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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
    1990년대 초, 이 나라에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광풍이 몰아닥쳤던 적이 있었다. 세계적 흐름의 하나가 유입되었다고 볼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이제껏 어깨너머로 훔쳐보고, 아쉬워하기만 했던 그림책(?)을 거금을 들여서라도 가질 수 있다는 기쁨이 더 큰 때였다. 더불어 일부 유학파나 조경가라 자부하는 이들의 전유물로 느껴졌던 관념적, 사상적 흐름이 우리의 곁으로 파고들던 때이기도 했다. 특히 이때 미국의 여러 예술경향들이 우리나라에 속속 소개되었고 이런 와중에 조경계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새로운 그림하나가 던져졌다. 당시 건축 뿐만 아니라 조경계에서도 누구나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했고 누구나 그 논의의 중심에 서기를 원했다. 모던을 겪지 않았던 우리에게 포스트모던은 무의미하다는 어느 분의 말씀도 이러한 시류를 이겨내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필자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그 주변을 서성거리기를 즐겼고, 아프리카의 하이에나처럼 논의의 중심에서 흘러나온 몇 점의 고기조각에 희열을 느끼기도 했었다. 이런 와중에 필자의 눈과 귀에는 Emilio Ambasz, Robert Venturi, Richard Ling, Robert Smithson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과 이론이 익숙해졌고, Peter Walker가 즐겨 썼다는 미니멀리즘 역시 비슷한 시기에 마주할 수 있었다. 무수한 헷갈림과 호기심속에 더욱 충격이었던 것은 Robert Smithson의 “Spiral Zetty"였다. 분홍빛 호수에 긴 나선형의 울퉁불퉁한 길은 그 근원이 땅에서인지 호수속인지를 헷갈리게 하는 대작이었다. 이러한 만남은 호기심에 호기심을 불러 유사 개념인 개념미술, Specific Art, Minimal Art, Performance 등으로까지 그 영역은 확대되어갔다. 본고에서 말하고자 하는 Robert Smithson을 살피기전에 먼저 당시의 미술계의 상황과 대지미술이라 일컬어지는 Earth Work 혹은 Land Art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는 것이 그 순서이겠다. 대지예술은 1967년 미국에서 처음 시도되었던 운동으로 대지예술가들은 미술계의 소비회로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수집가나 화상들을 위한 작품생산을 거부한다. 이러한 경향은 1960년대 일었다. 자연으로의 회귀의 연속선상에 위치하여 재현된 전시공간이 화랑 내에서 흙, 돌, 소금 등을 사용하여 작품활동을 한 이들은 그들의 작업장을 탈피하여 자연을 그들의 캔버스와 작업장으로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태도로 다분히 실험적 경향을 띄게 되었고, 지적이고 논리적 개념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실험성 및 태도로 기존의 영감과 직관에 의한 사고 내지는 완결성을 목적으로 하는 관습적인 태도에서 탈피하여 우리의 일상속으로 들어옴으로써 그간 아방가르드 미술과 일반인들 사이의 벽은 허물어지고 매체와 매체간의 새로운 의사소통의 구실을 하게 된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랜드아트의 개척자 중 하나인 마이클 헤이저(Michael Heizer)는 네바다 고원에 거대한 참호를 파고, 월터 드 마리아(Walter De Maria)나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 등은 자연에 직접 작업을 하거나 대륙의 공간을 연상시키는 작품을 선보였다. 이들의 궁극적 작품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변하는 형태와 작업의 모든 과정을 수록한 사진, 준비데생, 글, 필름 등이 포함되어졌다. Nancy Holt에 의해 편집된 “The writing of Robert Smithson"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앞서 예를 들었던 로버스 스미슨(1928~1973)의 작품 “Spiral Zetty" 역시 이러한 경향 속에서 제작되어진 작품으로써, 직경 48.8m, 총길이 457m이며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Salt Lake)의 소금호수 내에 설치되었다. 로버트 스미슨은 모든 현대 문명 현상이 기존의 자연의 흐름과는 다르게 혼돈상태로 향하여 추락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지구보호에 대한 경각심의 하나로 뻗어가는 생명력과 재생능력을 보여주길 원했다. 또한 이러한 자연 속에서의 전시행위 및 연출은 기존의 미술시장에서의 개인적 작품소유에 대한 틀을 깨는 것으로 그 누구도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작품을 “소유”할 수는 없게 되었다. 또한 그는 갤러리, 미술관 등 제도적 기관을 일종의 문화적 감옥이라고 표현하였다. 대체로 작가들은 표현의 자유와 함께 자신들 스스로 제도권의 장치에 대한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제도권의 장치들이 예술가를 장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작가가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것은 미술관과 화랑 문화에 복종하는 일이며 더 나아가 이것은 자신의 통제 밖에 있는 문화적 감옥을 지지하는 섭리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더 이상 당시의 모더니즘론에 응하지 않은 채, 자연에 대한 이해와 선사시대로 눈을 돌려 그곳의 지식을 섭렵한다. 이런 과정속에 그가 얻는 것은 “있는 자연 그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연 풍경식 회화의 경관이 아니라 퇴적지, 폐광, 사막, 오염된 강 등 인간의 손길이 닿았던 곳을 찾아다니며 아스팔트, 진흙 등을 이용하여 대상지와 선택 재료가 상호작용할 때의 특성과 속도를 관찰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스파이럴 제티의 경우 그 설치과정이나 그 이후에 일어난 자연적 현상 등은 그대로 노출됨으로써 자연환경과 작품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관계들을-특히 소금의 결정같은- 기록함으로써 다른 해석과 관계설정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가 이러한 작업과정을 통해 그려내고자 한 것은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 자연 “실체”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 병 훈 Lee, Byung Hoon 유림조경기술사사무소 실장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친근하고 인간적인 스케일을 지닌 영국 요크시의 가로와 시장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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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함브라 궁전
    지상의 낙원, 혹은 감각의 향연 카를로스 궁전을 지나 어두운 실내 홀로 들어서자 작열하던 태양 빛의 더운 공기는 사라지고 시원한 청량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어 ‘대사의 방’을 들어서자 멀리 알바이신 마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흰색 톤이 주조를 이루는 마을 풍경이 눈길을 끌었다. 경치를 빌려오는 차경의 수법은 이곳에서 그 빛을 발한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그라나다의 장님이라는 속담이 쉽게 수긍이 간다. ‘대사의 방’에서는 화려한 벽면 장식과 작은 분수가 우리를 압도했다. 많은 관광객들이 머물고 있었지만 보글보글 올라오는 분수의 물소리가 공간의 모든 소음을 흡수해 버렸다. 다시 실내 홀들을 지나 ‘아라야네스 정원’에 들어섰다. 단순하고 절제된 공간이었다. 정원의 연못은 거울처럼 주위의 건축물들과 하늘의 풍경을 잡아내는 스크린과 같았다. 겉으로는 닫힌 정원이지만 하늘을 비추어냄으로서 외부세계와의 소통을 이루어내는 듯하였다. 정원은 무척 감각적이면서도 신과 우주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다시 홀을 지나 사자의 정원을 만날 수 있었다. 실내 공간과 정원 공간, 즉 어두운 홀과 밝은 중정은 대비되고 교차되며 긴장감을 연출한다. 정원 중앙에는 12마리의 사자상들이 물을 내뿜고 있으며, 그 물은 다시 4개의 물길을 따라 흐르고 있다. 정원 외곽에는 124개의 대리석 기둥이 열 지어 서 있어, 정원을 바라보는 시선의 틀을 끊임없이 변화하게 만들었다. 벽면에 섬세한 장식이 이어지는 이 기둥들은 이슬람 지역의 가로에 늘어선 야자수를 연상하도록 만들어졌다 한다. 사자의 정원은 가장 대표적인 이슬람 정원의 원형에 가깝다. 페르시아 양탄자에 새겨져 있는 정원들을 보면 중앙에 분수가 있고 4개의 수로가 정원의 골격을 잡아 주고 있다. 4개의 수로는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온 물이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기혼, 피손의 문명의 발상지인 4개의 강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상징한다. 낙원이라는 뜻의 paradise는 ‘담을 두른 정원’이라는 뜻의 페르시아어의 pairidaeza가 그리스어를 통해 전해진 말이다. 코란에서 파라다이스는 지상에서 맛보는 낙원은 온갖 감각적 즐거움이 넘쳐 나는 곳이다. 지상의 낙원을 상징한 페르시아 정원에서는 꽃향기가 가득하고, 시원한 그늘이 있고, 마음껏 과일을 따 먹을 수 있는 나무들이 있다. 이곳에서는 무엇보다도 생명의 근원이 되는 물이 정원의 중심이 된다. 분수나 가로수는 페르시아 사막 지방에서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로서 이슬람이 그 원조이다. 이슬람 문명은 정원을 하나의 예술의 형태로 끌어올렸으며, 이슬람 문화가 유럽문화권에 전해 준 가장 큰 선물은 ‘정원’일 것이다. 알함브라 궁전 외부로 나와 언덕길을 한참 올라가다 보면 또 다른 낙원인 헤레날리페가 자리 잡고 있다. 알함브라 궁전보다 앞서 지어진 헤레날리페는 여름 별궁으로 식당이나 주거용 방이 없다. 단지 머물고 쉬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알함브라는 ‘붉은 성’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반면, 헤레날리페는 ‘가장 고귀한 정원’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한 때 이태리인이 이곳을 소유하는 바람에 일부가 이태리식으로 개조되어 원형이 조금 변형되기는 하였지만. 알함브라의 정원과는 또 다른 느낌의 다채로운 정원들이 펼쳐져 있다. 긴 장방형 수로로 꾸며진 중정은 한편의 물과 꽃의 유희를 보는 듯하다. 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의 영롱한 소리들이 공간에 퍼지고, 다양한 초화류는 형형색색 공간을 장식하고 있다. 이곳을 지나면 알함브라 궁전이 마주 보이는 전망대를 만나게 되고, 다시 이어지는 작지만 간결한 정원인 사이프러스 정원에 다다르게 된다. 영원한 삶을 상징하는 사이프러스 나무들로 꾸며진 이 정원은 잠시 머물며 정원의 의미를 적합한 곳이다. 그라나다의 왕들은 어두운 사이프러스 숲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햇빛과 그 빛을 받으며 부서지는 가는 물줄기를 보면 영원불멸은 소망했을 것이다. 루이 마시농은 헤레날리페의 망루에 있으면 꿈꾸게 된다 했다. 슬프지는 않지만 멜랑코리한 꿈을. 그 꿈들은 실타래처럼 얽히게 된다. 마치 실타래처럼 연결된 정원의 물길처럼. 알함브라에서 헤레날리페에 이르는 지역은 다양한 모습의 정원들이 구석구석 숨겨져 있다. 마치 정원에 관한 옴니버스 영화를 보는 것처럼 여러 가지 빛깔이다. 때로는 밝고 경쾌하게, 때로는 고요하고 적막하게. 물의 유희도 다채로움의 극을 보는 듯하다. 이슬람 건축과 장식 그리고 정원은 그라나다의 풍광과 어우러져 잠시도 한 공간도 눈을 떼지 못하도록 우리의 감성을 자극한다. 이곳에 머무는 순간순간은 지루함을 거두어도 될 것이다. 알함브라 궁전의 ‘두 자매의 방’의 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써 있다. “나는 정원이다. 매일 아침 새로운 아름다운 옷을 입고 나타난다. 나의 옷을 세심하게 관찰하라. 당신은 장식에 대한 어떤 말보다도 더 깊은 감흥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알함브라 궁전은 아름답지만 애절한 구석이 있다. 이 곳에서 머무르는 동안은 영원함과 소멸, 기쁨과 슬픔의 이미지들이 교차되어 진다. 아마도 그 까닭은 알함브라 궁전이 담고 있는 애절한 역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조 경 진 Zoh, Kyung-Jin 서울시립대학교 건축도시조경학부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일본 아미타바이엔 한국정원을 보고 한국 전통조경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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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경조형과 도자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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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idcote Manor 정원
    영국 Gloucestershire 지방에 자리 잡고 있는 Hidcote Manor 정원은 20세기 정원예술의 경계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늘날까지 정원사에서 중요한 역할과 함께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20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매우 매력적인 정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원이 위치하고 있는 Cotswolds 지역은 해발 180m 정도로 바람이 심하고 쌀쌀한 날씨로 정원이 자리 잡기에는 그리 이상적인 장소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정원이 자리 잡고 있는 Chipping Campden 마을이나 주변의 Broadway 등 조그만 마을들은 방풍림을 겸한 생울타리 수벽이나 수려한 자연환경으로 영국 내에서도 매혹적인 풍광으로 유명하며 그 중심에 정원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매혹적인 자연풍광 속에 새로운 문화풍경으로서의 정원에 Genius Loci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 정원 조성개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테마별로 조성된 각각의 공간이 생울타리 수벽 등으로 둘러싸여 느슨한 구성으로 이루어진 듯 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짜임새 있는 조화를 이루고 있는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200m에 이르는 Long Walk는 편안하게 느껴지는 주변의 자연환경과는 구별되는 절제되고 균형감 있는 공간을 보여주고 있다. 17세기의 건물인 Manor House는 특별히 지배적으로 돋보이지는 않지만 눈에 띠지 않게 정원구성의 중요한 시각적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정원관람을 시작해서 처음 접하게 되는 부분은 Old Garden이며, 이곳에서 원형의 수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으로 연결되어 계속해서 만나게 되는 붉은색의 화단이 이 정원에서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아름다운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잔디로 포장된 길 양쪽으로 조성된 붉은색의 화단은 계절별로 각종 붉은색의 꽃과 붉은 잎을 가진 소관목들을 만날 수 있는 아름답고 인상적인 공간으로 후에 설명하는 하얀색의 정원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붉은색의 정원 끝부분에 낮은 계단과 접하여 좌우로 두 개의 파빌리온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부터 Hidcote Manor의 특징적인 장소 중의 하나인 사각형으로 다듬어진 수벽 형태의 소규모 Allee로 구성된 Stilt Garden이 계속 연결되어져서 그 끝부분은 마치 보행로의 종점처럼 보여진다. 붉은색 정원과 Stilt Garden은 파빌리온을 중심으로 하나의 축을 형성하듯 이루어 있으며 좌우가 서로 다른 형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붉은색 벽돌건물과 하얀색의 창문틀로 조화를 이루는 두 개의 파빌리온은 Hidcote Manor의 상징물로써 뿐 아니라 전체 정원에서 T자 형태의 축을 이루는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정교하고 세심한 배치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관람객들은 파빌리온을 통해서 또 다른 하나의 축으로 이루어진 200m 길이의 잔디로 포장된 Long Walk를 인상적으로 만나게 된다. 김 인 수 Kim, In Su 환경조형연구소 그륀바우 소장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이란 쉬라즈
    -시와 장미로 대표되는 페르시아(Persia)문화의 심장- 수도 테헤란(Teheran)에서 남쪽으로 935km 떨어진 인구 120만의 쉬라즈(Shiraz)는 이란(Iran) 남서부 파르스(Fars)주의 주도(州都)이다. 파르스주는 한때 세계를 향해 강력한 힘을 과시했던 고대 페르시아(Persia)제국이 탄생한 곳이다. ‘페르시아(Persia)’라는 이름은 이 ‘파르스(Fars)’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파르스지역이 최초의 통일왕조인 아케메네스(Achaemenes)왕조의 발상지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고대 제국의 명칭이 된 것이다. 키루스대왕(Cyrus the Great, 재위 BC 559-529)에 의해 첫 수도로 정해졌던 파사르가드(Pasargadae),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다리우스대왕(Darius the Great, 재위 BC 522-486)의 영화를 한껏 드러내고 있는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영원히 지속될 제국의 번영을 꿈꿨던 역대 제왕들이 묻힌 바위산 암벽묘(岩壁墓)가 있는 낙쉐루스탐(Naqsh-e Rustam)과 같은 페르시아제국의 고대 유적지들을 구경하려면 반드시 쉬라즈를 거쳐야 한다. 쉬라즈는 이러한 유적지들의 관문이자 거점의 역할을 하는 도시이다. 이 도시 외곽의 길목에는 ‘코란 게이트(Koran Gate, Darvaazeh Quran)’라 불리는 조형문을 설치하고 대규모 관광단지를 조성하여 관광도시로서의 상징성을 높이고 있다. 페르세폴리스의 석판(石板)에 새겨진 ‘SHIRA-ITS-TSI-ISH’가 당시 쉬라즈의 지명으로 알려지는 등, 이 도시의 역사는 대단히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국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던 이 도시가 파르스지역의 중심도시로 성장한 것은 3세기 무렵인데, 이후 역사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중심도시로서의 위상을 이어오고 있다. 흔히 쉬라즈를 “시와 장미의 도시”로 지칭한다. 이는 이 도시가 13-14세기에 사디(Saadi, 1190-1290)나 하페즈(Hafez, 1320-1389)와 같은 유명한 시인들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그들로 인해 쉬라즈는 문학과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지금 그들은 없지만 그들이 안치된 묘소는 그들을 추념하는 사람들과 항상 함께 하고 있다. ‘사디의 묘(Aramgah-e Saadi)’와 ‘하페즈의 묘(Aramgah-e Hafez)’는 이 도시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유적지에 해당하는데, 묘소라는 암울한 공간이라기 보다는 잠시 시의 세계에 빠지게 되는 일종의 정원이나 공원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100년을 살았다는 사디는 ‘과수원(Orchard)’이란 뜻의 ‘부스탄(Bustan)’과 ‘장미정원(Rose Garden)’을 뜻하는 ‘골레스탄(Golestan)’을 저작한 인물이다. 현재 도심의 북동쪽에 있는 사디의 묘는 이란의 근대화와 개방화에 주력했던 팔레비(Phalevi)왕조가 통치하던 1952년에 개축된 것이다. 시신이 안치된 석관(石棺)은 회랑(回廊)과 둥근 돔(Dome)의 지붕이 시각적으로 돋보이는 대리석 건물의 중앙에 있다. 석관과 주위 벽면에는 그의 시가 새겨져 있는데, 여기서는 문맹(文盲)이 따로 없다. 아라비아(Arabic) 서체로 휘갈겨 새겨진 그의 시구(詩句)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다만 음각(陰刻)으로 새겨져 입체감이 돋보이는 시구는 건물 내부를 장식하는 화려한 문양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 주변은 울창한 숲과 장미를 비롯한 화려한 꽃들의 화단으로 꾸며져 있고, 건물 지하층은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휴게실로 사용되고 있다. 지하 휴게실에 조성된 우물 형상의 연못에는 고기들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다. 이처럼 지하층에다 연못을 설계한 사례는 좀처럼 보기가 어려운데, 연못은 지하수로인 카나트(Qanat)로 연결된다. 카나트는 강수량이 매우 부족한 지역에서 물을 공급하는 시설로, 땅 속으로 깊게 판 우물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지하수로이다. 우물의 깊이는 수십 미터에 이른다. 깊게 판 우물에는 땅 속의 주변 습기가 모이게 되고, 이러한 습기가 모여 물이 고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로 믿기에 어려운 이야기가 이곳의 신비함을 더하고 있다. 연못 속의 고기들은 사디의 시심(詩心)을 좇아 이름모를 먼 곳에서 카나트를 따라 이곳에 모인 것이라 한다. 아름다운 운율의 서정시(抒情詩)인 가잘(Ghazal)의 대가인 하페즈는 세계 각국을 떠돌았던 사디와는 달리 일생을 쉬라즈에서 보냈다. 그는 이란의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국민적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Goethe)는 위대한 시인의 영혼으로 채워진 그의 시를 “별빛이 반짝이는 우주와 같은 신비한 구성(Turning like the starry spheres)”으로 격찬했다. 현재 도심에 위치해 있는 하페즈의 묘는 사디의 묘와 같이 팔레비왕조가 통치하던 1953년에 개축된 것이다. 울창한 숲과 시원스런 연못으로 정원을 꾸미고, 그 중앙의 화려한 원형 정자에다 석관을 안치했다. 강 철 기 Kang, Cheol Gi 경상대학교 산림과학부 교수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Westonbirt 가든 페스티벌
    영국은 세계적으로 정원이 많은 나라로 유명하다. 영국인들 누구나 정원이 딸린 집에서 Gardening을 취미로 살고 싶어한다. 영국의 어느 공공정원을 가봐도 한 손에는 메모지와 한 손에는 필기도구를 가지고 식물 하나 하나를 열심히 살피며 메모를 하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이토록 영국이 정원의 나라라는 명성을 얻는 데에는 Flower Show, Garden Show의 역할이 많은 영향을 미쳐왔고 중요한 부분이었다. 1년 중 영국 전역에서는 크고 작은 정원관련 행사가 120여 회가 넘게 개최된다. 형태는 다양하다. 영국왕립식물원이 개최하는 세계적인 플라워 쇼인 Chelsea, Hampton Court와 같이 여러 정원과 화훼 그리고 정원관련 물품을 전시 판매하는 형태부터 정원관련 산업에 관한 박람회 그리고 Westonbirt와 같이 정원만 전시되는 형태가 있다. Westonbirt International Festival of Gardens은 영국 남서부 브리스톨 북쪽에 위치한 Westonbirt 식물원에서 개최되는 정원 전시회이다. 이 행사는 영국에서 첫 번째로 열린 오직 하나뿐인 최신 현대 정원 디자인 축제이다. 이 행사의 안은 TJM Associates 2명의 중역에 의해서 계획되었고 Forestry Commission (산림청)의 공동작업으로 2002년에 탄생하였다. 올해로 3회째를 맞이하는 Westonbirt International Festival of Gardens는 다른 전시회처럼 많은 수의 관련업체가 참여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건축, 조경, 미술, 조각 그리고 사진분야 등 다양한 분야에서 200개가 넘는 작품이 접수 되어 13개의 정원이 선정 되어 전시된다. 이것은 프랑스의 Chaumont-sur-Loire의 정원전시회와 캐나다 퀘벡주의 International Garden Festival of Metis와 같은 정원전시회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형태의 영국식 정원전시로 다시 만들어졌다. 선정된 13개의 정원은 현대적이며 새로운 스타일의 정원을 소개하고 있다. 1, 2회 전시를 보면 약 3개월에 달하는 전시기간 동안에 10만 여명의 관람객이 다녀갔고 약 2백만 파운드의 경제적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비록 3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해가 거듭 될수록 성장하고 있으며 인지도가 높아지고 홍보가 되면서 올해는 더욱 많은 내방객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광활한 Westonbirt식물원을 배경으로 한편에 조용히 마련된 행사장에는 독창력, 표현력, 재료의 사용, 자연에 대한 이해와 영감 등에 의해서 13개의 정원이 선출되어 전시되고 있다. Westonbirt International Festival of Gardens은 단순 정원 전시 차원이 아닌 현대정원에 대한 새로운 시도와 도전, 다양한 분야의 참여와 정원이 예술의 한 장르로 승화하는 차원에서 가치 있는 큰 행사이다. 이 행사의 특색은 전통재료와 공간의 사용, 현대적 디자인 그리고 폐기물의 재활용이 두드려져 보이며 3개월이라는 전시기간을 통하여 정원이 사간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도 하나의 큰 특색이다. 이 정원전시회는 전적으로 정원디자인의 독창적인 방법을 경험할 수 있는 흥미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윤 상 준 Yoon Sang Jun Sheffield 대학 박사과정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가로림만(加露林灣)
    Caroline Bay “Prince Jerome Gulf를 목표로 하여 항해한 지 이틀 만에 도착한 곳은 Prince Imperial Archipelago의 남단에 돌출해 있는 해안선으로, Joachin Bay, Caroline Bay, Deception Bay가 서로 인접해 있는 곳이었다. 프랑스 정찰자들의 정보에 의하면 이 일대에 4,000명의 주민이 있는 촌락이 있다고 했다. 가능한 곳까지 만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으나 해안에는 촌락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19세기 후반의 어느 항해기록의 첫머리 일부다. 미지의 땅을 항해하다가 이들이 최초로 상륙한 곳은 Caroline Bay의 어느 한 어촌마을이었다. 어느 나라의 어느 해안인지 이 글만으로는 알 수 없다. 이 여행기에는 항해를 하면서 작성한 지도가 첨부되어 있다. 이 지도를 우리나라 서해안 일대의 지도와 맞추어 놓고 보면, Prince Jerome Gulf는 아산만이며, Prince Imperial Archipelago를 비롯하여 Caroline Bay, Deception Bay 등 영문으로 표기된 곳은 각각 덕적군도, 가로림만, 대호지만으로 불리는 태안반도 북쪽해안 일대임이 드러난다. 이들이 처음 상륙했다는 마을이 있는 Caroline Bay는 태안반도 북쪽해안의 가로림만을 말한다. 오페르트와 남연군묘 굴총 위의 글은 대원군 집권시절 우리나라 서해안을 항해한 유태계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여행기다. 우리에게는 남연군묘 도굴하려 왔다가 실패하고 돌아간 “나쁜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는 세 차례 서해안에 왔다. 그의 세 번째 항해는, 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왕실의 보물을 감추어 둔 보물창고를 털려던 것”이었으니, 결국 남연군묘를 도굴하려던 것이 주 목적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왜 그랬을까? 그 이전에 두 차례 서해안에 온 것은 무엇을 하려던 것이었을까? 오페르트의 말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서지적으로 또는 역사학이나 사회학적으로 따지고 보아야 할 일이지만, 이 글을 통하여 내가 다룰 바는 그 어떤 것도 아니다. 다만 오페르트는 순수한 민간차원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최초의 유럽인이자 서해안의 한적한 어촌과 해안을 두루 항해한 최초의 사람이었던 점을 주시하게 된다. 오페르트의 여행기를 잘 들여다보면, 근대 이전의 서울이나 도시가 아닌, 서해안 일대의 어촌의 경관과 사람들 그리고 풍습 같은 것을 생생히 전해 받을 수 있다. 굳이 전통조경이야기에서 오페르트를 들고 나온 것은 바로 그 점을 위해서이다. 오페르트의 여행기는 독일어와 영어 판으로 발간되었던 모양이다.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은 독일어판인데, 영어 판을 원본으로 한 번역본이 시중에 나와 있다. 오페르트의 세 번째 항해는 애초에 남연군묘를 굴총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졌고, 오페르트 일행은 아산만의 행담도에 정박한다. 행담도란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서해대교 중간 즈음에 맞게 되는 휴게소가 있는 곳이다. 오페르트 일행은 행담도에서 작은 배를 타고 지금의 삽교호가 있는 쪽으로 삽교천을 따라 들어와 구만이라는 곳에서 배를 내린다. 거기서 육로를 통하여 남연군묘로 향한다. 남연군묘에 도착한 오페르트는 “참으로 아름다운 경관”에 감탄을 한다. 개인적으로 그의 세 번째 여행기록에서는 별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 이야기에서는 첫째 항해와 두 번째 항해의 기록을 중심으로 다루어 볼까한다. (중략) Verfremdungseffekt, 또는 우리 경관 “낯설게 보기” 아직 오페르트의 여행기를 따라 답사여행을 시작하지 않던 즈음, 우연히 우석대의 김두규 교수와 오페르트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오페르트에 관한 한 역사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는 굴총사건이 어떨지 모르지만 경관을 다루는 입장에서 그의 여행기는 우리에게 익숙해 있는 우리의 경관을 다른 시각으로 만나게 해주는 역할을 하지 않는가 싶다는 식으로 나의 견해를 피력했던 것 같다. 그 자리에서 나는 김교수로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Brecht란 독일의 한 현대작가가 주창한 Verfremdungseffekt라는 중요한 개념이 있다고 했다. Verfremdung이란 대략 “낯설어지기” 정도의 뜻이 될 것 같다. 낯설어지기, 이미 우리 주변에 있어왔기에 너무 익숙하여 인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새삼 낯설어질 필요성을 이야기한 것이다. 나는 문학이든 문학이론이든 전혀 문외한이지만 평소 경관을 대하면서 항상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바로 낯설어지기라는 현대문학이론과 맞닿아 있었구나 싶다. 매일 보아온 일상 주변의 경관, 또는 자주 가 보지는 않았지만 워낙 우리 눈에 익어있는 우리의 산천이기에 자칫 세심하게 들여다보지 않고 지나칠 경우가 많은 것이다. 정말 그런가 싶다. 그 며칠 후, 집사람한테 Brecht의 Verfremdungseffekt를 아는가 하고 물어보았는데 (딴은 어찌 그런 걸 알겠나 싶었지만)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브레히트 희곡의 소외효과!”라는 것이란다. 물론 소외효과란 희곡 장르상에서는 그렇게 통용되지만 오히려 낯설어지기란 의미가 더 적합할 것 같다고 했다. 아주 가까이에 나름대로의 전문가를 두고 나는 머나먼 길을 돌아온 셈이다. 역사경관은 말할 것도 없다. 만약 우리가 역사경관을 가까이하고 이를 보다 근접된 연구를 하며 보다 실제에 다가가는 이해를 필요로 한다면 우리는 그들에 대해 아주 처음 만나는 듯 낯선 대상인 듯 다가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도굴범) 오페르트는 (참으로 묘하게도) 우리에게 우리의 경관을 새롭게 만나도록 자극을 주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오페르트를 역사학적으로는 어떻게 평가하여야 할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야 어떻게 평가되고 또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하는 점과 무관하게 그가 남겨 놓은 글을 통하여 우리는 구한말의 우리 옛 경관을 새롭게 접하는 기회를 삼을 수 있음이 틀림없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 절서·조화·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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