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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스케이프] 인터스텔라
이상한 나라의 체험
스포일러가 지뢰밭이다. 글을 쓰는 현재 시점은 영화가 개봉한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잡지가 출간될 때쯤에는 아마도 관심 있는 이들의 상당수가 영화를 봤을 것이다. 그럼에도 미처 보지 못한 독자는 꼭 영화를 본 후에 읽기를 권한다. PC나 스마트폰으로 보려면 차라리 이 글을 읽고 상상으로만 그치는 편이 낫다. 반드시 극장에서 감상해야 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인터스텔라Interstellar’는 위기에 빠진 지구를 대체할 행성을 찾기 위해 웜홀worm hole을 통해 시공간을 여행하는 탐험담이다. ‘웜홀’, 낯선 용어지만 어디선가 본듯하다. ‘이상한 나라의 폴’의 주인공 폴이 딱부리, 삐삐, 찌찌와 함께 힘을 모아 대마왕으로부터 니나를 구하기 위해 통과했던 시간의 문이 웜홀 아니었을까? 찌찌가 요상한 봉을 휘두르면 현실의 시간이 정지되고 시간의 문을 통해서 어른들은 모르는 4차원의 세계로 간다. 제한된 시간 동안 모험을 펼치다가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오곤 하던 ‘이상한 나라의 폴’은 오래전에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이다. 폴 일행은 4차원 마법 세계에서 한참을 헤매다 돌아오지만 현실의 시간은 그대로 멈추어 있다. 알지 못하는 사이 이미 상대성 이론을 예습했다니 놀랍다.
SF영화에서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하는’ 경우는 흔히 보았기에 ‘버리는’ 구상이 일단 신선하다. 과학의 발달과 지구 환경의 변화로 볼 때 미래의 시간대로 보이지만, 주인공 가족이 사는 집, 시내, 야구장의 풍경은 니나를 구하러 다니던 폴이 활약했던 20세기 중후반의 풍경과 다르지 않다. 웜홀을 통과해 새로운 땅을 찾으러 다닐 정도로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 바람이 좀 많이 불고 산소가 부족하다고 지구를 버릴 구상을 하다니, 대마왕의 손아귀에서 니나를 구하는 일보다 더 무모한 일이 아닐까 싶다. 행성 집단 이주 계획이라는 어마무시한 계획을 세우면서 변변한 엔지니어 한 명 찾지 않고 남자 주인공이 제 발로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니, 차라리 찌찌의 요술봉을 찾으러 다니는 편이 빠르지 않았을까.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있지만 인터스텔라는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는 경이의 세계를 체험하게 해주는 볼만한 영화다.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은 ‘메멘토Memento’에서는 기억을, ‘인셉션Inception’에서는 무의식과 꿈의 세계를 다루었다. 특히 인셉션에서는 무의식의 세계를시각적인 상상력으로 빚어내 일찍이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것을 보여준 바 있다. 인셉션의 복잡한 이야기 전개는 잊어버릴 수 있어도 도시의 풍경이 그대로 접혀 하늘로 이어지던 그 아찔한 장면은 절대 잊을 수 없다.
인터스텔라는 상상력에 과학을 접목해 감독의 전작을 뛰어넘는 그 이상을 표현하고 있다. 먼지로 뒤덮인 지구, 입체적인 웜홀, 파도가 산처럼 보이는 물로 뒤덮인 행성, 구름까지 꽁꽁 얼어붙어 하늘과 땅이 이어진 것 같은 얼음 행성, 그리고 그 문제적 장면인 블랙홀까지. 지구의 환경오염 때문에 다른 행성을 찾아다니지만, 그들에게 닥치는 시련이란 외계인과의 조우도 대마왕의 공격도 아닌 또 다른 이름의 환경 재앙이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고, 한겨레 영화평론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전공으로 삼아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지만, 극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그것이 주는 감동과 함께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텍스트라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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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사라와지 찾기
#30
사라와지를 찾아야 하는 이유
영국에서 풍경화식 정원이 태동하던 시절에 떠올랐던 개념이 하나 있었다. ‘사라와지sharawadgi’라는 단어인데 대략 ‘무질서한 아름다움’ 정도로 해석될 수 있겠다. 이 개념을 1685년에 처음으로 제시한 인물은 윌리엄 템플 경Sir William Temple(1628-1699)이었다. 영국의 정치가이자 에세이스트였던 템플 경은 아일랜드 의원의 자격으로 유럽 대륙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많은 정치적 업적을 남겼다. 그러다 명예혁명 후 은퇴하여 서리 지방 모어파크에서 여생을 보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영향을 받아 전원에서 은둔 생활을 만끽하며 많은 에세이를 썼다. 1685년, ‘에피쿠로스의 정원’이라는 에세이에서 그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필치로 동시대의 정원들을 묘사했다. 그중 언뜻 중국의 진기한 정원을 언급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그의 사후에 어떤 파문을 일으켰는지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가 말하기를 “지금까지 내가 묘사한 정원들은 모두 규칙적이고 질서정연한 것들이다. 그러나 질서가 없는 정원이 오히려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 중국에서 살다가 온 사람들에게 들은 바로는 중국인은 지리적으로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고 체계 역시 우리와는 사뭇 다른 것 같다. 우리의 경우 비율이나 좌우대칭, 통일성 등에 큰 비중을 두고 산책로를 만들 때나 나무를 심을 때 일정한 원칙을 따른다. 중국 사람들은 이런 우리를 비웃는다고 한다. 몇 걸음 간격으로 나무를 심었는지 아이들이라도 금방 알아챌 만한 뻔한 방식을 쓰다니. 그들의 목표는 아무 규칙이 없어 보이면서도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다. 이 때 그들은 ‘사라와지가 좋다’라는 감탄사를 연발한다고 한다. 중국에서 온 비단 옷이나 병풍, 도자기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규칙이 없음에도 아름답다.”1 템플 경은 중국에 가본 적이 없고 중국 정원을 본 적도 없었다. 중국 정원을 표현한 그림도 아직 없던 시절이라 전해 들은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오죽했으면 병풍 그림을 관찰하며 중국의 미학이 어떤 것인지를 해독하려 했을까. 템플 경은 사라와지, 즉 무질서 속의 아름다움을 동경했지만 동료들에게 경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공연히 그대로 흉내내려고 하다가는 큰 실수를 할 확률이 높다며 늘 하던 대로 정형적 양식의 범위 내에 머물면 크게 실수할 일이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 이야기는 여러 측면에서 흥미롭다. 우선 당시 유럽의 정원은 ‘정형식’이라는 하나의 원칙밖에 몰랐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고대 이래로 정원은 정형적이라는 것이 불변의 원칙이었다. 그렇다고 템플 경이 거기서 벗어나자고 주장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조심스럽게 ‘세상에는 다른 것도 있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템플 경은 풍경화식 정원의 창시자 반열에 끼지 못한다. 다만 그가 던진 한 마디, ‘사라와지’가 저 혼자 날개를 달고 멀리 날아갔을 뿐이다. 사라와지가 중국어라고는 하는데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2008년도에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사라와지에 대한 책을 출간한 유 리우Yu Liu도 사라와지는 아무 뜻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페르시아 어원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일본어가 아닐까 짐작하는 사람도 있다.2 아마도 발음이 와전되어 이제는 원어를 찾기 힘든 듯하다. 사라와지는 결국 영국 사람들이 창조한 중국 단어인 셈이다.
그 후 사라와지는 샤프츠베리 백작Earl of Shaftesbury(1671~1713)에게, 그에게서 다시 조지프 애디슨Joseph Addison (1672~1719)과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1688~1744)에게 전해졌다. 이 세 사람은 저술가, 철학자, 시인이었으며 정형식 정원을 혐오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영국의 풍경화식 정원이 형성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점도 같다. 풍경화식 정원의 긴 역사를 놓고 볼 때 1700년대 초반, 풍경화식 정원의 태동을 책임진 초기의 영웅들인 셈이다.
당시 영국의 지식인들은 마치 정형식 정원을 빈정거리기 위해 살았던 것처럼 보인다. 특이한 것은 그들이 정형식 정원을 비판하고 ‘새로운 것’에 대해 고민을 할 무렵 프랑스에서는 베르사유 정원이 완성되면서 오히려 정형식 정원이 절정에 달했다는 사실이다. 그 후로도 반세기가 넘도록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등 대륙 쪽에서는 바로크 정원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말하자면 정형식 정원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영국에서는 이미 새로운 것을 찾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 이유를 조지프 애디슨이 설명해 준다. “우리 영국의 ‘바로크’ 정원들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정원만큼 재미가 없다. 그들의 바로크 정원은 정형적인 양식의 정원과 이어지는 넓은 숲이 펼쳐지므로 변화가 많고 예술과 자연이 공존한다. 그에 반해 우리 영국 것은 우아하긴 하지만 아담한 것이 특징이다. 사실 농경지나 목초지로 쓸 수 있는 면적에 숲을 만들자면 그만큼 소득이 줄어드니 난감한 것은 사실이다.”3 이는 프랑스와 영국의 사회정치적 차이에 기인했다. 프랑스 귀족들은 루이 14세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에 굴복하여 모두 왕실에서 살았다. 볼모로 잡혀있었던 것이다.4 당시 베르사유는 곧 국가였다. 그 반면 명예혁명에 성공해 왕권에 족쇄를 채울 수 있었던 영국 귀족들은 시골에 넓은 영토를 소유하고 그곳에서 살면서 자신들의 영토와 소득을 직접 관리했다는 차이가 있다. “군주가 기분 내키는 대로 만든 바로크 정원을 왕실의 노예들(귀족들)이 죽자고 지키고 있다”5 라는 샤프츠베리의 발언이 아마도 가장 비중 있고 ‘지속가능한’ 비판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비아냥거리는 것만으로는 새것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독한 인위성에 대해 ‘자연스러움’으로, 억압에 대해 ‘자유’로 대응해야 한다는 점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다만 그 자유를 어떻게 삼차원의 공간으로 표현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자유가 어떻게 생겼을까. 이에 힌트를 준것이 템플 경의 사라와지였다. 사라와지를 찾아야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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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 남에게 미루기
도대체 누가 한 거야?
영민이네 작품 봤어? 정말 모델은 전문 회사에서 만들었다고 해도 믿길 정도로 훌륭하더라. 그런데 그 모델, 전부 후배들이 만들었대. 방학 때부터 애들 매일 밥 사주고 술 사줘서 돈으로 도우미 섭외한 거나 마찬가지지. 정작 자기는 모델에 손 하나도 대지 않고 지시만 내렸다고 하더라고. 그래픽도 완전 멋있지. 그런데 그 팀 애들 중에 복수 전공하는 미대생 있잖아. 걔가 아는 대학원생 오빠들이 다 해준 거래. 3D 프로그램으로 동영상 만드는 사람들이 해주는 그래픽을 어떻게 당해내겠냐? 솔직히 나는 그 작품이 걔네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봐. 모델도 그렇고, 그래픽도 그렇고, 직접 한 게 거의 없잖아. 솔직히 그 디자인도 본인의 아이디어인지 의심스러워. 비슷한 디자인을 무슨 공모전에서 본 것 같기도 하거든. 아니면 말고.
작가의 죽음
68혁명이 일어나기 한 해 전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작가의 죽음The Death of the Author’을 선언한다.1 바르트는 작가란 근대에 들어와서야 나타난 개념이라고 말한다. 중세가 끝날 무렵, 근대 철학과 종교 혁명을 통해 ‘개인’이라는 관념이 탄생한다. 여기에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까지 더해지면서 개인적 주체인 작가는 모든 텍스트의 주인이 된다. 문자의 제국에 군림하는 작가는 작품에 대해 아버지의 권위를 넘어 종교적인 신성마저 갖는다. 하지만 실상 그어떠한 작품도 작가가 만들어낸 새로운 창조물이 될 수 없다. 알고 보면 모든 텍스트는 이전에 존재했던 수많은 원문의 인용의 재인용이며 무한한 모방일 뿐이다. 작가가 부여한 작품의 원본성은 실제로는 완벽한 허상이다. 오늘날 작가의 자리는 서술자scriptor가 물려받는다. 서술자는 거대한 텍스트의 사전에서 단어들을 끌어내 다른 누군가의 언어로 부연하는 자다. 작품에 선행하는 작가와 달리 서술자는 텍스트와 동시에 태어난다. 글쓰기는 더 이상 특정한 기록, 표현, 묘사가 아니다. 이제 언어 그 자체 이외에 텍스트는 그 어떠한 기원도 갖지 않는다. 텍스트에는 작가의 인생도, 열정도, 고뇌도 없다. 작가의 죽음과 함께 텍스트에 내포된 신화도, 작가의 존재에 기대어오던 문학의 비평도 전복된다.
작가의 죽음은 비단 문학에서만 나타난 사건이 아니었다. 20세기 들어서 예술의 전 분야에서 작가라는 개념은 무의미해진다. 1940년대 중반, 셰페르Pierre Schaeffer는 연주자를 위한 음악이 아닌 소리 그 자체를 위한 음악을 시도한다. 그는 이미 연주된 악기나 음악, 심지어는 사람들의 대화나 자연의 소음에서 음악을 만들어낸다. 이집트에서 할림엘-답Halim El-Dabh은 고대 종교 의식을 테이프에 녹음하고 그 소리를 조작하여 만든 음악을 선보인다. 이들이 개발한 샘플링sampling이라는 기법은 작곡가의 악보나 음악가의 연주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음’에서 음악이 만들어진다. 그들에게 음악은 창작이 아니라 발견과 조합이었다. 작가의 죽음이 없었다면 이들의 실험에 영향을 받은 오늘날의 일렉트로닉이나 힙합과 같은 대중음악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술계에서 작가의 죽음은 이미 20세기 초에 예견되었다. 1917년 뒤샹Marcel Duchamp은 상점에서 사온 변기를 전시회에 출품하면서 화장실 용품 제조업자의 이름 ‘R. Mutt’를 새겼다.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의 변기는 20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작품이 된다. 1919년 뒤샹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걸작 모나리자의 복제품을 사와 콧수염을 그리고 ‘L.H.O.O.Q’라는 제목을 붙인다(그림1, 2).2 뒤샹 이후로 미술계에서 작가는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한다.
뒤샹의 개념을 이어받아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전성기를 연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작업 이후 작가의 권위에 기대는 ‘숭고sublime 미학’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대신 허상과 복제가 지배하는 ‘시뮬라크르simulacre 미학’의 시대가 도래한다. 더 이상 예술을 만드는 주체는 없다.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창작의 역할을 타자에게 전가할 것을 강요받는다. 이제 바르트가 선언한 작가의 죽음은 충격적인 도발이 아니라 진부한 현실이 되어버렸다.
작가 없는 정원
졸업 후 일을 시작한 지 2년 정도 된 마사 슈왈츠Martha Schwartz는 1979년 어느 날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 깜짝 파티를 해주기 위해 자신이 살던 아파트 앞마당에 작은 정원을 만든다.3 정작 조경가였던 남편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이 정원은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젊은 슈왈츠는 조경계의 화려한 주목을 받게 된다. 몇 평 되지도 않는 정원이 그토록 화제가 되었던 이유는 슈왈츠가 선택한 ‘재료’에서 찾을 수 있다. ‘베이글 가든’이라는 이름처럼 정원 가장자리의 보라색 자갈 위에 80여 개의 베이글이 깔려있다. 이 베이글들은 작가가 방수처리를 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가게에서 파는 베이글 그대로다. 슈왈츠는 60년 전 뒤샹이 그랬던 것처럼 대량 생산되어 판매되는 베이글로 정원을 만듦으로써 설계가의 권위를 파괴한다(그림3).
1988년, 슈왈츠는 ‘베이글 가든’에서 선보인 팝아트적인 시도를 확장한다. 슈왈츠는 한 쇼핑센터의 조경 설계를 맡게 된다. 그런데 정작 그녀가 제안한 설계의 초점은 공간적 구성이나 이용보다도 350마리의 황금 개구리에 맞추어져 있다.4 모든 맥락을 무시하고 그리드 형태로 균일하게 배치되어 공간을 지배하는 개구리들은 슈왈츠가 직접 만들지도 형태를 고안하지도 않았다. 공장에서 생산되어 쇼핑센터로 운반된 뒤 배치되었을 뿐이다. 10년 전의 작은 정원의 베이글의 역할을 쇼핑몰의 개구리가 수행한다(그림4).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뒤 슈왈츠는 베이글 가든과 리오 쇼핑센터에서 보여주었던 레디메이드의 전략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그녀는 개념 미술conceptual art의 아이디어를 빌어 그때까지 설계가가 맡아오던 역할에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뒤샹이 예술의 고전적인 가치를 파괴한 이후로 예술은 스스로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려야만 했다. 그 고민 끝에 제시된 한 가지 해답이 개념 미술이다. 1960년대에 등장한 미니멀리스트들은 레디메이드의 개념을 극단적으로 추구하여 실제 사물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 작품을 선보인다. 미니멀리스트였던 버긴Victor Burgin은 작품이 다른 요소들과 다를 바가 없다면 왜 굳이 작품을 쓰는지 반문한다.5 예술의 본질은 작가가 만들어낸 작품이 아니라 오히려 작품에 대한 생각이 아닐까? 1963년 키엔홀츠Edward Kienholz는 ‘개념 타블로Concept Tableaux’ 라는 작품을 통해 예술이 개념 상태로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1966년 보크너Mel Bochner는 작품이 아니라 여러 작가들의 드로잉과 구상을 복사한 노트를 전시했다. 전시된 대상은 완성된 예술이 아니라 예술의 개념들이었다. 1968년 솔 르윗Sol LeWitt은 월 드로잉Wall Drawing 연작을 구상한다. 솔 르윗은 월 드로잉을 그리기 위한 개념적 가이드라인과 다이어그램을 제시하였을 뿐 작품을 직접 그리지 않았다. 작품은 인부들이 완성한다. 월 드로잉에서 작가는 더 이상 작품의 유일한 창작자가 아니다. 작품에 대한 개념과 구상의 주인일 뿐이다(그림5, 6).
슈왈츠는 2009년 벨기에에서 열린 정원 축제에서 ‘가든 게임Garden Game’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6 그녀는 정원을 구상하면서 그 어떤 도면도, 스케치도 그리지 않았다. 단지 정원을 만드는 규칙을 이메일에 써서 벨기에로 보냈을 뿐이다. 슈왈츠가 보내준 규칙대로 주사위를 던져 만든 생울타리 미로가 완성된다. 그리고 무용수들이 주사위, 돌림판, 끈, 말뚝으로 또 다른 게임을 진행하며 35개의 화단의 위치를 결정한다. 그 후에 시공 인부들이 다시 주사위와돌림판을 사용하여 무용수들이 정한 위치에 놓인 화단을 채워나간다. 슈왈츠는 개념 예술가들이 사용했던 방식을 통해 정원을 완성한다. 이 때 슈왈츠는 고전적 의미의 설계를 하지 않았다. 규칙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작품의 주체는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규칙을 제시한 슈왈츠에서, 화단의 위치를 정한 무용수로, 그리고 정원을 마무리한 인부들로(그림7).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하였고 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하였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어바니즘』이 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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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서재] 책과 헤어지지 않기3
번역과 세계와 당신
처음 당신을 알게 된 게 언제부터였던가요
도저한 사랑에 관한 절절한 중단편을 하나 꼽으라면 거의 반사적으로 떠올리는 작품이 있지요. 김연수의 소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입니다.1 늦가을에는 꼭 이 소설을 읽어야 합니다. 이제 한 달이 지나면 이 세계도 온통 하얗게 뒤덮일 테니. “처음 당신을 알게 된 게 언제부터였던가요. 이젠 기억조차 까마득하군요.”2 내 기억이 옳다면 찬바람에 낙엽들이 포도鋪道 위로 산산이 흩어지던 이 무렵이었을 겁니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김연수의 소설에서는 번역을 하고 주석을 다는 이야기가 첫머리부터 등장합니다. 화자인 ‘나’는 총 227행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풀어 쓴 번역가입니다. “다시 121행의 포蒱자로 돌아가면 이다음에 올 글자는 도桃자나 도陶자가 거의 확실하다. 포도라는 단어는 라틴어‘botrus’를 음사해서 만들었다.”3 ‘포도葡萄’의 유래입니다. 서아시아가 원산지인 포도는 페르시아에서 로마로 가기도 하고, 저 멀리 설산을 넘어 중국으로 왔다가 고려 때 우리 땅에도 들어옵니다. 음차音借도 번역입니다. 족히 천 년은 걸렸을 긴 여정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군요.
한편 주인공인 ‘그’는 아무 연락도 없이 갑자기 한강에 뛰어들어 자살한 여자 친구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후회는 없어’로 끝나는 짧은 유서만 남겼지요. 여러 연애 소설을 탐독하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둘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지만 여전히 알 수 없지요. 찾은 건단 한 가지. 여자 친구가 죽기 전에 ‘나’가 번역한 『왕오천축국전』을 도서관에서 빌렸다는 사실이지요. 안타깝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사이를 원래 그대로 틈으로 남겨두고 살아가는 일뿐”4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즐겨 적던 릴케Rainer Maria Rilke의 글귀를 따릅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용기다. 아주 기이하고도 독특하고 불가해한 것들을 마주할 용기.”5 『왕오천축국전』의 ‘소발률’, 동서양 모두 ‘세계의 끝’이라 불렀던 낭가파르바트Nanga Parbat라는대설산으로 향하지요. 이젠 목숨까지 걸고 해석해보려 합니다. 작중 화자인 ‘나’가 글로 번역을 했다면, 설산을 오르는 ‘그’는 온몸으로 번역을 한 셈이지요. 글쎄요, 끝내 뭔가를 봤을 겁니다. 현실과 환각이 만나는 ‘세계의 끝’의 미혹 또는 매혹. 목숨을 건 번역 이야기는 고혹적입니다.
철저한 독서의 오래된 역사
간만에 사사키 아타루입니다. “번역이란 철저한 독서입니다. 한 자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벌거벗은 ‘읽기’의 노정입니다.”6 도서관에 관한 책을 읽다가 이 철저한 독서의 역사가 생각보다 오래된 것임을 깨달았어요. 현재 확인된 최초의 문자는 기원전 3000년경 수메르인들이 점토판에 새긴 것이지요. 그런데 이후 수메르인을 정복한 아카드인 등 여러 민족이 모두 수메르인의 설형 문자를 그대로 씁니다. 훗날 로마가 멸망한 후에도 유럽인들이 굳이 라틴어를 사용한 이유와 흡사하지요. “결과적으로 그 지역 필경사들은 자신들의 언어뿐만 아니라 수메르인이 사용하던 다양한 설형 문자의 가치를 알아야 했다.”7 그래요. 최초의 번역가는 필경사이며, 번역은 문자처럼 역사가 유장합니다.
1980년 시리아에서 고대 도서관의 원형을 발굴했지요. 점토판이 가득한 이 문서 보관실을 기원전 2300년경에 지었답니다. “60여개의 점토판에는 수메르어로…(중략)… 새겨져 있었고, 28개의 점토판에는 수메르어가 에블라어로 번역되어 있었다”8고 합니다. 번역 자체가 수천 년 문명의 오랜 흔적이지요. 철저한 독서가 켜켜이 쌓여 있어요.
허대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받았다. 졸업 후 1999년부터 16년째 조경설계사무소를 다니고 있다. 4년 전부터는 개인 주택 정원, 어린이집과 학교의 외부 공간, 농장 조경계획, 공장 외부환경 개선사업, 아파트 조경 가이드라인 등 하나하나 성격이 다른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공간을 설계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야 나중에 그 공간에서 머무는 사람들도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즐겁게 일하는 조경설계 공동체를 꿈꾸고 있다. 현재 스튜디오테라(STUDIOS terra)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공저로 『철새협동鳥합』이 있고, 제프 마노가 쓴 『빌딩 블로그』를 번역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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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로이 이마무라
SWA 그룹 소장
로이 이마무라는 일본계 미국인 디자이너로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모더니즘 조경의 반세기 역사를 현장에서 일궈 온 대표적인 실무 조경가다. 대규모 주거단지 및 공원 계획에서부터 오피스, 호텔, 리조트, 캠퍼스, 골프장, 마리나, 테마파크, 도시 광장, 환경 보전 계획 등 그의 프로젝트 목록은 조경가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스펙트럼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아닐 정도다. 또한 캘리포니아, 플로리다 등 그가 주로작업해 온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인도, 대만, 동남아시아 각국 및 한국과 중동 등에서 다양한 차원의 프로젝트를 관리하고 지휘해왔을 정도로 세계화 시대의 조경가로서 광활한 지리적 범위의 프로젝트를 수행해왔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시작한 조경 실무를 올해로 50년째 하고 있다. 특히 SWA 그룹이라는 한 직장에서 40년 넘게 근속한 꽤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누구나 열정만 있다면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활발한 창조 작업을 할 수 있는 곳이 조경 분야라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사례다. 그의 디자인은 낡아지기보다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과감해지고 젊어지고 새로워졌다. 오히려 오랜 경험과 경륜은 디자이너가 성숙하고 완성된 결과물을 생산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로이 이마무라는 단지 회사 내 연장자로서 조언이나 자문 역할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가 제도판 위를 넘나들며 순식간에 뽑아내는 콘셉트 드로잉, 평면과 단면, 식재와 디테일 도면은 시공을 위한 청사진의 수준을 넘어 하나의 예술품이라 부를 만하다. 30년 넘게 소장principal으로서 팀과 회사를 이끌고 관리자로서 경력을 쌓았지만, 그는 오늘도 여전히 놀라운 생산력을 지닌 실무자다. 젊은 설계가의 이직률이 높고 다양한 여러 현장 경험을 갖춘 실무형 마스터 디자이너가 드물며 종종 관리자와 설계 담당자와 자문가의 역할이 분리되는 우리나라의 상황에 비한다면, 로이 이마무라의 경우는 먼 나라의 꿈 같이 들리기도 한다. 전반적인 프로젝트의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가장 세심한 부분까지 직접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설계가는 이상적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우리에겐 한쪽에만 치우친 불구와 같은 디자인 프로세스가 어느덧 상식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머리만, 눈만, 입만 갖춘 디자이너. 반면에 손발로서만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밝히는 디자이너 등 우리는 스스로 그러한 편중된 역할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때로는 자처하기도 한다. 과정이 결과물을 좌우하는 것이 상식이라면 온전한 지성과 단련된 표현력을 겸비하고 그에 더해 따뜻한 가슴의 연륜까지 갖춘 조경가를 찾아보기 힘든 설계 산업의 미래는 상당히 불안하다. 이제 그와 같은 조경가를 길러내고 유지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난 것인지 사뭇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수많은 프로젝트를 관통하는 로이 이마무라의 디자인은 매우 경제적이면서도 풍부한 것이 특징이다. 그는 스스로 현장의 자연적 조건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설계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해안 습지에 맞닿은 플로리다의 호텔에서는 여유로운 정적과 수평적 평화로움이 있고, 일본 나가노의 계곡부에 위치한 리조트에서는 급격한 사면이 지극히 아름다운 인공미를 돋보이게 하는 팔레트가 되기도 한다. 상하이 외곽의 고급 주택 단지에서는 수로변에 화초가 자연스럽게 자라난 듯한 여유로운 풍경이, 대만의 전자회사 본사 사옥에서는 예리한 칼로 자른 듯한 선형의 디자인과 한 치도 어긋날 것 같지 않은 치밀한 디테일이 공중으로 떠오를 듯 경쾌하게 새겨져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통신회사 사옥의 전면부 정원에서는 명확한 기하학과 절제된 미니멀리즘이, 이전에 군 기지였던 대학 캠퍼스에서는 자유로운 예술적 표현이 두드러진다. 그는 특정한 설계 언어나 스타일 또는 자기만의 질서를 추구하기보다는 현실에서 영감을 얻고 상황에 맞게 변화하는 상황주의자situationist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전시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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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와 헤어지지 않기
re-VIEW 2014
“그래서 뭐가 떠오르는데” “영화 이야기가 재밌던데. 제목이 뭐더라? 시네마 스케이프? 암튼 그 글 때문에 못 본 영화 찾아본 적도 있어. 에디토리얼은 꼭 챙겨 읽는 편이지. 그들이 설계하는 법은 꼼꼼히는 아니지만, 그래도 정독하는 편이고. … 뭐, 그 정도인 것 같은데. … 아, 30대 조경가 30명 다뤘던 특집도 기억난다. 하이라인은 최근호니까 생각나고 … 그리고 미안한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난 작품은 이미지만 봐. 텍스트에는 이상하게 눈이 안가더라고….” 조경 전문 잡지에서 영화 이야기가 재미있다는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다시 수화기를 든다. “저희가 송년호 특집으로 올 한 해 동안 잡지에 실렸던 원고 가운데 독자 여러분이 흥미롭게 보셨던 글을 다시 들여다보려는 기획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혹 기억에 남는 글이 있으신지요” “음, 글쎄요. … 혹시 예시는 없나요? … 아, 최근에 실린 것 가운데는 하이라인 특집이 생각나네요. 거기에 실린 인터뷰도 흥미로웠습니다. 예전 글은, 요즘 기억력이 영 좋지 않아서….” “아유, 아닙니다. 이 정도만 해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으며 나는 정말 감사한 마음이 컸지만, 그 곱절로 막막해졌다.
11권의 잡지를 책상 한켠에 쌓아두고 우선 목차를 일별한다. 6월호 목차를 넘기고 나니 1월호 목차가 다시 가물가물해진다. 이래서는 영 진도가 나가질 않겠다 싶었다. (조한결, 양다빈 기자의 손을 빌려) 특집과 연재별로 글 제목과 필자만 열거한 리스트를 뽑아본다. 리스트가 한결 일목요연해졌지만, 작품과 설계공모까지 포함하니 이 또한 A4 10여장 분량이다. 마지막으로 그 목록에서 필자 이름만 가나다순으로 정리해보았다. 강동진, 강연주, 고정희, 고주석, 김병채, 김상윤, 김세훈, 김승남, 김아연, 김연금, 김영민, 김용규, 김용택, 김이식, 김일현, 김정윤, 김정화, 김진오, 김현민, 김현숙, 박경의, 박선희, 박성태, 박소현, 박승진, 박윤진, 박인석, 박인수, 박정현, 박해천, 박희성, 반이정, 서영애, 송하엽, 신현돈, 안계동, 안동혁, 오경아, 오휘영, 우성백, 유승종, 유영수, 윤정원, 윤희연, 이경근, 이경훈, 이명준, 이병철, 이상민, 이수학, 이원호, 이유직, 이윤주, 이재연, 이종호, 이준규, 이준석, 임승빈, 전상인, 전진삼, 정석, 정욱주, 정종은, 조경진, 조병준, 조한, 진양교, 차태욱, 최도인, 최막중, 최신현, 최영준, 최이규, 최정민, 최혜영, 함성호, 허대영, 홍미영, 황주영. 강동진 교수부터 황주영 박사까지 총 79명이다. VIEW에 등장한 필자를 비롯해서, 본지 편집진은 포함되지 않은 명단이다 (1월호 특집 “309인에게 조경의 리얼리티를 묻다”에 도움을 준 309인과 7월호 특집 “조경가로 자라기 - 30대 조경가 30인에게 던진 다섯 가지 질문”에 참여한 30인도 미포함). 한 분씩 이름을 불러보며 그들이 쓴 글을 기억 저편에서 소환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우성백은 누구지? 아, 여름방학때 실습 나왔던 학생이구나. 실습 나왔다가 9월호 특집에 필자로도 참여했었지!’ ‘그러고보니, 강동진 교수(6월호와 10월호)와 황주영 박사(4월호와 11월호)는 특집에만 두 번씩이나 글을 써주셨네. 이리 고마울 수가….’ ‘조경 동네 거주자가 아닌 필자가 대략 25분 정도이니, 조경계 외부로 필자 층의 외연을 확대해보자는 초기의 의도는 절반의 성공인 셈이구.’ ‘신진 필자 발굴은 나름 노력한 흔적이 조금씩이나마 보이는군.’ ‘국내 작품에는 비평이 꽤 실렸는데, 해외 작품은 역시나 저조하네!’ ‘이외에, 뭐, 다른 이슈는 없었나’ 여기까지 써놓은 상태에서 송년호 특집 회의가 열렸다. 기자들이 추천한 목록을 정리하니, 아래 분량이 순식간에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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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드 바이 컴피티션
re-VIEW 2014
조경가에게 설계공모는 도전과 기회의 영토다. 잘 차려진 잔치판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험하고 평가받을 수 있다. 신인이라면 디자인 능력만으로 등용의 문을 화려하게 통과할 수 있고, 기성의 조경가 역시 자신의 위상을 한 번에 끌어올릴 수 있다. 물론 설계공모가 좋은 설계를 보장하는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렇지만 조경 설계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새로운 공간에 대한 이념과 형태를 제시해 온 설계공모의 파급력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도시 공원의 대명사 센트럴 파크의 산파도 공모전이었고, 센트럴 파크에 반기를 든 혁신의 장 라빌레트 파크도 설계공모의 산물이었다. 공원과 도시의 대안적 관계 맺기를 주창한 다운스뷰 파크도 마찬가지다. 2000년대 중후반의 한국 조경은 “조경의 시대”라는 레토릭이 결코 과장이 아닐 만큼 호황을 구가했고, 그 배경에는 유례없는 설계공모의 풍년이 있었다.1 국내외의 경기 불황으로 설계공모의 양은 급감했지만, 2014년의 『환경과조경』 열두 권에 실린 공모전들은 새로운 경향과 쟁점들을 감지하게 해 준다.
진화하는 설계공모의 ‘과정’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특징은 설계공모의 ‘과정’이 전통적인 방식을 탈피해 다각도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당선작이 선정된 직후 특종 격으로 실은 8월호의 ‘리빌드 바이 디자인Rebuild by Design: Hurricane Sandy Regional Planning and Design Competition’이다. 이 공모전은 계획과 설계를 통해 재난 지역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향상시키고자 한 지향점에서도 큰 의의를 지니지만, 공모 과정 자체가 혁신적이었다. ‘리빌드 바이 디자인’은 정해진 사이트와 프로그램을 주고 참가자 각각이 제출한 제안 중에 가장 나은 안을 뽑는 관례화된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1년에 걸친 긴 공모 과정을 통해 참가자들은 스스로 사이트의 이슈를 찾고 그 중요성을 입증해야 했다. 프로젝트 자체를 만들어나가는 공모였던 것이다. 설계공모 1단계에서는 참여 전문가의 구성, 역량, 간략 제안서를 바탕으로 5~10팀을 후보로 선정했다. 2단계는 장기간의 리서치를 통해 프로젝트를 발굴하고 팀별로 하나의 프로젝트를 결정하는 과정이었다. 3단계를 통해 각 프로젝트를 발전시켜 복수의 최종 프로젝트를 확정했고, 4단계는 계획의 실행 단계다. 이 공모전을 다룬 비평에서 적절히 진단되고 있듯, 이 복잡한 공모 과정의 가치는 “각 팀들이 단순한 경쟁 구도에서 벗어나 각자가 수행한 지역에 대한 분석과 그로부터 도출한 중요한 아이디어를 다른 모든 이들과 공유함으로써 지역 전체를 위한 더 나은 해법을 찾아내려는 공통의 목적에 기여”2 했다는 점에 있다. 특히 2단계인 리서치 과정은 전문가와 지역 사회가 함께 사이트의 조건을 충실히 이해하고 디자인 이슈를 발굴하는 긴 여정이었다는 점에서 눈여겨볼만하다.
좋은 설계공모가 되기 위해서는 대체로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우선, 우수한 디자이너들이 참여하여 경쟁하면서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작품을 제출해야 한다. 뛰어난 작품을 정확하게 읽고 공정하게 가려낼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심사위원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조건이다. 이 두 가지 기본 조건의 전제가 되는 것이 설계지침이다. 설계공모의 성과는 설계지침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라빌레트 파크를 공원 설계 역사의 전환점으로 평가하는 이면에는 혁신적이면서 동시에 내실을 갖춘 설계공모 지침서가 놓여 있다. 퐁피두센터 설계공모 지침서는 그 자체로서도 현대 건축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는 자료라는 평가를 받는다. 설계지침은 곧 텍스트로 쓰는 설계이자 실천적 비평인 셈이다. 그러나 ‘리빌드 바이 디자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최근에는 디자이너, 심사위원, 설계지침 외에 ‘과정’이 부각되고 있는 추세다. 1단계 공개 공모와 자격이나 제안 심사(RFQ나 RFP)를 통한 2단계 초청 공모로 대별되는 전형적인 틀을 벗어나, 디자이너와 심사위원과 전문위원뿐만 아니라 주최자, 주민, 기업, 정부 등 다양한 주체가 다각적인 방식으로 다단계의 공모 과정에 참여하고 소통함으로써 그 과정 자체가 설계안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토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환경과조경』이 다룬 여타의 해외 설계공모에서도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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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과 하늘 사이
지극히 주관적으로 꼽은 올해의 작품
아무래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최근의 것들이다. 특히 ‘하이라인 3구역’을 다룬 11월호는 주변의 평도 꽤 다양하고 뜨거웠다. 더구나 ‘하이라인’ 아닌가? 굳이 서울역 고가 공원화 프로젝트와 연관 짓지 않더라도, JCFO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의 하이라인은 충분히 ‘올해의 작품’으로 꼽을 만하다. 하지만 하이라인의 유명세는 올 9월에 개장한 3구역 때문이 아니라 1999년부터 지속된 ‘하이라인 친구들’의 장기간에 걸친 노력과 2009년에 개장한 1구역 덕분이기에, 2014년이 더 각별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9월호에 실린 거버너스 아일랜드의 의미가 더 커 보인 것이 사실이다. West8이 설계한 거버너스 아일랜드는 2013년 가을, 블룸버그 시장이 퇴임 전에 리본 커팅식을 갖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일반에 공개된 것은 올 5월이다.
설계공모 때부터 큰 주목1을 받은 점을 고려하면 2014년의 작품으로 꼽기에 충분한 작품이다(물론 완공작에 대한 평가는 상이할 수 있다). 그런데, 거버너스 아일랜드는 전혀 다른이유로 이 지면에 실렸다.
국내 작품으로 시선을 돌리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이하 DDP)가 드디어 그 실체를 드러낸 점을 꼽을 수 있다. 과정상의 문제점에 대한 논란이 뜨거웠던 만큼, 완공 직후부터 쏟아진 언론과 일반의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서울한복판 우주선? 불시착일까 연착륙일까”부터 “비정형 곡선미에 감탄이 절로”, “곡선만으로 연결된 괴물”, “서울의 새로운 세계적 랜드마크”, “일대의 역사 환경을 무시한 괴물 우주선”, “4,840억 원을 쏟아 부어 만든 흉물거리, 운영에는 390억 원 소요”, “서울의 명물? 돈 먹는 괴물”, “관람객 400만 명 돌파”, “돈 먹는 하마에서 관광 효자 상품으로”, “재정자립도 여전히 불투명” 등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관련 뉴스가 끊이지 않았다. 뉴스의 초점도 설계자 선정 과정부터 막대한 조성과 운영 비용, 활용 방안, 빌바오 효과에 대한 의구심과 낙관론까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었다. 그래도 묵직한 울림을 준 것은, 일련의 DDP 조성 과정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었다. 그리고 그와 궤는 다르지만, 동대문 일대에 대한 진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 김연금 소장(조경작업소 울)의 글은 되새길 만하다. “그래서 결론은, DDP는 동대문이라는 큰 세계에서 별것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대단한 명물도 대단한 문제도 아닐 수 있다. DDP가 잘된다고 하면 동대문이 있기 때문일 테고, 잘되지 않는다고 해서 크게 동대문에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 DDP가 별거 아닐 수 있다는 결론은 바람이기도 하다. DDP가 별거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온갖 풍파 속에서 시간을 견뎌온 동대문이 고작 DDP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2 하지만, DDP역시 전혀 다른 이유로 이 지면에 실렸다. 아, 한 가지 정도는 더 기록에 남겨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여러 가지 논란과 별개로, DDP 준공 직후 완성도에 대한 감탄이 꽤컸다는 점이다. 특히나 각종 집기가 들어차기 전에 진행된 프레스투어 때는 색다른 공간감에 대한 호평이 상당했다. 누군가는 텅 비어 있는 공간이지만 도리어 꽉 차 보였다고 했고, 또 다른 이는 샘솟는 호기심을 주체하기 쉽지 않았다고 했다. 프레스투어 인파가 워낙 많아서 떠밀리듯 다녔기 때문이겠지만 공간 속을 미끄러지듯 유영하는 느낌이었다는 고백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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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2014
‘309인에게 조경의 리얼리티를 묻다’로 문을 연 2014년의 마지막 특집은 ‘re-VIEW 2014’입니다. 꽤 오랫동안 송년호 특집으로 진행했던 ‘조경계 10대 뉴스’ 대신 한 해 동안 본지에 실린 여러 작품과 공모, 원고를 되돌아보는 기획을 준비했습니다. 주요 뉴스를 통해 한 해를 정리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고 1년 동안의 잡지 콘텐츠를 돌아보기로 한 까닭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그 하나는 달라진 조경 분야의 매체 환경입니다. 라펜트와 한국조경신문이 각각 일간과 주간 단위로 조경 뉴스를 전달하고 있는 상황에서, 월간으로 발행되는 『환경과조경』의 매체 성격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올 초부터 ‘뉴스’ 지면 대신 잡지 뒷부분에 ‘VIEW’ 섹션을 운영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pre-view, re-view’의 의미를 담고 있는 ‘VIEW’ 섹션은 뉴스 성격의 사실 전달보다는, 짧은 분량이더라도 ‘들여다보기’를 시도하고자 마련한 꼭지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월간지가 소화할 수 있는 긴 호흡의 콘텐츠에 조금 더 진한 방점을 찍어보고자 송년호 특집 역시 뉴스가 아닌 주요 기사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둘째는 ‘조경 문화 발전소’를 표방하며 새로운 첫 걸음을 뗀 2014년의 굵직한 흐름을 기록으로 남겨두기 위해서입니다. 작년 9월부터 4개월여의 준비 기간을 거쳐 첫 선을 보인 1월호를 만들 때의 초심을 되돌아보고, 편집진이 좌표로 설정한 비전을 어느 정도 실천했는지 찬찬히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이를 토대로 2015년의 밑그림을 그려보고자 한 것이지요.
하지만 기획이 진행되는 도중 작은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12월호 특집을 위한 편집회의를 위와 같은 두 가지 이유로 기획하고 준비했지만, 실제로 정리된 내용은 ‘에디터가 지극히 주관적으로 꼽은 올해의 ○○’ 정도가 된 것입니다. 에디터 한 명 한 명이 가장 기억에 남는 ‘올해의 ○○’을 각각 3가지씩 선정 후 진행한 편집회의는 애초의 기획 의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그 내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툭 던진 “너무 딱딱하고 재미없다”는 중얼거림에 단체로 홀려버린 탓입니다. 가장 의미 있는 작품, 완성도가 높은 작품, 시사점이 큰 작품을 한 번 더 리뷰해 보자는 의견은 어느새 잦아들었고, ‘지극히 주관적인 에디터의 시선’이 급부상했습니다. 그 결과는 이어지는 내용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특집의 전체 제목을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두 번째 원고로 실린 “리빌드 바이 컴피티션” 같은 경우는 초기의 의도가 온전히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주 의미가 없지는 않다고 자위하는 이유는, 독자 여러분 각자가‘올해의 ○○’을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는 최소한 될 수 있겠다 싶어서입니다. 이렇게 한 해를 마무리합니다.
1. 여울과 하늘 사이 _ 편집부
2. 리빌드 바이 컴피티션 _ 배정한
3. 텍스트와 헤어지지 않기 _ 남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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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조경인 특별상 서주환
제17회 올해의 조경인
2014년 조경계는 유난히 다사다난했다. 시민과 함께 한 ‘조경의 날’ 행사를 비롯해 얼마 전에는 광화문광장에서 ‘조경문화박람회’가 열려 조경과 대중의 거리가 한 뼘쯤 가까워진 계기가 마련되었지만, 한편에서는 조경의 업역을 축소시키는 법 제·개정 문제가 지속적으로 불거져 위기감이 고조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조경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위기는 늘 존재했고, 학계와 업계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러한 파고를 헤쳐 나가며 조경의 영역을 만들어왔다.
서주환 교수는 조경학자이지만 올해 개최된 제11회 조경의 날 조직위원장을 맡아 범조경계 행사를 주도하고 조경관련 정책을 만들고 바로잡는 데 기여하여 ‘올해의 조경인’ 특별상을 수상하였다.
‘조경의 날’을 축제의 장으로
올해 1월 공원법 제정일인 3월 3일이 새로운 ‘조경의 날’로 선포되고, 조경계만의 내부 행사에서 시민과 함께하는 대외 행사로 규모와 의의가 확장되었다. 지난 10년간 지속해온 행사에 변화를 주는 데 진통이 없었을 리 없다. “야외에서 진행되는 행사이다 보니 장소를 섭외하고 서울시청의 협조를 받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얼마 전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던 조경문화박람회 역시 함께 준비한 행사인데, 준비 기간이 짧다보니 결국 이원화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세월호 참사가 발생해 조경문화박람회는 재차 연기되었지만, ‘추모의 정원’을 조성하면서 많은 국민들이 조경은 몰라도 추모의 정원은 알게 되기도 했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조경의 날과 조경문화박람회가 잘 마무리되어 조경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작은 보탬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급하게 준비된 행사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올해 조직위원장으로서 향후 행사에 대한 제언을 부탁했다. “꼭 3월 3일이 아니더라도, 박람회와 학회 시상식, 환경조경대전 등 각종 조경 행사가 한데 어우러지는 종합적인 예술제가 열린다면 홍보도 효율적이지 않겠습니까. 미리 계획을 세우고 준비한다면 해외에도 홍보할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