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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듈 박스로 남북 보행축 연결한다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공공공간 설계 국제공모’ 당선작 발표
지난 6월 16일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공공공간 설계 국제공모’의 당선작이 발표됐다. 서울시는 지난 2월 ‘세운상가 활성화(재생)종합계획’을 발표하고 2월 24일부터 5월 17일까지 국제 설계공모를 실시했다. 공모전에는 국외 44개 작품과 국내 38개 작품을 포함해 총 82개 작품이 제출되어 높은 관심도를 엿볼 수 있었다. 최종 심사 결과 당선작으로는 이_스케이프 건축사사무소(대표 김택빈) 외 2인의 ‘현대적 토속Modern Vernacular’이 선정됐다.
2등작으로는 건축사사무소 메타(대표 우의정) 외 1인이 제출한 ‘누워있는 거인의 저속 촬영Time-lapse of Lying Enormous’이 선정되었으며, 이소우 건축사사무소(대표 김현수) 외 4인의 ‘도시의 필터Urban Filter’가 3등작으로 뽑혔다. 가작으로는 ‘플랫폼크레프팅Platform Crafting’(김주현 건축사사무소(대표 김주현) 외 1인), ‘세운상가의 영혼Spirit of Seunsangga’(lokaldesign(대표 신혜원) 외 3인), ‘골목길 너머 오솔길Golmokgil Ner-mer Osolgil’(건축사사무소 M.A.R.U.(대표 정일교) 외 4인), ‘숲 산책Forest Walk’(건축사사무소 아크바디(대표 김성한) 외 3인), ‘낡음에서 만든 새로움New from Old’(오다건축사사무소(대표 김승욱) 외 1인)이 선정됐다. 심사에는 승효상(이로재 대표, 서울시 총괄건축가, 심사위원장), 김준성(건국대학교 교수), 온영태(경희대학교 교수), 로저 리붸Roger Riewe(그라츠 공과대학교 건축학부 학장), 아드리안 구즈Adriaan Geuze(West 8 대표), 임재용(O.C.A 대표) 등 국내·외 건축, 조경, 도시설계 분야 전문가 6명이 참여했다.
주변과 연계된 입체 보행 네트워크를 창의적으로 구축하는 것과 동서 방향으로 단절된 주변 도시 조직과의 관계를 활성화하는 데 심사의 주안점을 두었다.
당선작에는 기본 및 실시설계권이 주어지며, 2등과 3등팀에는 각각 상금 5,000만 원과 상금 2,000만 원이 수여된다. 가작을 수상한 5팀은 각각 상금 500만원을 받는다. 발표 이후 6월 22일부터 30일까지 8개 수상작이 신청사 1층 로비에 전시됐다. 세운상가의 끊어진 조직을 뜨개질하는 ‘플랫폼 셀’ 당선작은 세운상가가 들어서기 전에 골목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생긴 집들과 삶의 방식을 기존 도시 조직인 ‘토속’으로 정의했다. 이를 현대에 속하는 세운상가 데크와 내부로 자연스럽게 연결·확산시켜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현대적 토속’ 도시 구조로 재현했다. 이를 위해 종묘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남북으로는 끊어진 보행 데크의 축을 복원하고, 종로에서 동대문을 잇는 동서 방향은 역사적으로 지속해온 길을 찾아내 공간적·시각적으로 연결했다.
위·아래로는 중간 레벨의 데크를 추가해 데크 상하부를 입체적인 그물망처럼 연결하면서 기존 도시 조직과 세운상가 사이의 끊어진 조직을 뜨개질하듯이 연결해나가는 방식을 제안했다. 현재 남북을 잇는 보행 데 크는 높이가 너무 높아 한 번에 접근할 엄두가 나지 않는데, 플랫폼 셀Platform Cell이라고 부르는 모듈화된 박스를 데크 위·아래에 끼워 넣어 지상층(기존 도시 조직)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했다. 이 플랫폼 셀 안에는 전시실 등의 공공 편의 시설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담을 수 있으며, 3층 보행 데크와 2층을 수직으로 오갈 수 있어 활용도면에서도 유연하고 효율적인 시스템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세운초록띠공원은 종묘와 연결되는 횡단보도부터 세운상가 2층까지 완만한 경사로 이루어진 광범위한 광장으로 계획했다. 다양한 퍼포먼스를 수용할 수 있게 했으며, 앉아서 종묘 쪽을 바라볼 수 있게 설계했다. 세운초록띠공원은 약 960억 원 정도의 예산을 들여 조성되었는데, 이곳에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건 예산 낭비라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는 “현재보행 네트워크 계획과 관련해 공간의 성격을 규정하고 용도를 정해나가는 과정이라 기존 예산 투입의 효과를 누릴 기회”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심사위원들은 당선작에 대해 조성 예정인 선형의 경관 녹지와 주변 도로가 늦게 조성되거나 조성되지 못하는 상황에도 자체적으로 작동 가능한 시스템을 가졌다는 점을 가장 큰 장점으로 꼽았다. 단계적인 개발이 가능하고 주어진 공기와 예산 안에서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2등작은 세운상가와 새로 개발될 주변 건물군 사이에 놓인 경관 녹지와 데크를 하나의 공간으로 보고 접근했다. 지상층에서 데크로 접근하는 수직 동선을 경관녹지 내에 조성해 주변과 데크의 관계를 잘 설정한 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종묘 앞 진입 광장이나 데크를 연결하는 전략은 간결하고 높은 완성도를 보였으나, 경관 녹지가 확보되지 않았을 때를 대비한 단계적 개발 전략이 부족한 점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수직 동선의 위치나 지상층의 계획이 세운상가 동서 방향에 조성 예정인 경관 녹지에 너무 의존하고 있어 자체적인기능을 하기 어렵다는 점이 당선안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인다.
3등작은 건축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세운상가 기존 데크 위로 신설 데크를 추가해 혼잡한 도심에 존재하기 힘든 넓은 수평 공간을 확보해 다양한 행위를 유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주변과의 소통과 연결이 다소 부족한 것으로 지적되어 3등에 머물렀다.
한강부터 백두산까지 잇는 생태축의 거점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공공공간 설계 국제공모’는 이 일대 7개의 건물 총 1km 구간을 연결해 도심 문화·관광·산업 거점으로 역할을 하게 함으로써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세운상가군의 데크와 주변의 공공 공간을 재정비해 보행 환경을 개선하고, 주변 지역과 연계해 서울 역사 도심의 중심인 북악산~종묘~세운상가군~남산을 잇는남북 보행 중심축을 복원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세운상가는 1968년에 만들어진 거대 구조물로 건축가고 김수근이 설계했다. 승효상 총괄건축가에 따르면, 세운상가는 미완의 설계로 시공이 되어 설계의 본질이 잘 구현되지 못했음에도 당시 세계적으로 앞선 건축물이었다. 세운상가 건립 당시 전통적 도시에 거대구조물을 세우는 계획들이 발표되었는데, 세계에서 가장 낙후된 국가 중 하나였던 한국에 세운상가가 세워진 일은 세계 건축사에 남는 의미 있는 결과라는 것이다. 이후 강남 개발로 세운상가는 퇴락의 길로 접어들면서 철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5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근대적 유산으로서 가치가 조명되면서 보존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승효상 총괄건축가는 세운상가 활성화 프로젝트가 서울의 역사적인 공간 조직을 되살린다는 측면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의 도로는 동서 방향으로 발달된 망을 구성하고 있는 반면, 남북으로 연결된 곳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에 세운상가의 보행 데크를 복원하면 남북으로 가장 강한 보행축을 형성해 남산에서 북악산까지 걸어서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것. “북악산은 백두대간과 연결되고, 용산공원이 조성되면 남산과 한강이 연결되어, 백두산까지 생태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축을 세운상가가 잇는 셈이다.”
서울시는 세운상가가 복원되면 을지로 지하 공간과 청계천의 물길, 종로의 보행로와도 연결되어 한양도성 구도심의 공간 조직이 활성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보행 친화 정책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서울시는 ‘서울역 7017 프로젝트’를 통해 성 밖과 안을 잇고, 세운상가 활성화를 통해 남북 축을 이음으로써 도시의 중심 영역을 보행 공간으로 활성화시킬 계획이다. 사업은 2단계로 구분해 추진된다. 1단계는 종로~세운상가~청계·대림상가 구간으로 기존의 노후화된 3층 높이 보행 데크를 보수·보강하고, 단절된 세운상가 가동~대림상가 구간의 공중 보행교를 복원해 입체 보행 네트워크를 조성하는 것이다. 2단계 구간인 삼풍상가~진양상가는 소유자와 주민 의견을 수렴한 이후 구체적인 추진 계획을 수립한다.
한편, 서울시는 이번 당선안을 바탕으로 지역 주민 대상 설명회 및 분야별 전문가와의 협의를 통해 설계를 구체화할 예정이며, 당선팀과 설계 범위에 대한 구체적인 협상을 진행한 후 6월 중 계약을 체결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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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ive
밀라노의 꿀벌과 생태적 상상력
지난 5월 1일부터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지구 식량 공급, 생명의 에너지Feeding the Planet, Energy for Life’라는 주제로 ‘2015 밀라노 엑스포Milano Expo 2015’가 열리고 있다. 140여 개국이 참여한 이번 박람회는 건강한 삶을 보장하고, 안전한 음식을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히 제공하며, 그와 동시에 보다 회복탄력적인 지구 환경을 만들 수 있는 방식을 찾고자 기획되었다. 다양한 아이디어를 모으고 지속가능한 미래에 대한 전 세계적 공통 담론을 형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박람회장 한 편에 이러한 주제와는 맞지 않아 보이는 공간이 하나 있다. 이 공간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은 내부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와 예고 없이 꺼지고 켜지기를 반복하는 불빛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 이례적 공간은 지속가능성, 구체적으로는 식량과 자원을 주제로 한 이번 박람회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벌통, 그 이상
이번 박람회에 참여한 국가 중 상당수가 기술적·공학적 연구 결과를 통해 지속가능한 식량 및 자원 공급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에 반해, 영국 팀은 노팅험Nottingham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가 볼프강 버트리스Wolfgang Buttress의 주도하에 ‘하이브The Hive’라 불리는 거대한 ‘벌통beehive’을 선보였다. 우리가 먹는 곡물과 과일의 3분의 1은 꿀벌의 수분에 의존한다. 세계 식량의 90%를 차지하는 100대 농작물만 보더라도 무려 71%가 꿀벌의 수분에 의존하고 있다. 그 중 사과, 딸기, 양파, 호박, 당근은 90%를 꿀벌의 수분에 의존하며, 아몬드의 꿀벌 수분률은 무려 100%에 달한다. 그린피스Greenpeace는 전 세계 꿀벌의 노동 가치를 373조 원으로 추산하기도 했다. 국내의 경우 꿀벌이 수분 작용에 기여하는 경제적 가치가 6조 원에 달한다고 한다. 즉, 꿀벌이 사라진 세상에서는 우리 먹거리의 상당수가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중요성이 하이브의 모티브가 되었다. 생산자(식물)의 생산자(꿀벌)를 살려야 한다는 아주 간단한 계산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박람회장에서 이와 같은 수치적 내용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버트리스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꿀벌의 수에 대한 위기의식이 대두된 지는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경험이 생태계의 상호 관계성과 꿀벌의 중요성을 인지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며 디자인 의도를 설명했다. 하이브에는 숫자와 관련된 내용은 전혀 없다. 단지 사람들이 꿀벌의 하루를 체험하도록 할 뿐이다.
꿀벌의 일상을 경험하다
벌통으로의 여행은 과수원에서 시작된다. 과일향이 가득한 과수원을 지나고 나면, 야생화로 가득한 초지를 만나게 된다. 사람들은 눈높이만큼 높게 자란 야생화가 가득한 길을 따라 걸으면, 마치 꽃 속에서 꿀을 채취하는 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직선 구역을 지나면 ‘벌들의 춤’ 구역이 나온다. 사람들은 직선으로 날지 않는 벌꿀처럼 잠시나마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지그재그로 이동하며 벌통(하이브)에 도달하게 된다. 32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하이브에는 총 169,300개의 부품이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부품이 철골 구조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철골 구조의 거대함에 이끌려 내부로 들어온다. 그러나 버트리스는 이런 물리적 요소보다 내부에서 들을 수 있는 청각 신호와 볼 수 있는 시각적 신호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고 밝혔다. 내부를 향해 소리와 진동을 전달하는 다수의 스피커는 노팅험의 한 벌통에 설치된 센서와 연결되어 있다. 실제 꿀벌들의 신호 체계에 대한 분석과 진동 정보가 혼합된 정보가 밀라노의 하이브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변환되어 전달된다. 내부는 물론 외부를 밝히는 수천 개의 LED 전구 또한 노팅험의 벌통에서 꿀벌들이 만들어 내는 작은 진동에 반응한다. 전구 하나하나가 꿀벌 수백 마리의 움직임을 시시각각 전달하여 발광하는 것이다. 사실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는 것과는 전혀 다르기에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정말 꿀벌과 대화하는 것이냐”며 신기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귀가 간지럽다며 서둘러 빠져나가는 사람도 있다. 자꾸 깜빡거리는 전등을 보고 “고장난 것 아니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많다. 버트리스는 “이렇게 생물의 생명력을 과학과 예술을 통해 인간에게 전달하려는 시도가 잘 전달되지 않을 수도, 무의미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지금 저 멀리 수천 마일 떨어진 노팅험의 벌꿀이 모두 멸종된다면, 이곳 밀라노(의 하이브)에도 아무런 생명의 흔적이 없을 것”이라며 하이브가 꿀벌의 존재가 갖는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로 이어지길 바랐다.
아인슈타인은 “지구상에서 꿀벌이 사라지면 4년 안에 인류도 멸종하게 될 것이다”라며 꿀벌이 전 지구적 환경과 인류를 존속시키기 위해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꿀벌의 수가 20~40% 감소하고 등 세계 도처에서 벌꿀의 밀도가 갑자기 감소하는 현상이 보고되고 있다. 관련분야의 과학자들은 해결책을 품종 개발 등의 기술 개발에서 찾고 있지만, 여러 환경 단체는 기후 변화, 농약 중독, 밀집 사육 등 꿀벌의 생장 및 활력에 영향을 주는 원인을 먼저 해결하지 않는 이상 큰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기도 하다.
분명 원인은 복잡하고 해결책은 불분명하다. 영국 팀은 하이브를 통해 공기알만한 크기에 불과한 꿀벌이 전 지구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것처럼 6개월이 지난 시점에 하이브를 경험한 수많은 ‘인간 꿀벌’들의 크고 작은 생태적 상상력이 전 지구적인 변화로 이어지길 기대했던 것은 아닐까. 이번 박람회는 10월 31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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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스케이프] 말하는 건축 시티:홀
말하지 않는 경관
9회 말 동점, 2루에 주자가 나가 있는 상황에서 안타 하나로 경기가 끝나면 누가 패배의 책임을 져야 할까? 끝내기 안타를 친 선수는 기사의 헤드라인을 장식하지만 마무리 투수는 패배의 원흉으로 비난을 받는다. 사실은 3시간이 넘는 경기의 고비 고비에 수많은 요인이 차곡차곡 쌓여 승부가 결정된 것인데도 말이다. 이처럼 한 경기의 승패에는 선수의 컨디션, 수많은 작전, 순간적인 판단, 크고 작은 실수가 숨어 있다. 준공된 지 2년이 넘은 서울시청사는 건립 과정부터 완공된 이후의 평가에 이르기까지 우호적인 시선을 찾아보기 어렵다. 사람 눈이 간사해서 이쯤 되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측면의 사선 디자인은 여전히 거칠게 느껴지고 정면의 유리 곡면은 낯설기만 하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비슷한 프로젝트가 다시 추진된다면, 시간을 뒤로 돌릴 수 있다면 다른 결과가 나올까? 최근 서울시는 굵직한 사업들을 연이어 계획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과거에 벌어진 일을 되짚어보면 무언가 얻는 것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서울시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2년 만에 다시 보았다. 서울시청사는 이명박 시장에 의해 현재의 부지에 건립이 결정되었고, 3천억 원의 공사비를 들여 2012년 10월에 준공되었다.
‘말하는 건축 시티:홀’은 시청사 준공을 1년 앞둔 시점부터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9회말 2아웃 상황에서 시작하는 영화는 당시 시공 현장에서 벌어진 리얼한 상황과 지난 7년간 서울시청사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복잡다기한 이야기를 함께 담고 있다. 정재은 감독은 ‘고양이를 부탁해’(2001)에서 서울의 주변부이면서도 어디로든 출발할 수 있는 인천이라는 도시의 특성을 등장인물의 심리 상태에 탁월하게 투영한 바 있다. 영화 개봉 이후 도시와 건축에 관심 있는 이들은 영화 속 주요 공간인 월미도, 차이나타운, 여객터미널, 폐철도 등을 답사하고 연구하기도 했다. 서울시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이전 작으로는 건축가 정기용의 삶의 마지막 1년을 담은 ‘말하는 건축가’(2011)도 있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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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기사 국가기술자격시험 개정을 위한 공청회
저조한 합격률의 조경기사 자격시험, 해법을 모색하다
지난해, 조경기사 국가기술자격시험의 필기 합격률이 역대 최저 기록인 6.1%로 집계돼 조경계에서 조경기사자격제도에 대한 관심을 다시 한 번 환기시켰다. 조경기사 시험의 저조한 합격률에 대한 우려와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지난 6월 18일 한국조경사회(회장 황용득)는 코엑스에서 열린 ‘2015 대한민국 조경박람회’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조경기사 국가기술자격시험 개정을 위한 공청회’를 개최했다. 공청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시험의 난이도뿐만 아니라 자격증의 실효성, 교육과 시험 문제 간의 괴리, 자격 인증 방식 등 자격시험과 관련해 산업과 교육 전반에 걸친 문제점을 제기하며 열띤 토론을 펼쳤다. 이날 개진된 내용은 한국조경사회에서 취합·정리해 조경기사 국가기술자격시험을 운영하는 한국산업인력공단에 제출할 예정이다. 본지는 문제의식을 폭넓게 공유하기 위해 이번 공청회에서 다뤄진 내용을 지면에 옮긴다.
기사 제도의 현황과 문제점
발제 김태경 강릉원주대학교 환경조경학과 교수, 한국조경사회 부회장
자격증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한 자격을 인정하여 주는 증서’다. 현재 조경기사 국가자격시험 제도는 맨 밑에 기능사, 그 위에 (산업)기사, 기술사 순으로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 세 자격을 갖춘 전문가들이 직능을 상호 보완하는 구조로 일하고 있다. 그런데 기능사와 기술사 중간에 위치하는 조경기사의 자격시험 접수 및 응시자 현황을 살펴보면, 응시자 수가 2010년을 정점으로 해서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으며 2014년의 응시자 수는 2008년도의 수준이다. 지금 추세로 보면 앞으로 조경기사 자격시험의 응시자 수가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조경기사 자격시험 합격률도 마찬가지로 떨어지고 있다. 특히 문제가 된 작년도 필기 합격률 6.1%에 실기합격률(최대 40%)을 적용하면, 2014년 조경기사 국가기술자격시험 응시자의 약 2.44%만 최종적으로 조경기사 자격을 취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107개의 국가기술자격시험 평균 필기 합격률이 36.4%인 것과 비교하면 조경기사 자격시험의 필기 합격률은 현저하게 낮다. 게다가 2014년도 조경기사 응시자의 최종 합격률은 사법고시 합격률(2.74%, 총 7,428명 지원, 205명 합격, 출처: 법무부), 외교관후보자 합격률(5.90%, 총 559명 지원, 33명 임용, 출처: 정책브리핑), 행정고시 합격률(3.13%, 총 13,700명 지원, 430명 합격, 출처: 안전행정부)과 비교해도 가장 저조하다.
이 현상을 종합해서 보면, 응시자가 자격증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다보니 합격률이 낮아지고, 이로인해 또 다시 조경기사 자격시험에 대한 관심이 저조해지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타 분야의 국가기술자격시험에 비해 유독 조경기사 자격시험의 합격률이 낮은 이유에 대해 크게 시험의 난이도와 시험의 출제범위 두 가지를 검토해 볼 수 있다. 자격시험의 난이도는 조경 내부의 문제이므로 다른 분야와 비교할 수 없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장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반면 시험 출제 범위는 인접 분야와 비교해 형평성을 가려볼 수 있다. 자연생태복원기사, 산림기사 등을 포함해 조경과 인접한 38개 분야는 필기시험으로 대부분 5개 과목을 보고 있다. 조경처럼 필기시험에 6과목을 치르고 있는 분야는 전체 107개의 국가기술자격 중 6개 밖에 없는데다가 조경기사의 필기 합격률 또한 평균(36.4%)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다.
한국조경사회는 학생, 실무 종사자, 교수 등 총 403명을 대상으로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조경기사 시험에 대한 설문을 진행했다. 필기과목 조정 필요성, 적정 필기과목수, 필기과목의 실무적합도 등을 질문한 결과, 대부분의 응답자가 필기과목수를 줄여야 한다는데 동의했고, 조경 계획, 조경 설계, 조경 식재 등의 과목이 실무와 관련성이 높은 것으로, 조경사, 조경 관리 등의 과목이 실무와 관련이 낮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리고 기타 의견으로는 ‘필기시험의 난이도를 낮출 필요가 있다’, ‘실무와 관련성이 높은 과목 위주로 필기과목을 선정해야 한다’, ‘유사 과목과 통합할 필요가 있다’, ‘시험 출제 범위가 넓은 것에 비해 너무 세분화된 문제가 나오고 있다’ 등의 의견이 있었다.
국가기술자격에 대한 이해와 발전 방안
발표 김규섭 한국산업인력공단 선임연구원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실무에서 요구하는 업무 능력은 차이가 많다. 국가기술자격 시험은 교육과 현장, 양쪽의 요구를 모두 반영할 수밖에 없는데 교육과 현장의 극심한 괴리 때문에 국가기술자격의 의미와 필요성이 퇴색하고 있다. 최근 조경기사 시험에 응시하는 학생들에게 기사 자격을 취득하려는 이유를 물어보면, 80% 이상의 학생들이 공무원 시험에서 가산점을 받기위해서라고 응답했다. 자격제도의 취지와 실제 활용사이에 모순이 발생하고 있다.
만약 국가기술자격시험이 출제자가 한자리에 모여서 다함께 출제하는 방식으로 치뤄진다면 출제자들이 실무와 관련성이 적거나 지엽적이라고 공감하는 문제는 필기시험에서 제외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자격시험은 문제 은행 방식이기 때문에 문제가 임의로 추출되어 출제된다. 기본적으로 모든 필기 문제의 난이도나 출제 경향을 제어하기 어려운 구조다.
이처럼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인증하고 있는 국가자격 제도는 기본적으로 공급자(수험자) 위주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국가직무능력표준National Competency Standards, 이하 NCS(산업현장에서 직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요구되는 지식, 기술, 소양 등의 내용을 국가가 산업부문별·수준별로 체계화·표준화한 것)1과 신자격 제도(과정평과형 자격제도2, 일학습병행제도3)가 도입되면서 국가기술자격은 최근 4~5년 전부터 수요자(현장 활용자)의 요구 사항에 맞추어 현장성 및 통용성을 갖춘 인력을 선별하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기존의 검정형 자격은 실무 능력을 실제로 입증할 수 없기 때문에 외국처럼 산업 현장에서 개개인의 능력을 평가하려는 것이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검정형 시험을 전면 폐지하고 NCS에 따른신자격 제도를 바로 적용할 수는 없고, 유예 기간을 두고 공지가 될 것이다. 이렇게 실무 능력을 중시하는 경향에 따라 앞으로 5년 안에 실무 능력과 관련성이 부족한 검정형 시험 문제는 점점 퇴출되고 모든 실무 현장에서 표준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문제로 구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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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세 도시 이야기
#51
독인가 약인가 - 이상 도시 쇼Chaux
원로 건축가가 하루아침에 감옥에 던져진 신세가 되었다면, 그리고 감옥에서 종이와 펜을 소지하는 것이 금지되었다면,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선 살아나갈 궁리를 할 것이다. 그리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 머릿속에서 세상을 다시 설계할 것이다. 프랑스의 건축가 클로드 니콜라 르두Claude-Nicolas Ledoux(1736~1806)의 이야기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 그는 왕실 전속 건축가였다. 루이 15세와 16세의 신임을 얻어 중요한 프로젝트를 여러 건 의뢰받았다. 다만, 당시 프랑스 왕실의 재정이 파산 상태였기 때문에 으리으리한 궁전 등을 지을 형편은 못 되었고 중요한 국가시설들이 그에게 맡겨졌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파리의 새로운 성벽, 세관 건물, 왕립 제염소다. 여기서 파리의 성벽이란 중세에 축조된 방어용 성벽이 아니라 1785년에서 1788년 사이, 즉 혁명 전야에 세워진 새로운 성벽을 말한다.
표면상으로는 밀수품을 통제하기 위해서 새로 축조했다고 하지만 실은 파리를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통관세를 걷기위 해서였다. 새 성벽은 총 연장 24km에 총 60개의 관문을 세워 물샐 틈이 없었다. 그 60개의 관문 중 42개를 르두가 설계했다. 르두의 주요 프로젝트인 세관 건물과 제염소는 서로 판이한 운명을 맞게 된다. 세관 건물은 혁명의 날분노한 파리 시민들에게 파괴당했다. 그 반면 제염소는 파리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덕에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뿐만 아니라 1920년 프랑스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8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영광을 얻었다.
18세기, 소금은 왕실 전매품으로서 왕가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프랑스의 아르케스낭Arc-et-Senans이라는 곳에 중요한 제염소가 하나 있었는데 시설이 몹시 낙후되어 다시 지을 필요가 있었다. 이 지역은 지하수에 염분이 섞여 있어 고대 로마 시대부터 내륙 소금 생산지로 유명했다. 소금이 엄청 비쌌던 시절이었으므로 소금 도둑이 많아 철통같은담장을 둘러 지켰는데,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점점 비좁아지니 위생 문제와 더불어 화재의 위험도 커졌다. 게다가 오랜 세월 동안 주변의 숲을 모조리 벌목하여 불을 땠으므로, 땔감 수급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르두는 구 제염소를 개조하는 것보다는 숲이 있는 곳으로 이전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경우 제염소 전체를 새로 설계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는 새 제염소의 기본 틀을 반원형으로 잡고 건물과 동선을 방사형으로 배치하여 향후 사업이 확장되더라도 외곽으로 퍼져나갈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르두가 설계한 아르케스낭의 소금 마을 배치도 참조). 이 반원형의 구조를 좀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가장 외곽에는 높은 담장이 둘러쳐져 있고 정원과 건물이 번갈아가며 배치되어 있다. 가장 남쪽에 반원형을 그리며 좌우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는 건물군은 기숙사다. 정중앙의 캐노피가 입구 겸 경비실이며 양쪽으로 각각 재판소와 유치장이 배치되어 있다. 북쪽의 일직선을 보면 중앙에 소장의 관사가 우뚝 서 있다. 여기가 바로 컨트롤 타워이며 힘이 집중되는 구심점이다. 이곳에는 예배당도 마련되어 소장의 감시 하에 모두 함께 미사를 드렸다. 소장의 관사를 양 옆에서 호위하고 있는 건물들이 바로 생산 공장이다.
이 제염 마을의 배치도에는 르두의 세계관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가 추구했던 것은 계몽 왕조였다. 즉, 왕정과 신분 사회를 유지하여 계급 사이에 선을 분명히 긋되, 계몽 정신에 의거하여 각 신분의 존엄성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계몽 정신보다 더 우위에 둔 것은 건축이었다. 이 사실은 그의 건물 설계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건물의 창을 아주 작게 만들었고, 공장의 굴뚝도 생략했다. 자신의 건축 미학을 훼손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공장 내부는 통풍이 잘 되지 않아 노동자들이 만성 호흡기 질환에 시달렸고 일찍 사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어느 모로 보나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었다.
바스티유 감옥에서 13개월을 보내는 동안 르두는 소금 마을을 이상 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해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종이와 연필이 없으니 일단 머릿속에 담아 두었다가 자유의 몸이 되자마자 종이에 옮겼다. 우선 그는 반원을 확장시켜 완전한 원으로 만들고 개별 건물을 디자인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숲의 이름을 따서 이상 도시쇼1라고 이름 붙였다(118쪽 아래 그림 참조). 이상 도시 쇼의 설계도는 마치 백설 공주의 계모가 내민 사과와 같다. 반쪽에는 독이 들어있고 나머지 반쪽에는 독이 없는 사과처럼 쇼 마을의 반은 참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북쪽의 새로운 반원 마을이 이상 도시에 해당된다. 이곳은 ‘도덕적인 이상에 따라 사는 곳’2이었다. 18세기 계몽 시대에 정원이나 건물을 지을 때 항상 ‘도덕성’을 내세우는 이유는 그동안 신의 계율에 따라 살았으나 이제는 인간 중심의 세상을 만들어스스로를 지켜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신의 계율이 아닌 인간의 도덕성이 관건이 되었다. 루소나 조지프 에디슨 등이 정원에서 도덕성을 찾았다면 르두는 공동 생활체 개념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이를 위해 숲 속에 세노비Cénobie라는 공동 주택을 설계했다. 총 16가구가 모여 사는 주택이다. 르두에 따르면 사람은 다른 이와 교류를 통해 좋은 사람으로 다듬어지기도 하고 방종하게도 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즐거운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만 행복해진다. 고요한 숲 속에 지어진 세노비에서 현인들의 지도 아래 단순한 자연의 법칙에 따라 생활하면서 전설 속의 황금기를 구현하고자 한 곳이 바로 이상 도시 쇼다.
혁명 이후, 아무도 전 왕실 건축가에게 일을 주려 하지 않았으므로 르두는 나머지 생을 건축 이론을 완성하는 데 바친다. 그 결과 다섯 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책3을 집필했고 총 364장의 도판을 삽입했다. 이상 도시 쇼는 1권에서 설명하고 있다. 책의 제목 『예술과 관습과 법의 맥락에서 고찰한 건축』에서 나타나듯, 그는 세상의 모든 이치에 답을 주는 것이 건축이라고 주장했다. 건축가는 공간만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도 해법을 제시한다며 혁명 와중에 공석이 되어 버린 종교와 왕의 자리에 건축을 슬며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건축가는 신과 경쟁하는 자다. 모든 것이 그의 영향권 안에 있다”라고 비약하기에 이른다. 르두의 이상 도시는 그의 사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사라져 갔다. 20세기 초, 경제 대공황을 겪으며 다시금 격변의 시대가 왔을 때, 일거리가 별로 없는 건축가들이 이상 도시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 르두의 작품들이 재조명되었다. 르 코르뷔지에4가 르두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편 독일에서도 한 젊은 건축가가 르두의 작품에 깊이 심취하게 된다. 히틀러의 전속 건축가가 되는 알베르트 슈페어였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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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 정의로운 도시, 차별의 도시
삼(오)포세대 도시론
연애, 결혼, 출산, 이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를 일컫는 삼포세대에 대한 사회적 우려를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그렇게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우려를 기성세대가 자신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한 사람에게 갖는 정체 모를 불편함이라고 생각했다. 남녀가 건강하다면 만혼이면 어떻고 아이를 갖는 대신 부부만의 오롯한 삶을 꿈꾸는 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하지만 이후 나는 적잖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앞의 세 가지에서 더 나아가 ‘인간 관계’와 ‘내 집 장만’마저 포기한 오포세대를 접하게 된 것이다. 도시에서 사회적 관계와 주거 공간이 갖는 의미는 매우 특별하다. 나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기쁨과 슬픔, 보살핌과 따스함, 붐빔과 다양성의 감각을 만끽 할 기회를 넓혀가는 것, 나아가 적정 비용의 지불을 통해 소박하지만 깨끗한 집에서 거주하며 가족이나 이웃과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도시설계가 추구해야 할 핵심 덕목이 아니었던가? 이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세대에게 좋은 도시를 함께 만들어가자고 종용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도시에서의 삶, 특히 젊은 세대의 일상이 각박해지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질수록 이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 더욱 첨예하게 대립함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사회·경제적 어려움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만 특정한 사람들의 삶을 특히 더 힘들고 비참하게 만든다는 관점이다. 출발 자체가 남들과 다른 이들은 자유 시장 경제 안에서 빈곤의 대물림, 교육 기회 박탈, 체력 저하나 건강 문제로 인한 사회적 격차를 극복하기 어렵다. 따라서 정책적 배려와 함께 지금보다 더욱 정의로운 도시 공간을 제공해야 한다. ‘저소득층 주거권 보장’, ‘다민족·다인종 사회 만들기’, ‘청년 창업 지원 센터’, ‘공동 육아방’이나 ‘폭염 쉼터’ 운영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이 중요한 만큼 지금의 도시를 더 혁신적이고 경쟁력 있는 곳으로 변화시키는 일이 시급하다고 보는 관점이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도시 경쟁력 강화’, ‘혁신 도시 건설’, ‘(전략적) 불균형 성장’을 이루어 전체 파이를 키운 후, 이를 적절히 나눠 가지면 궁극적으로 모두가 잘 살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배-성장, 정의-효율성 관점의 대립은 시설 투자에 대한 정부 예산 분배부터 도시 공간의 이용과 규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준다.
파인스타인 교수의 ‘정의로운 도시론’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과연 도시 공간을 조금씩 바꾸어 가는 방식을 통해 효율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보다 정의로운 도시just city를 구현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자면 정의로운 도시를 만드는 일이 과연 얼마나‘공간’과 관련되어 있을까? 조경·도시설계의 결과는 결국 크고 작은 도시 개발(혹은 재개발)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토지 매입, 보상, 착공 및 준공, 분양을 포함한 도시 개발 과정은 매 순간 돈의 흐름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정의나 분배와 관련된 이슈가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 쉽지 않다. 나아가 개발 사업의 타당성 여부도 궁극적으로 지역 경제 성장이나 일자리 창출, 도시 경쟁력 강화나 기업 브랜딩 효과 같은 효율성의 지표에 따라 판단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도시 개발로 인해 토지의 잠재된 가치가 발현됨으로써 공간을 직간접적으로 소비하는 사회 구성원 전체가 혜택을 볼 수 있지만, 결국 직접적인 개발 이익의 대부분은 투자의 불확실성을 감수한 개인이나 집단이 누리게 된다. 더욱이 이들의 이익 추구 행위를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규제하기도 쉽지 않다. 개발 사업에서 정당한 이익 추구와 지나친 탐욕의 경계가 모호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버드 대학교의 수잔 파인스타인Susan Fainstein 교수는 정의를 도시 공간과 이를 생산하는 과정 속에서 구현되어야 할 목표로 본다(그림1). 그는 정의로운 도시란 “공공 투자와 정책이 이미 부유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공정하게 혜택을 주는 도시”라고 정의한다.1 여기서 공정한 혜택이란 개발로 인해 도시민 전체가 골고루 부유해진다는 결과론적 해석이 아니다. 도시 개발 과정의 매 단계에서 어떤 목적으로 누구를 위해 부와 효율성을 추구하는가를 묻고, 나아가 최소한의 ‘민주적 참여,’ 사회·경제적 ‘다양성 추구,’ 개발 혜택에 대한 ‘공정한 분배’ 원칙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을 고려한 도시 개발의 결과가 전혀 고려 없이 진행된 결과보다 훨씬 더 공정한 도시 공간에 가깝다.
파인스타인 교수는 뉴욕 브롱크스Bronx 지역에 2009년 완공된 양키스 구단 야구장Yankee Stadium을 정의롭지 못한 개발 사례로 손꼽는다(그림3). 비교적 낙후되었을 뿐 아니라 총격 사건과 방화가 빈번하게 벌어지는 지역에 다수의 관중이 이용하는 스포츠 경기장을 개발함으로써 지역 이미지 개선을 기대하는 정책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뉴욕 양키스라는 명망 있는 구단을 유치함으로써 지역 불균형 해소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럼에도 파인스타인 교수는 과연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연봉을 받고 있는 선수들과 부유한 구단주를 위해 뉴욕 시가 나서서 경기장 건립과 주차장 및 어메니티 시설 확보를 위한 대규모 공공 자금을 투자해야만 했는가, 그리고 야구장 부지 확보라는 명목으로 브롱크스 커뮤니티가 오랫동안 이용해 온 오픈스페이스를 잃게 되는 기회 비용이 과연 정당한 비용인가에 대해 묻는다. 나아가 다수의 야구 경기 관람객, 특히 값비싼 VIP 관람석 비용을 지출할 만큼 부유한 사람들이 과연 브롱크스라는 낙후된 지역 사회의 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얼마나 줄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2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양키스 야구장 개발 과정을 보다 정의롭게 하기 위해 민주성, 다양성, 공정성이라는 원칙이 중요하지만, 이 중 하나에 지나치게 집착할 경우 오히려 총체적인 의미의 정의가 구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 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 이론과 스튜디오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 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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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설계하는 법] Do you like it?
열세 살 때 집을 떠났고 미국 동부에서 오랜 시간 동안홀로 유학 생활을 했다. 유학 초기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문화적·언어적·지리적 혼돈 속에 사춘기를 보냈고, 낯선 것들 사이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강원도 속초.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의 어느 작은 시골에 부모님의 집이 있었다. 지붕 넘어로 설악산 미시령과 울산바위가 보이는 작은 마을인데, 학창 시절 단기간 살았던 서울과는 또 너무나도 다른 육지 위의 섬 같은 이곳을 나는 ‘내 집’이라부르며 자랐다. 막상 익숙해지려 하면 떠나게 되었고, 다시 돌아와 보면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이처럼 그곳이 어디가 되었든 간에 빨리 흘러가는 시간, 그리고 그 세월 속의 변화가 느껴지는 공간이라면 ‘장소’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지난 이십 여 년 동안 항상 스쳐가는 방문객처럼 살다보니(뭐, 원래 다 그런 것이겠지만), 장소란 한 곳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나를 따라 어디든지 동행할 수 있는, 정신적이고 무형적인 요소로 이루어졌을 거라 믿게 되었나보다. 그래서인지 공간을 추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하나의 의도나 요지, 혹은 게임의 룰로서. 익숙한 것보다 생소한 것이 더 좋다. 아니, 좋다기보다는 생소해서 편하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물질적인 창조와 공간의 생산을 목표로 하는 조경 디자인의 일반적인 접근법에 비교하면 조금 벗어난 방식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추상성은 오히려 공간을 좀 더 자유롭게 해석하고 또 다르게 표현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사고방식이지 않을까.어쨌든 조경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내기의 눈으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네 가지 설계 방식을 적어본다.
01 물어보기: Do I like it?
다루는 대상이 뭐든지 간에 조금이라도 다른 시각에서 보고 또 그러한 시각의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갈망과 의지가 설계하는 방법을 주도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그 방법은 항상 바뀌는 것 같다. 나라는 사람 자체가 변하기 때문일까. 매번 똑같지 않다. 사소한 설계 디테일이 바뀐다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을 보는 시각과 디자인에 대한 패러다임이 변하고자연스럽게 내가 설계하고 싶은 ‘이상’도 변화한다. 당연하겠지만 그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시도하는 설계 방법도 같이 변하게 될 것이다.
큰 그림, 즉 추구하는 바가 같더라도 객관적인 디자인이란 있을 수 없다. 디자인은 절대적으로 주관적인 사고의 결과물이라는 것. 아무리 과학적인 접근을 취하더라도―하는 척만 해도!― 결국엔 개인의 취향을 반영한 결과가 생산된다. 같은 맥락에서 사이트의 모든 챌린지를 단번에 풀어주는 디자인 전략이 있다고 해도, 내가 신나지 않으면, 즉 자신의 설계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결국엔 망한 전략이다.
설계 대상의 수많은 디테일과 여러 가지 상황 안에 나를 집어넣고 그때마다 받는 느낌이 어떤지, 내가 그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상해가며 설계한다. 디자인 안에 들어가서 디자인하기다. 따라서 설계 중 항상 점검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의 취향과 시각이다. 그것이 디자인에 있어 가장 중요한 도구이자 매체라고 생각한다. 사이트를 읽든 소재를 고르든 설계의 대부분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내가 정보를 선택하고 걸러내며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런 도구―취향과 시각―가 빛바랬거나 너무 익숙하다거나 또는 저만의 특별함이 사라졌다면, 설계가 잘 된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다. 결국, 취향과 시각에는 좋고 싫음의 잣대가 적용되어 있다. 그런 익숙함에서 벗어나 정말 많은 것을 봐야 하고 접하고 또 물어봐야 한다. 또한 피하고 싶은 디자인 종류―나는 녹색만 입혀 놓았거나, 비전이 약하거나, 오버 엔지니어링된 건축이나 조경 사례를 좋아하지 않는다―도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설계 스튜디오 때 학생들의 설계 안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면 빼놓지 않고 그들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다. “So, do YOU like it?”
다시 말하지만, 방금 설명 받은 그 학생의 설계 안을 놓고 묻는 말이다. 설계안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던 학생들도 의외로 많이 머뭇거린다. 간단한 “Yes!”나 “No!”가 아니라, 대부분 한숨 섞인 미소로 답을 대신한다. 디자인하는 데 바빠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눈치다.
어떤 계기로 이 질문을 그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처음으로 던지기 시작했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누군가가 대학원생 시절의 나에게 한번만이라도 물어봐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그랬다면 좀 더 일찍 남의 눈에 들지는 못하더라도 나만의 것을 찾으려 의식하고 대화했을 것이다.
이렇게 ‘Do I like it?’이라는 질문을 수시로 던지며 설계하다 보면 데드라인에 쫓겨 허겁지겁 마무리하는 식의 설계안이나, 잘 마무리된 것 같으나 어딘지 특별함이 없는 설계안을 내놓는 일이 줄어든다. 보통, 내가 진행한 프로젝트는 대략 네 가지 레벨로 나뉜다. 1) 숨기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거나 “I didn’t do it”, 2) 다들 좋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부족하거나 “I don’t believe in this”, 3) 모두 별로라고 하지만 나에겐 좋아 보이거나 “I believe in it”, 4) 전체적으로 부족해도 어느 한 구석 잠재력이 보이는 “There’s something in there” 프로젝트로,언젠가 다시 제대로 써봐야 할 밑거름 같은 설계안들이다.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설계와 감정이 많이 있겠지만, 어찌되었건 스스로 열심히 대화하며 설계하는 것, 나의 직감과 능력의 바로미터를 꾸준히 셀프 검진하는 것이 나의 설계 과정에 있어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방법이다.
사이트나 소재를 해석하는 것. 상당한 연습이 필요한 일이다. 대상지 분석(site analysis)은 설계 대상을 알아가는 과정인데, 지난 몇 년간 내가 지도하는 학생들에게서 대부분의 대상지 분석이 해석(interpretation)이 아닌 말 그대로 분석에서 끝난다는 점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분석은 서술(description)이고 해석은 프로포지션(proposition), 즉 논의가 있는 개인적 편향이라는 점이다. 물론 분석하는 과정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맞춰보고 들어보면 어떤 개인의 견해가 생기겠지만, 설계 대상을 알아가는 과정이 분석에서 끝나면 자기 자신만의 유일한 디자인은 나오기 쉽지 않다. 해석은 분석된 내용이 디자이너를 통해 한 번 더 걸러진 정보다. 디자이너만의 시각으로 사이트나 소재를 소화하는 과정이다. 어떻게 보면 두 결과물이 비슷할 수 있으나, 창의적인 해석을 의도적으로 진행하면 설계 과정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런 변화는 우선 드로잉에 나타난다.
가끔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조경을 하는 사람으로 나무의 생물학적 특징과 습관을 더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왜 나무를 평-단면 형태의 아웃라인으로 동그랗게만 그릴까. 물도 마찬가지다. 특유의 역동적인 성질이 모두 제외된 볼륨이나 덩어리, 물을 담고 있는 컨테이너로 대신 그린다.
조경에 가장 많이 쓰이는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습관적 묘사 기법(representational habit)때문에 보다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해석이 나오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드로잉에 드러난 것처럼 조경다운 시각이 결여된, 어찌보면 너무나도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태도로 설계하고 있는 것 같다.
2년 전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진행한 디자인 스튜디오는 이런 고민에서 시작되었다. ‘막대 사탕 모양의 나무는 No’. 아이콘이 아닌, 나무의 아키텍처(architecture)를 구축하는 문화적·생물학적 과정을 이해하고 그리기, 즉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소재의 재해석을 바탕으로 설계할 것을 과제로 제시했다.
‘가지치기’ 같은 도시 행정 속의 문화적 의도가 살아있는 소재(living material)의 형태를 어떻게 구체화시키는지, 즉 어떤 방식으로 도시 수목의 관리 과정이 이루어져야 하는지가 스튜디오의 쟁점 중 하나였다. 나무의 캐노피를 생태적 산물이 아닌 변형 가능한 건축 구조물로 본 셈이다.
설계는 게임이나 놀이처럼 진행됐다. 우선 학생들은 자기만의 규칙으로 나무를 관찰하고 그려나가는 것 자체를 아주 재미있어 했고, 그래서인지 그 과정에서 생산된 그림들 역시 매우 신선했다. 물론 오차도 많았고, 개인적으로는 학생 14명의 14가지 규칙을 모두 기억해야 했던 부담감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개개인의 규칙을 바탕으로 ‘나무를 얼마만큼 언제 어디에 심으며 어느 부분을 관리해 주어야 원하는 형태의 도시 숲이 생성될 수 있을까’라는 렌즈를 통해, 익숙하다고 여겨왔지만 여전히 생소한 소재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03 노동하기
도면 없는 설계, 즉 노동도 설계 방법의 하나다. 물론 일시적인 설치 작품(temporary installation)이나 골목, 정원 등 작은 사이즈의 프로젝트에 해당되는 말이다.
대학원에서 건축 디자인을 가르치는 남편도 강의식 수업이 많다 보니 가끔 무작정 손으로 만들어 보고 싶을 때가 있다고 한다. 우선 시작하고 본다. 가벼운 스케치 몇 장과 250달러를 들고 바로 재료를 사러 나간다. 5일 만에 끝내겠다는 플랜도 짠다.
아침과 오후엔 수업과 미팅이 있어 밤 8시가 되어서야 이 게릴라 설계 노동이 시작되었다. 새벽 두세 시에 건축학교 빌딩 앞마당에서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당시엔 아직 아이가 없을 때라 이런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었다) 남편과 나를 발견한 학생들이 창문을 열고 뭐하냐고 물
어본다.
“We are just making! 그냥 만드는 중이야!”
“Making what?! 뭘 만드는 데요?!”
“We don’t know yet! I’m sorry! 우리도 아직 몰라! 미안해!”
그리고 5일 후, 안에선 사람들 머리만 보이고 밖에선 몸만 보이는 헤드 박스가 완성되었다. 이 해 10월, 할로윈 파티에 앞서 비가 너무 많이 온 것이 설계에 영향을 미쳤던 걸까. 박스 내부엔 마일라(Mylar)와 조명을 사용해 다들 물속에서 나오고 있는 듯한 (혹은 가라앉고 있는 듯한) ‘가짜 공간’을, 외부엔 본격적인 파티에 앞서 몸을 풀 수 있는 작은 에피타이저 같은 장소가 만들어졌다.
설계 과정에서 모델(physical model)을 활용해 아이디어를 실험해 보는 것처럼, 헤드 박스를 만드는 ‘노동’은 실시간 설계다. 비용과 시간에 제한을 두고 직접 지으면서 설계 결정을 해 나간다는 것은 그리면서 하는 설계와는 다른 종류의 설계법과 디테일을 배우게 한다. 심플한 구조에도 무게가 꽤 나갔던 박스의 나무 프레임이 1인치도 안 되는 가는 막대기 네 개에 의해 지탱될 수 있을지 처음엔 몰랐던 것처럼.
설계란 꾸준히 다양한 방법을 필요로 한다. 한 가지에 익숙해질 때 쯤 또 다른 설계 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도면 없는 설계를 한다. 헤드 박스는 한 예에 불과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이유를 찾는다면 도면 베이스의 설계 시 필요한 현실적 감각을 기르기 위함이라 할 수 있겠다.
04 설계 안하기
마지막으로 설계를 하지 않아도 좋다고 결정하는 자세도 중요한 설계 방법 중 하나다. 즉, ‘없음’이 도구다. 우리가 사이트나 소재를 알아야 하는 이유도, 클라이언트와 꾸준한 대화를 하는 이유도 모두 그 상황에서 가장 적합하고 훌륭한 설계안을 만들어내기 위함이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새로 짓거나 개조한다고 해서 어떤 공간이 반드시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몇 년 전 보스턴 시청 건물과 광장에 관한 공모를 준비하고 있었다. 공모 대상은 거대한 콘크리트 외부를 자랑하는 브루탈리즘(brutalism0 건축으로, 한 때 세계에서 가장 못 생긴 빌딩 중 하나로 뽑혔던 나름 역사적인 건물이다. 그만큼 이 건물을 재해석해보려는 시도가 많았다. 아직도 수많은 설계 회사와 건축 대학원에서 스튜디오 소재로 쓰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설계안이 나왔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니. 우린 또 다른 설계안을 제안하기보다 과대 선전을 통한 이미지 개선 캠페인을 전개하기로 했다. 이 시청 빌딩이 건축적으로 혹은 도시학적으로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빌딩을 또 다른 문화를 생산하는 촉매제로 사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사실 이 건물을 좋아해 애초부터 별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없기도 했다).
행정 건물과 대중문화가 서로 어우러진 시청의 미래는 연상(association), 모사(replication), 아이콘화(iconization), 그리고 전파(dissemination)라는 전략을 통한 물질적 개조가 아닌 대중 인식의 개조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설계를 하지 않았다기보다 설계의 정의를 넓힌 것이다.
이러한 예가 아니더라도 설계 도중 스스로 편집할 수 있는 능력, 상황에 따라 잠시 생략하고 전환시킬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프로젝트가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공간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아이디어가 곧 ‘설계’고 ‘방법’일 것이다.
조리나는 1982년 생으로, 미국 웰슬리 칼리지(Wellesley College)에서 여성학을 전공한 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마이클 반 발켄버그 어소시에이트(Michael Van Valkenburgh Associates)와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맥스완 아키텍트 + 어바니스트(Maxwan Architects + Urbanists)에서 다양한 도시 디자인과 조경 및 건축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현재 미국 버지니아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조경학과 대학원 강사로 있으며 하버드 GSD에서 초청 강사로 가르친 바 있다. 건축가 매튜 줄(MatthewJull)과 쿠토노톡(KUTONOTUK)의 공동 대표로서 구겐하임 헬싱키(Guggenheim Helsinki)와 헬싱키 공공 도서관(Helsinki Public Library), MoMA PS1 젊은 건축가(Young Architects Program), 유로판 등에서 주관한 디자인 프로젝트에서 수상한 바 있다. 또한 아크틱 디자인 그룹(Arctic Design Group)의 대표로서 미국 워싱턴D.C.의 정책 연구 기관과의 협력 아래 북극 도시와 극한 랜드스케이프(extreme landscapes)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www.kutonotuk .com | www.arcticdesigngroup.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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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알렉산더 가빈
AGA 공공영역전략컨설팅 설립자 겸 대표
예일대학교 건축학부에서 ‘도시연구 개론Introduction to the Study of the City’이라는 인기 과목을 48년간 강의하며, 뉴욕 시 도시계획국에서 46년간 재임해 온 원로 도시계획가 알렉스 가빈을 그의 맨해튼 사무실 겸자택에서 만났다. 벽을 가득 메운 빛바랜 책과 닳은 페르시안 카펫에서 풍기는 노학자의 풍모와 달리, 장난스런 눈빛과 나비넥타이를 곧추세운 빳빳한 셔츠는 그가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현장의 도시계획가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필자는 더운 날씨에도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는 이유에 대해 먼저 물었는데, 의외로 단순히 클래식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성향이나 고집스런 직업적 권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젊은 건축가로서 파리에서 일하던 당시의 일화를 들려주었는데, 잉크를 이용해 도면을 그리던 디자이너들에게 자칫 축늘어져 작업을 망칠 수도 있는 긴 넥타이는 절대 금물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나비넥타이는 이후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그리고 도시에 대한 명확한 근거와 이유가 있는 발언 또한 그를 따라다니는 이미지가 되었다. 도시 분야에서 고전적 교과서가 된 『미국의 도시: 성공과 실패The American City: What Works, What Doesn’』는 이미 세 번째 개정판을 냈다. 또한 그는 『공원, 레크리에이션, 오픈스페이스: 21세기의 의제Parks, Recreation, and Open Space: A 21st Century Agenda』, 『도시 공원과 오픈스페이스Urban Parks and Open Space』, 『공원: 살기 좋은 공동체를 위한 비결Public Parks: The Key to Livable Communities』 등을 펴내며 도시계획가로서 공원에 대한 철학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를 제공해 온 대표적인 인물이다. 도시설계포럼Forum for Urban Design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공유토지신탁Trust for Public Land의 국가자문위원회, 스카이스크레이퍼 뮤지엄Skyscraper Museum 이사회, 에드먼드 베이컨 재단Ed Bacon Foundation, 미국 도시 및 지역 계획 역사협회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도시계획가로서 뉴욕의 올림픽 유치 본부를 지휘했으며, 세계무역센터 붕괴 후에는 로어 맨해튼을 재건하는 도시계획과 디자인의 책임자로 일했다. 최근에는 조지아 주 애틀랜타 시의 거대 오픈스페이스인 벨트라인BeltLine 계획을 수립하고 실현하는 데 노력해 왔다. 벨트라인은 미국의 대표적인 자동차 의존 도시이자 스프롤 경관의 대명사인 애틀랜타를 둘러싼 35km의 환형 공원 체계로서, 전차 등 대중교통 노선이 트레일과 결합된 형태다. 20여 개의 공원이 연합해 점유하는 면적은 약 520만m2에 달한다. 도시 중심부로부터 대개 2.5 ~5km의 거리를 두고 순환하는 벨트라인은 애틀랜타의 도시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혁신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 받으며 폭 넓은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했으며, 계획 발표만으로도 이미 지역 경제에 막대한 부흥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현재까지 약 3,600억원의 민관 개발 자금이 투입되었으며 9,000여 세대의 신축 주거 개발, 8만m2의 신축 상가 개발 등 1조원 이상의 민간 부문 투자를 유도한 것으로 추산된다. 무엇보다 벨트라인은 고속도로에 의존해 온 시민의 생활권을 휴먼 스케일의 걷는 공간으로 이동시킨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벨트라인은 앞으로 약 17년에 걸쳐 완성될 예정인데, 하이라인 같은 단일 용도의 선형 공원과 달리 상업, 산업, 주거가 복합적으로 긴밀히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도시 오픈스페이스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Q. 뉴욕 태생이라는 개인적 배경과 도시계획에 대한 관심이 연관되어 있나?
A. 나는 맨해튼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부터 이 도시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1958년 예일대학교 건축학과에 입학했는데, 4학년 때 룸메이트로부터 갓 출간된 책한 권을 선물 받았다. 제인 제이콥스의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아이티Haiti로 휴가를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그 책을 읽었던 시간은 내 인생을 어디에 쏟아야 할지 깨닫게 된 전환점이었다. 도시계획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책에 나온 모든 내용에 대해서 정열적인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대학원에서 크리스토퍼 터나드Christopher Tunnard의 수업을 들었고, 점점 더 도시계획에 빠져 들어갔다. 나는 도시계획학과장이던 터나드와 건축학과장이었던 찰스 무어Charles Moore를 찾아가 도시계획과 건축의 복수 학위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은 멋진 생각이라며 찬성했고, 나는 예일역사상 최초로 두 가지 학위를 동시에 받게 됐다. 졸업 후 뉴욕의 필립 존슨Philip Johnson 사무실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몇 달 후 뉴욕도시연대New York Urban Coalition에서 주거 프로그램을 운영할 사람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도시연대는 1960년대 뉴욕의 폭동 이후, 노동 운동가, 사업가, 지역 사회의 리더들이 모여 결성한 단체였다. 일 년 정도 일한 후, 당시 린지John Lindsay 시장 휘하에 있던 도시계획국 주거 부문에 합류하게 되었다. 빔Abraham Beame 시장이 부임한 후에는 주택국 부국장으로 일했고, 에드 카치Ed Koch 시장 시절에는 신설된 종합 계획comprehensive planning 팀장에 임명되어 당시 계획 국장이었던 밥 와그너Bob Wagner를 도왔다. 그러다 1980년에 공직을 그만두고, 부동산업에 뛰어들어 15년간 약 1,000여 개의 임대 아파트를 관리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줄곧 예일대학교에서 파트타임으로 매년 3과목씩 학생들을 가르쳤다.
부동산업계에 있는 동안 쓴 책 『미국의 도시The American City』는 내 인생에서 두 번째 전환을 가져왔다. 책을 읽은 사람들이 갖가지 자문을 의뢰하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댄 독토로프Dan Doctoroff였는데, 그는 뉴욕에 올림픽을 유치하길 원했다. 우리는 1996년부터 2005년, 런던이 뉴욕을 제치고 2012년 올림픽 유치권을 따내기까지 십여 년 간 함께 일했다. 그 와중에 로어 맨해튼 개발 회사의 계획 개발 디자인 부서를 맡아 세계무역센터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전시해 왔다. 저서로 『시티 오브 뉴욕』(공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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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와 디테일] 잡초, 다르게 볼 줄 아는 자가 누리는 사치
첫 번째 대화
얼마 전, 평소 알고 지내던 임 소장(건축가)이 설계와 시공을 담당하게 된 성북동 현장을 방문했다. 성북동이라는 말에 한껏 들떴다. ‘우리도 이제 부자 동네에 한건 하는구나!’ 이렇게 혼자 헛물을 켜며 도착한 곳은 건물이 7평, 그 앞 장방형 마당 또한 무려 7평이나 되는 대저택(?)이었다. 너무 넓어서 놀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건축주는 정원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어서 아파트를 처분하고 단독 주택을 짓게 되었다며 이 대저택의 출생을 설명한다. 그 분의 꿈을 이루어내야 하는 중 대한 사명을 띠게 된 것이다. 예산은 얼마냐고 물었다.
“없다”는 답이 돌아온다. ‘그럼 어떻게’ 우린 고민하기 시작했다. 많은 아이디어가 오고가는 와중에 건축주가 한마디 거든다. “성북동 언덕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들풀을 써보면 어떨까요” 경비를 아끼자는 측면도 있지만 자신의 집에 들풀이 자라는 마당이 있으면좋겠다는 것이다. 처음엔 ‘과연 될까’하며 머뭇거렸지만, 현장을 나서면서 마주친 성북동의 오래된 담장 틈으로 자라고 있는 고들빼기와 민들레를 보는 순간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두 번째 대화
조경 회사에 다니는 친구가 놀러 왔다. 파주 근처에 지어지는 건물 중정에 식재 공사를 하고 있다며 현장 사진을 보여 준다. 강원도에서 멋지게 자란 흉고직경 20cm의 낙엽교목을 이식하는 이미지였다. 부러웠다. ‘우리가 만들 정원의 총공사비로는 저런 나무 한 주 밖에 못 사겠네’라는 씁쓸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기에 에둘러 흠집을 잡기 시작했다. 물론 속으로만. ‘처음 태어난 땅에서 어렵사리 자리 잡고 살고 있던 나무였을 텐데…, 뿌리에 온통 칼질을 해대며 뽑아내 이 먼 거리를 싣고 와서 낯선 땅에 심는 게 마땅한 일인가…, 그것도콘크리트 바닥 위에다가….’ 그러다가 나 역시 인간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가만히 있는 식물에게 몹쓸 짓을 해오지는 않았나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대영은 여기저기 살피고 유심히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작고 검소하며 평범한 조경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우대기술단과 씨토포스(CTOPOS)에서 조경의 기초를 배웠다.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엘(STUDIO L)을 시작하고 작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 www.studio89.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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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공감] 알토 사옥 옥상정원
빛 공장 위에 떠있는 작은 천국
별천지라는 말이 여기만큼 딱 맞는 곳이 있을까. 특별할 것 하나 없는 경기도 외곽, 난개발로 이름난 용인시 한 구석에 툭툭 던져놓은 것처럼 무심히 박혀있는 공장들 틈에서 밤이 되면 그 존재감을 달리하는 한 건물이 있다. 빛을 연구하고 만드는 알토 사옥이다. ‘라이트 빌딩Light Building’이라는 정직한 이름을 가진 이 건물 옥상에 아주 특별한 정원이 있다.
2013년 경기정원문화대상 최우수상을 받은 알토 사옥 옥상정원(이하 알토 정원)은 직원과 방문객에게 휴식과 평화를, 그리고 문화 행사와 연회의 기쁨을 제공하는 열린 정원이다. 이곳은 정원의 사전적 의미를 충실히 구현한다. 정원garden의 어원이 ‘구획을 지어gar, gher, enclosure’ ‘이상향을 만드는 것eden’이라고 한다면, 알토 정원의 단아한 외관 뒤에 숨은 구획과 위요의 기법, 이상향을 만들기 위한 크고 작은 장치들은 치밀하게 작동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건물을 빠져나와 정원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누구나 ‘와~’하는 감탄사와 함께 미소를 머금게 된다. 그 감탄사는 건물로부터, 노동으로부터, 속세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들어서는 극적 반전에서 비롯된다.
알토 정원의 신비함에는 매우 치밀하게 계산된 건축적·구조적 장치가 숨어 있다. 주변 건물의 보기 흉한 대형 광고판이나 골프연습장을 시각적으로 차단하기위해 옥상 파라페트와 가벽의 높이가 정확히 계산되어 설치되었다. 몇몇 나무들의 위치 역시 바깥으로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꼭 그 위치에 있어야 했다. 반면 정원은 주변의 산을 향해 무한대로 열려 있다. 적절한차단과 시각적 연계를 통해 만든 위요와 차경은, 대지 경계선 안쪽의 디자인 이전에 주변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정원의 성패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식물의 크기를 고려하여 화단의 높이가 달라지고 바닥의 수로를 설치하기 위해 목재와 화강석으로 마감한 바닥면은 슬래브에서 띄워져 있다.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글쓴이 외에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 교수 등 다섯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했고,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