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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르칸트의 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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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백운(淸溪白雲)
백운사 가는 길의 향토경관
백운사는 의왕시의 남쪽 끝, 수원의 지지대고개를 넘어 서울방향으로 내려서서 얼마 되지 않은 백운산 자락에 있다. 버스 정류장에서 2-3km 정도 되는 길을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서, 의왕 과천 간 고속도로가 지나는 거대한 도시구조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완연히 달라지는 경관을 만난다. 도시 주변에 금싸라기처럼 남아있는 전원풍의 농촌경관, 두 대의 차가 서로 교행하기에 약간 불편한 정도의 도로 연변 여기저기 흩어져 자연부락을 형성하고 있는 여러 동네들을 지난다. 이 길을 거닐며 얼핏 의왕시의 북쪽 끝, 청계산 자락에 있는 청계사 들어가는 길을 떠올려 본다.
청계사 들목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백운사 들목처럼 자연부락과 농촌경관이 펼쳐지던 곳이었다. 두 대의 차량이 교행하기 빠듯했던 그 길은, 제대로 2차선의 차로와 인도를 갖춘 도로개설을 하게 되었다. 대대적인 토공도 없었고 차선 하나를 더하고 보행로를 개설한 것에 지나지 않은 작은 일이었지만, 길 주변의 경관은 낯이 설 정도로 변해버렸다.
현대도시에는 옛 이야기가 없고 옛 이야기가 깃을 치고 앉을 여유가 없다. 그래도 농촌에는 옛 이야기가 남아있을 듯하고 앞으로도 여전히 옛 이야기는 쉬 살아지지 않을 것만 같다. 지금 우리는 농촌마을다운 경관들을 그리워하는 입장이 되었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 ”라고 했던 60-70년대 새마을운동이 일어나던 때에도 지금처럼 그렇게 급변하지는 않았다. 무엇이 향토경관 보존에 문제가 되는가? 청계사 들목의 변화는 도로개설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차량통행 중심의 직선화와 평탄화를 통한 개발에 중요한 원인이 있다. (… 중략 …)
나의 전통조경이야기
전통조경이야기에 관한 글을 구상하면서 나는 어릴 적 수없이 들어온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떠올려 보았다. 이제 할머니로부터 들어볼 이야기는 없다. 시골을 다니면서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보기는 하지만 나로서는 역부족이다. 방방곡곡의 모든 어르신네를 만날 도리도 없고. 그 분들은 우리를 한없이 기다려주시지 않는다.
아직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할 만한 연배가 된 것은 아니지만, 전통조경이야기 시리즈 집필을 부탁받았을 때, 어쩌면 이 자리를 빌어 내가 간직하고 있었던 이야기보따리를 펼쳐 놓을 자리가 된 것이리라 생각하였다. 때마침 연구년이었기에 잡상에 불과할 이야기들을 정리할 시간도 있었고, 새로운 글도 구상하며 여러 곳을 다시 둘러볼 시간도 가져 보았다. 아무래도 이 자리는 격에 맞는 사진도 첨부해서 사진과 이야기가 따로 놀지 않도록 해야 하겠기에 별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은 뒤로 미루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백운사를 찾아가던 길목에서, 뒤로 미루어 놓았던 그 이야기들이 끝없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럭저럭 백운사 들목에 이르렀다. 거기서 기대 반 우려 반의 상상을 해 보았다. 백운사는 어떤 모습일까?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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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환경 관련 법제도의 변화에 따른 대응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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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 르 비꽁트
비운의 역사, 보 르 비꽁트 파리 근교 멜룽 지방에 베르사이유 궁전의 모델이 된 보 르 비꽁트 성이 있다. 이 성의 주인은 니콜라 푸케였다. 그는 26세에 참사원 의원이 되었고, 35세의 젊은 나이에 재무장관이 되어 세인들의 부러움을 받은 존재였다. 부친에게 물려받은 재산과 권력을 이용해 축척한 부를 바탕으로 젊은 화가, 시인 등의 예술가들을 그의 주변에 불려 모았다. 푸케는 1657년부터 최고의 디자이너와 예술가 팀으로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성을 짓는다. 그 때까지는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세 명의 전문가들은 조경사 르 노트르, 건축가 르 보, 화가 르 브룅이었다. 1661년 여름, 보 르 꽁트의 골격 대부분이 완성되었다. 완성될 때 쯤 푸케는 국왕인 루이 14세가 방문하겠다는 전갈을 받는다. 총리 마자랭이 죽기 전에 다녀가고, 영국 왕비, 왕제와 왕제비가 다녀간 후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 성과 정원에 왕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 달 남은 기간 동안 푸케는 온갖 정성을 다해 마무리 인테리어 공사와 연회 준비에 힘을 쏟는다. 화려한 가구와 샹들리에, 최고품의 옷감을 파리에서부터 가져왔다. 집사였던 바텔은 전체 연회를 기획하고 준비했고, 최고의 음식 메뉴를 만들었다. 극작가 몰리에르는 ‘불쾌한 사람들’이라는 새로운 작품을 서둘러 썼고, 보샹이 안무를 맡고, 륄리가 음악을 맡아 준비했다. 지아코모 토렐리는 불꽃놀이 이벤트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1661년 8월 17일이 되었다. 루이 14세의 일행은 오후 3시경 퐁텐블로 성을 출발하여 저녁 6시경 보 르 비꽁트에 도착했다. 도착 후 왕의 일행은 정원을 산책하였다. 약 460만평 규모의 정원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왕은 융단과 같은 잔디, 형형색색 꽃으로 장식된 화단, 조각상 그리고 분수로 가득 찬 정원을 거닐었고, 커다란 수로를 지나 천 개 이상의 분수가 있는 옥외극장에 올라 사람의 몸통만큼 굵은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성으로 되돌아오자 루이 14세는 르 브룅이 그린 왕의 초상화를 선물로 받았다. 성의 내부는 금실로 짠 태피스트리와 촛대들로 가득 차 있었고,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진 홀은 좌중을 압도하였다. 손님들은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금 식기와 은 접시, 베네치아 자수의 식탁보와 냅킨의 장식된 식탁에서 최상의 다섯 가지 요리를 맛보았다. 화려한 공간 속에서 감각적인 미각의 향연이 펼쳐졌다. 연회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식사 후 손님들은 몰리에르의 발레희곡을 보기 위해 정원의 숲으로 향했다.커튼이 젖혀지고 공연이 진행되면서 불꽃놀이가 정원의 동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고래모양의 배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고 수백발의 불꽃이 성과 정원의 밤하늘을 수놓았다. 이곳에 초대되었던 손님들은 매혹적인 광경에 말을 잃었고, 연회가 끝난 후에도 한참동안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시인 라 퐁텐은 그날의밤의 감동을 이렇게 묘사했다. “보의 땅이란 땅은 모두 왕의 기쁨을 얻기 위해 다투었다. 음악, 물, 빛, 별마저도” 그러나 이날 왕이 기쁨보다 노여움과 분노로 가득 찼다. 푸케의 몰락을 예상한 사람은 왕과 왕의 태후, 그리고 푸케를 질시하던 콜베르이었다. 새벽 두 시경 왕은 임신 중이 왕비를 혼자 두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가 머물던 퐁텐블로 성으로 돌아간다는 출발신호를 보냈다. 돌아오는 길에서 젊은 왕(당시 23세)은 몹시도 치욕스럽고 불쾌해 했다. 그토록 아름다운 보 르 비꽁트와 비교해 그는 너무 가난했고, 어두침침한 고성에 사는 초라한 왕이라고 생각했다. 이전부터 푸케가 국가의 재정을 낭비한다고 말하던 콜베르의 말을 떠올렸다. 재무장관인 푸케가 공금이 유용했다는 것은 명약관하 하였다. 곧바로 푸케를 감옥에 넣고자 했으나, 태후의 만류가 있었다. 태후는 그래도 자기 집에 초대한 푸케를 바로 감옥에 넣을 수 없다고 왕을 설득했다. 그러나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왕의 애첩이었던 라 발리에르는 자신과 왕의 관계를 모르는 푸케가 늘 추근거린다고 왕에게 일러바쳤다. 왕도 더 이상을 참을 수 없었다. 1661년 9월 5일 푸케는 달타냥에게 체포되어 피네룔 요새에 수감되었고, 얼마 후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푸케는 세상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놓고 이를 즐기지도 못한 채 어두운 감옥에서 1680년에 생을 마감한다. 그 자신은 보 르 비꽁트 때문에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인류 역사에 남을 기념비적 정원을 선사하였다. 조 경 진 Zoh, Kyung Jin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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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업으로 하는 3D 조경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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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237 주거환경개량사업: 충격과 당혹의 도큐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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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山水)와 천석(泉石)
아무리 나의 전통조경이야기가 담론(談論)처럼 풀어간다 하여도 아직 잘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을 그대로 쏟아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아직은 덜 익어서 차마 내 놓지 못하고 있었던 일들이 하나 둘이 아닌데, 이번 이야기에서는 다소 만용을 부리듯 심증만으로 두어 가지의 이야기를 해볼까 싶다.
전통조경 작품론
물이 휘돌아 나가서 하회가 그의 이름을 얻은 것처럼, 서울의 종암동은 고려대 인근에 있었다는 종처럼 생긴 바위 (鍾岩)에서 그 이름이 유래된다고 한다. 어느 성균관 유생의 글에 의하면, 성균관 뒤쪽으로 짙푸른 소나무 숲이 있어서 그 일대를 벽송정(碧松亭)이라 했다 한다. 후에 누군가가 그곳에 정자를 하나 세워 그 이름을 벽송정이라 했다거나, 지금처럼 소나무 숲이 사라지고 난 후라 하더라도, 원래의 그 이름은 여전히 솔밭에서 유래된 것임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바위와 물과 나무가 있어서 이름이 유래되었고 명소가 되었던 그런 것을 두고 우리는 좋은 경관이 있거나 있었던 장소로서 기억하고 있어야 할 일이다. 즉 이름을 붙이는 명명행위를 경관에 대한 중요한 행위로써 이 또한 조경이라 일컬을 수 있겠다. 퇴계 선생을 비롯한 무수히 많은 선비들이 행해온 자취에서 그러한 경우를 익히 만날 수 있다.
천연의 바위를 가지고, 또 물과 나무를 천연의 그대로 소재로 삼아 경관을 연출하였다고 한다면 이 역시 중요한 조경행위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다. 바위와 물 그리고 나무를 천연 그대로 한 작품행위는 전통조경에서 흔히 보이는 것이었다. 이들 역사적 사례들을 모아 전통조경작품전 같은 것을 연다면 어떨까? 나무와 바위와 물. 전통조경작품전의 큐레이터가 된 기분으로, 나무와 바위와 물을 천연의 모습 그대로, 인위적으로 다듬은 냄새가 나지 않으면서, 자연의 경관에 함께 어우러진 전통조경사례들을 좀 훑어볼까 싶다.
심증(心證)만으로 본 전통조경작품들
창덕궁 후원의 불로문을 비롯하여 탑이며 부도 같은 무수히 많은 석조형물들이 손에 꼽히는데, 이들은 엄밀히 바위를 소재로 하였다기보다는 돌을 다듬은 석조형물이라 해 두자. 물을 소재로 한 작품? 어차피 물은 그릇에 담아두어야 하니 물만으로 무엇을 할 수는 없겠다고 본다면, 안압지나 전통연못 같은 것 외에 석연지나 포석정 같은 것으로 꼽아두면 될 듯싶다. 나무만으로는 어떻게 될까?
편의상 산수론(山水論)과 천석론(泉石論)이라 구분하여, 산수론으로는 산수의 국면, 즉 산과 강의 차원으로 다소 넓은 범역에서 다루어진 사례를 이야기해보고 천석론으로는 천석의 국면, 즉 소(沼)와 바위의 관계처럼 보다 작은 국면으로 다루어진 것들을 이야기해 보려는 것이다.
정 기 호 Jung, Ki Ho·성균관대학교 건축·조경 및 토목공학부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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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남·竹+들꽃그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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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 뱀들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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