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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하는 빛 - 자연과 빛 그리고 인간과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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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볼리 가든
여전히 찌푸린 날씨가 시간마저 가늠하기 힘들게 하지만, 말로만 듣던 티볼리 가든이 바로 눈앞에 떡하니 서있다. 동행한 김은성 소장님의 얼굴엔 미소가 번지고, 약간의 흥분마저 느껴진다. 도대체 티볼리 가든이 어떤 곳이길래 테마파크에 관여했다는 사람들이 그리도 가보라고 그러는지 한번 내 눈으로 확인해보자는 오기 아닌 오기를 안고 이곳에 온지 이틀째. 시차적응도 적응이지만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곳이라 아침도 오후같고 오후도 아침같은 얼떨떨함속에서 피곤함도 그리 문제가 되진 않는 듯 하다. 티볼리를 보러 간다니까 서양조경사 시간에 배웠던 이탈리아 빌라를 생각하여 유명한 빌라 많이 보라던 엉뚱한 소리처럼 필자 역시 처음엔 헷갈렸던 게 사실이다. 그냥 무지의 소치일 따름이다. 티볼리 가든은 1843년 George Cartensen에 의해 조성되었는데 그 동기가 대중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이끌고자 했다는 게 우리의 1980년대를 생각하게 한다. Cartensen은 영국의 Vauxhall의 경험을 티볼리 가든에 집중시켰으며, 1863년에 그랜드 바자, 1900년에 중국식 타워를 세운다. 면적은 약 8.3ha에 24개의 주요 어트랙션과 38개의 레스토랑이 있으며, 매년 하계에 하루 평균 4만명, 일년에 약 5백5십만명 정도 방문한다. 필자가 위에서 언급한 것 같은 내용은 ‘테마의 시대’에 비교적 상세히 나와 있으므로 재론할 필요는 없겠다. 연간 이용객수가 5백5십만이라면 우리나라의 대표적 테마파크인 에버랜드가 약6백8십만명에, 서울대공원이 연간 3백2십만명임을 생각한다면 어마어마한 숫자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그것도 겨우 2만 8천여평에. 무슨 대단한게 있긴 있나보다. 이런 생각이 필자의 머리에 떠오르자 하나라도 더 보고 가야되겠다는 욕심이 앞서기 시작했다. 티볼리 가든은 코펜하겐시 중심의 중앙역에 대로를 끼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찾기가 쉬웠다. 또 인근에는 시청과 시청광장이 위치해 있어, 집시로 보이는 이들의 작은 공연도 볼 수 있었다. 일단 65크로네, 한화로 치면 200원을 곱해서 약 1만3천원을 주고 웅장해 보이는 입구 게이트를 통과했다. 밖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조금은 어수선한 분위기이다. 중앙에 대로가 나있고, 그 양쪽의 독특하게 생긴 철제 반원형 프레임에 조명등이 붙어 있는데, 왠지 약간은 촌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야간에 조명에 불이 들어온다면 괜찮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입구에 보이는 안내판을 한번 휘익 살펴보는데 국내에서 포스터로만 봤던 티볼리 가든과는 차이가 느껴진다. 하지만 약 160년이라는 세월을 감안한다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닌 것 같다. 입구에서 조금 들어가니 군악이 들려오고 천막 쳐진 극장에서 황실 근위대의 군악연주가 펼쳐진다. 무대 앞은 젊은 사람보다는 노인층이 더 많아 보인다. 백발의 노인네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같이 온 듯한 할머니와 관람을 하는 게 부러워 보인다. 그나저나 대체 젊은 애들은 다 어디 있나? 오른쪽은 원형의 무대가 대칭되듯 서 있는데 거기선 야간에 정장차림의 노인들의 오케스트라 연주가 열린다고 한다. 지금은 낮시간이라 그런지 빈 공간이다. 오케스트라 파빌리온을 지나니 길이 갈라진다. 일단 대로를 따라 둘러본 뒤 다시 세세히 보기로 하고 우측으로의 발길을 재촉했는데, 원형 연못에 있는 조형물의 형태가 독특하다. 원통형의 원기둥에 물이 차 있고 밑에서 기포가 올라온다. 물을 이용한 환경조형물인듯 하다. 야간에 주위에서 비추는 조명이 더욱 묘한 분위기를 만들 것 같다. 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덴마크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이다. 여기서 한가지 티볼리 가든이 여타의 테마파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우선 식당이 무지 많다는 것이다. 그것도 간단히 맥주한잔으로 갈증을 채우거나 패스트푸드를 먹을 수 있는 곳부터 예약을 해야만 식사할 수 있는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까지 방문객들이 가히 먹으러 온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듯하다. 가만히 보니 계층이 어느 정도 나누어진다. 젊은 층은 패스트푸드를 팔고 있는 카페로, 가족이나 중년층은 Formal한 레스토랑을 즐겨 찾는 듯 하다. 레스토랑을 끼고 우회전을 하니 계단이 나오고 계단 중앙의 난간이 재미있다. 계단사이의 경계난간까지에도 세심한 신경을 쓴 것 같다. 그 뒤쪽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걸로 봐서 뭔가 재미난게 있는 것 같다. 앞서 지나온 레스토랑과는 또 다른 레스토랑들을 지나니 우리나라 재래식 시장골목같은 느낌의 소로가 나있고 그 주변에 갖가지 상점들이 즐비하다. 이 병 훈 Lee, Byoung Hoon (주)유림조경기술사사무소 실장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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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古刹) 바닥
계룡 갑사
갑사는 여느 다른 사찰과 비교하여 특징적인 모습이 있어서 오랜 동안 기억에 남아 있던 사찰이었다. 강당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적묵당과 진해당이 배치되어 길게 널려있었던 파사드가 참으로 기억에 남는 곳이었고, 특히 강당의 현판에 계룡갑사라 휘 갈려 놓은 강한 필체의 글씨가 그 맛을 더해주는 곳이었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고찰 갑사의 옛 모습은 1970년대에 발간된 한국건축의 외부공간이란 이름의 한 사진집에 모두 여덟 장으로 간추려져 있다.
요즘 들어 절을 다녀온 사람들의 목소리는 둘로 나뉜다. 어디에고 옛 맛이 남아 있지 않아 씁쓸하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새로 잘 지어놓아 좋더라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주로 전자에 속하는 편이다. 옛 맛이 나는 것이 낡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새로 지었다 (혹은 새로 개보수 했다)고해서 반드시 옛 맛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못살던 시절에야 어차피 개보수하거나 확장을 할 여력이 없었으니 거의 옛 모습 그대로 지니고 있었을 수밖에 없었다고 치면, 이러저러하게 근자에 크고 작은 개보수며 새로운 개발사업이 빈번해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추이일수도 있다.
얼마 전, 오대산 월정사에서는 절 들어오는 긴 진입부의 도로포장을 반대하여 그 사업을 않도록 조처했다는 일을 어느 일간지에서 읽은 적이 있다. 도로포장에 그치지 않고 산길을 넓혀 번듯한 차도를 내려는 추이에 반하여 이미 계획되어 있었을 사업을 굳이 마다한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되새겨 보면 어떨까 싶은 것이다.
갑사 들어가는 길목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티나는 고찰을 찾는 기분으로 가 볼 수 있었던 작은 산사의 이미지를 지닌 곳이 드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최근에도 그런 느낌을 주는 곳들이 여전할까? 갑사 들어가는 길목에서 옛날의 사진과 비교해 보면서 그런 생각을 좀 해 보았다.
지금의 갑사 들어가는 길과 옛 사진에 남아 있는 그 길을 두고 잠시 생각해 본 것은, 예전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 볼 기회가 없었을 요즘 세대들을 위해서도 참으로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는 점이었다. 게 중에는 혹 절 들어가는 길목의 포장 같은 작은 일이 무슨 사찰의 원형훼손이니 원형보존의 문제니 하는 거창한 이야기꺼리가 되랴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찰의 원형이란 곧 사찰의 이미지와 직결되는 것이고 그 이미지의 보존이란 것이 반드시 대웅전 일곽에 머물러 있는 절대적인 경관 가치로써 이야기될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간단히 생각하여, 갑사 들목에서는 그냥 바닥에 블록으로 깨끗하게 포장을 하여 걷기 편한 좋은 길을 마련한 것 외의 별다른 일은 없어 보인다. 변화는 결코 대대적인 개발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바닥 포장이라는 사소한 시설물 공사가 사찰의 이미지를 바꾸어 놓는 것임을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중략)
내 생각에는
사찰에는 바닥이든 석축이든 대개가 자연석 혹은 흙바닥이었다. 새로 포장을 한다거나 계단을 잘 정비한다는 명목으로 사찰에는 잦은 개보수 작업이 생긴다. 반드시 옛 모습을 간직한 채 흙바닥이며 자연석으로 처리되어 있어야 한다는 걸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마감되어야 할 것인가를 살펴 그 해법을 자연스럽게 도출해 보려는 것이다.
쌍계사든 화엄사든 잘못된 것과 잘 처리된 것이 같은 경내에서 함께 하고 있었다. 문제점과 그 해답이 바로 인접하여 있다는 것이다. 다만, 문제점으로 나타난 것들은 근자에 이루어진 일이고 해답을 가진 것들은 보다 전 세월에 손질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
한마디로 의견을 내 보이자면, 가능한 한 기존의 현황에 가깝게 (덜) 다듬어진 재료로 마감되어 갈 때 가장 어색하지 않은 마무리가 되어 간다는 사실이다.
산사를 찾았다가 몹시 씁쓸한 뒷맛을 안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옛 맛이 없다”고 하는 이면에는 기실 도시의 차도 변에 깔아 놓은 보도 불럭 같은 전통사찰의 바닥에서 비롯되는 그 아쉬움의 토로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정 기 호 Jung, Ki Ho·성균관대학교 건축·조경 및 토목공학부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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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우 풍경식 정원
런던의 북서쪽 Buckinghamshire에 위치하고 있는 Stowe 정원은 풍경식 정원 중 가장 매력적인 장소의 하나로, 단지 영국을 대표하는 정원일 뿐 아니라 당시 유럽 조경계의 거장들의 역사적인 손길을 느끼며 18세기 정원양식과 정원 조성의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이상적인 정원이라고 할 수 있다. 1593년부터 Temple 가문에 속해 있던 이 지역은 정원문화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Richard Temple경 (1643-1697), Cobham자작 (1675-1749), Richard Grenville (1711-1779), 그리고 Buchingham의 첫 번째 공작인 George Grenville공작 (1753-1813)의 4명의 연속된 소유주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풍경식 정원으로 변모될 수 있었다. 이 곳이 풍경식 정원으로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사회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바로크시대까지 여러 정원양식들이 계속 발전되어 왔지만 그 발전을 방해할 수 있을 정도로 정반대의 견해를 가진 정원들은 큰 흐름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이태리, 프랑스 등 절대적 왕조의 고전주의를 지나면서 이에 반하는 영국의 자연주의운동은 실제로 정원역사에서는 혁명과도 비유될 수 있었으며 아울러서 17세기 후반부터 영국에서는 경험적으로 점차 민주주의를 배우게 되었다. 민주적인 Whig당이 당시의 지배적이며 보수적인 Tory당과 반대세력으로 등장하는데 Stowe 정원은 Cobham경 (후에 자작 칭호를 받음) 등이 Whig당의 핵심당원으로 관계해 이런 반대세력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특히 이곳의 사원을 비롯한 많은 구조물들은 이런 정치적 이념이 그 내용에 표현된 기념물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략)Stowe 정원을 풍경식 정원으로 개조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W. Kent도 이 당시 영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유럽대륙으로 여행을 떠나듯이 이태리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이미 조성된지 200여년이 지나 많이 훼손되어 폐허형태로 남아있는 르네상스 시기나 바로크 시대의 정원들은 마치 17세기 풍경화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아, 조성당시의 의도된 모습이 아닌 새로운 시대정신의 풍경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한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그는 티볼리의 신전을 복제하는 일, 또는 이태리 정원에서 받은 영감으로 재해석된 캐스케이드를 설치하는 등 이태리 풍경을 영국식으로 해석해서 작업을 하게 된다. W. Kent는 화가, 건축가로 활동하다 조경가로 일을 하게 되는데 그의 탁월한 미적 감각은 원예에 대한 전문지식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원을 그림처럼 경치를 그려가는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18세기 초 Richard Temple 경은 정원 조성과 기존 주택의 개조를 위해 조경가 Charles Bridgeman 과 건축가 John Vanbrugh 경을 불러들여 구부러진 길과 정형이 아닌 비정형의 축 등을 조성하면서도 이미 조성되어있던 프랑스식의 정원 양식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C. Bridgeman의 조성 방식은 정형식 정원은 아니었고 아마도 처음으로 조심스럽게 풍경을 정원에 도입한 조경가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처음 정원조성에 도입한 “Ha-Ha"기법은 원래 프랑스군의 참호를 파는데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정원을 산책하면서 경계부근에서 갑자기 도랑을 발견하고 놀라면서 ”아하“ 하고 말하는데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주변에서 기르는 가축들이 정원 안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하면서도 울타리 등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매혹적인 풍경이 단절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생각된 것인데, 울타리 없이 경계를 지어주는 이 건조한 도랑은 특히 주변의 풍경을 함께 정원조성에 이용하는 풍경식 정원에서는 매우 합리적인 기법으로 후에 W. Kent도 널리 사용하였다. 김 인 수 Kim, In Su 환경조형연구소 그륀바우 소장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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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리고 T.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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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西安)
3천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서안은 현재 대륙의 중앙에 위치한 섬서성(陝西省)의 성도(省都)로, 서북(西北)지방 최대의 관광도시이자 상공업도시이다. 현대적인 도시로 변모하고 있는 시내에서 그 옛날의 자취를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 있다. 당나라 때의 장안성(長安城)을 본 따 명나라 때 축조된 성벽(城壁)이 바로 그곳이다. 이 성벽은 옛 모습이 보존되어 있는 중국의 성벽들 중에서 으뜸으로 손꼽히는 유적으로, 대략 6백년에 이르는 시간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당대(唐代)의 장안은 당시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품위있고 정연한 계획도시였다. 계획도시 장안의 모습에 혹한 당시의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수도였던 경도(京都)를 만들면서 장안의 도시구조를 그대로 복제했을 정도였다. 장안은 기능에 따라 궁전지구 · 행정지구 · 주거지구 · 상업지구 · 공업지구 등으로 엄격하게 구분되고 철저하게 관리되었다. 요즘의 지역지구제(地域地區制)가 시행되었던 것이다. 각 지구들을 잇는 가로망은 바둑판의 격자형 체계를 이루었고, 황제가 거처하는 황성(皇城)의 남문인 주작문(朱雀門)에서 남쪽으로 쭉 뻗은 폭 150m에 이르는 주작대로(朱雀大路)가 중심대로였다. 한편으로 이 도시는 서방세계로 연결되는 실크로드(Silk Road)의 출발지였다. 비단길의 관문으로 서역의 상인들이 거주했고 국제적인 무역시장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장안은 인구 150만에 이르는 동양문화의 중심지로 화려한 번영을 누렸다. 당나라가 망하고 송(宋)나라가 들어서면서 수도는 동쪽의 개봉(開封)으로 옮겨졌다. 장안은 중심도시로서의 날개를 접었고 그 이름도 지금의 서안으로 바뀌었다. ‘서안(西安)’이라는 이름은 장안에 잔류했던 당의 후손들이 혹시 반란을 일으키지는 않을까 염려하여 “서쪽 지방의 안정을 바란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이후 북경(北京)에 수도를 정한 명(明)나라 때에 이르러 서안은 서북지방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로 주목받았다. 거점도시가 되면서 당나라 때의 장안성을 근거로 ‘서안부성(西安府城)’이 축조되었다. 지금 보이는 명대의 서안부성은 규모가 1/6 정도로 축소된 것이니, 당대 장안성의 어마어마한 규모는 좀처럼 짐작하기가 어렵다. 주위에 해자(垓字)를 두르고 있는 성벽은 대략 12m에 이르는 상당한 높이를 보이고 있다. 성벽의 윗 폭은 12-15M로 성벽 위는 관광객들을 실은 코끼리열차가 다닐 정도로 상당히 넓다. 아랫 폭은 윗 폭보다 약간 넓은 15-18m로 안정감 있는 구조를 취하고 있고, 성벽의 사방 둘레는 12km 정도이다. 6백여 년의 역사를 지닌 성벽이 이렇게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도 놀라운데, 그 위를 코끼리열차를 타고 구경하는 현실은 대단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급격히 성장하는 오늘의 도시에서 성벽은 도로터나 건물터로 그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당연히 헐리어 없어져야 될 옛 시대의 퇴물이라는 개발논리가 횡행하는 시대가 아닌가? 성벽 위에서는 도시의 다양한 모습들을 쉽게 조망할 수 있다. 성곽 안은 고도로서의 옛 모습을 지키기 위해 전통양식의 건축물을 권장하는 한편, 스카이라인(Skyline)을 해치는 고층건물의 높이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반면 성곽 밖은 급변하는 현대도시의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방어의 목적과 아울러 이렇게 도시에 성벽을 쌓은 것은 도시의 품격을 높이고 도시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안과 밖을 명확히 구분하는 성벽이라는 장애물이 있기 때문에, 성벽에 뚫린 도시의 문이 비로소 문으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이 있기에 비로소 길은 길로서의 제 구실을 하게 된다. 결국 도시에 성벽이 있기 때문에 도시공간은 질서를, 도시가로는 체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강 철 기 Kang, Cheol Gi · 경상대학교 산림과학부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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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푀르스터
독일어권의 최신 조경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는 “Landschaftsarchitekten I, II, III권”이 조경설계사무소의 자료실이나 조경학과의 연구실에 거의 빠짐없이 꽂혀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조경작가나 작품은 국내에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어쩌면 독일은 생태의 나라이며 조경디자인은 ‘별로’라는 통념이 지배하고 있는 듯한데 그 이면에는 독일에 대한 “심각하고 원리 원칙대로 사는 사람들의 나라” 따라서 “예술이나 디자인과는 어쩐지 먼 나라”라는 선입견도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도 바우하우스 움직임 이후 20세기 독일 조경이 미국 혹은 영국과는 또 다른 독자적인 길을 걸어 왔다는 사실이 가장 큰 작용을 한다고 보아야겠다.
이에 독일의 독특한 20세기 조경이라는 배경이 낳은 대표적 조경인들의 생애와 작품을 두 회로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그 중 오늘 얘기할 칼 푀르스터는 스스로 조경가(Landscape architect)라고 불리기를 거부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20세기 독일 조경의 대부역할을 담당하였던 인물이고, 칼 푀르스터를 모르고는 독일의 현대 조경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그의 생애와 작품을 먼저 소개하기로 한다.
칼 푀르스터는 1970년에 96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30여년이 지난 오늘도 그의 영향력은 생생하게 살아 있어 그가 표방한 “일곱계절의 정원(Garten der sieben Jahreszeiten)”과의 씨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표현주의 예술과 (Expressionismus) 바우하우스라는 쌍두마차를 타고 20세기의 관문을 선두로 질주하던 독일이 20년대에 불현듯 기수를 바꾸어 모더니즘의 길을 떠나 버린 데에는 1차 대전, 2차 대전과 나치라는 역사적 변수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1차 대전 이후 독일에서는 민족적 주체성을 찾으려는 사회전반의 움직임과 더불어 새로운 조경의 방향을 잡으려는 격렬한 태동이 일었고, 이 태동은 나치 정권이 들어서기 직전인 1929년을 전후하여 ‘新풍경주의’라는 새로운 조경양식을 낳게 한다.
新풍경주의는 결국 독일식의 모더니즘인 셈인데, 이로서 독일은 국제주의 모더니즘과 (Internationalismus) 정식으로 결별을 선언한다.
新풍경주의는 이후 독일 20세기 조경의 기틀이 되었고, 1960년대 말 환경운동이 여기서 갈라져 나오게 되는데 이를 탄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세 명의 조경인이 칼 푀르스터, 헤르만 마테른, 헤르타 함머박허이다. 다음 호에 소개하게 될 헤르만 마테른, 헤르타 함머박허는 젊은 부부로서 당시 신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으며 칼 푀르스터는 이 둘의 代父역할을 한 사람이다.
특기할 것은 칼 푀르스터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엄밀한 의미에서 조경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원래 정원사였고 정원사이기를 고집하였으며 동시에 자연 철학자였다. “나는 다시 태어나고 또 태어나도 정원사가 될 것이다.” 혹은 “온 세상 사람들이 정원사라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라는 말은 괴테의 “신이 나를 정원사로 만들었다면 나는 더 행복했을 것이다.”라는 말을 이어 받는 것으로 기실 푀르스터는 괴테의 낭만주의적 고전주의의 유산을 그대로 이어 받고 있다고 봐야 한다. 정원사의 사회적 위치를 확고하게 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한 그는 평생 3백여종의 숙근초화류를 육종하였고 30권의 책을 썼다.
그는 낮에는 정원을 만들고 해가 지면 포츠담 자택 서재의 녹색 전등갓 아래서 글을 쓰는 생활을 70여년간 지속한다. 마지막 날까지 푀르스터는 조경과 집필의 작업을 멈추지 않았는데 그가 그리 오래 산 것은 정원사로서 할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라고 그의 제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의 소망은 “온 세계의 정원화”였고, 그 방법론으로 세계 곳곳에 전시용 정원을 만들어 네트워크로 연결 할 것을 제시한다.
실제로 그는 1910년 그의 저택 정원을 전시용 정원으로 개방하고, 1934년 포츠담 프로인트샤프트 섬에 두 번째의 전시용 정원을 짓는데 성공하며 그와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훗날 그의 제자들이 전 유럽에 세운 전시용 정원이 현재 서른 곳을 헤아린다.
그의 저택과 정원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명한 녹색 전등갓을 포함하여 그의 서재는 지금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수많은 그의 글들은 자연철학뿐 아니라 샘솟듯 하는 정원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로 점철되어 있는데 그만의 독특한 언어구사와 최상급으로만 진행되는 자연예찬은 오늘의 정보문화 시대의 정서로는 읽기가 벅찬 감이 있어 “너무 달콤하기에 쓴 독주로 중화시켜가며 읽어야 한다.”는 ‘푀르스터 독서 방법론’이 제시될 정도이다.
그는 유럽 전역에 수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단 한 장의 도면도 그려 본 적이 없는 조경인 아닌 조경인이다. 그럼에도 그를 기리는 기념정원이 곳곳에 만들어 지고 있는데 예를 들어 정기적으로 열리는 정원전시회에는 칼 푀르스터 이름으로 그의 아이디어를 딴 일곱 계절의 정원을 만드는 것이 마치 필수 과목처럼 되어 있다.
고 정 희 Go, Jeong-Hi 삼성에버랜드(주) 환경개발사업부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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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워스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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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스투어헤드(Stourhead)
스투어헤드와 헨리 호어 가문 런던에서 차량으로 2시간 정도 가면 스톤헨지가 있는 윌트셔 지방의 스타우어턴 마을에서 18세기 영국정원을 대표하는 스투어헤드를 찾을 수 있다. 스투어헤드 역시 National Trust가 관리하는 영국정원이다. 스타우어턴 마을은 원래 스타우어턴 가문의 터전이었다. 1448년 존 스타우어턴 경이 이 곳에 경계를 치고 공원을 조성하였지만, 1704년 가문이 몰락하면서 1717년 은행가인 헨리 호어가 이 토지를 매입하게 된다. 1725년 헨리 호어가 죽고 아들인 헨리 호어 2세가 20세의 나이로 이 땅을 물려받게 된다. 젊은 시절 헨리 호어 2세는 은행일에 별 관심이 없었고, 이 곳에 머물지도 않았다. 40세가 되면서 은행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스투어헤드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1744년에서 1780년까지 정원을 점차 완성해갔다. 그의 개인적 삶은 행복하지 못했다. 두 번째 부인은 그의 나이 40세 전에 죽었고, 이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그는 두 딸과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은 이태리여행을 하다 천연두로 젊은 나이에 죽게 된다. 정원을 만드는 데 온갖 심혈을 기울인 것도 가족을 잃은 상실감을 달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헨리 호어 2세가 정원을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는 이태리 여행에서 비롯된다. 그의 아내가 죽자 그는 3년 동안 이태리로 그랜드투어(당시 유럽 지식인들은 문명의 발상지인 이태리로 여행하는 것이 유행이었다)를 한다. 이 곳에서 이태리 풍경을 그린 클로드 로랭, 니콜라스 푸생, 가스파르 푸생 등의 풍경화에 감명을 받고, 이것들을 수집하였다. 로랭과 푸생의 회화가 포착한 풍경은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이었고, 이 풍경화 안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야기가 가상적인 이미지로 첨가되곤 하였다. 이 화가들의 덕택으로 당대의 사람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눈 뜨게 되었다. 헨리 호어 2세는 스투어헤드로 돌아온 후 풍경화의 이미지를 정원 속에 형상화하고자 하였다. 클로드나 가스파르의 꿈은 영국 귀족의 소유지 내의 정원 속에 작은 자연으로 되살아났다. 미술사학자 곰브리치는 영국의 아름다운 전원 풍경 속에는 화가의 사인이 들어갈 만 하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실제로 헨리 호어 2세는 가스파르와 푸생의 그림을 소유하였고, 정원의 어떤 지점은 ‘매혹적인 가스파르의 그림’을 닮고 있다고 말하였다. 소위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드는 시도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정원의 입구에서 보는 팔라디오 다리를 지나 판테온을 바라보는 풍경은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 걸려있는 클로드 로랭의 ‘Coast View of Delos with Aeneas’와 너무나도 유사하다(헨리 호어 2세가 이 그림을 보았는지는 확인 할 수 없다). 스투어헤드 정원의 곳곳에는 18세기 이 곳에서 풍경을 그린 화가들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예전의 풍경화의 이미지는 현재의 정원 모습과 거의 유사하다. 풍경화는 정원을 낳고, 정원은 다시 풍경화를 낳았다. 헨리 호어 2세가 죽은 후 손자인 리처드 콜트 호어경이 스투어헤드를 물려받았다. 그는 이 곳을 물려주며 가업인 은행사업에 스투어헤드를 담보로 삼을 수 없음을 유서에 명시했다. 그는 친구인 챨스 해밀톤의 풍경식정원 페인스힐이 사업의 실패로 다른 사람에게 팔려나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스투어헤드의 운명을 걱정했다. 콜트 호어경은 정원의 원형을 가능한 한 보존했고, 정원에 액센트를 주는 초화류 등의 식재를 보강하기만 했다. 이후 몇 대를 걸쳐 이어 내려오다 헨리 호어 6세는 유일한 상속자인 아들이 죽자 1936년 National Trust로 스투어헤드를 기부하였다. 헨리 호어 6세의 부인인 알다는 스투어헤드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나는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을 보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들이 이 곳에서 스스로를 즐기는 것을 보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누구도 이 곳을 문 닫게 할 권리는 없다. 우리의 후손들도 이 곳을 보고 즐기기를 바란다.” 이렇게 영국 귀족의 개인 정원이 공공을 위해 기부되면서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오늘날에도 18세기의 정원을 일상 속에서 즐길 수 있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 중략 … 천의 얼굴, 스투어헤드 호레이스 월폴은 ‘정원술은 시와 회화와 겨루는 자매예술’이라고 했다. 스투어헤드는 문학적 텍스트와 회화적 이미지가 교직되고 있는 대표적인 영국 정원이다. 아울러 스투우헤드는 영국에서 다양한 식물상을 관찰할 수 있는 정원이기도 하다. 스투어헤드는 다양한 얼굴을 지닌 정원이다. 방문객은 각기 다른 관심으로 이 곳을 찾기도 한다. 정원의 식물책을 들고 관람하는 사람들, 지적인 알레고리를 해독하려는 방문객들, 그저 한가로이 산책하는 사람들. 저마다 스투어헤드라는 정원의 두께를 한겹씩 벗겨내며 이 곳에서 머문다. 스투어헤드는 또한 풍경화를 그리기에 좋은 곳이기도 한다. 전경, 중경, 후경의 깊이가 곳곳에 숨어 있고, 자연과 대비되는 건축물이 풍경화 그리기에 좋은 구도를 형성한다. 계절별로 풍경화를 그리는 이벤트도 펼쳐진다. 5-6월에는 화려한 형형색색의 초화류로, 9-10월에는 갖가지 단풍으로 스투어헤드의 모습은 변신한다. 스투어헤드를 찾을 때는 풀발에서 피크닉 준비를 해도 좋을 듯하다. 조 경 진 Zoh, Kyung Jin 서울시립대학교 건축도시조경학부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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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 흐트러뜨림과 바로잡기
들어가는 이야기, 근정전과 인정전
경복궁의 근정전과 마찬가지로 창덕궁의 인정전은 반듯한 회랑에 둘려 좌우가 엄정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워낙 궁의 엄격한 범제가 있어서 그렇기도 하거니와 궁궐건축으로서 그러한 분위기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인정전의 조용한 분위기는 반드시 안내자를 따라 단체로 움직여야 하기에 관람객의 자유로운 행동으로 인한 어수선함이 없어서 우선 그렇고, 또 이렇듯 도심 한가운데에서 현대건축의 숲에 아랑곳하지 않고 낮은 저층건축의 전각 속에서 한가로이 지낼 수 있는 바탕이 되어 있어서 더욱 그럴 수 있겠다.
한 무리의 관람객이 안내자의 열성어린 설명을 들으면서 지나간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우리는 궁이든 절이든 어디에서나 우루루 가장 중요한 건축물로 몰려간다. 그렇게 달려갔다가는 중요한 그림을 만나고는 곧장 그 자리를 뜬다. 그리고는 다른 볼일을 찾아 나선다. 하긴 왕이 지내던 곳에 왔으니 왕이 있던 곳을 보는 것이고 절에 왔으니 부처님 모셔져 있는 곳을 보았으니 목적을 달성한 셈이 아닐까? 그런데 거기에 무엇을 빼 놓았다는 듯이 그렇게 따지고 드느냐고 반문하면..., 안 되지.
절이든 궁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곳이든 목적한 곳을 눈여겨보고는 그냥 되돌아 나오거나 여기저기 둘러보기는 하지만 눈여겨보지 않는 습관은 많이 손해 보는 일이 될 수 있다. 들어가면서 감상하는 것 못지않게, 한번쯤 뒤를 돌아다보는 습관의 중요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오늘 인정전에서는 거기에 덧붙여, 문간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똑바로 보이는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을 이야기해 볼까한다.
궁이든 사찰이든 아니면 상류주택이라 이름 된 옛 건축물을 마주하고 보면, 한눈에 들어오는 모습으로는 좌우가 반듯한 대칭의 균형을 지니는 것 같지만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한쪽을 흐트러뜨려 놓은 소위 파격이 발견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를 두고 보통 한국건축에서 발견되는 破格(파격)의 美(미)라고 부르곤 한다. 우리의 전통건축에서 보이는 이러한 파격은 문자 그대로 흐트러뜨려 놓은 모습일까, 아니면 균형을 맞추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의 결과일까?
인정문 드날목의 경관
기왕 인정전에 왔으니 들어가면서도 보고 돌아 나오면서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인정문은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문안으로 한 걸음 들여놓기 전에 인정문 처마 아래서 인정전을 한번 관조해 보도록 하자.
그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하기로 해보고, 일단 인정전의 월대에 올라 몸을 돌려 들어오던 방향으로 눈길을 돌려 보자. 인정문 너머로는 바깥의 좋은 나무가 무리를 이룬 모습이 보이고 그 너머로 남산 한 부분이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그 옆으로 회랑 울타리 너머로 서울의 고층 건물이 현대도시의 면모를 자랑이라도 하듯이 남산 기슭 쪽으로 막 몰려오다가 걸음을 멈춘 듯 서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잠시 현대와 전통이 한데 어우러진 장관을 만나보는 것도 인정전의 이 자리가 우리에게 주는 좋은 기회요소가 될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조경의 과업을 짊어지고 도시의 경관을 책임지는 업무를 담당하는 전문가라고 한다면 인정전에서 내다보이는 이 광경의 아름다움만을 취할 일이 아니라, 앞으로 이 도시의 경관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 것인지 중요한 과제를 만난 일임을 생각하게 되리라. 도시의 경관을 적절히 통제하고 질 높은 경관을 유지하는 일, 그건 가로를 차지하고 들어서는 건축물 하나하나에 대한 통제와 조절의 일일 뿐 아니라, 상당히 먼 거리에서 영향을 줄 시각경관의 광역적인 안목을 가지고 다루어야 할 것임을 생각하는 계기를 만난다. 이것은 궁에 국한된 일이 아니라 사찰이든 서원이든 또는 다른 여타의 무수히 많은 역사물의 경관보존과 관련되어 주위의 남다른 경관이 어떻게 시각적인 침범을 하게 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과제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한 10여 년 전 어느 날, 카메라를 메고 정독도서관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매표소 관리하시는 분이 ‘여기서는 사진촬영을 할 수 없노라’는 것이었다. 왜 그러냐고 하였더니 청와대 방면으로 훤히 내려다보이기 때문에 그러노라고 했다. 청와대가 아니라 경복궁을 한눈에 내려다보면서 사진 몇 장을 찍으려 한다고 사정했더니 정 그렇다면 도서관 관리하는 책임부서에 가서 허락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성가시게 할 이유가 있나 싶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고 해서 사진촬영은 하지 않겠노라고 약속을 하고는 그냥 구경만 하고 왔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서관 앞마당 한쪽에는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새겨 놓은 안내 표지판이 하나 있었다. 거기서 정선의 그림에 표현된 인왕산의 진경산수를 실제로 그렇게 만날 수 있음을 친절하게 안내해 준 역할을 한 것이었다. 이제는 그렇게 사정을 한다거나 몰래 어떻게 한다거나 하는 일이 전혀 없이 되었다. 민주화가 되어서라거나 개방사회가 되어서라거나 하는 이야기도 전혀 아니다. 정독도서관 마당 어느 곳에서도 인왕산이고 경복궁이고 한 귀퉁이나마 바라볼 수 없이 되었다. 정독도서관의 울타리를 높여 놓아서도 아니고 아무도 그 바깥을 내다보지 못하도록 금지해 놓아서도 아니다. 담 너머 동네의 집들이 삼층 사층으로 치솟아 올라와 있어서. 일석이조의 성과를 두고 흐뭇해 할 것인지, 아니면 미처 그런 일이 생길 것을 고려하지 못한 처사였는지는 알 수 없다.
정독도서관과 인왕제색도의 현장(?)의 관계를 떠올리면서, 인정전 월대에서 나는, 역사경관의 보존과 역사물의 관리라는 것이 문화재 주변 몇 미터 반경에서의 규제라는 차원에 그치는 일이 아니라는 극히 자명한 일을 생각하고, 도시경관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지를 꿰어 차고 있어야 할 책임과 의무조차 역사경관을 다루어갈 사람들의 몫이어야 할 것을 확인해 보게 된다. 최소한 관람객의 보는 즐거움을 가로막지 않게 한다는 명목 하에서 만이라 하더라도. … 중략 …
이제 원래의 우리 이야기 화제로 돌아오자. 인정전을 정면으로 보면서 인정문 처마에 서서 한참을 관조한다. 인정전의 양 옆 날개 부분에서 파격이 생긴다. 이 파격은 인위적인 파격의 미를 추구하는 일환으로 일부러 한 것이었겠는가, 아니면 다른 피치 못할 여건에 따른 자연스런 처리이며 그 와중에 가장 대칭을 유지할 수 있는 대칭구조의 극치라 일컬어야 할까?
전통조경, 비단 조경이고 건축이고 구분할 이유도 명분도 없이 뭉뚱그려 전통경관에서 비쳐지는 대칭의 구성이며 엄정한 대칭을 피하여 소위 파격의 미를 가져온 구성은 일반적으로 민가에서 어렵지 않게 보아오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를 따라 우리는 곧잘 “대칭이면서 대칭이 아닌”, “파격의 미”를 추구한 것으로 이야기해 오고 있다. 그리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심심파격, 심심해서 한번 뒤틀어놓은 것과 필연적으로 그리 되어가는 것은 서로 다른 상황임에 틀림없다.
민가에 있었던 것은 그것대로 또 특수한 상황으로써 전개되었겠지만, 일단 오늘 우리의 이야기는 인정전이라고 하는 궁의 정전을 두고 한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파격의 추구가 아니라 대칭적 구성을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을지 모르는 몇 가지의 기미를 살필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들의 기존에 해 온 생각들을 잠시 정리하고 가야할지 모른다. 경복궁 근정전에서도 그랬듯이, 창덕궁 인정전에서도 자연을 어떻게 하지 않고 슬그머니 피하듯 스며들어 가면서 기필코 엄정한 대칭을 이루기 위한 기막힌 처리를 만날 수 있었다. 화계와 담장 그리고 회랑의 처리, 북악의 봉우리에 대칭되는 전각의 구축과 같은 것이 확연히 눈에 띈다. 전통경관으로부터 배우는 친환경적인 처리와 엄정한 원칙의 고수를 위한 여유로운 우회. 그것이 오늘 우리가 만난 고도의 디자인 사례가 아니었나 싶다.
정 기 호 Jung, Ki Ho·성균관대학교 건축·조경 및 토목공학부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