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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의 서재] 책은 빨갛다
사랑도 빨갛다 아니 처연하다
개양귀비 꽃잎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아 본 적이 있다. 한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붉은 빛은 그 강렬한 덧없음으로 인해 비현실로 각인된다. 그에 비해 동백꽃은 붉은 눈물방울처럼 툭 떨어져버리는 처연함에 속수무책이다.
“빨간색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한계가 없고 특징적인 따뜻한 색이다. 그것은 생기에 차 있고 활동적이며 동요하는 색으로서 내적으로 작용하지만, 사방으로 자기 힘을 소모하는 노란색이 지닌 경솔한 성격은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빨강은 모든 에너지와 강렬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목적을 의식한 무한한 힘을 강력히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거의 외부로 향하지 않고 주로 자기 내부에서 분출하고 작열하는 빨강은 소위 남성적으로 성숙한 색이다.”1
칸딘스키가 ‘남성적’이라고 얘기했던 속성은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ovar의 영화 ‘하이힐’2을 보면 단순히 남성적인 것보다는 ‘여성 안에 갖고 있는 남성적인’ 빛깔로 욕망과 슬픔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색이 어느 정도 이면을 가지고 있지만,특히 빨강은 그 강렬함으로 인해 그 안에 숨겨진 슬픔과 부서지기 쉬운 감성을 간과하게 된다. 강렬함과 다치기 쉬운 감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빛깔. 그런 면에서 개양귀비 꽃잎은 빨강이 가지고 있는 빛깔의 본성을 가장 적절한 물성으로 보여준다.
“나는 여기에서 당신들의 눈에 말을 걸고 있다. 이것이 나의 신중함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 동시에 나는 공중에서 당신의 시선을 통해 날아오른다. 이것이 나의 가벼움이다. 나는 빨강이어서 행복하다! 나는 뜨겁고 강하다. 나는 눈에 띈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를 거부하지못한다. 나는 숨기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섬세함은 나약함이나 무기력함이 아니라 단호함과 집념을 통해 실현된다. 나는 나 자신을 밖으로 드러낸다. 나는 다른 색깔이나 그림자, 붐빔 혹은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를 기다리는 여백을 나의 의기양양한 불꽃으로 채우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내가 칠해진 곳에서는 눈이 반짝이고, 열정이 타오르고, 새들이 날아오르고,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나를 보라,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를 보라, 본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다는 것은 곧 보는 것이다. 나는 사방에 있다. 삶은 내게서 시작되고 모든 것은 내게로 돌아온다. 나를 믿어라!”3
오만하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 나오는 ‘빨강’의 얘기다. 파묵의 빨강은 말 그대로 불꽃이다. 그래서 그것은 살아 있음 자체다. 그러고 보니 제목이 의미하는 것은 결국 불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지만 영원하고 싶은 그러나 영원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술탄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고,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바뀌고, 그들이 시대를 거슬러서도 지탱하고자 했던 양식이 바뀌는, 이전의 모든 것들이 소멸되어 가는 얘기. 그러니까 빨강은 소멸의 시간을 얘기하는 유일한 빛깔이다.
이수학은 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이원조경에서 4년 동안일했다. 프랑스 라빌레뜨 건축학교와 고등사회과학대학원이 공동 개설한 ‘정원·경관·지역’ 데으아(D.E.A.) 학위를 받았고, 현재 아뜰리에나무를 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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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설계하는 법] 디자인 검산법, 경관 모형 실험
1 조경은 글자 그대로 경관을 만드는 행위다. 실제의 경관이 장소를 구성하는 다양한 물리적구성 요소 간의 상호 작용에 의해 그 장소만의 공감각적 시스템을 형성하는 것처럼, 경관을 디자인하는 것 역시 대상지라는 물리적 바탕과 그 장소를 채우게 될 새로운 물리적 구성 요소의 조합을 통해 구현된다. 설계자만의 깊이 있는 개념과 태도도, 남다른 눈으로 해석한 대상지의 의미와 감흥도, 경관적 컬티바landscape cultivar로서 새로이 장소를 작동시키기 위한 창의적 전략도 물리적인 디자인 없이는 불가능하다.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모든 과정이 그 장소에 가장 적합하고 합리적이고 의미 있는 물리적 디자인을 위한 과정인 셈이다. 결과물로 디자인된 물리적 요소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경관적 감흥이 미학적 가치를 갖고 이용자들로부터 사랑받을 때, 그러한 과정도 의미를 얻게 된다. 혹자의 말처럼 우리가 디자인하는 물리적 경관은 일단 예쁘고 봐야 한다. 그래야 할 말이 있는 것이다.
2 무언가를 실제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과 검증이 필요하다. 경험 많은 작가일수록 보다 안정적인 결과물을 담보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고, 그것은 그만의 노하우가 된다. 하지만 흔히 말하듯 조경은 잡학이다. 가장 통합적이고 복합적인 디자인 단위라 할 수 있는 경관을 다루다 보니 비슷한 디자인 분야 중에서도 고려해야 할 것이 더욱 많고, 그러한 요소들 간의 모든 조합을 경험하는 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수많은 현장 경험을 수십 년 해온 대가가 아니라면 디자인과 실제의 간극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충실하게 디자인을 검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머리가 아니라 눈과 손을 통해 이루어질 때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이 때 모형model을 통한 스터디는 가장 손쉽지만 가장 효과적인 검증 도구가 된다.
3 나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디자인과 실제 사이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모형 스터디 작업을 시도하고자 노력한다. 단순히 최종 디자인을 재현하는 프레젠테이션 도구로서의 활용을 넘어, 대상지의 3차원적 현황을 보다 쉽게 이해하는 분석 도구로서, 개념적 전략이 대상지에 적용되었을 때 발생하는 현상을 관찰하여 그로부터 대상지만의 시스템을 도출하기 위한 전략적 도구로서, 계획안의 형태, 스케일, 공간감 등을 빠르게 검증하고 발전시키는 디자인 도구로서 모형의 다양한 활용 가능성을 실험해 본다. 뿐만아니라 디지털 모형의 활용은 복잡한 구조물의 기초에서부터 마감까지 실제 시공의 전 과정을 가상적으로선행해 봄으로써 시공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순서상의 오류를 파악하고 시공 방법을 개선하기 위한 효과적인 검증 도구가 되기도 한다.
4 모형을 통해 디자인 스터디를 하는 경우 나에게는 다섯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실제로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 직접 모형을 만들도록 한다. 물론 단순히 대상지 지형을 재현하는 모형이나 전체적인 베이스를 만들거나 하는 것은 누가 해도 상관이 없겠지만, 디자인 스터디 모형의 경우에는 제작 과정 자체가 디자인의 과정이 되므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디자이너가 직접 깨닫고 느끼고 수정하면서 디자인을 발전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모형 제작이 두세 시간을 넘기지 않도록 한다. 아주 디테일한 스터디를 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형 제작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 효율적인 스터디가 가능하다. 셋째, 디테일한 설계를 제외하고는 디지털 모형보다 물리적 모형physical model을 만들도록 한다. 화면의 한계 속에서 벗어나야 하며 손을 통해 디자인을 느끼는 것 역시 중요하기 때문이다. 넷째, 재료 선정 시 가급적이면 모형용 소재가 아니라 스케일과 재질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창의적 소재를 찾도록 한다. 다섯째, 쉽게 분해되거나 변경이 용이하도록 만들어야한다. 그래야 지속적인 스터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5 ‘Gubei Pedestrian Promenade Central Folly’(2009). 대부분의 프로젝트에서 디지털과 물리적 모형이 병행되는 경우가 많다. 센트럴 폴리는 상하이의 대규모 주거 단지 내 보행자 가로인 구베이 골드 스트리트Gubei Gold Street의 중앙 광장에 설치된 카페, 매점, 꽃집, 관리실 등으로 구성된 소규모 편의시설이다. 폴리 디자인의 거의 모든 과정은 디지털로이루어졌다. 기본구상 단계에서부터 디자인은 라이노 3D를 이용하여 완성되었고, 프로그램으로부터 추출된 평면, 단면, 입면을 베이스로 모든 캐드 도면이 작성되었다. 유일하게 디지털로 진행되지 않은 것은 바로 디자인의 검증 단계였다. 디지털 모형은 정교함에서는 뛰어나지만 유연하지 못하고, 모니터의 한계 또는 가상공간의 왜곡된 화각 탓에 대상을 통합적으로 관찰하고 인지하는 데 분명한 한계를 갖는다. 마우스의 반복된 클릭과 옵셋offset이나 카피copy 같은 명령어 없이 손끝으로 느끼면서 하나하나 완성되는 과정의 정교함은 디지털 세계의 오차를 검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일 것이다.
김현민은 1975년생으로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조경가협회(ASLA)에서 수여하는 우수졸업자상을 받았으며, 미국의 SWA Group에서 Shanghai Gubei Gold Street Plan, Symphony Park Competition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 기술사사무소 렛, 비오이엔씨에서 계획, 설계 및 정원 시공에 이르는 폭 넓은 실무를 경험하였고, 국내 여러 대학에서 조경 설계를 강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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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코랄리 윈
갭 필러 설립자
갭 필러Gap Filler는 뉴질랜드 캔터베리 지방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파괴된 도시를 시민의 손으로 재건하기 위해 설립된 비영리 시민 단체다. 지진으로 생긴 수많은 공터들이 영구적으로 개발되기 전까지 무작정 비워두는 것이 아니라, 공터를 임시적으로 활성화하고 커뮤니티의 요구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 갭 필러의 목표다.
2010년 9월 4일에 전 도시를 뒤흔든 첫 번째 지진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인 이듬해 2월 22일에 또 한 번의 파괴가 이 지역을 충격에 빠뜨리면서 갭 필러의 역할과 임무는 빠르게 늘어났다. 설립자 코랄리 윈은 호주 애들레이드Adelaide 출신으로 원래 로스쿨을 다녔다. 그러나 연극과 영화, 미술사를 공부하고 싶어 법학을 그만두고 뉴질랜드 캔터베리 대학교의 문학부로 교환 프로그램을 갔다. 당초 반년을 염두에 둔 계획이었지만, 크라이스트처치의 매력에 빠진 그녀는 호주로 돌아가지 않고 이 도시에 자리를 잡았다. 지진 이전에는 미술관의 파트타임 매니저로, 그 후 아트센터에서 예술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거나 관람객 프로그램을 짜기도 하고, 웹사이트 관리, 마케팅 등 온갖 잡일을 도맡았다고 한다. 각종 페스티벌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기도 하고, 무료 연극단Free Theatre Company에서 실험적 연극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극단에서는 거의 보수를 받지 못했고, 가끔 급여가 지급되면 시간당 200원꼴이었다고 한다.
생활고와 타향 생활에 지쳐 방황하고 있던 코랄리 윈에게 지진은 하나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크라이스트처치 곳곳에서 수천 채의 건물이 붕괴되었는데, 그녀의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건물이 무너져 벽돌더미로 변하기 직전에 그녀는 가까스로 뒷문을 통해 빠져 나왔다고 한다. 집 뒷마당에 천막을 치고 바비큐 그릴로 음식을 만들며 생활해야 했고, 가졌던 모든 물건을 잃었다. 하지만 그녀는 당시를 회상하며 말한다.
“왠지 모르게 자유스러워진 느낌이었어요. 떠난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많은 물건을 소유하지 않는 다는 사실이 말이에요. 때로는 우리의 물건들이 오히려 우리 삶을 지배하죠. 차 안에 있는 것이 내게 필요한 전부라는 현실을 맞닥뜨리고 나니, 사실 갑자기 신나는 기분이었죠.”
그녀는 목숨은 건졌지만, 첫 번째 지진 후 아트센터에서 해고되었다. 출장 가는 남자친구를 따라간 웰링턴의 거리에서 “I Love Christchurch” 포스터를 보고선참을 수 없어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갭 필러의 아이디어는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솟아났다. 실직 후 한 달 반 만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모든 것이 부정적이었던 상황에서 갭 필러는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단 하나의 기회였다. 함께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초기 멤버인 라이언 레이놀즈Ryan Reynolds나 앤드류 저스트Andrew Just와 달리 갭 필러에서 코랄리 윈이 항상 중심적인 역할을 맡은 이유는, 다른 정규직 일을 하고 있던 두 사람과 달리 오직 갭 필러에만 매진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갭 필러 설립 후 약 1년간 그녀는 무보수로 아침 7시부터 자정까지 거의 매일 일했다. 2011년 8월, 갭 필러는 드디어 크라이스트처치 시청으로부터5만 달러의 지원금을 받게 되었다. 현재 갭 필러는 6명의 유급 직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갭 필러의 중요한 역할은 버려진 도시 공간을 사용하는 데 갖가지 걸림돌을 제거하는 일이다. 법적인 난관과 책임 보험 등 시민들에게 생소한 어려운 절차들을 해결해 줌으로써 아이디어를 샘솟게 하고 현실화되게 돕는다. 갭 필러의 프로젝트가 주장하는 것은, 굳이 큰 예산의 공공 사업이 아니더라도 작은 시민 활동을 통해 실질적으로 사람들의 상처가 치유되고 동시에 도시의 성장 방향이 제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작은 프로젝트라고 모두 쉽게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실망스럽기도 하고 기대했던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코랄리 윈이 말하는 바는, 직접 해 보지 않으면 생각, 짐작, 대화만으로는 어떤 것이 성공하고 어떤 것이 관심을 끌지 알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다. 길을 아는 것과 실제로 걸어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기에 실패한 프로젝트 또한 나름대로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 갭 필러가 효과적인 것은, 이러한 실패가 비교적 적은 자본과 시간 투자로 진행되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시행되는 커다란 시행착오와 달리 재빨리 실패의 교훈을 흡수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진행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공공 정책적 측면에서 보면, 갭 필러는 일종의 길잡이 프로젝트로서의 성격도 가진다.
최근 조경 계획과 설계에서 대형 자연 재해와 각종 사회적 재난에 대비한 효과적인 대응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예방도 중요하지만, 많은 경우 재난은 제도적 준비를 무색하게 하는 압도적인 규모로 닥쳐온다. 그중 하나가 지진이다. 한반도는 그간 지진 안전지대로 인식되어 왔지만 상식을 뒤엎는 각종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크라이스트처치는 뉴질랜드 남섬의 중심 도시로서, 관광지일 뿐만 아니라 지역 산업과 문화의 구심점이 되어 왔다. 6개월 간격으로 일어난 두 차례의 지진은 도시 전체를 사실상 폐허로 만들었다. 살아남은 상당수 건물 또한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사용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일시에 발생한 대규모의 잔해, 공터, 그리고 충격적인 기억들은 대부분의 젊은이를 떠나게 했고, 일상적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제한된 인프라와 자본 탓에 복구와 재건은 수 년, 길게는 수십 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운 좋게 일자리를 유지하고, 삶터를 지키고자 도시에 남은 이들에게도 광대한 면적의 공터와 폐허 지역은 그날의 아픈 경험을 환기시키는 상처가 되고 있다. 갭 필러는 예술, 조경, 건축적 개입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 다시 웃음을 가져오고 새로운 모습의 도시에 대한 희망을 열고 있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 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 전시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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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공감] 다섯 번째 공간 탐색, 서울시립대학교 캠퍼스
이곳이 100년 가까이 된 캠퍼스라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1918년 경성공립농업학교로 시작하여 서울농업대학, 서울산업대학을 거쳐 약 30년 전 서울시립대학교(이하 시립대)로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시립대 캠퍼스를 처음 와본 건 아니었지만 여유를 가지고 찬찬히 둘러본 적이 없었던지라 이번 답사는 설계적 관점으로 이 공간을 살펴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캠퍼스 전반의 첫인상은 안정감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오래된 캠퍼스답게 차분하게 가라앉은 건축물과 아름드리나무들이 이러한 공간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건축물이 홀로 튀거나 윽박지르지 않고 대지에 안착되어 있다는 것은 구성원들이 편안한 공간감을 느끼는 데 도움을 준다. 100년 건축의 흔적을 기대할만 하지만 아쉽게도 서울학연구소나 박물관 등 몇몇 건축물에 국한되어 있고, 대부분의 건물은 보편적인 학교 건축의 모습이다. 최근 지은 것으로 보이는 건축물들에 주목할 만한데, 이들은 기존 캠퍼스와 스케일이나 재질면에서 어울리면서도 동시대적 감각을 드러내고 있다. 여러 부류의 건축이 공존하고 있지만 이질적이라고 보이지 않는 이유는 편안한 무게감이라는 공통분모가 캠퍼스 건축에 적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건축물과 그 배치가 주는 안정감과 더불어 원 수형을 지니면서 성목으로 자라난 아름드리나무들이 쾌적함을 더해준다. 캠퍼스 내의 나무는 과거 농업 학교의 유산으로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캠퍼스에 수목원을 결합해놓은 것처럼 다양한 수종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양호한 수형을 유지하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잘 관리된 녹음은 가치를 환산하기 힘든 혜택이 되어 구성원에게 되돌아가고 있다. 개별 건축이나 오래된 나무들 외에 시립대캠퍼스의 안정감에 기여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지형이다. 이 캠퍼스는 교문 부근의 지대가 높고 안쪽으로 완만하게 낮아지다가 끝부분에서 배봉산을 만나다시 오르막의 경계를 이룬다. 분지라고 볼 수는 없지만 완만한 그릇 같은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이 오목한 그릇에 담긴 건축과 나무는 상대적으로 낮아 보여 은연중에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은 또한 캠퍼스 외부로부터의 시각적 영향을 차단하고 위요감을 증가시키는 효과도 준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캠퍼스 전반을 아우르는 디자인의 원칙은 ‘언더 디자인’이다. 휴게 공간의 조성방향은 나무들이 완성한 공간을 잘 살피고 그 안에서 조심스럽게 구성원이 활용할 수 있는 최소의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상쾌한 그늘을 드리우는 큰 나무들 아래에는 데크와 벤치가 설치된 곳이 많다.
정욱주는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하였다. 글쓴이 외에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였고,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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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색의 정원
5월은 정원이 가장 풍요로운 계절이다. 새로운 잎이 돋는 신록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만한 정원이다. 어젯밤에 비도 오고 햇살도 밝으니 오늘 보게 되는 정원은 완벽한 차비를 갖추었을 터다. 숲 속에 위치한 주택 단지로 가는 길만으로도 마음이 정갈해진다. 도심 속에서 이런 숲길을 통해 주거지에 이르는 것도 새롭거니와 잘 정비된 도로가 흡사 어디 리조트에 가는 기분이 들게 한다. 작은 마을로 이루어진 주택 단지는 차분한 재료로 이루어진 비슷한 분위기의 저택들로 구성되어 주변 자연 및 정원과 잘 어울렸다. 맨 안쪽 산기슭에 위치한 주택은 힘 있고 정갈해 보였다.
린의 이재연 대표는 서안에서 10여 년 같이 근무했던 동료이고 설계와 현장경험을 한 이력도 비슷해서 나와는 태생적으로 비슷한 디자인 태도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장과 소재를 중시하고, 디자인·시공이 일체화된 작업을 위주로 하고 있는 점도 비슷하다. 아마도 디자인이 다른 부분은 나와 다른 성격적 특성 정도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보게 되는 정원은 내가 서안에서 독립한 후 처음 보는 서안 멤버의 정원이란 기대도 있다. 나와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작업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정원의 입구
여유 있는 주변 녹지와 도로변의 조경 공간은 안에 있는 정원에 대한 기대감을 높인다. 대문을 들어서면 단정한 계단과 그 옆 기단에서 흐르는 작은 벽천이 이국적이다. 코르텐스틸 기단은 식물 재료와 절묘하게 어울리고 베이지색 포장 재료와도 잘 어울려 명료한 입구 정원의 몫을 다하고 있다. 코르텐스틸기단 위에는 황금눈주목과 회양목, 일본조팝나무(홍조팝)를 심었는데, 금속의 재료와 잘 어울렸다. 특히 황금눈주목은 그 강렬한 색상이 더욱 이국적으로 보인다. 강렬하지만 잘 어울렸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금속과 대비되는 좀 더 차분한 색상의 식물을 선택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강한 이미지의재료에는 습관적으로 소프트한 재료를 놓는 버릇이 있다. 어쨌든 나와 다른 첫 번째 선택, 신선했다. 조팝나무와 황금눈주목 사이에 회양목으로 라인을 만든 것도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계단을 올라서면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이르는 디딤돌이 단정하게 놓여있다. 진입로가 마당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구조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으나 마당의 구조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 같다. 좌우로 긴 마당의 형태가 길의 레벨에 의해 변화가 생기고 포장 좌우로 살짝 마운딩 된 잔디 마당은 가볍게 느껴지기도 한다. 작은 지형의 흐름이 생겨 공간에 더욱 긴장감이 생기게 되는 효과도 있어 보인다. 또한 특별한 경계 없이 지형에 연속되는 포장과 잔디의 단정한 면이 시원한 공간감을 주고 있다.
빛의 마당
마당의 풍경은 눈부셨다. 날씨 탓도 있겠으나 풍부한 소재와 신선한 잎들, 꽃들이 빛나는 풍광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단정한 테라스와 한쪽의 코르텐스틸 기단, 그리고 여러 가지 변종 식물들의 풍부한 색상이 잘 어울렸고 마당에 심겨진 체리나무의 열매도 인상적이었다. 마당의 전면부에는 여러 가지 조팝나무가 심어지고 한쪽의 코르텐스틸 기단 위에는 무늬병꽃나무와 황금눈향나무가 심겨 있었다. 무늬병꽃나무의 흰색 잎과 연분홍 꽃이 황금눈향나무와 대비되어 이국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넓은 테라스에는 포니테일, 팜파스그라스, 모닝라이트억새 등 이국적인 그라스가 심겨 있었다. 나의 습관적 선택이라면 마당의 전면부에 그라스 종류를 배치했을 텐데 그는 테라스에 그라스를 배치하여 특별한 공간감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라스는 역광에 효과적인데, 테라스에 심겨진 그라스 종류들은 특히 섬세한 디테일을 가지고 있어 빛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주택 안의 풍경에 신선함을 더할 것이다. 이런 그라스가 은은하고 섬세한 빛을 표현한다면 순도가 높은 색상의 변종 식물과 꽃은 화려한 색상으로 빛을 표현한다. 황금눈향나무와 노란 대사초, 붉은 체리 열매, 대왕철쭉 등이 화려한 정원의 모습에 일조한다. 앞집 경계에 심겨진 에메랄드그린은 이런 화려한 색깔의 배경이 되는 맑은 녹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몇 개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건축의 형태가 강렬하기 때문에 다소 많아 보이는 정원의 색조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넓은 테라스와 같은 레벨의 잔디가 연속되면서 전체적으로 넓고 시원한 공간을 형성한다.
김용택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환경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부터 조경설계 서안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으며, 2001년부터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부암동 반계별서와 평창동 정원 등 정원 조성 작업을 주로 해 왔으며, 조경 작품이 주변 환경에 동화되도록 장소의 특성에서 얻은 모티프를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설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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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디지털 풍경화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5년째 살고 있다. 생활인으로 지내다보니, 이곳 사람들의 공원에 대한 인식이 여타 미주 대도시권과 차이가 있음을 느낀다. 가까운 거리에 근린공원이 없어도,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해변이나 구릉이 대부분의 주거지에서 불과 한 시간 내의 거리에 있다. 자동차 중심의 거리 환경은 이러한 여가 활동을 더욱 뒷받침하며 휴일에 자동차 핸들을 공원이 아닌 바다나 산으로 돌리게 한다. 교외화로 일반화된 주거 양식은 뒷마당을 포함하는 유형이 보편적이기에 공공 공원의 수요나 사용 밀도가 상대적으로 낮다. 그리고 수평적 확산을 거듭해온 도시 위계는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처럼 심장부 역할을 하는 중앙 집중형의 오픈스페이스와 거리가 멀다. 그런데 근래에는 가장 급속도로 교외화가 진행되었던 남부 캘리포니아마저도 산업 구조의 중심이 도시 집중을 본질적으로 요구하는 금융-서비스-IT 등 지식 기반 산업으로 이행되면서 다시금 도심지로 인구가 유입되는 국면을 맞고 있다. 그에 따라 남가주의 주요 도시들은 기존 도심지의 활성화 계획을 구상하였고, 각 도시의 시청사 전면에 중앙 공원을 조성함으로써 도시 문화 재생의 중심지로 삼으려 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세 도시가 비슷한 시기에 시청사 앞에 공원을 마련했다. 로스앤젤레스의 그랜드 파크Grand Park를 시작으로 뉴포트비치의 시민공원Newport Beach Civic Park, 가장 최근인 지난해 가을 문을 연 산타모니카의 통바 파크Tongva Park가 그 마지막 순서였다.1 작년 송구영신 전야에 그랜드 파크로 예상보다 3배가 많은 인파가 몰렸던 사건2을 기점으로 남가주 대도시 지역에서 공원의 위상 변화가 점쳐지고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이 주택의 안뜰이 아닌 도심의 공원으로 초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산타모니카 해변으로 가다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하여 산타모니카 프리웨이인 10번 도로를 타고 태평양을 향해 서쪽으로 이동하면 바다를 향해 카운트다운이라도 하듯 거리명의 숫자가 26에서부터 1로 줄어든다. 대상지의 서쪽 경계이기도 한 오션 애비뉴Ocean Avenue가 해안에 가장 가까운 1가에 해당하는데, 거리명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 수록 하늘의 끝이 태평양의 수평선과 만나길 기대하게 되지만, 마지막 길인 오션 애비뉴에 가까워져도 백사장은커녕 하늘의 끝도 보이지 않는다. 산타모니카 해변이 블러프bluff라 불리는 절벽 형태의 해안 지형이기 때문이다. 일반 절벽보다 넓고 길게 해안이나 호안을 따라 형성된 절벽을 뜻하는 블러프는 정서향의 산타모니카 해안선과 평행하게 백사장의 뒤편으로 절벽의 병풍을 드리운다. 절벽의 상부는 바다 쪽으로 완전히 열린 수 킬로미터의 전망대를 마련해주어 해질녘의 산타모니카는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랑한다. 대상지의 위치는 절벽의 끝에서 불과 한 블록 떨어져 있어 건물 2~3층 높이만 확보되면 산타모니카 부두와 해변을 모두 내려다 볼 수 있는 강력한 조망의 가능성을 가진다. 대상지는 지형적 조건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방문객을 기대할 수 있는 명소들에 둘러싸여 있어 도시 문화적 조건 또한 탁월하다.3 오션 애비뉴 건너 바다 쪽으로는 관광객이라면 반드시 찾는 제1의 아이콘인 산타모니카 부두가, 한 블록 북쪽으로는 연간 천만 명이 방문하는 쇼핑의 1번지인 3가 보행자거리3rd street promenade가 시작된다.
그러나 대상지는 가능성만 큰 곳은 아니다. 우선 산타모니카 하이웨이가 공원의 북쪽 경계를 감싸며 현 도심지와 대상지를 갈라놓는다. 동쪽으로는 근대 건축 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존해야 할 시청사 건물이 공원의 경계를 규정한다. 남쪽으로는 새로운 주거단지의 개발이 예정되어 있어 공공의 영역 밖이다. 서쪽으로도 시야는 바다를 향해 열리지만 6차선의 오션 애비뉴가 블러프 하부의 1번 도로와 연결되는 진입 경사로가 위치하기에 늘 차량의 통행이 붐빈다. 보행가로와 자전거 도로 체계가 발달된 산타모니카이지만 대상지의 실제 연결성은 사방으로 열린 도심 공원의 전형이라 하기엔 폐쇄적이다.
설계자 선정 과정을 살펴보다
캘리포니아의 아이콘인 산타모니카의 시민 공원 설계자로 예상과 달리 서부에 둥지를 틀고 있는 팀4이 아닌, 영국 태생의 제임스 코너James Corner가 이끄는 대륙의 반대편에서 온 뉴욕 기반의 JCFO가 선정되었다. 의아한 점은 지정학적 거리만이 아니었다. 프레시 킬스로 대표되는 JCFO의 여러 대형 공원 작업은 논리적 사고로 도출되는 대상지의 조직site organization을 통한 경관적 기반landscape as infrastructure의 형성과 도시적 전략urban strategy의 제시로 대표되는 작업이었기에 통바 파크처럼 빈 주차장이었던 부지에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 내는 작업과는 거리가 느껴졌다. 다만, JCFO의 근작인 하이라인 파크HighlinePark의 성공을 계기로 상대적으로 작은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실현해 가는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던5 2010년, 하이라인 파크는 이곳의 설계자 선정 과정에 강력한 카드로 통했고,6 통바 파크는 JCFO에게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설계의 결과물에 더욱 귀추가 주목되었다.
최영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디자인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마쳤다. 미국의 SWA Group과 한국의 오피스박김에서 다양한 성격의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ArchiprixInternational 본상, 뉴욕 신진건축가 공모 대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는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하는 설계사무소 Laboratory D+H를 설립하여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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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생태경관건축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Landscape architecture가 1970년대 한국에 소개되면서 환경, 생태, 경관, 조경 등의 다양한 의미로 이해되었고 아직도 일반인들에게는 국토나 도시 환경보다는 정원이나 토목과 건축의 미화 작업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서양에서도 소위 조경은 사유지의 설계와 조성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라 20세기 초에는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로 이해되고, 1960년대에는 생태 경관 계획ecologicallandscape planning으로, 1980년대 이후에는 도시와 산업지의 재생과 관련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landscape urbanism과 인프라스트럭처 중심으로 변신해 왔다. 건강, 환경 개선 및 재생, 지속성에 선도적 역할을 하고, 건설 사업의 보조를 넘어 환경 보존과 재생의 선두 역할을 함으로써 조경은 건축보다 더 사회적 연관성을 가지게 되었다. 또 조경은 개발뿐 아니라 보존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시장 경제의 변화에 덜 민감한 점이 있다. 조경 및건설 경기가 침체 상황인 이즈음, 조경 또는 경관계획의 원래 이름 landscape architecture를 다시 돌아보고, 그것을 학문 영역보다는 환경 개발과 보존의 한 방법론으로 생각하면서 조경 분야의 장래를 모색해 볼 필요가 있다.
조경계는 건축계의 동질성과는 달리 이질성으로 특징지어지고 있다. 이것은 조경이 농과·환경대학에 속하기도 하지만 건축·디자인대학에 속한 경우도 많다는 점, 그리고 그 자체가 문화를 바탕으로 한 실행이라는 점을 반영한다. 또 조경에는 건축과 다른 세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 경관은 건물에 비해 다양한 스케일―정원, 도시, 지역―을 포괄하고 경계 없는 개방형 시스템이며 역동적이다. 둘째, 조경은 설계, 계획, 시공 그리고 관리라는 네 영역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셋째, 경관은, 네덜란드의 어원에 따르면, 형성과 보존의 개념 또는 그림의 개념일 뿐 아니라 공동체 및 관리의 개념이다. 따라서 큰 규모의 조경인 경우, 지역 사회를 강조하고 특출한 예술가적 개성이나 개인주의적 사고를 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필요성과 전통을 갖고 있다.
이러한 근본적 차이는 조경에 건축적 방법을 직설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큰 문제임을 말해 준다. 즉, 조경 고유의 계획과 설계 방법을 개발하고 구현해야 함을 뜻한다. 더욱이 오늘날 지속성의 문제―기후 변화, 자원과 에너지 안보, 문화 정체성과 실체성, 계층 간의 갈등―는 생태경관적 접근 방식이 건축적, 도시적, 산업적 접근 방식보다 더 중요함을 의미한다.
현재 한국의 조경계는 건축, 도시·지역계획, 토목, 임업 분야로부터 영역 침투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사실 한국의 조경은 원래 문화적·역사적 뿌리가 약하며 중국이나 일본과 같은 정원예술의 전통이 적다고 나는 보고 있다. 한국의 유수한 산수·자연 환경, 20세기 중반까지 지연된 도시화, 잔손이 많이 가는 것을 싫어하는 심성, 도시 중산층의 부재 등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국의 풍류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흐름을 즐기는 멋이고 맛이었다.
지난 40년간 한국 조경은 괄목할만한 발전을 했다. 조경계가 잘해서 발전한 면도 있겠지만 외재적 원인도 컸다. 박정희 정부의 정책적 지원, 건설투기 붐, 급속한 산업화·도시화를 통한 환경 파괴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조경은 정원에나 적합한 방법을 도시 경관에 적용하기도 했다. 도시계획이나 사회 기반시설 또는 국토관리에는 적극적이고 지도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 했다. 건설이 남긴 폐해를 감추거나 미화하는 작업을 하면서 양적으로 성장해 왔다. 파괴가 많을 수록 조경 일이 많았다.
이제는 한국이 선진화되며 복지·행복 국가를 향해 질적 성숙을 하고 있다. 동아시아적 정체성을 회복하면서, 또 역동적 참여 민주화를 실현하면서 지속가능한 문화에 기여하는 국가가 되기 위해 조경이 해야 할,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은 수없이 많다. 기후 변화에 대응한 도시 및 지역 구조의 조정, 핵 에너지 위험을 감소하기 위한 지속가능한 에너지 경관 전략, 건설이 아닌 파괴로 치닫는 공공 기반시설(새만금 간척 사업 등)의 생태적 인프라로의 전환, 다기능적 생산 녹지 및 습지의 복원확장, 닫힌 전시 광경보다 일상적 생활환경의 개선에 주목하는 실용적 조경, 낭비의 측면이 큰 단일 용도의 공공 공간(학교, 정부 시설) 개조를 통한 녹지 증대와 환경 개조, 세천의 복원, 고가도로의 제거, 비투수층 도로와 주차장 및 산업 구조물의 제거, 대규모 녹화(지붕, 벽, 거리) 등이 그것이다. 공원이 따로 필요 없는 ‘숨쉬는’ 도시 및 국토의 재편성이 조경가와 경관계획가가 참여해야 할 일들이다. 설계와 계획 능력이 있고 과학적 지식에 기반을 둔 조경가일수록 할 일은 더 많다. 건설 사업의 ‘환경미화원’으로서의 조경보다 국민의 행복, 복지, 건강을 위해 공공 환경을 작동시키는‘전동차’로서의 조경이 필요하며, 이를 위한 적응과 변모의 계기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조경학과 실무 조경계는 다음과 같은 변신의 자세를 구축해야 한다.
첫째, 도시와 지역 규모의 경관·생태 및 공공 기반시설을 설계, 계획, 관리할 수 있는 관심과 능력을 확장해야 한다. 둘째, 열악한 도시 내부에 게릴라처럼 침투하여 아스팔트 도시를 건강한 유기체로 전환시키는 전문성을 길러야 한다. 셋째, 계획 및 관리 분야는 물론 기술·과학자와 협업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도시·국토계획의 전반적인 관리에서 ‘생태경관적 접근 방식’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넷째, 설계를 미관이나 형태보다는 삶의 질, 체험의 질, 건강·복지에 연계시키는 접근, 즉 국토를 몸으로, 조경을 의학으로 생각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의미 있는 일을 하려면, 또 위기에 대응하려면, 쉬운 일만 찾아서는 안 된다. 건설과 보존을 보완하기 위해 개발을 위한 보존, 보존을 위한 개발을 실행해야 한다. 경관이 본질적으로 스케일이 다양하고 경계가 없듯이, 조경 분야도 관심과 능력의 스케일을 다양하게, 경계 없이 하여 지속가능성 확보의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재도약의 기회를 찾아야 할 것이다.
고주석은 건축가이자 조경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생태경관적 접근 방식에 기반을 둔 디자인을 추구한다. 1989년 설립한 오이코스 디자인(Oikosdesign)을 이끌며 독일, 미국, 네덜란드, 한국을무대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고, 세계 여러 나라의 디자인 어워드와 설계 공모전에서 수상한 바 있다. 2003년부터 2013년까지네덜란드 바허닝엔(Wageningen) 대학교 조경학과 학과장을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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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용산공원, 참여할 때다
미지의 땅이자 금단의 땅인 용산 미군 기지의 공원화 프로젝트는 기지 이전에 관한 한미 정상의 양해각서가 체결된 이후 25년이라는 긴 과정을 겪고 있다. 우리나라 특유의 ‘빨리빨리’ 정서로 보면 이례적으로 길고 느린 호흡으로 구체화되어 온 프로젝트다. 양국 정상이 기지 이전에 합의(2003)한 후 기지의 공원화 계획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용산기지 공원화 구상’(2005)을 통해 계획의 밑그림이 그려졌고, 이 구상은 노무현 대통령의 ‘용산기지 공원화 선포’(2006)로 이어졌다. 이후 ‘용산공원 조성특별법’(2007)이 제정되었고, ‘용산공원 아이디어 공모’(2009)가 개최되었다. ‘용산공원 정비구역 종합기본계획’(2011)은 그간의 논의와 계획을 종합한 그랜드 플랜으로, 국제공모와 기본설계의 토대로 작동한 법정 계획이다. 2012년 4월, 정부는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의 당선작으로 West8 팀의 ‘미래를 지향하는 치유의 공원’을 선정한 바 있다. 용산공원이 담론의 영역에서 디자인의 차원으로 진화할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계획대로라면 이 작품을 바탕으로 기본설계가 진행되고, 2017년에는 공원 조성의 첫 삽을 뜰 예정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기본설계비로 책정된 예산이 작년과 금년 모두 국회에서 전액 삭감된 것이다. 표면상의 이유는 공원의 성격과 조성 시기에 관한 것이라지만 그 이면에는 비합리적이고 사소한 ‘어떤’ 정치적 이유가 작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본설계가 초기 단계에서 중단되었음은 물론 적지 않은 수의 공무원으로 구성된 국토교통부산하의 용산공원추진단도 개점 휴업이나 마찬가지였다. 법에 의해 국가 공원을 만들기로 한 정부가설계안을 선정했지만 그 설계를 진행할 예산을 못 받아 모든 일정이 지체되고 프로젝트 자체가 중지된 것이다.
엉뚱하게도 용산공원추진단은 종합기본계획 변경이라는 카드를 빼들었다. 종합기본계획은 이미 법적 고시가 끝났고 그 계획을 준거로 기본설계가 진행되는 마당에 다시 과거의 계획을 고치겠다는 것이다. 추진단은 변경의 당위성을 종합기본계획의 주요 골격인 6개 단위공원에 대한 반대 여론이 있다는 점, 그리고 공원 조성 여건과 상황의 변화―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의 난항, 미대사관 시설의 이전 시기, 침수 대비 등―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기본계획의 단위공원 개념은 공원 전체를 여섯 개의 주제로 나누어 개발하는 방식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진화하는 크고 작은 공원들의 연합united parks”이라는 탄력적 전략이며, 설사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기본설계 과정에서 다시 검토하는 것이 순리다.
여건과 상황이 달라졌다 해도 기본계획을 변경하여 대응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시간을 되돌려 과거의 계획을 바꾸기보다는 다음 단계의 과정에서 고려하면 충분할 일이다. 명분도 없고 실리도 없다. 그렇다면 종합기본계획의 변경은 예산 전액 삭감의 ‘어떤’ 이유와 연관된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변경 프로젝트가 이미 시작된 이 시점에서 ‘어떤’ 이유의 정당성 여부를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용산공원과 같은 빅 프로젝트는 계획 외적 환경, 즉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기존 계획을 주도했지만 다시 변경 계획이라는 난처한 숙제를 떠맡은 한국조경학회는 6개 단위공원을 생태 중심의 단일공원으로 바꿀 것이라는 추진단의 어색한 논리와 방향을 따르기보다는, 기본설계는 물론 그 이후의 과정에 닥쳐올 다양한 난제들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시나리오 계획과 유연한 전략을 구축하는 쪽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2년 연속 예산을 배정하지 않은 건 국회지만 그러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은 건 정부다. 정부와 국회모두 용산공원에 대한 관심과 의지가 거의 없었기에 벌어진 일이다. 만일 미래에 용산공원의 주인이 될 국민들이 예산 미배정이나 기본설계 중단과 같은 문제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국회와 정부의 입장은 지금과는 아주 달랐을 것이다. 시민참여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05년의 ‘용산기지 공원화 구상’이 방점을 두었던 ‘과정 중심적 계획과 유연한 설계’, 그리고 ‘참여적·소통적 계획’이 다시 강조되어야 할 시점이다. 지난 5월 21일에 열린 ‘용산 국가공원 전문가 세미나’에서 ‘참여’가 키워드로 부각된 것은 그나마 긍정적인 일이다.
지난 5월 1일, 한 세기가 넘는 긴 세월 동안 일본군과 미군이 점유해 온 캠프 하야리아가 부산시민공원이라는 새 옷을 입고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번 호에서 특집으로 다룬 부산시민공원은 용산공원의 앞날에도 적지 않은 교훈을 던져준다.10년 이상의 지난했던 부산시민공원의 조성 과정, 그 중심을 지탱하며 방향을 이끈 중심에는 시민, 언론, 전문가가 연합한 새로운 형식의 시민사회단체 ‘하야리아공원포럼’의 참여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지난 4월호부터 연재되어 온 김현민 소장의 “그들이 설계하는 법”이 이번 호로 마무리된다. 이수학소장의 “조경가의 서재”도 막을 내린다. 풍성한 그림과 글로 독자들과 소통해준 두 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다음 7월호부터 3개월간의 “그들이 설계하는 법”은 서울시립대학교 김아연 교수가, “조경가의 서재”는 에코이드ecoid의 김용규 소장이 이어갈 예정이다. 제주도로, 부산으로 종횡무진하며 잡지의 시각적 질을 높여주고 있는 전속 포토그래퍼 유청오 작가(스튜디오 키노)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빼놓을 수 없다. 지난 5월 중순부터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조한결 기자가 『환경과조경』 편집부의 새 식구가 되었다. 한국 조경에 만연한 피로와 불안을 교정하고 혁신해나갈 조경 언론인으로, 한결같이, 성장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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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전통과 이용
“전통은 고정되어 있는 것인가, 전통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대한 원론적 논의부터, 전통의 현대적 계승, 재현, 모사, 모방, 변용 등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정답 없는 문제지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래도 끊임없이 진행된 전통에 관한 논의 덕분에 이제는 직설적으로 외형만 본떠 만드는 것이 전통의 계승이라는 목소리들은 수그러들었지만, 문제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바로 지난달에 완공된 조경 공간 내에도 외형만을 빌려다 설계하고 시공한 정자며 방지며 원도며 담장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눈에 보이는 고정적인 형태주의 위주의 전통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숨어있는 눈에 안 보이는 질서와 고유의 세계관의 발견이 보다 기름진 전통 계승과 창조의 텃밭 역할을 할 수 있을 것”1이라는 인식은 활자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전통 전문가들은 답답하단다. 돌을 눕히거나 세워서 쌓는 들여쌓기 양식은 일본의 조경 양식인데 마치 우리의 전통 양식인 양 전통 공간 내에도 무분별하게 도입되고 있고, 방지 내에 원도를 배치하고는 분수를 설치하는 경우는 또 어느 나라 스타일이냐며 한탄한다. 자신 있게 복원할 수 없다면 유적지는 차라리 그대로 두고, 제대로 모방하지 않을 바에야 후손들 혼동하지 않게 전통 요소를 도입하지 말란다. 실무자들도 답답하단다. 어디 우리나라 상황이 글줄이나 읊어대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산이며, 시간이 여유 있는 줄 아냐고 한다. 무엇보다 발주처나 이용자들이 전통 요소의 도입을 선호하는데, 어쩌란 말이냐고 한다.
전통 관련 논의는 진부하고, 전통은 여전히 그 일부분 혹은 한두 가지 요소만이 도입되고 있고, 현실은 너무도 견고해 보이지만, ‘그래도’ 전통은 방학숙제처럼 마냥 미뤄둘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현대 조경 공간에 전통을 도입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대상지 전체가 아예 조성의 목적을 전통 정원의 재현에 두고 있는 경우다. 희원이나 해외에 조성되고 있는 한국 전통 정원이 이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전체 대상지 중 타 공간과 확연히 구분되는 특정 공간만을 전통 정원으로 꾸미는 경우다. 여의도공원 내의 한국전통의 숲, 일산호수공원 내의 전통 정원, 경주 안압지의 축조 양식을 도입한 분당 중앙공원 내의 분당호 주변 등이 그 예가 된다. 마지막으로는 특별한 공간 분할 장치 없이 타 공간과 혼재된 곳에 전통 조경의 일부 요소가 도입된 경우다. 선유도공원의 선유정을 비롯, 무수히 많은 사례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진부한 여전한 답답한, 전통”이란 제목으로 썼던 글2의 앞부분이다. 공원이나 아파트 외부 공간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던 ‘전통 코스프레’ 공간을 보며 느꼈던 답답함이 글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이번 호에 실린 두 곳의 전통 정원은 그와는 거리가 멀다. 타슈켄트 서울공원은 말할 것도 없고, 율수원 역시 본격적인 전통 양식의 한옥 정원을 목표로 했다. 단, 율수원은 생활 공간으로서의 현대 한옥 정원에 초점을 맞추었다.
안계동 대표(동심원조경)를 인터뷰하기에 앞서, ‘정원 문화 심포지엄’에서 율수원 소개를 접했다. 처음에는 어디서 본 듯한 전통 요소의 짜깁기 공간인가 싶었다. 사진 속에는 일본풍이 아닌가 싶은 공간도 보였다. 그런데 ‘생활과 이용’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면서 흥미가 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전통 양식의 공간을 접할 때마다, 왜 ‘문화재, 보전, 복원, 재현, 계승, 교육, 볼거리, 장식적 공간’ 따위만을 떠올렸을까? 그러고 보니 전통 양식의 정원이 실제 이용하기에는 어떠한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용을 전제로 새로 만들어진 개인 한옥 정원을 접한 것도 율수원이 처음이었다. 몇 년 사이 한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제법 뜨거워졌는데도 말이다.
율수원의 경우, 사모정과 방지가 있는 후정 부분에 일본풍의 첨경물이 놓여 있고, 잔디밭 주변에는 제법 화려한 초화류도 심겨 있다. 가든 파티를 할 수 있는 평상도 있다. 일본풍 첨경물은 공사가 모두 끝난 후 안주인이 설치한 것이고, 잔디밭이나 평상은 정원으로서의 이용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목욕채 뒤뜰에는 포장재로 맷돌도 깔려있다. 엄격한 전통 양식과는 거리가 먼 부분이다.
반면, 후정의 연못은 클라이언트의 희망에 따라 서석지를 적극적으로 참고해서, 연못의 깊이와 돌 쌓는 방식, 돌의 크기 등을 결정했다. 원래 연못 주변에 안전을 고려해서 녹지대를 두르는 방안을 검토했는데, 최종적으로 녹지대를 없애고 흙 마당에서 돌경계가 곧바로 맞닿는 전통 양식을 따랐다. 식물 수종을 비롯해서, 공간 구성까지 전통 양식을 기본적으로 따르되 현대적 쓰임을 고려해서 약간의 변형을 가한 것이다.
“이곳과 똑같은 모습의 한옥 정원은 어디에도 없다.” 안계동 대표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어디서 본 듯한 전통 요소들의 집합장이 아닌가 했던 의심이, 실은 나의 답답한 고정관념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사토 마당과 사모정, 방지, 원도, 화계가 있다고 해서, 즉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가 같다고 해서 공간이 같은 것은 당연히 아닐 테니 말이다. 전통을 꼭 재현이나 계승의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한옥의 장점을 취하려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는 것처럼, 현대적인 한옥 정원의 매력을 탐구하는 노력도 필요해 보인다. 만약 지금 전통을 열쇳말로 글을 쓴다면, ‘지금 여기의 한옥’도 한 챕터 정도는 포함되지 않을까. 이용을 전제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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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스케이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낯선 강박과 가짜가 주는 황홀한 미적 체험
오래전에 본 웨스 앤더슨Wes Anderson 감독의 ‘로얄 테넌바움The Royal Tenenbaums’은 내 취향의 영화가 아니었다. 빨간 추리닝을 단체로 입은 이상한 가족과 욕실에서 생활하는 은둔형 캐릭터로 짙은 아이라인을 한 기네스 펠트로 정도만 기억에 남았다. 기이한 강박이 낯설었다. 작년에 ‘문라이즈 킹덤Moonrise Kingdom’을 본 후 같은 감독의 전작들을 찾아보고 나서야 드디어 그의 독특한 스타일이 주는 낯섦을 즐기게 되었다. 올해 개봉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The Grand Budapest Hotel’은 매력적인 시공간, 이야기구조, 상상을 초월한 캐스팅과 함께 그가 줄곧 추구해온 독특한 형식미가 극대화된 영화다. 한때 번성했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소유하게 된 벨 보이의 모험담을 그리고 있는데,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이야기 전개보다 형식적인 면에 더 집중한다는 점이다. 가상의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모험담은 다소 허술하고 황당하기까지 하지만,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공간의 구조·형태·색감, 공간을 보는 방식, 이야기와 공간의 관계는 매우 정교하다. 인공적인 호텔의 내·외부 모습과는 달리 배경도시의 경관은 극사실적이다. 촬영지인 독일 동부의 드레스덴Dresden과 괴를리츠Görlitz는 중세의 건물이나 고풍스러운 골목길이 그대로 남아 있는 도시여서 영화 속 배경인 1930년대의 분위기가 생생히 전달된다.
영화 속 공간의 매력 포인트는 자로 정확히 잰 듯한 질서와 공간에 대한 강박이다. 인물은 항상 정중앙에 있거나 양쪽으로 정확히 대비되어 배치되고 그 가운데 그림이나 창문, 그것도 아니면 아무 의미 없는 사람이라도 세워놓고 좌우 대칭 구조를 만들고 있다. 엘리베이터, 화장실이 없는 작은 옥탑방, 케이블카, 교도소, 호텔 스태프룸, 기차 객실, 공중전화 박스처럼 폐쇄감을 주는 작은 공간이 자주 등장한다. 사건을 해결하는 중요한 소품 중 하나도 정육면체의 상자다. 리본을 풀면 단숨에 해체되는 분홍색 케이크 상자는 마치 공간을 축소한 모형 같이 보인다(호텔의 외장도 같은 분홍색이다). 시간 속의 시간, 공간 속의 공간 개념은 영화 후반부에 주인공들이 크고 작은 케이크 상자들이 쌓인 작은 트럭 안으로 떨어지며 다시 반복된다. 이러한 질서와 강박이 주는 형식미는 자칫 무거울 수 있는데, 빠른 카메라 움직임, 경쾌한 음악, 반복적인 사선의 움직임, 화려한 색감, 유쾌한 회화적 은유 등으로 그 무게를 덜어낸다.
주인공이 집착하는 과다한 향수, 와인, 나이든 여자에 대한 취향과 시도 때도 없이 시를 낭독하는 모습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제복에 대한 애정 역시 두드러지는데, 호텔 제복, 죄수복, 사제복, 군복, 킬러복(누가봐도 킬러스러운 복장과 표정)으로 집단과 소속을 표현한다. 그러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은 대체로 엉뚱하고 우스워서 제복이라는 틀을 스스로 조롱하는 것처럼 보인다.
‘설국열차’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틸다 스윈튼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분장으로 짧은 출연이지만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런 소소하고 세밀한 디테일들이 전체적인 형식미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고, 한겨레 영화평론 전문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전공으로삼아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지만, 극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그것이 주는 감동과 함께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텍스트라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