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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평: 광무11년 7월 31일 한성, 모든 일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대체 광화문광장을 생각할 때 밀려오는 난감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장소 부정합성에 따른 무기력증을 동반한 직업병에서 기인한 것인지, 소실된 장소가 주는 망각과 삶의 표피의 간극에서 발생한 상실감을 동반한 우울증인지 가늠할 수 없어 스스로에게 몇 가지 사소한 질문을 놓는다. 대한민국 헌법은 이렇게 시작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헌법이 말로 규정한 대한민국이라는 실체에 대한 정의라면 멀리 청와대와 정부청사,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세종문화회관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작동케 하는 정부와 문화가 있는 공간적 실체다. 광화문광장은 그 중심에 있다. 그것이 설령 조선 시대 오백 년의 역사적 공간과 중첩을 이룬다 하더라도 그렇다. 그러나 지금의 광장 또 앞으로의 광장 어디에 임시 정부의 법통과 4·19의 기억이 있는가. 조선조 오백 년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역사로서 남아 있으면 아니 되는가. 이순신장군상이 가진 불순한 의도를 알면서 굳이 세종대왕을 앉히고, 월대를 넓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 그 모든 것이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면 이해하겠다. 광장은 원래 정치적 공간이다. 그들의 정치야 여전히 밀실에서 이루어지지만 인민2의 정치는 광장에서 이루어진다. 촛불이 그랬고, 명박산성이 그랬고, 6·10이 그랬고, 4·19가 그랬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은 광장이 아니었을 때도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민주주의가 광장에서만 가능하다는 논거는 성립할 수 없고, 민주주의는 어디서고, 어느 때고 작동 가능한 것이 되어야 한다. 다시 얘기하자. 광장은 정치적 공간이나 광장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굳이 광장을 만들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문제가 광장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묻게 된다. 광장 안의 문제라고 하면 광장의 형식과 기술적 해결이 문제가 될 것이고, 광장 밖의 문제라면 광장의 존재 이유와 인민의 합의가 아닐까. 광장 안의 문제는 경관이나 프로그램, 교통 같은 기술적 문제를 떠나서, 기본적으로 광장은 그릇과 같아야 한다. 거기에 정치가 담기든, 축구공이 담기든, 노란 종이배가 담기든, 성조기가 담기든, 광장은 그 모두를 담는다. 내용이 정치냐 문화냐의 차이가 있을 뿐 광장 자체가 어느 한 시대의 정치색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촛불도 마찬가지다. 내용물이 흘러 쏟아지지 않게 그릇을 만들면 될 일이지 그릇에 광어회를 그려 넣거나 감자탕을 그려 넣고 배불리 드시라고 얘기하는 경우는 없다. 그러니 광장은, 그 형태나 형식은 광장 밖의 문제를 공간으로 풀어 수용하나 광장 밖의 문제에 갇혀 넘어서지 못한다. ...(중략) 각주 정리 1. “하지만 1907년 고종이 강제퇴위 당한 직후 일본의 압력으로 설치된 성벽처리위원회에 의해 숭례문 좌우 성벽이 철거되면서 도성은….”, “내각령 제1호, <성벽처리위원회에 관한 안건> 제1조 성벽처리위원회는 내부, 탁지부, 군부 세 대신의 지휘 감독을 받아서 성벽을 헐어 철거하는 일과 그 밖에도 이와 관련한 일체 사업을 처리한다. …제5조 본 영은 반포일부터 시행한다. 광무11년 7월 30일 내각총리대신 훈2등 이완용”, 서울역사박물관 편, 『서울 한양도성』, 서울역사박물관, 2015, p.54 중. 2. 1919년 4월 11일 제정된 임시정부법령 제1호 ‘대한민국 임시헌장’에서 사용한 용어다. * 환경과조경 371호(2019년 3월호) 수록본 일부 이수학은 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이원조경에서 4년 동안 일했다. 프랑스 라빌레뜨 건축학교와 고등사회과학대학원이 공동 개설한 ‘정원·경관·지역’ 데으아(D.E.A.) 학위를 받았고, 2003년부터 아뜰리에나무를 꾸리고 있다. www.ateliernamoo.xyz
  • 비평: 새광장의 주인, 동상의 주인
    최인훈이 소설 ‘광장’을 통해 말하듯 우리의 존재 양태는 밀실만으로, 또는 광장만으로 충족되지는 않는다. 물론 ‘광장’에서 밀실과 광장의 개념은 사회주의, 자유주의와 같은 이념 추구와도 관계가 있겠지만, 굳이 이념적 입장이 아니어도 밀실을 개인주의적 삶, 광장을 사회적 삶과 발언의 비유적 표현이라 볼 때 역시 그러하다. 실은 머리로는 광장을 추구하지만 몸으로는 여전히 밀실을 추구하는 사람, 건물로 둘러싸인 커다란 공터나 폭발적 에너지로 넘쳐나는 군중 사이에 있는 것에 왠지 모를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인 나는,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가 그리는 휴먼 스케일의 도시 내 커뮤니티를 추구하면 했지 그다지 광장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광장을 중히 여기고 그 존재 방식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밀실이든 광장이든 어떤 것이 필요할 때 그것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고, 어느 한쪽의 존재가 없다면 이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광화문광장의 조각상을 둘러싼 논쟁은 조각과 출신인 나에게 관심이 가는 논제일 수밖에 없었다. 광장을 광장이게 하는 요소는 단순하지만은 않다. 그저 물리적으로 너른 공간을 확보한다 해서 그것이 광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광장의 의미는 사람들이 그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완성된다. 광장은 실재적, 물리적, 일상적 공간이면서 상징적 공간이고, 비워진 공간이면서 동시에 활동으로 채워지는 공간, 그리고 이를 위한 적당한 밀도의 물리적 요소가 필요한 공간이다. 같은 광장이라도 어떻게 디자인하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아고라가 되기도, 또는 반대로 제의적 공간이나 전체주의적 권력의 전시장이 되기도 한다. 10년 전 광화문 세종로에 광장이라 불리는 어정쩡한 공간이 생겼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다소 생소하기도 했을뿐더러 그 형태나 내부 밀도를 생성하는 요소들의 배치 역시 광장이라 하기엔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어쩌면 군부 정권의 직선적 힘과 미학을 전시했던 쭉 뻗은 대로와 동상이 있던 공간에 사멸한 광장을 되살린다는 상징적 의미에 주안점을 둔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시민의 활동에 따라 아고라로서 광화문광장의 역할은 점점 더 커졌으며, 그만큼 공간에 대한 새로운 요구도 생겨났다. ...(중략) * 환경과조경 371호(2019년 3월호) 수록본 일부 진나래는 조각과 사회학을 전공했으며, 사회와 예술, 도시, 인류학과 기술·문화 등에서 발생하는 타자성과 윤리의 문제에 흥미를 느낀다. 2012년 ‘일시합의기업 ETC(Enterprise of Temporary Consensus)’를 공동 설립하여 활동한 바 있다. 현재 학업과 작업을 병행하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2017년 2월부터 12월까지 『환경과조경』에 “예술이 도시와 관계하는 열한 가지 방식”을 연재한 바 있다.
  • 비평: 광화문 광장에 대한 논의, 이제 시작이다
    당선작이 현재의 공간에서 많은 진전을 이룬 디자인인 것은 분명하다. “세계 최대의 중앙분리대”라고 조롱받던 공간이 광화문의 월대나 해태상 같은 요소를 재현하면서 광장의 역사성을 회복·강조하고, 차도 한가운데 위치했던 광장이 서쪽 보행 공간과 온전하게 합쳐지면서 시민들이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공간으로 변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질문이 있다. 이 광장이 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느냐다. 그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이 있냐는 점에서 보면, 이번 설계안도 과거의 시도와 거의 다르지 않다. 즉 ‘수도 서울이 자랑할 수 있는 번듯한 광장을 가져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시민들이 왜 그 장소를 필요로 하느냐’는 근본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노력에 앞서버린 느낌이다. 횡단보도나 지하도를 통해서만 갈 수 있는 ‘접근성의 부족’은 광화문광장이 가진 중요한 문제지만,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현재 광화문광장은 그 존재 이유가 규정되지 않은 공간이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이는 시민과 관광객이 광장을 이용하는 모습을 조금만 관찰해봐도 알 수 있다. 대개 횡단보도를 건너 광장에 도착한 후 분수대나 세종대왕상 앞에서, 혹은 경복궁 너머 북악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찍은 후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가장 전형적인 광장 이용 패턴이다. 그 밖에 노조나 관이 하는 성격이 짙은 행사에서 대형 스피커 탑과 무대, 간이 의자들을 광장에 늘어놓는 정도가 현재 광장의 용도다. 즉 대규모 집회가 아니면 일반 시민들은 광장에 머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광화문 앞 세종로의 탄생, 서울 도심의 전통적 구조와 역할에서 찾을 수 있다. 서울 도심에서 사람의 흐름, 상업 공간의 배치는 종로, 청계천, 을지로 등에서 볼 수 있듯 동서의 축으로 이루어진다. 그에 비하면 남북으로 흐르는 도심 도로들은 빈약하고 보행량이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화문 앞 세종로 공간이 대형으로 조성된 이유는 그곳이 바로 왕이 행차하는 권력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즉 경복궁에서 출발하는 권력의 투사가 이루어지는 공간이지, 백성 혹은 시민이 이용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공간이다. 물론 지금 경복궁은 권력의 공간이 아닌 역사적 유물이 되었고, 청와대가 인근에 있다고 해도 광화문 앞 도로를 권력의 과시용으로 사용하는 시절은 지났다. 하지만 세종로는 여전히 정부청사와 미국대사관, 세종문화회관 등 힘 있는 건물들이 들어선 공간일 뿐 시민들이 즐겨 찾는 시설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시민들은 그 자리에 아름다운 광장이 하나 있다고 해서 찾아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굳이 간다고 해도 그곳에 들렀다는 증명사진 한 장 찍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어 자리를 뜨게 되는 것이다. ...(중략) * 환경과조경 371호(2019년 3월호) 수록본 일부 박상현은 사회학과 미술사를 전공하고,현재 미디어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 메디아티(mediati)에서 콘텐츠랩장으로 일하고 있다.「서울신문」등의 매체에 미디어와 테크놀로지,미국 정치에 관한 글을 쓰며『영국에서 사흘 프랑스에서 나흘』,『아날로그의 반격』등을 번역했다.
  • 야간 스퀘어 Yagan Square
    ‘퍼스 시티 링크 프로젝트(Perth City Link Project)’는 퍼스 중심 업무 지구(Perth CBD)와 노스브리지(Northbridge)사이의 부지를 재개발하는 사업이다. 퍼스 중심 업무 지구와 노스브리지는 두 지역 사이를 가로지르는 철로로 인해 오랜 시간 단절되었으며, 1904년에 지어진 호스슈 브리지(horseshoe Bridge)가 유일한 연결로였다. 두 지역을 연결하기 위해 기존의 철로를 지하화하고 약 13.5ha의 부지를 마련했으며, 쇼핑몰, 주거지, 식당, 광장 등을 새롭게 계획했다. ‘야간 스퀘어(Yagan Square)’는 퍼스 시티 링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된 문화 공간이다. 대상지는 동쪽으로 호스슈 브리지와 인접하고, 센트럴 퍼스 역(Central Perth Station)과 퍼스 버스 터미널(Perth Busport) 사이에 있어 유동 인구가 많고 지형 구조가 복잡했다. 또한 이곳은 오래전 영국의 식민지기를 거치면서 고유한 경관과 원주민 문화를 잃기도 했다. 대상지에 얽힌 다양한 맥락을 설계에 반영하고자 조경, 건축,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협업했다. 이로써 역사, 문화, 예술, 음식, 건축, 경관이 한데 어우러진 복합 오픈스페이스가 탄생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71호(2019년 3월호) 수록본 일부 Landscape Architect ASPECT Studios Principal Architect Lyons in Association with Iredale Pedersen Hook Retail Architect Maddison Architects Construction DORIC Group Engineering WSP, Aurecon and Waterform International Artist Jon Tarry Arborist Arbour Carbon Digital Lighting Ramus Illumination Art & Cultural Advisor Malcolm McGregor, Material Thinking and Richard Walley Client Metropolitan Redevelopment Authority Location Perth WA, Australia Cost $73.5 million Area 1.1ha Completion 2018 Photographs Peter Bennetts ASPECT 스튜디오(ASPECT Studios)는 1993년에 설립된 호주의 조경설계사무소로, 애들레이드, 브리즈번, 멜버른, 시드니, 상하이에 사무소를 두고 있다. 폭넓은 분야의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조경, 도시계획, 통합 놀이터 등의 공간 설계부터 최첨단 인터랙티브 디지털 미디어, 환경 그래픽 프로젝트까지 다양한 작업을 수행한다.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지향하는 설계를 추구하며, 클라이언트와 지역 사회 모두를 만족시키는 디자인 해결책을 제공하려 힘쓰고 있다.
    • ASPECT Studios
  • 호흘롭스카야 스퀘어 Khokhlovskaya Square
    ‘마이 스트리트(My Street)’는 모스크바 시의 낙후된 거리를 개선해 보행 친화적으로 만드는 도시 재생 사업이다. 모스크바의 역사적 도심을 둘러싼 순환 대로인 블러바드 링(Boulevard Ring)이 사업 대상으로 선정되면서 도로 포장, 배수, 식재, 편의 시설 등이 대대적으로 개선되었고, 블러바드 링 인근의 유휴 공간도 새롭게 변화했다. 그중 하나인 ‘호흘롭스카야 스퀘어(Khokhlovskaya Square)’는 오랜 시간 방치된 역사적 공간이었지만, 주변의 변화와 발맞추어 역사와 현재가 공존하는 광장으로 거듭났다. 고고학적 유산의 발견 대상지는 블러바드 링의 일부인 포크롭스키 블러바드(Pokrovskiy Boulevard)와 포크롭카 거리(Pokrovka Street)의 교차점 인근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하얀 성벽이라 불리는 벨고로드스카야(Belgorodskaya) 성벽이 있다. 이 역사 자원은 16세기부터 모스크바의 경계를 이뤘지만 18세기 경 도시에 대로가 들어서기 시작하며 해체됐다. 성벽이 사라진 후 대상지는 주차장으로 이용되었는데, 2000년대 초반 쇼핑몰 건설 공사 중 거대한 구덩이에서 성벽의 일부가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공사는 중단되고 부지는 오랜 시간 방치되면서 도심 속 흉물로 전락했다. 우수가 고이고 폐기물이 쌓였으며, 블러바드 링을 산책하는 보행자에게 큰 불편을 안겨주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71호(2019년 3월호) 수록본 일부 Landscape Architect Djao-Rakitine Local Architect Strelka KB Client Strelka KB, City of Moscow Location Pokrovskiy Boulevard, Moscow, Russia Area 3,850m2 Design 2015~2018 Completion 2018 Photographs Olga Alexeyenko, Strelka KB 디자오-라키틴(Djao-Rakitine)은 런던과 파리에 기반을 둔 조경설계사무소로, 제품 디자인부터 마스터플랜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범위의 프로젝트를수행한다. 프로젝트의 규모와 관계없이 부지의 지리적, 생태학적, 문화적, 경제적 특성 등에 주목해 대상지의 잠재력을 최대한 드러내는 설계를 추구한다. 2015년 설립 이후, 런던의 웨스트민스터와 모스크바 시의 공공 프로젝트를 진행해왔으며, 중국, 러시아, 슬로베니아의 민간 프로젝트에도 활발히참여하고 있다.
    • Djao-Rakitine
  • 타피 루즈 Tapis Rouge
    ‘타피 루즈(Tapis Rouge)’는 아이티(Haiti)의 카르푸르-푀유스(Carrefour-Feuilles)에 있는 공공 공간 중 하나로, 라미카(LAMIKA)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미국 적십자사와 글로벌 커뮤니티스(Global Communities)의 지원을 받아 진행되는 라미카는 ‘우리 이웃의 더 나은 삶(The Lavi Nan Miyo Katye Pa)’이라는 뜻의 크리올어(Creole)에서 따온 말로,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고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카르푸르-푀유스는 2010년 아이티를 강타한 지진으로 막대한 피해를 본 지역이다. 산골짜기의 경사지에 세워진 주택들은 전기, 수도, 위생 시설 등 삶을 위한 기본적인 시설도 갖추지 못하고 있고, 공공 기반 시설도 전혀 없는 상태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에는 언덕을 굽이굽이 돌며 이어지는 좁은 골목을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다. 주민들은 대개 비좁은 길모퉁이나 이웃한 주택의 담벼락 사이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교류해야 했다. 대상지는 지진으로 집을 잃은 난민들이 텐트를 치고 잠시 머물며 임시 피난처로 사용한 곳이다. 이 공간을 공동체 지향적이며 공공 공간의 가치와 사회적 관계의 성장을 보여줄 수 있는 기반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를 통해 마련된 안전하고 깨끗한 환경은 지역에서 발생하는 범죄, 폭력, 반사회적 행동을 줄이는 데 기여하게 된다. 또한 설계 프로세스에 지역 주민들을 참여시킴으로써 주민 스스로 삶터를 바꾸는 경험을 하고, 주인 의식, 정체성, 자부심을 느끼게 하고자 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71호(2019년 3월호) 수록본 일부 Architect Emergent Vernacular Architecture(EVA Studio) Lead Architect Andrea Panizzo, Simone Pagani, Jeannie S. Lee, Gianluca Stefani, Anna Calogero, Etienne Pernot du Breuil, Edoardo Paoletti, Samuel Eliodor, Berrousse Exius, Faudia Pierre, Radim Tkadlec, Clement Davy Civil Engineer Sisul Consulting Contractor FICCAS, Ginkgo Landscape, ARCOD Artist Le Centre d’art, Bault Client Global Communities Donor American Red Cross Location Carrefour-Feuilles, Haiti Area 4,300m2 Budget $230,000 Completion 2016 Photographs Gianluca Stefani, Etienne Pernot du Breuil 2014년 설립된 EVA 스튜디오(Emergent Vernacular Architecture Studio)는 런던에 본사, 아이티에 지사를 두고 다양한 연구 및 설계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2017년에는 영국왕립건축가협회(RIBA) 공인 사무소로 인증을 받았다. 다양한 문화권의 재능있는 전문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이티와 볼리비아 등 개발 도상국에서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공공 공간, 기반 시설, 학교, 주택 등을 다루며, 디자인을 통해 사회적 의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지역 예술가나 장인, 정부 기관 등 여러 이해관계자와 함께 지역 풀뿌리 사업을 수행하는 데 능숙하다.
    • EVA Studio
  • [이미지 스케이프] 수평에 대하여
    풍경 사진을 찍을 때면 다른 대상보다 좀 더 신경 쓰는 것이 있습니다. 수평을 맞춰 구도를 잡는 일이지요. 예를 들면 바다, 호수, 길, 건물, 구조물 등으로 만들어지는 선을 정확하게 수평으로 맞춘다는 뜻입니다. 안정감 있는 사진을 얻기 위해서는 가급적 수평을 맞추는 것이 안전(?)합니다. 요즘 카메라에는 뷰파인더에 보조선이 보이거나 수평계가 내장된 경우가 있어서 촬영할 때 수평을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막상 모니터로 확인해 보면 수평이 안 맞는 경우가 상당히 많죠. 후보정을 통해 수평을 맞출 수는 있지만, 꽤나 성가신 작업입니다. 그래서 찍을 때 최대한 수평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건축 사진을 찍는 분들이 수직선에 강박을 갖는 것처럼 조경 전공자들은 수평선에 꽤 많은 신경을 쓰는 것 같습니다. “내가 찍은 사진 중에 수평 구도가 강조된 사진이 얼마나 될까”, “나중에 이런 사진들을 옆으로 쭉 늘여 붙여보면 재미있겠다.” 그래서 이번 호에는 수평선이 강조된 사진들을 모아 편집해 보았습니다. 이미 ‘이미지 스케이프’에 소개한사진 중에도 꽤 많더군요. ...(중략) * 환경과조경 371호(2019년 3월호) 수록본 일부 주신하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거쳐 같은 학과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토문엔지니어링, 가원조경, 도시건축 소도에서 조경과 도시계획 실무를 담당했고,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원예생명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경 계획과 경관 계획에 학문적 관심을 두고 있다.
  • [당신의 사물들] 노트북과 데이터
    학부 졸업 직전, 데이터 관리에 대한 특강을 들었다. 강의의 핵심은 좋은 자료를 보유하고 있더라도 정리해두지 않으면 추후 활용할 확률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이후 나름 데이터 관리에 신경을 썼지만, 그것에 일정 시간을 투자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대학원 진학을 위해 노트북이 필요했고, 유럽 사람들은 모두 맥북을 쓴다는 뜬소문을 따라 충동적으로 맥북을 구입했다. 2D와 3D 소프트웨어를 함께 써야 하는 조경 설계의 특성상 맥북은 윈도즈 운영 체제 기반의 컴퓨터보다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맥 운영 체제가 동기화 기능으로 기본 응용 프로그램을 활용해 데이터를 관리하기에 훨씬 쉽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 ‘서치’(2017)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 남겨진 데이터를 통해 실종된 딸의 흔적을 추적하는 내용이다. 현대 사회에서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신선한 구성으로 보여주었는데, 특히 맥 운영 체제에 익숙한 사람들은 영화의 화면 구성이 더욱 반가웠을 것이다. 영화를 보며 현대인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데이터를 웹에서 만들어 내고, 이렇게 생성된 정보는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끊임없이 인터넷과 동기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모인 데이터 그룹은 한 사람 또는 어떤 사물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략) * 환경과조경 371호(2019년 3월호) 수록본 일부 윤일빈은 서울시립대학교와 에식스 대학교(University of Essex)에서 조경을 공부했으며, 디자인 스튜디오 loci, 길레스피에스(Gillespies)에서 실무 경력을 쌓았다. 한국, 영국, 사우디아라비아, 두바이, 중국, 홍콩 등 다양한 나라의 프로젝트를 경험했으며, 2018년 11월부터 삼성물산 조경사업팀 디자인그룹에 근무 중이다.
  • [그리는, 조경] 측정하는 드로잉
    조경 드로잉은 언제부터 그려졌을까. 먼저 조경 드로잉의 범위를 정할 필요가 있다. 정원, 공원, 자연을 그린 모든 그림을 조경 드로잉이라고 한다면 화가가 그린 풍경화도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한 이미지는 존재하는 경관을 모사한 그림일 뿐 조경 드로잉은 아니다. 조경 드로잉은 설계가가 경관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생산한 경관과 관련한 이미지를 말한다. 초기 아이디어 구상 과정에서 빠른 속도로 그리는 스케치, 대상지를 분석하면서 생산하는 다이어그램, 공모전 출품을 위해 만든 컴퓨터 이미지, 공사를 위한 시공 도면, 조성 후에 자신의 작품을 다시 그린 이미지 등 설계 과정에서 만들어진 모든 시각화 작업을 조경 드로잉으로 볼 수 있다. 그럼 언제부터 조경가가 설계 과정에서 이미지를 생산하기 시작했을까. 조경이라는 전문 분야가 만들어진 것이 19세기 중반 이후이므로, 그 이전의 정원이나 공원을 설계한 전문가를 엄격히 말해 조경가라 부를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지난 연재『( 환경과조경』 2019년 2월호, “나무를 그리는 방법, 드로잉의 혼성화”, pp.98~103 참조)에서 소개한 바 있는 이집트 정원 그림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가 조경이라고 부르는 작업의 역사는 인류 문명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다만 이집트 정원 그림은 설계가가 그린 것인지 그 여부를 알 수 없기에 조경 드로잉이라 할 수는 없다. 조경 연구자들은 조경 드로잉, 즉 조경가가 경관 설계 과정에서 그린 드로잉이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고 추정한다. 이때의 드로잉은 당시 이탈리아 정원의 질서 정연함을 시각화하기 적합한 평면도 형식으로 그려졌다. 그것은 설계가의 머릿속에 디자인된 경관을 자로 측정해 표현한, 조경 드로잉의 두 가지 특성인 과학적 도구성과 예술적 상상성 중에서 전자의 특성이 강조된 시각화 방식이었다. 메디치 정원 드로잉 16세기 중엽에 조성된 이탈리아 메디치Medici 정원 중 하나인 빌라 디 카스텔로(Villa di Castello)의 정원 상세 평면도는 현존하는 최초의 정원 드로잉 중 하나로 여겨진다(그림 1). 이 드로잉은 정원을 설계한 니콜로 페리콜리(Niccolo Pericoli)(1500~1550), 트리볼로(Tribolo)라고도 불린 이탈리아 조각가이자 화가가 그렸다고 추정된다.1 설계가의 머릿속에 있는 정원을 그대로 평면도로 옮긴 듯한 이 드로잉에는 생울타리의 외곽선이 정교하게 직선으로 그려져 있다. 정원이 조성될 대상지는 평면에서 구획되고 그 내부에 식재가 가지런히 채워지게 된다. 빌라 카스텔로는 현재 남아 있는 이탈리아 정원 중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1404~1472)의 조형 질서를 가장 충실하게 구현한다. 그러한 조형 질서는 화가 주스토 우텐스(Giusto Utens)(?~1609)의 그림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그림 2). 남북 방향의 직선 축이 화폭 중앙을 지배하고 축을 따라 건축물과 정원이 좌우 대칭으로 펼쳐지며, 격자형 길의 군데군데 분수대, 퍼걸러, 조각상 등이 놓여 있다.2...(중략) * 환경과조경 371호(2019년 3월호) 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Raffaella Fabiani Giannetto, Medici Gardens: From Making to Design,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08, pp.257~258. 2. 빌라 카스텔로 정원 설계의 전반적 설명은 다음을 참조할 것. D. R. Edward Wright, “Some Medici Gardens of the Florentine Renaissance: An Essay in Post-Aesthetic Interpretation”, in The Italian Garden: Art, Design and Culture, John Dixon Hunt, ed.,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pp.34~59. 이명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경 설계와 계획, 역사와 이론, 비평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있다. 박사 논문에서는 조경 드로잉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현대 조경 설계 실무와 교육에서 디지털 드로잉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했고, 현재는 조경 설계에서 산업 폐허의 활용 양상, 조경 아카이브 구축, 20세기 전후의 한국 조경사를 깊숙이 들여다보고 있다. ‘조경비평 봄’과 ‘조경연구회 보라(BoLA)’의 회원으로도 활동한다.
  • [도면으로 말하기, 디테일로 짓기] 컨벤셔널 콜라주
    알 수는 없지만 가정은 할 수 있다. 램 콜하스(Rem Koolhaas)는 디자인의 명료성을 잃지 않기 위해 다이어그램 단계에서 설계를 종료했다. 다이애나 발모리(Diana Balmori)는 회화적 설계에 우아함을 불어넣고자 자신이 19세기 화가가 되는 자기 최면을 걸었다. 디제이 섀도(DJ Shadow)는 턴테이블 플레이어만의 독창성을 만들기 위해 아날로그 악기를 완전히 배제하고 샘플링만으로 음악을 만들었다. 이런 자조적인 재해석의 사념들이 해 질 무렵의 그림자보다 길어지면, 작가는 창작을 위한 배경으로 스스로 제한된 설정을 구축한다고 결론 낼 수 있다. 정의할 수 없지만 가정은 할 수 있다. 1. 콘셉트, 2. 프로그램과 레이아웃, 3. 디자인, 4. 디테일의 단계가 지난 세기 동안 북미와 유럽의 건축계가 합의해 온 가장 효율적인 불패의 설계 프로세스라고 한다면, 이 같은 전형적 워크 프로세스는 비전형적 배경 설정과 대립한다. 음악이라면 싱커페이션(당김음)과 스케일(음계)의 관계에 해당된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상충되는 두 방식을 자신만의 해석을 통해 적절히 조합하고 재구성하여 새로운 악보를 준비해야 한다. 새로운 세대를 위한 새로운 설계의 전주곡으로서. 유니버설 가든(Universal Garden)은 우주적 이미지 표현과 유니버설 디자인 시스템의 구축을 목표로 진행되는 프로젝트다. 우주의 이미지를 직설적으로 표현하지는 않되 보편적으로 감응이 가능한, 언어적으로 모순되어 보이지만 디자인적으로는 상응하는 복합적 이미지를 구축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콘셉트’ 단계를 핵심 프로세스인 동시에 제한 요소로 설정하고, 사이트의 최소한의 물리적 맥락만을 반영한 뒤 우주적 일러스트 아트워크를 그리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리고는 일러스트 단계에서 설계를 종료시켜버렸다. ...(중략) * 환경과조경 371호(2019년 3월호) 수록본 일부 나성진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 GSD에서 조경을 전공했다. 졸업 후 한국의 디자인엘, 뉴욕의 발모리어소시에이츠(Balmori Associates)와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CFO)에서 실무 경험을 쌓고, West 8 로테르담과 서울 지사를 오가며 용산공원 기본 설계를 수행했다. 한국, 미국, 유럽에서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귀국 후 파트너들과 함께 얼라이브어스(ALIVEUS)라는 대안적 그룹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