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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사상과 입지선정(1) -주거환경과 풍수
홍강, 풍수와의 인연
축축한 습기가 묻어져오는 1996년의 여름, 홍강 - 중국에서 발원하여 하노이시를 가로지르는 대단히 규모가 큰 강이다. 서울의 한강과 같은 모습으로 강폭이 2-3km에 이른다. 침식된 토사의 영향으로 항상 붉은 물이 흘러 홍강(Red River)이라고 부른다 - 의 둑 위에서 끝없이 펼쳐질 미래의 도시를 바라보았다. 밭과 습지, 벼를 재배하는 논들이 신도시로 적합한가에 대한 의문은 계속 되었다. 2,500만평 규모의 하노이 신도시 계획에는 한국의 대우를 포함하여 세계 최고의 설계회사들이 참여하였다. 미국의 Bechtel사와 SOM사, 일본의 Nikken Sekkei사, 네델란드의 OMA사 등으로 그 이름만 들어도 명성이 자자한 곳들이다. 이곳이 신도시의 적지임을 베트남의 최고위층에 설명하기 위한 자료를 준비하였다. 공항과 항구 그리고 도시가 Golden Triangle를 형성하는 곳, 기존도시와 접근성이 좋은 곳, 장애물이 비교적 적고 넓은 부지의 확보가 가능한 곳 등이 적지임을 설득하는 모든 것이었다. 후덥지근한 날씨만큼이나 지루한 설득과정이 이어져갔다. 홍수의 위험은 없는지? 다른 지역보다 좋은 이유는 무엇인지? 군사적 방어에 적합한 지역인지? 끝없는 질문에 명쾌한 답을 주기가 어려웠다. 여기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였다. 수천 년을 이어오는 동양의 도시입지는 어떻게 선정되었던가? 동양의 입지선정이론으로서 풍수의 가능성을 떠올리게 되었다. 세계적인 설계회사들의 현대적 접근으로는 만족할만한 답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풍수연구의 의미
주거환경은 인간의 외부환경으로서 도시환경의 일부를 구성하며 인간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인간과 인간의 상호관계를 지속시켜 주는 여러 가지 물리적 조건을 뜻한다. 주거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자연적 요소와 인위적 요소로 구분 할 수 있다. 특히 주거환경의 자연적 요소인 지형지세, 향과 일조, 미기후 등에 많은 영향을 주는 입지선정과 공간구성에 대해 그 동안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으나 한국의 전통사상 중 풍수가 주거의 입지(이하 "주거입지"라 함) 및 건축의 외부공간 배치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심층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특히 주거입지와 관련된 풍수의 연구는 단편적이고 편향된 풍수의 이론을 적용하여 연구되고 있거나 지형의 물리적 형태분석에 그치고 있어 한국의 주거입지가 갖는 풍수적 특성을 바르게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원인 중의 하나는 주택의 입지선정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며 다른 이유로는 풍수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입지에 대한 해석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 전통가옥의 안채공간은 대문과 안방, 대문과 부엌의 배치가 주역의 팔괘를 기준으로한 동서사택론에 부합하는지의 여부가 중요하다(월성 손동만 가옥)
조선시대의 주거건축
조선시대는 절대왕권을 전제로 한 전제군주국가였던 만큼 이에 부응하는 엄격한 신분제도가 확립되어 사회적 지위는 물론 주택에 있어서도 신분제의 제약을 받게 되었다. 조선은 개국과 더불어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땅이 한정되어 정 일품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계급에 따라 나누어 줄 집터[家垈]와 간수(間數), 장식을 제한하였다. 조선시대는 태조이래 유교를 정교의 최고원리로 숭봉한 결과 국민정신의 이상이 되고 조상숭배가 민간정신의 핵심이 되었다. 사회의 기본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가족으로 그것도 가부장적인 가족으로 대가족제를 이루는 것이었다. 가부장적인 대가족제도는 하나의 주택 속에서 여러 대(代)가 모여 살게 되었고 특히 대가에서는 3대, 혹은 4대에 이르는 여러 식구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따라서 주택건축은 큰사랑, 작은사랑, 안채, 아랫채, 별당 등 여러 채[棟]의 건물들이 지어져 하나의 커다란 주택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숭유억불정책은 남존여비사상과 엄격한 남녀구별의식을 가져와 내외법(內外法)에 의한 공간분화가 이루어졌다. 즉, 안채와 사랑채의 구별, 안방과 사랑방의 구별, 내측(內 )과 외측(外厠)의 구별 등 같은 주택 안에서도 남녀의 공간을 따로 마련하였다.
한양으로의 천도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풍수사상은 주택건축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어 동족촌의 입지선정, 집터의 선정과 배치, 좌향(坐向)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본래 주거건축에 있어서 풍수의 적용은 택지의 선정에 한정된 것이었다. 땅의 길흉이 사람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을 판단하는 풍수의 관점과 방법으로 볼 때 건물 자체보다는 건물이 들어설 자리를 판단하는 일이 본래의 기능이었다. 조선의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조(山川條)에는 진산(鎭山)風水的 觀點에서 마을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산으로 마을 뒤편에 위치을 명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을의 입지 또한 사신도(四神圖)의 기본형태를 취하고 있음을 볼 수 있고, 읍지에 수록된 강계, 산천, 형승조 등의 항목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물리적 형상물을 서로 통합하고 유기체적인 관계를 이룬다는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는데, 이러한 환경인식은 홍만선의 산림경제나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서도 찾을 수 있다. 풍수사상에 입각한 마을의 포치모습은 소위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으로 산을 등지고 남향으로 앉아서 앞에 경작지와 명당수(明堂水)로서의 생활하천을 마주하는 형태이다. 이에 더하여 장풍득수형(藏風得水形)이 우수한 지형으로 선호되었는데 뒷산과 이어져 마을 주위를 좌우로 감싸고 맞은쪽의 경작지와 물을 건너 마주 보이는 산이 있는[北玄武, 南朱雀, 左靑龍, 右白虎]지형을 말한다. 한편, 주거건축물의 배치와 관련해서는 양택삼요론(陽宅三要論)에 따르고 있다. 삼요(三要)란 출입이 이루어지는 대문[門]과 주인이 거처하는 주실[主], 그리고 먹을 것이 만들어지는 부엌[ ]을 말하며, 이 세 가지를 주택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라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이 세가지 요소의 좌향과 배치관계를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주역(周易)의 논리로 설명하고 있다.
권영휴 Kwon Young Hyoo
조경학박사, 조경기술사, 문화재기술자, (주)대우건설 부장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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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조경 이론과 설계의 지형(9) - 공감각의 조경미학
예술의 굴레, 화장술 조경
엘리자베스 마이어가 명확히 지적하고 있듯이 "부지 분석과 디자인 표현 사이의 단절, 즉 환경적 가치와 형태 생성 사이의 단절" 은 동시대 조경의 가장 큰 환부 중 하나이며, 이는 곧 조경을 둘러싸고 있는 예술과 과학, 디자인과 생태학의 대립으로 치환될 수 있다. 최근의 이러한 대립 양상은 1960년대 말 이후 환경론의 대두와 이러한 흐름에 대한 반동의 하나로 형성된 1980년대 이후의 조경예술(landscape architecture as art)운동에서 비롯되었다고 파악할 수 있다. 이 지점에 대한 정교한 분석은 이 지면의 영역을 벗어난다. 정작 이 글에서 문제 삼고 싶은 것은 픽춰레스크의 진부한 낭만을 거부한, 광역 생태계획의 건조함에 도전한 조경예술운동의 성과가 아니라 그것이 노출해 온 난점들이다.
피터 워커와 마샤 슈왈츠로 대표될 수 있는 이러한 흐름의 한계는 지극히 형태중심적이라는 데 있다. 현대 미술의 언어를 적용하고 동시대의 문화적 감각을 조경에 결부시키고자 한 시도는 물론 긍정적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시도가 겉모습의 복제에 그치고 있다는 점, 즉 종래의 디자인과 달라야만 한다는 강박증 내지 어떻게든 눈에 띄어야 한다는 "형태적 튀기 전략"의 차원에 머무르고 말았다는 점이다. 이렇게 보자면 예술이라는 새옷에 감추어진 조경의 몸체는 결국 장식과 화장에 골몰했던 전통적인 조경과 그리 다를 바 없다. 즉 동시대 조경 행위의 주류는 자연과 문화의 대화를 중개하는 "관계의 예술"이기보다는 예술이라는 허사로 포장된 미장원 내지 피부클리닉이라는 비판에 노출되어 있다. "예술로서의 조경은 곧 눈에 보기 좋은 조경"이라는 등식을 거짓 명제라고 부정해 버리기 어려운 형편인 것이다. 조경미학의 비판적 앵글이 요청되는 지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조경미학의 과제 중 하나는 가시적 형태 장식에만 치중해 온 화장술 조경을 극복할 수 있는 미학적 전략을 모색하는 데 있으며, 우리는 여러 경로를 통해 그것에 접근할 수 있다.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 할애할 것은 그 다양한 경로 중 "지각"의 측면이다. 예술의 굴레 속에서 형태 중심의 화장술로 부유하고 있는 조경의 이면에는 "시각 중심적 지각"이라는 전통이 자리잡고 있다는 강한 의심, 그리고 그러한 단편적 지각 모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인―실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고의 탐색이 뒤를 이을 것이다.
▲ james Corner/Field Operations, Lifescape, Fresh Kills(그림제공 : Field Operations 정옥주)
공감각, 삶과 경험의 확장
시각만을 통해 어떤 환경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신체가 환경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하고 환경이 우리로부터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에서 우리는 표면의 형식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시각은 환경의 미적 경험에 필요한 하나의 감각에 불과하다. 문화적 자연으로서의 환경에 참여(engagement)하기 위해서는 그 내부의 모든 상황을 포괄하고 연결할 수 있는 다른 감각들의 역할이 시각 못지 않게 중요하다. 개념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실제의 환경 경험을 기억해 보자. 멀리서 어떤 경치를 보는 것만으로 미적 경험을 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의 신체는 그러한 환경에서 환경과 함께 움직이며 그것에 따라 행동하고 반응하지 않는가? 우리는 눈을 통해 환경의 색과 질감과 형태를 파악할 뿐만 아니라 땅과 풀을 만지고 밟거나 바람과 물의 소리를 듣거나 고유한 어떤 냄새를 맡고도 환경을 파악하고 구별하지 않는가?
환경의 미적 경험을 설득력 있게 해명하기 위해서는 시각에 비해 조명을 받지 못해 온 청각, 후각, 촉각, 근운동감각 등 여타 감각들의 가능성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다. 환경의 소리는 생동감과 역동성을 가져다준다. 바람이나 파도 소리처럼 리듬이 있는 소리는 생명의 기본적 파동―심장의 박동과 호흡―과 비슷하다. 소리는 환경을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성분이며, 따라서 귀를 통한 음의 지각은 환경의 미적 경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각 방식이다. 저급한 감각으로 여겨져 온 후각은 환경의 숨겨진 차원을 드러내 주며 우리의 감성에 영향을 준다. 사람마다 냄새가 다르듯이 환경의 냄새도 서로 다르다. 음식 맛도 냄새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듯이 환경의 냄새는 환경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 촉각은 사물의 표면 결, 윤곽, 압력, 온도, 습도 등에 대한 지각을 담당하는 것으로, 환경의 특질을 파악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자연을 만지며 즐거워하는 행위는 인간과 자연의 연속성을 보장해 주지만, 우리는 주로 자연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자연을 향유했다고 만족한다. 그러나 촉각은 가장 속이기 어려운 감각이며 인간이 가장 신뢰하는 감각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또 하나의 감각은 근육과 골격 및 신체의 운동과 관련되는 근운동감각(kinaesthesia)이다. 근운동감각을 통해 우리는 신체 운동의 속도, 회전 각도의 정도, 방향 변화의 정도 등을 지각할 수 있다. 근운동감각은 정태적 자연 경험을 대치할 수 있는 생동감 있는 자연 경험의 전제 조건이다. 신체의 운동은 생명의 증거이다.
시각의 그림자에 묻혀왔던 청각, 후각, 촉각, 근운동감각 등 각각의 감각 영역에 주목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감각들이 환경의 경험에서 동시에 작동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다. 이른바 공감각(synaesthesia)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소리를 듣고 어떤 색깔을 연역하는 상황은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공감각의 보편적 형식이다. 예컨대 음의 높이는 이미지의 밝기와 관련된다. 굵은 목소리, 드럼 소리, 천둥 소리 등과 같은 저음은 어두운 이미지를 느끼게 하는 반면, 아기의 울음 소리, 바이올린 소리, 소프라노 음 등은 희거나 밝은 이미지를 느끼게 한다. 음의 높이는 또한 이미지의 크기 및 형태를 연상시키게 한다. 고음은 작고 날카로운 각을 떠올리게 하는 반면, 저음은 어둡고 둥근 양감을 준다. 이처럼 우리의 지각은 단일한 감각 경로에 의존하기보다는 여러 감각의 통합적 기작을 통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전통적으로 예술은 단일 감각에 의존해 왔다. 미술과 음악은 가장 전형적인 단일 감각형 예술이다. 이처럼 시각과 청각만이 고유의 예술 형식과 표현 언어와 기교를 가지고 있는 세련된 감각으로 여겨져 왔는데, 그러한 전통의 배경에는 시각과 청각을 이성의 활동과 관련되는 감각이라고 간주해 온 전통이 내재해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예술이라 하더라도 실제로 그것을 경험하고 지각할 때는 다른 감각들이 동시에 작동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조각을 경험할 때 우리는 그것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가서 만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또 콘서트홀에서 교향곡을 감상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장소의 시각적 분위기, 연주자의 모습, 홀 내부의 온도, 옆 사람들과의 접촉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환경의 미적 경험과 지각은 예술의 경우보다 한층 더 총체적이며, 여러 감각들이 동시에 동원된다. 이런저런 이론과 개념을 떠나 실제의 경험을 생각해 보기만 하더라도, 환경에서는 하나의 감각―특히 시각―만이 상황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감각들이 동시에 개입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환경의 미적 지각은 "여러 감각 또는 모든 감각의 연합 작용에 의해 형성되며 모든 감각이 서로 관련된다." 보기, 만지기, 듣기, 냄새맡기, 맛보기, 근육의 움직임 등과 같은 복합적 지각 행위가 경험 과정에서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
미학자 아놀드 벌리언트가 적절히 분석하고 있듯이, "환경의 경험은 단순히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감각 양태를 공감각적으로 포함하는 것"이다. 동시에 작용하는 감각들을 분리하여 분석하는 일은 시각에 대한 강조가 갖는 문제 이상으로 허구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공감각은 한층 더 설득력을 지닌다. "환경 지각에서……공감각은 ……감각 양태의 혼합을 뜻한다.……환경 지각은 전체적이자 상호적인 인간의 감각 중추와 엉켜있다. 우리는 신체와 장소의 상호 침투를 통해 환경의 일부로 참여하는 것이다." 인간 개개인을 자연적·문화적 조건과 결합시키는 연속성을 지향해야 한다면 공감각에 대한 강조는 필연적이다. 공감각은 또한 "문화의 상상력"을 "지각하고 창조하는 새로운 방식"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마라 밀러의 말을 빌리자면, 다른 감각들을 배제한 시각 위주의 "이차원적" 환경 경험은 "환경에 대한 우리의 향유를 제한할 수밖에 없다." 감각의 전체 영역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는 것은 곧 환경의 미적 경험은 물론 우리의 삶을 확장시키는 의의를 지닌다. 공감각에 대한 인식은 환경이라는 미적 장에서 벌어지는 우리의 삶에 다양한 미적 경험을 마련해 줄 수 있는 전환적 사고의 하나일 것이다.
배정한 Jeong-Hann Pae
조경비평가, 조경학 박사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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뻬쩨르브르그- 에르미따쥐 박물관과 시민혁명으로 유명한 바로크식 도시
이 도시는 바로크식 도시이다. 전제왕권 스타일의 바로크 건물로 지워진 도시이다. 바로크는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은 민주주의의 이념을 추구하는 바로크식 도시가 되었고, 파리, 런던도 마찬가지이다. 뻬쩨르브르그는 바로크를 파리, 런던 등 유럽 주요도시에서 가져왔다. 브라질의 행정수도 역시 원시림을 개발하여 만든 인스탄트 바로크 도시가 아닌가? 뻬쩨르브르그는 이 시기의 신도시이다. 모스크바로부터 무려 7백여 킬로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신도시를 만든 것이다. "유럽으로 난 창문"으로 우리에게 레닌그라드로 알려졌던 도시. 이 도시가 1703년 5월에 세워지고 정식으로 러시아의 수도가 될 때까지 9년을 기다려야 했다. 왜냐하면 로마노프왕조가 대법원과 연방정부청사를 이 곳으로 옮기는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뾰뜨르(1672-1725)는 선진문화와 기술을 배우기 위해 서유럽으로 떠난다. 쿠데타 소식을 접하고 겁이나 1년 6개월만에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이끼가 가득 찬 습지와 진흙탕에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하나 하나 실천에 옮긴다. 발트해를 거머쥐고 유럽을 자유롭게 왕래하고자 하는 그의 염원은 유럽에서 내로라 하는 큰 도시를 만드는 길이라는 의지를 불태우게 하였다. 이 길만이 러시아가 서유럽에 대한 콤프렉스를 벗어 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스웨덴이 발트해를 떡 버티고 있는 바람에 유럽통로가 봉쇄되자 그는 스웨덴과 북방전쟁을 일으켜 승리하게 된다. 승전은 국민들을 도시건설에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을 제공할 수 있었다. 우선 뾰뜨르는 네바강 하구에 외침에 대한 든든한 방어의 수단으로 요새 구축을 서두른다. 요새를 필두로 하여 도시는 서서히 그 거대한 위용을 들어내기 시작한다. 뾰뜨르대제는 유럽 선진도시의 계획방식과 건축양식을 골고루 받아들여 도시를 계획하되, 건축물은 모두 돌로 만들라고 명령한다. 이 당시 뽀뜨르대제는 테크로크랏을 비롯한 수 만 명의 농민을 전국에서 차출하여 운하를 구축하고 다리를 놓고 건물을 짓는다. 마치 황량한 사막에 도시를 세우는 것처럼… 1703년에 단추를 낀 사업이 한 세기에 걸쳐 진행된 것이다. 18세기에 이렇게 거창하고 화려한 신도시가 만들어 진 것은 유럽의 도시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대역사인 것이다.▲ 저녁노을과 햇살이 깔리는 네바강의 풍경 진흙탕과 밀림이 전부였던 습지대가 도시적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동원된 국민들(주로 농민)은 중노동, 그리고 배고픔과 혹독한 추위와 싸워야 했다. 도시건설 현장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 나가게 되었다. 마치 전장에서 죄 없는 병사들이 쓰러지듯이… 이 도시건설에 묻힌 많은 희생자들 때문에 이 도시의 별명 같은 이름 "사람의 뼈로 이루어진 도시"가 생겨나게 되었다. 서유럽과 북유럽 사람들은 짧은 기간에 이토록 유럽형의 아름다운 도시가 만들어진 것을 보고, 경외의 찬사를 보내는 한편 적지 않은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도시가 형성되자 유럽에서는 뻬쩨르브르그를 유럽의 일원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도시 하나가 유럽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은 것이다. 북방전쟁의 승리에다 유럽형 도시의 건설로서 유럽을 오가는 길목인 발트해를 굳건히 지킬 수 있는 교두보가 마련된 셈이다. 백야를 지나 잠시 어두워 지더니만 이내 아침해가 둥그러니 솟아 오른다. 구두끈을 고쳐메고, 손가방을 챙기고 길을 나선다. 나직하고 완강한, 따스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아침해를 두팔로 끌어 안으며 어제와는 다른 길을 간다. 또 다른 곳에 우리의 발자국을 찍으러... 네프스키 거리를 간다. 이 도로는 역시 뻬쩨르브르그의 상징가로이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이 뻬쩨르브르그의 길은 모두 네프스키로 통한다. 이 도로는 역사성, 상징성, 그리고 중심성을 지니고 있다.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이고, 상가, 은행, 공공건물, 그리고 도로 이면에는 주택등이 포진하고 있다. 18세기와 19세기 문호 도스도예프스키, 고골리, 푸시킨 등이 이 도로를 무대로 글을 쓰고, 이데아를 논하고, 시상을 떠올렸다. 이 길을 통해 시민혁명이 일어나고, 이 길에서 시민들이 외치는 혁명적 요구가 러시아 뿐만이 아니라 유럽까지 퍼져 나갔다. 뻬쩨르브르그의 길을 모두가 넓다.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도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로들은 사람보다는 대제를 위하고, 권위를 자랑하기 위함이다. 대로 중심의 이 도시는 중세도시의 모습을 간직한 대부분의 유럽도시들과는 엄연한 차별성을 지닌다. 중세형 유럽도시에는 큰 길이 없다. 똑바른 길도 드물다. 기하학적 질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어느 중세형 도시의 도로는 도로 폭이 일정하지 않고, 방향성도 모호하다. 구불구불한 길은 도시 어느 곳에서라도 중심광장으로 사람들을 안내해 준다. 그러면 성당이나 시청사는 마치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타나게 마련이다. 원 제 무 Won, Jaimu한양대학교 도시대학원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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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공간에서 만나는 점토벽돌(2) - 점토벽돌의 다양한 활용사례
이번호에서는 점토벽돌을 녹지경계석, 배수로, 플랜터, 앉음벽, 계단 등에 활용한 구체적 사례를 살펴보고, 점토바닥재의 응용방안으로 켜쌓기 방법을 살펴본다. 더불어, 점토바닥재의 기본적인 포장방법에 대해서도 간략히 소개하도록 하겠다.
녹지경계석
경계석은 다양한 재료와 만나 녹지경계석, 포장분리경계석(재료분리대)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에는 녹지와 만나는 곳에는 어김없이 녹지경계석이 사용되었으나 최근들어서는 특별한 경계석을 사용하지 않고 바닥재 그대로 마감하는 현장도 눈에 띄고 있다. 그만큼 다채로운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종류와 방법으로 바닥재가 시공되고 있는 만큼 녹지의 경계와 서로 다른 재료가 만났을 때의 경계부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녹지경계석의 경우 녹지와 만나는 포장재를 고려하여 꼭 기성제품의 콘크리트나 화강석 경계석을 사용해야 하는지, 미처 세밀하게 살펴볼 여유가 없어 녹지와 만나는 라인에는 무조건 경계석을 사용하여 과잉설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건축과 토목에 비하여 늘 부족한 공사비를 사용해야 하는 조경공사의 현실을 고려할 때, 경계석에 사용되는 만만치 않은 공사비를 다른 공정에 사용하여 전체적인 공간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점도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해 봐야 할 일이다. 현장에서 시공되는 경계석의 길이와 포장면을 생각한다면, 세심한 배려가 결과물에 있어 얼마나 다른 품질로 나타날지 생각해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점토바닥재가 최상의 방식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장 여건에 따라 하나의 좋은 대안이 될 수 있기에, 몇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하지만, 점토바닥재를 경계석으로 사용할 때에는 특히 콘크리트베이스 위에 점토바닥재를 붙여야 하므로 백화현상에 유의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레미탈(시멘트, 모래가 혼합되어 현장에서 물만 부어 사용할 수 있고 해사 사용으로 인한 하자를 막을 수 있다)로 시공하는 것이 좋다.
현장에서 어떤 포장재를 어떤 느낌으로 표현할 것인지에 따라 적당한 경계석 시공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포장마감이 점토바닥재로 사용되었다면 점토바닥재를 이용한 경계석은 통일감을 줄 수 있으며 작은 단위로의 절단과 시공이 용이한 만큼 현장상황에 따른 다양한 응용이 가능할 것이다.
▲ 그레이팅 테두리
배수로
배수로에 이용 될 수 있는 점토바닥재는 크게 세가지 정도로 나눠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표면배수가 되도록 하여 시공시 경사를 주어 배수의 방향을 잡아 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배수용 점토제품인 찬넬(channel)을 이용해 배수로를 만들어 주는 방법이 가능하다. 세 번째는 점토바닥재로 포장면 보다 단을 낮춰 배수로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배수로를 만들때는 전체 포장면적과 강수량을 고려하여 폭과 깊이를 정해야 한다.
플랜터(Planter)
플랜터를 만들때는 조적하여 만드는 방법과 콘크리트 구체를 치고 외벽에 점토바닥재, 점토타일, 점토벽돌을 붙여주는 방법이 있다. 포장의 재질이 점토바닥재였을 경우는 공간의 통일감을 주기 위하여 플랜터에 같은 재료를 사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앉음벽(Sitting Wall)
앉음벽은 시설물중에서 시각적으로 중요한 구조물인 동시에 기능성도 있는 구조물이다. 1B나 1.5B 쌓기 정도의 폭을 갖게되며 다양한 길이와 형태, 다른 재료(나무, 석재)와 혼용하여 여러 가지 표정을 연출하는 시설물로 만들 수 있다. 콘크리트 구체로 만들 경우에는 점토타일이나 점토바닥재로 붙여 시공한다. 마지막 끝부분 마무리에 있어서는 무공제품으로 구멍이 보이지 않도록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담장 설치시에도 마무리는 무공제품을 사용하고 설계시 디테일에 나타내 주어야 할 부분이다.
계단
같은 점토제품을 사용해 계단을 만들더라도 여러 가지 형태로 만들 수 있는데 바닥포장을 마무리한 같은 점토바닥재로 계단을 마무리 할 수 있고, 밟는 면은 점토바닥재로 측면은 점토벽돌을 세워 시공할 수 있으며 계단마감재로 마감을 할 수도 있다. 이 방법들 모두 느낌이 다른 형태의 계단으로 시공되므로 현장의 분위기, 계단사용의 빈도, 계단 날개벽 마감 등을 고려하여 선택해야 한다. 계단의 높이가 현장상황에 따라 조금씩 차이날 수 있지만 점토바닥재나 점토벽돌은 절단이 쉬우므로 변수가 많은 현장에서 탄력적으로 이용 가능하다.
점토바닥재의 응용 - 켜쌓기
점토바닥재를 반으로 컷팅하거나 포장공사시 절단하고 남은 점토바닥재의 절단면을 정으로 쪼아 적당히 다듬어진 요철을 주어 화강석의 켜쌓기와 같은 방법으로 줄눈 없이 몰탈로 붙여 시공할 수 있다. 시공시에는 벽돌을 쌓듯이 정형적인 방법으로 쌓는 것이 아니라 길이가 서로 다른 것들을 조합하여 자연스러움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점토바닥재 색상중 투톤의 색상으로 되어있는 것은 절단된 면의 색상이 한층더 돋보이게 된다. 이러한 방법은 플랜터, 장식가벽 등에 활용될 수 있다.
이 희 경 Lee, Hee Kyung·미드랜드코리아(주) 디자인팀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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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과 이정표 및 가로수에 대한 고찰
장승과 가로수
도로에 거리 표시로 처음에는 흙이나 돌을 무더기로 쌓아서 일정한 거리마다 설치 하다가 점차 시대의 필요성에 따라 그 돈대( )위에 나무를 깎아세워 안내기록을 새겨넣는 표목(標木)이 세워 지다가 장승과 함께 병행하는 변화과정을 거치면서 수목을 심어서 거리의 위치표시로 삼다보니, 마침내는 그 이용효과는 거리표시는 물론 행인들의 쉬어가는 그늘로하여 쉼터로서의 다목적 효과를 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언제부터 로변의 장승이 가로수로 변하게 되었는지 그 시대적 과정을 보면, 도로변에 후( )라는 명칭으로 장승을 세우면서부터 나무를 심게 되었던 최초는 앞서 언급된 바 있는 고대 중국의 남북조 시대 위효관 이라는 지방 수령이 도로변에 거리 표시로 흙장승( )을 설치했던 것을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나무를 심어 그 돈대( )를 대신케하니 길가는 나그네들로 하여금 서늘한 그늘을 주는 덕을 베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본 임금(周文帝) 은 전국 각 주(州)에 명하여 이와같이 후( :장승)를 없애고 대신 나무를 심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심은 나무의 수종은 어떤 나무를 심었던가 하니,
북사(北史) 위효관전(韋孝寬傳)에 있기를 후( )대신 홰(槐)나무를 심었다.(當里處植槐以代理 也) 하였으니, 이 나무는 일명 회화나무로서 중국이 원산인 활엽교목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회화나무는 예부터 삼공지괴(三公之塊)라 하여, 공명심록(空名臣錄)에 자손이 삼공(三公)에 오르면 뜰 안에 이 나무를 심었다는 상서로운 나무로 귀애함을 받았던 나무였다. 그래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옛 한양의 도성 궁궐내 요소마다 홰나무가 지금도 거목으로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와 관련한 연유가 있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조선 초기에 와서의 실상을 보면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서는 건설사업에 주력하는 바 도성 및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동서남북 중앙의 5부로 나누어 도로건설을 시행하였는데, 도성내의 도로망은 물론 전국의 역원(驛院)제와 봉수제를 한성부 중심으로 개편하므로 하여 이 사업은 태종, 세종, 세조, 성종조를 거쳐 경국대전의 완성으로 전국적인 도로망의 정비를 보게되었다. 이 기간동안에 도로변에 심은 나무의 기록이 있는바 「도로변에 거주하는 자는 전부 도로변에 나무를 심고 하천변에 거주하는 자는 축방 양측 제방에 나무를 심어야 한다.」(路傍各戶皆命栽植川邊各戶各於兩岸築坊栽木)하였는데 이는 중국의 남북조시대 위효관이 시행한 길가에 나무를 심어 행인들에게 덕한 길가에 나무를 심어 행인들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것과 무관치 않은 일이며, 우리나라 가로수 역사의 효시가 아닌가 싶다.
또한 조선왕조의 통치 법전인 경국대전에 장승에는 리(里)수와 지명을 새긴다라는 규정이 있지만 후대로 내려오면서 새로운 제도의 창립시행도 있고, 시류에 따른 변화도 있어서인지 거리표시 방법도 기존 장승에만 의존하지 않고 융퉁성 있게 시행하였던 것 같다.
그러니까 태종때 까지는 후( )라 하여 토석의 단위에 거리표시를 해오다가 세종 20년(1438)때 와서는 장승의 위치에 이정표로 표목(標木)을 세우고는 나무를 심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세종 23년(1441) 8월에는 중국 사신이 들어오는 평안도 대로변에는 30리마다 로표(路標)를 하나씩 세우되 구간 내에는 단을 쌓아서 거리 표시를 하기도 하였다. 또 단종때에 와서는 본격적으로 나무만 심게 하였으니, 단종원년(1452) 5월에 는 한성과 지방의 대로변 좌우에 나무를 심도록 하고 철저히 관리하게 하는 반면 그 심는 수종은 각 지방에 알맞은 나무로 하되 소나무, 잦나무, 밤나무, 홰나무, 버드나무 등을 심고 가꾸게 하였는데, 이는 앞서의 나무로 거리표시를 하던 방법과는 크게 변화된 시행이며, 특히 도로변 좌우에 심으라는 것으로 보아 가로수 개념에 가까운 시행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와같은 일이 단종 이후로는 기록에 보이지 않다가 현종때에 와서의 일로 반계수록에 보이는데.
「회화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잦나무, 버드나무는 성(城) 내·외에서 관도의 양쪽에 느려심고 근처에 사는 사람에게 관리하도록 했다.(槐木, 銀杏, 松柏, 楊柳則又於城內外官道兩傍列植分付傍道居人看手如有伐者治罪郞令準植)」 는 기록이 있다.
이는 그동안 장승과 함께 구간마다 나무를 심어본 대체 효과가 아예 나무를 많이 심어 얻는 다목적 효과를 가져온 결과의 시도가 아니었나도 생각된다.
장승의 처음은 거리표시로 장승만이 주체이던 것이 나무를 시어 대치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의 처음 시작은 세종때부터 변화기라 하겠지만 후애로 오면서 일관성 있게 통일된 시행이 아니라 장승과 함께 나무를 식재로 병행설치 방법으로 후기에까지 이어온 것 같다.
정약용 선생도 이정표를 세우되 쉬어 갈 수 있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이 목민심서(1801∼1818)에,
나루터에 배 없는 일이 없드시 역정(驛)에 장승 없는 곳이 없음은 행인과 나그네들의 즐거워 하는 바 라고 하면서, 5리가서 표목 하나 세우고, 10리에 가서 장승을 세우되 거기에 중국의 위효관의 예를 들면서, 우리도 흙돈대를 없애고 홰나무(槐)를 심게하면 길가는 나그네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주어 덕을 베풀는 일이라 하고, 또 10리마다 작은 장승(小 )을 세우고, 30리마다 큰장승(大 )을 세운다면 거기에는 느릅나무(楡)와 버드나무를 심어야 한다.(--每十里立小 三十里立大 樹之以楡柳) 고 하였다.
이는 관의 지침이나 직접적인 지시가 아닌 선비가 관을 향한 학자적인 설문이므로 그대로의 시행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러나 앞의 왕조간의 시행사례 몇 가지의 예로보아 도로변에 이정표로 장승을 세우기도 하고, 거기에 나무만 심어 장승을 대신 하기도 하고 장승과 함께 나무를 심어 길가는 행인들에게 그늘을 주고 신선함을 제공하게 되었던 것은 우리나라 도로 문화에 변화의 과정이었으며, 이는 외부의 견문이 없이도, 우리만의 사고에 의해서 발전하는 고유의 우리모습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조의 재위기간(1776∼1800) 동안에 도로변에 심은 노송의 숲이 있으니, 수원시 북부 옛 지지대 고개 소나무 숲이 그것이다.
이는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세자로 추존하고 능(陵)을 수원으로 천봉하면서 이 능을 지키는 용주사를 짓고는 부모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부모은중경을 새겨 기복케 하는 지극한 효심으로, 한달이 멀다하고 능을 찾아 행차 하셨다 하는데, 지지대 고개는 국도의 대로이며 정조가 현륭원을 봉행할 때마다 지나는 능행어로(陵行御路)이기 때문에 장승도 격이 있는 큰 장승(大 )을 세웠던 위치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나무를 심은 것은 이미 세종때부터 큰 장승 주위에 나무를 심었던 것이 관행이 아니었나 함이며, 궂이 소나무를 심었던 것은, 단종때도 그 지방에 알맞은 수종을 심도록 했던 선례도 있을 뿐만 아니라, 소나무는 옛부터 충절을 기리는 의미도 있었거니와 수장지목(樹長之木)이라 하여 나무중에 으뜸이요 조한 묘역이나 관문 입구에 심는다는(以松樹考門) 뜻을 높이 감안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다.
그러면 능원으로 가는 입구의 대로에는 장승이 어떻게 세워 있었는지 기록의 한 예를보면,
영조 46년(1770)에 관련한 도로고(道路考)의 능원묘어로 조(陵園墓御路條)에,
「厚陵在豊德長 隅自薺陵五里豊德府十里陵下五十里共二百二十里」라고 표기된 장승의 이정표다.
여기서 후능이란 정종의 능을 말함인데, 이 릉은 개성의 풍덕에 있는 능이다.
장승이 서있는데서 거리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왕능 앞을 지나는 도로에는, 장승도 이정표도 격이 있고 품위가 있게 했으리라 여겨진다.
또 하나 임금이 다니는 온천길의 장승에는 어떤지 예를 보면, 같은 도로고(道路考)의 온천행궁로 조(溫泉行宮路條)에,
「---鳥山大川菁好驛前竝長 山見十里」
여기에서 보면 임금이 통행하는 어로나 관 대로에는 장승도 쌍장승으로 규모있게 세웠던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 보듯이 지지대 고개 또한 왕능이 있는 관대로 이므로 큰 장승이 품위있게 세워져 조선 말기까지 있었던가, 신채효 선생의 판소리중 변강쇠가의 가사 내용에도 지지대 유사님(有司) 지지대 공원(公員) 운운하는 대목이 있다.
장승을 가리켜 유사님 공원임 하는 말은 보부상의 직책으로 장승의 기능도 이에 유사함을 빗대어 음풍한 것일 것이다.
이렇듯 큰 장승이 서있는 지지대 고개에 소나무를 심어서, 관의 임무를 수행하는 관원은 물론 일반 행인들까지 쉬어가는 곳이었을 것이니 생각해 보면 그늘이 있고 쉬어가는 곳이라면, 우마차와 행인들의 봇짊등을 길가에 길게 늘받쳐 놓고 쉬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그러자면 나무도 길을 따라 가로수 열식으로 길게 심게 되었을 것으로 상상이 되는바, 초기에는 장승주위에 어찌 심었던지 간에, 정조임금의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질서있게 가로수처럼 길게 열식하여 심게된 것이 아닌가는 알 수 없으나, 오늘날까지 지지대 고개 노변을 울창하게 지켜 서있는 소나무 길은 사실이 아닌가.
우리나라에 가로수가 의도적으로 심어지기는 개항기 이후인 고종 32년(1895) 3월 10일 내무아문(內務衙門)에서 각도와 각 읍에 시달하되,
「道路 左右에 樹木을 植養함을 勸하고 栽植할 事」하고, 가로수를 심도록 지시하므로 하여, 이로부터 전국에 설치되어 있는 역(驛)과 발참을 폐지하고 우체사를 신설하고 현대식 교통통신의 도입으로 하여 장승의 이정표 제도는 사라지게 되었고 관 주도로 획일적인 가로수를 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국가시책의 지침으로서 그 첫 시행의 시기와 장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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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30년이 되는 해를 맞이하여
e-매거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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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도시광장Ⅲ - 상하이(上海市)의 인민광장(人民廣場)과 외탄광장(外灘廣場)
지난 여름 중국을 다녀오면서 하루가 다르게 변화·발전하고 있는 그들의 도시 모습에 무엇인가 초조함을 저버릴 수 없었다. 몇년전부터 중국의 변모상은 여러 경로를 통해 인식들은 하고 있었지만 그동안 게으르지 않게 관심을 갖고있던 필자 입장에서는 좀더 생산적인 기회 마련에 시간을 놓치고 있는 듯한 안타까움이었다. 그래서 궁리해낸 것이 지난해 11월초에 있었던 한·중 조경설계 작품전시회였다. 그들의 생각과 표현을 현장에서 확인하면서 필자가 받은 충격을 우리측 인사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한편으론 우리와의 접촉에 자신감을 찾았고, 절치부심하던 올림픽 유치도 성취한 그들이지만 그래도 이제부터는 도시환경문제 개선에 아쉬워할 입장임에 착안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해서 4개월만에 다시 북경을 찾았더니 주로 문혁세대 이후 젊은 작가들로, 작품내용도 놀라울 정도였지만 종합토론에서의 숨길 수 없는 그들의 욕구 표시는 역시 올림픽 개최에 따른 한국에서의 경험적 정보들이었다. 그러면서도 "1998년 이후 중국 전체의 도시에서 6,000여개의 도시광장이 출현하였다"라는 은연중의 과시와 행사 마지막날 북경의 가로조경 사례지 답사에서는 충격적인 현장을 보여주고 있었다.
왕부정(王府井)거리 서북쪽 명·청(明·淸) 초기의 황궁 성벽자리를 발굴하여 가로 공원화 하였는데 2.8km 거리에 폭이 약 40여m 되는 구간이었다. 현 지반고에서 2m 정도 낮은 곳에 옛 성벽의 원형을 찾아 선큰광장화 하였고 높낮이의 변화에 따른 각종 수경시설과 시대상을 보여주는 환경 조형물, 섬세한 바닥 포장 등의 다양한 설계내용들이었다.
60세가 넘은 듯한 여사장의 정력적인 안내 설명에 따르면 계획수립에서 설계 기간까지 한달 보름이었고, 시공 6개월만에 마치었다하니 진위 여부에 대한 재확인을 하여야할 정도였다.
오래된 주택가의 철거 과정과 보상비는 그들 체제상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동안 인식되었던 중국, 중국인들이었던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여야할 시간이었다. 마치 비온 후의 숲 속에 버섯이 솟아나듯 새로운 장소의 양적인 출현도 상상을 초월하지만 질적인 내용에서도 그들의 잠재력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10여년 전 필름 속의 중국 모습과 비교하면서, 편의상 신해혁명(申亥革命)을 근대, 문화혁명 이후를 현대사의 시작점이라 가정한다면 과연 오늘의 목표는 무엇이고, 내일의 지향점은 어디까지인가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숨가쁘게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이렇게 변모하는 배경 요인 중 변화의 근원이 될 수 있는 곳은 흔히들 광동성(廣東省) 심수라 하지만 이는 경제개발의 전략지점이었고, 정신적 중심도시는 역시 상해시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는 상하이의 도시광장을 더듬어 보기로 하였다.
▲ 상해시 인민광장 - 배경의 건축물들이 화려하게 반사되고 있다
정부청사 앞의 인민광장
상해는 4·5년 전 까지만 하여도 인구 1400만으로 북경, 천진과 함께 중국 3대 도시 중 인구 최대의 도시였다.
그러나 최근 중경(重慶)시가 3090만의 직할시로 분리되면서 최고의 자리를 넘겨주었지만 그래도 1674만의 중앙 직할시로 중국 근대화의 간판이자 현대화의 선두이기도 하다.
근대화의 상징인 손중산(孫中山)과 사상적 지도자인 노신(魯迅)의 옛집(故居)을 기리고 있고 1921년 7월 중국 공산당 제 1차 개최지로서 선진국의 근대 문명과 부닥친 역사성과 함께 개방과 변화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1824년 남경조약(南京條約)에 의해 개항하고 나서야 도시조성이 이루어진 곳으로 그동안 협소한 가로망에 교통체증으로 인상 지워졌던 곳이었지만 그래도 우리들에게는 마당로(馬堂路)에 위치한 망명 정부터와 노신공원 안의 윤봉길 의사 현장 등으로 망명자들이 찾아들 듯한 푸근하고 어스름한 분위기의 도시였었다.
뒷골목 그늘 밑에는 웃통벗는 노인들의 장기 두는 모습이 한가로웠고 아파트마다 내 걸린 장대 끝의 빨래들과 주택가 입구마다 내놓은 마통(馬桶)들이 신기롭기만 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들도 90년대 초 였고, 그 이후에는 예원(豫園) 입구의 붉은색 상가 앞을 가득 메운 관광객들과 강변 외탄(外灘)으로 밀려드는 인파에 상해의 변화는 예측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90년대 말이 되자 허허벌판이던 포동(浦東) 지구에 등소평(鄧小平)의 명에 의해 중국 희망의 지표로 삼았던 동방명주(東方明珠) 탑이 들어서자 이를 신호로한 고층 빌딩들이 우후죽순처럼 솟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은 도시의 면모를 바꾸어 놓은 곳이 바로 상해시의 행정중심인 인민정부인데 동쪽으로는 서장중로(西藏中路)와 북쪽의 남경동로(南京東路)와의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다.
정부청사 주변에는 인대(人民代表會議), 정협(政治協商) 건물들과 함께 근대의 우수한 역사적 건축물들이 집중된 지역으로서 공공활동이 가장 활발한 지역이기도 하다.
그중 인민광장은 정부청사 전면에 자리잡고 있는데 면적은 1,626,000m2에 이르고 시중심에서 가장 큰 open space 이기도 하다.
장 태 현 Jang, Tae Hyun·청주대학교 환경학부 조경학전공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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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환경조경Ⅱ - 습지
에버글레이즈 국립공원
지역적 특성
에버글레이즈 국립공원은 플로리다 반도의 남서쪽 일대에 펼쳐진 아열대성의 국립공원으로 멸종위기에 처한 동·식물을 포함, 다양하고 미묘하게 얽혀진 먹이사슬을 구성하고 있는 아열대 생태계를 접할수 있는 미국최대의 지역이다. 광활한 습지, 갈대가 무성한 소택지, 맹그로브 숲등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의 면적은 Cape Sable, 늪과 야생들판을 포함 대략 1백40만5백에이커에 이르는 면적으로 플로리다만을 포함해서 동쪽으로 30마일, Cape Sable로부터 멕시코만을 따라 북쪽으로 45마일까지 뻗어있다.
플로리다 반도 중부의 키시미(인디언말로 『긴 물』이란 뜻)호는 에버글레이즈 공원의 서쪽 입구로서 키시미호에서 시작하여 오키초비 (『큰물』이란 뜻)호로 흘러가는 에버글레이즈의 원류이다. 두 호수간 직선거리는 90㎞에 불과하나 2∼3㎞의 폭으로 165㎞를 굽이굽이 돌아 흐르며 5∼10월 우기시에는 주변 호수와 강이 일제히 범람하여 폭 50∼60㎞의 거대한 물살이 오키초비 호를 지나 반도끝까지 흘러 내려간다. 오키초비 호는 넓이 1,800㎢로 미국 제2의 담수호이나 수심은 3m에 불과한 습지로 인디언들은 거대한 물살이 흐르는 이 방동사니(sawgrass)숲을 『풀의 강』이라 불렀다고 한다.
공원의 대부분이 맹그로브나무 사이로 수로가 복잡하게 있고, 간간이 다습 비옥한 지대와 방동사니(sawgrass)가 자라는 늪 지역이다. 비가 오면 소나무 자연 식생지와 고산다습비옥지대 이외의 지역은 수렁이 되어 질척거리게 된다고 한다.
개발현황
에버글레이즈는 1880년대부터 개발이 되었는데 제방과 운하를 건설하여 주거지와 농경지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총 개발 면적은 23,000㎢(남한의 1/4)로 1년중 1/2이상이 물에 잠겨 있어 쓸모없는 습지로 여겨졌다. 1909년, 제1차 배수사업이 완료되어 오키초비 호와 마이애미강 그리고 대서양에 이르는 운하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허리케인을 동반한 대홍수로 4차례(1926년, 1928년, 1947년, 1948년)에 걸쳐 막대한 인명 및 재산피해를 입게 된다. 23년간(1948 ∼ 1971년), 중·남부 플로리다 홍수예방사업이 추진되었는데 인류 역사상 최대의 공사이자 최악의 파괴행위라고 불리워진다. 추진기관은 남부 플로리다 수질관리기구, 미 육군공병단이었다.
사업내용은 총 연장 3,000㎞의 운하 및 제방설치, 150여개의 크고 작은 홍수조절시설구축과 오키초비호 북쪽에는 목장, 남쪽에는 2,700㎢의 사탕수수 및 오렌지 농장, 해안지역에는 600만명 수용의 도시가 건설되었다. 이러한 대규모 사업의 결과로 에버글레이즈의 절반이상이 원래의 모습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개발로 인해서 에버글레이즈지역의 자연적인 건기와 우기의 순환과정이 교란되는 생태계 변화를 초래, 가뭄이 들고 산불이 발생하고, 습지 160㎢가 없어지면서 야생 동·식물 이 멸종되었는데 황새, 두루미 등의 섭금류 90종이 멸종되었다고 보고 되고 있다.
복원
총 사업기간은 30년으로 준비기간 15년, 복원기간 15년으로 소요예산은 3억7천2백만달러가 소요될것으로 보고 있다. 상류지역의 수위를 높임으로써 채울 물을 확보하는데 9천2백만달러, 물채우기에 2억8천만달러, 수몰지역(276㎢) 매입에 7천만달러가 소요된다고 한다.
복원사업의 내용을 보면 1960년대 치수목적으로 직강화했던 강의 허리부분(약 35㎞)을 원래의 모습대로 사행화(蛇行化) 하고, 강 주변에 약 100㎢의 범람원(습지)지역을 형성하는 것으로 진행되며 1998년부터 물 채우기 작업이 시작되었다. 사업은 1983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5년간의 연구조사를 실시, 1990년에 복원계획을 확정하였으며 1993년 가을, 300m 길이의 시범복원구간이 완료되었다. 이러한 복원사업을 통해 에버글레이즈는 대략 320여종에 이르는 야생동·식물의 낙원이 될 자연습지로의 복원을 예상할수 있다.
생태관광
플로리다주 남부지역의 늪지대에 자리잡은 에버글레이즈 국립공원(140만 에이커)은 건기와 우기로 계절이 나뉘는데 건기는 야생동물이 활동하기 좋은 계절이며, 조류관찰을 위한 관광객이 찾아오는 시기이다. 그러나 우기에는 늪지대의 수위가 높아져서 안전지대나 내륙으로 동물들이 이동한다. 이곳에서 서식하는 야생동물은 플라맹고, 학, 저어새, 왜가리, 악어 등이 있다고 한다. 민물고기가 많아 조류가 서식하기에 적합하며, 낚시도 가능하지만 면허소지자에 한해서 허가하고 있다.
60㎞에 달하는 에버글래이즈 국립공원에는 여러곳의 관광루트가 있는데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Shark River
Shark River지역에는 75피트나 되는 Mangrove나무들이 자라고 있으며, 강변에는 많은 조개들이 있다. 또한 Saw Grass가 많은데 Saw Grass의 뾰족한 끝부분은 맨살을 벨수 있고 얇은 옷의 천도 뚫을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Everglades 지역
Everglades 지역은 매너티(Manatee : 해우)와 미국산 희귀 악어들의 몇 안되는 은신처이며, 6백여종에 달하는 어류, 악어, 뱀과 바다거북이 등을 볼 수 있다. 돌고래도 간혹 관찰된다. 낚시가 가능하나 면허소지자만 가능하며, 어획량도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
·Gumbo Limbo trail
Royal Palm Interpretive 지역에서 널빤지를 깐 산책길을 따라 시작되어 정글지대를 일주하는 코스(약1km)이며 산책로의 중간중간에 도마뱀, 달팽이, 너구리를 관찰할 수 있다. 근처에는 Flamingo Visitor Center가 있다. 이곳에는 마리나, 모텔, 야영장, 간이숙박시설등이 있고, 근처에 플라밍고 관찰전망대가 있으며, 이곳에서 망원경을 통해 왜가리, 백로, 저어새등의 조류를 관찰할 수 있다.
·Anhinga Trail
Royal Palm Interpretive Center에서 시작되는 널빤지를 깐 산책길이다. 무성한 늪지대 수로 사이로 가설한 일주다리이며 다리 위를 지나면서 악어, 학, 왜가리, 뱀새(Anhinga), 실고기를 내려다 볼 수 있으며, 한겨울에도 관찰이 가능하다.
이상으로 미국의 에버글레이즈 국립공원에 대해서 에버글레이즈 습지의 파괴와 그의 복원과 생태관광지로의 활용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미국의 경우 많은 간석지가 개척되어 목초지로 변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은 연안역 통합관리계획의 수립 및 실행을 통한 습지 자원의 현명한 이용, 용도 지정을 통한 습지 자원의 보호등을 통해 습지 내에서의 주거지 개발을 금지하고 사냥, 자전거 타기, 하이킹 등 습지환경을 변화시키지 않는 활동만 허가하고 있다. 또한 땅 매입을 통한 습지 자원의 보호도 이루어지고 있는데, 민간 차원에서 환경단체, 연안역관리위원회, 연안자원보호재단을 구성하고 기금을 마련하여중요한 습지를 매입해 관리하고 있다.
한편 경제적 동기를 활용한 습지자원의 보호노력도 있다. 즉 습지를 기부하는 자에게 세금 감면 혜택을 주거나 습지 및 연안 환경의 보전을위해 활동하는 단체에 유리한 세금 혜택을 주는 연방세금 정책을 수립함으로써 경제적 동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위의 사례를 참고하여 우리에게도 적절한 대책의 수립을 통한 습지의 보존이 이루어져야 하고 습지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생명의 다양성을 생태관광을 통하여 시민들에게 습지의 소중함을 알려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직 파괴되지 않은 습지는 가능한 보존하여 습지 특유의 생태환경이 유지되어 환경에 도움을 줄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할 것이다. 또한 생태관광지를 개발하고 운용함에 있어서도 생태계에 끼치는 영향을 최소한도로 줄이도록 전문가와 지역주민과 여러 환경단체들이 함께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의 어린이들이 생태관광을 통해서 생명의 중요성과 환경에 대한 관심을 기울일수 있도록 한다면 우리의 자연 또한 지켜지고 복원될수 있을 것이다. 생태관광을 통해서 환경의 중요성을 항상 깨달을 수만 있어도 생태관광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환경에 대해서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생태관광은 우리에게 저항감없이 환경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Water and Environmental LandscapeⅡ -wetland
김세천 Kim, Sei Cheon · 전북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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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조경 이론과 설계의 지형(8) - 조경+도시 : 생성과 진화의 장
몇 가지 사례와 설계 전략
우리는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으로 분류될 수 있는 프로젝트들을 이미 건설되어 있는 부지나 오픈 스페이스에 대한 재개발, 도시 인프라스트럭처 계획, 기존의 도시 맥락을 다시 연결하고 통합하는 계획 등에서 목격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형태 중심적 설계보다는 도시의 잠재력을 개발하고 현실화할 수 있는 전략을 구축하는 과정에 더 큰 비중이 주어지기 마련이다.
유토피아적 이상에 매몰된 모더니즘 도시계획과 건축의 한계를 직시하고 도시란 변화하는 곳이며 그 속의 삶 또한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에 확고한 질서를 통해 도시를 통제하려는 시도는 근본적인 모순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비판을 바탕으로 대안의 좌표를 마련하고 있는 참조. Rem Koolhaas, "Tabula Rasa Revisited," in S, M, L, XL (New York: The Monacelli Press, 1995), pp.1091-1135.
렘 쿨하스의 "새로운 어바니즘"은, 건축과 조경과 어바니즘의 영역을 넘나들며 도시의 혼돈과 불확정성을 수용하는 동시에 미래의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전략을 선보여 왔다. 렘 쿨하스의 도시관과 디자인 전략은 우리에게 이미 잘 알려진 제출안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다. 그는 형태의 구성이나 재현보다는 공간의 전략적 조직에 비중을 두고 무수히 변화될 프로그램을 수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계획했는데, 상호 민감하게 반응하고 적응될 수 있는 네 개의 전략적 층위(layer)를 통해 "사회적 도구로서의 경관" 골격을 짜고자 했던 것이다.
20세기말의 도시 건축과 조경에 큰 여파를 가져 온 라빌레뜨파크의 유연한(flexible) 계획은 예컨대 프랑스 에서 한층 더 정교하게 발전한다. 이 프로젝트는 건물을 도(figure)에, 오픈 스페이스를 지(ground)에 대응시키는 관례적인 접근 방식을 뒤바꿈으로써 건물의 계획과 배치에 집중하기보다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지닌 빈 공간(void)의 가능성에 초점을 둔 것으로 유명하다. 예측 불가능한 사건의 발생과 진화를 담을 수 있는 미결정의 공간을 마련하는 일은 공간의 잠재력을 통합하고 미래의 불확실한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최우선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렘 쿨하스의 전략적 디자인은 최근의 토론토 우승작인 에서 절정에 달한다. 상세한 내용은 다음 졸고를 참조할 것. 배정한, "도시 공원 설계의 새로운 전략: 다운스뷰파크 국제설계경기 우승작 를 중심으로," {한국조경학회 추계 학술논문발표회 논문집}, 2001년 10월, pp.125-129.
▲ What ever happened to Urbanism?(자료:www.spaceimaging.com/attack_gallery.html)
건축, 조경, 어바니즘의 하이브리드를 실천하고 있는 네덜란드의 디자인 그룹 MVRDV는 이동성, 순간성, 일시성으로 규정되는 현대 도시를 "가벼운 어바니즘(Light Urbanism)"이라는 개념적 골격에 놓고 다양한 실험을 전개하고 있다. 밀도와 관계와 흐름에 주목하는 MVRDV의 도시 프로젝트들은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의 이념을 구체적인 언어를 통해 예증해 주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Datascape과 FARMAX로 대변되는 MVRDV의 설계 전략에 대해서는 보다 넓은 지면을 통한 깊이 있는 분석이 요구된다. 다음을 참조할 것. MVRDV, FARMAX (Rotterdam: 010 Publishers, 1998) ; MVRDV, Meta City/Data Town (Rotterdam: 010 Publishers, 1999) ; www.archined.nl/mvrdv.html
현대 메트로폴리스의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인 이동성과 접근성은 도로와 같은 인프라스트럭처에 역동적인 집합과 분산의 기능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통 인프라스트럭처의 통합적 설계는 원활한 도시 기능 형성과 전략적 경관 구축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즉 교통과 수송의 인프라스트럭처는 새로운 네트워크와 관계를 창조할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이자 도시의 지배적인 경관 요소인 것이다. 그러나 교통 기능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도로는 그물처럼 복잡하게 얽힌 매우 중요한 도시 인프라스트럭처임에도 불구하고 철도 역사나 공항에 비해 디자인의 차원에서는 간과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스페인 건축가 요셉 안토니오 아세비요와 베르나르도 데 솔라가 설계한 바르셀로나의 는 도로를 정주의 구성 요소로, 건축과 조경의 영역으로 복권시킨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참조. Francisco Asensio Cerver, Urbanismo 3: Road Systems(Barcelona: Axis Books, 1999), pp.11-28.
이 도로의 설계는 자동차의 최대 통과보다는 주변 교통 네트워크와의 적절한 연결을 통한 최대의 집합·분산 능력에 초점을 두고 진행되었다. 또한 도로 설계와 인근 지역에 새로운 오픈 스페이스를 공급하는 프로그램을 결합시켰다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특히 인터체인지 주변의 도시 공간을 새로운 유형의 경관 인프라스트럭처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공원과 레크리에이션 지역을 도로와 상호 결합시켜 설계함으로써 공공성과 접근성의 향상을 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설계의 전략적 효과를 독해할 필요가 있다.
네덜란드 조경의 젊은 기수 아드리안 구즈가 이끄는 West8은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을 조경의 차원에서 실천할 수 있는 디자인 전략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큰 스케일을 다루는 전략적 사고에 탁월한 아드리안 구즈는 주어진 부지의 도시적 문제를 정확히 해석함으로써 시간의 변화와 사건의 생성을 고려하는 디자인을 발표해 왔다. 도시 내의 공간을 다룰 경우, 구즈는 과도한 프로그램으로 공간을 채우기보다는 비워두기(emptiness)의 전략을 채택하곤 한다. 렘 쿨하스의 빈 공간(void) 개념을 연상시키는 구즈의 이러한 전략은, 도시인(urbanite)은 새로운 경관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장소를 창출해 낼 수 있다는 신념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아주 단순한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사건과 행위를 수용하고 생성시킬 수 있는 세심한 디자인이 도출된다. 이 연재의 다른 회를 통해 이미 소개한 바 있는 로텔담 이 그 단적인 예이다. 지하주차장 위의 그리 크지 않은 광장, 경량의 금속 패널과 목재로 바닥을 처리한 이 극장 앞 마당 위엔 돛대를 연상시키는 크레인 모양의 조명시설 4개―동전을 투입하면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다―외에는 별다른 시설이나 프로그램이 없다. 그러나 이용자들은 스스로 펜스나 천막을 치기도 하고 지붕을 씌우기도 하며 다양한 이벤트를 벌이기도 한다. 최근 일제 자동차 인피니티(Infiniti)의 상업광고 배경으로 전파를 타고 있기도 한 이 쇼우부르흐광장은 매일 매일 새로운 광장으로 다시 태어나며 하루 중에도 여러 다른 얼굴로 변신하고 있다.
이론가이자 건축가인 알렉스 월은 조경과 어바니즘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양상의 도시 프로젝트들에서 몇 가지 생산적인 설계 전략을 도출하고 있다. 참조. Alex Wall, "Programming the Urban Surface," pp.244-246.
두껍게 하기(thickening), 접기(folding), 새로운 재료, 프로그램 없는 이용(nonprogrammed use), 일시성(impermanence), 이동(movement) 등이 그러한 전략이다. 위에서 간략히 짚어 본 바와 같이 쇼우부르흐광장은 다층화된 표면이 만들어내는 "두껍게 하기" 전략을 통해 배수, 구조, 설비 등의 테크놀러지 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좁은 광장의 사용 면적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램프, 다리 등의 장치를 통한 다층의 공간 형성과 그에 따른 이용자의 이동은 제한적인 공간을 두껍게 해 줄 수 있는 동시에 연속성과 생동감을 보장해 줄 수 있다. "접기" 전략은 표면을 자르고 싸고 접음으로써 내부와 외부 공간을 연결해 준다. 또한 다양한 레벨로 넘실거리며 겹쳐지는 디자인을 통해 용도별로 공간을 분리해 온 전통적인 방식보다 훨씬 더 유기적으로 이동의 흐름을 조절하고 결합시킬 수 있는 전략이다. 이 글에서 사례로 다루지는 않은 FOA(포린 오피스 아키텍트)의 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다음을 참조할 것. Foreign Office Architects, "Yokohama Port Terminal Competition," AA Files 29, 1995, pp.17-21.
전통적으로 도시 공간에서 선호되어 왔던 재료 외에, 고무 타이어, 목재, 경량 금속, 각종 합성 소재 등 각종 "새로운 재료"는 공원과 같은 도시 공간의 경계를 확장하고 새로운 디자인을 가능하게 하는 매우 현실적인 촉매제가 될 수 있다. 주어진 표면을 각종 시설과 프로그램으로 제어하기보다는 다양한 기능이 생성될 수 있도록 열어두는 전략인 "프로그램 없는 이용"은 일상적 삶의 양상에 충실한 설계 언어가 될 수 있다. 렘 쿨하스의 "빈 공간" 개념이나 아드리안 구즈의 "비워두기" 설계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불안정성과 가변성으로 대표되는 도시 공간에 "일시성"의 전략을 대입하는 방식은 지극히 현실적인 방법이자 미래의 요구에 탄력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골격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동"을 고려하는 전략은 이동성의 증가로 대변되는 현대 도시의 역동적 삶을 반영할 수 있는 장치이다. 21세기의 도시 프로젝트에서 도로와 같은 이동 인프라스트럭처를 재편하고 디자인하는 일은 가장 근본적인 과제의 하나로 부각될 전망이다.
CODA: What ever happened to Urbanism?
렘 쿨하스가 던진 이 난제에 우리는 어떤 대답을 마련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래성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쓸어가 버린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다" Rem Koolhaas, "What Ever Happened to Urbanism?" in S, M, L, XL, p.971.는 그의 은유에 우리는 어떤 대응을 할 수 있을까? "What ever happened to Urbanism?" 미래를 설계하는 이 시대의 조경가에게 숙고를 요청하는 물음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도시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다. 우리의 삶에 허락된 마지막 남은 일상의 상황이자 조건이다. 도시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조경, 이것은 너무도 평범한 화두라는 이유로 조경가들이 외면해 왔던 조경의 근본적인 역할이다.
그러므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은 도시와 조경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고 경관의 진화적·생성적 차원을 재발견하는 이론적 과제이자 실천적 지향점이다. 경관의 장식을 향해 질주해 온 화장술적 조경의 대안적 좌표이다. 자연이라는 이름의 무언가를 살리는 구원자이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억압해 온 도덕주의적 조경의 탈출구다. 그리고 건축과 조경과 어바니즘의 경계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전해 주는 지극히 현실적인 선언이다. 우리의 도시와 경관이 마치 월드와이드웹(www)처럼 복잡한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진화해가듯,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의 이념을 실천하는 장 또한 그물처럼 뒤엉킨 다양한 영역의 네트워크를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 이 글의 불완전한 마침표이다♠
Theory and Critical Practice in Contemporary Landscape Design(8):
An Emerging Field of the Landscape Urbanism
배정한 Jeong-Hann Pae
단국대·서울시립대·숙명여대 강사, 조경학 박사
※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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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공간에 대한 연구
공공공간에 대한 연구 - by William Thompsn공공 공간은 최근 미국 도시에서 해결해야하는 새로운 과제거리가 되고 있다. 경제적으로 점점 어려워지는 공원관리과(parks department)는 공공이 소유한 대지에 대한 재원과 운영을 관리위원회(conservancy)나 다른 비영리 단체에게 넘겨주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개인 개발업자들은 공공에게 개방된 광장이나 아케이드와 같은 개인이 소유한 공공 공간을 제공해주고 있다.(물론 그 대가로 정부로부터 특권을 부여받는다). 그렇다면 소유자 개인의 요구에 맞게 설계되고 관리되고 있는 이러한 공간[개인에 의해 제공된 공공 공간]이 정말로 공공 공간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기능을 충족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또한 공공 공원이 공공 기관에 의해 자금을 받거나 관리되지 않는다면 이것이 정말로 공적(public)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지난 5월, LA포럼이 보스턴에서 소집되었다. Boston Architectural Center에서 주요 이슈에 대해 심도있는 토론을 진행한 후, 참석자들은 빽빽한 보스톤 도심을 직접 걸어다니면서 공적인 것에서 개인적인 것으로 변하는 스펙트럼 상에 있는 몇몇 중요한 부지들을 평가하였다. 토론의 초점을 집중시키기 위하여 본 포럼은 Boston Common과 같은 대규모 도시 공원들은 제외하였다. Copley Square Harvard의 계획과 교수인 Jerold Kayden은 포럼에서 도시의 공공공간의 역할, 2가지를 제안하고 있다. 첫 번째는 도시의 거주자, 근로자, 그리고 관광객들의 즐거움을 배가시킬 수 있는 공공 장소를 제공하는 분명하고 기능적인 역할이다. 두 번째는 Central Park에서 Olmsted가 주창하였던 목적, 즉 빈부, 나이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민주적인 사회를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다. Kayden는 많은 대규모 도시 공원들은 이러한 목적들, 특히 두 번째 목적을 어느 정도 충족시키고 있지만 이번 포럼에서 다루고 있는 소규모 도심 공원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첫번째 방문지인 Copley Square는 1.8에이커의 공공 공원으로, Boston Parks와 Recreation Department가 소유하고 있다. Kayden이 말하는 공적인 도시공간에서 사적인 공간으로 변하는 스펙트럼 상에서 보면 Copley Square는 철저히 공공이 소유한 공공 공간이다. 잘 차려입은 회사원들이 점심을 먹기도 하고, 대학생들이 다음 수업을 위해 책을 훑어보기도 하며, 노숙자처럼 보이는 초라함 차림새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벤치에 누워있기도 하다. 이곳의 이용자들 사이에서는 통일성이 전혀 없지만 모두가 편안하게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원의 디자인은 일정한 형태의 이용을 요구하지 않는다. 걷고, 안고, 어슬렁거리고, 심지어는 누울 수 있는 공간-잔디밭, 포장된 공간, 둘레에 앉을 수 있는 분수, 수많은 벤치, 그늘이 있는 나무-들이 충분하다. Copley Square는 Kayden이 언급한 공공 공간의 2가지 목적을 모두 충족시키고 있다고 평가받으면서 참석자들에게 좋은 점수를 받았다. John Hancock Square John Hancock Square는 Copley Square 근처에 위치하였지만 성격이 매우 다른, 개인이 소유한 공공 공간이다. John Hancock 보험 회사 건물 정면에 설계된 광장으로, 거리에서 통과가 편리하도록 대중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Copley Square와는 대조적으로 매우 드라마틱하다. 광장은 매우 좋은 돌과 다른 재료들로 멋지게 만들어졌지만 사람들이 머물 수 있도록 매력적이지는 못하다. 그늘도 거의 없으며 앉아 있을만한 편안한 장소도, 건물 사이에서 부는 바람을 피해갈 어떠한 시설도 없다. Post Office Square 또다른 개인소유의 공공 공간인 Post Office Square는 John Hancock과는 매우 다르다. 점심을 먹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사업상 중요한 미팅을 위해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곳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도 다른 곳과 달라, 주로 경제가 집중되어 있는 업무지구이다. 따라서 공간은 이곳을 둘러싸고 있는 호화로운 타워와 호텔들을 잘 반영하고 있다. 공원의 이용자들도 대개가 좋은 양복을 입고 있다. 이러한 매혹적이고 부담없는 공원이 실제로 개인 소유의 것이라는 것은 매우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날 오후에도 공원은 간단히 식사를 하거나 쉬고 있는 사람들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Boston의 조경가이자 사회활동가인 Shirely Kressel은 Post Office Square는 일부 사람들의 즐거움과 사회적 경험을 충족시키기 때문에 민주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Kayden은 이 공간 자체가 우체국 직원들과 우체국을 이용하는 사람들, 그리고 주변의 호텔투수객들을 위해 설계된 것으로, 이용자가 한정되었다고 해서 비민주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반박하였다. Kressel을 제외한 대부분의 포럼 참석자들은 이 공간이 공공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비교적 잘 충족시키고 있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100 Federal Street Post Office Square에서 길을 건너편 고층 건물 정면에는 세심하게 디자인된 광장은 건물주가 대중들에게 공개한 개인 소유의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더 높은 층수를 건축하기 위하여 시로부터 받은 특권에 대한 대가로 만들어진 것이다. 광장은 대리석과 다른 최고의 재료들로 멋지게 만들어졌지만 포럼은 이것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다. Basley는 이것에 대하여 "내가 느끼기에 이곳은 공공적이다. 이곳은 개인적인 고립된 공간으로는 좋지만 대중들을 초대하지 못하는 작은 공간들로 나누어져 있다."라고 평하였다. 실제로 광장의 많은 이용자들이 금연 건물에서 나온 흡연자들이었다. Kressel은 이곳을 더 큰 맥락에서 비판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개인 소유의 광장을 유일한 공공 공간으로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다음 세대들은 진정한 의미의 공공 공간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City Hall Plaza Boston 중심을 가로지는 도보 여행은"Brutalist" 양식의 건물이 서있는 Hall Plaza로 끝을 맺었다. 참석자들의 논평들로부터 판단해보면 이 광장은 도시 설계의 실패작처럼 보인다. 이곳을 걸어가는 보행자들은 위축되고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광장 한쪽 가로에 있는 최근 지어진 아케이드는 이 거대하고 특징없는 공간의 무미건조함을 더욱 부각시켜주고 있다. City Hall plaza는 공공 공간으로서는 비판받고 있다. 그러나 시장은 이것을 복구해보고자 새로운 계획에 대한 연구에 자금을 공급하고 있다. City Hall plaza는 공공이 소유한 공공 공간이라는 것의 궁색한 사례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미국 도시에서 공공 공간과 사적 공간이 복잡하게 혼합된 공간의 실제이기도 하다.♧ 2001년 8월호 (이상민 · 다산이앤씨 조경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