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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도의 이면을 항해하다 ‘신지도제작자’, 2015.8.5~26
    오지 여행가이자 국제 구호 활동가로 잘 알려진 한비야의 책 제목인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지도가 가진 사회문화적인 메타포를 잘 보여준다. ‘지도’란 우리가 잘 아는 세상을 의미하고 ‘지도 밖’이란 미지의 세계 혹은 소외된 공간이나 사람들의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무의식중에 우리는 지도를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정보로 받아들이곤 하지만 사실 지도는 만드는 사람의 정치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 그 안에 담기는 정보가 선택되고 가공된다. 즉 지도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관계망을 드러내고 시대의 관습을 투영하는 매체인 셈이다. 그래서 지역적 맥락을 중시하는 도시, 조경, 건축분야에서는 맵핑mapping을 분석 도구로 활용하고 더 나아가 디자인의 생성 도구로 확장하기도 한다. 맵핑이 디자이너에게 창조적 과정이 되고, 더 나아가 예술가들의 표현 방식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공간을 주관적으로 인식하면서 발생하는 실제와 재현된 지도의 간극에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충만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8월 5일부터 26일까지 송원아트센터에서는 통상적인 지도의 형식과 개념을 넘나들며 맵핑의 범주를 확장하는 전시 ‘신지도제작자’가 열렸다. 한국, 프랑스,독일 등 14명의 작가와 디자이너, 건축사가가 참여해 드로잉, 설치, 회화, 미디어아트, 디자인 등 다양한 형식으로 세상을 지도화했다. 지도와 예술의 만남, 예술가와 디자이너의 대화 “예술가와 디자이너의 작품에 대한 접근 방식이 워낙 다르고 작업에 담아내는 내용의 간극도 상당히 크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러한 양면을 모두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작품의 배치도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듯이 상대적인 방식의 작품을 의도적으로 병치했지요.” 전시의 기획자인 독립 큐레이터 심소미의 말처럼, 각자의 방식으로 활동하던 참여 작가들이 어떻게 맵핑을 해석하고 표현하는지 그 다양함에 주목하는 것은 ‘신지도제작자’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전시장 초입에 전시된 카롤린 코바쏜Caroline Cobasson의 ‘블랙아웃 맵Blackout Map’(2013)은 지도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흔든다. 블랙아웃 시리즈는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접이식 지도에 검은 스프레이를 뿌려 시각적 정보를 모두 지워버렸다. 마치 밤하늘을 보고 있는 듯한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어둠과 적막이지나간 자리에 언뜻언뜻 남아있는 지도의 흔적이 마치 은하수처럼 떠오른다. 코바쏜의 작업이 직관적이고 정서적으로 자연의 광대함과 무한한 신비의 세계를 열어준다면, 부로 데튜드Bureau d’tudes의 ‘세계 정부World Government’(2013)는 현실 세계의 구조적인 관계망을 논리적으로 보여준다. 동시대 정치·사회·경제 시스템의 보이지 않는 영역을 맵핑하는 카토그래피cartography 작업을 해왔던 작가는 자본주의 발전과 유형에 대한 관계망을 구체화한 ‘권력 지도’를 선보였다. 이 엄청난 양의 정보 앞에서 관객은, 작가가 구축한 세계를 해석하느라 머리가 바빠진다. 그러나 동시에 화면을 가득 채운 픽토그래픽pictographic과 컬러풀한 버블은 그 자체로 지도의 배후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권력의 아우라aura를 뿜어낸다. 반면 유창창의 ‘COME’ 시리즈는 불안과 공포를 신경질적으로 드러낸다. 작가의 메시지를 이해해보기 위해 지도 앞으로 한 발 다가서 보면 지도 안의 정보는 꼼꼼하게 지워져 있다. 유창창의 지도 작업은 2010년경 한참 사회가 각종 참사와 분쟁들로 소란스러울 때 등장산되고 흘러내리면서―실제 작품에 뿌려진 것은 작가의 정액이다―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전시장 한편에는 1966년판 유라시아 지질구조지도가 전시되어 있다. 벽면을 가득 메운 이 ‘순수한’ 지도는 과학적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에 충실하지만 그 자체로 훌륭한 디자인과 아름다운 색감을 보여주기도 해서 의외로 이 전시에 잘 녹아든다. 그 바로 옆에는 임선이의‘붉은 눈으로 본 산수’(2008)가 전시되어 있다. 지도의 등고선을 칼로 오려내 켜켜이 쌓아 올린 작업이다. 흔히 조경가나 건축가들은 대상지의 지형을 이해하기 위해 참고용으로 ‘콘타를 뜬다’. 그런데 임선이 작가는 무한한 수공의 노력을 통해 이러한 등고선 지도contourmap를 조각으로 만들어 새로운 풍경을 맵핑한다. 보이지 않는 장소, 보이지 않는 삶의 이야기 과거의 지도에서만 볼 수 있는 우리의 역사와 현재 진행 중인 분쟁의 이야기를 다시 기억하는 맵핑도 있다. 줄리앙 코와네Julien Coignet의 ‘군도Archipel’는 고지도에서부터 현재의 지도까지 시간을 달리하는 지도를 중첩해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준다. 작가는 구글 검색을 통해 한반도 주변 섬들의 과거와 현재 지도들을 한자리에 불러들여 가상의 풍경을 만들었다. 남한, 북한, 일본 등 세 나라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현재는 분쟁 중인 곳도 있고 과거에는 다른 나라 영토였던 섬도 있다. 이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통해 마치 고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영토나 국경의 개념이 얼마나 한시적인 상황을 말하는 것인지 드러낸다. 지도에 얽혀있는, 혹은 지도가 드러내지 않는 삶을 드러내는 작가들도 있다. 이들은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주관적 시선과 세계와의 관계를 표현한다. 린다 하벤슈타인Linda Havenstein의 ‘구룡 워크The Guryong Walks’(2015)는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지만 존재하는 ‘장소 아닌 장소no place’ 구룡마을을 찾아나서는 것으로 시작한다. 도시에서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 부분들을 들춰내는 작업은 은폐된 것들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예술의 임무라는 점을 다시금 환기한다. 김태헌은 너무 좁아서 지도에 잘 드러나지 않는 성남의 오래된 골목길을 걸으며 도시의 빛바랜 색들을 채집해 재현한 작업을 선보였다. 심소미 큐레이터는 “이 작가는 1990년대 말쯤 성남 개발에 대한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작업과 리서치를 많이 했습니다. 소위 요즘 유행하는 작업들을 일찍 시작한 셈입니다. 최근에는 작은 회화 작업을 주로 하셨구요. 선생님의 초창기작업을 연상하고 전시를 부탁드렸는데, 자연스럽게 그 두 가지 작가적 태도가 연계된 결과물이 나왔습니다”라며 작품의 배경을 설명했다. 김태헌 작가가 색을 채집하는 방법은 의외로 원시적이고 노동집약적이다. 일례로 오래된 문을 발견하면 그 표면에 접착용 셀로판테이프를 붙였다가 떼어낸다. 그리고 작업실로 돌아가 그 색을 똑같이 재현하는 방식이다. “수십 년의 때가 묻은 색을 페인트를 섞어서 똑같이 만들어 내는 작업이 너무 힘들었다고 합니다.” 마치 추상화처럼 전시되어 있는 ‘성남 구시가지의 색’(2015)은 이렇듯 작가가 직접 땀 흘려 채집한 45가지 골목길의 색들이다. 실제 작가들이 몸으로 체험하며 만들어내는 작업은 애초의 계획과는 다른 의외의 결과를 내놓기도 한다. 한국의 이주 노동자들의 삶에 관한 작업을 주로 해온 미디어아티스트 자우녕의 작업이 그렇다. 나룻배를 가지고 계셨던 아버님과 함께 광나루에 살았던 작가는 어린 시절 한강의 모래사장에서 뛰어 놀았다고 한다. 그기억 때문에 한강에 남아있는 모래를 찾아 전시하려던 것이 본래의 계획이었는데, 서울에서 남양주, 팔당댐까지 모두 걸으며 모래를 찾았지만 남아있는 모래사장은 없었다. 대신 사람들의 유품처럼 강물에 떠내려온 물건들을 발견했고 그 죽음의 잔재와 그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시장에서 복원했다. “처음에 이 오브제들을 보았을 때 기획자의 입장에서 너무 당황했죠. 그때 저도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보니 다른 전시물들에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있는 게 보였어요.” 그렇게 자우녕의 작품은 전시장의 한 구석에서 사람들의 삶을 애도하고 기억하면서 맵핑의 범주를 고민하게 한다. 그밖에도 전시장에는 시각을 청각으로 전환한 백정기의 ‘맑은 밤 혼자 걷는다’(2011)나 일상 속 장소에 깃든 개인적인 기억과 몸의 움직임, 주관적인 감성의 흔적등을 자신만의 지도화한 김정은의 ‘부유하는 장소 맵핑Floating Place mapping’(2015) 혹은 통계를 활용한 다이어그램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접근한 맵핑 작업들이 전시되어 있다. 경험이나 기억, 지각, 이데올로기, 사회 문제 등 지도에 담긴 주제의 폭넓은 스펙트럼은 ‘지도’의 복합적 성격과 가능성을 드러낸다. 한편으로 이번 전시의 상당수 작업들이 온전히 작업실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작가들이 몸으로 겪어낸 결과물이라는 점은 예술 작품과 공간을 다루는 디자이너의 작업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또한 전적으로 예술적 상상력에 의존하는 것 같지만 끝없이 반복된 노동 이후에 찾아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예술가와 디자이너의 공통된 숙명을 느끼게 한다.
    • 김정은
  • 셀가스카노의 서펜타인 파빌리온 2015 런던 하이드파크, 2015.6.25~10.18
    ‘런던에 상륙한 사이키델릭 번데기’, ‘무지갯빛 애벌레’등은 올해 서펜타인 파빌리온에 따라붙는 수식어다.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런던 하이드파크 내 위치한 현대미술관인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매년 여름 세계적인 건축가를 초청해 선보이는 한시적인 건축 프로젝트다. 요약하자면 낮에는 카페로 쓰이고 밤에는 포럼이나 오락을 위해 활용되는 300m2 면적의 파빌리온을 세워 약 4개월가량 대중에게 공개하는 것이다. 서펜타인 갤러리 측은 올해의 파빌리온을 지을 초청 건축가로 스페인의 건축 스튜디오 셀가스카노selgascano를 선정했다. 재미있는 디자인playful design과 대담한 색채 사용이 특징인 이들 신예 건축가가 완성한 파빌리온은 건축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던지며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한없이 가벼운 디자인 이번 파빌리온은 마치 두 마리 애벌레를 X자 형태로 겹쳐 놓은 듯한 모습인데, 스틸 프레임을 사탕 포장지같은 얇은 막과 리본이 이중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이 다채로운 색깔의 이중 외피는 반투명한 플라스틱인 불소수지필름(ETFE: 콘월에 있는 온실인 에덴 프로젝트를 덮고 있는 재료)으로 만들어졌다. 방문객들은 파빌리온의 여러 구멍을 통해 자유롭게 들어가고 나갈 수 있으며, 구조물의 외부와 내부 레이어 사이의 ‘비밀 통로secret corridor’를 통과할 수도 있다. 건축가는 대상지 자체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런던에서 이동하는 방식에서 이 작업의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레이어가 많아서 혼돈스럽지만 구조화된 흐름을 보여주는 런던의 지하철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영국의 왕립 공원에 번데기 모양의 파빌리온을 만든 셀가스카노는 부부 건축가인 호세 가스José Selgas와 루시아 카노Lucía Cano가 1998년 마드리드에서 설립한 건축설계사무소다. 셀가스카노의 작업은 건축에서 드물게 쓰이는 합성 재료synthetic materials나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이들은 독특한 색채와 자연을 참조하는 디자인을 추구했던 건축가 루이스 바라간Luis Barragan이나 리차드 로저스Richard Rogers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를 설명한다. 셀가스카노는 대중이 “구조, 빛, 투명성, 그림자, 가벼움, 형태, 예민함, 변화, 놀람, 색채 그리고 재료와 같은 단순한 요소를 통해 건축을 경험”하길 바랐다. 그 결과 탄생한 파빌리온의 “각 출입구는 색채와 빛 그리고 놀라운 형태의 공간을 통해 특별한 여행을 허락한다.” 서펜타인 갤러리의 디렉터인 줄리아 페이튼-존스Julia Peyton-Jones는 한 인터뷰에서 이번 파빌리온이 “여름내내 사람들이 만나고 커피를 마시고 생생한 이벤트가 펼쳐지는 장소”라며, 올해의 프로젝트가 ‘파티 파빌리온’이 되기를 희망했다고 했다. 서펜타인 갤러리는 매년 여름 금요일을 택해 서펜타인 파빌리온에서 열리는 이벤트 무대인 ‘공원의 밤Park Nights’을 기획해왔다. 올해 프로그램으로는 음악, 공연, 토크, 영화상영 등이 있다. 이러한 시즌은 서펜타인 갤러리의 공동 디렉터인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Hans Ulrich Obrist가 매년 10월진행하는 마라톤 행사와 함께 절정을 이룬다. 실제 올해 파빌리온의 심장부는 카페와 같이 사람들이 모이는 오픈스페이스다. 영국의 홍차 전문 브랜드인 포트넘앤 매이슨Fortum & Mason은 파빌리온 내에 베이스를 차리고 아이스크림 카트를 운영하고 있다. 방문객들은 파빌리온에서 아이스크림뿐만 아니라 이 브랜드를 유명하게 만든 애프터눈티 세트인 햄퍼링Hamperling도 즐길 수 있다. 이들의 디자인 의도는 매혹적으로 작동한다. 화창한 날이면 파빌리온의 벽과 바닥은 마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빛에 의해 몽롱한 색깔이 어른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밤이 되면 파빌리온 내부의 조명에 무지개처럼 (혹은 신호등처럼) 빛나는 ‘번데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미 이곳은 “인스타그래머들의 파라다이스”가 되었다. 사진 공유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인 인스타그램instagram에서는 이 형형색색의 빛을 발하는 동굴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다양한 포즈를 취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셀가스 역시 사진 재생이 파빌리온의 핵심 부분임을 인정했다.1 재미와 기능 사이 셀가스카노의 파빌리온은 투명성과 가벼움은 확보했으나 디테일과 안전 문제에 대한 지적은 면하지 못했다. 사실 리본 테이프가 스틸 프레임에 아슬아슬하게 엮여 있는 모습은 미덥지 않다. 비가 내리거나 바람이 불면 이 장난기 넘치지만 연약한 구조물이 자신의 모습을 지킬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2 그래서 건축의 기본적인 기능을 충족시키기 못하는 이 파빌리온은 ‘건축architecture’이 아니라 ‘사물thing’이라는 비판을 불러 오기도 한다. 한 건축 비평가는 “신은 디테일 안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s”는 미스 반 데어 로에 Mies van der Rohe의 경구를 떠올리며, “이 파빌리온은 6개월 동안 디자인되고 완성되는, 툭 등장했다 사라지는 재미있는 궁전이며 건축적 미덕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3 반면 셀가스와 카노는 이 파빌리온이 완성된 건물이 아니라 진행 중인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그들은 파빌리온 프로젝트가 “완벽하고 세련된 보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재료의 한계를 끝까지 밀어붙여 실험하는 기회”라는 생각을 피력했다. 그러나 이번 서펜타인 파빌리온의 디자인에 대한 일각의 비판(즉 디테일이 결여되었다거나 조잡하다는 평가)은 일부 짧은 조성 기간이나 제한된 예산 등의 기본 조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 셀가스는 한 인터뷰에서 제작비와 시간 부족으로 한 가지 재료만을 사용하려던 원래 계획을 변경했다고 밝히기도 했다.4 서펜타인 파빌리온 프로젝트는 건축가 초청부터 완성까지 최대 6개월을 넘지 않는다는 독특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위한 예산은 없다. 파빌리온의 조성 비용은 후원―올해의 주요 후원은 국제적 금융기업인 골드만 삭스(Goldman Sachs)가 했다―이나 현물지원, 그리고 완성된 구조물의 판매를 통해 충당된다. 그러나 이 판매 금액은 전체 비용의 40%를 넘지 않아야 한다. 이미 스밀랸 라디치Smiljan Radi 의 2014년 파빌리온은 하우저 앤 워스 갤러리Hauser & Wirth art gallery로 옮겨졌다. 올해의 파빌리온도 세컨드 홈Second Home에 팔려 LA에서 두 번째 삶을 시작할 예정이다. 경비는 많이 들지만 수명은 짧은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상당한 모금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이 좀더 스펙터클하고 오락적 성격을 강화한 구조물을 만들도록 압력을 가한다는 주장5도 설득력을 가진다. 영구적으로 지속되는 실제 프로젝트에 비해 훨씬 더 실험적인 기회를 제공한다는 파빌리온 프로젝트는, 제작비 조달의 한계 앞에서 스폰서를 위한 기능 위주의, 수집 가능한 작품으로 만들어지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실험적인 공공 프로젝트의 가치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지난 2000년 서펜타인 갤러리의 후원금 모금 파티를 위해 자하 하디드Zaha Hadid에게 설계를 의뢰한 임시 야외 천막이 예상 외로 인기를 얻으면서 연례행사로 발전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이런 일시적인 프로젝트는 드문 일이었고, 서펜타인 갤러리는 파빌리온 시리즈를 통해 영국 안팎에서 현대미술을 선도하는 공공 갤러리로 거듭날 수 있었다. 파빌리온 프로젝트의 혁신성은 지속적으로 건축 실무의 영토를 넓혀 왔지만 영국에서는 작업하지 않았던 신진 건축가를 초청하는 작가 선정 기준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그간 렘 쿨하스Rem Koolhaas, 프랭크 게리Frank Gehry, 오스카 니마이어Oscar Niemeyer 등 스타 건축가들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러나 2013년의 소우 후지모토Sou Fujimoto, 2014년의 스밀랸 라디치 그리고 올해 셀가스카노 등은 고국 밖에서의 작업이 드문,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건축가들이다. 이들은 연간 30만 명이 방문하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활동의 범위를 국제적으로 확장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이 파빌리온이 예술과 사회·문화적인 행사들과 결합되며 대중과의 신선한 만남을 주선한다는 점도 성공의 요인이다. 그러나 어느덧 15주년을 맞이하는 서펜타인 파빌리온 프로젝트의 문제점 역시 지적되는 최근, 혹자는 서펜타인 파빌리온 시리즈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제 갤러리의 앞마당을 넘어, 좀더 다양한 경계에 있는 디자인을 지원해야 할 시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번 파빌리온이 재료의 새로운 지평을 탐색하는 혁신적이고 매혹적인 건축인지 혹은 한시적이고 불완전한 그 무엇에 불과한지는 논쟁거리다. 그러나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건축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하고, 보다많은 사람들에게 건축에 대한 관심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의 후원을 받기 위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건축의 본질을 탐구하는 서펜타인 파빌리온 프로젝트의 공공적 가치는 아직 유효한듯하다.
    • 김정은
  • [시네마 스케이프] 암살 근대의 풍경
    “경성,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잘 됐네요.” 올 여름 대중적 성공을 거둔 영화 ‘암살’에서 우리의 아름다운 주인공 안옥윤(전지현 분)은 경성 암살 작전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이 대사에서 경성은 커피라는 것을 마실 수 있는 곳, 즉 근대화된 도시를 의미한다. 그녀는 아기 때 유모의 품에 안긴 채 만주에 온 후 간도 학살을 목격하고 독립군의 명사수가 되었다. 그녀가 처음 접하게 될 경성의 낯선 근대 풍경은 영화에서 어떤모습일까. 1930년대의 경성은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정치, 경제, 종교, 군사, 교육의 중추 기능을 집중시킨 도시다. 1940년 조선총독부의 외주로 만든 영화 ‘경성’은 경성의 하루를 담은 다큐멘터리로, 당시의 실제 풍경을 볼 수 있다. 새벽에 기차가 경성역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다큐멘터리에는 활기찬 일상과 화려한 본정의 밤거리가 담겨 있지만, 지배자의 시선으로 대상화한 경성 풍경이 주를 이룬다. 최근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몇 편 발표되었지만 당시의 풍경을 엿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영화 ‘암살’은 1910년대의 손탁 호텔부터 영화 속 주요 배경인 1933년의 경성역, 미쓰코시 백화점과 선은전 광장, 명치정과 아네모네 카페, 서소문거리와 주유소를 비교적 세심하게 재현하고 있다. 남산에서 벌어지는 자동차 추격신사이로는 만리재와 경성역의 원경까지 볼 수 있다. 선전용 영화가 아니면 엽서나 사진 같이 박제된 이미지로만 접했던 근대 태동기의 풍경이 담겨 있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고대의 유산, 물
    #57 로마 시민을 위한 물 - 기원전 4세기, 아콰에둑투스 에어컨은 물론 없고 선풍기도 잘 모르는 베를린에서 35도를 오가는 폭염이 2주일 이상 계속되고 있다. 더위에 멍해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오로지 하나, ‘물’이다. 조경사에서 물이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서구의 정원은 물로부터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식물이 가장 중요했겠지만 물 없이 자랄 수 있는 식물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물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지금껏 보아 온 드넓은 풍경 호수의 잔잔함이 아니라솟구치고 쏟아져 내리며 물보라를 뿌리는 시원함에 대한 이야기가 좋을 것이다. 오백 개 넘는 분수가 마구 솟구치는 빌라 데스테Villa d’Este가 떠오른다. 그러나 정원에 물을 정성스럽게 담아낸 것은 이미 고대부터 시작되지 않았던가. 잠시 고대로 시간 여행을 떠나야 할 것 같다. 아득한 옛날, 정원의 역사가 시작된 곳은 하필 건조하고 더운 지역이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물론이고 그리스와 로마 역시 더운 곳이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자연적인 오아시스에 만족하지 않고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산의 원천에서 물을 끌어다 마른 땅을 적셔 평야를 만들었고, 도시가 형성된 후부터는 고도의 관수 시스템을 완성했다.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파라다이스 정원이 가능했던 것도 이런 관수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구 정원의 기원이 메소포타미아에 있고 메소포타미아 정원의 구조를 결정한 것이 관수 시스템이었으므로 서구 정원의 기하학이 여기서 시작되었다는 해석도 있다.1 그도 그럴 것이 모든 면적을 고루 적시려면 수로를 격자형으로 정연히 배치하는 것이 가장 합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원에 가장 먼저 수로가 등장했다. 더불어 수로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샘 혹은 분수가 있었고 수로의 물이 모이는 연못이 있었다. 그리고 연못의 물은 다시 지하나 지상의 수로로 빠져나가 정원 밖의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천 시스템으로 돌려보냈다. 이런 시스템을 가능하게 하려면 정원 밖에도 수로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베를린처럼 땅만 조금 파면 물이 나오는 곳이라면 정원에 우물을 파서 지하수를 퍼 올렸을 것이다. 한국처럼 산이 많은 곳이라면 뒷산 골짜기에 졸졸 흐르는 계류를 끌어다 썼을 것이다. 그러나 사막에 도시를 세웠던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참 많은 수고를 하여 물을 끌어다 대었으므로 그 덕에 엔지니어링이 남다르게 발달할 수 있었다. 기왕 수고하는 김에 돌을 반듯하게 깎아 수로를 만들어 보기 좋게 했으며 물이 흘러나오는 샘도 동물 모양이나 꽃 모양으로 아름답게 장식했다. 수압을 이용해 물을 역류시키는 기술도 터득했던 사람들이었기에 분수도 만들 수 있었다. 이런 상하수도 시스템이 농경 문화와 함께 발달했고 도시를 존재하게 했다. 흥미로운 것은 고대의 물 공급 시스템이 현재의 상하수도 시스템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는 점이다. 이 기술이 메소포타미아에서 그리스로 전해지고 그리스에서 다시 로마로 전해지면서 극치를 이루었다. 아콰에둑투스aquaeductus2라고 불리는 로마의 물 공급 시스템은 가히 기적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며 로마 엔지니어링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지금도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지를 다니다 보면 계곡에 교량처럼 생긴 석조 구조물이 더러 남아있는데, 많은 이들이 이 교량을 아콰에둑투스라고 이해하고 있다(가르교 사진 참조). 그러나 아콰에둑투스는 본래 샘, 수로, 저수지 등을 포함한 물 공급 시스템 전체를 말한다. 펌프가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가장 높은 곳에서 시작해 낮은 곳으로 자연스럽게 흐르게 했다. 속도를 조절해야했으므로 근소한 경사(0.035~0.37%)를 주면서 수로를 연결했는데, 물을 보호하고 증발을 막기 위해 전 연장의 85%는 지하에 터널을 만들어 흐르게 했다. 다만 골짜기를 지나야 하는 곳에는 교량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같으면 펌프를 써서 끌어올렸겠지만 당시의 역류 기술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치형으로 운치 있게 만든 것은 미학적 이유보다는 구조적 이유 때문이었다. 2층이나 3층으로 지은 것 역시 골짜기의 깊이, 즉 교량의 높이에 따라 기둥의 하중을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3 그 결과로 숨을 죽이게 하는 건축 미학이 탄생했다. 수로의 폭은 대개 1m 남짓, 깊이는 평균 1.5m 정도였으니 상당한 양의 물이 흘렀다. 산 위의 샘물을 우선 저수지에 모았다가 이를 수로로 흘려보냈으며 물이 도시에 도착하면 다시 어마어마한 규모의 지하 탱크에 모았다. 말이 지하 탱크이지 그 규모나 축조 양식은 대형 성당을 방불케 했다. 그래서 이를 카스텔 룸, 즉 ‘성’이라고 불렀다. 이 카스텔 룸에서 다시 세 개의 용수로가 각각 갈라져 나갔다. 하나는 도시 곳곳에 설치된 공용 수도에 공급되었고, 그 다음 테르메라고 불리는 공중목욕탕에 공급되었으며, 마지막으로 각 주택에 보내졌다. 이런 시스템이 처음 만들어진 때는 기원전 312년, 아직 공화정이던 시절이었다. 이후 인구가 늘고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물의 수요도 증가했으므로여러 개의 아콰에둑투스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약 700년이 지난 서기 400년경에는 로마 시에만 11개의 시스템에 총 연장 504km의 수로가 연결되었다. 공중목욕탕이 11개소, 사설 스파가 856개소, 그리고 도시 전역에 1,352개의 공공 분수가 있었다. 지금도 이탈리아에 가면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분수는 본래 장식용이 아니라 공공 수도 시설이었다. 여기서 종일 물이 졸졸 흘러 누구나 마시고 쓸 수 있었다. 주택 대부분에 별도의 수도가 연결되어 있었으나 서민 연립 주택의 경우 1층에만 수도가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위층에 사는 사람들은 여기서 물을 길어다 썼다. 이렇게 하여 고대 로마인들은 매일 목욕을 하며 물을 펑펑 썼고 물 소비량으로 문화적 수준을 가늠했다. 당시 1인당 하루 물 소비량이 현재 유럽인들 소비량의 두 배 이상이었다.4 여기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게르만족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동게르만족에 속하는 고트족이었다. 서기 537년 로마를 포위하고 공략했던 고트족은 도시로 들어가는 모든 수로를 메우거나 파괴해 버렸다. 이후 로마 제국이 무너지면서 그들의 화려한 물 문화 역시 말라버렸다. 로마의 모든 문화와 문명은 멀리 비잔틴 제국으로 이사 갔고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는 서서히 퇴색해 갔다. 이후 바티칸에 교황청이 세워지면서 교황들이 아콰에둑투스를 일부 복원하긴 했지만 그때의 영광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물론 아콰에둑투스는 로마 시에만 설치된 것이 아니다. 이탈리아 곳곳은 물론 점령지에도 수로를 놓고 스파를 만들어 로마 제국의 위상을 높였다. 지금도 동으로는 터키, 서로는 영국, 북으로는 독일까지 아콰에둑투스와 로마의 분수, 테르메의 흔적이 수없이 남아 있다. 조경이나 건축을 하는 사람치고 아콰에둑투스의 높은 교량을 보고 가슴 뛰지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파리 시트로앵 공원의 디자이너들 역시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아콰에둑투스에서 영감을 받아 수로 시스템을 만들고 공원의 동쪽 경계로 삼았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 취약한 도시, 회복탄력적인 도시
    취약한 도시 화재, 화산 활동, 산사태, 질병, 오염, 지진, 쓰나미, 홍수, 태풍, 폭염. 현대 사회를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대표적인 열 가지 환경 재해다. 최근 발생한 국내의 메르스 사태부터 2012년 가을 초대형 허리케인 샌디Sandy로 인한 미국동부의 초토화,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본 사회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 도호쿠東北 대지진과 쓰나미, 후쿠시마 원전 붕괴에 이르기까지 각종 재해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그림1). 특히 제한된 공간 안에 많은 사람과 자산이 밀집해 있는 도시에서는 한 번 재해가 발생하면 그 피해가 증폭되기 쉽고 이에 따른 트라우마도 깊다. 더욱이 개발이 완료된 도시를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덜 취약한 지역으로 도시의 일부를 옮기기 위해서는 보상과 이주에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한 도시의 취약성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그림2). 여기서 ‘취약성vulnerability’이란 특정 재해 위협에 대해 한 사회가 대처하거나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위험성의 정도를 말한다. 이렇게 보면 취약성은 재해 자체의 규모나 지속 시간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예상치 못한 충격이나 스트레스에 대한 지역 사회의 민감도, 피해 후 정상 상태로 회복하는 속도와 역량, 과거의피해 경험을 기억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학습 능력, 그리고 재해와 관련된 피해자와 가해자에 대한 관용과 사회적 시선까지도 총체적인 취약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잠재적 위험, 확률, 리스크 2013년 3월, 포항시 용흥동 주택가에서 작은 산불이 일어났다. 한 초등학교 뒷산에서 점화된 불씨는 강한 바람을 타고 주변 산림에 옮겨 붙었고 이후 많은 수의 학교와 주택이 밀집한 지역까지 4km 이상 이동하며 대형 산불로 번졌다. 진화를 위해 소방 인력 약 2,500명이 동원되었으나 그 피해는 엄청났다. 주택 50동 이상이 폐허로 변했고 주민1,500여 명이 대피해야 했다.1 용흥동 산불의 발생 과정을 재구성해봄으로써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재해의 여러 개념을 정리해 보자. 우선 도심지에서 산불은 왜 발생하는가?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누군가의 고의적인 또는 부주의한 발화다. 물론 자연 현상에 의해 불씨가 생길 수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용흥동에서는 한 중학생의 불장난이 대형 화재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발화가 도시 공간 어디서나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자주 불을 사용하는 외부 공간, 이를테면 주택지 인근에서 논밭두렁을 태우는 곳,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소각하는 장소, 빈번한 흡연이 이루어지는 공터가 잠재적으로 도심 산불의 원인을 제공한다. 이러한 행태와 장소 특성을 포괄하여 잠재적 위험hazard이라 부른다. 하지만 잠재적 위험이 늘 대규모 피해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연 상태의 산림과 달리 도심지에서는 발화 지점에 낙엽이나 건조한 잡초가 집중적으로 축적되어 있거나 그 주변에 목조 주택과 슬레이트 구조물처럼 불에 타기 쉬운 시설이 분포할 때, 그리고 건조한 날 발생한 불이 큰 산불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요소가 모여 발생 확률probability을 결정한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잠재적 위험이 높은 발생 확률을 만나 대형 인명·재산 피해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즉 원인이 결과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방아쇠가 필요하다. 용흥동에서는 산불이 확산되는 경로를 따라 가연성 물질이 연속적으로 있었다. 그리고 다수의 주택과 학교 시설이 경로를 따라 위치해 있었고, 특히 1980년대 이후 야산을 따라 무허가 주택이 집중적으로 지어지면서 사회적 약자와 노인 계층이 거주하기 시작했다.3 산불발생지 주변에는 불법 노상 주차가 협소한 골목을 막고 있어 소방차의 신속한 접근과 진화 작업이 어려웠다. 이렇게 당겨진 방아쇠가 일으킨 결과인 대형 산불과 관련 피해를 리스크risk라고 부른다.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 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 이론과 스튜디오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 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 김세훈[email protected]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도시설계전공 교수
  • [그들이 설계하는 법] 같이 하기
    이번 마지막 글에서는 여성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던 내가 디자인으로 진로를 바꾼 후 그 초기부터 현재까지 디자인 프로젝트는 물론 연구와 강의까지 모든 활동을 함께 해 온 건축가 파트너이자 남편인 매튜 줄Matthew Jull과의 대화를 담고자 한다. 설계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공동 작업의 과정과 팀의 시너지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작은 회사의 특성상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팀 자체가 바뀔 때가 많고 학교에서 직접 가르치는 학생들도 많이 참여시키다보니 그렇게 만들어진 팀원간의 궁합까지 매번 다른 것이 사실이다. ‘같이 하기’는 쿠토노톡KUTONOTUK과 북극 디자인 그룹Arctic Design Group(ADG)의 공동 대표로서 나와 매튜 줄이 디자인과 연구를 병행하는 방법과 방향에 대한 이야기다. 영어대화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뉘앙스가 조금 달라지기도 했지만, 되도록 평소 대화할 때 느낌을 그대로 살렸다. 조리나(이하 조): 우리 둘만의 돋보이는 공통점은 일종의 아웃사이더였던 게 아닐까? 지금은 디자이너로 인정받으며 활동하고 있지만, 다른 대학원생들과 비교하면 디자인에 발을 들여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디자인 비전공자들이었잖아. 결국 대학원에서 각각 건축과 조경 학위를 수여받긴 했지만 디자인은 우리에게 두번째 길이었어. 너는 물리학 박사를 마치고 연구원 생활까지 하다가 건축으로 진로를 바꾼 경우고, 나 역시 정치학과 여성학을 공부하고 NGO에서 일하다가 조경의 길을 선택한 거잖아. 학부 때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점이 현재 우리 설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해? 매튜 줄(이하 줄): 글쎄. 하나 확실한 건 주변에 아는 사람이 학부 전공으로 건축이나 조경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러지 않도록 말리겠다는 거야. 우리의 배경이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디자인은 풍부하고 다양한 경험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아. 특히 지금 시대의 건축가나 조경가는 다방면에 걸쳐 많이 알아야 하는 제너럴리스트임이 분명한데다 서로 다른 가치와 사고 방법을 연결하고 종합할 수 있는 지혜를 요구하잖아. 물론 도시의 물 순환에 대한 지식이 상당하다거나 공공 건축을 위주로 설계를 진행했다거나 구체적인 전문 분야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조: 하지만 우리의 그런 배경이 디자인에 매번 고스란히 배어나오는 것은 아니잖아. 줄: 그게 아이러니한데,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아. 하지만 공간 또는 디자인을 정의하고 해석하는 방향에서 묻어나오는 것 같아. 우리가 북극 디자인 그룹을 만든 이유 중의 하나도 디자인 배경이 없는 사람들과 디자인을 이야기해 보기 위해서잖아? 조: 뭐.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 난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개념 중의 하나가 세상의 모든 것이 문화적 구성체cultural construct라는 점이었던 것 같아. ‘태생적 운명’이라는 개념에 도전하면서 무엇이 되었든 인간 사회에서는 역시 각자 생각하고 말하기 나름이라고 주장하는 거지. 진리도 언젠가는 변할 문화적 사상이라는 얘기잖아. 조경을 하면서 특히 ‘자연’에 관한 정의를 내릴 때, 이런 여성학의 배경이 많은 영향을 미친 것 같아. ‘자연’ 또한 언제 어디서나 색다르게 제조manufacture될 수 있는 문화적인 매체라는 거지. 또 한 시대의 사상을 조금이나마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고달픈지 NGO에서 일하면서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꾼다’거나 ‘바꾸겠어!’ 같은 슬로건을 보면 오히려 사기가 떨어져. 안 믿겨지더라고. (웃음) 조리나는 1982년 생으로, 미국 웰슬리 대학교(Wellesley College)에서 여성학을 전공한 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미국 마이클 반 발켄버그 어소시에이츠(Michael Van ValkenburghAssociates)와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맥스완 아키텍트 + 어바니스트(Maxwan Architects + Urbanists)에서 다양한 도시설계, 조경, 건축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현재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Virginia) 조경건축학과 대학원 강사로 있으며, 하버드 GSD에서 초청강사로 가르친 바 있다. 건축가인 매튜 줄(Matthew Jull)과 쿠토노톡(KUTONOTUK)의 공동 대표로서 헬싱키 구겐하임(HelsinkiGuggenheim)과 헬싱키 공공 도서관(Helsinki Public Library),MoMA PS1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MoMA PS1 Young ArchitectsProgram), 유로판(Europan) 등 다양한 디자인 프로젝트에서 수상한바 있다. 또한 북극 디자인 그룹(Arctic Design Group)의 대표로서 미국 워싱턴 D.C.의 정책 연구 기관과 협력하여 북극 도시와 극한 랜드스케이프(extreme landscapes)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www.kutonotuk.com | www.arcticdesigngroup.org 매튜 줄(Matthew Jull)은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지구물리학(Theoretical Geophysics)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프랑스 파리의 지구물리학 연구소(Institut de Physique du Globe)와 미국의 우즈 홀 해양 연구소(Woods Hole Oceanographic Institution)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하버드 GSD에서 건축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SOM(Skidmore, Owings & Merrill LLP), 스티븐 홀 아키텍트(Steven Holl Architects), MIT 센서블 시티 랩(SENSEable CityLab)에서 건축과 도시설계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2008~2012년에는 네덜란드 OMA/Rem Koolhaas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로 활동하기도 했다. 현재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건축학과 조교수(Assistant Professor)이자 조리나와 쿠토노톡 및 북극 디자인 그룹의 공동 대표로 있다. www.kutonotuk.com | www.arcticdesigngroup.org
  •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로리 올린 Beyond the Limits of Landscape Architecture, and into the Heart of Landscape Architecture: Laurie Olin
    조경가 로리 올린은 최근 조지 루카스 등과 함께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국가예술훈장National Medal of Arts을 수여 받았다. 이 훈장은 미국 정부가 예술가에게 주는 가장 영예로운 상이다. 역대에 국가예술훈장을 받은 조경가는 단 세 명, 댄 카일리, 로렌스 핼프린, 그리고 이안 맥하그가 있다. 조지 루카스는 누구나 알지만 일반인 중에 로리 올린을 들어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조경가의 사회적 기여와 개인적 성취가 현대 문화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영화감독과 나란히 거론되었다는 점에서 조경계에 큰 의미로 다가온다. 그만큼 올린은 단지 훌륭한 조경 디자인을 넘어, 대중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사회의 문화적 토대 자체를 구축해 온 인물이다. 브라이언트 파크, 콜럼버스 서클, 배터리 파크 시티, 게티 센터, 워싱턴 모뉴먼트 등 기념비적인 작업을 해 왔으며, 50여 년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가르쳤고 하버드 대학교와 칭화 대학교 조경학과의 학과장을 역임하는 등 실무와 교육의 병행을 통해 현재 세계 조경계를 이끌고 있는 수많은 중요한 디자이너를 길러냈다. 어떤 평론가들은 올린을 옴스테드 이후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조경가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의 관심과 주제는 대부분 미국 도시의 이야기지만, 반세기에 걸친 통찰과 지혜는 인간의 보편적 특성과 문화적 가치에 기반한 것이기에 우리 도시에도 큰 교훈을 준다. 개발과 산업, 성장의 시대를 쉼 없이 달려 온 한국 사회도 이제 저성장과 청년 실업, 다양성과 복지를 화두로 국면을 전환하고 있고 조경 및 관련 산업 또한 여기에 발맞추어 변하고 혁신해야 함을 누구나 느끼고 있다. 로리 올린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미국사회가 이미 1970~1980년대를 거치며 혹독히 겪은 사회적 혼란과 나름대로의 돌파구를 관찰할 수 있다. Q. 알래스카 출신이라는 개인사적 배경에 대해 설명해 달라. A. 대학에서는 원래 토목공학을 전공했다. 어릴 적 나의 눈으로 봤을 때 알래스카에서 유일하게 무언가를 만드는 직업은 토목 엔지니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한두 해 다녀보니 토목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예술적이지 않았다. 이미 학기가 지나고 있었고 장학금도 받고 있었지만 뭔가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건축을 해보자는 결심이었다. 본토에 와서 고향과 가장 가깝고 가장 비용이 적게 들어 택한 학교가 워싱턴 주립대학교였다. 당시 알래스카가 주로 승격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워싱턴 주, 오레곤 주, 아이다호 주는 알래스카 학생에게 주민 수준의 등록금 혜택을 주고 있었다. 부모님으로부터 학비 보조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매년 여름마다 다음 학기를 위한 등록금을 벌어야 했다. 알래스카 도로건설국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다. 결과적으로 워싱턴에서 4년을 보낸 것은 참으로행운이었다. 당시 건축학부에서 도시계획과 조경학과를 신설했기 때문이다. 명문 학교인 하버드, 버클리, 미시간 등을 모델로 삼으려 했다. 또 하나의 행운은 보자르의 전통 속에서 훈련 받은 노교수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어 워싱턴 주립 대학교는 역사적인 안목을 갖춘디자인을 교육하는 데 매우 뛰어났다는 점이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혹독하게 드로잉 연습을 시켰다. 4년 내내 거의 매일같이 그리고 또 그렸다. 2학년 때 워싱턴대학교는 리차드 하그Richard Haag를 영입해 조경학과를 신설했다. 그가 커리큘럼을 짜고 이사회의 승인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조경학과에 속한 학생들이 없었기때문에 우리 학년의 스튜디오를 담당하게 되었다. 나는 일 년 동안 리차드 하그 스타일의 이론과 역사 수업에 푹 빠졌고 그것은 정말 좋았다. 그는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스탠 화이트Stan White의 제자였는데 화이트는 옴스테드의 사무실 출신이었다. 히데오 사사키 등이 그의 동료였다. 리차드 하그는 대단한 선생이었다. 그것이 세 번째 행운이다. 리차드는 사무실을 열었는데 학생 중 드로잉에 능한 몇 명을 뽑았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실무와 학업을 병행하는 것은 나에게 무척 자연스런 일이었다. 졸업 후엔 캘리포니아에서 육군에 복무했고 시애틀의 한 건축설계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우리는 리차드 하그 사무실과 자주 협업했고 나의 학교 친구들이 리차드의 직원이었기에 건축과 조경의 협업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당시에는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1964년도에 나는 뉴욕으로 이주해 당시 가장 존경받는 건축가 중 한 사람이었던 에드워드 라라비 반스Edward Larrabee Barnes의 회사에서 건축가로 일을 시작했다. 나는 이미 알래스카에서 일하면서 지형을 만들고 도로를 설계하는 데 익숙했고 조경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학 캠퍼스 등의 대규모 마스터플랜 등을 집중적으로 맡게 됐다. 때는 1960년대였다. 당시의 상당수 젊은이처럼 나 또한 사회적으로 공인된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여행을 시작했다.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오두막에서 생활하고 돌아다니다가 돈이 떨어지면 이런 저런 일을 하는 식이었다. 결국 시애틀로 돌아왔는데 이제 정말 그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다 많은 세상을 보고 싶었다. 유럽을 보고 싶어 장학금을 신청했다. 풀브라이트, 롬 프라이즈Rome Prize, 구겐하임 재단에 지원했다. 어느 것 하나라도 합격하게 되면 고향을 벗어날 이유가 되기 때문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셋 다 합격하게 되었다. 결국 구겐하임과 로마의 미국 재단을 설득해 양쪽의 프로그램을 모두 누리는 것으로 조정했다.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뉴욕에 기반을 두고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해 왔다.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고, 주요 작품이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 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 전시되었다. UNKNP.com의 공동 창업자이며, 저서로 『시티오브뉴욕』(공저)이 있다.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에서 조경 설계를 연구하며 학생들이만드는 것의 기쁨을 알아가도록 돕고 있다.
  • [재료와 디테일] 화분, 장식을 넘어 생활로
    아침 출근길에 버스를 타기 전에 늘 집 앞 식당을 거치곤 한다. 맛이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곳이었지만 글의 재료를 찾기 위해 고민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식당 앞 풍경은 훌륭한 영감을 주었다. 상도동 급경사지의 지형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콘크리트 옹벽 앞에서 홀로 외롭게 그러나 당당하게 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 작은 화분과 꽃은 감동스럽기까지 했다. 흙을 담을 땅조차 부족한 곳에 억지로 공간을 만들어 식물을 심는다고 잘 자라줄지도 의문이고, 이런 경우엔 관리의 어려움도 뒤따른다. 큰 나무가 필요하지 않다면 이렇게 작은 화분을 이용하는 것이 녹시율도 높이고 경관용으로도 손색이 없는 좋은 방법이란걸 식당 주인의 지혜를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 주위에 화분은 흔하다. 관리가 용이하면서 실내분위기를 다르게 만들 수 있는 좋은 인테리어 소재이기도 하다. 도심의 흔한 찻집에서도 실내에 녹색을 들이려는 노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큰 나무에서 작은 나무 또는 인조목까지 화분을 채우는 식물을 다양화할 뿐만 아니라, 화분을 바닥에 그냥 내려놓거나 벽이나 테라스 난간에 걸어두는 등 활용법에 변화를 주기도 한다. 화분의 활용은 실내에서 흙으로 식물의 생육 조건을 만드는 것이 힘들다는 걸 방증하기도 한다. 가장 큰 이유는 유지 관리의 어려움에 있을 것이다. 이대영은 여기저기 살피고 유심히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작고 검소하며 평범한 조경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우대기술단과 씨토포스(CTOPOS)에서 조경의 기초를 배웠다.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엘(STUDIO L)을 시작하고 작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 www.studio89.co.kr
  • [공간 공감] 박수근미술관
    박수근미술관이 그의 고향 강원도 양구에 문을 연 지 14년이 지났다. 대표적인 작가 중심 미술관으로 자리 잡은 이 미술관은 박수근기념관, 현대미술관, 박수근파빌리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 건물 모두 건축가 이종호가 설계했다. 미술관 건립 후 뜻있는 여러 사람들이 박수근의 작품뿐만 아니라 다양한 한국 근현대 미술 작품을 기증하여 미술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낮은 언덕에 둘러싸여 있는 세 전시관은 각각의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주변 풍광을 거스르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특히 기념관과 파빌리온은 박수근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인 ‘마티에르’를 건축적으로 해석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종호는 설계 노트에 이렇게 기록한 바 있다. “박수근의 작업을 경험할 수 있게 만드는 일련의 전개 과정이 중요하다. 대지에 미술관을 새겨 나갔다. 박수근의 그림은 그려진 것이 아니라 새겨진 것이다.” 미술관의 외벽으로 화강석 깬돌을 성곽처럼 쌓았다. 여기에서 박수근 고유의 무채색의 거친 마티에르를 조우할 수 있다. 이 석축은 건축 외벽이라기보다는 성곽처럼 보이며 박수근 그림의 연장처럼 느껴진다. 관람객은 이 석축을 강렬하게 경험하며 미술관으로 진입하게 되는데, 누구든 박수근 회화의 이미지를 연상할 수밖에 없다. 미술관 내부에 들어서면 박수근의 그림들이 생각보다 작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 그러나 크기가 작다고 해서 결코 감흥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림의 소박함과 진실함에 감동받게 되고 그런 감동이 건축적 체험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기념관의 지붕 위를 걸어 박수근파빌리온에 이르는 길은 성곽에 닿아 있는 기다란 산기슭을 따라 나 있다. 이 연재를 위해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대학교정욱주 교수와 서울시립대학교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여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이들은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며, 2014년1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유쾌한 답사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 최우수작: 산림천택 여민공지山林川澤 與民共之 고덕 국제화계획지구 개발사업 및 택지개발사업(1단계) 조경(공원·녹지)
    산림천택 여민공지 평평한 땅에 못이 많다는 의미의 평택. 이는 곧 산림천택山林川澤을 의미한다. ‘산과 숲’, ‘내와 못’을 일컫는 산림천택은 오랫동안 동식물의 서식처이자 인류의 생활공간이었다. 평택은 과거 ‘여덟 갈래의 물줄기가 에워싸고 흐르는 지형’을 의미하는 하팔현河八縣이라고도 불렸으며 지난 100년간 그러한 산림천택을 ‘백성들이 공유하도록 하는 與民共之(여민공지)’을 도시의 근간으로 삼아왔다. ‘산림천택 여민공지’라는 설계 개념은 이러한 터를 활용하여 국제적 수준의 도시 환경을 위한 기틀을 다지고 산림천택의 공간을 시민들과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하여 평택 고덕 신도시가 미래의 국제적 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수변 공원 복합적이고 다양한 활동을 수용하는 수변 중심 공원을 제안한다. 도시민의 야외 활동 유형의 변화는 물론 증가하는 자연 체험에 대한 요구와 도심 생산 활동 참여를 고려한 프로그램과 관련 시설을 도입했다. 수변 데크, 모래사장, 물놀이 공간과 같은 휴게 공간과 엑스스포츠로 대표되는 물을 이용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 수성엔지니어링 + 어리연조경디자인 + 최정민 설계 참여 / 수성엔지니어링 + 어리연조경디자인 + 최정민 설계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