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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아버지의 꿈의 초상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의 ‘아버지의 정원’에 부치는 글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의 두 번째 정원 전시인 ‘아버지의 정원 - 어떤 정원에 대한 현고학現古學적 사색’이 186일간의 전시 일정을 모두 마치고, 한 달 전인 11월 1일 막을 내렸다. 개막 전에 도록을 제작해 배포하는 여타의 전시회와 달리, ‘아버지의 정원’은 계절에 따라다른 느낌과 감성을 전달하는 야외 전시인 점을 고려하여 4월, 6월, 8월, 11월에 작품 사진을 촬영하여 전시 종료 후 도록을 제작했다. 본지는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의 협조로, 이 도록에 수록된 김아연 교수(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의 작품 해설 ‘우리 시대 아버지의 꿈의초상’을 전재한다. _ 편집자 주
전시 개요
•전시명: 아버지의 정원 - 어떤 정원에 대한 현고학적 사색
•장소: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아티스트 가든
•작가: 박승진(디자인 스튜디오 loci 소장), 정상철(jsc archi-tects 대표)
•면적: 약 100m2
•주최: 김해시
•주관: 김해문화재단 클레이아크김해
이 시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버지라는 단어는 특별하다. 그들은 전쟁, 유신과 독재, 경제 성장, 민주화의 격동기를 어떤 식으로든 몸소 치러낸 세대다. 우리 사회가 빚을 지고 있는 그들의 뼈 마디마디에 대한민국의 성장통이 스며 있다. 누구나 아버지가 있다. 그는 큰 산같이 엄하되 든든한 사람일 수도, 다정한 친구 같을 수도, 혹은 벗어나고 싶은 굴레 같은 존재이기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갈망의 대상일 수도 있지만 누구에게나 아버지는 있다. 그렇게 제각각인 아버지들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작은 땅덩어리에, 그것도 정원이라는 매체로 과연 표현할 수 있을까. 작가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소박하게 표현했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을 가지고 김해로 향했다. 그날은 비가 내렸고, 이걸 보러 멀리까지 왔는데 참 운도 없다 생각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비를 털어내는 자동차 와이퍼 사이로 들어온하얀 지붕과 담벼락을 보았다. 나는 그렇게 자동차 유리창을 통해 하나의 빛바랜 엽서 속 풍경처럼 아버지 의 정원을 처음 만났다.
박승진의 정원은 늘 얄미울 정도로 간결하고 함축적이다. 스스로 정원을 ‘시’를 만드는 과정에 비유하듯 그가 만들어내는 공간 역시 읽는 사람에게 많은 역할을 떠넘긴다. 그의 정원은 이야기를 좇아가다 보면 나를 잊고 글에 몰입하게 되는 소설이 아니다. 나의 어떤 부분을 끄집어내지 않으면 도무지 읽히지 않는 한 편의 시에 가깝다. 정원을 거닐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나는 낯선 아픔을 느꼈다. 그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가 의도치 않게 이 정원에서 마주쳤기 때문이다. 예상치도 않게 그의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나의 아버지를 끄집어낸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대한민국 아버지들의 꿈이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성장과 왜곡된 주거 문화의 단면‘아버지의 정원’은 주택 정원을 묘사한다. 작가는 여느 서울 사람들처럼 인생의 대부분을 아파트에서 살았다. 작가가 묘사한 이 집은 대한주택공사가 1970년대 판박이처럼 찍어내어 분양한 서울 변두리의 ‘국민주택’으로 불리던 어느 단독주택을 묘사한다. 박공지붕과 콘크리트 블록 담장은 보급형 단독주택을 담백하게 재현하고 있다. 2015년 현재 70% 이상의 대한민국 사람이 아파트, 연립주택과 같은 공동주택에 살고 있다. 불과 1970년대 초반만 해도 95%가 단독주택에 살았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기 힘든 ‘아파트 공화국’에 살고 있다. ‘아버지의 정원’은 작가의 유년 시절 기억을 소박하게 묘사하는 동시에 아파트라는 현대의 지배적 주거 문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집에 대한 따듯한 시선의 이면에는 정원을 빼앗아버린 물량 공급 중심의 주택 정책에 대한 날선 아쉬움이 배어 있다. 사고파는 투자 상품으로서의 아파트가 상실한 집의 가치는 정원에 투영된다. 아버지의 정원은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살고 있는지를 묻는다.
‘아버지의 정원’은 오래된 흑백 텔레비전의 영상처럼 탈색된 기억의 소품들을 담고 있다. 고유의 색을 빼앗긴 사물들은 그래서 누구나의 기억을 투영할 수 있는 도화지가 된다. 작가의 어린 시절 강아지인 로미는 나의 뽀삐이자 이웃집의 바둑이, 누군가의 누렁이가 된다. 작가는 자신만의 은밀한 유년기의 기억 속에서 호출해온 사물들의 색을 제거하여 모두의 기억으로 만들어버렸다. 우리의 기억들은 ‘보급된’ 집과 사물들에서 자유롭지 않은 셈이다.
정원, 땅과 공간을 정의하는 일
그의 정원 작업은 땅을 찾는 과정에서 시작한다. 넓은 미술관 부지에서 하필이면 잘 보이지도 않는 주차장 옆 한 편이라니. 여느 작가라면 눈에 잘 띄고 주변이 정돈된 반듯한 부지를 탐냈을 테지만 박승진과 정상철은 후미진 전시관 뒤편을 선택했다. 거대한 건물을 배경으로 세든 듯 들어선 ‘아버지의 정원’은 대형 아파트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남아있는 오래된 집 한 채를 보는 것 같다. 두 건축물의 스케일적 대비는 정원에 또 다른 콘텍스트를 제공해 준다. 정원은 멀리서 볼 때 하나의 순백색 오브젝트로 보이다가 대문을 통과하는 순간 시각에 의존했던 단편적 감각이 4차원으로 팽창한다. 정원은 더 이상 볼거리가 아닌, 나의 지금을 정의하는, 나를 둘러싼 공간이 된다. 화려한 초화류의 꽃들에 시선을 뺏길 우려가 없으니 훨씬 더 편안하게 정원을 장소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정원이 적절한 위요를 필요조건으로 한다면, 그건 주변으로부터의 분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의 관계를 다시 설정한다는 것이다. 경계는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와 마주하는 창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의 정원은 주변을 기웃거린다. 동네의 담벼락은 아파트의 벽체와 같이 완벽한 단절과 통제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담장은 골목을 지나다니는 이웃의 섣부른 참견을 걸러내지 못하며, 동네 아이들의 월담을 눈감아주는, 칸막이 정도의 존재다. 정원의 사다리는 나무의 열매를 딸 때보다 옆 집에 건너갈 때 더 유용하게 쓰였으리라. 심지어 이 담장은 구멍투성이다. 동네 똥개들도 버젓이 제 집처럼 다녀가는 이 허술한 담장이 만들어내는 위요감은 나만을 바라보라는 이기적인 욕망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의 정원은 그렇게 가족들을 위한 내부지향적인 공간이자 이웃과 사회를 만나는 마당이 된다. 아름다운 볼거리보다 공간의 ‘쓸모’에 관심을 갖는 이곳은 그래서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의 정원이다. 어머니가 예쁘게 가꾸는 것에 마음을 쓴다면 아버지는 아이들이 뛰어노는 잔디밭을 관리하고, 함께 공을 차고, 과일 나무의 가지를 치는 일을 중시했을 것이다. 작가들은 ‘아버지의 정원’이라는 주제를 통해 미술관의 전시품이 아닌 미술관의 풍경을 만들었다. 보여주는 것보다 기능하는 것이 중요한 아버지의 정원은 그래서 ‘예쁘다’는피상적인 시각적 감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정원은 보여주기 위한 장소가 아니다. 가족들이 채워줄 빈 그릇 같은 공간인 것이다.
동네 아버지들이 만드는 정원
어린 시절 아버지가 만들어준 가오리연, 팽이, 새총, 개집을 기억하는가. 아버지는 무언가를 뚝딱뚝딱 잘 만들어주셨지만, 사실 아이들은 썩 맘에 들어 하지 않는다. 부잣집 친구가 아버지가 외국에서 사온 멋진 장난감을 가지고 놀이터에 등장하는 순간 우리 아버지가 만든 어설픈 수제 장난감들은 부끄러움의 상징이 된다. 저런 근사한 장난감을 사줄 능력 없는 야속한 아버지. 아버지가 만든 사물의 정체성은 완벽하지 못함에 있다. 그러나 어설퍼서 생긴 그 틈새를 사랑이 메우고 있다. 건담, 미니카, 바비 인형, 레고는 아버지의 손때 묻은 장난감만큼 기억 속에 오래 남아있지 못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만드는 사물은 엉성하지만 단단하다. 작가들은 정원 만드는 일의 상당 부분을 미술관이 위치한 지역에서 해결했다. 아버지의 정원은 동네 아저씨들, 즉 진례의 아버지들이 함께 만든 곳이다. 동네 자전거 가게에서 허름한 짐자전거를 사고, 벽돌 쌓는 아저씨, 용접하는 아저씨, 목수 아저씨, 철물점 사장님을 모아 ‘마을 잔치하듯’ 만들었다. 정원을 만들며 벌어지는 아버지들의 시끌벅적 야단법석 잔치 한 판이 ‘아버지의 정원’으로 완성되었다.
80%의 미학
아버지의 정원은 모자란다. 난 그 모자람을 사랑한다. 정원은 누군가가 꽉 채워주길 바라는 채우다 만 그릇 같은 곳이다. 작은 일화가 있다. 정원에 심은 수수꽃다리에 슬쩍 무궁화 한 뿌리가 묻어왔다. 이 녀석이 여름에 꽃을 피우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 밀항을 알아채지 못했다. 담당 큐레이터가 발견하여 작가에게 묻자 “원래 정원에는 좀 부실한 놈들이 자라는 법이니 측은지심도 정원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나는 최근 유행처럼 번지는 정원박람회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정원이라는 공간이 ‘경쟁’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기획되고 조성되는 것이 서글프고, 짧은 기간의 전시를 겨냥해 모든 것을 화려한 클라이 맥스로 연출하는 상황에 숨 막히기 때문이다. 개별 정원 하나 하나의 완성도에 초점이 맞춰진 ‘박람회’이니만큼 전체로서의 경관 운운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원의 본질이 기다리고, 변하고, 기르고, 가꾸는 것이라고 할 때, 완성품으로 정원을 소비하는 문화가 정원을 사유하고 가꾸는 것에 앞설까 걱정이다. 정원의 본질은 결과보다는 과정에 있다. 이 부분을 간과한다면, 잡지 화보나 SNS를 점령한 예쁜 사람, 예쁜 물건, 예쁜 장소 사진들처럼, 정원은 예쁘게 포장된 자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지금의 정원 박람회는 너무나 빽빽이 자기만을 바라보길 바라는 이기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 하나로 어우러지는 풍경이 아니라 자기만의 완결성과 우월성을 중시하는 모자이크식 공간 체험은 결국 정원에 대한 피로감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버지의 정원’은 최근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장식적 정원에 던지는 질문과도 같다. 100%를 향한 완벽과 통제의 패러노이아가 아닌, 몰래 묻어온 ‘부실한 녀석들’을 품을 수 있는, 동네 똥개가 당당하게 똥을 싸고 갈 수 있는 구멍을 내주는 여백같이 너그러운 존재가 아버지라면 박승진과 정상철의 ‘아버지의 정원’은 그 모자람과 비어있음을 성실하게 구현하고 있다.
우리 시대 아버지에게 바치는 송시
결국 작가는 이 정원을 모두의 아버지의 정원으로 만든다. 작은 땅덩어리 딸린 집 하나 마련해서 가족들과 단란하게 지내고 싶어 자신의 몸뚱이 돌보지 않고 살아온 우리 시대 아버지 누구나 꿈꾸던 작은 이상향이기 때문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을 통하여 지독히 보편적인 감성을 만드는 그들의 작업. 결국 우리는 같은 꿈을 꿀 수밖에 없는 결핍을 공유하던 세대의 자식들로 태어났다. 자식들 역시 그들의 자식을 위해 정원이 있는 행복한 집 한 칸을 욕망한다. 그렇게 우리 세대는 꿈을 물려받았다. 희망보다는 결핍을 상속받은 것이다.
박승진과 정상철의 정원은, 고단했던 삶, 맘 한 편에 묻어둔, 이 시대 아버지들이 가졌던 ‘우리 집’이라는 꿈의 초상이다.
작가가 부제로 쓰고 있는 ‘현고학現古學’은 동시대 사람들이 기억하는 가까운 과거를 고고학적 시선으로 탐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정원을 마주치기 전까지 나는 우리 시대가 이토록 무서리우리만큼 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 글을 처음 끼적거리기 시작할 때 그의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그 이후로 좀처럼 글의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박승진의 아버지는 직접 김해에 오지 못하셨지만 어린 아들이 뛰어놀던 이 작은 정원을 사진으로 보고 잠드셨다. 정원이 작게는 작가의 가족들을, 크게는 이곳을 찾은 많은 가족들을 기억과 꿈이라는 끈으로 다시 한 번 엮어주었으리라. 이 작은 땅덩어리의 위대한 힘, 정원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김아연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와 동대학원 및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건축대학원 조경학과를 졸업했다. 미국Stephen Stimson Landscape Architects와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 디자인 로직에서 실장으로 일했으며, 국내외 다양한 스케일의 조경설계를 진행해왔다. 자연과 문화의 접합 방식과 자연과 커뮤니티의 변화가 가지는 시학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느슨한 설계 집단 스튜디오 테라의 대표로서 조경 설계 실무와 설계 교육 사이를 넘나드는 중간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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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문화 축제, 릴 3000
2015.9.26.~2016.1.17.
파리 북역에서 TGV로 한 시간, 릴 유럽역에 내리자마자 습하고 차가운 바람 덕에 북부 도시의 우울한 가을이 물씬 느껴졌다. 프랑스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인 릴Lille은 브뤼셀, 런던, 암스테르담 등 북유럽 주요 도시를 이으며 중세시대부터 군사 요충지와 상업 도시로발달했고, 산업혁명 후에는 탄광과 섬유 산업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아시아시장에 주도권을 뺏기며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게 되었다. 버려진 공장, 더 이상 연기를 뿜지 않는 굴뚝, 배가 다니지 않는 운하, 일자리를 잃어버린 노동자들, 그리고 구름이 짙게 깔린 먹먹한 하늘. 도시는 활력을 잃고 자연은 그 자리를 되찾기 시작했다. 릴은 과거의 영광이 폐허로 남아 있는 슬픈 도시로, 프랑스인들에게 가장 살기 싫은 도시로 손꼽히기도 했다.
1990년대, 렘 콜하스, 장 누벨, 크리스티앙 드 포잠박 등 내로라하는 건축가를 초대해 TGV역과 유로스타역을 포함한 교통 및 사업 지구인 유라일을 건설하며 미래지향적 도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나, 인근도시를 아우르는 릴만의 지역적 정체성을 찾지 못한채 살기보다는 거쳐가는 도시 이상의 매력을 창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2004년 ‘유럽문화수도’로 선정되면서 도시 변화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버려졌던 과거의 산업 유산이 릴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살릴 핵심 대안으로 떠올랐다. 새로운 것을 집어넣기보다 기존의 폐건물을 문화와 예술 공간으로 되살려 지역 주민의 참여와 소통을 유도하는 도시재생 실험을 시작한다.
‘릴 3000’ , 도시 여행을 시작하다
2004년, 유럽인들에게 릴이라는 도시를 각인시키는 데 성공하며, 이듬해 도시 문화 축제 ‘릴 3000’이 제정되었다. 3년에 한번씩, 4개월간 한 주제를 가지고 도시곳곳에서 벌어지는 이 행사는 동시대성을 보여주는 젊은 작가들과 다양한 문화 행사 및 참여 프로그램을 통해 도시를 재발견하고 더 나아가 사회와 문명에 대해 고찰하고 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2006년 인도의 ‘뭄바이의 사람들’을 시작으로, 2009년 동유럽과 이스탄불까지 연결하는 ‘유럽 XXL’, 2012년 골목부터 집문 앞까지 도시 곳곳에 공공 작품을 설치해 일상을 뒤집어엎는 ‘판타스틱’이란 주제로 2백만 명의 관람객을 끌어 모았다.
그리고 2015년, 심각한 유럽 경제 위기로 인한 재정긴축에도 불구하고 ‘르네상스’라는 주제를 걸고 지난 9월 26일 리우의 화려한 카니발로 축제의 시작을 알렸다. 800여개의 이벤트와 문화 행사 그리고 35개의 전시회를 통해 도시의 새로운 미래에 대한 가능성에 질문하고 해답을 찾아나가는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릴,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그 예외적 영감과 정신을 회복하라
불어로 ‘다시 태어나다’라는 의미의 르네상스는 중세의 억압적인 종교의 그늘 속에서 피어난, 유럽 역사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중요한 시기였다. 오늘날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함께 삶의 방식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실험이 세계 곳곳의 도시를 변형시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릴은 21세기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는, 유럽인들에게 조금은 낯선 다섯 도시인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덴마크의 에인트호번, 미국의 디트로이트, 캄보디아의 프놈펜, 한국의 서울을 초청해 ‘릴 3000’ 축제를 열었다. 특히 이 도시들은 전쟁, 경제적 쇠퇴, 독재의 잔재 등 역사적인 고통을 극복해가며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도시로, 그 모순과 갈등의 목격자이자 대안을 제시하는 적극적인 창조자로 존재하는 예술가들을 초청했다. 각 도시의 전시는 릴 각지에서 열렸는데, 무엇보다 전시가 열린 장소와 초청된 나라 간의 고려가 매우 흥미로웠다.
폐허, 잠재된 생명의 장, 디트로이트, 그리고 생 소뵈르역
짐 자무쉬의 영화,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에는 한밤중에 디트로이트Detroit의 버려진 건물들 사이를 자동차로 배회하는 뱀파이어 연인이 나온다. 시간을 거스르는 그들의 차가운 아름다움과 깨지 못할 꿈을 꾸는 듯한 우울한 폐허의 도시는 묘하게 닮아 있었다. 100년 가까이 모터 시티로 아메리칸 드림을 이끌던 도시는 쇠퇴와 회복을 반복했고, 2008년 이후 40만 명의 실업자를 내며 범죄의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현재 이 꿈의 도시는 테크노, 블루스, 힙합, 그라피티, 도시 농장, 젊은 도시 예술가들의 은신처가 되면서 또 다른 문화적 아메리칸 드림의 도시가 되고 있다.
디트로이트 전은 19세기 산업 부흥과 함께 지은 화물전용 철도역이지만 산업 침체로 버려졌던 생 소뵈르역Gare Saint Sauveur에서 열렸다. 버려졌던 모습으로 최대한 보존된 이 전시장은 묘하게 산업 도시의 황금기를 맞이하다 유령 도시가 된 디트로이트와 닮아 있었다. 작품을 설치했다기보다 디트로이트 예술가들의 아틀리에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전시는 작품 전체가 어울려 도시적 분위기를 만들어내면서 우리로 하여금 릴이 아닌 디트로이트를 여행하게 한다.
디자인으로 새로 태어난 하이테크 도시 에인트호번 그리고 메종 폴리 드 물랭
필립스의 도시로 호황을 누리던 에인트호번Eindhoven은 필립스가 암스테르담으로 본거지를 옮기며 쇠퇴기를 맞이한다. 2차 산업 쇠퇴와 함께 버려진 공장들은 1990년대 이후 창작 스튜디오로 바뀌며 컬처 메이커culture maker들을 만들어내는 인큐베이터 도시로 재탄생,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혁신적인 디자인 도시로 꼽힌다. 에인트호번 전은 전통적인 전시에서 탈피하여 3D 프린팅과 목공 일을 할 수 있는 팹랩fab lab 형태의 공동 작업장을 제공했다. 참가한 퍼포먼스 아티스트들이 관객과 함께 교류하는 장소인 셈이다. 18세기의 양조장이었던 메종 폴리 드 물랭Maison Folie de Moulins에서 열린 이 전시는 일회성 퍼포먼스가 아니라 이후 릴의 도시 정책에 반영하기 위한 전초전 역할을 한다.
파벨라에서 2016 올림픽까지 리우데자네이루 그리고 메종 폴리 와제므
삼바와 카니발의 도시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는 산을 배경으로 한 긴 하얀 백사장과 강렬한 태양 등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갖춰 브라질 최고의 아름다운 관광지로 꼽힌다. 그러나 인구의 20% 이상이 가난과 마약, 폭력의 문제가 극심한 빈민촌인 파벨라favela에 살고 있다. 젊은 예술가 집단 ‘카리오카스Cariocas’는 도시 변화의 목격자로서 극단적인 도시 리우의 일상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보여준다. 해변의 잡상인, 파벨라의 판잣집, 좁은 골목길, 혼재된 문화 등 리우의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부정적이고 제거해야 할 것이 아니라 이 도시를 매력적으로 만들고 있는 요소임을 웅변하고 있다. 이 전시가 열린 와제므 지구MaisonFolie Wazemmes는 릴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이 사는 곳으로 매일 오전 대규모 상설장이 열린다. 가장 싸고 인구 밀도가 높아 젊은 예술가와 아마추어가 모이는,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가장 생동감이 넘치는 지역이라 도시 리우를 전시하기에 릴에서 가장 적절한 곳이다.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 프놈펜 그리고 빈민구제소 박물관
동양의 진주라 불리던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Phnom Penh은 붉은 크메르에 의해 1975년 이후 4년간 빈 도시가 되었다. 이후 40년간의 정치적 갈등 속에 백만 여명의 캄보디아인이 사라져갔으며 도시는 그야말로 킬링 필드가 되었다. 1990년대에 되찾은 수도로서 프놈펜은 급속한 도시화를 경험했다. 무질서한 도시 확장, 지옥 같은 교통난, 무작위적인 건설과 부패, 전통과 현대의 충돌, 세대 간의 갈등을 겪으며 도시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런 도시적 혼란 속에서도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뛰어난 예술가들이 수없이 배출되고 있는 것에 주목, 캄보디아 출신의 세계적 예술가는 물론, 한번도 외국에 소개되지 않았던 다양한 세대의 예술가들이 초청되었다. 프놈펜 전은 릴에서 가장 역사적이고 고풍스러운 동네인 비유 릴Vieux Lille에 있는, 17세기에 지어진 빈민구제소 박물관Hospice Comtesse Museum에서 열렸다. 옛 병원의 작은 교회당에 설치된 대나무 부처는 역사와 종교를 넘어 인간의 보편적인 고귀함을 보여주고 있다.
전통과 하이퍼모더니티의 간극 서울 그리고 트리포스탈
급격한 현대화, 다이내믹, 나이트라이프, 하이퍼테크닉, 전통, 긴장감, 획일성, 다양성, 콘트라스트. 잠시 서울을 방문했거나 서울에 관심 있는 프랑스 사람들이 가지는 느낌이다. 전시 큐레이터 장 막스 콜라르Jean Max Colard가 대조적이고 복합적인 서울의 모습 때문에 작품을 추려내기 어려웠다고 말할 정도로, 다양한 서울과 한국의 모습이 전시되었다. 복사한 듯 똑같은 아파트 주거 형식, 성형한 소녀들의 모습, DVD방, 줄 맞춰 걸려있는 교복 등 서울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작품부터 찢어진 산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한 전통과현대의 간극 등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과 갈등을 표현한 작품들이 섞여 서울의 현재를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이우람의 하이테크 설치미술, 일상 언어를 예술로 재탄생시킨 최정화와 이불의 작품들이 프랑스인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번 서울 전은 신시가지인 유라일지구 옆에 있는 트리포스탈Tripostal에서 열렸다. 과거 우편물을 분류하는 곳이었던 이곳은 ‘빨리, 빨리’라는 주제에 맞게 깊이 있는 주제를 무겁지 않게 다루고 있다.
또한 10월 14일부터 18일까지 서울 주간을 맞이하여 릴 국립건축조경학교와 릴 3000 주관으로 조경진 교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를 초청, 서울의 르네상스에 대한 컨퍼런스가 열렸다. 조경진 교수는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역학 관계를 중심에 두고 서울의 변천사를 소개하며 메타폴리스로서의 서울로 발돋움하기 위한 서울시의 최근 도시 정책과 계획을 설명했다. 대부분의 청중은 K-Pop이나 한국 영화 외에는 서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어 단기간에 급변한 서울의 역동적 모습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지만 시민 참여를 통해 도시가 긍정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점에는 큰 공감을 표시했다. 그 밖에 파리에서 이미 큰 성공을 이룬 안은미의 댄스 공연 ‘할머니들Grandmothers’을 비롯하여 K-Pop나이트, 길거리 DJ 공연, 한국 영화 상연 등 이채로운 공연이 열리기도 했다.
릴 3000,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묻다
‘릴 3000’은 문화라는 주제로 낯선 얼굴들을 도시 속에 받아들이며 유럽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로 인해 도시는 예외적인 도약을 해왔으며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고 릴 시장 마르틴 오브리는 평가한다. 어려운 시기가 올 때마다 문화와 예술은 희생되었고 물질적 가치에 그 자리를 쉽게 빼앗겨왔다. 그러나 마르틴 오브리는 그것은 큰 실수이며 예술과 문화만이 새로운 세상에 대한 성찰과 방향을 제시한다며 유럽 경제 위기 속에서도 ‘릴 3000’에 대한 열정을 강하게 나타냈다.
근 몇 년 전부터 프랑스는 경제적 위기로 공공 프로젝트 투자가 특히 줄고 있다. 그로 인해 공공 영역의 많은 조경 회사 및 건축 회사는 문을 닫거나 살생적으로 비용을 줄이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인 불안감을 부추기고 자국민 보호 정책을 내세우며 반이민 정책을 펴는 극우파 수장마린 르 펜이 역사적으로 사회당이 주도하던 프랑스 북동부 지역에서조차 표몰이를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라는 논리는 보호되어야 할 대상과 해를 끼치는 대상으로 나누는 이분법을 적용하며 두려움을 조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릴 3000’은 침제 분위기를 벗어나 미래에 대한 긍정적 의지와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참여와 액션을 부추기며 축제를 즐기자 한다. 나아가 이번 도시 축제는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민간 차원이나 로컬 중심의 실천을 독려하는 새로운 도시 정책을 위한 시민 동의 과정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 속 스스로 닫은 도시가 영광을 누린 예를 알지 못한다. 반면 타자를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도시만이 영광을 누려왔다. 오늘날 여기저기서 위기를 말한다. 위기를 벗어나는 길은 두 가지 뿐이다. 안으로 숨던가, 밖으로 나서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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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스케이프] 더 랍스터
기묘하거나 현실적이거나
“더 랍스터 한 장 주세요.” “네? 더 셰프 아닌가요” “아뇨, 랍스터요, 랍스터!” “다시 확인해주세요.” 셰프와 랍스터, 연관 단어이긴 하다. 어제 퇴근길, 며칠째 유난히 지치고 힘든 이유를 가을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무언가 다른 처방이 필요할 것 같아 극장으로 향했다. ‘보고 싶은 영화 한 편 보는 것도 내 뜻대로 안 되는구나’하고 좌절하는 순간 주변의 다른 극장과 헷갈린 것을 깨달았다. 나라 구하는 심정으로 서둘러 달려가 보니 관객석에는 나처럼 혼자 온 사람이 너덧 명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고백건대 ‘더 랍스터’를 선택한 건 순전히 포스터 때문이다. 어떤 영화인지 아무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접한 포스터는 그 자체로 너무 아름다웠다. 황량한 갈대밭 사이로 다급하게 어디론가 달려가는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여자는 남자의 손을 두손으로 꼭 붙잡고 있다. ‘사랑에 관한 가장 기묘한 상상’이라니, 대체 어떤 영화일까. 극장에서 그다지 오래 상영할 것 같지 않고 이 원고가 실린 후에도 일부러 영화를 찾아보는 이가 열 명이 채 안 될 것을 확신하므로 그 내용을 낱낱이 소개할까 한다. 혹시 나처럼 포스터에 순간적으로 영혼을 뺏겨 영화를 보게 될지 모를 아홉 명은 여기서 멈추시기 바란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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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신화 속으로
#66
고고학자들에게 갈채를
1980년대, 독일고고학연구소에서 ‘그리스 폴리스의 주거 문화’라는 주제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베를린 자유대학 고고학과 연구원들이 주동이 되어 진행한 국제 프로젝트였다. 그중 베를린에 살았던 팀원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별도로 모여 그리스 고전 읽기 모임을 했다. 어느 날 팀을 이끌던 교수가 퓌클러 정원문화재단1의 초청을 받아 고대 그리스의 ‘정원’에 대해 특강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강연을 들으러 팀원 모두 몰려갔는데 거기서 뜻 밖에도 ‘고대 폴리스의 주택에는 꽃밭이 없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뭣이라고”, “그럴 리가”, “그리스에 가보라고.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데”, “고대 문헌에 정원이 얼마나 많이 언급되는데” 등의 반응을 보이며 흥분한 팀원들은 토론 끝에 진실을 파헤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화제의 특강 후 지도 교수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므로 자초지종을 물어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했다. 수소문해보니 마침 “부조에 나타난 고대 그리스의 풍경”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여류 고고학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일연구재단의 도움을 받아 연구비를 확보하고 그 여류 고고학자를 프로젝트 팀원으로 초대하는 데 성공했다.2 현재 영국 셰필드 대학에서 고고학을 가르치고 있는 모린 캐롤Maureen Carroll 교수다. 이때부터 모린 캐롤은 고전 읽기 팀에 합류하여 옛 기록을 분석하는 한편 발굴 현장을 탐색하고 발굴 보고서를 샅샅이 조사하여 정원의 증거들을 수색해나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국 폴리스 주택에 꽃을 심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3 아무리 열심히 찾아도 없는 것이 발견될 리가 없다. 그렇다면 고전에 그렇게 자주 등장하는 ‘케포스Κήος’, 즉 정원이라는 개념은 무엇을 뜻한단 말인가. 고대에 꽃을 가꾼 정원이 정말로 없었단 말인가.4 이런 질문이 팀원들을 괴롭혔다. 여기서 우리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바로 ‘정원’에 대한 개념이다. 1980년대 중반, 베를린에서 살았던 고고학자들에게 정원이란 ‘꽃이 가득 심겨있는 곳’이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즉 꽃이 가득한 정원은 ‘20세기적현상’이라는 것5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원하던 답은 찾지 못했으나 그 대신 다른 수확은 많았다. 우선 케포스라는 말이 언급된 모든 고대 문서를 샅샅이 찾아내어 목록으로 만들었다는 사실만 해도 엄청난 일이었다. 그리고 케포스를 아무리 털어 봐도 꽃밭 대신 과일과 채소만 나온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케포스가 정원이라고 번역되기는 하지만20세기에 생각하는 정원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닫게 된 것이다. 이는 마치 부엌과 주방의 차이와도 같다. 부엌에는 부뚜막이 있지만, 주방에는 싱크대가 있다. 케포스에서 꽃밭을 찾는 것은 마치 조선 시대 부엌에 가서 싱크대를 찾는 것과 같았다.
그럼에도 왜 폴리스 주택에 꽃이 없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아마도 두 가지 방향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우선 폴리스라는 고대 그리스 특유의 도시 구조를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꽃에 대한 고대인의 관점도 규명해야 한다. 다시 결론부터 말하자면, 폴리스의 주택들은 너무 협소하여 정원을 만들 자리가 없었다. 꽃은 일상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며 신성한 것이라 신들에게 바치기 위해서 존재했다. 개인이 보고 즐거워할 대상이 아니었다.
폴리스는 대략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라고 널리 이해되고 있으나 정확히 말하자면 성채를 두르고 사람들이 모여살았던 공동 생활 구간을 말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확립되기 이전에도 공동으로 의사 결정을 했으므로 성안에서 살아야 참정권 행사가 기술적으로 가능했다. 전쟁이 잦았으므로 안전을 위해서도 성안에 모여 사는 것이 유리했다.6 도시라고 해도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던 아테네의 인구가 한창 때에 약 4만 정도였으니 이 역시 지금과 달랐다. 특이했던 점은 도시가 팽창하면 도시의 영역을 확장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을 ‘분가’시켜 아주 먼 곳에 가서 신도시를 개척하게 했다는 점이다. 오십 명의 미혼 남성으로 구성된 신도시 개발팀을 내보냈다. 무력으로 정복한 것이 아니라 현지 여인들과 혼인하여 문화적 융합을 꾀했다.7 사실 인구가 너무 많으면 공동의 의사결정도 불가능하지만 ‘어떻게다 먹여 살릴 것인가’하는 문제가 더욱 시급했다. 기원전 8~6세기에 신도시 건설이 가장 활발했으며 6세기 말 소위 고전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이미 서쪽으로 스페인 해안, 남으로 북아프리카, 동으로 지금의 터키, 사이프러스는 물론 흑해 연안까지 그리스인들의 폴리스가 분포되어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도시 규모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거의 집착했던 것 같다. 폴리스에 대한 개념을 정립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열 명으로는 도시를 형성할 수 없지만, 인구가 십만 명이 넘으면 이미 도시라 할 수 없다.”8 플라톤은 5,040명을 적정 인구수로 보았다.9 이런 폴리스들은 격자형 계획도시였다. 똑같은 면적의 블록으로 도시를 나누었으며 이를 다시 균일한 크기의 필지로 나누었다. 한 필지의 규모는 도시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으나 평균적으로 250m2였다.10 세대 당 두 개의 필지를 배당받았는데,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신분을 가리지 않고 도심에 주택지 하나, 외곽에 같은 평수의 텃밭을 하나씩 나눠받았다. 외곽의 텃밭이 바로 케포스, 즉 그들이 정원이라고 일컬었던 것이었다. 도시 내에는 지금의 연립주택과 다름없는 집이 밀집하여 지어졌고 디자인도 두세 개의 모델로 국한되어 있었다. 주택 구조를 보면 정원이 비집고 들어갈틈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당이 있었으나 협소했고 이곳에 우물과 제단이 있었으며 바닥은 흙다짐되었거나 돌, 모자이크 등으로 포장되었다.
폴리스의 모습만 보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참으로 기계적이고 합리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공동체적 삶을 위해 개인의 안락함을 포기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졌다. 굳이 주택가에서 꽃을 찾으려는 20세기적 발상 자체가 그들에게는 그릇될 것이다. 신화와 문학이 그들의 ‘꽃’이었을지도 모른다. 타임머신을 타고 고대 그리스로 가서 아무나 붙잡고 이렇게 물어보면 어떨까. “평등도 좋고 민주주의도 좋지만 집 좀 크게 짓고 정원도 좀 꾸미지 그랬소” 그러면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데” 그리고 길을 가리킬 것이다. “저리로 한번 가보시게.” 그 길은 아마도 신화 속으로 가는 길일 것이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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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 천의 얼굴을 가진 도시 - 적응성을 향하여
Cities of Visionaries, Cities of Reality: Multifaceted City - Toward an Adaptability
연재를 마무리하며
‘좋은 도시란 무엇인가’라는 다소 포괄적인 질문과 함께 시작한 본 연재가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다. 지난 1년은 도시설계와 관련된 여러 주제를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에게 이야기하듯 소개할 수 있다는 기대와 설렘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는 앞선 설렘과는 다른 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과연 좋은 도시란 무엇이란 말인가? 도시 공간에 대한 요구가 문화마다 다르고 지역적 특수성의 차이도 큰데, 좋은 도시의 공통분모란 것이 과연 존재할까?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 했던가. 진작 처리했어야 할 과제를 마지막까지 미루고 있다가 최종 연재에 이르러서야 황망하게 생각을 정리하는 게으름을 피우고야 말았다.
기왕 이렇게 된 바에 초조해 하지 말고 도시의 본질적인 문제로 돌아가 보자. 도시의 가장 흥미로운 특질 중 하나는 도시는 항상 다양한 사회경제적 요구와 환경 변화라는 ‘자극’에 노출되어 있으며, 이에 대응하여 제한된 도시 면적안에서 크고 작은 변화가 끊임없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특히 도시를 구성하는 물리적 환경―거시적인 지역 환경과 녹지 분포, 도시 블록과 가로 패턴, 건축물의 유형과 필지의 종류, 도로와 오픈스페이스, 옥상정원과 공용 주차장 등―은 각종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며 변화하는데, 그러한 과정 자체가 공간에 차곡차곡 기록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불완전한 변화의 파편과 흔적으로 공간에 남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 공간은 다시 사람들의 삶과 행태, 미시적인 도시 환경과 거시적인 도시 문화에 근본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그림1).
좋은 도시란 무엇인가
이러한 변화 과정에서 비교적 일관된 특성을 공유하는 연속적인 지역이나 장소가 도시 안에 형성된다. 하버드 대학교의 피터 로우Peter Rowe 교수는 이를 “영역territory”이라 부른다. 이를테면 19세기 후반부터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걸쳐 보스턴 도심부 남측에 금융 관련 초고층 업무 시설이 집중적으로 조성되면서 형성된 ‘파이낸셜 지구’나, 1950년대 독일의 기술 원조를 받아서 각종 전자제품과 이후 군수 물자를 생산하던 국영 산업단지이자 최근 중국 최대 예술가들의 놀이터로 탈바꿈한 베이징의 ‘다산쯔 798지구’가 이러한 영역에 해당한다(그림2). 공통의 성격을 갖는 영역뿐만 아니라 차이와 특이성이 두드러지는 크고 작은 도시 공간을 통해서도 변화를 목격할 수 있다. 이를테면 하나의 단일 도심을 기반으로 성장하던 도시 영역이 급격한 인구 증가 때문에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확산되고 단핵 중심의 도시가 다핵 도시로 변형되는 경우가 그 예다. 여기에 다시 새로운 교통 시스템이 도시내 주요 거점을 연결하면서 개발 잠재력이 높은 지역에서는 필지 합병을 통한 대규모 재개발이 진행되는 반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지역에서는 도시 쇠퇴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와 함께 특정 건축 유형에 대한 자발적 고급화와 타율적 잉여가 반복되면서 넓게 확산된 도시 조직은 미시적인 분화를 겪는다. 이러한 공간의 분화와 차이성의 발현은 공통성을 기반으로 한 도시의 각종 영역을 부분적으로 해체하거나 때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지역성을 짧은 시간에 붕괴시킬 때도 있다.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 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 이론과 스튜디오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 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 김세훈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도시설계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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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설계하는] 경계자는 조바심을 관리한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경계자로 지칭하는 것은 위험하다. 단지 자신을 묘사하거나 기술하는 단어가 아니라 가치판단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 자기 색깔이 뚜렷하지 않은 자’라는 부정적 뉘앙스가 있는가 하면, 함민복의 시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처럼 긍정적 뉘앙스도 있다. 그래서 스스로를 경계자라 말할 때는 부정적·긍정적 뉘앙스를 모두 감내해야 한다. “나는 어디에도 끼지 않을 거야, 내 길을 갈 거야”같은 치기, 혹은 “나는 당신들과 달라” 같은 자기 허영.그럼에도 나는 이 마지막 글에서 스스로를 경계자라 칭하려 한다. 현재의 나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지향점이라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첫 번째 글의 ‘어.설.자.’는 고백이었고, 두 번째 글의 ‘경관편집자’는 경관을 다루는 나의 관점과 방식에 대한 소개였고, 이번 마지막 글의 ‘경계자’는 나의 바람이다. 경계에 서 있는 점들이 시스템이 만든 영역을 가로질러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새로운 지평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
책상 vs 현장
20~30대에 직장 생활을 오래 하지 않았다. 아침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는 (물론 정확한 시간에 퇴근한 적은 없지만) 직장 생활은 고작 3년이었다. 석사 졸업하고 2년, 영국에서의 박사 후 연구원(post-doc) 후 1년. 나머지는 거의 학생 신분으로 학교를 다녔다. 20대는 학부와 석사 과정, 30대는 박사 과정과 영국에 가기 위한 준비, 그리고 영국에서의 1년간의 연구 과정.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30대 막바지에 설계사무소를 열었다. 고작 3년이 설계라는 작업을 집중해서 고민하고 배우던 실무기간이었다. 20대부터 현장에 뛰어들어 일을 배웠던 동년배들에 비해 훈련의 시간이 부족했던 셈이다. 대신 동기, 선·후배들에게 틈틈이 배웠고, 특히 한 후배는 몸으로 익힌 실무를 ‘속성’으로 내게 전해 주었다. 이렇게 내 이력을 나열한 이유는 책상과 현장에서 서성이는 나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다. 2002년 그 ‘유명한’ 한평공원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도시연대의 구성원들과 주민 참여, 참여 디자인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더불어 관련된 여러 이론을 공부했고 외국 사례도 살펴보았다.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이 박사 학위 논문이다. 박사 논문을 쓰면서도 한평공원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조바심이 났다. 책을 보고 있으면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걱정스러웠고, 현장에 있으면 책 속의 내용이 궁금했다.
그 이후의 몇 년 동안은 박사 논문을 쓰면서 가졌던 질문에 답하고 되새김하는 시간이었다. 막연하게 알던 것들을 보다 선명하게 알아가기, 어떤 책에서 보거나논문에 인용했던 것들을 현장에서 확인하기, 이래야한다고 주장했던 것들을 현장에서 실천해보기. 되새김의 기간이 길었던 만큼 박사 논문의 자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조바심의 기간도 길었다. 그런데 주어진 현장에 집중하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내 실천의 방향과 내용이 논문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몇 년 더 현장에 파묻혀 있다 보면…. 아니 지금도 그런 조짐이 나타나는데, 조바심의 방향이 바뀌고 있다. ‘어떤 언어와 논리로 내가 현장에서 얻은 경험을 정리할 수 있을까’로.
전문가 vs 활동가
내 관계의 지형을 보여주는 것 중의 하나가 페이스북 친구이지 않을까 싶은데, 1/4이 ‘조경’이라는 키워드로 만난 사람들이고 3/4이 ‘시민단체’라는 키워드로 만난 이들이다. 페이스북에 적극적으로 글을 올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시민단체라는 키워드로 만난 이들이다. 그들이 최근에 올리는 글은 주로 도시재생, 공유공간, 마을만들기, 사회적 경제 등에 대한 것이다. 이 글들을 읽으며 굳이 노력을 하지 않아도 이 분야에 대한 정보를 얻고 사고의 폭을 확장시킬 수 있다.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대부분 시민단체라는 키워드가 만들어준 네트워크 속의 전문가들이다. 조경이라는 키워드 속에 있는 사람들 중 지속적으로 만나는 이들은 ‘조경작업소 울’의 구성원 정도다. 시민단체마다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가치’가 활동의 중심이 된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사회나 단체에 가치 있는 일이라고 판단되면 적자가 나더라도 한다. 그리고 이들은 사람들이 세상을,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고 본다. 정치적 판단을 떠나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보니 활동가들의 일하는 방식도 행정이나 기업, 학교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올해 도시연대의 일원으로 한 대학교의 연구실과 도시연대가 함께 진행하고 있는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연구 초기, 학교 연구실과 시민단체 간의 차이로 인해 통역자 역할을 해야 했다. 연구자들의 언어와 일의 방식을 활동가들에게 전달하고 활동가들이 추구하는 내용과 언어를 연구자들에게 전달했다.
시민단체나 활동가들의 특성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전문가라 여겨진 탓인지, 조경작업소 울의 클라이언트는 주로 시민단체다. 올해만 해도 세이브더칠드런, 장애물없는생활환경시민연대(이하 무장애연대), 생명의숲이 주요클라이언트였다. 시민단체의 활동가들과 일하다보니 그들의 일하는 방식을 배워, 일반적 전문가들이 하는 역할의 경계를 벗어날 때가 있다. 이를 의식하지 못했는데, 올해 몇 번인가 “너는 전문가니? 활동가니”라는 질문을 간접적으로 받았다. 앞서 언급한 연구에서 통역자의 역할을 할 때 그랬고, 연재의 첫 번째 글에서 소개한 어린이공원 작업에 대한 어떤 이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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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인터뷰 연재를 마무리하며
Beyond the Limits of Landscape Architecture, and into the Heart of Landscape Architecture: Epilogue of Interview Series
2013년 ‘조경의 영토를 넓혀나가는 주목할 만한 조경가’라는 부제를 달고 시작한 ‘조경의 경계를 넘어’ 인터뷰 지면은 2014년부터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란 제목으로 지난달까지 총 35명의 조경 관련 디자이너들을 소개하며 3년을 달려왔다. 뉴욕의 대표적조경가인 시그니 닐슨과의 인터뷰로 시작해 지난 호에 소개된 캐나다 몬트리올의 무나 안드라오스와의 인터뷰까지, 다양한 인물과 대화를 이어온 소감을 여기에 정리한다.
『환경과조경』의 해외 인터뷰 시리즈를 시작한 2013년 1월은 개인적으로 디자인에 대해, 조경 설계라는 직업적 자긍심에 대해 상당한 회의를 느끼던 무렵이었다. ‘진짜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마음에 “쩡”하는 소리를 울리는 작업이란 어떤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 온 지 몇 해가 되었지만 여전히 이렇다할만한 단서는 보이지 않았다. 진정한 공부를 하고 싶었고 배움에 목이 말랐다. 바쁜 설계사무소 일을 소화하면서 아이 둘을 키우는 빡빡한 생활에서 주어진 시간을 쪼개 배움에 대한 욕구를 채우곤 했지만 실망스럽게도 충족보다는 대개 한숨이 앞섰다. 어디선가 이미 봤던, 독창성을 찾기 어려운 설계안들이 미디어와 공모전을 도배했고 패션은 단추 구멍의 위치만 바꾸어가며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다.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어디에 갖다 놔도 상관없는 ‘맥락 결여’의 장식적 작품들이 마치 문화의 최전선에 나선 듯 우쭐댔고 허공에 메아리치듯 공허한 미사여구의 독백이 이론이라는 투구를 쓰고 그렇지 않아도 지친 안구에 피로감만을 더했다. 진정한 새로움을 향한 여행길에서 보이는 풍경이란 봐도 안 봐도 그만인 딱그 정도였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월간·주간·일간지들을 멀리하게 된 것도 비슷한 시기였다. 그래서 나의 관심은 동시대 설계자들의 작업으로부터 점점 더 멀리 과거로 회귀하고 있었다. 인터넷이 모두의 두뇌에 평준화를 시작한 2000년대 이후 조경이라는 동네는 기웃거릴만한 꺼리가 도무지 없는, 참으로 재미없고 지루한 단체 관광 상품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우울함을 달래려면 대신 곰팡내 나는 뉴욕공립도서관의 서가를 뒤져야 했다. 1960~1970년대 미국의 사회적 혼란기, 20세기 초반의 시티 뷰티풀, 그리고 19세기의 옴스테드와 17세기의 르 노트르로 빠져 들어갔다. 한 세기 전 조경이라는 분야가 본격적으로 태동하던 시기, 그 부근에 자리 잡은 귀퉁이 골방에 머물며 나는 스스로 외부와 담을 쌓고 있었다. 그곳에서 자족하고 있었다.
박명권(현 『환경과조경』 발행인)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대표가 이 코너의 공동 작업을 제안했을 때 무언가 자그마한 창이 열리는 느낌이었다. 현 시대 조경에 대한 나의 우울증이 진정한 고수들에 대한 무식과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어렴풋이나마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편적인 미디어 정보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그들에 대한 이해 작업을 본격적으로 착수할 수 있다는 데 신이 났고 아랫배 한 구석에서 의욕이 솟았다. 그해 겨울 휴가를 떠난 자메이카의 해변에서 가족들이 잠들어 있는 새벽, 귓전을 때리는 파도소리와 함께 윙윙대는모기에 뜯겨가며 첫 번째 원고를 썼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은 간단히 두 가지였다. 첫째, 우선 금붕어 같이 눈은 커지고 머리는 작아진 상태를 극복하고 싶었다. 작금의 우리 일에 지성이란 것이 존재 한다면, 아직 지적인 디자인이라는 전통이 남아있다면, 그것을 옴스테드 시대와 같이 환하게 드러내 복원하고 싶었다. 기본에 대해 질문하고 싶었다. 고상한 언어의 도움 없이도 즉각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디자인, 현란한 컴퓨터 그래픽 없이도 사람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디자인, 쉽고도 좋은 디자인을 현학의 덫에서 구출하고 싶었다.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뉴욕에 기반을 두고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해 왔다.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고, 주요 작품이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 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 전시되었다. UNKNP.com의 공동 창업자이며, 저서로 『시티오브뉴욕』(공저)이 있다.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에서 조경 설계를 연구하며 학생들이만드는 것의 기쁨을 알아가도록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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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도시정원 옴니버스 축제와 5.18민주광장
아시아 문화중심도시를 꿈꾸는 광주
지난 10월 14일부터 18일까지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Asia Culture Center(이하 ACC)의 5.18민주광장 일대에서 ‘정원으로 부활하는 도시, 가드닝으로 만나는 시민’을 주제로 한 광주 도시정원 옴니버스 축제Gwangju Garden Omnibus Fiesta가 개최되었다.1 이 이벤트는 당초 광주광역시 주최의 공모 사업 ‘시민이 함께 하는 게릴라 정원 사업’의 공동 주관자로 전남대학교 조경학과 조경설계연구실이 선정된 후 당초의 범위와 목적2을 자체적으로 수정·기획해 이루어진 것이다. 경기정원문화박람회나 서울정원박람회처럼 정원을 테마로 한 도시 규모의 행사는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ACC의 개관을 시민들과 자축(?)하며 도심에서 정원을 매개로 가을 한때를 즐기는 로컬 이벤트를 벌이는 정도가 이번행사의 취지였다.
증폭되고 있는 정원에 대한 관심을 조경 분야가 어떻게 수용하고 키워갈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선의 논의와 심층적 진단이 이미 있어 왔기에 이 글에서 새삼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만들고 돌보는 현실적 공간으로서의 정원만이 아니라 즐기고 나누는 문화로서 정원 현상에도 주목한다면 디자인뿐만 아니라 기획의 대상으로도 정원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정원 붐에 휩쓸리거나 다른 도시의 정원 이벤트를 따라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정원은 조경이 사회와 만나는 부드러운 방식의 통로라는 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기에 지나간 작은 행사이지만 그 프로덕션의 성과를 보고하고 공유하고자 한다.
도시정원 옴니버스 축제는 닷새 동안 다음과 같은 다섯 개의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 시민참가정원(한평×5일 정원)이 전 기간 전시되면서 이와 연계되는 다른 프로그램들이 같은 장소에서 또는 주변 도시 공간을 넘나들면서 이루어지는 방식이었다.
한평×5일 정원
‘한평×5일 정원’은 시민 참가로 조성된 한평 정원을 5일 동안 전시하는 프로그램이다. 8월 10일부터 9월 10일까지 한 달간 생활 정원과 게릴라 정원 부문의 참가자를 공모하여 다시 한 달 간 준비 기간을 거친 후 개막 전 2일에 걸쳐 행사 광장에 모여 개별 정원을 조성했다. 이 기간 동안 2회에 걸쳐 디자인 워크숍을 개최하여 팀별로 어떤 주제를 정했는지, 정원을 어떻게 조성할지 서로 공유하는 기회를 가졌다. 정원에 관심이 있는 시민들 중에는 나름대로의 목표나 커리어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고 전공 학생들도 참여하는 터라 예상 못한 문제에 대한 조언이 필요한 경우 외에는 그들의 아이디어를 밀어주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포장 광장 위에 설치해야 하는 불리한 여건이나 제작 비용의 한계에 비하면 시민들이 만든 정원의 결과물은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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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아시아문화전당 개관과 문화도시 광주의 미래
아시아 문화중심도시를 꿈꾸는 광주
문화도시, 끝나지 않은 논의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 사업은 물리적 공간으로는 광주에 머물지만 과업의 범위는 광주를 넘어 대한민국, 아시아와 전 세계를 포괄하는 거대 사업이다. 시간적으로는 일차적으로 2004년부터 2023년까지 20년간, 그리고 그 이후로도 계속 이어질 장기 프로젝트다.
지난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광주 문화수도’, ‘충청도 행정수도’란 선거 공약을 내놓았다. 이때 건국 이래 국가가 주도하는 가장 큰 문화 프로젝트로 광주사회에 던져진 소위 ‘문화도시’라는 거대 담론은 다양한 형태로 논란을 야기했다. 그동안 중앙이냐 지방이냐, 순수(문예)냐 현실(산업)이냐, 운동적 선명성이냐 관제 기관이냐, 포섭/편승이냐 배제냐, 부처 현안 사업이냐 국가 균형 발전 사업이냐, 외부적으로 주어진 것이냐 자생적인 것이냐, 지상이냐 지하냐, 랜드마크가 되는가, 문화 향유 시설을 늘려야 한다, 그래도 기대해 볼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등 정말 말이 많았다. 이런 가운데 대통령으로 당선된 노무현은 국정의 총책임자로서 광주의 아픔과 도시가 지닌 문제점들을 총괄한 조성 사업의 종합계획을 대국민보고회를 통해서 확정함으로써 이 논란은 일단은 종결된 듯했다.1
그러나 이후에도 도시적 랜드마크에 대한 기대, 공연장의 필요, 국립아시아문화전당Asia Culture Centre(이하 ACC)의 운영 체계, ACC 설계 당선작, 주차장, 정권 교체에 따른 관심의 향배, 구 도청 건물의 존치, 주차장문제, 콘텐츠의 미비, 정부 예산의 삭감과 집행 지연, 특별법과 법인화, 계획의 축소와 지연 등 끊임없는 이슈를 낳고 있다. 특히 ‘5월 현장 보존’이라는 명제는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의 수행 방식에 대한 큰 교훈을 남겼다.
국가 균형 발전을 위한 선택과 집중인가, 지역 사업인가 문화도시는 참여정부의 정책 목표였던 국가 균형 발전차원으로 자리매김 되면서 질적으로 비약한다. 수도권 집중의 비정상적인 구도를 재편하기 위해 행정수도를 충청도로 옮기고 각 지역의 특색에 맞는 산업을 선택해 발전 방향을 집중 모색한다는 국가적 차원의 밑그림이 그려지면서, 광주를 비롯한 호남은 21세기형 지식기반 산업인 문화를 매개로 미래 활로를 찾는다는 구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광주 문화수도는 호남의 미래를 위한 선택과 집중이라고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즉 전국 유일의 문화수도, 일종의 ‘only one' 정책이었다. 그러나 벌써 규모 축소와 독립법인화가 논의되고 있는 실정이다. 국가 균형 발전과 호남의 웅도 광주를 살리고자한 원래의 정책적 배려와 의도와는 달리 ‘잘하는지 두고 보자’, ‘돈 먹는 하마’, ‘예고된 재앙’이라는 비아냥이 고개를 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부산에 ‘아시아문화원’을 개설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구체화되어 광주 문화수도가 국가 사업이 아닌 지역의 사업으로 전락해 유일한 사업이 아닌 국가의 여러 문화 사업 중의 하나one of them로 의미가 축소되어 가고 있다.
천득염은 전남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문화재위원과 한국건축역사학회장을 맡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한국의 명원 소쇄원』, 『백제계석탑 연구』, 『한국의 건축문화재』, 『광주건축사』, 『삶의 공간과 흔적우리의 건축문화』, 『인도 불탑의 의미와 형식』, 『전남의 석탑』 등이 있다.그간 대통령직속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위원 등 문화중심도시 조성사업과 관련한 일을 많이 했으며, 100여 편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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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숲,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 문화중심도시를 꿈꾸는 광주
10년 만에 완성된 ‘빛의 숲’
광주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하 ACC)이 11월 25일 공식 개관했다. 2005년 12월, 8개월간의 국제 공모를 거쳐 우규승의 설계안 ‘빛의 숲’이 선정된 이후 10년 만이다. 낮추고 비워 도시의 경관을 끌어안은 획기적인 설계 개념 때문에 떠들썩하게 화제가 되었지만, 지난10년간 광주에서 드문드문 들려오는 소식은 랜드마크 논란이나 도청 별관 존치 여부, 읍성 유허 보존 등 그 개념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었다. ACC를 둘러싼 내홍을 접할 때면 국내에서 진행되는 많은 설계공모 당선작의 운명이 그러하듯 ‘빛의 숲’이 온전히 구현될 수있을지 우려스럽기도 했다.
ACC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본부로 사용한 옛 전남도청과 경찰청 일대에 자리잡고 있다. 2005년 국제 공모에서 가장 중요했던 요청은 이러한 역사적 현장의 중요성을 공간적으로 드러내고, 바로 그 희생의 자리에서 광주가 과거의 상처를 씻고 아시아의 문화도시로 발돋움하기 위한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당선작인 우규승의 ‘빛의 숲Forest of Light’은 광주의 역사를 기리기 위해 채우는 대신 비우는 전략을 취한다.
공간들(건물)은 지하로 들어가고 그 결과 비워진 땅과 건물의 지붕은 시민들의 공원이 되는 것이다. 우규승은 설계설명서에서 “기존의 보행자 가로체계가 연장되어 역사적인 현장과 만나면서 광주 도심에 대규모 시민공원이 조성된다”고 기술했다. ‘빛의 숲’이란 개념은빛고을 광주光州를 상징하면서 유리 파사드와 천창을 통해 빛을 품고 발산하는 형태로 구현된다. 우규승1은 우리에게는 88서울올림픽선수촌 아파트, 환기미술관의 설계자로 알려진 재미 건축가다. 그는 설계설명서 첫머리부터 시민공원을 ACC의 핵심으로 제시해 건축과 조경의 경계가 없음을 강조한 셈인데, ACC의 조경은 우규승이 평소 함께 작업해왔으며 공모 당시부터 깊게 관여했던 반 발켄버그Michael Van Valkenburgh(MVVA)가 기본설계를 진행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우규승은 88서울올림픽선수촌 아파트에서 인연을 맺었던 정영선(조경설계 서안)에게 조경 설계의 로컬을 제의했다. 서안은 기본설계 단계에서 건축의 로컬인 삼우건축과 희림건축 컨소시엄에 합류했고, MVVA와 서안의 설계팀은 광주와 보스턴을 오가며 설계를 현실화했다.
공간 배치
광주역에서 차로 20여 분쯤 달리면 작은 건물들 사이에 낮지만 눈으로 더듬어 입구를 찾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ACC가 모습을 드러낸다.2 옛 관청 일대 필지를 합쳐 조성된 이곳에는 금남로와 만나는 5.18민주광장과 보존 건물(민주평화교류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표면 아래에는 중앙의 아시아문화광장을 중심으로 주요시설(어린이문화원, 아시아문화정보원, 문화창조원, 아시아예술극장)이 부지의 생김새대로 자리를 잡았다.
5.18민주광장과 옛 전남도청 한국 민주화 운동의 성지로 불리는 옛 전남도청 앞 광장은 1980년 5월 시민군이 최후의 항전을 준비한 곳이다. 광장 한가운데 남아있는 분수대는 당시 각종 집회의 연단이 되기도 했고 그 주변에서 많은 광주 시민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교통광장이었던 이곳은 5.18민주광장으로 탈바꿈하여 보행자들에게 열린 공간이자 ACC의 주 관문이 되었다. 우규승은 새로운 공간들은 땅 아래에 배치하고 역사의 증인들은 땅 위의 주인공으로 남겼다. 밝은 회색 석재가 깔린 이 광장에는 어찌 보면 촌스러운 파란색 페인트에 회양목으로 둘러싸인 분수대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그날의 기억을 소환한다. 반 발켄버그 역시 5월 당시 총격을 당했던 다섯 그루의 나무를 목격자 나무witness tree라고 부르며 광장과 이어지는 보존 지구에서 가장 중요한 조경 요소로 삼았다. 이 살아있는 역사의 상징 외의 부차적인 요소들은 모두 제거하고 나무들이 잘 생장할 수 있도록 토양 조건을 개선했다. 당시 희생자들의 시신을 안치했던 상무관 주변에는 상록수를 많이 심어 차분한 기념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옛 전남도청은 광주의 역사적 기억을 민주와 인권, 평화의 가치로 승화시킨 콘텐츠를 담게 될 민주평화교류원으로 리모델링되었다. 도청 옆 별관 건물은 5.18민주광장과 아시아문화광장을 시각적으로 이어주고 ACC 안팎에서 무등산을 조망할 수 있도록 철거될 예정이었으나, 설계공모 이후 5월 관련 단체 측의 요청으로 남게 되었다.
기념과 추념이 늘 엄숙한 것은 아닌 법. 평범한 일상에서 5.18민주광장은 크고 작은 행사가 펼쳐질 수 있는 유연한 공간으로 시민들에게 돌아왔다. 새로 설치된 바닥 분수는 더운 여름날의 열기를 가라앉히고 그 안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이 공간을 미래를 향한 희망의 공간으로 만든다.
조경기본설계MVVA(Michael Van Valkenburgh Associates) + 조경설계 서안
조경실시설계조경설계 서안 + MVVA, 씨엔조경
건축설계KyuSungWoo Architects +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 + 희림종합건축사사무소
발주문화체육관광부
위치광주광역시 동구 관산동 등 구 전남도청 일원
대지면적96,036m2
조경면적15,091.79m2
건축면적20,938.67m2
연면적139,178.87m2
건폐율21.80%
용적율11.11%
규모지하4층, 지상4층
최고높이20.3m
- 김정은 / KyuSungWoo Architects, 삼우, 희림, MVVA, 조경설계 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