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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네마 스케이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낯선 강박과 가짜가 주는 황홀한 미적 체험
    오래전에 본 웨스 앤더슨Wes Anderson 감독의 ‘로얄 테넌바움The Royal Tenenbaums’은 내 취향의 영화가 아니었다. 빨간 추리닝을 단체로 입은 이상한 가족과 욕실에서 생활하는 은둔형 캐릭터로 짙은 아이라인을 한 기네스 펠트로 정도만 기억에 남았다. 기이한 강박이 낯설었다. 작년에 ‘문라이즈 킹덤Moonrise Kingdom’을 본 후 같은 감독의 전작들을 찾아보고 나서야 드디어 그의 독특한 스타일이 주는 낯섦을 즐기게 되었다. 올해 개봉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The Grand Budapest Hotel’은 매력적인 시공간, 이야기구조, 상상을 초월한 캐스팅과 함께 그가 줄곧 추구해온 독특한 형식미가 극대화된 영화다. 한때 번성했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소유하게 된 벨 보이의 모험담을 그리고 있는데,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이야기 전개보다 형식적인 면에 더 집중한다는 점이다. 가상의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모험담은 다소 허술하고 황당하기까지 하지만,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공간의 구조·형태·색감, 공간을 보는 방식, 이야기와 공간의 관계는 매우 정교하다. 인공적인 호텔의 내·외부 모습과는 달리 배경도시의 경관은 극사실적이다. 촬영지인 독일 동부의 드레스덴Dresden과 괴를리츠Görlitz는 중세의 건물이나 고풍스러운 골목길이 그대로 남아 있는 도시여서 영화 속 배경인 1930년대의 분위기가 생생히 전달된다. 영화 속 공간의 매력 포인트는 자로 정확히 잰 듯한 질서와 공간에 대한 강박이다. 인물은 항상 정중앙에 있거나 양쪽으로 정확히 대비되어 배치되고 그 가운데 그림이나 창문, 그것도 아니면 아무 의미 없는 사람이라도 세워놓고 좌우 대칭 구조를 만들고 있다. 엘리베이터, 화장실이 없는 작은 옥탑방, 케이블카, 교도소, 호텔 스태프룸, 기차 객실, 공중전화 박스처럼 폐쇄감을 주는 작은 공간이 자주 등장한다. 사건을 해결하는 중요한 소품 중 하나도 정육면체의 상자다. 리본을 풀면 단숨에 해체되는 분홍색 케이크 상자는 마치 공간을 축소한 모형 같이 보인다(호텔의 외장도 같은 분홍색이다). 시간 속의 시간, 공간 속의 공간 개념은 영화 후반부에 주인공들이 크고 작은 케이크 상자들이 쌓인 작은 트럭 안으로 떨어지며 다시 반복된다. 이러한 질서와 강박이 주는 형식미는 자칫 무거울 수 있는데, 빠른 카메라 움직임, 경쾌한 음악, 반복적인 사선의 움직임, 화려한 색감, 유쾌한 회화적 은유 등으로 그 무게를 덜어낸다. 주인공이 집착하는 과다한 향수, 와인, 나이든 여자에 대한 취향과 시도 때도 없이 시를 낭독하는 모습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제복에 대한 애정 역시 두드러지는데, 호텔 제복, 죄수복, 사제복, 군복, 킬러복(누가봐도 킬러스러운 복장과 표정)으로 집단과 소속을 표현한다. 그러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은 대체로 엉뚱하고 우스워서 제복이라는 틀을 스스로 조롱하는 것처럼 보인다. ‘설국열차’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틸다 스윈튼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분장으로 짧은 출연이지만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런 소소하고 세밀한 디테일들이 전체적인 형식미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고, 한겨레 영화평론 전문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전공으로삼아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지만, 극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그것이 주는 감동과 함께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텍스트라 믿고 있다.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클로드 모네에게 정원을 묻다
    #18 모네와 초원의 꿈 “르네상스 미술의 진정한 혁신은 그때부터 삼라만상이 신의 은총이 아닌 빛의 은총에 의해존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오토 페히트 미술의 역사와 정원의 역사는 관계가 깊다. 17세기에 그린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과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의 풍경화가 18세기 풍경화식 정원이 탄생하는 데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면, 19세기 말의 인상주의 미술은 20세기와 21세기 정원의 방향을 부추겼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술계의 정원사 클로드 모네Claude Oscar Monet(1840~1926)의 경우가 그렇다. 1867년, 스물여섯의 젊은 화가 클로드 모네는 ‘정원의 여인’이란 대형 작품을 파리의 살롱전에 냈다가 거절당했다. 당시 모네가 살았던 파리 근교의 빌 다브레Ville d’vray의 정원에서 그린 그림이었다. 그림 속 정원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세 여인 중 한 명은 곧 모네의 첫 아들을 낳게 될 카미유였다. 신화적, 역사적 이야기가 없는 ‘비서사적’ 그림이어서 전시할 수 없다는 게 심사위원들의 설명이었다. 붓질이 성의 없다는 평도 곁들였다. 만약에 실존하는 여인들 대신 비너스, 주노, 아테네 등의 세 여신을 그려 넣었다면 통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는 역사적 모티브를 선호하던 시대였다. 과거 지향적이던 정원의 흐름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림에 이야기가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6년 후 ‘인상, 해돋이’라는 제목으로 또 다시 순간의 장면을 포착했던 모네의 그림이 이해되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인상파라는 조롱 섞인 명칭만 남았다. 모네 스스로 자신을 일컬어 “그림과 정원을 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말했다는데,2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란 말은 물론 무시해야겠지만 중요한 건 그가 그림과 정원으로만 가득 채워진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이것저것 다른 장르를 시도해 보려 하지 않고 오로지 풍경화가의 외길을 걸었으며, 사는 동안 여러 번 이사를 다녔지만 항상 정원을 가꾼 열정적인 정원사이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첫 정원은 노르망디의 생타드레스라는 곳에 있는 고모네 정원과 ‘정원의 여인’의 무대가 되었던 모네 자신의 빌 다브레 정원이었다. 모네의 가족은 고모의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정원에서 책을 읽고 있는 아버지, 흰 드레스를 입고 꽃을 바라보고 있는 고모, 테라스 난간에 기대있는 연인 카미유 등을 그린 작품들이 이 시기에 전해진다.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초기작들이지만 위의 두 정원은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당시 상류 사회의 정원이 거의 흰 장미와 붉은 제라늄으로만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장미는 대에 묶어 곧추 자라게 했으며 둥근 원형 화단에 빨간 제라늄을 질서 있게 심어놓았다. 윌리엄 로빈슨이 경멸해 마지않았던 그런 정원이었다. 정원에서 노니는 인물들이 음악회 수준으로 의상을 갖추어 입었다는 것은 당시 사회 규범이 그렇기도 했지만 정원이 과시의 장소였음도 넌지시 귀띔해 주고 있다. 1873년, 그 사이 혼인식을 치른 모네 부부는 센 강변의 아르장퇴유Argenteuil라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 물론 정원이 딸려 있었으며 여기서 젊은 모네 가족은 1878년까지 행복한 시절을 보낸다. 이 시기에 유난히 많은 정원 그림이 탄생했고 아내 카미유와 어린 아들 장을 즐겨 모델로 삼았다. 정원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생트 아드레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정하게 다듬어진 정원이 당시 시민사회에서 알고 있던 유일한 방식이었다. 정원 울타리 안팎으로 두 개의 세계가 마주하고 있었다. 울타리 안쪽의 정원은 안전하고 정돈된 문명의 세상이며 울타리를 벗어나면 야생의 자연경관이 있었다. ‘야생’은 위험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인지되었고, 그러므로 더욱 울타리 안에선 질서를 고수했다. 안보와 질서. 여기서 우리는 그 사이 사고 체계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사회 구조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유추할수 있다. 될 수 있으면 정원에 자연을 끌어들이자는 것이 요즘을 사는 우리의 생각이다. 울타리를 벗어나면 자연의 위험이 아니라 번잡한 도시 문명이 덮쳐온다. 불과 백오십 년 정도 흐르는 사이에 정반대의 질서 관념이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모네는 마치 요즘의 우리처럼 바깥의 야생 경관을 울타리 안으로 들여오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적어도 주의 깊게 관찰하기 시작했던 건 확실하다. 짐작컨대 1870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피해 런던에서 1년을 보내고 온 다음부터였던 것 같다. 미술사적으로 말하자면 거기서 접한 윌리엄 터너 식 빛과 색의 비밀이 모네의 회화법에 결정적인 변화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인상파가 탄생하던 순간이다. 조경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바로 그 해에 윌리엄 로빈슨William Robinson이 『야생 정원The Wild Garden』이란 책을 발간했다고 말할 것이다. 모네가 비록 정원 서적의 충실한 독자로 소문이 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로빈슨의 책을 읽었다는 증거는 없다. 다른 한편, 모네 같은 정원 인간이 터너와 로빈슨의 나라에 가서 터너만 가지고 돌아오진 않았을 것 같다. 어쨌거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프랑스로 다시 돌아온 후 그가 이젤을 챙겨들고 정원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 시점부터 센 강변의 야생화초원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했다. 아르장퇴유는 파리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지만 집 밖을 벗어나면 야생이었다. 지난 날, 제라늄의 빨간 꽃 위에 내리는 화사한 빛을 보았다면 이제는 야생화초원에 내린 빛이 어떻게 색의 마술을 펼쳐내는지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이제 그의 가족은 정원이 아니라 풀밭에 나가 포즈를 취해야 했다. 풀밭에서 책을 읽는 카미유, 양산을 들고 풀밭 사이를 거니는 카미유와 장. 그후 십 년 가까이 모네는 무수한 초원 풍경을 그렸다. 아마도 초원에 서서 캔버스에 붓질을 하며, 어떻게 해야 저 아름다운 빛과 색을 내 정원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고민했을 것이다. 이 무렵에 사랑하는 아내 카미유가 서른 두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모네는 한동안 정원을 그리지 않았다. 풀밭을 더 부지런히 그렸다. 나중에 다시 정원을 그리기 시작할 때, 정원 속에 늘 등장했던 인물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고정희 /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
  • [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 그림만 그리기 2
    단면도는 구축의 해설서다 자동차를 사용할 때 우리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외관과 인테리어 디자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엔진과 동력 전달장치의 구조를 본 적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자동차를 만들거나 수리하는 엔지니어에게는 자동차 외피 너머에서 작동하는 기계들의 구조와 관계가 더 중요하다. 바로 이들이 자동차 본연의 특성과 기능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일상적으로 공간을 이용할 때 우리는 벽의 두께가 얼마여야 하는지, 벽에 철근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전혀 알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공간을 만드는 이들은 대상의 숨겨진 본성과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설계가의 그림이 공간에 대한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공간의 구축을 목적으로 한다면 단면도는 모든 도면 중에서 가장 중요해진다. 디자인 의도의 전달 측면만 본다면 대개 단면도는 참조의 역할을 할 뿐이다. 설계가의 의도와 표현을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매체는 역시 평면도와 입면도다. 그래서 도면집을 보면 단면도는 대부분 뒷부분에 등장한다. 앞선 도면들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단면도는 읽을 수조차 없는 경우도 많다.1 그런데 한번 도면집에 실린 그림 중 어떠한 형식의 그림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지 세어보자. 단면도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공간이 복잡하면 할수록,설계에 다양한 생각이 담길수록 단면도의 수는 더욱 증가한다. 왜냐하면 단면도는 구축을 위한 해설적 도면이기 때문이다. 구축의 과정이 까다로울수록 설명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단면도는 클라이언트나 동료, 혹은 대중에게 디자인을 친절하게 이야기하기 위한 그림이 아니라, 전문가들 사이의 고도로 엄격하고, 기술적이며, 세심한 설계의 대화를 위한 그림이다. 단면도를 통해서 비로소 이차원의 그림에 불과한 도면은 현실의 삼차원적인 공간과 사물을 구현하는 마법의 주문서가 된다(그림1). 그런데 이러한 단면도의 특성 때문에 학생들의 오해가 생긴다. 학생들의 설계가 실제 공간으로 만들어지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래서 구축을 위한 그림인 단면도는 설계 시간에 인기가 없다. 단면도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시간은 설계보다는 오히려 시공이나 구조 수업 시간이다. 그러나 여기서 설계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설계는 무엇인가를 만들기 위한 행위로서 의미를 지닌다. 설계의 결과물이 현실로 구현되지 못할지라도 설계는 그 대상이 실제로 만들어짐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래서 비록 지금 그 역할이 대단해 보이지 않더라도 반드시 단면을 통한 설계의 사고를 익히고 훈련해야 한다. 공간과 대상의 구조를 이해하고 표면의 효과를 이끌어내는 설계는 껍데기만 포장하는 설계와 분명 다르다. 참조적이며 기술적인 단면도는 다른 도면과 결합할 때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 새로운 설계의 매체가 되기도 한다(그림2). 이러한 결합은 도면의 규칙을 준수하면서도 설계 매체의 형식이 지닌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입면도와 투시도가 디자인의 표면적인 효과를 전달하는 매체라면 단면도는 그 표면을 구성하는 내재적인 원리를 나타내는 매체다. 특히 조경에서 단면도는 주로 지형의 논리와 공간과 지형의 관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구조적인 지형의 단면도와 대지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효과를 보여주는 입면도나 투시도가 만날 때 그 어떠한 도면도 보여줄 수 없는 비밀스러운 관계를 이야기해 준다. 입단면도나 단면투시도를 통해서 설계가는 지형의 논리와 생태계의 변화가 연관이 되고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발생하며, 경험의 감각이 어떻게 연출되는지 시각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그림3). 투시도는 진실한 왜곡이다 시골의 어르신들도 투시도를 보여드리면 누구나 쉽게 공간을 이해하신다. 그만큼 보는 이의 입장에서 투시도는 쉽고 편안하다. 왜냐하면 투시도는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풍경의 모습과 가장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투시도를 제대로 그리는 일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도법에 따른 정확한 투시도는 기하학 문제 풀이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작업이 까다롭고 시간도 무자비할 정도로 소요된다. 도학 교과서를 보면 투시도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크지만 원래 투시도는 도면보다는 회화를 위해 발전된 기법이다(그림4). 1413년 경 이탈리아의 건축가이자 공학자인 부르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는 선형투시도법을 개발했을 뿐 아니라 이 표현 방식이 과학적으로 타당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2 곧 이탈리아 지역 대부분의 르네상스 화가들은 부르넬레스키가 개발한 투시도법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435년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가 미술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회화론De pictura』을 펴낸다. 이 책에서 알베르티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응용하여 더욱 발전된 투시도법을 이론적으로 정리한다. 흥미로운 점은 정작 건축가가 투시도법을 발명해냈지만, 도면의 발전 과정은 투시도법에서 벗어나기 위한 역사였다는 것이다. 미술사학자 애커먼James S. Ackerman은 중세와 르네상스 초기의 건축 도면에는 투시도의 흔적이 나타나다가 후대에 이르러서야 평행투상도법을 따르는 도면의 체계가 정립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3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를 그리려면 투시도법이 아닌 평행투상도법을 사용해야 한다. 실제로 그려보면 알겠지만 투시도법이 평행투상도법보다 더 까다롭고 복잡하다. 애커먼에 따르면 도면의 형식은 역설적으로 고도로 정교한 투시도법에서 더욱 일반화되고 단순화된 투상도법을 발전시키면서 형성되었다. 이는 현실을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한 회화와 현실을 정확하게 만들어내기 위한 도면이 전혀 다른 의도와 체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그림5). 여기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가장 현실과 유사하며 과학적으로 먼저 증명된 투시도법을 놔두고 왜 도면에서는 굳이 어딘가 어색해보이며 한참 뒤에나 수학적으로 정리가 되는 투상도법을 기본적인 원칙으로 사용해야만 했을 까?4 그것은 바로 왜곡의 문제 때문이었다. 투시도법의 핵심은 단축법이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동일한 크기의 사물이라도 가까이 있으면 커 보이고 멀리 있으면 작아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화가들은 투시도법을 사용하여 인간의 시각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왜곡 현상을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했다. 투시도법의 발명은 과학과 수학적 연구의 성과물이다. 그리고 수학적 성과를 응용함으로써 서양의 회화는 놀라울 정도의 정교함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왜곡은 오히려 도면에서는 문제가 되었다. 화가의 투시도는 현실의 정확한 재현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도면은 설계가의 추상적인 형태와 개념을 현실에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서 설계의 그림은 정보의 체계여야하며 왜곡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 어떠한 도면에서도 10m 높이의 기둥은 거리에 관계없이 10m로 표현되어야한다. 진실한 왜곡을 표현하고자 하는 투시도는 도면을 그리기에 부적합한 도법이었다. 도면집에서 투시도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콜라주는 감각을 종합하는 창발적 이미지다 설계에서 투시도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검증의 도구다. 아마 투시도를 그릴 때 즈음이면 대부분의 그림은 완성된 상태이며 설계도 막바지일 것이다. 그런데 설계의 결과물이 실제로 만들어지면 과연 좋은 공간일지, 예상치 못한 문제가 있지는 않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본인은 물론 타인에게도 설계안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려면 현실과 가장 닮은 모습을 보여주는 투시도로 설계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물론 이러한 투시도의 역할이 설계의 마지막 단계에서만 주어지지는 않는다. 투시도는 의사소통 과정에서 수시로 그려지며 설계의 각 단계에서 설계의 과정과 방향을 검증하기도 한다(그림6).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했고 이후 하버드 대학교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SWA 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했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 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이 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있다.
  • [조경가의 서재] 그 가벼움에 대하여
    한병철의 『피로사회』, 그리고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들, 『빅 픽처』, 『더 잡』, 『행복의 추구』, 『위험한 관계』, 『템테이션』, 『리빙 더 월드』, 『모멘트』, 『파이브 데이즈』 과잉의 시대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점점 가벼워진다. 아니, 보다 정확한 표현은 우리의 ‘선택’이 심각함을 수반하지 않는 다는 것일 게다. 심각한 것은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사로 잡지 못한다. 우리의 선택이 깃털만큼이나 가벼워지고 있다. 그 가벼움은 ‘선택할 것이 많아졌음’에서 온다. 선택할 것이 왜 많아졌는가? 한병철1은 이를 규제, 억압, 규율, 복종 등 ‘부정성’의 패러다임이 물러나고, 그 자리를 자기주도, 성과, 능력 등 ‘긍정성’의 패러다임이 차지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설명한다. 그는 이러한 긍정성이 산업화, 권위화, 규범화 등의 모던 사회를 다양성, 탈권위, 탈중심, 개인 욕망의 긍정 등 후기 모던late modern 혹은 포스트모던postmodern 사회로 전환시키고 있다고 진단한다. 더글라스 케네디Douglas Kennedy의 소설2은 존 그리샴John Grisham이나 마이클 크라이튼Michael Crichton 류의 소설과 달리, 철저히 동시대를 살아가는 미국 중산층의 일상을 보여준다. 그의 소설은 대하소설 같은 웅장함도, 스릴과 서스펜스가 가득하지도 않다. 분량이 적지도 않다. 처음 접한 『템테이션Temptation』(2006)부터 『빅 픽처Big Picture』(1997), 『파이브 데이즈Five days』(2013), 『더 잡The Job』(1998), 『모멘트The moment』(2011), 『리빙 더 월드Leaving the world』(2009), 『위험한 관계A special relationship』(2003), 『행복의 추구 1, 2The Pursuit of Happiness』(2001) 등에 이르기까지 그는 다른 장르로, 다른 소재로 이탈하지 않고 주인공만 바꾸어 한결같은 형식으로 여러 유형의 일상을 보여준다. 그의 소설 속 미국 중산층은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쉼 없이 앞으로 달려야만 한다. 잠시라도 삐끗하면 그가 누리던 일상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그들에게 국가, 정의, 인생 등과 같은 거대 담론은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그들은 한병철의 『피로사회』가 지적하듯 철저히 자기 착취를 통해 ‘성과’를 내야만 하는 시스템에 내던져져 있다. 이런 시스템에서 자기 자신 이외에 믿을 것은 없다. 이들은 이제 ‘타자’보다는 ‘자기 자신’에 관심을 더 갖는다. 이들이 만들어 내는 성과는 ‘차이’로 평가된다. 차이는 서로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차이는 본질적으로 같음에서 출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차이는 심각하지 않고 가볍다. 작은 차이를 가진 성과들은 곧 ‘과잉’을 불러 일으킨다. 서점에 쏟아지는, 성공에 이르는 지름길을 알려준다는 자기계발 서적, 구석구석 자리잡은 피트니스센터, 본질은 바뀌지 않은 채 패션화된 상품 등은 멈출 줄 모르는 욕망을 매개로 넘쳐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속한이 작가의 소설 쓰기는 소재부터 가볍다. 그는 소설을 통해 ‘삶이 이렇다’는 식의 심각한 교훈을 말하려 하지않는다. 그저 재미있게 기술할 뿐이다. 그에게는 앞으로도 또 다른 주인공의, 또 다른 일상이 계속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그는 아마도 계속 이렇게 쓸 것이다. 이 방법이 이 시대에 부합하는 최선의 방법일 수 있으니까…. 맘대로 몇 개의 키워드를 추출해 본다, 그 첫 번째. 우연 “불어에 ‘A chacun son destin(아 샤캥 송 데스탱)’이라는 말이 있지. 모두들 운명대로 살아가는 거야.” - 리빙 더 월드, 16쪽 “운명은 그렇게 우연히 찾아들었다.” - 행복의 추구 1, 131쪽 “인간 존재는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 우연의 힘을 절대로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우연히 어떤 때에 어떤 장소에 있게 되었다가 그 우연이 그 사람의 존재를 통째로 바꿀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구나 인생이라는 우연한 리듬에 묶인 포로이다.” - 모멘트, 58쪽 일상 속에서 우연을 만난다. 매일이 변함없는 일상 같지만 사실 매 순간 똑같지는 않다. 일상 속에 우연이 생기는 것은 매 순간에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변화가 없는 순간은 순간이 아니다. 그냥 ‘길이’만 있을 뿐이다. “길이 있다. 새로운 날이 있다. 눈앞에 기다리는 것들이 있다. 깨달음을 줄 심오한 무엇을 바라는 희망, 다시는 못 느낄 생각.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충동. 인간실존의 중심에 있는 고독. 타인과 연결되고 싶은 욕망. 타인과 연결될 때 피할 수 없는 두려움. 이 모든 것의 한가운데에… 순간이 있다. 모든 걸 바꿀 수 있는 순간,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는 순간, 우리 앞에 놓인 순간.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찾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결코 얻을 수 없는 게 무엇인지 알려 주는 순간. 우리는 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아주 짧은 찰나라도 순간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울 수 있을까” - 모멘트, 592쪽 김용규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하버드 대학교 설계대학원에서 방문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생태 기술 개발과 관련한 각종 연구 프로젝트의 총괄 책임자로참여했으며, 현재는 생태 기술과 디자인을 결합하는 분야에 관심을 쏟고 있다. 현재 일송환경복원과 Ecoid Corporation, USA 대표이사를맡고 있다.
  • [그들이 설계하는 법] 첫 번째 이야기
    나와 설계 설계사무소에 취업할 것도 아닌데 왜 설계 과목을 들어야 하느냐는 볼멘소리를 일주일에도 몇 차례 듣는다. 설계사무소에서 일하다가 더 이상 설계를 하기 싫다고 떠나는 젊은 친구들의 소식도 종종 듣는다. 그들은 설계사무소의 열악한 처우보다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등을 돌리노라고 말했다. 그들중에는 내가 설계에 대한 열정을 얘기할 때 눈을 반짝거리며 듣던 청년들도 꽤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설계하는 방법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이 무슨 흥이 있으며, 누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나 싶어 소심하게 거절도 해보고 머뭇거렸다. 설계가 뭐라고 수많은 청년들에게 또 다른 소외감과 상실감을 던지고 있는가. 그들에게 나는 설명할 수 없는 빚이 있고, 그 부채의식을 가지고있는 한 설계하는 일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를 말보다는 실천을 통해 내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설계에 대한 발언이 꺼려졌다. 수년 전 격월로 진행하던 연재조차도 펑크낸 적이 있는 전과범이라 더더욱 망설이다가 그래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설계에 대해 스스로 겪고 있는 진흙탕 같은 생각과 감정을 이번 기회에 빤히 들여다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조경학에서 설계는 과연 어떤 의미이며 역할인가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질문해 본 적이 없다. 대학의 성과를 취업률로 평가하는 시대에서 설계가 직업 교육의 한 트랙으로 대접받는 것만 원망할 수는 없으나 설계의 근원적인 기능과 역할에 대한 성찰 없이 그 원성을 받아들이기엔 뭔가 억울하다. 내게 가르침을 주신 스승 중 한 분은 “디자인은 좋은 생각”이라고 명쾌하게 정의하셨다. 디자인을 처음 배우는 학생들이 형태를 만드는 일에 너무 집중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짧고 굵게 던지신 꾸짖음이었다. 좋은 생각을 만들어내는 과정의 중요성이 사라진 설계에 대한 번잡한 논의는 소모적이다. 설계 교육의 우선적 목표가 좋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을 키워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여전히 조경학에서의 설계 교육은 그 중심적 위치를 잃어서는 안 된다. 설계는 직업 이전에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자 내가 세상을 꿈꾸는 방식이다. 세상에 대해 겁이 많은 나를 세상과 분리시키면서도 이어주는 나만의 창인 셈이다. 창이 내부와 외부를 나누어주지만 동시에 이어주는 솔기 역할을 하는 것처럼, 설계는 내가 (구질구질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비밀 아지트로 들어가는 창이기도 하고 내가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하는’ 현실로 되돌아가는 문지방이기도 한 셈이다. 현실의 질곡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는 매체이기도 하고, 내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거나 무심히 지나쳤던사각지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비로소 보게 만드는 반사경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설계가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이자 세상에 대처하는 유일무이한 필살기 아니겠는가. 설계가의 상상 대규모 마스터플랜 설계공모의 연이은 당선은 결국 내게 의미 있는 성과로 돌아오지 못했다. 나의 첫 설계사무소는 현장을 기반으로 한 중소 규모 프로젝트가 많았다. 상상이 현실로 만들어지는 과정에 매료되었다. 두 번째 설계사무소는 큰 규모의 회사였는데, 내게 덩그러니 주어진 ‘설계공모 담당’이라는 암묵적 직위가 버거웠다. 현장이 큰 의미가 없는 택지개발 설계공모, 등고선이 사라진 측량 도면, 당선되면 모든 아이디어와 도면을 ‘실시 담당’에게 시집보내야 하는 기이한 일들에 차츰 익숙해질 무렵, 나는 설계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공과대학이나 자연대학의 교수들에게 그들만의 실험실이 있듯이, 설계를 가르치는 사람도 그만의 실험실 혹은 실천의 현장이 있어야 했다. 이런저런 차가운 눈총과 루머 속에서도 꾸역꾸역 설계 일을 해오고 있는 이유다. 내게 설계는 소위 대학의 3대 기능인 교육, 연구, 봉사를 실천하는 매체가 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회사에 소속되지 않은 ‘자유 계약 선수’인내게 선뜻 실험을 부탁하는 클라이언트는 없었다. 그런 내게 설계공모는 정말 중요한 기회였다. 비록 준공현장에서 설계의 개념과 공간의 디테일이 교차하는 짜릿한 감동의 기회는 얻지 못하였지만, 일련의 설계공모를 통해 평생에 걸쳐 풀어나가야 할 무한한 생각과 질문의 실뭉치를 마련했다. 그러나 설계가에게 도면을 비평해주는 것은 또 다른 도면이 아니라 현장이듯, 시공 과정에서 검토되지 못하고 거듭되는 도면 작업은 제 아무리 아이디어가 기발하고 개념이 탄탄하고 디자인이 아름다워도 실제적인 전투력 상승으로 쉽게 이어지지 못한다. 설계가에게 있어서 자기 성찰적 과정은 도면과 실제 만들어진 공간과의 설레면서도 낯 뜨거운 조우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실험적”이라는 평가와 함께 똑 떨어진 어느 신도시 공원 설계공모를 마지막으로 마모적인 공모 작업을 잠정적으로 그만두었다. 그 열정의 흔적들은 철지난 컴퓨터 외장 하드의 아카이브 폴더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설계가 덧없다고 생각할 무렵, 손끝에 만져지는 디자인을 하고 싶어 시작한 것이 나무로 가구를 만드는 일이다. 그 무렵 격려의 뜻을 담아 한 친구가 한 권의 책을 전했다. 미술비평가이자 전시기획자인 김진송이 목수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무라는 질료를 통해 펼친 상상의 결과물을 모은 책 『상상목공소』. 창작 활동은 어쨌든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니, 그 내용과 결과의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을 떠나 상상력은 창작 활동의 핵심적인 역량이자 원천이다. 김진송은 상상력에 대해 얘기하면서 서사적 상상력, 시각적 상상력, 논리적 상상력이 거의 모든 생산과 창작에 관여한다고 얘기하였는데, 억울하게도 평소에 내가 생각하던 바와 지나치게 비슷하다. 나는 조경과 관련된 상상력을 소설적 상상력, 조형적 상상력, 기술적 상상력, 그리고 하나 더 보태어 생태적 상상력이라고 믿어왔다. 앞의 세 가지는 의미하는 바가 김진송의 그것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 네 가지의 상상력이 연금술사의 마법 같은 화학작용을 통해 다양한 도면 정보로 표현되는 것을 설계라고 믿는다. 내가 첫 번째로 좋아하는 상상력의 범주를 소설적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소설처럼 설계에도 어떠한 이야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에도 단편, 중편, 장편소설이 있고, 대하소설, 추리소설, SF소설, 연애소설도 있듯, 내가 소설적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세부 장르가 제각각이다. 굳이 ‘서사적’이라는 단어보다 ‘소설적’이라고 부르고 싶은 이유는 큰 줄거리뿐만 아니라 찌질하게 느껴질 만한 소소한 이야기 역시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소설과 시의 작법이 적절하게 버무려진 작업이 설계에 가깝기 때문이다. 시적 감흥에 대한 얘기는 이 코너를 열어준 박승진 소장의 탁월한 표현에 공감한다. 나의 경우는 공간 속에서 이야기를 관찰하고 머리와 가슴으로 이야기를 상상하는 능력이 선행할 뿐이다. 소설적 상상력이 시로 표현될 때, 시로 표현된 것을 논문처럼 구체화할 때, 내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설계 과정에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저런 자리에서 멋쩍게 몇 번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내가 필연적으로 설계를 하게 된 이유, 혹은 설계를 정말 좋아하게 된 이유는, 내 첫 사랑과 첫 설계가 우연히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우연의 새들이 내 어깨 위에 날아 앉았던 것처럼”1 태어나서 처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마침 이듬해 학기에 정원 설계라는 첫 설계 수업을 듣게 되었다. 주택 정원을 설계하는 개인별 프로젝트였는데, 그 정원의 주인은 자기가 맘대로 정할 수 있었다. 물론 젊은 부부를 위한 정원을 만들었다. 그가 매일 정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걸어 들어오는 작은 돌길 옆으로는 소박한 꽃을 심었다. 그 길은 굽어져서 집에 들어왔을 때 건물보다는 정원의 전경이 펼쳐지고 그 길의 끝에 그를 기다릴 벤치가 놓여져야 했다. 저녁에 같이 지는 해를 보면서 앉아있을 언덕 위의 그네를 그려 넣고,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만들어갈 행복한 삶을 설계했다. 나의 첫 설계는 또 다른 연애질이었다. 엄청난 양의 유치찬란한 핑크빛 이야기를 그 설계 도면이 보장해줘야 했다. 그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아우성쳤고, 스무 살의 나는 그중 핵심적인 이야기를 엄선하여 선으로 꼭꼭 눌러 담았다. 상상이 선으로 이어졌다. 행복했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그녀는 자신을 위해 그가 설계한 집을 평생의 추억으로 가지고 살지만, 이 경우 그녀의 정원 설계도는 그에게 가지 못했다. 학기 말이 되기 전에 그가 떠났기 때문이다. 결말이야 비참하더라도, 난 당시에 설계가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지를 처절하게 경험했다. 첫 스튜디오를 통해 설계에 대한 평생의 문신 같은 기억을 갖게 되었다. 찌질한 연애소설적 상상력이 설계를 하고 가르치는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내겐 설계가 그 공간 안에서 장차 일어날 수많은 이야기들을 상상하는 일에서 시작하게 되었나보다. 어찌 설계가 가슴 설레지 않겠는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상상 상상에도 스케일이 있다. 요즘 유행하는 사극 드라마처럼 나라를 만드는 역사적 상상에서부터 주말엔 무엇을 할까라는 일상의 상상까지. 스케일이 크다고 더 중요하고 스케일이 작다고 하찮아지지 않는다. 그저 다를 뿐이다. 우리 시대의 특혜라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새로운 도시가 백지에서 탄생해서 만들어지는 과정을 우리나라 땅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인데, 바로 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시의 얘기다. 조경이 다루는 영역이야 엄청나게 다양하지만 아예 처음부터 새로운 도시를 만드는 일에 관여하는 일은 하워드(Ebenezer Howard)의 전원도시(Garden City)같은 경우가 아니라면 어디 가능이나 했겠는가. 행정중심복합도시는 도시 개념에 대한 공모에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공모전을 통해 전 세계적인 아이디어와 지혜를 모아 탄생했다. 특히 중앙이 비워진 이 새로운 개념의 도시 속 중앙녹지공간은 여느 공원이 허락하는 일반적인 상상 그 이상을 요구하였다. 비록 우리가 제출한 안이 당선작 그룹에 꼽히지는 못했으나, 그 과정에서 여러 전문가들과 진행한 도시에 대한 토론은 현실적인 업역 구분의 좁은 한계에 부딪쳐 답답했던 상상력을 더욱 자극하였다. 규모가 커질수록 협업을 요청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 집단의 협력 작업은 그 이후 내가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에 대한 확신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 미래의 도시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농경지를 중앙에 품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 논은 밭이나 과수원에 비해 그 작동 방식이 다르다. 땅과 물의 적절한 치고 빠짐이, 즉 물이 땅과 맺는 역동적 관계가 중요하다. 우리는 우선 논농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말라있는 논에 물을 대는 방식에 매료되었다. 논의 물길에는 물을 통제할 수 있는 ‘점’적 요소가 있다. 수많은 수문들이 그것이다. 이 점들이 열리면서 갇혀 있던 물은 농수로라는 ‘선’적인 실체로 뻗어간다. 이 선들이 논에 물을 공급하여 하나의 수‘면’을 형성한다. 우리는 점이 선으로 변하고 선이 면을 만드는 실제적·개념적 과정이 사회적으로도 형성되길 바랐다. 가장 작게는 새로운 도시의 시민 개개인이 자신의 개성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공간과 문화를 상상했다. 제도화된 문화 공간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민들이 자기 욕구를 표출할 수 있는 공간을 원했다. 이곳에서는 누군가평생에 걸쳐 모아온 수집품이 있다면 쉽게 임대하여 일정 시간 동안 자기만의 갤러리를 꾸밀 수 있다. 가수가 되고 싶어하는 청년들은 자기만의 뮤직 갤러리를 열어 소규모 연습 공연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가설 구조물 단위를 ‘퍼스널 쇼케이스(personal showcase)’라고 명명하였다. 이러한 소규모 점적 시설들이 활성화되어 늘어선다면 느닷없이 새로운 거리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러한 풀뿌리식 문화 시설을 조직하고 도시와 공원의 게이트 역할을 할 문화 콤플렉스는 ‘큰 점’으로 자리 잡는다. 점이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많아지면 선으로 변하듯, 참여하는 사람들과 문화 시설들이 늘어나면 새로운 가로가 형성될 것이다. 길을 먼저 내는 방식보다 백지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흔적이 모여 길이 생기는 방식에 더 가깝다. 이 길들로 다니는 사람들이 기존의 논둑길을 통해 녹지 공간 전역으로 퍼져 나간다. 당연하게도 결국 이 엄청난 ‘면’을 어떤 개념을 가지고 접근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이 깊어졌다. 도시의 공공 공간의 역할에 대한 질문들, 공간의 스케일과 그 역할, 조성 프로세스에 대한 질문들, 시민의 개인성과 집단적 정체성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 모아졌다. ‘필드 뱅크(Field Bank)’라고 명명한 이 공간의 핵심은 도시의 비워진 중앙부가 서로 다른 단위의 가치들을 축적하고 생산하고 증식하고 교환하고 분배하는 사회적 은행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부의 증식을 욕망하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공원이라는 공공재이자 공공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재정의해보자는 시도다. 가치의 생산, 교환, 증식이라는 현대 사회의 작동성에 기반하되 그 체계 내에서의 공공성을 고민해보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대규모 공원은 도시에서 생산한 것들을 맡아서 보관해주고, 그것의 가치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증식시키고, 동시에 도시에서 필요한 것들을 자체적으로 생산하여 공급해주고, 서로 이질적인 화폐 단위를 중재해주어 문화나 기억 등 도시의 무형 자산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돈이 아닌 다른 교환 가치로 돌려주는 시스템이다. 누구나가 자기의 주거래 은행이 있듯이, 개개인이 중요시 여기는 가치들을 맡기고 관리하는 사회적 은행으로서 존재하는 공원 혹은 공공 녹지를 상상한 것이다. 시민 한 명 한 명의 가치를 모아 사회적 가치를 공유하는 도시에 대한 상상이 필드 뱅크라는 개념과 결과를 만들었다. 필드 뱅크는 다양한 개별 은행의 연합체인데, 잉여 식량 자원을 맡아 재분배하고 건강한 농업 문화를 관장하는 곡물 은행(crop bank), 우리나라 토종 종자를 개발하고 보급하는 종자 은행(seed bank), 개인, 커뮤니티, 집단 등의 문화적 활동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문화 은행(culture bank), 도시의 건설에 따라 필요한 나무를 재배하고 도시의 변화에 따라 자리를 옮겨야하는 식물 자원의 보관과 재배치를 담당하는 나무 은행(tree bank), 지역 생태계의 동물에 대한 관리뿐만 아니라 도시화에 불가피한 반려견과 유기견 등을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건강한 동물복지 문화를 담당하게 될 동물 은행(fauna bank), 친환경 에너지의 생산과 보급, 탄소발자국 등의 체계적 관리를 위한 에너지 은행(energy bank), “노인 한 명이 죽으면 박물관 하나가 사라진다”라는 말처럼 전문 지식뿐만 아니라 제도권의 지식 체계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개인들의 ‘암묵지’를 권장하고 조직화하여 사회적으로 축적하고 공유할 수 있는 지식 은행(knowledge bank), 시민 개인과 지역의 역사를 기록하고 찾아볼 수 있는 기억 은행(memory bank), 제방을 허물고 하천의 범람과 도시의 우수를 관리하여 물을 저류하고 처리하는 물 은행(water bank), 그리고 조금은 생뚱맞을 수도 있지만 농작물을 발효 가공하여 먹는 우리나라 음식 문화를 개발하고 보급하는 발효 은행(condiment bank) 등을 상상하였다. 그 외에도 공원이 성장하면서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다양한 은행이 생기고 진화할 것이다. 이 모든 은행은 마치 다른 나라의 화폐 단위를 일정 환율에 의해 바꿀 수 있는 외화 거래처럼 서로 교환된다. 곡물 창고, 종자 연구소, 문화 시설, 수목원, 동물원, 발전소, 저류조 등 기존에 있는 시설을 말장난하듯 바꾸어 불렀다고 누군가 따져 물을 수도 있겠다. 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에게 중요했던 것은 지금까지 분리되어 존재했던 도시의 각 부분이 모두 공공의 영역에서, 도시의 가치를 생산하는 하나의 체계 속에서 자기의 역할을 재정립하는 그 관계성이다. 개인과 도시의 관계성, 도시의 부분들 간의 관계성, 자연과 문화의 관계성, 가치들 사이의 관계성. 나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설계하는 데 있어 소위 말하는 ‘큰 선’ 그리는 것을 조심스러워하는데, 그 이유는 규모에 맞는 시스템에 대한 생각 없이 지르는 큰 선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 큰 선은 우선은 개념적이고 논리적인 생각을 직설적으로 옮겨 그린 것이다. 스케일이 작든 크든, 공간의 구조 혹은 뼈대를 만드는 작업은 개념적이고 논리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 있어서 공간의 작동 시스템에 대한 생각이 먼저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 그 다음이 조형적이고 감각적인 도형적 퇴고 과정이다. 논리성 자체만으로는 ‘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경관의 체험은 기본적으로는 감성적 체험이다. 공간의 규모에 맞는 감성적 체험을 상상하고 재현할 수 있는 설계가의 역량은 훈련 없이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 법이다. 아름다운 조형은 디자인의 핵심적인 부분 중 하나다. 물론 무엇을 아름다움이라고 규정하고 누구의 시선으로 바라본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는 시대적으로 상황적으로 매우 다르게 정의될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상대적인 어려움을 뚫고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과정이 설계라는 것이다. 나는 요즈음 조경 설계에 대한 논의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가 부재하다는 사실이 몹시 불안하다. 여기에 기술적 상상력은 ‘큰 선’을 현실화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뉴욕 센트럴 파크의 목가적 풍경은 ‘기술의 향연’에 가까운 엄청난 기술적 상상력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하자. 논리적, 조형적, 감성적, 기술적, 미적인 상상들이 반죽되어 도면화되는 과정에서 마지막은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그 선들을 검증하게 된다. 이야기로 시작해서 다시 이야기로. 그래서 ‘이곳은 어떠한 삶을 꿈꾸는가’라는 질문으로. 그래서 아무리 큰 규모의 설계도 내겐 그 공간을 이용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입장에서 따져보는 게 중요한가 보다. 그렇지만 큰 규모의 땅이 작은 규모로 단절되어 큰 땅만이 제공할 수 있는 경관적, 체계적, 활동적 잠재성이 사라지지 않도록 견제하는 일 역시 대규모 설계에 있어서 중요하다. 나라는 작은 개체가 더 큰 세상을 만나는 곳이 결국 공공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 중 하나일 테니. 세상에 대한 상상이 꼭 거대 담론이나 거창한 이슈를 언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조금 더 따듯하고 재미있는 세상에 대한 상상은 언제나 즐겁다. 현대의 도시적 삶에서 고립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커뮤니티가 정답이라고 단정 짓는 일은 왠지 불편하게 느껴진다. 커뮤니티는 무언가를 공유하는 집단이다. 커뮤니티는 동시에 내부인과 외부인을 판단하고 구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와 남을 구분하는 것이 정치”2라고 얘기하던데, 커뮤니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섣부르게 강제된 커뮤니티가 그것에 쉽게 끼지 못하는 새로운 유형의 소외를 만들까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설계에서 사람을 다루는 일이 제일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사람에 대한 섬세하고 깊은 고민 없이 만병통치약처럼 커뮤니티가 제시되는 풍토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그 흔한 ‘엄마들 커뮤니티’에조차 끼지 못하는 내 성격 탓일지도 모른다. 그런 탓인지 나는 타인들과 훨씬 더 느슨하고 느리게 가까워지는 방법을 찾아다닌다. 목표가 있더라도 그곳에 이르는 방법이 훨씬 더 유희적이었으면 한다. 타인과 강제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즐겁게 교류하는 것 자체가 공공 공간의 사회적 기능 중 하나라고 믿는다. ‘놀이’는 공공 공간의 큰 작동 방식 중 하나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빈둥거리는 것부터 축제에 이르기까지 놀이의 가짓수는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 수에 버금갈 것이다. 72시간 프로젝트에 출품한 ‘희망물고기 낚시터’는 도시의 공공 공간에 유머와 놀이를 통해 펼쳐질 재미있는 세상에 대한 상상에서 비롯된 작업이다. 우선 ‘의자를 만들라’는 대 전제가 주어졌다. 우리는 의자라는 시설물보다는 누군가에게 ‘어딘가에 앉아있었던 즐거운 기억’을 만들고 싶었다. 우리는 서로 돌아가며 지금까지의 삶에서 각자 가장 소중한 ‘어딘가에 앉아있었던 기억’을 꺼내어 공유하였다. 놀랍게도 많은 친구들이 어렸을 때 물가의 작은 목교나 어딘가 어른 규격의 벤치에서 바닥에 발이 닿을락 말락한 상태에서 다리를 흔들거렸던 기억, 그리고 그곳에 함께했던 사람들과 그때 바라봤던 풍경을 끄집어냈다. 우리는 한편 이렇게 만드는 임시적인 공공 공간이 그 동네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앉아서 쉰다’라는 의자 본연의 기능보다는 하나의 공간이 담을 수 있는 메시지와 사회적 기능을 꿈꾸는 일이 더 중요했다. 격려보다는 비판이 보편화되고, 내가 올라가기 위해 남을 깎아내리는 일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세상에서 ‘우연히’ 내게 전해진 희망의 메시지는 어떻게 다가올까. 어딘가에 앉아있던 즐거운 기억을 공유하는 임시적인 커뮤니티가 가능할까. 반으로 가르면 행운의 쪽지가 나오는 행운 쿠키(fortune cookie)처럼 우연히 뽑게 된 쪽지에 적힌 누군가의 흔적을 통해 세상의 나 아닌 누군가와 잠시 이어질 수 있을까. 내가 누군가를 꼭 1:1로 만나지 않더라도 자신의 소망과 타인의 격려가 ‘우연’을 통해 교차하는 체험을 디자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희망물고기 낚시터는 이렇게 작동된다. 이곳에 들르는 사람들은 미리 잘라놓은 ‘백지 상태’의 물고기를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다. 물고기 뒷면에 나만의 소원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덕담 등 희망의 메시지를 쓰고 낚시터에 방생한다. 이곳에 쉬러 온 사람들은 심심할 때 구비된 낚싯대로 낚시질을 할 수 있다(물고기의 눈과 낚싯대의 끝이 자석으로 되어 있다). ‘우연히’ 낚은 물고기의 메시지를 보고 난 이후의 반응은 자유다. 어떤 사람의 소원을 함께 기원해 줄 수도 있고, 누군가가 보낸 따뜻한 말 한마디에 웃고 잊어버릴 수도 있고, 그저 낚는 행위 자체만 즐겨도 그만이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바보짓을 보고만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의 누군가가 공유하고 싶은 소원과 누가 될지 모르는 사람에게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고 낚고 만들고 놓아주는 놀이의 과정이 앉아있는 행위와 겹쳐지길 바랐다. 모든 물고기들이 저마다의 개성이 있지만 동일한 크기와 형태를 가지고 있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원이 똑같이 소중하게 여겨지길 바랐다. 우리의 ‘너무 앞서가는 혹은 막나가는’ 아이디어는 처음 이틀 동안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게 펼쳐졌다. 참여했던 학생들이 시간을 정해 낚시터에서 사람들과 대화하며 물고기 기부를 진행했고,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였다. 잊을 수 없는 일 중의 하나. 어느 날 아침에 가보니 밤새 누군가가 ‘붕어빵’을 물고기 사이에 곱게 놓아두고 갔다. 수능을 앞둔 시기여서 모두의 수능 시험을 격려하는 물고기를 누군가가 기둥에 박아놓고 갔다. 그러나 함께 낚시터를 만든 친구들이 각자의 수업과 시험으로 현장을 더 이상 지키지 못하게 되었고 비가 많이 오고 날씨는 몹시 추웠다. 아름다운 꽃밭의 꽃은 하룻밤이 지날 때마다 사라졌다. 따뜻하고 재미있는 세상에 대한 상상은 누군가가 훔쳐가 버린 수많은 꽃 화분처럼 냉정한 현실 앞에 사라졌지만 그 과정을 통해 설계가가 무엇을 디자인해야 하는가에 대한 열린 질문을 가지게 되었다. 도둑조차 탐내지 않았던, 꽃과 잎이 다 떨어져 버린 볼품없는 다년생 식물은 무료급식소 ‘밥퍼의 정원’으로 자리를 옮겨주었다. 곧 들이닥칠 겨울의 칼바람을 이기고 다시 새싹을 틔우게 되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희망으로 느껴질 테니. 설계가는 물리적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과 동시에 사회적·문화적 행위를 디자인하는 것이다. 설계가는 경관을 디자인하는 동시에 체험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설계가는 결과물을 디자인하는 동시에 프로세스를 디자인하는 것이다. 결국이 모든 것이 ‘좋은 생각’에서 비롯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니 설계를 배우고 가르치는 일의 바닥에는 ‘생각하고 상상하는 능력’이 기초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상세 도면과 내역 작업의 반복적이고 소모적인 일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하는지와 연결되지 못한다면, 즉 설계가의 꿈과 상상이 현실 속의 지긋지긋한 도면 작업과 이어지는 창을 갖지 못한다면, 설계는 더 이상 생산적인 창작이 아닌 허드렛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될 것이다. 설계에 대해 환상‘만’ 품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 설계를 통해 ‘꿈꾸는 일’을 무의미하다고 다그치는 순간 우리의 젊은 청년들은 계속해서 설계에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내가 보지 못했던 세상에 대한 발견 모든 설계 프로젝트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지적 탐구 과정으로 시작한다. 무언가를 조금 더 잘 알게 되면 꼭 그만큼 세상을 더 잘 보게 된다. 서울에서 중산층으로 태어나고 자란 내가 인생에서 겪은 경험의 폭이 넓을 리 만무하다. 모든 설계 과정은 그래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만나는 과정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정 정도의 두려움과 공존할 수밖에 없나 보다. 설계 과정이 아름다운 이유 중 하나는 설계 작품이 하나 끝나면 그 전의 나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서는 나를 확장시키는 과정으로서의 설계적 측면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눠볼까 궁리 중이다. 각주 1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가볍게 빌려왔다. 각주 2 칼 슈미트 저, 김효전 역, 『정치적인 것의 개념』, 법문사, 1992. 김아연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와 동 대학원 및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건축대학원 조경학과를 졸업했다. 미국Stephen Stimson Landscape Architects와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디자인 로직에서 실장으로 일했으며, 국내외 다양한 스케일의 조경 설계를 진행해왔다. 자연과 문화의 접합 방식과 자연과 커뮤니티의 변화가 가지는 시학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조경 설계 실무와 설계 교육 사이를 넘나드는 중간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피터 해치 몬티첼로 가든 디렉터
    미국 버지니아 주에 위치한 몬티첼로Monticello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미국 유일의 개인 주택으로, 그 주인은 미국의 국부 중 한 사람이며 3대 대통령을 지냈고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었다. 제퍼슨은 5개 언어에 유창하고, 과학, 건축, 철학 등 다방면에 능통한 천재적 인물이었으며, 버지니아 대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의 저택인 몬티첼로는 건축과 예술 못지않게 채소와 과수 정원으로 잘 알려졌다. 유용한 작물을 미국 문화에 도입하는 것보다 중요한 국가 대사는 없다고 천명할 정도로, 그는 농업에 깊은 열정을 갖고 있었고, 새로 건국된 미국에 농본주의 국가 비전을 제시했다. 제퍼슨은 관상용 화훼 식물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가꾸지도 않았다. 그의 정원은 항상 채소와 과수로 이루어졌고, 백악관에서도 육식을 최소화한 신선한 채소 위주의 식단을 옹호했다. 그는 20대 초반의 변호사 시절부터 직접 정원을 가꾸었는데, ‘가든 북’이라는 기록지에는 58년간의 성공과 실패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을 가드닝 아마추어 혹은 학생이라 불렀다고 한다. 새롭고 유용한 작물을 도입하고 시험하는 등 그의 가드닝 모험은 모두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당시만 해도 미국 농부들은 영국의 가드닝 형태를 모방하고 있었는데, 제퍼슨은 유럽 모방을 그치고 독자적인 작물 품종과 재배 방식을 확립하기를원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기후의 차이였다. 유럽형 정원이 노동과 시설 집약적인데 반해, 제퍼슨은 버지니아의 온화한 기후를 이용해 더욱 많은 수확을 더 쉽게 산출해내는 방법을 찾아냈다. 또한 제퍼슨의 정원은 단순히 먹거리를 공급하는 차원을 넘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심성과 사회적 변화를 위한 동력이었다. 몬티첼로에서 생산된 먹거리를 나눔의 기회로 삼고 행복을 찾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는 유명한 식도락가이자 와인 애호가였으며 미국에 아이스크림과 파스타, 토마토를 처음 도입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최근 기후변화와 먹거리의 안전성 문제, 가격 상승 등으로 인해 ‘정원에서 식탁으로’ 형태의 운동이 크게 성장하고 있다. 피터 해치는 몬티첼로의 정원과 대지에 대한 개발과 관리를 맡은 디렉터로서, 그의 리더십으로 200년 전에 잊힌 토머스 제퍼슨의 채소 정원을 거의 완벽하게 복원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330여 종의 식용 작물을 통해 전통적 가드닝 방식과 종자의 다양성을 보존하고, 역사적 문헌에 기초한 정원 복원에 있어 선구적인 사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피터 해치가 처음 몬티첼로에서 일을 시작할 무렵의 상황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건물 주변으로 보잘것없는 화단이 듬성듬성 놓여있을 뿐이었고, 몬티첼로는 작은 지방의 시민운동 대상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피터 해치는 토머스 제퍼슨이 이루고자 했던 가드닝의 이상과 그 역사적 중요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숲The Grove, 채소 정원Vegetable Garden, 과수원South Orchard, 파빌리온Pavilion, 포도밭Northeast and Southwest Vineyard 등을 차례로 복원하고, 역사경관협회Historic Landscape Institute, 전통식물센터Center for Historic Plants를 설립하였으며, 매년 전통 수확 축제Heritage Harvest Festival를 조직하는 등 잊혔던 몬티첼로 정원의 유산을 현재로 되살리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84년에는 미국조경가협회ASLA 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저작으로는 『Thomas Jefferson’s Monticello』, 『The Fruits and Fruit Trees of Monticello』, 『Thomas Jefferson’s Flower Garden at Monticello』, 『TheGardens of Thomas Jefferson’s Monticello』, 『Thomas Jefferson’s Garden Book』, 그리고 근작으로 『The Rich Spot of Earth: Thomas Jefferson’s Revolutionary Garden at Monticello』(2012) 등 다수가 있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전시해 왔다.
    • 최이규 /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지소장
  • 조경가로 자라기 30대 조경가 30인에게 던진 다섯 가지 질문
    한국 제도권 조경이 서른 살을 향해 달려가던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의 경제적 환경은 본격적인 조경설계사무소에 대한 수요를 낳았고, 정상적인 설계 교육이나 시스템이 뒷받침되지 못한 상황에서 ‘스스로’ 성장한 한국 조경 1세대와 2세대는 불안하지만 동시에 화려한 그들의 시대를 맞았다. 반면 최근의 문화친화적 사회 환경은 문화적 역량과 전문성을 갖춘 조경가를 요청하고 있지만, 이른바 건설 경기의 침체가 이 세대에게 위기를 맞게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세대가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조경을 배우고 조경가를 꿈꾸기 시작한 이들이다. 한국 조경의 3세대라 부를 수 있을 이들은 전 세대와는 다른 토양에서 시작했다. 조경의 정체성에 대한 막연한 책임감이나 부채 의식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자신의 선택을 통해 조경가의 길을 걸었다. 그들에게는 개인의 전문성이 더 중요했다. 척박한 외적 설계 환경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로서의 조경가, 디자이너로서의 조경가로 내실을 다지며 성장하고 있다. 그들의 성장 과정은 다양한 스펙트럼에 걸쳐 있다. 유수의 해외 디자인 스쿨에서 유학하고 세계적 오피스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아온 이들이 있는 반면, 국내에서 교육받고 제도권 설계사무소에서 경력을 쌓으며 자신의 전문성과 역량을 깊고 넓게 가꾸어 온 이들도 적지 않다. 국내의 교육과 다양한 작업 경험을 바탕으로 해외 설계사무소에서 활동하는 이들도 있고, ‘강소’ 오피스를 꿈꾸며 일찍이 독립한 이들도 있다. 이번 호 『환경과조경』은 이들이 조경가로 자라온 다양한 과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불안하고 피로한 한국 조경의 이면에서 묵묵하지만 깊이 있는 호흡으로 성장하고 있는 30대 조경가 30인의 성장사와 비전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이들 30인의 조경가의 이야기는 조경가를 꿈꾸면서도 늘 갈증과 허기를 느끼는 미래 세대에게 조경가로서의 성취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 스타 조경가가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의 평범한 한 구성원으로서 또 직업인으로서 조경가로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1. 조경가로 성장하게 한 가장 큰 동력과 계기는? 또는 당신을 사로잡은 조경의 매력은? 2. 조경가의 길을 걷는 과정에서 또는 자신의 작업에, 영향을 준 사람이나 작품 혹은 책이 있다면? 3. 주도하거나 참여했던 작업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또는 중요하게 여기는 프로젝트와 그 이유는? 4. 성장 과정에서 직면했던 어려움이나 현재의 가장 큰 고민은? 5. 조경가로서 자신만의 접근 방식이나 설계 철학은? 조경가로서의 미래에 대한 꿈과 구상은?
    • 김정은, 이형주, 조한결
  • [공간 공감] 연남교 교차로
    이번 대상지는 계획이나 설계의 결과물이라고 보기는 힘든 장소다. 연재를 여는 글에서도 밝혔듯이 “공간 공감”의 논의 대상은 설계가의 작품만이 아니다. 연남교교차로 일대는 도시에서 발생한 수많은 흐름이 입체적이고 집약적으로 교차하는 곳이며 의도하지 않은 수동형의 도시 공간이다. 이 교차로에는 홍제천을 시작으로 홍제천변 보행로와 자전거도로, 수색로와 성암로 등의 일반자동차도로, 가좌역을 포함한 경의선, 옛 경의선 흔적과 공항철도 등의 철로, 그리고 내부순환도로와 모래내고가차도 등의 고가도로가 집약되어 있다. 곧 조성될 경의선 공원화 사업의 초입부이므로 선형공원의 흐름도 이곳에 가세할 전망이다. 현재의 공간은 다소 복잡하고 산만함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그저 지나쳐버리는 헙수룩하고 일상적인 공간에 불과하다. 이처럼 불리한 조건이 가득한 공간에서 우리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미묘한 매력을 느꼈다.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 이 낯선 공간의 매력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보기로 한다. 우선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이 장소의 특징은 다양한 층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일단 물리적으로 여러 높이가 존재하여 다양한 위치에서의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보는 위치의 차이는 같은 공간의 다른 면을 드러내는 데 도움을 준다. 하천 레벨에서는 주변 도시의 건물들이 시각적으로 소거되고 하천과 교통 구조물만 강조되며, 도로 레벨에서는 차량과 보행자 흐름의 복잡도를 가장 강하게 느끼게 된다. 상부의 교통 구조물에서는 자동차나 기차에서 바라보는 시각이기 때문에 빠른 속도의 조감이 제공되는 반면, 그리 긴 구간은 아니지만 홍제천을 건너는 옛 경의선의 남겨진 교각에서는 느린 속도의 독특한 조감이 가능하다. 현재 펜스에 의해 막혀 있는 공간이기는 하지만 쓰이지 않는 철로 교각의 상부가 가장 잠재력 높은 뷰포인트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시간적 층위도 빼놓을 수 없다. 녹슨 철, 무성한 잡초와 함께 세월의 때가 낀 옛 경의선의 교각 흔적은 지금 모습 자체로도 향수를 자극한다. 반면 동일한 콘크리트 구조물이지만 비교적 최근의 교통 시설인 내부순환도로는 현대적 도시의 이미지를 풍기고 있다. 물론 이러한 공간적·시간적 층위가 그 효과를 극대화하면서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우리에게 파편적으로 인식될 뿐이다. 만약 이곳이 설계의 대상지가 된다면 이러한 파편을 염두에 둔 정리하기와 드러내기가 중요한 숙제가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정욱주는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하였다. 글쓴이 외에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였고,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 제이콥 자비츠 플라자의 세 번째 변신
    기구한 운명의 광장 뉴욕 로어 맨해튼에 위치한 제이콥 자비츠 플라자Jacob Javits Plaza는 미국 연방 기관인 총무처General Service Administration(GSA)가 소유한 제이콥 자비츠 연방 빌딩의 동쪽 면에 위치한 공공 광장이다. 이 광장이 재미있는 이유는 근래에 새롭게 단장한 MVVAMichael Van Valkenburgh Associates의 재기 넘치는 포장 디자인이나 부정형의 마운드로 만들어낸 몇 개의 친밀한 사교 공간intimate social space 때문만은 아니다. 이 광장은 연방 빌딩이 완공된 1967년부터 지금까지 약 45년 사이에 세 번에 걸쳐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야만 했다. 이례적으로 짧은 수명의 오픈스페이스 디자인 전시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대중과 작가 및 예술가 또는 디자이너 사이의 뜨거운 논쟁을 불러왔던역사가 있는 공간이다. 공공 공간을 디자인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공공공간을 디자인 하는 방향이 시대가 변화하면서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엿볼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에 필자에게는 더 흥미 있는 공간으로 다가왔다. 45년이라는 짧지만 긴 역사를 간략히 간추려 보자. 연방 빌딩 완공 후 소유주인 GSA는 당대의 유명 미니멀리스트 조각가인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에게 이 광장에 어울리는 조각품을 의뢰한다(1969). 이는 “공사비의 0.5%를 공공 예술 작품을 설치하는 데 투자해야 한다”는 정부의 ‘건축물의 예술 작품Art-in-Architecture’ 프로그램 일환으로, 리처드 세라는 “사이트에 꼭 맞는site specific”1 ‘기울어진 호Tilted Arc’를 광장의 북쪽 일부에 설치한다(1981). ‘기울어진 호’는 높이 3.6m, 길이 36m, 두께 62.5mm에 달하는 코르텐 스틸 소재의 벽면이다. 작품이 설치되자마자 광장 주변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은 이 조각품이 보기 흉하고 시야를 차단하며 통행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크게 반발하며 나섰다. 작품을 반대하는 대중과 이를 옹호하는 예술가2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공공 공판public hearing이 4년 넘게 열렸고, 결국 ‘기울어진 호’는 철거 명령을 받게 된다(1985). 긴 법정 공방 끝에 리처드 세라의 항소는 기각되고, 1989년 ‘기울어진 호’는 철거되어 GSA 소유의 브루클린 창고에 보관된다. 작품의 철거 후 광장에는 임시 플랜터와 작은 교목들이 빈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3 1992년, 연방 정부는 광장 지하에 위치한 지하 주차장의 슬래브 방수 처리 공사에 착수하게 되는데, 이는 광장을 새롭게 단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당시 디자이너로 선정된 마사 슈왈츠Martha Schwartz는 원형으로 구불구불하게 연결된 밝은 녹색 벤치와 토피어리 형태의 식재로 대표되는 디자인을 제안했고, 이는 1997년 완공되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벤치의 밝은 녹색은 하루 중 대부분을 주변 빌딩들에 의해 그림자가 지는 공간을 밝게 만들기 위해 선정되었으며, 이밖에 파란색의 음수대, 오렌지색의 쓰레기통 등을 공공 가구로 도입했다. 재미있는 점은 이들 공공 가구가 모두 뉴욕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공원 가구를 살짝 비틀어서 디자인되었다는 점이다. 마사 슈왈츠는 이들의 디자인이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의 유령이 너무 강력하여 그러한 디자인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편 여타 예술 분야에 비해 조경에 대한 지지가 빈약한 뉴욕 시에 대한 비판”4에서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사 슈왈츠의 디자인은 “리처드 세라의 안티테제antithesis로, 실제 사용 가능한 공간”5으로 계획되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포스트모던 벤치가 이전 ‘기울어진 호’와 같이 광장의 움직임을 제한한다는 등의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안동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마치고 뉴욕의 제임스 코너 필드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에 입사하여 Philadelphia Race Street Pier, 부산시민공원, London Queen Elizabeth Olympic Park, Hong Kong Tsim Sha Tsui Waterfront 등의프로젝트를 진행했다.
    • 안동혁 /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
  • 낯선 곳의 한국 정원
    지난 5월 31일 타슈켄트에 완공된 서울별서는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옛 정원을 재현했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 있는 바부르공원은 외교 단지와 대학가가 있는 대로 사이에 위치해 사람들의 이동이 빈번한 곳으로,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나무가 빽빽하게 심겨 있었다. 이곳에 서울별서가 생기면서 공원 한편에 오픈스페이스가 형성되었고 색다른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한국인의 시선으로 낯선 나라에서 만난 한국식 정원은 친근하게 다가왔는데, 현지인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함이일었다. 서울별서의 설계자 신현돈 대표(서안알앤디 디자인)와 사람들의 행태를 계속 관찰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신현돈 대표는 최근 세 개의 한국 정원 작업을 진행했다. 타슈켄트에 설계한 공원이 이제 막 완공됐고, 신안군 비금도초의 정원이 1단계 준공을 마쳤다. 그리고 브라질 아라샤에도 설계를 마무리해 앞으로 공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굳이 그의 작업을 ‘한국 정원’이라고 부르는 건 설계 성격을 정의하기 위함이 아니다. 세 개 모두 한국 정원을 조성하고 싶다는 발주처의 요구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형주(이하 이): 설계 작업에서 한국성이나 전통은 항상 쟁점이다. 한국적인 정원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신현돈(이하 신): 물리적 계획이나 디자인, 배치 계획 등을 짤 때, 시적poetic인 접근과 땅에 순응하고 지형을 잘 이용하는 그런 기법들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지형지세를 거스르지 않는 게 한국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디자인적으로 보면 전통적인 설계 방법론을 구사하고 궁궐, 별서, 그리고 민가 정원에서 보이는 배치 구조나 디자인 언어 등을 구현하여 전통 정원을 단순히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모티프로 삼아 현대화시키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한국 정원이 아니더라도 과거의 지혜를 구현하고자한 흔적을 당신의 몇몇 프로젝트에서 볼 수 있다. 광화문광장이나 청계광장 등이 그러한 예다. 신: 설계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게 한국성이다. 모더니즘적인 설계를 하는 사람도 있고, 아방가르드한 설계를 하는 사람도 있고, 전통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설계자도 있다. 설계하는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다르다. 한국적인 것을 구현하는 게 내 설계의 출발점이다. 광화문광장도 일제에 의해 왜곡된 국가축을 바로 잡는 작업의 일련이었고, 디자인은 우리의 육조거리를 재현하는 걸 기조로 했다. 청계광장도 전통 보자기 형태에서 배치 계획의 골격을 잡았다. 이: 한국성에 대한 고민이 계속되었다는 말인데, 최근 작업 중 그러한 측면이 잘 드러나는 작업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신: 얼마 전 조경의 날 기념으로 한국조경학회와 환경조경발전재단을 통해 서울광장에 조성한 템포러리 조경도 한국적인 시간의 기억에서 출발했다. 과거의 흔적을 되살린 프로젝트다. 덕수궁에서 모전교를 지나 북촌으로 가던 길, 원구단에서 경복궁이나 효자동으로 다녔던 길의 기억을 살렸고, 나머지 길의 흔적을 상징화한 것도 과거 선조들이 걸었던 길을 현대화시켜서팝아트적으로 푼 것이다. 종로 1가에 위치한 그랑서울의 조경 설계가 또 다른 예다. 피맛길에 고층 빌딩을 세우면서 과거 피맛길의 흔적을 살리고 운종가의 영지影池, 장초석과 온돌, 집터의 기억을 살렸다. 해외에 한국 정원을 만든다는 것 설계공모의 안이 관철되기까지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디자인이 퇴행하거나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서울별서 조성에는 두 가지 난제가 더 있었는데, 복잡한 통관 절차와 여러 클라이언트의 존재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에 있는 독립국가연합의 하나로 공화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인구의 약 80%가 이슬람교도로 한국과 문화적 차이가 크다. 해외에 조성되기 때문에 과정상 어려움은 예상할 수 있었지만, 서울시와 타슈켄트가 직접 협약을 맺고 진행했음에도 실제 현장에서는 일처리가 미진했다. 문화적 차이로 한국인과 우즈베키스탄인 사이에 업무 처리 방식과 절차에 괴리가 생겼고, 일할 사람과 자재가 준비되었음에도 통관이 처리되지 않아 공사가 지연되는 등 난항을 겪었다. 이때 우즈베키스탄 주재 한국 대사관이 조율에 나서면서 소통에 물꼬를 텄다. 공사를 총괄한 현장 소장은 “해외에서 진행하는 조경 공사에 대사관에서 이렇게 관심을 가져준적은 처음”이라고 말했는데, 한국 대사관 측은 “한국정원이 한류의 발판이 될 것”이란 믿음으로 서울별서에 각별한 신경을 기울이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 정원’의 가능성에 대한 신현돈 소장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또 하나의 난제는 타슈켄트 시장과 우즈베키스탄 국가 연구원, 타슈켄트 공원국, 우즈베키스탄 주재 한국 대사관, 그리고 고려인협회라는 다섯 클라이언트를 설득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난제로 예상된 이 부분은 의외로 쉽게 해결됐다. 신현돈 대표가 직접 방문하여 진행한 발표회마다 ‘한국 정원’의 모습은 당선된 설계안대로 진행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 일색이었다. 그렇게 서울별서는 설계안대로 구현되었고, 산고의 아픔을 덜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