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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남산
    나는 듯이 안압지에 내려앉았다. 안압지에는 언제 가 봐도 사람들이 많다. 복원해 놓은 전각들을 둘러둘러 호안을 따라 한바퀴 돌면서 기념촬영도 하고 호젓하게 데이트도 하곤 한다. 대개 한바퀴 도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더 돌아보기에는 이미 다 본 것 같고, 그냥 나가자니 뭔가 아쉬움이 남고. 대개들 약간의 미련을 남겨 놓은 듯 머뭇거리며 발길을 돌린다. 만약 한 바퀴 정도 더 돌면 어떻게 될까? 한바퀴는 그냥 보통 관람하듯 돌고 두 바퀴 째는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돌아보면 재미가 한층 더 할 것이다. 해목령에서 북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안압지를 만났으니 안압지에서도 해목령을 한번 살펴볼 만한 일이 아닐까? 정작 안압지에서 남산이나 해목령을 눈으로 확인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반월성의 높은 언덕과 숲에 가려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하다가 곡선 호안의 크고 작은 돌출부 중 한 곳에서 어렵사리 해목령을 만난다. 나침판을 들여대 보니 정확히 남북방향을 가리킨다. 해목령에서 북쪽으로 바라보이던 안압지 방향으로의 시선은 곧바로 이리로 달려온 것이다. 안압지를 일주하면서 이렇듯 미세한 계획적인 구성이 눈에 여럿 띄는데, 이러한 일들은 실제 조원의 과정에서 시공 상의 편리함과 같은 기준점이나 기준 선으로 설정되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 되는 것들이다. 역사물을 바라보는 눈은 이렇듯 디자인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크고 작은 제반 과정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제반 사항은 결국 오늘날 현대조경을 위한 좋은 착안이 되기도 할 것이다. 여하튼 남북 방향으로 한 선상에 놓인 안압지와 해목령. 일단은, 참으로 묘한 우연인가 싶다. 만약 이러한 시선축이 안압지를 조성하던 당시 남북방향으로 설정해 두었을지 모르는 축을 발견한 것이라고 한다면, 동서방향의 축의 흔적도 확인될 수 있는 일이다. 말을 바꾸면, 혹 동서방향으로 그 비슷한 우연한 현상이 발견되어, 우연과 우연이 서로 만나는 경우가 발생되면 이는 필연이 되어 간다. 혹시나 해서 동서방향으로 좌우를 살피며 어림잡아 본다. 길게 계곡을 이룬 호안부 일대의 돌출된 부분과 그 끝부분에 놓여 있는 바위들을 기준으로 눈가늠을 해 보면서, 만약 동서축이 있다면 이들 간에 엮여 있겠거니 싶은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다. 언젠가 측량기를 가지고 와서 확인작업을 해 보아야 할 일이지만, 우선 그런 정도로 짐작해 놓고 본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자연이 준 아름다운 선물
    e-매거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독일 슈베찡엔의 로코코 정원
    슈베찡엔은 우리에게 “황태자의 첫사랑”으로 잘 알려진 독일의 옛 도시인 하이델베르그로부터 서쪽으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16세기의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풍성한 정원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나 정원 발달사에 기여한 공로는 그리 크지가 않다고 할 수 있다. 독일에 있는 역사적인 정원들은 독일 고유의 양식을 가진 것은 없고 영국, 이태리, 프랑스 등으로부터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원 양식을 전수받은 다른 유럽의 여러나라들을 경탄하게 하는 많은 아름다운 정원을 가지고 있다. 슈베찡엔의 정원도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런 정원 중의 하나이다. 슈베찡엔 궁전과 정원의 역사는 1350년경 해자(垓字)를 두른 성에서 시작된 것으로 여러 역사물에서 밝혀지고 있다. 그 후, 16세기에 팔츠지방의 선제후에 의해 사냥을 위한 성으로 개조되면서 이미 정원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30년 전쟁시 상당부분이 파괴된 후 18세기에 이르러 팔츠지방의 선제후 Karl Theodor가 당시 팔츠지방의 주정부가 있었던 부근 만하임의 여름 별장으로 이용하기 위해 많은 부분을 보수하거나 새로 조성하여 현재의 기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궁전건축은 당시 만하임과의 연결 관계를 고려해 만하임 궁전의 외관을 많이 흉내내었다고 한다. 슈베찡엔 궁전과 정원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Karl Theodor의 의도는 옛 사냥성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정원과 궁전을 새롭게 구성하려는데 있었다. 그 후 본격적인 정원공사와 궁전 전체를 조화시키기 위해 Karl Theodor는 프랑스에서 건축가 Nicolas de Pigage를 초청해 정원 총감독에 임명한다. 1761년부터 시행된 Pigage에 의한 슈베찡엔 정원의 두 번째 단계 공사는 원래 1753년 독일의 궁중 조경가인 Ludwing Petri가 마련한 기본 계획에 근거해 이루어졌다. 당시 Karl Theodor는 Pigage에게 당시 유행이던 프랑스식 로코코 정원의 양식과 기타 여러 형식의 새로운 아이디어의 정원이 함께 조화를 이루기를 원했는데 Pigage는 규모가 큰 정원의 전체적인 연결 시스템을 16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조경가인 Le Norte의 방법을 인용해 역사적인 것과 새로운 형식이 잘 조화를 이룬 형태의 정원으로 조성했다. 매년 5월부터 6월까지 음악제가 열리는 정원 내의 아름다운 로코코양식의 극장과 목욕장 등도 Pigage가 설계한 건물이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대지조형
    전통조경을 위한 Earthwork 지난번 이야기에서 전통조경을 위해 아주 세심한 경관 읽기와 새로운 개발에 따른 신중한 Earthwork의 필요성을 이야기한 바가 있었다. 조경설계를 하면서 도면에 등고선을 그려가며 마운딩 처리를 하곤 하지만, 등고선을 그려가며 아주 자연스러운 지형을 만들어 내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는 일이다. 보다 자연스럽고 변화무쌍한 지형을 만들어 가는 좋은 방법은 현장에서 직접 조형작업을 하는 것이지만 그건 특별한 작업 여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좀처럼 그럴 수 있는 기회를 만날 수도 없다. 설사 그럴 기회를 만났다 하더라도, 생각과는 달리 지형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기에 등고선을 그려가는 일보다 더 힘든 일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형설계를 해 갈 것인가? 지형의 처리가 매우 자연스러운 우리의 전통조경 기법으로부터 Earthwork에 대해 배울 수 있다면 참 좋은 일이 아닐까 싶지만, 매우 아쉽게도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한, 전통조경에서는 어떻게 지형처리를 해 갔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도, 그에 관한 연구도 별로 알려진 바가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우리의 전통조경에서 인공적으로 지형을 만들어 가거나 조작한 경우로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있는 그대로를 그대로 두어 최소한의 인공을 가미한 것이라 하니 결국 그럴 수밖에도 없지 않겠나 싶다.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전통조경의 기법으로부터 Earthwork의 모델을 삼아 전통을 계승할 기회도 애초에 차단되어 버린다. 전통조경에서 살펴 본 Earthwork 어떻게든 Earthwork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터이니 그 해법(?)을 하나쯤 제안해야 할 일인가 싶다. 어느 산이든 상관없다. 힘겹게 산 정상에 올라 발 아래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산과 들판을 바라본다고 생각해 보자. 그 중에서 특히 마음에 드는 모습을 뚝 떼어다 내 정원에다 옮겨 놓아 본다거나 아니면 공원의 한 부분을 그 형상으로 재현시켜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고 치자. 말이 될 것도 같고 말이 안 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만약 그게 어떻게든 가능하다고 친다면 한번쯤 시도해 볼 만한 일이 아닐까 싶다. 조금 오래 전의 일이지만, 경주의 남산에 올라 선도산 일대의 경관을 내려다보면서 겹겹이 겹쳐 있는 크고 작은 산과 능선의 아름다운 실루엣을 어느 사이트에 통째로 옮겨 놓는 일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얼핏 생각하면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할까 싶지만, 생각을 바꾸어 보면 그게 그리 불가능할 일도 아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안압지의 무산십이봉이라 일컫는 Earthwork는 남산에서 바라본 선도산 일대의 경관이기 때문이다. 혹은 그게 무슨 밑도 끝도 없는 뚱딴지같은 이야기인가 생각할 수도 있기에, 우선은 그렇게 가정해 놓고 보아도 좋다. 여하튼 나는 경주 남산에 올라 간 그 즈음, 이미 여러 해 동안 경주의 안압지를 다루고 있던 참이었다. 필요한 만큼의 결과를 도출하기까지는 한 7-8년 정도의 상당히 오랜 세월이 필요했었는데, 물론 그 대부분의 시간은 착각과 시행착오, 그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반복된 허송세월이었다. 오늘 이야기는 그 과정에서 있었던 Earthwork, 즉 선도산 일대의 파노라마를 모형으로 옮겨오는 작업에 관한 부분이다. 정 기 호 Jung, Ki Ho·성균관대학교 건축·조경 및 토목공학부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이란 이스파한(2)
    - 회교의 화려한 정원문화를 꽃피운 정원도시 - 이란(Iran)의 중앙부에 입지한 이스파한(Isfahan)은 1501년에 수립된 사파비(Safavid)왕조의 압바스(Abbas, 재위 1587-1629) 1세에 의해 1597년에 수도가 되면서 역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이스파한은 현 수도인 테헤란(Teheran)으로 수도가 옮겨질 때까지 200여 년간 이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이었다. 이슬람(Islam)문화의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압바스 1세에 의해 축조된 계획도시 이스파한의 개념은 고대 페르시아(Persia)제국이 꿈꿨던 천국과 코란(Koran)에 묘사된 낙원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삶의 쉼터이자 영혼의 안식처로서 정원은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천국과 낙원을 의미하는 여러 작은 정원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면서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정원으로 전개되었다. 이스파한이 “회교(回敎)의 화려한 정원문화를 꽃피운 정원도시(庭園都市)”로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도시의 중앙대로인 남북방향의 ‘차하르 바그로(Chahar Bagh Avenue)’는 차량이 통행하는 주간선도로(主幹線道路)로서의 역할과 함께 도시의 남북을 연결하는 거대한 녹지축(綠地軸)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스케일(Scale)상의 차이는 있지만 서울과 비교하면, 세종로(世宗路),태평로(太平路),남대문(南大門),한강로(漢江路),한강대교(漢江大橋)를 잇는 길이 차하르 바그로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한강은 이스파한의 젖줄이자 도시를 동서로 가르는 ‘자얀데(Zayandeh)강’에, 한강대교는 아름다운 아치(Arch)형상의 33개 교각(橋脚)이 인상적인 ‘시오세(Si-o-se)다리’에 해당한다. 세종로가 조선왕조의 경복궁(景福宮)에서 시작하듯, 차하르 바그로의 북쪽 끝은 이스파한의 찬란한 시대를 열었던 사파비왕조의 궁궐이 있던 곳이다. 당시의 영화(榮華)를 과시했던 300여 개의 건물들은 대부분 그 흔적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리고 지금은 숲이 우거진 공원으로 개방되어 있다. 공원의 중앙에는 ‘하스트 베헤스트(Hasht Behesht)’라 불리는 2층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1669년 술레이만(Suleiman)의 거주처로 만들어졌는데, 궁정건물로는 비교적 작은 건물이지만 보존상태는 가장 양호한 건물이다. ‘하스트(Hasht)’는 ‘8(Eight)’을 ‘베헤스트(Behesht)’는 ‘낙원(Paradise)’을 뜻하는데, 건물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사방대칭의 건축구조를 보이고 있다. 하스트 베헤스트 인근에는 조경서적에 그 이름이 빠지지 않는 유명한 ‘체헬 소툰(Chehel Sotun)’이 자리잡고 있다. 그 위치는 차하르 바그로와 이맘광장(Meidan-e-Imam)의 중간이 된다. 압바스 2세가 건설했다는 체헬 소툰의 착공시기는 정확치 않으나, 1647년에 완공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건물은 압바스 2세가 신하나 외국사신들을 접견하고 향연을 베풀던 장소로, 경복궁으로 치면 경회루(慶會樓)에 해당하는 곳이다. 지금은 페르시아양식의 진귀한 그림과 도자기를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건물의 이름에서 ‘체헬(Chehel)’은 ‘40(Forty)’을 ‘소툰(Sotun)’은 ‘기둥(Column)’을 뜻하므로, ‘체헬 소툰(Chehel Sotun)’은 “40개의 기둥이 있는 건물” 즉 ‘40주궁(40柱宮, Pavilion with Forty Columns)’으로 번역된다. 체헬 소툰의 입구는 테라스(Terrace)를 갖는 홀(Hall)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입구는 20개에 이르는 우아한 목재 기둥들이 지붕을 떠받고 있어, 열린 느낌을 표출하는 공간을 이루고 있다. 목재 기둥은 3줄로 6개씩 18개에다 끝줄의 입구에 있는 2개를 합쳐 모두 20개가 된다. 테라스 앞으로는 장방형을 보이는 잔잔한 연못이 펼쳐져 있어, 이 20개의 기둥을 그대로 수면에 드리우게 한다. 이를 거울효과(Mirror Effect)라 하던가? 이로써 40개의 기둥을 갖는 건물이 만들어지게 되고, 40주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기둥은 플라타너스(Platanus, Plane Tree)를 통으로 자르고 정교하게 조각해 만들었는데, 당시 체나르(Chenar)로 불렸던 플라타너스는 차하르 바그로를 비롯한 이슬람의 정원에서 가로수나 녹음수로 사용된 대표적인 수종이었다. 강 철 기 Kang, Cheol Gi 경상대학교 산림과학부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색 그리고 일획첨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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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과 예술의 섬, 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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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시환경과 공공미술의 경계에서 - [3] 미술의 영원한 오브제 ; 自然
    재현이 지나치면 자연 앞에 무릎을 꿇고, 표현이 지나치면 공허함이 남는다. 선사시대 동굴 벽화로부터 2004년, 현대미술의 [지금]까지 수많은 작품과 ...ism에도 불구하고 미술의 역사를 일축 하자면 결국 미적 행위의 대상인 自然에 대한 ‘재현(emersion)’과 ‘표현(expression)’이라는, 실천적 태도에서 벗어나 않는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모더니즘 초기는‘감상자’란 요소가, 후기 모더니즘 이후로는 ‘시간’이란 요소가 개입하게 된다. 조형의 요소로서 감상자는 작가와 작품 사이에 중요한 매개체로서 작품은 감상자에 의해서 더욱 완성의 밀도를 갖게 된다. 작가는 감상자의 적극적인 행위를 유도 하거나, 관객들 자체가 작품 제작의 중요한 오브제로서 끝없이 작품과 feedback하는 경우이다. 모더니즘 후기에서 보여 지는 시간성이란 전기모더니즘의 시간성(작품이 움직이는 것과 같은 단순한 동적 작업들)이 아니라, 자라거나 늙거나 죽는, 좀 과장하자면 심지어는 작품 스스로 생각하는, 마치 자연의 시간과 같이 작품에 대하여 물리적 생명력을 부여 하는 것이다. 물론 한 작가의 창작에 대한 욕구와, 천부적 재능과, 세상에 단절된 듯 소외된 고뇌 끝에 탄생한 작품은 그 자체로서도 무한한 생명력을 갖는다. 시간을 초월한 감동을 주며, 공간을 뛰어넘고 소통 될 수 있는 그림문자가 된다. 작가가 세상을 떠날 지라도, 세기가 바뀔지라도 작품은 [폐기] 될지언정 스스로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작품이란 물성이 갖는 생명력은 불사신 같아서 오히려 생물의 생명력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최근 현대미술에 있어 말하는 생명력은 물리적인 그것에 가깝다. 즉 자연처럼 발생해서 자연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계류의 작업들은 계속적으로, 사람을 포함한 자연과 교감하면서 변형되고 소멸된다. 또한 이 계류의 대부분의 작가들은 대지예술가들처럼 자연환경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인공에 대해, 작위적 행위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가장 최소한으로 제한하며, 자신의 작품을 대대손손 남기고자 하는 욕구 또한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미술시장의 유통도 사뭇 다르며, collector들도 작품의 영구적 소장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Rear Living Sculpture & Plant Art 작품에 생명력을 부여 하기위한 한 방법으로 그들은 화학염료대신 곰팡이와 이끼를 사용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은 먹이가 공급될 때 까지 계속적으로 작품에 기생하고, 이에 작품의 표면은 시간의 추이에 따라 다양한 자연의 색깔을 보여준다. 또한 그들은 과거 조소작업을 위하여 점소성이 뛰어난 재료로서의 점토를 사용 하는 것 대신에 토양이란 표현에 가까운 유기체로서의 흙을 선택한다. 그러므로 이들의 작품들은 전시장을 마치 깊은 숲 속의 축축한 음지에서 나는 냄새로 가득 채운다. 이 자연이 내뿜는 냄새들은 결코 자연의 일부인 사람에게 역겨움과 유해함을 주는 일은 없을 것이며 오히려 자연의 기운이 온몸에 전이되는 착각마저 들게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새로운 미술운동이 아니다. 1960년대의 대지예술작가들이 가졌던 자연에 대한 태도와 유사한 맥락으로서, 대지미술이 비교적 대규모 프로젝트성의 장대한 스케일로 자연과의 상호작용을 유도하였다면, 198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젊은 작가들이 주축이 된 이 살아있는 예술작품들은 식물의 성장 또는 소멸 등의 변형과정을 통해 자연과의 교류를 시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주는 성과들은 간혹 그들의 의지와는 달리 결과적으로 자연의 과정을 드러내는 방법에 다소 억지스러움을 드러낸다. 무위자연이란 동양적 사상의 견지에서 본다면 자연의 과정을 표현 혹은 재현 하고자 하는 그들의 제스처조차 작위적이고 부질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순들 또한 동료예술가들을 신나게 하는, 다른 예술적 시도들을 가능케 하는 동기이기에 이 살아있는 조각들은 틀림없이 가치롭다. 영국의 조각가 David Nash 또한 그의 일련의 설치작업을 통해 작품에 햇빛, 토양, 물, 기후..그리고 먹이사슬 구조와 같은 요소들을 사용하여, [자연다운 삶의 과정]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공원의 영역확대를 위한 조경의 위상
    e-매거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독일 상수시(Sansoucci) 정원
    상수시 정원과 프리드리히 대왕 상수시 궁전은 베를린에서 남서쪽으로 24km 떨어진 포츠담에 있다. 포츠담은 브란덴부르크 주의 수도이기도 하고, 1945년 ‘포츠담 선언’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지명이다. 포츠담에 가려면 베를린에서 S-bahn 3번이나 7번을 타고 포츠담 슈타트에서 내려 91번이나 96번 트램을 타고 가다 루이젠프라츠에서 내려 약간 걸으면 된다. 총면적 287k㎡에 이르는 큰 규모의 상수시 정원은 워낙 넓어 상수시 공원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곳에 최초로 세워진 건물이 상수시 궁전이고, 이후 확장을 거듭하면서 다른 궁전과 정원 건축물 그리고 부속 정원들이 추가되었다. 흔히 프리드리히 대왕이라 불리는 프리드리히 2세는 1744년 상수시에 여름별궁을 세운다. 그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베를린을 수도로 정하고 1709년 정식으로 프러시아왕국을 선포한 왕이다. 그는 엄격한 전형적인 군인스타일의 왕이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이러한 부친과는 성향이 사뭇 달랐다. 그는 문예에 큰 관심이 있었고, 여성처럼 파마를 했으며 프랑스어를 즐겨 썼다. 남성우월적인 부친의 눈에는 너무 나약한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시를 읽는 것을 보고 지팡이로 때리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친구와 영국으로 도주하려다 발각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왕이 된 후 선정을 베풀었다. 고문제도를 금지시켰고, 베를린의 학사원을 부흥시켰다. 학자와 문인을 상수시 궁전에 초청하여 학문과 예술을 토론하게 하였다. 볼테르가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플루트를 연주하는 상수시의 철학자 제왕으로 불렸다. 그는 이러한 문화취향에도 불구하고 냉철한 정치가였다. 당시 프러시아는 강력한 왕권을 자랑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마리 테레사는 프리드리히 2세를 냉혈한이라 표현했을 정도였다. 그의 아버지의 걱정은 한낮 기우였다. 프랑스 문화에 심취해 있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상수시궁전을 만들면서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델로 삼았다. 로코로식 궁전과 기하학적 정원공간의 구성은 베르사이유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상수시 궁전은 베르사이유 궁전보다 소박하다. 포도덩굴의 정원은 다른 정원에서는 볼 수 없는 상수시 정원만의 독특한 스타일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왕위를 물려받은 직후인 32세 때에 건축가 크노벨스도르프를 시켜 거친 언덕이라 불리는 곳에 궁전을 만들게 한다. 포도나무 덩굴로 덮인 테라스 정원은 프리드리히 대왕이 직접 스케치한 구상을 실현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정원 애호가였고, 그의 이러한 취향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왕비는 베를린에 있는 몽비쥬라는 여름별장에 정원을 만들어 가꾸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장식을 싫어하여 베를린과 포츠담 성의 정원을 과일과 채소들을 가꾸는 정원으로 개조하였다. 실용적인 목적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런 부모의 상반된 취향을 받아들여 포도나무 테라스라는 새로운 정원을 창조하였다. 포도나무들이 햇볕이 잘 받을 수 있도록 언덕의 지형을 이용하여 테라스를 만들었고, 테라스의 형태도 포물선 모양으로 만들었다. 미학적 아름다움이 실용적 목적과 교묘히 결합된 것이다. 그의 명성을 유럽에 드높인 7년 전쟁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상수시 정원을 새롭게 확장한다. 상수시 궁전보다 보다 큰 신궁전을 건축하고 벨베데레라 불리는 건축물과 폐허의 산이라 불리는 조형물과 중국식 찻집을 만든다. 신궁전은 보다 강력해진 왕권을 표현하기 위해 상수시 궁전보다 웅대한 스케일로 지어 왕족들과 손님들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폐허의 산은 상수시 궁전에서 바라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로마의 콜로세움을 본 따 만든 인공의 폐허로서 신전의 흔적과 건축물의 기둥들이 서있다. 당시에서 상수시 궁전의 대리석 홀에서 손님들과 만찬을 하면서 로마식 폐허를 바라보며 고대 철학자의 이름을 들먹이며 담소를 나누었다 한다. 중국식 찻집 정원은 가장 기이하고 매력적인 건축물로서 숲 속에 숨겨져 있다. 중국예술은 로코코 시대에 매우 인기가 높았다. 중국 비단으로 몸을 두르고, 중국식 문양의 벽지로 실내를 꾸미고 중국 도자기로 차를 마시곤 했다. 상수시의 중국식 티 하우스는 당시의 귀족 취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다른 어느 정원건축물보다 화려하고 아름답다. 덤불들이 가려진 숲 속에서 중국식 정자를 보게 되면 마치 동화 속 나라에 들어온 착각이 든다.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상수시 정원은 하나의 소우주였고, 내면으로 침잠하는 비밀의 정원이었다. 그는 이 곳에 그가 좋아하던 개들 옆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는 강아지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이 곳에는 10마리의 애견들이 묻혀있을 정도니까. 아마도 불행했던 결혼생활 때문이었기에 애견에 집착했는지도 모른다. 애정 없는 정략결혼을 한 후 그는 왕비와 별거한다. 왕비는 다른 곳에서 생활하였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평생 자식이 없었다. 상수시 궁전은 프리드리히 대왕과 손님들의 처소로 사용되었다. 세상을 얻었지만, 사랑을 얻지는 못했나보다. 그는“나는 철학자로서 살았다. 화려하지 않게 아무런 의식 없이 상수시에 잠들게 해다오”라고 말했단다. 그러나 당대에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후손들은 그러한 초라한 장례식을 원치 않았고, 그를 부친의 묘소 옆에 묻었다. 다행히 한참이 지난 독일이 통일된 후 1991년, 프리드리히 대왕은 다시 이 곳 상수시에 돌아와 묻히게 되었다. 이제 그는 ‘근심 걱정 없는’ 상수시(san soucci는 불어로 without worry라는 뜻이다)에서 편안한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조 경 진 Zoh, Kyung Jin 서울시립대학교 건축도시조경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