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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400호 시대를 맞으며
1982년 7월, 국내 최초의 조경 전문지 계간 『조경』이 창간됐습니다. 1985년 6월에는 『환경 그리고 조경』으로(통권 9호), 10호부터는 『환경 & 조경』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습니다. 1987년 1월에는 한 해에 네 번 나오는 계간지에서 두 달에 한 번 나오는 격월간으로 전환됐고(통권 15호), 월간지로 바뀐 1992년 1월호(통권 45호)부터 쓰기 시작한 제호 『환경과조경』이 지금껏 유지되고 있습니다.
2013년 10월, 박명권 발행인 체제로 옷을 갈아입은 『환경과조경』은 2014년 1월호(통권 309호)를 기점으로 laK 브랜드를 새로 내걸며 대대적인 리뉴얼을 했습니다. 개편 첫 호 에디토리얼의 몇 구절이 생각납니다. “『환경과조경』은 ‘조경 문화 발전소’를 꿈꾼다. ‘한국 조경의 문화적 성숙을 이끄는 공론장’, ‘조경 담론과 비평을 생산하고 나누는 사회적 소통장’, ‘동시대 세계 조경의 보편성과 지역성을 수용하고 발굴하는 전진기지’ 이 세 가지 비전을 지향한다.” 한 차례의 결호도 없이 간행되어온 『환경과조경』은 한국 현대 조경의 살아있는 아카이브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조경의 성장사를 기록하고 저장해왔으며 동시대 조경의 담론과 쟁점을 발굴하고 그 경계를 확장해왔습니다.
통권 400호가 더 중요한가, 창간 40주년이 더 의미 있는가. 2021년 8월호는 400호, 2022년 7월호는 40주년 기념호입니다. 작년 늦가을 어느 오후의 편집회의, 다음 해 지면의 큰 흐름과 줄기를 구상하다가 예정에 없던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일이 커지고 말았습니다. 느슨하게 시작된 편집 구상이었는데, 400호 기념 일회성 콘텐츠를 기획하는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2021년에는 『환경과조경』의 발자취를 다각도로 되돌아보며 한국 조경의 현대사를 촘촘히 되짚는 지면을 ‘매달’ 배치한다는 대형 기획으로 확장됐습니다.
연중 기획의 하나로 이번 호부터 7월호(399호)까지 ‘『환경과조경』 400호 돌아보기’가 시작됩니다. 여덟 명의 필자가 매달 50권씩 과월호를 리뷰하는 기획입니다. 창간호부터 통권 50호까지 시간 여행을 떠나는 첫 주자는 무려 20세기부터(1999년 1월호부터) 『환경과조경』을 만들어온 남기준 편집장입니다. 다음 달에는 최장수(2014년 1월호~현재) 편집위원인 박승진 소장(디자인 스튜디오 로사이)이 51호부터 100호까지 이어 읽기를 맡습니다. 여러 편집위원과 편집자가 매달 50권씩 릴레이 리뷰를 이어갈 것입니다.
4월호에 다룰 편집 디자인 변천사는 독자 여러분의 아련한 추억을 소환하게 될 것입니다. 5월호에는 전직 편집자들이 참여합니다. 우리 기억 속에 희미하게 묻힌 특집 기사와 작품을 그들의 기억을 통해 다시 길어 올리는 지면을 꾸립니다. 7월호에는 『환경과조경』의 옛 얼굴, 399장의 표지와 재회하는 기획을 마련합니다. 잡지 한 권으로 40년 가까운 긴 시간을 가로지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가장 궁금한 건 통권 400호인 8월호의 내용과 형식이겠죠? 독자 여러분의 테이블에 잡지가 놓이기 전까지는 일급 비밀이랍니다.
독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방안도 다듬고 있습니다. ‘다시 읽고 싶은 연재 원고는?’이라는 설문에 곧 독자 여러분을 초대할 계획입니다. 독자들이 뽑은 10대 연재물의 옛 필자를 초청하는 지면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편집부와 편집위원회는 조경설계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국 현대 조경 대표작’을 묻는 설문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이 기획은 2022년 세계조경가협회IFLA 학술대회 광주 개최 및 한국 조경 50주년을 맞아 출간될 『한국 조경 50+50』(가제)과도 연계됩니다. 400호 시대를 맞이하는 2021년, 『환경과조경』은 한국 조경의 지난 50년을 기록하고 다음 50년을 설계하는 최전선에 서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를 기다립니다.
2021년의 문을 여는 이번 호는 ‘제3회 젊은 조경가’ 수상자인 최영준 특집입니다. 중국과 미국, 한국을 넘나들며 다국적 조경설계사무소 랩디에이치(Lab D+H)를 이끌고 있는 최영준, 그의조경관을 요약하는 가장 중요한 어휘는 오피스 이름의 H, 곧 희망(hope)입니다. 특집 지면에 담은 그의 에세이, 열두 가지 설계 키워드, 인터뷰에서 우리는 “디자인을 통해 희망과 사회적 책무를 구현”하기 위해 “이웃을 향한, 이웃을 위한 조경”을 실천해온 그의 젊은 조경 정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와 협업해온 건축가 이치훈(SoA)이 말하듯(본문 63쪽), “최영준의 젊음은 조경…이 처한 사회적 조건의 불합리함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정확하게 대응”합니다. “불합리함에 불평하기는커녕 조경가가 다루어야 하는 공간의 구조에 관한 다채로운 제안으로 대응”합니다. “변죽을 울리는 일 없이 늘 핵심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런 태도를 기반으로 한 그의 “지속적 작업은 한국 사회에서 조경가의 유의미한 역할 모델을 만들어가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번 호 지면뿐 아니라 그의 3년 전 연재 원고 “그들이 설계하는 법”(2018년 1월호~3월호)도 함께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새 꼭지 ‘나의 미개봉작 상영기’를 엽니다. 3개월씩 이어갈 꼭지의 첫 필자는 이남진(바이런소장)입니다. 윤정훈 기자의 지면은 ‘편집자의 서재’에서 ‘기웃거리는 편집자’로, 본문 마지막 쪽 김모아 기자의 지면은 ‘CODA’에서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로 새 제목을 답니다. 물론 이름만 바뀐 건 아니겠죠?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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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감각] 햇빛을 주워가도 될까요?
모교의 새 건물을 보고 떠오른 생각은 ‘햇빛 안 쓸 거면 나한테 주지’였다. 해가 들창을 하나도 내지 않고 벽돌로 외벽 전체를 마감했기 때문이다. 솔방울 날개처럼 어슷하게 배치된 벽돌 한 장 한 장에 떨어지는 작은 그림자들이 아름다웠지만, 내 방 창으로 드는 조각 빛을 조금이라도 더 쬐여주려 아침저녁으로 화분을 옮길 때마다 할 수만 있다면 건물에 닿는 햇빛을 주워 오고 싶었다. … (중략)
*환경과조경393호(2021년 1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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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조경』 400호 돌아보기] 4.12m 이어달리기
올해 8월, 통권 400호가 출간된다. 책상 바로 앞에 있는 창간호부터 2020년 12월호까지 총 392권의 잡지를 줄자로 재보았다. 4.12m였다. 페이지로는 7만 장이 훌쩍 넘을 것이다. 무게도 재볼까 싶었지만, 김모아 기자가 그러다가 한 권씩 밖에 없는 보관본이 상하기라도 하면 어떡할 거냐며 고개를 저었다. 김기자가 퇴근한 후 재볼까, 아주 잠깐 고민했다. 다행히 사무실에 줄자는 있는데 저울은 없었다(나보다 많이 무겁겠지 따위의 싱거운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400호 돌아보기’란 숙제를 끌어안고 시작된 고민은 쉽게 해결되었다. 일단 나눴다. 그래서 8과 50이란 숫자를 얻었고, 나누기를 먼저 주장한 탓에 첫 스타트를 끊게 되었다. 1호부터 50호까지가 내 몫이다. 1998년에 입사한 탓도 있다. 잡지사에 제일 오래 다녔으니, 가장 오래된 파트를 맡아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있었다. 나는 역으로 편집부 막내인 윤정훈 기자를 적극 추천했지만, 편집주간이 나를 지목하자 윤기자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던 것 같다(뭐, 기분 탓이었겠지만 말이다).
1990년대나 2000년대였다면 400호에 대한 감흥이 조금은 달랐을 것이다. 영화 잡지만 해도 『씨네21』, 『키노』, 『스크린』, 『프리미어』, 『필름2.0』, 『무비위크』 등등 다종했고, 『씨네21』은 한 때 주간 판매 부수 7만부를 기록했다. 한 달이면 20만부를 훌쩍 넘는 부수다. 문학 잡지나 패션 잡지는 일일이 꼽을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은 독립 잡지들이 속속 생겨나서 잡지 생태계의 다양성은 커졌지만, 휴간과 폐간의 고비를 넘기며 장수하는 종이 잡지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여기까지 쓰고 나니,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에 살짝 힘이 들어간다).
1998년 12월에 입사해 1999년 1월호인 129호부터 마감에 참여했고, 중간에 3년 동안 나무도시 출판사를 운영한 기간을 빼면 19년 동안 잡지사에서 일했다. 대략 230여 권의 잡지 제작에 직간접으로 손을 보탰다. 내 몫이 된 통권 1호부터 50호까지와는 무관하지만, 400호와 관련된 일련의 기획을 준비하며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201호에 실었던 ‘열 개의 공간, 다섯 가지 시선’이란 특집이다. 조경설계 전문가 200인을 대상으로 ‘한국 조경 대표작’ 설문조사를 진행한 후 그 결과를 토대로 다섯 편의 리뷰 원고를 꾸렸다. 어떤 일은, 어떤 시기에만 할 수 있거나 어떤 시기이니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4월에서 5월로 넘어가는 순간과 12월에서 1월로 넘어가는 시기는, 아무래도 다르다. 정리하고 돌이켜보고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는 1월이 제격이다. 129호나 400호나 그저 잡지 한 권일 뿐이지만 400호니까 ‘할 수 있는’ 기획이 있다(‘할 수 있는’ 기획을 꼭 해야 하는 건 아닌데, ‘할 수 있는’을 ‘해야만 하는’으로 느끼는 건 역시 기분 탓일 게다).
월간지라면 통권 50호까지 펴내는데 만 4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환경과조경』통권 1호부터 50호까지는 10년이 걸렸다. 창간호는 1982년 7월, 50호는 1992년 6월에 발행되었으니 정확하게 만 10년이다. 계간지로 시작해 격월간(통권 15호)을 거쳐 월간지(통권 45호)로 자리 잡아서다. 제호도 『조경』에서 『환경 그리고 조경』(통권 9호), 『환경 & 조경』(통권 10호)을 거쳐 지금의 『환경과조경』(통권 45호)으로 바뀌어 왔다. 종로의 공평동 한미빌딩에서 시작해 뚝섬 시대를 지나, 내가 입사했던 역삼동 사무실에서 분당의 오피스텔로, 첫 사옥이었던 파주출판단지에서 지금의 방배동 사무실까지, 편집부의 책상도 일정 시기마다 옮겨 다녔다. 2007년도에 『조경세계』가 창간될 때까지만 해도 국내 유일의 조경 잡지였지만, 지금은 정원 잡지도 많이 생겼고 라펜트, 한국조경신문 등 조경 매체 상황도 꽤 달라졌다. 통권 306호인 2013년 10월호부터는 박명권 발행인 체제로 바뀌어 영문 제호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변화가 시도되었다. 그럼에도 1호부터 392호까지 펴낸 38년 동안 바뀌지 않은 점이 있다면, 직사각형 국배판을 유지한 판형과 제호에서 한 번도 빠지지 않은 ‘조경’이란 두 글자다(TF팀을 구성하여, ‘조경’이란 두 글자를 빼고 제호를 ‘스케이프’, ‘랜드스케이프 플러스’, ‘Landscape KOREA’, ‘L and Scape’ 등으로 바꿔보려는 시도를 100일 넘게 추진한 적은 있었지만 말이다). … (중략)
*환경과조경393호(2021년 1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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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개봉작 상영기] 경의선숲길 감독판
설계안이 실제 작품이 되기까지, 19.3%
설계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 설계안이 그대로 시공되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을 꿈꾸며 하루하루 영혼을 끌어 담아 작업 중일 것이다. 나는 2007년부터 조경 설계에 발을 담그고 일을 시작했다.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설계를 배우며 연구실에서 설계사무소와 협업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2009년 동심원조경에 입사해 조경 설계업의 최전선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4년간 총 124건의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그중 실시설계를 거쳐 실제 완공된 현장은 24건으로 약 19.3%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80%를 상회하는 100건의 프로젝트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미개봉작’이 됐다. 대형설계공모의 수상작 정도가 아니라면 『환경과조경』을 비롯해 세상에 공개하지 못한, 회사 서버에 고이 모셔둔 수집품인 것이다.
왜 수많은 프로젝트가 실현되지 못하는 것일까? 우선 각종 공모전 및 제안 입찰에서 고배를 마신 낙선작이 있겠다. 전체 미개봉작 중 약 25%다. 다음은 공모전, 입찰 당선, 발주처의 지명 등을 통해 설계를 진행했으나 실시설계까지 완성하지 못하고 기본계획이나 기본설계에서 중단된 42.7%의 경우다. 실시설계까지 했지만 공사를 하지 못한 경우도 12.9%로 상당하다. 사유는 다양하다. 발주처의 도산, 대상지 변경, 의사 결정권자의 단순 변심, 발주처의 인사 개편, 공사비 부족에 따른 조경 공사 최소화 등. 착공하더라도 온전히 완성되기까지 수많은 난관을 거치는데, ‘개봉작’ 중에서도 설계안이 그대로 완성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시공 과정에서 다양한 검열을 통해 상당한 편집이 가해진다. 그래서 천신만고 끝에 알을 깨고 나와 세상의 빛을 보는 19.3%의 프로젝트들은 더없이 소중하다. 작품성을 인정받아 잡지에 소개되는 프로젝트는 마치 훈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한편 아픈 손가락이 돼버린 미개봉작들은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라고 위로하기엔 너무 아깝다. … (중략)
*환경과조경393호(2021년 1월호)수록본 일부
이남진은 서울대학교 산림자원학과와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심원조경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다. 현재 조경기술사사무소 바이런(VIRON)을 이끌고 있으며, 좋은 설계는 좋은 회사에서 나온다는 생각으로 설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함께 성장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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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스케이프] 치유와 성장의 공간, 비밀의 정원
작년에는 극장에 한 번도 못 갔다. 이제 영화관은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는 마법의 공간이 아니라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방문을 삼가야 하는 고위험 시설이 되어버렸다. 영화 ‘시크릿 가든The Secret Garden’(2020)도 하는 수 없이 인터넷 스트리밍으로 보았다. 아끼는 소설이 원작이고 주제도 ‘덕업일치’하며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하기에 오랫동안 기대했건만, 놀라울 정도로 재미가 없었다. 내셔널 트러스트가 관리하는 영국 최고의 정원들을 배경으로 하여 ‘해리포터’ 미술팀이 촬영했으니 눈요깃거리도 화려한데 말이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영화 ‘시크릿 가든’의 아이들은 정원을 가꾸지 않는다.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Frances Hodgson Burnett)의 『비밀의 화원』(1909)은 원예 치료(therapeutic gardening)라는 용어가 보편화되기 전 이미 정원 가꾸기가 지닌 치유와 공감의 힘을 우리에게 알려준 소설이다.1 그런데 『비밀의 화원』에 담긴 ‘과정으로서의 정원’의 의미를 축소하고 막연히 정원은 모든 것을 치유하는 마법의 공간이라고 하니 영화의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영화 속 아이들은 정원(이라기엔 너무 넓고 다채로우며 버려졌다기엔 지나치게 잘 가꾸어진 곳)을 가꾸기는커녕 흙 한 번 파보는 일 없는 방문자다.
원작 소설과 이전에 제작된 동명의 영화가 모두 성공한 작품을 리메이크하는 일에는 상당한 부담이 따른다. 잘해봤자 본전치기인 상황에서 전작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시크릿 가든’과 달리 소설 『비밀의 화원』 속 메리는 미슬스웨이트 저택의 숨겨진 정원을 리메이크하는 데 성공한다. 지난 10년 동안 방치된 정원이기도 했고 그녀의 본능적인 가드닝이 자신을 넘어 콜린, 그리고 콜린의 아버지로 확장되었기에 가능했다.
소년소녀세계명작 시리즈를 탐독하던 시절, 『비밀의 화원』의 메리에게 늘 마음이 쓰였다. 버넷의 다른 작품인 『소공자』(1886)의 세드릭이나 『소공녀』(1905)의 사라는 너무나 모범적이고 긍정과 인내의 미덕을 체현하는 인물이라 위인전의 위인들만큼이나 멀게 느껴졌다. 그에 비해 메리는 예의상의 배려도 찾아볼 수 없는 이기적이고 심술궂은 응석받이가 아닌가. 외모마저도 허영심 많은 어머니가 외면할 정도로 볼품없어 세상에서 제일 정 안 가는 아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런 무관심한 부모마저 전염병으로 갑작스럽게 잃고, 나고 자란 인도를 떠나 일면식도 없는 영국의 친척 집에 맡겨졌다. 심리 치료가 필요해 보이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몸과 마음이 모두 메말랐던 메리가 정말로 회생시키려 한 것은 정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 (중략)
*환경과조경393호(2021년 1월호)수록본 일부
황주영은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19세기 후반 도시 공원의 모더니티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파리 라빌레트 국립건축학교에서 박사후 연수를 마쳤다.미술과 조경의 경계를 넘나들며 문화사적 관점에서정원과 공원, 도시를 보는 일에 관심이 많으며,이와 관련된 강의와 집필, 번역을 한다. 그러는 동안수많은 책을 사거나 빌렸고, 그중 아주 일부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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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코로나 시대의 『환경과조경』
그저 막막하고 답답하기만 했던 2020년이 저물고 있다. 코로나, 감염, 마스크, 사회적 거리두기, 비대면 수업, 재택근무 정도의 대여섯 단어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옆 방 동료와도 화상으로 회의를 하고, 테이블에 투명 칸막이를 세운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마스크로 얼굴을 덮은 채 공원을 산책하는 역설. 초현실적인 시절을 현실적으로 살아내야 하는 감염 도시의 역설적 풍경이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김모아 기자가 10월호 코다(CODA)꼭지에 말한 것처럼, 커뮤니케이션, 편집, 디자인, 교정, 마케팅이 긴박한 호흡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월간지 작업은 불안과 긴장이 감도는 팬데믹 상황과 공존하기 쉽지 않았다. 1월호 첫 쪽에 호기롭게 외친 “한국 조경의 다음 50년을 설계한다”는 편집 좌표를 찾아나가기 쉽지 않았던 2020년을 보내며 과월호 열한 권을 다시 꺼낸다.
독자의 반응은 편집자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가장 많은 피드백이 도착한 기획물은 10월호 특집 ‘포스트 코로나, 도시의 안녕을 묻다’였다『환경과조경』은 팬데믹과 함께 벌어지고 있는 일상생활, 작업 환경, 공원, 도시의 변화를 짚어보고 다가올 미래의 양상을 조심스럽게 전망해보고자 했다. 조경가, 조경학자, 도시설계가, 도시기획자, 도시학자, 부동산학자, 교통학자, 경영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필자 열아홉 명을 초대한 이 특집을 석 달 넘게 기획한 김모아 기자와 윤정훈 기자는, 지면에 담은 이야기가 혼란스러운 상황을 조금 더 담담히 바라보게 하고 소란 가운데 놓친 중요한 지점들을 알게 해주길 바랐다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10월호는 팬데믹 한가운데 서 있는 독자들에게 『환경과조경』이 전하는 안부이기도 했다.
3월호 특집 지면 ‘공원 아카이브, 기억과 기록 사이’에는 도시경관연구회 보라BoLA를 플랫폼 삼아 활동하고 있는 연구자 일곱 명을 초대해 도시와 공원을 기억하는 방식, 그 기록을 수집하고 보관하여 공유하는 방법을 탐색해보았다. 보라가 진행한 서울의 공원 아카이브 구축 프로젝트는 지난 10월과 11월에 온·오프라인 전시 ‘우리의 공원’(www.ourpark.kr)으로 이어지면서 조경 아카이브의 지평을 개척했다.
밀레니얼 세대가 도시를 사용하는 방식, 도시를 경험하는 기준, 도시를 제작하는 풍경을 두루진단한 4월호 특집 ‘밀레니얼이 만드는 도시’에도 적지 않은 피드백이 있었다. 도시와 밀레니얼의 함수 관계를 짚어보는 것에 더해, 이 지면은 도시의 기획과 운영, 제작과 재생을 횡단하며 도시 비즈니스의 새 영토를 꿈꾸고 있는 밀레니얼 그룹들을 소개했다. 어반플레이를 비롯한 여러 실천 그룹이 전한 생생한 이야기에서 밀레니얼이 바꿔나가고 있는 도시의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국내 조경가의 최근 작업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동시대 한국 조경의 성과를 공론장에 올리고자 한 특집을 세 차례나 마련한 것도 예년과 다른 기획이었다고 자평한다. 1월호에는 ‘제2회 젊은 조경가’ 수상자인 박경탁(동심원조경)의 작업 철학과 경관 제작 방식을 다양한 형식의 지면으로 꾸렸다. 5월호에는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운 경관의 형태’를 실험하며 글로벌 조경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박윤진과 김정윤(오피스박김)의 근작을 모았다.
8월호 지면은 “살아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는 조경론을 과장과 과잉 없이 구현해온 박승진(디자인 스튜디오 로사이)의 근작으로 풍성했다. 표지에 실은 통의동 골목의 공공 정원 ‘브릭웰’은 조경계 내부에서뿐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널리 주목받은 화제작이었다.
이번 12월호에는 매년 본지가 주최하는 ‘올해의 조경인’과 ‘젊은 조경가’ 선정 결과를 싣는다. 제23회 올해의 조경인으로는 한국조경협회장을 맡아 분야 발전을 위해 노력해온 노환기(비욘드), 제3회 젊은 조경가로는 한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을 발표하고 있는 최영준(랩디에이치)이 선정됐다. 최영준의 랩디에이치(Lab D+H)는, 광저우 용칭 지구(Yongqing Fang)도시재생 프로젝트로 올해 미국조경가협회상(2020 ASLA Award)도시설계 부문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비트로 상상하기, 픽셀로 그리기’의 나성진, ‘공간잇기’의 서준원, ‘북 스케이프’의 황주영, ‘풍경 감각’의 조현진, 연재 필자들의 노고에 마음속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나성진과 서준원의 연재는 이번 호로 막을 내린다. 이렇게 코로나 시대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며 2020년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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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코로나 블루, 그린 블루!
나의 코로나 블루는 새해를 맞이해 기대를 가득 안고 떠난 이스라엘 성지 순례에서 시작됐다. 동네 성당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행사였고 나 또한 설레는 마음으로 참가했다. 그런데 7박 9일 여행의 둘째 날, 서울발 뉴스가 전해준 성지 순례단의 코로나 감염 소식으로 갑작스럽게 모든 한국인이 이스라엘 당국의 입국 금지 조치를 당했다. 텔아비브 공항에 도착한 비행기는 승객을 내리지도 못한 채 다시 한국으로 떠났고, 현지의 많은 한국 순례자들은 여행 및 이동 금지와 격리 조치 예정이라는 급보를 받았다. 당장 숙소를 떠나 달라는 요청이 왔고, 성지는 한국인의 관광을 금지했다. 가장 두려움에 떨게 만든 건 어쩌면 우리가 이스라엘 군부대에 무기한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입소문이었다. 당황한 일행은 즉시 순례를 멈추고 긴급 회의를 통해 격리 조치가 이루어지기 전, 아직 입국이 허가된 터키로 탈출하기로 하고 인원을 나누어 간신히 항공권을 예약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에 도착한 뒤엔 2주간 자가격리를 해야 했고, 평생 1주일 이상 쉬어본 적이 없던 나는 집에 갇혀 지내는 내내 답답함과 무기력함 속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아마 코로나 블루였던 것 같다.
코로나 블루는 코로나19와 우울감을 의미하는 블루blue를 결합한 신조어로,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일상에 큰 변화가 닥치며 생긴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을 뜻한다. 며칠 지나지 않아 갑자기 신열이 오르고 오한이 들기도 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드라이브스루 코로나 검사를 받았는데, 음성 진단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는지 그제야 열이 내렸다. 늘 바깥에서 바쁘게 지내던 내가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요즘 대세인 트로트 열풍에 채널만 돌리면 나오는 송가인의 노래를 듣거나 소위 간 큰 남자들이 한다는 ‘삼식이’ 되기가 고작이었다. 참다못해 마스크를 쓰고 동네 뒷산을 오르내렸다. 하루하루 짙어지는 올리브그린 색의 새싹들과 점점 부푸는 꽃망울들의 뭉그적거리는 몸놀림, 코끝으로 전해오는 이름 모를 식물들의 짜르르한 풀 내음 같은 미시적인 현상을 체감하며 그동안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자연의 경이로움에 새삼 감탄했다. 들뜬 마음으로 숲의 초록과 향기에 몸을 맡기고 자연의 치유력을 믿으며 점차 몸과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불안한 상황은 직장으로 돌아온 뒤에 더욱 확장됐다. ‘자연과의 동거’가 사훈인 회사는 이제 신종 바이러스인 코로나와의 새로운 동거를 준비해야 했다.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직원들이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도록 하는 등 코로나 대응 지침을 만들어 시행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재택근무가 가능한지 점검하고 과밀한 지하철을 피해 출퇴근 시간을 유연하게 선택하게 했다. 단체 회식을 금지하고 점심시간에도 가급적 도시락을 싸 오도록 했다. 마스크를 구매해 직원들에게 배급하고 간헐적으로 면역력 향상을 위한 홍삼과 비타민을 지급했다. 대부분의 대면 행사가 취소되고 장기간 회식이 금지되자 직원들의 사기가 저하되었다. 분위기를 전환해보고자 옥상에서 함께 텃밭을 가꿔보자고 제안했다. 직원들과 상추, 오이 등 갖가지 엽채 모종을 심고 함께 자장면을 시켜먹으며 스프링 파밍 데이(spring farming day)를 즐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채소가 자랐을 땐 함께 수확의 기쁨을 나누며 루프 가든 파티를 열었다.
가을이 시작되고 공기가 서늘해져도 팬데믹이 지속되자 사회 곳곳에서 코로나 블루가 점점 짙어졌다. 노심초사하는 마음에 조금이나마 직원들의 마음 치유에 도움이 될까 싶어 가평 깊은 산자락에 위치한 회사 연수원을 무료로 개방해 가족들과 특별 휴가를 다녀오도록 했다. 국내외 여행이 어려운 시기, 단풍이 짙은 계곡 사이 한적한 숲 속의 연수원은 코로나 시대의 여행지로 제격이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정착되고 모든 단체와 모임이 비대면 방식으로 바뀌었다. 조경 분야도 예외일 수 없었다.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의 심사와 시상식 역시 온라인으로 진행되었고, 서울정원박람회, 대한민국조경박람회, LH가든쇼, 경기정원문화박람회도 오프라인 행사를 취소하거나 연기하고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제한된 인원만 참석하는 방식으로 개최됐다. 주목할 만한 점은 정원 조성과 전시 같은 필드 행사는 취소되지 않았고, 한국조경협회의 ‘학교 치유정원 조성사업’과 같이 녹지를 통한 힐링 프로젝트의 수요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코로나 블루의 처방책으로 백신의 신속한 개발과 함께 조경가들이 만드는 공원과 숲길, 정원 같은 그린 인프라 사업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 사태가 한 해 가까이 지속되며 일상의 변화가 우리 사회 모든 영역에서 빠르게 일어났다. 자주 다니던 동네 마트, 음식점, 영화관, 학원에 가는 것을 꺼리게 되고, 소비와 관련된 물리적 공간이 온라인 플랫폼 기반의 다양한 서비스로 대체되면서 이른바 언택트 소비가 일상화됐다. 학교는 수업을 디지털 원격 학습 방식으로 대체했고, 등교하지 않는 학생들의 일과는 저소득층 가정과 맞벌이 부부에게 또 다른 걱정거리가 됐다. 재택근무가 급증하면서 전통적인 근태 중심 관리 방식이나 워크숍, 단체 회식에 기반을 둔 직장 문화도 크게 바뀌고 있다. 산업 현장에 디지털 워크플레이스(digital workplace)개념이 도입되며 일자리가 더욱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부정적인 전망도 보인다. 전반적으로 4차 산업혁명이 가속화되고 인공 지능, 챗봇, 빅데이터, 태그 정보, 5G, 가상 및 증강 현실 기술의 발전으로 스마트화가 급속하게 진전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변화의 갈림길에서 여전히 꽃과 나무 같은 아날로그적 감성을 무기로 삼고 있는 조경 분야는 과연 위기를 맞이한 것인가, 또 다른 기회를 마주한 것인가. 건강과 위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밀폐된 실내 공간을 피해 사람들은 산책과 등산을 즐기려 가까운 공원과 산으로 몰려간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가능한 외부 공간의 필요성이 한층 높아지는 상황은 곧 오픈스페이스 소비의 확산을 의미한다. 코로나 블루를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이 공원과 정원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소비재로서의 공원과 자연의 수요가 폭증하고 있는 현상은 조경 분야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코로나 사태가 끝나면 사회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전문가들은 예상되는 거대한 변화를 기점으로 BC(Before Corona)와 AC(After Corona)로 시대를 구분 지을 정도다. 숲(green)과 물(blue)을 다스리고 오염된 도시에 건강한 자연을 심는 조경가야말로 이 시대의 코로나 블루를 치유하는 진정한 그린-블루 히어로가 아닐까?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사회 전반적으로 지식 체계를 비롯한 과거 모든 질서를 새롭게 구축해야 하는 시기에 살고 있다. 작은 바이러스에서부터 동물과 식물을 아우르는 위대한 자연, 그리고 겸손한 자세로 자연을 경외하는 인간의 공생 인식이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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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감각] 아무도 감각하지 않는 풍경
설계 회사에 몸담고 있을 때 처음으로 완공된 정원을 기억한다. 큰 역할을 한 건 아니지만 과정 전반을 담당한 첫 프로젝트였고, 완성된 첫 공간에서 일에 대한 보람을 느꼈다던 선배들이 생각나 빨리 실물을 확인하고 싶었다.
오월의 봄바람과 햇빛을 받아 빛나는 정원은 정말 아름다웠다. 확인 차 가져간 도면 뭉치가 초라해 보일 정도로. 그런데 조용한 실망감이 찾아왔다. 정원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 때문이었다. 그들은 설계가가 의도한 대로 벤치에 앉아 쉬고 허브의 향기를 맡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공간을 감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중략)
*환경과조경392호(2020년 12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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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로 상상하기, 픽셀로 그리기] 파라메트릭 플랜팅 Ⅲ
현실
계절이 변했다. 사실 많은 것이 변했지. 마스크부터 기후 변화까지. 낯선 풍경과 새로운 용어들. 그림책에 그려질 법한 비현실이 현실이 되고. 인스타에 쌓여가는 사진들. 시간이 지나며 바뀌고 색이 바래는 관계들. 현실은 새로운 현실로 변해간다.
내 오늘의 소모가 부정적인 내일로 소멸될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제이슨 므라즈가 평화를 말했던가. 피델 카스트로가 평등을 말했나. 무대 위의 정의는 소란이 끝나면 기억 속으로 부패한다. 썩어 문드러지지. 다른 건 없다. 필요에 따라 유행이 모습을 달리할 뿐, 트렌드가 뭐람. 그래서 혁명의 깃발을 들고 벌판을 질주하면 역사의 주역이 될 수 있나? 괜한 칼로리만 소모할 뿐이다. 목이 말라 물을 찾고 지하수 고갈을 조금이라도 촉진시키겠지. 재미다. 그저 재미라고. 재미가 아니라도 재미라고 말해야 하는 게 사회의 룰이라고. 그렇게 매일 밤 재미를 더하고 인생의 별을 따서 술잔에 기울이고 다음 날 적당히 얼버무리면 되는 거라고.
수련은 끝났다. 의미의 유통기한이 다했지. 아이스라테니 진정한 식재 설계니 다 합의된 관계 안에서만 유의미할 뿐이고, 그냥 서로의 피드에 적당히 좋아요만 눌러주면 되겠지. 현대 사회에서 새로움을 얘기하고 진정함을 말하고 옳고 그름을 말하는 건 바보다. 그냥 재미있다고 말하라고. 대충 재미있다고 얘기하는 게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매너라고. 재미있는 파라메트릭 플랜팅 연재는 오늘 끝난다. 우리에게 실낙원이 있을까? 진정한 재미를 보여 줄 수 없는 게 유감이다.
습작
지난 습작들을 이어서 소개한다. 우리는 수련이라는 명목하에 서로 연극을 했고, 자연스레 불완전한 그림들이 작업대에 쌓였다. 먼지가 덮여 인생의 구석에 내몰리기 전에, 채도가 바래 온전한 의미마저 상실되기 전에 우울한 작업의 기록을 남긴다. 기록은 진정한 파라메트릭 식재 설계의 테스트베드 1장과, 실제 대상지에 적용한 디자인 예시 1장의 조합으로 다섯 개의 습작을 병렬로 배치했다. 설계 이전에 테스트베드를 만드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포레스트 팩을 사용한 뒤 왠지 흰 가운을 걸친 연구원이 된 듯한 느낌에 콘셉트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 정원 설계 프로세스에 대한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파라메트릭 키드의 관점에서 보면 지난 정원 설계의 과정은 상당히 직관적이고 우연적이다. 작가들은 개인의 취향이 투영된 독자적 스타일을 정립하고, 프로세스를 통해 설계를 발전시키기보다 클라이언트와의 취향 매칭을 하는 느낌이었다. 따라서 우선 정원 설계의 팔레트들을 스타일에 따라 테스트베드로 아카이빙해 명료한 디자인 베이스를 만들고, 대상지의 맥락과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최적의 테스트베드 옵션을 도출한 뒤, 대상지에 적용한 시뮬레이션을 비교해 상호 만족하는 최종 설계안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럴듯한가? 아니, 재미있는 망상일 뿐이다. 수련생이란 늘 부족한 현실감에 어설픈 환각을 즐기기 마련이다.
테스트베드 1장. 프렌치.유러피안 스타일
그림 1은 테스트베드 1장으로 프렌치-유러피안 스타일의 팔레트다. 이상한 이름인 줄 알지만 어쩔 수 없다. 대림 아크로ACRO 갤러리 모델 하우스에 적용했던 패턴인데, 전체 콘셉트가 화려한 유럽의 느낌에 모던한 라이프 스타일을 더하는 방향이어서 숨겨왔던 화려함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다. 일단 모든 걸 수국에 맡겼다. 정말이지 수국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강렬한 블루 계열보단 화이트와 핑크 계열이 더 이국적이라고 생각했고, 그중에도 화이트를 메인으로 할 때 유러피안 감각과 모던한 느낌을 연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이트 60퍼센트에 핑크 40퍼센트 정도로 메인 수종을 구성하고, 보라색에게 카운터 역할을 맡긴 뒤 짙은 녹색으로 배경 볼륨을 채웠다. 수련생에게도 나름의 직감이란 게 있는 법이다. 이후 스타일에 대한 의사 결정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배열은 수국의 독자적인 볼륨을 살리면서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기 위해 덴스(dense)알고리즘을 사용했다. 비정형 배치에 클러스터와 스캐터가 자연스럽게 혼합되는 패턴이며, 70퍼센트 정도의 밀도로 영역을 채우는 비교적 여유로운 배치다. 교목은 수국의 하이라이트를 빼앗지 않기 위해 배제했고 대신 소관목을 추가해 불규칙한 리듬을 더했다. 마지막으로 조형 화분과 체스 모형을 더해 그림 2와 같이 유러피안 스타일로 대상지에 발전시켰다. ...(중략)
*환경과조경392호(2020년 12월호)수록본 일부
나성진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GSD에서 조경을 전공했다.한국의 디자인 엘,뉴욕의 발모리 어소시에이츠(Balmori Associates)와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CFO)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고, West 8의 로테르담과 서울 지사를 오가며 용산공원 기본설계를 수행했다.한국,미국,유럽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귀국 후 파트너들과 함께 얼라이브어스(ALIVEUS)라는 대안적 그룹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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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잇기] 이야기경관, 그 새로운 시작
나를 담은, 나를 닮은 장소
“내 추억도 서울의 역사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새로웠어요.” ‘2019 스토리스케이프(Storyscape)’1 연구 전시를 본 박준서 어린이가 방명록에 남긴 소감이다. 도시의 주인공인 평범한 개인들의 사라져가는 일상 속 공간에 대한 기억을 가치 있는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 연구자의 의도를 어린이의 눈높이로 파악했다는 점이 반가운 순간이었다.
연구 전시의 주제는 어렵지 않게 이야기경관으로 정할 수 있었지만, 연구 성과를 전시 공간에 풀어내는 일은 매우 낯설었다. 이야기경관 개념을 처음 선보이는 매개체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전시를 기획했다. 심층 인터뷰와 현장 답사를 통해 연구자의 가족 구성원들이 경험한 도시 생활사(11월호 참조) 연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가족들이 경험한 130년의 다양한 서울 동네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이를 시간과 공간으로 분류하고 도시사적 연구를 기반으로 이야기의 지층을 탐구하는 과정은 색다르고 신나는 경험이었다.
이야기경관은 이야기(story)와 경관(landscape)의 합성어로, ‘이야기가 있는 경관’이라는 의미로 고안한 용어다.2 도시 및 경관 연구의 바탕 위에 사회과학적 생활사 연구를 접목하는 시도는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공간잇기가 추구하는 연구의 지향점은 도시민의 일상 속 삶의 이야기를 통해 도시 경관 연구의 깊이 있는 확장을 모색하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시대적, 사회적 배경 속에서 어떠한 유기적 관계를 맺고 도시가 어떤 변화를 거듭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고, 이야기경관이라는 새로운 명제를 제시함으로써 도시 지층 탐색의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
평소에 궁금했지만 너무 일상적이고 평범해서 묻거나 함께 가보지 않았던 가족들의 애착 장소를 구술 기록하고, 이야기에 나타나는 장소적,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 각 시대의 사회, 경제, 정치적 사료를 조사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광범위한 작업이었다. 가족들과 나는 같은 시기 같은 공간에 대한 추억을 공유하고 있어 연구자로서 관찰과 참여를 동시에 해야 했고, 그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연구의 모든 과정을 연구 전시의 콘텐츠로 활용하기 위해 구술사 기록 형식을 취했고, 녹음, 영상, 녹취록 작성, 가계도를 활용한 관계도와 옛집 도면 그리기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낡은 앨범 속의 옛 사진들이 큰 역할을 했다.
평범한 역사
“제 이야기는 연구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요. 그저 평범하게 살았거든요.” 인터뷰이를 섭외할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소시민의 일상과 공간을 연구하는 내게는 그 평범한 일상 이야기가 소중한 자원이다. 한 명 한 명을 섭외할 때마다 그들의 일상과 삶을 담는 그릇인 마을이 얼마나 가치 있는 연구 대상인지 설명하는 데 늘 심혈을 기울였다. 서울의 도시 공간을 연구하기 위해 친외가 가족들의 생활사 인터뷰를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연구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개인의 평범한 일상에 대한 생활사 연구는 사회과학, 특히 인류학 분야에서 자주 쓰인다. 알프 뤼트케는 생활사 연구를 역사 속 대다수 이름 없는 사람들의 매일의 삶이 일궈낸 일상의 역사이자 “역사 속의 일상(historishe alltage)”이라고 정의했다.3 평범한 개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화두로 끄집어낼 기회를 확대해 준다는 그의 말은, 재개발과 재건축으로 사라져가는 도시 공간에서 개개인의 삶의 흔적을 발굴하고, 도시를 통해 연결된 그들의 장소를 공간 속 시간의 켜로 연결하고자 하는 연구자의 목적과 맞닿아 있다. 장소는 개인들의 정감 어린 기록 저장고이며 현재에 영감을 주는 찬란한 유산이라고 한 이-푸 투안의 주장도 맥락을 같이 한다.4 ...(중략)
*환경과조경392호(2020년 12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2019년 12월 5일부터 2020년 1월 11일까지 성수동 우란문화재단에서 ‘2019 스토리스케이프’ 연구 전시를 진행했다.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문화예술 인력을 육성하기 위한 ‘우란이상’ 프로그램의 후원 작가로 선정되어 우란문화재단의 소장품을 매개로 연구 주제를 확장했다. 재단 소장품인 마이클 울프의 ‘인포멀 솔루션’에 담긴 도시 공간과 소시민의 일상이 있는 도시의 찰나성과 연속성에 주목했고, 도시 공간의 서사성과 소시민적 이야기에 기초한 도시 연구 방식을 섬세히 풀어냈다. 연구는 2019년 5월부터 같은 해 11월까지 진행됐으며, 연구자의 4대에 걸친 가족을 통해 바라본 130년 서울의 도시 생활사를 연구 전시로 발표했다.
2. 서준원, “역사와 이야기가 있는 서울, 내 고향”(미발표 연구 자료), 2017, pp.8~17.
3. 알프 뤼트케 외, 나종석 역, 『일상사란 무엇인가』, 청년사, 2002, pp.15, 65.
4. 이.푸 투안, 구동회·심승희 역, 『공간과 장소』, 대윤, 1995, p.249.
서준원은 열다섯 살부터 대학 졸업 후까지 뉴욕에서 약10년간 생활했다.파슨스 디자인 스쿨(Parsons School of Design)인테리어디자인학과에서 다양한 주거 공간에 대해 공부했고,한국인의 생활 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박사를 수료했다. SOM뉴욕 지사, HLW한국 지사, GS건설,한옥문화원,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등에서 약16년간 실내외 공간을 아우르는 디자이너이자 공간 연구자로 활동했다.한국인의 참다운 생활 환경을 위한 디자인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품고 다양성이 공존하는 도시 공간 연구를 위해 곳곳을 누비며‘공간 속 시간의 켜’를 발굴하는 작업을 긴 호흡으로 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