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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MF와 우리 환경문화의 복원
    보아오던 우리의 도시와 농촌의 터전임에도 요즘은 유난히 황량하다. 정 붙일 곳 없이 낯설다. IMF 사태는 경제에서 비롯되었지만 앞으로 사회·문화문제로 비화될 것이다. 소외와 갈등, 공동체의식의 붕괴, 이것이 더욱 두렵다. 이러한 현상이 환경쪽에서는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 먼저 IMF 사태로 인해 우리 환경에 당장 닥칠 부정적 영향으로는 공공부문의 환경·녹지 예산절감과 기간사업 축소에 따른 환경관련예산의 감소를 들 수 있다. 가장 만만한 삭감대상이 환경과 공원·녹지관련 예산이다. 문제는 이 예산삭감에 시집행부 보다도 시민들의 대표기관인 시의회가 주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지자제 시대 이들 시민대표들의 환경인식을 제고시키는 것이 앞으로의 중요과제로 대두된다. 시행정부 입장에서도 기업활동촉진 미명하에 오염유발행위 감시활동의 소홀이나 난개발에 대한 통제가 완화될 가능성이 크다. 긍정적 측면으로는, 당분간의 가계소비 감소와 생산활동 위축으로 환경부담의 총량적 감소가 예상된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 현상일 것이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식의 경제우선정책으로 국토 환경은 전반적으로 타격받을 가능성이 현저해지고 있다. ※ 키워드: 문화, 복원 ※ 페이지 : 90 - 93
  • 실핏줄처럼 살아움직이던 골목길이 그리운 곳
    서울시 종로구 익선동, 그중에서도 지금은 세운상가가 서있는 곳인 나의 고향은 놀라울 정도로 변한게 없다. 신흥 강남지역이나 다른 개발지역과는 달리 이곳 종로 주변은 의외로 옛스러움이 많이 남아 있으며 특히 세운상가 주변은 나 자신 또한 믿어지지 않을 만큼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최희준 의원의 고향이야기를 들어본다 ※ 키워드: 고향 ※ 페이지 : 104 - 105
  • 합성수지포장기술
    합성수지 포장은 투명한 합성수지 바인더(접착제)와 인공 또는 천연골재를 일정비율로 혼합하여 일반적으로 콘크리트 표면에 5~12㎜두께로 마감포장(손미장)하는 포장재로서 주변환경에 적합한 재질, 패턴, 색상, 회화성 등을 고려한 디자인 시공이 가능하다. 기존 면개념의 포 장패턴에 색상과 선개념을 복합시킨 포장패턴으로 적용할 수 있어 설계자의 의도를 만족시켜 주는 포장재이다. 칼라세라믹포장, 자연콩자갈포장, 칼라멘트포장, 색동포장 등이 있으며 조경, 토목, 인테리어 바닥재로 널리 적용되고 있다. 일부 하자문제로 인해 부정적인 견해도 있으나 설계, 시공, 유지관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널리 이용될 수 있는 선진형 조경 바닥재이다. 합성수지포장은 특히 수분에 매우 민감하여 습기가 있는 상태에서 시공할 경우 수지 포장체와 콘크리트면과의 접착이 안되며, 또 시공후 수지가 경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습기가 접촉되면 백화현상이 발생된다. 따라서 수지의 특성(경화시간, 점도, 결합구조)을 반드시 숙지하고 온도, 기후에 따라 시공속도 및 공정을 맞추지 않으면 곧바로 하자와 연결될 수 있다. ※ 키워드: 합성수지, 신기술, 포장 ※ 페이지 : 54-55
  • 남겨져야 할 안동(安東), 국제화로 탈바꿈한 구미(龜尾)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북도 북부지역은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남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의 상류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통이 발달할 수 없었고 외부와의 교류가 활발치 못하자 자연히 보수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 또한 낙동강 7백리의 수자원을 보호하느라 공업화를 이루지 못한 농업 위주의 산업기반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곤란을 겪게 되었으며 전통 유교문화에 가치관을 둔 이 지역 주민들의 자긍심 마저 흔들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민족사를 주도하며 국난극복에 앞장서온 충절의 고장이고, 산재되어 있는 문화재의 보유고는 우리나라의 어느 도시보다도 높다. 아울러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중심도시로서 일반적 정서는 선비정신을 이어받아 예와 의를 중시하고 있다. 이렇게 명산들의 산세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백두대간을 밟다지치면 내려와 쉬는 곳이 이곳이고 경치가 좋은 물가에 볼거리가 남아있으니 전통 문화를 이야기하다보면 자연스레 이곳 안동지방을 찾게 된다. 그 중에서도 안동의 문화적 토대와 전통속에 민속문화의 전형으로 소문이 난 하회마을이 있다. 절묘한 지리적 형상과 아름다움마저 간직하고 있어 여행길에 가장 먼저 거치거나 마지막에라도 꼭 들러야 할 곳으로 굳어지게 되어버렸다. ※ 키워드: 안동, 구미, 공원탐방, 경상북도 ※ 페이지 : 72-75
  • 가야 할 길과 가보지 못한 길
    지난 호에서 나는 우리 조경분야가 한국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시기의 단편들 중 극히 일부분과 내가 그 길을 찾기까지의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털어놓았다. 별로 내세울 이야기도 아닐 진데 말이다. 그런데 나는 처음부터 조경이란 이 길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앞에 인용한 시처럼 한 시인이 문득 아름다운 두 갈래 길에서 그 어느 길을 택할까 망설이듯,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것이냐 저것이냐, 이리로 갈까 저 길을 택할까 선택의 기로에 설 때가 많을 것이다. 평범하고 쉬운, 그러면서도 가슴을 절절히 울리는 이 한편의 [가보지 못한 길]처럼 여전히 가보고 싶은 길이 있다. 그렇지만 또 프로스트가 눈 내리는 숲에서 그 숲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을 노래했듯이(註; 로버트프로스트, [눈 내리는 밤 숲가에 서서]) 나의 길을 확신에 차서 걸어야 했고, 걸어야만 한다. 나는 원래 시를 쓰고 싶었다. 순수 예술에 몸담기를 갈망했었고 아버님의 지기(知己)이신 고 박목월 선생께서도 내가 그 길에 전념할 수 있게 고등학교 시절부터 많은 도움을 주셨다. 그런데 내가 엉뚱한 농과대학으로의 진학을 택했을 때, 모든 사람의 반대속에서 오히려 목월 선생께서 아버님을 설득하여 승낙을 받아주셨다. 그리고 잡지사 기자가 되고자 했을때는 또 가장 심하게 반대하셨다. 순진한 대구, 수원 촌놈이 갑자기 변하면 그 때까지 일관되게 쓰던 글들이 이상해진다(?)고 하시면서 때묻지 않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나는 선생께 흔히 말하는 그런 기자는 되지 않겠다, 순수함을 잃지 않겠다를 몇 번이고 약속드려야 했다. 그러나 대학에 갈 때부터 이미 글쓰기 보다는 조경분야에 마음이 있었고, 그렇다고 커리큘럼도 없는 곳에서 대학 4년을 보내는 동안 나의 방황과 갈등은 그야말로 끝이 없는 듯 했다. ※ 키워드 : 조경가, 조경설계, 서안, 설계작품, 설계철학 ※ 페이지 : 30-35
  • 뜰을 가꾸며
    허리를 졸라매고 열심히 노력하여 조그만 앞뜰이 있는 집을 장만하게 되었고, 그 후 여러 번 후원을 만들기 위하여 조금씩 조금씩 터를 사서 지금은 분에 넘치게 2백여평이 넘는 터를 지니게 되었다. 도시의 골목을 지나다가 집이 훌륭한 것은 부럽지 않았는데 정원이 잘 가꾸어진 집은 참으로 멋이 있어 보였다. 염체불구하고 담 너머로 멍하니 서서 보거나 대문앞을 얼씬거리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 보았으니 누가 보았더라면 영락없이 낮털이 도둑으로 의심받을 만도 하였다. 앞뒤 뜰에 잔디도 심고 맷돌을 구하여 징검다리 길도 내었다. 대문에서 현관까지 길을 내는데 유년시절 고향 숲길처럼 곡선이 있는 에스자 형식을 취하였다. 대청댐을 막을 때 남한강에서 채취한 한 트럭 분의 정원석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였고 연자방아·문관석·동자석·석등·물확도 구해서 구색을 갖추었다. 통일신라 시대의 5층석탑이며 쌍사자 석등까지 진열하기에 이르렀다. 정원문화는 일본이 세계에서 으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주 작은 공간에 자연을 아기자기하게 잘 배치하고 꾸미는데 솜씨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의 정원문화는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전파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서양은 인간중심에서 자연이 객관적 입장을 보여주지만 동양은 자연중심적 성격에서 인간이 주관적 입장을 보여준다. 서양은 자연이 정복의 대상이지만 동양은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자연에 순응하는 일체감을 보여준다. 서구인들이 자연을 분석, 해부하려 하였고 동양인들은 자연과 인간이 혼연일체가 되어 자신의 내부에서 창조된 새로운 자연, 즉 초자연의 세계, 절대정신의 세계에 도달하려고 했다. ※ 키워드: 경관, 정원, 뜰, 정원문화 ※ 페이지 : 76-77
  • 백제 문화유적 형태
    개방화, 세계화 조류를 타고 과거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분열 대립했던 냉전시대도 종식되어지고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 경향이 농후해지고 있는 20세기 말, 세계사와 우리 나라 역사의 재해석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미력하나마 지금까지 세계사 속에서 빠진 고리(missing link)라고 보았던 아메리카 인디언 역사와 히브리 역사에 대해 이미 발표한 바 있지만, 본고에서는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간과되었거나, 빠진 고리라고 본 백제인들의 사적에 대해 논해 보고자 한다. 백제 기원 항주대학 한국학연구소가 1995년 간행한「한반도와 중국 소수민족의 문화관계 비교」에서 원리(苑利)선생은“한민족(韓民族)은 구이(九夷) 중 백이족(白夷族)이고 그 일족은 중국 동남 연해안인 강소, 절강, 안휘 일대에 살던 예맥(濊貊)이 3천여년 전에 옮겨간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지금도 중국 남쪽 5개성을 중심으로 2백 70만명이 살고 있다한다. BC221~206년 전후 중국대륙에서 진(秦)나라가 망하면서 그 유민들인 남맥(南貊)들이 한반도에 건너가 마한의 보호 아래 신라 등 삼국을 열었다. 남맥은 뒷날 오월족(吳越族)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일파가 운귀(雲貴) 고원으로 옮겨가 백족(白族)이 되었다. 이 민족은 중국에서 백월민(白越民) 또는 월족(越族)이라 부르는 민족이다. 한반도에서 수도작이 시작된 것은 3천5백여년 전으로 중국 중남부 예맥의 이동 시기와 거의 같으며 지석묘 반월형 돌낫, 돌도끼 등과 관련이 있다. 한국의 ‘논’도 백월 문화권에서 나라 부르는 것과 유사하다. 발효음식, 보신탕 풍습, 순대풍습, 사랑방 풍습, 다락방 풍습, 쓰개 풍습, 문신, 성석 신앙, 알바위 신앙, 웅장 풍습 등이 모두 백월 문화의 영향이다. ※ 키워드: 역사, 백제문화, 조경사, 백제유적 ※ 페이지 : 48-53
  • 가슴 찌릿한 어린날의 추억, 감익는 마을
    고향은 누구에게나 ‘가슴찡한’ 곳이다. 더욱이 이른 나이에 고향을 떠나살게 된 사람에게는 한없는 그리움의 대상일 수 있는 것이 바로 어릴적에 살던 고향 마을이다. 내 고향은 감으로 유명한 충청북도 영동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시인 박두진 선생의 수필‘영동을 지나며’로 일찌감치 유명해졌다. 선생의 수필이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덕분에 영동은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고장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지금도 머리속에 남아있는 것은, 경부선 열차를 타고 가다가 본 영동의 맑은 풍경을 한폭의 수채화처럼 펼쳐놓은 장면이다. 게다가 선생은 열차에서 잠시 내려 발을 담그고 싶을만큼 물이 맑은 고장이라고 영동을 극찬했었다. 나는 그 때문에 국어 교과서를 읽고 또 읽으며 얼마나 고향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는지 모른다. 여기에는 또 그만한 사연이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때 가정사정으로 영동을 떠나 경기도 안성땅으로 이사를 한 탓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남들보다는 훨씬 각별하였던 것이다. ※ 키워드: 동화작가, 고향, 윤수천, 영동 ※ 페이지 : 78-79
  • 아름다운 정원무대 이대로 무너지나 _ 30년간 가꿔온 금곡미술관, 아파트 개발로 매몰위기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에 위치한 아름다운 정원‘금곡미술관.’아파트개발문제로 헐리게 될 것이라는 공고를 받기 전까지, 아니 더이상 이런 곳의 존재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 나라의 원망스러운 현실을 깨닫기 전까지 적어도 이곳은 지난 30년간 남편과 함께 젊은 날의 꿈을 일구어온 희망의 터전이었다. 1만1천여평의 부지위에 펼쳐진 이 정원의 아름다움은, 전통양식의 건축물을 비롯한 정자와 연못, 그리고 돌물확, 목장승 등 갖가지 민속품들의 전시로 고풍스런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외형적 모습에 한정되지 않는다. 바로 이곳이 연극무대로 활용된다는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보여준 ‘호동왕자’ 공연사진을 놓쳤더라면 아마도 막연한‘정원예찬’의 편협함에 묻혀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 키워드: 정원, 금곡미술관, 호동왕자 ※ 페이지 : 68-69
  • 다양한 분야와 제휴, 탄력운영이 열쇠 ; 일본 (주)도큐설계컨설턴트
    지난 4월 10일 창립 25주년을 맞이한 (주)도큐컨설턴트는 1억엔의 자본금과 2백50여명의 직원을 보유하고 있다. 본사는 도쿄((03)3715-1321)에 위치하고 있으며 오사카에 지점((06)343-5910)을 두고 있다. 업무는 토지이용·사업계획 컨설턴트, 건축 및 토목에 관한 기획·조사·설계 그리고 이들업무에 동반한 부동산 거래를 하고 있다. (주)도큐컨설턴트의 전신은 1963년 7월에 (주)도큐부동산의 첫번째 사업부문인 설계감리부로 발족하여 10년간 활동한후 1973년 4월에 새로 회사를 설립, 분리 독립하기에 이르렀다. 창업이래 30여년간 상업건축, 공공건축, 택지개발, 리조트개발 등 여러 분야에 있어 도큐그룹사는 물론 민간, 관공서, 해외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업들의 폭넓은 사업전개에 도움이 되어 왔다. 도큐그룹의 핵심기업이라 할 수 있는 동경급행전철은 뎅엔(田園)도시회사의 철도부문이 전신으로 뎅엔도시회사에서 분리독립한 메구로가마다(目黑浦田) 전철에서 도큐그룹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그 이후 동경급행전철은 10년간에 걸쳐 교통사업이외에 부대사업으로 백화점 등의 유통사업과 부동산사업에까지 사업폭을 넓혀, 현재의 도큐그룹은 4백개사 10개 법인으로 구성되어 기업그룹으로 성장했다. 또한 교통, 유통,개발, 호텔, 리조트, 정보·문화 등 여러갈래에 걸쳐 있는 사업분야에서는 독자적인 전개를 도모함과 동시에 제휴와 융합을 두텁게 하며 사업을 추진해 왔다. ※ 키워드: 해외설계사, 도큐컨설턴트, 일본설계사무소 ※ 페이지 : 4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