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 문화 콘텐츠로서 정원의 가능성 한국정원디자인학회 창립총회
    조경 분야에서 정원이라는 주제는 그동안 대형 사업에 밀려 외면당해 왔다. 그런데 최근의 정원 열풍으로 조경 분야 내에서 자성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조성주체에 따라 정원의 개념이 다양하게 쓰이면서 유관단체와 기관들 사이에는 용어 논쟁이 일기도 했다. 이에 정원과 관련한 여러 가지 담론이 형성되고 있으며,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전략을 세우기 위해 관련 전문가들은 다각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정원 관련 단체가 여럿 설립되었다. 지난 해 한국정원문화협회(회장 정주현)가 발족한 데 이어정원 문화 활성화와 정원 산업 진흥을 목표로 지난 9월 25일에는 정원문화포럼(회장 송정섭)이 창립총회를 가졌다. 한국조경학회는 올해 정원학연구센터(센터장 조경진)를 설립해 고양국제꽃박람회에서 정원문화 심포지엄을 개최했고, 오는 12월에는 ‘정원학의 새로운 지평’을 주제로 심포지엄을 준비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한국정원학회로 설립해 활동을 이어오다 외연 확대를 위해 개칭한 한국전통조경학회(회장 안계복)는 다시 원래 이름으로 명칭 변경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지난 10월 18일 푸르지오 밸리에서 한국정원디자인학회가 창립총회를 가져 그 설립 배경이 관심을 끈다. 학회 설립 배경 한국정원디자인학회 초대 회장에는 홍광표 교수(동국대학교)가 추대되었다. 이날 홍 교수는 학회의 설립 의의를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했다. 첫째는 융·복합적인 시스템의 구축이다. 정원이 조경 분야의 관심에서 멀어진 동안에도 정원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늘어왔고 이제 보다 다양한 형태로 정원이 소비되고 있는데, 이를 조경의 틀로만 연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홍광표 교수는 “학제 간 연구를 통한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 학회를 설립했다고 밝혔다. 두 번째는 사회적 요구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함이다. 홍 교수는 “사회가 요구하는 정원은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공공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공공디자인의 한 부분으로 기능하고 도시 경관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원에 대한 연구가 공공성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속가능한 정원 문화 정착을 위해 제도적 장치가 필수라는 점을 역설하며, 그 기반으로 정원학회를 설립하게 되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한국정원디자인학회의 비전 한국정원디자인학회가 역점을 기울이는 사업은 한국정원의 국제화 모델 개발과 해외 보급이다. 홍광표 교수는 한국전통조경학회 회장 재임 시기부터 해외에 한국 정원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왔다. 지난해에는 미국 어바인Irvine 시와 협력 체계를 구축해 한국정원 조성을 위한 논의를 진척시킨 바 있으며, 윤후덕국회의원과 함께 ‘한국전통정원 활성화를 위한 토론회’를 개최해 발전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윤후덕 국회의원은 토론회 이후 “한국 전통 정원이 다른 나라와 차별화되는 고유의 아름다움과 표현 방법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 역사·문화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고 전한 바 있다. 이에 이번 한국정원디자인학회 설립을 지지하고 해외 한국 정원 조성 사업에도 힘을 보탤 예정이다. 윤 의원은 “우리 전통 정원이 문화 콘텐츠의 한 분야로 세계에 널리 소개된다면 해외에서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한류와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 대한민국의 국가 브랜드 가치를 제고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강은 ‘도시의 녹지 공간과 정원(부제: 도시 정원의 본연의 모습과 미래상)’을 주제로 코시미즈 하지메 교수(메이지대학교)가 발표하고, 황지해 정원작가와 신현돈 대표(서안알앤디 디자인)가 해외에서 진행한 정원 작업의 과정과 성과를 소개했다. 황지해 작가는 첼시플라워쇼를 비롯해 국외 유수의 정원 박람회 참가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소개했으며, 신현돈 대표는 ‘한국 전통 정원’을 주제로 해외에 조성한 공원 사례를 통해 제한 사항과 노하우를 공유했다. 특히 발표 내용 중 ‘황지해 작가의 첼시플라워쇼 금메달 수상’의 해외 온라인 노출량을 비교한 결과는 흥미로웠다. 황 작가의 관련 뉴스는 박찬욱 감독의 칸 영화제 수상 소식과 비슷한 수준이며, 임권택 감독의 칸 영화제 수상 소식의 3배, 이창동 감독의 베니스영화제 감독상 수상 소식의 4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원의 파급력과 경제적 효과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양질의 한국 정원을 해외에 조성해 국가 이미지를 제고하는 것이 한국정원디자인학회가 꿈꾸는 미래상이다. 새로운 수요 창출을 위한 전략, 한국 정원의 세계화 한편에서는 한국정원디자인학회 설립을 의아해 하는 시선도 있다. 지금도 조경 분야에는 많은 단체가 활동 중이고 중복 가입한 회원이 많기 때문에 역량이 분산되어 사실상 저변 확대와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시선에 대해 조세환 교수(한양대학교 도시대학원)는 “점점 더 복잡화되는 사회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다원화 전략이 필요하다”고 반론하며 한국정원디자인학회 설립을 반겼다. 하나의 구심점을 바탕으로 조경 분야가 더 다원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경계해야할 점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섬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당부했다. 한류 바람은 대중문화를 넘어 제품과 한국의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이어졌다. 한국의 특징을 보여주는 정원을 해외에 조성하는 일은 새로운 수요의 창출 가능성을 제시한다. 뿐만 아니라 정원이 조성되는 국가와 문화 교류의 촉매제로서 정원의 역할을 기대해볼 수 있다. 이는 조경의 외연 확대를 위한 전략이 되기도 한다. 한국정원디자인학회가 그 가능성을 어떻게 열어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 경관의 새로운 지평 4대 학회 연합 국토경관정책심포지엄 ‘국토경관자원의 가치평가와 활용’
    2007년, ‘경관법’이 제정되었다. 과거에는 지자체별로 조례를 만들어 경관 사업을 시행해 왔으나 관련법이 없어 국가적 지원을 받지 못했고 일부 지자체 위주로 경관 계획을 수립해왔다. ‘경관법’ 제정으로 지역 환경과 도시 미관 정비 사업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며, 실제로 이전에 비해 사회적 관심이 늘고 다양한 부문에서 경관 계획이 수립되며 활성화되는 조짐을 보였다. 하지만 관련 전문가가 부족하고 관계 당국조차 경관이라는 용어가 생소해 업무가 비효율적으로 이루어지는 등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국토교통부는 지난 해 제도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경관법’전부개정안을 발표했고, 국가 차원에서 경관을 관리하기 위해 현재 ‘경관정책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이와 함께 각 분야별, 지자체별로 산발적으로 관리되던 경관을 국가 차원의 ‘국토경관’으로 통합 관리해야 한다는 관련 전문가들의 공감대도 형성되고 있다. 지난 9월 26일에는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국토경관자원의 가치평가와 활용’을 주제로 ‘4대 학회 연합 국토경관정책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날 행사는 대한지리학회(회장 손일), 대한국토·도시계획학회(회장 최막중), 한국조경학회(회장 김한배), 한국경관학회(회장 류중석)가 공동으로 주최했으며, 국토교통부, 환경부, 산림청, 한겨레신문사가 후원했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경관을 연구하는 학회와 관계 부처가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였다. 국가 차원의 경관 계획 수립 심포지엄에서 이희정 교수(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공학과)는 지금까지의 ‘경관법’이 “도시 및 인공 환경 조성 위주의 계획에 치중해 왔다”고 지적했다. 이는 ‘경관법’ 제정이전 경관 계획 및 사업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으나 이로 인해 경관 자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이에 경관을 “자연환경과 인문 환경을 담는 그릇”으로 인식할 것과 법체계를 국가 단위로 수립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경관정책기본계획’과 관련해 ‘한국 도시의 경관경쟁력 평가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차주영 연구위원(건축도시공간연구소)은 이 교수의 말처럼 기존 ‘경관법’이 농촌과 자연 경관을 배제한 제도라는 사실에 동의했다. ‘경관법’은 여러 경관 요소를 함께 고려한 제도지만 도시에 보다 무게를 두었던 게 사실이다. “도시는 많은 사람이 살고 그에 따른 문제가 더 많이 산재하기 때문”이다. 개정된 ‘경관법’과 현재 수립 중인 ‘경관정책기본계획’은 도시와 농촌의 경관을 통합적인 시각에서 아우른다. 차주영 연구위원은 “경관정책기본계획은 기존 경관법의 문제를 인식하고 국토경관의 미래상을 설정하는 데서 출발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동안 국토경관에 대한 논의가 없었고 공통된 미래상이 없기 때문에 기본계획을 수립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무엇보다 경관이라는 용어자체가 일반인에게 낯설다는 점이 난제로 꼽힌다. 경관 자원의 데이터베이스화 주신하 교수(서울여자대학교 원예생명조경학과)는 국가 차원에서 경관 자원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주 교수에 따르면 지금까지 경관 계획을 세울 때마다 자원 조사가 이루어져 왔다. 그런데 연구·조사 결과가 자료로 축적되지 않아 계획을세울 때마다 재조사를 진행하는 데 시간을 투입하는 등 연구가 비효율적으로 이루어져 왔는데, 국가경관자원 DB를 구축함으로써 지속가능한 경관 계획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게 주 교수의 설명이다. 더불어 국가에서 관리하는 경관 지도를 만들어 이를 공유하고, 경관 자원을 국가 경관, 도 경관, 시·군 경관 자원으로 구분해 관리할 것과 경관 자원 승급제 등을 도입해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체계를 갖출 것을 제안했다. 류제헌 교수(한국교원대학교 지리교육과)는 경관의 관리와 계획에 있어 가장 존중해야 하는 원리와 목표로 경관의 지속가능성과 다기능성을 제시했다. 이를 위한 방안으로 여러 갈래로 추진하는 경관 정책과 사업을 하나로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유럽의 사례를 들며 경관 특성 지역을 지도화 하는 작업이 전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토경관자원 활용을 위한 과제 경관은 일반적으로 ‘경치’를 뜻하거나 ‘특색 있는 풍경형태를 가진 일정한 지역’을 뜻한다. 사전적으로는 ‘산이나 들, 강, 바다 따위의 자연이나 지역의 풍경’을 뜻한다. 이 정도가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경관의 의미일 것이다. 경관, 자연, 풍경, 환경, 장소가 각기 다른의미를 지니고 범위도 다른데, 일반인은 이 용어를 혼용해서 쓰고 있다. 학계에서도 경관의 의미는 광범위 하게 쓰이고 있는데, 심지어 분야와 연구하는 주체별로 그 의미와 범위가 다르다. 류제헌 교수는 “경관의 의미는 토지나 환경의 의미와 구별되어야 한다”면서 사람들이 공유하는 문화적 자산이기 때문에 자연이나 환경보다 그 범위가 넓다고 주장했다. 경관보다 환경의 범위가 넓은 것으로 보는 이희정 교수와 다른 시각이다. “환경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 경관은 인간 앞에 전개되어 인간에게 지각되는 경치”1라고 구분되기도 하는데, 이희정 교수에 따르면 “경관의 의미, 범위, 대상이 복잡하고 다양해 이해가 어려우며 효율적인 관리가 어렵다.” 학제 간 합의가 필요해 보인다. 이에 대해 조홍섭 논설위원(한겨레신문사)은 “언론에서 경관이라는 용어가 필요한 경우 ‘경치’로 고쳐 사용한다”면서 경관의 개념이 아직까지 대중과 거리가 멀어 경관 계획 방향의 초점이 어디에 맞추어져야 할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간 다양한 방면에서 경관 관리가 이루어져 왔다. 지자체 중심으로 각 지역별 경관 계획이 세워지고 ‘경관법’은 이를 지원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기존 지자체 주도의 경관 계획은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관광 자원으로서 경관의 가치에 초점을 맞춰왔다. 이에 ‘경관법’은 그간 외면해온 도시 경관에만 초점이 맞추어지며 경관 관리의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 ‘국토경관’으로서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기 위해 법을 개정하고, ‘경관정책기본계획’을 수립하는 등 제도적 장치가 정비되고 있다. 자원으로서 경관의 가치도 재조명되고 있는 데, 이를 뒷받침할 학제적 연구가 미진하다. 관계 부처와 관련 학회 간의 긴밀한 협력이 시급하다.
  • 미지의 세계로의 초대 ‘초자연’ 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2015년 1월 18일까지
    우리는 다섯 가지 감각으로 존재를 인식한다. 그중 시각에 가장 많이 의존한다. 보이지 않으면 다른 감각으로 인식되는 것은 ‘착각’으로 여기거나 종종 무시한다. 하지만 보이지 않으면서도 실재實在하는 존재가 있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바람이 대표적이다. 바람이 부는 소리와 살결을 에는 촉감 그리고 나뭇가지의 흔들림과 꽃잎이 날리는 현상을 통해 바람이 있음을 인지한다. 불은 눈에 보이지만 만질 수 없는데, 온도를 느끼고 다른 물체를 태움으로써 실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처럼 공감각적 체험을 통해 하나의 감각으로 인지할 수 없는 존재를 지각할 수도 있다. 초자연주의는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존재를 다른 논리와 방법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초자연’ 전에서는 공감각적 체험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9월 2일부터 2015년 1월 1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정형민) 서울관에서 ‘초자연’ 전이 열린다. 이번 전시는 예술과 과학 기술의 융·복합을 실험하는 국내 작가들을 발굴해 전시의 다양성을 증진하고 발전적인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전시에는 리경, 조이수, 박재영, 김윤철, 백정기 작가가 참여했다. 5인의 작가는 비가시적 세계의 이면에서 자연성을 해체하고,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역이 겹치는 중간 지대인 새로운 초자연적 환경을 다양한 감각을 통해 실재로 느낄 수 있도록 재구축한다. 현장에서 제작·설치한 기계 장치를 5개의 전시 공간에 서로 유기적으로 배치해 초현실적 세계의 실재를 상정하고 그 공간 속에 초자연적 기계 장치들을 삽입했다. 이렇게 장소 특정적으로 제작·설치된 작품들은 통상적인 시지각과 감각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다. 전시는 관람객이 이동하는 동선을 따라 유기적으로 이어지도록 배치되었다. 천막을 들추고 전시 공간에 들어서면 가느다란 붉은 빛줄기와 공간 전체를 아스라이 감싸는 연기가 시선을 몽롱하게 만들어 초자연의 세계로 관람객을 끌어들인다. 빛은 서로 교차하며 수평과 수직의 격자로 분할해 빈 공간을 수놓는다. 붉은 선으로 가른 섬세하고 얇은 벽은 마치 실재하는 듯 감각을 교란한다. ‘더 많은 빛을’, 이 작품은 빛과 연기가 반응하며 일정 시간마다 기다란 통로와 벽을 만들어 내는 데, 연기의 촉감을 통해 빛의 벽을 만지는 듯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전시장 전체를 감싸는 섬세한 사운드가 감각을 극대화시킨다. 붉은 빛의 산책로를 지나면 ‘바람의 정령’을 만날 수 있다. 지하 1층에서 3층까지 아래로 길게 연결된 계단의양옆 벽면에는 사슴머리를 한 16개의 봇bot(대리자)이 방문자를 기다린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적외선센서로 인지해 작동하고 핸드벨 소리를 무작위로 연주한다. 이 사슴과 닮은 동물들은 초자연의 정령으로 비유된다. ‘원령공주’를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사슴머리의 봇이 초자연의 정령이라는 설명에 한층 공감대가 형성될 것 같다.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시시가미(사슴신)가 바로 자연의 대리자를 상징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사슴은 고대부터 중요한 식량 자원이었다.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낼 때 희생 동물이 되기도 했다. 희생 동물은 하늘과 교통하는 힘이 있다고 사람들은 믿었고 때로 사슴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이러한 사슴의 개념은 유라시아 전역에서 나타났고 한반도 설화에도 종종 나타난다.1 ‘원령공주’와 ‘바람의 정령’은 이러한 개념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람의 정령’에서는 초자연적 존재가 기계 장치를 매개로 인간의 감각 영역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사람이 좁고 긴 통로를 지나가는 동안 이에 반응해 빛이 반짝이고 소리가 들린다. 작가는 비유적 수법을 통해 이 공간을 지나는 동안 사람에게 바람이 되는 경험을 하게 한다. ‘아일랜드 프로젝트: 불안한 숨결’. 이 작품이 설치되어 있는 공간은 오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로다. 이곳에 들어서면 기분 나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소곤거리는 소리와 스산한 촉감이 음침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작가는 기술적인 조작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의 불특정한 이야기를 관람객에게 들려주고자 하는데, 텅 빈 공간 속에서 시각적인 장치는 배제한 채 후각과 촉각, 청각만을 자극해 마치 유령이 지나쳐가는 듯한 오싹한 느낌을 안겨준다. 상쾌한 바람이 되어 지나온 후라 대비적 감각이 더욱 극대화된다. 이후 전시는 창고 전시장으로 이어지고 미립자들이 만드는 폭포(‘캐스케이드’)를 지나 마지막 작품인 ‘웨이브 클라우드’에서 의지와 염원이 물리적 현상으로 치환되는 시각적 경험을 할 수 있다. ‘초자연’ 전은 각각의 작품이 주체성을 갖고 있지만 공간 속에서 관계를 맺고 순차적으로 경험하는 또 다른 공감각적 체험을 유도한다. 모든 작품이 초자연적 경험의 총체라 할 수 있다. 다섯 개의 작품이 상호작용하며 전시관을 초자연적 세계로 만든다. 전시장 입구의 천막을 걷는 순간 미지의 존재와 만나는 문이 열린다.
  • 34,000톤의 기적 2014 ASLA Student Awards, Honor Awards
    지난 9월 29일 ‘2014 ASLA Awards’의 심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올해 학생 부문은 전 세계 77개 학교에서 500여 개의 팀이 출품했으며, 이중 학생 부문‘General Design Category’에서 부산대학교 정원광, 엄성현 팀의 ‘34,000tons of Miracles’가 ‘Honor Awards’로 선정되었다. 본지는 참가 팀에게 작품에 대한 소개 글을 전달받아 수록한다. _ 편집자 주 준설선과 바지선 그리고 보세 창고 부산 영도구 내항에 있는 녹슨 준설선과 바지선이 서로 엉켜 붙어 사람의 이동이 가능하다. 마치 미로를 만들어 놓은 것 같다. 배 위 구석구석에서는 주민들이 낚시를 즐긴다. 과거 일거리가 많고 유가가 낮을 때에는 분주하게 움직여 어선 및 무역선과 함께 역동적인 항구의이미지를 담당했다. 하지만 점점 일거리가 줄고 유가가 오르면서 준설선과 바지선들이 장기간 정박하게 되어녹이 슬고 있다. 이와 함께 주변의 보세 창고, 수리, 부품 공장의 건물이 비워지는 등 관련 산업이 함께 무너져 내렸다. 뿐만 아니라 인근 거리에는 각종 고철과 선박 자재들이 방치되어 있다. 이는 부산항의 경관을 어지럽게 만들어 영도 지역의 매력을 반감시키고 있다. 영도구(주거지)와 구도심 사이 그리고 항구 도시 영도구의 토지이용을 보면 크게 전용 공업 지역, 준 공업 지역 그리고 일반 상업 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지역의 대부분이 주거지 역할을 하고 있고, 가장자리 부분은 조선소와 관련 공장들로 이용되고 있어, 오픈스페이스 및 여가 공간이 부족한 실정이다. 주거지는 1980년대의 경관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어 낙후되고 노후한 느낌을 자아낸다. 영도구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롯데백화점과 남포동시내가 있는 구도심이다. 구도심과 주거지를 잇는 영도다리는 부산 영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데, 이곳에 서서 바로 옆을 내려다보면 약 100여 척의 바지선과 준설선을 발견할 수 있다. 대상지는 부산시 영도구에위치하고 있으며, 지정학적으로 도심과 주거지 사이에 있는 요충지라 할 수 있다. 또한 대상지가 있는 부산항은 무역항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바다라는 자연과 항구시설이라는 역동적인 인공물에 의해 매력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부산항은 현재 장기간 정박된 바지선과 준설선으로 인해 경제적, 환경적 문제를 겪고 있다. 대상지를 품고 있는 내항은 파도와 조류가 거의 없는 잔잔한 바다이며, 하루에도 수많은 무역선이 왕래하는 곳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해양 바닥에는 퇴적이 일어나는데, 무역선들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 해로 수심을 8~16m로 유지해야 하며, 매년 약 7만5천 톤의 준설이 필요한 곳이다.
    • 정원광, 엄성현
  • 건설기술진흥법, 조경설계업에 미칠 여파는?
    지난 해 5월 22일 ‘건설기술관리법’이 ‘건설기술진흥법’으로 전부 개정된 이래 추진되어 왔던 하위법령(시행령 및 시행규칙)의 개정 작업이 마무리되어, 올해 5월 23일부터 건설기술진흥법령이 본격적인 시행에 들어갔다(건설기술용역업의 경우, 2015년 5월 22일까지 1년간 경과 조치에 따른 시행 유예). 시행령은 5월 20일 국무회의를 통과했고, 시행규칙은 5월 21일 법제처 심사를 통과했다. 이 법령 개정에 따라 ‘건설기술용역업 및 기술자 체계의 전면적 개편’ 내용이 구체화되었는데, 건설기술용역에 해당하는 조경설계도 이 법령의 영향을 받게 되어 조경설계업에 미칠 여파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현재의 시행령 별표5에 의거하여 건설기술용역(조사, 설계, 감리 등)이 발주될 경우, 조경설계 업체들의 공공부문 수주가 상당 부분 봉쇄될 가능성이 커,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현재 조경 관련 단체들이 해당 부처인 국토교통부(이하 국토부)에 시행령 개선을 공식적으로 요구하고 있으며, 다양한 의견 개진을 통해 국토부로부터 특정 분야에 불합리한 경우가 발생하지 않도록 시행령 변경을 추진할 예정이라는 긍정적 답변을 받은 상태다. 본지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번 건설기술진흥법 논란과 관련된 사항을 정리하여 소개한다. 1. 건설기술진흥법은? 기존의 ‘건설기술관리법’이 개정된 법으로, 크게 3가지 주요 내용을 담고 있다. 첫 번째는 ‘건설기술자 체계 및 교육’과 관련된 것으로, 기존의 자격 중심 기술자 등급 체계가 건설기술자의 종합적인 기술력 평가에 미흡하다는 판단에 따라, 앞으로는 경력·자격·학력 등을 종합하여 점수화한 역량지수에 따라 건설기술자의 등급(초급·중급·고급·특급)을 산정하도록 했다. 교육 부담 완화를 위해 교육 시간을 3주에서 2주로 단축한다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두 번째는 ‘건설기술용역업 분야 및 등록 요건’에 대한 것으로, 건설기술용역업의 전문분야를 종합, 설계·사업관리, 품질검사로 구분하고, 해외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종합엔지니어링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건설기술용역 업무를 포괄적으로 수행하는 ‘종합(설계+건설사업관리(감리 포함)+품질검사)’ 및 ‘일반 설계·사업관리(설계+건설사업관리(감리 포함))’ 업역을 신설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는 종합엔지니어링 수행을 위해서는 설계, 건설사업관리, 감리, 품질검사 등을 개별 법령에 따라 별도로 신고·등록해야만 했다. 아울러 건설기술용역업 진입 요건을 낮춰 업체간 경쟁을 활성화할 수 있도록 등록 요건도 완화했다. 일례로, 현재는 종합감리업에 등록하기 위해 기술자 25명, 자본금 5억 원을 확보해야 하지만, 개정된 법에 따르면 기술자 10명, 자본금 1억 5천만 원만 확보하면 된다. 세 번째는 ‘안전 관련 규제 강화’로, 인명 피해 등이 발생할 경우 영업정기 기간이 강화되고, 안전관련 의무 위반의 경우도 영업정지를 과징금으로 대체할 수 없도록 했다. 시설안전 전문 공기업인 시설안전공단이 공사의 안전관리계획을 검토하도록 하여, 안전관련 심사의 내실화도 꾀했다. 2. 조경설계업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은? 건설기술진흥법(이하 건진법)의 전반적인 법 개정 취지를 살펴보면, 해외 경쟁력은 강화하고, 경제적 규제는 완화(단, 안전 관련 규제는 강화)하는 의도로 기획된 것이어서, 언뜻 보기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기술사회를 비롯해서 관련 단체에서 건진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장외 집회를 개최하였는데, 건설기술용역업이 아니라 건설기술자의 인정 기준 완화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토목, 건축, 기계 분야는 건설기술용역업에 진입할 수 있는 등록 요건이 낮아지고, 관련 기술용역업이 융합·통합형으로 변경되어 경쟁력이 강화되었지만, 토목, 건축, 기계를 제외한 설계분야는 오히려 진입 장벽이 이전과 비할 수 없이 높아졌다. 조경설계업 역시 후자에 해당되어, 공공부문 설계 수주에 큰 장벽이 생겼다. 현재 조경설계업은 엔지니어링산업진흥법(산업통상자원부)과 기술사법(미래창조과학부)에 따라 엔지니어링활동주체와 기술사사무소로서의 자격을 갖춰 공공부문 조경설계 용역을 수주하고 있는데, 건진법은 앞으로 국가, 지방자치단체, 공기업, 준정부기관, 지방공사, 지방공단 등이 건설기술용역사업(조사, 설계, 감리 등)을 발주할 때 건설기술용역업자(진흥법에 따라 지자체 장에게 건설기술용역업 등록을 필한 자)에게 관련 사업을 맡겨 시행하도록 규정해 놓았다. 바로 이 대목이 문제다. 건설기술용역업에 등록을 해야 설계 용역을 수주할 수 있는데, ‘설계 등 용역’ 전문분야에 등록을 하려면 ‘토목·건축 또는 기계분야 특급기술자 1인’을 반드시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조경설계는 해당이 없고, 토목·건축·기계분야에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냐고 여기기 쉽지만, 현재의 법령을 살펴보면 그렇지않다. 국토부 담당 사무관의 답변 역시, 현재의 시행령이 바뀌지 않는다면 앞으로 건축, 토목 설계는 물론이고 조경설계 용역을 하기 위해서는 ‘토목·건축 또는 기계분야 특급기술자 1인’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엔지니어링활동주체로 등록하여 활동하고 있는 조경설계사무소와 조경기술사사무소가 받을 타격은, 업체의 사정에 따라 편차가 있겠지만, 일부의 경우는 존폐를 걱정해야 할 정도인 것이 사실이다. 3. 조경설계업과 관련하여 중차대한 문제로 보이는데, 왜 이렇게 늦게 알려지게 된 것인가? 법 개정에는 여러 단계의 절차가 선행되기 마련이다. 건진법 역시 여러 절차를 거쳐 국회 심의, 의결을 통과했다. 그 절차 중의 하나가 관련 단체 의견 청취인데, 조경 단체도 이 과정에 참여했다. 그런데 당시 “의견없음”이라는 회신을 보냈다. 왜 그랬을까? 한국조경사회 진승범 부회장(법제 담당, 이우환경디자인 대표)에게 자초지종을 확인해 보았다. 국토부에서 관련 단체에게 법 개정 내용의 공람과 의견을 요청한 것은 맞는데, 당시에는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확정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시행령과 시행규칙은 관련 법 개정 및 제정 이후 마련된다) 시행령별표5에 담겨 있던 문제의 조항을 법 개정 시에는 확인할 수 없었다. 또한 조경설계 용역은 건진법의 모태였던 ‘건설기술관리법’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건설기술관리법의 개정에 신경을 덜 쓴 것도 사실이다(개정된 법에 따라 시행령이 마련된 올해 5월 이후 지금까지 확인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조경 단체에서 인지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문제가 되고 있는 건설기술용역업과 관련된 사항은 경과 조치에 따라 2015년 5월 22일까지 시행이 유예된 상황이기 때문에, 지금은 건설기술용역업 조항에 근거하여 설계 용역 발주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아, 법 시행 여파를 체감할 수도 없었다. 4. 그렇다면 어떻게 뒤늦게라도 알려지게 되었나? 지난 10월 14일 차욱진 대표(두인디앤씨)가 조경사회 밴드에 관련 문제를 제기하면서, 조경인들이 이 사안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했다. 차욱진 대표에게 문의한 결과, 토목 분야 지인으로부터 건진법 관련 사항을 전해들은 후, 법 조항과 시행령, 시행규칙 등을 직접 확인했고, 그래도 미심쩍은 생각이 들어 국토부 담당자에게도 전화로 문의한 후, 사태의 심각성이 크다는 판단이 들어 조경 단체 회장단에게 연락을 취했고, 관련 내용의 공유를 위해 조경사회 밴드에도 글을 올렸다. 또한 오랜 고심 끝에, 겸임교수로 강의를 하고 있는 동아대학교 조경학과 학생들에게도 관련 문제의 심각성을 전달했다. 학생들은 물론이고 조경학과 교수들도 이문제를 정확히 인지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조경사회 회원과 조경학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건진법 문제가 조경분야 내에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고,라펜트와 한국조경신문에 관련 기사가 속속 보도되기 시작하면서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커졌다. 관련 단체를 중심으로 한 대책 마련도 이 기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5. 만약 현재의 시행령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그 여파는 어느 정도일까? 당장 조경기사나 조경기술사 자격증이 (최소한 조경설계업과 관련해서는) 무용지물이 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지만, 지금은 차분하고 냉정하게 대비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또한 현 시행령의 개선이 확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체계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변화 없이 그대로 시행령이 유지될 경우의 여파는, 쉽게 예측할 수 없다. 공공부문 발주처에서도, 아직 관련 지침이 내려오지 않아 정확히 어떻게 발주하겠다는 방침을 세우지 못한 상태다. 다만 ‘건설기술용역업’은 국토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것이어서, 만약 시행령이 현 상태대로 유지된다면 국토부와 관련 산하 단체에서 발주되는 공공부문 조경설계 용역은 조경설계 업체에서 수주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조경설계사무소 여건상, 토목·건축 또는 기계 분야 특급 기술자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자체에서 발주하는 공공 설계 용역의 경우는 기존의 관련법을 함께 적용하여 ①엔지니어링활동주체, ②기술사사무소, ③건설기술용역업체가 모두 참여할 수 있도록 발주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국토부에서 건진법을 개정한 이유 중의 하나가 건설기술용역업의 통합에도 있기 때문에 점차 일원화될 가능성이 크다. 안일하게 대처하기보다, 대응 방안 강구에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하는 이유다. 참고로 조경기술사사무소는 기술사 1인만 있으면 기술사법에 의거 기술사사무소를 설립할 수 있다. 2014년10월 20일 현재 조경기술사는 336명(출처: 기술사종합정보시스템)이다. 엔지니어링활동주체는 기계, 선박, 금속, 화학 등 그 기술부문이 다양하다. 조경은 토목구조, 철도, 상하수도, 건축구조 등과 함께 ‘건설부문’에 속한다. 규모에 따라 일정 기준 이상의 기술인력(기술사, 기사 등)을 확보해야 한다. 서비스업에 속하는 일반 조경설계사무소는 별도의 기술 인력 확보 없이, 사업자등록만 내면 활동이 가능하다. 하지만 공공부문 설계 수주를 하기위해서는 최소한 엔지니어링활동주체나 기술사사무소등록을 해야 한다. 건진법은 민간부문 설계 발주와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기 때문에, 조경설계 업체마다 그 여파가 천차만별이다. 민간부문 설계만 하는 업체는 당장에는 거의 영향이 없을 수 있고, 이미 토목이나 건축 특급기술자를 보유하고 있는 종합엔지니어링 업체는 오히려 수주 가능성이 높아질 수도 있다. 하지만 진승범 부회장과 최정민 교수(순천대학교 조경학과)는 한국 조경을 뒷받침하고 있는 조경설계 업체들은 지역을 기반으로 관내 공공부문의 조경설계 용역을 수행하고 있는, 규모가 작은 업체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 여파가 심각한 수준이 될 수 있다는 견해를 공통적으로 밝혔다. 어느 분야든 저변의 중요성은 따로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더구나 건진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건설기술용역업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내년 5월 이후, 건설기술용역 시장이 급변하게 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6. 현재의 시행령이 개선될 가능성은? 국토부 담당 사무관에 따르면, 시행령 개정은 국회 의결 과정이 필요 없기 때문에 법 개정보다는 수월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국토부에서 현 시행령의 문제점을 파악한 후 개정 절차에 나서겠다는 입장이어서, 본격적으로 건설기술용역업이 시행되는 내년 5월 23일 이전에 개선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 진승범 부회장은 “시행령 별표1의 건설기술자의 직문분야에서는 기계, 전기·전자, 토목, 건축, 광업, 도시·교통, 조경, 안전관리, 환경, 건설지원 등으로 상세히 범주화해놓고, 별표5에서는 토목·건축 또는 기계분야 특급기술자가 모든 설계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해놓은 것 자체가 상충되는 사항이며, 각 건설기술 부문의 전문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점 또한 큰 문제”라며, 환경조경발전재단, 한국조경학회 등과 함께 국토부에 현 시행령의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고, 개선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강구할 계획임을 밝혔다. 이번 건진법 문제와 관련하여, 최정민 교수는 “조경가들은 임승빈 교수의 저서 제목처럼 ‘조경이 만드는 도시’를 꿈꾸지만, 실제로는 택지분양부터 설계, 건설공사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법이 만드는 도시’인 것이 현실이라며,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법제도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대학 교수들도 방관만할 것이 아니라, 조경 분야와 학생들의 미래가 걸린중대한 문제이니만큼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진승범 부회장은 “이번 문제에 대한 반응을 보면, 업체마다 조금씩 온도차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누군가에게는 건진법 시행령이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 아닐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건설기술용역업과 무관해 보이는 조경공사업에도 그 여파가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힘과 지혜를 모아나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주변에서 지나치게 문제를 심각하게 판단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는데, 느슨한 판단이 큰 화를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현재 국토부에서 긍정적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문서상으로 개정된 것이 아니기에, 확실히 개선되는 순간까지 가능한 모든 노력을 함께 기울이자”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건설기술진흥법 관련 내용은 이번호 CODA에서도 일부다루었다. 본지 159쪽 참조).
    • 남기준
  • [시네마 스케이프] 원스 진짜의 힘
    노래 잘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넘쳐나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서 더 이상의 실력자는 없겠구나 싶었는데 어디서 그렇게 또 나타나곤 하는지. 열풍이 불던 초반에 비해 일일이 챙겨보지는 못하지만, 화제가 되는 동영상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이 전해진다. 단 몇 분 만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눈물까지 흘리게 만드는 힘은 대체 무엇일까. 최근 개봉해 가을에 어울리는 감성을 전하고 있는 ‘비긴 어게인Begin Again’에서 주인공은 음악을 통해 ‘진정성’을 표현한다고 말한다. ‘진정眞情’의 사전적 의미는 ‘거짓 없이 참’이며, 유네스코에서 정의하는 ‘진정성Authenticity’은 ‘본질 및 기원을 증명할 수 있는 정품, 또는 본래 가진 원형’이다. ‘Authenticity’는 옥스퍼드영어사전에서 ‘진짜임’이라고 설명된다. ‘비긴 어게인’을 보고 나니 감독의 전작인 ‘원스Once’가 떠올랐다. ‘원스’의 두 주인공(글렌 핸사드, 마케타 잉글로바)은 ‘비긴 어게인’의 주인공(키이라 나이틀리, 마크 러팔로)처럼 유명 배우도 아니며, 배경 역시 근사한 뉴욕이 아닌 아일랜드의 더블린이다.영화는 쇼핑몰로 보이는 거리에서 남자가 기타 케이스를 앞에 두고 노래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무심하게 그의 옆을 지나고, 마약에 취한 부랑아가 근처를 서성이다 동전 몇 푼이 전부인 기타 가방을 들고 도망친다. 노래 부르던 그는 필사적으로 부랑아를 쫓아가 근처 공원에서 기어이 붙잡는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남자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절규하듯 노래를 부른다. 일정 거리를 두고 손에 든 카메라로 촬영한 듯 조금씩 흔들리는 이 장면은 마치 관객이 남자 앞에 서서 실제로 노래를 듣고 있는 것 같다. 그의 노래가 끝나자 한 여자가 박수와 함께 10센트를 기타 케이스에 넣는다. 시큰둥해 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음악에 관해 묻는다. 남자와 여자는 그렇게 처음 만난다. ‘가짜’ 이야기지만 ‘진짜’로 느껴지는 인상적인 첫 시퀀스다. 피아노를 살 형편이 되지 않는 여자가 피아노를 연습하는 악기점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함께 노래를 부른다. 여전히 카메라는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으로 흔들리고, 그들의 옆에는 여자가 수리해달라고 끌고 온 진공청소기가 놓여있다. 악기점 주인은 신문을 읽다 옅은 미소를 지을 뿐 과장된 호들갑 따윈 없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여자가 밤에 건전지를 사러다녀오는 장면이다. 남자가 빌려준 시디플레이어로 곡을 들으며 노랫말을 만들던 여자는 어린 딸의 저금통에 들어있던 동전을 챙겨 들고,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치고 슬리퍼를 신은 채 가게로 향한다. 건전지를 끼워 넣고 노랫말을 붙이며 걸어오는 길을 카메라가 따라 걷는다. 인위적인 조명 없이 촬영한 듯 가게 불빛이나 가로등에 의지한 여자의 모습은 컴컴한 곳을 지날 때는 아예 보이지 않기도 한다. 몇 블록의 코너를 돌며 여자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서야 비로소 관객은 여자의 속마음을 알게 된다. 더블린의 어느 허름한 주택가를 함께 걸으며 ‘거짓이 아닌 참’ 사연을 듣게 되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고, 한겨레 영화평론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전공으로 삼아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지만, 극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그것이 주는 감동과 함께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텍스트라 믿고 있다.
  • [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 저항하기
    주민참여 주민참여? 물론 중요하지. 디자이너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항을 반영할 수 있고, 이용자들의 만족도도 높일 수 있고, 더욱 민주적인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점, 모두 동의해. 그런데 주민참여가 설계와 큰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어. 솔직히 말해서 주민참여 설계의 사례들, 좀 촌스럽지 않아? 타일 만들기, 벽화 그리기, 텃밭 가꾸기. 항상 식상한 아이템의 반복이잖아. 만약 주민들의 불만이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 주민참여라면 내가 어제 인터넷 쇼핑몰에 불만섞인 글을 써놓고 환불 요구한 것도 주민참여겠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안을 관철시켜서 길이 남을 작품을 남기는 경우는 들어봤어도, 주민참여를 통해서 걸작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어. 그리고 그토록 신선했던 설계안들이 주민들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그저 그런 작품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수두룩하다고. 그래서 말인데 친구야. 네가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꿈꾼다면 주민참여에는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저항 1 –하이라인 최근 디자인계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공원을 꼽으라면 아마도 많은 이들이 하이라인High Line을 선택할 것이다. 설계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 공원의 디자이너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조경가 제임스 코너James Corner라는 사실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이 공원을 기획하고 만든 당사자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그림1). 맨해튼 웨스트 첼시 지구를 관통하고 있는 고가 철도 하이라인은 1980년을 끝으로 운영되지 않고 방치된 상태로 남아있었다. 뉴욕 시는 이 버려진 고가 철도를 철거할 계획을 발표한다. 어릴 적부터 이 동네에서 자란 청년 로버트Robert Hammond는 우연히 신문에서 철거 계획을 보고 의문을 품는다. ‘이 멋진 구조물을 꼭 철거해야만 할까’ 여러 건축 및 문화재 보호 단체, 그리고 시당국에 문의를 해본 결과 아무도 이 구조물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이라인 철거에 대한 주민들의 의견을 묻는다는 소식을 듣고 로버트는 난생 처음으로 주민 공청회에 참석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이라인의 철거에 의구심을 품은 또 다른 청년 조슈아Joshua David를 만나게 된다. 로버트는 조슈아에게 말을 건다. “저기요, 우리 무언가를 함께 시작하지 않을래요” 하이라인 친구들Friends of the Highline은 이렇게 두 명으로 시작되었다(그림2).1 두 청년은 하이라인을 철거하려는 시당국의 계획에 맞서 여러 가지 활동을 시작한다. 지역 주민들을 설득하고, 대상지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디자인 대안도 제시하고, 법적 대응 절차도 강구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로버트와 조슈아는 사진가 스턴필드Joel Sternfeld와 연락해 대상지의 현황 사진을 찍기 위해 하이라인 구조물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맨해튼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야생의 정원을 목격한다. 그때 그들은 하이라인이 모두를 위한 공원으로 다시 탄생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그림3).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하이라인의 모습을 공개한 사진 전시회는 엄청난 대중들의 호응을 얻고 하이라인은 지역 사회의 가장 뜨거운 화두로 떠오른다. 5년 뒤 하이라인 친구들은 지역 주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는 데 성공한다. 마침내 2004년 새로운 뉴욕 시장 블룸버그Michael Bloomberg와 시당국은 하이라인을 공원으로 만들기로 결정하고, 2009년 하이라인의 첫 구간이 개장한다. 로버트와 조슈아가 하이라인 친구들을 만든 지 정확히 10년만의 일이다. 현재 하이라인 친구들은 뉴욕 공원국과 함께 공원의 운영을 담당하고 있고 향후의 공원 이용 계획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는 하이라인을 제임스 코너의 작품으로 알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코너는 철거될 구조물을 보존하자고 주장한 적도 없고, 이를 공원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하지도 않았다. 주민들을 설득하고 시당국의 결정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도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 하이라인을 공원으로 만들기 위한 모든 기획과 실천은 로버트와 조슈아가 생각하고 발로 뛰어가며 이루어낸 성과다. 그렇다면 하이라인은 누가 만든 것인가? 제임스 코너라는 세계적 디자이너인가, 아니면 두 명의 동네 청년인가? 우리는 좁은 의미에서 코너가 제안한 공간적 구상과 도면들을 설계라고 부른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이라인의 설계는 로버트가 어릴 적부터 보아오던 구조물의 철거 계획에 저항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코너는 하이라인을 공원으로 만들기까지의 많은 과정 중 일부분만을 담당한 협력자일 뿐이다. 로버트와 조슈아는 하이라인의 가장 중요한 의의를 물어보았을 때, 철거될 위기의 근대 유산을 보존했다거나, 지역에 뉴욕을 대표하는 새로운 명소를 만들었다거나, 현대 건축과 조경에 중요한 이정표를 마련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 두 청년은 아무런 지식도, 경험도 없었던 그들이 이러한 프로젝트를 성공시킴으로써 누군가 또 다른 하이라인을 자신의 지역에 만들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는 점이 하이라인의 가장 큰 의의라고 말한다. 저항 2 - 포르타 볼타와 파킹데이 로버트와 조슈아는 하이라인을 통해서 저항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지금보다 더 나은 대안이 있다면 저항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시의 잘못된 결정이 아무런 근거가 없을 수도 있고, 나의 이웃이 그 잘못된 결정을 그대로 따르는 이유는 무관심 때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저항이 하이라인처럼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프로젝트로 발전되는 경우는 매우 예외적이다. 대부분의 경우 저항의 목소리는 대립되는 논리나 무관심 속에 묻혀버린다. 그럴 경우 실천이 중요하다. 설계는 실천적 저항의 가장 중요한 도구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포르타 볼타Porta Volta라는 동네에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공지가 있었다. 어느 날 서커스 단원들이 이곳에서 서커스 연습을 시작했고 동네 아이들에게 공짜 서커스는 인기 있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이 공지는 주민들이 모이는 동네의 명소가 되었다. 얼마 뒤 공지는 한 재단에 팔려 주차장으로 개발되기로 결정된다. 주민들은 그 계획안에 맞서 이 부지를 작은 공원으로 만들 계획을 시에 제출한다. 주민들이 지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인 끝에 시는 개발이 착수되기 전까지 남은 한 달 동안 주민들이 자유롭게 부지를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내어준다. 작은 지역 설계 회사와 함께 주민들은 쉼터, 아이들을 위한 놀이 공간, 텃밭, 정원으로 이루어진 공원을 만들어 나간다. 이 빈터는 화려하진 않지만 주민들이 늘 모여서 담소를 나누고 가꾸어나가는 공공 장소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약속대로 한 달 뒤에 이 공원은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철거된다(그림4, 5).2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하였고 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하였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어바니즘』이 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있다.
  • [조경가의 서재] 책과 헤어지지 않기2 책과 설계와 나
    ‘올곧은 삶’이라는 손 글씨 벌써 가물가물한 일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담 너머옆집에서 자취를 하시던 담임선생님이 실로 오랜만에 내 고향 집을 찾으신 적이 있었지요. 대학 합격을 축하한다면서 불쑥 내민 문고판 크기로 출판된 토마스 불핀치Thomas Bulfinch의 『그리스 로마 신화』 표지 안에는 ‘올곧은 삶’이라는 손 글씨가 적혀 있었습니다. 당시 담임선생님의 연배가 아마도 지금 내 나이쯤이었을 겁니다. 선생님은 굳이 산골 분교만 골라서 다니시던 아동문학가였습니다. 소박한 동화를 쓰겠다는 목표를 초임부터 묵묵히 실천하시던 선생님도 때로는 삶의 궤적이비틀거린다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부끄럼 탓인지 짧은 글귀의 뜻을 여쭙지 못했지요. 벌써 마흔을 넘어 수년이 부질없이 더 흘러갔습니다. 시인 허연은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린다. 때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나와 내 친구들은 이제 죄와 잘 어울린다.”2 그렇군요. 부인할 수 없어요. 적잖이 비열하고 야비해도 별 이상할 게 없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회의하고 탈선하고 타락하려는 삶을 ‘올곧게’ 잡아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이라는 날을 다시 살면서 결코 너의 정신을 그 위엄 있는 말이 흐리게 하는 일이 없도록, 그런 걸 해서 뭐가 되겠는가, 라는 예의 그 말이.”3라는 시인 겸 비평가 폴발레리Paul Valéry의 결연한 다짐처럼. 문사철시서화는 오늘날 설계가의 소양이지만 신영복 선생이 이르기를, 군자는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중략)… 문사철시서화文史哲詩書畵를 두루 익혀야”4했다고 하지요. 무릎을 쳤습니다. 그 대목을 읽고 바로 이 여섯 자가 다름 아닌 우리 설계자들이 평생 익힐 소양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런데 퍼뜩 드는 생각을 조금 다듬어보면, 책을 읽고 쓴다는 것과 설계를 한다는 것은 실은 꽤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적어도 나에겐 아주 멀지요. 문학과 설계가 비슷한 시간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비슷한 결과 물을 내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쉽사리 금방 이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사키 아타루는 자신의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읽을 수가 없는 것을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되풀이 해서 읽는 것이고, 이를 통해 마침내 남의 꿈을 그대로보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접속하게 되면 정면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지요. 결국 책을 읽는 것은 광기의 도박입니다. ‘읽어버리면’ 써야 하고, 고쳐 쓰면 따르지 않을 수 없으니 죽음까지 불사합니다. 성서를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또 고쳐 쓴 문학가이자 혁명가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도 이렇게 말합니다. “나,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5 두렵습니다. 우리는 흔히 자기 방어적 태도를 취하며 책을 그저 ‘정보’의 수준까지만 받아들이고 만다는 겁니다. 문학을 통한 혁명을 외면하지요. 그렇다면 설계는 어떨까요? 허대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받았다. 졸업 후 1999년부터 16년째 조경설계사무소를 다니고 있다. 4년 전부터는 개인 주택 정원, 어린이집과 학교의 외부 공간, 농장 조경계획, 공장 외부환경 개선사업, 아파트 조경 가이드라인 등 하나하나 성격이 다른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공간을 설계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야 나중에 그 공간에서 머무는 사람들도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즐겁게 일하는 조경설계 공동체를 꿈꾸고 있다. 현재 스튜디오테라(STUDIOS terra)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공저로 『철새협동鳥합』이 있고, 제프 마노가 쓴 『빌딩 블로그』를 번역한 바 있다.
  • [그들이 설계하는 법] 방법론에 대하여: 설계에 대한 탐구적 접근
    첫 번째 글에서는 비정통성, 기회주의, 그리고 책임감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통해 나의 설계 방법론이 구체화되기까지의 배경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번 호에서는 실제 설계를 함에 있어서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여느 조경가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설계를 할 때 연구, 분석, 개념, 프로그램 설정, 공간의 구상과 같은 과정을 거치며 다이어그램을 그리고 투시도를 만든다. 특별히 남과 다른 것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남들이 하는 것은 아마 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남과 다른것을 할 수 있을까?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완전히 희한한 새로운 것을 들고 오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것을 보고 똑같은 것을 하더라도 남들과는 다른 방법을 찾아서 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연구 방법론은 가설을 설정하고 연구를 통해 이를 검증한다. 전통적인 설계 과정도 이와 비슷해서 합리적 분석을 통해 초기에 설계의 전제와 방향을 설정하고 이를 이용해 최종적으로 도출되는 논리와 결과를 정당화시킨다. 이와 상반되는 방법이 탐구적인 연구exploratory research다. 어떠한 가설이나 전제를 갖고 특정한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다양한 방향을 연구한 후 여기에서 나타나는 증거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연구의 궁극적인 방향이 발견되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탐구적 연구를 처음 시작하게 된 것은 1996년 하버드 GSD에서 렘 콜하스Rem Koolhaas와 함께 하버드 도시 연구 프로젝트Harvard Project on the City를 수행할때였다. 연구 첫 시간에 모든 연구원이 각자의 연구 주제와 이를 위한 가설thesis을 만들어 왔는데 연구를 총괄한 콜하스가 엉뚱한 주문을 했다. 모든 가설을 버리고 백지에서 시작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가설을 원하지 않는다. 가설을 세우고 이를 증명하는 연구는 이미 답을 알고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장 잘 되어도 처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을 증명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가설과 입증의 전통적인 연구 방식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이와 같은 탐구적인 방법론은 획기적인 것이었는 데,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열린 결과를 추구하는 연구방식이 지금까지 나의 설계 방법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탐구적 접근은 당연히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기대하지 않은 전혀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해준다. 탐구적 방법론에서 연구와 분석은 결과를 정당화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결과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차태욱은 미국 뉴욕에 위치한 수퍼매스 스튜디오(Supermass Studio)의 대표로 미국을 근거로 한 17년간의 국제적 설계 경력을 통해 설계및 프로젝트 운영, 시공에 이르는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하버드 GSD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뉴욕, 매사추세츠, 네바다, 노스캐롤라이나에 공식 등록된 미국 공인 조경가로서 친환경전문자격증(LEED)을 보유하고 있다.
  •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데이비드 브룩스 예술가
    2012년, 타임스퀘어 인근 뮤지컬 극장가에 대형 설치미술이 모습을 나타났다. 고층 건물 사이에 설치된 작품은 마치 땅에 묻힌 단층집처럼 보인다. 미국의 도시 외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조로운 단독 주택의 모습이지만, 땅에 묻혀 있어서 보이는 건 지붕뿐이다. 아스팔트 싱글asphalt shingle이라는 저렴하고 평범한 재료로 만든 지붕은 미국 교외 지역을 대표하는 경관을 이룬다. 그런데 맨해튼 한가운데 출현한 이 지붕은 너무나 이질적이고 독특하다. 게다가 작고 아담한 지붕도 아니고 무척이나 덩치 큰 주택, 소위 말하는 맥맨션McMansion 지붕이다. 맥맨션이란 넓은 대지에 자리한 최상위층의 저택과는 달리, 중산층을 겨냥해 일반적인 넓이의 택지에 면적을 낭비하는 과도한 크기와 천편일률적인 모양으로 찍어낸 듯한 주택을 말한다. 맥도날드처럼 저렴하고, 지나치게 크며, 사회적인 문제가 된 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맥맨션은 주택 시장의 비정상적인 과열을 부추기고 겉모습을 중시하는 얄팍한소비주의를 대표한다. 부동산 시장이 붕괴되면서 가장 먼저 골칫덩이로 대두된 것이 맥맨션이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미국의 자연 경관을 무서운 속도로 좀먹어가는 맥맨션과 스프롤sprawl 현상을 뉴욕 한가운데로 가져왔다. 그는 어린 시절 거의 매년 플로리다남부로 가족 여행을 다녔는데 해마다 습지가 메워져 주택가가 되고 쇼핑몰이 들어서는 모습에 경악했다고 한다. ‘사막 지붕Desert Rooftops(2011~2012)’은 이러한 무분별한 개발의 확산을 예술가의 눈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그는 ‘스프롤’이라는 미국 사회의 복잡다단한 현상을 아스팔트 싱글 지붕으로 압축시켜 표현했다. 우리가 평소에 느끼지 못하던 스프롤의 단면이 지붕이라는 장치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최근작인 ‘갭 이콜로지Gap Ecology’, 일명 ‘리프트와 종려나무의 정물화Still Life with Cherry Picker and Palms(2009~2013)’는 대개 건물의 유리창 청소나 보수작업에 이용되는 이동식 리프트 위에 종려나무 화분을 올려놓은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발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마치 최근에 유행하는 옥상 정원과 그린 빌딩에 대한 냉소적인 일격 같다. ‘보존된 숲Preserved Forest(2010~2011)’은 열대 지방의 무성한 숲 일부를 갤러리로 옮겨와 스프레이 콘크리트로 수목의 잎과 줄기를 모두 덮어버린 작품이다. 아마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개발 지역 도로변 숲이 시멘트 먼지를 뒤집어 써 회색빛으로 박제가 된 모습을 은유한 것 같다. 혹은 수박겉핥기식으로 전개되는 환경 보존 운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외침으로 들리기도 한다. ‘대이동과 구아노의 정물화Still Life with Stampede and Guano(2011)’는 인상적인 과정 중심의 작품이다. 시멘트로 만든 동물상을 플로리다 군도 야생조류센터Florida Keys Wild Bird Center에 넣어두어 갈매기와 펠리컨 등의 갖가지 새똥, 즉 구아노guano가 자연스럽게 표면을 덮어 만드는 패턴을 보여준다. ‘새똥’이라는 핵심적인 자연의 순환 고리를 여과 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한 이 작품은 강렬한 시각적 효과뿐만 아니라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새똥을 맞은 시멘트 동물처럼 우리는 항상 새똥을 맞고 산다.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생태계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다. 한 해에도 여러 가지 전혀 다른 콘셉트의 작품들을 선보이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데이비드 브룩스는 오랜 기간 보전생태학 활동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며 독특한 시각의 토대를 형성했다. 환경의 시대, 우리의 식상한 자연관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데이비드 브룩스의 작업은 조경가로서 눈여겨 볼만하다. Q. 플로리다 남부와 남아메리카를 정기적으로 여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한 현지 조사는 예술적 작업을 위한 기초 연구인가? 보전생태학 활동에 참여하게 된 배경과 그에 대한 당신의 관점은 무엇인가? A. 지난 15년간 많은 시간을 어류학자와 조류학자, 보전생물학자들이 이끄는 현지 조사에 자원봉사자로서 참여해 왔다. 플로리다 남부의 플로리다 군도Florida Keys와 에버글레이드Everglades, 그리고 남아메리카의 아마존 강 유역Amazon Basin, 가이아나 쉴드Guyana Shield, 안데스 산맥 유역Andean river drainages 등을 탐험했다. 학제간 협력에 기반을 둔 보전생물학처럼 나의 작업은 문화적 문제와 자연환경을 연결한 결과물이다. 자연은 언제나 문화라는 틀을 통해 인식되고 이용된다. 보전생물학이란 생물종다양성을 유지하는데 사명을 둔 다학제적 과학이다. 보전생물학자들은 역사와 기반 시설, 미학, 사회적 책임 등을 시대 경관이 공유하는 토대로 보기 때문에 그런 주제들을 혼합한 분석 방법을 종종 사용한다. 나의 작업 또한 보전생태학 처럼 수많은 주제 사이를 오가며 형태적인 도구와 소재의 전통, 대상지의 제약된 환경 등을 얼기설기 엮어나가는 방식을 취한다. 나는 현대의 세계화된 자본주의가 토해낸 심각하고 다급한 상황을 중심 주제로 다룬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 활동하는 보전생물학자들이 현 시대의 가장 전위적 사상가들avant-garde thinkers이며 예술적 담론을 위한 산파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2005, 2007, 2010, 그리고 2012년에 나는 베네수엘라의 브라조 카시퀴아레Brazo Casiquiare, 브라질의 아크리Acre, 에콰도르의 코르디예라 델 콘도Cordillera del Condor, 페루의 마드레 드 디오스Madre de Dios 등지에서 생물학적 조사 작업을 진행하는 과학자들을 도왔다. 그 네 차례의 원정을 통해 새로운 종을 발견하는 큰 결실을 맺었고 우리는 약 40여 종의 보고되지 않은 어류를 수집했다. 그러나 이 무척이나 궁벽한 아마존의 오지에서조차 인간이 미친 영향은 충분히 충격적이 었고 경악스러웠다. 오늘날의 세계화된 경제와 문화적 욕구, 사회적 병리현상, 말세적인 규모의 생태적 재앙은 마치 하나의 복잡한 정신병처럼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느꼈다. 이들은 서로에 대한 적대감과 대결을 부추기면서 엔트로피의 급격한 증가를 가속화한다. 나는 문화를 생산하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엔트로피를 기록·해석하고 그에 대한 해결방안을 나의 분야인 문화적 영역으로 옮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모든 문제의 원인은 어떤 관념적ideological인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전시해 왔다.
    • 최이규 /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