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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생태경관건축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Landscape architecture가 1970년대 한국에 소개되면서 환경, 생태, 경관, 조경 등의 다양한 의미로 이해되었고 아직도 일반인들에게는 국토나 도시 환경보다는 정원이나 토목과 건축의 미화 작업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서양에서도 소위 조경은 사유지의 설계와 조성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라 20세기 초에는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로 이해되고, 1960년대에는 생태 경관 계획ecologicallandscape planning으로, 1980년대 이후에는 도시와 산업지의 재생과 관련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landscape urbanism과 인프라스트럭처 중심으로 변신해 왔다. 건강, 환경 개선 및 재생, 지속성에 선도적 역할을 하고, 건설 사업의 보조를 넘어 환경 보존과 재생의 선두 역할을 함으로써 조경은 건축보다 더 사회적 연관성을 가지게 되었다. 또 조경은 개발뿐 아니라 보존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시장 경제의 변화에 덜 민감한 점이 있다. 조경 및건설 경기가 침체 상황인 이즈음, 조경 또는 경관계획의 원래 이름 landscape architecture를 다시 돌아보고, 그것을 학문 영역보다는 환경 개발과 보존의 한 방법론으로 생각하면서 조경 분야의 장래를 모색해 볼 필요가 있다.
조경계는 건축계의 동질성과는 달리 이질성으로 특징지어지고 있다. 이것은 조경이 농과·환경대학에 속하기도 하지만 건축·디자인대학에 속한 경우도 많다는 점, 그리고 그 자체가 문화를 바탕으로 한 실행이라는 점을 반영한다. 또 조경에는 건축과 다른 세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 경관은 건물에 비해 다양한 스케일―정원, 도시, 지역―을 포괄하고 경계 없는 개방형 시스템이며 역동적이다. 둘째, 조경은 설계, 계획, 시공 그리고 관리라는 네 영역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셋째, 경관은, 네덜란드의 어원에 따르면, 형성과 보존의 개념 또는 그림의 개념일 뿐 아니라 공동체 및 관리의 개념이다. 따라서 큰 규모의 조경인 경우, 지역 사회를 강조하고 특출한 예술가적 개성이나 개인주의적 사고를 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필요성과 전통을 갖고 있다.
이러한 근본적 차이는 조경에 건축적 방법을 직설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큰 문제임을 말해 준다. 즉, 조경 고유의 계획과 설계 방법을 개발하고 구현해야 함을 뜻한다. 더욱이 오늘날 지속성의 문제―기후 변화, 자원과 에너지 안보, 문화 정체성과 실체성, 계층 간의 갈등―는 생태경관적 접근 방식이 건축적, 도시적, 산업적 접근 방식보다 더 중요함을 의미한다.
현재 한국의 조경계는 건축, 도시·지역계획, 토목, 임업 분야로부터 영역 침투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사실 한국의 조경은 원래 문화적·역사적 뿌리가 약하며 중국이나 일본과 같은 정원예술의 전통이 적다고 나는 보고 있다. 한국의 유수한 산수·자연 환경, 20세기 중반까지 지연된 도시화, 잔손이 많이 가는 것을 싫어하는 심성, 도시 중산층의 부재 등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국의 풍류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흐름을 즐기는 멋이고 맛이었다.
지난 40년간 한국 조경은 괄목할만한 발전을 했다. 조경계가 잘해서 발전한 면도 있겠지만 외재적 원인도 컸다. 박정희 정부의 정책적 지원, 건설투기 붐, 급속한 산업화·도시화를 통한 환경 파괴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조경은 정원에나 적합한 방법을 도시 경관에 적용하기도 했다. 도시계획이나 사회 기반시설 또는 국토관리에는 적극적이고 지도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 했다. 건설이 남긴 폐해를 감추거나 미화하는 작업을 하면서 양적으로 성장해 왔다. 파괴가 많을 수록 조경 일이 많았다.
이제는 한국이 선진화되며 복지·행복 국가를 향해 질적 성숙을 하고 있다. 동아시아적 정체성을 회복하면서, 또 역동적 참여 민주화를 실현하면서 지속가능한 문화에 기여하는 국가가 되기 위해 조경이 해야 할,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은 수없이 많다. 기후 변화에 대응한 도시 및 지역 구조의 조정, 핵 에너지 위험을 감소하기 위한 지속가능한 에너지 경관 전략, 건설이 아닌 파괴로 치닫는 공공 기반시설(새만금 간척 사업 등)의 생태적 인프라로의 전환, 다기능적 생산 녹지 및 습지의 복원확장, 닫힌 전시 광경보다 일상적 생활환경의 개선에 주목하는 실용적 조경, 낭비의 측면이 큰 단일 용도의 공공 공간(학교, 정부 시설) 개조를 통한 녹지 증대와 환경 개조, 세천의 복원, 고가도로의 제거, 비투수층 도로와 주차장 및 산업 구조물의 제거, 대규모 녹화(지붕, 벽, 거리) 등이 그것이다. 공원이 따로 필요 없는 ‘숨쉬는’ 도시 및 국토의 재편성이 조경가와 경관계획가가 참여해야 할 일들이다. 설계와 계획 능력이 있고 과학적 지식에 기반을 둔 조경가일수록 할 일은 더 많다. 건설 사업의 ‘환경미화원’으로서의 조경보다 국민의 행복, 복지, 건강을 위해 공공 환경을 작동시키는‘전동차’로서의 조경이 필요하며, 이를 위한 적응과 변모의 계기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조경학과 실무 조경계는 다음과 같은 변신의 자세를 구축해야 한다.
첫째, 도시와 지역 규모의 경관·생태 및 공공 기반시설을 설계, 계획, 관리할 수 있는 관심과 능력을 확장해야 한다. 둘째, 열악한 도시 내부에 게릴라처럼 침투하여 아스팔트 도시를 건강한 유기체로 전환시키는 전문성을 길러야 한다. 셋째, 계획 및 관리 분야는 물론 기술·과학자와 협업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도시·국토계획의 전반적인 관리에서 ‘생태경관적 접근 방식’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넷째, 설계를 미관이나 형태보다는 삶의 질, 체험의 질, 건강·복지에 연계시키는 접근, 즉 국토를 몸으로, 조경을 의학으로 생각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의미 있는 일을 하려면, 또 위기에 대응하려면, 쉬운 일만 찾아서는 안 된다. 건설과 보존을 보완하기 위해 개발을 위한 보존, 보존을 위한 개발을 실행해야 한다. 경관이 본질적으로 스케일이 다양하고 경계가 없듯이, 조경 분야도 관심과 능력의 스케일을 다양하게, 경계 없이 하여 지속가능성 확보의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재도약의 기회를 찾아야 할 것이다.
고주석은 건축가이자 조경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생태경관적 접근 방식에 기반을 둔 디자인을 추구한다. 1989년 설립한 오이코스 디자인(Oikosdesign)을 이끌며 독일, 미국, 네덜란드, 한국을무대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고, 세계 여러 나라의 디자인 어워드와 설계 공모전에서 수상한 바 있다. 2003년부터 2013년까지네덜란드 바허닝엔(Wageningen) 대학교 조경학과 학과장을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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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용산공원, 참여할 때다
미지의 땅이자 금단의 땅인 용산 미군 기지의 공원화 프로젝트는 기지 이전에 관한 한미 정상의 양해각서가 체결된 이후 25년이라는 긴 과정을 겪고 있다. 우리나라 특유의 ‘빨리빨리’ 정서로 보면 이례적으로 길고 느린 호흡으로 구체화되어 온 프로젝트다. 양국 정상이 기지 이전에 합의(2003)한 후 기지의 공원화 계획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용산기지 공원화 구상’(2005)을 통해 계획의 밑그림이 그려졌고, 이 구상은 노무현 대통령의 ‘용산기지 공원화 선포’(2006)로 이어졌다. 이후 ‘용산공원 조성특별법’(2007)이 제정되었고, ‘용산공원 아이디어 공모’(2009)가 개최되었다. ‘용산공원 정비구역 종합기본계획’(2011)은 그간의 논의와 계획을 종합한 그랜드 플랜으로, 국제공모와 기본설계의 토대로 작동한 법정 계획이다. 2012년 4월, 정부는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의 당선작으로 West8 팀의 ‘미래를 지향하는 치유의 공원’을 선정한 바 있다. 용산공원이 담론의 영역에서 디자인의 차원으로 진화할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계획대로라면 이 작품을 바탕으로 기본설계가 진행되고, 2017년에는 공원 조성의 첫 삽을 뜰 예정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기본설계비로 책정된 예산이 작년과 금년 모두 국회에서 전액 삭감된 것이다. 표면상의 이유는 공원의 성격과 조성 시기에 관한 것이라지만 그 이면에는 비합리적이고 사소한 ‘어떤’ 정치적 이유가 작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본설계가 초기 단계에서 중단되었음은 물론 적지 않은 수의 공무원으로 구성된 국토교통부산하의 용산공원추진단도 개점 휴업이나 마찬가지였다. 법에 의해 국가 공원을 만들기로 한 정부가설계안을 선정했지만 그 설계를 진행할 예산을 못 받아 모든 일정이 지체되고 프로젝트 자체가 중지된 것이다.
엉뚱하게도 용산공원추진단은 종합기본계획 변경이라는 카드를 빼들었다. 종합기본계획은 이미 법적 고시가 끝났고 그 계획을 준거로 기본설계가 진행되는 마당에 다시 과거의 계획을 고치겠다는 것이다. 추진단은 변경의 당위성을 종합기본계획의 주요 골격인 6개 단위공원에 대한 반대 여론이 있다는 점, 그리고 공원 조성 여건과 상황의 변화―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의 난항, 미대사관 시설의 이전 시기, 침수 대비 등―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기본계획의 단위공원 개념은 공원 전체를 여섯 개의 주제로 나누어 개발하는 방식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진화하는 크고 작은 공원들의 연합united parks”이라는 탄력적 전략이며, 설사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기본설계 과정에서 다시 검토하는 것이 순리다.
여건과 상황이 달라졌다 해도 기본계획을 변경하여 대응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시간을 되돌려 과거의 계획을 바꾸기보다는 다음 단계의 과정에서 고려하면 충분할 일이다. 명분도 없고 실리도 없다. 그렇다면 종합기본계획의 변경은 예산 전액 삭감의 ‘어떤’ 이유와 연관된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변경 프로젝트가 이미 시작된 이 시점에서 ‘어떤’ 이유의 정당성 여부를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용산공원과 같은 빅 프로젝트는 계획 외적 환경, 즉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기존 계획을 주도했지만 다시 변경 계획이라는 난처한 숙제를 떠맡은 한국조경학회는 6개 단위공원을 생태 중심의 단일공원으로 바꿀 것이라는 추진단의 어색한 논리와 방향을 따르기보다는, 기본설계는 물론 그 이후의 과정에 닥쳐올 다양한 난제들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시나리오 계획과 유연한 전략을 구축하는 쪽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2년 연속 예산을 배정하지 않은 건 국회지만 그러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은 건 정부다. 정부와 국회모두 용산공원에 대한 관심과 의지가 거의 없었기에 벌어진 일이다. 만일 미래에 용산공원의 주인이 될 국민들이 예산 미배정이나 기본설계 중단과 같은 문제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국회와 정부의 입장은 지금과는 아주 달랐을 것이다. 시민참여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05년의 ‘용산기지 공원화 구상’이 방점을 두었던 ‘과정 중심적 계획과 유연한 설계’, 그리고 ‘참여적·소통적 계획’이 다시 강조되어야 할 시점이다. 지난 5월 21일에 열린 ‘용산 국가공원 전문가 세미나’에서 ‘참여’가 키워드로 부각된 것은 그나마 긍정적인 일이다.
지난 5월 1일, 한 세기가 넘는 긴 세월 동안 일본군과 미군이 점유해 온 캠프 하야리아가 부산시민공원이라는 새 옷을 입고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번 호에서 특집으로 다룬 부산시민공원은 용산공원의 앞날에도 적지 않은 교훈을 던져준다.10년 이상의 지난했던 부산시민공원의 조성 과정, 그 중심을 지탱하며 방향을 이끈 중심에는 시민, 언론, 전문가가 연합한 새로운 형식의 시민사회단체 ‘하야리아공원포럼’의 참여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지난 4월호부터 연재되어 온 김현민 소장의 “그들이 설계하는 법”이 이번 호로 마무리된다. 이수학소장의 “조경가의 서재”도 막을 내린다. 풍성한 그림과 글로 독자들과 소통해준 두 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다음 7월호부터 3개월간의 “그들이 설계하는 법”은 서울시립대학교 김아연 교수가, “조경가의 서재”는 에코이드ecoid의 김용규 소장이 이어갈 예정이다. 제주도로, 부산으로 종횡무진하며 잡지의 시각적 질을 높여주고 있는 전속 포토그래퍼 유청오 작가(스튜디오 키노)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빼놓을 수 없다. 지난 5월 중순부터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조한결 기자가 『환경과조경』 편집부의 새 식구가 되었다. 한국 조경에 만연한 피로와 불안을 교정하고 혁신해나갈 조경 언론인으로, 한결같이, 성장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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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전통과 이용
“전통은 고정되어 있는 것인가, 전통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한 원론적 논의부터, 전통의 현대적 계승, 재현, 모사, 모방, 변용 등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정답 없는 문제지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래도 끊임없이 진행된 전통에 관한 논의 덕분에 이제는 직설적으로 외형만 본떠 만드는 것이 전통의 계승이라는 목소리들은 수그러들었지만, 문제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바로 지난달에 완공된 조경 공간 내에도 외형만을 빌려다 설계하고 시공한 정자며 방지며 원도며 담장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눈에 보이는 고정적인 형태주의 위주의 전통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숨어있는 눈에 안 보이는 질서와 고유의 세계관의 발견이 보다 기름진 전통 계승과 창조의 텃밭 역할을 할 수 있을 것”1이라는 인식은 활자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전통 전문가들은 답답하단다. 돌을 눕히거나 세워서 쌓는 들여쌓기 양식은 일본의 조경 양식인데 마치 우리의 전통 양식인 양 전통 공간 내에도 무분별하게 도입되고 있고, 방지 내에 원도를 배치하고는 분수를 설치하는 경우는 또 어느 나라 스타일이냐며 한탄한다. 자신 있게 복원할 수 없다면 유적지는 차라리 그대로 두고, 제대로 모방하지 않을 바에야 후손들 혼동하지 않게 전통 요소를 도입하지 말란다. 실무자들도 답답하단다. 어디 우리나라 상황이 글줄이나 읊어대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산이며, 시간이 여유 있는 줄 아냐고 한다. 무엇보다 발주처나 이용자들이 전통 요소의 도입을 선호하는데, 어쩌란 말이냐고 한다.
전통 관련 논의는 진부하고, 전통은 여전히 그 일부분 혹은 한두 가지 요소만이 도입되고 있고, 현실은 너무도 견고해 보이지만, ‘그래도’ 전통은 방학숙제처럼 마냥 미뤄둘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현대 조경 공간에 전통을 도입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대상지 전체가 아예 조성의 목적을 전통 정원의 재현에 두고 있는 경우다. 희원이나 해외에 조성되고 있는 한국 전통 정원이 이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전체 대상지 중 타 공간과 확연히 구분되는 특정 공간만을 전통 정원으로 꾸미는 경우다. 여의도공원 내의 한국전통의 숲, 일산호수공원 내의 전통 정원, 경주 안압지의 축조 양식을 도입한 분당 중앙공원 내의 분당호 주변 등이 그 예가 된다. 마지막으로는 특별한 공간 분할 장치 없이 타 공간과 혼재된 곳에 전통 조경의 일부 요소가 도입된 경우다. 선유도공원의 선유정을 비롯, 무수히 많은 사례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진부한 여전한 답답한, 전통”이란 제목으로 썼던 글2의 앞부분이다. 공원이나 아파트 외부 공간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던 ‘전통 코스프레’ 공간을 보며 느꼈던 답답함이 글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이번 호에 실린 두 곳의 전통 정원은 그와는 거리가 멀다. 타슈켄트 서울공원은 말할 것도 없고, 율수원 역시 본격적인 전통 양식의 한옥 정원을 목표로 했다. 단, 율수원은 생활 공간으로서의 현대 한옥 정원에 초점을 맞추었다.
안계동 대표(동심원조경)를 인터뷰하기에 앞서, ‘정원 문화 심포지엄’에서 율수원 소개를 접했다. 처음에는 어디서 본 듯한 전통 요소의 짜깁기 공간인가 싶었다. 사진 속에는 일본풍이 아닌가 싶은 공간도 보였다. 그런데 ‘생활과 이용’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면서 흥미가 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전통 양식의 공간을 접할 때마다, 왜 ‘문화재, 보전, 복원, 재현, 계승, 교육, 볼거리, 장식적 공간’ 따위만을 떠올렸을까? 그러고 보니 전통 양식의 정원이 실제 이용하기에는 어떠한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용을 전제로 새로 만들어진 개인 한옥 정원을 접한 것도 율수원이 처음이었다. 몇 년 사이 한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제법 뜨거워졌는데도 말이다.
율수원의 경우, 사모정과 방지가 있는 후정 부분에 일본풍의 첨경물이 놓여 있고, 잔디밭 주변에는 제법 화려한 초화류도 심겨 있다. 가든 파티를 할 수 있는 평상도 있다. 일본풍 첨경물은 공사가 모두 끝난 후 안주인이 설치한 것이고, 잔디밭이나 평상은 정원으로서의 이용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목욕채 뒤뜰에는 포장재로 맷돌도 깔려있다. 엄격한 전통 양식과는 거리가 먼 부분이다.
반면, 후정의 연못은 클라이언트의 희망에 따라 서석지를 적극적으로 참고해서, 연못의 깊이와 돌 쌓는 방식, 돌의 크기 등을 결정했다. 원래 연못 주변에 안전을 고려해서 녹지대를 두르는 방안을 검토했는데, 최종적으로 녹지대를 없애고 흙 마당에서 돌경계가 곧바로 맞닿는 전통 양식을 따랐다. 식물 수종을 비롯해서, 공간 구성까지 전통 양식을 기본적으로 따르되 현대적 쓰임을 고려해서 약간의 변형을 가한 것이다.
“이곳과 똑같은 모습의 한옥 정원은 어디에도 없다.” 안계동 대표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어디서 본 듯한 전통 요소들의 집합장이 아닌가 했던 의심이, 실은 나의 답답한 고정관념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사토 마당과 사모정, 방지, 원도, 화계가 있다고 해서, 즉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가 같다고 해서 공간이 같은 것은 당연히 아닐 테니 말이다. 전통을 꼭 재현이나 계승의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한옥의 장점을 취하려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는 것처럼, 현대적인 한옥 정원의 매력을 탐구하는 노력도 필요해 보인다. 만약 지금 전통을 열쇳말로 글을 쓴다면, ‘지금 여기의 한옥’도 한 챕터 정도는 포함되지 않을까. 이용을 전제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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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 건축의 주인은 누구?
서울건축포럼 토론회 ‘서울시청과 동대문디자인파크
“공공 건축물의 주인은 누구인가” 지난 5월 29일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열린 서울건축포럼 토론회에서 제기된 물음이다. 그간 공공 건축물의 이용 주체에 따라 조성 방식이나 이용 프로그램이 달라져야 한다는 문제 제기가 간헐적으로 있어왔지만, 최근 서울시청 신청사(이하 신청사)와 동대문디자인파크(이하 DDP) 조성을 기점으로 이러한 담론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서울건축포럼은 서울시 조례에 따라 시의 건축 관련 정책을 지원·추진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다. 이번 토론은 최근 주목받는 두 건축물을 중심으로 ‘공공 건축’의 의미를 재조명하고 생산적인 담론을 끌어내 향후 추진할 서울시 건축 관련 정책의 바탕으로 삼기 위한 의도로 마련되었다. 토론에는 박정현 편집장(도서출판 마티), 유걸 대표(아이아크건축가들), 이상헌 교수(건국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이필훈 대표(포스에이씨), 최윤경 교수(중앙대학교 건축학과)가 참여하고, 박인수 대표(파크이즈)가 사회를 맡아 발제 없이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논쟁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주제는 공공건축, 역사성과 장소성, 생산 과정으로 구분했다.
“공간의 문제를 넘어 인간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손용훈 교수의 말처럼 도시 재생 시대의 조경에는 철학이 필요하다.
공공 건축의 의미
토론을 시작하며 이상헌은 한국에 과연 공공 건축이 있었는지 반문했다. “형식은 존재하지만, 공공 영역에서 토론과 합의 과정을 거친 진정한 의미의 건축은 없다”는 비판이다. 따라서 공공 건축의 의미와 역할을 좀 더 공론화하고 “공공 건축이 조성 주체에 따른 것인지, 이용 주체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그 과정에 따른 것인지 용어의 정의부터 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일갈했다. 우리는 흔히 공공 건축이란 공무원이 운영하고 시민이 찾는 공간을 떠올린다. 반면 이필훈은 공공 건축물의 주인은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시각에 따라 주체가 둘로 나뉜다. 건축가의 입장에서는 돈을 지불하는 주체가 발주처이겠지만, 그 돈의출처는 시민의 세금이다. 따라서 공공 건축물에 발주처의 요구가 반영되어야 하는지, 시민들의 요구가 반영되어야 하는지가 이번 토론의 쟁점 중 하나로 떠올랐다.
최윤경은 이용자의 시각에서 “공공 건축물이라 할지라도 그 기본 기능을 따져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주로 공무원이 행정 업무를 보는 공공 청사와 시민이 관람하는 박물관은 사용 주체와 건축물의 성격이 다르므로, 건물의 기능에 따라 공무원과 시민의 요구의 비율을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정 업무 공간으로서 공공 건축물은 보안이나 업무 보장을 위해80%는 공무원을 위한 공간으로 조성하고, 나머지 열린 공간을 시민이 얼마나 잘 활용할 수 있게 하느냐가 공공 건축의 관건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조성 과정
공공 건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도 문제가 지적되었다. 공무원이나 시민 모두 공공 건축의 사용자 입장이지만, 공사 과정에는 공무원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공무원은 공공 건축의 이용자이자 발주처로서 역할을 하고, 시민은 이미 만들어진 건축물의 이용자로서만 역할하는 셈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발주처 입장에 있는 공무원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공공 공간의 질을 떨어뜨리는 주 원인으로 지목된다. 박정현은 공공건축의 질을 좌우하는 또 하나의 원인으로 공무원의 업무 태도를 꼽았다. “공무원은 건축물의 질을 높이기보다 감사에 지적되지 않는 과정을 선호한다. 경력이 쌓일수록 감사에 지적받지 않는 행정 전문가로서 성장한다”면서 행정과 건축의 관계가 변해야 제 역할을 하는 공공 건축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걸은 공공 건축의 조성에 시장이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이필훈은 “건축이 정치적 욕망의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다며 경계했으며, 이상헌도 유걸의 말에 반대 견해를 내놓으며 그 대안으로 공공 건축가 제도의 도입을 주장했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공공 건축가 제도처럼 재능기부 형태로 운영되며 명확한 권한 없이 행정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는 것이아니라, 유럽의 사례처럼 공공에 소속되어 권한과 책임을 동시에 부여받는 공공 건축가 제도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를 통해 시민과 건축가를 중재할 수 있으며, 이는 공공 건축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건축프로세스가 성장하는 동력이 될 것이라고 부연했다.
신청사와 DDP는 둘 다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낸 작품이지만 올 3월 문을 연 DDP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했다. 완공 초기 한동안은 형태에 관심이 집중되었는데, 이날은 작품론보다는 운영에 초점이 맞춰졌다. DDP는 1년에 300억 원의 운영비가 투입될 예정으로, 서울시는 DDP의 재정 자립을 천명하고 각종 전시와 프로그램으로 수익 사업을 계획·실행하고 있다. 박정현은 DDP가 “현상 유지를 위해 공익보다 수익에 집중할 것을 우려”했다. 세금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시민들의 자유로운 이용을 보장해야 하지만, 수익이나지 않으면 다시 시민들의 세금으로 비용을 채워야하는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기획 단계부터 시민의 필요와 건축물의 기능을 명확하게 계획하지 않아서 발생한 문제다.
통상적으로 공공 건축물이 가장 공공적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이필훈은 “가장 공공적인 성격을 띠는 건축물은 상업 시설”이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을 유인해야하는 게 상업 시설이고 그들에게 만족감을 주지 못하면 손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상업 시설도 결국 대중을 목표로 조성되는 것이다. 이 역시 건축의 공공성은 이용자에 초점을 맞출 때 확보됨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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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재생 시대의 조경
환경조경나눔연구원 개원 1주년 기념 세미나
지난 2013년 6월 도시의 종합적 기능 회복을 도모하기 위해 ‘도시 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특별법이 제정된 지 약 1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도시 재생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도시 재생 시대’에서 조경의 역할과 비전은 무엇일까?
지난 5월 27일 서울대학교 미술관 렉처홀에서 환경조경나눔연구원 개원 1주년 기념 세미나 ‘도시 재생 시대의 조경’이 열렸다. 우리나라 도시 재생의 현 상황을 진단하고 조경의 과제를 논하는 자리였다.
도시 재생, 어디까지 왔나
임승빈 원장(환경조경나눔연구원)은 기조 강연을 통해 대한민국 도시 재생의 흐름을 짚고 앞으로의 비전을 제시했다. 그는 2000년을 기준으로 도시 개발의 성격이 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1990년대까지는 대규모 철거 위주의 과격한 개발이 주를 이루었지만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시민 눈높이에 맞춘 친환경적, 친문화적, 친보행적 개발로 전환했다는 것. 그는 이를 ‘경계 긋기’와 ‘경계 허물기’에 비유했다. 그는 우리나라와 같이 고밀도 개발이 불가피한 도시에서는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이 더욱 높아야 한다고 지적하며 지구온난화, 황사, 미세먼지 등과 같은 돌발적 기상 사태에 대비하고 한정된 지구 자원과 국토 자원을 다음 세대와 함께 나누어 쓸 수 있도록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민 연구위원(건축도시공간연구소)은 ‘우리나라 도시 재생의 현황과 조경의 역할’을 주제로 도시 재생 특별법의 세부 내용과 도시 재생 사업의 추진 현황을 발표했다. 국토교통부는 지난 4월 국무총리 소속 도시재생특별위원회 심의를 거쳐 도시 재생 선도지역 13곳(도시경제기반형 2곳, 근린재생형 11곳)을 지정했다.
국토교통부와 도시재생지원기구로 지정된 한국토지주택공사(LH), 국토연구원, 건축도시공간연구소 등 3개 전문기관은 함께 도시 재생 사업의 행정·기술적인 사항을 지원한다. 근린재생형은 지역 도시재생지원센터 등 추진 주체 구성과 주민 교육 등에 대한 컨설팅을 통해 주민 스스로 지역의 자산을 활용하여 실행력있는 계획을 수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경제기반형은 현장 여건 분석을 통해, 민간 투자가 가능한 복합개발사업 등을 지자체 주민이 발굴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이상민 연구위원은 “도시 재생 사업에 대한 내용과 해당 사업에 필요한 조직체를 소개했는데 모두 조경이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도시 재생 관련 사업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좋겠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도시 재생은 기존의 도시 사업들에 대한 ‘대안’임을 강조하며, 관련 사업에서 조경가가 창의력과 유연성을 발휘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도시 재생 시대, 조경의 과제는?
임승빈 원장은 21세기 한국의 유토피아로 ‘그린 유토피아’를 제시했다. 그린 유토피아는 시민 모두가 평등하게 건강하고 쾌적한 자연 및 녹색 환경을 향유하며 소외 계층을 위한 녹색 나눔 활동이 활발한 세상이다. 임승빈 원장은 그린 유토피아를 만드는 구체적 방법으로 그린 인프라 체계의 확립과 그린 생활환경 조성을 제시했다.
박준서 소장(Design L)과 강동진 교수(경성대학교 도시공학과)는 주제 발표를 통해 ‘그린 유토피아’를 만들기 위한 노력과 그 과정에서 가졌던 고민을 이야기했다. 박준서 소장은 그가 수행한 이화동 벽화마을 프로젝트와 한남동 교각 하부 프로젝트를 설계 과정에서부터 그 결과까지 되짚어봤다. 그는 마을을 예쁘게 꾸미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며 ‘사람’이라는 모호한 대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공간을 실제로 이용하는 주체인 대중, 특히 주민에 대한 신중한 고민과 고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강동진 교수는 캠프 하야리아, 산복도로(영주동) 오름길, 대청로, 동천, 북항, 동해남부선 기찻길(폐선부지)등 조경을 통한 부산의 도시 재생 사례를 소개했다. 지난 6월 2일 수상작이 발표된 ‘동해남부선 폐선부지 학생 창의 아이디어 공모전’을 추진하고 심사위원을 맡기도 한 그는 “동해남부선 기찻길은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밀리지 않는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길”이라고 자부했다. 그는 역사적 가치를 지닌 동해남부선 기찻길에 상업적 목적으로 레일바이크나 스카이라이더 등 관광 시설물을 설치하겠다는 부산시와 철도공단의 아이디어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주제 발표에 이어진 토론회에서 정욱주 교수(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는 시민참여의 문제에 대해 조명했다. 그는 디자인 면에서의 퀄리티 저하와 같이 시민참여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생길 수 있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지역 커뮤니티와 도시재생사업단 등 도시 재생에 참여하는 조직에 소속된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지향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손용훈 교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는 도시를 풍요롭게 하는 도시 재생의 핵심 요소는 녹지라며, 이와 연관된 시민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일본에서는 녹지 분야에서 시민 참여를 숲 가꾸기, 제초 작업, 식생 조사, 기념 식재, 야외 전시, 산책로 보수, 식물 관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끌어내고 있다며, 우리나라에서도 보다 많은 시민참여가 이루어질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도시 재생’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다. 전 국민의 뜨거운 관심 속에 치러진 지난 6월 4일 지방선거에서 후보자들의 공약에는 ‘도시 재생’ 키워드가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전국의 여러 도시에서는도시 재생 사업에 시동을 걸고 주민 교육과 워크숍을 실시하고 있다. 하지만 도시 재생에 대한 높은 관심에 비해 도시 재생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점이 남는다. 이날 세미나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도시 재생을 뉴타운이나 재개발 사업으로 오인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는 데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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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왕궁리 유적 후원의 조경적 가치와 과제
지난 6월 10일부터 이틀간 원광대학교 숭산기념관에서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와 익산시가 주최한 ‘동아시아 고대 도성과 익산 왕궁리 유적 국제학술 심포지엄’이 열렸다. 왕궁리 유적을 주제로 한 심포지엄은 이번이 두 번째다. 지난 2009년에는 발굴 20주년을 기념한 국제심포지엄이 열린 바 있는데, 그동안 고고학 분야에 치중해 학제적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최근 몇 년 사이 이를 보완하기위해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이 연구를 진행했고, 이번 심포지엄에서 ‘백제의 도성과 사료로 살펴본 금마의 백제 유적’, ‘지리학 관점에서 본 백제 도성’, ‘백제 후기 익산 왕궁리 유적의 도성 계획사적 의미’, ‘익산 왕궁성과 백제 건축’ 등의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익산 왕궁리 유적은 현존하는 남한 최고最古 유적(639년)으로서 지난 1989년부터 25년에 걸쳐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발굴 조사 결과 백제 궁궐의 모습, 건축물, 유물들이 출토되어 백제 왕실의 모습을 엿볼 수 있고, 궁궐 화장실 유적이 최초로 발견되기도 해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백제는 삼국 시대 융성한 문화를 자랑했는데, 현재 그 흔적이 대부분 소실되고 내용이 기록으로만 전해지고 있어 고증이 어려운 실정이다. 이런까닭에 발굴된 매장문화재로서 비교적 보존이 잘 된 익산 왕궁리 유적이 백제 유산의 탁월성을 증명하는 사료로 그 존재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왕궁리 유적의 조경적 가치를 고증한 연구로 노재현 교수(우석대학교 조경도시디자인학과)가 “익산 왕궁리 궁원 후원의 괴석과 유수시설”을 논제로 발표했다. 노 교수에 따르면 익산에 조성된 왕궁의 수 체계는 단순히 치수治水나 이수利水를 위한 수로의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로가 이어지는 중간 중간괴석과 경석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고, 가까운 능선 정점에 있는 건물터의 초석을 통해 곡수연曲水宴 등의 제의적 성격이나 유락의 기능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에 왕궁리 수 체계水體系를 후원의 기능측면에서 보다 포괄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 교수의 주장 중 또 다른 핵심은 괴석의 활용이 정원 내 폭포 석조石組 구성을 위한 첩석疊石, 돌 자체의 아름다움과 기괴함을 완상하기 위한 치석置石의 두 가지 쓰임새로 혼용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폭포 석조에 활용된 괴석은 여러 형태와 재질의 돌을 혼합 배치시켜 축경식縮景式 산수 경관을 입체적으로 연출했는데, 이는 한국 전통 조경의 여타 유구에서도 확인된 바 없는 매우 파격적인 사례라는 점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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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통일을 여는 도시
개성의 도시적 정체성을 묻다
최막중 교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원장)는 통일이되어 북한 협동조합 소유의 토지를 개인에게 나눠주는 순간 부의 재분배가 일어날 것이고 도시계획이 재결정될 것이라며, 이러한 대변혁을 개성과 평양, 함흥과 신의주 등의 도시에서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여러 전문가들은 왜 ‘통일’을 대비하여 ‘개성’에 주목하는가.
고려 시대 왕도였던 개성은 지난 201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역사 도시이다. 또한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미수복지구’, 북한의 입장에서는 ‘신해방 지구’에 해당하는 사회주의 지방 도시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현재는 북한의 변화와 남북한 교류 및 통일을 가늠할 수 있는 대규모 산업단지, 개성공업지구(이하 개성공단)가 자리한 도시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체성을 지닌 개성이 향후 통일 국토의 거점으로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번 심포지엄은 네 가지 주제로 나누어 개성이라는 도시의 특징과 통일과정에서의 역할에 대해 짚어보았다.
유네스코 역사 도시, 개성
왕건의 고려 건국 후 약 470년간 ‘개경’이란 이름으로 수도의 자리를 지켰던 개성은 동아시아 각국의 문물이 모여들었던 곳이다. 현재 개성은 평양과 함께 고도古都로 인식되어 정권 차원의 보존 대상으로 지정되어 있다. 개성 일대에 분포된 궁궐 및 왕릉 등의 유적은 북한 내 타 지역의 문화 유적에 비해 양호하게 보존되어 왔다. 그 결과 개성은 지난 2013년 6월, ‘개성역사유적지구’라는 명칭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역사도시개성의 보존과 활용’을 주제로 발제한 박성진(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은 특히 한 시대의 정치적·문화적·철학적·정신적 가치의 총체적 표현물이라고 할 수 있는 ‘도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향후 북한의 문화재에 대한 우리 정부 차원의 체계적 관리와 보존을 위한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토론자인 황두진 소장(황두진건축사사무소)은 북한을 특수하고 낭만적 대상으로 인식하는 경향을 경계하고, 보편적이고 다원적인 도시의 현실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문가적 시선 외에 비전문가적 시선, 즉 시민사회적 시선으로 문화재를 바라본다면 문화재를 도시의 한 부분으로 또 내 삶의 일부로 어떻게 체험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통일이 된다면 고려시대의 유적뿐만 아니라 개성공단의 건물들 도 문화재적 대상으로 포섭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도 등장할 수 있다.
사회주의 지방 도시, 개성
박소영(국립산림과학원 박사후연구원)은 개성이 사회주의적 지방 도시로 변해가는 과정과 정체성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개성은 광복 직후에는 남한의 도시였다가 한국전쟁 중 북한으로 편입되면서 사회주의 도시 발전을 겪었다. 박소영 연구원은 개성이 한국전쟁 당시 폭격을 받지 않았으며, 옛 도시의 모습을 계승하려는 북한 당국의 의지로 역사문화적 도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예외적 도시라고 강조한다. 반면 ‘상인의 도시’와 같은 사회주의적 특성에 맞지 않는 부분은 제거되면서 도시의 특징과 지방 정체성이 재구성되었다는 것이다. 토론을 맡은 장세훈 교수(동아대학교 사회학과)는 과연 사회주의 도시의 이상은 무엇이며, 또 그러한 목표가 현실에 적용되었을 때, 즉 북한식 사회주의 도시로서 개성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는 의문을 표했다. 한편으로는 월남한 가족들이 많은 개성을 ‘이산의 도시’로 바라볼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개성공단 산업 도시, 개성
양문수 교수(북한대학원대학교)는 지난 2000년 막이 오른 개성공단 사업에 ‘남북 경협 27년 역사에서 유일한 성공 모델’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개성공단은 중국이나 베트남 등지에 비해 경쟁력이 있다는 경제적 의미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긴장을 실질적으로 완화하고 문화 접촉에 따른 통합 효과를 끌어낸다는 것이다.
토론자인 송영훈(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은 입주한 기업별로 실질적인 경쟁력이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전략적으로 접근한다면 경제 통일의 실험장으로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 설명했다.
통일시대 미래 도시, 개성
허재완 교수(중앙대학교 도시계획·부동산학과)는 통일 한국의 수도는 개성이 맡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정치적 통일을 위해 개성이 통일 한국의 수도가 되어야 하며, 국토·경제적 통일을 위해서는 개성이 ‘글로벌 경제특구’로 육성되어야 하고, 사회·문화적 통일을 위해서는 개성이 통일 한국의 ‘멜팅 팟melting-pot’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북한 주민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고도이자, 개성공단 조성 이후 남북화합의 아이콘으로 부상한 개성이 평양이나 서울에 비해 남북한의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후보라는 점에서 찾는다. 베를린을 수도로 정한 통일 독일의 경우를 보아도, 서독은 동독 주민들에게 동등한 국민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엄청난 경제적 비효율성을 감내했다는 것이다. 통일의 시작은 쉬울 수 있으나 국민의식의 통일 즉 문화적 통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서로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북한에 대한 연구는 그 접근성에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자연히 북한 관련 연구자들도 찾아보기 쉽지않고, 그만큼 우리는 북한을 특수하고 낭만적으로 대상화하기 쉽다. 황두진 소장의 말처럼 북한에 관한 연구가 지속되고 공유될수록 초반의 선정적인 관심 대신 보편적인 도시 문제에 대한 관심이 늘어날 것이다. 북한 주민들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시민으로 이해하고 통일의 실마리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한 정서적 공감대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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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기록, 한반도 오감도
제14회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 건축전 11월 23일까지
지난 6월 7일 개막한 제14회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 건축전에서 한국관이 65개국 전시관 중 최고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비디오 아티스트 고 백남준이 1993년에 독일관 공동 작가로 참여해 황금사자상을 받았지만, 한국관이 건립된 1995년 이후 최고상을 받은 경우는 미술전과 건축전을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다. 개막식 5일 뒤인 6월 12일에는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조민석 커미셔너(매스스터디스 대표) 귀국 기자회견이 열려 그간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현지에서 한국관을 찾은 렘 콜하스(전시 총감독)와 심사위원단은 한국관을 꼭 봐야 하는 국가관으로 꼽고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에 조민석은 “렘 콜하스의 관심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담론이 일어난 미국과 유럽에서 다음 지역으로 옮겨가는 시점에 (한국관이) 그 퍼즐조각 역할을 해준 것”이라고 말해 비엔날레 총감독의 방향성을 읽고 전시를 기획했음을 암시했다. 더불어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하는 전시는 보통 9개월의 준비 기간을 거치는데 반해, 조민석은 14개월에 걸쳐 전시부터 관련 행사까지 치밀하게 준비했다고 전했다.
분단으로 달라진 한국 건축과 도시의 모습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는 국가관을 모두 아우르는 ‘모더니티의 흡수: 1914~ 2014’라는 하나의 주제로 준비되었다. 이전까지 나라마다 각기 자유 주제로 전시를 진행했던 것과 대비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권영빈)는 지난 해부터 커미셔너 선정을 지명에서 공모 방식으로 전환했는데, 지난 백 년 간 한반도를 규정짓는 가장 거대한 역사적 현실은 분단의 비극이라고 판단해 남북 공동 건축전을 제안한 조민석을 커미셔너로 선정했다. 여기에 배형민 교수(서울시립대학교)와 안창모 교수(경기대학교)가 큐레이터로 함께 참여했다. 조민석은 연세대학교와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으며, 뉴욕 콜라튼 맥도날드 스튜디오Kolatan/Mac Donald studio와 폴쉑 앤드 파트너스Polshek and Partners, 그리고 렘 콜하스가 이끌고 있는 OMA를 거치며 다양한 실무 경험을 쌓았다. 2003년 귀국해 매스스터디스를 설립해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작으로는 딸기 테마파크, 부띠크 모나코, 자이 갤러리, Daum Space.1 등을 꼽을 수 있다.
“자칫 잘못하면 건축은 없고 정치적 상황만 남을 우려가 있었다.” 많은 이들이 우려한 바다. 접근이 제한적인 북한의 건축을 이해하고 전시로 담는 데는 한계가 있고, 북한 건축가들의 참여 가능 여부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민석은 “건축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풍족한 배경 설명과 맥락에서 이해하는, 건축을 비스듬히 보는 전시라 걱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이를 대비해 북한 전문가들이 직접 참여하는 플랜 A와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를 대비한 플랜 B를 마련해 전시준비에 돌입했다. 실제로 이번 전시에 북한 건축가는 참여하지 못했고, 플랜 B에 돌입해 여러 나라를 누비며 다양한 전문가와 기관을 접하는 수고가 더해졌다.
안창모 교수는 이러한 우려에 대해 “오히려 지난 한세기 동안 현대화를 이룬 한국의 건축 역사가 자리매김할 기회”였다고 말했다. “지난 100년 동안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상응하면서 세계의 도시를 만들어왔는데, 한반도는 분단으로 각각의 단점을 보완할 기회를 갖지 못했고 도시와 건축이 이를 반영하고 있다.” 이번 한국관 전시를 통해 이념의 차이로 도시와 건축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전 세계 사람이 공유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한반도 오감도
이번 전시의 주제인 ‘한반도 오감도’는 이상(1910~1937)의 시 ‘오감도’에서 영감을 받았다. 오감도의 시각은 보편성과 전체성을 전제로 한 조감도의 시각과 대비를 이루며, 분단 체제의 건축이 일원적인 시각으로는 이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건축가, 시인, 화가 등 국내외 작가의 다양한 작업을 모았지만 작가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남과 북의 건축 모두에 접근할 수 있는 개념으로 작품을 엮었다.
한국관은 총 네 개의 소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남북이 대립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주고받은 폭넓은 건축현상을 ‘삶의 재건Reconstructing Life’, ‘모뉴멘트Monumental State’, ‘경계Borders’, ‘유토피안 투어Utopian Tours’로 구분했다. ‘삶의 재건’은 한국 전쟁 이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달려온 재건의 역사를 담았다. 백지 위에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 신화를 만들어온 평양과 국가 주도의 성장 과정에서 변해온 서울의 기억을 엿볼 수 있다.
‘모뉴멘트’는 최고지도자의 권위 안으로 사라진 북한건축과, 자본주의 논리와 타협한 개인의 이상에 고취된 남한의 건축을 표상한다. 사회적 이상이 만들어낸 건축과 경제적 힘이 작용한 건축의 양 단면을 볼 수 있다. ‘경계’는 분리의 시작점이자 서로를 연결하는 시작이기도 하다. 경계는 분단된 상황 속에서 서로를 구분 짓지만 관계가 맞닿아 있는 증거가 되는데, DMZ를포함해 경계에 있는 공간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작품을 전시해 상호 연결된 복잡한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특히 한국관 전시에는 닉 보너Nick Bonner가 크게 기여했다. 닉 보너는 중국 베이징에 고려그룹을 설립해 20년 이상 북한에서 다양한 활동을 이어왔다. 북한 건축가와 예술가에게 다양한 작품을 의뢰해왔는데, 이번에 한국관에 그 작품들을 선보였다. ‘유토피안 투어’ 섹션을 구성한 상당수가 닉 보너의 커미션 작품으로, 북한이 주장하는 유토피아적 사회 건설에 건축이 중요한 요소였음을 보여준다.
이번 한국관의 최고상 수상은 한국의 건축이 국제적인 관심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일이지만, 북한의 건축가가 참여하지 못한 부분은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오히려 북한의 불참으로 최고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남한은 경험한 건축인 반면 북한은 외부적 시각으로 바라본 건축을 표현했다는 균형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의 차이로 달라진 한국 건축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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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뷰티: 두 개의 자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9월 14일까지
“둘은 하나다. 육체와 정신이, 본질과 외형이, 빛과 어둠이, 삶과 죽음이 하나이듯 스스로 온전히 존재하는 ‘자연自然’ 속에서 모든 것은 하나다. 둘은 하나다.” ‘코리안 뷰티: 두 개의 자연’ 전을 기획한 이추영 학예연구사의 글이 전시장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어느 철학자의 명언 같기도 하고, 심오한 경전의 한 구절 같기도 하다. ‘자연’에 대한 한국 작가들의 깊은 사유와 철학을 전시에 담아내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느껴진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지난 5월 17일부터 9월 28일까지 소장품 특별기획전 두 번째 전시인 ‘코리안 뷰티: 두 개의 자연’을 선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중 ‘자연’과 교감하며 독창적인 감성과 미의식을 보여준 한국 현대미술 작품 140여 점이 소개된다. 회화, 사진, 조각, 판화 등 다양한 장르로 구성된 전시작은 전통 예술의 미의식을 계승하면서도 그 지평을 넓혔다고 평가받는 작품들이다. 모노하物派(1960~1970년대 일본의 전위적 예술 운동)를 이끈 이우환의 작품부터 만화와 회화를 넘나들며 위트 있는 작품을 선보이는 최호철의 작품까지 ‘자연’을 대하는 작가들의 다양한 시선을 볼 수 있다. 전시는 자연의 본질과 근원을 탐구하는 ‘울림’과 자연을 이루는 인간, 동물, 산, 강, 식물 등의 관계와 환경에 대해 탐구하는 ‘어울림’의 공간으로 나뉘어 주제를 표현한다.
명상의 바다에 잠기는 시간, ‘울림’
제1전시실 ‘울림’에 들어서면 비움과 여백의 명상 세계가 펼쳐진다. 자연의 근원적인 형태를 표현하기 위해 과도한 표현을 절제하고 함축과 은유, 상징을 극대화한 작품이 전시되었다. 하지만 이 고요하게 정제된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들은 번뇌와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이우환의 ‘조응’은 텅 빈 순백의 캔버스 위에 무심한 듯 찍힌 8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하지만 이 점들은 절대로 ‘무심하게’ 찍히지 않았다. 점과 점 사이의 적절한 간격, 점들이 서로 바라보는 방향, 여백과 조화를 이루는 점의 길이를 찾아내기 위해 작가는 대형 캔버스를 몇 번이고 재고 또 재었다. 측량과 고심을 거듭한 뒤 캔버스에 점을 한 번 그렸다고 거기서 끝이 아니다. 한 번 칠한 물감은 열흘간 말린 후 다시 덧칠하길 수차례 반복한다. 점 하나를 완성하는 데엔 두 달이 소요된다. “존재한다는 것은 점이며, 산다는 것은 선이므로 나 또한 점이며 선이다.” 이우환이 그의 작업에 대해 한 말이다. 그에게 점과 선, 캔버스는 철학이며 우주다. 송현숙의 ‘2획’ 또한 단순하고 간결한 표현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작품이다. 송현숙은 스물두 살에 파독 간호사로 독일로 건너가 함부르크 미술대학에서 공부하고 화가이자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항아리, 말뚝, 고무신 등 어린 시절의 기억을 환기하는 소재를 캔버스에 담아내 한국적 정서를 표현한다. ‘2획’은 장대에 흰 천이 걸린 모습을 단 두 획으로 표현했다. 장대는 질박해 보이고 흰 천은 소박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한국미’라고 하면 불상, 탑, 한옥 등 전형적인 이미지부터 떠올린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 두 획으로 여백과 색채를 강조함으로써 한국미를 세련되게 표현했다.
나, 너 그리고 우리, ‘어울림’
제2전시실 ‘어울림’은 명상에 잠겨있던 관객을 깨우고 주변 관계와 환경을 환기한다. 일상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주변 이웃의 모습,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있는 동물과 식물, 무심코 지나쳤던 도시의 풍경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어디서 한 번은 본 듯한 평범한 얼굴과 풍경에 작가만의 시각이 더해져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진다. ‘어울림’에서 관객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은 최호철의 ‘을지로 순환선’이다. 을지로 순환선은 하루 평균 이용객이 154만 9천 명으로, 시민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지하철 노선이다. 그런데 이 지하철의 흔한 풍경을 그린 작품 앞에 관객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다. 관객들은 폭이 2m가 넘는 대형 캔버스에 신도림역의 풍경을 빼곡하게 채운 작가의 세밀함에 감탄을 연발한다. 뒤틀리고 왜곡된 모습으로 표현된 지하철 승객들의 모습은 현기증을 유발하지만, 열차 차창 너머로 보이는 마을의 모습은 활기차고 정감이 넘친다.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도시민의 삶에서도 희망과 웃음을 포착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제2전시실 ‘어울림’을 나가기 전 관객들이 마지막으로 접하는 작품은 김상우의 ‘세대’다. ‘세대’는 세로로 긴 캔버스에 실물 크기의 인물을 그려 넣은 연작 작품이다. 짓궂은 표정의 꼬마 아이, 수줍은 포즈의 중학생, 환한 표정의 회사원, 지팡이를 짚고 있는 노인 등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지극히 평범한 이웃의 모습이다. 하지만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그들의 눈빛은 당당하고 열정적이어서 이 작품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한다. 전시장을 나서기 전 관객들은 거울에 비친 것 같은 자신의 모습을 본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건강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우리의 삶을 응원하는 무언의 격려에 용기를 얻는다.
‘코리안 뷰티: 두 개의 자연’ 전은 일렬로 나란히 작품을 배치하는 일반적인 전시와는 다른 감각적인 큐레이팅을 선보인다. 작품은 주제와 소재에 따라 높이와 간격을 달리해 율동적으로 배치되었다. 특히 압권은 1층의 제1전시실과 지하의 제2전시실을 연결하는 거대한 벽면이다. 벽면은 관람객의 시선에 맞게 자연의 풍경으로 채워졌다. 1층 위쪽의 벽면엔 구름과 하늘의 사진이, 지하 아래쪽 벽면엔 돌과 바위의 사진이, 왼쪽과 오른쪽의 벽면엔 소나무와 대나무 숲의 사진이 걸렸다. 구름, 바위, 나무 등 각각 홀로 존재하던 자연물은 관객의 상상을 통해 프레임을 넘어 ‘자연’을 만든다. ‘울림’과 ‘어울림’의 세계를 연결하는 재구성된 ‘자연’이다. 또 하나의 ‘자연’ 앞에서 이추영 학예사의 글을 다시 떠올린다. “스스로 온전히 존재하는 ‘자연’ 속에서 모든 것은 하나다. 둘은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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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우스
스페인 알라리즈 가든 페스티벌 전시작
지난 5월 24일 막을 연 스페인의 알라리즈 가든 페스티벌Allariz International Garden Festival에 젊은 조경가 김태경, 강한솔, 나성식의 작품인 ‘인-하우스IN-HOUSE’가 최종전시작으로 선정되었다. 올해 5회 째를 맞이한 알라리즈 국제 가든 페스티벌은 ‘인-하우스’를 포함한 12팀의 전시 작품 중에서 최종 대상을 가린다. 최종 대상작은 4만 명 이상의 방문객 투표로 선정될 예정이다.
50여 팀의 출품작 중에서 선정된 ‘인-하우스’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집과 식물이라는 두 요소의 이질적인 관계 형성을 통해서, 관람객에게 새로운 경험과 공간 인식을 선사하는 실험적인 정원 작품이다. 익숙하고 일상적이지만 개인의 취향이 투사되어 있는 ‘집’과 우리에게 친숙하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식물’의 관계를 재구성한 독특한 발상이 ‘인-하우스’의 가장 돋보이는 특징이자 흥미로운 요소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세 사람에게 주요 설계 개념에 대해 들어보았다. _ 편집자 주
일상적 요소에 기반을 둔 새로운 정원
‘인-하우스’는 거실, 부엌, 침실, 화장실로 구성되어 있고, 각 공간에 흔히 사용되는 카펫, 소파, 식탁, 싱크대, 책장, 침대 등의 가구로 집이라는 공간을 연출하였다. 이렇게 갖추어진 집의 형식을 기본으로, 집에서 사용하는 물건과 식물을 의도적으로 혼재시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냄으로써, 각 요소의 기능을 왜곡시키고 정원의 새로운 미감과 경험을 이끌어낸다. 이 작품에서 식물은 일상적으로 집에 사용되는 장식 요소가 아니다. 식물은 이질적인 경험, 변형된 공간 인식, 그에 기반한 새로운 정원을 제시하는 중요한 매개체다.
예를 들어, 거실 중앙에 직사각형 형태로 식재된 잔디와 초화류는 집에서 사용하는 카펫을 대체한다. 잔디와 초화류는 함께 배치된 소파와 결합하여 일상적인 것과 비일상적인 것 사이의 이질성과 생경함을 극적으로 연출한다. 책장과 신발장에는 원래 그 가구를 점유하는 책과 신발의 자리에 식물을 집어넣어 흔히 경험할 수 없는 정원의 모습을 구성한다. 또한 부엌과 화장실에 배치한 싱크대와 욕조 등 기본적으로 물과 관련된 요소에는 이끼와 수생식물을 심었다. 이 외에도 작품에 등장하는 일련의 식물과 집의 요소들과의 생소한관계 맺기가 이 정원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이며, 정원전체의 미적 감각과 경험을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