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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천연색으로 핀 문화역 서울284 ‘최정화 -총천연색’, 문화역 서울284에서 10월 19일까지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이 오지 않았나 보다.” 미당 서정주 시인은 꽃 한 송이 피우는 일은 온 우주를 이해하는 일이라고 했다. 꽃 한 송이에도 온 우주가 담겨있다는데 미술가 최정화는 구 서울역 건물 전체를 꽃 피웠다. 고층빌딩과 고가도로, 기차선로 등이 뒤엉켜 복잡한 도심에서 무심한 듯 자리하던 고풍스러운 건물이 총천연색으로 물들었다. 문화역 서울284(구 서울역)는 9월 4일부터 10월 19일까지 ‘최정화-총천연색總天然色’ 전을 선보인다. 최정화의 ‘총천연색’은 꽃을 주제로 세상의 삼라만상을 담아낸전시다. 미술, 디자인, 공예, 설치, 수집, 미디어, 퍼포먼스 등 복합 예술·문화 행사로 구성되어 꽃의 향연을 펼친다. 성과 속, 꽃의 이중성 ‘꽃’을 주제로 한 전시라 자연스레 ‘자연미’나 ‘순결한 아름다움’을 기대한 관람객이라면 최정화의 전시는 ‘충격과 공포’가 될 것이다. 총천연색으로 물든 최정화의 꽃은 묘하게 야하다. 홍등가의 불빛처럼 알록달록한 ‘꽃궁’을 거닐다보면 평범한 빨간 소쿠리도 야해 보일수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런가 하면 촌스러운 구닥다리 잡동사니가 거대한 풍경이 되기도 한다. 1층 입구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는 거대한 탑 ‘꽃의 여가’는 흔히 볼 수 있는 비닐 가방을 조각조각 이어 붙여 매단 것이다. 최정화는 천박함과 성스러움, 깨끗함과 더러움, 진짜와 가짜의 경계와 고정관념을 허문다. 황금색 비닐 풍선으로 만든 왕관(‘꽃의 뜻’)은 한껏 팽창하다가 우리를 조롱하듯 갑자기 허물어진다. 오색의 청소도구들이 아무렇게나 꽂힌 휴지통에는 ‘청소꽃’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붙었다. 방 전체에 건설 폐자재를 쌓아 놓은 폐허같은 방 ‘꽃의 속도-폐허’의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듯 위태롭게 흔들린다. 최정화는 천박함을 부정하지도, 성스러움을 긍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모든 것들을 한데 모아 놓았을 뿐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질적인 사물과 색의 조화는 ‘이것이 우리가 사는 방식이야’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것 같다. 최정화식 유머 마치 우리를 시험하듯 ‘진짜’와 ‘가짜’를 묻는 최정화의 작품은 도발적이기보다는 어딘가 어설퍼 웃음 짓게 한다. 그는 이 엉성함을 ‘치밀하게’ 완성했다고 말한다. 최정화는 1986년과 1987년 미술인에게 ‘엘리트 코스’라 불리는 중앙미술대전에서 장려상과 대상을 타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하지만 그는 곧 회화를 그만두고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에 입사했다. ‘그림으로 사람들을 속이기가 너무 쉬웠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제 그는 회화, 공예, 설치, 수집, 미디어, 퍼포먼스 등 더욱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 ‘치밀한 엉성함’을 선보인다. 그는 자신의 예술에 대해 “날조에 날림을 더하면 완성”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날조에 날림인데다가 엉성한 듯 보이는 그의 작품에는 매력이 있다. 그의 작품은 현대 미술의 경계와 정의에 대해 관객을 가르치려 들거나 시험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나 알 수 있는 익숙하지만 화려한 풍경으로 하여금 관객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해 시각을 매혹시키고 입을 ‘활짝’ 벌려 웃음 짓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최정화식 유머는 대중에 대한 냉소나 예술에 대한 비웃음이 아니라 따뜻한 농담이고 긍정의 웃음이다. 최정화식 유머는 전시 곳곳에서 나타난다. 전시 건물의 2층에서 가장 큰 전시실을 차지하는 작품인 ‘꽃의 만다라’는 관객이 만들어가는 작품이다. ‘총천연색’ 전의 관람료는 플라스틱 병뚜껑이다. 그는 관객들에게 받은 각양각색의 플라스틱 병뚜껑을 모아 만다라를 만들었다. 전시장의 한 쪽 벽면은 거울로 되어 있어 플라스틱 병뚜껑들이 공간을 꽉 채운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쓰레기로 버려지는 병뚜껑도 모아 놓으니 아름다운 꽃이 되었다. 2층 전시관 창문에서 내다볼 수 있는 구 서울역 지붕 위에는 공기 풍선으로 만든 로보트 태권브이가 누워 있다. 고가 도로와 철로, 고층빌딩, 혼잡한 대중교통 등으로 어지러운 도심 풍경 속에서 죽은듯이 누워있던 태권브이가 별안간 벌떡 일어나 요염한 포즈를 취한다. 태권브이 아래에는 “당신도 꽃입니다” 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화려한 꽃무늬의 문구는 몸빼 바지 천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유쾌한 응원이다. 손때 묻은 자개장, 누렇게 바랜 플라스틱 보온병, 촌스러운 액자 등 최정화가 모은 잡동사니에는 어머니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작가는 개막 행사에서 자신의 모든 작업의 원천은 어머니라고 소개하며 어머니 앞에 큰절을 올렸다. 아들의 절을 받으신 어머니는 꽃처럼 수줍으셨다. 우리는 모두 꽃이다. 꽃의 아들딸이다.
    • 조한결
  • [시네마 스케이프]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정원, 인간의 조건에 대하여
    이제는 빛바랜 추억이 된 어린 시절, 어머니는 공들여 정원을 가꾸셨고 아버지와 동생은 집안을 휘젓고 다니던 강아지에게 애정을 듬뿍 쏟았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정원에 제대로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강아지를 안아준 기억도 없다. 아파트로 이사한 후, 어머니는 베란다에서 못다 한 정원의 꿈을 펼치셨지만 나는 여전히 물 줄 생각도 않는 무심한 딸이었다. 조경학과를 꽃을 가꾸는 과로 아시던 어머니는 대학 때 꽃꽂이를 배우게 하셨다. 지나친 자녀 걱정이 취미였던 그녀는 정원에 관심 없던 딸이 학업에 뒤처질까 봐 일종의 과외 공부를 시키셨던 것이다. 하지만 화병에 꽃을 보기 좋게 담아내는 것과 생명이 있는 식물이 잘 자라도록 심고 돌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그 후로도 나는 오랫동안 화분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서 “저런 애가 어떻게 조경한다고 하는지 모르겠네”라는 어머니의 염려를 달고 사는 딸이었다.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유사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 제가 때론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라는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글을 인용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영화는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요 모티브를 가져와 한 남자가 기억을 소환함으로써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두 살 때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폴은 그 충격으로 말을 하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피아노를 치며 두 이모와 살아간다. 우연히 같은 아파트 4층 언저리(4층 약간 안 되는 계단 중간에 출입문이 있음)에 사는 프루스트 부인을 알게 되고, 그녀가 주는 차를 마시면서 과거의 기억을 하나씩 찾아가게 된다. 삶이 매번 아름답지 않은 것처럼 기억은 독약이 되기도 하고 진정제가 되기도 한다. 영화의 원제는 ‘Attila Marcel’로 폴의 아버지 이름이다. 해외 포스터는 아버지의 이름이 크게 적힌 광고를 쳐다보는 장면을 담고 있다. 기억의 퍼즐이 맞춰지면서 무의식적으로 지배하던 아버지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되고, 첫 장면에서 아버지가 하던 대사를 마지막 장면에서 폴이 반복하며 영화가 끝난다. 아버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의 민낯을 들여다보고 인정하는 것이다. 영화는 무의식과 현실을 넘나드는 다소 철학적인 메시지를 무겁게 다루기보다는 환상적인 색감과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 문학적인 대사와 함께 한편의 동화처럼 따뜻하게 그린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고, 한겨레 영화평론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전공으로 삼아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지만, 극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그것이 주는 감동과 함께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텍스트라 믿고 있다.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풍경의 귀환
    #27 산업 자연의 낭만 - 엠셔 지방의 풍경 ‘반지의 제왕’ 삼부작을 만든 피터 잭슨 감독이 후속편으로 연작 ‘호빗’을 만들었다. 영화의 주인공인 호빗족의 빌보배긴스는 키 작은 종족 드베르그들과 함께 모험을 떠난다. 무시무시한 용 스마우그에게 빼앗긴 보물을 찾기 위해 지하 왕국에 잠입한다는 이야기다. 드베르그족이 건설한 지하 왕국의 엄청난 부는 그들이 캐내는 지하자원에서 유래한다. 바그너의 오페라 연작 ‘니벨룽겐의 반지’에서 반지와 라인 강의 보물을 만든 장인 알베리히 역시 몸집은 작지만 힘세며 재주가 뛰어난 종족, ‘니벨룽겐’에 속한다. 백설공주 동화에 등장하는 난쟁이들 역시 광산에서 일했다. 이렇듯 유럽 신화에서 키 작은 종족 혹은 난쟁이들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데에는 사연이 있다. 이들은 인류의 광산자원 이용의 역사를 미화한 것에서 유래한다. 땅을 파고 들어가 어두운 곳에서 살며 금과 은, 구리, 철, 석탄을 캐내어 인류 문명을 번성케 한 무리들. 힘들게 캐낸 시커먼 흙더미와 돌덩어리에서 빛나는 금관을 만들어 왕의 머리를 장식하고, 철을 연마해 무기를 만들어 무사의 손에 쥐여준 장본인들. 이들은 국가 체제를 확립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다만 오랜 지하의 삶으로 어느새 모습이 바뀌고 허리가 굽어 난쟁이가 되었고, 그로 인해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라인 강과도 관련이 깊다. 전설 속에서는 라인 강바닥에 깊이 묻혀있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보물을 만들었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소위 ‘라인 강의 기적’을 일으킨 주역으로서 루르 지방의 도시들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라인강이 모든 공적을 혼자 차지하긴 했지만 사실 라인 강과 라인 강의 지류인 엠셔Emscher 강 사이에 있는 철광과 탄광지대가 독일 경제 부흥의 기반이 되어 주었다. 이 지역이 바로 루르Ruhr 지방이다. 엠셔 강가에서 고기를 잡고 농사를 지어 연명하던 작은 마을들이 산업혁명 이후 시작된 철강 산업과 철도 사업의 붐을 타고 수십 년 사이에 산업 도시로 급성장했다. 뒤스부르크, 에센, 보쿰, 도르트문트 등 널리 알려진 산업 도시들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성장이 빨랐던 만큼 하강세도 빨랐다. 1950년대 말에 시작된 석탄 위기로 탄광들이 하나 둘 폐쇄되기 시작했다. 철강 산업은 1980년대까지 유지되었으나 그 역시 산업 구조의 변화로 사양길을 걷기 시작했다. 철광과 탄광은 1980년대에 거의 폐쇄되었고 철강 산업 역시 해외로 옮겨가면서 수십 개의 산업체가 문을 닫고 환경 잔해로 남게 되었다. 약 백 년간에 걸친 집중적인 산업 이용으로 루르 지방의 자연 경관은 문자 그대로 안팎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대지진이 지나간 자리처럼 모든 것이 달라져 버린 것이다. 한때 농경문화 경관이 지배하던 곳에 하늘을 찌르는 높은 굴뚝의 스카이라인이 들어섰고, 수십 미터 높이의 산업 건축물과 함께 수백 개의 구덩이와 산이 새로 생겼다. 하천은 더 이상 경관을 적시는 생명줄이 아니었다. 오히려 썩은 물을 흘려보내 자연을 병들게 했다. 루르 지방은 이제 총800km2의 면적, 즉 서울, 수원, 안양을 합친 것보다 조금 더 큰 면적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의 죽어가는 경관을 재생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루르 지방에 존재하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도시들이 모이고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정부의 후원을 받아 1989년 4월 1일 엠셔 지방 재생 사업이 발족되었다. 엠셔 지방 재생 사업은 다른 이름으로 ‘세계 건설 박람회 엠셔 파크IBA Emscher Park’라고 불린다. 엠셔 지방 전체가 곧 박람회장이다. 17개의 크고 작은 도시가 참여해 총 120개의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다. 이와 병행하여 기형이 되어 버린 엠셔의 풍경을 서로 연결해 거대한 엠셔 랜드스케이프 파크Emscher Landschaftspark를 조성했다. 엠셔 랜드스케이프 파크는 하나의 공원이 아니라 이십여 개의 지역 공원과 정원을 서로 연결한 공원 네트워크다. 엠셔 재생 사업은 1999년까지 십 년에 걸쳐 재생 사업의 과정과 절차를 세상에 공개하고 많은 토론을 유도해 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중 가장 먼저 완성되었고 널리 알려진 공원이 ‘뒤스부르크-노르트Duisburg-Nord’다. 뒤스부르크-노르트는 피터 라츠Peter Latz라는 조경가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는 말이 있듯 루르 지방의 시급한 과제는 피터 라츠라는 훌륭한 조경가를 낳았다. 그는 지나간 흔적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시간을 두고 상처가 아물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인간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라츠는 마스터플랜을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해 화제가 되었다. 그는 “마스터플랜은 자연이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1 라츠가 한 일은 우선 폐허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이 듣도 보도 못한 괴물의 경관적 잠재력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마치 고고학자가 켜켜이 쌓인 유적을 하나씩 들어내듯 그는 산업 폐허의 성격을 분류해냈고 이름을 붙였다.2 썩은 물이 흐르는 배수로와 하수 처리 시설을 합하니 미래의 수 경관이 보였다. 사내 철도 시설이 레일 공원이 되었으며 각종 산업 도로망과 교량을 연결하니 하염없이 긴 산책로와 자전거길이 되었다. 건물을 그대로 두고 이를 전시장, 공연장으로 명명했다. 이 과정에서 ‘산업 자연’이란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산업 자연은 단순히 산업 시설의 잔재나 지형 변화로 만들어진 환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산업 이용으로 인해 더 심각한 프로세스가 진행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지표면의 화학적 성질이 달라지고 있었다. 그 결과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자연’이 형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실제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동식물이 서식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앞으로도 인류는 자연을 화학적으로 변형시켜 더 많은 산업 자연을 만들어 놓을 것이다. 2009년 뮌헨 공과대학 조경학과에 ‘산업 경관과 조경’이라는 학과가 신설되었다.3 엠셔의 풍경처럼 시간이 만들어 놓은 마스터플랜으로 되돌아올 산업 자연을 맞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일까.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 유치해지기
    유치한 녀석 오늘 작업을 함께 하는 녀석과 크게 싸웠다. 처음 녀석과 같은 조가 되었을 때는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좀 거만한 편이기는 했지만 세련된 감각과 손재주로 설계 시간만큼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던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그 녀석이 내가 열심히 고민한 설계안을 다 듣고 나서 한마디를 던졌다. “유치한 녀석.” 내 설계에 직설적인 디자인 모티브가 많은 것은 인정한다. 고래 분수, 코끼리 놀이터, 꽃무늬 포장.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복잡한 설계 이론은 잘 모른다. 최신 외국 사례를 열심히 들여다본 적도 없다. 하지만 좋은 디자인이라고 해서 꼭 유럽에서 건너온 듯 세련되어야 하고 어려운 개념을 통해서 설명되어야 하는 걸까? 나는 좋은 설계란 여든이 넘으신 우리 할머니도 쉽게 이해하고 즐겁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이 틀린 것일까? 아니면 그 녀석의 비아냥거림처럼 그냥 내 설계 능력이 유치한 수준인 걸까 라스베이거스의 교훈 1968년 가을, 벤츄리Robert Venturi는 학교 스튜디오의 일환으로 학생들과 라스베이거스Las Vegas로 향한다. 이후 수업의 결과는 책으로 출판되어 건축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다. 당시 라스베이거스는 건축적으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도시였다. 학계는 물론이고 건축가들도 모두 라스베이거스를 상업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유치함과 천박함의 표상으로 여겼다. 벤츄리는 가난한 욕망을 위한 잡동사니의 총체인 라스베이거스에서 어떠한 교훈을 찾고 싶었던 것일까? 다음은 벤츄리의 말이다. “하나는 비너스 동상 옆의 에이비스Avis1 상표,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 신전 모양 지붕 아래 있는 쉘Shell 주유소 간판과 잭 베니Jack Benny2 사진, 혹은 수백억짜리 카지노 옆의 주유소. 이들은 내포의 건축Architecture of Inclusion이 선사한 생기를 보여주며, 우아함과 총체적인 디자인에 과도하게 사로잡힌 무기력함과 대비된다(그림1).”3 벤츄리는 라스베이거스를 통해서 당시 건축계를 지배하고 있던 모더니즘 건축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모더니즘 건축의 업적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모더니즘은 19세기 말 대량 생산을 바탕으로 한 기성 자본주의 문화에 기반을 두고 형성되었다. 20세기 중반, 바야흐로 대량 생산의 시대는 가고 대량 소비를 지향하는 후기자본주의가 도래했다. 그런데 여전히 모더니즘은 시대적 흐름과 괴리된 채 50년 전의 주장만을 되풀이한다. 현대 예술의 현주소를 살펴보자. 몬드리안, 칸딘스키로 대표되는 추상과 아방가르드의 시대는 오래전에 막을 내리고 앤디 워홀Andy Warhol, 로이 리헨슈타인Roy Lichtenstein과 같은 작가가 새로운 양식의 예술을 주도하고 있다. 현대 건축의 방향을 제대로 지시하고 있는 대상은 모더니즘의 후예들이 이끌고 있는 엘리트 건축이 아니라 라스베이거스의 잡동사니인 것이다. 그렇다고 벤츄리가 현대 건축이 라스베이거스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교훈은 지침이 될 만한 가르침일 뿐 정답은 아니다. 벤츄리는 ‘추하고 평범한 건축Ugly and Ordinary Architecture’이라는 비평문에서 당대 최고의 모더니스트였던 루돌프Paul Rudolph의 ‘크로포드 매너Crawford Manor’와 자신이 설계한 ‘길드 하우스Guild House’를비교한다.4 그는 크로포드 매너를 영웅적이고 독창적Heroic and Original이라고 추켜세움과 동시에 길드 하우스를 추하고 평범하다고 깎아내린다.5 얼핏 들으면 선배에 대한 살신성인의 각오를 동반한 아부처럼 들리지만 이 칭찬과 비판은 곧 역전된다. 모더니즘 건축은 ‘Less is more’라는 유명한 모토처럼 모든 장식을 건축에서 배제한 기능적인 미학을 추구했다. 20세기 초 모더니스트들은 자신들이 과거의 모든 건축 양식을 파기했고 새로운 건축을 추구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벤츄리는 이것이 대단한 착각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상 그들도 당시 교량이나 구조물에서 나타난 산업시대의 양식을 모방했으며 그들이 모델로 삼은 기능적 구조물에서조차 장식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벤츄리는 구차한 장식 없이 구조적인 완결성을 구현한 듯 보이는 크로포드 매너의 외관이 가식임을 밝힌다. 영웅적인 독창성은 이미지에 불과할 뿐 실제 크로포드 매너에서 사용된 공법과 구조는 고전적이고 평범하다. 결국 크로포드 매너는 스스로 아방가르드 건축처럼 보이기 위한 장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그림2). 반면 길드 하우스는 의도적으로 건축에 장식을 다시 도입한다. 길드 하우스에서는 일상적으로 늘 마주치는 건축적 요소들을 볼 수 있다. 동네 대부분의 건물들처럼 벽돌로 만들어진 길드 하우스는 얼핏 보기에 별다른 특징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이 건물은 그리 평범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일상적인 건축적 요소들이 모두 의도적으로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길드 하우스의 이름이 새겨진 간판은 과도하게 거대하다. 정면의 황금색 안테나는 조각품과 흡사하게 디자인되었다. 창틀 역시 기성 제품처럼 보이지만 보통의 창틀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일반적인 면적 구성의 비율은 파괴된다. 그리고 길드 하우스의 전면부는 르네상스 시기의 고전적 파사드를 그대로 모방한다. 모더니즘에서 금기시 되어오던 과거 양식의 부활인 것이다(그림3). 벤츄리는 크로포드 매너의 겉과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더욱 강력한 결정타를 날린다. 모더니즘 건축은 시대착오적이며 더 나아가 공허하고 지루하다. 유치함을 거부하고자 했던 모더니즘의 양식은 20세기 중반 이후 너무나 과도하게 소비되어 스스로 유치한 상징이자 장식이 되어버렸다. 마치 우스꽝스러운 오리 모양의 집처럼 말이다. 이제는 유치함을 거부하기보다 오히려 제대로 유치해져야 역설적으로 세련되어 보일수 있다. 우리는 상업자본과 대중문화가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쉬운 설계 “지루한 건축이 재미있는가Is boring architecture interesting?” 벤츄리가 던진 이 질문은 대중성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제시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양식을 탄생시킨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반드시 모더니즘 건축의 폐기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굳이 장식을 디자인에 복귀시키지 않아도, 과거의 양식을 재해석 하지 않아도 재미있는 건축은 가능하다. 그 한 가지 방법이 쉬운 설계다. 렘 콜하스Rem Koolhaas는 가장 탄탄한 이론적 기반을 바탕으로 설계를 하는 건축가 중 한 명이지만 가장 대중적인 설계를 하는 건축가이기도 하다. 그의 작업은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자들만이 현대 건축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편견임을 증명한다. 또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설계는 이론적기반이 약하다는 건축가들의 선입견도 철저하게 파괴한다. 다음은 OMA에서 진행한 시애틀 중앙도서관의 설계다(그림4). 지식의 양적 증대와 함께 도시의 인구도 늘어나면서 시애틀 중앙도서관은 이미 여러 차례 증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은 여전히 이용자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기에 역부족이었다. 1998년 시애틀 시는 과거의 도서관을 아예 철거하고 미래의 변화를 유동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새로운 도서관을 설계하고자 했다. 콜하스는 이 도서관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일반적으로 도서관은 서고와 관리실처럼 고정된 공간과 열람실처럼 고정되지 않은 공간으로 구분된다. 모든 도서관의 문제는 책이 늘어나면서 고정된 공간이 고정되지 않은 공간을 잠식하면서 발생한다. 고정되지 않은 공간도 서고처럼 기능에 따라 구분한다면 서로의 영역을 잠식하지 않고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재단된 유동성Tailored Flexibility’6 이것이 콜하스가 제시한 해결책이었다(그림5). 당시 시애틀 도서관의 공간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책을 위한 공간이 32%, 나머지 기능을 위한 공간이 68%의 공간을 차지한다(그림6). 콜하스는 ‘나머지 기능’들이 무엇인지 살펴본 뒤 책과 ‘나머지 기능’의 영역들을 성격에 맞게 결합시킨다. 이렇게 다섯 개의 고정된 공간과 네 개의 고정되지 않은 공간으로 도서관을 재구성할 수 있다.7 그럼 건축적인형태는? 두 가지 공간을 성격이 중복되지 않게 번갈아 배치한다. 그대로 쌓아 올리면 재미가 없으니 프로그램의 블 록들을 밀고 당겨보자. 그러면 어떤 공간은 햇빛도 더 들어오고 어떤 공간에서는 거리 풍경도 잘 보인다. 이제 블록다이어그램에 외피를 씌우면 건축적 형태는 완성된다. 벽돌 쌓기만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설계다(그림7). 콜하스가 이론과 실무를 넘나드는 건축가라면 조경에는 제임스 코너James Corner가 있다. 이론가가 아닌 건축가로서 시작한 콜하스와는 달리 코너의 출발점은 학자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이론과 초기의 설계는 깊이 있고 난해하기로 유명했다. 그런데 최근의 설계 작품을 보면 까다로운 코너 씨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그림8). 유선형의 지형이 만들어내는 조형적 경관을 보면 산타모니카에 위치한 통바 파크Tongva Park의 설계 개념이 무척 궁금해진다.8 코너는 캘리포니아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계곡 지형인 아로요Arroyo에 주목하여 세 가지 설계 개념을 제시한다.9 첫째는 아로요 흐름Arroyo Wash이다. 말 그대로 폭우가 만들어낸 물줄기가 건조한 사막 지대를 지나가면서형성한 유선형의 형태다. 둘째는 아로요 협곡Arroyo Ravine. 물줄기가 집중되면 양쪽에 절벽을 만들면서 흐르는데, 두 번째 안은 절벽의 형태를 디자인에 그대로 도입하였다. 셋째는 아로요 둔덕Arroyo Dune. 물이 흐르며 계곡을 형성하면 자연히 계곡 옆에는 유동적인 모래 언덕이 형성된다. 세 번째 안은 이러한 사구의 형태를 형상화하였다. 세 가지의 개념 중에서 최종적으로 첫 번째 개념인 아로요 흐름이 공원의 설계 개념으로 선택되었다(그림9). 이렇게 듣고 나니 황당할 정도로 간단하다. 거의 유치원 꼬마들을 데리고 미술 시간에 “물줄기 모양을 그려볼까요? 아니면 언덕처럼 그려볼까요”하는 수준이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이 성의 없다고 생각한다면 반문을 해보자. 무엇이 더 필요한가? 이 공원은 주민들이 편안한 반바지 차림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관광객과 어우러져 산책을 하는장소다. 굳이 다양한 사회적 층위의 중첩과 교차, 공간과 시간의 충돌과 혼성이 매개된 까다로운 설계가 필요할까? 누군가 여전히 통바 파크의 설계 방식이 너무 쉽다고 주장할 수는 있어도 이 공원의 디자인이 훌륭하지 않다고 함부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설계 개념, 그리고 설계 방식의 새로움은 그 공간이 좋고 나쁨과는 의외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하였고 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하였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 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어바니즘』이 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다.
  • [조경가의 서재] 책과 헤어지지 않기 1 시집 활용법
    돌이켜보건대 내 독서 생활은 어디까지나 그저 책에서 손을 완전히 떼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투쟁의 연속이었다. 학교 다닐 때부터 모양 좋은 책들을 여럿 사서여기저기 꽂아두고 쌓아두었지만, 간혹 생각난다 싶을 때에만 깨작깨작 들춰보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설계 일을 시작하면서는 ‘바빠서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당당하게 일정 기간 아예 책을 멀리한 적도 많았고, 설령 읽었다고 하더라도 그리 심오하지도 않은 책을 띄엄띄엄 조금씩 아껴가며 훑었을 뿐이다. 그나마도 읽고 난 뒤 메모나 서평을 따로 써둔 적도 없는 터라 세상의 책들과 그리 끈끈한 사이가 아니다. 그런 나에게 ‘조경가의 서재’라는 타이틀은 부담스럽고도 민망하기 짝이 없다. 물론 집에 서재라고 따로 정한방도 없거니와. 그리하여 여러 밤낮을 찌푸린 낯으로 끙끙댔다. 고민끝에 ‘교양인으로서의 삶’을 근근이 이어가기 위해서 읽기 편한 책을 가려내던 나름의 수법과 알량한 독서수준에도 불구하고 이를 야무지게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쓰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기로 했다. 이를테면 보잘것 없이 아주 조금만 읽었지만 줄기차게 많이도 써먹었던 방법, 과문寡聞함을 거뭇한 먹구름으로 가리고 그 사이로 언뜻 드러나는 빛줄기처럼 남다른 감성을 은근히 과시하는 방법이랄까. 설계하는 사람은 책을 언제 어떻게 읽을까? 출퇴근 시간 잠깐 올라 탄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야근 끝에 돌아간 늦은 밤 방구석에서나 짧게 틈을 내어 책장을 펼칠 것이다. 심신이 피곤하면 그마저도 힘들다. 비단 설계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거나 또는 아예 공부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꾸준히 매일 한두 시간씩 시간을 정해놓고 책을 읽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쁘기로는 세상에서 둘째라면 서러워 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어른들이니 말이다(그런데도 가공할 만한 독서량으로 이름 난 ‘로쟈’ 이현우는 서평집 『그래도 책읽기는 계속된다』에서 사람들이 날마다 무려 60~70쪽, 그러니까 한 주 한 권의 책을 꾸준히 독파하는 ‘독서력을 갖춘 사회’를 만들어보자고 이야기한다). 정말 이토록 가련한 형편이라면, 그래서 지속적인 읽기가 수월치 않아서 좀처럼 책 펴기가 힘들다면, 숨을 끊어가면서 읽을 수 있는 시집들을 우선 권해본다. 뭔 소린지 통 모르겠다며 서점의 시집 코너 앞에서 난감한 표정으로 주저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 경우는 이렇다. ‘교양 있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차피 제대로 된 시詩가 아니지’라는 당돌한 자세로 자신감을 상승시키며 눈에 들어오는 시집을 여러 권 집어 든다. 그러고는 방 책상에 올려두거나 가방에 넣어 두고 틈나는 대로 이리저리 훑어본다(화장실 또한 시집 보기에 꽤나 좋은 장소일 터). 앞에서부터 봐도 상관없고 마음에 드는 제목만 골라서 봐도 상관없다. 다만 한 가지! 한 장 한장 넘기다가 마음에 들거나 눈에 쏙 들어오는 부분은 책장 끝부분을 세모꼴로 접어둔다. 나아가 마구 떠오르는 잡생각을 널따란 주변 여백에 재빠르게 끼적거려도 좋겠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면 시집 맨 뒤에 나오는 시평詩評을 본 내용에 앞서 읽어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평론가나 동료 시인들이 해설해 놓은 내용이 전반적인 이해에 도움이 될뿐더러 여기서 인용한 시나 시구만 먼저 찾아보는 것도 알뜰한 독법讀法이다. 우리나라에서 시집을 시리즈로 내는 출판사로는 문학과지성사, 창작과비평사, 세계사, 실천문학사 등이 있다. 내 경우에는 그중에서도 유독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된 시집을 많이 사두었다. 익숙한 시인을 즐겨 찾게 마련이고 내용 또한 비슷한 맥락을 이어가며 구입한 탓이겠지만, 여기에는 시인 겸 소설가 겸 화가인 이제하가 그린 시인 캐리커처가 담긴 담백한 표지 디자인이 한몫 단단히 했을 듯싶다.사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간에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내 돈 주고 시집을 산 이후로 맘에 들어서 기억할 만하거나 능히 써먹을 만한 대목이 있으면 꼭 책장 모서리를 접어두곤 했다. 가깝게는 몇 달 뒤나 멀리는 몇 년 후쯤 그걸 찾아서 읽어 보시라.접어 둔 페이지나 밑줄 그은 시구나 휘갈겨 쓴 메모를 보면서 당시 그렇게 한 이유를 혼자서 추리해보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 허대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받았다. 졸업 후 1999년부터 16년째 조경설계사무소를 다니고 있다. 4년 전부터는 개인 주택 정원, 어린이집과 학교의 외부 공간, 농장 조경계획, 공장 외부환경 개선사업, 아파트 조경 가이드라인 등 하나하나성격이 다른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공간을 설계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야 나중에 그 공간에서 머무는 사람들도 행복할 수 있다는생각으로, 즐겁게 일하는 조경설계 공동체를 꿈꾸고 있다. 현재 스튜디오 테라(STUDIOS terra)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공저로 『철새협동鳥합』이 있고, 제프 마노가 쓴 『빌딩 블로그』를 번역한 바 있다.
  • [그들이 설계하는 법] 비정통적 기회주의자
    얼마 전 중국 베이징 대학교에서 수퍼매스 스튜디오(Supermass Studio)의 작업에 대해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발표 제목을 달라고 해서 사무실을 시작할 때 내세운 세 가지의 방법론 중 두 가지를 뽑아 ‘Unorthodox & Opportunistic’이라고 보내주었다. 헌데 발표장에 가서 공고 포스터를 보니 제목이 ‘비정통적 기회주의자’로 번역되어 있어 당황한 적이 있다. 비정통적인 기회주의자라니! 얼핏 들으면 아주 하류의 질 나쁜 시정잡배처럼 보일 수가 있으니 (이에 대한 설명으로) 내가 설계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비정통적 창의성(Unorthodox Creativity)’, ‘기회주의적 다양성(Opportunistic Diversity)’, ‘사회적·환경적 책임감(Social Environmental Responsibility)’은 수퍼매스 스튜디오를 시작하면서 작업 방법의 근간으로 내세운 세 가지 가치다. 생소한 개념인 것 같지만 이 세 가지 가치에 그동안 내가 학업과 실무를 통해 경험하고 쌓아온 조경에 대한 모든 생각이 담겨 있다. 비정통적 창의성 설계가라면 누구나 창의적인 설계를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설계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창의적인 행위니 모든 설계가들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창의적인 작업을 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설계가에게 창의적인 접근이 당연한 것이라면 그 다음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만 ‘남과 다른’ 창의적 접근을 할 수 있을까? 비정통적 창의성은 이러한 주류 창의성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하였다. 돌이켜보면 새로운 것에 대한 남다른 추구는 1990년대 초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황기원 교수가 가르치던 ‘경관의 해석’ 수업시간에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한 에세이를 쓰는 과제가 있었다. 나는 옴스테드가 설계한 센트럴파크의 성공이후 자연풍경식으로 일관되어온 20세기 현대 조경에 대해 일침을 가했고 “이제는 전혀 다른 가치와 미학을 기준으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현대 조경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라는 나름 거창한 선언을 했다. 더불어 내가 기억하는 1990년대는 사회 전 분야에 걸쳐서 새로운것에 대한 강한 갈망이 있었다. 조경에서는 피터 워커(Peter Walker)를 비롯한 조지 하그리브스(George Hargreaves), 마사 슈왈츠(Martha Schwartz), 마이클 반 발켄버그(Michael Van Valkenburgh) 등의 미국을 위주로 한 일단의 조경가들이 기존의 조경 미학에 반하는 파격적인 개념과 형태를 내세워 조경 설계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었다. 그리고 사회 전반에 걸쳐 실체 자체도 모호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개념을 통해 근대화를 거치며 적체되어 온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이해하려 했다. 1997년에 나온 애플 컴퓨터의 가장 성공적인 광고 캠페인 ‘다르게 생각하자(Think Different)’는 이러한 변화와 혁신에 대한 갈망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었는데 특히 규범과 질서를 따르는 모범생과 착한 학생이 아닌 말썽꾼, 왕따, 반항아, 그러나 세상을 전혀 다른 눈으로 보고자 하였던 선구자들을 기리는 ‘정상이 아닌 이들을 위하여!(Here’s to the Crazy Ones)’ TV 광고는 아직까지도 나의 가슴을 찡하게 한다. 2000년대 중반 제임스 코너와 함께 필드 오퍼레이션스(Field Operations)에서 일하면서 이러한 ‘비정통적’ 또는 ‘비정형적’ 창의성의 추구에 대한 생각이 점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당시의 필드 오퍼레이션스는 일찍이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유형의 공공 공간을 만들고 싶어 했으며, 이제까지 아무도 사용해 보지 않았던 방법을 도입하고 싶어 했다. 이전에 이미 만들어진 것, 했던 것들은 무조건 열외로 밀어냈고 엉뚱한 것, 말이 안 되는 것을 찾아 말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주요 관심사였다. 개념과 프로그램에서 시작해 물리적 공간 형성으로 완성되던 기존의 방법론을 뒤엎고, 공간의 물리적인 틀을 먼저 구성한 뒤 여기에 프로그램을 채워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개념을 도출시키는 방법론이 시도 되었다. 전혀 상관이 없는 여러 가지 패턴들을 대상지 위에 이리 저리 엎어보면서 공간의 구성과 프로그램간의 연계성을 찾으려는 작업들이 이때 시도되었다. 당시 설계공모 당선안과 계획안들을 통해 이름을 얻고 있던 제임스 코너는 실제 실무의 경험이 거의 없었는데 ‘장님 무서운 것 없다’는 말처럼 이러한 무경험이 오히려 당시의 필드 오퍼레이션스의 작업을 더욱 모험적으로 만들었고 기존의 특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분야 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시기에 진행했던 춘천 G5 설계공모 당선안은 이러한 패턴의 적용, 물리적 틀의 형성을 통한 프로그램의 도출 등과 같은 새로운 방법론이 대표적으로 사용되었던 사례다. 2000년대 후반 다국적 건축·엔지니어링 업체인 EDAW/AECOM(지금은 AECOM으로 통합)의 설계 총괄 담당(Design Director)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비정통적 창의성에 대한 개념이 점점 확고해졌다. 조경계의 거대 기업이었던 EDAW는 창의성을 강조하였지만 이는 매우 제도화되고 규범화된 이른바 ‘정통적’인 의미의 창의성이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조경설계사무소이기도 한 EDAW는 몇십여 년간 자신들이 해 오던 방식이 있었다. 이와 같이 틀에 박힌 진부한 설계에서 벗어나 새롭고 창의적인 방법론을 도입하는 것이 설계 총괄로서 내가 맡은 역할이었다. 전 세계에 업무 네트워크가 있고 막대한 자원을 움직일 수 있는 EDAW에는, 매년 세계 각국의 사무실에서 가장 뛰어난 설계 인력들을 한자리에 모아 서로의 방법론을 공유하고 창의적 업무 방향을 논의하는 설계정상회의(Design Summit)라는 행사가 있었다. 여기에 참석하는 이들은 역설적으로 EDAW 내에서 비주류에 속하는 이른바 진보파 설계가들이었다. 어느 해인가 논의의 주제가 ‘변방에 서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커팅 에지(cutting edge)가 될 것’인가 아니면 ‘중심에서 주류 사회를 이끌어 가는 리딩 에지(leading edge)가 될 것’인가에 모아진 적이 있다. 이때 결론이 매우 흥미로웠는데 바다에서 먹이를 찾아 헤엄치는 물고기 떼를 비유해서 ‘끊임없이 변방에서 헤엄치지만 언제나 중심을 향해 움직인다(swarming toward the center but swimming on the edge)'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결론이었는데 궁극적으로 주류를 염두에 두지 않은 비주류의 추구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기회주의적 다양성 1996년 하버드 GSD에서 공부할 때 렘 콜하스와 함께 ‘하버드 도시 연구(Harvard Project on the City)’라는 연구 프로젝트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십여 명의 건축, 도시설계, 조경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모여 1년 동안 특정한 도시 현상을 다각적인 방향에서 연구하는 것이었는데 우리의 연구 주제는 쇼핑이었다. 지금은 유명 건축가들이 너도나도 프라다니 샤넬이니 고급 상업 부티크(boutique)를 설계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저명한 건축가들은 상업 시설을 설계하지 않았다. 미술관, 학교, 공공 건물과 같은 고상한 건물들을 설계하면 이른바 건축가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상가나 백화점을 설계하는 건축가는 쇼핑 건축가라고 하여 저급하게 취급받는 때였다. 그러나 우리는 쇼핑이 이미 우리의 삶에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 있는가에 주목했고 상업 시설의 건축, 조경, 생태, 마케팅, 테크놀로지, 브랜딩 등 쇼핑과 관련지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연구했다. 그 결과는 쇼핑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도시의 중요한 물리적 환경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연구를 바탕으로 콜하스는 상업 건축의 중요한 이정표가 된 뉴욕 소호의 프라다 매장을 처음으로 설계하게 된다. 콜하스와의 쇼핑 연구는 나의 설계관 및 방법론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이것이 오늘 이야기하는 기회주의적 다양성이라는 개념의 밑바탕이 되었다. 내가 쇼핑 연구를 하던 1990년대 중반까지도 건축(조경을 포함해서)에는 옳은 건축과 그렇지 않은 건축에 대한 구분이 있었다. 이는 당시의 건축이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대의를 중요시하지만 생각을 경직시키고 사물을 흑백 논리로 끌고 갈 수 있다. 이데올로기에 근거하게 되면 ‘해야 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이 분명해지는데, 이를테면 상업 논리에 바탕을 둔 쇼핑이 하지 말아야 할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다변화·다가치가 점점 중요해지는 사회에서 과거의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접근법은 명확히 선을 긋기 어려운 애매한 경우가 종종 있다. 기회주의적 접근은 이러한 경우를 마주칠 때 재빨리 기회를 포착하고 그 속에서 공허한 대의 대신 실리를 선택한다. ‘모 아니면 도’라는 강경함 대신 위기와 제약을 기회로 바꾸는 보다 유연한 자세를 취한다. 이를 통해 할 수 있는 것을 하나씩 찾아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해결책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나에게 기회주의적이란 것은 모든 프로젝트가 그 나름의 기회와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믿음이다. 이러한 기회와 가능성이 설계를 통해 어떻게 구현되는지는 전적으로 설계가에게 달려있다. 많은 설계가들이 ‘왜 자신이 하는 프로젝트는 이리도 재미가 없고 진부하고 천편일률적인지’에 대해 회의하는데, 내가 볼 때에 설계를 재미있게 만드는 것도 설계가이고 이를 진부하게 만드는 것도 설계가다. 수퍼매스 스튜디오에서 진행했고 2012년 미국조경가협회 뉴욕 지부에서 계획 분야의 상을 받기도 했던 브라질 농업생태신도시 계획안은 이러한 제약 요건을 재빨리 기회로 전환시킨 대표적인 사례다. 브라질의 주요 농업 개발 지역인 북동부 사바나 지역에 유기농업을 위한 대규모 생태 신도시를 계획하는 작업이었는데 쓸모없는 황무지인줄 알고 시작한 사업 대상지가 최근 십여 년 사이에 아마존 열대우림에 버금가는 종 다양성을 갖는 생태계의 보고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프로젝트는 개발 프로젝트에서 개발을 가장한 생태 보존 프로젝트로 급선회하게 되었다. 대상지 내에 생태적으로 가장 민감한 자연 배수로 지역과 인접한 습지를 먼저 보존 네트워크로 연결하여 보존 지구로 지정한 후 나머지 지역을 농업 지구로 개발함으로써 개발 사업으로는 흔치 않은 선 보존·후 개발이라는 방식을 채택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회주의적 접근은 다양한 유형의 프로젝트를 새로운 눈으로 보도록 하는데, 이는 곧 작업의 다양성과 연결된다. 나는 사무실을 운영하는 데 있어 가능하면 다양한 유형의 프로젝트를 하도록 노력한다. 수퍼매스 스튜디오에서 다루는 프로젝트 유형을 보면 대단위 마스터플랜부터 주거단지 계획, 업무 시설, 전시 시설, 캠퍼스, 공원 계획, 광장, 호텔, 주택 정원, 공동주택, 수변 개발, 설치 예술에 이르기까지 공공, 민간, 상업, 문화, 업무, 주거, 예술 시설 등을 망라한다. 여기에 이전 회사에서 다루었던 프로젝트까지 더하면 식물원, 동물원, 놀이공원, 카지노, 리조트 등 실로 다양한 분야와 성격의 프로젝트를 포함한다. 이렇게 작업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데는 창의적인 욕구에 대한 만족 그 이상의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 회사의 규모가 커지고 보다 조직화 되면 업무 분야를 분화 및 특화시키려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내가 이전에 일했던 AECOM도 마찬가지여서 처음 시작할 때 회사에서는 나에게 전문 업무 분야(practice line)를 선택하여 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공략하기를 원했다. 당시 AECOM은 공공 공간(public realm), 커뮤니티 단지 설계(community design), 호텔 및 리조트(resort hospitality), 캠퍼스 설계(campus design & planning), 생태 설계(ecological design) 등과 같이 업무 분야를 특화하여 이 중 자기가 관심 있고 잘 할 수 있는 한 분야를 선택해 발주처 관리부터 마케팅, 프로젝트 운영, 설계에 이르기까지 선택 분야에 집중하도록 했다. 이러한 시스템은 경기가 좋을 때는 효율성을 발휘하지만 경기가 나빠지면 경기를 타는 특정 분야가 직접적 인 타격을 입게 된다. 실제로 2000년대 후반 미국 경기가 급격한 불황으로 빠져들게 되자 민간 중심의 주거 커뮤니티 개발과 호텔·리조트 개발 사업이 전면적으로 중단되었고 이 분야로 특화되어 있던 담당 소장들은 회사를 떠나야 했다. 특정한 업무 분야로 빠지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설계 총괄 소장으로 회사 내의 다양한 분야의 프로젝트에 관여하고 있던 나는 불황이 시작되자 경기를 심하게 타는 민간 개발 팀을 떠나 공공 개발 팀으로 용이하게 전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뭐든지 다 할 줄 아는 사람은 제대로 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듯이 내세울 수 있는 특화 분야가 있는 것이 클라이언트를 설득하고 프로젝트를 따오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대부분의 클라이언트는 본인들이 필요로 하는 요구 사항이 명확하기 때문에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원하지 다른 것을 이것저것 다 한다고 특별히 더 좋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수퍼매스 스튜디오에서는 이러한 특화 분야를 특정한 프로젝트 유형이 아닌 프로젝트에 특화된 방법론으로 접근한다. 수퍼매스 스튜디오가 특화점을 갖고 있는 분야는 새로운 프로그램의 개발, 친환경 기술의 시각적·경험적 구현, 공간의 조직적·구조적 처리 등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특화된 방법론은 모든 프로젝트 유형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사회적·환경적 책임감 예전 회사에서 일할 당시 우리끼리 하던 농담이 있었다. “신문이나 잡지에 실릴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한다(We’ll do anything for one magazine shot).” 물론 최고의 프로젝트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고 이를 통해 보다 나은 공간을 더 많은 대중에게 제공하고자 했지만 그 이면에는 그 작업이 대중으로부터 인정받고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욕구가 무척이나 강했던 것이다. 친환경성을 가장 중요한 기치로 내세우는 회사에서 일하며 가장 친환경적인 경관을 만들고자 할 때에도 이러한 것들이 결국은 회사의 수익이 맞춰진 후에야 시작된다는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실 대다수의 뛰어난 설계사무소들은 모두 최상의 설계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설계의 질을 조금이라도 더 높이고 이를 통해 조경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이러한 노력이 정당하게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러한 뛰어난 회사들을 거쳐 오면서 나는 아직도 많은 설계가들이 (특히 그들의 설계가 뛰어날수록) 우리가 처한 사회적·환경적 문제의 많은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우리가 설계하는 대부분의 공간은 다수의 일반 대중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 곳곳에는 아직도 이러한 ‘일반 대중’에 속하지 못하는 빈곤층과 소외계층이 존재한다.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를 조금만 벗어나 더 큰 세계로 눈을 돌리면 우리의 빈곤층·소외계층의 생활에도 미치지 못하는 생활을 하며, 최소한의 기본권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 너무도 많이 있다. 친환경적 설계 또한 이제는 거의 기본이 되어버렸지만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지구 온난화로 인한 자연재해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는 지금, 설계가들이 과연 우리가 처한 절박한 환경적 위기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대처하고 있는지 묻는다면 아마도 자신 있게 대답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수퍼매스 스튜디오의 세 번째 가치인 사회적·환경적 책임감은 이러한 자각에서 시작됐다. 때마침 사무실을 시작하던 해인 2011년 가을 뉴욕의 유엔 본부에서 스미스소니언(Smithsonian) 박물관이 기획한 ‘나머지 90%와 함께 하는 디자인(Design with the Other 90%)’이라는 획기적인 전시가 있었다. 지구촌 65억 인구 중 90%에 해당하는 58억의 인구가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기본적인 생필품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며, 그중 절반은 가장 기본적인 요건인 먹을 것과 깨끗한물, 그리고 잠잘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디자인을 통해 이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법들을 찾고자 하는 전시회였다. 이 전시회는 나에게 매우 큰 감명을 주었고 설계가의 보다 실천적인 사회 참여에 대한 적극적 인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수퍼매스 스튜디오는 지난 3년간 직·간접적으로 이와 같은 다양한 사회 문제의 해결에 참여하고 있다. 2011년에는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주제로 뉴욕에서 활동하는 12명의 예술가, 디자이너, 건축가들이 공동으로 기획한 ‘지구촌의 위기와 디자인(Global Crisis & Design)’ 전시회에 참가해 환경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2012년에는 필리핀 태풍 와시의 피해를 입은 이재민 구호를 위한 정착민 마을 조성 기본 계획안을 필리핀 당국에 제안하였으며, 지진으로 황폐된 아이티(Haiti)에 산림녹화를 지원하는 비영리단체에 간접적인 지원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비정통적 창의성’과 ‘기회주의적 다양성’은 2006년 『건축문화Architecture and Culture』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당시 필드 오퍼레이션스에서의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 처음 사용한 개념이었다. 이것이 AECOM에서의 작업을 통해 보다 구체화되고 여기에 ‘사회적·환경적 책임감’이 더해지면서 수퍼매스 스튜디오의 실무 철학이 된 것이다. 그러나 2006년의 첫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이런 용어들은 내가 만들어낸 말들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을 훨씬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수퍼매스 스튜디오가 설계하는 법에 대해 다시 한 번 묻는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한 줄로 답할 것이다. “남과 다르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러나 책임감 있게 한다.” 차태욱은 미국 뉴욕에 위치한 수퍼매스 스튜디오(Supermass Studio)의 대표로 미국을 근거로 한 17년간의 국제적 설계 경력을 통해 설계및 프로젝트 운영, 시공에 이르는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하버드 GSD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뉴욕, 매사추세츠, 네바다, 노스캐롤라이나에 공식 등록된 미국 공인 조경가로서 친환경전문자격증(LEED)을 보유하고 있다.
  •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루이 비네쉬 루이 비네쉬 페이자지스트 대표
    조경 설계에 문외한이 아니더라도, 베르사유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파리 근교, 조그만 전원 마을인 베르사유에 도착하면 그 한가한 분위기에 걸맞지 않게 생경하게 서 있는 궁전과 정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입장 차례를 기다리는 과정은 인내심을 요하고, 마리앙투아네트의 궁정 생활에 대한 몽환적 상상은 까다로운 관람 규정으로 증발되어 버린다. 화려하지만 구석구석 슬픔이 배어있는 금빛 가득한 방들을 지나 드디어 만나게 되는 정원 또한 기대만큼 화려하지도, 예쁘지도 않다. 항공사진으로만 보던 회화적인 자수 화단도 발치 가까이에 놓여있으니 그리 대단하지도 않고조금 유치하기까지 하다. 그저 커다랗기만 한 분수들은 영광스럽기보다는 낡아서 안쓰럽고 황량한 느낌이다. 이곳에서 절반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는 주인공은 회색빛 허공을 배회하는 프랑스의 햇빛이다. 휴먼 스케일을 넘어 극단적으로 인위적이고 장식적인 베르사유의 공간 구성은 자연을 인간의 통치 아래로 복속하려는 어리석고 실패한 시도로 느껴지기도 한다. 한껏 부풀었던 기대와 달리 사뭇 실망스럽다. 화려하지만 애정 어린 손길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 차가운 공간에서 살아야만 했던 프랑스 왕족들의 광기도 사뭇이해할 만하다. 북악과 인왕으로 둘러싸여 아늑하고 아기자기한 우리 궁궐 정원의 자연스럽고 간결한 아름다움이 새삼 그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정원이 그렇듯, 위대한 정원이란 당대의 시대상을 아낌없이 구현하는 공간이다. 베르사유는 17세기 절대 왕정의 상황을 반영하는 거울로서 프랑스의 고전주의 양식을 대표한다. 그중에서도 정원은 그저건물의 배경이 아니라 공간 계획의 핵심이었다. ‘루이 14세’라는 인물을 고려하지 않고 형태적인 측면에서만 베르사유를 분석하고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상당한 착오를 낳는다. 베르사유는 단순히 당시에 축적된 잉여적 부를 과시하는 궁궐과 정원 프로젝트가 아니라, 명확한 목적과 근거를 두고 진행한 프랑스식 행정 복합 신도시였기 때문이다. 종종 오해받는 것처럼 베르사유는 프랑스 왕가의 별장이 아니다. 루이 14세는 왕정의 통치 체제뿐만 아니라 모든 귀족 사회와 관료 집단을 루브르에서 베르사유로 옮겨왔다. 베르사유에는 그가 꿈꾸던 ‘새로운 국가, 프랑스’에 대한 신념과 중앙집권적 표상, 무엇보다도 ‘프랑스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사상이 담겨 있다. 17세기 중반만 해도 유럽의 문화적 중심은 이탈리아였다. 프랑스는 유럽 최고의 부와 군사력을 보유한 강국으로 떠올랐지만, 예술과 문화에 있어서는 여전히 이탈리아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루이는 프랑스의 패션과 예술, 건축을 보호하고 장려해 독자적인 문화적 전통을 구축하려 했고 베르사유는 그 전적인 수단이었다. 건축사가 빈센트 스컬리Vincent Scully가 지적했듯, 경사와 비탈면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이탈리아 정원과 달리 베르사유는 일드 프랑스Ile-de-France의 대평원에 건설된 프랑스식 정원이다. 또한 평생을 영토 확장과 전쟁으로 보낸 루이의 자랑스러운 군대와 프랑스 영토를 표현한 추상화이며,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순수한 르네상스적 아이디어에서 영향을 받은 앙드레 르노트르André Le Nôtre의 손길이 느껴지는 곳이다. 절반을 차지하는 하늘 또한 르 노트르가 의도한 바였다. 망사르Jules Hardouin-M. Mansart의 ‘거울의 방’이 스스로 빛을 발하는 루이 14세의 상징성을 표현한 것처럼 태양을 자처했던 루이 14세가 깃들 수 있는 끝없는 하늘과 무한히 뻗은 지평선의 정원은 더없이 어울리는 설계였다. 휴먼 스케일을 벗어나는 계획의 성격 또한 자신에 대한 초월적 기준을 세우고 왕으로서 초인적 면모를 구축하려 했던 루이의 의지가 정확히 반영된 결과였다. 루이는 매일 세 차례의 사냥, 세 차례의 관료회의, 세 차례의 성관계를 철칙으로 지키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베르사유 또한 그가 새롭게 이룩하려 한 프랑스적 격식과 이지적이고 복잡한 문화 예식의 3차원적 구현이었다. 다시 말해 베르사유는 프랑스의 국가적 기강과 문화적 기풍을 다시 세우는 사업이었다. 베르사유의 입구인 군사 광장Place d’rmes에는 세종대왕이나 링컨처럼 옥좌에 앉은 통치자가 아니라 말을 타고 돌격을 외치는 루이의 기마상이 서있다. 베르사유는 속전속결로 진행되는 현대적 개발 방식의 시초가 되었다고 할 만하다. 베르사유는 루이 14세의 꿈을 실현할 중앙 정치 무대가 되어야 했기에 늪지대가 아름다운 숲과 정원으로 바뀔 때까지 수십 년의 세월을 기다릴 수 없었다. 루이는 빠른 결과를 원했으며, 르 노트르는 프랑스 전 국토에서 장대한 수목을 구해 성목을 이식함으로써 깜짝 놀랄만한 경관의 변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그만큼 베르사유는 빠르게 건설되었고 또 빠르게 파괴되었다. 프랑스혁명의 혼란을 거치며 황폐화의 길을 걷던 정원은 근 200년간 복원의 대상이었다. 루이 14세와 르 노트르가 세웠던 비전을 해석하고 이상적 상태를 회복하는 일이 베르사유의 임무로 전승되어 왔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관점에 변화가 시작됐다. 폭풍 피해로 훼손된 ‘물의 극장이 있는 숲Le Bosquet du Théâtre d’au’ 정원의 재조성 과정에서 원형중심의 역사적 복원이 아니라 베르사유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을 도입한 것이다. 이 역사적인 과업을 맡은 조경가가 프랑스의 정원사, 루이 비네쉬다. 역사와 전통의 층이 겹겹이 축적된 베르사유를 해석하고 새로운 예술적 영감을 정원에 담는 작업은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다. 내년 봄에 선보일 비네쉬의 정원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지 무척 궁금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작품 또한 베르사유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해석하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엄격한 격식과 초월적 이상을 표현한 베르사유의 중앙 축과 대비되는 숲속 정원들은 파티와 공연의 무대가 된 그야말로 자유와 환상의 세계였다. 2011년 공모전에 당선된 비네쉬가 1674년 르 노트르가 설계한 물의 극장을 재조성하게 되었다. 루이 비네쉬는 법학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묘목장의 견습생으로 다시 출발하며 정원사의 길을 걸었다. 그는 프랑스 곳곳의 대규모 저택 정원과 성채, 전통 경관을 디자인하며 르 노트르 이후 베르사유 최초의 독창적 정원을 선보일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특히 1990년대 미테랑 대통령의 그랑 루브르Grand Louvre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던 튈르리 정원Jardin des Tuileries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비네쉬는 서울의 메종 에르메스 도산파크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전시해 왔다.
    • 최이규 /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지소장
  • 미래 도시 디트로이트 도시재생의 새로운 국면
    미래 도시 디트로이트Detroit Future City 스토스Stoss는 일련의 도시계획 전문가들과 함께 디트로이트 시 전역에 걸친 도시설계 작업인 디트로이트웍스 프로젝트Detroit Works Project에 참여했다. 본 프로젝트가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사회적·경제적·생태적 시스템 사이의 긴밀한 연계성을 확립함으로써 생산적 효율성을 발견해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통합된 해결책을 바탕으로 도시 전반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도시 생활, 도시에서의 새로운 생산 방식, 그리고 생산적인 그린인프라를 제안하고자 한다. 스토스는 경관landscape을 단지 여가 공간으로만 간주했던 전통적 인식을 재정의하는 동시에 이를 다변화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경관이 도시의 건전성 및 거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한다. 단일한 기능만을 지닌 수동적 경관은 자원만 소비할 뿐이다. 반면 현대의 생산적 경관은 자원 자체를 만들어낼 수 있으며 도시 거주민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환경 문제를 줄여줄 수 있다. 생산적인 경관을 만들어내는 것이 스토스의 작업의 기준이 되는 원칙이다. 생산적 경관과 그린인프라는 공기, 물, 그리고 토양을 정화시키며 보다 건강한 도심 생태계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혁신적 경관은 다양한 유형의 블루·그린인프라 조성에 초점을 맞춰 물과 공기의 정화를 추구하며, 식량 및 에너지 등의 생산 기반 시설, 지역 사회의 참여, 그리고 연구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이 계획은 새로운 도시 구조를 만들기 위한 사회적 촉매제로서 종합적 경관 기반 시설의 확립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스토스(Stoss)는 도시 및 사회적 공간 조성 과정에서 조경의 생산적인역할을 추구하는 설계사무소다. 스토스는 기본적으로 공공의 영역과 관련된 일을 한다. 공원이나 캠퍼스 및 오픈스페이스, 지역 및 도시 조성전략, 다양한 스케일의 경관 기반 시설, 개발 및 재개발 등의 공간 조성프로젝트에 관여하고 있다. 스토스는 창의적이면서 실용적인, 동시에아름다우면서 기능적인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간단하지만 효율적인 기술적 접근과하이브리드적인 해결책을 제안한다.
    • Stoss / Stoss
  • 창조적 파괴와 전략적 버리기 도시재생의 새로운 국면
    창조와 파괴만큼 도시·조경설계 분야에서 흥미로운 논란을 일으키는 행위도 드물다. 도시 자체가 크고 작은 창조와 발명의 결과다. 19세기 중반 바르셀로나에 도시 격자를 카펫처럼 덮은 일데폰스 세르다Ildefons Cerdà, 그리고 비슷한 시기 보스턴 커먼Boston Common에서 프랭클린 파크Franklin Park에 이르기까지 7마일에 달하는 에메랄드 네클리스Emerald Necklace를 도시에 선사한 프레데릭 로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 이들은 아름다운 흔적을 도시에 남긴 창조자들이다. 이들은 종종 전대미문의 독창적인 계획가이자 용감한 개척자로 대접받는다. 그에 비해 파괴는 도시의 일부를 없애거나 중요성을 격하시키는 작업이다. 도시를 파괴한 사람은 때로는 도시 문명의 적 혹은 몰지각한 불도저라는 불명예를 얻게 된다. 이렇게 전혀 반대되는 의미의 두 단어를 결합한 개념인 ‘창조적 파괴creativedestruction’가 최근 도시계획 분야에서 자주 논의되고 있다. 1940년대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에 의해 널리 쓰이게 된 이 말은 최근 뉴욕타임즈 지에 따르면 시애틀, LA, 디트로이트 등의 도시를 쇠퇴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으로 주목받고 있다.1 창조적 파괴는 흔히 기존 환경을 의도적으로 파괴함으로써 바람직한 결과를 얻게 된다는 식의 지나친 단순화를 통해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개념이 자주 인용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도시 쇠퇴 과정이 성장과 발전의 정반대가 아니며 가능하면 피해야 할 절대악도 아니라고 보는 신선함 때문일 것이다. 이는 한 시기에만들어진 도시의 부분이 가까운 미래에 필요한 기능이나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점차 교체되어야 하며, 현재 세계 도시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쇠퇴decline가 바로 그 파괴와 교체 과정의 생산적 준비단계라는 관점이다. 이러한 생각은 특히 최근의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잘 나타난다. 다음은 디트로이트의 다소 불명예스러운 통계 중 일부이다. •미국 역사상 파산한 도시 중 가장 큰 도시(2013년 7월 파산 신청) •도시 총 부채 약 18조5천억 원(인구 1인당 약 3천만 원의 부채) •1950년대 180만 인구에서 2014년 70만 인구로 감소•남은 인구의 약 82%가 고등학교 졸업 이하 학력 •최소 약 4만 채의 집이 즉시 철거 대상으로 지정됨: 총 건축물의 30%가 극도로 열악함 혹은 빈집 •시 전체 가로등 약 8만8천 개 중 3만5천 개만 작동 •단위 인구 당 살인 사건 발생률 뉴욕 시의 11배 1900년대 초 미국의 실리콘밸리, 디트로이트 디트로이트는 미국 자동차 산업의 빅3, 즉 포드Ford, GMGeneral Motors, 크라이슬러Chrysler가 가져온 자동차 상업화 및 대중화의 진원지로 잘 알려졌다. 하지만 디트로이트는 자동차 생산이 이루어지기 전 이미 운하와 철도가 지나가는 물류 거점이자 내륙 워터프런트를 활용한 선박 제조 기지로 자리매김하며 1890년 약 21만 명 규모의 도시로 성장했다.3 당시의 디트로이트는 모험가 정신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기술 혁신을 이끌고 있는 1900년대 판 실리콘밸리였다. 흔히 ‘포디즘Fordism 자본주의’나 영국 헉슬리Aldous Leonard Huxley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혹은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의 ‘모던 타임즈Modern Times’에서 직간접적으로 묘사된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Henry Ford가 이 시기 디트로이트에 등장한다. 1903년 포드사를 설립한 그는 1906년 ‘Model N’의 상업적 성공을 토대로 대량 생산 시스템을 적용해 가격을 획기적으로 낮춘 ‘Model T’로 자동차 대중화의 꿈을 이룬다. 하지만이 도시는 몇몇 성공한 기업가들의 독무대는 아니었다. 세계 최고의 두뇌들, 열정적인 소자본 창업가, 그리고 이들의 혁신을 지원하는 수많은 창업 인큐베이터와 경쟁력 있는 컨설턴트들이 당시의 디트로이트를 담금질했다. 1901년 자체적으로 자동차 부품 워크숍을 설립하고 포드사에 자금을 조달한 닷지 브라더스Dodge Brothers를 포함해 1908년 GM, 1925년 크라이슬러 등이 혁신의 도시 디트로이트에 둥지를 틀었다. 지난 1850~1890년 10배 가까이 증가한 도시 인구는 다시 1890~1950년 8배 이상 늘어났다. 1950~2013년: 산업 쇠퇴, 악마의 밤, 그리고 파산 선고 그러나 1950년대 전후를 기점으로 이 혁신 도시는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수렁에 빠지기 시작했다. 미국내외 자동차 산업 간의 과도한 경쟁, 1950년대 본격화된 백인 중산층의 대규모 교외 이주, 1960년대 불거진 사회 불안과 폭동, 1973~1974년 석유 파동 등의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비슷한 시기 디트로이트 빅3는 시설 투자의 방향을 급선회한다. 1947~1958년 신규 자동차 공장 25개를 전통적으로 혁신의 중심지였던 디트로이트 도심부가 아닌 교외 지역의 저렴하고 넓은 토지에 설립한다.4 게다가 자동차 산업이 쇠퇴하기 시작할 무렵 새로운 산업이나 서비스를 도입해 변신에 성공한 뉴욕이나 보스턴과는 달리 디트로이트의 도심부는 제2, 제3의 신산업 유치에 실패하고 만다. 이곳은 더 가난하고, 더 분노에 찬, 그리고 혁신의 감각을 망각한 흑인 커뮤니티로 가득 차게 된다.5 1980년대를 기점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집단적 의식처럼 번진 ‘악마의 밤Devil’ Night’은 매년 수백 가구의 방화 피해와 살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디트로이트는 계속된 산업 쇠퇴와 사회 불안, 정부 부채 누적으로 결국 2013년 7월 공식적으로 파산 선고를 하게 된다.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 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 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환경대학원과 협동과정 도시설계학전공에서 도시설계 이론과 스튜디오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 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중국·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 부산 도시재생의 경험과 비전 도시재생의 새로운 국면
    부산이라는 도시 - 01 모든 도시는 인간이 모여 머물며 어우러져 살기 위해 선택한 삶터다. 그중, 항구 도시는 해양과 육지의 자원을 기반으로 경제적 가치를 보다 많이 창출하기 위해 사람들 스스로 선택한 보금자리다. 또 해양과 관련한 각종 산업이 발달해 다양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부산의 항구는 이러한 경제적 목적 외에 또 다른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다. 1876년 개항, 1945년 광복, 1950년 한국전쟁 등 일련의 사건에서 부산이 담당했던 ‘국가 문제 해결지’로서의 기능이다. 부산은 개항 직후부터 전쟁 후인 1960년대까지 급속한 변화 속에 놓여 있었다. 개항 후 140여 년의 시간 속에서 부산은 대한민국의 근대사와 켜를 같이 했다. 일제강점기, 광복, 경제개발기의 인프라와 부산의 사회체제, 공간 조직, 건축물, 장소들은 맞닿거나 연이어 있다. 또 일제강점기의 암울했던 상황에서도 움직였던 민초들의 공동체적 활동과 한국전쟁 후유증의 극복 과정이 지난 60여 년 동안 부산에서 벌어졌던 갖가지 일상과 사건의 배경이 되었으며 근거를 제공했다. 이러한 시대 상황은 부산이 특별한 준비 기간을 거치지 못한 채 역사적 사건들의 과정과 결과를 일방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게 했다. 이로 인해 부산은 제대로된 도시계획과 중·장기 도시발전 전략을 수립할 여유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결국 이러한 시간은 부산을 근대기에 출발한 도시임에도 근대사를 느낄 수 없는, 근대기에 발전된 도시임에도 근대 문화를 인지할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했다. ‘토목의 도시’, ‘기억 상실의 도시’라는 혹평을 들을 정도로 부산은 그동안 ‘부산만의 도시상都市像’ 구축에 소홀했다.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진입 도로 확폭이라는 미명아래 부산대교를 건설하며 시행된 부산세관 철거(1979년)가 무분별한 개발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점이 아니었나 싶다. 88올림픽을 준비하며 서울과 유사하게 시작된 공동 주거 단지의 본격적인 건설과 연이은 재개발 붐은 부산 곳곳의 산록과 해안에 스며있던 자연과 역사의 기억을 급격하게 해체시켰다. 그즈음 1992년의 시청 이전(남포동에서 양정으로)과 직할시에서 광역시로의 개칭(1995년)은 원도심의 쇠퇴를 불러왔고 근대 부산의 위상 또한 격하시키는 원인을 제공했다. 부산이라는 도시 - 02 부산은 타 지역에 비해 해운대, 영가대, 태종대, 이기대, 신선대, 몰운대, 시랑대 등 ‘대臺’로 끝나는 장소들이 유난히 많다. 이유는 바다 쪽으로 향한 지형의 끝점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대와 대 사이는 완곡한 모래사장과 크고 작은 포구와 항구가 자리를 잡았고, 이를 중심으로 동네와 시가지가 형성됐다. 그래서 연안부에 자리 잡은 시가지들은 대부분 앞으로 바다가 펼쳐진 배산임해背山臨海 구조를 가지고 있다. 부산의 연안부는 본토부와 연결된 여러 지점에서 들락날락하는 목을 이루고 있어, 여러 개의 작은 만과 반도들이 선으로 연결된 지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해안가에서 짧게는 50m, 길게는 1,000m 정도 내륙으로 이격된 배면부에 산들이 꼬리를 물고 연결되어 있다. 연안을 배경으로 병풍처럼 서 있는 승학산, 엄광산, 봉래산, 보수산, 구봉산, 수정산, 황령산, 금련산, 장산 등의 산봉우리들과 그 사이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던 보수천, 영주천, 초량천, 부산천, 동천(호계천, 가야천, 부전천, 전포천), 남천, 수영강, 춘천 등이 부산 연안 경관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역사적으로 부산의 도심 연안은 부산진성과 자성대 근처를 중심으로 하는 ‘점點’ 형태에서 출발했다. 구한말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연안부는 군사·경제적목적에 의한 침탈의 대상으로 악용되면서 절토와 매축에 의해 기다랗게 연결된 ‘선線’의 형태로 돌변했다. 전쟁 후, 1960~70년대를 거치며 부산 연안은 지형지세에 따라 지구地區 별로 가지각색의 목적을 가진 ‘면面’형태로 확장되었다. 강동진은 성균관대학교에서 건축학을 공부했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와 역사 경관에 대한 꿈을 키웠다. 현재 경성대학교 도시공학과에서 자연, 문화, 역사, 경관 등을 키워드로 하는 ‘도시재생’ 작업을 통해, 학생들이 도시재창조에 대한 꿈을 키워갈 수 있도록 함께고민하고 지도하고 있다. 특히 버려지거나 황폐해 가는 도시 유산(산업유산, 근대화 유산, 역사 마을 등)을 지키고 힘을 싣기 위한 방안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더불어 캠프 하야리아 부지의 시민공원화를 위한 전문가 그룹인 ‘하야리아공원포럼’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