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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스케이프] 다르게 보기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는 세상은 실제 세상과 조금 다른 느낌입니다. 프레임으로 주변이 모두 가려져 제한된 대상만 보게 되어 생기는 현상이겠지요. 아주 잘 만든 가상 현실을 보는 느낌이랄까요. 아니면 여행객이 되어 우리가 사는 모습을 구경한다는 착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한발 물러서서 세상을 보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거창하게 얘기하자면, 세계를 객체화된 대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작년 늦가을이었습니다. 회의가 있어 안산시에 갔다가 경기도미술관에 잠깐 들렀습니다. 미술관에 도착하니 막 문을 닫을 시간이었습니다. 겨우 입장을 해서 작품들을 서둘러 둘러봤습니다. 좀 일찍 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생각하며 출구 쪽으로 향하는 바로 그때, 창밖으로 아주 멋진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하늘을 품은 얕은 수반과 세로로 줄긋기를 한 듯한 검은 기둥들의 실루엣, 거기에 이런 풍경을 배경으로 걸어가는 사람들까지. 마치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 페이지를 펼칠 때 배경 음악이 나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얼른 카메라를 꺼내 들었습니다. 뭔가 새로운 느낌이 들 때마다 자동으로 나오는 반응이지요. 그리고는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저쪽 끝에서 어떤 분이 걸어오시네요. 조형물과 겹칠 때를 기다렸다 셔터를 살짝 눌렀습니다. 이번 사진은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사진을 찍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또 사람마다 그 이유가 조금씩 다를 겁니다. 그럼 내가 사진을 찍는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기록이 목적이지만, 다른 이유를 찾자면 사진을 통해 세상을 좀 다르게 보고 싶어서인 것 같습니다. 익숙한 모습을 다르게 볼 때가 참 흥미롭거든요. 세상을 뭔가 다르게 찍는 게 재미있습니다. 뷰파인더로 보는 세상, 그래서 즐겁습니다. 주신하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거쳐, 동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토문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 도시건축 소도 등에서 조경과 도시계획 분야의 실무를 담당한 바 있으며, 신구대학 환경조경과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원예생명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조경 계획 및 경관 계획 분야에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
  • [시네마 스케이프]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갇힌 물, 흐르는 물, 춤추는 물
    1960년대의 미국은 백인 남성이 주도하는 시대였다. 천재 여성 수학자의 실화를 다룬 ‘히든 피겨스’는 차별과 편견을 딛고 성공한 당대 흑인 여성들을 그린다. 흑인 전용 화장실에 가기 위해 구두를 신고 먼 거리를 뛰어다니는 그들의 상황이 애처롭다. 식당이나 버스에서도 좌석을 분리한 인종 차별의 시대였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의 시대 배경도 1960년대다. 장애를 가진 여성, 흑인 여성, 노인 게이, 소련 스파이, 심지어 괴생물체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말 못하는 여자 사람과 반은 사람이고 반은 물고기인 생물체의 사랑을 그린 19금 영화다.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서사지만 영화를 보는 중에 나도 모르게 왜 눈에서 물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주인공 엘라이자(샐리 호킨스 분)는 강에서 버려진 채 발견되어 고아원에서 자랐다. 말을 알아듣지만 하지는 못한다. 그녀의 직업은 비밀 우주 연구소의 청소부다. 밤 아홉 시에 일어나 자정에 출근해서 동틀 무렵 퇴근한다. 허름한 극장 건물 위층에서 혼자 살지만 외롭지는 않다. 옆방에 사는 화가인 노인 자일스(리차드 젠킨스 분)와 텔레비전을 함께 보며 식사를 하고 고민을 들어주는 일상을 공유한다. 그는 다니던 회사에서 쫓겨났고 단골 파이 가게의 남자 점원을 짝사랑한다. 따뜻한 심성의 직장 동료 젤다(옥타비아 스펜서 분)는 가부장적인 남편 험담으로 시작해 일하는 내내 말하기를 쉬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와 가정 모두에서 핍박 받는 소수자다. ...(중략)... * 환경과조경 360호(2018년 4월호) 수록본 일부 서영애는 조경을 전공했고,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국가 권력과 정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워싱턴 포스트」 여성 발행인의 내면을 다룬 영화 ‘더 포스트’는 울림을 준다. 남자들에 둘러싸여 힘든 결단을 해야 하는 그순간, 메릴 스트립의 떨리는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 [에디토리얼] 절제와 진정성
    새봄을 알리는 화창한 표지로 시작하는 이번 3월호에는 스웨덴을 대표하는 조경가이자 유럽 조경계의 지성으로 이름난 토르비에른 안데르손Thorbjörn Andersson의 근작 세 점과 에세이 한 편을 싣는다. 스웨덴과 미국에서 미술사, 건축, 조경을 전공하고 1980년대 초부터 조경가로 활동해 온 안데르손은 지난 30여 년간 조경 설계를 통해 도시 공공 공간의 사회적 역할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펼쳐왔다. 특히 그의 작업에는 북유럽 디자인 특유의 검박하고 섬세한 디테일, 단순과 절제의 미덕, 실용적 기능성이 도시 공간을 통해 구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케아IKEA와 에이치앤엠H&M의 고향 스웨덴만큼 자연 환경이 디자인 문화에 영향을 미친 나라는 없을 것이다. 스웨덴의 넓지만 척박한 토지, 제약이 많은 기후와 지형은 사회민주주의 정신과 결합되어 패션과 가구, 음악과 영화, 제품 디자인과 건축은 물론 도시설계와 조경에서도 “더 아름다운 실용”을 지향하는 “굿 디자인”의 전통을 낳았다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전 세계적으로 식지 않는 북유럽 디자인 열풍의 핵심은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군더더기 없는 디테일,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자연스러움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 같은 이런 가치를 일상에서 실천한 문화적 토양이 곧 스웨덴 디자인의 열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토르비에른 안데르손의 조경 작업은 스웨덴 디자인 정신의 도시 공간적 버전이라 할 수 있다. 이번 호 지면에 소개하는 그의 캠퍼스, 묘지공원, 기업 정원은 서로 다른 성격의 도시 공간이지만, 우리는 그 차이를 가로지르는 절제와 실용의 미학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안데르손은 『환경과조경』이 많은 지면을 할애해 특집 격으로 다루고 싶은 ‘위시 리스트’ 조경가 중 한 명이었는데, 이번에는 우연한 기회에 다소 급하게 섭외되어 그의 작업 전체를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홈페이지http://thorbjorn-andersson.com에 공개된 포트폴리오를 통해서라도 그가 지향하는 절제thrift와 진정성authenticity의 도시 조경 전반을 살펴보시길 권한다. 조경가에 의해 생산되고 있는 동시대의 많은 외부 공간이 얼마나 과장과 허위로 가득 차 있는지 반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안데르손의 조경가로서 이력 중 특이한 점은 30년 이상 북유럽의 대표적 조경가로 활약해 왔음에도 자신의 설계사무소를 경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한 사무실에 적을 두고 있지만 독립적으로 작업하며 때로는 다른 조경가, 건축가, 도시계획가와 유연하게 협력하는 이채로운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독립 조경가, 프리랜서, 1인 오피스 등 여러 가지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그의 작업 방식이 어떤 장점과 한계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면밀한 토론이 필요하다. 그러나 안데르손의 방식은 최근 국내외의 젊은 세대 조경가들 사이에서 시도되고 있는 1인 또는 소규모 작업 집단 경향과 관련해서 참고할 부분이 적지 않다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는 토르비에른 안데르손을 작품보다 글로 먼저 만났다. 그는 실무 조경가로서는 드물게 여러 책과 잡지를 통해 적지 않은 글을 발표해 왔다. 조경 작품 못지않게 검박하고 단순한 그의 글에는 현대 조경이 도시 공공 공간의 형성과 회복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지향해야 하는가에 대한 주장이 군더더기 없는 정제된 논리로 담겨 있다. 이를테면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vs. 조경 설계”에서 그는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이 옴스테드나 맥하그의 접근 방식과는 달리 “건축 중심의 블록이 아니라 공공의 공간”을 출발점 삼아 도시의 생존과 회복을 꾀하는 시대정신이라고 해석하면서 동시대 조경 설계의 역할을 강조한 바 있다(Topos 71, 2010). 이번 『환경과조경』 3월호를 위해 그가 보내 온 에세이 “설계 방법으로서 자연”은 짧고 간소한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현대 도시에 자연의 진정성을 제공하는 조경의 가치를 담담히 웅변하고 있다. “우리는 도시 교외 지역들이 상상 속에만 존재할 법한 고풍스러운 작은 마을을 흉내 내는 모습을 목도하고 있으며, 에어컨이 가동되는 쇼핑몰들은 전 세계 이국적인 명소를 보여주는 환상의 테마 상업 시설로 설계되고 있다. 이는 가공된 환경일 뿐 진정성과는 동떨어져 있다. 조경은 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 자연,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연스러움은 진정성 넘치는 경험을 제공한다. … 이러한 경험은 … 자연과 도시 사이에 개념적 연결고리를 형성한다. 자연에 대한 경험은 예측 불가능한 개방적 성격을 띠며 변화의 여지를 갖고 있다. … 자연은 현대 도시의 특성을 반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연은 나무, 식물, 바위 그리고 개울 같은 대상이 아니라 변화의 양상을 품은 여러 과정의 집합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 길고 추웠던 겨울이 다시 찾아온 봄에 길을 내주고 있다. 이번 3월호가 독자 여러분의 봄기운 가득한 친구가 되길 소망한다. 이번 호에는 자르뎅 드 바빌론(Jardins de Babylone)의 도전적 작업들도 소개한다. 진취적 실험을 펼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마인드도 갖춘 이 젊은 조경가 그룹의 대표 아모리 갈롱(Amaury Gallon)과의 인터뷰를 본지 프랑스 리포터 박연미 씨가 담당해 주었다. 작품 섭외와 인터뷰를 진행해 준 수고에 감사드린다. 집적경관, 축조경관, 절충경관으로 이어진 최영준 소장(Laboratory D+H)의 ‘그들이 설계하는 법’ 연재가 이번 호로 막을 내린다. 그간의 노고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얼마 전 로스앤젤레스에서 서울로 옮긴 그의 베이스캠프가 ‘전진경관’의 새로운 기지가 되기를 기대한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이미지 스케이프] 빛, 창, 공간
    새 달이 시작되면 어김없이 『환경과조경』이 도착합니다. 반가운 마음에 책을 받아 들고 어떤 글들이 실렸나 살펴봅니다. 생각, 사진 그리고 소식이 적당히 섞인 『환경과조경』, 그야말로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책을 보다 정신이 번쩍 듭니다. ‘아, 벌써 원고 마감할 때구나. 이번엔 어떤 사진으로 글을 쓰나?’ 사진 폴더를 뒤적입니다. 그 달에 찍은 신선한(?) 사진들이 별로 마음에 안 들면 오래된 사진들까지도 들춰 봅니다. 추억이 담긴 음악이 옛 시간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예전 사진을 볼 때면 사진을 찍던 순간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에겐 사진이 일종의 기억 저장 매체이기도 합니다. 다행히 이번 사진은 며칠 전 답사한 당진 아미미술관의 전시실 모습입니다. 아미미술관은 폐교된 초등학교를 미술가 부부가 전시 공간으로 새롭게 꾸민 곳인데, SNS를 통해 사진들이 소개되면서 최근 부쩍 유명해지고 있습니다. 전시실 한쪽 면을 넓게 차지하는 창문들과 마룻바닥을 통해 예전 교실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지더군요.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오니 전시실의 작품들이 또 새롭게 보입니다. 전시실 흰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전시물과 어우러져 또 하나의 작품이 됩니다. 역시 공간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것은 빛인가 봅니다. 조경에 비해 건축은 훨씬 더 치열하게 빛을 고민하던데, 조경가도 빛에 대해 조금 더 신경을 쓰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미미술관. 따뜻한 빛이 가득한 전시실 내부도 좋았지만 기다란 복도와 운동장에서 느껴지는 작은 시골 학교의 느낌도 참 좋았습니다. 조금 더 따뜻해지면 다시 한 번 가고 싶은 곳입니다. 주신하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거쳐, 동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토문엔지니어링 건축사사무소,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 도시건축 소도 등에서 조경과 도시계획 분야의 실무를 담당한 바 있으며, 신구대학 환경조경과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원예생명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조경 계획 및 경관 계획 분야에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있다.
  • [그들이 설계하는 법] 절충경관
    잠시 자고 일어나 시계를 보니 3시 34분. 알람을 못 들었는데 눈이 떠졌다. 상하이의 밤은 아직 컴컴하다. 이제 3박째. 첫 이틀 동안 클라이언트 그룹과 설왕설래하며 잡아놓은 방향대로 수정하려 막상 도면을 펴니 생경하게 다가온다. 내일 있을 보고에서 옥상 정원의 계획안을 확정 짓지 못하면 공사 일정에 차질이 생기거나 실시 설계팀이 무너지게 된다. 폴더를 뒤적여 라이노 파일을 찾는다. SHCL001_6F_Rooftop_16.3dm, 16번째 수정본이다. 그간 전반적인 변화가 있는 대규모 변경이 서너 번 있었다. 어제 오후 조경부 부장이 지켜보다시피 하는 상황에서 태블릿으로 그린 평면을 클라우드로 보내 3차원 모델의 바닥에 깔아보는데, 모퉁이에 그려놓은 입면의 비율이 틀렸음을 깨달으며 식은땀이 나려 했다. 다행히 높이 값을 주어보니 그다지 나쁘진 않다. 어서 재질을 입혀 루미온으로 익스포트. 캐드에서 가장 멍청하면서도 스마트한 명령어는 ‘해치넣기’다. 많은 경우 캐드를 멈추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복잡한 영역에 대한 면적을 쉽게 알려준다. 수십여 번의 해치 끝에 나온 제곱미터 값, 아니 헤베 값을 넣고 엑셀의 수식을 돌린다. 항목별 총량이 나오고 채팅창에 받아 놓은 단가를 다음 열에 넣기 시작한다. 합계를 돌려보기 무섭지만 AutoSum 기능은 이미 매우 높은 첫자리 숫자를 보여주고 있다. 실수는 안 했는지 다시 면적을 구해보지만 고작 수십만 원의 오류를 찾았을 뿐 아직도 3백만 원 이상이 초과된 숫자가 맨 아래에 보인다. 물론 이것은 이윤이 전혀 없는 실행가에 가깝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결국 다시 스케치하기 위해 펜을 잡는다. 인천공항에 내리기 두 시간 남짓 남았다는 방송이 나온다. 노파심에 좌석 사이 전원에 랩톱을 다시금 연결해 본다. 불이 켜지지 않는, 배터리가 다 된 랩톱을 탓해도 소용없다. 항공기 좌석의 전압이 너무 낮다. 공원심의위원회에 재심의 요청을 결정한 어제 저녁, 분명하지 않은 변경 사항에 최대한 대응한 수정안을 머릿속에 계속 그려보며 준비한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심의에 상정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12시간 안에 시 담당 부서에 접수해야 하는데, 인천공항에 체류하는 14시간 동안 수정하고 변경해야 하는 80장 분량의 파워포인트와 조서들을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하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전원이 구비된 커피숍을 찾지만, 아직 문도 열지 않은 새벽 5시. 조건부 가결이라도 되어야 올해 예산으로 집행될 텐데…. 작은 기도를 읊조리며 작은 의자에 앉아 11시간을 줄곧 작업해 제출하고, 다시 태평양을 건너는 비행기에 오른다. 위의 일기 같은 몇몇 에피소드는 지난 몇 년간 설계 과정에서 겪은 일들이다. 설계는 결과물로 평가를 받고 설계팀 크레디트에 첫 번째로 이름이 올라간 사람이 주도해 만들어내는 듯 보이지만, 실은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여러 주체가 종합적으로 참여하고 절충해 만드는 합작품이다. 좋은 의미로 참여와 절충이지, 한 프로젝트를 둘러싼 많은 주체의 알력과 복잡다단한 절차가 대본에 없던 캐릭터로 설계라는 드라마에 출연해 수많은 갈등을 일으킨다. 의뢰인 측이 보내는 코멘트가 지난 몇 달의 노력을 일순간에 허사로 만들기도 하고, 설계와 시공 사이의 간극은 늘 멀기만 하다. 허가 절차나 녹지율 같은 행정적 요구 사항이 설계가의 발목을 굳게 잡고 있기에 막판 스퍼트는 없고 다리를 절며 다시 스타트 라인에 서야 하는 것이 설계의 마지막 레이스다. 이 모든 난관은 ‘갑’이라 불리는 의뢰인 또는 건축주가 발생시키지만 계약의 결과로 받는 서비스의 일부이기에 ‘그들’은 보통 관조하고 때로는 인내심이 바닥났음을 알려오기도 한다. 아주 가끔은 그들 중 일부가 같은 배에 타서 공동의 목적지를 향해 항해하는 반전도 있다. 모든 설계는 갑과 을, 제약과 기회 간의 절충의 역사다. 그 치열한 절충, 타협, 조정, 조율, 대응, ‘밀당(밀고 당기기)’의 결과로 경관에 경계가 그어지고 경관의 최종 모습이 결정된다. 설계가인 ‘그’가 초기에 그려낸 설계안이나 도면이 완공된 모습과 같은 경우는 지구상에 단연코 없다. 수많은 ‘그들’과의 절충의 담금질만이 최종 경관을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연재의 제목으로 적절한 것은 ‘그(들)이 설계하는 법’이 아니라 ‘그들과 설계하는 법’일 것이다. 상하이 믹시몰(The MixC Mall) 프로젝트의 기회가 왔는데, 위치도, 규모도 당시 우리 회사 입장에선 꽤나 좋은 위상의 프로젝트로 보였다. 간단한 화상 인터뷰를 하더니 다 좋은데 중요한 프로젝트이기에 내부 공모전을 진행할 예정이라며 계속 해보겠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이왕 뽑아 든 칼, 휘둘러 보기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열흘 남짓한 시간, 스케치 수준의 간 보기 결과물이 요구됐다. 알고 보니 경쟁 상대는 대상지 건너편의 대형 회사 사옥 캠퍼스와 조각 공원을 말끔히 설계한 아시아권에서 이름 있는 회사. 다행히도 주어진 짧은 시간에 그들보다 더 많은 결과물을 뽑아낸 우리에게 설계권이 부여됐지만, 계약 진행은 늦어져만 가고 그들의 간 보기는 계속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 프로젝트는 무려 7년을 표류하며 설계사가 세 번 바뀌고, 담당자들이 견디지 못하고 수차례 바뀐 악명 높은 프로젝트였다. 우리가 개입한 그 시점에도 누구나 알 법한 대형 사무소의 실시 설계가 이미 완료됐고, 포장 공사가 시작되어 포장재와 시설물이 현장에 쌓여 있는 상황이었다. 다시 설계를 바꾸게 된 계기는 이 집단의 모든 리더가 최근에 교체되어 프로젝트의 위상과 디자인 방향이 모두 초기화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생각보다 무서울 정도로 커다란 ‘예상할 수 없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일반적인 설계 결정 과정에서는 최종 결정권자의 비전과 선호를 잘 이해하고 있는 조경 부서 관리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들은 결정권자에게 최종 승인을 받아내기 위한 충분조건을 충족시키면서도 트렌드를 개척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설계사를 이끌며 조율해가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들의 코멘트 하나하나에 최종 결정자와 회사의 정신이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을수록 프로젝트 진행은 수월해진다. 그런데 리더가 다 바뀐 이 같은 상황에서 그들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제곱미터 당 시공비의 제한도 없이 모든 것이 열려 있는 상황에서 이미 정해진 촉박한 쇼핑몰 오픈 일정만은 분명했다. 또 하나의 명백한 사실이자 부담은 새로운 리더들이 이 프로젝트를 경영진 교체의 상징적 전환점으로 삼아 온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건물 외관이 90% 넘게 완성된 이상, 이제는 조경으로 차별화해야 한다는 점도 분명했다. 일반적으로 중국 상업 프로젝트의 경우, IP라 불리는 관심을 사로잡는 대상을 설정하고 그것을 중심 콘셉트로 삼아 설계를 풀어간다.2 예를 들면 중앙 광장에 동물 조형물을 세워놓고 그것을 각인시키는 홍보물을 지속적으로 생산해 프로젝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실무진들이 제일 먼저 요구한 것은 이런 방식을 탈피한 색다른 아이디어를 제안해 달라는 것이었다. 간 보기에 그칠 것이라는 의구심은 있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설계에 대한 기대감도 안은 채 내부 공모에서 제안한 안을 업그레이드해나갔다. 설계 대상지는 상하이의 주요 대로 중 하나인 우종로(Wuzhong-road)에 면하는 약 700m 길이의 슈퍼 블록을 모두 점유한다. 인접한 녹지대로 이어지는 길목이라 쇼핑몰 앞 70m 정도의 폭 중 약 40m의 구간에 공공 녹지대를 구축해야만 했다. 기본적으로 쇼핑몰의 주 입구부에는 각종 상업 이벤트를 위해 포장된 광장부가 필요하기 때문에 높은 비율의 녹지 확보가 도전 과제이기도 했다. 이처럼 쉽지 않은 대지 상황에서 주목한 점은 기다란 대지의 길이 그 자체였다. 이렇게 긴 도시 오픈스페이스는 흔하지 않은 기회의 공간이다. 방문자가 과연 이 공간을 어떻게 온전히 즐기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10,000개의 경관을 감상하는 길’3이라는 콘셉트로 독특한 도시 경험을 제공하는 특별한 산책로 중심의 조경 개념을 제안했다. 대지를 관통하는 하나의 길이 때로는 지면으로, 때로는 공중으로 떠가게 해서 녹지율을 낮추지 않으면서도 부지를 흥미롭게 걷게 하는 제안이었다. IP와 같은 상징물이 중심이 되면 시각적 자극과 인상만을 남기는 데 비해 다채롭게 걷는 행위를 통해 온 감각의 자극과 인상을 줄 수 있음을 강조한 개념인데, 클라이언트의 반응이 미지수였다. 의뢰인들의 공통된 특징 중 하나는 독특한 콘셉트를 요구하고서 정작 조금이라도 관례에서 벗어난 제안을 하면 의구심을 내려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명백한 모순 같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설계자에게 새로우면서도 실현 가능한 안을 뽑아내기 위해 취할 수밖에 없는 태도다. 이 모순을 풀 열쇠는 적절한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현실적인 사례 제시다. 마침 이번 아이디어의 좋은 레퍼런스로는 맨해튼 허드슨 야드에 지어지고 있던 토마스 헤더윅Thomas Heatherwick의 작품 ‘베셀The Vessel’이 있었다.4 도시를 경험하는 조망점을 다양하게 하는 것만으로 도시의 경험이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증명하는 몇 가지 이미지가 1번 안의 출발점을 끊어주었고, 그 전략을 담은 첫 스케치 발표를 본 실무자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안을 더 개선할 수 있는 의견을 교환하며 몇 번의 스케치를 반복한 끝에 개념 설계안이 발전됐다. 보행교를 제안하는 방식이야 그리 새롭지 않았지만 보행로가 전망대, 분수, 음악 산책로, 수변 다리, 물 위를 걷는 다리, 갤러리 길 등으로 변모하며 대상지를 훑어가는 제안이 그들에게 신선하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1차 발표 뒤 마케팅팀의 피드백이 분위기를 틀어 버렸다. 그들이 문제 삼은 쟁점은 폭이 100m나 되는 광장일지라도 그 중간에 떠 있는 보행교가 있으면 건물 전면부를 가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의견이 사실임은 인정하지만 가려지는 범위나 정도가 그리 크지는 않다는 것을 여러 차례 증명해보고자 노력했음에도, 완강한 타 부서들의 반대에 부딪혀 설계 방향을 조절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상업 프로젝트에서 공들여 결정한 건물의 파사드는 온전히 노출되어야 한다는 게 공공연한 공식이자 ‘그들’의 절대 원칙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권유받은 설계 방향은 설계자로서 가장 피하고 싶던 IP 중심의 접근이었다. 피하고 싶던 이유는 IP로 제안받은 대상이 프로젝트의 중국어명 ‘만상성万象城’의 두 번째 글자의 동음이의어인 동물, 즉 코끼리였기 때문이다.5 그러나 ‘을’인 우리 팀에겐 선택권이 없었고, 조경 부서도 우리의 안을 지지하지만 너무나 결정적인 건물 전면의 노출 문제이기에 손을 쓸 수 없었다.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승인될 수 있는 설계안을 뽑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설계팀만이 아니라 운영팀과 마케팅팀 모두의 승인을 얻고 건축팀의 지원을 받아야 임원진 리뷰에 도달할 수 있기에, 프로젝트의 중요도에 비례해 넘쳐나는 그들의 여러 의견을 수용하는 절충의 절차를 밟아야만 한다고 담당자는 위로했다. 코끼리. 대부분의 설계가가 가장 싫어하는 설계라 할 수 있는 직설적 설계 앞에 마음이 무거웠다. 일단 코끼리를 다루게 된 이상 지나치게 추상화하여 코끼리의 상象이 희미해지면 안 되는 것이 상업 프로젝트의 IP이기에, 코끼리 이미지를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우회적인 설계 어휘를 쓰기 위해 요구 조건과 결과물 사이의 거센 절충과 타협의 과정을 거쳤다. 중국 프로젝트를 하며 코끼리를 다루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당시 2주간의 작업 과정은 치열한 내적 갈등과 난해한조형의 시간이었다. 결과물의 제목은 ‘10,000개의 코끼리’. 조경 실무자들과 여러 대화 끝에 코끼리의 실루엣이나 코를 형상화한 요소가 상업적 분위기를 진하게 연출하는 결과물을 만들었다. 우리 팀에게는 만족과 불만족의 경계 밖에 있는 설계 콘셉트였기에 스스로는 여전히 가치 판단을 유보한 채 의뢰인 집단인 ‘그들’의 결정을 온전히 존중한 안이었다. 스스로도 뜨거움을 담지 못한 결과물이라 그런지 이에 대한 반응 또한 그다지 뜨겁지 못했다. 클라이언트의 예상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이 미지근함의 이유였는데, 우리 팀의 입장에서는 힘 빠지는 상황이지만 동시에 직설적 설계를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이 믿는 마케팅 트렌드를 위한 희생과도 같았던 실험의 시간이 지나고 첫 번째 안과 두 번째 안의 프레임워크를 절충해 최종안을 진행할 방향에 대한 피드백이 전달되었다. 절충안의 방향은 IP를 피하면서도 과도한 설계를 지양하고, (정의하기 어렵지만) 고급스럽고 (정의하기 더 어렵지만) 격조 있고 우아한 설계 스타일을 만들라는 지침이었다. 그들의 급작스러운 방향 선회가 어떤 연유인지 알아보니, 당시 구정 연휴를 이용해 일본의 성공적 프로젝트들을 답사하고 돌아온 상급자들이 최신 사례에 영향을 받아 설정한 방향이며 최고 결정자의 본래 경향도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일본 특유의 미니멀한 언어를 사용하고 절제된 형태에서 면밀한 디테일의 완성도를 요구하는 ‘스타일’이 요구 조건이었던 것이다. 설계가가 (직설적 설계 다음으로) 두 번째로 지양하고자 하는 설계가 아마도 ‘스타일’에 맞추는 설계일테다. 다시 한번 깊은 고민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일본과 중국의 시공 완성도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이 크기에 설계사 입장에서는 무리수가 매우 큰 방향 설정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반적인 중국 상업 조경의 스타일이 아닌 조경 공간을 만들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믿으면서 일본의 단순함을 중국의 콘텍스트에 녹이는 방향의 안을 발전시켜 나갔다. 실시 설계로 넘어가야 하는 시점이 가까워지면서 더 높은 지위의 결정권자와 긴밀한 소통을 하며 설계안을 완성해 나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설계자인 우리 팀부터 조경부 실무자, 조경부장, 다른 부서장, 지역 책임자에 이르는 여러 관련자의 공통된 목표가 중국 북부 지역 총책임자의 승인을 얻는 것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느낌이 분명해진 순간에는 수많은 사람이 한 개인의 기호를 맞추는 게 설계인가라는 회의감도 들었다. 하지만 결국 깨달은 것은 한 개인의 승인을 받는다는 것이 비단 그 책임자의 개인적 선호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니며, 그가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설정한 가장 성공적인 비즈니스 모델과 흥행을 낳는 비전에 가장 가까운 설계안을 만들어내기 위해 모든 구성원이 머리를 맞대고 노력해 합일점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이 클라이언트 회사는 2017년 중국 대륙에서 상업시설 중 부동산 실적 1위를 기록한 가장 거대한 ‘그들’이었고, 이 같은 관료 체계가 무수한 우회를 발생시켰지만 그러한 우회는 그들 집단 모두의 합의를 얻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어쩌면 더 큰 성공이 보장된 설계안을 위한 의미 있는 여정임을 서서히 느끼게 되었다. 오픈을 석 달 반쯤 남기고 드디어 계획안에 대한 최종 결정권자의 승인을 받아냈다. 전체 그림이 선명해지자 디테일을 구체화하는 단계가 시작됐는데, 큰 그림 안에서 설계 결정 절차는 짧고 단순화되어 이 지역 디자인 디렉터와 직접 소통하게 되었다. 그만큼 더 짧은 피드백 시간 안에 ‘그들’이 믿는 성공적인 디자인의 디테일을 달성해야 했고, 오픈 한 달 전까지 지속적으로 변경된 건물 프로그램 변화에 맞추어 수정해야 했다. 일반적으로 이처럼 빠른 결정이 요청되는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결론에 도달하는 방법은 옵션 두세 가지 정도를 제안하는 방식이다. 설계자에게는 두 배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발표와 그에 대한 피드백을 받은 후 또 다른 대안을 준비할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는 애초에 대조적인 두 가지 이상의 대안을 들고 가는 게 도움이 되기에 처음부터 여러 옵션을 제안하기도 한다. 이 프로젝트는 시공비 제한 없이 그들의 새로운 리더를 만족시킬 높은 표준의 흥행성 달성만이 목표였기에, 한 요소당 평균 8개 이상의 대안 설계를 진행해 디자인 디렉터와 마케팅팀의 지속적인 리뷰를 거쳤다.6 대안 개수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많았기에 디자인의 대안을 개발하는 순수 설계 시간만큼이나 여러 디자인 대안을 리뷰하며 결정하는 의사소통 과정에 긴 시간이 소요됐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의견을 통해 배우게 되는 현실적 정보가 많았음은 물론 때로는 그들의 아이디어를 직접 반영해 설계가 발전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광기 넘치는 동거가 오픈 한 달 전까지 이어졌다. 끊임없는 설계 수정, 재료 선택, 샘플 리뷰를 빈틈없이 요구하며 우리를 괴롭히던 그들은 어느덧 우리라는 이름으로 한 팀이 되어 있었다.7 현장 사무실의 한쪽 벽에 시뻘건 글씨로 적혀 있던 오픈 일까지의 카운트다운을 마치고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완료됐고, 불가능할 것만 같던 모든 일정을 그들과의 설계를 통해 가능으로 이끌어낸 인생 최대의 난작難作으로 기록됐다.8 지붕감각(Roof Sentiment) 2015년 4월,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 당선팀에 축하 메시지를 보냈는데, 당선작의 조경을 의뢰하는 반가운 답장이 왔다. 설계를 구체화하기 시작한 초반이었는데, ‘지붕감각’ 파빌리온의 주인공인 특별한 지붕을 원안의 형태와 소재로 실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치열한 스터디가 진행되고 있었다. 정확한 예산이 파악되어야 조경의 규모와 복잡도도 가늠할 수 있기에, 건축 소장들과 함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중국인 친구인 우리 사무실 파트너에게 갈대발 업체 수소문을 부탁해 보았다. 파트너는 산둥 지방의 거대한 갈대밭을 배경으로 3대째 갈대발을 생산하는 업체를 운 좋게 한 번에 섭외해냈다. 건축팀의 몫인 갈대발 지붕의 순조로운 진행을 기대하며 그 아래의 땅을 살펴나갔다. 석 달 안에, 그리고 극히 제한된 예산 안에서 시공과 설치를 끝내야 하는 상황이라 모든 결정이 실시 설계 수준이어야 했다. 다시 말해, 정확한 제품 정보와 품이 동반되어야 했다. 한국의 가격 정보와 실상에 대한 지식과 상식이 전무한 때였다. 이번엔 한국에서 실무를 하고 있는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가깝게 지내는 시공 전문가를 소개해 주었다. 이렇게 세 명은 다 같이 만난 적도 없었지만 인터넷 3인 통화로 수차례 초기 검토를 진행했고, 마침내 몇 주 뒤 현장인 MMCA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나 팀 ‘동산바치’란 이름으로 의기투합해 ‘지붕감각’ 조경의 시공까지 함께하게 된다.9 당선작인 SoA의 ‘지붕감각’은 대상지 MMCA가 위치한 오래된 서울의 한옥과 궁궐의 전통 지붕 아래에서 쉽게 느낄 수 있는, 지붕으로부터의 공간적 감각을 극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파빌리온이다. 이 극적 경험은 ‘과장된 지붕’이 만들어내는 무게감과 깊이에서 오는데, 단청으로 채색된 무거운 목조의 전통 정자나 누각이 아니라 자연 소재인 손으로 엮은 갈대발의 지붕을 10m 높이의 수직적 주름 형태로 만들었다. 즉 현대 다층 건축물의 평 슬래브 사이에서 느끼는 지붕에 대한 제한적 경험이 갈대발 사이로 확장되는 경험을 제공하는 프로젝트다. 건축의 아래층을 구축하는 조경의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건축물의 가장 원초적이고 순전한 요소인 지붕과 조경이 뿌리내리는 대지라는 두 요소 간의 관계, 즉 건축과 조경의 관계를 맺고 조율하는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조경과 가장 직접적 영향을 주고받는 부분은 큰 지붕을 지지하는 구조체와 그 구조체의 기초가 땅과 만나는 부분의 처리 방식이었다. 한 묶음의 구조체는 네 개의 원형 강관이 중간에서 교차되어 묶인 다발 기둥으로, 위로는 갈대발 걸이 역할의 보를 받쳐주고 아래로는 기초와 접합되는 형상이다. 부족한 예산 때문에 원형 강관의 마감 처리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들’의 극적이고 자연을 닮은 지붕 아래에 차갑고 시퍼런 느낌의 철재 다발 기둥이 보행자 레벨에서 그대로 노출될 상황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개의 둔덕을 기둥 하부에 만들고 그 위에 적절한 높이의 식물을 밀식해 기둥의 삭막함과 지면과의 날 선 만남을 완화하는 개념을 기초로 한 초안을 만들었다. 개략 내역을 뽑아봤는데, 그제야 주어진 예산이 제안된 지형 요소를 최소화하고 나머지의 예산을 표면 처리에만 사용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함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설계의 초점을 우회하여 어떻게 바닥 면을 처리하면 가장 경제적이면서도 최대한 아름다운 효과를 낼 수 있을지 스터디했다. 다발 기둥 기초부의 조경 둔덕은 나머지 예산이 허락하는 만큼의 크기로 조성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갈대발 사이로 떨어지는 햇빛과의 만남, 방문자가 밟았을 때의 느낌이나 소리, 갈대발의 재질감과의 조화, 단가 등을 고민한 끝에 내린 1차 바닥 재료는 쇄석이었다. 인왕산을 향하는 경관축을 따라 주름을 잡아놓은 지붕의 결 방향과 평행하게 두 가지 색의 쇄석을 이용해 바닥에 선형 패턴을 만들고, 그 패턴의 경계가 전시 기간 동안 방문자들의 발자국에 따라 자연스럽게 서로 섞이는 일종의 참여적 퍼포먼스로 만들어 가는 안을 제안했다. 긍정적인 건축팀의 반응과 달리 궁극의 클라이언트인 미술관 측의 견해는 달랐다. ‘그들’은 쇄석이 마감재로 쓰이면 방문하는 아동들이 쇄석을 가지고 놀다가 집어던지기 마련이고, 미술관의 전면이 유리 소재이기에 파손의 우려가 크다는 매우 현실적이고 관리 중심적 의견을 냈다.10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운영자인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다른 소재를 찾아 나섰다. 표면 소재의 후보군인 고무칩은 안전하게 다양한 질감을 연출할 수 있지만 국내에서는 폐타이어를 재활용한 저렴한 제품의 생산처를 찾을 수 없어 단가가 높은 제품을 써야만 했다. 또 다른 표면 소재인 폐유리를 마모 처리한 반투명 인공 자갈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조달이 어려울 뿐 아니라 쇄석과 같은 안전 문제를 야기할 소재였다. 갈대발의 직조가 대부분 진행되고 기둥의 구조 또한 확정되던 즈음, 현장에서 갈대발의 실제 질감을 느낀 모든 팀원은 더욱 자연적인 소재로 눈을 돌렸고, 멀칭재로 쓰이는 수피로 만든 바크가 좋은 대안으로 떠올랐다. 안전에도 문제가 없고 비용면에서도 저렴하고 재질의 성격도 갈대발과 매우 유사한 1석 3조의 소재였다. 게다가 부족한 예산 때문에 밀도 있는 식재가 어려운 식재 마운드에 노출될 식물 사이의 토양도 자연스럽게 가려주고 평평한 바닥과 융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새벽 습기를 머금거나 관수를 하고 나서 물기에 살짝 젖은 적송 바크는 소나무 숲 속의 향기를 지붕 아래에 채워주며 감각의 확장을 가져다주는 화룡점정의 소재였다. 안전에 대한 다소 지나친 그들의 염려를 해결하기 위해 차선으로 채택한 소재가 오히려 기대 이상의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프로젝트의 이름에 걸맞은 감각을 일깨우는 경험의 단계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는 소재가 된 것이다. 적송 바크는 이 공간에 적절한 습도와 향기 그리고 걸음걸음마다 숲 속을 걷는 보행감을 선사해주며, 서울 한가운데에서 발만 들여놓으면 자연 속으로 순간 이동할 수 있는 자연으로의 통로이자 마법 같은 미기후의 공간인 ‘지붕감각’의 조경을 완성했다. 앞의 상하이 프로젝트와 정반대로 예산 규모는 한정적이다 못해 전체 팀이 손해를 보아야 할 정도의 비관적 상황이었다. 또 운영과 관리 주체인 미술관은 협조적이기보다는 안전 문제와 기존 포장의 보호에 더욱 신경을 쏟았지만, 그들의 우려에 절충한 결정이 최종적으로는 예상외의 결과와 함께 의뢰인의 우려도 불식시키는 선택이 되었다. 창천문화공원 한 건축사무소와의 오랜 협업 끝에 마침내 처음으로 공공 프로젝트 공모전의 당선 소식을 들었다. 대상지는 8090시대 대학 문화의 1번지였던 신촌을 다시 청년 문화의 중심지로 조성하려는 ‘신촌 도시재생사업’의 거점 지역 중 하나인 창천공원. 이 공원을 청년 문화 전진 기지로 탈바꿈하는 프로젝트였다. 인접한 백화점의 주차 타워와 중심 거리에서 이격된 위치 때문에 늘 그늘이 드리워지는 이 공원을 젊은이를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 신촌 지역을 다시 홍대만큼의 중량감을 갖도록 회복하는 것이 목표였고, 청년 문화 콘텐츠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청년 문화 발전소를 조성하는 것이 해당 구청의 요구였다. 우리 팀의 제안은 공원 중심에 길게 건물을 배치하되, 1층의 공원부는 파빌리온과 같은 최대한 개방된 구조로 열어주는 것. 주변 건물과 비슷한 규모의 적절한 상부층을 두어 실내의 청년 활동을 지원하는 건물이 되도록 하며, 공원을 휘감는 조경의 중추 골격이 건물과 맞물려 긴밀한 관계를 맺는 동시에 도시와의 교호도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건물이 공원의 중앙부를 가로지르기에 공원 전체를 청년 문화의 콘텐츠가 생성, 연습, 소비되어 즐길 수 있는 장으로 만들기 위한 중심이자 배경이 되도록 배치한 결과물이라 자평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모전 당선 직후의 심사 결과 종합 회의에서 건물의 위치가 커다란 논란거리가 되기 시작했다. 토지 이용이 공원으로 지정된 땅이고 개선 공사를 위해서는 상위 부처인 시 단위의 심의를 거쳐야 하는데, 현재의 계획안은 공원처럼 보이지 않기에 심의 통과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라는 게 담당 부서의 의견이었다. 조경 관련 심사위원 중 일부가 공원 내 건물에 대해 근본적으로 반대한다는 것도 문제였다. 사업이 준비되고 과업 지시서가 작성되는 과정에서 이 모든 것이 예측되고 반영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들었지만, 이미 공모전이 완료된 상황에서 이 같은 행정적 한계는 설계사와 지자체 모두가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이자 ‘그들이 이미’ 답을 내어놓은 룰이었다. 다수의 심의위원에게 ‘공원의 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 예상된 청년문화센터 건물의 존재감을 줄이기 위한 대안들을 만들며 가장 난관이 될 공원 심의를 통과하기 위한 절충안 수립에 들어갔는데, 사실 완전히 새로운 계획안에 가까웠다. 여러 다른 위치를 검토했지만, 현존하는 경로당 건물과 비슷한 규모와 위치의 건물을 지어 새 건물의 존재감을 줄이는 방향이 가장 설득력 있는 대안이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결정은 조경에게는 기회이자 동시에 도전이었다. 현 위치인 공원 서측은 공원의 안쪽에 해당하기에, 건물이 그곳에 위치하면 건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공원 활성화의 촉매 효과가 공원의 중심이나 바깥인 동편에 비해 낮기 때문이다. 대상지 동쪽으로 편중된 도시 문화의 무게중심을 서쪽으로 끌어오는 과제가 상당 부분 조경으로 넘어오게 되는 대목이었다. 이러한 무게중심의 변화에 대응하여 도시의 에너지를 더욱 공원 안쪽인 서측으로 끌어올 수 있는, 조경 중심의 강력한 구심점 구축을 대상지 남측 삼각 모서리 공간에 제안했다. 이곳은 1m가량의 등고 차이를 이용할 수 있고, 명물 거리로 열린 대지 동측과 상업 가로인 북측 가로에 비해 독립된 공간이었다. 우리 팀은 이곳에 수직적 상징성과 수관 하부의 활용도가 높은 메타세쿼이아로 구성된 작은 숲을 제안했다. 백화점이 드리운 그림자 대신 공원의 나무가 드리우는 생명력 있는 그늘 쉼터를 만들어 주고, 규모 면에서도 남측에 위치한 높은 건물에 대응하는 요소가 될 수 있기를 기대했다. 무엇보다 도심 한가운데에서 나무 아래 쉼터라는 독특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 자체가 청년문화센터와 함께 이 공원으로 시민들을 이끄는 양대 구심점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건물 외관은 명소를 만들겠다는 구청의 의지가 담겨 한층 더 상징적인(iconic) 외피를 갖게 되었고, 메타세쿼이아 숲과 함께 그들이 구상한새로운 공원의 얼굴이 만들어져가고 있었다. 첫 번째 절충안이 공원과 건물, 조경과 건축의 사이좋은 공생과 충분한 화제성을 만들 수 있는 안이라고 판단했지만, 1차 공원 심의위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여전히 복잡한 대학가의 비워두어야 할 오픈스페이스를 건축물로 채우는 생각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버리지 않았다. 조경하는 사람으로서는 반가운 의견이면서도, 점유율도 낮고 공원과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이 충실한 현재의 건축 설계가 그들에게 여전히 공원의 악으로 보이는지 아니면 공원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가치가 우선인지 알 방도가 없었다. 다행히도 공식 심의 결과문에서 공원 내 건물에 대한 무조건적 반대는 철회되어 전면적 수정은 피할 수 있었으나, 이번에는 남측의 도시숲이 공원의 유연성을 저해하니 좀더 열린 공원으로 조성하라는 의견이 개진되었다. 유연성은 오픈스페이스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가장 논란이 있을 수 있는 주제 중 하나인데, 이를 문제시한 그들의 의견이 그리 반갑지는 않았고 지하고를 높게 유지하고 그 하부를 유연하게 쓰도록 한 의도가 그들에게 읽히지 않았는지 답답했다. 아무리 지하고가 높은 수목을 여유 있게 배치한 숲이라도 그 공간이 크게 탄력적인 공간으로 쓰이기 어렵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저항할 수 없었고, 결국 수용해야만 했다. 두 번째 최종 절충안은 숲이 있던 자리에 청년 문화를 표출할 수 있는 원형 무대 광장인 ‘신촌포럼’을 만들어 그들이 강조한 공원의 개방성과 유연성을 증진하는 안으로 정리되었다. 예산 집행을 위해 심의 통과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기에 그들의 의견에 순종하듯 그대로 따르고 서둘러 마련한 절충안으로 수정하여 통과를 받아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스스로에게 그리고 여러 명의 그들에게 묻고 싶다. 공원 내부의 건축물이 디자인과 상관없이 반드시 공원을 해치는 악인가? 그리고 공원 내의 작은 숲 공간이 공원의 유연한 이용을 막는 것인가? 우리 모두는 이 공원에서 진정한 공공의 가치를 끌어내었는가? 앞에서 ‘그들’이라는 3인칭 복수 대명사를 설계자가 아닌 다른 모든 주체를 지칭하는 데 의도적으로 많이 썼다. 의뢰인, 디벨로퍼 집단, 건축가, 행정 주체, 심의위원, 또는 다른 조경가들. 이들 모두는 갑이든 을이든, 우리 편이든 상대편이든, 모두 다 그들이었다. 그들과의 얽히고설킨 설계 이야기를 적고 보니 그들을 이해하고 절충을 이뤄내지 못했다면 새로운 경관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새삼 느끼며, 주변에 있던 모든 그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나도 누군가에겐 그들중 하나라는 점을 잊지 않고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영감을 주는 그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그들이 설계하는 법’ 연재의 마무리다. 십수 년 동안 땅덩이를 놓고 고민해온 소사를 ◯◯경관이라는 제목에 끼워 맞추어 집적, 축조, 절충이란 단단한 발음의 어휘로 묶어보았다. 정리하고 싶었던 이야기, 끝없이 영감을 주는 대상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과 밀고 당기던 이야기를 담았다. 다음에 이렇게 돌아볼 기회가 있을 때는 주변의 이웃들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든 이야기를 담을 수 있기를 바라보며 연재를 마친다(연재 끝). **각주 1. (제목)이런 질문을 던져 본다. 모든 설계의 끝자락에 절충과 타협이 기다리고있다고 해서 미리 한발 물러선 설계를 하는 것이 현명한가? 설계가마다생각이 다르겠지만, 나의 대답은 “아니요”다. 절대 아니다. 결국 절충은너무나 여러 가지 형식과 이름으로(원가 검토, VE, 각종 심의 등) 거쳐야하기에 피할 수 없는 절차다. 그런데 설계가가 처음부터 예산, 규제 항목, 취향 등과 같은 제한 요소에 지나치게 구애받은 채 설계를 하면 좋은 설계를 도출하기 어렵다고 본다. 처음부터 죽을 쑤어갈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구첩반상을 차려갈 각오로 하다 보면 나중에 한두 가지 찬이빠지는 경우가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고, 그러다가 정 죽을 쑤어야 하면언제든 물을 부으면 되는 것이다. 특히 경계해야 하는 것은 김치 한 가지에 흰 죽만 내놓는 수동적이고 이미 절충된 경관의 재생산이다. 조경설계가 내놓을 수 있는 여러 재료를 이용한 깊은 맛의 잔칫상을 만들어가보고, 때로는 조경이 더 능동적으로 건설 환경에 참여하며 우리 영토밖으로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 의미 있다고 믿는다. 2.영어로 ‘지적재산권’을 의미하는 ‘Intellectual Property’의 약자인 이단어는 중국적 맥락에서 변용된 의미로 쓰이고 있다. 원래는 영화, 게임, 출판계에서 일종의 상징물이나 캐릭터를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여러제품이나 시리즈물로 재생산할 수 있는 재료가 되는 상업적 콘텐츠를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가, 부동산 개발 분야에서는 한 프로젝트를 다른 프로젝트와 차별화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오브젝트를 의미하는 어휘가 되었다. 이 오브젝트는 하나의 개발 프로젝트를 대표하는 용도이기에 지적 자원을 넘어 정체성을 규정하는 상징물이라 볼수 있다. 3.‘The MixC’의 중국어 이름은 ‘만상성’으로, 만이 의미하는 무수함을 담으려 했다. 4.http://www.heatherwick.com/project/vessel/ 5.같은 디벨로퍼가 개발한 같은 이름의 쇼핑몰이 2주 차이로 선전에도 오픈했는데, 이곳에는 코끼리 형상의 조형물이 프로젝트 중앙에 설치되었다. 6.포장의 대안은 셀 수 없고, 선큰 광장은 14가지, 중앙 입구부 드롭-오프(drop-off)는 20가지, 6층 옥상 정원은 16가지의 대안 설계가 진행되었다. 7.설계 일을 시작하고 가장 뿌듯했던 말을 그들의 선봉대에 섰던 클라이언트에게서 들었다. “이렇게 같이 지옥과 같은 시간을 보내고 나니 내가직접 설계를 해보고 싶다. 그리고 하게 되면 당신 회사에서 같이 하고싶다. 이건 진심이다.” 8.이 프로젝트와 함께 부임한 조경부장의 첫 성과 보고 마지막 페이지는내 여권의 중국 비자 페이지였다. 2017년 미국에서 상하이로 간 횟수는9번, 체류일의 합은 두 달이 조금 넘는다. 9.이렇게 만난 인연이 이어져 ‘2017 젊은 건축가 프로그램’의 설계와 시공도 완료했다. 현재는 설계와 시공을 함께하는 집단으로 활동 중이다. 10.실제로 조경부가 완공된 당일, 한 초등학생이 안전 펜스 사이로 몰래들어왔다. 기초 보강재로 쓰인 쇄석이 노출된 부분을 뒤적여 돌을 찾더니 미술관 건물로 던지는 상황을 목격할 수 있었다. 최영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설계 대학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 그룹(SWA Group)에서 다양한 성격의 설계 및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미국조경가협회상(ALSA Honer Award), 아키프리 인터내셔널(Archiprix International) 본상, 뉴욕 신진건축가공모 대상, 제4회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 대상 등을 수상했다. 2014년에 로스앤젤레스 기반의 설계사무소 Laboratory D+H를 공동 설립하고 L.A., 센젠, 상하이에 이어 서울 오피스를 꾸려 나가는 중이다.
  • [가까이 보기, 다시 읽기] 불완전함과 시간이 빚은 자연스러움
    알록달록한 색상의 포장석을 켜켜이 쌓아 만든 독특한 디테일의 포장이다. 검은색, 흰색 그리고 붉은색과 노란색까지 다양한 색상의 화강석 판석을 세워 쌓듯이 바닥에 깔아놓았다. 각각의 판석은 대략 230mm 너비에 30mm 폭의 좁고 긴 모양으로, 100mm 깊이로 땅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포장의 레이아웃에는 길이쌓기running bond 같은 정형적인 포장 패턴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포장 줄눈의 배열에 어느 정도 규칙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를 철저하게 따르고 있지는 않다. 포장 숙련공의 손재주와 판단에 따라, 하나하나 다른 색상의 돌을 고르고, 전체와 조화를 이루도록 쌓아나간 것으로 보인다. 포장석의 이음매는 오픈 조인트open joint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흙이 그 틈을 메우고 군데군데 잡풀이 자라고 있다. 조인트에 흙이 채워지면서 불규칙한 폭의 이음매가 드러난다. 그렇지만 이것이 불완전한 디테일이나 시공상의 실수로 보이기보다는, 마치 손 스케치처럼 자연스럽고 따듯하게 느껴진다. 포장석을 재단한 모양 또한 반듯하고 정확한 형태의 직사각형이 아닌, 모서리가 닳고 이지러진 모양으로 자연스러움을 더한다. 색상의 다양함과 석재를 재단한 모양의 불규칙함, 그리고 줄눈의 불완전함으로 연출되는 자연스러움은 설계가가 하나하나 완벽하게 도면에 명시하여 컨트롤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솜씨 좋은 시공과 함께, 시간에 따른 자연의 레이어가 추가되어 완성된 디테일이다. 이 포장석 길은 2004년 완공 당시에는 원래 흙다짐 포장이었지만, 이는 5년도 지나지 않아 풍화 작용으로 인하여 휠체어 사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울퉁불퉁하게 망가져버렸다. 견고한 새 포장 방법의 모색 끝에, 부엌의 조리대countertop를 시공하고 남은 화강석 조각을 모아 포장 재료로 재생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포장 재료의 알록달록한 색상은 자투리 재료를 사용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결과다. ...(중략)... 안동혁은 뉴욕에 위치한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에서 활동하고 있는 펜실베이니아 주 등록 미국 공인 조경가(RLA)다.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현재 회사에 8년째 근무하면서 Philadelphia Race Street Pier, 부산시민공원, London Queen Elizabeth Olympic Park, Hong Kong Tsim Sha Tsui Waterfront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다. * 환경과조경 359호(2018년 3월호) 수록본 일부
  • [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 차명호 섬이정원 대표 섬이 곧 정원이다
    남쪽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안온한 계곡은 바람도 잠잠했다. 태양을 받아안듯 팔을 벌린 초겨울의 남해, 정원 산책은 한마디로 행복감이었다. 다랑이논이라는 지형 위에 다양한 형식의 컨템퍼러리 가든을 제시한 섬이정원. 수백 년 전에 조성된 둠벙과 농업용 수로라는 문화재급 경관을 그대로 살리면서 우리식으로 귀화한 유럽 스타일과 노하우를 접목시켰다. 외래종과 토종이 서로 어울려 자라고 반딧불과 논의 생물이 번성하는 곳. 우리 국토는 하나의 큰 정원이라는 깨우침을 주는 곳이다. 발아래 펼쳐진 남해 바다와 다도해 섬들의 풍광은 ‘섬이 곧 정원이다’라는 뚜렷한 철학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오르락내리락 높낮이가 다른 다랑이논은 누군가 오래 전에 쌓은 돌담으로 지탱된다. 그렇다, 오래됐다는 것이 핵심이다. 거기에 열한 개의 작은 정원이 각각의 방처럼 다른 주제를 선보이며, 때로는 이태리처럼, 때로는 캘리포니아스럽게 펼쳐진다. 다랑이논은 산 위의 바다 같다. 정원이 물 위에 섬처럼 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초겨울이라 모든 것이 말라 있을 법한 계절이었지만, 섬이정원의 곳곳은 물길과 연못으로 가득했다. 한겨울에도 풍성함과 생동감을 주는 물소리는 반도의 남쪽 끝을 실감케 한다. 정원이란 해 보기 전엔 결코 모르는 것이다. 엄청난 노동이다. 불확실성과 비예측성이 지배하는 정원을 혼자의 힘으로 가꾼다는 것은 더욱 상상하기 어렵다. 그래서 섬이정원은 빼어나다. 무엇보다 정원 자체에 집중하는 사람, 차명호 대표 개인의 취향과 안목이 차분하고 짙게 반영된 곳이라 더욱 값지다. 철저하게 나만의 정원인데, 역설적이게도 그 어느 곳보다 공감되는 정원이기 때문이다. 50톤의 자갈을 수레로 깔았다. 나무 한 그루, 바닥 한 뼘에도 큐레이터로서 그의 판단과 손길이 속속들이 채워져 있다. 어쩌면 채우는 것은 돈으로 가능하지만, 비우는 것은 안목일 수밖에 없다. ...(중략)...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뉴욕에서 10여 년간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하며 저서 『시티오브뉴욕』을 펴냈고,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다. UNKNP.com의 공동 창업자로서 뉴욕시립미술관, 센트럴 파크, 소호 및 대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에서 개인전 및 공동 전시를 가졌다.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에 생태조경학전공 교수로 재직하며 울산 원도심 도시재생 총괄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 환경과조경 359호(2018년 3월호) 수록본 일부
  • [정원 탐독] 폭력의 상징이 된 식물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독을 품은 숲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1982년 만화로 발표되었다. 이후 1984년 애니메이션 영화로 상영된 후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애니메이션으로 꼽힌다. 나우시카라는 이름은 고대 그리스 작가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에 등장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나우시카를 구상할 때 SF 소설의 대가 어슐러 르 귄Ursula Le Guin의 『어스시의 마법사The Wizard of Earthsea』를 비롯해 톨킨의 『반지의 제왕』 등 많은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가 가장 크게 영향 받은 것은 조국 일본 미나마타 해안의 급격한 오염이었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의 오염이 곧 인류에게 가장 큰 위험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나우시카는 환경 오염과 인간이 일으키는 전쟁에 대한 반대 메시지를 강하게 담고 있다. 어느 시점인지 알 수 없는 미래로부터 천 년 전, 인간은 대전쟁을 일으킨다. 그리고 인류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개발해서는 안 되는 살인 무기, 거인병까지 만들어낸다. 이 거인병은 결국 7일간 지구를 잿더미로 태우며 전쟁을 끝낸다. 전쟁의 결과 그 어떤 자의 승리도 없었다. 인류의 반 이상이 죽었다. 나머지도 황폐화된 환경 속에 독을 뿜는 균과 거대 갑각류 곤충의 등장으로 방독면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천 년이 흘렀지만 인류는 여전히 전쟁을 멈추지 않는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전쟁을 막고 오염된 지구를 살리면서 그 안에 살고 있는 거대 곤충과 함께 인간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려는 소녀의 이야기다. 나우시카는 인간이 오염시킨 흙에 의해 균이 독을 뿜어내게 됐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를 통해 소녀는 오염되지 않은 흙과 공기만 있다면 균이 더 이상 독을 뿜어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빠진 모래 무덤 밑 지하에 맑은 공기와 물이 있음을 발견한다. 결국 답은 나무에 있었다. 나무가 뿌리로 흙의 오염 물질을 빨아들인 뒤 정화하고 죽어서 지구의 환경을 돌려놓고 있는 중이었다. ...(중략)... 오경아는 방송 작가 출신으로 현재는 가든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영국 에식스 대학교(The University of Essex) 리틀 칼리지(Writtle College)에서 조경학 석사를 마쳤고, 박사 과정 중에 있다. 『시골의 발견』, 『가든 디자인의 발견』, 『정원의 발견』, 『낯선 정원에서 엄마를 만나다』 외 다수의 저서가 있고, 현재 신문, 잡지 등의 매체에 정원을 인문학적으로 바라보는 칼럼을 집필 중이다. * 환경과조경 359호(2018년 3월호) 수록본 일부
  • [시네마 스케이프] 코코 이토록 황홀한 죽은 자의 공간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죽음을 앞둔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 미지의 사건, 외로움, 기약 없는 이별 등이라고 한다. 만약 죽은 후에 먼저 죽은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어울리며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어떨까. 죽음을 삶의 연장으로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멕시코 사람들은 세상을 떠난 이가 1년에 한 번씩 가족을 만나러 온다고 믿는다. 디즈니 픽사의 애니메이션 ‘코코Coco’는 멕시코 전통 명절인 ‘죽은 자의 날’을 모티브로 삼아 삶과 죽음의 연속성이라는 진지한 주제를 유쾌한 방식으로 그린다. ‘죽은 자의 날’은 3천 년 전부터 이어져 온 전통으로, 멕시코에서는 해마다 10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공원과 가정에 제단을 차리고 죽은 이들을 기린다. 금잔화와 촛불로 무덤을 환하게 장식하고, 죽은 이들이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을 먹으며, 즐겨 듣던 음악을 듣는다. 죽은 자들의 영혼이 돌아올 때 무덤에서 집으로 온다고 믿기에 잘 찾아 올 수 있도록 꽃길을 꾸민다. 이 전통은 멕시코 토착 공동체의 일상에 미치는 사회적 기능과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인류 무형 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었다. 12세 소년 미구엘의 5대에 걸친 가족사를 소개하며 영화가 시작한다. 축제의 날, 거리에 매달린 형형색색의 색종이 공예를 활용하여 픽사의 전작인 ‘업Up’(2009)처럼 긴 시간의 서사를 압축해 전달한다. 미구엘의 고조할아버지는 음악의 꿈을 펼치기 위해 고조할머니와 딸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 고조할머니는 구두 만드는 법을 배워서 고난을 극복하며 딸을 키웠다. 구두 만들기는 그녀의 딸의 딸의 딸로 이어져 5대째 내려오는 가족 사업이 되었다. 미구엘은 치매에 걸린 증조할머니와 씩씩한 할머니와 부모와 친척들과 함께 산다. ...(중략)... 서영애는 조경을 전공했고,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본 영화 다시 보는 것을 좋아한다. 새롭기도 하고, 못보고 지나쳤던 것도 보인다. ‘패터슨’ 덕에 다시 본 짐 자무쉬 감독의 ‘천국보다 낯선’은 처음 보는 영화처럼 느껴졌다. 가끔은 나이 드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환경과조경359호(2018년 3월호)수록본 일부
    • 서영애 / 기술사사무소 이수 소장
  • [에디토리얼] 옥상달빛
    평범한 도시 남성의 옥상 경험은 세 가지 정도로 압축된다. 공통분모가 가장 큰 옥상의 추억은 흡연이다. 추억보다는 현재진행형의 용도라고 표현해야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제아무리 리처드 클라인을 인용해가며 “담배는 숭고하다” 외친들 이미 담배는 천덕꾸러기를 넘어 공공의 적이다. 성인 남성의 흡연율은 여전히 40%를 넘나드는데 도시의 거의 모든 공간에는 빨간색 금연 딱지가 선명하다. 옥상은 그나마 융통과 변칙이 묵인되는 일천만 흡연인의 해방구다. 옥상의 두 번째 추억에는 으레 주먹이 등장한다. “옥상으로 올라와.” 이 짧은 명령문 하나면 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옥상은 군기 잡는 선배 앞에 무릎 꿇는 복종의 공간이(었)고, 학교 폭력의 전시장이(었으)며, 갖가지 명분의 싸움과 결투가 벌어지는 전장이(었)다. 청소년기에 옥상에서 겪은 사건들을 망각할 능력이나 추억이라 포장할 배포가 없다면, 옥상은 긴 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는 상처의 공간이다. 세 번째 추억은 현실과 로망의 경계선상에 있다. 많은 이에게 옥상은 아련한 기억 저편의 사랑을 소환하는 가슴 먹먹한 장소다. 뭇 남성이 다 자기 이야기라고 여겼다는 공전의 히트작 ‘건축학개론’. 대학 새내기 서연(수지 분)과 승민(이제훈 분)의 어설픈 두 번째 데이트 장소는 개포동의 어느 아파트 옥상이다. CD 플레이어의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끼고 듣는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 신체의 모든 감각을 무장 해제시킨다. 옥상은 이렇게 이성은 물론 감성마저 마비시키는, 아름다운 기억의 장소다. 이 셋 중 한둘은 우리 모두가 겪어 온 도시 삶의 한 장면이다. 그런데 요즘 옥상 풍경은 이 정도 수준이 아니다. 옥상이 우리 사회와, 동시대 문화와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정말 다채로워지고 있다. 옥상에서 화분을 가꾸거나 상추를 기르며 짧게나마 노동의 희열을 맛보는 건 이미 고전이다. 더 진취적인 사람들은 블루베리 농사도 짓는다. 옥상을 이용해 빗물을 모으거나 옥상을 녹화해 기후 변화에 대처한다는 거룩한 명분의 사업도 활발하다. 옥상에서 하늘과 별과 바람이 주는 해방감을 느끼며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는 건 이미 드라마나 영화 주인공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쿨한 곳, 핫한 곳 가리지 않고 도처의 옥상을 카페와 바가 접수하고 있다. 나의 한 페이스북 친구는 주중의 격무를 스스로 위로하기 위해 주말용 옥탑방을 얻은 후 혼자 밥 먹고 술 마시며 빔 프로젝터로 영화 본다는 자랑질 포스팅을 매주 한다. 자본주의 도시 공간의 한계에 대한 도전이랄까, 여럿이 옥상을 함께 쓰는 움직임도 고개를 들고 있다. 어정쩡하게 버려져 있던 옥상이 도시의 그 어느 공간보다도 다양한 멀티 플레이어 역할을 하며 우리의 라이프스타일로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그 누구보다 옥상을 마음껏 즐기고 살면서 동시에 옥상에서 작품까지 생산하는, 부러운 도시인이 있다. 기자 출신의 화가 김미경은 서촌에 거주하면서 인왕산이 보이는 동네 풍경과 골목길, 서촌의 꽃과 사람들을 화폭에 옮긴다. 동네 친구들 옥상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려서 “서촌 옥상 화가”라 불린다. 그는 옥상의 매력을 이렇게 전한다. “옥상에서 보는 서촌은 어마어마한 바닷속 풍경인 듯도, 축소된 세계 지도인 듯도 하다. … 옥상에서는 전체 구도가 확연하게 보여 좋다. 동네가 산과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 어디서부터 길이 시작되는지가 한눈에 보인다. 동서남북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내가 나를 둘러싼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내가 자리한 곳이 어디인지를 객관화해 볼 수 있어 좋다. 그 새로운 면들이 겹치고 풀리고 만나면서 만들어내는, 예측할 수 없는 선과 면, 그리고 새로운 구도를 찾아낼 때마다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는 기분이다.” 펜 터치가 정다운 그의 ‘옥상화’ 엽서를 보노라면 서울의 또 다른 세계로 한 걸음 들어서는 기분이 든다. 운 좋게도, 나에게는 일상을 풍요롭게 해 주는 옥상이 있다. 연구실에서 다섯 걸음만 내디디면 검박하면서도 화려한 옥상 테라스다. 여느 옥상처럼 어수선하게 방치되던 곳을 동료 정욱주 교수가 정갈하게 디자인해 고쳤다. 꼼꼼한 디테일의 데크, 장방형의 내후성 강판 플랜터, 그 속에 날아와 스스로 자란 이름 모를 야생의 꽃과 풀, 단정한 철제 의자와 여유로운 목제 평상이 전부지만 그 조합의 시너지가 만만치 않다. 압권은 옥상을 향해 달려오는 관악산 풍광과 기운이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산 풍경도 아니고,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도 아니다. 산허리를 바로 눈앞에서 뚫고 대면할 수 있는 도시의 이 비경을 김미경 작가라면 어떻게 담아낼지 궁금하다. 그이처럼 재주가 없고 성실하지도 못한 나는 내가 정해 놓은 한 지점에서 같은 장면의 사진을 이따금 찍을 뿐이다. 옥상에 가만히 앉으면 날이 밝아 오고 해가 저물 때의 기온 변화를 스마트폰이 아닌 피부로 알 수 있다. 땅거미, 오래 잊고 지낸 이런 단어가 다시 생각난다. 도시의 초록이 봄과 여름과 가을에 어떻게 다른지 실물로 배운다. 감각의 연합, 즉 공감각synaesthesia이 책 속에만 존재하는 개념이 아님을 온몸의 감각으로 직접 느낀다. 어느 가을밤, 나를 삼킬 듯한 달빛을 옥상에서 만나고야 말았다. 옥상의 여러 얼굴을 포착하고자 기획한 특집 ‘옥상다반사茶飯事’를 싣는 이번 호 에디토리얼에는 그 달빛의 감동을 전해야겠다 싶어 제목을 ‘옥상달빛’으로 일찌감치 고정했다. 도무지 전할 방도가 없는 글쓰기 재주, 지면이 춤을 춘다. 애꿎은 네이버에 옥상과 달빛을 쳐 넣으니 가수 ‘옥상달빛’이 제일 먼저 뜬다. 아, 이런 듀엣이 있구나! 뭔가 글감을 포착한 직감이 들어 그들의 음악을 재생한다. ‘수고했어, 오늘도’라는 노래를 듣다가 방에서 공부하는 아이를 불러내 “너, 옥상달빛 아니? 이 노래 완전 좋은데?” 물으니, 대략 난감한 표정을 짓는 아이에게서 이런 답이 돌아온다. “아빠, 아니 교수님, 공부 좀 하셔야겠어요. 벌써 7, 8년 된 노랜데요? 드라마 ‘미생’에도 OST로 나오잖아요.” (얼마 안 됐네. 다 지우고 다시 써볼까? ‘미생’의 명장면들에도 옥상이 많이 나오는데, 어떻게든 엮어볼 수 있지 않을까….) 올해는 연재물을 점차 줄여나가면서 특집 중심의 구성, 즉 독립된주제의 단행본 성격을 띤 구성을 실험해 볼 계획이다. 가까운 예로는 자전거를 주제로 특집 원고와 작품을 엮었던 2015년 4월호를 들 수 있겠다. 실험의 첫 걸음으로 이번 호에서는 옥상을 주인공으로 발탁해 보았다. 많은 관심과 피드백 부탁드린다. 참, 이달에는본문 편집 디자인에도 작은 변화를 시도했다. 알아차리신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역시, 많은 의견 부탁드린다. ‘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을 연재하고 있는 최이규 교수(계명대학교도시학부)가 『와이드 AR』과 『건축평단』이 공동 주최한 ‘2017 올해의 발견, 매체기고부문’에서 수상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한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