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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치·공간 정보 기술로 엿본 세운상가의 미래 도시재생의 기술: 미로, 회로, 여로’, 세운콘퍼런스
    세운상가 일대가 새 옷을 갈아입을 준비로 분주하다. 지난 3월 2일 서울시는 ‘다시·세운 프로젝트 창의제조산업 활성화 대책’을 발표하며 세운4구역의 사업 정상화를 선언했다. 대규모 철거 재개발 계획과 용적률 상향 문제로 오랜 기간 표류해온 세운4구역을 3D 프린터, 웨어러블 디바이스 등 최신 기술을 활용하는 스타트업 기업과 함께 4차 산업혁명의 중심지로 만들 계획이다. 세운4구역을 포함해 세운 상가 주변은 171개 구역으로 분할 개발되어 산업과 주거, 문화가 복합된 메이커 시티Maker City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될 예정이다. 세운4구역 사업이 정상 궤도에 오르며 세운상가에 활력을 불어넣을 다양한 프로젝트와 이벤트도 진행되고 있다. 지난 2월 27일부터 3월 2일까지 세운상가에서 열린 ‘한 걸음 더 세운’도 이 중 하나다. 그동안의 세운상가 재생 사업 성과를 발표하기 위해 마련된 이번 축제에는, 지난해 진행된 주민공모사업과 기술협업프로젝트의 성과물을 전시하는 ‘세운쇼케이스’, 세운상가 일대를 주제별로 돌아보는 투어 프로그램 ‘세운 사파리’, 세운상가의 기술을 주제로 토론하는 ‘세운콘퍼런스’가 마련됐다. 도시재생의 기술: 미로, 회로, 여로 종묘와 세운상가를 잇는 ‘다시·세운 광장’, 건물 곳곳을 연결하는 ‘공중 보행교’, ‘플랫폼셀’ 등 침체된 세운상가 일대를 활성화할 공간이 오는 8월까지 조성될 예 정이다. 새로운 하드웨어가 마련되면 이전과는 다른 주체들이 세운상가로 유입될 것이다. 이들은 세운상가를 구성하고 있는 공간과 사물 그리고 사람들과 어떤관계를 맺게 될까? 좀 더 많은 또 다양한 사람들이 세운상가를 방문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2월 28일 세운콘퍼런스의 일환으로 열린 ‘도시재생의 기술: 미로, 회로, 여로’는 위치·공간 정보 기술을 통해 그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 ...(중략)... *환경과조경348호(2017년 4월호)수록본 일부
  • 굴취맨, 하자는 ‘줄고’ 나무 이식은 ‘빠르게’ 지아이조경건설의 한국형 굴취기기
    나무 이식을 잘하는 기계가 있다. 바로 ‘굴취맨’이다. “나무 이식을 잘한다는 것”은 적은 인력을 투입해 시간 당 많은 나무를 옮겨 심는다는 뜻이지만, 이후 하자가 적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다. 나무를 캐서 옮기는 과정이 물건 옮기듯 단순하지 않은 이유는 살아있는 나무를 죽이지 않고 운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무의 생명과 연관된 섬세한 작업을 돕는 장비 ‘굴취맨’의 작업 비결을 알아보자. 굴취맨의 나무 이식 과정 보통 나무를 이식하는 과정은 이렇다. 우선 나무 근원직경 3∼5배 크기로 땅을 파서 뿌리분을 뜬다. 그리고 분이 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녹화마대나 가마니로 분을 감싼다. 이것을 새끼로 단단히 감아서 이식할 장소로 운반하고, 땅을 파서 심는다. 이 과정에서 잔뿌리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해야 옮긴 후에도 수분을 잘 공급받아서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굴취맨의 작업은 이렇다. 우선 이식할 나무가 굴취맨의 중앙에 들어오도록 위치를 조정한다. 그리고 굴취맨의 특수 삽날을 하나씩 땅속에 삽입하여 분 모양으로 나무를 담아낸 뒤, 함께 들어 올리면 분뜨기가 된다. 들어 올린 나무를 가지고 이식할 장소로 이동한 뒤, 미리 굴취맨이 분 모양으로 파 놓은 구덩이에 나무를 내려놓으면 작업이 완료된다. 굴취맨의 방식이 기존 작업과 다른 점은 우선 특수 날을 이용하기 때문에 땅을 파기 쉽고, 분을 떠서 그대로 이동하기 때문에 녹화마대로 감싸거나 새끼로 감아주는 작업이 생략된다. 또한 수목지주장치가 달려 있어서 운반 시 나무를 잡아주기 때문에 나무의 손상이 적다는 점이다. ...(중략)... *환경과조경348호(2017년 4월호)수록본 일부
  • [편집자의 서재] 상냥한 폭력의 시대
    스물여덟 살. 그중 스물다섯 해를 한 동네에서 보냈다. 몇 번 이사를 다니긴 했지만, 걸어서 십여 분이면 오갈 수 있는 거리였다. 덕분에 동네가 변하는 모습을 모두 지켜보며 자랐다. 초등학생 시절 동네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시장 한가운데 있던 교회였다. 그런 교회의 첨탑이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 다른 건물에 가려지기 시작했다. 유명한 패스트푸드점이 사거리 모퉁이를 차지했고, 주상 복합 건물이 들어섰다. 동네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중학교로 향하는 구불구불한 골목에 벽보가 붙기 시작한 때도 그 무렵이었다. 재개발을 반대한다는 내용이 빼곡하게 들어찬 벽보가 담벼락을 채웠다. 때론 붉은 스프레이로 ‘투쟁’, ‘생존’, ‘죽어도 못 나간다’ 등 뉴스에서나 볼 법한 단어와 문장들이 적히기도 했다. 그 모습이 왠지 무서워 혼자 골목을 지날 때면 걸음을 서두르곤 했다. 골목은 주기적으로 정돈되고 다시 채워졌다. 덜 떼어진 벽보 귀퉁이가 남은 자리에 다시 벽보가 붙고 붉은 글자 위에 페인트가 덧칠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얼마 뒤 골목은 방치되기에 이르렀다. 벽보의 끄트머리가 헤져 팔락거리고 붉은 색 글자가 바래 흐릿해지자, 나는 혼자 골목 걷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그 풍경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벽보와 골목을 메운 단어가 갖는 힘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그랬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 자리에는 모양새가 제각각인 주택 대신 반듯반듯한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앞을 지날 때면 문득 궁금해진다. 그때 붉은 스프레이를 들고 숨죽여 골목을 누볐던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담벼락의 주인들이 벽보를 떼어 내고 페인트칠을 하는 모습을 보며 느낀 불편함은 어쩌면 정이현이 말하는 ‘상냥한 폭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로 이루어진 ‘상냥한 폭력의 시대’는 정이현 작가가 『오늘의 거짓말』(2007) 이후 9년 만에 내놓은 단편집의 제목이다. 2013년부터 2016년 5월까지 쓴 일곱 편의 단편을 묶은 책으로, 그는 이 책을 “피를 흘리지는 않지만 고통 속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고통을 각각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관찰해가는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스릴러나 험난한 인생사를 다룬 소설에 등장할 법한 ‘고통 속에 놓여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각종 학원 버스를 갈아타는 초등학생, 피곤이 가득한 얼굴에 미소를 띠고 손님을 맞는 아르바이트생, 날이 갈수록 오르는 식재료 값에 한숨을 쉬며 퇴근하는 직장인, 자녀가 찾아오는 걸 본 적이 없는 이웃집 할머니 등 현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나아질 기미가 없는 삶에 지친 사람들은 서로에게 의도치 않은 폭력을 행사한다. 물리적인 폭력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의 고통을 모른 척하고 때때로 자신의 고통을 덜기 위해 다른 이의 죽음을 외면하는 등 상냥한 외피를 뒤집어쓴 폭력은 주먹보다 서늘하고 잔인하다. “예의 바른 악수를 위해 손을 잡았다 놓으면 손바닥이 칼날에 쓱 베여 있다. 상처의 모양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누구든 자신의 칼을 생각하게 된다”는 작가의 말처럼 책 속의 이야기는 나도 몰랐던 내 안의 폭력성을 발견하게 한다. 이제 열여섯 살이 된 어린 딸이 낳은 미숙아의 수술 결정을 미루며, 인큐베이터 안에서 죽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엄마. 섬뜩함을 느끼면서도 딸의 미래를 걱정하는 엄마의 심정에 일부 공감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 절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고개를 돌려 버리면 쉽게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만들 수 있기에 얼마나 많은 일들을 외면해 왔을까. 취재를 위해 방문한 세운상가가 어렸을 적 보았던 동네의 모습과 겹쳐 떠오른다. 재개발 논란과 몇 십 년간 계속된 상인 그리고 주민과의 갈등 끝에 거대한 주상 복합 건물은 간신히 철거를 면하게 됐다. 지난 3월 세운4구역 사업의 정상화가 발표되며 세운상가와 그 일대를 대상으로 한 각종 공모와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상가의 일부는 허물어져 새롭게 태어날 것이고, 상가 곳곳에는 4차 산업혁명을 실험할 단체가 들어서는 중이다. 하지만 여전히 세운상가를 검색하면 기존 상인의 입장과 의견을 포용하지 못해 불만을 사고 있다는 기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어쩌면 도시재생이라는 명목으로 세운상가에 상냥한 폭력을 행하고 있는 건 아닐까. 세운상가가 신중한 방식으로 재생되기를 기대한다. 벽보를 무시하고 붉은 아우성을 덮어버리기보다, 모든 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느리게 나아가기를. 세운상가는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고 천천히 소멸해 갈 것”이니까. “샥샥은 샥샥의 속도로, 나는 나의 속도로, 바위는 바위의 속도로”세운상가는 세운상가의 속도로 살아가 시대에 맞추어 천천히 소멸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 [CODA] 아파트
    건설사에 다니는 J는 광주에서 고층 아파트를 짓는 현장에 있다. 시간되면 내려갈게 라는 공수표 날리기를 1년여. 이번에는 진짜라고, 당장 내려가 화창한 토요일 오후 아시아문화전당에서 공연도 보고 광주 시내도 함께 누비자고 했다. 이번에는 J가 난색을 표한다. 샘플하우스 오픈 준비 때문에 바쁘단다. 그래, 괜찮아. 일이 먼저지. 앞으로 계속 바쁠 일만 남았다구? 그래, 다음에는 너 틈날 때 내가 딱 맞춰 날아 갈게. 그러게,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우린 맨날 이렇게 고달프냐. 그래서 어디냐고? 나 예술의전당. ‘르 코르뷔지에’ 전시가 곧 끝난다잖아. 근데 언제부터 우리나라에서 코르비 옹이 이렇게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거야? 전시장에 들어가려면 1시간이나 줄을 서 기다리란다. 젠장, 토요일 오후 데이트 장소가 여기밖에 없는 거니! 르 코르뷔지에 전시가 장안의 화제이긴 한 모양이다. 평소 미술과 디자인 분야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무시했던 동생이 이 전시는 꼭 봐야 한다며 강력하게 권유했으니 말이다. 요즘 주말에 스케치를 배우는 동생은 전시회에 다녀오더니 르 코르뷔지에는 대단한 사람이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건축 설계를 했던 나의 부친은 어린 시절부터 우리 남매가 동네 미술 학원에서 그려온 그림들을 보시곤 일찌감치 남동생을 포기하고 나에게 꿈을 물려주려고 하셨다. 안타깝게도 나 역시 그쪽으로 큰 재능이나 열정이 없었다는 점이 부녀지간 비극의 시작이었지만. 화가로서 르 코르뷔지에를 재조명하고 있는 전시를 보니 동생이 받고 있는 취미 미술 수업에서 왜 건축가 전시를 찾았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르 코르뷔지에는 처음부터 자신을 화가로 여겼다. 그는 건축가이기보다는 위대한 화가로 인정받기를 바랐다. …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을 때만, 그는 자신을 건축가로 생각했다.”(앙드레 보겐스키) “내가 건축이라는 것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내 그림이라는 운하를 통해서였습니다.”(르 코르뷔지에) 마치 한 편의 자서전처럼, 혹은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전시는 친절하게 화가이자 건축가로서 그에 대해, 또 형에게 빼앗긴 어머니의 사랑을 평생 갈구했던 아들이자, 뮤즈였던 아내 이본느를 사랑했던 한 남자로서 르코르뷔지에에 대해 이야기한다. “난 롱샹 성당에 꼭 가보고 싶어.” 동생은 그의 그림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며 롱샹 성당이 무척 감동스러웠다고 한다. “하긴, 전에는 합리적이고 미니멀한 빌라 사부아를 설계한 사람과 시적인 롱샹 성당을 설계한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점이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평생 그림을 그리고 게 껍데기 따위를 모으며 형태를 연구했다고 하니, 이젠 좀 납득이 가긴 해.” 동생은 르 코르뷔지에가 아내 이본느를 위해 지었던 4평짜리 오두막 카바농Cabanon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정신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게 틀림없어.” 동생은 최소의 기능만을 담았던 단출한 카바농에서 초가삼간이나 정자를 지어 마음을 가다듬고 자연을 즐겼던 조선 선비의 모습을 떠올렸던 것일까. 여하튼 큰 감동 받은 동생이 사들인 비싼 도록을 휘휘 넘겨보았다(동생아, 패킹도 안 뜯고 책장에 꽂아둘 거면 책은 왜 사니?).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그가 영향을 미친 것이 어디 건축 양식뿐이랴. 전 세계의 천재들이 모여든다는 파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항상 동그란 안경을 쓰고 나비넥타이에 양복을 차려입으며 자신을 브랜딩했던 그의 사진을 보니(마치 스티브 잡스가 검정색 터틀넥 니트와 청바지, 운동화로 스스로를 아이콘화했던 것처럼), 여전히 많은 르 코르뷔지에의 후예들이 동그란 안경을 즐겨 쓴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그러나 가장 큰 상념을 안겨 준 것은 아파트를 창안한 혁명가로서 르 코르뷔지에였다. 어렵게 비집고 들어간 전시장에서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수백만 서민의 거주지를 해결한 공동 주택(아파트)을 창안해 집이 없는 이들의 삶을 바꾸다”란 문구였다. 지면을 녹지로 활용할 수 있게 한 필로티, 옥상 정원, 인간이 최소한의 공간에서 불편함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최적의 비율 모듈러가 적용된 마르세유 유니테다비타시옹(1952년 준공)은 세계 최초의 현대식 아파트의 모티브가 되었고,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그 결과 (정작 유럽에서 건물을 고층화해 지상을 녹지 낙원으로 조성하겠다는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계획이 실패했다고 평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나는 아파트 단지를 고향처럼 느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번 달 칼럼을 쓴 송준규가 과천의 아파트 단지에 느끼는 애착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오래된 아파트 단지와 그곳에서 몇 십 년을 자란 나무를 보면 편안함을 느낀다. 그 아파트 단지들이 재건축되고, 내가 다녔던 학교가 초고층 주상 복합 아파트로 둘러싸인 격변을 목도하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다. 지금은 코르비 옹이 서민 주거를 해결하기 위해 창안했다는 아파트 한 채를 서울에 마련하지 못한 채 새로운 변화를 지켜보고 있다. 4~5년 전쯤 내가 새로 정착(?)한 동네는 망원동이다. 조용한 서민 동네이면서, (홍대나 상수동 등지에서 높은 임대료 때문에 밀려난) 개성 있는 상점이나 카페들이 군데군데 숨어있는 묘한 분위기가 좋았다. 골목길이 있고 세탁소와 철물점 그리고 전통 시장이 있는, 거리에서 누릴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이 있는 동네다. 아파트는 장만 못했지만 이런 동네 생활이 좋다고 스스로 위안 삼았다. 그러나 망원동의 변화는 이미 내가 들어오기 전부터 예견되어 있었다. 요즘은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는 ‘망리단길 싫어요’ 서명 운동 글이 올라왔다. 최근 몇몇 TV 프로그램과 신문 등에서 망원시장 일대를 ‘망리단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가로수길이나 경리단길과 같은 소위 핫 플레이스로 소개하면서 언론에서 붙인 이름이다. 시장 주변 골목에는 젊은 창업자들이 차린 트렌디한 음식점과 프렌차이즈 카페들이 점점 많아지고, 주말이면 맛집 탐방을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서명 운동을 제안한 주민은 망원동이 주목받으며 임대료가 상승하고, 음식점과 카페가 오래된 원주민들의 근린 생활 시설을 밀어내고 있음을 우려하고 있었다. “반짝 뜨고 지는 핫플레이스가 아니라 모두가 오래오래 살고 싶은 동네이고 싶다”는 바람에서 ‘망리단길 안부르기 운동’을 제안하고 있다. ‘좋아요’를 꾹 누르고 서명을 했지만, 과연 변화를 막을 수 있을까. 근처 합정동에 얼마 전 준공된 높다란 새 아파트를 보면서 착잡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골목길이 있는 동네의 정취 역시 오래 누릴 수 없다면, 늘 날 어린애 취급하며 걱정했던 J의 말처럼 진작 아파트 분양 정보나 열심히 찾아볼 걸 그랬나 후회도 슬며시 고개를 든다.
  • [PRODUCT] (주)예건 도피오 벤치 출시 단숨함이 주는 강렬함
    (주)예건이 도피오 벤치Dopio Bench를 새롭게 선보였다. 러프한 스케치처럼 강렬한 시각적 인상을 벤치의 형상으로 구현했다. 대개 러프 스케치는 주곡선과 이를 보조하는 덧곡선으로 이루어지는데, 제품의 모든 디테일을 표현한 도면이나 사진보다 그 특징을 명료하게 전달한다. 콘셉트와 도피오의 유래 도피오Dopio는 두 잔의 에스프레소가 들어가는 커피를 뜻하는 이탈리아어인데, 일반 커피에 비해 풍미가 짙고 끝 맛의 여운이 오래간다. 강렬한 인상의 드로잉처럼, 두 잔의 에스프레소가 담긴 도피오의 짙은 정체성이 벤치의 디자인 콘셉트와 일부 유사하여 도피오라 명명했다. 재질을 통한 콘셉트의 구현 펜 드로잉의 주곡선과 덧곡선의 리드미컬한 선형을 구조적 형상으로 구현한 벤치다. 알루미늄 프레임의 측면을 에지로 다듬었는데, 키네틱kinetic 요소를 적용해 펜의 날렵하고 유연한 흐름을 금속의 유체 흐름으로 시각화했다. 도피오의 매력은 전체적인 외관의 미적 요소뿐만 아니라 디테일 속에 숨어 있다. 두 선이 만나고 분리되는 유기적인 홀hole의 정교한 마감은 벤치 전체 선형의 미려함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사용성과 안정성에 대한 디테일 등받이는 척추선과 유사하고,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103도(권장 100~110도)로 설정했다. 103도로 기울어진 등판은 이용자가 착석했을 때 편안함과 시각적인 안정감을 준다. 생산성과 가격 적정성에 대한 디테일 벤치 좌대 금속부의 돌기는 목재 좌대의 설치를 용이하게 할 수 있는 기능적인 측면과 더불어 시각적인 미감을 고려했다. 대부분의 일체형 좌대 목재 교체 소모비는 크지만, 도피오의 좌대는 개별 목재를 결합해 각 목재의 심미적인 디테일을 살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설치와 교체를 개별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기성 벤치와 비교해 경제성과 시공의 용이성을 확보했다. 지면 고정부의 디테일 도피오의 다리 내측에 일체화된 볼트 포켓bolt pocket을 적용해, 시공 후 눈높이에서 투박하게 보이는 볼트 체결부의 외부 노출을 최소화해 기성 벤치와 차별화했다. TEL. 031-943-6114 WEB. www.yek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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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토리얼] 광장의 계절을 보내며
    광장의 계절이다. 지난 가을과 겨울 광화문광장을 촛불로 타오르게 한 집회 참가자 연인원이 3월 초면 1,500만 명을 넘어설 전망이다. 이 차디찬 계절의 뜨거운 광장을 한 외신은 가장 아름다운 형태의 민주주의라 평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도시 문화에서는 낯선 공간이었던 광장에 그 어느 때보다 큰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번 호 특집 ‘광장의 재발견’의 배경에는 최근의 국정 농단과 ‘광화문광장 현상’이 광장이라는 공간과 문화에 대한 다각도의 해석을 요청하고 있다는 진단이 자리한다. 그러나 도시의 그 어느 곳보다도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와 활동이 교차하는 공간인 광장을 어떻게 설계하고 경영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이번 특집을 관통하는 중요한 문제의식이다. 이번 광장 기획은 또한 월간 『환경과조경』이 공동 주최하는 제14회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과 켤레를 이룬다. 공모전 취지문을 아래에 옮긴다. “광장보다 골목과 길이 더 친숙했다. 꽤 오랫동안 광장은 우리의 것이 아닌 서구의 것이었다. 광장과 같은 빈 땅을 필요로 하는 집단적 종교 활동도 없었고, 군중의 집합이 동반되는 시민 사회의 성숙 역시 뒤늦게 발현되었다. 사람들은 가로의 일종인 선형의 시장에서 만났고, 아이들은 골목에서 뛰어 놀았다. 개인이나 마을 단위의 대소사를 치르기 위해서는 마당이면 족했다. 그도 아니면 사람들은 당산나무 그늘을 찾았다. 우리네 광장의 역사가 짧은 까닭이다. 한강 백사장과 여의도광장에서 벌어진 대규모 관제 집회와 종교 집회의 시기를 거쳐, 본격적으로 광장이 주목받게 된 계기로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을 꼽지 않을 수 없다. 2002년 월드컵 당시의 대규모 거리 응원도 광장의 흥분을 온 국민에게 선사했다. 하지만 세기가 바뀌기 시작할 무렵부터 전 세계적으로 광장은 공원과 유사한 하나의 오픈스페이스로 변신하며, 그 고유한 특질을 잃어갔다. 공원 같은, 광장 아닌 광장이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했고, 우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의도광장은 여의도공원으로 옷을 갈아입었고 서울광장엔 잔디가 깔렸다. 청계광장 역시 일상적 이용에 초점이 맞춰졌다. 정부도, 시민도 비일상적인 대규모 집회용 광장보다는 녹색 옷을 입은 일상적인 오픈스페이스를 선호한 탓이다. 광활한 비움보다는 불확정적이며 유연한 설계가 더 각광받았다. 그 사이 오프라인에서의 직접적 만남은 온라인상에서의 새로운 사회적 관계망, 이른바 SNS로 대체되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교류할 수 있는 플랫폼이 하루가 멀다 하고 늘어난 것에 비례해서 광장에는 녹음을 드리우는 녹색의 면적이 커져갔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광장의 의미와 쓰임은 무엇일까? 혹은 무엇이어야 할까? 광장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신선한 모색을 초대한다. 작아져만 가던 광장을 다시 호출한, 슬프고도 우울한 시국은 ‘광장의 재발견’에서 절대적인 단서가 아니다. 우리는 이 엄중한 시기를 지나 다시 우리의 일상을 살아가야 하니까.” 특집의 첫 번째 글 ‘아고라포비아’에서 박승진 소장은 설계자들이 갖는 광장공포증을 다루지만, 광장 설계를 둘러싼 거의 모든 핵심 쟁점들도 샅샅이 조회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광장은 대중 민주주의의 상징이면서 전체주의의 통치 도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광장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사용된다.” 그는 광장공포증을 극복하는 태도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며 글을 맺는다. “좋은 광장을 만드는 데 있어서 위대한 설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열정적인 협력 그룹, 뛰어난 집단지성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편집자로서 가장 굵은 형광펜을 그은 문장은 “광장은 다수의 군중을 위해 존재하지만, 외로운 도시 산책자를 외면하지 않는다. 어쩌면 도시에 더 많은 광장이 필요한 이유다”였다. 전상인 교수는 ‘광화문광장인가, 광화문극장인가?’에서 도시의 계획·설계와 문화라는 관점으로 광화문광장 촛불집회의 몇 가지 쟁점을 검토한다. 이 글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광화문광장은 광장이 아니라 극장”이라는 주장이다. 광화문광장은 “그 자체의 전통으로 빛나는 시민의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연출과 기획을 기다리는 미장센”이며, 그것이 “하버마스가 말하는 공론의 장이 될지, 푸코가 말하는 권력의 장이 될지 선택은 우리의 몫”이라는 해석은 토론을 초대한다. 반면, ‘광장, 군중, 이벤트’에서 김세훈 교수는 최근의 평화 집회가 광장이라는 도시 공간을 재발견할 소중한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고 진단하고, “다양한 집단의 사회적 활동을 풍부하게 담을 수 있으면서 동시에 즐겁고 쾌적한 광장, 그리고 이벤트에 몰입하는 경험과 함께 자유로운 참여 선택의 여지를 주는 광장”을 위한 과제를 탐색한다. 특히 ‘군중관리학’에 토대를 둔 정교한 광장 설계와 이벤트 계획의 가능성을 짚는다. 광장을 광장답게 쓰는 방식이 정해져 있다, 정해져 있지 않다는 지점에서 두 필자의 견해가 엇갈린다. 특집에는 남기준 편집장의 ‘‘광장의 재발견’에 단 편집자 주’와 편집부의 조사와 토론을 바탕으로 김정은 편집팀장이 갈무리한 ‘편집부가 추천하는 광장 10선’을 함께 싣는다. ‘광장 10선’은 지난 10년간 『환경과조경』에 실린 광장 프로젝트 전수를 놓고 에디터들이 열띤 토론과 투표를 통해 선정했다. 환경조경대전 출품을 준비하는 독자들에게 광장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실험을 접하는 기회가 되길 기대한다. 이번 특집 ‘광장의 재발견’은 완성본이 아니다. 지금, 여기, 한국 사회와 조경계의 교집합이 있다면 그 중심에 광장이 놓이기에, ‘광장의 재발견’은 현재진행형 프로젝트다. 광장을 다시 생각하며 도시사, 건축사, 조경사의 내로라할 고전들을 계속 뒤적거리지만, 그래도 자꾸 손이 가는 책은 최인훈의 『광장廣場』이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 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 나온다.” 누구나 밑줄 그어놓았을 1961년 판본의 서문 한 대목이다. 희망의 새봄을 맞는 『환경과조경』에 몇 가지 뉴스가 있다. 김정은 편집팀장이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기쁜 소식을 먼저 전한다. 논문 주제는 한국 근대 유원지의 공간문화사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 (정확하게 조사하지는 않았지만) 국내 조경과 건축 전문지 역사상 최초의 박사 기자가 탄생한 셈이다. 하지만 2014년 6월호부터 합류해 서른 세 권의 잡지를 만든 조한결 기자가 대학원 진학을 위해 퇴사한다는 아쉽고 섭섭한 소식도 있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조 기자는 『환경과조경』의 지면 혁신을 실천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잡지 곳곳을 업그레이드시킨 유능한 편집자였다. 미술사를 전공할 그의 새로운 항해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편집자가 아닌 필자로 『환경과조경』 지면에 곧 등장하리라 기대한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칼럼] 젖은 광장, 마른광장
    지난 해 12월 9일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핑계 삼아 다음날 새벽까지 통음했다. 오후에야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찾아간 미용실. 머리를 다듬던 원장이 말했다. “오늘은 우리 꼬맹이들 데리고 가려고요.” 지난 6주 동안 그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느라 퉁퉁 부은 다리를 이끌고 토요일마다 촛불을 들었다. 8시가 넘어서야 가게 문을 걸어 잠그고 서둘러 광장으로 달려가 자정 넘어서까지 거리를 지켰다. “하도 구호를 외쳐서 목이 터지는 줄 알았다”고 했다. 내 직업이 정치 뉴스를 다루는 것임을 알면서도, 원장은 나를 단골로 대한 지난 8년 동안 한 번도 정치 얘기를 건넨 적이 없었다. 그를 보면서, 나는 어떻게 ‘232만 명’이라는 경이로운 숫자가 탄생했는지 알게 되었다. 내 주변의 평범한 이웃들이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내가 경험했던 광장은 잠깐 타오르다 달콤한 케이크 위로 녹아버리는 막대 촛불 같은 것이었다. 2008년 봄 광화문광장. 그 전해 말 531만의 큰 표 차로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은 금세 촛불의 성난 함성에 부닥쳤다. 그러나 거세게 타올랐던 촛불은 1987년 민주화 항쟁의 시작 일인 6월 10일을 기점으로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청와대 뒷산에 올라 눈물을 흘렸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이후 이내 잦아들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조건이 다소 까다로워졌고 ‘한반도 대운하’가 ‘4대강’으로 바뀌었지만, 근본적으론 변한 건 없었다. 반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에 대한 감시·사찰·검거가 이어졌고, 검찰의 가혹한 망신 주기 수사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4년 뒤인 2012년엔 이번 겨울 수백만 명을 거리로 내몬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됐다. 뿐만인가. 2014년의 광장은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었나. 세월호 참사에 대해 가슴깊이 아파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왔다 간 광화문광장에선 유가족을 능멸하는 행위가 자행됐다. 단식 농성을 하는 가족들 곁에서 ‘자장면 퍼포먼스’가 벌어졌다. 슬픔과 공감이 있던 자리엔 진영 논리가 횡행했다. 광장에서 튄 분노의 불꽃은 이내 마른 장작처럼 화다닥 탄 뒤 한줌 재로 스러졌다. 마른 광장은 희망을 잠시 조우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 광장은 달랐다. 마음에 차오른 물기. 그건 나만이 느낀 게 아니었을 게다.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느낀 따뜻함 밑바닥엔 슬픔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가 소리친 광장엔 울분과 통한이 서려 있었다. 광장은 축축했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던 2014년 당시, 나는 매일 국회로 출근해 하루 종일 정치인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취재하는 일을 했다. 흔히들, 갈등은 민주주의를 작동하게 하는 동력이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갈등을 표출하고 사회화 하는 과정이 바로 정치”(샤츠 슈나이더)라는 관점이다. 이 경우 정치는 밀실의 개인들을 불러내 자신의 목소리를 분출하도록 하는 광장이다. 그러나 유족들에게 한국의 정치는 광장이 아니었다. 같은 해 재보궐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주도권을 쥔 여권은 한국 사회를 들끓게 한 ‘지배적 사회 갈등’이었던 세월호 문제의 본질을, 자신들의 존립에 유리한 갈등, 즉 ‘색깔론’으로 대체했다. 야당은 당내 분열과 실력 부족으로 여권의 이런 행태를 제어할 수 없었다. 도무지 좌우를 따질 일이 아닌 사회적 대참사가 정쟁으로 전락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족들은 보상금을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려는 탐욕스런 집단으로, 좌파와 결합한 불온한 세력으로 몰렸다. 유족들은 밀실에 갇혔다. 지난 해 4·13 총선 때 ‘세월호 변호사’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출마하자 유족들은 도라에몽 인형 탈을 쓰고 선거 운동을 했다. ‘세월호 유족’이 공공연히 나섰다가 표 떨어질 것을 우려했던 까닭이다. 유족들은 ‘투표로 아이들의 미래를 바꿉시다’라는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주장을 펼칠 때조차 인형 탈 뒤로 숨어야 했다. 올 겨울 광장. 시민들은 진실의 외침을 다시 응시했다. 밀실에 유폐됐던 진상 규명의 호소를 응원했다. 촛불이 밝혀지기 시작하던 11월 초까지만 해도 광장 한편에서 쭈뼛거렸던 유족들은 날로 탄핵의 열기가 고조되자 전면에 나섰다. 11월 28일엔 노란 종이배 304개를 태운 ‘세월호 고래’ 풍선과 함께 청와대 앞까지 행진을 벌였다. 2014년 말,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호소하며 당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앞에서 무릎 꿇고 빌기까지 했던 창현이 아빠 이남석 씨는 시위대 맨 앞에 서서 광화문에서 청와대까지 갔던 날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람들이 우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 달라’며 1000일 가까이 바쳤던 간절한 기도가 드디어 응답 받았다고 생각했다.” 올 겨울 광장. 수백만 명이 모였는데도 질서와 평화가 유지된 것은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일부 언론이 쓰는 ‘시민의식의 성숙’이란 ‘중립적’ 표현은 이 광장의 경이로움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인내와 절제, 그 밑에 자리한 것은 304명을 떠나 보낸 우리들의 눈물이었다. 광장은 젖어 있었다. 이유주현은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19년을 살았다. 1997년 「한겨레」 신문에 입사해 문화부, 사회부, 정치부 등을 거쳐 왔다. 한때 조경가를 꿈꾸기도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일과 일 아닌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보려고 하면서도 늘 휘청거리며 살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주름이 멋지게 잡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공저로 『소울 플레이스』, 『공원을 읽다』 등이 있다.
  • [광장의 재발견] 광장의 재발견 Reinvention of Plaza
    지난 2016년 11월 12일 서울 광화문광장 일대에는 100만 명 넘는 사람들이 운집했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래 최대의 인파, ‘광장의 역사’를 새로 쓴 날로 기억된다. 우리는 광장을 뒤덮은 인파를 보며 주체적 시민의 힘에 압도되기도 하고, 그 축제적 가능성에 전율하기도 한다. 한국의 도시민에게 광장은 익숙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1960년 4.19 혁명을 통해, 그리고 긴 침묵 후 1987년 6월 민주화 시위를 통해 시민이 주체가 된 광장을 발견했다. 그리고 2002년 6월, 월드컵과 촛불집회를 통해 우리는 광장을 매개로 집단적 정치 참여를 축제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폭발적으로 또 반복적으로 광장이 형성되고 있는 지금의 광화문광장 현상은 광장과 광장 문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논의를 촉발하고 있다. 그러나 광장을 정치적 관점으로만 해석할 경우 광장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용도와 층위를 간과할 우려도 있다. 여러 공공 공간 가운데 광장만큼 일상적 이용과 비일상적 이용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공간이 있을까. 혹은 광장만큼 도시와 장소의 맥락, 정치와 역사적 상징과 관련된 공간이 있을까. 그럼에도 전 세계적으로 광장이 녹음을 드리운 공원과 유사한 오픈스페이스로 변신하는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점차 늘어가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은 물리적 광장의 기능을 대체할 것인가. 우리는 광장에 관한 다양한 시선을 담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다양한 면면 가운데서 우리 시대 광장의 의미와 쓰임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아고라포비아_ 박승진 광화문광장인가, 광화문극장인가?_ 전상인 광장, 군중, 이벤트_ 김세훈 ‘광장의 재발견’에 단 편집자 주_ 남기준 편집부가 추천하는 광장 10선_ 김정은 * 환경과조경 347호(2017년 3월호) 수록본 일부
    • 편집부
  • [광장의 재발견] 아고라포비아
    1. ‘광장공포증agoraphobia’에 대한 정의는 전문 분야마다 조금씩 상이하다. 심리학에서는 사람들이 붐비는 낯선 공공장소처럼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환경에 혼자 놓이게 되는 상황을 두려워하여, 비이성적인 공포를 느끼는 일종의 공황 장애로 설명하는 반면 건축 분야에서는 광장과 같이 개방되고 넓은 장소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는 것을 두려워 하는 증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증상을 유발시키는 계기가 조금씩 다르지만, 실체적인 공간이 공포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런데 설계자들에게도 일종의 광장공포증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의학적, 심리학적 정의에 속하지 않는, 조금 부연한다면 ‘광장설계공포증’이라고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공간을 다루는 조경가 혹은 건축가들에게 간혹 나타나는 불안 증세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설계라는 작업의 끝은 결국 실체적 공간을 구현해 내는 것이다. 도면 위에 그려지는 수많은 선과 기호는 곧바로 물리적 재료로 치환되고 그렇게 공간을 만들어 내거나 점유하게 된다. 공간을 구축하거나 조직하는 행위는 대체로 무엇인가를 더하는 행위인데, 광장은 무엇인가를 담기 위해 비워진 상태를 유지해야(혹은 유지할 수 있어야)하는 공간이므로, 광장을 물리적으로 표현하고 정의하기가 사실 쉽지 않다. 더욱이 설계라는 과정을 통해 ‘광장’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인문적 가치를 구현해야 한다는 지점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이 광장설계공포증의 불안 증세는 최고조에 이른다. ...(중략)... 박승진은 아직까지 조경 설계라는 마당을 떠난 적이 없으며, 이 마당에 맞닿아 살고 있는 다양한 이웃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고 있다. 조경이라는 특징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가치 있고 정교한 작업을 늘 꿈꾸지만 그것도 만만치가 않다. 그래도 읽고, 쓰고, 가르치며, 배우는 일상에 감사하고 있다. 1965년 서울 생으로, 성균관대학교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 디자인을 공부했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조경설계 서안에서의 설계 실무를 거쳐, 2007년 디자인 스튜디오 loci를 열었다. * 환경과조경 347호(2017년 3월호) 수록본 일부
  • [광장의 재발견] 광화문광장인가, 광화문극장인가?
    최근 우리나라에서 광장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광장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을 뿐 아니라 광장이 뉴스 헤드라인의 진원지가 되는 일도 눈에 띄게 늘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는 2016년 연말을 강타한 이른바 최순실 국정농단 비판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관련 촛불시위 탓이다. 건축이나 조경, 도시계획 분야에 종사하는 이른바 전문가들의 영역을 넘어, 광장이 요즘처럼 보통 사람의 의식과 일상에 가까웠던 적이 우리 역사상 또 있었을까? 언제부터 우리 국민이 이처럼 ‘광장형 인간’이 되었을까? 이는 광장이라는 공간이 워낙 한국적 전통과 무관하다는 점에서 더욱 더 놀라운 일이다. 광장은 서구의 역사적 유산으로서, 그것의 기원은 고대 희랍의 아고라agora와 고대 로마의 포럼forum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경우 아크로폴리스가 신전이나 관청을 거점으로 한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였다면, 아고라는 상품 및 화물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장이자 시민들의 사교와 의사소통을 위한 무대였다. 고대 로마의 포럼은 자유인들의 공적 공간으로서, 밀실密室과 대비되었다. 특히 로마 제국은 유럽을 지배하면서 곳곳에 군단 캠프를 설치했는데, 이때 로마로 오가는 길에 교차로를 만들어 포럼을 조성했다. ...(중략)... 전상인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아파트에 미치다: 현대 한국의 주거사회학』(2009), 『옥상의 공간사회학』(공저, 2012), 『편의점 사회학』(2014), 『공간으로 세상 읽기: 집·터·길의 인문사회학』(2017) 등이 있다. * 환경과조경 347호(2017년 3월호) 수록본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