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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토리얼] 먼지 쌓인 앨범 속 빛바랜 공원 사진
    우연히 본 포스터 한 장에 마음이 흔들렸다. 모처럼 공모전에 나가보자. 떠들썩한 국제 설계공모가 아니라 사진을 찾아서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시민 공모전이다. 서울시 공원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하나로 열린 ‘장롱 사진첩 속 남산 찾기.’ 유년의 추억을 소환하는 일은 언제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창고처럼 쓰는 수납장을 뒤져 먼지 쌓인 어릴 적 앨범들을 꺼냈다. 남산 사진이 몇 장 있을 텐데, 남산에서 열린 사생 대회에서 지금은 서울시교육청 교육정보연구원으로 쓰이는 옛 어린이회관 건물을 그려 상 탄 기념으로 찍은 사진만큼은 분명히 있을 걸로 확신했는데 도통 찾을 수 없다. 대신 어린이대공원에서 찍은 빛바랜 사진 몇 장을 발견했다. ‘어린이는 내일의 주인공, 착하고 씩씩하며 슬기롭게 자라자’라는 대통령 친필이 새겨진 기념비 앞에서 찍은 사진, 정문 지나면 바로 나오는 분수대와 하얀 조각상들을 배경으로 한 사진, 국내 최초의 롤러코스터인 ‘청룡열차’에 열광하는 사진. 아마 1970년대에 유년기를 보낸 세대는 다 엇비슷한 사진들을 가지고 있을 거다. 반바지 밑에 하얀 타이츠 신고 재킷을 걸치는 게 당시 어린이들의 공원 나들이 패션이었다. 어린이대공원 자리는 마지막 황제 순종의 비 순명황후 민씨의 능 터였고, 1927년에는 서울컨트리구락부의 18홀 골프장이 들어섰다. 능동 골프장을 교외로 옮기고 어린이를 위한 대공원을조성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는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하는 속전속결 공사로 이어졌고, 1973년 어린이날, 광활한 녹색 초원과 놀이동산을 갖춘 어린이대공원이 문을 열었다. 당시 신문을 보면 개장일 오후 세 시에 입장객이 60만 명을 넘었고 정문 옆 미아보호소는 3백 명 넘는 아이들로 넘쳐났다. 분수대 앞의 내 사진에 새겨진 날짜도 같은 해 5월의 어느 일요일이다. 유난히 뜨거웠던 햇살과 발 디딜 틈 없는 인파에 잔뜩 겁을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서울시 기획관리관이었던 고 손정목 교수의 기록에 따르면, 제작 비용을 줄이느라 돌을 쓰지 않고 콘크리트 위에 석고를 바른 이 분수대와 조각상은 세종로 충무공 동상의 조각가 김세중의 작품이다. 1996년 서울을 처음 방문한 마이클 잭슨이 이 조악한 분수대에 반해 똑같은 작품을 자기 집 정원에 설치하려고 작가를 수소문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어린이대공원은 남산공원, 삼청공원, 사직공원 같은 산지형 자연공원이 공원의 전부였던 서울에 대형 도시공원의 시대를 열었다. 1976년의 기사를 보면 서울시민이 가장 많이 놀러 가는 곳 1위가 창경원(1년에 198만 명)이고 2위는 어린이대공원(117만 명)이었다. 어린이대공원은 동부 서울의 지도를 다시 그리게 했다. 서울시내 어느 곳에서도 한 번만 갈아타면 어린이대공원에 갈 수 있도록 시내버스 노선이 개편됐고, 대공원에 가는 버스 번호는 500번대로 통일됐다. 한적한 교외였던 능동, 중곡동, 뚝섬, 화양리 일대에 개발 열풍이 불었다. 공원이 도시의 구조를 바꾼 대표적인 사례다. 한 뭉치 사진을 보며 옛 기억의 파편들을 맞춰보다 마침내 신발 끈을 묶었다. 얼마만일까. 오랜만에 다시 찾은 어린이대공원은 흑백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풍경이다. 인근의 서울숲보다 훨씬 한산해 쓸쓸하기까지 한 풍경은 수십 년 세월 동안 고치고 덧댄 시설과 공간의 콜라주다. 여러 시간대가 탈색된 채 겹쳐져 있다. 거의 50년 전의 지형과 조각품들에 불과 3년 전에 만든 ‘맘껏놀이터(김’ 아연 설계)가 병치되어 있다. 1970년에 지은 골프장 클럽하우스(나상진 설계)는 철거 직전에 살아남아 시간의 흔적을 견뎌내며 ‘꿈마루’(조성룡과 최춘웅 설계)로 부활했다. 마이클 잭슨이 사랑한 분수대는 그 시절 그대로고, 1980년대를 연상시키는 퇴락한 놀이동산 한구석엔 1세대 청룡열차가 부식된 채 전시되어 있다. 후문을 빠져나오며 통일교 재단 리틀앤젤스회관을 마주하고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어린이대공원 근처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음을.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대공원 후문으로 몰려가 선화예고 여학생들을 훔쳐보다 공원 숲속으로 담 넘어 도망치던 한 무리의 십대가 그곳에 있었다. 공원 아카이브 프로젝트 ‘장롱 사진첩 속 남산 찾기’ 포스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번 달에는 설계공모에 대처하는 노하우를 모은 기획물 “공모의 한 수”를 특집으로 기획했다. 초대에 응한 열다섯 팀 조경가들에게 감사드린다. 유튜브로 심사 과정이 생중계됐던 ‘잠실한강공원 자연형 물놀이장 설계공모’의 수상작 지면에도 많은 관심 기울여주시길 기대한다.
  • [풍경 감각] 우듬지 산책
    “매일 지나는 길가 풍경이 항상 같을 리 없다.” 일과에서 산책을 빼놓지 않는 이의 SNS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무척 동감하지만, 미세하게 달라진 풍경을 읽어내기 어려운 날도 분명 있을것이다. 이런 날의 산책에는 달콤한 바닐라 라테 한잔을 연료로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매일 지나는 그 길에 늘어선 나무 위를 걸어보면 어떨까? ...(중략) *환경과조경387호(2020년7월호)수록본 일부
  • [비트로 상상하기, 픽셀로 그리기] 그래스호퍼 연대기Ⅰ
    변신 다행히 변해 있었던 건 아니다. 술을 끊은 뒤에도 여전히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지만 형편없는 껍질이 그대로 누워있을 뿐 그렇게 의미 있는 변화는 아니었다. 다들 세련된 매너를 표현하느라 분주한 나이가 됐다. 그래스호퍼 같은 기술의 향방에만 관심을 두기에는 합리적으로 소모해야 할 사회적 일들이 너무 많아졌다. 지나고 나서야 내가 왜 이런 사람이 됐는지 이해하게 되는 법이다. 이제 와 누군가를 설득하려 해봤자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될 뿐이다. 그렇게 나는 그래스호퍼를 배우게 됐다. 어느 날 벌레로 변해 버린 건 아니지만 자유로운 선택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내 코딩을 공부하고 있다. 사람들은 조경가가 그래스호퍼를 배우는 이유에 대해 집요하게 물어오곤 했는데, 실존적인 입장에서 꺼낸 얘기는 아닌 것 같아 진지하게 대답하지는 않았다. 아마 나는 비교적 젠틀한 언어로 위대한 진실보다는 서로의 관계에 의미 있는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물론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이유 같은 건 없었다. 모든 미디어는 가치 중립적이고 새로운 미디어는 활용 방법이 덜 개발됐을 뿐이다. 예술가는 어떻게 사용할지만 고민하면 된다. 미지의 세계에 도착했으니 창의적 경쟁심을 잔뜩 탐닉할 기회를 즐기면 그만이다. 그래서 배웠다. 인간들의 편견에서 출구를 찾으려고 조련사를 속인 것은 아니다. 미디어와 레퍼런스의 시대 내 생각은 그렇다. 패러다임의 시대는 끝났다. 앞으로 경제나 환경 문제에 있어 지구적 재난의 시대가 도래할지언정 포스트모더니즘 이후는 없다. 거대 서사의 시대는 끝났다는 얘기다. 우리 세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해야 하는 것은 기술 개발 시대의 새로운 미디어를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일이다. 그리고 주체성에 대한 자각을 바탕으로 새로운 삶의 가치를 발현하고 포화된 역사를 레퍼런스로 재창조의 문화를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지금은 미디어의 시대이고 자기 주체의 시대이며 레퍼런스의 시대라고. 그래스호퍼, 코딩, 파이썬, 클라우드, 스위프트 같은 말들은 더 이상 기술 어휘가 아니고 가치 판단의 문제도 아니며 시대의 역할에 대한 개인의 실천일 뿐이다. 역사는 언제나 새로운 것들에 대해 보수적으로 말해 왔으며, 이형의 개인에게 집단은 불편함을 내보였다. 현재를 유지하는 것과 관성을 지속하는 것은 인류에 내재된 방어적 본능이며 돌연변이가 가져올 미래의 가능성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 수 없다. 잠에서 깨어보니 나는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었고, 자취를 남기고자 하는 사람은 달라진 상황을 이해하고 적응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래스호퍼로 뭘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리를 해보려고 한다. 이후에 받는 같은 질문에 대해서는 어색한 웃음과 서로에게 불편하지 않은 대화 주제를 조합해 대응해 나갈 것이다. 파라메트릭 선언 목록을 나열하기 전에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한 선언을 하겠다. 파라메트릭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래스호퍼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코딩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당연하지 않은가? 코딩은 1940년대에 시작됐다. 파라메트릭은 변수를 활용하는 지극히 보편적 개념이며 세상 어디에라도 이미 적용되어 있다. 가치 판단의 문제가 전혀 아니다. 일렉트로닉 음악이 비틀즈를 대체한 것이 아니지 않나. 비틀즈는 비틀즈고 다프트 펑크(Daft Funk)는 다프트 펑크고, 톰 미쉬(Tom Misch)나 FKJ(French Kiwi Juice)같은 지금 세대의 뮤지션들은 심지어 비틀즈이고 다프트 펑크이며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다. ‘대체’가 아니라 ‘확장’이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인식의 변화’다. 세상에는 아날로그로 설계하는 사람, 아날로그와 컴퓨터로 설계하는 사람, 그리고 아날로그와 컴퓨터와 파라메트릭으로 설계하는 사람이 있게 된 것이다. 그뿐이다. ...(중략) *환경과조경387호(2020년7월호)수록본 일부 나성진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GSD에서 조경을 전공했다.한국의 디자인 엘,뉴욕의 발모리 어소시에이츠(Balmori Associates)와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CFO)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고, West 8의 로테르담과 서울 지사를 오가며 용산공원 기본설계를 수행했다.한국,미국,유럽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귀국 후 파트너들과 함께 얼라이브어스(ALIVEUS)라는 대안적 그룹을 열었다.
  • [공간잇기] 마을 기억지도로 찾은 잊힌 공간
    기억이 나요 철원에서 아홉 세대를 거치며 대대로 살아온 이근회 어르신이 가만히 앉아 있다 한마디 거든다. “여기 요 옆에 감나무가 있었고 그 옆으로 냇물이 졸졸 흘렀어요.” 각자의 기억을 더듬으며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던 열 명 남짓 주민들이 일제히 어르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어렸을 때 동네 친구들이랑 이 감나무에 올라가 감도 따고 옆 냇물에서 첨벙첨벙 놀고…그러던 곳이에요. 한참 뛰어놀다 목마르면 요 개울 아래 우물에서 물 한 모금씩 마시기도 했죠.” 어르신은 테이블에 펼쳐 놓은 지도의 한 곳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천진한 미소를 띠며 이야기한다. 이곳에서 대를 이어 살아 ‘천 년의 철원 토박이’라 불리는 어르신은 지역에서 공무원 생활도 오래 한 터라 누구보다 철원이 변해온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주민들도 어르신이 가리키는 지도의 위치를 열심히 따라가 본다. 하지만 주거지가 들어선 현지도 어디에도 물길과 우물은 보이지 않는다. “시공간의 이야기를 한 장에 담은 지도를 우리 지역에서도 만들 수 있게 도와주세요. ‘계동100년, 시간을 품은 지도’처럼”(4월호 참조). 지방의 한 연구소에서 ‘일상 공간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강연을 마친 내게 누군가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철원군청 소속 공무원인 그는 철원에도 잊힌 공간들이 많아 안타깝다며 지역의 사라진 공간을 찾고 싶다고 했다. 주민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통한 진행 과정이 특히 인상적이었다며 말을 이어간 그는 철원이 고향이라고 했다. 짧게 나눈 대화였지만 진정성 담긴 눈빛에서 지역에 대한 자부심과 애틋함이 느껴져 강한 여운이 남았다. 이런 인연으로 시작된 신철원 일대의 ‘시간을 품은 지도’1 프로젝트는 초반에는 순조로운 항해를 할 것처럼 보였다. 새로운 곳, 신철원 철원에는 새 도읍이 필요했다. 구舊철원이라 불리는 화려한 명성의 옛 도읍은 한국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됐다. 군청, 경찰서, 법원, 우체국 등 주요 관공서가 있던 자리는 치열한 전쟁의 상흔으로 흔적도 찾을 수 없게 초토화돼 한때 기능이 마비되기도 했다. 새로운 중심지가 필요했다. 강원도 철원군의 남쪽 끝에 위치한 갈말읍이 휴전 협정이 체결된 이듬해 새 도읍지로 선정됐다. 1950년대판 신도시였다. ‘칡뿌리의 끝’이라는 뜻의 갈말葛末이라는 이름을 가질 만큼 척박해 아무도살지 않던 땅이었다. 전쟁 이후 불안정한 상황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된 남쪽 끝에 새 터를 정한 것이다. 비옥한 구철원 땅을 뒤로하고 언제 다시 일어날지 모를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지 않았을까.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와 지포리 일대에 조성된 신도시는 신철원이라 불렸다. 구시가지에 있던 철원군청을 비롯한 주요 관공서와 학교 등의 공공 시설을 새 중심지로 옮겼고, 철원군민, 실향민, 외지인이 함께 정착할 환경을 하나둘 만들어갔다. 사람이 산 흔적이라고는 없던 허허벌판에 집을 짓고 마을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철원의 신도시, 신철원의 70년 역사가 시작됐다. “죄송하지만 그런 자료는 없습니다.” 신철원 주민들과 초기 워크숍을 통해 알아낸 1차 자료를 모아 문헌 조사를 시작할 단계였다. 현재는 사라지고 없는 곳들을 파악하고 역사적, 사회적 배경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려던 참이었다. 관련 관공서, 교육 기관, 문화 시설을 모두 찾아다녔지만 돌아오는 답은 자료가 없어 미안하다는 말뿐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채 창고에 쌓여 있던 옛 자료를 최근 새 건물을 짓고 이전하면서 모두 불태웠다는 설명이었다. 전쟁으로 불에 탄 것도 아니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불과 십여 년 전에도 존재했다는 그 자료들을 임의로 없앴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타임머신이라도 있다면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그 자료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실 확인을 할 사료가 없다는 점이 막막하게 다가왔다. 도대체 무슨 수로 지역의 사라진 공간들을 연구할 것인가. 마을 기억 더듬기 신철원은 조직적으로 계획된 요즘 신도시와 확연히 다르다. 전쟁의 폐해를 피해 급하게 만든 만큼 민관의 소통과 협업이 필수였다. 주민들은 사람이 살 만한 땅이라 생각되면 힘을 합쳐 그곳에 마을을 만들어나갔다. 땅을 다져 집을 짓고 농사지을 땅을 다듬었다. 신철원 일대를 가로지르는 용화천은 한탄강으로 흘러드는 지류다. 인근 명성산과 각흘산에서 삼부연폭포의 절경을 통해 쏟아져 내려오는 물은 신철원의 젖줄이었다. 용화천의 맑고 힘찬 물은 신철원 일대 크고 작은 물길과 우물의 생성에 영향을 미쳤다. 척박한 땅에서 물은 삶의 원천이었다. 신철원의 마을들은 실개천과 우물을 빼면 이야기할 수 없다. 자연스레 사람들의 삶도 이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1960년대 관이 지은 철원 최초의 대중목욕탕이 있던 곳이에요.” 80대 이근회 어르신은 지도를 가리키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용화천 물을 수동식 펌프로 끌어와 시작한 목욕탕은 당시 철원 사람들이 우물에서 길은 물로 고무 대야 목욕을 하던 생활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지금은 한무관이라는 태권도장이 있던 흔적만 남아 있다. “나는 어려서 잘 몰랐지만 어머니께 여쭤보니 사람들이 빨래를 한 바구니씩 들고 와 빨래를 그렇게 했대요. 물이 펑펑 나오니까. 그래서 주인이 그거 단속한다고 들어갈 때 짐 검사하고 사람들은 안 보여주려고 하고. 그런 시절이 있었대요.” 함께 있던 조금 젊은 60대 주민이 거든다. “지포리에도 목욕탕이 있었어요. 아직도 기억나는 게, 1960년대에는 5원짜리 지폐 내고 들어갔죠.” 당시 입장료를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185원 정도로 저렴했다. 목욕탕은 1971년 문을 닫을 때까지 주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목욕탕 있던 자리 옆이 지금 폐가로 남아 있는 양조장이에요.” 현장 조사 때 본 폐공장 터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제법 큰 우물이 있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곳으로, 한 동짜리 공장 내부 숙직실에는 당시 사용하던 달력과 관리 일지 등이 무심한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듯 먼지를 뒤집어쓰고 벽에 걸려 있다. 물이 좋아 막걸리 맛도 일품이던 이곳에서 생산된 막걸리는 동네 사람들에게 단연 인기였다. 말통(20리터 플라스틱 통) 단위로 판매하던 막걸리는 자전거 리어카에 실려 신철원 일대 주점에 배달됐다. “이쪽으로 좀 와보세요. 여기 막걸리 통이 있어요.” 함께 조사 나간 30대 주민이 반가운 듯 소리친다. 오래 관리하지 않아 잡초가 우거진 폐가 마당에서 버려진 막걸리 통을 발견한 것이다. 술에 취해 아무데나 막걸리 통을 버렸을 누군가에게 순간 고마웠다. ...(중략) 각주 1.‘시간을 품은 지도’는 특허청의 인증을 받았다(상표등록 제40-1454765호). *환경과조경387호(2020년7월호)수록본 일부 서준원은 열다섯 살부터 대학 졸업 후까지 뉴욕에서 약 10년간 생활했다. 파슨스 디자인 스쿨(Parsons School of Design) 인테리어디자인학과에서 다양한 주거 공간에 대해 공부했고, 한국인의 생활 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박사를 수료했다. SOM 뉴욕 지사, HLW 한국 지사, GS건설, 한옥문화원,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등에서 약 16년간 실내외 공간을 아우르는 디자이너이자 공간 연구자로 활동했다. 한국인의 참다운 생활 환경을 위한 디자인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품고 다양성이 공존하는 도시 공간 연구를 위해 곳곳을 누비며 ‘공간 속 시간의 켜’를 발굴하는 작업을 긴 호흡으로 해오고 있다.
  • [북 스케이프] 정원, 보다 더 위대한 완성
    ..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학기가 끝나간다. 매주 온라인 강의 준비에 허우적대다 보니 어느새 종강이 코앞이다. 마스크 너머로나마 회색의 인물 아이콘이 아니라 실재하는 수강생들을 만날 기대에 기말고사가 기다려지기까지 한다. 재택 근무 모드로 지내다 보니 일상의 모든 경계가 자꾸 흐려지는데, 이럴 때일수록 방학 계획을 잘 세워야 한다. 어수선한 책장을 정리하고, 아래쪽에 내려놨던 탐구 생활용 책과 몇 년째 지지부진한 번역 초고를 담은 두툼한 링 바인더의 먼지를 털어 잘 보이는 곳에 꽂는다. 이 책의 제목은 존 딕슨 헌트(John Dixon Hunt)의 『그레이터 퍼펙션즈(Greater Perfections)』다.1 정원 이론을 공부하면서 헌트의 연구를 피해가긴 어렵다. 그런데 그의 글을 단박에 이해하는 일은 더욱 어렵다. 유려하지만 번역은커녕 해석도 잘 안 되는 문어체 영어 문장은 그렇다 치고, 인문학의 전 영역을 종횡무진 누비는 방대한 지식을 대할 때면 도대체 나는 학부와 석박사 과정에서 뭘 했나 하는 좌절감마저 든다. 하지만 의지할 만한 선학이 있음에 안도할 때가 더 많다.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활발한 학술 활동을 펼치는 그는 대개 조경사학자(landscape historian)로 소개된다. 그의 학문적 경력은 영문학에서 시작하여 미술 이론과 비평으로, 이어 정원 역사와 이론, 비평으로 이어진다.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작업이 주로 18세기 영국 풍경화식 정원 관련 연구였다면,2 보다 더 포괄적인 정원 이론 연구는 『그레이터 퍼펙션즈』에서 시작된다. ...(중략) 각주 1. John Dixon Hunt, Greater Perfections: The Practice of Garden Theory, Thames &Hudson, 2000, 2004. *환경과조경387호(2020년7월호)수록본 일부 황주영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불문학과 영문학을 공부하고,미술사학과에서 풍경화와 정원에 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서울대학교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19세기 후반 도시 공원의모더니티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파리 라빌레트 국립건축학교에서박사후 연수를 마쳤다. 미술과 조경의 경계를 넘나들며문화사적 관점에서 정원과 공원, 도시를 보는 일에 관심이 많으며,이와 관련된 강의와 집필, 번역을 한다.그러는 동안 수많은 책을 사거나 빌렸고, 그중 아주 일부를 읽었다.
  • [에디토리얼] 감염 도시의 공원 풍경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 중인 조경가 최지수(SOM)가 최근 포스팅한 글은 그 어떤 기사보다도 생생하게 코로나 시대의 비일상적인 일상을 담고 있다(brunch.co.kr/@playwithaina/12). 초현실적인 시절을 현실적으로 살아내야 하는 역설을 그는 이렇게 기록한다. “힘을 냈다가 지쳤다가 막막했다가 끝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가 매일 같은 장소, 집에서 일하고 자고 먹고 살아가는 하루가 느린 듯 바쁜 듯 흘러간다. … 그렇게 셋이 복닥거리며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나의 주말은 전보다 더 특별해졌다. 반강제로 집에 갇혀 ○○를 돌보며 정신없이 일하다가 삼시세끼 해 먹고 지쳐갈 때 즈음 맞이하는 주말이 요즘은 더더욱 반갑기만 하다. 닫아버린 공원이나 산책로, 해변을 제하고 … 한정적인 선택지 속에서 한두 시간 걸을 수 있는 곳을 찾아 사람 대신 자연을 만나서 한숨 돌리는 주말의 시간은 다음 한 주를 준비하는 나의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 주변에 산과 바다를 포함한 공원이 가까이 있어 정말 다행이고 감사하다.자연 속에서 걷기만 해도 얻는 에너지는 대단하다.” 전국 곳곳의 크고 작은 공원들이 주말뿐 아니라 평일에도 유례없는 인파로 북적이고 있다. 유럽 남부의 무더위가 시작되고 서구 여러 국가의 봉쇄령이 완화되면서 해변과 공원에서는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이미 불가능한 상황이다. 미국 대부분의 도시에서도 경제 활동이 부분적으로 재개되면서 광장과 공원은 두세 달 만에 집 밖으로 나온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대감염병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도시공원과 공공 개방 공간의 존재 이유와 그 역할을 새삼 재발견하고 있는 중이다. 지난 5월 15일, 여러 외신은 초록 잔디밭에 새긴 하얀 동그라미 속에서 공원을 즐기는 이색적인 풍경을 앞다퉈 실었다. “공원의 인간 주차장(human parking spots in the park)”이라는 촌평이 화제를 낳기도 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유도하기 위해 백색 분필 페인트로 그린 지름 8피트(약 2.4미터)의 원형 띠 속에 앉거나 누운 뉴요커들의 모습은 아마도 코로나 시대가 남긴 가장 역설적인 장면의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서른 개의 원형 ‘인간 주차장’이 배치된 이 공원은 2년 전 개장한 브루클린의 핫 플레이스, 도미노 공(원Domino Park)이다(『환경과조경』 2019년 7월호 게재). 맨해튼에서 브루클린 방향으로 윌리엄스버그 브리지를 건너다보면 높은 굴뚝이 인상적인 노후한 갈색 벽돌 건물과 ‘도미노 슈거(Domino Sugar)’ 사인이 시선을 붙잡는다. 이 건물 바로 앞의 강변을 따라 들어선 도미노 공원은, 1856년에 세워져 ‘설탕 제국’이라 불리며 2004년까지 가동된 뒤 방치된 도미노 설탕공장 일대를 재생하는 사업의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JCFO(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가 디자인한 도미노 공원은 브루클린 탈산업 경관 고유의 풍취에 파묻혀 이스트 강 너머 맨해튼의 해질녘 스카이라인을 감상할 수 있는 낭만의 명소로 순식간에 떠올랐다. 뉴요커와 관광객들이 이 신상 놀이터에 마음껏 모여 윌리엄스버그 브리지를 사랑한 전설적인 색소폰 연주자 소니 롤린스의 재즈를 들으며 강바람에 취할 수 있는 날은 언제쯤 다시 올 수 있을까. 도미노 공원의 원에 갇힌 사람들을 조감한 드론 사진은 그야말로 초현실적이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전시장 한 벽을 내줘도 손색이 없을 만하다. 공기 여과기까지 달린 마스크를 쓰고 정자세로 앉아 독서 삼매경에 빠진 남자, 마스크는 물론 웃옷까지 벗어던지고 태양에 몸을 맡긴 커플, 한 원에 네 명 이하라는 규칙을 어기고 일곱 명이 빼곡 모여앉아 피크닉을 즐기는 한 무리의 십 대들, 고독이 절절히 묻어나는 표정으로 원의 경계를 따라 도는 중년 남자, 할아버지의 무릎을 베고 안온하게 누운 할머니, 아이의 걸음마에 바이러스의 공포를 잊고 마냥 흐뭇한 부부, ‘홈트’ 앱을 틀어놓고 유연성 강화 운동에 여념 없는 레깅스족. 도미노 공원의 진풍경을 영상 취재한 한 저널리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 찍은 비디오를 2019년에서 온 누군가에게 보여주면, 그는 실재하는 현실이 아니라 디스토피아를 그린 할리우드 텔레비전 쇼의 한 장면이라고 여길 것이다.” 어찌 보면 사회적 거리를 두고 박혀 있는 원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작은 공원 같기도 하다. 휴식, 일광욕, 피크닉, 산책, 독서, 사색, 연애, 운동.평범한 공원 프로그램들을 잘라 붙인 압축적 콜라주처럼 보이기도 한다. 초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감염 도시의 공원 풍경. 도미노 공원에 분필로 새긴 동그라미들이 등장한 지 사흘 뒤, 샌프란시스코의 힙 타운인 미션 지구의 돌로레스 공원(Dolores Park)도 똑같은 땡땡이 무늬 새 옷을 입었다. 이번 호부터 새 꼭지 ‘풍경 감각’의 문을 연다. 일러스트레이터 조현진의 그림과 글이 소란한 일상의 소중한 쉼표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풍경 감각] 보름달을 잡는 방법
    달빛에 그림자가 생기는 가을밤이었다. 강아지풀이 무성한 아파트 뒤뜰에서 동네 어른들은 맥주를 마셨고, 아이들은 안주로 가져온 과자를 집어 먹고 있었다. 이날 처음으로 귀뚜라미 소리를 들었(다고 기억한)다. 이렇게나 좋은 소리를 작은 벌레가 낸다니. 귀뚜라미를 잡아가져가기로 했다. ... (중략) *환경과조경386호(2020년6월호)수록본 일부 조현진은 조경학을 전공한 일러스트레이터다. 2017년과 2018년 서울 정원박람회, 국립수목원 연구 간행물 『고택과 어우러진 삶이 담긴 정원』, 정동극장 공연 ‘궁:장녹수전’ 등의 일러스트를 작업했고, 식물학 그림책 『식물문답』을 독립 출판했다. 홍릉 근처 작은 방에서 식물을 키우고 그림을 그린다.
  • 조경 설계의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들 한국조경협회 40주년 좌담
    모든 시작은 끝에서 비롯되듯, 우리는 이제 21세기의 두 번째 10년의 출발점에 서 있다. 앞으로 한국 조경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앞만 보고 달리기를 잠시 멈추고 지난 날을 돌아보며 미래를 가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한국조경협회 창립 40주년을 기념해 한국조경협회와 월간 『환경과조경』이 공동 개최한 좌담에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러 세대의 조경가들을 초대하여 조경의 미래를 그리는 작업의 물꼬를 트고자 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시대를 지나온 한국 조경 설계와 이를 뒷받침했던 교육 환경을 세대별로 진단하고 조경 설계 주제의 변천사가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논의했다. 분야가 축소되고 분화되는 가운데 있지만 위기와 기회를 구분하는 분별 있는 관점과 조경의 희망을 기대하는 목소리로 좌담회는 마무리됐다. 아름답고 유용하고 건강한 환경을 만드는 것은 조경의 역할이자 본질적 가치다. 각자의 시간대,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조경의 가치를 실천해 온 이들의 이야기를 지면에 옮긴다. 박명권 그동안 조경 분야가 숨 가쁘게 달려오면서 많은 발전을 이뤘다. 이제 잠시 멈춰서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좌담회에 설계뿐만 아니라 시공, 자재 등 전 분야의 조경인을 고루 모시고 싶었으나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대신 한국 조경의 초창기를 연 안계동 대표부터 이제 막 대학교를 졸업한 신입 사원까지 다양한 세대의 조경가를 한자리에 초대했다. 논의 주제는 네 가지다. 첫째는 내가 돌아본 조경 설계 40년이다. 세대별로 체감하는 조경설계사무소의 현실에 관한 생각을 나눠주길 바란다. 둘째는 조경 교육의 문제점이다. 설계 분야 후진 양성이 미흡한 원인과 대책도 함께 돌아보고자 한다. 셋째로 조경 설계 주제의 변천에 관해 이야기하고, 마지막으로 조경 설계업의 전망과 기대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한다. 안계동1981년도에 취업해 조경을 시작한 지 거의 40년이 됐다. 당시에는 설계사무소도 별로 없고 설계를 하는 사람도 적었다. 근무 여건은 열악하고 사회에서 조경 설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탓에 설계비도 적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계속 걸어온 사람들 덕분에 조건이 많이 나아졌다. IMF 등 경제 위기나 설계 업계 자체의 불황도 있었지만, 어려움을 겪으면서 조경가들의 역량이 커질 수 있었다.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지만 근래 들어서는 위기감도 느낀다. 개발의 시대가 끝나가며 일거리는 줄어드는데 설계사무소는 늘다 보니 경쟁도 치열해졌다. 앞으로의 조경설계사무소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안세헌 나는 안계동 대표를 비롯한 1세대가 10년간 닦아 놓은 토대 위에서 출발한 세대다. 한국 국토 개발의 한복판에서 그 시작과 과정을 고스란히 경험했다. 처음으로 설계사무소에 입사했던 1991년 말, 1기 신도시인 분당, 일산, 산본, 중동 등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입사해 맡은 첫 프로젝트가 산본 신도시 중심상업지구 쇼핑몰 현상설계였고, 분당 택지개발 사업 조경의 실시설계를 진행했다. 일거리가 폭풍처럼 쏟아지는 환경 속에서 30년을 보냈다. 개발의 시대가 종지부를 찍는 오늘날에 이르러 돌아보니 그간 내용이 빈약한 설계를 해오지 않았나 싶다. 짓기 급급했던 시절이었다. 덕분에 공원 등 기본 인프라는 많이 구축됐으나 공간을 도상에 빨리 표현하는 일에 매몰되어 조경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은 부족했던 것 같다. 서미경 올해로 조경 설계 일을 한 지 24년째다. 스스로 낀 세대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1996년에 대학원을 졸업했는데, IMF 직전이었고 설계사무소가 많지 않아 직장을 구하기 쉽지 않았다. 취업 후 정신없이 바빴고 육아로 경력 단절을 겪기도 하는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조경이 천직이라 생각했다. 식물을 직접 만지고 외부 환경을 다루는 일에 만족했다. 하지만 공공 환경보다는 건축물이나 아파트 외부 공간을 주로 설계했기에 조경의 가치와 사명감을 체감하기는 쉽지 않았다. 2000년대부터 세종시 중앙녹지공간 같은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이론적으로만 고민하던 가치를 설계에 구현해볼 수 있었다. 덕분에 조경가로서 자긍심을 갖고 그 원동력으로 지금까지 일하고 있는데, 근래 들어 밀레니얼 세대 조경가들의 도전적이고 실천적인 작업을 눈여겨보게 된다. 어쩐지 이들이 만드는 급격한 변화와 초창기 세대 사이에 큰 두각 없이 끼어 있는 기분이다. 김기천 각종 이론이 난무하는 시기를 지나왔다. 조경과 도시계획에 관련된 국내외의 다양한 이론을 설계에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하며 20년을 보냈다. 설계할 기회는 많았는데 돌아보니 무엇을 해왔나 싶다. 젊은 후배들이 설계사무소를 차리고 자신만의 영역을 찾아가는 걸 보면 어떤 입장에서 앞으로의 20년을 보낼지 고민이 많다. 최영준 지난 십몇 년을 네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 보았다. 이론의 부재, 디지털화, 설계 유학, 중국 건설 호황이다. 김기천 소장의 말처럼 그간 조경에 관한 여러 이론이 정립됐지만 다소 허망하거나 같은 내용의 반복처럼 느껴졌다. 이론의 한계를 드러내고 증명한 프로젝트를 접하면서 우리 세대는 실무적이고 실천적인 것을 더 중시하게 됐다.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landscape urbanism)의 몰락을 목격하고 이 같은 이론을 비판하는 리포트를 쓴 적도 있다. 또한 2000년대 초반 학번은 캐드부터 라이노, VR을 경험한 세대다. 랩디에이치 파트너 중 한 명은 전 세계 40명밖에 없는 루미온 초기 베타 테스터이기도 했다. 도면 제작의 기초로 여겨지는 제도를 정식으로 배워 본 적도 없다. 설계 초반에는 손 스케치를 많이 하지만 캐드와 라이노, 스케치업이 더 친숙하다. 유학이 한창 융성했던 시기를 지난 것도 우리 세대의 특징이다. 유학을 가면 장래가 밝을 거라 믿는 분위기였고, 해외에서 공부를 마치고 학교에 포진한 윗세대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하버드 GSD에 중국인보다 한국인이 많다는 이야기가 들릴 때였고, 유펜(UPenn)에서 공부할 당시 한국인이 15명, 하버드 GSD까지 합치면 거의 40명이었다. 마지막으로, 영토가 넓고 여전히 개발이 활발한 중국에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좋은 프로젝트를 경험할 기회가 많았다. 김지환 최근 몇 년간 조경의 가치와 방향성, 희망을 정리하기보다 위기를 부각한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경제적 혹은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부각되어 보일 순 있지만 이럴 때일수록 조경의 가치를 탐구한 결과물을 학계에서든 업계에서든 알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예전에는 큰 대지를 다룰 기회가 많았다면 지금은 작은 공간 혹은 새로운 유형의 공간을 다룰 일이 많아졌다. 이를 기회로 삼아 조경의 방향과 가치를 더 면밀히 탐구해야 한다. 강은영 조경에 대해 제대로 알고 전공을 택한 건 아니었다. 여러 수업을 통해 차차 조경을 공부했고 이 학문이 미적 영역을 넘어 도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배웠다. 이 배움이 저영향개발LID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관련 회사에 다니게 됐다. 졸업하고 보니 나처럼 전공과 관련된 회사에 취직한 동기나 선배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중략) *환경과조경386호(2020년6월호)수록본 일부 토론 - 강은영 한국그린인프라연구소 사원 - 김기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소장 - 김지환 조경작업장 라디오 대표 - 서미경 해안건축 수석 - 안계동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 대표 - 안세헌 가원조경설계사무소 대표 - 최영준 랩디에이치 조경설계사무소 대표 사회 박명권 발행인 사진 유청오 정리 윤정훈 일시2020년 5월 15일 장소 환경과조경 회의실
  • [비트로 상상하기, 픽셀로 그리기] 캔디렌더와 포스트 프로덕션
    캔디렌더 안개비와 구라파적 가스등이 없더라도 누구나 해질녘이 되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늘 그렇듯 뻔한 거짓말을 적당히 둘러대고는 커피숍으로 달려가 새로운 트럼펫 연주에 어울리는 컴퓨터 작업을 시작했다. 지난주부터 왠지 모르게 다음 연재를 위한 캔디렌더(Candy Render)이미지(그림 1)를 무척이나 만들고 싶었다. 다른 소장들은 새로운 수주에 관해 수줍게 이야기하거나 최근에 만든 서로의 작품을 칭찬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나는 혼자 렌더링 같은 것을 만들고 있다고 하면 아마 모두 비웃을 거다. 그래스호퍼나 넙스 같은 얘기를 더 할까도 생각해봤지만 몇 달째 반복되는 똑같은 얘기들은 우리 사이를 다시 피곤하게 할 것만 같았다. 캔디렌더는 파라메트릭도 아니고 초연결 사회의 교차점에 걸려 있는 그림도 아니며, 로버트 글래스퍼(Robert Glasper)가 세련되게 믹싱한 새로운 시대의 재즈도 아니다. 그저 브이레이의 커스틱스(Caustics)효과를 포토샵으로 따라 한 사탕 느낌의 이미지일 뿐이다. 지금까지 패시브한 성격을 자조적으로 고백하는 우울한 디자이너를 애써 흉내 내왔는데, 귀여운 성향을 갑자기 고백하다니 나도 나 자신을 잘 모르겠다. 오늘은 과묵하게 말을 아끼다가도 내일은 엄청나게 수다스러워지고 마는 거다. 포토샵 포스트 프로덕션 적당히 어려운 얘기만 하다 연재를 마칠 생각이었다. 아무에게도 관심 받지 않고 고독하게 마감하려고 했다. 하지만 포토샵에 애달팠던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져 포토샵 포스트 프로덕션(post-production)에 관한 얘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됐다. 포토샵 포스트 프로덕션은 관성적인 레이어 쌓기 게임일 수도, 디지털 사진의 일반적인 후보정 과정일 수도 있으며, 루미온 시대의 카메라 로 필터(raw filter)를 활용한 최후의 리터치 과정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렌더링 과정에서의 연출에 대해 말하고 싶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아니지만, 디지털 콜라주에서 원근법을 구축하는 과학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시대를 마감하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무너지는 서브컬처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싶은 것이다. 아무래도 정리를 해야겠다. 너무 많은 프로그램들이 쏟아지고 있고, 전통적인 아카데미 교육과 새로운 미 디케이드ME decade(자기중심주의 시대)의 미디어들 사이에서 정체 모를 과도기가 깊어지고 있다. 이제는 소묘 수업에서 명암의 기초를 배우며 빛과 그림자로 표현하는 과정을 자연스레 익히지도 않고, 루미온을 통해 카메라와 구도에 대해 배우는 것도 아니다. 어느새 포토샵은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무시하던 프리미어 프로(Premiere Pro)(어도비의 영상 편집 프로그램)에게 스마트 시대의 주인공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누구도 영원할 수는 없는 거다. 찬란했던 모든 것들도 결국은 적막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렌더링의 과정을 다시 살펴보겠다. 렌더링은 한 마디로 ‘원근법을 구축’하는 과정이다. 이 점을 확실히 이해해야 전체 과정을 디자이너의 시각으로 ‘재창조’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디자인.모델링.렌더링.포스트 프로덕션이지만 아무래도 이래서야 재창조할 수는 없다....(중략) *환경과조경386호(2020년6월호)수록본 일부 나성진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GSD에서 조경을 전공했다.한국의 디자인 엘,뉴욕의 발모리 어소시에이츠(Balmori Associates)와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CFO)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고, West 8의 로테르담과 서울 지사를 오가며 용산공원 기본설계를 수행했다.한국,미국,유럽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귀국 후 파트너들과 함께 얼라이브어스(ALIVEUS)라는 대안적 그룹을 열었다.
  • [공간잇기] 어르신들에게 시간을 묻다
    옛날에 내가 말이야 가난하고 힘들었던 젊은 시절 갖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살아온 엄주옥 할아버지의 인생 무용담은 20분이 넘어도 도무지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한결같이 왕년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어르신만 벌써 여섯 명째, 슬슬 수업이 산으로 가고 있었다. “어르신, 그때 누구랑 같이 사셨고 동네 이웃들은 어떤 분들이었어요?” 나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그가 살던 동네와 그 시절의 생활사를 듣고 말겠다는 의지로 질문 공세를 펼친다. “그때 동네의 모습이 지금이랑 어떻게 같거나 다른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발표를 하던 할아버지는 질문을 가만히 듣다 한마디로 상황을 종료시켜 버린다. “몰라요. 그런 걸 다 어떻게 기억하고 사나. 그때는 먹고사는 게 급해서 그냥 살았어요.” 서울 북촌의 안국역 사거리와 탑골공원 사이에 있는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70대 이상 어르신을 대상으로 진행한 ‘우리동네, 여행작가’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자신이 살던 곳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옛집 사진을 가져와 발표하기로 한 날이었다. 총 13강의 수업 중 세 번의 강의를 통해 일상의 공간과 삶의 기억이 마을의 역사라는 것을 열심히 설파한 뒤였다. 네 번째 수업을 기점으로 일상 공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사라지거나 변한 동네 이야기를 중심으로 수업을 이어갈 요량이었다. 그날 수업이 어려운 시절을 누가 더 잘 이겨내고 살았는지에 대한 인생 자랑 시간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내 부족함을 탓하며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들과의 만남 북촌에서 두 해 연달아 연구와 전시, 출판을 진행하다보니(4월호와 5월호 참조) 서울노인복지센터로부터 인문학 강의를 맡아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기존에 진행한 연구와 결을 같이 하는 강의이면서 동시에 어르신들이 스스로 누구인지 생각해 볼 수 있게 끔 해달라고 요청했다. “어르신들을 20년 가까이 오래 보았지만, 그분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한 번도 궁금해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교육을 의뢰한 담당 사회복지사와 센터장은 내 연구 활동 결과물들을 접하고 든 생각이라며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이 센터는 탑골공원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많은 어르신의 주체적인 삶과 활기찬 노후를 돕는 평생 교육 공간으로, 서울시가 2001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사회복지시설이다. 설립 초기부터 ‘20년째 열정적인 어르신 학생들’이 많이 있는 이곳은 배움에 대한 열정을 충족할 수 있는 다양한 분야의 수업뿐만 아니라 취미 활동을 위한 기술과 지식을 가르쳐 준다. 글, 그림, 영화 등 각종 아마추어 공모전에서 수상하기도 하는 등 꽤 높은 수준의 프로그램을 이미 섭렵한 분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정중히 거절 의사를 밝혔다. 나는 인문학자도 사회학자도 아니며, 그저 공간 속 시간의 켜에 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 소규모 연구를 진행하는 연구자라고 설명했다. 어르신들을 강의실에 모아 놓고 각자의 이야기를 얼마나 깊이 있게 끌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센터의 거듭된 요청과 설득으로 결국 70대부터 90대에 이르는 11명을 대상으로 수업을 하기로 했다. 센터에서 붙여준 수업 제목에 부제를 붙여 목적의식을 뚜렷이 했다. ‘손주들에게 들려주는 우리동네, 나의 시간여행기’, 즉 어르신들이 살던 동네에서의 삶 이야기를 끄집어내면서도 두서없는 옛날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전달 대상을 자라나는 손주 세대에 맞추겠다는 의도였다. 이야기할 대상이 명확하다면, 대상의 눈높이에 맞춰 동네의 시간적, 물리적 변화를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 진행한 연구들처럼 전문 연구자가 제3자 관점에서 이야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제공자인 어르신들이 주체가 되어 변화해온 동네를 기억하고 자신만의 목소리로 기록하게 만드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연구자는 그저 이 연구를 기획하고 설계하며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돕는 역할을 할 뿐이었다.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전의를 불태웠다. 이 호기로운 도전 정신이 좌절과 ‘멘붕’으로 점철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중략) *환경과조경386호(2020년6월호)수록본 일부 서준원은 열다섯 살부터 대학 졸업 후까지 뉴욕에서 약10년간 생활했다.파슨스 디자인 스쿨(Parsons School of Design)인테리어디자인학과에서 다양한 생활 공간에 대해 공부했고,한국인의 주거 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다. SOM뉴욕 지사, HLW한국 지사, GS건설,한옥문화원,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등에서 약16년간 실내외 공간을 아우르는 디자이너이자 공간 연구자로 활동했다.한국인의 참다운 주거 환경을 위한 디자인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품고,다양성이 공존하는 도시공간 연구를 위해 곳곳을 누비며‘공간 속 시간의 켜’를 발굴하는 작업을 긴 호흡으로 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