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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토리얼] 편집자로 산다는 것
    책을 편집하는 것은 영화를 만드는 것 못지않게 복합적인 작업이다. 특히 『환경과조경』 같은 디자인 전문 월간지의 편집은 기획, 조사, 취재, 인터뷰, 작품 섭외, 필자 섭외, 교정과 교열, 사진 촬영, 편집 디자인, 마케팅이 한 번에 뒤섞여 돌아가는 도전적인 작업이다. 편집자가 멀티플레이어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매달 일정한 날짜에 잡지를 내야 하므로 편집자는 항상 시간과 싸운다. 필자가 원고 마감을 지키지 않더라도, 약속한 날까지 사진이 도착하지 않더라도, 데드라인 전날 편집장이 원고 교체를 결정하더라도 무조건 정해진 날 편집을 마무리해야 한다. 편집 일을 하며 무척 당혹스러운 건 한 달을 먼저 산다는 점이다. 12월에 다음 해 1월호를 만들면 막상 새해 첫날이 와도 감흥이 없다. 칼바람 부는 2월에 새봄맞이 3월호에 집중하다 보면 계절을 착각하기 십상이다. 겨울에 봄옷 입고 가을에 겨울옷 입는 편집자가 적지 않다. 무더위가 한창인 늦여름에 낭만적인 가을 풍경 이야기를 쓰다 보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진다. 조경 저널리즘의 최전선을 질주하고 있는 김모아, 윤정훈 편집자의 한 달을 잠깐 들여다보자.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빼서 늘 집중해야 하는 건 기획 업무다. 기획의 스펙트럼은 참 넓다. 1년간 어떤 흐름으로 무슨 주제와 콘텐츠를 구성할지 계획하는 장기 기획,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을 주제를 발굴하고 엮는 특집 기획, 콘텐츠의 일관성과 연속성을 보장해주는 긴 호흡의 연재 기획. 물론 면밀한 조사와 성실한 취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머리를 쥐어짜며 작성한 기획서가 곧바로 채택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기획서에 대한 편집주간과 편집장의 반응은 기껏해야 ‘한 번 더 생각해 봅시다’ 아니면 ‘더 발전시켜 봅시다’다. 작품과 필자를 섭외하고 원고 일정을 관리하는 일 앞에는 늘 난맥이 놓인다. 오히려 해외 작품 섭외에는 ‘루틴’이 있어서 공력이 적게 든다. 설계사무소 홈페이지, 뉴스레터, 웹진, 소셜미디어에서 신중히 고른 후보작 리스트를 두고 편집회의를 한다. 후보작을 좁힌 뒤 이메일로 섭외를 시작하는데, 대개 해외사에는 홍보 담당 부서나 직원이 있어서 바로 반응이 온다. 도면, 사진, 설명을 한 묶음으로 정리한 ‘프레스 키트’가 금방 도착한다. 정작 막막한 건 국내 작품의 발굴과 섭외다. 실을 만한 근작을 수소문하기 위해 갖가지 레이더를 총동원한다. 의외로 섭외 성공률이 낮다. 섭외되더라도 진행 과정이 순탄하지 않다. 정리된 도면과 출판 가능한 사진이 없는 경우, 정제된 형식의 작품 설명이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집과 연재 원고에 맞는 필자를 찾고 섭외하는 일에는 다양한 조사와 공부가 필요하다. 필자와 소통하며 원고를 맡기고 받는 일은 잡지 편집의 중요한 과정이다. 필자는 원고 마감일을 어기기 일쑤다. 요즘은 편집자의 애를 태우는 ‘잠수형’ 필자가 거의 없지만, 연이은 독촉 연락에 이제 곧 보낸다는 말만 반복하는 ‘철가방형’ 필자가 여전히 드물지 않다. 최악의 상황이 언제든 일어난다. 도착한 원고가 편집자의 기획 의도와 완전히 다르거나, 필자와 편집자의 소통 과정에서 서로 조율한 방향과 크게 어긋나는 경우도 있다. 다시 써달라고 요청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많은 시간이 들고 손이 가는 편집 과정은 교정과 교열, 그리고 편집 디자인이다. 외부 필자의 원고와 취재 기자의 기사가 도착하면 우선 모니터로 일독하며 오탈자를 바로잡고 잡지사의 띄어쓰기 원칙, 외래어 표기법 규칙에 맞게 원고를 수정한다.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머리를 맞대고 수정 원고와 이미지들을 배치하고 구성하는 편집 디자인이 시작된다. 출력한 초벌 편집본을 놓고 1교가 진행된다. 디자이너의 수정을 거쳐 재출력한 버전으로 편집자를 바꿔가며 2교와 3교를 진행한다. 교정과 교열은 오탈자 정도만 고치는 작업이 아니다. 문법과 어법에 맞지 않는 단어나 문장을 잡아내고, 정확하지 않은 사실이나 표현을 적확하고 자연스러우며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걸러내고 다듬는 일이다. 글이 더 잘 읽히게, 지면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재구성하는 일이다. 4교에서 책임자의 ‘OK’가 떨어지면 인쇄 이전의 과정이 끝나고, 다음 달의 역동적인 사이클이 다시 시작된다. 여러 멀티플레이어 편집자들이 1982년 7월부터 2021년 5월까지 『환경과조경』 397권을 만들며 어제와 오늘의 한국 조경을 기록하고 내일의 조경 문화를 설계해 왔다. 이번 호 특집 ‘편집자들’에 그들을 초대했다. 『환경과조경』을 거쳐간 김정은, 백정희, 손석범, 양다빈, 조수연, 조한결 편집자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환경과조경』은 어떤 잡지였으며, 조경이란 무슨 의미였나요?”
  • [풍경 감각] 스트로브잣나무와 개
    사철나무, 서양측백나무, 스트로브잣나무…. 이 나무들은 그 자체보다무언가를 가리고 막는 쓰임으로 익숙하다. 이 식물들을 보면 떠오르는개 한 마리가 있다. 본가 아파트 단지에는 샛길이 있다. 쪽문으로 드나드는 발걸음이만든 짧은 지름길인데, 적절히 나무를 심어둔 단지 내 보행로와 달리식재 밀도가 낮아 길에서 1층 세대의 집 안이 보였다. 베란다에 그개가 늘 있었다. 검고 큰 덩치에 순한 인상, 리트리버 종류가 아니었나싶다. 어머니는 주인과 산책하는 걸 가끔 보았다고 했지만 나와마주칠 때는 늘 그곳에 조용히 누워 바깥을 보고 있었다. 그 개가 보던 창밖은 어땠을까? 특별한 풍경은 아니었다.그래도 그 집 앞에는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하얀 봄맞이꽃이며 개망초같은 풀꽃, 누군가 심어둔 노란색 낮달맞이꽃, 소국 같은 화초들이계절마다 피고 졌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맺힌 붉은 산수유열매에는 직박구리와 참새가 날아들었고, 스트로브잣나무 숲에서는까치가 울었다. 사람들은 그 풍경을 가로지르며 여름이면 진창을찰박거리고 겨울이면 쌓인 눈을 뽀드득 밟는 소리를 냈다. 언제부턴가 그 개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여쭤보니 이사를간 것 같다고 하신다. 그 집 앞은 여전한데. 검은 개는 지금 어떤곳에서 무엇을 보고 있을지 궁금하다.
    • 조현진
  • [『환경과조경』 400호 돌아보기] 아날로그 시대의 끝자락
    남들 하는 건 다 해보라는 부모님 말에 따라 (이러란 뜻은 아니었겠지만) 반년 정도 재수생 생활을 했다. 일명 ‘반수생’, 고작 6개월밖에 안 되는 시간이 어찌나 지루하고 길었는지 수험생 신분을 다시 한 번 벗어던질 때의 해방감과 그해에 일어난 일들을 유독 선명하게 기억한다. 오답 노트 복기에 열을 올리던 2008년 하반기, 미국 대선이 치러졌다. 한창 조경에 관심을 두던 때라 버락 오바마가 기후변화와 관련한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게 생각난다. 이듬해 벚꽃이 필 무렵에는 북미 지역을 중심으로 신종플루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인 줄 알았는데 열이 나나 싶더니 사흘을 꼬박 앓아누웠다. 무엇보다 휴대 전자기기가 무서운 속도로 변해갔다. 전자사전은 구식이 된 지 오래, PMP가 진화하나 싶더니 가볍고 성능이 좋은 노트북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의 필수품이었던 MP3의 설 자리가 좁아지고, 터치폰에 좀 익숙해졌나 싶을 즈음 아이폰이 국내에 등장했다. 카메라, 음악 플레이어, 게임기, 웹 서핑은 물론 애플리케이션만 깔면 휴대폰에 수많은 기능을 더할 수 있다니! 손안에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신입생 때만 해도 책 읽는 일은 조금 유별나거나 고루한 취미로 여겨졌다. 당시의 나 역시 책보다는 바깥이 흥미로웠다. 도서관보다는 영화관이나 전시관에 자주 들락거렸다. 활자가 얌전하게 배열된 종이는 무한 확장이 가능한 액정과 스크린 속 세상보다 좁아 보였다. 이곳저곳 쏘다니기 바빴던 내가 『환경과조경』을 펼치게 된 건, 순전히 설계 수업 때문이었다. 텅 빈 도면에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 하는데 아이디어는 없고, 참고 자료만이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노트북은 없었고 핸드폰 액정은 너무 작았고 2층 컴퓨터실과 1층 설계실을 오가기에는 버려지는 시간이 너무 많아 고민하던 내 시야에 한쪽 서가에 주르륵 꽂혀 있는 잡지들이 들어왔다. 검색을 대신해 원하는 키워드를 책등에서 찾아 쏙쏙 뽑아들었다. 에디터의 손길이 닿은 종이 묶음은 무수한 자료의 망망대해를 헤맬 필요 없이 양질의 콘텐츠를 쥐여 주었다. 그때 책상 위에 『환경과조경』을 펼쳐 놓은 모습을 다시 회상하니 큐레이션이 잘 된 전시장이 떠오른다. 어쩌면 그때부터 종이 매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생각하는 한국 현대 조경을 대표하는 작품은? 다시 읽을 잡지는 통권 201호부터 250호, 2005년 1월부터 2009년 2월호까지다. 내가 2009년 봄 조경학과에 입학했으니, 신입생이 되어 접한 조경의 바로 직전 소식들이 담겨 있는 셈이다. 2005년을 여는 첫 달은 『환경과조경』이 통권 300호를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인 201호가 발간된때다. “어느 칼럼니스트가 적절하게 지적한 바 있듯이, 10년, 20년 혹은 100호, 200호와 같은 인위적인 눈금은 우리의 삶에 리듬을 부여하고, 우리에게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계기를 마련”해준다(오휘영, “월간 『환경과조경』 통권 200호 발간에 즈음하여”, 2004월 12월호). 『환경과조경』도 이뜻깊은 숫자를 기념해 표지를 비롯해 전반적인 편집 디자인을 정비하고, 새로운 필진을 발굴하고조경 담론과 조경 비평을 활성화하자는 목표를 되새겼다. 더불어 올린 특집 ‘열 개의 공간, 다섯 가지 시선’은 무려 118쪽에 달하는 지면을 할애한 굵직한 기획이었다. 당시는 국내에 현대적 의미의 ‘조경’이 들어온 지 30여 년을 지나던 때였는데, 이쯤해서 그간 축적된 조경 작품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편집부 내부에서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에2014년 11월, 조경설계 실무자를 비롯해 담당 교수, 비평가 200여 명을 대상으로 조경 작품에 관한 이야깃거리를 끌어낼 수 있는 설문 조사를 진행했다. 응답자는 152명, 참여율도 높은 편이었다. 이 결과를 토대로 201호에 열 개의 조경 공간을 새롭게 소개하고, 개별 공간에 대한 비평과 설문 조사 결과에서 나타난 경향과 특징, 문제점을 다룬 다섯 편의 글을 수록했다. 편집부가 던진 질문은 다섯 개였다. 나름대로 다채로운 결과가 도출될 수 있도록 고민했을 텐데, 아쉽게도 순위권에 오른 작품의 스펙트럼은 그리 넓지 못하다. 순서만 조금씩 달라질 뿐 계속해서 엇비슷한 이름이 등장한다. 그 질문과 결과를 옮겨 적는다.(후략) *환경과조경397호(2021년 5월호)수록본 일부
  • [나의 미개봉작 상영기] 잭과 콩나무 부산판
    잭과 콩나무 원고 청탁을 받고 난 후,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난감했다. 그동안 수행한 프로젝트가 담긴 폴더들을 하염없이 클릭하며 여닫기를 반복하며 지쳐갈 즈음, 2018년 여름 SRT에 몸을 싣고 매주 부산을 오가며 진행한 하나은행 부산 IPC가 떠올랐다. 하나은행이 부산 서면에 PB 센터를 새로 열면서 기존 건물의 내외부와 조경 공간을 리모델링하는 프로젝트였다. 지명 설계공모를 통해 선정된 안을 토대로 조경, 건물 입면, 벽화, 음향 설계 및 감리를 수행했다. 하나은행 부산 IPC는 초기 브랜딩 단계부터 동화 ‘잭과 콩나무’를 기본 콘셉트로 계획되었다. 잭과 콩나무는 시대 혹은 나라별로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주인공이 콩나무를 타고 하늘 높은 곳에 있는 거인의 집에 올라 보물을 훔친 뒤, 거인의 추격을 뿌리치고 인간 세계로 다시 내려와 콩나무를 벤다는 큰 맥락은 동일하다. 이러한 이야기를 조경의 방식으로 구현해야 했다. 거대한 콩나무 한 그루 건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콩나무라는 핵심 개념에 따라 방문객이 잭이 되어 콩나무를 타고 거인의 집을 향해 떠나는 모험을 형상화했다. 지하 2층과 지상 1층 사이 계단실은 콩나무의 뿌리, 1층은 콩나무의 얼굴, 12층부터 15층까지의 램프 구간은 하늘을 향해 뻗은 콩나무 줄기, 15층은 거인의 마당, 16층은 거인의 집으로 개념화했다. 콩나무의 뿌리: 지하 구간이 콩나무의 뿌리에 해당됐기 때문에 지하 2층에서 지상 1층에 이르는 계단실에 콩나무의 뿌리가 흙 속을 무작위로 뻗어나가는 형상의 벽화를 제안했다. 발주처는 큰 맥락에서의 디자인 개념에는 동의했으나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동화적이고 예쁜 이미지를 원했다. 결국 몇 번의 디자인 회의를 거쳐 동화 속 줄거리를 담은 도안이 들어가게 되었다. 콩나무의 얼굴: 1층 외부 공지는 영업점 출입구가 있는 곳이자 서면역 주변의 많은 유동인구가 지나기 때문에 콘셉트를 강력하게 드러내야 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상층부 건축 설계의 가장 큰 형태적 언어인 ‘땡땡이’ 패턴에 주목했다. 상하의를 비슷한 패턴의 옷으로 코디하듯 건물 상부의 패턴에서 착안한 패턴을 1층 건물 입면과 바닥 포장에 적용했다. (후략) *환경과조경397호(2021년 5월호)수록본 일부 원종호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쳤다.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에서 설계의 기본을 익혔으며, 현대건설에 근무하며 해외 현장에서 시공 경험을 쌓았다. 현재는 제이더블유랜드스케이프(JWL)에서 훌륭한 동료들과 함께 다양한 규모의 공간을만들어가고 있다. 조경가가 문화인으로 인정받는 날까지 끊임없이생각하고, 공부하고, 실험해 볼 생각이다.
  • [사람과 사람을 잇는 사람들] 길거리가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도록 우옌더 인생백미 공동설립자
    대만의 사회적 기업 ‘인생백미(人生百味)’의 공동설립자 우옌더(巫彥德)를 만났다. 인생백미는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청년들이 2015년 설립한 단체로 도시의 노숙인이나 노점상이 사회와 다시 건강하게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데 목적을 둔다. 인생백미는 노점상이 판매할 음식을 개발해주는 사업으로 출발했다. 이 기업의 영어 이름이 ‘Do You a Flavor(맛을 보여드립니다)’인 이유다. 도시에서 소외되는 계층, 모두를 위한 공공 공간에서조차 쫓겨나는 노숙인과의 작업에서 인생백미가 추구하는 바는 ‘구제’가 아닌 사회와의 ‘연결’이다. 디자인, 문학, 일자리 창출 등 다양한 분야와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그들의 삶에 새로운 활력을 주려 한다. 소외 계층의 인권을 생각하는 단체답게 생겨난 계기나 과정에서도, 노숙인과 만나는 모든 작업에서도 평등과 공동의 가치를 중시하고 있다. 인생백미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고, 얼마 동안 일했나? 공동창립자 세 명 중 한 사람이다. 현재 인생백미의 전임 직원이 11명인데, 그중에서 조직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이 일을 시작한 지는 6년이 조금 넘었다. 단체가 만들어진 과정이 궁금하다. 디자인, 심리학, 중국어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모여 있는데, 누군가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인가? 예전에 같은 회사에서 일하던 친구 몇 명과 함께 3.18 학생운동1에 참여했는데, 시위 참여자를 위해 마련된 간식 테이블에서 먹을 것을 받으려다가 쫓겨나는 노숙인들을 보게 되었다. 운동의 공간에서조차 그들을 거부한 것이다. 흔히 노숙인은 노동하지 않고 게으르게 산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그러한지, 그래서 그들이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날 시위 현장에 함께한 친구들과 마음이 통해 퇴근 후 노숙인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막상 거리에서 생활하는 이들을 만나보니 대부분 전단지 돌리기와 같은 일용직 노동을 하고 있지만 생활비를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연히 더 좋은 직장을 구할 수도 없었다. 이 만남을 계기로 인생백미를 설립하게 되었다. 특별히 더 나서서 단체의 설립을 주도한 사람은 없었다. 모든 것은 토론을 통해 합의로 결정됐다. 우리는 모든 의사 결정을 함께하고, 합의되지 않은 건 하지 않는 수평적인 단체다. 사회의 소외된 계층, 그중에서도 가난을 주제로 하는 단체로서 인생백미에게 ‘연결’은 어떤 의미인가? 연결에는 많은 의미가 있다. 가족, 친구, 스승과 제자 같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일 수도 있고, 사업상의 동료, 직장 동료, 상사와 부하 같은 경제적 관계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것이 ‘관계’라는 것이다. ‘연결의 단절’은 노숙인들이 모든 ‘관계’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적, 사회적 관계를 잃은 노숙인들은 아무런 기회를 얻지 못하고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우리는 모든 연결이 끊어진 이들에게 소통의 창구를 제공하여 다시 사회와 연결된 한 구성원으로 자립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노숙인들을 향한 마음이 특별한 것 같다. 그들을 거리 친구, 형 또는 오빠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론적인 질문일 수 있지만, 노숙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것이 왜 중요한가? 노숙인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노숙인에 대한 사회의 태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사회가 노숙인을 위험하고 게으르고 더럽다고 여겼다. 그래서 노숙인을 체포하거나 모욕하거나 쫓아내는 일이 많았다. 사회가 노숙인들을 낙인찍고 차별했다. 하지만 노숙인들이 어떤 상처를 받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 상처의 고통 때문에 쉽게 화내고 공격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연결을 잃은 절망감 때문에 자포자기해서 알코올 등에 쉽게 중독되고 ‘씻기’라는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아서 자연히 몸에서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을 돕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해는 아주 중요하다. 노숙인들의 부정적인 행동의 원인을 이해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가 그들에게 상처를 입힐 것인지 아니면 도울 것인지, 그들을 향해 어떤 태도를 취하게 할지를 결정짓는다. (후략) *환경과조경397호(2021년 5월호)수록본 일부 조성빈은 유년 시절을 미국과 한국의 다양한 도시에서 보냈고,공간과 도시에 매료되어 한국과 노르웨이에서 건축과 조경을 공부했다.늘 경계에 있는 사람으로 살아와 깊이는 부족해도 본질에 관심이 많고,관계에서든 공간에서든 진정성을 추구한다.조경설계 서안을 거쳐 조경작업소 울에서 놀이터와 커뮤니티 디자인을 하고 있다. 김연금은 서울 옥수동에서 태어나 살고 있고, 2009년부터 옥수동 옆 약수동에서 조경작업소 울을 운영하고 있다.『텍스트로 만나는 조경』,『커뮤니티디자인을 하다』,『소통으로 장소만들기』,『우연한 풍경은 없다』등 다양한 집필 작업을 해왔다. 2020년에는 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인 이규목 교수를 비롯해 여덟 명의 조경가의 글을 엮어『이어 쓰는 조경학개론』을 펴냈다.
  • [북 스케이프]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정원을 보여주는 법』
    책을 읽는 방법은 많고 많지만, 묘사된 바로 그 장소에서 그 책을 읽는 ‘현장 독서’는 단연코 최고다.1 여행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현장에서 읽으며 묘사된 분위기를 공감각적으로 느끼고 나면 그 책은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된다. 정원 답사 길에 현장 독서를 하면서 그 시절 사람들의 뜻을 좇아 보려 했는데 아직 잘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읽을거리가 마땅찮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거나, 내 능력이 못 미치거나 하는 등의 이유다. 교토에서는 무소 소세키(夢窓 疎石)의 『몽중문답(夢中問答)』을 읽고 사이호지(西芳寺)를 거닐었지만 과문한 탓에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호가유금원기(扈駕遊禁苑記)’를 스마트폰에 담아 창덕궁에 갔는데, 해설사를 따라 정해진 코스를 조금 빠르다 싶게 다녀야 하니 강세황이 감탄했던 후원의 풍취를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베르사유에서도 현장 독서를 시도해보았다. 워낙 당대의 기록이 많아 읽을거리를 고르는 것부터 큰일이었다.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과 정원을 조성하고 이를 통해 절대 왕정 체제를 강화하려 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성의 2층 중심에 위치한 왕의 침실에서 시작해 무한을 향해 뻗어 나가는 중심축과 태양빛처럼 방사선으로 뻗은 알레(allee)는 강력한 왕권을 시각화하고, 정원 곳곳에는 태양왕을 암시하는 도상이 가득하다. 이 복잡하고 방대한 권력의 극장을 이해하는 일은 당시에도 어려웠는지 여러 인물들이 정원을 거니는 법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전제 군주의 행보는 일거수일투족 모두 주시의 대상이 되고, 그(녀) 또한 이를 통치 수단에 활용했다. 그들에게는 정원 산책이라는 여가 활동도 중요한 정치적 활동이었다. 언제 누구와 어느 정원에 가는지가 중요하다. 이 활동의 무대가 되는 정원, 특히 르네상스 및 바로크 시대 정형식 정원의 축을 통한 ‘정치적 풍경’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런데 루이 14세는 이러한 공간 통제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베르사유 정원 산책 경로를 소개하는 안내서를 직접 집필했다. 『Maniere de montrer le jardin de Versailles(베르사유 정원을 보여주는 법)』은 제목은 거창하지만 실제로는 몇장짜리 문서에 가깝다.2 하지만 조원가나 정원을 방문한 이의 기록이 아니라 정원의 주인인 왕이 작성한 정원 안내서로는 (아직까지) 유일무이하고, 한 번도 아니고 여섯 번이나 수정을 거듭할 정도로 루이 14세가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후략) *각주 정리 1. 앤 패디먼, 정영목 역, 『서재 결혼시키기』, 지호, 2001. 2. 후대 사람들이 편집하고 삽화를 덧붙여 만든 책(Manière de montrer les jardins de Versailles par Louis XIV, Art Lys eds, Collectif, 2013) 등은 베르사유 궁의 기념품점이나 프랑스 내 대형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환경과조경397호(2021년 5월호)수록본 일부 황주영은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19세기 후반 도시 공원의 모더니티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파리 라빌레트 국립건축학교에서 박사후 연수를 마쳤다. 미술과 조경의 경계를 넘나들며 문화사적 관점에서 정원과 공원, 도시를 보는 일에 관심이 많으며, 이와 관련된 강의와 집필, 번역을 한다. 그러는 동안 수많은 책을 사거나 빌렸고, 그중 아주 일부를 읽었다.
  • [에디토리얼] 잡지의 얼굴, 표지 탐닉
    봄, 바람이 분다. 모처럼 서울 도심에서 약속이 있다면 한두 시간 먼저 출발해 덕수궁에 들르시길 권한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2021. 2. 4.~5. 30.)는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시와 그림이 탄생했던 근대기의 풍요로운 문화적 토양으로 우리를 이끈다. 시대의 전위를 꿈꾸며 함께 활동한 시인 정지용, 이상, 김기림, 김광균, 소설가 이태준, 박태원, 그리고 화가 구본웅, 김용준, 최재덕, 이중섭, 김환기 등의 교유와 연대를 그들의 글과 그림을 통해 한 호흡으로 감상할 수 있는 전시다. 화가와 시인이 만나 빚어낸 자유로운 화문(畵文)의 세계를, 그들의 지적, 미적 수준의 결정체인 아름다운 책들을 탐닉할 수 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백석의 『사슴』,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같은 시집들의 원본도 영접할 수 있다. 잡지 편집자와 디자이너라면 전시장 곳곳에 펼쳐진 근대기 잡지 표지들의 치명적인 매력에 빠져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당대의 현실과 이상을 고스란히 담은 자화상. 잡지를 편집하는 여러 단계의 과정에서 가장 고민되는 순간은 표지를 결정할 때다. 표지는잡지의 얼굴이다. 잡지 고유의 브랜드 정체성을 표현해야 한다. 해당 호의 콘텐츠를 간결한 이미지와 텍스트로 전달해야 한다. 독자의 상상력을 허용하는 여백의 미도 필요하다. 구매욕을 자극하는 것도 표지의 중요한 역할이다. 표지의 힘을 단적으로 예증하는 잡지로 『뉴요커(The New Yorker)』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1925년부터 계속 간행되고 있는 이 잡지는 사실의 전달보다는 해석과 비평을 중심으로 뉴욕의 문화와 시사 이슈를 다룬다. 설명적이거나 선동적인 문구 한 줄 없이 지적이고 유머 넘치는 일러스트레이션과 제호만으로 표지를 디자인한다. 무려 100년 가까이 지켜온 전통이다. 『뉴요커』 표지만 순서대로 모아도 미국 현대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1982년 7월부터 2021년 3월까지 『환경과조경』의 역사에는 395장의 표지가 쌓였다. 396번째책을 내며 이달에는 그간의 표지를 기록하고 전시하는 특집, ‘표지 탐구’를 마련한다. 오는 8월 출간될 통권 400호를 기념해 『환경과조경』의 발자취를 다각도로 되돌아보는 여러 기획 중 하나다. 2021년의 미감으로 보면 어설프고 촌스러운 표지도 있지만 놀라울 정도로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표지도 있다. 한군데 모은 표지들의 이미지와 텍스트를 훑어보기만 해도 한국 조경이 그려온 지형의 주요 지점을 조감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만난 옛 친구처럼 반가운 표지가 많은 독자라면 모처럼 추억 여행에 나선 기분이 들지도모르겠다. 표지 대부분이 낯선 젊은 독자라면 봉인된 한국 조경사의 타임캡슐을 열어보고 싶은 탐구심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꼼꼼히 살펴보지 않더라도 표지의 제호와 디자인이 몇 차례 크게 바뀐 걸 발견할 수 있는데, 언제, 무엇이, 어떻게, 왜 변했는지 추측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표지 이미지들과 함께 배치하는 해설이 추측의 재미를 안내한다. 길지 않은 해설 텍스트에는 김모아, 윤정훈 편집자와 팽선민 디자이너가 꼽은 주목할 만한 표지와 그 선정 이유가 담겨 있기도 하다. 독자 여러분의 시선을 멈추게 한 표지는 무엇일지 궁금하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표지가 있다면 책장에 무심히 쌓인 과월호를 뽑아 옛 사연을 살짝 들춰보시길. 창간호부터 2013년 12월호까지는 환경과조경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보실 수도 있다. 특집 뒷부분 ‘책등 탐구’에는 396권의 책등 중 몇몇을 모아 배치한다. 도서관 서가 사이를 산책하면서 나란히 꽂힌 과월호 잡지들의 책등을 넉넉한 리듬으로 훑는 것 같은 즐거움이 이번 달 지면에 있기를 기대해 본다. 참, ‘웃프게도’, 출판계의 편집자와 디자이너 중 책등을 책등이라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주로 ‘세네카’라는 전문 용어(?)가 쓰이는데, 얼핏 라틴어 느낌이 나는 이 말은 등, 뒷면, 뒤 등을 뜻하는 일본어 세나카せなか(背中)에서 왔다고 한다. 이번 396번째 표지의 주인공은 세네카들이다. 역대 『환경과조경』의 세네카 변천사를 한눈에 감상해 보시길. 반팔 차림이 어색하지 않을 5월의 특집 지면은 ‘편집자들’(가제)이다. 반가운 이름 김진오, 조수연, 백정희, 손석범, 김정은, 양다빈, 조한결. 추억 속의 OB 편집자들이 출연 예정임을 넌지시 알려드린다.
  • [풍경 감각] 안녕하세요, 감사해요, 잘 있어요, 다시 만나요
    “안녕하세요, 감사해요, 잘 있어요, 다시 만나요.” 이 문장을 읽으며 어떤 멜로디를 떠올렸다면 나와 같은 시기에 유년을 보낸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중학생 때 방과 후 TV를 틀면 만화 채널에서 애니메이션 ‘아따맘마’의 주제가가 흘러나왔다. “아침 해가 뜨면 매일 같은 사람들과또다시 새로운 하루 일을 시작해”로 이어지는 가사를 들으며 매일 같은 사람들을 보는데 하루가 새로울 게 뭐가 있겠냐고 시큰둥해 했다. 매일 보는 사람 중엔 그 애도 있었다. 가무잡잡한 탓에 다른 애들이 외국인 같다고 놀리면 곧잘 웃어넘겼는데, 가끔은 정말 그렇냐고 물었다. 같은 학교와 학원을 다닌 우리는 운동장 구석에서 자주 빈둥대곤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매일 보는 그 애와 보내는 날들이 새로운 하루가 된 건. …(중략)
    • 조현진
  • [『환경과조경』 400호 돌아보기] 언제나 지금만 같길 바라
    필자가 이력서에 쓰는 세부 전공은 ‘동아시아 조경의 역사와 이론’이다. 짧게는 몇백 년, 길게는 천여 년 전 사람들의 생각을 읽고 공간을 상상하는 일을 십수 년 하다 보면, 동시대 조경의 이야기가 딴 세상의 것처럼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분명 조경을 공부하는데 조경과 한참 멀어졌음을 발견할 때,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켜 준 것이 『환경과조경』이었다. 그렇다고 『환경과조경』의 열렬 독자냐.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일부러 열심히 찾아 읽은 적도 있지만, 원하는 것만 보거나 의무감에 보기도 하고, 그냥 지나친 적도 허다했다. 그런데 이런 ‘변덕스러운’ 독자가 비단 나뿐일까. 부침이 있는 독자들을 두고도 한결같이 제자리에서 조경의 주요 이슈를 제공하는 『환경과조경』이 대견하고 고맙다. 21세기 한국 조경, 세계로, 세계로! 이번 ‘『환경과조경』 400호 돌아보기’에서 다룰 순서는 151~200호, 2000년 11월부터 2004년12월까지다. 2000년의 밀레니엄 시대를 지나 21세기로 접어드는 시기로, 조경계에서는 확실히 새로운 변화가 감지되었다. 그리고 이 변화는 151~200호의 『환경과조경』에서도 잘 드러난다. 먼저 외형과 구성부터 살펴보자. 지금까지 몇 차례의 리뉴얼이 있었는데, 151~200호 사이에도 변화의 지점들이 있다. 특히 21세기 들어 처음 출간한 153호(2000년 1월호)에서 형식은 물론 내용까지 큰 변화를 꾀했다. ‘편집자에게 & 편집실에서’라는 코너를 빌어 변화의 주요 지점을 안내하고 있는데, 변화의 목적이 “알차고 내실 있는 정보의 적극적 제공, 우리나라 조경 분야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주된 내용을 몇 가지 꼽아 보면, 첫째, 1985년부터 표지에 사용했던 한글 제호 ‘환경과조경’의 크기를 줄이고 영문 제호 ‘ELA(Environmental & Landscape Architecture of Korea)’를 전면에 내세웠다. 둘째, 표지에 영문 제호를 강조한 것에 이어, 영문 요약 소개 이외에 별도로 한 코너에서 한영문 병기를 시도했다. 셋째, 웹페이지 주소를 변경하면서 업로드 콘텐츠를 확충했다. 21세기를 맞이해 해외 소식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독자의 요구에 맞는 국내 조경 소식을 촘촘하게 전할 수 있는 창구가 되고자 하는 『환경과조경』의 새로운 방향을 읽을 수 있다. 이후 눈에 띄는 또 하나의 큰 변화는 과감한 광고 배치다. 2002년 8월호(172호)부터는 잡지의중간에 상당량 배치했던 각종 광고가 앞뒤로 빠지는 변화를 보였다. 맥락 없이 요란한 디자인의 광고 묶음이 잡지 중간중간 많은 부분을 차지했는데 그 이미지가 너무 강력해서 『환경과조경』의 디자인 콘셉트와 어울리기가 쉽지 않았다. 광고를 정리하니 목차부터 마지막까지 기사 내용에 집중할 수 있어 훨씬 간결하고 깔끔한 잡지로 탈바꿈했다. 섹션 구성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사실 『환경과조경』은 태생부터 조경계의 유일무이한 잡지라는 정체성이 분명했는데 그 바람에 다뤄야 할 내용이 너무 많다는 애로사항이 따랐다. 게다가 조경은 범주 자체도 광범위해서 전문지로서 개성을 드러내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Design+Planning’과 ‘Technology & Practice’, ‘Feature’, ‘Reports’, ‘Reader’s Information’의 섹션 구성에서 2003년 3월호(179호)부터 ‘Technology & Practice’를 덜어내고1 『환경과조경』의 색깔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조경설계의 새로운 지형과 조경이론 형식의 변화는 언제나 내용의 변화를 수반한다. 새롭게 단장한 2001년 1월호(153호)부터 해외 작품과 해외 조경 업체, 해외 대학교, 해외 주요 웹사이트, 해외 잡지의 주요 기사 등에 대한 소개를 보완해 국외 소식과 정보의 비중을 대폭 늘렸다. 물론 이전에도 해외 작품 소개 코너가 없지는 않았다. 당시 3인 체제로 운영되었던 편집부에서 갑자기 늘어난 콘텐츠의 스펙트럼을 어떻게 감당했을까 싶다. 단지 ‘21세기의 출발’이 이 모든 부담스러운 일을 시작하게 하는 명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2000년대 변화의 근원지였던 인터넷 환경이 정보 경쟁력을 부추겼을 것이고, 조경계‘핫’한 해외 소식은 『환경과조경』을 통해 속속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그 가운데 인상적인 기사 하나가 153호에서 발견된다. 현재 『환경과조경』 편집주간으로 있는배정한 교수의 “조경설계의 새로운 지형”으로, 이 글은 향후 같은 필자의 연재 ‘동시대 조경이론과 설계의 지형’과 함께 한국의 조경설계와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중략) *환경과조경396호(2021년 4월호)수록본 일부 박희성은 오랜 시간 동아시아 역사와 이론을 연구하며 한·중·일의 자연미를 꾸준히 탐색했고, 최근에는 근대 동아시아 조경과 역사 도시 경관에 주목하고 있다. 한중 정원과 문인, 자연미의 관계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동아시아 각국 수도 연구’를 수행하고 현재 ‘근대기 서울 주택정원 연구’를 진행중이다. 자연미와 정원에 대한 인문학적 탐구를 넘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제도와 운영, 한국 근현대 도시·조경사 등 조경 연구의 지평을 넓히고자 한다. 연구와 더불어 서울대학교와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 박희성
  • [에디토리얼] 공터에서
    이달에는 오랜만에 본문 기사 한 편을 쓰게 되었다. 올해 8월 통권 400호 출간을 기념해 편집부 에디터들과 편집위원들이 돌아가며 지난 39년간의 『환경과조경』 전권을 리뷰하는 기획물의 세 번째 순서를 떠맡게 된 것. 등 떠밀려 다시 읽은 옛 잡지는 통권 101호부터 150호까지, 1996년 9월호부터 2000년 10월호까지 쉰 권이다. 뽀얗게 먼지 쌓인 잡지에 파묻혀 때아닌 추억과 향수를 곱씹다 데드라인을 한참 넘기고 말았다. 게다가 요즘은 원고지 10매 안팎의 짧은 칼럼에 길들어 있어서 모처럼 50매 넘는 글쓰기 모드로 전환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에디토리얼만 백지로 비어 있고 모든 지면의 최종 교정과 디지털 작업까지 끝난 지금, 심장 쫄깃한 마감의 스릴을 애써 즐기며 다른 꼭지들의 편집과 레이아웃을 한 번 더 간섭하는 호기를 부리고 있다. 김모아 기자와 윤정훈 기자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간다. 이달에는 편집부의 보배 김 기자와 윤 기자가 꽤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찾고 모으고 고른어린이 놀이터 프로젝트 13개를 싣는다. 서울의 초등학교 신상 놀이터부터 저 멀리 터키 이스탄불과 스웨덴 스톡홀름의 어린이공원에 이르기까지, 3월호 지면을 넘기다 보면 틀에 박힌 놀이터 디자인의 전형을 깨는 갖가지 신박한 아이디어를 만날 수 있다. 어린이 놀이터 디자인은 참 쉽지 않은 숙제지만, 결국 핵심은 마음껏 뛰놀게 해주는 바탕 아니겠는가. 지면에 배치된 열세 곳 놀이터를 꼼꼼히 살펴보면서 ‘바람직한 어린이 놀이 환경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거룩한 질문을 던져야 마땅하겠지만, 그만 어릴 적 놀이터의 추억들을 소환하기에 이른다. 김 기자를 빨리 안심시키려면 어쩔 수 없다. 비록 꼰대 소리 듣더라도 이번 에디토리얼은 ‘라떼 이즈 홀스(나 때는 말이야)’로 가는 수밖에. ‘라떼는’ 빈 땅이면 다 놀이터였다. 대도시에도 어디나 널린 게 빈 땅이었다. 김훈의 『공터에서』가 나왔을 때, 소설 내용과 상관없이 가슴이 얼마나 쿵쾅거렸는지 모른다.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단어 ‘공터’를 다시 만난 것이다. 그래, 그땐 그랬지. 공터라고 불렀었다. 도시 여기저기에 방치되고 유기된 ‘지도 바깥의 땅’, 공터는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주택가 곳곳에도, 등하굣길에도 공터들이 있었다. 아이들 키보다 한참 더 높이 자란 잡초더미 공터도 있었고, 돌밭이 드넓게 펼쳐진 공터도 있었다. 누군가는 메뚜기를 잡거나 잠자리채를 휘두르며 오후를 보냈고, 누군가는 땅거미 내려앉을 때까지 고무줄놀이, 비석 치기, ‘오징어가이상’을 하고 놀았다. 모험을 즐기는 아이들은 화약놀이나 불장난을 즐겼지만, 나에게 공터는 야구장이었다. 다른 스포츠 경기장과 구별되는 야구장의 매력은 규격이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베이스 간 거리,홈에서 투수판까지의 거리, 타석의 크기를 비롯한 내야의 여러 규격은 격자형 도시의 블록 크기처럼 일정하지만, 외야의 넓이, 펜스 높이와 재질, 파울 지역의 크기는 야생의 자연처럼 제멋대로다. 『볼파크(Ballpark)』(2019)의 저자 폴 골드버거(Paul Goldberger)는 야구장이란 “도시(내야)와 자연(외야)이 만나는 변증법적 공간”이라고 잔뜩 힘준 정의를 내리기도 한다. ‘라떼의’ 놀이터 공터야말로 도시와 자연이 제대로 뒤엉킨 매력적인 야구장이었다. 돌과 자갈이 널린 내야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바운드로 우리를 즐겁게 했고, 잡초더미 외야로 타구를 보내기만 하면 무조건 홈런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서울 서북부 변두리 주택가에서 강 건너 잠실의 아파트 단지로 순간 이주한 아이는 공터계의 신세계를 만난다. 아파트 단지에는 정성껏 만든 놀이터와 단정한 놀이 기구가 있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아파트 놀이터란 태생적으로 인기 없는 공간이다. 그러나 1970년대 중후반의 아파트 주차장은 언제나 텅 비어 있지 않았던가. 훨씬 넓으면서도 평평하고 반듯해 놀기 좋은 공터, 주차장은 아이들의 새로운 천국이었다. 주차 라인을 요모조모 활용하면 공터가 다목적 다기능 놀이터로 변신했다. 돌밭과 잡초더미 공터보다 주차장 공터는 다방구를 하기에도, 얼음땡을 하는 데도 편리했다. 야구는 두말할 나위 없다. 아스팔트 바닥이라 슬라이딩 캐치는 어려웠지만, 불규칙 바운드를 두려워하지 않고 내야 땅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주차 라인을 잘만 이용하고 분필로 금을 조금만 더 그으면 ‘파울’이냐 ‘인’이냐를 두고 패싸움을 벌이지 않아도 됐다. 향수, 노스탤지어란 모름지기 너무 깊이 빠져들지만 않는다면 효용이 있는 법이다. 재미있고신나는 이번 호 지면의 놀이터 작품들을 즐겁게 보다가 급기야 ‘라떼의’ 공터 향수에 빠져 의식의 흐름대로 허우적거리다 보니 텅 빈 지면이 이럭저럭 찼다. 이제 김모아 기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차례다. 김 기자, 빨리 앉히고 한 번만 교정 봐서 바로 인쇄 넘깁시다! 이번 호부터 격월로 새 연재 ‘사람과 사람을 잇는 사람들’을 싣는다. 놀이터와 커뮤니티 디자인으로 이름난 ‘조경작업소 울’의 조성빈과 김연금이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커뮤니티 만들기에 힘쓰고 있는 이들을 만나 대화하는 인터뷰 꼭지다. 연결은 도시를 변화시키는 힘이다. 도시와 사람, 사람과 도시의 새 연결고리를 발견하는 지면,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