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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간 공감] 연남교 교차로
    이번 대상지는 계획이나 설계의 결과물이라고 보기는 힘든 장소다. 연재를 여는 글에서도 밝혔듯이 “공간 공감”의 논의 대상은 설계가의 작품만이 아니다. 연남교교차로 일대는 도시에서 발생한 수많은 흐름이 입체적이고 집약적으로 교차하는 곳이며 의도하지 않은 수동형의 도시 공간이다. 이 교차로에는 홍제천을 시작으로 홍제천변 보행로와 자전거도로, 수색로와 성암로 등의 일반자동차도로, 가좌역을 포함한 경의선, 옛 경의선 흔적과 공항철도 등의 철로, 그리고 내부순환도로와 모래내고가차도 등의 고가도로가 집약되어 있다. 곧 조성될 경의선 공원화 사업의 초입부이므로 선형공원의 흐름도 이곳에 가세할 전망이다. 현재의 공간은 다소 복잡하고 산만함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그저 지나쳐버리는 헙수룩하고 일상적인 공간에 불과하다. 이처럼 불리한 조건이 가득한 공간에서 우리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미묘한 매력을 느꼈다.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 이 낯선 공간의 매력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보기로 한다. 우선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이 장소의 특징은 다양한 층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일단 물리적으로 여러 높이가 존재하여 다양한 위치에서의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보는 위치의 차이는 같은 공간의 다른 면을 드러내는 데 도움을 준다. 하천 레벨에서는 주변 도시의 건물들이 시각적으로 소거되고 하천과 교통 구조물만 강조되며, 도로 레벨에서는 차량과 보행자 흐름의 복잡도를 가장 강하게 느끼게 된다. 상부의 교통 구조물에서는 자동차나 기차에서 바라보는 시각이기 때문에 빠른 속도의 조감이 제공되는 반면, 그리 긴 구간은 아니지만 홍제천을 건너는 옛 경의선의 남겨진 교각에서는 느린 속도의 독특한 조감이 가능하다. 현재 펜스에 의해 막혀 있는 공간이기는 하지만 쓰이지 않는 철로 교각의 상부가 가장 잠재력 높은 뷰포인트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시간적 층위도 빼놓을 수 없다. 녹슨 철, 무성한 잡초와 함께 세월의 때가 낀 옛 경의선의 교각 흔적은 지금 모습 자체로도 향수를 자극한다. 반면 동일한 콘크리트 구조물이지만 비교적 최근의 교통 시설인 내부순환도로는 현대적 도시의 이미지를 풍기고 있다. 물론 이러한 공간적·시간적 층위가 그 효과를 극대화하면서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우리에게 파편적으로 인식될 뿐이다. 만약 이곳이 설계의 대상지가 된다면 이러한 파편을 염두에 둔 정리하기와 드러내기가 중요한 숙제가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정욱주는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하였다. 글쓴이 외에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였고,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 낯선 곳의 한국 정원
    지난 5월 31일 타슈켄트에 완공된 서울별서는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옛 정원을 재현했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 있는 바부르공원은 외교 단지와 대학가가 있는 대로 사이에 위치해 사람들의 이동이 빈번한 곳으로,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나무가 빽빽하게 심겨 있었다. 이곳에 서울별서가 생기면서 공원 한편에 오픈스페이스가 형성되었고 색다른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한국인의 시선으로 낯선 나라에서 만난 한국식 정원은 친근하게 다가왔는데, 현지인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함이일었다. 서울별서의 설계자 신현돈 대표(서안알앤디 디자인)와 사람들의 행태를 계속 관찰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신현돈 대표는 최근 세 개의 한국 정원 작업을 진행했다. 타슈켄트에 설계한 공원이 이제 막 완공됐고, 신안군 비금도초의 정원이 1단계 준공을 마쳤다. 그리고 브라질 아라샤에도 설계를 마무리해 앞으로 공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굳이 그의 작업을 ‘한국 정원’이라고 부르는 건 설계 성격을 정의하기 위함이 아니다. 세 개 모두 한국 정원을 조성하고 싶다는 발주처의 요구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형주(이하 이): 설계 작업에서 한국성이나 전통은 항상 쟁점이다. 한국적인 정원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신현돈(이하 신): 물리적 계획이나 디자인, 배치 계획 등을 짤 때, 시적poetic인 접근과 땅에 순응하고 지형을 잘 이용하는 그런 기법들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지형지세를 거스르지 않는 게 한국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디자인적으로 보면 전통적인 설계 방법론을 구사하고 궁궐, 별서, 그리고 민가 정원에서 보이는 배치 구조나 디자인 언어 등을 구현하여 전통 정원을 단순히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모티프로 삼아 현대화시키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한국 정원이 아니더라도 과거의 지혜를 구현하고자한 흔적을 당신의 몇몇 프로젝트에서 볼 수 있다. 광화문광장이나 청계광장 등이 그러한 예다. 신: 설계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게 한국성이다. 모더니즘적인 설계를 하는 사람도 있고, 아방가르드한 설계를 하는 사람도 있고, 전통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설계자도 있다. 설계하는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다르다. 한국적인 것을 구현하는 게 내 설계의 출발점이다. 광화문광장도 일제에 의해 왜곡된 국가축을 바로 잡는 작업의 일련이었고, 디자인은 우리의 육조거리를 재현하는 걸 기조로 했다. 청계광장도 전통 보자기 형태에서 배치 계획의 골격을 잡았다. 이: 한국성에 대한 고민이 계속되었다는 말인데, 최근 작업 중 그러한 측면이 잘 드러나는 작업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신: 얼마 전 조경의 날 기념으로 한국조경학회와 환경조경발전재단을 통해 서울광장에 조성한 템포러리 조경도 한국적인 시간의 기억에서 출발했다. 과거의 흔적을 되살린 프로젝트다. 덕수궁에서 모전교를 지나 북촌으로 가던 길, 원구단에서 경복궁이나 효자동으로 다녔던 길의 기억을 살렸고, 나머지 길의 흔적을 상징화한 것도 과거 선조들이 걸었던 길을 현대화시켜서팝아트적으로 푼 것이다. 종로 1가에 위치한 그랑서울의 조경 설계가 또 다른 예다. 피맛길에 고층 빌딩을 세우면서 과거 피맛길의 흔적을 살리고 운종가의 영지影池, 장초석과 온돌, 집터의 기억을 살렸다. 해외에 한국 정원을 만든다는 것 설계공모의 안이 관철되기까지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디자인이 퇴행하거나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서울별서 조성에는 두 가지 난제가 더 있었는데, 복잡한 통관 절차와 여러 클라이언트의 존재다. 우즈베키스탄은 중앙아시아에 있는 독립국가연합의 하나로 공화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인구의 약 80%가 이슬람교도로 한국과 문화적 차이가 크다. 해외에 조성되기 때문에 과정상 어려움은 예상할 수 있었지만, 서울시와 타슈켄트가 직접 협약을 맺고 진행했음에도 실제 현장에서는 일처리가 미진했다. 문화적 차이로 한국인과 우즈베키스탄인 사이에 업무 처리 방식과 절차에 괴리가 생겼고, 일할 사람과 자재가 준비되었음에도 통관이 처리되지 않아 공사가 지연되는 등 난항을 겪었다. 이때 우즈베키스탄 주재 한국 대사관이 조율에 나서면서 소통에 물꼬를 텄다. 공사를 총괄한 현장 소장은 “해외에서 진행하는 조경 공사에 대사관에서 이렇게 관심을 가져준적은 처음”이라고 말했는데, 한국 대사관 측은 “한국정원이 한류의 발판이 될 것”이란 믿음으로 서울별서에 각별한 신경을 기울이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 정원’의 가능성에 대한 신현돈 소장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또 하나의 난제는 타슈켄트 시장과 우즈베키스탄 국가 연구원, 타슈켄트 공원국, 우즈베키스탄 주재 한국 대사관, 그리고 고려인협회라는 다섯 클라이언트를 설득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난제로 예상된 이 부분은 의외로 쉽게 해결됐다. 신현돈 대표가 직접 방문하여 진행한 발표회마다 ‘한국 정원’의 모습은 당선된 설계안대로 진행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 일색이었다. 그렇게 서울별서는 설계안대로 구현되었고, 산고의 아픔을 덜수 있었다.
  • 어느 한옥의 정원
    율수원은 완벽한 ‘복원’에 초점을 맞춘 곳이 아니다. 그래서 더 흥미로웠다. 복원은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거주와 사용을 목적으로 지어지는 한옥과 정원은 이야기가 다르다. 치밀한 재현보다는 사용의 편의를 적절히 고려해야 한다. 최근에 새로 지어지는 한옥에는 유리도, 잔디도 과감히(?) 쓰인다. 한옥의 장점을 취하되, 효율과 취향을 고려한 결과다. 자연스럽게 설계자에게는 선택지가 많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조심스러운 작업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무늬만 한옥’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옥에 대한 관심도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전국 곳곳에 한옥마을이 만들어지고 있고, 2011년에는 정부 출연 기관인 국가한옥센터도 설립되었다. 서울시는 한옥체험업과 도시민박업을 700개소 늘릴 계획을 발표했고, 국토교통부는 6월에 『한옥 설계의 원리와 실무』라는 한옥 설계 교재까지 발간했다. 한옥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과정도 꾸준히 늘고 있다. 한옥에 대한 수요가 그만큼 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옥의 정원은 어떠해야 할까? 그저 마당이면 족한 것일까? 율수원은 도심형 한옥과 여러 조건이 상이하지만, 한옥 정원을 제대로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곳이기에 시사점이 꽤 있어 보였다. 도심 한옥은 훨씬 작은 규모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한옥 정원의 기본 조성 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 말이다. 율수원의 설계자인 안계동 대표를 만나, 현대에 지어지는 한옥 정원을 중심으로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남기준(이하 남): 얼마 전 있었던 ‘정원 문화 심포지엄’에서 율수원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무척 인상적이었다. 빛바랜 대학 시절 강의 노트를 뒤적이고, 다양한 사례 조사를 통해 현대에 조성되는 한옥 정원의 좋은 예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선 율수원 프로젝트를 맡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안계동(이하 안): 우연한 기회에 지인에게 소개 받았다. 2년여 동안 공들여서 한옥을 잘 만들어 놓았는데, 정원에는 손도 못 대고 있던 상황이었다. 건물이 모두 지어진 상태였고 담장까지 둘러쳐져 있어서, 수목이나 흙, 자재를 반입하기가 무척 곤란했다. 설계뿐만 아니라 시공까지 함께 맡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남: 그동안 꽤 많은 설계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동심원의 대표작 중에서 전통 공간에 대한 설계는 언뜻 기억나는 작품이 없다. 안: 율수원처럼 본격적으로 전통 양식을 따르는 공간을 설계한 적은 없었다. 과거에 조성된 전통 정원과 현대에 실용적인 목적을 가미해 만들어지는 한옥의 정원은 분명히 다르다. 그래서 더 해보고 싶은 욕심이 났고, 과정 자체가 무척 재미있었다. 남: ‘실용적인 목적을 가미했다’는 대목이 색다르게 들린다. 전통적인 양식을 바탕으로 하되, 현대에 요구되는 편의와 필요를 반영했다는 이야기일 텐데, 가장 주안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안: 처음부터 전통 공간의 완벽한 재현은 염두에 두지않았다. 문화재 복원 작업도 아니고, 희원과도 성격이 다른 곳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주인이 이곳에 살면서 생활하는 가옥의 정원을 만들고자 했다. 미리 지어진 한옥 역시 큰 뼈대는 전통 양식을 그대로 따랐지만, 조명이나 난방 등은 모두 현대식으로 꾸며졌다. 조경 역시 마찬가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옥과 어울리는 전통적인 경관이 기본 뼈대가 되어야겠지만,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공간을 염두에 두고 실용성을 적절히 반영했다. 텃밭을 포함시킨 것도 그 때문이다. 또 우리의전통 정원은 경치 좋은 곳에 짓고 주변의 자연을 감상하는 차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이곳은 주변경관이 무척 열악하다. 차경이 아니라, 도리어 차폐에 신경을 썼다. 클라이언트의 생가라는 특수성도 고려해야 했다. 무작정 전통적인 양식을 따르기보다, 예전에 살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곳이 되면 어떨까 싶었다. 건물이 이미 다 지어져 있는 상태였지만, 경관이 기억을 매개할 수 있기를 바랐다.
    • 남기준
  • 콘텍스트와 패턴 사이, 그의 미니멀리즘
    1 경관의 힘, 남해에선 누구나 마음을 놓을 수밖에 없다. 쪽빛 바다에 반사되는 따뜻한 햇살이, 다도해의 훈풍이 실어 나르는 대양의 숨결이 우리를 무장 해제시킨다. 바다와 하늘을 향해 끝없이 열린 자유의 시선이, 부드럽고 온화한 자연과의 밀착감이 일상의 번잡함을 마취시킨다. 사우스케이프 오너스클럽은 이런 축복받은 대지에 들어선 최고급 골프 리조트다. 사이트의 조건이 이처럼 완벽에 가깝다는 것은 조경가의 로망이기도 하지만 엄청난 무게의 제약일 수도 있다.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 고급과 품격, 사우스케이프를 방문하면 누구나 이 두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반발심이나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호화나 사치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수려한 경관 자체가 그럴 뿐 아니라, 골프장 역사상 최고의 예산으로 소위 ‘작품’을 만들기 위해 건축가 조민석(클럽하우스)과 조병수(호텔)에게 무한의 지원을 한 클라이언트의 의지도 그렇다. 물론 두 건축가가 빚어낸 결과물도 상상 이상이다. 원경에서 보면 땅으로 포복하며 지형에 그 존재를 숨기지만, 근경에서는 질료의 물성과 양감이 구조미와 결합하여 또 하나의 자연이 오롯이 구축된다. 삼차원 곡선의 백색 콘크리트 지붕과 중후한 트래버틴 대리석 벽으로 구현된 조민석의 클럽하우스는 바닷바람과 조망을 만끽하게 한다. 노출 콘크리트 덩어리를 치즈처럼 썰어 놓은 조병수의 호텔동은 해안선의 흐름과 호흡을 맞춘다. 동과 동 사이의 캔틸레버 아래로 리아스식 해안과 쪽빛 바다가 고개를 든다. 태생부터 명품인 이런 조건 속에 던져진 조경가는 그 이상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취재 첫 날, 남해의 경관에 취하고 사우스케이프의 품격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조경가 박승진이 겪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난망함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조건의 존중, 자연과의 조화, 건축의 해석과 수용, 이런 지고의 가치에 기대 애써 선한 척하는 것 외엔 별다른 묘수가 없었을 것 같다. 2 정영선의 조경설계 서안에서 성장한 후 2007년에 디자인 스튜디오 로사이loci로 독립한 박승진은 실무 조경가로서는 이례적으로 다량의 글을 발표하며 자신의 조경론을 펼쳐왔다. 그의 글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것은 조경이라는 행위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사고이며, 그 중심에는 ‘자연’이 놓여 있다. 그는 조경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행위”이므로 조경 행위의 출발은 “결국은 조경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추구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1에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자답한다. “조경의 본질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다듬고 삶을 보살피는 것이며, 이것은 … 자연의 본성과 닿아 있다. 자연은 모성적이어서 생명을 보살피고 인간 관계를 평화롭게 유지시킨다. 모든것이 스스로 조화를 이루며 힘의 균형을 유지한다. … 자연의 본성을 닮은 ‘보살핌’의 조경을 통해 세상과 조경이 소통하는 희망의 통로를 발견할 수 있다.”2 여기서 그는 자연을 보살피는 것이 조경의 역할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조경이라는 행위 자체가 자연의 고유한 성질처럼 무언가를 돌보고 보살피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임에 유의해야 한다. 자연과 조경의 관계에 대한 그의 시각은 매우 명료하다. 몇 부분만 더 인용해 보자. “조경이 다루는 소재는 대부분 자연에서 얻어 온 것들이며 그것들은 스스로 생육하고 번식해 나간다. 조경가는 이 위대한 존재들이 생육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주고 보살피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조경은 자연과 더불어 시간을 엮어내는 일이라는 점에서 여타의 디자인과 다른 본질적인 차별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3 “오늘날 도시 문명의 표상은 발기된 남성의 성기로 상징화되는 수직적 건축 구조물들이다. 이 구조물들은 도시의 풍경을 장악한다. 자연(여성)과의 정서적 결합을 외면하고 허공을 향해 욕정을 뿜어낼 태세다. 항상 어디에서나 오브제처럼 빛나는 존재여야 하며, 오만하게 땅을 굽어본다.”4 반면, “조경의 공간은 땅과의 밀착을 통해 자연과 소통하고 관계를 형성한다. 돌출된 형태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남성 성기와는 다르다. … 이렇듯 우리가 다루는 자연은 여성성 혹은 여성 그 자체이다.”5 이러한 박승진의 조경론을 읽으면 자칫 그의 작업이 목가적인 픽처레스크picturesque풍이거나 잡풀 하나까지도 철저하게 연출하지만 전혀 손댄 것처럼 보이지 않는 정영선식 조경invisible landscape 또는 젠스 젠슨Jens Jensen의 ‘프레리 스타일prairie style’에 경도되어 있을 것이라고 오판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실제 작업은 “흙, 풀, 물, 돌, 철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자연의 물질과 그 물성을 잘 이해하고 그 결합 관계를 해석하여 구성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박승진식으로 표현하면 “물성과 감성 사이”의 설계다.6 그가 말하는 조경의 역할, 즉 “보살핌”은 바로 그 사이에서 작동한다. 그의 작업 속에서 보살핌은 주어진 조건에 대한 조경가의 적극적 개입이다. 그의 용어를 빌리자면 조건은 “콘텍스트”이고, 개입은 “패턴”이다. 그는 콘텍스트를 “공간을 설계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 만들어진 모든 상황,” 즉 “내 책임이 아닌 모든 것들”이라고 말한다.7 콘텍스트에 대한 무한 존중을 넘어 그것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그것을 교정하는 패턴을 디자인하는 것이 그가 지향하는 조경 작업인 셈이다. 물론 자신의 패턴이 콘텍스트에 도전해야 함을 말한다기보다는 “콘텍스트와 패턴 사이”의 접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음 구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설계는 더하는 작업이 아니라 빼는 작업이다. 누구나 처음에는 욕심을 부리기마련이다. 그런데 의욕이 지나치게 앞서면 설계안은 복잡해진다. 복잡한 설계안이 좋은 공간으로 진화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때로는 ‘패턴’이 ‘콘텍스트’를 존중하고 스스로 몸 낮추기를 아끼지 말아야 할 이유다. 형태뿐만이 아니다. 재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모든 조형적 요소들은 최적의 순간까지만 적극적으로 작동해야 한다.”8 박승진의 작품에 미니멀리즘minimalism을 대입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워커힐 아카디아호텔 옥상(2007), 물의 정원(풀무원 제일생면 공장 폐수처리장, 2009), 아모레퍼시픽뷰티 캠퍼스(2012) 등과 같은 그의 작업에서는 자연의 바탕을 마련하고 자연의 시간성과 물성을 살리는 “보살핌”의 조경이 미니멀한 형태와 재료를통해 단적으로 드러난다.9 3 남해 프로젝트는 박승진에게 쉽지 않은 도전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형용사가 필요 없는 최선의 자연 경관이, 호화롭거나 사치스럽지 않으면서도 멋과 품격을 담은 최고급 건축이 그에게 조건으로 주어졌다. 환상적이지만 동시에 부담스러운 최상의 콘텍스트 앞에서 그는 철저한 조연이 되기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클럽하우스와 호텔동 사이의 급격한 단차를 절제된 지형설계를 통해 해결했다. 클럽하우스의 하이라이트 공간인 파티오에서 바다와 하늘이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시선을 사로잡는 데에는 단순하면서도 섬세한 그의 지형 설계가 큰 몫을 하고 있다. 정지 작업 중 드러난 거대한 암반을 호텔동에 의해 위요된 정원의 일부로 살리고 거기에 덧대어 만든 철제 수반은 복잡한 시선에 수평적 질서를 부여해 주었다. 공간감을 주기 위해 선택한 팽나무 위주의 교목 몇 그루 외에는 식물 재료로 몇 종류의 풀과 초화만 넣었다. 바다와 바람과 계절의 공감각적synaesthetic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절제된 식재 설계다. 사우스케이프에서 화려함보다 편안함을, 사치함보다 여유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자연의 충실한 조연이 되고자 한, 건축의 지혜로운 조정자가 되고자 한 조경가의 ‘자제’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승진은 이 숨 막힐 정도로 완벽한 콘텍스트가 참 답답했을 것 같다. 강우와 폭풍이 오전 촬영을 가로막았던 취재 둘째 날, 믿기지 않는 속도로 구름이 물러가고 다시 남해의 하늘과 바다가 펼쳐졌다. 다시 둘러본 사우스케이프에서 나는 띠 형태의 긴 돌무더기를 발견했다. 그제서야 마음이 확 트였다. 난데없는 현장 채집석의 띠가 주차장 쪽 마운드의 풀숲을 뚫고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클럽하우스 옆 정원을 지나 리차드 에드먼Richard Erdman의 조각 볼랑트Volate를 스치며 퍼팅 그린 쪽 아래 레벨로 연결된다. ‘카메라타’의 남해 분점인 음악감상실(클럽하우스 1층) 앞에서 돌무더기 띠가 멈춘다. 강하고 풍요로운 이 사이트의 콘텍스트에서 해방된 박승진의 패턴일거라 단정하고 나니 서울의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이 오히려 즐거워졌다. 며칠 후 그에게 확인하니 과거에 그 자리에 있던 말 훈련장의 담장 유적을 살리라는 문화재 심의에 대한 설계적 대응이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 돌무더기 띠는 대지미술가 리차드 롱Richard Long의 초기작들보다 울림이 있는, 날카로운 선으로 캔버스를 찢은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의 개념 작업들보다 강한, 그의 미니멀리즘이었다. 남해로부터, 건축으로부터 자유로운.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칼럼] 작은 디테일부터
    호황을 구가하던 한국 조경이 항로를 잃은 배처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건설 경기의 침체로 건축과 조경 분야가 위축되었고, 자구책을 마련하며 이겨나가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역부족이다. 대부분의 조경가가 내뱉는 말은 “그저 버텨야죠” 일색이다. 설상가상으로 업역 다툼도 한층 치열해졌고, 우후죽순처럼 발전을 거듭하는 중국 조경은 우리를 더욱 움츠러들게 한다. 이 시점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며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조경이 외적으로 풍성함을 누렸던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아파트 분양 자율화에 있었다. 거주보다는 부동산 투자의 방편이었던 아파트 건설열풍에 편승해서 한국 조경은 디자인의 질적 향상 보다는 겉으로 보이는 조야한 화려함에만 치중해 왔다. 조경의 가치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한눈에 보이는 큰 그림보다 세심하게 들여다보아야 하는 작은 디자인 디테일부터 고민하고 노력했어야 한다. 아주 작은 눈짓이나 입가의 미소가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듯, 공간의 섬세한 디테일이 공간의 이미지를 높여준다. 갑자기 폭증한 일감, 적은 설계비, 까다로운 발주처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독창적인 디자인과 디테일 개발을 소홀히 하고 기성품으로 조경 설계의 내용을 채웠다. 새로운 공간에 적합한 새로운 디테일을 고민하지 않고 가장 일반적인 디테일을 그대로 적용하면서 편하게 넘어가곤 했다. 건축, 도시, 토목 분야와 차별화된다고 우리 스스로 자부하는 식재 설계 디테일 도면도 누구나 쉽게 베껴서 할 수 있는 수준의 디자인으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조경가가 다른 분야의 전문가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무기를 녹이 슬 때까지 방치한 것이다. 새로운 재료, 공법, 가공 기술 등에 대한 다양한 연구 개발을 진행하기는커녕 설계 물량의 양적 풍성함에 취해서 전문적인 디자인과 기술 개발을 등한시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 조경의 회복을 위한 전기를 마련할 시점이다. 조경만이 해낼 수 있는 디자인 디테일을 발굴하고, 결과물을 모니터링하고, 부족한 점을 냉철히 직시해야 한다. 후속 프로젝트에서 보다 높은 수준의 디자인 디테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토론과 논의 또한 활성화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과 노력이 장기적으로 조경 디자인의 새로운 영역과 정체성을 만들어줄 것이다. 그러할 때 조경가는 도시의 일부분만을 디자인하는 전문가를 넘어서 도시의 가치를 높이고 정체성을 바꾸는 전문가로, 도시를 재생시키는 전문가로 대우받으며 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새로운 시장을 바라보되 우리가 간과하며 지나쳤던 작은 디테일부터새롭게 주목한다면 조경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1983년부터 조경 디자인을 시작했으니 어느새 30년이 훌쩍 넘었다. 열악하기 짝이 없는 기반에서 시작했지만 그 덕분에 작은 디테일 디자인부터 세부 시공까지 하나하나 경험하며 일할 수 있었다. 기성품이 없어서 의자, 퍼골라, 휴지통, 안내판, 지주목, 미끄럼틀, 그네, 조합놀이대, 수경시설 등 모든 것을 직접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밑거름이 되어 지금까지 다양한 재료를 바탕으로 섬세한 디테일을 고려하게 되었다. 물론 이런 경험을 내세우고자 함이 아니다. 한국 조경의 다음 세대에게 다양한 디자인과 새로운 디테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젊은 조경가들이 한국 조경의 희망이다. 국내외에서 다양한 교육과 실천을 통해 새로운 디자인과 디테일을 경험하며 고민해 온 신진 조경가 그룹이 이제 한국 조경의 새로운 좌표를 제시하고 조경의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리라 믿는다. 새로운 라이프스타일과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익숙한 그들이 한국 조경의 다음 패러다임을 열어줄 것을 기대한다. 작은 디테일 디자인부터 도시의 비전을 계획하는 일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그들이 감당할 것이다. 건축과 대화하며 도시를 다시 살리고 바꾸어 나갈 것이다. 단순히 보기만 좋은 도시가 아니라 활력 있고 생기 있는 도시를 만드는 그런 조경가가 되어야 한다. 환경의 질뿐만 아니라 도시의 경제와 문화를 살리고 시민의 참여를 유도하는 그런 디자인을 선도해야 한다. 새로운 장을 열어갈 젊은 조경가들에게 한 가지 당부할 것이 있다. 조경가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웬 뜬금없는 사랑 타령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의 다른 이름은 관심과 애착이기도 하다. 조경가는 땅을 사랑하고, 식물을 사랑하고, 환경을 사랑해야 한다. 주어진 일을 사랑하고 일을 통해 만나는 사람과 그 지역을 사랑하며 디자인한다면, 그 디자인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전하게 되고 그 사랑으로 도시는 아름답게 될 것이다.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듯, “사랑은 모든 허물과 죄를 덮는다.” 사랑 가득한 도시를 만들어갈 그들의 미래를 기대한다. 최신현은 우대기술단 조경사업부를 거쳐 2003년 씨토포스를 설립했다. 북서울꿈의숲, 대구 두류공원, 고령 대가야 역사테마파크, 진주 만경지구 남가람 문화거리, 아양교 조형물, 대구 동구청앞 광장, 무안 회산 백련지 등 다양한 층위의 작품을 설계하였으며, 서서울호수공원으로 미국조경가협회상(ASLA ProfessionalAwards)을 수상했다. 동탄2신도시 워터프론트, 신월정수장 부지공원화, 의정부 역전근린공원(캠프 홀링워터), 충북 음성 혁신도시 등 다수의 설계공모에서 당선되었고, 영남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조경사회 수석부회장, 서울시 공공조경가그룹 위원, 서울시 건축심의위원을 맡고 있다.
  • [에디토리얼] 가출하자, 조경 3세대
    30대 조경가 30인의 성장사와 비전을 다룬 이번 호의 특집 ‘조경가로 자라기’를 준비하며, 그리고 그들이 보내온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엉뚱하게도 20년 전 영화를 떠올렸다. 그들이 대학 생활을 시작하거나 10대였던 1994년의 영화다. 스테판킹 원작,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의 ‘쇼생크 탈출 The Shawshank Redemption’. ‘탈출’자가 들어가는 제목, 자유를 강조하는 진부한 모토,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비를 맞는 포스터는 ‘빠삐용’을 벗어나지 못하는 전형적인 감옥 영화의 아류일 거라는 첫인상을 준다. ‘감옥 안의 혹독한 환경과 비인간적 실태를 과장해서 스케치할 테고, 결국엔 아주 극적으로 탈출하겠지, 뭔가의 정치적 냄새가 약간은 배어 있을 거고….’ 하지만 쇼생크 탈출은 빠삐용의 재탕이 결코 아니다. 감옥 쇼생크는 장기수로 가득하다. 화면의 쇼생크는 몇 가지 위협을 제외하면 대체로 평안하다. 그 극한의 위협이라는 것도 반사적으로 몸 사리고 조심만 하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정도다. 이 감옥에서 삶의 목적은 감옥 외부로부터의 격리다. 감옥외부를 향한 자유를 저당 잡힌 채 감옥 안에서 그저 존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쇼생크의 생활에는 내일에 대한 긴장이나 경쟁이 가져오는 불안이 없다. 그곳의 생활은 규칙적이고 단조롭기때문에 불확실성이 불러오는 공포도 없고 책임 때문에 갖게 되는 삶의 무거움 역시 없다. 이런 감옥에 인간은 길들여진다. 쇼생크는 그러한 길들여짐이 초래하는 결과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길들여진 인간에게 탈출은 무의미하고 자유는 무용지물이다. 운이 좋아 형기를 덜 채우고 석방된 노인 죄수들이 감옥 밖에서 겪는 부적응은 불안에서 공포로, 공포에서 자살로 이어진다. 이런 길들여짐은 이데올로기이거나 심리적 변화이기에 앞서 습성의 일상적 조작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미셸 푸코는 근대의 미시적 권력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감옥을 실례로 든다.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늪과 같은 감옥을 뛰쳐나가기 어렵게 된다. 게으르고 안일하며 권태로운 감옥의 습성에 의해 그 외부의 세계는 지워진다.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은 그 안의 존재로 제한되고 그 밖을 향해서는 모든 것이 차단된다. 그래야 감옥에 머물 수 있다. 감옥의 의미는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다, 군대로, 학교로, 전문 분야나 집단으로. 우리의 ‘조경’과 ‘조경학’도 쇼생크와 다름없는 감옥이다. 조경 1세대는 제 발로 쇼생크로 걸어들어 왔다(물론 다른 감옥의 1세대도 다 그러하겠지만). 그들은 좋은 안전울타리 속에 좋은 감옥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틀 속에서 길들여져 갔다. 벗어날 필요가 없었다. 이미 편안한 감옥이 있었던 것이다. 조경 2세대는 아마 1세대의 감옥에 불만을 느꼈을 것이다. 저 철망만 통과하면 좀 더 나은 세계가 펼쳐져 있을 거라는 낭만적인 낙관에 들떴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자유란 애당초 불가능했다. 불확실한 자유보다는, 새로운 내일의 책임보다는 길들여짐을 선택하는 게 백배 낫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일군의 2세대는 앞 세대가 가꾸어 온 감옥을 벗어나고자 여러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그 다양한 갈래의 길들을 여기서 나열하는 건 그들이 맞이한 또 다른 길들여짐에 대한 변명일 뿐이다. 그들 역시 길들여짐의 평화를 체득하게 되는 길 위를 걸었다. 감옥을 뛰쳐나오기보다는 감옥 안에 있으면서도 감옥 밖에 있다고 혼동한 것이다. ‘쇼생크 탈출’에서 앤디는 위험을 감수하고 ‘피가로의 결혼’을 감옥 안에 바람처럼 울려 퍼지게 한다. 마치 키에르케고르의 ‘영원한 순간’처럼, 그 순간에 도취된 모든 수인囚人들은 자신이 감옥 밖에 서 있다고 느낀다. 이 조경 2세대가 할 수 있었던 건,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이미지와 리얼리티의 혼동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자유라면, 그것은 자유의 길들여짐에 대한 궁색하고 초라한 인정에 불과하다. 쇼생크에서 앤디의 존재는 메시아와 다를 바 없다. 그는 감옥의 습성에 적응하기를 거부한 유일한 인간이었다. 죄수의 신분으로 감옥 내에 도서관을 만들었다. ‘브룩스 도서관’은 감옥 안에 존재하는 감옥의 외부였다. 쇼생크에 단순히 매몰되어가던 수인들은 이 도서관을 통해 또 다른 세계를 본다. 이 세계는 격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은 유일한 세계였다. 그렇지만 그 세계에 누구보다도 만족한 인간은 앤디 자신이었을 것이다. 20년을 버텼다. 탈옥을 결단한다. 하지만 탈옥 ‘이후’의 준비를 결코 간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유를 향한 ‘영화적’ 실험이 앤디를 반긴다. 조경 3세대, 어디서부터 누구부터 시작될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조경 3세대, 그들은 앞선 두 세대의 감옥을 극복해야 한다. 감옥과 탈출의 상징성이 너무 과격하다면 이렇게 말해 보자. 지키느라 불안하고 넓히느라 피로한 집안―조경―을 ‘가출’해 제대로 된 가문을 한번 일으켜 보자고. 우선은 앤디가 되어야 한다. 찬찬히 치밀하게 준비하고 감옥 안부터 다듬어야 한다. 그러나 앤디에 그쳐서는 안 된다. 앤디의 탈출이 다다른 곳은 막막하고 막연한 공간이었다. 온통 비어있는 바다와 모래사장에는 허무한 호흡만 가득했다. 영화는 애써 기적적인 자유를 서사적으로, 낭만적으로 극화했지만, 앤디의 자유는 역설적이게도 세상과의 완전한 절연이었다. 비존재의 확인이었다. ‘부자유의 부재’와 ‘자유의 존재’를 명증하게 구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다시 말해 어떤 가출이 참다운 가출인지 알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우선 어떻게 가출해야 할지, 우리는 안다. “생각의 감옥을 벗어나는 것.” 그것이 조경 3세대가 길들여짐을 뛰어넘어 자유를 품는 ‘가출’의 첫 걸음이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CODA] 다르게 생산하고 공유하기
    잡지사의 편집부에는 매달 새 책이 쌓인다. 『환경과조경』은 조경 전문지이니 대개 조경, 원예, 건축, 도시 관련 신간이 보도자료와 함께 도착한다. 그 가운데 새 책 담당기자의 안목 그리고 선배 기자들의 간섭(!)과 추천으로 서너 권의 책이 선정되어 이 달의 ‘새 책’ 꼭지가 꾸려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하루는 색다르게도 인터넷 관련 신간이 눈에 띄었다. 제목은 『텔레코뮤니스트 선언The Telekommunist Manifesto』.1 사실 『공산당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의 오마주인 듯한 제목보다는 그 밑의 부제목에 눈이 갔다. “정보시대 공유지 구축을 위한 제안, 카피파레프트와 벤처 코뮤니즘”이 그것이다. ‘공유지’ 그리고 ‘카피파레프트’란 단어에 눈길이 닿은 것이다. 사실 요즘 ‘공유’란 용어가 흔하게 쓰이는 만큼(비슷하게는 ‘공동성’, ‘공유 도시’, ‘공유 경제’ 그리고 ‘공공 공간’에서 ‘셰어하우스’까지) 그 의미가 명확하게 손에 잡히지는 않는다. ‘카피파레프트’는 낯선 단어이기는 해도 카피라이트 혹은 카피레프트와 같이 지적재산권과 관련된 이야기이리라 짐작되었다. 이 문제 역시 설계 분야와 무관하지 않다. 일례로 설계공모에서 저작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상금을 걸고 안을 공모한 발주처에 저작권이 돌아가야 하는 가, 아니면 창작자인 설계자에게 있는가 등은 가늠하기 쉽지 않은 문제다. 이렇게 둘다 ‘올바르게’ 보이기는 하지만 함께 놓기 어려운 두 개념이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할는 지 궁금했다. 그런 연유로 새 책 담당 기자에게 압력을 넣어 책을 먼저 손에 들었다. 『텔레코뮤니스트 선언』은 인터넷 상에서 일어나는 ‘공유’에 관한 통상적 이해를 뒤집는다. 흔히 웹2.0으로 통칭되는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 유튜브 같은 커뮤니티 공유 사이트의 등장은 과거 콘텐츠의 일방적 수용자를 직접적인 생산자이자 유통자로 참여하게 하면서 수평적 소통과 자유로운 협력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클라이너Dmytri Kleiner는 과연 웹2.0이 새로운 소통과 협력의 모델을 제시하는 혁명적인 모델인가 질문한다. “웹2.0은 공동체가 창출한 가치를 사적으로 포획하는 비즈니스 모델이다.” 일례로 “유튜브의 진정한 가치는 사이트 개발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유튜브에 비디오를 올리는 사람들이 만든다. 그러나 유튜브가 10억 달러가 넘는 주식으로 구글에 매각될 때 이 비디오를 만든 사람들이 받은 주식은 얼마나 되는가? 아무것도. 전혀. 없다.” 웹2.0 기업들은 자신의 콘텐츠를 생산하고 발행하기 위한 수단이 없는 사용자들의 ‘집단 지성’을 중앙 집중화시켜 공동체가 창출한 가치를 사유화한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현상은 실제 물리적 세계인 도시에서도 볼 수 있다. 지리학자인 하비David Harvey는 『반란의 도시Rebel Cities』2에서 도시를 “온갖 유형, 온갖 계급의 사람들이 서로 싫어하고 적대하면서도, 하나로 뒤섞여 끊임없이 변화하고 이동하는 삶을 살아가는 공유재common를 생산하는 장”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부동산 개발업자가 활기찬 거리, 다채로운 다문화 생활양식 등 그 지역의 ‘개성’을 부유층에 매각”하는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문제를 거론한다. “지역 원주민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공유재를 약탈당할 뿐만 아니라 종종 지대와 부동산세가 치솟는 바람에 쫓겨나기까지 한다.” 때로는 재활성화 정책으로 지역에 근근이 남아 있던 활력이 사라져 공유재 자체가 훼손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젊고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만들어낸 뉴욕 소호 지구의 활력은 이 지역의 경제적 가치가 올라가면서 망가져갔다. 그리고 이 활력을 만들어냈던 예술가들은 비싼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어 빠져나가게 된다. 우리 도시에서도 가회동이나 삼청동,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이러한 변화를 목도하게 된다. 그렇다면 공유지·공유재를 생산자들이 자유롭게 활용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는 가? 클라이너는 ‘또래생산peer production’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 용어는 하버드 대학교 법대 교수인 요카이 벤클러가 자유소프트웨어와 위키피디아 그리고 유사 작업들이 생산되는 방식을 기술하기 위해 만들었다. 또래생산은 다른 사람들의 소비를 방해하지 않는 ‘비경쟁적인 자산’으로서 공유지를 구축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재생산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산한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바꿀 수 있을 까? 바꾸어 말하면 또래생산자들이 자신의 생계유지에 필요한 물질적 필요를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에 클라이너는 독립적인 또래peer들 간에 필요한 물질 자산을 배분하는 시스템인 ‘벤처 코뮤니즘’을 제시한다. 벤처 코뮤니즘이 노동자들의 자기조직화를 위한 새로운 모델이라면, 카피파레프트 copyfarleft는 비물질 재화를 공유지로 가져오기 위한 수단이다. 아이디어에 대한 배타적 권리인 카피라이트는 ‘창작하는 사람들의 땀과 노력을 인정하고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하는데, 클라이너는 사실 이것이 보호하는 것은 창작자가 아니라 창작물을 판매하고 유통하는 기업의 수익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카피라이트를 비판하며 나온 것이 안티카피라이트anti-copyright나 카피레프트copyleft다. 둘 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비-소유의 공유 공간을 창출하기 위한 시도다. 그러나 여전히 기업들은 해당 라이선스를 어기지 않으면서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또한 클라이너는 카피라이트의 대안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는 크리에 이티브 커먼즈(CC)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다. CC에서 저자는 다른 이용자들의 상업적 이용을 금지할 수 있지만, 그 역시 저자 자신이 상업적 이용의 권리를 보유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저작물은 전혀 공유지에 속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카피파레프트를 주장하며 상업적 이용에 대한 계급적 제한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도입한다. 노동자 소유 기업은 카피파레프트 저작물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지만 사적 소유 기업의 사용은 제한된다. 카피파레프트는 이러한 기준을 통해 상업적 이용이 아니라, 공유지에 기반하지 않은 사용을 제한하고자 한다. 클라이너가 주장하는 공유의 방식을 실제 물리적 공간에 그대로 대입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공간과 가치를 공유하려는 창작자들에게 의미있는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리고 이번 호에 실린 ‘리빌드 바이 디자인Rebuild by Design’에서 그런 실마리를 찾게 된다. 필자인 유영수 소장의 말을 다시 옮겨본다. “이 같은 공모과정의 가장 큰 가치는 무엇보다 각 팀들이 단순한 경쟁 구도에서 벗어나 각자가 수행한 지역에 대한 분석과 그로부터 도출한 중요한 아이디어를 다른 모든 이들과 공유함으로써 지역 전체를 위한 더 나은 해법을 찾아내려는 공통의 목적에 기여한다는 점이다. 즉 공모 과정에서 생산된 모든 지적 결과물은 어느 팀에 제한적으로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자산으로 활용된다는 의미다.”
  • [시네마 스케이프] 경주 도시의 시간, 기억의 대상
    대한민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40대 이상이라면 경주에 대한 첫 기억이 수학여행일 확률이 높다. 동트기 전부터 산에 올라가 졸린 눈을 부비며 화장실인 줄 알고 들어가서 본 석굴암은 충격적으로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첨성대는 상상했던 것보다 작았고 포석정은 미니어처 같이 느껴졌다. 사진 속에서 본 유적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전통 양식을 어설프게 모방한 기와 장식의 4층 민박집과 넓은 잔디밭 위의 벚꽃이 석가탑보다 더 기억에 남는다. 바람에 흩날리던 벚꽃 아래에서의 수다는 눈부셨고, 민박집에서의 크고 작은 에피소드는 여전히 단골 안줏거리다. 경주의 첫인상은 불국사 앞에서 찍은 단체 사진(내 얼굴 찾기도 힘들다)처럼 박제된 이미지로 남아 있다. 첨성대 뒷모습의 표정이 앞모습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 황룡사의 빈터가 어떤 울림을 주는지 느끼게 된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난 후였다. 영화 ‘경주’(감독 장률)에는 불국사나 첨성대 같은 경주의대표 선수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오래된 골목, 찻집의 정원, 노래방 앞, 아파트 주변, 자전거 길 등 일상의 공간이 주요 무대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두 공간은 고분과 찻집 정원이다. 장률 감독은 재중 동포 3세로 특정한 장소가 가진 정서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의 감성을 주로 그려 왔다. 장률은 경주를 처음 방문했을 때 백 개가 넘는 고분이 일상과 아무렇지 않게 섞여 있는 모습이 특이해 보였다고 한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은 베이징 대학 교수로, 선배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남은 시간을 경주에서 보낸다. 남자는 고분 앞에서 교복 입은 고등학생들이 입을 맞추거나 소풍 나온 유치원생들이 재잘대며 지나가는 장면을 본다. 장률이 실제 느꼈을 경주의 첫인상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남자는 미모의 찻집 여주인과 얽히면서 그녀의 일상에 하루 동안 동행하게 된다. 여자는 아파트 창문을 열면 보이는 고분을 바라보며 “경주에서는 단 하루라도 능을 보지 않고는 살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 여자의 모임에 따라가 술을 마신 남자는 그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와 함께 술에 취한 채 걷다가 고분 위로 올라간다. 그녀는 고분에 엎드려 고분을 향해 소리치기도 하고, 건너편 고분에 올라가 자신과 똑같은 포즈로 누워있는 남자를 바라보기도 한다. 옆으로 누운 여자의 허리선과 고분의 부드러운 곡선이 닮아 보인다. 그녀를 짝사랑하는 남자는 그의 아버지가 고분 위에서 술을 마신 후 깔고 앉았던 돗자리를 타고 내려오곤 했다는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고분에서 술 취한 채 썰매타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난다. “알 만한 사람들이 문화재 위에서 뭐하는 짓들이냐. 문화재는 너희가 올라가 노는 데가 아니야”라고 호통치는 경비원에게 그들은 결국 쫓겨난다. 엄숙한 죽음의 공간과 자잘한 일상이 얽히는 상황은 경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다. 고분들과 멀리 보이는 도시의 불빛을 한 프레임에 담은 장면은 영화의 공간과 주제를 함축해서 보여주는 마법 같은 장면이다. 영화 속에서 고분이 경주의 실제 모습이라면, 찻집은 경주를 은유한다. 찻집은 오래전 모습을 간직한 채 현재의 시간이 흐르고 있으며 낯선 사람들이 방문하는 공간이다. 비밀을 간직한 아름다운 여주인이 있고 전통차라는 콘텐츠가 있다. 결코 화려하지 않은 작은 정원이지만 깊이와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내부 공간과 정원은 주인공들의 시선, 움직임, 감정의 변화로 점점 그 경계가 불분명해진다. 정원의 빛은 방으로 들어와 인물을 비추고, 방안의 인물은 정원에 있는 인물을 훔쳐본다. 소나기가 잠시 왔다가 그치면서 정원의 빛이 석양으로 노랗게 물들면 방안의 빛도 변하면서 인물의 마음도 움직인다. 여주인공으로 분한 신민아는 키가 커서 집과 정원을 더 작아 보이게 만든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고, 한겨레 영화평론전문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전공으로 삼아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지만, 극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그것이 주는 감동과 함께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텍스트라 믿고 있다.
  • 찰스 랜드리와의 아주 ‘평범한’ 인터뷰 진격의 ‘창조 도시’, 그 다음은 무엇인가?
    창조 도시의 주창자로 알려진 찰스 랜드리Charles Landry(Comedia 대표)와 메타기획컨설팅(이하 메타)의 인연은 약 십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5년 메타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추진단이 개최한 국제 콘퍼런스에 『The Creative City: A Toolkit for Urban Innovator』라는 저서를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랜드리를 초청하는 작업을 도 왔다. 이후 그의 대표적 저서 중 하나인 『The Art of City-Making』의 한국어판인 『크리에이티브 시티 메이킹』 출간을 기획했고, 대구, 부산, 서울, 광주 등에서 랜드리를 초청할 때마다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면서 관계를 돈독히 해왔다. 이번 전라북도에서 개최한 콘퍼런스를 앞두고도 랜드리는 자신의 일정을 미리 공유하면서 서울에서 다시 한 번 메타 식구들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2014년 6월 9일 오후 4시 반 용산역에서 시작되어 자정에 가까운 시간까지 진행된 이 밀착 인터뷰는 기존의 포럼·콘퍼런스·세미나 등에서 이루어졌던 공식적인 인터뷰 형식이 아니라 함께 먹고 마시고 산책하는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궁금한 내용을 서로 묻고 답하는 아주 평범한, 그래서 더욱 특별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용산역에서 서머셋 호텔로: 랜드리의 전북 방문기 몸집이 큰 백인 사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커다란 여행가방을 끌고 약속 장소로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랜드리 대표님이시죠.” “오, 반갑습니다. 전화했던 정 부소장이신가요” “네, 이쪽으로 가시죠.” KTX를 타고 용산역에 막 도착한 랜드리와 함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 역 앞 광장으로 내려갔다. 길을 건너 신속하게 광화문 방향 택시를 타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데, 갑자기 랜드리가 발걸음을 멈춘다. “와우, 저기를 좀 찍어야겠어요!” 용산역을 올려다보면서 이곳저곳을 끊임없이 자신의 갤럭시 스마트폰에 담는다. 택시에 올라서도 랜드리의 사진 찍기는 멈추지 않았다. 간판, 길거리, 나무, 독특한 건물들… “저게 국보남대문이죠? 저쪽으로 가면 서울시청이 있고요. 여기가 어딘지 알 것 같아요.” 오세훈 시장 시절, 디자인서울 정책 자문을 위해 시청을 방문한 적이 있었던 랜드리는 그 뒤를 이은 박원순 시장에 대해서는 잘 알지못하고 있었다. “새 시장님 이름이 뭐라고요” “메이어 박이에요. 박.원.순.” 그는 끝끝내 그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정종은(이하 정): “그건 그렇고, 이번이 한국에 일곱 번째 방문이신데, 전북 방문은 어떠셨나요?” 찰스 랜드리(이하 랜): “매우 흥미로웠어요. 흥미로운 콘퍼런스들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도 있었어요. 콘퍼런스 전날 밤에 호텔에 도착해서 자고 일어났더니, 다음날 아침에 바로 기조 강연을 하도록 일정이 짜여 있었죠. 저녁까지 콘퍼런스를 진행하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내가 있는 여기가 도대체 어디지’ 일단 도시를 둘러보고 나서 프레젠테이션을 했어야 했는데, 기조 발표를 마친 다음에야 도시를 볼 수 있었죠. 저로서는 그 반대로 일정이 짜여있었다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그 외에는 만족스러웠어요. 시골에서 전통 장인이 도자기 만드는 것을 본 일도 기억에 남구요, 한옥 마을에서 도시 속의 오아시스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공간들을 여럿 만난 것도 좋았습니다. 오늘 기차를 타기 전에 익산에서 한 예술 큐레이터가 오래된 거리를 재생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곳을 방문했는데, 너무 멋졌어요. 그런 시도들 이야말로 정말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990년 영국 최초로 유럽문화수도로 선정된 글래스고에 대한 연구 보고서에서 ‘창조 도시creative city’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으니, 랜드리가 이 개념을 파고든 지도 벌써 25년이 가까워진다. 그 세월 동안 그가 직접 방문해서 들여다보고 컨설팅을 진행한 도시의 숫자가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 전역에 걸쳐 수백 개를 헤아린다. 따라서 ‘그 경험에서 나온 알짜배기 교훈을 정제해서 들려주십사’하는 요청이 크게 무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내용이 없는 형식은 공허하고, 형식이 없는 내용은 맹목적”이라는 칸트의 말처럼,난생 처음 한 도시를 방문한 사람에게 최소한의 ‘내용’을 스스로 채우기 위한 시간을 미리 확보해주었다면 더욱 유익했으리라. 정: “예전에 방문했던 한국의 도시들은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대도시들이었는데, 이번에는 전주에 머무셨죠. 어떤가요? 전하고는 좀 느낌이 달랐나요?” 랜: “네, 전주는 인간적인 규모human scale를 갖고 있더군요. 게다가 콘퍼런스 장소가 한옥 마을 주변이었기 때문에 색다른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전통문화가 갖고 있는 독특한 힘이 분명히 있죠. 그런데 제가 더 궁금했던 것은 일상 문화였어요. 그 도시에 관한 생생한 느낌real feeling은 특별한 것에서가 아니라 일상적인 것에서 포착되는 법이거든요. 제가 자꾸 다른 곳, 더 평범한 곳을 가자고 하니까 사람들이 좀 이상해 하더라구요. 한옥 마을 바깥을 충분히 보지 못한 게 아직도 아쉽습니다.” 베이징과 상하이의 타산지석: 한옥 마을과 이태원의 미래를 위한 레시피 잠깐 서머셋 호텔 주변을 산책하며 서울의 ‘평범한’ 것들을 들여다본 후, 저녁 약속 장소인 이태원의 고깃집으로 이동했다. 소맥으로 시작하겠다고 우겨서 우리 일행을 놀라게 한 랜드리. 쌈장을 잔뜩 묻혀 차돌박이와 꽃등심을 흡입하시더니 급기야는 옆 테이블의 쌈장까지 자기 앞으로 가져간다. 한국식 음주 문화에 대한 싸이의 새 뮤직비디오, 중국에서 시작된 한류의 기원, 최근 K-Pop의 기세 등에 대해 한참 동안 담소를 나누다가 상하이, 베이징, 칭다오 등 재빠르게 ‘창조 도시’ 트렌드에 올라탄 중국의 도시들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랜: “언급한 도시들 외에도 여러 도시들에 초청을 받아 방문한 적이 있지만, 나는 매우 걱정스럽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중국의 도시들이 ‘미쳐가고 있다obviously going crazy’ 또는 ‘폭발할 것 같다explode’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최근 방문한 베이징에서 갖게된 느낌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여러 도시들이 창조 도시를 언급하지만, 슬로건으로 사용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중국 정부의 문화 부처차관과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창조도시에 관한 얘기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창조 경제’에관한 논의, ‘소프트 파워’에 관한 논의였습니다. 각 도시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섬세한 논의는 찾아보기가 힘들어요. 물론 나의 주관적 인상이 중국의 대표적인 도시들의 운명에 대해 정확한 판단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나와 교류한 일군의 중국인 전문가들도 매우 유사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문제의 근원은 ‘자유의 결핍’입니다. 자유를 동반하지 않은 창조성을 진정한 창조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서로 다른 문명에서 서로 다른 창조성 개념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슬람권의 ‘창조성’과 기독교권의 ‘창조성’, 그리고 유교권의 ‘창조성’ 개념은 같을 수가 없을 테지요. 또한 같은 유교의 영향을 받았더라도 일본의 ‘창조성’과 한국의 ‘창조성’과 중국의 ‘창조성’ 역시 상당히 다를 겁니다. 다시 베이징과 상하이로 돌아가 볼까요? 우리는 중국인들이 보여주는, 무언가 일이 되게 하는 것, 과감한 의사결정 등에 대해서 감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뭐죠? 점점 더 그 도시들이 살기 어려운 곳이 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오염과 같은 건강 이슈, 사회적 불신과 양극화 등은 문제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례로 아까 내가 언급한 전문가들은 꽤나 부유한 사람들이었는데요, 거의 모두가 유럽이나 북미에 따로 집을 갖고 있었습니다. 기회만 되면 중국을 떠나려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어요.” 랜드리는 유럽의 창조 도시가 표방하는 ‘창조성’은 구성원 모두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곳을 전제한다고 강조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자유의 결핍’이야말로 중국의 ‘창조 도시’를 진정한 창조 도시로 인정하기 어려운 이유이며, 중국의 도시들이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직면하지도 못하고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게 한다는 것이다. 다소 주제가 무거워지기도 하였으나, 저녁 식사 이후 이태원 구석구석을 산책하게 되자랜드리는 금세 이 세상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가진 천진난만한 아이로 되돌아갔다. 이견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그 지명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한국에서 이태원梨泰院/異胎院보다 더 국제적인 공간, 더 이문화적인 공간이 있을까? 이태원 뒷골목의 매우 모던한 카페에 자리를 잡고 주문을 마치자마자 랜드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전통문화의 본산인 전주 한옥 마을과 이문화의 집합소인 이태원 중에서 어디가 더 당신의 마음을 끌어당기느냐고…. 정종은은 서울대학교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영국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문화 정책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메타기획컨설팅에서Knowledge본부의 부소장으로 ‘세계문화정상회의 의제 설정 연구’,‘이야기산업 산업범위 확정 연구’, ‘꿈의 오케스트라 합동공연 효과성연구’, ‘콘텐츠코리아랩 아이디어융합공방’의 프로그램 개발 등을 수행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예술과 사회’를 가르치고 있으며,한국문화정책학회 학술이사를 맡고 있다.
    • 정종은 / 메타기획컨설팅 Knowledge본부 부소장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경관의 발견
    #21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꿈 구겐하임 미술관을 위시하여 불후의 명작을 무수히 남긴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1867~1959)에게 “당신은 당대 최고의 건축가입니다”라고 누군가 칭송하자 “당대뿐 아니라 동서고금을 통틀어 최고지”라고 응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 자신이 천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천재였던 모양이다. 그의 명작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폭포 위에 지은 집’(낙수장(落水莊) 혹은 Fallingwater)인데 건축주 에드거 카우프만이 애초에 원했던 것은 폭포 맞은편에 집을 지어 창밖으로 폭포를 바라보며 즐기는 것이었다. 라이트는 이를 무시하고 폭포 위에다 집을 지어버렸다. 그리고 폭포 소리, 즉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카우프만을 설득했다. 그때 집을 폭포 위에 짓지 않고 맞은편에 지었다면 과연 역사에 남을 작품이 되었을까. 라이트는 차갑고 비인간적인 인구 밀집형 도시를 못마땅하게 여겨 평생 그에 대한 대안을 고민했다. 그 결과 1932년, ‘리빙 시티Living City’의 비전을 펼쳐보였다. 한 가족당 1에이커, 즉 4,000m2 정도의 땅을 고루 분배받기 때문에 브로드에이커 시티Broadeacre City라고도 불렀다.2 미국 영토를 4,000m2 단위로 나누어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대륙에 고루 퍼져 살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정한 장소에 집중적으로 모여 도시를 형성하지 않게 되므로 도시로부터 자유로운 대륙이 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미 대륙 전체가 하나의 도시이자 국가가 될 것이므로 도시는 결국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게’ 된다. 4,000m2의 땅에서 농사도 짓고 살고 싶은 대로 산다면 새로운 사회가 형성될 것이라 했다. 결국 그는 새로운 이상향을 꿈꾸었던 것이며 건축가적 시선에서 도시설계를 통해 이를 이룩해 보려 했다. 만약 그의 비전대로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졌다면 미국인들은 현재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프레리 스타일’의 집에서 살고 있을 것이며 모기지론이니 금융사고니 하는 것도 모른 채 평화로울지도 모를 일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위시한 소위 ‘시카고 학파’의 건축가가 중심이 되어 19세기 말에 짓기 시작한 프레리 스타일 혹은 프레리 하우스의 건축적 특징은 땅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듯한 강한 수평성이며, 황토색, 적토색 등 자연적인 색과 소재를 이용했다는 점이다. 자연순응적인 건축 양식이라고도 한다. 프레리 스타일의 건축가들은 그들이 지은 집이 주변 경관에 스며들기를 원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프레리였을까. 프레리는 대초원이라고도 하여 북미 중서부 평원 지대를 이루는 독특한 경관을 말하기도 하고 그 경관을 이루는 식물 군락을 일컫기도 한다. 서부 활극에서 인디언이나 카우보이들이 프레리에서 시원하게 말을 달리는 장면은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프레리 위의 작은 집Little House on the Prairie’이라는 미국의 텔레비전 드라마가 있었는데, 1976년부터 1981년까지 한국에서도 ‘초원의 집’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어 많은 사랑을 받은 적이 있다. 서부 개척 시대에 대초원을 ‘개간’하여 마을을 만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후세의 우리들에게는 낭만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지만 당시의 개척민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진 풀밭을 갈아엎어야 했으므로 힘겨운 싸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풀이 너무 커서 말 탄 사람들이 완전히 그 속으로 사라질 정도라고 했다. 건조기에도 지하수를 빨아들일 수 있도록 뿌리를 깊이 내리는 프레리의 ‘큰 풀’ 중에는 1.5m에서 7m 깊이까지 뻗는 것도 있었다. 농사 지을 땅을 마련하기 위해 억센 풀과 싸움을 하는 동안에는 프레리가 가진 생태적 가치라거나 경관의 아름다움 등에 연연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1840년경 강철 쟁기가 도입된 후 1900년경까지 프레리는 무서운 속도로 사라져 갔다. 애초에 70만km2, 즉 한국 국토 면적의 일곱 배가 넘던 프레리 면적 중 현재 0.01퍼센트 정도만 남아 있다.3 19세기 말, 사람들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유사한 것을 찾아볼 수 없는 프레리 경관의 유일성을 ‘발견’한 것이다. 지금의 일리노이 주가 바로 한 때 큰 풀 프레리가 지배했던 곳이다. 시카고를 중심으로 프레리 보존 및 복원 운동이 일어났다. 1901년 헨리 챈들러 카울즈Henry C. Cowles(1869~1939)라는 생태학자가 시카고 주변의 프레리의 형성 과정,변천사와 유형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4 물론 아메리카를 발견한 이래 수많은 식물학자가 대륙을 종횡으로 다니며 식물을 수집하고 기록하긴 했지만 하나하나의 개체에 대한 관심에 그쳤다. 이제 처음으로 생물지리학적 관점 하에 기후, 토양, 식물, 인위적 영향 등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형성된 독특한 ‘경관’을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로 인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프레리는 백퍼센트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서부 건조지대의 ‘짧은 풀 초원Shortgrass Prairie’을 제외한다면 이미 인디언들의 손때가 묻은 경관이었다. 초지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언젠가는 숲으로 천이하게 되어 있다. 들소를 사냥해서 먹고살았던 북미 중서부의 인디언은 정기적으로 불을 질러 초원 상태를 유지하는 ‘들불 관리’ 기법을 일찌감치적용했다. 초기 생태학자들은 그 사실을 미처 몰랐으므로 프레리를 복원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진땀을 흘렸다. 수시로 비집고 올라오는 그악스런 목본식물을 근절하기 위해 농약을 엄청 뿌리기도 했다. 프레리를 복원하고자 하는 의도가 그만큼 절실했다. 사람들은 곧 프레리를 ‘미국적 경관의 이상형’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경관에 인간적 이념을 이입시킨 것이다. 이에 가장 앞장 선 인물이 빌헬름 밀러Wilhelm Miller(1869~1938)였는데, 그는 1915년, 조경에 프레리의 ‘영혼’을 담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32쪽짜리 책자를 발간했다.5 프레리를 거의 종교적으로 찬양했던 밀러는 다음과 같은 ‘프레리 헌장’으로 글을 맺는다. “나는 프레리에서 가장 우수한 인종들이 탄생할 것을 믿는다. 프레리에 세워진 국가와 지역사회의 아름다움을 옹호하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며, 이 아름다움을 훼손하고자 하는 탐욕에 대항하여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 빌헬름 밀러는 독일계 학자이며 조경가이며 지식인이었다. 위의 첫 문장과 독일이라는 국가를 합쳐보면 좀 듣기 거북한 대답이 나온다. 조경계의 나치 사냥꾼들 귀에 경종이 울렸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