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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등작: Seoul-Yeok-Goga: Walkway for All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
사람의 길로 돌아보기 위한 새로운 시작,
도시재생을 위한 의미 있는 거버넌스의 출발점
서울역 고가 프로젝트는 서울시가 본질적으로는 처음 시도하는 도심재생 작업이다. 한국에서 근대화는 20세기 초 외세에 의해 강제로 시행된 일련의 도시 정비 계획과 해방 후 역사의식 없이 계속된 근대 도시 계획으로 시작되었다. 그런 계획들은 지난 500년 동안 지속된 서울의 역사와 기억, 지형과 삶을 단절시켰다.
이 제안은 이러한 정치·사회적 상황에 의해 생겨나 부조화를 이루는 도시 조직과 공간 구조를 새롭게 돌아보기 위한 시작이다. 자동차가 우선이던 계획에서 사람을 중심에 놓고 건강한 도시를 만들고자 한다. 이를 위해 건축가와 엔지니어, 도시계획가, 조경가뿐만 아니라 인문학자, 작가, 예술가, 디자이너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 학생 그리고 시민과 공무원이 시작부터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며 의견을 수렴했다. 마치 수평으로 펼쳐진 고가의 기능이 그러하듯이, 그 결과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은 민주적인 절차로 진행되었다. 그 과정이 다소 익숙하지 않았지만 소중한 경험이었다.
수직: 3가지의 다른 레벨의 길 조성. 1 고가 + 3 보도
서울역 고가의 아스팔트를 덜어내어 하중을 줄이고, 원래 고가의 구조를 재활용해 여러 가지의 길 조합을 만들어낸다. 원래의 아스팔트 면과 그 위의 높은 길, 지붕 아랫길과 더 아랫길까지 네 개 층의 길이 생겨 계절이나 기후변화에 따라 햇볕과 비바람, 눈을 피할 수도 있다. 고가의 보강 비용을 줄이는 동시에 시민들의 활용도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이 이 안의 핵심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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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Seoul Arboretum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
서울역 고가는 대형 차량의 통행이 가능한 2차선 도로였으며, 그 규모 덕분에 서울의 중심부에서 독창적인 공공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공공성을 창출하고 최대한 친환경적인 공간을 조성하기 위해 모듈을 통한 접근법을 제안했다. ‘서울 수목원Seoul Arboretum’은 대상지 주변에 식재된 수목들을 한데 모아놓은 도심형 식물원이다. 이 수목들은 938m에 이르는 고가와 그 주변 지역에 가나다순으로 식재될 것이다. 다양한 크기의 원형 화분과 더불어 찻집, 꽃집, 노점, 도서관, 온실 등 일련의 가변적 시설activator을 더해줌으로써 서울의 하늘 정원에 생기를 불어넣고 더욱 다채로운 모습을 담아낼 것이다.
수목원
서울의 중심을 관통하는 고가 위라는 대상지 조건에 따라 식재 수종의 선택에 있어서도 보다 상징적인 접근을 취했다. 서울의 환경 조건에서 식재 가능한 모든 식물을 보여줄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수목원, 즉 일종의 ‘식물 도서관’을 조성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체험형 식물 도감에서 자신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식물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식물을 화분에 식재하는 방식은 수종에 따라 뿌리를 내리기 위해 필요한 충분한 깊이를 개별적으로 확보할 수 있도록 하며, 이는 하중의 집중과 분산을 가능하게 하여 구조적 안정성에도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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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
International Competition for Seoul Station Overpass
설계공모경과 및 심사평
다음은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의 심사평 전문이다.
“산업 유산인 서울역 고가 도로를 보존하면서 새로운 공공 공간으로 전환하는 것이 이번 현상설계의 과제다. 사람 중심의 보행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고가 도로를 주변 지역과 긴밀히 연계하여 녹지, 문화, 소통의 공간으로 재생함으로써 서울역 일대의 변화는 물론 더 나아가 서울의 변화를 촉발하려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다. 심사위원들은 이 취지에 공감하며 프로젝트의 전개 과정을 통해 성숙한 시민문화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공유했다.
장소성을 어떻게 발견하고 해석할 것인가, 주변 지역과의 연계를 어떻게 이루어 낼 것인가, 고가 도로 시설을 어떻게 보존하면서 재구성할 것인가, 어떠한 이용 프로그램을 제시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일곱 개의 설계안은 각기 다른 독창적인 해법을 제시했다. 심사위원들은 디자인에서 운영관리까지 다각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토론과 표결을 통해 세 작품의 입상작을 선정했다.
당선작은 고가 도로를 공중 정원으로 조성하는 안이다. 자연을 매개로 콘크리트 구조물을 생명의 장소로 전환하는 비전과 전략은 미래지향적이며 혁신적이다. 단계적으로 서울역 일대를 녹색 공간화하는 확장가능성을 제시한 점과 다양한 시민 및 주체가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프로세스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심사위원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또한 고가 도로와 여러 장소를 유기적으로 연계하여 접근성을 제고했다는 측면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서울의 기후를 고려한 정교한 식재 디자인과 식물 생육의 지속가능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2등작은 장소의 기억을 존중하면서 고가 도로에 대해 최소한의 개입을 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시간에 따른 지형과 도시 조직의 변화를 추적했으며, 지역 사회의 면밀한 분석을 통해 주변의 변화를 촉진하는 적정 수준의 설계안을 제시했다. 공공의 개입이 가능한 민간영역까지 찾아내어 실제적인 설계를 제안한 점도 높이 평가된 점이다. 비용 절감과 운영관리 측면까지 고려한 제안이 돋보였고, 지역 주민의 참여를 고려한 디자인 전략도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고가 도로 상부의 활용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와 구체적인 설계안이 발전되지 못한 점은 한계로 지적되었다.
3등작은 도시 조직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통해 공간별로 적극적인 디자인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각각 정교하게 조직된 공간 구성으로 다양한 활용에 대응하고 있다는 점은 이 설계안의 장점이다. 남대문과 한양도성 주변을 연결하는 새로운 교량 디자인 방식은 창의적이었다. 그러나 설계안에 제시한 고가 도로의 과도한 변형은 심사위원 전체의 공감을 끌어내기는 어려웠다. 당선작이 지니는 가치와 장점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주체가 참여하는 관리 기구가 만들어져서 운영되어야 하며, 장기적 관점에서 단계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당선안이 지향하는 열린 디자인의 정신이 프로젝트의 전개 과정에서 잘 구현되기를 바란다.”
전문위원인 김영준은 당선작은 수목원을 통해 새로운 도시 맥락을 만들자는 것이 핵심이며, 프로젝트의 진행에 따라 변형을 수용하되 원 개념을 존속시키기에 적절한 유연한 형태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강조했다.
당선자인 비니 마스는 “어떻게 완성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에 집중해 단순히 고가 상부를 디자인 하는 것을 넘어 고가의 하부와 주변으로 파급 효과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고 밝혔다.
“우리의 제안 개념이 ‘수목원’이라고 해서 단순히 식물을 모아 놓은 공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서울에 존재하는 다양한 나무와 풀들이 화분 형식으로 고가 위에 심기고, 그 식재 과정과 분위기를 사람들이 경험하는 가운데 행위를 유도하고자 했다. 현재 서울역 고가의 범위를 넘어 남대문 성곽, 버스 정류장, 서울역 북부 역세권 등으로 과감하게 번져 나갈 수 있는, 향후 더 큰 가능성을 가질 수 있는 디자인의 단초를 마련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서울시는 지역 주민 설명회, 분야별 전문가 소통을 통해 올해까지 설계를 구체화 해 완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한 다른 출품작의 좋은 아이디어 역시 선별하여 당선자에게 권고할 예정이며, 비니 마스 역시 이러한 제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향후 고가의 구조 보강 작업과 구간별 공사를 단계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며, 2017년 3월 일부 개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당선작Seoul Arboretum
서울 수목원
비니 마스Winy Maas|MVRDV
2등작Seoul-Yeok-Goga: Walkway for All
서울역 고가: 모두를 위한 길
조성룡Joh Sung Yong|조성룡도시건축
3등작Continuous Landmark: Unified Hyper-Collage City
흐르는 랜드마크: 통합된 하이퍼 콜라주 도시
조민석Cho Min Suk|매스스터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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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담장에 갇힌 늙은 거인
불안감에 쌓기 시작한 담장에 스스로 갇혀 버린 사람의 얘기는 더 이상 우화가 아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아파트 거주자가 도시의 절반이 넘고 그나마 남은 골목은 주차장이 되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은 지 오래다. 행여나 뭐라도 훔쳐 갈까 집집마다 보안 시설을 설치하고 도로 곳곳에 CCTV를 단다. 서울의 아이들이 바깥공기를 맡는 시간이 하루 평균 7분이라는 통계는 담 정도에 갇힌 게 아니라 벙커에 사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게할 정도다.
담은 궁극적으로 단절을 말하는 것인데, 도시민들이 스스로 쌓은 담은 사유재산을 지키려는 불안감에서 기인하지만 도시의 단절은 자본의 욕망에 기인한다. ‘더 많이’ 벌고 싶은 욕구는 ‘더 빨리’를 요구했고 결과적으로 더 넓은 도로와 더 많은 철도가 만들어진 셈이다.
서울의 어느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가려고 할때 가장 효율적인 수단은 단연 자동차다. 필자는 건강과 다이어트를 이유로 걷기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있지만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여전히 걷기 힘든 도시다. 그래서 결국 다시 자동차 열쇠를 찾는다. 역시 자동차가 답이다.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교통이 좋아야 장사도 잘 됐고 집값도 올랐다. 그래서 사람들은 월세를 사는 한이 있어도 차는 꼭 샀다.
시작은 달콤했으나 결과는 참혹했다. 교통사고는 늘고 공기의 질은 지속적으로 나빠진 데다 아스팔트의 열기는 숨이 턱턱 막히게 했다. ‘더 빨리’가 무색하게 길에서 낭비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천정부지로 치솟은 기름값은 지갑을 얇게 만들었다. 그뿐인가 개인이 쌓은 담과 도시가 쌓은 수많은 담들에 갇힌 시민들은 급속도로 개인화되기 시작했다. 한동안 한국 사회를 휩쓸고 간 키워드는 ‘불不’이었다. 불통, 불신, 불안, 불확실 등의 단어는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수준으로 다가왔고, 결국 우려했던 단계로 접어들었는데 그것은 ‘무無’다. 작년 세월호 사건 이후로 지금의 메르스까지 우리는 무책임, 무능력, 무관심으로 인한 무기력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개인화가 낳은 소외와 단절이 가져온 결과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이제야 정신을 좀 차린 서울은 세계의 대도시가 다들 그랬듯이 육교와 고가를 허물고 보도를 넓히고 더 나아가 차량이 다니지 못하는 보행 전용 도로나 대중교통 전용 도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담을 허무는 서울의 도전이 시작된 셈이다. 그 한복판에 서울역 고가가 놓여 있다. 남대문시장의 상인들은 시장이 망할 것이라고 하고, 고가 주변 주민들은 집값이 떨어질 것이라고 걱정이 태산이다. 과거의 경험이 주는 믿음은 견고했고 갈등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것에 있음에도 여전히 화살의 방향은 교통을 향한다. 꽉 막힌 도시에서 자본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길을 뚫어 소비의 물꼬를 돌렸고 더 이상 좋은 땅을 찾지 못한 현대판 지관들인 투기꾼들은 수도권 곳곳에 욕망의 신기루를 만들어 배를 불렸다. 그러는 동안, 정부와 서울시의 무책임, 시민들의 무관심, 소위 전문가 집단의 무능력은 상인들을 무기력 상태에 빠뜨렸고 분노의 화살은 엉뚱하게도 서울역 고가로 향했다.
서울역 뒤편의 상황은 더 처참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도시의 중앙 역사의 뒤편은 허름했다. 서울역도 예외가 아니었고 한 발 더 나아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 병폐인 부동산 투기와 만나 상황은 더욱 처참해졌다. 지난 30년 동안의 선거에서 모든 후보들은 개발을 약속하고 파기하기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요동을 친 땅값은 2008년 북부역세권 개발 계획 발표 시 평당 6천만 원이라는 정점을 찍었다. 800여 명이었던 소유주는 그새 2,200여 명으로 늘었는데, 소위 딱지 거래가 성행한 결과 한 집에 소유자가 무려 20명에 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이제 주민들은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다. 말기 암환자가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대체 의학을 찾듯 “그나마 박원순이니까…”하는 마음으로 심드렁하게 쳐다보는 중이다. 늙은 도시, 600살을 넘긴 무기력한 거인의 현재 모습이다. 그렇다면 진정 답은 없는 것인가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에 답이 있을 것 같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때 어미닭이 쪼아주듯이 주민과 시민들이 스스로 깨려고 할 때 행정이 도움을 주어야 한다. 서울의 활력은 애초부터 사람에 있었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서울은 언제나 도전하는 사람들의 활력으로 발전해 온 도시다.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역량이 지속적으로 자랄 수 있도록 지원하면서 정책의 결정 과정에 참여시켜야 근육이 생기고 힘이 붙어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는 법이다.
네덜란드의 세계적 건축가인 비니 마스가 서울역에 말을 걸었다. 그에 대한 대답을 시민이 할 것인가, 서울시가 할 것인가. 앞으로 남은 설계 과정에 얼마나 많은 시민이 참여할 것인가가 이 사업의 관건이다. 앞으로 3개월 여, 고가산책단은 이 과정의 퍼실리테이터facilitater가 되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서울역 고가의 당선 작가인 비니 마스의 인터뷰는 눈여겨볼 만하다. “도시재생은 결과가 아닌 과정의 산물입니다.” 이제 선택은 서울 시민들에게 달렸다. 담장을 허물어주길 기다릴 것인가, 스스로 깨고 나올 것인가.
조경민이라는 이름보다는 조반장이라는 별명이 더 익숙해졌다. 지금은 사단법인 서울산책의 대표이자 고가산책단의 일원이지만 이전까지는 각종 문제 연구소장으로 불릴 정도로 얇고 넓게 그리고 복잡하게 살아왔다. 건축을 전공했으나 아직 자기 집이 없고 남자 평균수명의 절반을 넘었으나 아직 해보고 싶은 게 많으며 현재 가장 큰 고민의 주제는 ‘서울’과 ‘길’이다. 고가산책단은 서울역 고가에 대한 걱정이 많은 사람들의 자발적 모임이다. 지금은 고가에 대한 시민들의 마음을 듣고 모으고 전하는 퍼실리테이터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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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설계공모의 이면
예고한 대로 이달에는 ‘서울역 고가 기본계획 국제지명 현상설계’의 당선작과 출품작들을 세 편의 비평과 함께 엮은 특집을 싣는다. 너무 당연한 말이 겠지만 설계공모의 목적은 좋은 설계안을 뽑는 데 있다. ‘좋은’의 자리에는 실험성이나 독창성처럼 가슴 뛰는 단어가 들어갈 수 있다. 경제성이나 공공성 같은 가치가 더 중요할 때도 있다. 어느 경우든 설계공모의 주인은 당선작에 따라 구현될 현실 공간의 사용자들이어야 하지만, 그들이 공모전의 실제 과정에 개입할 기회는 거의 없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주체는 주최자(또는 전문위원), 출품자, 심사위원 정도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나는 이 세역할을 모두 경험하며 설계공모의 이면을 생생히 목격할 수 있었다.
모든 게임의 주인공은 직접 뛰는 선수다. 스스로를 조경가가 아니라 이론가나 비평가라고 정의하고 있지만, 공모전에는 출품한 적이 몇 번 있다. 연합팀의 일원으로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거나 전반적인 디자인 개념이나 전략을 잡는 일을 했다. 설계공모에 도전한다는 건 경쟁의 장에 뛰어드는 일이다. 시간과 노동과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안감이나 피곤함보다는 흥분감과 초조함이 절묘한 비율로 혼합된, 매우 자극적인 경험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공모전을 한번이라도 해보면 바로 그 “기쁨을 아는 몸”이 된다. 자신의 디자인 아이디어와 해법을 실험하고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구상이 실현되거나 적어도 공론화될 수도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부르디외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일루지오illusio”(장場의 환상)에 빠져 “인정 투쟁”을 하는 셈이다. 당선작을 내는 기쁨을 맛본 적은 없다. 매번 아쉬울 수밖에 없었는데, 경쟁에서 이기지 못해 억울한 건 아니었다. 패인을 알 수 없다는 점이,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패인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주최자나 심사위원회가 제출작이나 최종 경쟁작에 대해 상세한 리뷰를 제공하는 경우는 전무하다. A4 한쪽 미만의 형식적인 심사평이라도 발표되면 다행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패자는 작품 외적인 모종의 어떤 상황이나 관계 때문에 자신의 작품이 당선되지 못했다고 굳게 믿으며 분루를 삼킨다. 다시는 하지 않으리라 냉소를 짓지만 이미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기에 멈출 수 없다. PAProfessional Advisor라는 조금은 생소한 약자로도 불리는 전문위원은 설계공모 주최자의 대리인이다.설계공모의 풍년이던 2000년대 중반부터 도입되기 시작한 제도다. 같은 학과 원로 교수를 도와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앙녹지공간, 광교신도시 호수공원, 동탄신도시 워터프런트공원, 용산공원 등 대형국제 설계공모의 전문위원 역할을 하게 됐는데, 복잡하지만 도전적인 일이었다. 설계공모 전반을 기획하고 설계 지침을 쓰고 제공 자료를 만들고 심사위원을 섭외하고 심사를 진행한다. 초청 공모인 경우에는 지명 초청자를 선정하는 일도 해야 한다.홍보, 의전, 전시 기획, 출판까지 관장해야 한다. 교수 몇 사람이 하기에는 벅찬 일이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전문 인력 풀이 필요함을 깨닫곤 했다.
가장 당혹스러웠던 건 주최자가 설계공모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였다. 설계 대상지를 무엇으로 어떻게 쓰겠다는 명확한 목적 없이, 원하는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최소한의 바람도 없이 행정 절차의 하나로 진행되는 공모전. 설사 좋은 작품을 뽑는다하더라도 현실로 구현되기 어렵다. 주최자를 대리하는 입장에서 공들여 설계 지침을 작성해도 머릿속에 그렸던 작품이 제출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전문위원이 설계 지침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사를 진행하는 과정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했다. 심사위원회에 모신 내로라하는 세계적 전문가들이 합리적인 토론보다는 난데없는 국가대항전이나 감정적인 민족주의의 대리전을 펼친다. 작품 자체보다는 태도나 스타일이 심사의 초점이 되기도 한다.
심사위원은 다시 하라면 가장 하기 싫은 역할이다. 다른 분들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나에겐 몇 달씩 뜬눈으로 밤을 새워 제출한 노력과 성과를 단 몇 시간 안에 감식할 안목이 없기 때문이다. 첨예한이권이 걸린 설계공모에서는 심사위원간의 토론을 금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공정성과 투명성이라는 미명 하에 심사장의 상황이 옆방에 앉은 제출자들에게 실시간으로 생중계되고 심사위원은 마네킹처럼 다소곳이 앉아 자신의 채점표에 점수만 매기는 진풍경도 펼쳐진다. 토론을 하더라도 “이 작품은 직선이 많아 생태적이지 않다”, “저 작품은 정자가 있으므로 전통적이고 한국적이다”는 수준의 주장이 난무한다. 심사위원 노릇이 난감하고 피곤한 더 큰 이유는 인간관계 때문이다. 심사위원으로 예상되거나 발표되면 선후배, 친구는 물론이고 친구의 친구, 생전 본 적 없는 사람들로부터 전화가 빗발친다. 찾아오지 마시라고 간청을 해도 소용없다. 연구실 문을 잠그고 없는 척해야 한다. 작품 제목을 문자 메시지로 보내는 사람도 있고, 패널 이미지 파일이 카톡으로 날아오기도 한다.
2015년의 서울은 때 아닌 공모전의 르네상스다. 지난 한달 동안만 하더라도 설계공모 뉴스가 줄을 이었다. ‘잠실운동장 도시재생 구상 국제공모’의 참가 등록이 끝났고, ‘노들꿈섬 운영구상(1차) 공모’의 설계 지침이 발표됐으며,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공공공간 국제공모’의 수상작들이 공개됐다. 세종대로의 국세청 별관을 허물고 역사문화 광장을 조성하는 설계공모도 곧 시작될 예정이다. 공공의 도시 공간을 재발견해 지혜롭게 고쳐 쓰는 일이야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홍수처럼 쏟아지는 이 프로젝트들의 목표 시점이 정치적 일정과 무관하지 않으며, 일련의 설계공모가 ‘공간 정치’의 전시적 이벤트로 동원되고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공모전이 많아질수록 조경, 건축, 도시 전문가의 일거리가 풍족해진다고 마냥 좋아할 일만은 아니다. 설계공모는 생각처럼 낭만적인 제도가 아니다. 잡지 첫 쪽에 부끄러운 개인적 경험담을 늘어놓은 건 설계공모의 관행적인 형식과 내용을 다시 돌아보자는 뜻에서였다. 설계공모의 과정 자체를 다시 디자인하고 그 과정에 사용자(시민)가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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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여행의 기술
여행에서 가장 설레는 때는 어딘가로 떠나기를 결정하고 출발을 기다리며 기대를 부풀리는 시간일 것이다. 무려 6개월 전부터 비행기 티켓을 끊어두고 동행과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만날 때마다 어떤 아름다운 풍경을 볼지, 어떤 맛있는 음식(술)을 먹을지 등을 이야기했다. 바르셀로나나 파리, 런던 등 대도시와 이름만으로도 낭만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프로방스나 지중해의 도시를 따라가는 여행. 가보고 싶은 장소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들뜨고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통장에서 따박따박 빠져나가고 있는 여행 경비 따위는 외면하고 말이다. 이런 흥분 상태는 먹고사는 일을 잠시 제쳐 두고 익숙한 공간을 떠나 벌어질 미지의 일들에 대한 기대와 상상 때문에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우리에게 이번 여행은 현실 탈출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막상 여행을 떠날 때가 되자 (“꿈이 현실로 바뀔 시간”이 다가오자) 그전에 마쳐두어야 할 일들에 대한 부담과 준비 부족으로 인한 걱정이 여행에 대한 기대를 슬그머니 대신하기 시작했다. 이상향이 부담스러운 현실이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출발 전부터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 생각났다. “늘 제기되는 한 가지 문제는 여행에 대한 기대와 그 현실 사이의 관계이다.”1 여행 전에 가졌던 기대와 달리 새로운 곳에서 느끼는 환희의 시간은 매우 짧다는 그의 예민한 관찰에 열렬히 동의하게 된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감동적인 풍경의 사이사이는 낯선 환경의 고달픈 현실이 채운다. “우리는 지속적인 만족을 기대하지만, 어떤 장소에 대하여 느끼는 또는 그 안에서 느끼는 행복은 사실 짧다.” 예상치 못한 현실이란, 답사를 위해 준비한 새 신발은 길이 들지 않아 걸을수록 상처만 내고, 기상이변으로 기온은 40도까지 치솟는데 한국에서는 흔하게 팔고 있는 아이스 커피가 없는 식이다(카페에서 아이스 커피를 주문하면 점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뜨거운 커피가 담긴 잔과 딸랑 얼음 두 조각이 담긴 유리잔을 함께 내밀곤 했다. 얼음이 든 음료를 잘 마시지 않는 유럽 문화의 체험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었지만 더위를 견디기 힘들었던 우리는 사방에 널려 있는 매력적인 노천 카페를 두고 결국 익숙한 스타벅스에 찾아들곤 했다. 예전에는 전 세계의 맥도날드화를 우려했다면 지금은 스타벅스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 같다. 여하튼 우리에게 스타벅스 커피는 고향의 맛이었다. 낯선 것을 열망해 떠난 여행에서 다시 익숙한 것을 소망하는 아이러니라니!).
신체적 욕구의 충족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부분도 여행의 질에 영향을 미쳤다. “아름다운 대상이나 물질적 효용으로부터 행복을 끌어내려면, 그 전에 우선 좀더 중요한 감정적 또는 심리적 요구들을 충족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 따라서 중요한 인간관계 속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몰이해와 원한이 갑자기 드러나면, 우리의 마음은 화려한 열대의 정원과 해변의 매혹적인 목조 오두막을 즐기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즐길 수가 없다.” 긴 여정에 몸이 피곤해지니 사소한 의견 차에도 감정이 예민해졌다. 관심사와 스타일이 다른 여러 사람들이 함께 여행을 다니다 보니 보고 싶은 것도 제각각이어서 아무리 팀을 나누어도 의견 조율이 쉽지 않았다. 돌발 상황도 속출했다. 어느 순간 우리는 희망한 그 모든 곳에 갈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을 답사 리스트에 올려 두는 것과 치밀하게 동선을 짜는 것은 다른 일이다. 꼼꼼한 답사 계획을 짜지 못한 데 대한 자책을 접어두고) 여건이 되는대로 또는 그날의 리더가 이끄는 대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여러 지역을 단체로 움직였던 이번 여행에서 습득한 ‘여행의 기술’은 대략 이런 것들이다. 하나의 도시를 차근차근 둘러보거나 한 공간을 음미하며 답사하기보다는 빠르게 둘러보고 파악하기, 그리고 대책 없이 나열해 놓은 답사지 리스트를 다음 방문을 기약하며 포기하기가 주요 포인트였다. 그런데 여행의 빛나는 순간은 계획되지 않은 우연한 순간에 찾아오곤 했다. 이를테면 주요 스팟을 징검다리 건너듯 답사하다가 누군가의 의견에 따라 큰 기대 없이 돌아선 길에서 마주친 길거리 풍경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식이다. 그리고 보면 가장 인상적인 기억은 거리나 광장 혹은 공원의 사람들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좋은 계절 탓인지 공원이나 광장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치 극성수기 해변 모래사장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파라솔들처럼 낯선 사람들과 큰 거리를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딱히 특별한 일을 하는것도 아니다. 그저 대화를 나누거나 누워서 햇볕을 즐기거나 홀로 앉아 있다. 서양인들은 햇볕을 종교처럼 여긴다는 상식만으로는 뭔가 설명이 부족하다. 잘 꾸며진 공원뿐만 아니라 어디든 자리만 있으면 그렇게들 앉아 있다. 하다못해 파리 센 강의 더러운 지천 양편에도 맥주 한두 병을 든 젊은이들이 마치 술집의 바인 양 줄지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마치 많은 실내 공간을 오픈스페이스가 대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몇 달 전 편집부 카톡방에서 나눈 이야기가 떠오른다. 가을이 되면 소풍을 겸해 ‘공원’ 특집을 기획하자는 내용이었다. 실제 공원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미세하게 들여다보자고 했다. 공원의 원조인 서구의 공원과 우리의 공원 문화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는 이야기도 했던 것 같다.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공원이나 거리가 어떻게 받아주어야 할지도 고민해보자고 했다. 아마 올 가을에는 ‘즐거웠던’ 이번 여행을 추억하며 한국의 공원과 거리를 쏘다닐것 같은 예감이 든다. “기억은 단순화와 선택을 능란하게 구사”하기 때문에 그때쯤이면 고달팠던 현실은 생략된 채 감동적인 장면을 이어 붙여 편집한 여행이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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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서재]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조경학과 학생들이 대상지를 이해하기 위해 답사를 다녀오는 것처럼 국문학과 학생들도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혹은 밤샘 술자리에 대한 그럴듯한 핑계를 대기 위해) 문학의 고향을 찾는다. 하지만 의도한 것과 반대의 경험을 하기도 한다. 지난해 나는 우연히 청양에 들렀다가 내가 사랑하는 시의 고향을 영영 잃어버린 느낌을 받았다.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얼어붙은 호수에 헛되이 돌멩이를 던지며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고 담담하게 고백하는 나희덕의 시 ‘천장호에서’를 읽으며 과거에 나는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리곤 했다. 그런데 이제 천장호에는 적막 대신 거대하고 시뻘건 청양고추·구기자 조형물과 뜬금없이 하늘로 승천하고 있는 용 한 마리가 세워져 있다. 이 끔찍한 기억 덕분에 나는 이번 달에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국제공모를 다루면서 늦기 전에 세운상가를 꼭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줄곧 시골에서 살았던 터라 아쉽게도 세운상가에 대한 추억도, 찾아가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 시골뜨기에게 유하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정서의 시집이었다. 지금은 시인보다는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한 그는 자신의 시와 영화에서 줄곧 과거의 서울에 대한 향수를 노래해왔다. 최근작 ‘강남 1970’에서는 1970년대 초 강남의 재개발을,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는 1970년대 말죽거리(양재동) 일대의 풍경을,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에서는 1990년대의 압구정동을 스케치했다. 하지만 그가 묘사하는 도시의 풍경은 사실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오히려 ‘욕망의 통조림 공장’1이나 ‘쩝쩝대는 파리크라상, 흥청대는 현대백화점, 느끼한 면발 만다린, 영계들의 애마 스쿠프, 꼬망딸레부 앙드레 곤드레 만드레 부띠끄, 무지개표 콘돔 평화이발소, 이럇샤이마세 구정 가라, 오케’2 등으로 표현되는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욕망으로 넘쳐나는 공간이다. 그가 영화에서 묘사하는 공간에도 언제나 폭력과 부패가 넘친다.
그런데도 그의 시를 읽다보면 혐오의 감정 속에 왠지 모를 그리운 마음이 뒤섞인다.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세운상가에 대해 ‘욕망의 이름으로 나를 찍어낸 곳’3, ‘고담시市에 뒹구는 쓰레기들의 환희, 유혹’4이라고 표현하면서도 ‘난 모든 종류의 위반을 사랑했고 버려진 욕설과 은어만을 사랑했다’5고 고백한다. 이 모순된 감정은 특히 시집에 마지막으로 수록된 시 ‘모텔, 카사블랑카’에서 ‘세월의 불안, 경멸과 모독, 기다림 따위들을 견디며 난 길 위의 먼지 묻은 사과를, 형편없는 푸른 사과를 산다’는 구절로 압축된다. 시금털털할 것이 분명한 형편없는 푸른 사과를 사는 시인의 감정은 무엇일까? 나는 그의 시를 읽으며 공존할 수 없는 양가감정 사이에서 헤매다가도 ‘흠집 많은 중고 제품들의 거리에서 한없이 위안받았네 나 이미, 그때 돌이킬 수 없이 목이 쉰 야외 전축이었기에’6라는 아름다운 시구에서는 알듯 말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지난 주말 세운상가를 답사하면서 시인이 표현한 감정을 어렴풋이 느꼈다. 페인트칠이 누더기처럼 지저분하게 벗겨진 건물 외벽, 많이 훼손되어 바스라질 것 같은 시멘트 계단, 비아그라, 흥분제, 도청장치, DVD, CCTV를 모두 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으슥한 상점,건물 주변으로 다닥다닥 붙은 허름한 건물들 사이로 길게 누워있는 세운상가는 과거라는 행성에 불시착한 은하철도999를 현실 세계에 옮겨 온 것 같은 분위기였다. 처음 세운상가 입구에 들어설 때는 ‘여기서 걷다가 어디 이상한 골목에 끌려가 장기를 떼이고 버려지는 게 아닐까’하는 무서운 상상에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안쪽으로 진입하니 좁은 골목 사이로 오토바이와 트럭이 끊임없이 들락날락 거리며 무언가를 날랐다. 칼빵(?)이 한두 개쯤 있는 무서운 얼굴일 것이라 생각했던 정체불명의(?) 상점 상인들은 평범한 인상이었다. 세운상가 건물 중 가장 낡고 허름한 진양상가에서는 그 어둡고 쇠락한 건물 속에서 꽃을 팔고 있었다(세운상가 일대에서 본 가장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한동안 세운상가는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인 성급한 행정과 건축가의 의도가 충분히 구현되지 못한 실패한 건축으로 인식되었다. 지역 슬럼화의 원인으로 지적되며 철거의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일정 부분 맞는 평가다. 하지만 그 B급의 정서가 없었다면 세운상가가 지금처럼 영세한 부품 가게, 특수 용품점, 소규모 작업공장 등을 하나로 품는 독특한 장소성을 가진 공간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오피스텔 단지와 공원으로 바뀐 세운상가를 상상하는 것은 천장호에 세워진 고추와 용 조형물을 보는 것만큼이나 어색하다. 더디고 완벽하진 않겠지만 철거 대신 활성화를 택한 세운상가의 미래를 응원한다. 그리고 활성화 과정에서 특유의 B급 정서를 잃지 않았으면 한다. 세운상가엔 ‘시금털털한 푸른 사과만큼의 희망이 있’7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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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조경비평상 심사평
총 네 편 출품, 조경비평 봄 심사
‘2015 조경비평상’에는 총 네 편의 작품이 출품되었습니다. 심사는 ‘조경비평 봄’ 회원들이 맡았습니다. 심사자마다약간의 견해 차이는 있었지만, 공통적인 심사 기준은 문제의식의 독창성과 주장의 타당성, 작품의 내용과 형식의 완성도, 비평가로서의 태도와 문장력이었습니다.
이번 응모작들은 비평의 소재가 다양화되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존의 작가나 작품 위주의 비평을 넘어 일상의 경관(응모작1, 2, 3)과 조경가 혹은 조경계의 문제(응모작4)로까지 비평의 대상이 확장되었습니다. 또한 객관적 서술을 지향하는 글쓰기 못지않게 주관적인 서술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도 절반을 차지했습니다(응모작2, 4). 작가가 있는 작품에 대한 비평에 비해 일상을 소재로 한 비평이 불리한 것은 아닙니다. 주관적인 서술 스타일의 글이 비평으로서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소재와 스타일에서 참신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비평’의수준과 완성도가 문제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번 응모작들은 다소 미흡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네 편의 글에서 장점 또한 많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지면을 통해서 그 장점에 대해 주로 말씀드릴까 합니다.
응모작1. ‘일상의 풍경을 새롭게 보기 - 가로수’는 지적 의욕이 넘치는 글입니다.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자료 조사와 준비를 충실히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데이터와 정보를 근거로 한 주장은 강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저자가 그 근거를 바탕으로 무엇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호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적 구조도 부실했다는 것이 공통된 심사 의견이었습니다. ‘가로수’와 ‘가로’에 대한 문제의식의 혼란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되었습니다.
응모작2. ‘위로의 산책’은 문장 자체가 편안하게 읽힙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주관적인 시점으로 서술하는 형식에 대해서는 심사위원의 평가가 엇갈렸습니다. 이런 서술 방식은 비평문으로서 부적합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참신한 전략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 사적인 것을 넘어 공감과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글 자체의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글은 그 문턱을 넘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공간에 대한 저자의 기억, 감정, 생각 등 개인적인 경험과 느낌을 글로 풀어 쓴 부분과 공간에 대한 주관적인 분석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응모작3. ‘무제’는 삼청동을 ‘권력의 공간’으로 읽으려는 시도로 읽힙니다. 이 글은 권력의 의미를 정치권력 외에 자본권력으로 확장하여 정의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권력을 이렇게 정의했기 때문에 삼청동이라는 장소 선택은 퍽 흥미로워집니다. 삼청동이 청와대로 대표되는 정치 권력과 최근의 상업 및 자본 권력이 함께 나타나는 권력 중심지가 되었다는 관점입니다. 이렇게 저자는 삼청동의 장소 특성을 논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잘 마쳤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전개에서 삼청동만을 대상으로 한 고유한 논의가 이루지지 못했고,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에 대한 기존 논의의 반복에 머문 점이 아쉬웠습니다.
응모작4. ‘건축가 아닌 승효상 탐구 - 어느 30대 조경가의 길 찾기’는 자신의 문제에 대한 몰입도가 강한 글입니다. 문제의식과 주장이 선명하고 문장 자체가 잘 읽힙니다. 개인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글은 우선 진실하고, 성공할 경우 우리 모두의 해답이 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조경가로서 자신의 진로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경계의 문제 해법을 건축가 승효상과 건축계의 성공 전략에서 찾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전략은 자칫 무비판적이고 순진하게 비춰질 위험이 있습니다. 세련미와 참신한 대안에 대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네 작품 모두는 나름의 장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글의 목표 지점까지 완주하는 지구력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각자의 장점을 더욱 살리고 짜임새 있게, 끝까지 힘 있게 글을 쓴다면 좋은 비평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심사를 하면서 입상작을 내지 못한 결론이 심사자들에게 부담스러웠습니다. 이런 결과가 조경비평의 앞날에 나쁜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매 회마다 반드시 수상작을 내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가능성의 문은 늘 열어두되 그
결과에 조급해 하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당선작이 없어도, 가작 한 편 없어도 매년 신진 조경비평가의 등용문을 마련하는 주최측의 ‘은근과 끈기’를 응원합니다. 내년에는 조경비평상에 부합하는 글을 만나기를 기대하며 심사평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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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IFLA 세계대회
아직 오지 않은 조경의 역사를 논하다
지난 6월 10일부터 12일까지 ‘제52회 세계조경가협회 세계대회World Congress of the International Federation of Landscape Architects(IFLA)’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개최됐다. 최근 러시아는 매년 새로운 조경 디자인, 논문, 전문 서적이 쏟아져 나오는 등 ‘조경의 호황기’를 맞고 있다. 조경에 대한 시민의 수요가 증가하고 있고, 국가적으로도 조경의 잠재력을 인지하고 경제적·정책적 뒷받침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번 IFLA 세계대회는 러시아에서는 처음 개최된 것으로 총 35개국에서 304명의 관련 전문가가 참여했다.
‘미래의 역사History of the Future’를 중심 의제로 제시한 이번 행사에서는 잃어버린 경관의 재건과 재생의 사례를 바탕으로 조경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도전과 기회에 대해 폭 넓은 논의가 전개됐다. ‘미래의 역사’를 위한 사흘간의 토론 이번 세계대회는 세 개의 세션으로 구성되었고, 총 95개의 세부 사례와 연구 발표가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첫 번째 세션, ‘동에서 서로: 현대 조경의 통합과 혁신’에서는 현대 조경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 어떠한 연구방법론이 필요한가에 대한 발표가 주를 이루었다. 특히 아시아와 유럽 모두에 속한 러시아에서 어떤 조경이 펼쳐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토픽이 주목을 받기도했다. 두 번째 세션, ‘21세기의 역사와 자연 경관: 보전, 재건, 복원을 중심으로’에서는 문화 유산의 보전과 역사적 장소에 대한 생태적이고 지속가능한 복원 및 재생에 대해 미국, 러시아, 터키, 중국, 스웨덴 등 각 국가의 사례 연구가 발표됐다. 지형학적, 생태적, 사회문화적 조건에 따른 각기 다른 해법을 공유했다. 세 번째 세션은 ‘그린-블루 인프라스트럭처와 지속가능한 도시 개발’을 주제로 미래 도시의 오픈스페이스 활용과 미래지향적 도시 시스템 등이 논의됐다. 워터프런트 리노베이션 프로젝트, 워터프런트 시티, 에코시티, 기후 변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 문제, 미생물 연구를 통한 조경 분석, 돌로 만들어진 식재 기반 연구등 미래 도시의 오픈스페이스와 시스템에 대한 발표와 토론이 주를 이루었다.
2015 IFLA 세계대회의 주요 주제 발표
사흘 동안의 본 회의에 앞서 매일 두 개의 기조 발표keynote presentation가 진행됐다. 러시아에서 개최된 만큼, 러시아 주요 도시의 도시 경관 개선 프로젝트들이 소개되기도 했다. 1일차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총괄 조경가인 라리사 카누니코바Larisa Kanunnikova가 ‘경관 시나리오’를 주제로 향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진행될 경관 개선 사업을 개괄했다.‘생명을 위한 장소들 Places for Life’을 키워드로 도시 속에 녹색 인프라스트럭처를 구성할 것이라 밝혔다.
2일차 회의에 앞서 세르게이 쿠슈네트소프Sergey Kusnetsov 모스크바 총괄 건축가는 ‘2035 모스크바 강변 개발 사업’을 주제로 모스크바 강 주변 10,400헥타르 면적에 펼쳐질 대규모 경관 개선 및 도시 인프라 구축 사업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 사업은 2014년 모스크바 시정에서 주최한 공모전의 당선작인 ‘메가놈 프로젝트Meganom Project’(설계: SUE Research and the Project Institute)를 기반으로 진행된다. 같은 날, 중국 투렌스케이프Turenscape의 조경가 콩지안 유Kongjian Yu는 ‘도시의 자연 속에 딥폼Deep Forms 만들기’라는 제목의 기조 발표를 하기도 했다. 딥폼은 다랭이 논과 같이 인간이 오랫동안 자연과 함께 지내면서 만들어낸 형태나 시스템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딥폼 방식의 예로 자르고 채우기, 틀 세우기, 관개와 토지 개량, 수확을 제시하며, 이를 도시 속에 자연 환경을 재건할 때 적용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홍수, 가뭄, 황사, 기근 등 전 지구적인 환경 문제에 대한 조경적 해결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날에는 스웨덴 농업과학대학교Sweish University of Argriculture Sciences의 마리아 이그나티에바Maria Ignatieva 교수가 ‘러시아의 조경: 동서양의 상호작용’을 주제로 1900년대 초부터 1990년대까지 러시아의 사회문화적 변화 흐름 속에서 조경이 어떤 역할을 해왔고 어떤 영향을 받아왔는지 해석한 논문을 발표했다. 특히 유라시아 지정학적 영향권에서 큰 다양성을 갖게 된 러시아의 사회문화적 분위기가 세계화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오픈스페이스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에 많은 청중이 주목했다. 한편 같은 날, 올가 밀리샤Olga Militsa 러시아 국가문화유산관리위원회 위원장은 ‘러시아의 역사적 정원과 공원에 대한 주state 단위 관리 시스템’이란 기조 발표에서 러시아 오픈스페이스의 변화 양상과 현재를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사례로 제시하며 설명하기도 했다.
한국인 발표
이번 세계대회가 끝나고 게재된 리뷰 글에서도 여러번 언급될 만큼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의 주제 발표가 큰 관심을 끌었다. 한국에서는 김준현(서울대학교), 윈쟈엔(서울대학교), 황주영(서강대학교) 등이 세션 발표자로 나섰다. 김준현은 ‘공원 설계와 정치의 경계에서’를 통해 정책 결정권자가 공원 설계 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정치 이데올로기가 공원 설계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의 한계는 어디인가, 정치 영합적으로 조성된 공원을 어떻게 살릴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을 던졌다. 윈자엔은 ‘상하이 스쿠먼Shikumen 경관: 과거, 현재, 미래를 엮어내다’를 발표했는데, 스쿠먼의 ‘신천지Xintiandi 프로젝트’를 예로 들어 1990년대 이후 중국과 서양의 건축 문화 양식이 융합되는 과정을 해석했다. 황주영은 ‘예수회Jesuits로부터 유입된 시느와즈리Chinoiserie 취미에 대하여’에서 조경의 유입 경로에 새로운 의견을 개진했다. 흔히 조경은 서구에서 동아시아로 유입된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17~18세기에 유럽의 정원 문화는 중국의 시느와즈리(중국 예술풍의 일종)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밖에 심지수(서울대학교), 유수진(고려대학교), 이명준(서울대학교) 등이 포스터 발표자로 참가했다.
2016년은 이탈리아 튜린에서
제53회 세계조경가협회 세계대회는 이탈리아의 튜린Tulin에서 2016년 4월 20일부터 22일까지 개최될 예정이다. 내년의 의제는 ‘테이스팅 더 랜드스케이프Tasting the Landscape’로, 환경, 경제, 사회적 현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전문성으로 경관을 다루는 다양한 접근과 경험이 발표, 토론될 것이다. 참가를 원하는 조경가와 학생은 오는 8월 10일까지 영문 초록과 관련 서류를 공식홈페이지(http://www.ifla2016.com/)에 제출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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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를 향한 건축가들의 여정
‘아키토피아의 실험’, 2015.6.30~9.27
건축가들은 때로는 파격적이었고, 낭만적이기도 했으며, 내밀하게 욕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아키토피아의 실험’ 전에서 유토피아를 향한 건축가들의 여정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하게 펼쳐졌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아키토피아의 실험’은 건축architecture이 꿈꾸는 유토피아utopia, ‘아키토피아architopia’를 쌓아올린 건축가들의 사회적 실험을 영상, 그래프, 텍스트, 사진 등 다양한 매체로 소개한다.
건축가, 사진가, 비평가, 미디어 아티스트, 만화가, 그래픽 디자이너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 22명이 참여해 전시를 구성했다.
도시의 괴물, 세운상가의 꿈
이번 전시는 건축의 꿈과 욕망이 투영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아키토피아로 세운상가, 파주출판도시, 헤이리 아트밸리, 판교 신도시를 꼽으며 이들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본다. 전시의 첫 장 ‘유토피아의 꿈’을 여는 세운상가는 ‘도심을 가로지르는 괴물 빌딩’1으로 불리는 서울의 대표적인 슬럼가이지만 그 시작은 화려했다. ‘세상의 기운이 다 모여라’라는 뜻의 ‘세운世運’ 상가는 김현옥 전 서울 시장의 진두지휘 아래 1968년, 국내 최초의 주상 복합 건물로 완공되었다. 당시 세운상가의 설계를 맡았던 젊은 건축가 김수근은 쪽방과 판자촌이 즐비하던 소개 공지에 옥상 정원, 건물과 건물을 잇는 공중 보행로, 건물을 유리로 덮는 아트리움 등 도시의 구조를 건축물에 압축한 파격적인 설계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시공사가 8개 회사로 조각나면서 당초 설계대로 진행되지 못한 채 완공되었고 반짝 인기를 끌었다가 1970년대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이번 전시는 서울시의 협조를 얻어 건축가 김수근의 세운상가 기본 설계 도면을 50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한다. 또한 당시의 신문 기사, 홍보 전단지, 관련 문서 등을 통해 세운상가의 번영과 쇠락의 역사를 들여다보고 이곳에 움트고 있는 새로운 미래에 주목한다. 전시를 기획한 정다영 학예사는 세운상가에 대해 “기본 설계 도면을 보면 원래 아주 미려한 건물로 설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메타볼리즘을 보여주는 진보적인 건물”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당시 실현되지 못한 건축가의 꿈이 미래와 어떻게 만나고 있는 지 확인할 수 있다. 건축가의 작업실을 옮겨온 듯한 전시의 배치는 관객을 세운상가와 그 일대의 청사진을 그리는 건축가의 치열한 고민의 현장으로 데려간다.
유토피아의 낭만과 현실
파주출판도시의 퇴근 시간, 사람들은 거리가 스산해지기 전에 서둘러 셔틀버스에 올랐다. 파주와 서울을 오가는 출퇴근 셔틀버스는 언제나 만석이었다. ‘출판과 예술이 조화를 이루는 꿈의 도시’를 꿈꾸며 야심차게 출범한 출판도시의 밤거리와 주말 카페 테라스엔 도시로서의 생명력이 부족하다. 파주에 근무하는 직장인 500명을 설문 조사해 출퇴근 시간과 거리를 인포그래픽으로 나타낸 옵티컬레이스의 작품 ‘출판단지 가는 길’(2015)은 출판도시의 스산한 밤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파주출판도시와 헤이리 아트밸리는 기존의 마스터플랜 식의 도시 개발의 대안으로 건축 코디네이터 개념을 도입해 출발한 도시다. 1부에서 소개한 세운상가가 1960년대 후반 기존 도심지에 정부 주도로 세운 아키토피아라면 2부 ‘건축도시로의 여정’에서 소개하는 파주의 사례는 1990~2000년대 도시 외곽에 민간이 주도해 이룩한 아키토피아다. 2부는 생태 도시, 민주적 도시, 문화·예술의 도시의 낭만적인 기치 아래 이룩된 아키토피아가 도시로서의 기능을 자족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상업주의와 절충하는 모습을 비춘다. 배형민, 정다운의 공동 영상 작업 ‘목소리의 방’(2008)을 통해 파주출판단지를 둘러싼 건축가, 건축주, 주민 등의 다양한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저녁이 있는 삶’의 이율배반
3부 ‘욕망의 주거 풍경’은 2000년대 이후 젊은 건축가들의 데뷔 무대가 되고 있는 판교 단독주택 단지를 조명한다. 경부고속도로의 건설로 서울로의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형성된 판교 단독주택 단지는 건축가와 건축주의 욕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저밀도 신도시다. 도시근교에서 여유와 멋이 있는 ‘저녁이 있는 삶’을 꿈꾸는 건축주의 요구와 자신의 철학과 개성이 담긴 작품을 짓고 싶어 하는 건축가의 이상이 맞물려 탄생했다. 판교 단독주택 단지는 도시와 동떨어진 반쪽 도시가 아니라 주민들이 실제로 생활하고 있는 삶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파주의 사례와 다른 특징을 갖는다.
하지만 판교의 ‘저녁이 있는 삶’은 이율배반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건물 크기에 비해 좁고 작은 창문을 가진일련의 단독 주택을 촬영한 이영준의 사진 작품 ‘왜 판교는 창문을 싫어할까’(2015)는 이웃과 함께 하는 ‘저녁’이 과연 판교에서 가능할까 의구심이 들게 한다. 이웃과 소통하는 친밀한 공동체를 형성하라는 의미에서 담장을 만들지 못하게 한 규정은 오히려 단지 곳곳에 무인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고 주택의 창문을 극도로 작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최호철의 일러스트 작품 ‘판교택지개발지구-돈이 자라는 땅’(2005)은 평범한농촌 마을이 신도시 개발 붐으로 인한 부동산 투기로 어수선해진 모습을 묘사했다. ‘저녁이 있는 삶’에 대한 욕망이 누군가의 소박한 저녁을 망가뜨리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한다.
한국전쟁 직후, 백지와 같던 도시의 밑그림은 어느새 빽빽한 획으로 들어찼다. 저성장 시대, 앞으로 건축가들은 아키토피아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 실험을 펼칠까. 이번 전시는 건축가들이 지금까지 펼쳐온 실험의 부산물과 열매를 소개하며 미래의 아키토피아에 대해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