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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의 청춘은 안녕하십니까? ‘신림동 청춘-고시촌의 일상’, 2015.9.11.~11.8
    공간마다 특유의 감수성이 있다면 서울특별시 신림 9동(현 대학동)의 감성은 묘한 애상감이라 할 수 있다. 머물기보다 떠남이 익숙한 장소. 어느 노랫말처럼 꼭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지는” 청춘과 같은 신림 9동 특유의 감수성에 주목한 전시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시대의 변화와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에게 적응하며 자신의 옷을 바꿔 입었던 신림동의모습을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안녕, 신림동 전시장 입구를 들어서기도 전에 신림동으로 향하는 버스 정류소가 관람자보다 더 먼저 인사를 건넨다. 우뚝서 있는 표지판과 정류소 한쪽 벽면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전단지가 이목을 끌고, 중앙에 덩그러니 놓인 벤치는 여느 정류장과 다를 바 없다. 정류소 이름은 ‘신림동고시촌입구’. 이 표지판 하나로 전시 공간은 자연스레 신림동 고시촌이 된다. 그러고 보니 ‘빈방 있습니다’, ‘투룸’, ‘잠방(잠만 자는 방) 있습니다’, ‘민법 진도별 모의고사’ 등 벽면에 붙은 전단지들도 전부 고시생들을 겨냥한 것이다. 고시촌은 어떤 모습일까. 전시의 첫 번째 섹션은 ‘안녕, 신림동’하고 인사를 건네며 관람자를 맞이한다. ‘신림新林’이라는 지명은 관악산 아래 기슭에 위치한 탓에 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관악산이 입신을 용이하게 하는 ‘벼슬산’이라고도 불렸다는 설명을 보며 그 이름 덕에 고시생들이 신림동에 모이게 된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곧 그런고루한 이유가 아니라 도심과 멀어 조용하고, 도시에 팽배한 환락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 있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스스로 고립된 삶을 택한 청춘들은 대거 신림동으로 이주했고, 1990년부터 시작된 변화에 발맞춰 신림동은 고시생들의 생활에 적합한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1인분씩 잘라 파는 과일가게가 생겼고, 여러 개월 치의 식권을 한꺼번에 판매하는 뷔페식 식당, 일명 ‘고시식당’이 생겼다. 닭장과 같은 독서실에서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달리는 학생들이 하도 보아 너절해진 책에 열정을 쏟아 붓고, 독서실을 나가면 유일한 오락거리인 인형 뽑기 기계에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고시생들이 가득하다. 거리에 버려진 담배꽁초가 유난히 많은 것도 신림동 고시촌의 일면이다. “빨리 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나고 싶다”란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답답하고 어두운 공간에서 청춘을 지새우는 이들의 초상이 곳곳에 묻어있다. 오랜 시간 힘든 공부에 찌든 이들의 바람은 오직 한가지다. 서둘러 이 신림동 고시촌과 안녕을 고하는 것. ‘안녕 신림동’이라는 다소 명랑한 인사와 달리, 전시장에 펼쳐진 신림 9동의 모습은 헤어짐을 종용하는 기운으로 가득했다. 항상 손을 들고 서있다 고시촌이 들어서기 전부터 신림동은 작별의 기운이 맴돌던 곳이었다. ‘고시촌 너머 신림동’ 섹션은 고시촌이 형성되기 전 신림동에 머물렀던 사람들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시대별로 조명해 보여준다. 이 섹션을 천천히 둘러보며 신림동이란 공간에서 느껴지는 묘한 애상감이 비단 고시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본래 의성 김 씨의 집성촌이었던 신림동은 1960년대 중후반 서울시가 진행한 도심 불량주택 철거 정책과 개발에 삶의 터전을 잃은 난민들의 집결지가 되었다. 용산 해방촌, 청계천, 한강 주변, 이촌동, 공덕동 등 각지에서 떠나온 철거민들은 황량한 신림동 일대를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그러나 구호 대책이 전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주가 진행되었기에 당시 신림동은 주거와 교통 등 생활 환경이 매우 열악했고, 마을 곳곳에선 삶의 몸부림같은 생계형 범죄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철거민들이 신림동에 자리 잡기 위해 애쓰는 마음과 별개로 그들의 삶은 녹록치 못했다. 주민들이 서울시장에게 대책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낼만큼 어려웠던 그 때를 좋은 시절로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렇게 신림동은 철거민들에게 가난과 상실의 아픔이 떠오르는 장소가 되었고, 본의 아니게 서둘러 작별을 고하고 싶은 공간, 혹은 그곳에 머문 이들의 안녕을 바라며 항상 손을 들고 서 있어야 하는 공간이 되었다. 마주보고 서있다 신림동은 어떤 형태로든 청춘의 이면이 머물다 가는 공간이다. 전시 서문에 적힌 헤르만 헤세의 책 제목처럼 청춘은 아름답다. 그러나 미래를 준비해야 하기에 고달프고 불안한 시기이다. 좋을 때니 청춘을 즐기라는 말을 수시로 듣지만, 사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제가 지금 그럴 땐가요” 하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온다. 이 경험을 어떤 청춘이든 해보았을 것이다. ‘신림동 청춘’을 보며 들었던 애상감은 청춘이라는 시기가 주는 동질감이 만들어낸 자기 연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신림동 청춘’ 전에는 열정적이고 건강한 청춘의 모습도 소개되고 있다. 1975년 서울대학교가 신림동으로 완전히 이전되며 거리를 장악했던 당시 대학생들의 일상을 담은 것이다. 대학이 자리를 잡아가던 1980년, 학생들은 당시 독재 정권에 반기를 들고 민주화를 노래하며 신군부 집권에 반대하는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지식인으로서 분노를 참지 않고 발산했던 때, 서로의 연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순수함이 존재했던 그 때, 신림동은 뜨거운 아우성을끊임없이 토로하는 청춘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청춘들은 고함을 치는 것보다 침묵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고, 연대보다 혼자가 되는 것에 더욱 익숙해져 있다. 삼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를 지나 오포 세대(삼포에 더하여 인간관계와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한 세대)라고까지 일컬어지는 현대의 청춘들에게 이제 신림동 고시원은 고시생만의 거주지가 아닌 가난하고 몸둘 데 없는 1인 가구들의 안식처다. 2008년 로스쿨이 도입된 후, 2017년에는 사법고시를 폐지한다는 법안이통과되며 고시생들이 신림동 고시촌을 떠난 자리를 혈혈단신의 다양한 청춘들이 채우게 된 것이다. 신림동 뿐만이 아니다. 고시원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건물중 정말 사법고시 준비생들이 머무는 곳이 얼마나 있을까. 이제 곳곳의 고시원들은 거리로 내몰린 외로운 청춘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새로운 ‘신림동 청춘’들은 어디에나 있고, 신림동 고시촌의 일상은 다름 아닌 당신의 혹은 당신 다음 세대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신림동 청춘’ 전에서 당신이 마주보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길 바란다. 전시는 11월 8일까지 진행된다.
    • 박인수
  • 어반 스파 치와와 건축 대학교 ‘불모지를 위한 워크숍’
    2주 동안 ‘지역의 미래와 희망을 담은 임시 설치물’을 만들어야 한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2주 만에 해결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럽고 거창한 과제를 스페인의 건축설계사무소 PKMN은 지역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단순하고 유쾌하게 풀어냈다. 고장이 나서 오랫동안 쓰지 않고 버려져 있던 분수가 모두를 위한 야외 풀장으로 재탄생했다. 불모지를 위한 워크숍 매년 여름, 멕시코 치와와 건축 대학교Instituto Superior de Arquitectura de Chihuahua는 ‘불모지를 위한 워크숍Taller del Desierto’을 조직한다. 국내외 디자이너를 초청해 이 지역의 낙후된 공간을 활성화시키는 임시 설치물을 짧은 시간 동안 조성하는 워크숍이다. 올해 워크숍의 과제는 치와와 시 중심에 있는 우루에타 공원Parque Urueta에 작은 시설물을 짓는 것이었다. PKMN을 주축으로 멕시코 디자이너 듀오 메멜라Memela, 지역 건축가 후안 카스틸로Juan Castillo, 미구엘 헤레디아Miguel Heredia, 디자이너 미구엘 가르시아Miguel García가 함께 설계팀을 이뤄 워크숍을 진행했다. 특히 이 프로젝트는 여러 대학과 치와와 시 노동자 밀집 구역에서 시민운동을 하고 있는 임풀산도 카파시다데Impulsando Capacidades, 지역 구호 단체 에이 플러스 비엔A+bien 등의 지역 시민 단체가 파트너십을 맺어 조성될 수 있었다. 임풀산도 카파시다데와 에이 플러스 비엔을 통해 비계飛階 40개와 팔레트 수십여 개, 그늘막을 만들기 위한 자투리 천을 빌리고 페인트 몇 통을 조달받았다. 뿐만 아니라 이번 워크숍에는 설계부터 시공까지 공원 근처 주민들을 포함한 다양한 구성원이 참여해 도움을 주었다. 공동의 희망을 위한 설계 과정 치와와 시 중심에 있는 우루에타 공원은 농구장, 축구장, 테니스장 등이 모여 있는 스포츠 구역과 큰 나무가 우거진 작은 숲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중앙 통로가 두 구역을 잇고 있다. 프로젝트의 대상지는 공원의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은 이 중앙 통로에 위치한다. 워크숍의 목적은 지역의 미래를 위한 공동의 희망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설계팀은 공원 바로 옆에 위치한 학교의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기다리면서 잠깐 쉴 수 있는 그늘진 공간, 스포츠 구역 및 휴식 공간의 계단과 점수판, 새로 디자인한 공공 벤치 등 공원에 부족한 편의시설을 고안하고 일련의 스케치를 그려 보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역 주민들은 이러한 새로운 편의 시설보다는 공원 중심부에 있지만 고장이 나서 몇 년간 사용하지 못하고 있던 기존의 수경 시설을 고쳐서 다시 활용하기를 원했다. 워크숍 설계팀은 지역 주민의 바람에 따라 중앙의 수경 시설을 재활용하는 아이디어를 실행하기로 결정하고 공원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희망과 기대를 어떻게 하면 건축적 제안으로 충족시킬 수 있을지 궁리했다. 확정된 아이디어를 설계로 완성시키는 데 1주일, 설계안을 토대로 주민 및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시공하는 데 1주일이 주어졌다. 워크숍은 대학과 시 정부 간의 소통 창구 역할을 담당했다. 시 의회는 워크숍에서 나온 시민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공원 중앙 수경 시설의 펌프를 고치고 분수에 다시 물을 채우는 데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어반 스파 어반 스파Urban Spa는 레크리에이션의 용도로 물을 활용하는 것을 가장 기본적인 목표로 삼은 임시 편의 시설이다. 설계팀은 나무 팔레트, 비계, 자투리 천 등의 재료를 재활용해서 최소의 비용으로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나무 팔레트를 이용하여 분수 시설을 야외 목욕시설로 탈바꿈시켰으며 그 외에 계단, 선 배드, 작은 화단, 경사로 등의 부속 시설물도 만들었다. 비계 유닛은 나무 팔레트와 천막을 지지하는 기초 구조물로 이용되었고 휴식 공간과 작은 전망대를 제공한다. 임시 풀장으로 이용되는 분수는 주변의 큰 나무들이 드리우는 그늘과 끊임없이 쏟아지는 물로 인해서 주변지역보다 시원한 미기후를 조성해 주변 유동 인구를 풀장으로 끌어들인다. 또한 어반 스파는 이전부터 이 구역에서 주민들을 위해 진행되고 있던 줌바zumba 및 요가 수업의 장소로도 이용되며 우루에타 공원을 활성화시킨다. 어반 스파는 임시 가변 설치물로 곧 철거될 예정이지만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 설계팀과 지역 주민들이 함께 힘을 모으고 아이디어를 짜냈던 경험은 지역을 위한 새로운 희망을 움틔울 것이다. ‘불모지를 위한 워크숍’에 참여한 지역 시민 단체 임풀산도 카파시다데의 감독 가브리엘라 데라 크루즈 아르멘다리즈Gabriela de la Cruz Armendáriz는 “지역 주민들의 우려와 고민을 존중하고 공감의 디자인을 제안한 설계팀과 뜨거운 태양 아래 작업했던 학생 및 주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앞으로 우리도 공공 공간을 개선시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 조한결
  • ‘클라우드 시딩’ 플라자 파빌리온 ‘이스라엘의 도시 그늘’ 전, 홀론 디자인 박물관
    이스라엘의 국립 디자인 박물관인 홀론 디자인 박물관Design Museum Holon의 ‘클라우드 시딩Cloud Seeding’플라자 파빌리온은 디자인이 공공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넘어 공공의 경험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클라우드 시딩’은 2015년 7월 4일부터 10월 31일까지 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스라엘의 도시 그늘Urban Shade in Israel’ 전시의 일부다. 한여름, 이스라엘 도시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공공 공간에 그늘이 없다는 점이다. 열섬 현상 때문에 점점 뜨거워지는 도시의 더위를 거리, 광장, 혹은 공원이나 학교 운동장에서도 피할 수 없다.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인 마틴 바일Martin Weyl은 적절한 기술을 활용해 공공 공간에 그늘을 만들어 좀더 나은 도시적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번 전시는 단순히 최근의 트렌드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계획가,생태학자, 건축가, 조경가, 경제학자 등에게 도시 내 그늘을 만들 것을 촉구하는 선언과 다름없다. ‘클라우드 시딩’은 태양과 그늘 사이의 경계를 창조한다. 이 경계는 역동적이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파편화되어 있다. 이러한 경계는 메시 생지mesh fabric 천장 위에서 움직이는 수천 개의 가벼운 공 혹은 ‘씨앗들’이 만들어 낸다. 이 ‘씨앗들’은 페트병을 재활용해 만들어졌다. 천장의 표면에 놓인 3만 개의 공들은 바람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인다. 이러한 머리 위의 움직임은 파빌리온의 각기 다른 영역에서 공공 이벤트가 일어나도록 유도한다. 문화적이고 레저와 관련된 프로그램이 보이지 않는 날씨의 힘과 연계되는 것이다. 박물관 플라자 주변에 부는 바람과 같은 미기후는 움직이는 천장이라는 물질적인 형태를 부여받고, 이는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매혹한다. 매일 매일 산들바람이 지중해로 부터 불어와 오후에는 네게브 사막Negev Desert으로 불어 가면서 대중들에게 핵심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이 구조물은 박물관의 어반 플라자에 위치하며, 박물관과 시가 주최하는 다양한 이벤트를 위해 이용된다. 대중들은 공연에 초대받고, 옥외 댄스 강습에 참여하고, 무료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혹은 그늘을 단순한 라운지로 이용하기도 한다. 해변 의자는 방문객들이 머리 위로 움직이는 천장을 바라보며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한다. 다목적 플라자 파빌리온은 박물관 방문객과 일반적인 대중들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공 공간이다. ‘클라우드 시딩’은 온실과 같은 이스라엘의 농업 경관을 유비쿼터스 건물 유형으로 변환시킨다. 이때 온실이라는 구조적인 틀은 (벽과 지붕 패널 없이) 단순하게 유지된다. 농업 용도의 온실은 문화, 레저 그리고 공공 이벤트를 위한 플라자 파빌리온으로 재-전용되는 것이다. ‘클라우드 시딩’의 디자인은 모두MODU가 지오텍투라Geotectura와 함께 했다. 뉴욕에 기반을 두고 건축 실무를 하고 있는 모두는 사람을 환경과 연결해주는 스마트 디자인을 추구하며 대개 여러 분야와 함께 협업하며 작업한다. 건축가인 코리 박사Dr. Cory가 설립한 지오텍투라는 혁신적인 디자인과 지속가능성에 특화된 실무를 지향하고 있다.
    • 박인수
  • [시네마 스케이프]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반복과 차이
    어느 봄날, 첫 아이 낳은 후 정신없이 살던 두 아줌마가 어렵사리 저녁 나들이를 하게 됐다. 홍상수라는 신인 감독의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보기 위해서였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짧은 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근처 맥줏집으로 향했다. 종로 연타운은 대학 시절과 변함없이 성업 중이었다. 마침 그날은 성년의 날이어서 그곳은 젊음의 열기로 가득했다. 대학 시절의 추억과 오랜만의 밤 문화에 살짝 들뜬 우리는 맥주를 빨리 많이 마셨다. 그것도 모자라 검정 봉지에 캔 맥주를 넣어 극장에 들어갔다. 시네코아라는 극장은 그런 짓이 살짝 용인되는(물론 근거 없는 주장이다), 소위 ‘아트 무비’로 분류되는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었다. 우리는 맥주를 몰래 마시기 위해 객석 가운데 있는 기둥 근처에 자리 잡았다. 관객은 몇 명 되지 않았고 영화는 소문대로 충분히 낯설었다. 맥주 탓에 둘 다 화장실을 들락거려서 가뜩이나 낯선 영화의 집중도는 현격히 떨어졌다. 영화가 끝날 때쯤 또 화장실에 다녀온 나는 갑작스러운 살인 사건 장면을 보고 누가 왜 죽인 거냐고 친구에게 물었다.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잘 모르겠는데.” 그 후 내게 홍상수의 영화는 얼마 동안 ‘잘 모르겠는’ 영화였다. 해외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국내외 비평가들은 엄청난 찬사를 보냈으며 논문 주제로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영화는 점점 단순해지는데 평론은 더 어려워지고 심오해졌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첫날 달려가서 봤다. 기존 상업 영화들이 식상해서였는지 ‘아트 무비보기’라는 허세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난 찌질한 남자가 등장했고, 그들은 항상 술을 마시며 남자는 여자와 자거나 혹은 자고 싶어 했다. 더는 극장에서 맥주를 마시지 않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소주가 마시고 싶었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로마, 헬레니즘을 만나다- 키케로의 증언
    #63 농자 로마지 대본 중국 고사에 현인들이 농사를 짓다가 재상으로 등용된 사례가 종종 전해진다. 고대 로마에도 그런 고사가 있다. 로마의 군자軍者이자 농자였던 킨키나투스Cincinnatus(B.C. 519~430) 역시 밭을 갈던 중 로마 원로들이 모셔다가 독재관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독재관이란 외침 등으로 인해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임명되는 임시직으로서 절대적인 통수권이 주어졌지만 임기가 6개월로 제한되어 있었다. 킨키나투스 장군은 불과 16일 만에 외적을 물리쳐 임무를 완수했다. 시민들은 장군이 그대로 눌러앉아 권력을 휘두를까 은근히 걱정했으나 그는 곧바로 밭으로 돌아갔다. 이런 일이 두 번이나 있었다. 이후 킨키나투스는 로마의 덕목을 상징하는 인물로 길이 추앙되었다.1 킨키나투스 장군의 연대가 말해주듯 지금 우리는 시대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로마가 시작되었던 무렵으로 더듬어 가고 있다.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가 로마의 팔라티노 언덕에 도시 국가를 건설하고 왕이 되었을 때 그를 도왔던 건국 공신들이 있었다. 이들이 파트리키라는 귀족층을 형성하고 원로원이 되었으나 본업은 모두 농자였다. 로마인들은 천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로마가 농경 사회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힘겹게 일하는 농자야말로 고귀한 로마인의 유일한 직업이라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이 사실은 우선 원로원을 비롯하여 모든 로마의 정치가, 법관들이 녹봉 없이 근무했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신흥 세력으로서 로마 토착 세력의 철통같은 방어선을 뚫고 마침내 성공한 키케로의 경우, 로마 근교 아르피눔―지금의 아르피노(Arpino)―에 있는 자신의 빌라를 찾을 때면 가슴에 뿌듯함이 가득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여기에 내 선조들의 근본이 있고 그들이 찾던 성소가 있으며 곳 곳에 그들의 자취가 가득하다.”2 거대한 제국의 건설, 전쟁과 뛰어난 군사력, 엔지니어 기술, 콜로세움의 전투사들, 웅장한 건축물 등 지금 우리가 로마에 대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로마 문화의 꽃이라면 그 뿌리는 농업이었다. 이는 로마의 유력한 사상가들이 농업에 대한 저술을 적지 않게 남겼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그 중 네 명의 작가가 가장 주목받고 있다. 최초로농업서를 집필한 인물은 ‘대大 카토Marcus Porcius Cato(B.C. 234~149)’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다. 정확한 집필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개 기원전 170~60년경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로부터 백 년도 넘게 지난 기원전 37년경,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Marcus Terentius Varro(B.C. 116~27)라는 인물이 농업론 혹은 농사론De re rustica을 집필했고 그로부터 또 다시 백 년가량이 흐른 뒤 콜루멜라Columella의 방대한 농사서De re rustica libri 13권이 발표되었으며, 서기 4세기에는 팔라디우스가 14권 분량의 ‘농가월령가’3를 지었다. 그 중 처음의 두 작가, 대 카토와 바로의 작품을 한번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대 카토의 농업론의 경우, 시대적으로 보아 로마의 토지 분배에 큰 변화가 있던 때에 집필되었다는 사실이 주목을 끈다. 전설에 의하면 처음 로물루스 왕이 국가를 세운 뒤 모든 로마인들에게 공평하게 농토를 나눠주었다고 한다. 가구당 약 1,700평 정도의 규모였다.4 온 가족을 먹여 살리기에는 작은 땅이었으나 공용지가 있어 모자라는 분량은 거기서 충당했다. 이렇게 소규모 의 농토를 나눠주던 전통은 꽤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던 것이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시작된 영토 확장과 함께 소농 기본의 원칙이 무너지고 대지주 세력이 형성되었다. 점령한 땅은 일단 국유지5로 지정되었으나 이들을 효과적으로 관리·운영하기 위해서는 소규모 농지 시스템을 고수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영유지에 대한 처분 법을 제정하고 이 법을 집행하기 위해, 즉 땅을 분배하고 관리·감독하기 위해 ‘감찰관’이란 직분을 만들었다. 이 감찰관이 원로원들 사이에서 선발되었으므로 자기들끼리 토지를 나눠가졌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대 카토는 재무관, 법무관, 원로원, 집정관을 거쳐 감찰관을 고루 지낸 정치가였다. 불어난 토지를 어떻게 경영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 그의 농업론은 어떤 작물을 어떻게 심어야 최대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제안으로 점철되어 있다. 결국 땅을 이용하여 수익을 올리자는 투자 제안서이기도 했다. 요즘 같으면 도시 개발로 한몫 챙겼을 터다. 서문에서 그는 농업이야말로 상업이나 금융업에 비해 유일하게 정직하고 명예로운 수입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자신은 노예 매매와 무역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여기서 얻은 수익을 다시 토지에 투자했으니 모순될 것 없다는 주장인 듯하다. 그러므로 카토가 농업서를 집필한 진정한 이유는 투자 사업으로 인해 실추된 명예를 만회하기 위해 자신을 농사꾼으로 포장한 것이라는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 쾌락의 도시, 절제의 도시
    도시와 쾌락 1990년대 대한민국은 여러 측면에서 돌이키기 어려운 변화를 겪었다. 나라 밖에서는 냉전과 이념 대립의 시대가 저물어 갔고, 안에서는 정치 민주화를 향한 힘겨운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체제의 정당성 확보보다는 폭등하는 집값 안정이, 사회적으로는 공동체 재건보다는 개인의 정체성 발견이 더 시급한 과제였다. 이와 함께 새로운 종류의 놀이 문화에 대한 갈망, 때로는 억눌린 욕망의 분출과 퇴폐적인 즐거움에 대한 추구가 도시 공간 깊숙이 파고들었다. 1990년대 초 부산에서 첫선을 보인 ‘노래방’이 짧은 시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국민 유흥의 장소로 자리매김했고,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로 대표되는 야하거나 관능적인 여자(혹은 남자)―나아가 이들을 향한 시선―에 대한 재발견이 ‘압구정 오렌지족’으로 상징되는 젊은 세대의 거침없는 자기표현과 향락적 판타지 위에 묘하게 포개지곤했다. 그뿐인가. 각종 ‘러브 호텔’과 ‘변종 카페’가 우후죽순처럼 도시 경관을 잠식했고, 재벌 2세와 유명 연예인들이 환각 상태에서 벌인 ‘마약 파티’가 우리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것도 1990년대에 일어난 현상이다.1 각종 즐거움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고 이에 따라 도시 공간이 끊임없이 바뀌는 것 자체가 이상할 까닭은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쾌락의 쳇바퀴hedonic treadmill’를 도는 존재 아니었던가2 소득 수준이 높아지거나 과거 갈망했던 즐거움을 손쉽게 얻을 수 있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다시 새로운 종류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계속 쳇바퀴를 돌리고, 때로는 사회적 금기로부터의 일탈과 탈주를 꿈꾼다. 이러한 일탈적 도시 경험에는 국경이 없다. 16세기 후반으로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가는 쿠바 하바나의 칼레 오비스포Calle Obispo 거리에서 경험할 수 있는 라틴 음악과 술, 세계 엔터테인먼트의 수도이자 카지노의 본산인 라스베이거스의 쇼와 도박, 그리고 필리핀 앙헬레스와 같은 ‘죄악의 도시Sin City’에서 벌어지는 퇴폐적 밤 문화와 이를 향한 어른들의 낯뜨거운 호기심도 여기에 포함된다(그림1). 쾌락의 쳇바퀴가 굴러감에 따라 각종 유희는 때로는 합법적으로, 때로는 느슨한 규제를 틈타 도시 공간에 침투하게 되며, 익숙함과 일탈이라는 두 경험의 축은 도시 변화의 원동력이 된다. -방, -룸, -탕, -텔, -장 적어도 지난 20여 년간 각종 ‘-방’, ‘-룸’, ‘-탕’, ‘-텔’, ‘-장’은 한국 도시에서의 밤 문화를 바꾸는 데 공헌한 단역 배우들이다(그림2). 그 기원은 다르지만 이들 공간은 다양한 종류의 술과 음료, 음식과 노래, 춤과 휴식, 게임과 스포츠, 때로는 낯선 타인과의 교류 혹은 은밀한 만남의 기회를 제공한다. 물론 20세기 초 서울에 등장한 유곽이나 1960~70년대 무교동을 비롯한 각종 유흥가도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지만, ‘-방’, ‘-룸’, ‘-탕’, ‘-텔’, ‘-장’은 그 가벼운 몸집과 다채로운 서비스를 무기로 끈질긴 생명력을 보인다. 이들은 한때 심각한 사회적 유해성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터키탕’처럼 한 국가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는 항의가 제기될 만큼 불명예스러운 서비스 공간이기도 했다.3 그럼에도 적어도 일부 용도에 대해서는 그 규제가 완화되거나 때로는 적법한 시설로 전환되는 데 성공했다. 노래방이 그 좋은 예다. 등장과 동시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간 노래방의 인기에 다소 놀란 듯 정부는 1992년 ‘풍속영업의 규제에 관한 법률’에 따라 노래방 심야 영업과 미성년자 출입을 전면 금지했다.4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이 규제는 불필요하게 국민 생활을 구속하는 정책으로 낙인찍혔다. 곧이어 영업 시간 규제가 철폐되었고, 청소년 출입은 심야 이전에 한해 전면 허용되었다. 노래방에 대한 유해성 논란은 채 10년도 지속되지 못했다.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 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 이론과 스튜디오 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 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 김세훈[email protected]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도시설계전공 교수
  • [그들이 설계하는 법] 경관편집자는 발견하고 엮는다
    2014년, 부천의 한 공단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경관에디터’라는 단어를 조어했다. 잡지 편집자가 여러 저자의 글로 하나의 잡지를 만들어내듯이 내 스스로 새로운 경관을 창조하기보다는 편집하는 역할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역할에 대한 설명을 위해 ‘경관(혹은 landscape)’이라는 단어와 ‘편집(혹은 editing)’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놓고 경관편집자, 경관에디터, 랜드스케이프에디터 등 이런 저런 조합을 해보았는데 어떠한 것도 적당해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서도 어떤 의도인지는 알겠지만 어감이 좋지 않다고들 했다. 그러다 경관을 영어인 ‘랜드스케이프’로 쓰면 너무 길어 ‘경관’이라는 단어를 선택하니 뒤의 단어도 같은 한글인 ‘편집자’가 적당했다. 작가로서 작업해 주세요? 그리고 경관편집자 경관편집자라는 단어를 조어하도록 한 프로젝트의 명칭은 ‘예술이 흐르는 공단 공공미술(이하 예술 공단 프로젝트)’이다. 경기문화재단과 부천테크노파크가 3년 동안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로, 2014년이 마지막 해였다. 첫 해에는 최정화 작가와 조민석 건축가, 김형관 미술가가 참여했다. 최정화는 공단에서 나온 고철을 이어 붙여 ‘당신은 꽃입니다’라는 조형물을 만들었고, 조민석은 조형물이 놓이는 꽃방석을 만들어 공단 외부 공간한쪽에 설치했다. 김형관은 ‘달리는 파사드’라는 제목으로 건물 내부 공간을 벽화로 연출했다. 두 번째 해에는 박은선 작가가 참여했다. 그는 공단 내 건물 외벽을 대상으로 ‘유기적 공간’이라는 이름의 벽화 작업을 했다. 이 작품에는 ‘가로 24m, 높이 36m로, 작업 기간만약 2개월 이상 소요된 국내 최대의 공공미술 벽화’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마지막 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내게 주어진 역할은 ‘작가’로서 그동안의 사업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조경 분야에서의 작가라? 작가라는 단어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경기도 문화재단과도 이 작가라는 단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에게 ‘조경’이라는 분야는 낯설었고, 특히나 나는 한평공원처럼 개인의 감성이나 조형적 감각을 표현하기보다는 주민들의 의견에 좌지우지 된다고 여겨지는 참여 디자인 작업을 많이 해왔기에 그들의 우려는 더욱 컸다. 조경 분야에서의 작가? 조경가? 작가의 자의식? 그리고 이용자? 같은 단어들 사이를 오고가다, 큰 개념 정리는 접어두기로 했다. 대신 이 프로젝트에서의 나의 역할을 앞서 언급한 ‘경관편집자’로 스스로 규정했다. 지난 2년 동안 조성된 조형물과 벽화, 광장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연못, 여러 조각상 등, 이미 많은 조형적 요소들로 꽉 차 있는 이곳에서 내가 할 일은 이 요소들을 엮어주는 역할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김연금은 조경작업소 울을 운영하고 있으며, 커뮤니티 디자인 센터의일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커뮤니티 디자인, 마을만들기를 일과 활동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박사 학위 논문을 발전시킨 『소통으로 장소 만들기』(한국학술정보, 2009), 일상의 경관에서 이루어지는 거시적 구조와 미시적 요소와의 상호 관계를 관찰하고 기록한 『우연한 풍경은 없다』(나무도시, 2011) 등의 저서가 있다.
  •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무나 안드라오스 데일리 뚜레쥬르 창립자 및 대표
    ‘매일’이라는 뜻을 가진 ‘데일리 뚜레쥬르’(캐나다에서 영어와 불어를 병기하는 문화를 표현했다)는 캐나다 몬트리올에 위치한 별난 디자인 회사다. 특별히 어떤 일을 한다고 정의하기에는 너무나도 자유로운 작업을 해 온 집단. 굳이 말하자면 인터랙션interaction 디자인을 이용해 도시 공간(주로 외부 공간)에 공공 설치예술 작품을 해온 아티스트들이다. 그들의 작품은 부드러우면서도 감동적인 사회적 아젠다, 즉 ‘함께 사는 세상, 더불어 사는 우리’라는 메시지를 매우 세련되고 참신한 방식으로 전한다는 특징이 있다. 하나로서는 지극히 단순한 소리일 뿐이지만 여러 개가 어울렸을 때에는 형용할 수 없이 아름다운 화음을 연출해 내는 ‘21개의 그네21 Balançoires’, 한 명이 부르는 노래는 그저 음치일 뿐이지만 수십 명이 함께 부르면 그 어떤 합창보다도 멋진 감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거대한 합동 노래방Giant Sing Along’ 프로젝트 등이 대표적이다. 공동의 삶, 타인과 함께 함으로써 평범함이 특별함으로 전이되는 놀라운 경험을 선사한다. 공감empathy이 화두가 되는 시대에 과연 조경과 도시설계가 만드는 공간은 충분한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 일까? 이용자의 마음과 시대적 성향, 사회적 요구를 과학적으로 충분히 검토하고 있는가? 우리의 디자인은 진정 창의적이라 말할 수 있을까? 멜리사 몽지아Melissa Mongiat와 함께 데일리 뚜레쥬르를 창립해 이끌어 온 공동 대표 무나 안드라오스를 만나 확인해 보자. Q. 데일리 뚜레쥬르의 작업 영역은 매우 넓은 것 같다. 여러 분야의 경계를 넘나드는 포괄적인 프로젝트를 해왔는데 당신의 일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A. 우리 회사에서 주로 다루는 일은 인터랙션 디자인Interaction Design이라 할 수 있다. 즉, 사람들의 경험에 집중하며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고 세상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있다. 따라서 중간에서 서로 다른 영역들을 이어주는 매체medium 자체가 우리의 프로젝트가 다루는 대상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수년간 대부분의 작업은 공적 장소나 대중과의 직접적인 상호 작용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에 설치되었다. Q. 데일리 뚜레쥬르의 사명이 있는가? 그러한 작업을 하는 이유를 밝힌다면? A. 우리의 관심은 ‘대화’와 ‘교류’다. 우리 회사의 핵심 멤버들은 최근 몇 년간 건강한 시민 사회를 만드는 과정에서 공유 공간shared space과 공유하는 삶shared common life의 중요성과 그 역할에 대해 알려주는 여러글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다. 우리 프로젝트를 통해좀 더 많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가지며 궁극적으로 진심이 담긴 대화를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개인이라는 경계를 넘어서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Q. 무척이나 도시적urbanistic이고 공적인 사업 목표인 듯하다. 이런 회사를 운영하게 된 개인적 배경과 회사를 설립할 당시의 상황에 대해 말한다면? A. 원래 전공은 인문학과 영화학이다. 2000년대 초반 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영화학의 연장선상에서 새로운 매체로서의 웹과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인터넷엔 그 어떤 규율도 없었고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경험을 통해 인터랙션 디자인 회사를 설립했는데 초반에는 주로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을 연구하다가 점차 물리적 형태를 가진 것들로 옮겨갔다. 가상 공간에서 실험한 아이디어를 현실의 3차원 공간에 적용하면서 공동 창업자인 멜리사를 만났다. 멜리사의 전공은 환경 그래픽 디자인이고 주로 전시 디자인narrative environments쪽의 일을 해왔다. 그녀는 런던에서, 나는 뉴욕에서 활동하다가 몬트리올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서로의 관심사가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함께 회사를 창업하게 되었다. Q. 데일리 뚜레쥬르의 프로젝트는 음악, 무용, 시를 매우 빈번히 사용하는데, 이것은 개인적인 취향 때문인가 아니면 프로젝트를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것인가? A. 직원 중 아무도 직업적인 예술 교육을 받은 경우가 없다. 우리는 이용자와 좀 더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이러한 예술적 매체를 활용한다. 예술은 시공간과 언어를 초월해 모두를 묶을 수 있는 만국 공통어이기 때문이다.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뉴욕에 기반을 두고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해 왔다.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고, 주요 작품이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 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 전시되었다. UNKNP.com의 공동 창업자이며, 저서로 『시티오브뉴욕』(공저)이 있다.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에서 조경 설계를 연구하며 학생들이만드는 것의 기쁨을 알아가도록 돕고 있다.
  • [재료와 디테일] 속도를 만드는 경계석
    도시의 가로를 걸으며 보게 되는 가장 흔한 풍경은 무엇일까. 가로수, 건물, 도로 등등 많은 것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바닥의 포장과 그 영역을 엄정하게 규정하는 경계석들이 눈에 쉽게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직업의 특성도 있지만 늘 장소가 바뀔 때마다 바닥의 포장 재질이나 패턴은 변해도 경계석만은 고정된 모습으로 영역을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도시를 논할때 늘 빼놓지 않고 회자되는 것 중 하나가 누적된 시간의 모습이다. 이때 시간의 적층은 단순히 옛것의 낡음이 겹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살아온 삶의 모습이 다양한 방식으로 적층되며 표출되는 다양성의 아름다움이다. 때로는 세련된 모습으로 혹은 투박하지만 두텁고 견고한 모습으로 말이다. 이러한 다양한 표현의 양태야말로 열린 민주 도시가 갖는 참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경계석은 근대 도시에 가로 경관을 형성하게 한 가장 대표적인 소재이며 명확하게 공간을 구분하는 가장 기능적인 재료다. 도시의 근간을 차지하는 도로의 기초가 되는 작업이고 각각의 소유 관계를 분명하게 하여 분쟁을 억제하는 자본주의 세상에 없어선 안 될 존재다. 또 그것은 속도와 관련이 있다. 속도는 우리가 빠르게 도시를 발전시키고 성장하게 만든 원동력이다. 경계석은 이를 가능하게 만든 기본 소재이며 흐름을 만드는 재료이기도 하다. 자동차를 통한 물류, 사람의 이동, 도시의 가로 구조를 형성하는 도로의 기본 골격을 형성하고 빗물의 운반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물의 흐름을 통제하는 도시 인프라의 기능도 수행한다. 경계석의 모양을 보면 돌이 적층된 면적인 이미지보다 턱을 만들어 분리하고 개발을 촉진하는 가속도와 어울리는 선적인 이미지로 읽힌다. 자본주의의 급속한 팽창과 산업화는 세분화된 소유의 개념을 발생시켰고 그에 따라 도시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였다. 이대영은 여기저기 살피고 유심히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다.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작고 검소하며 평범한 조경설계를 추구하고 있다. 영남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우대기술단과 씨토포스(CTOPOS)에서 조경의 기초를 배웠다. 조경설계사무소 스튜디오엘(STUDIO L)을 시작하고 작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 www.studio89.co.kr
  • [공간 공감] 홍익대학교 중앙광장
    2006년 홍대 인근에 사무실을 연 후 점심시간이면 가끔 직원들과 함께 건축학과 졸업전시회나 강연을 보러 다니며 홍대 캠퍼스 진입 공간인 중앙광장을 만나게 되었다. 이곳은 폭이 30m쯤 되고 길이가 300m 정도인 좁고 긴 형태이지만 홍대 내에서는 가장 넓은 오픈스페이스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고목 플라타너스와 양버들 그리고 느티나무 몇 주가 광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른 대학교 캠퍼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2007년부터 이 공간의 리노베이션이 시작됐고 1년 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중앙광장이 다시 태어났다. 변신과정 내내 이 광장의 새로운 모습에 대한 기대감이 컸지만 완공 후의 모습은 무척 실망스러웠다. 원래 있던 나무 사이에 1~3m 키의 갖가지 나무를 두서없이 식재하여 마치 서울 근교의 그렇고 그런 수목 농장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전체적인 공간의 스케일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마냥 어색하기만 했다. 한창 조경 설계에 대한 열정이 불타오르던 시절, 나는 왜 멀쩡한 광장을 이렇게 만들어버렸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공간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된 계기가 몇 년 후 찾아왔다. 2010년부터 홍대 건축학과 4학년의 조경 과목을 맡게 되면서부터 나는 광장을 매주 자연스럽게 지나다니며 변신을 거듭하는 이 광장의 매력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새로 심은 수목들이 성장을 거듭하면서 광장은 계속 변해갔다. 이 연재를 위해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대학교정욱주 교수와 서울시립대학교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여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이들은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며, 2014년1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유쾌한 답사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