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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광교신도시와 주민의 열망
한국의 신도시 주택은 대부분 아파트다. 순차적인 분양과 공사 기간을 거쳐 입주 때가 되면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신도시로 들어오게 된다. 개인에게 아파트 구입은 평생의 큰 거래다. 당연히 그들에게 신도시 계획과 공사 과정은 크나큰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입주자 수가 워낙 많다 보니 관심으로만 끝나지 않고 직접 의견을 제시하는 이들도 많다.
조경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조경에 대한 관심과 관여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수목, 시설물, 포장, 생태 하천, 산책로 등 대부분의 조경 공종을 대상으로 다양한 문제가 제기된다.
대개는 개인 단위이지만 정보화 기기의 발달에 힘입어 집단적 관여가 점점 늘고 있다. 입주자가 워낙 많다 보니 그 영향력도 갈수록 커져만 간다. 때때로 항의 방문이나 시위도 하지만 이들의 주된 소통 경로는 인터넷 ‘입주(예정)자 카페’이며 행동 경로는 인터넷 ‘민원 창구’다. 입주자 카페는 인터넷 환경이 대중화된 2000년대 초반부터 활성화되어 근래의 판교, 파주 운정, 청라, 김포 한강, 광교, 제2동탄 등대부분의 신도시 개발 과정에서 활발히 작동했다. 카페 게시판을 통해 서로 정보와 의견을 나누다가 생각이 일치되면 곧바로 집단 행동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관련 자료를 보면 광교신도시 입주자 카페 게시글의 상당수가 조경과 관련된다. 그중 57%는 호수공원과 생태 하천을 대상으로 쓴 글로, 광교신도시의 랜드마크인 호수공원에 대한 높은 비중과 기대감을 잘 보여준다. 게시글의 42%는 정보 교류 목적이었고, 38%는 공사 과정에 대한 비평이나 평가였으며, 20%는 문제 제기를 하고 있었다. 문제 제기 글에 대한 댓글수가 다른 글보다 1.6배 정도 더 많아 이에 대해 관심이 높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입주자 카페를 통해 확인되고 뭉쳐진 의견은 대개 사업 시행자나 지자체에 민원으로 접수된다.
광교신도시의 조경 민원은 입주 전후로 본격화되었다. 조경 공사를 시작한 뒤 준공하여 공원·녹지를 지자체에 인계할 때까지 약 4년간 조경 관련 민원은 1,000여 건에 달했다. 이 중에는 같은 사안에 대한 수십 명의 집단 민원도 있었고, 한두 명이 비슷한 내용을 하루에 몇 번씩 접수하거나 길게는 몇 달 동안 반복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물론 그 모두가 조경에 대한 높은 관심의 증거다. 그렇지만 일부 공원 시설에 대한 혐오와 기피는 조경 시설도 님비 현상의 대상일 수 있음을 경고한다. 화장실과 빗물 저류조가 대표적이다. 화장실은 디자인에 신경 썼음에도 혐오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빗물 저류조는 위생성에 대한 걱정과 함께 지상에 돌출된 환기구가 공원 이용에 불편하다는 불만이 쏟아졌다. 판교신도시에서도 같은 문제로 결국 화장실을 최소화했다고 하니 이는 신도시의 공통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혁신적인 디자인 개발과 기술 개발로 풀어야 할, 신도시 조경의 과제다.
물론 입주자의 조경 민원은 원칙적으로 타당한 것이 많았다. 그렇더라도 예산과 공사 기간, 관련 법규 등의 현실적 문제와 설계 개념 및 기능과 맞지 않을 때는 수용하기 힘들다. 상당히 공을 들인 생태 하천이었건만 친수 및 경관에 치중한 나머지 생물 서식처 기능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꽤 가슴을 아프게 했다. 최신의 포장재에 대한 신통찮은 반응을 보니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적정한 공간에 적절하게 표현되지 못하면 ‘듣보잡’ 포장으로 전락하는구나 싶었다. 그 외에도 수질 문제와 기능성에 치우쳐 경관적고려가 부족한 토목 공사 구역의 옹벽에 대한 지적도 꽤 있었다.
입주자 카페에서 많이 얘기되었다 해서 모두 민원으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민원은 엄연히 공적 영역이기에 은연 중 자기주장의 공공성을 재고해 보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를테면 가장 많이 언급하는 조경수의 경우 입주자 카페에서는 수종에 대한 주관적 평가와 함께 ‘가격’도 꽤 따지지만 이러한 요구가 그대로 민원이 된 경우는 별로 없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생각임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입주자 의견의 공론화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지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광교 이후에 ‘주민 참여형 조경’을 적극 고려하게 되었다. 행정적인 처리나 전문가주의를 탈피하고 주민의 역할과 참여 폭을 선제적으로 더 넓힌다는 데 목적이 있다. 물론 그 때문에 시간과 비용이 더 들거나 효율성이 떨어질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신도시를 개인들만의 ‘개미굴’이 아닌 ‘공동체’로 만들려면 결국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된다. 그 방법의 하나로 경기도시공사는 ‘조경가든대학’을 2015년부터 개설하여 현재 다산신도시 조성에 2년째 적용하고 있다. 입주자와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14주 교육 프로그램으로, 공원ㆍ녹지의 공익적 가치와 함께 개인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원 만들기와 그 관리법을 알려준다. 신도시 조경 공간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궁극적으로는 주민들의 자율적인 공원ㆍ녹지 관리 역량을 길러주기위함이다.
저출산ㆍ저성장 시대를 맞아 이제 신도시는 과거처럼 양산되기 힘들다. 지금까지 주택이라는 주거 시설 공급에 급급했다면 앞으로는 주거 공동체와 신도시 문화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졌다. 특히 신도시의 공원ㆍ녹지는 주민들의 일상적 공간이자 문화의장소다. 이 공간들이 주민들의 소통과 공유 경제에 일조하기 위해서 공청보다 공론에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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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광교의 호수공원에서
원주민도 아니고 현재의 신도시 주민도 아니고 자주 가볼 기회도 없지만 나는 광교라는 두 글자에 이상하리만치 친근감을 느낀다. 누군가 광교신도시가 참 살기 좋다는 평을 하면 이유 없이 뿌듯하다. 호수공원에서 주말 오후를 보내기 위해 일부러 광교를 자주 찾는다는 지인의 말을 들을 때면 내가 설계한 곳도 아닌데 괜히 우쭐한 마음이 든다. 다른 곳의 아파트 값은 계속 추락하지만 그래도 광교만은 오른다는 부동산 기사를 읽으면 마치 내 재산이 늘어나는 양 즐겁다. 사실 그럴 만한 특별한 인연은 없다. 근 삼십 년 전쯤에 광교호수공원의 전신인 원 천유원지로 몇 차례 MT를 가서 칠흑 같은 밤하늘, 그 침묵의 밤하늘보다 더 짙은 저수지 수면의 고요함을 깨며 부어라 마셔라 디오니소스를 친구 삼았던 게 전부일 뿐.
2008년, 까마득히 잊고 있던 원천저수지의 추억이 되살아난 적이 있다. 경기도시공사의 의뢰로 같은 과의 원로 교수님을 도와 ‘광교신도시 호수공원 국제설계공모’를 진행할 때였다. 이십 년 만에 다시 찾은 그곳의 풍경을 묘사하기엔 상전벽해(桑田碧海)만한 말이 없었다. 신도시의 바탕이 될 부지 토목 공사가 이미 끝나 어디가 어디인지 알아볼 길은 없었지만, 그래도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한 무상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저수지만은 그대로였기 때문일까. 공모전의 전문위원을 맡은 그 교수님과 여러 차례 현장을 드나들다보니 대화의 소재가 떨어졌다. 멋쩍은 정적을 깰 겸 치기어린 MT 무용담 몇 가지를 들려드렸더니 교수님은 갑자기 짧은 한마디 추억담을 꺼내놓으셨다. “와이프랑 처음 데이트한 곳이 여긴데.” 왜 하필 이 시골 저수지를 산책하셨는지 그 사연은 기억나지 않지만, 평소의 표정과 달리 교수님의 입가엔 로맨틱한 미소가 살며시 번지고 있었다. 그 후로는 원천유원지나 광교호수공원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도 한 쌍의 남녀가 수변을 행복하게 걷는 영상이 떠오른다. 내가 데이트를 한 것도 아닌데, 매번 남자 주인공은 나다. 인연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생기는 게 아닌가 보다. 아주 짧은 시간이더라도, 아무리 이방인이더라도, 사람과 어느 장소 사이에는 인연이 싹튼다.
이번 달의 광교신도시 특집은 꽤 오래 전에 기획한 아이템이다. 몇 달 전 편집회의 때는 이번에야말로 발로 뛰며 생생하고 입체적인 취재를 바탕으로 지면을 꾸려보자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플랜 B’ 카드를 뽑는다. 계획은 변화에 적응할 때 그 가치를 발휘하는 법, 유연한 계획이 좋은 계획이다. 초여름부터 지금까지 환경과조경은 유례없는 비상이다. 발행인과 편집장부터 편집부, 디자인팀, 마케팅팀 모두가 ‘2016 서울정원박람회’ 기획과 준비에 총력을 쏟아 붓고 있다. 광교 기획을 조금은 축소할 수밖에 없는 형편.
박람회 프로젝트로부터 ‘스스로’ 면제된 나는 그래도 한번은 현장을 가야겠다는 의무감에 침대만을 친구 삼는 일요일 오후의 소중한 루틴을 깨고 잠시 광교신도시를 걷기로 했다. 상전벽해가 따로 없는 새 도시의 낯선 풍경이지만, 원천저수지는 그대로다. 세련된 겉옷으로 갈아입긴 했지만, 깊고 짙은 수면의 고요함과 넉넉함은, 그곳을 거니는 연인들의 웃음은 예전과 다르지 않다. 여느 신도시와 달리 광교에는 생동과 활력이 넘친다는 평가를 받는 데에는 원천저수지의 잠재력을 잘 살린 호수공원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치열했던 국제설계공모를 거쳐 원천저수지에 새 옷을 입힌 신화컨설팅의 최원만소장과 동료 조경가들은 늘 자랑스러울 것 같다.
짧지만 즐거웠던 광교 산책에서 돌아와 책장 한구석에 처박아놓았던 8년 전 공모전의 설계 설명서들을 다시 펼쳐봤다. 신화컨설팅의 당선작뿐만 아니라 쟁쟁한 여러 국내외 조경가들의 다양한 디자인 해법을 꼼꼼히 다시 살펴봤다. 그때는 동시대 조경의 압축 파일이라 할 만한 그들의 설계 태도나 접근 방식에만 눈이 갔는데 이제야 원천저수지라는 조건 자체가, 장소의 힘이 눈에 들어온다. 이 공모전에 대한 비평문에 나는 어깨에 힘 잔뜩 주고 이런 결론을 적은 적이 있다. “공원에 대한 도시인의 욕망과 수동적…인 공원 사이에 존재하는 등식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그것은 빠져나오기 힘든 공원의 굴레일지도 모른다. 라빌레트 공원을 기점으로 지난 20여 년 동안 새로운 방식으로 공원을 설계하는 접근이 여러 프로젝트에서 실험되어 왔다. 그것은 설계 자체의 변신을 위한 기획이었다기보다는 ‘다른 공원’을 향한 대안적 시도와 노력이었다. 달라지기 위해서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고 인식한 첫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지만, 광교에서 볼 수 있듯, … 다른 공원의 가치를 실천적으로 제시하는 두 번째 발걸음은 아직 힘들기만 하다.” 취소다. 다시 출판할 기회가 있다면 꼭 수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광교호수공원에는 ‘다른 공원’이 있었다.
중요한 광고 하나 덧붙인다. “정원을 만나면 일상이 자연입니다!” 10월 3일부터 9일까지 월드컵공원 안에 있는 평화의공원에서 ‘2016 서울정원박람회’가 열린다. 월간 환경과조경이 서울시, 환경조경나눔연구원과 함께 정성껏 준비한 이번 박람회에는 작가정원과 주제정원뿐만 아니라 팝업가든 콘테스트, 해설이 있는 정원 투어, 당신의 정원을 디자인해드립니다, 정원에 차린 식탁 등 다채롭고 알찬 프로그램이 풍성하게 마련된다. 많이 오셔서 ‘다른 정원’들을 경험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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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식물의 르네상스
#93
식물원, 식물 수집, 식물 사냥
조각, 조형물, 분수가 아무리 근사하고 알레고리적 의미가 흥미롭다고 하더라도 식물과의 조화 속에서 비로소 빛이 난다. 르네상스 정원들을 보면 녹색 기하학이 지배하여 회양목, 주목, 사이프러스 외에는 별다른 식물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녹색 기하학의 정원’이라고 정의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르네상스 정원들은 조성 당시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두 후세에 복원된 것이며 고증을 통해 ‘이러했을 것이다’라고 유추하여 최대한 실제와 근접하게 재구성한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구조적 기본 틀과 개념을 재구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실제로 자라고 있었을 식물을 재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높은 유지·관리비 때문에 포기하고 녹색 테두리를 두른 반듯한 기하학 속에 모래를 깔고 만다. 그러나 당시 정원을 직접 목격한 여러 증인에 따르면 수천 가지의 식물이 자라 풍성하고 화려한 것이 마치 낙원과 같았다고 한다. 물론 과장은 있겠으나 수많은 식물이 심겼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르네상스 정원이 완성될 즈음에는 휴머니스트들이 고문서 수집과 조각상 수집에 이어 식물 수집에 열을 올렸다. 그 많은 식물을 수집하여 정원이 아니면 어디에 심었겠는가. 다만 심는 방법이 지금과 많이 달랐다. 식물을 서로 자연스럽게 섞어 심은 것이 아니라 유형별로 나누어 따로따로 심는 것이 불변의 원칙이었다. 마치 오케스트라 구성과 같았다.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를 나누고 그 안에서 악기 종류에 따라 음악가들을 배치했듯, 르네상스 정원에는 교목, 관목, 수벽, 유실수, 초본 식물들의 위치가 따로 지정되어 있었다. 엄격해 보이지만 이들이 철따라 서로 어우러져 내는 수많은 화음은 풍성하고 화려했고, 때로는 웅장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41호(2016년 9월호) 수록본 일부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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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랜드스케이프, 더 비기닝
올해 어느 때인가부터 일 때문에 속이 쓰리면 인류사 책을 짬짬이 읽었다.저마다 두꺼운 책 중 앞부분,정원과 조경의 시작이 궁금해서 시간을 거슬러갔다.복잡다단한 현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대략1만 년 전 농업 혁명이 일어나던 때다.여기서 실용적 가치와 심미적 가치를 따져서 농업과 정원을 엄밀히 구별한다는 것은 꽤 난감한 주제다.그보다는 우리 인류가 나름의 목적과 의도를 지니고 자연을 가꾸는 행위를 시작했다는 데 초점이 있다.
사들인 여러 권의 책 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은 것은 올해 인문학 부문 베스트셀러 순위에 상당 기간 올라 있던『사피엔스』.이스라엘의 역사학자인 저자 유발 하라리는1만 년 전 지구에서 벌어진 혁명에 대해 다소 도발적인 견해를 내놓는다.알고 보면 농업 혁명은‘역사상 최대의 사기’라는 것이다.몇몇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밝혀졌듯이 초기 농업인의 영양 섭취와 건강 상태는 이전 시기 수렵 채집인에 비해 상당히 열악했다.농경을 시작한 결과 정착 생활을 하고 발아 단계의 도시와 문명을 창조했지만,어찌되었든 농지를 돌보기 위해서 전에 없던
가혹한 노동이 줄기차게 필요했다.인류라는 종의 관점에서는 개체수가 급격하게 늘었으니 진화의 법칙에서는 성공한 셈이지만,인간 개체의 입장에서는 처절하게 실패한 혁명이었다.인류가 거대한 진화의 법칙에 속은 것이다.더 매몰차게는 밀이나 쌀을 비롯한 일부 곡물의 성공적인 생존 전략에 인류가 선택 당했을 따름이다(고정희의 책 제목『식물,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는 이런 의미에서 더욱 절묘하다).
150억 년 전 물질과 에너지가 모인 아주 작은 점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대폭발하면서 생겨나 지금도 끊임없이 팽창하는 우주.언젠가는 다시 수축하면서 원래 블랙홀로 돌아가기까지 우주론과 물리학으로 설명하는 시간과 공간.그 망망한 흐름 속에서 잠깐 미미하게 살다가 다시 먼지로 돌아가는 셈이니 인간의 비루한 삶이란 애초부터 그랬던 것이다.또 지구에 터를 잡은 생명체라면 어쩔 도리 없이 도도한 진화의 법칙에 매일 수밖에 없다.법칙으로 환원되는 세계는 치밀하고 지루하며 끔찍하다.
하지만 유발 하라리는 작은 출구 하나를 열어 두었다.터키에 있는 괴베클리 테페는 약1만2천 년 전의 유적이다. 20여 곳에 달하는 기념물을 이루는 돌기둥은 총200개 이상이고,가장 큰 것은 무려 높이5.5m,무게7톤이었다.또 미처 완성하지 못한50톤의 돌기둥이 근처 채석장에서 발견되기도 했다.놀라운 점은 이 유적의 건설 시기가 농경의 시작보다 앞선다는 사실이다.또 이 유적에서30km떨어진 카라사다그 언덕은 밀의 변종이 최초로 생겨난 발상지로 밝혀졌다.그렇다면 수렵과 채집을 겸하던 모종의 집단이 어쩌다가 먼저 공동체를 이루고,종교를 비롯한 자신의 문화와 신념 체계를 만들었으며,이를 배경으로 아직까지 목적을 알 수 없는 거대한 기념물을 지었을 가능성이 있다.이렇게 예상 밖으로 농업 혁명은 실용적 목적보다는 이런 사회 문화적 동력에 의해서 생겨난 것일 수 있다.이렇게 본다면 오로지 과학의 법칙으로만 인간 환경을 설명할 수 없다.초기 인류사를 통해서 짐작하는 정원과 조경의 탄생은 대략 이런 풍경이었다. ...(중략)...
*환경과조경341호(2016년9월호)수록본 일부
허대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졸업 후1999년부터18년째 조경설계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으며,느슨한 설계연대를 지향하는 스튜디오 테라(STUDIOS terra)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7년 전부터는 개인 주택정원,어린이 집과 학교의 외부 공간,놀이터,가로 공원,호텔 조경설계 및 감리 등 하나하나 성격이 다른 프로젝트를 다양하게 수행하고 있다.공간을 설계하는 사람이 즐거워야 나중에 그 곳에 머무는 사람도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땅에 뿌리를 박고 실천하는 조경 설계 공동체를 꿈꾸고 있다.『철새협동鳥합』을 여럿이 함께 쓰고,제프 마노의『빌딩블로그』를 함께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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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의 경제학] 경관, 경제 활동의 배경에서 대상으로
경관의 경제학은 가능한가?경관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하늘과 땅이 낳은 수많은 것들로 이루어진 경관은 신이, 또는 대자연이 우리에게 선물한 무상 공여물이다. 문화 경관, 나아가 도시 경관조차 그러하다. 사람의 손이 닿아 형성된 도시도 그것을 조망하는 입장에서 보면 마치 산이나 바다와 같이 누가 보여주려고 일부러 만든 적이 없는(만들 수도 없는) 광활한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도시는 사람이 만들었지만, 도시 경관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이러한 경관이 경제 활동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경관을 경제 활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정당할까? 애덤 스미스(1723~1790)를 출발점으로 본다면 경제학의 역사는 참으로 짧다. 그러니 그것이 다루어본 대상도 매우 한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 충만한 경제학자라면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경관에 대해 시장경제의 메커니즘이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이라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여기서 ‘시장경제의 메커니즘’이란 경관이 거래되어 가격이 형성되고, 가격에 의해 적정한 수요량과 공급량이 결정되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경제학적 관점에서 경관을 고찰하기 전에 경제학자나 조경학자가 경관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살펴보면 그 작업의 난이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학자는 자연환경이 인간의 경제 활동에 세 가지 측면에서 유용하다고 본다. 자연환경은 경제 활동을 위한 자원을 제공하고(resource supplier), 경제 활동의 과정에서 발생한 폐기물을 처리하고(waste assimilator), 자연 또는 경관 그 자체로 쾌감을 준다(direct source of utility). 그런데 이 중 첫 번째 유용성을 다루는 분야는 자원경제학, 두 번째 유용성을 다루는 분야는 환경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상당한 연구가 진행되어 있으나, 세 번째 유용성을 심도 있게 다루는 경제학의 분과는 찾아보기 힘들다. 자연이 아닌 도시의 경관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에 비해 조경학자는 경관 분석에 대한 접근 방법으로서 생태학적 접근 방법, 미학적 접근 방법, 철학적 접근 방법과 나란히 경제학적 접근 방법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자연환경의 가치를 화폐 단위로 측정하는 것에 한정되어 있어 경관 시장의 메커니즘과 같은 본질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경관의 경제학이 이렇게 전문가들에게 홀대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경관의 가치가 낮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그보다는 경관이라는 대상을 경제학적 관점에서 다루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 환경과조경 341호(2016년 9월호) 수록본 일부
민성훈은 1994년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조경설계 서안에서 2년간 일했다. 그 후 경영학(석사)과 부동산학(박사)을 공부하고 개발, 금융, 투자 등 부동산 분야에서 일했다. 2012년 수원대학교로 직장을 옮기기 전까지 가장 오래 가졌던 직업은 부동산 펀드매니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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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데이터센터
Hanwha Data Center
모든 프로젝트가 충분한 기간과 공사 예산을 확보하고 시작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클라이언트의 충분한 신뢰와 지지가 수반된다면 부족한 시간과 예산이 언제나 좋은 공간의 탄생을 막는 것은 아니다.
본 프로젝트는 아주 명확한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기존의 외부 공간은 얕은 토심으로 인해 나무가 고사해 그늘이 전무했고 따라서 건물의 전면부로서 인상도 좋지 않았다. 클라이언트는 이를 개선하고자 했고 예산은 기성품 퍼걸러 세 개를 구입할 수 있는 정도로 확보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오피스박김은 셸터를 직접 디자인하고 식재를 포함한 전체 시공 책임까지 맡아 ‘디자인-빌드design-build’의 형태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윈드 터널, 단순하고 안정적이며 아름다운 구조체우리나라의 외부 공간에서 그늘의 제공은 매우 중요하다. 한강공원에서 텐트들이 만들어내는 이질적 경관이 이를 증명한다. 이 프로젝트에서도 그늘의 제공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는데, 우리는 어떤 그늘을 어떻게 제공하는지에 초점을 두었고 3D 모델링을 통해 셸터의 구조와 길이, 모양 등을 집중적으로 스터디했다.우리는 셸터 구조의 원칙으로 ‘별도의 다리 등의 지지물 없이 하나의 바디가 자체로 서는 심플한 형태’, ‘제작비를 낮추고 시공이쉬운 모듈화 방식’, ‘구조가 곧 겉모습이 되는 아름다운 디자인’을 전제했고 많은 대안들을 연구한 끝에 두 가지 삼각형 모듈이 서로 연결되어 서는 절판 구조를 설계했다.본래 비를 완벽히 막는 것을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 모듈의 연결 부위는 따로 막지 않고, 오히려 셸터 안에서 중간중간 그 틈 사이로 떨어지는 빛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설계 및 시공오피스박김발주한화디자인본부 / 한화데이터센터위치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면적380m2완공2016
*환경과조경 341호(2016년 9월호) 수록본 일부
박윤진은 하버드 GSD를 졸업하고 치치 지진메모리얼 국제설계공모 당선을 계기로 김정윤과 함께 네덜란드에서 오피스박김을 설립하였다(2004). 미국 보스턴 건축대학교 등에 출강하였고 타이완 쉬이첸 대학교(2007), 미국 하버드 대학교(2008, 2010), 오하이오 주립대학교(2011), 호주 멜버른 대학교(2012) 등에서 교육, 전시, 강연을 위해 초청되었다. 김정윤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을 전공하였고, 네덜란드 조경건축사이며 바허닝엔 대학교에 출강하였다. 차세대디자인리더(산업자원부 2007), 광교신도시 공원디자인 커미셔너(2008), 서울형공공건축가(2011)로 선정되었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놀튼건축대학원이 선도적 조경가에게 수여해 온 글림처 특훈 교수(2011)로 임명되어 강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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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설계하는 법] 연필을 놓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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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의 소설, 『불멸』의 멋진 점은 제목과는 다르게 역설적으로 소설 속에서 불멸이 배제된다는 것이다. 소설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첫 번째 주인공의 얘기가 한참 전개되고 있을 때 주인공의 주변을 스쳐 지나간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배경 인물이 다음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며, 소설은 그 사람의 관점에서 다시 시작된다. 그런 점에서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포함한 세 개의 연작 중편은 여러모로 쿤데라를 연상시킨다. 한강이 인정하건 아니건 ‘몽고반점’과 ‘나무불꽃’으로 이어지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쿤데라에게 바치는 일종의 오마주처럼 보인다. 물론 쿤데라조차도 에리히 레마르크의 영화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 한 수 배운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그들은 하나 같이 인생의 본질은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며, 또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불멸』에서 우리로 하여금 무한한 애정을 갖게 만든 여자 주인공은 소설 중간에 (자살을 시도하는 어떤 멍청이 때문에) 뜬금없이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는다. 쿤데라의 다른 소설에 붙여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제목은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에 붙였어야 했다. 또 다른 주인공이며 여자 주인공의 아버지이기도 한 남자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과 관련된 것들을 하나씩 지워나간다. 자신의 물건, 자신에 대한 기록을 포함하여 자신을 기억하게 할 만한 모든 것들을 모조리 없애기 시작한다. 자신이 죽었을 때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려고 말이다. 쿤데라는 이 주인공을 통해 어차피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니 그럴 바엔 아예 기억되지 않는 것도 가치가 있다는 점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이건 우리의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지독하고 잔인한 페이소스기도 하다. 하지만 이 터무니없는 페이소스가 이렇게 마음에 와 닿으니 참 터무니없는 일이다.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나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은 몇천 년을 버텨왔으니 앞으로도 영원할까. 앞으로 잘하면 몇백 년, 더 잘하면 몇천 년 갈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다.
* 환경과조경 341호(2016년 9월호) 수록본 일부
진양교는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 조경학과 및 도시지역계획학과에서 공부했으며, 강원대학교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10여 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2002년부터 CA조경기술사사무소를 열고 실무의 최전방을 절절하게 체험하고 있다. 2010년 봄부터 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원의 전임교수를 겸하고 있다. 주요 설계 작품으로 하늘공원, 한강 반포공원 등이 있으며, 저서로 『기억과 상징으로의 여행』, 『건축의 바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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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기록관
Presidential Archives
기록을 담는 소중한 상자세종시 중심행정타운의 호수공원 가까이에 위치한 대통령기록관은 시민들의 문화 공간이다. 2015년 4월 16일 1단계 준공을 마친 대통령기록관은 2단계 내부 전시 준공을 완료한 후, 2016년 1월 14일 시민들에게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대통령기록관은 세종시 문화 벨트의 중심 공간으로 공원과 호수가 만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위치의 중요성과 역대 대통령을 기념하는 공간이라는 상징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구상이 필요했다. 이 같은 의도를 반영해 덕에 감싸인 기록관, 국새國璽를 소중히 감싸는 보관함이라는 의미를 지닌 호수 변 언덕이 탄생했다.
호수를 향한 언덕‘대통령의 언덕’이라 명명한 언덕은 호수 조망을 위한 최적의 장소다. 불규칙하지만 방향성 있는 포장을 통해 자연스럽고 다양한 이용을 도모한 오픈스페이스다. 진입부의 급경사면에 계단과 잔디 스탠드를 설치해 활용성이 높은 공간으로 만들었다. 언덕 상부에는 교목 식재를 하지 않았는데, 이는 국새인 대통령기록관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외부 환경, 개방감 있는 경관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인 사항이었다. 또 다른 상징 요소로 초대의 마당(진입 광장)에 거울연못을 계획했는데, 기술 제안 과정에서 삭제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조경 설계조경설계 이화원건축 설계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시공대림건설발주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위치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진의리 848면적28,000m2완공2016. 1.
*환경과조경 341호(2016년 9월호) 수록본 일부
양성희는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한 이후 스무 해가 넘는 현재까지 조경 설계라는 길 하나만 바라보며 걸어왔다. 모아조경과 서인조경 등에서 다수의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2011년부터 조경설계 이화원의 이사로 합류했다. 이화원의 프로젝트 디렉터로 설계 지식과 정보의 공유, 동료들과의 교감을 바탕으로 상생의 결과를 지향해 왔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영인산수목원, 대통령기록관, 국립세종도서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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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시티 공원 & 광장
Y City Park & Square
기부채납 부지의 새로운 시도그동안 기부채납 부지는, 만들어서 넘기는 입장에서는 사비의 절감이, 넘겨받는 입장에서는 유지·관리 비용의 최소화가 목표였고 이러한 상호간의 암묵적 동의는 흔히 질 낮은 공공장소의 양산으로 이어져왔다. 이에 비해 일산 와이시티는 한 블록 안에 아파트(2,400세대), 쇼핑몰, 오피스텔 등이 들어서는 복합 개발인데, 기부채납 광장과 공원의 경우 각각 쇼핑몰과 아파트 단지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어서 발주처에서 단지의 얼굴로 인식하고 특화에 의지를 가지게 된 경우다. 오피스박김은 광장과 공원에 대한 개념·기본·실시설계의 전 정과 주거부, 쇼핑몰 외부 공간에 대한 개념 제안을 행했다.신도시 개발 전 일산은 낮은 구릉과 논밭이 혼재한 지형이었는데 지금은 이러한 땅의 역사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아 광장과 공원을 통해 그 공간감을 재현하고자 했고, 도시 문화 활동의 장이 될 수 있는 공공장소로 일 수 있기를 바랐다.
광장: 장소로서의 계단설계 초기 와이시티 광장은 지구단위계획상에서 백석역과의 연결 통로를 만들 것이 권고된 상태였다. 이는 광장이 선큰화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고, 우리는 옛 일산 지형에 있었던 계곡과 같이 길고 완만하게 지하로 연결되며 그 경로 자체가 공공장소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선큰 광장을 만들고자 했다.
설계오피스박김건축 구조황경주토목 구조세나투스시공요진건설산업발주요진개발위치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백석동면적66,137m2완공2016
*환경과조경 341호(2016년 9월호) 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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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물만골벙커 국제 아이디어공모 설계공모 경과와 심사평
INTERNATIONAL IDEA COMPETITION FOR BUSAN MULMANGOL BUNKER REGENERATION
부산 황령산자락 물만골에 자리한 ‘부산물만골벙커’는 일제강점기부터 동굴의 형태로 전쟁의 피난처 역할을 해왔다. 1968년 군 작전 시설로 정비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계속 방치됐다. 최근 부산시는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서 벙커 재생 사업의 행정적 지원을 추진 중이었고, 지하 벙커와 그 일대의 대지를 소유하고 있던 경동건설은 지하 벙커와 지상 대지의 연계 개발을 계획했다.지난 3월 부산국제건축문화제조직위원회의 주관으로 ‘부산물만골벙커 국제아이디어공모’가 개최되었고 8월 15일 공모 결과가 발표됐다. 1등작에는 다비데 디 프란코Davide Di Franco와 누리아 베르날 리베라Nuria Bernal Rivera의 ‘더 리본, 오가닉 컬처 파크The Ribbon, Organic Culture Park’가 2등작에는 주디 청Judy Cheung의 ‘마운틴 오브 컨템퍼러리 아트 부산Mountain of Contemporary Art Busan’이, 3등작에는 미하엘 에프레모브Mihael Efremov의 ‘케이브 타운Cave Town’, 프란시스 우Francis Wu의 ‘라이프스타일 리제너레이션 LifestyleRegeneration’, 헤수스 헤르난데즈Jesus Hernandez의 ‘오픈 벙커Open Bunker’가 선정되었다.부산물만골벙커는 재개발 중인 고층 아파트 단지, 부산 시청, 저소득 밀집 주거지인 ‘물만골마을’ 등이 있는 접근성이 좋은 도심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벙커를 부산의 독특한 명소로 만들 수 있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요구됐다. 주변 쇠퇴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고 경제적인 면의 타당성도 고려해야 한다. 개미굴처럼 얽힌 구조, 연간 평균 온도 12.9˚C 등 벙커가 가진 독특한 장소성의 고려 유무도 중요한 평가 요소로 작용했다. 또한 황령산 정상의 봉수대, 전망대 등의 관광 자원과 자연환경을 적절히 연계 및 활용한 계획안을 제시해야 한다. 한편, 공모 발주처인 경동건설은 기본적인 검토와 추후 논의를 거친 뒤 당선자와 함께 실시설계를 진행할 수도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다음은 ‘부산물만골벙커 국제아이디어공모’의 심사평을 요약·정리한 내용이다.
전체적으로 콘셉트나 메시지가 강한 전달력이 있는 작품이 많지 않아 아쉽다. 특히 벙커의 활용에서 출발한 공모임에도 불구하고 벙커에서 유래한 개성 있는 콘셉트의 제시가 다소 미흡했다. 주변 자연환경의 생태성이나 경관성을 향상해 지하 공간을 외부와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프로그램의 제시나 조형적인 시도도 부족했다. 프로그램의 창의성과 생태적 환경성, 단계적 개발 가능성과 실행성 측면에서 완결성을 갖춘 작품이 눈에 띄지 않았다. 이것은 본 프로젝트의 입지와 맥락이 갖는 한계 그리고 아이디어 공모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근본적인 한계일 수 있다.
1등작역동적인 자연 경관 기반 시설을 표현한 작품으로, 산꼭대기를 둘러싸는 건물과 동선을 계획했다. 땅의 풍경과 문화 프로그램이 벙커를 연결하고, 도시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를 제공하면서 천연 대지의 다양성에 관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시스템을 제안하고 있다. 건축 개발 과정이 다이어그램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추후에는 프로젝트를 단순화하여 ‘리본’이라는 개념에 접근하는 방법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2등작참신한 개념과 아름다운 형태를 보여주는 계획안이다. 가장 단순한 접근 방식으로 벙커와 산을 개발해 문화 명소를 제안했다. 열린 튜브 형태의 구조물 하나가 산을 관통하며 ‘겸손한 존재감’을 표현한다. 이 구조물은 중요한 기반 시설을 연결할 뿐만 아니라 도시를 조망할 수 있도록 만든다. 하지만 자연 경관에 대한 고려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간과 야생 동물, 식물을 위해 다양한 대지의 특성에 주목했다면 더 좋은 안이 되었을 것이다. 주차 및 전망 탑은 도발적이지만 대지에 전반적으로 적용된 최소주의와는 정반대의 접근 방법을 취하고 있다.
3등작‘케이브 타운’은 아름다운 개념과 도면을 보여준다. 이 계획안은 기존의 주거 유형에서 형태적 전략을 끌어와 발전시켰다. 하지만 산의 절반을 없애야 하기에 자연환경에 미칠 영향이 우려됐다.‘라이프스타일 리제너레이션’은 산이라는 대지 조건에 가장 감각적으로 접근했다. 이 같은 접근 방식의 바탕을 이루는 도시와 기반 시설에 대한 생각 또한 훌륭하다. 벙커 입구에 제안된 극장과 한국 전통 탈 전시장 프로그램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파빌리온의 형태와 재료에 대한 전략이 다소 임의적으로 느껴져 아쉽다.‘오픈 벙커’는 아름다운 도면과 벙커의 발전 과정을 보여준다. 프로젝트를 브랜드화하고 사용자가 쉽게 이해하게 만드는 아이디어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 막혀 있는 벙커의 체계와 반대로 열린 벙커를 개발한다는 접근 방안도 강력하다. 하지만 이 단순해 보이는 접근 방식이 결과적으로 산의 생태계를 크게 파괴할 수도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도시적인 전략을 더 발전시켰다면 좋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