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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앤디 카오 카오 페로 스튜디오 공동설립자
    조경가로 출발해 조경이라는 틀을 던져버린 앤디 카오(실제 발음은 ‘고우’라고 한다)의 작품을 읽다 보면 전위적이라는 수식어조차 보수적으로 들린다. 그에게 ‘조경’과 ‘조경가’란 애초부터 통상적 이미지에서 훨씬 벗어나 있다. 공간 디자인과 설치 예술의 경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그는, 3천5백 명이 참석하는 아랍 왕족의 호화로운 결혼식장Royal Wedding, Dubai을 디자인하는가 하면, 오스트리아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 월드Swarovski Kristallwelten의 확장을 기획하고, 디자인 브랜드 겐조Kenzo의 파리 본사 중정에 클라우드 샹들리에를 설치하기도 한다. 언뜻 보면 부유층과 상류 문화에 가까이 닿아있는 디자이너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의 작업은 소박한 자신의 집 뒤뜰에서 시작되었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느낀 것은, 그는 무차별적 대중과 사회에 작가의 메시지를 던지기보다, 작품과 그 앞에선 관람자 개인 간의 매우 사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는 점이었다. 큰 규모의 공적 공간이든 작은 정원의 한편이든 간에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앤디카오의 작품을 관통하는 분위기와 정서는 매우 일관되다. 내면적이고 섬세하며, 마스터플랜을 거부하며 예기치 못한 사고incidental placemaking로서의 작업이자 감정이 주를 이루는 과정이다. 비록 그것이 오래도록 남지 못하더라도, 그에게 소중한 것은 바로 이 순간, 현재의 감정이다. 의심할 바 없이 그는 매우 부드럽고 애틋한 성격을 가진 작가다. “나는 가장 최근 작업을 가장 사랑한다. 작업 과정을 통해서 작품과 하나가 되는 만큼, 우리는 작품과 이별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하나의 일이 끝나면 작품은 더 이상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여행의 추억이 남을 뿐이다All we have is the journey.” 칼 폴리 포모나 대학교Cal Poly Pomona 조경학과를 졸업했으나, 두 해 동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고생했던 카오는 책상에 앉아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만들거나 수십 통의 입사 원서를 쓰는 대신, 팔을 걷어붙이고 뒷마당 빈 공간에 첫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회상한다. “나는 기존의 조경 설계 공식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왜 꼭 형태가 있어야 하지? 왜 주위에 널려있는 일상적인 소재들을 쓰면 안 되는 거지” 이민자인 카오에게 있어 베트남은 언제나 추억의 대상이었으며, 이국 땅 낯선 문화의 삶이 힘들어질 때마다 고향에 대한 동경이 더욱 짙어졌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어린 시절을 보낸 바닷가 거대한 염전의 소금밭과 물결치는 언덕, 장대같은 비를 뿌리던 검은 구름을 잊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던 그는, 주위에서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던 재활용 유리 조각recycled glass pebbles을 쏟아 부으며 마음속 고향이 눈앞에 재현되길 바랐다. 유리 조각은 염전 풍경을 작은 모형으로 묘사하기에 더없이 좋은 재료였다고 한다. 멋모르고 시작한 프로젝트에 카오는 미친 듯이 빠져들기 시작했고, 몇 주면 끝날 줄 알았던 유리 조각 정원glass garden에 3년을 보냈다. 뚜렷한 청사진이나 계획에 근거한 작업이 아니었기에 즉흥적이고 미완성의 아마추어적인 인상을 풍기지만, 이 정원은 카오의 미래를 바꾸어놓았다. ‘이것도 조경인가’ 아니면 ‘단순히 한 젊은이의 장난스럽고 치기 어린 자기표현인가’라고 쉽게 의문을 던질 수 있고, ‘표현 방식이 어쩔 수 없는 1990년대의 시대적 유행을 반영했다’고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남들의 해석이 어떠하든 카오는 자신의 내면이 외치는 소리에 솔직히 반응했고, 자기만의 만족과 충족감을 위해 DIYDo It Yourself 가든을 밀어붙였다. 카오는 “무스토리no story, 무형태no form, 무논리no need to make sense”를 말한다. 이해의 공백을 채우는 것은 그의 탁월한 감각과 완벽함에 대한 집념 그리고 어려운 순간을 즐길 수 있는 끈기다. 그에게 디자인과 작업이란 ‘그냥 노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한 청년의 방황기를 대변하는 글라스 가든은 갑자기 유명해졌다.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하고 기묘한 감정을 자극하며, 아방가르드 가든의 대표적 검색어가 된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나의 작업은 아티스틱한 것이지 과학적인 것이 아니다. 애초 그렸던 디자인에 크게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작업 과정에서 실수란 없으며, 단지 새로운 발견일 뿐이다There are no mistakes to be made, only new discoveries.” 그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하는지 미리 알았다면 어떤 것도 해낼 수 없었을 것이며, 때로는 알지 못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또한 작금의 많은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디자인을 설명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는지에 대해 탄식한다. 그러기에 그는 리서치를 최소화하고, 시행착오 과정을 통해 배우려 한다. 그리고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배우는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즉각적인 느낌으로 반응하길 원한다. 그는 배우는 것보다 쓸데 없는 배움을 잊어버리는 과정이 더 값지다고 말한다. 그의 작품은 매우 노동 집약적이다. 동시에 장인의 치밀함이 배어 있으며, 기계에 대한 의존이 최소화된 로우 테크low-tech다. 또한 일상적 소재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다. 그는 유행하는 소재를 쓰거나 다른 작가를 참조하는 것을 거부한다. 인터넷을 통해 지구 저 편의 새로운 발견이 실시간으로 복제되어 다른 쪽에서 재생산되고 유행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가 소재를 쓰는 방식의 독특함조차 복제될 수는 없다. “소재 자체는 완벽할 수 없다. 모든 것은 나름의 결점과 불완전한 성질을 지닌다. 그러나 하나의 결점은 곧 미인점beauty mark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글자 그대로 ‘픽처-퍼펙트picture-perfect(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한 풍경이다. 곧잘 대중의 접근이 제한된 곳을 대상지로 하기 때문에 삶의 현실과 유리되어 보이기도 한다. 그의 공간은 마치 한 편의 꿈처럼 곧 부서질 듯이 연약해 보인다. 그래서 더욱 명품 이미지와닮아있고, 때로 가슴 찡한 감동을 준다. 그래서인지 그에 대한 평가는 사뭇 극단적이다. 한쪽에서는 틀을 깨는 아티스트로 그려지지만 다른 쪽에선 무의미한 장식적 소모일 뿐이라 한다. 그러나 그는 예술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데 관심 없다. 스스로 말하듯 그의 작업은 자기만의 ‘꿈’에 대해 대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 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 전시해 왔다.
    • 최이규 /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지소장
  • [공간 공감] 네 번째 공간 탐색, 대학로
    좀 이르다 싶게 찾아온 봄날, 대학로를 찾았다. 그동안 비교적 작은 공간을 대상으로 설계 탐구와 토론을 이어왔는데, 이번에는 특정 장소를 정하지 않고 대학로 일대를 거닐면서 만나는 공간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는 방식으로 분위기를 바꿔보았다. 대학로에 대한 도시인문적 담론을 생산하기보다는 이 연재가 지향하는 설계 어휘의 확장과 연마를 염두에 두었고, 동네 혹은 도시 공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드러나기를 기대하였다. 과거 서울대학교 캠퍼스라는 역사성과 공연 문화의 확산을 반영한 ‘대학로’ 지정, 그리고 현재의 상업화·키치화라는 지역의 변천사도 흥미롭지만, 대학로는 건축, 도시설계, 조경 분야의 설계 대상이자 설계인들의 일터로도 사랑받는 곳이어서 특별히 애정이 가는 동네이기도 하다. 필자 역시 20년 전 첫 직장의 기억이 떠오르는 곳이다. 우리는 마로니에공원에서 만나 이야기와 걸음을 시작하였다. 지금은 다소 희석되었지만 여전히 김수근의 건축은 대학로의 랜드마크이자 디자인 가이드라인이다. 국적 불명의 상업 건물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대학로가 일반적인 유흥 가로와 다른 격을 갖는 이유는 이 같은 진지한 건축들이 포진하고 있어서 일 것이다. 마로니에공원은 김수근의 건축을 병풍 삼아 거대한 칠엽수와 은행나무들의 품 아래에서 도시인들의 자유로운 흐름과 머무름을 부양하고 있었다. 박승진 소장이 들려준 마로니에공원 재조성의 뒷이야기와 고 이종호 교수에 대한 안타까움이 교차되면서 자리를 떠나 걸음을 옮기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마로니에공원에서 동숭아트센터로 가는 길에 새로 지어진 커피빈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새롭지는 않지만 최근 스타일로 깔끔하게 지어졌다. 과거 대학로 건축물의 주재료였던 붉은 벽돌은 아니지만 목재와 유리 그리고 개비언으로 이루어진 평균 수준 이상의 건축이다. 조경가의 입장에서 나무를 잘 심어서 이 건축이 돋보인다고 말하면 자칫 편협한 의견으로 치부될 수 있겠지만, 두 그루의 거대한 배롱나무는 확실히 이 건축물로 시선을 이끌고 있다. 이것저것 다양하게 심는 방식보다 제대로 된 나무 한 그루가 효과적일 수도 있는 법이다. 작품과 키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대학로의 다양한 층위의 건축물 가운데 뮤지컬 센터는 우리를 실소하게 만드는 입면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곳의 건축물 중 가장 큰 덩치를 갖고 있으면서 한쪽면을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 노출 콘크리트로 ‘처리’해버린 것이다. 노출 콘크리트는 대학로에서 벽돌 다음으로 애용된 재료다. 하지만 수준 떨어지는 배합에서나오는 밋밋한 질감은, 더군다나 우악스런 넓은 입면은, 골목길을 통해 보이는 도시 경관의 격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래도 잠재력은 남아 있었으니, 얼마 남지 않은 월드컵 응원 때 스크린으로 활용하기에 제격이라는 아이디어에 크게 웃으며 지나칠 수 있었다. 정욱주는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하였다. 글쓴이 외에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랜드스케이프 디자인 스튜디오 knl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였고, 새로운 대상지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 장소의 혼
    제주는 천혜의 경관을 자랑한다. 제주의 가장 큰 매력은 훼손되지 않은 천연의 자연 환경 속에 순응하는 도시의 모습이다. 원시적인 자연도 아니고, 인공물이 자연을 압도하는 도시도 아니다. 시내에서 돌담과 각양각색의 나무와 꽃을 쉽게 볼 수 있고, 조금만 벗어나면 바다와 만날 수 있다. 한라산은 다양한 식생 분포를 이루어 생태계의 보고로 손꼽히며, 어느 마을을 가도 한라산이 배경을 이루어 빼어난 경관을 연출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제주는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고 테마파크 또한 무수히 많지만, 정작 공원은 많지 않다. 기존의 녹지 체계 안에서 약간의 시설물이 추가된 형태를 보이는 것이 대부분이다. 사실상 제대로 설계가 이루어진 근린공원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환경 속에 대규모 공원이 조성되어 눈길을 끈다. 제주서귀포혁신도시 내에 자리한 근린공원 “ 름모루”가 지난 해 공사를 마치고 모습을 드러냈다. 지우고 다시 그리기 “바름모루”는 제주서귀포 혁신도시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공원으로, 대상지는 1132번 국도와 1136번 국도 사이에 자리한 경사지에 위치하고 있다. 1136번 국도와 고근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종점부에 범섬이 떠 있는 해안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 름모루”는 여기에 어우러져 시야를 방해하지 않고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굴곡 없이 북-남으로 경사가 이어지기 때문인데, 경관을 조망하는 요점에는 시야가 막히지 않도록 한 설계 의도가 배어 있기도 하다. 이곳의 옛 터는 경관으로서는 무심의 대상이었다. 경관의 요점부도 아니고, 이동의 목적지도 아니기 때문이다. 감귤밭은 제주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기도 하거니와 제주도민들에겐 노동의 공간이기에 감흥을 느끼기 어렵다. 현재 “ 름모루”는 공원으로서 기존과는 다른 모습으로 공간의 매력을 어필하고 있는데, 원래 모습을 완전히 털어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한 건 아니다. 대상지가 가지고 있던 모습을 입체화해 그 가치를 극대화함으로써 제주도민들에게 익숙한 모습을 친근하면서도 새롭게 보이도록 설계했다. 설계의 핵심은 ‘제주다운 공원’의 구현이다. 대상지가 가진 제주라는 경관적인 강점을 더 드러내 보이는 게 설계의 주안점이었다. ‘~답다’는 공간이 그 역할을 다 하고 본연의 특성을 보일 때 느낄 수 있다. 제주의 정체성이 공원에서 뚜렷하게 드러나야 인정할 만한 ‘제주다움’이 표현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장소성 파악이 필요하다.1 그런데 설계공모가 시행되던 당시부터 장소성 파악은 난관에 부딪쳤다. 기존의 등고선이 깨끗하게 지워진 땅만 남았기 때문이다. 공원에 대한 설계가 이루어지기 전 공정에서 장소의 본 모습과 기억은 자취를 감추었다. 결국 공원 설계는 도면에서 사라진 등고선을 되찾는 데 가장 공을 들이게 되었다. 조경 설계는 “원 지형도를 베끼는 작업부터 설계가 시작”2되었고, 땅의 모습을 살려 길을 내고 공간을 만들었다. 이곳에서의 조경 작업은 원래 모습의 회귀였던 것일까? 물론 “ 름모루”의 설계 과정이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기 위한 작업이었던 건 아니다. 대상지 조사를 통해, 지워진 ‘제주다운’ 요소를 필요에 의해 부분적으로 되살린 것이다. 땅의 기억을 더듬어 본 설계자들은 대상지를 다공질 경관, 생산적 경관, 서사적 경관의 세 가지 관점으로 받아들였다. 돌과 바람 그리고 여자가 많아 삼다도三多島라 불리는 제주의 대표 요소 중 돌의 물리적 특성과 제주의 특산 작물인 감귤이 자아내는 경관적 특성, 설문대할망이라는 제주의 설화를 바탕으로 공원 설계의 방향을 잡아 ‘제주다움’을 표현했다. 장소의 혼과 대화 장소성이 희석되었을 때 그 상태를 지속할지 아니면 복원할지가 쟁점이 되는데, 이때 설계자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과학 기술이 집적된 고층 빌딩 숲과 개인이 구분되지 않는 단지화 된 아파트 등에서는 장소성을 느끼기 어려운 반면, 수려한 경관 속에 자리하고 신화적 이야기가 가득한 제주와 같은 환경에서는 비교적 장소성이 드러나기 쉽다. 이에 “바름모루”는 ‘제주다움’의 구현을 위해 지역성의 재현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지역마다 설화나 전설이 있듯이 제주에도 전해지는 설화가 많다. 한국에 속한 땅이지만 바다 건너 육지와 멀리 자리한 섬이기 때문인지 신비감이 서려 있고, 제주의 경관과 연관 지어 설명되는 설화이기에 구체적이고 신빙성이 느껴진다. 제주에는 한라산을 베개 삼고 누울 정도로 크고 힘이 센 설문대할망이 있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설화에 따르면 이 할망은 제주 백성들에게 100동의 명주로 속옷을 만들어 주면 육지와 연결되는 다리를 놓아주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설문대할망이 워낙 커서 제주의 명주를 다 모아도 1동이 모자라 속옷을 짓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최근까지 제주는 육지와 고립되었다고 설화는 설명하고 있다.
  • 호랑이, 햇빛, 또는 공기: 서울이라는 생태계 속 DDP
    “개별 생명체들이 주변 환경에서 주어지는 여러 가지 특별한 기회를 늘 활용하는 것처럼, 생태계 또한 우리가 부분적인 지식만으로는 결코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부분은 오직 전체 맥락 안에서만 특수화된 역할을 맡는다.” - 어니스트 칼렌바크 저, 노태복 역, 『생태학 개념어 사전』, 에코리브르, 2009. 200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정치적·문화적 논란의 중심에 있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지난 3월 21일 개관했다. DDP는 규모의 측면에서 보면 1993년 전관을 개관한 예술의전당 이후 서울에 건립된 최대 규모의 복합 문화 공간이다. (1980년대 추진된 예술의전당은 당시 아시아 최대 규모 아트센터(복합 예술 공간)로 계획되었다.) 2004년 참여정부가 추진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광주광역시 소재)의 개관이 늦어지면서 DDP는 21세기 최초, 최대 규모의 복합 문화 공간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게 되었고 그만큼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예술의전당, 국립아시아문화전당, DDP 등 대형 문화 프로젝트는 플래그십flagship 프로젝트 또는 아이콘 프로젝트라고 불린다. 플래그십 또는 아이콘 프로젝트는 대개 격렬한 논란을 유발하며 논쟁이 벌어지지만 논의의 접점을 잡기도 쉽지 않다. 도시계획적 측면, 역사적 측면, 문화적 측면, 산업적 측면, 지역공동체적 측면 등 복잡하고 복합적인 맥락이 가로지르기 때문이다. DDP 역시 이를 피해갈 수 없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다만 개관 시점에서 우리는 어떠한 시각에서 이 거대 문화 공간의 현재와 미래를 들여다보고 예측해야 하는지 말해야 할 때가 되었다. 지금까지 DDP에 대해 많은 이들이 비평적 측면에서 여러 각도의 유의미한 의견을 피력하고 있지만, 필자는 서울의 문화·산업 생태계에서 더 나은 역할을 하는 공간으로 성장하기 위해 당부하는 관점에서 글을 쓰고자 한다. DDP, 새 가치 창출의 중재자가 되자 서울 시장이 초기 DDP 건립을 주도했던 오세훈 시장에서 박원순 시장으로 바뀌면서 DDP의 비전은 ‘세계 디자인의 메카’에서 ‘디자인 창조 산업의 발신지’로 궤도를 수정했다. 허울뿐인 비전이라 불릴 수 있지만, 비전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공유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디자인에서 창조 산업으로의 확장은 주목할 만한 변화다. DDP라는 그릇이 담고자 하는 창조 산업의 범위는 매우 넓다. 창조 산업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영국에서는 ‘개인의 창의성, 기술, 재능 등에 기원을 두고, 지적재산권의 발생 및 활용을 통해서 부와 일자리를 창출하는 활동’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크게 13가지 산업, 즉 광고, 건축 설계, 미술품과 골동품, 수공예, 디자인, 영화, 쌍방향 소프트웨어, 음반, 공연 예술, 출판,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을 포함하고 있다. 창조산업의 정의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창의성creativity’, ‘기술technology’, ‘재능talent’을 가치 창출의 원천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DDP가 ‘디자인 창조 산업의 발신지’가 되기 위해서는 동대문, 서울, 아시아, 세계의 ‘창의성’, ‘기술’, ‘재능’이 모이는 장소(DDP에서는 이를 ‘터’라는 말로 부른다)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쟁점은 ‘창의성, 기술, 재능을 어떻게 모이게 할 것인가’이며 나아가 ‘이들이 결집하는 모멘텀momentum은 어떻게 형성되고 작동하는가’이다. DDP가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전시를 기획하고 유치하면 발현되는가, DDP가 한국 디자인의 원형을 전시하고 해설하면 실현될 수 있을까. 아직 정확한 해답은 없지만, 찾아야 하는 숙제다. 도시 문화적 관점에서 문화 공간은 중재자에 가깝다. 창의적인 사람들이 모이고 작품을 선보이고 이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모인다. 이를 중재하는 곳이 문화 공간이다. 고전적으로 공연장, 박물관이 이러한 역할을 해왔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3세대 문화 공간에서 중요한 지점은 예술가(작품)를 관객과 만나게 하는 중재적 역할(마케팅)을 넘어서, 창의적인 예술가들의 관계를 형성하게 하고 창의적인 관객들의 관계적 참여를 이끄는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DDP를 통해 창의적인 디자이너, 예술가, 기획자들이 어떻게 상호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을 통해 창의적 구상을 펼치게 될 것인가. 스스로 창의성을 발현하는 장소가 되는 것, DDP가 주목할 지점의 하나다. 최도인은 메타기획컨설팅에서 예술 경영, 문화 공간, 도시 문화 전략 등의 컨설팅을 총괄해 왔다. 대표적인 프로젝트로는 서울시립교향악단, 통영국제음악당, 아시아예술극장, DDP 운영 체계 컨설팅 등이 있다. 창조 도시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찰스 랜드리(Charles Landry)의 저서 『크리에이티브 시티 메이킹』 한국어판을 기획·감수했다. 서울공연예술센터 국제심포지엄, 타이완 타이베이현 창조도시 국제심포지엄과 러시아연방 브리야트 바이칼포럼 등에 초청받아 기조 발제를 하였다. 2011년부터 북방아시아 예술가와 기획자들의 창작 협력 프로젝트인 유목창작여행(Nomadic Artists’Journey)의 프로젝트 디렉터를 맡고 있다.
  • DDP, 별것 (별 물건도, 별 문제도) 아닐 수 있다
    줌아웃 해야 하는 DDP와 줌인 해야 하는 동대문 경관 많은 사람들이 비판하듯이 DDP가 불시착한 우주선 형태인지 아니면 설계가의 말처럼 자연 경관의 곡선과 같이 아름다움과 안정감을 주는 선형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주변 높은 건물에서 내려다 봐야 알 수 있다. 형태가 서로 다르다는 알루미늄 패널 45,133장은 한 장 한 장 그 자체로는 시각적으로 중요하지않다. 전체 형태는 대칭이나 일정한 비율이 없는 비정형이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면서 봐야 곡면이 어떻게 흘러가는지가 보인다. 줌아웃 하면서 봐야 한다. 많은 이들이 DDP가 동대문의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평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변이 확 뚫린, 그러니까 충분히 줌아웃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곳에 들어섰다면 건축물이 더 돋보였을 것이다. 반면 동대문 일대(이하 동대문)는 줌인 하며 봐야 실체가 드러난다. 터치스크린을 통해서 본다면 두 손가락을 벌리며 들여다봐야 한다. 멀리서는 흥인지문이라는 랜드마크와 선형의 청계천, 규칙 없이 서 있는 대규모 상가 건물들, 혼잡한 도로와 이리저리 얽힌 뒷골목만이 보일 뿐이다. 줌인 상태에서 화면을 좌우상하 밀치며 보면 청계천변으로 상가들이 서 있는 이유가 궁금해지고 밀리오레나 두타 쇼핑몰 주변은 외국인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대형버스로 북적거리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일상가 일대에서는 오토바이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드는 모습을, 신발도매상가 골목에서는 지게꾼들이 짐을 옮기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양고기집, 인도 카레집, 홍어국수집, 콩나물국밥집, 양고기집까지 음식점도 다양하다. 좀 더 줌인 하면 속옷, 겉옷, 의류 관련 각종 부자재, 신발, 스포츠용품뿐만 아니라 조류, 어류, 파충류까지 판매 대상임을 볼 수 있다. 동대문은 공간만 복잡한 게 아니라 시간도 복잡하다. 상가가 여는 시간도,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간도 다르다. 통일상가를 줌인 해보자. 의료 관련 부자재를 파는 이 상가는 겉보기에는 서로 다른 건물이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마치 하나의 건물처럼 연결되어 있다. 주변에 새로 생기는 대규모 상가 건물에 대응하기 위해 단층이던 건물의 층을 높였고 어느 순간 벽을 터 30여개의 건물을 하나의 건물처럼 만들었다. 그 안에 들어가면 무언가 함정에 빠진 듯하다. 마치 피라네시가 그린 “상상의 감옥” 같다. 층별 높이가 서로 다른 건축물이 하나로 연결되다 보니 분명 상가 건물 위층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계단인데 내려가는 계단이다. 그래서 뭔가 아니다 싶어 돌아서면 길을 잃게 된다. 복잡하지만 설명하자면 그 내려가는 계단은 높이가 서로 다른 두 건물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일 뿐이고 그 계단을 통해 옆 건물로 가야만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을 수 있다. 이해들 되셨는지? 손가락을 왼쪽으로 밀어 신발도매상가 B동으로 가보자. 원래 7층으로 계획했으나 7층에서 동대문운동장의 로열석이 내려다보일 수 있어 계획을 변경해 5층으로 지었다고 한다. 축구장을 자주 찾았던 VIP가 저격당할 수 있어 미리 예방한 것이다. 3층까지는 상가고 4층과 5층은 주택이다. 옥상 한쪽에는 연탄재를 쌓아 만든 화단이 있고 그 위에는 배나무며 박태기나무, 소나무가 심겨 있다. 화단 옆으로는 플라스틱 호스로 만들어진 아치도 서있다. 아래층 사람들이 이사 나가면서 옥상에 버리고 간 냉장고나 세탁기는 솜씨 좋은 건물 관리소장의 손을 거쳐 화분이 되었다. 건물로 올라가는 계단의 창은 값 비싼 유리 대신 콘크리트 블록으로 채워져 있는데 블록 사이를 통해 쏟아지는 빛은 일품이다. 그렇게 동대문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 경관과 달리 산업 생태계는 줌인 해도 알 수 없다. 스스로 몸을 부딪쳐 봐야생태계 사슬의 구조를 어림짐작이라도 할 수 있다.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작가 정원에 놓을 방석을 동대문에서 직접 만들었다. 동대문 종합상가 3층에서 을 끊어 동화상가 재봉 집에 맡겼더니 방석이 완성되었고 방석 안에 넣을 솜은 다시 종합상가 지하에서 구입했다. 좀 번거롭지만 물어물어 그 안에서 많은 일을 해결할 수 있다. 상당히 유기적이다. 김연금은 조경작업소 울을 운영하고 있으며, 커뮤니티 디자인 센터의 일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커뮤니티 디자인, 마을만들기를 일과 활동의 중심으로 삼고 있고, 최근에는 스토리텔링과 조경 디자인, 경관의 사회적 구성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하고 있다. 박사 학위 논문을 발전시킨 『소통으로 장소 만들기』(한국학술정보, 2009), 일상의 경관에서 이루어지는 거시적 구조와 미시적 요소의 상호 관계를 관찰하고 기록한 『우연한 풍경은 없다』(나무도시, 2011) 등의 저서가 있다.
  • [칼럼] 서울, 경계 긋기와 경계 허물기
    강변도로를 달리면서 혹은 고층 건물에서 서울 시내를 바라보면 나 자신이 서울이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기계 속의 작은 부품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천만이라는 많은 인구가 먹고 자고 일하고 노는 데 큰 불편 없이 작동되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과 더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서울은 진정 아무 문제도 없는 도시인가 서울의 사대문 안은 600년의 역사를 지녔으며, 강남으로 확장된 현재의 서울시는 백제 시대부터 계산하면 2,000년의 역사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서울은 짧게는 600년 동안, 길게는 2,000년 동안 진화해온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진화의 과정 중에서도 한국 전쟁 후 부터 현재까지의 60년은 그 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급속한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태에서 세계 도시로 발돋움한 오늘의 서울로 성장하기까지 와우시민아파트 붕괴, 재개발로 인한 철거민 이주,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붕괴, 남산외인아파트 철거 등 많은 시행착오와 아픔이 있었으나, 이러한 성장통이 있었기에 오늘의 서울이 가능했다. 서울의 변화는 대략 2000년을 기점으로 그 전후의 성격이 달라진다. 즉 1990년대까지는 대규모개발 위주의 과격한 변화가 주를 이룬 ‘경계 긋기’ 작업이었다면, 21세기에 접어들면서는 시민의 눈높이에 맞춘 친환경적, 친문화적, 친보행적 개발이 대세를 이룬 ‘경계 허물기’ 작업이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개발 방향의 전환은 뉴 어바니즘으로 불리는 보행자 중심의 서구 도시 개발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지만,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행된 지방자치제와 지자체장 직선제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표를 의식한 시민 중심의도시 행정이 전국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시민의 피부에 와 닿고 가시적 효과가 큰환경, 교통, 경관, 문화, 복지 등이 도시 행정의 키워드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도시계획의 근간이 되는 토지이용계획은 대표적인 경계 긋기라 할 수 있다. 2000년 이전까지는 지구 생태계의 일부인 토지에 주로 경제적, 기능적 관점에서 상업지역, 공업지역, 주거지역, 녹지지역 등 평면적, 기하학적 경계를 만들고 분리시켜 생태계를 파괴하는 무리한 개발을 관행으로 일삼아왔다. 이러한 무모한 개발을 제어하는 수단으로 등장한 그린벨트 역시 또 하나의 경계 긋기에 지나지 않았다. 1971년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의 대규모 도시 외곽에 그린벨트(도시개발제한구역)가 지정되었는데, 경계선 안과 밖의 차별적 행위제한에 따른 그린벨트 내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그린벨트 해제를 선거 공약으로 내세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2001년 제주도 그린벨트의 전면적 해제를 시작으로 수도권에서도 부분적 해제가 이루어져 개발과 보존의 부자연스러운 구역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초의 한강 개발은 수로를 정비하고 둔치를 조성하여 일면 정돈된 강변 경관을 만들었으나, 이 역시 또 하나의 경계 긋기가 되고 말았다. 모든 제방이 직선형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자연 하천의 모습은 사라지고 물 흐르는 곳과 흐르지 않는 곳을 직선적으로 경계 짓고 말았다. 이러한 비생태적 경계 긋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는 2000년대에 들어 활발하게 진행되는데, 콘크리트의 경직된 경계를 허물고 유연한 자연형 하천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한강공원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1980, 90년대의 주택지 재개발과 재건축은 저층주거지 한가운데에 고층의 나 홀로 아파트를 만들어 기존 주거지와의 물리적·사회적 경계를 만들고 말았다. 기존 도시 조직의 붕괴와 원주민의 낮은 재입주율 등의 부작용이 초래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주민 주도의 ‘도시 재생’ 개념을 도입하여 대규모의 택지 개발보다는 중소규모의 현지 개량 혹은 정비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경계 긋기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서울은 2000년 넘는 역사의 층위가 공존하고 있는 박물관 같은 도시이기도 하다. 강동의 암사동에서는 원시 시대 주거지가 발굴되었으며, 한성백제 시대의 몽촌토성, 조선 시대의 왕궁, 도성, 정자 등 많은 역사적 유물을 볼 수 있다. 또한 서울은 전후 폐허에서 시작해 짧은 기간 동안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하여 한옥부터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거 양식이 부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는 도시다. 따라서 서울은 서로 다른 시기를 대표하는 지역 간의 시간적 경계를 유기적으로 연결함으로써 역사성과 조화성이 충만한 도시로 발전해야 한다. 최근 들어 도시 개발과 성장의 그늘에서 만들어진 사회 계층 간의 경계를 허물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면서 환경 복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많은 도시 가운데 특히 서울은 양극화가 두드러지고 계층 간의 경계가 매우 두껍다고 할 수 있는데, 소외 계층이 평등하게 도시 환경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시도되고 있다. 저소득층 주택과 골목의 개량, 보행 약자를 위한 시설 개선, 노인과 어린이를 위한 복지 시설의 건립 등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모두 계층 간의 경계를 허무는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서울은 개발과 성장 과정에서 수많은 공간적, 시간적, 사회적 경계를 만들어왔는데, 21세기 들어오면서 이들 경계를 해체하려는 작업이 여러 측면에서 시도되고 있음은 다행이다. 이러한 시도가 성공해야 서울은 진정한 세계 일등 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이 이러한 경계 허물기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는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아직도 만연해 있는 경제성 중심의 개발 행태, 전시성 생색내기 행정, 집단이기주의와 개인주의는 시민 모두가 함께 행복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다. 주민, 전문가, 행정가 등 사회 구성원 모두가 뜻을 모아 장기적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힘을 모아 흔들림 없이 실천할 수 있어야 비로소 경계 허물기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임승빈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를, 버지니아 공과대학교에서 환경설계계획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런던대학교에서 박사 후 연구를 하였고,하버드 대학교에서 객원 교수를 역임하였다. 저서로 『환경심리와인간행태』, 『경관분석론』, 『조경이 만드는 도시』, 『도시경관계획론』 등이 있으며, 한국조경학회, 한국농촌계획학회, 한국경관협의회, 한국인공지반녹화협회의 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며, 환경조경나눔연구원 원장을 맡아 조경을 통한녹색환경복지의 평등한 구현과 그린유토피아 건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 임승빈[email protected] / 환경조경나눔연구원 원장,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에디토리얼] 내 고향 서울
    “내 고향 서울은 만인의 타향이다. 그러므로 서울에 고향을 건설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뜨내기일 뿐이다.” 얼마 전 열린 한양 도성 학술회의, 작가 김훈의 음성이 가슴을 파고든다. 부산에서 났지만 백일을 갓 넘겨 서울로 이주했으니 내 고향도 서울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누가 고향을 물으면 “부산에서 태어났고 서울에서 자랐다”고 답한다. 서울과 고향 사이에 등호를 넣지 못하는 나는 서울의 구경꾼이나 이방인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하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하다. 서울로 올라온 부모님은 참 이사를 많이 다니셨다.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니 스물 세 개의 주소가 찍혀 있다. 2년에 한번 꼴로 이사를 다닌 셈이다. 덕분에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동네에서 거대 도시 서울의 변화와 발전을 역동적으로 경험하며 성장했다. 내가 서울을 고향이라 말하지 못하는 건 단지 유목민 같았던 이사의 역사 때문일까? 아마도 거주한 장소의 숫자보다는 그곳들에 대한 기억의 상실이 고향의 부재를 낳았을 것 같다. 어쩌면 고향은 공간이기보다는 시간일 것이다. 시간은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고 붙잡을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의 힘을 빌려 시간의 역류를 꿈꾼다. 기억은 시간의 방향을 거스를 수 있다는 기대감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고향, 그것은 곧 기억이다. 초록의 산야보다 콘크리트 주차장이 더 익숙한 원조 아파트 키드이지만, 나에게도 장소의 기억은 여러 개의 파편으로 조합되어 남아있다. 그러한 단편들의 콜라주가 그나마 나의 고향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서울은 고향의 매개체를 너무나 빠른 속도로 변화시켜 왔다. 연 날리던 들판이 롯데월드가 된 건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지금의 로데오거리에선 스릴 넘치는 화약 놀이 카니발이 열렸었고, 타워팰리스 자리에선 총천연색 만국기 아래를 달리며 스케이트를 탔다. 기억할 수 있는 고향이 물리적으로 사라졌다는 건 불행한 일이다. 이제 시간을 거스르기 위해, 고향의 파편을 경험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침대 맡에서 아이패드의 스크린을 두 손가락으로 벌리고 오므리기를 반복하며 옛 위성사진을 들여다보는 일뿐이다. 2012년에 서울시가 시행한 ‘서울시민의 고향 인식도’ 조사를 보면 매우 놀랍게도 시민의 81.1%가 서울이 고향이다, 또는 고향 같다고 응답하고 있다. 서울을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이들 중 반은 서울 태생이고, 나머지 반은 다른 지역 출신이다. 이들에게 서울은 고향‘이기’보다는 고향‘이어야’ 하는 도시인 셈이다. 그것은 패티김이 노래한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렵니다”(서울의 찬가, 1969년)라는 역설과 다르지 않다. “아, 우리의 서울, 거리마다 푸른 꿈이 넘쳐흐르는 아름다운 서울을 사랑하리라”(서울, 1982년)는 이용의 맹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 네버 포겟 오 마이 러버 서울”(서울 서울 서울, 1988년)이라는 조용필의 고백도 고향을 갖고자 하는 보편적 욕망의 표상일 것이다. 우리가 서울을 고향이라 여기고 싶은 건 서울이 육백 년의 역사 도시이기 때문이 아니다. 산 많고 강좋은 도시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전쟁의 상흔을 딛고 짧은 시간에 일구어낸 기적 같은 경제 발전때문도 아니다. 63빌딩이나 DDP 같은 화려한 랜드마크가 서울을 고향으로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서울을 고향으로 열망하는 건 서울이라는 도시의 시공간이 일상생활의 현실과, 또 그 기억과 뒤엉켜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은 그의 고향 풍경과 삶을 담은 자전 에세이 『이스탄불』에서 이렇게 말한다. “도시는 우리 자신의 삶과 정신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우리 자신 외에 도시의 중심부란 없다.” 도시의 핵심은 사람이며 삶임을 강조한 것이다. 도시 자체가 정치의 최전선이었던 지난 10여 년간 서울은 또 한 번의 큰 변화를 꿈꾸었다. 이명박, 오세훈, 박원순 시장은 도시의 구조와 형태를 재조직하고 삶과 문화를 재편성하는 그랜드 플래너를 자임했다. 계획가로서의 서울 시장들, 그들이 선언하고 추진해 온 서울의 비전과 대형 프로젝트는 서울이라는 도시를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희망과 어떻게 접속해 왔는가? 이번 호의 서울 특집은 이런 의문에서 기획되었다. 애초에 구상했던“그들의 서울, 우리의 서울”이라는 주제는 “서울의 오늘을 읽다”로 축소되었지만, 그들의 ‘세계 도시서울’, ‘걷고 싶은 서울’, ‘디자인 수도 서울’, ‘공유도시 서울’, ‘푸른 도시 서울’이 서울을 우리의 고향으로 만드는 일에 어떻게 기여했는가 하는 문제의식은 읽힐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나는 튀는 도시보다 참한 도시가 좋다』의 정석,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의 조한,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의 이경훈, 『랜드마크; 도시들 경쟁하다』의 송하엽, 『건축·도시·조경의 지식 지형』의 조경진 등 조경, 건축, 도시 분야의 베스트셀러 필자들이 이번 특집에 흔쾌히 참여해 주셨다. 이들은 시정市政, 기억, 거리, 랜드마크, 공원을 단면으로 잘라 건강하고 편리하고 아름다운 도시 살이를 디자인해야 할 우리 전문가들의 과제를 드러내 주고 있다. 김훈은 이렇게 글을 끝맺는다. “나는 내 고향 서울이 만인의 … 고향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한다. 타향사람들아, 서울이 당신들의 고향이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CODA] 부산시민공원이 남긴 것
    특집의 원고 청탁이 이렇게 수월했던 적이 없었다. 그들은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오랜 시간 붙잡고 있던 하야리아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려는 의지가 느껴졌다. 황금연휴의 다음날 부산으로 향했다. 하루 일찍 부산에 도착한 사진작가는 그 연휴에 엄청난 인파가 부산시민공원에 몰렸다고 전했다(그래서인지 이달의 사진에 사람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아무리 개장 직후라지만 우리나라 도시 공원의 인기가 이렇게 높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5월의 부산은 더웠다. 공원을 걷는 연인들이 그늘을 찾으며 불평하는 소리도 들렸고, 벤치마다 이미 주인이 있어 앉을 자리를 찾아헤매는 이들의 조급한 눈초리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 그늘이 좀 부족한 것 쯤이야 어떠랴 싶었다. 공원의 나무야 자랄 것이고, 그늘은 시간이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새 공원이라 그런지(?) 공간보다는 시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도시인의 로망인 저 푸른 잔디밭을 둘러싼 각종 놀이 시설에서, 바닥 분수에서, 미로 정원에서 수많은 아이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게다가 시민공원의 시설은 무료이니 웬만한 테마파크 못지않은 매력으로 다가서는 듯했다. 나중에 들은 설명이지만, 부산 사람들은 바람을 쐴 때 대개 바다를 찾는다. 그런데 내륙에 대규모 공원이 들어섰으니, 이 새로운 유형의 공간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것이다. 공원 문화도 학습하며 형성되기 마련이다. 지금 부산 시민들은 부산의 유일한 공간에서 공원 문화를 탐색하는 단계인 셈이다. 공원을 돌아본 후 공원의 북문으로 나서는데, 지금은 아주 일부만 남은 캠프 하야리아 시절의 담장에 시선이 가 닿았다. 그 너머로 집들이 보였다. 의외로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지난 100여 년간, 부산 시민의 지척에서, 이 큰 공간이 저 담장 아래 꽁꽁 숨겨져 있었겠구나 싶으니 새삼 기가 막혔다. 그리고 다음날, 이번 특집의 두 필자인 김승남 사장과 강동진 교수를 함께 만났다. 두 사람 모두 하야리아공원포럼을 통해 오랫동안 캠프 하야리아의 공원화에 노력해 온 만큼 현재 공원의 모습에 아쉬움도 컸다. 특히 캠프 하야리아의 역사적이고 문화적 가치가 있는 건물들이 토양 오염을 이유로 대부분 철거된 점을 안타까워했다. 환경 오염을 정화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독일 함부르크의 도시 재생 사업인 하펜시티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김승남 사장은 독일에서도 역시 기름이 유출되었으나 5년에 걸쳐 천천히 치유했다고 설명한다. 반면 부산시민공원의 경우는 ‘싸고 빨리’ 추진하기 위해 한꺼번에 밀어버리고 덮어버리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건물들도 새로 페인트를 칠하고 부재를 새것으로 바꾸어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이 안쓰럽다. 디자인의 완성은 디테일이 아니던가. 옛 건물을 무조건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상책은 아니겠지만, 차라리 그대로 두었다면 어땠을까. 마치 하야리아 담장의 파편처럼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장소의 기억을 호출하는 매개체가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대부분의 미군 기지의 토양이 오염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금, 반환되는 땅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는지, 환경이 오염되었다는 사실에 집중하는 것만큼 어떻게 치유와 보존을 병행 혹은 선택할 것인가 고민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한편 부산시민공원에는 기억의 숲이 조성되어 있다. 캠프 하야리아 곳곳에 심어져 있던 플라타너스를 한 곳에 모아 가식해 둔 것인데, 오히려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 그 모습 그대로 남게 된 공간이다. 개인적 선호의 차이가 있겠지만, 부산시민공원에서 지금 자연스러운 경관은 이렇게 과거의 것이 그대로 남은 곳들이다. 안타까운 것은 부대 내부의 철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캠프 하야리아의 부지와 부전역 사이에는 삼각형 모양의 주거 지역이 쐐기처럼 부대 쪽으로 밀고 들어온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효율적인 공원 토지 이용’과 뉴타운 계획을 이유로 이 주거지역을 철거하고 공원 부지로 편입시켜 부지를 정형화했다. 이를 두고도 두 필자는 입을 모아 안타까움을 표한다. 이 오밀조밀한 주거 지역이 남았다면, 독특한 상업 공간과 문화 공간으로 진화해 가며 공원의 경계에 활력을 불어넣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한번 없애버린 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지만, ‘하야리아공원포럼’의 노력으로 기존의 계획을 변경시켜 몇몇 건물을 남긴 것도 의미 있는 결과다. 무엇보다 부산시민공원의 성과는 사람들에게 남은 듯하다. 여하튼 부산의 시민들은 공원의 탄생에 크고 작게 기여했고, 이러한 경험에서 오는 자신감도 그 성과의 일부다. 이 경험은 부산에 남아있는 다른 많은 것, 폐선부지나 워터프런트(북항), 달동네 등에서 다시 진화하리라 믿는다. 부산시민공원을 담은 6월호 특집을 마무리하는 지금, 용산공원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때, 또 대한민국의 현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세월호 참사의 여진이 강하게 남은 지금, 예술평론가 수전 손택의 글을 공유하며 글을 닫고 싶다. “부디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사람과 식물
    #15 거트루드 지킬, 위대한 정원 예술가 영국 정원 역사상 가장 중요한 디자이너로 지금도 그 영향력이 시들지 않고 있는 거트루드 지킬Gertrude Jekyll(1843~1932)은 엄격한 쪽머리에 빅토리아풍의 검은 원피스를 입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정원을 돌아보는 노년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지킬이 디자인한 아름다운 색채 정원과 얼핏 매치시키기 어려운 모습이다. 어쩌면 검은 옷과 지팡이는 위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면 지킬 선녀로 변하여 마술봉을 휘둘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트루드 지킬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지루한 정원에 마술처럼 빛과 색을 가져다줌으로써 새로운 장르를 완성시킨 장본인이었다. 건축과 정원의 화합을 이루어낸 것 외에도 식물, 그중에서도 다루기 힘든 야생화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으며 그가 연출했던 장면들은 지금도 귀감이 되고 있다. 비록 야생화를 자유롭게 풀어놓기는 했지만 완강하고 경직된 사고방식으로 인해 작품으로 완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했던 윌리엄 로빈슨1과 비교해 볼 때, 첫 정원 작품으로 단번에 마에스트로의 평판을 얻은 지킬의 비결은 우선 자유로운 사고 체계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하게 한다. 물론 타고난 감각과 오랜 세월 화가로 활동하며 얻었던 체험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시력이 급속히 나빠져서 화가의 길을 접고 정원 예술가로 전향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다.2 그러나 그보다는 그의 삶의 여정이 자연스럽게 정원 예술가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정원공부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모든 영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정원 유전자’ 덕으로 지킬에게 정원은 어린 시절부터 일상에 속했었다. 유난히 색에 민감했으므로 꽃의 다양한 색조에 매료되었던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영국 남부의 서리 지방이 고향이었던 지킬은 만 열여덟 살이 되던 1861년에 런던의 사우스켄싱턴 예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하기 위해 집을 떠났다가 1876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홀로 남은 어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십여 년 만에 귀향했다. 딸이 돌아오자 어머니는 먼스테드히스Munstead Heath에 집을 새로 지었는데 이곳에 ‘실험적’으로 만들어 본 정원이 지킬의 공식적인 첫 작품이 된다. 그것이 불과 3~4년 만에 소문날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음으로써 정원 예술가로서의 운명이 결정되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영국인들은 소문난 정원을 방문하는 전통이 있었으므로 지킬 모녀의 먼스테드히스 정원에도 방문객이 찾아들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당시에 『정원The Garden』이란 제호의 잡지를 발행하던 윌리엄 로빈슨과 영국장미협회 회장의 방문을 받게 된다. 이렇게 얻은 성취감으로 인해 지킬은 정원이 대안이나 차선책이 아니라 그동안 쌓아왔던 예술적 체험을 집약시킬 수 있는 기회임을 이해했다. 이즈음 로빈슨의 권고로 『정원』 잡지에 기고를 시작했는데 1932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기까지 천여 편의 에세이를 쓰고 모두 열세 권의 책을 냈으며 크고 작은 정원 400여 개를 디자인했다. 이런 엄청난 작업량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지킬에게 정원이 전부였음을 시사한다. 지킬이 미술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미술공예운동Art & Craft Movement의 창시자 중 한 명이었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1834~1896)가 학교 인근에 디자인 회사를 설립했다. 본업이 화가였던 윌리엄 모리스는 공장에서 생산되는 생활용품들을 몹시 역겨워했다. 손으로 직접 만든 것만이 가치 있다는 철학 하에 벽지부터 가구까지 직접 만들어 저렴하게 판매하는 것을 목적으로 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손재주가 많았던 지킬이 “마음과 손과 눈”이 삼위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모리스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지킬은 회화 외에도 자수, 조각, 판화, 직조, 사진 등 다방면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분야를 넘나드는 포괄적인 작품 세계를 추구했다. 이런 성향은 후에 정원 예술가로 완전히 방향을 굳힌 후에도 양식에 구애받지 않은 ‘편견 없는 정원’을 만들게 했다. 그러나 정작 지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1775~1851)3의 그림 세계였다. 미술관에서 터너의 그림을 연구하며 보낸 수많은 시간은 터너의 화폭을 환하게 밝히는 지중해의 빛과 색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1874년 지킬은 터너의 빛을 찾아 여러 달에 걸쳐 북아프리카, 그리스, 이탈리아를 여행하게 되며 여기서 만난 파스텔 색조의 식물에 매료되어 돌아왔다. 이런 영향들이 축적되어 후에 지킬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경계 화단’4이 탄생했다. 경계 화단은 본래 프랑스 정형식 정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경계를 이루던 회양목 생단이 진화하여 꽃피는 식물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을 말한다. 지킬은 이 경계형 화단이 독립적 정원 요소로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것 같다. 화폭 속에서 더욱 빛나는 터너의 밝은 색조를 응시하던 수많은 나날 중 야생화들도 저렇게 ‘액자’에 담되 윤곽 없이 서로 스며드는 기법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것이다. 소로를 따라 화단을 길게 배치하는 것이 경계 화단의 기본 형태였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여러 방법으로 응용했다. 특히 옹벽, 계단, 테라스 등 시설물을 오히려 화단처럼 이용하여 식물과 어우러지게 함으로써 최대의 상승 효과를 내는 기법 역시 지킬의 아이디어였다. 경계 화단에서 보여준 지킬의 탁월한 감각은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원 전체의 구성에 여실히 반영되고 있다. 지킬의 정원들은 손수건 크기의 화단으로부터 몇 헥타르에 이르는 숲 정원까지 때로는 정형으로, 때로는 자연형으로 장르를 넘나들었으며, 전원의 정다움, 도시적인 세련됨, 이국적인 매력 등 상황에 따라 적절한 식물들로 ‘팀’을 짜서 배치함으로써 수많은 변주곡을 연주한다. 각 식물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무대를 만들어 줌으로써 최상의 효과를 얻어 낸 지킬의 방법론은 건축과 정원의 화합뿐 아니라 사람과 식물 사이에도 균형 잡힌 관계가 가능함을 말하고 있다. 20세기 초까지 일정한 패턴을 벗어나지 못하고 쳇바퀴를 돌고 있던 정원계에 지킬이 보여준 자유로움과 균형감은 확실한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 그림만 그리기 1
    설계의 정의 설계의 목적은 그림을 그리는 데 있지 않다. 설계design는 “특정한 대상의 형태와 기능을 결정하는 행위다.” 이때 특정한 대상은 반드시 건물이나 정원 같은 공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옷도, 가구도, 일상용품도 설계의 대상이며, 요즈음에는 심지어 감정이나 행위도 설계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설계를 할 때 우리는 대상의 형태와 기능을 결정하기 위해 다양한 요소들을 생각해야 한다. 크기, 색, 질감, 위치와 같은 물리적 성질들뿐만 아니라 대상의 목적, 의미, 만드는 과정, 심지어 변화까지도 디자이너가 고려해야 할 설계의 요소들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는 글이나 소리로 기술된 계획을 설계라고 하지 않는다. 설계 과정상의 모든 생각과 결정들은 그림을 통해서 구현된다. 설계의 매체는 결국 그림이다. 설계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설계 행위는 기능과 형태의 구체적인 그림을 만듦으로서 이루어진다는 전제가 붙어있다. 다시 온전한 정의를 내리자면 설계는 “특정한 대상을 만들기 전에 구체적인 그림을 통해 그 형태와 기능을 결정하는 행위다.”1 이렇게 본다면 설계의 목적은 특정한 대상의 형태와 기능을 구현하는 데 있지만, 모든 수식어와 관계사들을 제거하고 나면 설계는 본질적으로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된다. 두 가지 그림 그동안의 설계 경험을 떠올려보면 대부분의 시간을 그림만 그리는 데 쏟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실제의 공간을 직접 대면할 때라고는 고작 대상지 답사를 간다든가, 현장 실습 시간에 먼발치에서 콘크리트가 부어지는 모습을 바라본다든가, 모종삽으로 꽃포기들을 몇 번 심어본 기억밖에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졸업을 하고 회사에 취직하더라도 설계의 경험은 그림이라는 매체 바깥으로 나가기가 힘들다. 정원을 전문적으로 다루거나 시공을 겸하는 회사가 아니라면, 업무상으로도, 계약상으로도 설계의 모든 최종 결과물은 공간이 아닌 그림이 된다. 누군가는 공간을 만들면서 그림만 그려야 하는 설계의 현실에 괴리감을 느낄지 몰라도 이는 전혀 비정상적인 일이아니다. 근대적인 의미의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생기면서 공간을 창조하는 작업도 분업화된다.2 이제 설계가의 업무는 나무를 심고 석재 포장을 까는 일이 아니라, 어디에 나무를 심고 어떠한 모양으로 석재 포장을 깔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 되었다. 오늘날의 설계가는 구상에서부터 제작까지의 전 과정을 수행했던 중세의 대석공Master Mason이나 조선시대의 대목장과는 다르다. 설계가가 다루는 매체는 그림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림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려진다. 예술가도 설계가도 모두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이 중 설계가만이 전문적인 기술자로 인정받는 이유는 설계가의 그림이 작가의 개인적인 표현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전문적인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기술적 매체이기 때문이다(그림1, 2).3 우리는 이를 도면이라고 부른다. 도면은 정확하게 따라야 할 규칙이 있다. 전문적인 기술자로서 설계가는 이 규칙들을 숙지하고 지켜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건축학과와 조경학과 학생들은 저학년 때 도학과 제도라는 수업을 들어야 하고 평생 이때 배운 언어를 반복해서 구사한다. 그런데 공학도들 역시 제도 수업을 통해 동일한 도학의 원칙을 배우며 그들의 실습 과목 역시 설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는 설계가가 따라야 할 그림의 규칙이 예술가들이 익히는 표현기법보다는 공학자들이 요구하는 정보의 체계에 가깝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공학자의 도면과는 달리 디자이너는 기술적 정보의 전달을 넘어 대상의 미적인 아름다움과 작가가 부여하고자 하는 의미까지도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빠지는 함정이 있다. 바로 설계의 매체에 대한 잘못된 이해다. 설계의 그림은 기본적으로 정보로서의 가치를 지니면서 예술적인 표현을 반영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학생들의 그림은 이도 저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면의 형식을 취하지만 전달하는 정보는 오류 투성이고 그렇다고 대상의 아름다움도, 본인의 생각도 드러내지 못하는 그림. 다시 말하지만 설계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다. 때문에 설계의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잘못된 설계를 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앞으로 두 번에 걸쳐 할 이야기는 설계 매체에 대한 이야기다. 앞에서 나누었던, 그리고 이후 계속해서 하게 될 개념, 직관, 이론, 분석, 맥락, 의미와 같은 설계의 방법과 대상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잊어두자. 설계의 매체에 대한 이야기는 곧 설계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도면의 논리 가장 기본적인, 그러나 의외로 그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도면을 구성하는 그림들은 무엇인가? 조경학과 2학년 정도가 되면 누구나 이 질문에 쉽게 답을 한다.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 이 셋이 가장 기본적인 도면의 형식이다(그림3, 4, 5). 그런데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의문점이 하나 생긴다. 현실의 공간도, 설계가들이 구현하고자 하는 공간도 삼차원이다. 그런데 왜 도면의 기본은 삼차원적 형태를 보여주는 그림이 아니라 이차원적정보만을 보여주는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일까? 물론 이차원적인 그림들이 더 그리기 쉽겠지만, 고도로 복잡한 공학적 지식을 요구하는 교량도, 마천루도, 심지어 우주선의 설계 역시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로 그려진 이유가 단순히 설계가들이 그리기 쉬워서였다면 수긍하기가 힘들다. 고대 그리스어로 인위적인 것은 노모스Nomos라고 부른다. 노모스는 인간의 정신 문화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노모스의 반대말인 피지스Physis는 인간 문명과 대립되는 자연을 뜻한다. 문명이 발생한 이래로 인간은 자연 상태의 피지스를 노모스의 세계로 편입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설계는 단순한 자연의 변형을 넘어서 건축물과 같이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노모스의 공간을 창조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이를 위해 인간은 기하학이라는 사고 체계를 발명했다. 모든 문명을 막론하고 기하학은 건설, 치수, 천문, 경작 등 공간을 다루기 위한 모든 분야의 기반이 되는 지식이었다. 그래서 설계를 지배하는 사고의 체계, 그리고 설계 매체인 도면의 특수한 형식을 이해하려면 기하학의 사고를 이해해야 한다.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하였고 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하였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어바니즘』이 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