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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원 탐독] 자연과 함께 디자인하기
    인간 대 식물 먹을 수 있는 열매를 맺는 과실수는 인간과 가장 오래, 깊게 인연을 맺고 사는 지구의 생명체다. 특히 사과나무는 그리스·로마의 신화는 물론이고 여러 종교의 성경에도 빠짐없이 등장할 정도로 인류의 문명과 인연이 깊다. 현재 사과는 재배종이 7천여 개에 이를 정도로 엄청나다. 그런데 여러 ‘품종’으로 불리는 이 다양한 사과는 인간에 의해 변형된 식물로, 자연 상태에서 사는 자생종과는 다르다. 한때 미국의 워싱턴과 뉴욕은 최대 사과 재배지였다. 그 흔적이 아직 가로수에도 남아 있지만, 도시 뉴욕의 상징이 사과라는 것도 이를 잘 증명한다. 지금도 사과는 좀 더 크고 단맛이 강화되도록 끊임없이 재배종이 만들어지는 중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원래 자연에서 생존했던 야생의 사과는 잊혀졌다. 지나친 유전적 변형이 일어난 품종 사과나무가 급속히 자생력을 잃어가고 단맛의 증폭이 다른 영양분의 결핍을 일으키는 등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품종 사과의 어머니격인 야생 사과는 카자흐스탄 인근의 중앙 유럽 산악 지대에서 자라는 ‘말루스 푸밀라(Malus pumila)’로 최근 밝혀졌다. 물론 이 야생 사과의 특징은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사과 품종들과는 매우 다르다. 열매도 작을뿐더러 그 맛도 시고 떫어서 지금의 사과 맛이 아니다. 먹기에 적당하지 않지만 이 야생 사과는 재배종 사과의 유전적 결함을 치료하고 사과 고유의 특징을 다시 복원하는 데 꼭 있어야 할, 생물학적으로 귀한 식물이다. 사과나무뿐만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로 분류되는 인류와 식물은 그야말로 동고동락해 왔다. 애증과 공생의 고리가 아주 깊고 복잡하다. 인간은 식물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기에 식물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지만, 식물 입장에서도 인간이 아니었다면 지구 전체에 지금과 같이 번식하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인간만큼 식물을 파괴하는 생명체도 없지만 인간만큼 식물을 키우기 위해 애쓰는 생명체도 없는, 서로에게 참 묘하고 복잡한 공생 관계다. 사과나무에 얽힌 자생종과 재배종의 문제가 최근에는 정원에서도 고스란히 일어나고 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61호(2018년 5월호) 수록본 일부 오경아는 방송 작가 출신으로 현재는 가든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영국 에식스 대학교(The University of Essex) 리틀 칼리지(Writtle College)에서 조경학 석사를 마쳤고, 박사 과정 중에 있다. 『시골의 발견』, 『가든 디자인의 발견』, 『정원의 발견』, 『낯선 정원에서 엄마를 만나다』 외 다수의 저서가 있고, 현재 신문, 잡지 등의 매체에 정원을 인문학적으로 바라보는 칼럼을 집필 중이다.
  • [시네마 스케이프] 쓰리 빌보드 강렬하고 품위 있는 추모 공간
    전투복을 입은 주인공과 “죽은 딸을 위해 세상에 맞서는 엄마”라는 카피를 보고, 폭력과 차별에 맞서 장쾌하게 복수하는 영화를 상상했다. ‘쓰리 빌보드’는 우리가 그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유형의 영화다. 절대적으로 나쁜 사람도 없고, 절대적인 영웅도 없다. 주인공인 엄마는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지 않다. 누구보다 싸움도, 욕도 더 잘한다.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행동할 뿐이다. 등장인물들의 행동은 매번 의도와 다른 결과를 낳고, 관객의 예상도 번번이 빗나간다. 폭력과 분노가 충돌해서 빚어낸 결과로 남는 것은 고요와 숭고함이다. 누구하나 우아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없는데 희한하게도 품격이 느껴진다. 한편의 블랙 코미디가 끝날 때쯤 기어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 뜨거움의 정체가 궁금하다. 인종 차별, 젠더, 가족주의, 그 어떤 장르로도 묶이기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영화다. 주인공의 추모 공간과 그 추모 방식이 낳은 영향에 주목해 보자. 영화의 첫 장면, 안개 낀 한적한 도로변 들판에 서 있는 세 개의 낡은 대형 광고판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것이 앞으로 초래할 사건과는 달리 아름답고 시적인 풍경이다. 여기저기 찢겨진 채 방치된 광고판은 1980년대 이후로 그 기능이 멎었다.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맨드 분)는 광고 회사를 찾아가 계약금을 걸고 광고를 의뢰한다. “내 딸이 죽었다”, “그런데 아직도 못 잡았다고?”, “어떻게 된 건가? 웰러비 서장”, 몇 개의 단어로 광고판을 차례로 채운다. 경찰서장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공권력의 무능함을 지적하는 이 대담한 광고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방송에도 보도된다. ...(중략)... * 환경과조경 361호(2018년 5월호) 수록본 일부 서영애는 조경을 전공했고,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모처럼 좋은 영화가 많은 계절이다. 어제 본 영화를 오늘 본 영화가 덮어쓰고, 오늘 본 영화는 내일 또 어떤 영화로 묻힐지 모르겠다. ‘쓰리 빌보드’는 이달에 오늘까지 본 영화 중 최고다. 잠시 멈춰서 생각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 [에디토리얼] 행복한 조경가
    주말의 소중한 늦잠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6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한 손에 감기는 크기와 가벼운 무게, 정교하면서도 감각적인 누드 제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표지, 자유분방함과 치밀함의 경계를 달리는 편집 디자인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서로 엮여 독자의 숨 쉴 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첫 장을 열면 단숨에 읽어 내릴 수밖에 없는 따끈따끈한 신간 『도큐멘테이션(Documentation)』, 이 책은 오랜 수련과 실무를 거친 후 자신의 설계사무소 디자인 스튜디오 로사이(design studio loci)로 독립해 10년을 채우고 1년을 더 보낸 박승진 소장의 작업 기록이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아모레퍼시픽 사옥에 이르는 그간의 역작을 모은 작품집이 아니다. 그동안 발표해 온 주옥같은 에세이와 논평을 모은 책도 아니다. “일과 일상이 자연스럽게 교차”한 10년의 기록을 펴내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작업은 늘 조심스럽고 흥미진진하다. 모든 작업은 결국 땅 위에 구축되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좌뇌와 우뇌, 양팔과 양손 그리고 두 다리의 끊임없는 구동을 요구한다. 긴장과 이완의 지속적인 반복, 불안과 안도의 이상한 동거, 진척과 되새김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역행은 설계 작업자의 숙명이다. … 찢어진 메모지에, 혹은 값비싼 몰스킨에, 옐로페이퍼의 구겨진 한 모서리에도 그 흔적은 남는다. 이제는 휴대장치가 만들어내는 고해상도 이미지까지 가세하므로 기록들은 차고 넘친다.” 그는 기록의 “정리라는 행위는 가끔 무의미한 과장과 무책임한 소거를 동반하기 때문”에 특별한 구분과 정리 없이 10년의 일과 일상을 뒤섞어 묶었다고 변명하지만, 이 멋스러운 책에서 독자는 오히려 일과 일상의 행복한 만남을, 일과 일상을 가로지르는 섬세한 삶을 마주하게 된다. 책을 덮으며 마지막 장에 침대 맡 연필을 “압인기”(449, 453쪽) 삼아 꾹꾹 눌러 이렇게 적었다. 행복한 조경가. 일과 일상의 즐거운 동거는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이 일치할 때 가능하다. 이 둘이 일치하는 삶만큼 부러운 게 또 있을까. 좋아하는 일을 잘하는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행복 연구로 이름난 최인철 교수(서울대학교 심리학과)는 한 칼럼에서 최근의 연구를 소개하며 이런 질문을 던진다.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이 일치하지 않는 실존의 비극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까? 그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회의, 대화, 운동과 같은 일상적 경험을 하고 있는 그 순간순간의 즐거움과 의미는 그 일을 잘한다고 느끼는 정도보다 그 일을 좋아한다고 느끼는 정도에 의해서 훨씬 크게 좌우”된다고 한다. 일상에서 좀 더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잘하는 일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에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도큐멘테이션』에서 볼 수 있는 일과 일상의 행복한 만남, 그 열쇠는 ‘좋아하는 일 하기’가 아닐까. 주변의 여러 조경가들을 만나 이야기 나누다보면 비단 박승진 소장뿐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서 행복감을 발견할 수 있다. 아마도 좋아하는 일을 하기 때문일 테다. 누군가 지금 조경이라는 두 글자를 앞에 두고 진로를 고민하고 있다면, 조경 일의 전망과 연봉, 조경의 가치와 조경가의 지위 같은 잣대를 잠시 뒤로 물리고 우선 조경이 내가 좋아하는 일인지 스스로 묻고 답해 보기를 권한다. 최인철 교수의 조언을 옮긴다.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수 없다는 ‘어른스러운’ 조언이 들려올 때마다, 늘 잘하는 일만 하면서 살 수도 없다는 자기만의 주문을 외워야 한다. 그것이 자기다움의 삶과 행복한 삶을 사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이 달에는 호주를 대표하는 조경설계사무소 TCL(Taylor Cullity Lethlean)의 작업, 에세이, 인터뷰에 거의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했다. 독일의 토포텍 1(Topotek 1)(2015년 2월호), 프랑스의 아장스 테르(Agence Ter)(2016년 11월호) 이후 세 번째 조경가/설계사무소 특집인 셈이다. 대규모 정원과 수목원부터, 습지, 도시 광장, 부두와 항만, 탈산업 경관, 워터프런트, 공항에 이르는 TCL의 다양한 설계 작업에서 조경, 건축, 도시설계를 가로지르는 다층의 지혜와 다각의 디자인 문법을 만날 수 있다. 우리의 시선을 머물게 하는 TCL 작품의 더 큰 특징은 ‘호주 경관의 재해석’이라는 설계 태도일 것이다.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과 다른 호주 고유의 지질, 지형, 기후, 식생, 도시 문화를 재해석하는 시도가 프로젝트의 성격과 스케일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된다. 그들의 ‘호주성’ 재현 해법은 ‘한국성’의 그것과 무엇이 같고 또 다를까. 김정은 편집팀장과 김모아 기자는 TCL의 작품 사진, 텍스트, 이미지 패키지를 지난 두 달간 검토하고 편집하면서 그들의 작품뿐 아니라 설계 방식과 작업 환경에서 어떤 “따뜻함”과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박승진 소장의 『도큐멘테이션』에 담긴 일과 일상의 행복한 만남과 비슷한 어떤 것이 아니었을까.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의 역동적 이중주. 본문의 인터뷰에서 TCL은 프로젝트 선택 기준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우리가 전문가로서 관심 있는 분야인지, 우리를 흥분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는지”가 잣대다. 개인적으로는 오클랜드 워터프런트를 다룬 지면에서 묘한 행복감을 느꼈다. 몇 해 전 IFLA 학술대회에 참가했을 때 잠시 틈을 내 산책했던 곳이다. 낯선 도시의 청명한 오후 풍경이 지면에서 다시 살아난다. 이번 TCL 특집 기획과 구성에는 이홍인 호주 리포터의 공이 아주 크다. 국내에서 조경 교육을 받고 호주에서 활동해 온 이채로운 경력의 조경가인 그는, 지난 몇 달간 TCL과 본지를 매개하며 열정적으로 기획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네 편의 인터뷰 원고까지 맡았다. 깊이 감사드린다. 2017년 1월호부터 연재된 재미 조경가 안동혁(JCFO)의 ‘가까이 보기, 다시 읽기’가 이번 호로 막을 내린다. 16회에 걸친 긴 연재의 수고,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지면이 넘쳐 ‘그들이 설계하는 법’과 최이규 교수의 연재 ‘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을 다음 달로 넘긴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가까이 보기, 다시 읽기] 세대에서 세대로, 공원의 성숙
    자연스럽고 이상적인 경관의 공원 산책로다. 수풀과 나무가 빽빽이 우거지고 완만한 구릉을 따라 커다란 암석이 솟아올라 있다. 아스팔트 포장과 콘크리트 경계석, 금속 펜스와 가로등과 같은 인공물이 아니었다면 숲 속 경관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의도적으로 주변 도시와 동떨어진 자연을 부지에 도입하려고 했던 ‘조경가’1의 설계 의도에 부합한다. 모암층인 맨해튼 편암(Manhattan schist)이 지면에 노출되었는데, 이 암석을 뚫고 자라난 식생이 자연스러움을 더한다. 공간의 이상적 이미지인 ‘야생’을 ‘공원’으로 만들어주는 인공물에 눈을 돌려 보자. 공원의 주요 산책로와 도로는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다. 관습적인 아스팔트 포장과 같이 포장 단면의 중앙을 약간 높게 들어 올리고 양쪽 가장자리를 낮게 계획해 길 양옆으로 빗물이 흐르도록 계획했다. 배수로 역할을 하는 아스팔트 포장의 양쪽 가장자리의 경계에는 약 5cm 높게 콘크리트로 경계석을 두어 빗물이나 이물질이 플랜터 안팎으로 섞이는 것을 방지했다. 아스팔트는 흔히 자동차 도로에 사용하는 재료로 여겨 보행로에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는 경향이 있지만, 내구성이 좋고 특히 열에 강한 장점이 있다. 이 때문에 보행로를 콘크리트로 포장할 때 필요한 균열 조절 줄눈(control joint) 없이 매끈한 포장면을 제공할 수 있는 재료다. 다만 오랜 시간 풍화와 마모에 따라 작은 균열이나 재료의 벗겨짐 현상이 생겨 포장 재료를 부분적으로 때우는 유지ㆍ관리 작업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공원의 주요 보행로와 광장에서는 아스팔트가 아닌 특별한 재료로 포장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사진의 사례에서는 육각형 모듈의 콘크리트 블록으로 보행로를 포장했는데, 이는 이 공원이 위치한 뉴욕 시의 광장이나 공원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포장 재료다. 정형화된 모듈로 제조, 설치, 유지ㆍ보수를 비교적 간단히 할 수 있는 한편, 블록끼리 단단하게 맞물리는 구조로 포장면의 내구성이 높기 때문이다. 공원의 일부 구간에는 이용자와 서포터가 이 육각형 포장석을 기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기부자의 이름이나 기념하고 싶은 문구를 새긴 육각형 모듈의 화강석 포장석을 콘크리트 블록 사이사이에 끼워 넣는 방식이다. 1980년에 설립된 민간단체인 공원 관리위원회는 이와 같은 기부를 통해 공원 유지·관리 예산의 75%를 확보하고 있다고 한다. ...(중략)... 안동혁은 뉴욕에 위치한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에서 활동하고 있는 펜실베이니아 주 등록 미국 공인 조경가(RLA)다.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현재 회사에 8년째 근무하면서 Philadelphia Race Street Pier, 부산시민공원, London Queen Elizabeth Olympic Park, Hong Kong Tsim Sha Tsui Waterfront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다. * 환경과조경 360호(2018년 4월호) 수록본 일부
  • [명사의 정원 생활] 안평대군 이용의 정원 심리적 거루去累를 위한 방편, 혹은 순연하고 바른 성정을 위한 환경 조건
    안평대군, 조선 최고의 문예가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1418~1453)은 성군 세종의 셋째 아들이다. 시, 그림, 글씨에 모두 능해 삼절(三絶)로 불리기도 한 그는 서예에 특별히 뛰어나 중국에까지 명필가로 이름을 날렸다. 시문뿐 아니라 그림 그리기와 거문고 연주에도 일가를 이루었을 정도로 예술가적 면모를 두루 겸비한 인물이다. 탁월한 예술적 안목을 바탕으로 중국 역대 왕조와 일본 그리고 조선의 이름난 글씨와 그림 수백 점을 수집하여 조선 초기 문화 예술의 최고 후원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호방하고 활달한 성품을 지닌 그는 집현전 학자를 중심으로 한 당대의 문인과 예술가는 물론 종교인, 중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과 폭넓게 교류하면서 문예적 소양을 자유분방하게 발휘했다. 타고난 재능과 총명함으로 학문과 예술을 사랑했고, 선한 심성에 덕과 배포가 있어 뭇사람들이 믿고 따랐다. 세종을 도와 왕실 주도의 시회를 위시한 문학 모임과 연회, 서적 편찬, 경전 번역, 한글 창제 등에 적극 참여한 안평대군은 조선 초기의 문예 부흥을 이끈 핵심 주역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친형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36세 젊은 나이에 죽임을 당했다. 활짝 개화하기 시작하던 조선의 문예 활동도 함께 시들었고, 그와 관련된 흔적들도 철저히 파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정원가로 안평대군 읽기 안평대군은 왕자로서, 그리고 대군으로서 화려하고 풍족한 삶을 살았지만 친형에게 죽임을 당한 비극적 삶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36년이라는 길지 않은 생애였지만 정원 생활과 관련해 그가 남긴 족적은 뚜렷하다. 그가 직접 조영하거나 일정 기간 이상 살며 즐긴 정원은 다음과 같다. 수성궁: 안평대군은 13세에 혼인한 직후 궁궐에서 나와 인왕산 자락의 수성궁(水聲宮)에서 살기 시작했다. 인왕산 계곡 수성동은 그윽한 골짜기 안에 기암괴석이 여기저기 솟아나 있는 가운데 암반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소리로 유명한 한양의 경승지였다. 그는 있는 자연에 다채로운 정원 요소를 갖추어 놓고서 안팎의 경관과 경물을 골라 48경이라 이름 짓고 그림을 그려 즐겼다. 그림을 보면서 먼저 자신이 제화시(題畵詩)를 짓고 노래했다. 그런 후에 최항, 신숙주, 성삼문, 이개, 김수온, 이현로, 서거정, 이승윤, 임원준 등 당대 최고 문인 학자들을 초대해 48경을 구경시키고 그 감흥을 시로 짓도록 요청해 받았다. 당시의 시를 모은 ‘비해당48영(匪懈堂四十八詠)’에는 온갖 경물을 다채롭게 갖춘 수성궁 정원의 호사로운 면모가 잘 묘사되어 있다. 시에 언급된 36종 식물 중에는 귤, 치자, 석류, 파초 등의 남부 수종은 물론 일본철쭉까지 있어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식물 수집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원은 다양하고 특색 있는 유형의 건축물과 소정원 그리고 수공간이 계류와 지형을 따라 분화되어 있었다. 왕족의 부와 권력을 바탕으로 안평대군의 관심과 취향이 한껏 구현된 고급 정원인 셈이다. ...(중략)... *환경과조경360호(2018년 4월호)수록본 일부 성종상은 서울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한 이래 줄곧 조경가의 길을 걷고 있으며, 지금은 대학에서 조경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선유도공원 계획 및 설계, 용산공원 기본구상,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장 마스터플랜, 천리포수목원 입구정원 설계 등이 있다. 최근에는 한국 풍토 속 장소와 풍경의 의미를 읽어내고 그것을 토대로 풍요롭고 건강한 삶을 위한 조건으로서 조경 공간이 지닌 가능성과 효용을 실현하려 애쓰고 있다.
  • [이미지 스케이프] 다르게 보기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는 세상은 실제 세상과 조금 다른 느낌입니다. 프레임으로 주변이 모두 가려져 제한된 대상만 보게 되어 생기는 현상이겠지요. 아주 잘 만든 가상 현실을 보는 느낌이랄까요. 아니면 여행객이 되어 우리가 사는 모습을 구경한다는 착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한발 물러서서 세상을 보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거창하게 얘기하자면, 세계를 객체화된 대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작년 늦가을이었습니다. 회의가 있어 안산시에 갔다가 경기도미술관에 잠깐 들렀습니다. 미술관에 도착하니 막 문을 닫을 시간이었습니다. 겨우 입장을 해서 작품들을 서둘러 둘러봤습니다. 좀 일찍 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생각하며 출구 쪽으로 향하는 바로 그때, 창밖으로 아주 멋진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하늘을 품은 얕은 수반과 세로로 줄긋기를 한 듯한 검은 기둥들의 실루엣, 거기에 이런 풍경을 배경으로 걸어가는 사람들까지. 마치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 페이지를 펼칠 때 배경 음악이 나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얼른 카메라를 꺼내 들었습니다. 뭔가 새로운 느낌이 들 때마다 자동으로 나오는 반응이지요. 그리고는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저쪽 끝에서 어떤 분이 걸어오시네요. 조형물과 겹칠 때를 기다렸다 셔터를 살짝 눌렀습니다. 이번 사진은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사진을 찍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또 사람마다 그 이유가 조금씩 다를 겁니다. 그럼 내가 사진을 찍는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기록이 목적이지만, 다른 이유를 찾자면 사진을 통해 세상을 좀 다르게 보고 싶어서인 것 같습니다. 익숙한 모습을 다르게 볼 때가 참 흥미롭거든요. 세상을 뭔가 다르게 찍는 게 재미있습니다. 뷰파인더로 보는 세상, 그래서 즐겁습니다. 주신하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거쳐, 동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토문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 도시건축 소도 등에서 조경과 도시계획 분야의 실무를 담당한 바 있으며, 신구대학 환경조경과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원예생명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조경 계획 및 경관 계획 분야에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
  • [시네마 스케이프]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갇힌 물, 흐르는 물, 춤추는 물
    1960년대의 미국은 백인 남성이 주도하는 시대였다. 천재 여성 수학자의 실화를 다룬 ‘히든 피겨스’는 차별과 편견을 딛고 성공한 당대 흑인 여성들을 그린다. 흑인 전용 화장실에 가기 위해 구두를 신고 먼 거리를 뛰어다니는 그들의 상황이 애처롭다. 식당이나 버스에서도 좌석을 분리한 인종 차별의 시대였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시대 배경도 1960년대다. 장애를 가진 여성, 흑인 여성, 노인 게이, 소련 스파이, 심지어 괴생물체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말 못하는 여자 사람과 반은 사람이고 반은 물고기인 생물체의 사랑을 그린 19금 영화다.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서사지만 영화를 보는 중에 나도 모르게 왜 눈에서 물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주인공 엘라이자(샐리 호킨스 분)는 강에서 버려진 채 발견되어 고아원에서 자랐다. 말을 알아듣지만 하지는 못한다. 그녀의 직업은 비밀 우주 연구소의 청소부다. 밤 아홉 시에 일어나 자정에 출근해서 동틀 무렵 퇴근한다. 허름한 극장 건물 위층에서 혼자 살지만 외롭지는 않다. 옆방에 사는 화가인 노인 자일스(리차드 젠킨스 분)와 텔레비전을 함께 보며 식사를 하고 고민을 들어주는 일상을 공유한다. 그는 다니던 회사에서 쫓겨났고 단골 파이 가게의 남자 점원을 짝사랑한다. 따뜻한 심성의 직장 동료 젤다(옥타비아 스펜서 분)는 가부장적인 남편 험담으로 시작해 일하는 내내 말하기를 쉬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와 가정 모두에서 핍박 받는 소수자다. ...(중략)... * 환경과조경 360호(2018년 4월호) 수록본 일부 서영애는 조경을 전공했고,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국가 권력과 정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워싱턴 포스트」 여성 발행인의 내면을 다룬 영화 ‘더 포스트’는 울림을 준다. 남자들에 둘러싸여 힘든 결단을 해야 하는 그순간, 메릴 스트립의 떨리는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 [에디토리얼] 절제와 진정성
    새봄을 알리는 화창한 표지로 시작하는 이번 3월호에는 스웨덴을 대표하는 조경가이자 유럽 조경계의 지성으로 이름난 토르비에른 안데르손Thorbjörn Andersson의 근작 세 점과 에세이 한 편을 싣는다. 스웨덴과 미국에서 미술사, 건축, 조경을 전공하고 1980년대 초부터 조경가로 활동해 온 안데르손은 지난 30여 년간 조경 설계를 통해 도시 공공 공간의 사회적 역할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펼쳐왔다. 특히 그의 작업에는 북유럽 디자인 특유의 검박하고 섬세한 디테일, 단순과 절제의 미덕, 실용적 기능성이 도시 공간을 통해 구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케아IKEA와 에이치앤엠H&M의 고향 스웨덴만큼 자연 환경이 디자인 문화에 영향을 미친 나라는 없을 것이다. 스웨덴의 넓지만 척박한 토지, 제약이 많은 기후와 지형은 사회민주주의 정신과 결합되어 패션과 가구, 음악과 영화, 제품 디자인과 건축은 물론 도시설계와 조경에서도 “더 아름다운 실용”을 지향하는 “굿 디자인”의 전통을 낳았다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전 세계적으로 식지 않는 북유럽 디자인 열풍의 핵심은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군더더기 없는 디테일,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자연스러움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 같은 이런 가치를 일상에서 실천한 문화적 토양이 곧 스웨덴 디자인의 열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토르비에른 안데르손의 조경 작업은 스웨덴 디자인 정신의 도시 공간적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이번 호 지면에 소개하는 그의 캠퍼스, 묘지공원, 기업 정원은 서로 다른 성격의 도시 공간이지만, 우리는 그 차이를 가로지르는 절제와 실용의 미학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안데르손은 『환경과조경』이 많은 지면을 할애해 특집 격으로 다루고 싶은 ‘위시 리스트’ 조경가 중 한 명이었는데, 이번에는 우연한 기회에 다소 급하게 섭외되어 그의 작업 전체를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홈페이지http://thorbjorn-andersson.com에 공개된 포트폴리오를 통해서라도 그가 지향하는 절제thrift와 진정성authenticity의 도시 조경 전반을 살펴보시길 권한다. 조경가에 의해 생산되고 있는 동시대의 많은 외부 공간이 얼마나 과장과 허위로 가득 차 있는지 반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안데르손의 조경가로서 이력 중 특이한 점은 30년 이상 북유럽의 대표적 조경가로 활약해 왔음에도 자신의 설계사무소를 경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한 사무실에 적을 두고 있지만 독립적으로 작업하며 때로는 다른 조경가, 건축가, 도시계획가와 유연하게 협력하는 이채로운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독립 조경가, 프리랜서, 1인 오피스 등 여러 가지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그의 작업 방식이 어떤 장점과 한계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면밀한 토론이 필요하다. 그러나 안데르손의 방식은 최근 국내외의 젊은 세대 조경가들 사이에서 시도되고 있는 1인 또는 소규모 작업 집단 경향과 관련해서 참고할 부분이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는 토르비에른 안데르손을 작품보다 글로 먼저 만났다. 그는 실무 조경가로서는 드물게 여러 책과 잡지를 통해 적지 않은 글을 발표해 왔다. 조경 작품 못지않게 검박하고 단순한 그의 글에는 현대 조경이 도시 공공 공간의 형성과 회복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지향해야 하는가에 대한 주장이 군더더기 없는 정제된 논리로 담겨 있다. 이를테면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vs. 조경 설계”에서 그는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이 옴스테드나 맥하그의 접근 방식과는 달리 “건축 중심의 블록이 아니라 공공의 공간”을 출발점 삼아 도시의 생존과 회복을 꾀하는 시대정신이라고 해석하면서 동시대 조경 설계의 역할을 강조한 바 있다(Topos 71, 2010). 이번 『환경과조경』 3월호를 위해 그가 보내 온 에세이 “설계 방법으로서 자연”은 짧고 간소한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현대 도시에 자연의 진정성을 제공하는 조경의 가치를 담담히 웅변하고 있다. “우리는 도시 교외 지역들이 상상 속에만 존재할 법한 고풍스러운 작은 마을을 흉내 내는 모습을 목도하고 있으며, 에어컨이 가동되는 쇼핑몰들은 전 세계 이국적인 명소를 보여주는 환상의 테마 상업 시설로 설계되고 있다. 이는 가공된 환경일 뿐 진정성과는 동떨어져 있다. 조경은 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 자연,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연스러움은 진정성 넘치는 경험을 제공한다. … 이러한 경험은 … 자연과 도시 사이에 개념적 연결고리를 형성한다. 자연에 대한 경험은 예측 불가능한 개방적 성격을 띠며 변화의 여지를 갖고 있다. … 자연은 현대 도시의 특성을 반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연은 나무, 식물, 바위 그리고 개울 같은 대상이 아니라 변화의 양상을 품은 여러 과정의 집합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 길고 추웠던 겨울이 다시 찾아온 봄에 길을 내주고 있다. 이번 3월호가 독자 여러분의 봄기운 가득한 친구가 되길 소망한다. 이번 호에는 자르뎅 드 바빌론(Jardins de Babylone)의 도전적 작업들도 소개한다. 진취적 실험을 펼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마인드도 갖춘 이 젊은 조경가 그룹의 대표 아모리 갈롱(Amaury Gallon)과의 인터뷰를 본지 프랑스 리포터 박연미 씨가 담당해 주었다. 작품 섭외와 인터뷰를 진행해 준 수고에 감사드린다. 집적경관, 축조경관, 절충경관으로 이어진 최영준 소장(Laboratory D+H)의 ‘그들이 설계하는 법’ 연재가 이번 호로 막을 내린다. 그간의 노고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얼마 전 로스앤젤레스에서 서울로 옮긴 그의 베이스캠프가 ‘전진경관’의 새로운 기지가 되기를 기대한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이미지 스케이프] 빛, 창, 공간
    새 달이 시작되면 어김없이 『환경과조경』이 도착합니다. 반가운 마음에 책을 받아 들고 어떤 글들이 실렸나 살펴봅니다. 생각, 사진 그리고 소식이 적당히 섞인 『환경과조경』, 그야말로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책을 보다 정신이 번쩍 듭니다. ‘아, 벌써 원고 마감할 때구나. 이번엔 어떤 사진으로 글을 쓰나?’ 사진 폴더를 뒤적입니다. 그 달에 찍은 신선한(?) 사진들이 별로 마음에 안 들면 오래된 사진들까지도 들춰 봅니다. 추억이 담긴 음악이 옛 시간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예전 사진을 볼 때면 사진을 찍던 순간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에겐 사진이 일종의 기억 저장 매체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이번 사진은 며칠 전 답사한 당진 아미미술관의 전시실 모습입니다. 아미미술관은 폐교된 초등학교를 미술가 부부가 전시 공간으로 새롭게 꾸민 곳인데, SNS를 통해 사진들이 소개되면서 최근 부쩍 유명해지고 있습니다. 전시실 한쪽 면을 넓게 차지하는 창문들과 마룻바닥을 통해 예전 교실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지더군요.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오니 전시실의 작품들이 또 새롭게 보입니다. 전시실 흰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전시물과 어우러져 또 하나의 작품이 됩니다. 역시 공간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것은 빛인가 봅니다. 조경에 비해 건축은 훨씬 더 치열하게 빛을 고민하던데, 조경가도 빛에 대해 조금 더 신경을 쓰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미미술관. 따뜻한 빛이 가득한 전시실 내부도 좋았지만 기다란 복도와 운동장에서 느껴지는 작은 시골 학교의 느낌도 참 좋았습니다. 조금 더 따뜻해지면 다시 한 번 가고 싶은 곳입니다. 주신하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거쳐, 동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토문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 도시건축 소도 등에서 조경과 도시계획 분야의 실무를 담당한 바 있으며, 신구대학 환경조경과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원예생명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조경 계획 및 경관 계획 분야에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
  • [그들이 설계하는 법] 절충경관
    잠시 자고 일어나 시계를 보니 3시 34분. 알람을 못 들었는데 눈이 떠졌다. 상하이의 밤은 아직 컴컴하다. 이제 3박째. 첫 이틀 동안 클라이언트 그룹과 설왕설래하며 잡아놓은 방향대로 수정하려 막상 도면을 펴니 생경하게 다가온다. 내일 있을 보고에서 옥상 정원의 계획안을 확정 짓지 못하면 공사 일정에 차질이 생기거나 실시 설계팀이 무너지게 된다. 폴더를 뒤적여 라이노 파일을 찾는다. SHCL001_6F_Rooftop_16.3dm, 16번째 수정본이다. 그간 전반적인 변화가 있는 대규모 변경이 서너 번 있었다. 어제 오후 조경부 부장이 지켜보다시피 하는 상황에서 태블릿으로 그린 평면을 클라우드로 보내 3차원 모델의 바닥에 깔아보는데, 모퉁이에 그려놓은 입면의 비율이 틀렸음을 깨달으며 식은땀이 나려 했다. 다행히 높이 값을 주어보니 그다지 나쁘진 않다. 어서 재질을 입혀 루미온으로 익스포트. 캐드에서 가장 멍청하면서도 스마트한 명령어는 ‘해치넣기’다. 많은 경우 캐드를 멈추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복잡한 영역에 대한 면적을 쉽게 알려준다. 수십여 번의 해치 끝에 나온 제곱미터 값, 아니 헤베 값을 넣고 엑셀의 수식을 돌린다. 항목별 총량이 나오고 채팅창에 받아 놓은 단가를 다음 열에 넣기 시작한다. 합계를 돌려보기 무섭지만 AutoSum 기능은 이미 매우 높은 첫자리 숫자를 보여주고 있다. 실수는 안 했는지 다시 면적을 구해보지만 고작 수십만 원의 오류를 찾았을 뿐 아직도 3백만 원 이상이 초과된 숫자가 맨 아래에 보인다. 물론 이것은 이윤이 전혀 없는 실행가에 가깝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결국 다시 스케치하기 위해 펜을 잡는다. 인천공항에 내리기 두 시간 남짓 남았다는 방송이 나온다. 노파심에 좌석 사이 전원에 랩톱을 다시금 연결해 본다. 불이 켜지지 않는, 배터리가 다 된 랩톱을 탓해도 소용없다. 항공기 좌석의 전압이 너무 낮다. 공원심의위원회에 재심의 요청을 결정한 어제 저녁, 분명하지 않은 변경 사항에 최대한 대응한 수정안을 머릿속에 계속 그려보며 준비한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심의에 상정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12시간 안에 시 담당 부서에 접수해야 하는데, 인천공항에 체류하는 14시간 동안 수정하고 변경해야 하는 80장 분량의 파워포인트와 조서들을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하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전원이 구비된 커피숍을 찾지만, 아직 문도 열지 않은 새벽 5시. 조건부 가결이라도 되어야 올해 예산으로 집행될 텐데…. 작은 기도를 읊조리며 작은 의자에 앉아 11시간을 줄곧 작업해 제출하고, 다시 태평양을 건너는 비행기에 오른다. 위의 일기 같은 몇몇 에피소드는 지난 몇 년간 설계 과정에서 겪은 일들이다. 설계는 결과물로 평가를 받고 설계팀 크레디트에 첫 번째로 이름이 올라간 사람이 주도해 만들어내는 듯 보이지만, 실은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여러 주체가 종합적으로 참여하고 절충해 만드는 합작품이다. 좋은 의미로 참여와 절충이지, 한 프로젝트를 둘러싼 많은 주체의 알력과 복잡다단한 절차가 대본에 없던 캐릭터로 설계라는 드라마에 출연해 수많은 갈등을 일으킨다. 의뢰인 측이 보내는 코멘트가 지난 몇 달의 노력을 일순간에 허사로 만들기도 하고, 설계와 시공 사이의 간극은 늘 멀기만 하다. 허가 절차나 녹지율 같은 행정적 요구 사항이 설계가의 발목을 굳게 잡고 있기에 막판 스퍼트는 없고 다리를 절며 다시 스타트 라인에 서야 하는 것이 설계의 마지막 레이스다. 이 모든 난관은 ‘갑’이라 불리는 의뢰인 또는 건축주가 발생시키지만 계약의 결과로 받는 서비스의 일부이기에 ‘그들’은 보통 관조하고 때로는 인내심이 바닥났음을 알려오기도 한다. 아주 가끔은 그들 중 일부가 같은 배에 타서 공동의 목적지를 향해 항해하는 반전도 있다. 모든 설계는 갑과 을, 제약과 기회 간의 절충의 역사다. 그 치열한 절충, 타협, 조정, 조율, 대응, ‘밀당(밀고 당기기)’의 결과로 경관에 경계가 그어지고 경관의 최종 모습이 결정된다. 설계가인 ‘그’가 초기에 그려낸 설계안이나 도면이 완공된 모습과 같은 경우는 지구상에 단연코 없다. 수많은 ‘그들’과의 절충의 담금질만이 최종 경관을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연재의 제목으로 적절한 것은 ‘그(들)이 설계하는 법’이 아니라 ‘그들과 설계하는 법’일 것이다. 상하이 믹시몰(The MixC Mall) 프로젝트의 기회가 왔는데, 위치도, 규모도 당시 우리 회사 입장에선 꽤나 좋은 위상의 프로젝트로 보였다. 간단한 화상 인터뷰를 하더니 다 좋은데 중요한 프로젝트이기에 내부 공모전을 진행할 예정이라며 계속 해보겠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이왕 뽑아 든 칼, 휘둘러 보기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열흘 남짓한 시간, 스케치 수준의 간 보기 결과물이 요구됐다. 알고 보니 경쟁 상대는 대상지 건너편의 대형 회사 사옥 캠퍼스와 조각 공원을 말끔히 설계한 아시아권에서 이름 있는 회사. 다행히도 주어진 짧은 시간에 그들보다 더 많은 결과물을 뽑아낸 우리에게 설계권이 부여됐지만, 계약 진행은 늦어져만 가고 그들의 간 보기는 계속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 프로젝트는 무려 7년을 표류하며 설계사가 세 번 바뀌고, 담당자들이 견디지 못하고 수차례 바뀐 악명 높은 프로젝트였다. 우리가 개입한 그 시점에도 누구나 알 법한 대형 사무소의 실시 설계가 이미 완료됐고, 포장 공사가 시작되어 포장재와 시설물이 현장에 쌓여 있는 상황이었다. 다시 설계를 바꾸게 된 계기는 이 집단의 모든 리더가 최근에 교체되어 프로젝트의 위상과 디자인 방향이 모두 초기화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생각보다 무서울 정도로 커다란 ‘예상할 수 없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일반적인 설계 결정 과정에서는 최종 결정권자의 비전과 선호를 잘 이해하고 있는 조경 부서 관리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들은 결정권자에게 최종 승인을 받아내기 위한 충분조건을 충족시키면서도 트렌드를 개척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설계사를 이끌며 조율해가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들의 코멘트 하나하나에 최종 결정자와 회사의 정신이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을수록 프로젝트 진행은 수월해진다. 그런데 리더가 다 바뀐 이 같은 상황에서 그들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제곱미터 당 시공비의 제한도 없이 모든 것이 열려 있는 상황에서 이미 정해진 촉박한 쇼핑몰 오픈 일정만은 분명했다. 또 하나의 명백한 사실이자 부담은 새로운 리더들이 이 프로젝트를 경영진 교체의 상징적 전환점으로 삼아 온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건물 외관이 90% 넘게 완성된 이상, 이제는 조경으로 차별화해야 한다는 점도 분명했다. 일반적으로 중국 상업 프로젝트의 경우, IP라 불리는 관심을 사로잡는 대상을 설정하고 그것을 중심 콘셉트로 삼아 설계를 풀어간다.2 예를 들면 중앙 광장에 동물 조형물을 세워놓고 그것을 각인시키는 홍보물을 지속적으로 생산해 프로젝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실무진들이 제일 먼저 요구한 것은 이런 방식을 탈피한 색다른 아이디어를 제안해 달라는 것이었다. 간 보기에 그칠 것이라는 의구심은 있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설계에 대한 기대감도 안은 채 내부 공모에서 제안한 안을 업그레이드해나갔다. 설계 대상지는 상하이의 주요 대로 중 하나인 우종로(Wuzhong-road)에 면하는 약 700m 길이의 슈퍼 블록을 모두 점유한다. 인접한 녹지대로 이어지는 길목이라 쇼핑몰 앞 70m 정도의 폭 중 약 40m의 구간에 공공 녹지대를 구축해야만 했다. 기본적으로 쇼핑몰의 주 입구부에는 각종 상업 이벤트를 위해 포장된 광장부가 필요하기 때문에 높은 비율의 녹지 확보가 도전 과제이기도 했다. 이처럼 쉽지 않은 대지 상황에서 주목한 점은 기다란 대지의 길이 그 자체였다. 이렇게 긴 도시 오픈스페이스는 흔하지 않은 기회의 공간이다. 방문자가 과연 이 공간을 어떻게 온전히 즐기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10,000개의 경관을 감상하는 길’3이라는 콘셉트로 독특한 도시 경험을 제공하는 특별한 산책로 중심의 조경 개념을 제안했다. 대지를 관통하는 하나의 길이 때로는 지면으로, 때로는 공중으로 떠가게 해서 녹지율을 낮추지 않으면서도 부지를 흥미롭게 걷게 하는 제안이었다. IP와 같은 상징물이 중심이 되면 시각적 자극과 인상만을 남기는 데 비해 다채롭게 걷는 행위를 통해 온 감각의 자극과 인상을 줄 수 있음을 강조한 개념인데, 클라이언트의 반응이 미지수였다. 의뢰인들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는 독특한 콘셉트를 요구하고서 정작 조금이라도 관례에서 벗어난 제안을 하면 의구심을 내려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명백한 모순 같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설계자에게 새로우면서도 실현 가능한 안을 뽑아내기 위해 취할 수밖에 없는 태도다. 이 모순을 풀 열쇠는 적절한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현실적인 사례 제시다. 마침 이번 아이디어의 좋은 레퍼런스로는 맨해튼 허드슨 야드에 지어지고 있던 토마스 헤더윅Thomas Heatherwick의 작품 ‘베셀The Vessel’이 있었다.4 도시를 경험하는 조망점을 다양하게 하는 것만으로 도시의 경험이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증명하는 몇 가지 이미지가 1번 안의 출발점을 끊어주었고, 그 전략을 담은 첫 스케치 발표를 본 실무자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안을 더 개선할 수 있는 의견을 교환하며 몇 번의 스케치를 반복한 끝에 개념 설계안이 발전됐다. 보행교를 제안하는 방식이야 그리 새롭지 않았지만 보행로가 전망대, 분수, 음악 산책로, 수변 다리, 물 위를 걷는 다리, 갤러리 길 등으로 변모하며 대상지를 훑어가는 제안이 그들에게 신선하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1차 발표 뒤 마케팅팀의 피드백이 분위기를 틀어 버렸다. 그들이 문제 삼은 쟁점은 폭이 100m나 되는 광장일지라도 그 중간에 떠 있는 보행교가 있으면 건물 전면부를 가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의견이 사실임은 인정하지만 가려지는 범위나 정도가 그리 크지는 않다는 것을 여러 차례 증명해보고자 노력했음에도, 완강한 타 부서들의 반대에 부딪혀 설계 방향을 조절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상업 프로젝트에서 공들여 결정한 건물의 파사드는 온전히 노출되어야 한다는 게 공공연한 공식이자 ‘그들’의 절대 원칙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권유받은 설계 방향은 설계자로서 가장 피하고 싶던 IP 중심의 접근이었다. 피하고 싶던 이유는 IP로 제안받은 대상이 프로젝트의 중국어명 ‘만상성万象城’의 두 번째 글자의 동음이의어인 동물, 즉 코끼리였기 때문이다.5 그러나 ‘을’인 우리 팀에겐 선택권이 없었고, 조경 부서도 우리의 안을 지지하지만 너무나 결정적인 건물 전면의 노출 문제이기에 손을 쓸 수 없었다.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승인될 수 있는 설계안을 뽑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설계팀만이 아니라 운영팀과 마케팅팀 모두의 승인을 얻고 건축팀의 지원을 받아야 임원진 리뷰에 도달할 수 있기에, 프로젝트의 중요도에 비례해 넘쳐나는 그들의 여러 의견을 수용하는 절충의 절차를 밟아야만 한다고 담당자는 위로했다. 코끼리. 대부분의 설계가가 가장 싫어하는 설계라 할 수 있는 직설적 설계 앞에 마음이 무거웠다. 일단 코끼리를 다루게 된 이상 지나치게 추상화하여 코끼리의 상象이 희미해지면 안 되는 것이 상업 프로젝트의 IP이기에, 코끼리 이미지를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우회적인 설계 어휘를 쓰기 위해 요구 조건과 결과물 사이의 거센 절충과 타협의 과정을 거쳤다. 중국 프로젝트를 하며 코끼리를 다루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당시 2주간의 작업 과정은 치열한 내적 갈등과 난해한조형의 시간이었다. 결과물의 제목은 ‘10,000개의 코끼리’. 조경 실무자들과 여러 대화 끝에 코끼리의 실루엣이나 코를 형상화한 요소가 상업적 분위기를 진하게 연출하는 결과물을 만들었다. 우리 팀에게는 만족과 불만족의 경계 밖에 있는 설계 콘셉트였기에 스스로는 여전히 가치 판단을 유보한 채 의뢰인 집단인 ‘그들’의 결정을 온전히 존중한 안이었다. 스스로도 뜨거움을 담지 못한 결과물이라 그런지 이에 대한 반응 또한 그다지 뜨겁지 못했다. 클라이언트의 예상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 미지근함의 이유였는데, 우리 팀의 입장에서는 힘 빠지는 상황이지만 동시에 직설적 설계를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이 믿는 마케팅 트렌드를 위한 희생과도 같았던 실험의 시간이 지나고 첫 번째 안과 두 번째 안의 프레임워크를 절충해 최종안을 진행할 방향에 대한 피드백이 전달되었다. 절충안의 방향은 IP를 피하면서도 과도한 설계를 지양하고, (정의하기 어렵지만) 고급스럽고 (정의하기 더 어렵지만) 격조 있고 우아한 설계 스타일을 만들라는 지침이었다. 그들의 급작스러운 방향 선회가 어떤 연유인지 알아보니, 당시 구정 연휴를 이용해 일본의 성공적 프로젝트들을 답사하고 돌아온 상급자들이 최신 사례에 영향을 받아 설정한 방향이며 최고 결정자의 본래 경향도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일본 특유의 미니멀한 언어를 사용하고 절제된 형태에서 면밀한 디테일의 완성도를 요구하는 ‘스타일’이 요구 조건이었던 것이다. 설계가가 (직설적 설계 다음으로) 두 번째로 지양하고자 하는 설계가 아마도 ‘스타일’에 맞추는 설계일테다. 다시 한번 깊은 고민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일본과 중국의 시공 완성도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이 크기에 설계사 입장에서는 무리수가 매우 큰 방향 설정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반적인 중국 상업 조경의 스타일이 아닌 조경 공간을 만들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믿으면서 일본의 단순함을 중국의 콘텍스트에 녹이는 방향의 안을 발전시켜 나갔다. 실시 설계로 넘어가야 하는 시점이 가까워지면서 더 높은 지위의 결정권자와 긴밀한 소통을 하며 설계안을 완성해 나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설계자인 우리 팀부터 조경부 실무자, 조경부장, 다른 부서장, 지역 책임자에 이르는 여러 관련자의 공통된 목표가 중국 북부 지역 총책임자의 승인을 얻는 것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느낌이 분명해진 순간에는 수많은 사람이 한 개인의 기호를 맞추는 게 설계인가라는 회의감도 들었다. 하지만 결국 깨달은 것은 한 개인의 승인을 받는다는 것이 비단 그 책임자의 개인적 선호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니며, 그가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설정한 가장 성공적인 비즈니스 모델과 흥행을 낳는 비전에 가장 가까운 설계안을 만들어내기 위해 모든 구성원이 머리를 맞대고 노력해 합일점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이 클라이언트 회사는 2017년 중국 대륙에서 상업시설 중 부동산 실적 1위를 기록한 가장 거대한 ‘그들’이었고, 이 같은 관료 체계가 무수한 우회를 발생시켰지만 그러한 우회는 그들 집단 모두의 합의를 얻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어쩌면 더 큰 성공이 보장된 설계안을 위한 의미 있는 여정임을 서서히 느끼게 되었다. 오픈을 석 달 반쯤 남기고 드디어 계획안에 대한 최종 결정권자의 승인을 받아냈다. 전체 그림이 선명해지자 디테일을 구체화하는 단계가 시작됐는데, 큰 그림 안에서 설계 결정 절차는 짧고 단순화되어 이 지역 디자인 디렉터와 직접 소통하게 되었다. 그만큼 더 짧은 피드백 시간 안에 ‘그들’이 믿는 성공적인 디자인의 디테일을 달성해야 했고, 오픈 한 달 전까지 지속적으로 변경된 건물 프로그램 변화에 맞추어 수정해야 했다. 일반적으로 이처럼 빠른 결정이 요청되는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결론에 도달하는 방법은 옵션 두세 가지 정도를 제안하는 방식이다. 설계자에게는 두 배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발표와 그에 대한 피드백을 받은 후 또 다른 대안을 준비할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는 애초에 대조적인 두 가지 이상의 대안을 들고 가는 게 도움이 되기에 처음부터 여러 옵션을 제안하기도 한다. 이 프로젝트는 시공비 제한 없이 그들의 새로운 리더를 만족시킬 높은 표준의 흥행성 달성만이 목표였기에, 한 요소당 평균 8개 이상의 대안 설계를 진행해 디자인 디렉터와 마케팅팀의 지속적인 리뷰를 거쳤다.6 대안 개수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많았기에 디자인의 대안을 개발하는 순수 설계 시간만큼이나 여러 디자인 대안을 리뷰하며 결정하는 의사소통 과정에 긴 시간이 소요됐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의견을 통해 배우게 되는 현실적 정보가 많았음은 물론 때로는 그들의 아이디어를 직접 반영해 설계가 발전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광기 넘치는 동거가 오픈 한 달 전까지 이어졌다. 끊임없는 설계 수정, 재료 선택, 샘플 리뷰를 빈틈없이 요구하며 우리를 괴롭히던 그들은 어느덧 우리라는 이름으로 한 팀이 되어 있었다.7 현장 사무실의 한쪽 벽에 시뻘건 글씨로 적혀 있던 오픈 일까지의 카운트다운을 마치고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완료됐고, 불가능할 것만 같던 모든 일정을 그들과의 설계를 통해 가능으로 이끌어낸 인생 최대의 난작難作으로 기록됐다.8 지붕감각(Roof Sentiment) 2015년 4월,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 당선팀에 축하 메시지를 보냈는데, 당선작의 조경을 의뢰하는 반가운 답장이 왔다. 설계를 구체화하기 시작한 초반이었는데, ‘지붕감각’ 파빌리온의 주인공인 특별한 지붕을 원안의 형태와 소재로 실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치열한 스터디가 진행되고 있었다. 정확한 예산이 파악되어야 조경의 규모와 복잡도도 가늠할 수 있기에, 건축 소장들과 함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중국인 친구인 우리 사무실 파트너에게 갈대발 업체 수소문을 부탁해 보았다. 파트너는 산둥 지방의 거대한 갈대밭을 배경으로 3대째 갈대발을 생산하는 업체를 운 좋게 한 번에 섭외해냈다. 건축팀의 몫인 갈대발 지붕의 순조로운 진행을 기대하며 그 아래의 땅을 살펴나갔다. 석 달 안에, 그리고 극히 제한된 예산 안에서 시공과 설치를 끝내야 하는 상황이라 모든 결정이 실시 설계 수준이어야 했다. 다시 말해, 정확한 제품 정보와 품이 동반되어야 했다. 한국의 가격 정보와 실상에 대한 지식과 상식이 전무한 때였다. 이번엔 한국에서 실무를 하고 있는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가깝게 지내는 시공 전문가를 소개해 주었다. 이렇게 세 명은 다 같이 만난 적도 없었지만 인터넷 3인 통화로 수차례 초기 검토를 진행했고, 마침내 몇 주 뒤 현장인 MMCA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나 팀 ‘동산바치’란 이름으로 의기투합해 ‘지붕감각’ 조경의 시공까지 함께하게 된다.9 당선작인 SoA의 ‘지붕감각’은 대상지 MMCA가 위치한 오래된 서울의 한옥과 궁궐의 전통 지붕 아래에서 쉽게 느낄 수 있는, 지붕으로부터의 공간적 감각을 극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파빌리온이다. 이 극적 경험은 ‘과장된 지붕’이 만들어내는 무게감과 깊이에서 오는데, 단청으로 채색된 무거운 목조의 전통 정자나 누각이 아니라 자연 소재인 손으로 엮은 갈대발의 지붕을 10m 높이의 수직적 주름 형태로 만들었다. 즉 현대 다층 건축물의 평 슬래브 사이에서 느끼는 지붕에 대한 제한적 경험이 갈대발 사이로 확장되는 경험을 제공하는 프로젝트다. 건축의 아래층을 구축하는 조경의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건축물의 가장 원초적이고 순전한 요소인 지붕과 조경이 뿌리내리는 대지라는 두 요소 간의 관계, 즉 건축과 조경의 관계를 맺고 조율하는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조경과 가장 직접적 영향을 주고받는 부분은 큰 지붕을 지지하는 구조체와 그 구조체의 기초가 땅과 만나는 부분의 처리 방식이었다. 한 묶음의 구조체는 네 개의 원형 강관이 중간에서 교차되어 묶인 다발 기둥으로, 위로는 갈대발 걸이 역할의 보를 받쳐주고 아래로는 기초와 접합되는 형상이다. 부족한 예산 때문에 원형 강관의 마감 처리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들’의 극적이고 자연을 닮은 지붕 아래에 차갑고 시퍼런 느낌의 철재 다발 기둥이 보행자 레벨에서 그대로 노출될 상황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개의 둔덕을 기둥 하부에 만들고 그 위에 적절한 높이의 식물을 밀식해 기둥의 삭막함과 지면과의 날 선 만남을 완화하는 개념을 기초로 한 초안을 만들었다. 개략 내역을 뽑아봤는데, 그제야 주어진 예산이 제안된 지형 요소를 최소화하고 나머지의 예산을 표면 처리에만 사용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함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설계의 초점을 우회하여 어떻게 바닥 면을 처리하면 가장 경제적이면서도 최대한 아름다운 효과를 낼 수 있을지 스터디했다. 다발 기둥 기초부의 조경 둔덕은 나머지 예산이 허락하는 만큼의 크기로 조성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갈대발 사이로 떨어지는 햇빛과의 만남, 방문자가 밟았을 때의 느낌이나 소리, 갈대발의 재질감과의 조화, 단가 등을 고민한 끝에 내린 1차 바닥 재료는 쇄석이었다. 인왕산을 향하는 경관축을 따라 주름을 잡아놓은 지붕의 결 방향과 평행하게 두 가지 색의 쇄석을 이용해 바닥에 선형 패턴을 만들고, 그 패턴의 경계가 전시 기간 동안 방문자들의 발자국에 따라 자연스럽게 서로 섞이는 일종의 참여적 퍼포먼스로 만들어 가는 안을 제안했다. 긍정적인 건축팀의 반응과 달리 궁극의 클라이언트인 미술관 측의 견해는 달랐다. ‘그들’은 쇄석이 마감재로 쓰이면 방문하는 아동들이 쇄석을 가지고 놀다가 집어던지기 마련이고, 미술관의 전면이 유리 소재이기에 파손의 우려가 크다는 매우 현실적이고 관리 중심적 의견을 냈다.10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운영자인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다른 소재를 찾아 나섰다. 표면 소재의 후보군인 고무칩은 안전하게 다양한 질감을 연출할 수 있지만 국내에서는 폐타이어를 재활용한 저렴한 제품의 생산처를 찾을 수 없어 단가가 높은 제품을 써야만 했다. 또 다른 표면 소재인 폐유리를 마모 처리한 반투명 인공 자갈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조달이 어려울 뿐 아니라 쇄석과 같은 안전 문제를 야기할 소재였다. 갈대발의 직조가 대부분 진행되고 기둥의 구조 또한 확정되던 즈음, 현장에서 갈대발의 실제 질감을 느낀 모든 팀원은 더욱 자연적인 소재로 눈을 돌렸고, 멀칭재로 쓰이는 수피로 만든 바크가 좋은 대안으로 떠올랐다. 안전에도 문제가 없고 비용면에서도 저렴하고 재질의 성격도 갈대발과 매우 유사한 1석 3조의 소재였다. 게다가 부족한 예산 때문에 밀도 있는 식재가 어려운 식재 마운드에 노출될 식물 사이의 토양도 자연스럽게 가려주고 평평한 바닥과 융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새벽 습기를 머금거나 관수를 하고 나서 물기에 살짝 젖은 적송 바크는 소나무 숲 속의 향기를 지붕 아래에 채워주며 감각의 확장을 가져다주는 화룡점정의 소재였다. 안전에 대한 다소 지나친 그들의 염려를 해결하기 위해 차선으로 채택한 소재가 오히려 기대 이상의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프로젝트의 이름에 걸맞은 감각을 일깨우는 경험의 단계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는 소재가 된 것이다. 적송 바크는 이 공간에 적절한 습도와 향기 그리고 걸음걸음마다 숲 속을 걷는 보행감을 선사해주며, 서울 한가운데에서 발만 들여놓으면 자연 속으로 순간 이동할 수 있는 자연으로의 통로이자 마법 같은 미기후의 공간인 ‘지붕감각’의 조경을 완성했다. 앞의 상하이 프로젝트와 정반대로 예산 규모는 한정적이다 못해 전체 팀이 손해를 보아야 할 정도의 비관적 상황이었다. 또 운영과 관리 주체인 미술관은 협조적이기보다는 안전 문제와 기존 포장의 보호에 더욱 신경을 쏟았지만, 그들의 우려에 절충한 결정이 최종적으로는 예상외의 결과와 함께 의뢰인의 우려도 불식시키는 선택이 되었다. 창천문화공원 한 건축사무소와의 오랜 협업 끝에 마침내 처음으로 공공 프로젝트 공모전의 당선 소식을 들었다. 대상지는 8090시대 대학 문화의 1번지였던 신촌을 다시 청년 문화의 중심지로 조성하려는 ‘신촌 도시재생사업’의 거점 지역 중 하나인 창천공원. 이 공원을 청년 문화 전진 기지로 탈바꿈하는 프로젝트였다. 인접한 백화점의 주차 타워와 중심 거리에서 이격된 위치 때문에 늘 그늘이 드리워지는 이 공원을 젊은이를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 신촌 지역을 다시 홍대만큼의 중량감을 갖도록 회복하는 것이 목표였고, 청년 문화 콘텐츠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청년 문화 발전소를 조성하는 것이 해당 구청의 요구였다. 우리 팀의 제안은 공원 중심에 길게 건물을 배치하되, 1층의 공원부는 파빌리온과 같은 최대한 개방된 구조로 열어주는 것. 주변 건물과 비슷한 규모의 적절한 상부층을 두어 실내의 청년 활동을 지원하는 건물이 되도록 하며, 공원을 휘감는 조경의 중추 골격이 건물과 맞물려 긴밀한 관계를 맺는 동시에 도시와의 교호도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건물이 공원의 중앙부를 가로지르기에 공원 전체를 청년 문화의 콘텐츠가 생성, 연습, 소비되어 즐길 수 있는 장으로 만들기 위한 중심이자 배경이 되도록 배치한 결과물이라 자평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모전 당선 직후의 심사 결과 종합 회의에서 건물의 위치가 커다란 논란거리가 되기 시작했다. 토지 이용이 공원으로 지정된 땅이고 개선 공사를 위해서는 상위 부처인 시 단위의 심의를 거쳐야 하는데, 현재의 계획안은 공원처럼 보이지 않기에 심의 통과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는 게 담당 부서의 의견이었다. 조경 관련 심사위원 중 일부가 공원 내 건물에 대해 근본적으로 반대한다는 것도 문제였다. 사업이 준비되고 과업 지시서가 작성되는 과정에서 이 모든 것이 예측되고 반영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들었지만, 이미 공모전이 완료된 상황에서 이 같은 행정적 한계는 설계사와 지자체 모두가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이자 ‘그들이 이미’ 답을 내어놓은 룰이었다. 다수의 심의위원에게 ‘공원의 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 예상된 청년문화센터 건물의 존재감을 줄이기 위한 대안들을 만들며 가장 난관이 될 공원 심의를 통과하기 위한 절충안 수립에 들어갔는데, 사실 완전히 새로운 계획안에 가까웠다. 여러 다른 위치를 검토했지만, 현존하는 경로당 건물과 비슷한 규모와 위치의 건물을 지어 새 건물의 존재감을 줄이는 방향이 가장 설득력 있는 대안이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결정은 조경에게는 기회이자 동시에 도전이었다. 현 위치인 공원 서측은 공원의 안쪽에 해당하기에, 건물이 그곳에 위치하면 건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공원 활성화의 촉매 효과가 공원의 중심이나 바깥인 동편에 비해 낮기 때문이다. 대상지 동쪽으로 편중된 도시 문화의 무게중심을 서쪽으로 끌어오는 과제가 상당 부분 조경으로 넘어오게 되는 대목이었다. 이러한 무게중심의 변화에 대응하여 도시의 에너지를 더욱 공원 안쪽인 서측으로 끌어올 수 있는, 조경 중심의 강력한 구심점 구축을 대상지 남측 삼각 모서리 공간에 제안했다. 이곳은 1m가량의 등고 차이를 이용할 수 있고, 명물 거리로 열린 대지 동측과 상업 가로인 북측 가로에 비해 독립된 공간이었다. 우리 팀은 이곳에 수직적 상징성과 수관 하부의 활용도가 높은 메타세쿼이아로 구성된 작은 숲을 제안했다. 백화점이 드리운 그림자 대신 공원의 나무가 드리우는 생명력 있는 그늘 쉼터를 만들어 주고, 규모 면에서도 남측에 위치한 높은 건물에 대응하는 요소가 될 수 있기를 기대했다. 무엇보다 도심 한가운데에서 나무 아래 쉼터라는 독특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 자체가 청년문화센터와 함께 이 공원으로 시민들을 이끄는 양대 구심점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건물 외관은 명소를 만들겠다는 구청의 의지가 담겨 한층 더 상징적인(iconic) 외피를 갖게 되었고, 메타세쿼이아 숲과 함께 그들이 구상한새로운 공원의 얼굴이 만들어져가고 있었다. 첫 번째 절충안이 공원과 건물, 조경과 건축의 사이좋은 공생과 충분한 화제성을 만들 수 있는 안이라고 판단했지만, 1차 공원 심의위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여전히 복잡한 대학가의 비워두어야 할 오픈스페이스를 건축물로 채우는 생각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버리지 않았다. 조경하는 사람으로서는 반가운 의견이면서도, 점유율도 낮고 공원과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이 충실한 현재의 건축 설계가 그들에게 여전히 공원의 악으로 보이는지 아니면 공원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가치가 우선인지 알 방도가 없었다. 다행히도 공식 심의 결과문에서 공원 내 건물에 대한 무조건적 반대는 철회되어 전면적 수정은 피할 수 있었으나, 이번에는 남측의 도시숲이 공원의 유연성을 저해하니 좀더 열린 공원으로 조성하라는 의견이 개진되었다. 유연성은 오픈스페이스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가장 논란이 있을 수 있는 주제 중 하나인데, 이를 문제시한 그들의 의견이 그리 반갑지는 않았고 지하고를 높게 유지하고 그 하부를 유연하게 쓰도록 한 의도가 그들에게 읽히지 않았는지 답답했다. 아무리 지하고가 높은 수목을 여유 있게 배치한 숲이라도 그 공간이 크게 탄력적인 공간으로 쓰이기 어렵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저항할 수 없었고, 결국 수용해야만 했다. 두 번째 최종 절충안은 숲이 있던 자리에 청년 문화를 표출할 수 있는 원형 무대 광장인 ‘신촌포럼’을 만들어 그들이 강조한 공원의 개방성과 유연성을 증진하는 안으로 정리되었다. 예산 집행을 위해 심의 통과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기에 그들의 의견에 순종하듯 그대로 따르고 서둘러 마련한 절충안으로 수정하여 통과를 받아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스스로에게 그리고 여러 명의 그들에게 묻고 싶다. 공원 내부의 건축물이 디자인과 상관없이 반드시 공원을 해치는 악인가? 그리고 공원 내의 작은 숲 공간이 공원의 유연한 이용을 막는 것인가? 우리 모두는 이 공원에서 진정한 공공의 가치를 끌어내었는가? 앞에서 ‘그들’이라는 3인칭 복수 대명사를 설계자가 아닌 다른 모든 주체를 지칭하는 데 의도적으로 많이 썼다. 의뢰인, 디벨로퍼 집단, 건축가, 행정 주체, 심의위원, 또는 다른 조경가들. 이들 모두는 갑이든 을이든, 우리 편이든 상대편이든, 모두 다 그들이었다. 그들과의 얽히고설킨 설계 이야기를 적고 보니 그들을 이해하고 절충을 이뤄내지 못했다면 새로운 경관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새삼 느끼며, 주변에 있던 모든 그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나도 누군가에겐 그들중 하나라는 점을 잊지 않고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영감을 주는 그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그들이 설계하는 법’ 연재의 마무리다. 십수 년 동안 땅덩이를 놓고 고민해온 소사를 ◯◯경관이라는 제목에 끼워 맞추어 집적, 축조, 절충이란 단단한 발음의 어휘로 묶어보았다. 정리하고 싶었던 이야기, 끝없이 영감을 주는 대상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과 밀고 당기던 이야기를 담았다. 다음에 이렇게 돌아볼 기회가 있을 때는 주변의 이웃들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든 이야기를 담을 수 있기를 바라보며 연재를 마친다(연재 끝). **각주 1. (제목)이런 질문을 던져 본다. 모든 설계의 끝자락에 절충과 타협이 기다리고있다고 해서 미리 한발 물러선 설계를 하는 것이 현명한가? 설계가마다생각이 다르겠지만, 나의 대답은 “아니요”다. 절대 아니다. 결국 절충은너무나 여러 가지 형식과 이름으로(원가 검토, VE, 각종 심의 등) 거쳐야하기에 피할 수 없는 절차다. 그런데 설계가가 처음부터 예산, 규제 항목, 취향 등과 같은 제한 요소에 지나치게 구애받은 채 설계를 하면 좋은 설계를 도출하기 어렵다고 본다. 처음부터 죽을 쑤어갈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구첩반상을 차려갈 각오로 하다 보면 나중에 한두 가지 찬이빠지는 경우가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고, 그러다가 정 죽을 쑤어야 하면언제든 물을 부으면 되는 것이다. 특히 경계해야 하는 것은 김치 한 가지에 흰 죽만 내놓는 수동적이고 이미 절충된 경관의 재생산이다. 조경설계가 내놓을 수 있는 여러 재료를 이용한 깊은 맛의 잔칫상을 만들어가보고, 때로는 조경이 더 능동적으로 건설 환경에 참여하며 우리 영토밖으로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 의미 있다고 믿는다. 2.영어로 ‘지적재산권’을 의미하는 ‘Intellectual Property’의 약자인 이단어는 중국적 맥락에서 변용된 의미로 쓰이고 있다. 원래는 영화, 게임, 출판계에서 일종의 상징물이나 캐릭터를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여러제품이나 시리즈물로 재생산할 수 있는 재료가 되는 상업적 콘텐츠를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가, 부동산 개발 분야에서는 한 프로젝트를 다른 프로젝트와 차별화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오브젝트를 의미하는 어휘가 되었다. 이 오브젝트는 하나의 개발 프로젝트를 대표하는 용도이기에 지적 자원을 넘어 정체성을 규정하는 상징물이라 볼수 있다. 3.‘The MixC’의 중국어 이름은 ‘만상성’으로, 만이 의미하는 무수함을 담으려 했다. 4.http://www.heatherwick.com/project/vessel/ 5.같은 디벨로퍼가 개발한 같은 이름의 쇼핑몰이 2주 차이로 선전에도 오픈했는데, 이곳에는 코끼리 형상의 조형물이 프로젝트 중앙에 설치되었다. 6.포장의 대안은 셀 수 없고, 선큰 광장은 14가지, 중앙 입구부 드롭-오프(drop-off)는 20가지, 6층 옥상 정원은 16가지의 대안 설계가 진행되었다. 7.설계 일을 시작하고 가장 뿌듯했던 말을 그들의 선봉대에 섰던 클라이언트에게서 들었다. “이렇게 같이 지옥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나니 내가직접 설계를 해보고 싶다. 그리고 하게 되면 당신 회사에서 같이 하고싶다. 이건 진심이다.” 8.이 프로젝트와 함께 부임한 조경부장의 첫 성과 보고 마지막 페이지는내 여권의 중국 비자 페이지였다. 2017년 미국에서 상하이로 간 횟수는9번, 체류일의 합은 두 달이 조금 넘는다. 9.이렇게 만난 인연이 이어져 ‘2017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의 설계와 시공도 완료했다. 현재는 설계와 시공을 함께하는 집단으로 활동 중이다. 10.실제로 조경부가 완공된 당일, 한 초등학생이 안전 펜스 사이로 몰래들어왔다. 기초 보강재로 쓰인 쇄석이 노출된 부분을 뒤적여 돌을 찾더니 미술관 건물로 던지는 상황을 목격할 수 있었다. 최영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설계 대학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 그룹(SWA Group)에서 다양한 성격의 설계 및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미국조경가협회상(ALSA Honer Award), 아키프리 인터내셔널(Archiprix International) 본상, 뉴욕 신진건축가공모 대상, 제4회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 대상 등을 수상했다. 2014년에 로스앤젤레스 기반의 설계사무소 Laboratory D+H를 공동 설립하고 L.A., 센젠, 상하이에 이어 서울 오피스를 꾸려 나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