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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스의 섬마을 이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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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산대천(名山大川)
    경관, 시(詩)의 세계 - 풍수카메라의 파인더 동작동 현충원, 즉 동작동 국립묘지를 풍수 카메라로 촬영을 해 보면 공작이 나래를 편 형국이라는 그림이 인화되어 나오기도 하고 맹호(猛虎)가 출림(出林)을 하는 그림이 나오기도 한다. 나는 풍수의 전문가가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풍수를 잘 안다고 자처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조경가의 입장에서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카메라가 몇 있는데, 아날로그 카메라로는 품에 넣고 다니기에 조금 무거운 롤라이 카메라가 있고, 디지털 카메라는 그 동안 몇 개 정도는 해먹은 이력이 있는데 조만간 새로 하나를 장만할까 생각 중이다. 그리고는 시중에서는 살 수 없는 카메라, 소위 풍수 카메라도 하나 있다. 가지고 다니기에 무겁지도 않고 완전 자동으로 작동하기에 건전지 충전 걱정도 없고 필름이나 메모리 용량을 체크할 필요도 없이 정말 편리하다. 카메라 파인더를 통해본 경관, 그런데 풍수 카메라를 가지고 본 경관은 보편적으로 보아온 것과는 사뭇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최창조 교수는 일찍이 “한국의 풍수사상”이란 책을 통하여 사숙(私塾)한 터이지만 가까이서 직접 만나 뵌 것은 한 이삼년 정도 되는 모양이다. 어느 허름한 집에서 점심을 하던 자리였다. 반주 겸 대작을 하게 되었던 자리에서 나는 자판기에서 뽑아온 커피 잔을 들고 있었다. 그날 최 교수께 들은 이야기들 중 기억나는 것은 동작동 국립 현충원의 형국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현충원의 형국에 대해서는 전부터 ‘공작이 나래를 편 형국’으로 익히 듣고 읽어온 터였다. 그러나 그 분의 이야기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맹호출림(猛虎出林). “맹호출림이란 문자 그대로 산에서 내려오는 호랑이의 모습과 같이 커다란 덩어리의 맥이 듬직하게 힘차게 벋어 나오는 형세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 ?? 나는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아 그냥 듣고만 있었다. 물론 맹호가 숲에서 나오는 모습이라는 이미지를 몰라서가 아니라, 왜 현충원이 그런 형국으로 빗대어지는지를 모르겠다는 이야기다. 이미 내 의중을 파악한 듯, 아니면 워낙 여러 사람들에게 반문을 받아온 터였기에 그런지, 이내 보충설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만, 현충원 일대의 여건만을 놓고 생각해서는 상상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기 멀리 있는 관악산에서부터 살펴 내려와야 할 것입니다. 거기서 ...” 이어지는 부연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경관을 해석하는 다른 세계와의 만남이었다. 풍수에 빠져들고 있었다고 하기에는 나 자신이 풍수를 너무 모르는 터였고,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상식적인 범위의 풍수이야기로부터 사고를 벗어나고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라고 해 두는 것이 더 옳을지 모르겠다. 처음 풍수를 접하고는 (또는 풍수에 관한 이야기를 접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누구나 주산과 좌우의 청룡 백호라 일컫는 환포된 산세를 머리 속에 떠올리며 현장을 더듬어 보는 게 거의 틀림없다. 그러나 관악산에서 흘러내리는 산맥의 흐름에서 동작동에 이르는 줄기를 헤아려 본다면, 환포된 국면을 그리기 이전에, 전통적으로 내려온 풍수적 형세를 읽는 것이 상당히 광활하고 거시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 점에서 나는 풍수라는 파인더를 통해 보면 같은 경관이라 할지라도 상당히 보는 눈을 달리해 주게 되는 점이 있음을 보는 것이다. “동작(銅雀)이라는 지명으로 보아도 그게 공작(孔雀)이 나래를 편 형상과 밀접하지 않겠나 생각하실지 모르나, 그게 아닙니다. 원래 이 지역의 이름은 구리 銅자를 써서 동재기라고 불려 왔었어요. 공작과는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동작동 현충원은 ‘공작이 나래를 편 형상인가 맹호출림형인가?’ 만약 ‘맹호출림형’이 맞다면 ‘공작이 나래를 편 형상’은 아니라는 것일까? 아니면 ‘공작의 형국’이니 ‘맹호출림형’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인가? 우리는 풍수의 전문가가 아닌 터에, 동작동의 형국을 어떻게 해석하고 수용하여야 할까를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만약 고민할 필요가 있다면 그 핵심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풍수적으로는 무엇이 맞게 해석된 것이 될지언정 우리는 맹호출림과 공작의 나래의 두 관점에서 함께 현충원과 그 일대를 관찰할 필요가 있다. 풍수학적으로는 어떻게 접근될지 모르나, 일단 동작전철역 이층 테라스에 나가 현충원을 비롯한 일대를 한번 훑어보는 것으로 이 장소의 경관을 만나보면 어떨까 싶다. 천천히 주위를 살피고 음미하면서 현대도시공간에서 이 곳이 어떠하며 장차 어떻게 개선되어야 할지를 보아가는 것이다. 고개를 똑바로 돌리면 현충원이 쾌적하게 자리를 하고 있다. 그 앞으로는 수많은 자동차의 물결이 흘러간다. 대단한 소음을 내며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고가 차도를 지나가는 차량소음에 공작이며 맹호며 거론할 일도 아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보면 4호선 지하철이 터널을 뚫고 지나가는 모습이 들어온다. 관악산에서 묵직하게 흘러오던 능선이 끝나는 즈음의 산 덩어리를 뚫고 지하철 터널이 건설되어 있다. 터널입구는 소위 환경설계라 하든지 아니면 경관계획이라 하든지 여하튼 한옥모양의 지붕을 씌워놓음으로써 다른 일반적인 터널들과 차별성을 보여주려 했던 흔적을 만난다. 아예 관악산에 올라가 이 일대를 내려다보는 것도 좋지만, 일단은 지도를 펴놓고 본다. 관악산에서 줄기가 흘러흘러 동작동 일대로 내려온다. 신림동 방향으로 난 대로가 이 흐름을 잘라내고 있다. 산보삼아 다니기에는 썩 좋은 환경이 아니지만 그래도 그 길을 더듬어 걸음을 재촉해본다. 맥의 끊어짐, 소위 단맥이라 하는 것의 의미와는 무관하게 산의 흐름이 단절되고 녹지가 단절되며 하는 등등의 조경학적인 생각이 물씬 풍겨난다. 이 흐름을 다시 잇는다는 것은 현대 도시경관 상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만약 풍수적 파인더를 통해 본 도시경관이 단맥을 이어주는 현대조경의 해석으로 이어진다면 어떨까? (…중략…) 긴 여행의 끝 경관은 현실의 공간이며 현실의 공간에 덧붙여진 시의 세계다. 경관의 관리며 역사경관의 보존이며 하는 일에 몰두하다보면 자칫 경관이 가진 시의 세계를 놓치는 경우가 생긴다. 경관을 형성시키고(경관형성계획) 경관을 조성하며(조경) 하는 전통조경의 업무는 원래 역사적 향기가 가득한 경관으로부터 전통의 이미지를 그윽하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싶다. 언제부턴가 나 자신도 시의 세계로서 경관을 다룬다는 초심을 잃고 바람직한 보존과 관리를 위한 일에 진력을 하다보니 원래의 시의 세계를 그로부터 기억 해내지를 못하게 되었다. 맹호가 출림하는 그림을 읽다가 뇌수술을 받아 뇌사상태가 된 맹호를 만나고 청산의 계곡에 자리한 청계를 만나러 갔다가 치렁치렁 온갖 명품으로 둘러놓은 귀부인에 홀려, 마치 싸이렌의 노래에 취해 정신이 혼미해진 이타카의 오디세우스처럼, 정신이 아스라해진 나 자신을, 전통조경이 목표하던 바가 진정 무엇이었던가를 잊은 지 오래된 우리 자신을 백운사 뜨락에 서서 잠시 생각해 보았다. 정 기 호 Jung, Ki Ho·성균관대학교 건축·조경 및 토목공학부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조경설계 종사자들의 야근 · 철야와 복지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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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스본의 테주강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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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GRI-TECTURE: 하이라인 오픈 스페이스 설계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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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마르칸트의 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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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춤거리는 최저가 낙찰제, 우리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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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계백운(淸溪白雲)
    백운사 가는 길의 향토경관 백운사는 의왕시의 남쪽 끝, 수원의 지지대고개를 넘어 서울방향으로 내려서서 얼마 되지 않은 백운산 자락에 있다. 버스 정류장에서 2-3km 정도 되는 길을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서, 의왕 과천 간 고속도로가 지나는 거대한 도시구조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완연히 달라지는 경관을 만난다. 도시 주변에 금싸라기처럼 남아있는 전원풍의 농촌경관, 두 대의 차가 서로 교행하기에 약간 불편한 정도의 도로 연변 여기저기 흩어져 자연부락을 형성하고 있는 여러 동네들을 지난다. 이 길을 거닐며 얼핏 의왕시의 북쪽 끝, 청계산 자락에 있는 청계사 들어가는 길을 떠올려 본다. 청계사 들목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백운사 들목처럼 자연부락과 농촌경관이 펼쳐지던 곳이었다. 두 대의 차량이 교행하기 빠듯했던 그 길은, 제대로 2차선의 차로와 인도를 갖춘 도로개설을 하게 되었다. 대대적인 토공도 없었고 차선 하나를 더하고 보행로를 개설한 것에 지나지 않은 작은 일이었지만, 길 주변의 경관은 낯이 설 정도로 변해버렸다. 현대도시에는 옛 이야기가 없고 옛 이야기가 깃을 치고 앉을 여유가 없다. 그래도 농촌에는 옛 이야기가 남아있을 듯하고 앞으로도 여전히 옛 이야기는 쉬 살아지지 않을 것만 같다. 지금 우리는 농촌마을다운 경관들을 그리워하는 입장이 되었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 ”라고 했던 60-70년대 새마을운동이 일어나던 때에도 지금처럼 그렇게 급변하지는 않았다. 무엇이 향토경관 보존에 문제가 되는가? 청계사 들목의 변화는 도로개설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차량통행 중심의 직선화와 평탄화를 통한 개발에 중요한 원인이 있다. (… 중략 …) 나의 전통조경이야기 전통조경이야기에 관한 글을 구상하면서 나는 어릴 적 수없이 들어온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떠올려 보았다. 이제 할머니로부터 들어볼 이야기는 없다. 시골을 다니면서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보기는 하지만 나로서는 역부족이다. 방방곡곡의 모든 어르신네를 만날 도리도 없고. 그 분들은 우리를 한없이 기다려주시지 않는다. 아직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할 만한 연배가 된 것은 아니지만, 전통조경이야기 시리즈 집필을 부탁받았을 때, 어쩌면 이 자리를 빌어 내가 간직하고 있었던 이야기보따리를 펼쳐 놓을 자리가 된 것이리라 생각하였다. 때마침 연구년이었기에 잡상에 불과할 이야기들을 정리할 시간도 있었고, 새로운 글도 구상하며 여러 곳을 다시 둘러볼 시간도 가져 보았다. 아무래도 이 자리는 격에 맞는 사진도 첨부해서 사진과 이야기가 따로 놀지 않도록 해야 하겠기에 별 수 없이 많은 이야기들은 뒤로 미루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백운사를 찾아가던 길목에서, 뒤로 미루어 놓았던 그 이야기들이 끝없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럭저럭 백운사 들목에 이르렀다. 거기서 기대 반 우려 반의 상상을 해 보았다. 백운사는 어떤 모습일까?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국토환경 관련 법제도의 변화에 따른 대응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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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 르 비꽁트
    비운의 역사, 보 르 비꽁트 파리 근교 멜룽 지방에 베르사이유 궁전의 모델이 된 보 르 비꽁트 성이 있다. 이 성의 주인은 니콜라 푸케였다. 그는 26세에 참사원 의원이 되었고, 35세의 젊은 나이에 재무장관이 되어 세인들의 부러움을 받은 존재였다. 부친에게 물려받은 재산과 권력을 이용해 축척한 부를 바탕으로 젊은 화가, 시인 등의 예술가들을 그의 주변에 불려 모았다. 푸케는 1657년부터 최고의 디자이너와 예술가 팀으로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성을 짓는다. 그 때까지는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세 명의 전문가들은 조경사 르 노트르, 건축가 르 보, 화가 르 브룅이었다. 1661년 여름, 보 르 꽁트의 골격 대부분이 완성되었다. 완성될 때 쯤 푸케는 국왕인 루이 14세가 방문하겠다는 전갈을 받는다. 총리 마자랭이 죽기 전에 다녀가고, 영국 왕비, 왕제와 왕제비가 다녀간 후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 성과 정원에 왕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 달 남은 기간 동안 푸케는 온갖 정성을 다해 마무리 인테리어 공사와 연회 준비에 힘을 쏟는다. 화려한 가구와 샹들리에, 최고품의 옷감을 파리에서부터 가져왔다. 집사였던 바텔은 전체 연회를 기획하고 준비했고, 최고의 음식 메뉴를 만들었다. 극작가 몰리에르는 ‘불쾌한 사람들’이라는 새로운 작품을 서둘러 썼고, 보샹이 안무를 맡고, 륄리가 음악을 맡아 준비했다. 지아코모 토렐리는 불꽃놀이 이벤트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1661년 8월 17일이 되었다. 루이 14세의 일행은 오후 3시경 퐁텐블로 성을 출발하여 저녁 6시경 보 르 비꽁트에 도착했다. 도착 후 왕의 일행은 정원을 산책하였다. 약 460만평 규모의 정원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왕은 융단과 같은 잔디, 형형색색 꽃으로 장식된 화단, 조각상 그리고 분수로 가득 찬 정원을 거닐었고, 커다란 수로를 지나 천 개 이상의 분수가 있는 옥외극장에 올라 사람의 몸통만큼 굵은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성으로 되돌아오자 루이 14세는 르 브룅이 그린 왕의 초상화를 선물로 받았다. 성의 내부는 금실로 짠 태피스트리와 촛대들로 가득 차 있었고,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진 홀은 좌중을 압도하였다. 손님들은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금 식기와 은 접시, 베네치아 자수의 식탁보와 냅킨의 장식된 식탁에서 최상의 다섯 가지 요리를 맛보았다. 화려한 공간 속에서 감각적인 미각의 향연이 펼쳐졌다. 연회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식사 후 손님들은 몰리에르의 발레희곡을 보기 위해 정원의 숲으로 향했다.커튼이 젖혀지고 공연이 진행되면서 불꽃놀이가 정원의 동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고래모양의 배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고 수백발의 불꽃이 성과 정원의 밤하늘을 수놓았다. 이곳에 초대되었던 손님들은 매혹적인 광경에 말을 잃었고, 연회가 끝난 후에도 한참동안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시인 라 퐁텐은 그날의밤의 감동을 이렇게 묘사했다. “보의 땅이란 땅은 모두 왕의 기쁨을 얻기 위해 다투었다. 음악, 물, 빛, 별마저도” 그러나 이날 왕이 기쁨보다 노여움과 분노로 가득 찼다. 푸케의 몰락을 예상한 사람은 왕과 왕의 태후, 그리고 푸케를 질시하던 콜베르이었다. 새벽 두 시경 왕은 임신 중이 왕비를 혼자 두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가 머물던 퐁텐블로 성으로 돌아간다는 출발신호를 보냈다. 돌아오는 길에서 젊은 왕(당시 23세)은 몹시도 치욕스럽고 불쾌해 했다. 그토록 아름다운 보 르 비꽁트와 비교해 그는 너무 가난했고, 어두침침한 고성에 사는 초라한 왕이라고 생각했다. 이전부터 푸케가 국가의 재정을 낭비한다고 말하던 콜베르의 말을 떠올렸다. 재무장관인 푸케가 공금이 유용했다는 것은 명약관하 하였다. 곧바로 푸케를 감옥에 넣고자 했으나, 태후의 만류가 있었다. 태후는 그래도 자기 집에 초대한 푸케를 바로 감옥에 넣을 수 없다고 왕을 설득했다. 그러나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왕의 애첩이었던 라 발리에르는 자신과 왕의 관계를 모르는 푸케가 늘 추근거린다고 왕에게 일러바쳤다. 왕도 더 이상을 참을 수 없었다. 1661년 9월 5일 푸케는 달타냥에게 체포되어 피네룔 요새에 수감되었고, 얼마 후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푸케는 세상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놓고 이를 즐기지도 못한 채 어두운 감옥에서 1680년에 생을 마감한다. 그 자신은 보 르 비꽁트 때문에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인류 역사에 남을 기념비적 정원을 선사하였다. 조 경 진 Zoh, Kyung Jin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