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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버너스 아일랜드
Governors Island
거버너스 아일랜드를 위한 새로운 공원 및 공공 공간조성 프로젝트는 한때 버려졌던 이 섬을 극적으로 변모시키는 것과 이 장소가 지닌 여러 가지 특성을 명확히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궁극적으로는 거버너스 아일랜드를 관광 명소이자 랜드마크로 바꾸는 것이다. 그중 1단계 공사가 지난해 가을 마무리되었다. 프로젝트는 2006년 개최된 국제 설계공모전 수상작과 2010년 수립된 공원 및 공공 공간 마스터플랜The Governors Island Park and Public Space Master Plan을 바탕으로 진행되었다. 1단계 공사를 통해 30에이커 규모의 신규 공원 및 공공 공간이 섬 전역에 걸쳐 조성되었고, 방문객을 위한 주요 시설물이 역사적 의미를 지닌 노스 아일랜드North Island 지역에 들어섰다.
프로젝트의 1단계 지역에는 리겟 테라스Liggett Terrace, 해먹 그로브Hammock Grove, 놀이 잔디밭Play Lawn, 그리고 노스 아일랜드의 역사 유적지가 포함되는데, 소이선스 랜딩Soissons Landing, 퍼레이드 그라운드Parade Ground, 그리고 사우스 배터리South Battery 등이 이에 속한다. 설계를 맡은 West 8은 정원, 숲, 자전거길과 더불어 맞춤형 조명, 좌석, 그리고 이정표 등을 개발했으며, 이를 통해 섬 전역에 걸쳐 펼쳐진 새로운 공공 공간 사이의 연계성을 높였다.
뉴욕 시는 거버너스 아일랜드의 공원 및 공공 공간 그리고 기반 시설의 재설계 및 개선을 위해 2억5천만 달러 이상을 투자하기로 결정했는데, 여러 단계를 거쳐 진행될 예정이다. 15년 동안 폐쇄되었던 거버너스 아일랜드가 2005년 8천여 명의 방문객들에게 공개되자 뉴욕 시민들은 이 섬의 매력을 재발견하게 되었고, 2013년 한 해 동안 거버너스 아일랜드를 찾은 방문객수는 총 39만9천 명에 달했다. 명실공히 관광 명소가 된 거버너스 아일랜드는 매일 일반인에게 개방되고 있으며, 페리를 이용하면 언제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방문객의 85%가 뉴욕 시를 구성하는 5개 행정구에 거주할 정도로 지역민의 주말 나들이 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역사와 배경
델라웨어족 인디언, 네덜란드계 정착민, 영국군, 그리고 미국 해안경비대 등은 모두 거버너스 아일랜드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으며, 이 공간이 지닌 풍요로운 문화적·물리적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들어 거버너스 아일랜드는 지하철 렉싱턴 에비뉴 라인Lexington Avenue Line 건설에서 비롯된 토사 매립으로 인해 그 면적이 넓어져, 69에이커였던 섬이 172에이커로 커지게 된다. 대상지에 남아있는 여러 동의 빈 건물들과 식재 구성 등을 통해 미군과 해안경비대가 주둔한 역사와 그들이 남긴 흔적을 알 수 있다.
거버너스 아일랜드의 자연환경은 다소 역설적이라 할 수 있는데, 도시화된 뉴욕 시를 배경으로 일련의 독특한 미기후가 존재하고 있다. 거버너스 아일랜드 공원 및 공공 공간 마스터플랜의 대상 지역은 총 87에이커 규모로, 북쪽에 위치한 역사 지구historic district가 약 33에이커, 남쪽에 있는 신규 공원 및 공공 공간이 약 40에이커를 차지하고 있다. 2.2마일 길이의 그레이트 프롬나드Great Promenade는 섬 전역을 빠짐없이 연결하고 있다.
대상지 분석과 계획 수립 과정
디자인 팀은 마스터플랜의 내용을 충실히 구성하기 위해 방문객들의 이용 유형을 면밀히 관찰했다. 이동이 가능한 가구처럼 단순한 콘셉트에서부터 페리 탑승 대기나 승객 하선과 같은 복잡한 수송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귀납적으로 연구하고 직접 관찰했다.
성공적인 프로그래밍 전략의 상당수가 마스터플랜으로부터 발전된 것들이며, 여름 동안 그 타당성에 대해 검증을 받았는데, 무료 자전거 대여, 장대한 수변 산책로, 그리고 안전이 보장된 섬 둘러보기 등을 예로 들수 있다. 대중의 접근을 용이하게 하는 한편, 개장 초기의 이용객 증대를 꾀하기 위해 디자인팀은 각기 다른 이용 패턴을 갖고 있는 광범위한 사람들을 직접 만나 조사를 진행했다. 수천 명의 뉴욕 시민들이 자신이 공원과 공공 공간에서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생각을 밝혀주었고, 이런 내용이 고스란히 마스터플랜에 반영되었다. 낮잠을 잘 수 있는 해먹, 조류 서식지, 운동 경기장, 그리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자전거 등이 좋은사례다.
Lead Designer/Prime Consultant West 8 urbandesign & landscape architecture p.c.
Associate Landscape Architect Mathews NielsenLandscape Architecture
Lead Civil Engineer Magnusson KlemencicAssociates
Local Civil Engineer AKRF
Geotechnical Engineer Hart Crowser Inc.
Signage and Wayfinding Pentagram
Lighting Tillotson Design Associates
MEP Engineer Dagher Associates
Soils Consultant Pine and Swallow Environmental
Irrigation Consultants Northern Designs
Code Consultants Code Consulting Inc.
Cost Estimator Faithful & Gould
Operations and Maintenance ETM Associates
Surveyors of Record Langan
Water Feature Designers Fluidity Design
Archaeological Consultants Linda Stone, RPA
Specification Consultants ConstructionSpecifications, Inc.
Client The Trust for Governors Island
Location New York, USA
Area 30 acres
Design 2007~2013
Realization(Phase 1) 2013
West 8은 네덜란드 로테르담을 기반으로 뉴욕과 벨기에에 지사를 둔 도시·조경 설계 전문 오피스다. 1987년 설립된 이래로 대규모 도시 및 환경 설계 프로젝트에서부터 워터프런트, 공원, 광장, 정원, 시설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모와 성격의 프로젝트를 다루고 있다. 복잡한 디자인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조경가, 건축가, 도시설계가, 산업디자이너 등 70명이 넘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일하고 있으며 종합적이고 다학제적인 접근을 통해 디자인을 수행하고 있다. 로테르담 쇼부르흐플레인(Schouwburgplein), 암스테르담 보르네오 도시설계, 런던의 업무단지 치스윅 파크(Chiswick Park), 스위스 이베르동-레-방(Yverdon-les-Bains) 2002 엑스포 등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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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피할 수 없는 인문학과 종이책의 쇠퇴
출판업은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고들 한다. 아마 올해보다 내년이, 내년보다 그 후년이 더 나빠질 게 분명하니 당분간은 더 들어야 할 이야기다. 우리의 희망과 무관하게, 종이와 활자라는 매체를 통한 지식의 유통과 습득은 거대하면서도 급속한 전환기에 접어들었다. 다만 우리가 어느 위치에서서 이 변화를 바라보고 있느냐가 관건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애도(또는 환영)는 잠시 접어두고 인쇄매체의 쇠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되물어보아야 할 때다.
하이데거는 1946년에 쓴 ‘휴머니즘에 관한 편지’라는 글에서 휴머니즘이 처음 출현한 때를 로마공화정이라고 했다. 그리스인으로부터 전해 받은 교양(paideia, 독일어로는 Bildung)을 로마의 덕으로 고양시킨 시기를 시작으로 보는 것이다. 15세기 르네상스의 인문학(휴머니즘)이 고대 그리스 로마인이 남긴 글과 유산에 대한 화답이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설명이다. 르네상스를 고전의 부활로 아는 우리의 상식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책은 인문학과한 운명이었다. 사실 르네상스 이래 인문학은 휴머니즘, 달리 말해 고전을 통해 인간성을 고취하고 더 나은 인간을 만들고자 한 거대한 기획이나 다름없었다. 책은 이를 실현하는 최고의 도구였다. 보다 나은 정치 체제를 만들어 인류 일반의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열망이 아니라면 우리가 무엇하러 플라톤과 루소, 홉스, 그리고 마르크스를 읽겠는가? 같은 언어를 쓰고 비슷한 감성과 정서를 공유하는 공동체를 꿈꾸게 하는 데 소설과 책 이상으로 효율적인 것이 무엇이 있었던가? 인간의 삶과 관계하기에 역시 인문학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건축과 조경 쪽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알베르티부터 르 코르뷔지에에 이르기까지 보다 나은 공간과 환경을 향한 욕망이 아니었다면 저 책들이 쓰이기나 했겠는가? 그런데 하이데거는 고대인과의 우정 어린 대화로 미래를 꿈꿔온 인문학이 이제 한계에 달했다고 진단한다. 이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인 독일 철학자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는 “인문학(책)으로 인간을 도덕적으로 만드는 계획이 실패했음이 명백해진 지금 우생학이 그 역할을 하면 왜 안 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기실, 인문학의 프로젝트가 끝난 자리를 기술과 생리학이 대신하는 게 현재 상황이다.
MIT 미디어랩을 만들고 디지털 문명을 선도해온 네그로폰테Nicholas Negroponte는 최근 강의에서 옛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수십 년 전 등장한 최초의 터치스크린, 태블릿 등을 보여주며 지금의 디지털 혁신은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회고담만 늘어놓고 강연을 끝내자 조바심이 난 사회자가 무대로 올라가 질문을 던진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 까요” 네그로폰테는 지식 습득 방식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머뭇거리면서도 확신에 차서 이야기한다. 셰익스피어를 힘들게 읽어서 아는 게 아니라 먹거나 몸에 주입해서 단박에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한국의 사정도 이와 유사하다. 많은 통계에 따르면 현재 한국 출판 시장을 지탱하는 세대는 40대 이상이다(남성의 비율이 더 높다). 실용서나 특화된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책의 성패는 40대 이상의 구매에 달려 있다. 이는 단순히 한국 사회가 노령화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지금 40대 이상은 80년대 학번과 90년대 초반 학번들이다. 한때 책을 믿었던 이들이다. 출판사 문 앞으로 대형 서점 트럭이 달려와 줄을 서서 책을 실어가던 사회과학 서적의 전성기를 경험했던 이들이다. 책을 통한 계몽과 사회 변혁을 꿈꾸었던 경험은 이후에도 꾸준히 책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관심사뿐 아니라 자녀들에게 가장 책을 열성적으로 사주는 세대다. 유아 시장의 급속한 확대와 축소, 청소년 시장의 탄생 등은 386세대 자녀의 성장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이 열정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 이후 세대에게 책은 절대적 권위와 정보의 유일한 원천이 아니라 수많은 매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 세대는 또한 세상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체득했다. 한국에서 출판 동향은 세대론과 나란히 간다.
전자책이냐 종이책이냐를 떠나 책을 읽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외부적 환경의 변화를 논하기 이전에― 저수많은 인문사회과학 책이 우리가 원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그다지 유용하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고담준론과 사회과학의 치밀한 분석으로 우리는 사회의 교양을 높이기는커녕 도처에서 생겨나는 괴물조차 막지 못했다. 지금 국내에서 책의 위기는 87년 체제를 이끌어낸 열망이 소진되고 냉소와 허무만이 남았음을 알리는 징표다. 플라톤과 루소는 우리의 정치를 조금도 나아지게 하지 못하고, 마르크스는 우리의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무기력하며, 100만 부나 팔린 샌델Michael J. Sandel의 『정의란 무엇인가』는 우리 사회를 정의롭게 하는 데 아무런 힘이 없다. 책이 말하는 이상과 발을 딛고선 현실이 도무지 만나지 않을 것 같은데 책을 읽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실제 삶을 바꾸는 데 아무런 힘도 없는 인문학이 자기계발과 과시용 지식이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 위기를 일찌감치 감지한 이들이 인문학의 실패를 말했을 때부터 책의 쇠퇴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셈이다. 1960년대를 기점으로 인쇄 매체는 영상 매체에 자리를 넘겨주었다고 레지스 드브레Régis Debray가 일찌감치 진단하지 않았던가. 이제 누구도 인문학-종이책-자국어-계몽이라는 패러다임이 쇠하고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종이책이 쉽사리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음원의 시대를 맞아 LP가 역설적으로 부활한 것처럼, 물성의 힘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이사할 때마다 책이 제일 무겁고 부피가 크다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우리는 책을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읽고 쓰고 고뇌하고 떠들며 책을 ‘만드는’ 일을 사랑한다. 이 사랑이 골방에 파묻힌 아날로그 애호가의 페티시가 아니라 광장에 나가 다른 이들과 지식을 나누는 것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 지 고민해야 할 때다. 이 물음에 답하기란 지극히 어려울 것이고, 모두에게 유용한 하나의 답도 없을 것이다. 다만 출판, 잡지, 신문 등에 관여하는 모든 이들이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될 것은 분명하다. 책을 사랑하는 업보를 지닌 모든 이의 건투를 빈다.
박정현은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2012년 『와이드AR』 건축비평상을 수상했다. 『에스콰이어』, 「한국일보」 등에 칼럼을 기고하며 도서출판 마티의 편집장으로 일하고있다. ‘1980년대 한국 건축의 담론 구성’을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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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리빌드 바이 디자인’을 필두로 한 지난 호의 콘텐츠에 대해 많은 독자들이 피드백을 주셨다. 편집자에게는 독자의 반응 자체가 그 어떤 영양제나 피로회복제보다 힘이 된다. 이번 호에는 피터 워커, 조지 하그리브스, 아드리안 구즈 등 스타 조경가들의 근작이 한꺼번에 실리지만, 편집부가 두 달 넘게 준비해 온 특집은 정작 ‘책’ 이야기다. 초여름의 어느 평화로운 편집회의에서 책으로 가을을 열자는 의견을 누군가가 던졌고, 기왕이면 편집부 모두가 참여하는 책 기획으로 엮어보자는 성급한(?) 결론을 내렸다.
매주 아이디어가 백출했다. 제목 후보로 활자로 지어진 경관, 활자와 경관 사이, 이미지의 숲에서 활자 산책을 떠나다, 조경-책으로 말하다, 여기 129권의 책이 있다, 텍스트의 숲 속으로 등 갖가지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용기백배하여, 그래도 책을 읽고 펴내는 이유, 그들이 책을 쓰는 까닭, 나는 이런 독자를 원한다, 나는 이런 책을 원한다, 책의 101가지 활용법, 서점에서 조경 서적을 들추고 있는 당신에게, 읽어야 사는 여자(남자), 이런 책은 왜 없을까 등 정말 다양한 기획 꼭지를 수차례 구상하고 검토했다. 그러나, 김현의 책 제목처럼 ‘행복한 책읽기’를 꿈꾸며 출발했지만, 역시 책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그렇듯 스트레스의 일등공신이 아닐 수 없었다. 기획안이 표류를 거듭했고, 어느 한여름 오후의 편집회의에서는 마침내 책 특집이 백지화되기도 했다. 마감 전쟁을 치르고 있는 지금, 한 기자가 허공에 대고 이렇게 독백하는 게 들린다. “당분간은 책을 읽지 못할 것 같아요.”
사실 책 읽기는 일상적인 것 같지만 가장 비일상적인 행위 중 하나다. 이미지, 디지털, SNS와 같은 이 시대의 문화 풍경 때문에 책 읽기가 종말을 맞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어느 시대에나 책은 힘든 업보와도 같은 숙제였다. 시대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우리 대부분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성인이 된 이후에도 항상 책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의무는 모두 싫기 마련인데 독서도 의무처럼 어깨를 누른다. 권장 도서 리스트를 보면 숨이 멎을 것 같다. 남들이 읽은 책들을 나만 읽지 않은 것 같아 늘 마음이 무겁다. 사놓고 읽지 않은 책들을 보면 두통이 생긴다. 이런 맥락에서 피에르 바야르Pierre Bayard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의무나 강요가 아닌 자유로운 읽기를 통해 책과 함께 살아가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해주는 통쾌한 책이다. 언뜻 보면 이 책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러나 위트 있는 이 책의 저자는 그런 값싼 테크닉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과연 책을 읽었다는 것은 무엇이며 읽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모든 책을 다 읽어야 한다는 의무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그러면서도 책과 지식과 진실을 숭상해온 전통을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지켜나갈 수 있는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는 바야르의 논지는 곧 “불완전한 독서와 비非독서를 포함한 온갖 읽기 방식의 창조적 국면”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읽었다고 생각하는 책은 사실은 다른 사람들의 책들과는 무관한, 우리의 상상에 의해 다시 손질된 텍스트 조각들의 잡다한 축적인 것이다.”(p.122) 그렇다면 김현과 같은 ‘행복한 책 읽기’도 남의 일만은 아니지 않을까? 이번 호를 통해 독자들이 책의 중압감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행복한 책 읽기’를 꿈꿀 수 있다면 우리 편집부 모두의 두 달간의 스트레스도 날아갈 것 같다.
‘읽다’ 외에 책과 가장 궁합이 잘 맞는 동사는 무엇일까. 물론 ‘쓰다’이겠지만, 책 쓰는 일은 책 읽는 일 이상으로 하고 싶지만 하기 어려운 일이다. 책과 관련된 더 즐거운 행위는 없을까. ‘만들다’가 있다. 책 만드는 일은 읽고 쓰는 것 이상으로 복합적인 과정과 창조적인 상상을 동반하는, 아주 어렵지만 매우 재미있는 일이다. 편집과 인쇄와 제책으로 대별되는 책 만들기는 근대 이후 하나의 전문 영역이 되었지만, 아직도 직접 그 과정을 하나하나 밟아가며 자신만의 책을 만드는 사람도 있다. 8월 초, 우리 잡지 편집위원이기도 한 박승진 소장(디자인 스튜디오 loci)이 서류봉투 한 장을 건네주었다. 그가 손수 만든 달력 책이 들어있었다. 7월호의 사우스케이프 오너스 클럽 비평 글의 주석 귀퉁이에 “그는 대학원 시절 피터 워커의 작품 사진으로 수제 달력을 만들어 지인 100명에게 돌리기까지 했다”고 쓴 것을 보고, 바로 그 문제의 1993년 달력 책을 선물해준 것이다. 한정판 책의 마지막 남은 한 권, 매월 피터 워커의 대표작들이 하나씩 박승진의 수제 책 디자인 모티브가 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책을 만드는 일도 의미 있지만, 아름다운 책을 보관하고 소장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빌리다’도 있음을 깨닫는다. 7월 말에는 10월호부터 시작될 새로운 ‘조경가의 서재’ 필자와의 협의를 위해 남기준 편집장과 함께 허대영 소장(스튜디오 테라)을 만났다. 영원한 문학청년인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책 이야기로 불꽃을 튀긴다. 나와 허대영 소장 사이에는 단골 메뉴가 하나 있다. 대학원 시절, 내가 그의 책을 빌려가 아직도 돌려주지 않고 있다는 스토리다. 첫 장에 사인만 하고 채 펼쳐보지도 않은 최영미의 『시대의 우울』을 포스트잇에 ‘빌려간다’고 써놓고 집어간 지 어언 20년이란다. 다음엔 꼭 반납하겠다고 미루고 미루어왔지만 사실 나는 또 약속을 어길 것 같다. 책의 첫 문장 “그해 겨울 런던의 히스로우 공항에 도착해 피웠던 첫 담배의 맛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를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허 소장과 만난 다음날 아침, 한통의 카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자리가 파할 무렵 내가 9월호 에디토리얼을 이렇게 끝맺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이십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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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달콤한 나의 도시
퇴근길, 『환경과조경』 사옥이 자리 잡고 있는 파주출판도시에서 버스를 타고 자유로를 달려 합정역에 내린다. 그리곤 서너 정거장 남짓 거리를 걸어서 집으로 향한다. 날씨 좋은 요즘 그 길가는 각양각색의 가게에서 내놓은 테이블로 가득하다. 나는 폴딩도어를 열어젖히고 고기를 굽고 있는 사람과 눈을 마주쳐가며 꿋꿋하게 길을 걷는다. ‘이번 마감이 끝나면 나도 저 자리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리라’ 다짐하면서 말이다. 특별히 살 것이 없어도 전통 시장이 있는 길을 누비기도 하고, 구석구석에 있는 서점이나 카페를 눈여겨보며 나름의 품평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두건을 쓰고 연탄불에 황태를 굽고 있는 젊은 가게 주인을 발견하면 집에 거의 다다른 것이다. 간혹 ‘저 주인은 나를 기억할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른 후 집으로 들어간다. 생활의 터전을 아직 재개발되지 않은 동네로 옮기고 보니, 나의 일상적 즐거움이 ‘동네 생활’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부쩍 강렬해졌다. 이는 과거의 골목길과 그에 얽혀있는 끈끈한 공동체에 대한 향수와는 또 다른 정서다. 이런(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아닌) 동네의 매력은 걸으며 구경하는 재미와 곳곳에서 소비하는 소소한 즐거움에 있다. 나의 자잘한 일상의 팔 할은 집 밖의 여러 상점과 카페, 세탁소와 공원 등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이들은 모두 거리에서 만날 수 있다. 도시 생활의 매력은 상업 공간과 공공 영역이 맞물리는 곳에서 발생하는 것이란 생각이 체감으로 더욱 공고해지는 요즘이다.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산수화, 이상향을 꿈꾸다’전(7. 29~9. 28)을 개최했다. ‘이상향理想鄕’을 주제로 한 동아시아 산수화들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였다. 중국 호남성 동정호 일대의 절경을 그린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와 주자의 은거처를 이상화하여 그린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도연명의 ‘도화원기’에서 파생된 ‘도원도桃源圖’ 등이 전시의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것이 실경이든 상상 속의 경관이든 자연(산수)의 모습이 이상향으로 제시된다. 이런 회화 작품 가운데 개인적인 하이라이트는 단연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였다. 마치 추억의 그림인 ‘윌리를 찾아라’를 보는 듯 8폭의 병풍 가득 사람들이 그려져 있었다(‘태평성시도’에는 무려 2,120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18세기에 조선 화가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에는 성안 도시의 번창한 상점과 화려한 건물, 각종 행렬과 놀이, 작업 활동이 묘사되어 있다. 연못과 화분이 들어찬 주택 정원이 있는가하면, 각종 꽃이나 포목 등을 파는 상점이 있고,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하천 준설 작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마디로 도시 생활의 활기가 가득하다. 그러나 한눈에 보기에도 이러한 건물과 사람들의 복식이 조선의 것은 아니다. ‘태평성시도’가 최초로 공개된 것은 2002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조선시대 풍속화’전에서였는데, 당시에도 작품명을 어떻게 붙일지, 과연 조선의 화가가 그린 것은 맞는지 등에 관한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이수미의 연구2에 따르면 이 ‘태평성시도’는 중국 도성 내 번화한 정경을 묘사한 그림인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명대본明代本과 중국의 풍속화인 ‘패문재경직도佩文齋耕織圖’의 도상을 조선의 상황과 생활양식에 맞게 변형하고, 중국에 다녀온 사신들이 전해온 첨단 문물에 대한 정보가 반영되어 이상적인 사회를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그 전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형식과 주제를 가진 이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비록 중국의 도시이기는 하지만 “현실과 차원을 달리하는 별도의 세상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목표로서의 이상을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태평성시도’에는 상업이 발달하고 새로운 문화에 대한 관심이 넘실대는 등 변화로 꿈틀대는 18세기 조선의 도시적 삶에 대한 기대가 드러난다. 은거隱居나 무위자연無爲自然이 아니라 소비와 문화의 측면이 강조된, 즉 도시성(도시적 삶)이 극대화된 공간으로서 도시가 이상향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경훈 교수(국민대학교 건축대학)는 저서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3에서 ‘걷기’야말로 도시성의 총체이며, 인도와 거리를 메우고 있는 상점이야말로 가장 도시적이며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든다고 역설한다. 신사동 가로수길을 보자. 이 거리에는 독특하고 세련된 상품을 진열한 상점과 소위 핫한 카페들이 즐비하다. “상점의 쇼윈도는 교류와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적인 요소인 데다, 무엇보다 ‘걷게 하는’ 도시의 장치로서 의미가 크다.” 뉴욕이라는 도시에 대한 깊은 애정과 찬사를 보내는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도 “도시에서만 가능한 전형적인 삶을 포착하고 스타일을 찾아냈다.
주인공들은 걸어서 출근하고, 걸으며 사랑하고, 거리에서 이별하거나 옛 애인을 마주치기도 한다. 그리고 거의 매회 주말 아침에 모여서 브런치를 즐기며 서로의 지난 한 주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한국의 도시, 특히 서울이 도시성을 갖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있는 까닭은 상업적 건축을 배격하는 근엄하고 엉뚱한 체면과 현실적이지 않은 청렴 의식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영국의 문화이론가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는 『시골과 도시The country and the city』4에서 베르길리우스에서 현대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목가시에서 과학소설까지를 망라하는 다양한 시대의 방대한 텍스트들이 대체로 시골을 진정한 공동체의 모델로 설정하고 있으며, 또 그 공동체가 ‘이제 막’ 사라졌음을 한탄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그렇지만 이 방대한 텍스트들이 소멸을 아쉬워하는 공동체는 언제 어디서도 실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자연으로’를 외치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소외감을 느낀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공동체의 미덕을 모르는 덜 된 인간쯤으로 취급받는 것도 불편하다. 아마도 그래서 이상향을 주제로 한 전시회에서 만난 ‘태평성시도’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던 것 같다. 그 그림은 도시의 삶이 결코 저열하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나의 이상향은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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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자, 노마드, 순례자
2015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 미술전 총감독 오쿠이 엔위저 방한 강연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 미술전 총감독으로 선임된 오쿠이 엔위저Okwui Enwezor가 방한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권영빈)는 국제 예술계와 교류하고 동시대 비평적 담론과의 심도 깊은 접점을 만들고자 지난 8월 29일 대학로 예술가의 집 다목적홀에서 오쿠이 엔위저 초청강연회를 개최했다. 본 강연은 ‘인텐스프록시미티. 근접한 것과 먼 것 사이에서 건져 올린 동시대 예술Intense Proximity. Contemporary Art between near & the far’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강연은 2008년 광주 비엔날레에서 오쿠이 엔위저가 총감독을 맡을 당시 공동큐레이터로 참여했던 김현진 관장(아르코미술관)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오쿠이 엔위저는 당대의 조건을 후기 산업사회 이후 기술의 발달과 탈식민화, 세계화로 인해 정치, 사회, 문화, 인종 간의 시공간적 거리가 소멸되어온 인접성의 세계로 정의했다. 이러한 동시대적 조건에서 만들어진 동시대 예술의 실천과 생산, 전달과 수용이 어떻게 맥락화 될 수 있는지 ‘이주자’, ‘노마드nomade(유목민)’, ‘순례자’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전개했다. 이 세 단어의 의미상 공통점은 ‘어떠한 목표와 가치를 위해 자신의 거처를 벗어나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오쿠이 엔위저는 이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낯선 공간에서 향유하고 계승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자신이 사는 곳을 벗어난 다른 공간, 다른 나라에서 자국의 문화를 즐기는 모습을 통해 탈영토화 한 대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 강연의 핵심이었다.
결국 이주자, 노마드, 순례자의 이동이 동시대적 예술을 만들고, 국가적 이념의 제한을 벗어나 다양한 예술을 수용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즉 오쿠이 엔위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관객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였다. 이러한 고민이 필요한 이유는 동시대 예술을 더욱 다양하게 만드는 이주자, 노마드, 순례자 역시 관객이기 때문이다. 이에 전시를 관람하는 사람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봐야 할지 고민하고, 전시의 중점을 어디에 둘지 고민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엔위저에 따르면 동시대 예술이 국가적 이념의 제한을 받지 않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큰 변화를 인식하고 있다. 동시대 예술의 변화는 예술적 전통에 초점이 맞춰졌고, 이상을 지향했지만 유토피아를 지향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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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원형의 개념과 복원의 기준
한·중·일 고정원 원형 연구를 위한 국제심포지엄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는 2014 문화유산융복합연구의 일환으로 추진한 ‘한중일 정원원형에 관한 기초연구(연구책임자 안승홍)’ 성과를 점검하고자 지난 8월 29일 포스코 P&S 이벤트홀에서 ‘한중일 고정원원형 연구를 위한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오전에열린 콜로키움은 ‘한중일 정원원형에 관한 기초연구’ 과제를 수행하고 있는 전문가 발표와 토론으로 진행되었으며, 오후에는 한국을 비롯한 중국과 일본의 전문가가 나서 각국 정원의 개념과 문화까지 아우른 보다심도 있는 내용을 이야기하고 종합토론을 진행했다.
‘한중일 정원원형에 관한 기초연구’ 과제 발표 첫 발제자로 나선 안승홍 교수(한경대학교)는 ‘한국 궁궐 정원과 창덕궁 후원’을 주제로 시대별 궁궐 정원의 특징을 개괄했다. 궁궐 정원 유적의 현황을 분석한 내용에 따르면 현존하는 유적은 조선시대 유적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외에는 기록과 터만 남아있는 형국이다. ‘한중일 정원원형에 관한 기초연구’는 현존하는 유적을 바탕으로 복원을 진행 중인 궁궐 정원의 원형을 찾는 것이 목적인데, 조선시대 이전의 정원 원형을 고증할 자료나 유구가 많이 부족하다. 또한 접근이 어려운 북한에 유적이 자리하고 있어 연구가 실행되지 못하는 사례도 있다. 이에 중국과 일본의 정원 원형 연구를 함께 진행하여 비교 자료로 활용하고자 하는데, 객관적 비교를 위해 각국의 연구 대상 시기를 1300년대 부터 1900년대 초까지로 한정했다.
다음으로 염성진 소장(넥서스환경디자인연구원)이 일본 황실정원을 개괄하고 가쓰라리큐桂離宮의 특징을 설명했으며, 윤성융 대표(서호엔지니어링)가 ‘중국 황가원림과 이화원蓬和園’에 대해 발표했다. 김용수 명예교수(경북대학교)는 ‘한중일 정원원형에 관한 기초연구’ 내용에 대해 “궁궐 정원의 개념 풀이가 미흡하고 특정 시대에 초점이 맞추어져 각 나라별 정원의 특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며 연구의 한계를 지적했다.
보길도 세연정 발굴 조사와 복원을 맡았던 배병선 소장(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은 “고정원의 원류 연구를 위해서는 더 앞선 시대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면서 한국 궁궐정원의 ‘원형’을 찾기 위해서는 시대적으로 앞서 있는 부여의 백제시대 유구와 왕궁리 유적을 토대로 함께연구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더불어 한중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 다른 나라의 정원 연구 및 다른 분야 전문가와 협력을 제안했다.
과제 발표 이후 이어진 본 행사에서는 안계복 회장(한국전통조경학회)이 ‘조선시대 궁궐 정원의 원형’을 주제로 발표하고, 중국인 발표자로는 쉬즈위안 연구원许智源(베이징신도시계획설계연구원)이 ‘명청시대의 황가원림, 원림문화의 집대성’을 주제로 발표했으며, 일본 정원에 대해서는 ‘에도 시대 어소, 이궁의 정원’을 주제로 후지이 에이지로 교수藤井英二郎(지바대학교)가 발표했다. 심포지엄의 화두는 단연 정원 원형의 ‘개념’과 복원의 ‘범위’였다. 류제헌 교수(한국교원대학교)는 “시간이 지나면 물리적인 형태는 변할 수밖에 없지만, 정원을 조성하면서 나타난 비물리적인 개념은 계속 이어질 수 있다”
는 점을 강조하면서, “다른 나라와 대비되는 한국 정원의 특징을 정립하기 위해 보다 확고한 개념의 정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안계복 회장은 “그동안 복원할 때 원형 문제를 주장하면서도 논리적인 개념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어원에 따르면 원형은 ‘첫 번째 떠오르는 인상, 첫 번째 이미지, 첫 번째 모델, 첫 번째 모양’이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지금까지 원형의 의미는 ‘첫 번째 모양’으로만 인식돼 왔으며 이는 판단의 오류라는 것이 안 회장의 주장이다. 안 회장은 원형에 대한 시각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처음 발생한 시점의 형상을 원형으로 보는 관점, 시대와 문화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이상적이며 본질적인 원형 경관도 존재한다는관점, 발생 이후 특정 시대에 따라서 구분되는 원형 경관도 존재할 수 있다는 관점이 그것이다. 이 세 유형은 상호보완적 성격을 가지며 역사 경관의 복원과 정비를 위한 논리적 근거로서 준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통시성과 공시성, 시원성과 시대성, 불변성과 변형성(혹은 외래성)의 개념을 적용함으로써 판단할 수 있는 전통 경관·역사 경관·원형 경관의 기준을 제시했다.
류제헌 교수는 “원형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진정성만을 따지는 것 같다. 하지만 새로운 요소가 추가되어 더 좋은 정원이 만들어지면 그 시점에 하나의 완전성을 갖추게 되는 것”이라면서 원형의 기준을 논의할 때 완전성의 개념을 도입할 것을 제안했다. 최초의 형태를 그대로 재현한 것만이 원형 복원은 아니라는 설명으로 안계복 회장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나명하 궁능문화재과장(문화재청)은 “현재 궁궐 복원 작업들을 진행하고 있는데, 궁궐의 원형을 찾아서 복원하는 것이 화두”라면서 궁궐은 원형 복원의 기준을 찾는 것이 특히 어렵다고 설명했다. 궁궐은 시대를 거치면서 중건이 이루어지고, 통치자에 따라 모습이 바뀌어 다양한 시대적 층이 겹쳐 있기 때문이다. “이코모스ICOMOS 헌장에 따르면 특정한 시점보다 중첩된 시대를 존중해야 한다. 궁궐은 이 기준을 근거로 복원하고 있다.”
그간 복원은 ‘첫 번째 모양’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으나 이날 발표자들은 복원 대상이 가진 가치에 주목해 보다 넓은 의미에서 원형과 복원의 개념을 설명했다. 이광표 정책부장(동아일보)은 “복원의 기준과 시점, 규모에 대한 논의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여, 이에 대한 연구와 담론의 확장이 필요하다는 점을 환기했다.
이날 떠오른 또 다른 화두는 ‘고정원 원형 연구’는 건축물뿐만 아니라 식물과 기후, 생활 문화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류제헌 교수는 지금은 “과거의 문화 활동이 이루어진 장소의 현실감이 살아나도록 복원해야 하는 시대”라고 강조하면서 “장소로서 유적의 가치를 제고하고 한국인이 공유하는 정체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적인 유물뿐만 아니라 그 유적이 자리한 위치와 자연 환경을 고려한 복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원은 유구나 기록이 많지 않아 복원에 어려움이 있다. 쉬즈위안 연구원은 “중국에서는 문화를 기준으로 원형을 복원한다”고 전했다. 이는 한국의 정원사연구에 참고할 하나의 방향을 제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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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정비의 ‘진정성’
제5차 한양도성 학술회의, ‘남산 회현자락 한양도성의 유산가치
지난 해 2월 한양도성의 역사적 가치를 이해하고 보존과 관리 방안을 모색하기위해 처음 시작된 한양도성 학술회의가 어느덧 5회째를 맞이했다. 9월 12일 다섯 번째 학술회의가 ‘남산 회현자락 한양도성의 유산가치’를 주제로 서울특별시청 3층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1부에서는 ‘남산과 한양도성의 역사’를, 2부에서는 ‘남산 회현자락 한양도성의 보호·관리’를 주제로 한 연구가 발표되었다. 이 자리에서 600여 년의 세월 동안 근현대사의 부침을 겪었던 남산 회현자락의 역사와 정비방향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서울의 중심, 남산의 상징성
1부에서 발표된 ‘남산과 한양도성의 역사’에 관한 연구에서는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남산이 갖고 있는 상징성을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했다. 최기수 명예교수(서울시립대 조경학과)는 ‘남산의 경관 및 공원 변천’이라는 주제의 연구를 발표했다. 최 교수는 옛 문헌과 고지도, 산수화 등에서 남산의 경관적 의의를 찾아보고 공원으로의 변천사를 설명했다.
김대호 연구사(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20세기 남산회현자락의 변형, 시각적 지배와 기억의 전쟁’이라는 주제로 근현대사의 격동기에 남산 회현자락을 지배한 권력의 재편 과정에 대해 발표했다. 남산에 세워진 공원, 신사, 동상의 상징성을 당시 권력층과의 정치적 역학 관계로 상세하게 풀어냈다. 그는 남산 회현자락에 대해 “지난 100년간 시각적 지배와 기억을 둘러싼 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일어났던 공간”이라고 평가하며 정비 사업을 통해 새롭게 나타난 기억의 단층들이 현재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지 질문을 던졌다.
배우성 교수(서울시립대 국사학과)의 ‘조선후기 한양도성과 남산 회현자락’을 주제로 한 발표는 영조대代 한양도성 정비 사업과 남산 회현자락에 살았던 거주민들의 역사에 현대적인 해석을 더해 이번 학술회의에서 가장 큰 호응을 얻었다. 그는 한양도성을 ‘군사 유산’이 아닌 ‘도시 유산’으로 봐야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양도성이 군사적 방어체제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지만 도시적 삶과 복지를 위한 도시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정비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배우성 교수는 한양도성 안쪽 남산 회현자락에 터를 잡은 거주민들의 역사를 살폈다. 그는 “그동안 ‘뜨내기들의 보금자리’로 인식 돼오던 남산 회현자락이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이름있는’ 가문들의 오랜 터전이기도 했다”며 경주 이씨, 남양 홍씨, 안동 김씨 후손들의 흔적을 추적했다. 그의 연구를 통해 남산 회현자락이 오랜 세월동안 토박이와 뜨내기를 가리지 않고 도시 거주민들을 품어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진정성’에 대한 논의
학술회의 1부에서 남산 회현자락의 상징성과 그로 인한 역사적 상처에 대한 연구가 발표되었다면 2부에서는 보존 혹은 복원을 통해 역사적 기억을 건강하게 치유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먼저 최형수 서울역사박물관조사연구과장은 남산 회현자락 발굴조사의 결과와 의의에 대해 발표했다. 그는 그동안의 성과에 대해 태조 대에서 숙종대 이후까지 시기별 축성 양식이 다름을 확인했으며 한양도성 훼철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되었으나 사진과 일부 문헌에서만 볼 수 있었던 조선신궁 터를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이어진 김왕직 교수(명지대학교 건축학부)와 안동만 교수(서울대학교 조경학과)의 발표에서는 남산 회현자락 정비 방향을 두고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었다. ‘역사유적 보존·정비 사례 연구’를 발표한 김왕직 교수는 국내 성곽 유적 복원 사례(서울성곽, 수원화성, 남한산성 등)와 해외 도시 유적 복원 사례(델피 유적, 미케네 유적, 하이델베르그 성 등)를 예로 들며 창건 당시나 특정 역사적 시점의 형태를 되살리는 ‘복원’이 과거의 정비 방향이었으나 최근의 정비 방향은 역사적 변천 과정이 남아 있는 현재 상태를 보존하는 ‘현상 보존’에 두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억지스러운 ‘복원’보다 시간적 흐름에 따른 변화의 흔적을 보존하는 ‘현상 보존’이 역사 진정성을 잘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김왕직 교수는 창건 당시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복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오히려 과거의 흔적과 복원된 부분의 부조화로 인해 더욱 어색한 형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안동만 교수는 도면이나 설계 지침 같은 원형에 대한 상당한 자료가 확보된다면 복원 조치를 고려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가능한 발굴한 원형대로 유적을 보존해 진정성을 확보하되 ‘현상 보존’이 기술적으로 어렵고 훼손 가능성이 높은 유적이나 역사적 맥락에 맞지 않는 기념물은 이전 배치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학술회의에는 200여 명에 가까운 전문가와 시민이 참석해 한양도성 정비 사업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남산과 한양도성의 역사에 대한 1부 발표 내용과 한양도성의 보호·관리 방안에 대한 2부의 내용은 주제의 흐름에 맞게 잘이어져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내용 면에 있어서 이날 발표된 대부분의 연구 주제는 그동안 진행되었던 연구의 연장선에 있거나 정리에 그쳐 이번 학술회의가 한양도성의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위한 기초 자료 확보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중요 평가 기준이 ‘진정성’이기 때문에 ‘진정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한 참가자의 말 역시 씁쓸함을 남긴다. 한양도성의 보존 및 정비 사업의 진정한 목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에 앞서 잊히고 파괴된 역사의 기억을 복원하고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두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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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unce Below
거대한 ‘지하 트램펄린
“우리 발 밑 어둠 속에는 누군가가 만든 지하 세계와 지하 경관이 엄연히 존재한다. 이 공간은 누구나 접근이 가능하며 탐구 가치 또한 충분하다.”1 지난 7월 개장한 ‘바운스 빌로우Bounce Below’가 바로 그 ‘지하 세계subterranean world’가 아닐까. 바운스 빌로우는 영국의 노스웨일즈North Wales, 블라이나우 페스티니오그Blaenau Ffestiniog의 레치웨드Llechwedd라는 마치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름을 가진 동굴 안에 있다.바운스 빌로우는 간단히 말해 거대한 ‘지하 트램펄린underground trampoline’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하 세계를 만들어낸 지역 사업가 숀 테일러Sean Taylor는, “프랑스의 한 공원에서 그물을 이용해 만든 구조물을 보았다. 그 순간 노스웨일즈에도 이런 어드벤처 파크를 만들어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 동굴의 규모는 최대 깊이 200피트(약 60m) 및 최대 폭 60피트(약 18m)로 영국의 세인트 폴 대성당St. Paul Cathedral 두 개가 충분히 들어갈 정도다. 동굴 속에 펼쳐진 트램펄린의 총 면적은 1,000m2가 넘어 한 번에 최대 100명까지 이용할 수 있다. 이용 인원이 적을 때에는 바닥으로부터 최대 80피트(24m)까지 뛸 수 있다. 곳곳의 트램펄린은 슬라이드와 그물망을 통해 연결된다. 슬라이드를 타고 내려가 만나게 되는 지하 세계는 ‘인디아나 존스Indiana Jones’나 ‘호빗Hobbit’과 같은 영화에 나오는 음침하고 스산한 느낌의 공간이 아니다. 이 지하 세계 내에 설치된 LED조명은 동굴 벽에 반사되어 북극의 오로라와 같은 빛깔을 만들어내며, 실내 온도 또한 연중 섭씨 7도 정도를 유지하여 쾌적한 환경을 제공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공간을 만들 수 있었을까? 과거 이 지역은 원래 탄광 산업으로 유명했다. 1900년대 초·중반 산업 쇠퇴, 제2차 세계대전 등을 겪으면서 마을 인구가 줄어들었고, 결국 1946년 탄광은 문을 닫게 되었다. 수십 년 후, 그때 버려진 공간을 거대한 ‘지하 놀이터’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바운스 빌로우를 만드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인력이 투입되었다. 탄광의 흔적 및 위험 요소 제거, 트램펄린과 슬라이드 설치 등 모든 작업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테일러는 이 새로운 지하 세계가 지역 사회의 경제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탄광 산업의 침체로 많은 사람들이 실직의 고통을 겪고 있던 이 지역에 지하 트램펄린이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하고 있다. 바운스 빌로우는 산업 시대 유산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재활용’한 사례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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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농촌어메니티 마을설계공모전
농업·농촌 유산을 활용한 창조적 마을만들기
지난 5월 26일부터 8월 22일까지 한국농촌계획학회(회장 이성우)가 주최한 제12회 농촌어메니티 마을설계공모전이 진행되었다. ‘농업·농촌 유산을 활용한 창조적 마을만들기’를 주제로 열린 이번 공모전은 농업·농촌유산의 가치를 보존하고 활용함으로써 지속가능한 마을 만들기의 모델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열렸다. 지난 4월 청산도 구들장 논과 제주 밭담이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농업·농촌 유산에 대한 가치를 제고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러한 유산을 발굴하고 그 가치를 알리는 기회로 삼고자 공모전이 진행되었다.
공모의 소재가 될 수 있는 농업·농촌 유산의 범위는 구들장 논, 다랭이논, 돌담 밭, 염전, 둠벙, 독살, 저수지 등과 같이 농어업인이 오랜 기간 동안 형성·진화시켜 온 농어업 활동·시스템에서부터 방앗간, 저수로, 농촌 취락, 마을 숲 등 농촌의 다양한 공간 및 경관 자원 등이 포함되었다. 당선작을 선정하는 기준은 “농촌에 남아 있는 유산을 찾아 창조적으로 활용”하고, “농업·농촌 유산의 발굴과 보전을 통해 살고 싶고 찾고 싶은 농촌마을만들기의 가능성과 실천 방안을 제시”하는 안을 계획에 담는 것이었다.
지난 8월 29일 당선작이 발표되었으며, 대상에는 강수진, 이은지(경희대학교 환경조경디자인과)의 ‘삼봤다’가 선정되었다. 우수작으로는 강지아, 김지헌, 민경훈(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의 ‘지족, 잇다’와 이성규, 손은신, 심지수(서울대학교 대학원 조경학과)의 ‘도숙황만야춘래록편산’이 선정되었다. 특선 3작품과 입선 10작품을 포함해 총 16개의 작품이 선정되었으며, 지난 9월 25일부터 9월 29일까지 운남동 래미안갤러리에서 수상작들이 전시되었다.
대상(농림축산식품부장관상) - ‘삼봤다!’
강수진, 이은지(경희대학교 환경조경디자인과)
예로부터 삼베하면 곡성의 돌실나이와 안동삼베 등을 제일로 꼽았다. 다른 마을은 정부와 지자체, 마을의 적극적인 관심과 계획 사업으로 삼베의 전통이 이어져오고 있는데, 정작 국내 으뜸이던 곡성의 돌실나이는 마을 주민들로부터 점점 잊히고 있다. 돌실나이가 마을의 농촌 유산으로서 중요한 존재라는 공감대는 형성되어 있으나 이에 대한 관심이 적고 계획 방안의 부재와 대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그 맥이 끊길 위기에 처해있다. 이에 곡성군 석곡면 죽산리를 대상지로 하여 곡성 돌실나이를 재조명하는 데 계획의 초점을 맞췄다.
마을이 가진 어메니티를 활용해 ‘잊혀진 삼 되찾기’, ‘활기찬 삶 만들기’, ‘살기 좋은 삼베마을’이라는 3가지 방향으로 마을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전통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한 ‘삼·三·삶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휴경지를 되살려 삼베의 재료인 대마를 경작하고, 사계절내내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활용 방안을 계획했다. 그리고 돌실마당, 나이마당, 돌실나이 홍보관을 통해 잊힌 삼베 길쌈풍습과 다양한 공동체 문화, 볼거리 등을 제공하는 동시에 도농 교류 및 농촌 소득과 연계한 농촌관광 활성화 방안을 제시했다.
우수상(농촌진흥청장상) - ‘지족, 잇다’
강지아, 김지헌, 민경훈(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빠르게, 그리고 더 많이 가지려고 노력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풍족하지는 않지만 만족하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남해군 심동면 지족리의 전통어업방식인 죽방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척박한 땅을 계단식 논으로 바꾸어 살아가는 진취적인 모습도 보인다. 물살이 빠른 지족해협에 죽방렴을 놓고 산골짜기에 계단식 논을 만들어 살아가는 지족리 사람들의 삶은 자연에 순응하는 모습이다.
지족리는 강에서부터 시작된 단순한 구조의 어구에서 연안어업으로 발전한 500년이 넘은 유산 죽방렴을 품고, 수많은 천혜의 자원을 가지고 있는 마을이다. 그러나 관광마을이라는 이름이 무색하리만큼 알려져 있지않다. 도태된 죽방렴을 알리고 천혜의 자원과 유기적인 시스템을 갖춘 프로그램을 통해 마을 지족의 활성화를 꾀했다. 또한 유산을 살리고 알리는 것을 넘어 마을 내부의 발전에 기여를 할 마을기업을 제안하고, 관광지로서 개발 가능성을 고려해 수려한 경관을 보존하기 위한 경관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우수상(한국농어촌공사사장상)- ‘도숙황만야춘래록편산稻熟黃滿野春來綠遍山’
이성규, 손은신, 심지수(서울대학교 대학원 조경학과)
김포시 통진읍 가현리는 토탄층에서 5천 년 전 탄화미가 발견되어 한반도 최초의 벼 재배지로 알려져 있으며, 예부터 주요 식량 생산지로 역할을 해왔다. 지금도 많은 쌀을 생산하며 농업에 유리한 평야와 비옥한 땅조건을 가지고 있음에도 가현리의 농촌은 몰락하고 있는 현실이다. ‘도숙황만야춘래록편산’은 ‘쌀’을 중심으로 잊히는 것들을 되살려 ‘농촌’으로서 마을의 경쟁력 회복을 꾀하는 데 계획의 초점을 맞추었다.
가현리의 토탄층 일대를 활용해 2011년부터 재배되지 않는 자광미를 부활시키고, 종자를 개량할 수 있는 자광미연구소를 만들어 경쟁력을 향상시킨다. 그리고 대형 종합미곡처리장 등으로 인해 사라진 정미소를 되살려 마을 커뮤니티를 활성화시키고 동시에 가현리 자체적으로 곡식을 처리해 다른 가공품으로 만들 수 있는 기본 인프라를 구축한다. 또한 사라진 농촌의 공동체를 되찾기 위해 두레놀이와 체험 논의 도입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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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제안하는 토론토의 미래
‘NXT 시티 프라이즈’ 아이디어 공모전
시민들이 제안하는 토론토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지난 8월 14일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제1회 ‘NXT 시티 프라이즈NXT City Prize’의 우승작이 발표되었다. ‘NXT 시티 프라이즈’는 토론토의 공공 공간을 미래지향적으로 개선하는 아이디어를 모으는 공모전이다. 온타리오 주에 거주하는 30세 이하의 젊은이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으며 우승팀은 5,000달러의 상금과 전문가와 함께 아이디어를 정식으로 실현할 수 있도록 10,000달러를 추가로 받게 된다. 10,000달러의 추가 상금은 아이디어의 실현을 위한 사회적 투자 기금으로 사용되며, 토론토 시의 수석 도시계획가 제니퍼 키스맷JennferKeesmaat을 포함한 부동산 전문가, 미디어 홍보 전문가, 컨설턴트 전문가 등과 함께 팀을 이뤄 작업하게 된다. 이 공모전은 도시계획을 전문으로 하는 스튜디오Distl.에 의해 제안되었으며 토론토 시, 디자인 회사 루프Loop: Design for Social Good, 컨설턴트 회사 Gen Y와 파트너십을 맺고 지난 4월 30일 출범했다. 온타리오 전역에서 120여 개의 아이디어가 공모전에 제출되었고 이 중 리차드 발렌조나Richard Valenzona의 작품 ‘영리덕스YONGE REDUX’가 우승작으로 선정되었다.
영 리덕스
리차드 발렌조나의 우승작 ‘영 리덕스’는 토론토의 주요 도로인 영 스트리트를 보행자 중심의 거리로 변화시키는 아이디어다. 영 스트리트는 토론토의 쇼핑과 유흥, 관광 중심지를 관통해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다. 리차드 발렌조나는 영 스트리트를 이용하는 행인의 통행량에 비해 보도의 폭이 너무 좁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4차선 차도를 2차선으로 변경하고 인도의 너비를 확장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영 스트리트가 캐나다에서 가장 유명한 명물 거리임에도 디자인 면에서 특색이 없다는 점도 ‘영 리덕스’ 디자인의 출발점이 되었다. 발렌조나는 영 스트리트의 구역 별로 디자인 요소를 가미해 개성을 부여했다. 우선 영 스트리트 전 구역의 도로에는 사선 형태의 무늬가 그려져 자동차 통행에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역동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영 스트리트가 칼리지 스트리트College Street와 만나는 구역은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나무를 식재하고 벤치를 많이 배치해 휴식과 모임을 위한 공간으로 디자인했다. 던다스 스퀘어Dundas square가 위치한 구역에는 야외 공연과 행사가 많이 열리는 구역의 기능에 맞게 도로 바닥에 LED 조명을 설치해 특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영 리덕스’는 공공 거리 개선에 대한 발렌조나의 대학원 연구를 발전시켜 디자인에 적용한 작품이다. 발렌조나는 “영 리덕스가 토론토의 거리를 새롭게 보는 방법에 대한 선례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도시의 거리를 차량 통행을 위한 도로로 보기 보다는 모든 시민을 위한 공공장소로 인식해야 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앞으로 도시계획 전문가들과 함께 팀을 이뤄 아이디어를 실현 할 수 있도록 작업하게 된다.
국적과 나이를 불문한 수상자
‘NXT 시티 프라이즈’는 ‘온타리오 주에 거주하는 30세 이하의 젊은이’라는 조건 외에 참가에 제한을 두지 않았고 심사위원단은 토론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반영된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처음으로 시행되는 공모전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참가 자격과 심사기준 덕분에 120여 팀이 공모전에 참가했고 최종 수상작에는 외국인과 18세 이하의 어린 학생들의 작품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2,500달러의 상금을 받는 ‘최우수 선구적 아이디어 Most Visionary Idea’상은 중국인 세븐 시루 첸Seven Xiru Chen에게 돌아갔다. 그가 제출한 ‘인터체인지 파크INTERCHANGE PARK’는 앨런 가Allen Street와 401번 국도를 둘러싼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를 공원화하는 아이디어다. 도시에서 큰 부지를 차지하는 고속도로의 인터체인지 구역을 공원으로 프로그램해 시민들의 접근이 용이한 생태적인 공간으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
18세 이하 어린 학생들의 작품도 2,500달러의 상금을 수상하게 되었다. ‘18세 이하 부문 최우수작Best Submission, Under 18’을 받은 글로리아 주Gloria Zhou, 아난나 라파Ananna Rafa, 에자나 마이클Ezana Michael, 마리아 카시프Maria Kashif의 ‘오래된 골목의 새로운 미래New Visions For Old Paths’는 상습 우범지대였던 플레밍던 파크Flemingdon Park의 밴덤 구역Vendom Place을 안전하고 생동감 있는 구역으로 변화시키는 아이디어다. 그라운드 모자이크ground mosaic를 이용해 구역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모자이크 조각의 다채로운 색깔과 디자인으로 어두침침했던 분위기를 개선한다.
‘NXT 시티 프라이즈’ 공모전의 수상작들이 제안한 아이디어는 거창하지 않다. 시민들이 일상에서 겪던 작고 사소한 불편함을 개선할 소박하고 현실적인 아이디어가 당선되었다. 아이디어가 실현화되는 과정 또한 온전히 시민들에게 달렸다. 시민들 스스로 자신이 이용하는 공간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고 공간을 개선할 투자 기금을 모은다. 전문가들은 시민들의 협력자일 뿐이지 프로젝트를 직접 주도하지 않는다. 이 공모전을 공동으로 주최한 Distl.의 저스틴 레클레어Justin Leclair는 “NXT 시티 프라이즈는 토론토가 세계적 도시로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열망하는 새로운 세대의 도시계획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고 말했다. 토론토를 사랑하는 시민들의 소박한 아이디어가 바꿀 토론토의 미래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