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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발의 소리 없는 총성
엔씨소프트 R&D 센터를 이야기하다
동갑내기 조경설계사무소 소장 두 분을 한 테이블에 모셨다. 둘은 같은 시기에 조경학과를 다녔고, 우연이지만 같은 해(2005년)에 오피스를 설립했다. 그리 다르지 않은 환경에서 조경 교육을 받았고, 설계 실무를 익혔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디자인 오피스를 몇 개월 차이로 오픈했다. 섭외가 끝난 후 맞장구만 난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했지만, 기우였다. 비슷한 관점에서 동어반복을 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예상은 다행히 보기 좋게 빗나갔다. 둘은 화법도 상이하다. 고스란히 옮겨야 할까, 조금이라도 정제된 표현으로 (속칭) 마사지를 해야 할까, 고민이 컸다. 이어지는 대담 내용은 그 고심의 어정쩡한 결과물이다. 엔씨소프트 R&D 센터(이하 엔씨 사옥)에서 오전 11시에 만난 우리는 그날 오후 4시가 넘어서야 작별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게다가 둘은 에디터가 떠난 이후에도 뭔가를 정산(?)해야 한다면서 만남을 이어갔다. 생뚱맞은 제목인 ‘다섯 발의 총성’은 오형석 소장의 코멘트에서 따왔다. 조각 미남의 대명사인 브래드 피트가 ‘머니볼’이란 영화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머리에 한 방을 쏠래? 가슴에 다섯 방을 쏠래” 때로는 빙빙 돌려서 말하는 것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였다. 비평이든 비판이든 조언이든, 뭔가 이야기를 거들려고 나왔다면 솔직히 서로 느낀 점을 터놓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다짐으로도 읽혔다. 오소장은 원래 머리에 딱 한 발만 쏘겠다는 마음으로 나왔다고 했다. 모질게 마음먹고…. 이어지는 구구절절한 대화를 끝까지 읽다보면 왜 ‘가슴에 다섯 발’로 타깃이 바뀌었는지 느껴질 것이다. 무엇이든 확실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지만,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의 문제니까!
하나, 빗나간 불발탄
안타깝게 (혹은 다행히) 첫 번째 총알은 과녁을 빗나갔다. 불꽃 튀는 접전 없이 둘은 쉽게 의견 일치를 보았다. 지하 1층에 자리 잡은 피트니스 센터의 중심에 떡하니 자리 잡은 선큰 가든의 색다른 시도에 대해서만큼은 이견이 없었다. 박준서 소장은 건축 설계가 계속 바뀌는 과정에서 “왜 만들었는지 이해하기 힘든 공간이 몇 군데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이곳”이라는 부연 설명을 했다. 사진으로만 보면 완벽한 실내 공간처럼 보이지만, 이곳은 외기에 노출된 곳이다. 문을 여는 순간, 세찬 바람이 먼저 다가와 인사하는 곳이다.
오형석(이하 오): 엔씨 사옥은 시작 단계부터 박준서 소장에게 이야기를 지겹게 많이 들었다. (웃음) 그런 과정을 감안하고 보면 정말 고생을 많이 한 점이 눈에 선하게 보인다. 얼마나 큰 애착을 갖고 있는지도 절절히 느껴진다. 그런데, 디자인 코드는 확실히 나와 다르다. 둘러보고 나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은 식물을 전혀 활용하지 않은 지하 1층 피트니스 센터의 선큰 가든이다. 내가 흔히 ‘조경가들의 착한 감성’이라고 표현하는데, 조경 설계를 하는 이들은 대부분 자연을 최대한 끌어들이려고 한다. 이용자들이 조금이라도 생활 공간 가까이에서 쾌적한 자연을 느낄 수 있게 해주려고 골몰하는 것이다. 하지만 난 생각이 조금 다르다. 조경가라고 해서, 자연을 무기로 내세운 디자인만 해야 할까?
당연히 그런 설계가 좋은 디자인이라고도 여기지 않는다. 정말 좋은 디자인은 다른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디자인이어야 한다. 물론 식물을 이용해서도 얼마든지 그런 영감을 줄 수 있겠지만, 식물이라는 틀에 갇혀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피트니스 센터의 선큰 가든은 신선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긴장감이 느껴진다. 여기는 지하층이어서 하늘을 곧바로 쳐다 볼 수 없다. 그런데 박소장이 설계한 투명한 물이 하늘을 고스란히 지하로 가져왔다. 순환하고 있는 물이 마치 고여 있는 것처럼 보이게 처리한 점과은은한 조명 연출도 돋보인다. 활동적인 피트니스 센터와 대비되는 정적인 공간이 이용자들에게 분명 좋은 영향을 줄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외기가 통하는 곳이어서 바람도 느낄 수 있다. 땀 흘려 운동하고 쐬는 바람이 얼마나 시원하겠는가. 풀 한 포기 없는 공간이지만, 확실히 색다르다. 바로 이런 디자인을 조경가가 해야 한다. 보기 좋은 나무만 심을 것이 아니라.
2005년 가을, 박준서는 숲을 사람들의 삶 가까이로 끌어들인 총체적 삶의 환경으로서의 ‘경관(landscape)’을 구현하겠다는 꿈을 실천하고자 디자인 엘을 설립했다. ‘Link Landscape with Life’가 모토다. 그는 설계가 설계 자체로만 그치지 않고 현실 공간으로 구현되어야 그 진정한 가치가 발현된다고 믿고 있다.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박사 과정을수료했다. 삼성에버랜드, 서인조경 등에서 실무 경력을 쌓았다.
2005년 봄, 오형석은 새로운 조경 문화를 고민하던 젊은 조경가 7인과 의기투합하여 만든 프로젝트그룹을 기반으로 디자인로직을 설립하였다. 만 10년 동안 디자인로직을 이끌며 새로운 외부 환경에대한 실험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으며, 또 다른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디자인을 갈구하고있다.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 후 한양대학교 공학대학원 환경조경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서인조경과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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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씨소프트 R&D 센터
NC Soft R&D Center
얼마 전 친구와 술 한잔 하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학교에서 다양한 외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강의했던 이 친구는 요즘 학생들과 함께 국내의 실제 사례 답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공간들을 돌아보며 우리가 진정성 있는 조경 공간을 만들어 내고 있는 지 의문이라는 얘기를 했다. 조경 공간이 실제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좋은 감흥을 끌어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확신을 갖지 못하겠다는 얘기를 나눴다.
조경가들이 너무 새로운 것, 놀라운 것, 유행을 따르는 것 등을 지향하면서 정작 그걸 이용하는 사람들의 눈높이는 간과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욕심 아닌 욕심에 취해 정작 공간을 이용할 사람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감흥에 대해서는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이 건물의 외부 공간을 설계하면서 우리가 고민했던 부분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비록 놀라운 설계 어휘를 쓰지는 않았지만 진심으로 이곳을 찾는 이들이 공감하고 정 붙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애쓴 이야기를 여기 풀어놓고자 한다(이 멘트는 도둑이 제 발 저린 연막일 수도 있다)
첫 만남과 재설계
이 공간은 오래전의 PF사업자 공모로부터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설계는 그 훨씬 이후인 2008년도에 착수했다. 그러나 시작은 썩 좋지 않았다. 처음 건축과 함께 설계를 시작했을 때 외부 공간은 다른 프로젝트에 비해 좁았고, 층층이 잘게 나뉘어 있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수시로 변경되는 건축 기능과 외관때문에 조경 공간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왜 그런 경우 있지 않나? 입에 넣었는데 삼켜지지 않는 음식 같은 프로젝트. 평면을 놓고 끄적이고는 있는데 이게 뭘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그렇다고 클라이언트가 확실하게 원하는 게 무어라고 말해주지도 않는 참으로 답답한 설계가 진행되었다. 클라이언트 측에서 요구한 것은 ‘분명한 개념’이었지만 그 분명한 개념이라는 게 다른 프로젝트에서는 그렇게 잘 잡히더니 왜 이 공간에서는 잡히지 않는지…. 그렇게 첫 설계를 매끄럽지 않고 아주 힘들게 마무리 지었다. 당연히 클라이언트도 썩 마음에 들어하지는 않지만 그냥 무난한 정도로 받아주었다.
조경설계 디자인 엘
건축설계 DMP종합건축사무소
시공 GS건설
조경시공 금강조경
발주 엔씨소프트
위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삼평동 668번지 외 2필지
대지면적 11,531.10m2
조경면적 3,242.09m2
완공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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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동서발전 신사옥
Korea East-west Power
경사진 대지를 만났을 때 두 가지 반응이 떠오른다. 난감하거나 기쁘거나. 대지가 넓고 건물이 차지하는 면적이 작으면 기쁘다. 그러나 대지는 작은데 거기에 앉아야 하는 건물이 거대하면 난감하다. 동서발전 프로젝트는 후자였다. 게다가 건물이 모나게 생겼다.
동서발전 사옥은 비교적 대지의 크기도 작았고, 크게 보면 삼각형에 가까운 형상을 가지고 있었다. 두 면은 도로에, 그리고 한 면은 인접 부지에 접한 대지였다. 거창한 설계 개념을 떠올리기 전에 이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문제 해결이 과제의 전부였다. 물론 설계라는 행위 자체가 문제 해결의 과정이긴 하지만, 이 경우는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수준이었다.
경사진 땅에 앉은 날카로운 건물
한국동서발전은 발전소를 건설·운영해 전기를 만들어 내는 일을 담당하는 곳이다. 그래서 에너지가 튀어 나올 듯한 형태로 건물이 만들어졌다. 물론 모양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고 있는 여러 가지 기능과 태도가 역동적인 공간으로 기획되었다. 또한 이 에너지를 국민들이 이용하는 것인 만큼 건물 또한 주민들에게 많은 부분을 열어주어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동서발전 사옥은 어느 방향에서 보더라도 한쪽으로 기울어진 모양을 가진 날카로운 이미지의 건물이다. 그 평면 형태 또한 역동성 있는 평행사변형을 기본 형태로 가지고 있어서 땅과 만나는 방식이 매우 격정적이다. 우리는 이 다이내믹한 평면 형태가 대지를 온전히 지배하기를 바랐다. 좁은 공간이기 때문에 사선의 형태를 완화하려는 노력은 자칫 이 공간의 정체성을 오히려 뭉그러뜨리는 전략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선이 지배하는 형태를 디테일에까지 철저하게 적용하고자 했다. 건물에서 시작된 사선의 형태는 이 땅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흐름을 방향 삼아 끊임없이 뻗고 꺾였다.
조경설계 디자인 엘
건축설계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
시공 현대산업개발
조경시공 현디자인
발주 한국동서발전
위치 울산광역시 중구 북정동 222-2 일원(우정혁신도시 내)
대지면적 30,323.0m2
조경면적 7,702.12m2
완공 2014
디자인 엘은 분당에 사무실을 둔 조경설계사무소다. ‘LinkLandscape with Life’를 사무실 작업의 모토로 삼고 그 첫글자를 따 이름 지었다. ‘엘’은 10여명 내외의 설계가들이 모여 작업하고 있으며, 현재 박준서 소장이 대표를 맡고 있다.올해로 설립 10년째를 맞이하는 ‘엘’은 그림으로만 존재하는설계, 지어지지 않는 설계를 지양하고 실체적으로 구현될 수있는 설계를 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설계 해법을 찾고 그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경관과 공간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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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가르치기와 가리(르)키기
“뭐 가르치냐”는 물음에 “설계 가르킨다”고 하자이내 지적이 돌아온다. ‘가르치다’는 (지식이나 기술을)깨닫거나 익히게 하는 것이고, ‘가르키다’는 (무엇을)짚어 보이거나 알리는 것이란다. 맞다. 그런데 설계를 가르칠 수는 있는 건가? 가르친다면 무엇을, 어떻게, 왜 가르쳐야 하는가?
돌아보면, 우리의 선배들은 손이 좋았다. 그만큼 교육 방법도 명확했던 것 같다. 좋은 드로잉이 좋은 설계로 인정받았다. 그런 설계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복과 숙련이 요구되었다. 칭찬보다는 잘못을 지적하는 훈육을 통해 성장을 유도했다. 도제식에 가까웠다. 오래전부터 훌륭한 디자이너들을 배출한, 뼈대 있는 교육 방식이기도 했다. “발로 그려도 이것보다 낫겠다”면서 밤새워 그린도면을 찢어버렸다거나, “아닌 것 같은데” 한마디에 달포 가까이 고민한 결과가 물거품이 되었다는 일화들은 이런 교육 과정의 단면을 보여준다. 아
닌 것 같다면 ‘왜’ 아닌 건지? 설계 수업은 교육자의 취향과 경험을 배우는 건지? 같은 질문보다는 “괜찮은데” 정도의 사인을 얻기 위해 교수의 스타일과 취향을 파악하는 선택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어떤 이는 의식 있는 설계가로 성장했지만, 어떤 이들은 좌절하고, 어떤 이들은 앙금을 가졌다. 이들 가운데는 갑이 되어, 잘해야 을이나 병인설계가를 좌지우지하는 위치가 되었다.
설계를 배우는 것이나 가르치는 것은 쉽지 않다. 설계라는 작업 자체가 녹녹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늘 새로운 것을 고민해야 하고 개인적 시간을 줄여야하는 고단함이 있다. 그 고단함의 대가가 큰 것도 아니다. 자긍심이 이를 상쇄하곤 하지만, 앙금을 가진 갑 앞에서는 무기력해진다. 게다가 일감마저 줄어드는 상황이 그들을 떠나가게 한다. 이들에게는 절실한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병풍이 되기도 한다. 설계 시장이 불황인데 “설계를 왜 이렇게 많이 가르치느냐”는 말을 가능하게 하는 배경이 된다. 대학의 커리큘럼이 모두 직무와 관련되어야 하는 건가? 그렇다면 독립적 업이 없는 미학이나 역사, 생태학 같은 과목은 가르치지 말아야하나? 조경 분야가 설계 시장이 어려워지면 다른 부문은 좋아지는 제로섬 게임인가? 혹시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집단을 동원하는 것은 아닌가? 아카데미즘으로서 조경의 지향을 거론하기 이전에 드는 우문들이다. 교육의 성과를 취업률로 평가하는 시대인 것은 분명하다. 취업을 위해서는 실무에서 요긴한 실시설계, 시공과 적산 등을 더 많이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취업을 위해서는 조경기사가 필수고, 기사 시험에 합격하려면 설계 기법 연습이 더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아직까지 기사 실기는 제도판과 T자를 이용한 수작업이기 때문이다. 사십 년 전부터 해오던 선 긋기, 심벌 그리기, 방위와 범례 그리기, 스케치 등이 지속되고 강조되는 이유이기도 한다. 학생들은 기법 훈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만, 사고 과정은 생략된다. ‘어떻게’ 그리는지는 알지만, ‘왜’ 그리는지는 모른다. 간혹 이런 단순 반복 작업을 왜 시키느냐고 묻는 학생도 있지만 찻잔 속의 태풍이다. 교육받은 시대의 프레임 안에 있는 교육자와 학생 사이에는 삼사십 년의 시간 차이가 있지만, 교육 내용은 거의 같다.
늘 실무를 의식한다고 하지만, “실무에 나온 학생들이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오래된 불만은 여전하고, 학교가 철지난 것을 가르친다는 불만도 제기된다. 삼사십 년 된 조경 교과서들이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조경은 시대 변화와 함께 그 역할과 정의가 변화해왔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시대와 경향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조경의 운명이다. 그러나 조경은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다고 믿는 교육자는 불편하다. 본질을 가르쳐야지 경향을 가르치려 하냐고 힐난한다. 기본을 탄탄히 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기본이 삼사십년 전의 방법이라면 동의하기 어렵지 않은가교육은, 교육자들이 교육받은 시대의 프레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성장해서 활동할 시대를 염두에 두어야하는 것 아닌가. 꿈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교수도 꿈을 꾸어야 한다. 같은 이유로 설계 교수는 설계 참여를 통해 최소한의 설계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설계 교수의 아이덴티티이자 경쟁력이고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길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주당 수업 부담은 많고, 설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않다. 논문보다는 공모전이나 작품 발표, 전문지게재를 통해 실적을 평가받고 싶어 하지만, 공모에 당선된다고 해도 인정 실적은 SCI 논문의 1/10에 불과하다. 설계를 연구 실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실증적 평가 관행도 건재하다. 게다가 실기 실적이 논문에 비해 수월하지 않느냐는 위협구가 날아온다. 설계 시장에서는 “교육이나 하지 왜 설계에 참여하느냐”고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진다.
그러는 사이 설계가로서 경쟁력은 사라진다. 이미 대학에 오면서 예고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계는 생각이라고, ‘왜’ 그래야 하는지, 적어도 “아닌 것 같다”면 ‘왜 아닌 것 같은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가져보려는 노력이 한낮 학생들을 부추기는 관념의 유희로 치부되는 것은 참담하다. “설계는 답이 없다”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며 설계를 경험과 취향의 세계로 몰고 간다. 그렇다면 힘센 사람의 취향에 맞추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인가?
거의 모든 교과목이 그렇듯이, 설계 과목이 모두를 설계가로 키우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될 수도, 될 필요도,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누구는 좀 더 잘할 수 있고, 누구는 조금 못할 수도 있지만, 열등감과 앙금을 남기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분야의 발전을 위해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젊은 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바쳐 공부한 자신의 전공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지 못하고 앙금만을 가진다면 얼마나 불행한가. 여러 교과목의 관계성을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왜곡되지 않은 교육이 자긍심을 가지게 해야 할 것이다. 조금 못하더라도 학생의 생각을 읽으려 애쓰고 그 생각이 발전 할 수 있게 돕는 것이 필요하다. 그 생각이 자의적이라면 논리를 가질 수 있게, 개인적이라면 다수를 위할 수 있게. 그것은 위계적이고 훈육적인 ‘가르치기’가 아니라, 서로 다른 눈높이에서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설계 수업이기에 할 수 있고, 설계 수업이기에 필요하다.
최정민은 순천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로, 설계 실천과 교육 사이의간극을 고민 중이다. 대한주택공사에서 판교신도시 조경설계 총괄 등의 일을 했고,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 소장으로 다양한 프로젝트와 설계공모에 참여했다. 제주 서귀포 혁신도시, 잠실 한강공원, 화성 동탄2신도시 시범단지 마스터플랜 등의 설계공모에당선되었다. 조경비평 ‘봄’ 동인으로 현실 조경 비평을 통해 조경담론의 다양화에 기여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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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조경(가)의 탄생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건 공부가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시험, 입시, 자격증, 학위, 취직, 승진 같은 인생의 짐에서 어느 정도 해방된 다음부터는 더 하기 싫은 게 공부다. 아주 가끔은 공부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리기도 하지만 결코 지속가능한 감정은 아니다. 그래도 직업은 못 속여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그래서 방학 때면 오히려 이 의무감에 족쇄를 채우기 위해 세미나라는 멋진 이름으로 포장된, 일종의 집단 행동을 하곤 한다.
이번 겨울에는 ‘조경의 탄생’이라는 허세 가득한 세미나 제목을 달아놓고 대학원생들과 함께 조경이 근대적 전문 분야의 하나로 성립되던 19세기의 상황과 쟁점을 되짚어 보았다. 허구한 날 조경의 위기 타령을 반복하는 최근의 분위기가 오히려 위기인 것 같아 거꾸로 조경 태동기의 사정을 살펴야겠다는 게 하나의 이유였고, 때마침 이 시기와 관련된 새로운 연구 성과가 최근 활발하게 발표되고 있다는 게 또 다른 이유였다. 대표적인 조경 역사 저널 『Studies in the History of Gardens & Designed Landscapes』 34권 4호(2014년)의 특집 ‘조경(가)의 기원’에 실린 일곱 편의 논문, 그리고 최근 19세기 조경의 역사와 이론에 관한 새로운 시각의 탐구를 전개하고 있는 조셉 디스폰지오Joseph Disponzio의 글 몇 편을 읽었다. 짐작하시겠지만 재미있는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새롭게 발굴된 사실史實 몇 가지에는 독자 여러분도 흥미를 느끼실 것 같아 간단하게 정리해 본다.
첫째, 우리가 ‘조경가’로 번역해 쓰고 있는 영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landscape architect’에 해당하는 표현이 적어도 19세기 초 프랑스어에 존재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영국 풍경화식 정원landscape garden을 프랑스에서 유행시킨 건축가이자 풍경화가였으며 엔지니어이기도 했던 장-마리 모렐Jean-Marie Morel이 자신의 새로운 업역을 표현하기 위해 정원사 대신에 건축가를 경관과 결합시킨 합성어 ‘아르시텍트 페이자지스트architecte paysagiste’
라는 직업명을 1804년부터 사용했다.
둘째,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는 프랑스어 표현 ‘아르시텍트 페이자지스트’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1858년의 센트럴 파크설계공모 당선 이후인 1859년, 옴스테드는 사례조사를 위해 유럽의 공원을 순회하던 중 파리에 머물렀고 불로뉴 숲을 여덟 차례 이상 방문했다. 당시 불로뉴 숲의 개선 계획 책임자였던 아돌프 알팡Jean Charles Adolphe Alphand은 불로뉴 숲은 물론 자신이 담당하고 있던 파리의 도시 개조·정비 프로젝트를 옴스테드에게 소개했는데, 그는 파리의 조경국Service de l'architecte paysagiste(Office of the Landscape Architect) 소속이었다. 이 조직 명칭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알팡의 전임자였던 루이-쉴피스바레Louis-Sulpice Varé가 근무하던, 1854년의 불로뉴숲 도면 직인이 최초다. 따라서 옴스테드는 자신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라 지칭되던 1860년대 이전에 이미 파리에서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명칭, 그리고 대형 공원과 ‘도시개선’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의 직무 영역을 인지했을 것이다. 셋째, 1860년 4월, 맨해튼 155번가 위쪽으로 도시를 확장하는 계획 책임자로 옴스테드와 그의 파트너 칼베르 보Calvert Vaux가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로 임명된 것이 미국에서 전문가의 직함으로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가 명시된 최초의 기록이다. 이는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에게 주어진 최초의 담당 업무가 공원의 설계가 아니라 도시의 계획이라는 점을 뜻한다. 이제까지는 센트럴 파크 조성책임자였던 옴스테드와 보가 1863년 5월 14일 공원위원회에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그들의 이름 앞에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라고 쓴 것을 첫 기록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몇 가지 사실은 초창기 조경(가)의 전문성과 업역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초대한다. 예컨대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스트인 찰스 왈드하임Charles Waldheim은 ‘건축으로서 조경’이라는 글에서 옴스테드는 경관과 건축가의 합성어인 랜드스케이프아키텍트가 랜드스케이프 가드너보다 대중적으로 더 호소력을 지니고, 조경이 정원을 넘어 도시의 계획과 개선을 다루는 전문성을 지닌다는 것을 알릴 수 있으며, 건축과의 잠재적 갈등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그러나 이러한 적극적 해석은 논쟁적이다. 조경의 역사에서 건축이나 도시를 둘러싼 갈등과 충돌은 1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라는 용어의 사회적 공인은 이 분야의 업무 영역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오히려 옴스테드를 필두로 한 출중한 전문가들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landscape architect라는 직명으로 대규모 공공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성과를 거두면서 사회적인식을 얻게 된다. 그럼에도 19세기 말과 20세기초의 여러 기록에서 조경 전문업profession과 학제discipline의 불안정성을 둘러싼 고민과 논란을 반복적으로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조경(가)이라는 용어의 문제였다기보다는 조경(가)이 다루는 대상과 업무의 정체성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라는 말이 진부해질 정도로 조경의 정체성은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겨울 세미나를 마무리하는 토론에서 개진된 의견 몇 구절을 옮긴다. “작은 느낌표와 커다란 물음표를 동시에 얻었다.” “당시에 새롭게 등장한 전문분야를 지칭할 적절한 용어를 찾으려 고심하던 옴스테드의 ‘머뭇거림’은 어쩌면 조경의 정체성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건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것 또 하나는 글쓰기가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다른 달보다 사흘이나 짧은 2월에 닷새짜리 기나긴 명절까지 겹쳐 에디터들과 디자이너들은 연휴 마지막 날임에도 밤샘 사투를 벌이고 있다. 다른 필자들의 글을 다듬고 고치는 건 거의 마무리되었고, 누구나 가장 하기 싫은 일, 자기 글 쓰는 일이 아직 남은 것 같다.
나야 이제 여느 달보다 지루한 에디토리얼을 겨우 끝냈지만…. 야식으로 시킨 치킨과 맥주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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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비평(가)의 자리
추위도 잠시 주춤하고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던 3월 중순, 이종건 교수를 만났다. 새 봄에 『건축평단』이 세상에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서였다. 꽤 오래 전부터 비평지 창간을 준비한다는 소식은 들어왔지만, 솔직히 녹록치 않은 일이라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비평가 개인이 비평집을 내는 일이야 상대적으로 손쉽겠지만 (물론 이 역시 요즘과 같은 출판 시장의 불황 앞에서는 쉽지 않지만), 지속성을 담보로 해야 하는 정기간행물은 의외였다. 잡지가 유지되려면 필자와 독자, 그리고 책을 출간하고 배포하는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는 자본(가)이 필요하다.
이런저런 우려를 담아 이종건 교수에게 점점 더 짧고 쉬운, 이미지 위주의 지면을 (아니 화면을) 원하는 시대에 비평 전문지의 독자는 어디에 있겠느냐, 비평가들은 어떻게 모였으며, 또 앞으로 어떻게 이 잡지를 유지할 것인지 등등을 물었다. 그는 단호하게 가장 기본적인 건축적 문제를 다룰 것이며, 이러한 핵심 과제를 간과한다면 건축이라는 분야와 건축가라는 직능은 바로서기 어렵다고 일갈한다. 독자의 많고 적음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는 이 책이 ‘주인 없는 책’임을 강조했다. 모든 자금은 책을 만드는 데 쓰여야 하며 (그래서 원고료가 없는 것 같다) 이 책의 존재 가치와 운영 방식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참여한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 세상은 주인(자본가)의 입맛에 맞게 재단되지 않는 비평이 자리 잡은 사회다. 주인은 없지만 후원자는 있다. 아무 조건 없이 비평서의 존재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후원금을 보내고 구독을 약속한 것이다.
자본과 독자는 둘째 치더라도, 또 글을 쓰는 비평가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너무 자조적인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예전 건축 잡지사에 다니던 시절, 잡지에 게재될 작품의 비평가를 찾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주로 교수님들이) “저는 비평가가 아닙니다” 혹은 (대개 설계를 시작한 교수님들이) “저는 이제 비평을 하지 않습니다” 혹은 심지어 “건축계에는 발언하지 않을 생각입니다”라는 말을 종종 하곤 했는데, 겸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전문 분야 내에서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지 못한 비평의 위상을 보여주는 듯했다. 따라서 매체에서는 젊은 건축가를 발굴하는 것 만큼 새로운 비평가를 발굴하는 일도 항상 지난했다. 한편으로는 작품을 게재하기로 한 건축가가 비판적인 비평 원고가 실릴 예정이란 이야기에, 작품을 싣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간신히 설득해 원고를 내보낸 일도 있었다. 반대로 비평가의 날선 (혹은 독단적) 비평에, 편집부에서 필자에게 수위 조절을 요청하는 씁쓸한 일도 있었다. 그만큼 비평의 영역은 마이너한 것이었고, 비평 문화는 좀처럼 성숙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건축계에서 『건축평단』의 탄생 배경이 짐작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최근 건축 동네에는 오래된 매체 몇몇이 저물어간 대신, 지난 몇 년간 기존의 매체와 차별화된 몇 가지 매체가 등장했다. 2008년 창간된 격월간 『와이드 AR』은 ‘심원건축학술상’과 ‘건축비평상’ 등을 운영하며 비평과 연구를 독려하고 있으며, 젊은 비평가와 필자, 건축가의 발굴에 힘쓰는 잡지다. 건축을 통한 사회 공동체 활성화를 꿈꾸는 정림건축문화재단에서 발행하고 있는 「건축신문」은 2012년 창간(연 4회 발행)하여 참신한 기획으로 건축과 다양한 문화예술을 가로지르고 있다. 김용관 건축 사진작가가 이끄는 아키라이프에서 발행하는 『다큐멘텀』은 건축 과정을 이미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기록하는 건축 전문지로 2014년에 창간되었다.
건축 잡지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 중반까지 건축계에서는 월간지 형식의 10여 종의 잡지들이 비슷비슷한 콘텐츠로 잡지를 만들었다면, 최근 새로 만들어진 대안적 성격의 잡지들은 그 형태나 발행 횟수, 콘텐츠의 방향 등을 다양화하며 (형편껏) 꾸려가고 있다. 이 매체들이 모두 비평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매체 성격의 다변화는 문화의 다양화를 꾀한다는 점에서 분야의 여러 사람들의 활동 무대가 되어 풍요로운 토양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볼 수 있다.
건축 이론과 역사 관련 모임의 활동도 눈여겨 볼만하다. 2012년에는 목천건축아카이브와 한국 현대 건축 연구를 위한 학술모임인 현대건축연구회가 함께 ‘전환기의 한국 건축과 4.3그룹’이란 이름의 포럼으로 연구 성과를 공유하기도 했다. 매주 토요일 모여 건축 이론서를 강독하는 토요건축강독 역시 젊은 연구자들이 여럿 참여하며 몇 년째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건축평단』에 참여한 비평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러한 매체나 모임에서 활동하는 젊은 이론가·비평가들을 꽤 알아볼 수 있다. 이러한 젊은 이론가·비평가들의 건축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활동이 『건축평단』의 탄생에 동력이 되었을 것이고, 미래의 가능성도 꿈꾸게 했을 것이다.
이종건 교수와의 자리가 파할 무렵, 조경 비평의 미래를 위해 한 말씀 부탁했다.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이지만, 건강하고 비판적인 지식인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반동·저항·이질적 분자가 더불어 살 수 있는 토양을 분야의 원로와 주전 멤버들이 만들어 주어야 한다. 우리 바깥에서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고. 우리의 생각도 바깥에 알려야 한다. ‘생각하는 조경가’가 나오도록, 생각할 수 있는 자극을 주어야 한다. 왜 조경이 필요한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하고, 우리 고유의 조경·정원 문화·외부 공간을 고민하고 끊임없이 역사와 대화하는 그런 긴장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 이 글을 마무리할 무렵 『건축평단』의 강권정예 편집장과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다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은, 『건축평단』 정기구독자들의 95%는 건축 관련자들이지만, 그 나머지는 고등학교 교감 선생님, 교육 공무원, 미술 선생님, 카페 운영자 등 ‘일반인’이라고 한다.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항상 궁금해 하는 ‘독자의 실체’를 엿보고 잠시 놀랐다. 이를 두고 여전히 책은 힘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너무 낭만적인 자기합리화일까. 강권정예 편집장은 한때 건축 기자로 활동했으며, 최근 건축 전문 출판사 정예씨(JEONGYE publishingCompany)를 열었다. 대표적 책으로 열정적 건축 저널리스트였던 고 최연숙 편집장의 유고집 『사람의 가치』, 『부산 홍티문화공원 공공예술 프로젝트』 등이 있다. 미리 홍보하자면 부산의 홍티문화공원은 『환경과조경』 5월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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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서재] 뿌리 이야기
2년 전, 김숨 작가를 취재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한 통신사의 영상 뉴스 팀 인턴 기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정치, 사회, 문화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그림이 된다’ 싶은 이슈를 따라다니곤 했다. 그런데 그 날은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는 1차원적인 (그리고 명쾌한) 이유로 대산문학상 수상작 발표 기자간담회를 취재하게 되었다. 한때 문학에 대한 낭만을 불태웠던 시절이 있었건만 그날 나의 정신은 온통 ‘그림을 만드는 데’ 팔려 있었다. 문학상의 의미와 가치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날의 행사는 유명 연예인이 참석하는 화려한 행사나 정치인들이 핏대 세우며 갑론을박하는 공청회 등에 비하면 시선을 사로잡을만한 포인트가 부족했다. 영상을 채우기 위해 고급스러운 식기, 하얀 테이블 보 등을 클로즈업 하면서 시작한 나의 뉴스 영상을 보고 동료들은 ‘물잔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신’이라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문학상 기자간담회에서 작가 인터뷰보다 조명, 식기 등을 먼저 찍고 있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숨 작가는 답변을 할 때마다 정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깊고 고요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작게 소곤거리는 듯한 말투, 극적인 표정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겸손한 표정, 답변을 하기 전 오래 생각하는 진중한 태도는 내 속을 까맣게 타들어가게 만들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말에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결국 집에 돌아와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그녀의 소설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을 읽었다. 평소에는 내가 잘 읽지 않는 스타일―평범한 소재의 이야기를 집요하게 파헤치는―의 소설이었지만 잘 벼린 날처럼 선뜩함이 느껴지는 문장에 홀려 집중해서 읽었다. 나직하고 섬세한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던 것처럼.
올해의 이상문학상 수상작으로 김숨의 ‘뿌리 이야기’가 선정되었다는 소식에 나는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일었다. 매년 문단의 경향을 대표하는 개성이 뚜렷한 작품을 선정하는 이상문학상 심사위원단이 어쩌면 매우 평범한 소재인 ‘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의 조용한 소설을 대상으로 선정했다는 사실이 조금 의외이기도 했다. 사실 뿌리는 작가들에겐 건드리기 쉽지 않은, 노골적으로 말해서 ‘닳고 닳은’ 소재가 아니던가. 『용비어천가』의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부터 시작해서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 나희덕 시인의 신춘문예당선작 ‘뿌리에게’ 등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미 많은 작가들이 ‘뿌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게다가 우리는 이 진부한 소재가 이제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느껴지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뿌리’보다는 ‘노마드nomad’라는 단어가 더 섹시하게들리는 시대에 새삼 ‘뿌리’에 대해 고찰하는 그녀의 고집스러움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늘날 ‘뿌리’에 대해 다시 말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그녀는 이상문학상 작품집에 실린 문학적 자서전 ‘울산, 추부, 목동 18번지 그리고 서울’에서 정착한 지 15년이 된 서울이 여전히 적응하기 어려운 기이한 곳이라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작가는 그동안 그녀가 살아왔던 울산, 추부, 대전의 목동 18번지, 서울 중 어느 곳도 아닌 그 중간의 어디에서 ‘뿌리 들린 자들의 공포와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의 소설에선 철거민, 위안부, 입양아 등 다양한 ‘뿌리 들린 자’들이 등장하지만 역사 문제나 사회·경제구조의 문제와 같은 거대 담론으로 이어지지 않고 온전히 뿌리들린 자들이 느끼는 ‘감정’에 끈질기게 매달림으로써 ‘뿌리’라는 소재를 진부하지 않게 풀어낸다.1 김숨은 소설에서 태풍의 영향으로 전동 드릴처럼 흔들리는 메타세쿼이아 세 그루를 묘사하면서 나무가 그리는 표정에 주목한다. 멸종된 줄 알았던 ‘화석나무’가 세계 곳곳에 이식되어 자라고 있는 극적인 상황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자리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전력투구로 서 있는’ 나무의 표정을 상상하는 작가의 섬세함에 2년 전 보았던 그녀의 이미지가 다시 떠올랐다. 여러 언론 매체와 SNS 상에서는 21세기형 새로운 유목민의 출현에 대해 떠들썩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작 그들의 표정에 주목하지는 않는다. 늘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해야하는, 이주移住를 ‘강요’받는 시대에 살고 있는 유목민의고단함과 피로함, 낯선 곳에서 느끼는 공포감에 대해.
지난 2월호 특집으로 소개되었던 토포텍 1의 작품을 두고 사람들의 평이 극과 극으로 엇갈렸다. 과장을 통해 의도적으로 이질감을 주는 토포텍 1의 과감한 접근 방식이 자극을 주었다는 평과 국내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평이었다. 순응은 지루하다며 도발하고 도전하라고 선언하는 라인-카노의 인터뷰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하고 그들의 감각적인 디자인에 감탄하기도 했지만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었다. 그중 가장 궁금했던 점은 이주자들의 정체성을 반영한다는 수퍼킬렌의 야자수가 과연 북유럽 덴마크의 기후에서 정말로 튼튼하게 자라고 있는 지였다.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찍었을 보도용 사진과는 다르게 인터넷에서 본 최근 사진 속 야자수는 잎사귀가 마르고 색이 바래 볼품없었다. 특히 겨울에는 덴마크의 추운 기후에 얼어 죽지 않도록 포대 자루 같은 것을 잎사귀에 씌워 놓았는데 덴마크 사회에서 아직도 얼굴을 가리고 살아가고 있는 이주자들의 정체성을 보는 것만 같아 경악스럽기 그지없었다. 수퍼킬렌이 있는 덴마크의 다문화지역 뇌레브로Nørrebro에 살고 있지만 수퍼킬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한 도시설계가는 나무가 정상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조건에 야자수를 심어놓고 겨울에 포대기를 씌워놓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라고 지적했다.2 폭력적인 방법으로 나무를 이식한 결과가 아닐까. 지난 2월 뇌레브로 인근에서 일어난 덴마크판 ‘샤를리 테러’는 또 다시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뿌리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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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비평지 『건축평단』 창간
국내외 건축가·건축지식인 25인의 좋은 건축 해명
본격 건축 비평지인 『건축평단』의 창간호(2015 봄)가 출간되었다. 조경과 건축 등 분야를 막론하고 비평서와 전문지의 자리를 찾기 어려운 요즈음, 국내외 건축가·건축지식인 25인이 의기투합해 이미지 한 컷 없이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300여 쪽 분량의 비평지가 새로출발했다.
좋은 건축이란 무엇인가
창간호의 특집 주제는 ‘좋은 건축이란 무엇인가’다. 편집인 겸 주간인 이종건 교수(경기대학교 건축설계학과)는 여는 글에서, 이 본질적인 질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잖이 당혹해했다고 밝히고 있다. 건축을 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숙고해야 할 질문이겠지만, 마치 무엇이 좋은 삶인지 규명하기 어려운 것처럼 쉽사리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이다. 『건축평단』의 첫 번째 글은 건축이론가이자 평론가 김영철이 ‘좋은 건축’을 논의하기에 앞서, ‘건축이란 무엇인지’를 하이데거의 사유에 기대어 해명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김성홍 교수(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부)를 비롯한 국내외 건축가·건축지식인들이 ‘좋은 건축’에 대한 견해를 짧게 전개해 나갔다. 건축가 파블로 카스트로Pablo Castro는 흑색파 건축가들을 통해, ‘좋은 건축’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우회적인 방식으로 제시한다.
건축 교육과 관련된 두 가지 질문도 눈길을 끈다. 건축이론가 닐 리치Neil Leach는, 글로벌한 새로운 건축 상황과 점점 나빠지는 로컬 건축 교육 시장에 제대로 응전하기 위해, 건축교육 인증제를 폐기하고, 건축 설계교육의 방향을 바꿀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건축가 서재원(aoa architects)은 대학 설계 교육 현장에서 흔히 벌어지고 있는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자신의 교육 방식을 내어 놓고 있다. 그 뒤를 이어, 시인이자 건축가인 함성호는 ‘새로움에 대한 강박증’을 풀어내었고, 이종건은 그의 이슈를 이어받아 ‘우리 건축의 새로움 강박증’에 대해 전개한다. 그밖에도 『건축평단』의 한편에서는 ‘감동에 얽힌 건축’, ‘건축의 한계 혹은 역능’, ‘도발, 건축가의 내면’ 등의 주제를 연재 형식으로담고 있다.
『건축평단』의 여름호 주제는 ‘건축가 그/녀는 누구인가’다. 가을호에는 ‘건축의 도시성’을, 겨울호에는 ‘건축의 역사성’을 주제로 이어가, 올 한해는 건축의 네 가지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본질적인 문제에 천착할 예정이다. 기본적인 내용이라 오히려 잘 언급되지 않았고, 그 결과 건축가라는 직능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주제다. 내년부터는 한국의 설계(작품)를 평가하고 이를 어떻게 역사화할 것인지, 또 건축서가 출간되면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등 본격적인 비평에 돌입할 것이라고 한다.
『건축평단』의 지향은, 한국 건축 사회에 비평 문화가 건강하게 착근될 수 있도록 육성하는 것, 일회성에 그친 비평·평론이 지니는 문제들을 극복하고, 전문적 식견이 배제된 채 반복된 매체 노출로 가치가 매겨지는 대중영합주의에 대항하는 것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탁월한 건축 업적을 끈질기고 엄격하게 탐문·탐구·논구함으로써, 한국 현대 건축의 역사를 온당하게 일구어나가고자 한다. 한국 건축이 창발적인 힘을 더 가질 수 있도록, 지적이고 감성적인 차원에서 좋은 자극제가 될 수 있는 자원을 발굴하고자한다.
이종건 교수는 “이 책의 존재 자체가 사회에 대한 비평”이라고 강조한다. 대중은 쉽게 요약된 글과 이미지를 선호하는데 온전히 텍스트만으로 이루어진 비평서를 낸다는 것, 그리고 자본가 없이 완벽하게 자본으로 부터 독립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처음부터 건축의 핵심부를 겨냥했다. 독자의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독자를 타깃으로 삼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이종건 교수의 답이다. 그러나 책이 출간되기 전 이미정기구독자가 모였고, 출간 후에도 지속적으로 구독자수가 늘어가고 있다며 지속가능성에 대한 희망도 내비쳤다.
비평가 커뮤니티
『건축평단』은 건축 비평가 커뮤니티인 건축비평공동체가 꾸려지며 탄생했다. 이 공동체에서는 이종건 교수를 비롯해 강권정예(편집장, 정예씨(JEONGYE publishing Company) 대표)와 김영철(군자헌 건축이론연구소 대표), 김원식(건축·도시 역사학자), 이상헌(건국대학교 건축대학원 교수), 함성호(건축실험집단 EON 대표)가 편집위원을 맡았다. 김인성(영남대학교 가족주거학과 교수), 김현섭(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박성용(이가종합건축 실장), 송종열(건축비평가), 이경창(건축비평가), 임성훈(동명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전진삼(건축비평가, 와이드AR 발행인 겸 간향미디어랩 대표) 등은 운영위원을 맡았다. 이커뮤니티는 열린 공동체로 누구라도 참여하여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으며 한국 건축 사회의 공론장을 형성해 나가는 것을 꿈꾼다.
건축비평공동체 건축평단은 정림건축문화재단과 함께 한국 건축의 주요 이슈와 쟁점을 10회의 집담회를 통해 공론화할 예정이다. 그 첫 번째 집담회는 『건축평단』의 창간을 기념하며 ‘세월호 이후의 건축’을 주제로 3월 21일 열렸다. 앞으로 매월 마지막 토요일이면,건축비평공동체 건축평단, 정림건축문화재단, 토요건축강독, 한양대학교 동아시아건축역사연구실의 기획 및 주최로 토요집담회가 열릴 예정이다. 이 집담회에서는 한국 건축의 주체성과 정체성, 전통, 지역성과 보편성, 개인성과 공공성, 동시대 건축가의 생존주의, 지향점과 한계, 순수 건축 등 ‘한국 건축’ 전반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심화해 나갈 예정이다.
장기적 계획을 묻는 질문에 이종건 교수는 2017년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건축가연맹UIA 세계건축대회 조직위원회에 세계 비평가들이 연계하여 성과를 나누자고 건의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이를 기폭제로 삼아 우리나라의 건축비평가들이 연합할 수 있는 일종의 비평가협회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향후 건축비평공동체의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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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계획, 그 이상’ 국제 컨퍼런스
새로운 도시 계획 방향과 세운상가 재생 사업
지난 3월 12일부터 15일까지 ‘대규모 계획, 그 이상 Beyond Big Plans(BBP)’ 국제 컨퍼런스가 개최되었다. 이번 컨퍼런스는 박소란(WeLoveTheCity, 도시계획가·건축가), 박혜리(KCAP, 도시계획가·건축가), 강빛나래(델프트 공과대학교 PhD 연구원)가 기획하고, 국제도시지역 계획가협회International Society of City and Regional Planners(ISOCARP)와 걷고싶은도시만들기시민연대가 주최했다. BBP 국제 컨퍼런스는 최근까지 도시 개발의 주를 이루었던 마스터플랜을 통한 ‘대규모 도시 개발’방식에 의문을 던지며, 세운상가를 주제로 국내외 도시계획 및 개발 관련 전문가들이 모여 앞으로의 도시개발 방향과 그 이행 전략을 다양한 각도에서 탐색하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특히 최근 서울시에서 추진 중인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변경안’1과 ‘세운상가 활성화를 위한 공공공간 설계 국제공모’와 맞물려 관련 분야 전문가들과 일반 시민들의 많은 관심을 모았다. 컨퍼런스 첫 날인 12일에는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아홉개국 열다섯 명의 도시계획 전문가의 주제 발표와 관련 토론으로 구성된 심포지엄이 개최되었으며, 마지막 날인 15일에는 국내외 60여 명의 전문가들이 세운상가를 대상으로 한 워크숍 결과를 발표했다. 심포지엄은 세 개의 세션으로 구성되었다. 첫 번째 세션은, ‘도시계획을 재구성하자!Let’s Reinvent Planning!’는주제로 도시 개발 과정에서 개발의 스케일과 개발 과정에서의 시민과 전문가의 역할 재정립 등에 대한 논의로 꾸며졌다. 두 번째 세션, ‘세운이야기Sewoon Story’는 컨퍼런스 이튿날부터 진행되는 전문가 워크숍 대상지인 세운상가 지역을 역사·사회·문화·경제적 관점에서 되짚어보며, 세운상가 재생 사업의 현재를 되돌아보고 대안적인 접근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세 번째 세션은 ‘다른 도시에서 배우다Learning from Cities’라는 주제에서 알 수 있듯이 세계 각 도시의 사례를 중심으로 여러 도시계획 전문가와 학자들의 경험을 들을 수 있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도시계획의 새로운 태도
첫 번째 세션에서 케이스 크리스티안서Kees Christiannse 교수(취리히 공과대학교, KCAP 설립자)는 ‘로프트 시티loft city’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Matryoshka처럼 크고 작은 스케일의 계획이 중첩된 구조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존의 대규모 계획이 기능에 따라 조닝을 했다면, 이제는 프레임워크 안에서 작은 규모의 계획, 즉 지역별 특색에 따라 다양한 용도와 스케일의 개발이 섞여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대규모 지역을 마스터플랜에 따라 개발한다면 자본의 흐름에 따라 위험부담을 안게 되므로 작은 규모의 점진적 개발을 통해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진 두 개의 주제 발표는 도시 개발 과정의 주체와 그들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회복력 있는 도시를 넘어Beyond Resilience’라는 주제로 발표한 제프 헤멀Zef Hemel 교수(암스테르담 대학교)는 ‘집단 지성’을 강조했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계획의 가장 큰 문제는 비전문가라는 이유만으로 시민들을 계획 과정에서 배제해 온 것”이라며, “전문가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식의 태도로 수백 수천 아마추어의 아이디어를 수용하지 않는 계획은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위키피디아Wikipedia를 예로 들며, “온라인상의 열린 플랫폼에 (옳고 그른) 많은 생각이 모이고, 각각의 아이디어가 서로를 고쳐주는 과정에서 더 나은 지식이 완성” 된다며, 도시계획 과정이 더 나은 아이디어를 고르는 것이 아닌, 많은 아이디어를 축적하는aggregate 과정자체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는 이렇게 축적된 아이디어를 가치 있게 만드는 중계자moderator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발표자로 나선 요르크 슈톨만Jörg Stollmann교수(베를린 공과대학교) 역시 주제발표, ‘생산적인 공통의 기반을 위한 가치 발견Mining Value for Productive Common Ground’에서 “시민을 전문가로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며 헤멀 교수와 의견을 같이 했다.
세운상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세운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두 번째 세션에서 안창모 교수(경기대학교)는 ‘20세기 세계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세운상가에 대한 역사·도시적 평가’를 주제로 발제를 진행했다. 안 교수는 아시아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 이후 소개도로의 슬럼화, 그리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도심재개발사업의 결과로 탄생한 세운상가를 냉전 체제의 산물이자 과거 현대 건축의 상징으로 정의 내리며 그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한때 도심 상권의 번영을 주도했던 세운상가는, 강남 개발, 명동백화점 상권 부활, 도심부적격산업의 이전 등으로상권이 이탈하면서 현재 도심 속 흉물로 남았다.
이충기 교수(서울시립대학교, 세운상가 활성화 계획 총괄계획가)는 현재 서울시에서 추진 중인 세운상가 재생 계획Sewoon Regeneration Plan에 관해 설명했는데, 세운상가를 재생하려는 시도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1995년부터 2007년까지 서울시가 진행한 일련의 도심부 발전 계획에는 세운상가를 전면 철거한 뒤, 그 공간에 녹지축을 조성하고 주변을 대규모로 개발한다는 계획이 지속적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이 교수는 “매번 계획에 포함되던 녹지축은 주민들의 이주를 필요로 했기에 큰 반대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며, 수차례에 걸쳐 변경된 세운상가 활성화 계획이 매번 실행되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이에 서울시는 2013년 3월에 이르러 세운상가 건물군을 존치하고 주변 역사문화자산과 기존 산업 클러스터군을 활용하는 점진적 재생 개발 사업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되었다. 세운상가 존치 결정 이후 진행 중인 점진적 성격의 재생 사업은 크게 ‘활성화 프로그램’, ‘산업 생태계 지원 보전’, ‘입체보행 네트워크’의 세 가지로 구성된다. 그 첫 사업으로 종로에서 퇴계로까지의 전 구간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1단계로 공공의 영역인 종묘 앞 종로의 광폭횡단보도, 복합문화공간인 광장, 3층 레벨의 보행데크, 청계천 상부의 공중 보행데크, 1층 주차 공간과 보행공간을 아울러 입체보행네트워크를 구축할 계획이다.
이충기 교수는 서울시에서 “이와 관련해 ‘초록띠 공원’의 복합 문화 공간화, 공중 보행로를 통한 주변 지역연계, 청계천 주변을 연결하는 수직 보행 네트워크 개발 등을 계획하고 있다”2고 밝혔다. 한편 이동연 교수(한국종합예술종합학교)는 1980년대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기술하위문화적 유산―1980년 대 초반에 애플 복제 컴퓨터와 홈비디오가 호황을 누리며 세운상가 주변에는 청년 기술마니아들과 록메탈 등 불법 복제된 LP 음악과 성인 에로비디오를 구하러 온 하위문화 주체들이 모였다―에 대해 설명하면서 향후 세운상가의 재생을 위해서는 건축 및 도시공학적 계획뿐만 아니라 문화적 자원을 통한 창조적 기획이 필요함을 설명했다.
이어진 토론에서는 세운상가 활성화 계획과 관련해 보다 심층적인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좌장 이영범 교수(경기대학교)는 청계천 복원 사업(2005년 완료)과 세운상가의 초록띠공원(2009년 조성)이 만들어진 배경을 설명하며, 공공성의 가치를 내세워 역사적 건축물을 철거하고 공원화했던 과거 서울시의 행정 방식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세운상가 활성화 계획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 섞인 질문을 던졌다. 안창모 교수는 “청계천 복원 사업 대상지의 대부분이 공공(서울시)의 소유였다는 점에서 대상지의 대부분이 민간소유인 세운상가 활성화 사업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다”며 정책적으로 큰 변화라는 의견을 밝혔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업이 마치 세운상가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공 소유의 ‘길’에 국한된 것이며, 민간의 요구가 있을 때만 정부 차원의 보조가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서울시가 추진 중인 세운상가 설계공모가 여전히 빅플랜(마스터플랜)을 요구하면서 ‘사적 영역’을 계획에 포함시키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이충기 교수는 설계공모를 두고 “지속적인 세운상가 산업 쇠퇴에 제동을 걸기 위한 조치”라며, 서울시에서는 공공이 할 수 있는 사업을 부분적으로나마 시행함으로써 세운상가에 활력을 불어넣고 그 과정에서 민간 수준의 갈등 해소도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서 세운상가 활성화 사업과 같은 재생 사업에서 고려될 수 있는 ‘서브컬처sub-culture’, 즉 활성화 과정에 문화예술을 결합하려는 노력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 이동연 교수는 문래예술공장의 예를 들면서 “서브컬처를 접목시키려는 시도는 고무적이지만, 예술이 산업 클러스터를 점유하고 독점하지 않도록 경계해야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그 방안으로 기존 산업체와의 자재 선순환을 고려한 문화예술산업 도입,장인들의 기술을 접목할 수 있는 콘텐츠 산업 개발 등을 꼽았다.
다른 도시에서 배우다
세운상가에 대한 논의 후 이어진 세 번째 세션에서는, ‘대규모 계획’을 대체할 수 있는 세계 여러 도시의 실험적 사례들이 소개되었다. 안드리스 헤이르서Andries Geerse 위러브더시티WeLoveTheCity 대표는 네덜란드디벤터 시City of Deventer의 예를 들며, 전문가의 역할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시민들의 거친 아이디어가 실현될 수 있는 적당한 공간을 제공해주고, 그들이 표현해내지 못하는 것을 정교하게 시각적으로 대신 표현해주는 역할에서 전문가의 역량이 발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셩밍 우ShengMing Wu 홀+아키텍트Whole + Architects 대표는 타이의 프로젝트를 소개했다. 그는 “우리(건축가)만의 언어로는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 시민들에게 (도면이 아닌 그림을 이용해) 시각적으로 보여주면, 우리의 제안이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고, 어느 부분에서 개선될 수 있는지 쉽게 지적한다”며 헤이르서 대표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빌럼 코릇할스 알터스 Willem Korthals Altes 교수(델프트 공과대학교)는 ‘대규모 계획’에서 연속된 ‘작은 계획’으로 전환된 세 개의 네덜란드 도시계획 사례(Amsterdam IJ Waterfront, Amsterdam Zuidas, Utrecht Centrum)를 들어 작은 계획이 연속적으로 수립되는 것이 큰 계획에 비해 효과적이고, 실현 가능성이 높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대규모 계획은 구현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대부분 측정된 예산보다 많은 돈을 필요로 하며, 계획 대상지는 완성될 때까지 이용이 불허되는 등 많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전문가 워크숍
15일에는 심포지엄 이후 세운상가 개발 사업과 관련한 전문가 워크숍 최종 발표가 있었다. 이날 오전까지 이어진 3일간의 워크숍은 토지, 시간, 자본 및 투자, 개발방향, 산업 주체, 등 다양한 내용을 아우르는 일곱 개의 주제로 진행되었으며, 두 시간에 걸친 최종 발표 후시민 질의응답 및 워크숍 최종 요약 등이 이어졌다. 일곱 개의 팀으로 나누어 워크숍 발표가 진행되었고 전문가들의 분석과 관련 제안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이압축되었다.
“기존의 완전 철거 방향에서 선회한 것은 좋은 선택으로 보이나, 아직 작은 계획의 스케일의 적정성이나 섬세함에서는 부족함이 느껴진다”는 의견, “새로운 계획에서 지정한 건축 용적률이 지나치게 높기 때문에, 비율을 낮추거나 단계적·전략적으로 높여가야 한다”는 의견, “(공중보행로 사업에 대해) 공간을 연결하는 것은 다양한 연결을 가능하게 한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나 새로 창출될 공간에 ‘무엇을 채워 넣을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의견”, “현재 존재하는 산업 클러스터들의 연결고리를 파괴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 “여러 산업 군과 주변 지역을 포함해 하나의 큰 창조적 산업 클러스터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견 등이 주를 이루었다.
한편, 3월 12일부터 22일까지 11일간 서울시청 시민청 갤러리에서는 ‘에이징 드래곤aging dragons’이라는 제목의 도시·건축 전시회가 진행되기도 했다. 이번 전시회는 국제 컨퍼런스와 연계해 준비된 것으로서 홍콩, 서울, 싱가포르, 방콕, 그리고 도쿄를 중심으로 아시아 선진 도시의 성장과 그 이면을 담았다.
지난 10여 년간 서울에서 시도된 야심찬 대규모 도시개발 사업들이 최근 변경되거나 취소되고―뉴타운 재개발 수습방안 발표 및 7개 구역 해제(2012), 용산업무지구개발사업 취소(2013), 세운재개발촉진지구 변경(2013)― 다수의 아파트 단지가 미분양된 채 남아있는 등 그동안 제기되었던 도시개발 방식에 대한 의문이 더욱 공고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번 컨퍼런스는 이러한 의문에 답하려는 시도와 함께 ‘더 나은 도시 개발 방식’을 고민하고, ‘세운상가의 미래’를 가늠해보고자 했다. 12개의 다양한 주제 발표와 토론, 그리고 전문가 워크숍까지 진행되었지만, 마지막 날 최종 종합에서 언급된 것처럼 “한 번에 뚜렷한 방향성을 제기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세운상가 활성화 계획’의 현재 진행 상황과 개발 방향이 시민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공유되었다는 점에서 이번 국제 컨퍼런스가 세운상가를 위한 ‘대규모 계획, 그 이상’의 시발점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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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차 환경이 만드는 도시의 미래
헤리티지 투모로우 프로젝트 5
젊은 건축가들이 그리는 ‘더 나은 도시’는 첨단으로 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시민의 아날로그적 생활양식을 향수하고 이를 창의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자가용 없는 미래 도시’를 구상했다. 지난 3월 7일, 재단법인 아름지기(이사장 신연균), 월드컬처오픈 화동문화재단이 주최하고 중앙일보와 서울시가 후원하는 설계 아이디어 공모전 ‘헤리티지 투모로우 프로젝트 5Heritage Tommorrow Project 5’의 수상작이 발표됐다. 2009년 처음 개최된 이래로 올해 5회째를 맞은 ‘헤리티지 투모로우 프로젝트’는 ‘적은 차 나은 도시Less Cars, Better City’라는 주제로 ‘가까운 미래, 이동 수단과 교통 시스템의 발전으로 변화할 도시의 이상적 모델’을 찾기 위해 함께 고민했다. 전진홍·최윤희(B.A.R.E)의 ‘도킹시티’가 1등상인 ‘헤리티지 투모로우’상을 수상했다. 2등상 ‘헤리티지 스피릿’상에는 김대천·한지수(sum_Lab)의 ‘공공공장’과 조준호·권현정(아뜰리에 엑스빠스)의 ‘새로운 패러다임, 반응하는 도시’가 선정되었고 3등상 ‘헤리티지 챌린지’상에는 우태식(UA_Tectonic Space)의 ‘도심 보행네트워크의 회복을 위한 블록 접속 장치’, 이경택·이동희(BASEMENT BASE)의 ‘서울 피노키오’가 선정되었다. ‘헤리티지 투모로우’상 수상팀에게는 상금 800만 원,‘헤리티지 스피릿’상 수상팀에게는 각각 상금 500만원, ‘헤리티지 챌린지’상 수상팀에게는 각각 상금 300만 원이 수여되었다. 수상작은 통의동 아름지기 사옥 1층에서 3월 7일부터 4월 5일까지 전시되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세 번의 워크숍, 치열한 고민
이번 헤리티지 투모로우 프로젝트는 참가팀이 완성된 형태의 작품을 제출하는 기존 공모전 방식에서 벗어나 참가자, 심사위원, 시민이 함께 모여 토론하고 아이디어를 발전시켜나가는 과정 중심의 ‘워크숍’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김봉렬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총장)가 운영위원장을, 조민석 대표(매스스터디스)와 박경 교수(캘리포니아 대학교 시각미술과)가 심사위원을 맡아 작품 심사와 워크숍을 함께 했다. 1차 선발 과정에서 제안서 아이디어가 훌륭한 팀을 2차 워크숍 과정으로 초대해 세번의 세션을 가졌다. 세 번의 워크숍을 거치며 참가팀들은 작품 디자인뿐만 아니라 새로운 교통 및 운송 수단에 대해서 고민하기도 하고, 혁신적인 경제 시스템을 고안하기도 했으며, 세계 여러 나라의 사례를 연구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공공공장’의 슬라이드 웨이 아이디어를 발전시킬 방안을 논의하며 홍콩의 미드 레벨에스컬레이터, 코펜하겐의 시켈슬랑엔의 사례를 참조하여 필요에 따라 고가 도로를 미학적 방식으로 도입하는 아이디어도 제시되었다. 요구르트 아줌마의 카트에서 영감을 얻은 ‘도킹시티’의 새로운 이동 수단, ‘아이-고’는 워크숍에서 심사위원과 패널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세그웨이의 ‘로-테크’ 버전을 보는 것 같다는 평과 비탈길의 문제를 해결하는 적정 기술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 같다는 평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다. 조민석 대표는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공통 관심사를 근거로 한 다양한 제안이 충돌과 교류를 통해 발전되는 과정 또한 소중했다”며 그간의 과정에 의미를 부여했다.
헤리티지 투모로우 수상작
이번 공모전의 참가팀들은 저마다 원하는 대상지를 선택해 개성 있는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전진홍·최윤희의 ‘도킹시티’는 이태원의 우사단로를 대상지로 삼았다. 다른 팀들은 ‘나은 도시’를 위한 ‘적은 차’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고민하는 반면, ‘도킹시티’는 이미 물리적인 제약(비좁은 도로, 가파른 경사, 비포장 도로 등)으로 인해 차량의 수가 자연적으로 줄어든 대상지가 과연 더 나은 도시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우사단로 일대는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한강대로 변에 유일하게 남은 달동네다. 좁고 가파른 경사지로 인해 이곳을 통행할 수 있는 대중교통 수단은 마을버스뿐이다. 그나마도 좁은 골목에 심각한 교통 체증을 유발한다. 한강을 내려다보는 대상지의 가파른 경사지, 골목골목에 형성된 다양한 계층과 문화 거뮤니티에 매력을 느꼈다는 전진홍·최윤희 팀은 도로를 넓히고 평탄하게 만드는 대신 이곳의 단점이자 매력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했다. 자가용 대신 우사단로 일대를 자유롭게 통행하는 오토바이, 요구르트 카트, 이동식 포장마차 등 개인 이동 수단의 이용 행태를 관찰하고 미래의 대체 교통수단 모델을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도킹시티’는 도로시스템인 ‘5 Go System’을 제안한다. 미래의 이동 수단으로 제시된 전동식 개인 스쿠터 아이-고Ai-go, 이동과 설치가 편리한 트레일러 위-고We-go와 수직적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엘리베이터 버티-고Verti-go, 아이-고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나선형 슬라이드 돌-고Dol-go, 가파른 경사지와 계단, 언덕을 쉽게 오를 수 있게 하는 에스컬레이터 업-고Up-go 등이다.
한편 김대천·한지수 팀의 ‘공공공장’은 쇠락해가고 있는 가구 공장 단지인 아현동 일대를 대상지로 삼았다.구릉지를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슬라이드’라는 새로운 도로와 순환 체계를 고안해 자동차 이용을 필수적으로 수반하는 아웃소싱을 줄이고 인소싱이 가능한 커뮤니티를 만드는 방안을 구상했다. 단순히 편리한 도로 체계를 고안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커뮤니티를 구상했다는 점에서 사회 구조 전반을 통찰하는 안목을 보여주었다.
조준호·권현정 팀의 ‘새로운 패러다임, 반응하는 도시’는 신사동 가로수길 일대를 대상지로 삼았다. 대상지 각 구역의 용도에 따라 세심하게 고려한 맞춤 대안(전기자전거 셰어링 시스템, 자동차 셰어링 시스템, 시간 선택제를 대입한 탄력적 보행자 도로, 움직이는 정원 등)을 제시했다. 우태식의 ‘도심 보행 네트워크의 회복을 위한 블록 접속 장치’ 프로젝트는 무교동, 다동, 을지로입구역 주변지역을 대상지로 선정했다. 하나은행 건물의 입면을 개방해 공공 공간을 조성함으로써 맛집 골목을 걷고 싶은 거리로 개선하고, 을지로입구역과 청계천까지 연결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차로로 인해 단절된 인도를 지하 저·중층부를 이용해 연결하고 자유로운 보행 환경을 조성한다.
이경택·이동희의 ‘서울 피노키오’는 강남 대치동 은마아파트를 대상지로 아파트키드의 추억을 향수한다. 은마종합상가 위에 인공 대지를 올려 4,000여 대를 수용할 수 있는 주차장을 조성하고 아파트 옥상에는 각 동으로 이어지는 케이블카를 연결한다. 자동차로 점령된도로, 노후한 아파트 단지의 미래를 블랙 조크와 버무려 제시한 점이 흥미를 끈다.
헤리티지 투모로우 5의 수상작은 서울의 다양한 구역에 ‘더 나은 도시’를 위한 각기 다른 해법을 제시한다. 수상팀들은 자동차와 보행자를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보지 않고 때로는 공모전의 주제인 ‘적은 차 나은 도시’에 질문을 던지기도 하며 해법을 고민했다. 교통 시스템, 경제, 커뮤니티, 새로운 이동 수단 등 다양한 논의가 각각의 작품 안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산만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산발적인 다양한 논의를 통해 신선하고 창의적인 미래 도시를 구상하고자 한 참가자들의 열의가 느껴졌다. 박경 교수는 이번 공모전의 수상작들에 대해 “저마다 그곳만의 경관을 담고 있는 장소를 대상지로 삼아 앞으로 서울의 자동차 의존도가 낮아졌을 때의 다양한 모습을 상상하게 해주었다. 각 프로젝트는 대상지의 특수한 상황을 집중적으로 다루었지만 현재의 도시 문제를 야기하는 많은 이슈를 함께 공유하고 있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