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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경가의 서재] 그 새로움에 대하여
    새로움의 시대 ‘새로움’의 시대다. 새롭지 않으면 눈도 돌리지 않는다. 주변에선 모두 새로움을 추구하느라 난리다. 새로운 버전의 아이폰이 나오는 날에는 애플 스토어 앞에 밤샘한 이들이 장사진을 친다. 낡은 것, 익숙한 것은 이제 죄악시된다. 단지 새롭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왜 이리 새로움에 열광하는 것일까 사실 진중권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우연히 그의 서양 미술사 강의 동영상에서 대중 매체에 노출되는 모습과 다른 진지함을 보았다. 그 전에 읽은 몇 편의 글에서 ‘재기’는 충분히 보았지만 ‘지적 진지함’은 보지 못했기에 진지함이 묻어나는 그의 책이 읽고 싶어졌다. 학교 다닐 때 곰브리치Ernst H. J. Gombrich나 루카치György Lukács, 하우저Arnold Hauser 등의 미술사를 끝까지 읽지 못한 숙제를 해결해 보고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모더니즘 편』과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편』을 택했다. 고전예술 편은 건너뛰었다. 강의만큼 책이 쉽진 않았지만 미술사 전체를 서술하는 틀과 도판 자료는 어렵고 지루하기만 한 서양 미술사를 한 눈에 보게 해 주었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세상과 서양 미술사가 무슨 상관관계가 있으랴마는 예술가들의 앞선 사유의 흐름이 어떤 실마리를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다행히 첫 도판1부터 기대를 한껏 부풀려준다. 수 세기 동안 유지되어 온 고전 예술의 전통은 19세기 말,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일련의 흐름에 주류 자리를 내준다. 이 시기부터 현재까지 미술사의 흐름은 한마디로 ‘숨막히게 새로움을 추구해 온 시대’라 할 수 있다. 예술가들이 자칭한 ‘아방가르드avant-garde’2라는 단어에는 위험과 희생을 무릅쓰고 미지의 땅을 개척하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그의 언어로 서양 미술사를 요약해 본다. 안과 밖 자연이라는 ‘주어진 세계’ 속에 ‘머무는being’ 존재가 아닌, 자연 ‘밖에 서 있는ex-being, existence’ 인간은 자연을 원본 삼아 이를 모상함으로써 스스로 ‘만들어진세계’를 구축한다. 차츰 계몽을 통해 자연이 만만해지고 자신의 ‘만들어진 세계’가 자연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에 이르자 인간에게 자연은 더 이상 이상적인 모범이 아니다. 미술도 ‘자연의 재현’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먼저 화폭에서 색채가 춤을 추기 시작한다(야수주의). 그리곤 남아있는 형태와 공간을 실제로 지각되는 방식으로 그리자 화면 속 형태는 점점 지표성index을 잃어간다(입체주의). 이쯤 되니 내 바깥에 반드시 대상이 없어도 형태와 색채만으로도 회화를 완성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긴다(순수 추상). 이 자신감은 거칠 것 없이 더 끝으로, 회화일 수 없는 경계, 환원할 수 없는 근원까지 나아간다(절대주의). 망막에 맺힌 것만 드러내는 일이 지루해지자 이젠 좀 더 내 안의 정신적, 심리적인 것까지 밖으로 드러낸다(표현주의). 정치적으로 좌와 우, 계급 간의 대립이 격심해지자 정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급진적 미학을 앞세워 오감과 움직임을 포착한 회화와 사진이 등장하며, 기술과 예술의 통합을 꿈꾸는 예술가들은 기계적 건축과 도시를 이상향으로 제시했다(미래주의).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좌절된다. 김용규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하버드 대학교 설계대학원에서 방문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생태 기술 개발과 관련한 각종 연구 프로젝트의 총괄 책임자로참여했으며, 현재는 생태 기술과 디자인을 결합하는 분야에 관심을 쏟고 있다. 현재 일송환경복원과 Ecoid Corporation, USA 대표이사를맡고 있다.
  • [그들이 설계하는 법] 두 번째 이야기
    내가 보지 못했던 세상에 대한 발견 모든 설계 프로젝트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지적 탐구 과정으로 시작한다. 무언가를 조금 더 잘 알게 되면 꼭 그만큼 세상을 더 잘 보게 된다. 서울 중산층으로 태어나고 자란 내가 인생에서 겪은 경험의 폭이 넓을 리 만무하다. 모든 설계 과정은 그래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만나는 과정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정 정도의 두려움과 공존할 수밖에 없나 보다. 설계 과정이 아름다운 이유 중 하나는 설계 작품 하나가 끝나면 그 전의 나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다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세상의 복구 청년 시절 난 그다지 어린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어린이가 불편했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어린이집에 대한 논문으로 대학원 과정을 마치긴 했지만 학위 과정이 끝나자 그들에 대한 학구적 애정도 희석되었다. 지금도 종종 뜨끔한 점 중의하나는, 만약 나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나의 부모가 늙고 병들지 않았다면, 난 여전히 세상을 추상적으로 이해하고 설계했을 것이란 점이다. 내 주변에 사회적 약자가 늘어가면서 세상의 불친절함에, 세상의 물리적 환경을 디자인하는 설계가들의 무심함에 느닷없이 화가 날 때가 많아졌다. 지금이야 훨씬 좋아졌지만 아이의 유모차와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고 다녀야 했던 수년 전의 도시 거리는 100m를 전진하기에도 버거울 정도였다. 노면은 울퉁불퉁했고, 각종 시설들이 툭하면 앞길을 가로막았고, 단차와 턱도 즐비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설계의 디테일은 작품의 미학적 완성도와 더 관계 깊다고 생각했다. 디테일이 사회적 배려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서울시의 ‘공공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일에 참가하면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디자인 새마을운동’이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공공 디자인 가이드라인’은 이 사회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질적기준을 마련한 계기가 되었다. 취지로만 보자면 설계가의 자율성을 훼손한다기보다 설계가의 손을 벗어나있는 도시의 구석구석에 대한 촘촘한 점검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다. 젊고 신체 건강한 자는 세상의 크고 작은 돌부리들을 그저 뛰어넘어 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는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에도 누군가는 걸려 넘어지고, 작은 장애물 하나가 또 다른 누군가의 걸음을 가로막는다. 어리거나 나이 들거나, 몸이나 마음이 불편하거나, 세상의 지배적인 질서가 소외시킨 약한 자에게 세상은 여러모로 친절하지 않다. 평화로운 나라의 백성은 군주가 누군지 관심이 없고, 평등하고 안전한 사회에 사는 자는 법과 규제에 무심해도 전혀 문제가 생기지 않는 법이니, 가이드라인과 규제가 강화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사회가 규제없이 굴러가기에는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도 어린이와 관련하여 몇 개의 논문을 쓴 것이 밑천이 되고 아이를 직접 키우면서 위험한 세상에 대한 엄마의 본능적인 의구심이 더해진 탓에, 어린이 놀이 환경에 대한 고민과 생각을 축적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학생 시절의 관심이 개념적이고 학술적인 것이었다면 이제는 오히려 구체적인 아줌마의 관심일 터이다. 그래도 유아교육 전문가가 아닌지라 어린이 공간은 어린이 전문가와 함께 설계하는 것이 마땅하다. 놀이 환경 설계에 있어서 어린이들을 직접 만나고 선생님들과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 과정을 통해 내가 잘 알지 못했던 세상을 발견하게 된다. 나도 한때 어린이였으니 어찌 보면 잘 알지 못했던 세상이라기보다 잃어버린 세상에 대한 기억을 되찾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어린이를 위한 공간을 설계할 때는 그만큼 더 눈높이를 낮춰야 하고, 그만큼 더 유치해져야 하며, 그만큼 더 쪼잔해져야 하고, 그만큼 더 인내심이 필요하다. 어느 해 공원 설계 수업에서 서로 다른 열 명의 역할을 주고 그의 관점으로 공원을 분석하는 과제를 내주었다. 청소년 한 명, 중년 남자 한 명, 애기 키우는 엄마 한 명, 할머니 한 명 등등. 그중 한 명은 어린이의 눈높이인 지상 90~100cm 정도에서 공원 전체를 걸으며 사진을 찍었다. 우리가 관목이라고 부르는 식물이 아이의 눈앞에 거대한 수벽으로 펼쳐졌다. 반면 어른들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구멍으로 어린이들은 런닝맨 놀이를 하며 뛰어다녔다. 배치도를 전제로 하는 고정된 성인의 시각을 벗어나서 본 세상은 정말 위험한 전투장일 수도, 혹은 무엇이든 가능한 신세계일지도 모른다. 설계가 일단 시작되면 가급적 검증된 관점과 검증된 레퍼토리와 검증된 도형에 의존하고 싶은 욕구와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 예전에 누군가가 그랬다. 노인이 고집스러워지는 이유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그때까지 쌓아온 삶이 전부 무너지는 느낌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계가에게 자기부정은 생각만큼 멋진 피드백 프로세스가 아니다. 하지만 반성과 성찰이 삭제된 작업은 자신의 잠재성을 스스로 굳혀버리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마치 접착제로 붙여버린 레고 블록처럼!1 나를 돌이켜보는 성찰 과정은 나의 잘못만을 반성하는 일은 아니다. 내 작업 과정에 접착제로 붙어있는 부분들을 찾아 필요한 만큼 해체하고, 검증된 조립 설명서 외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 있도록 레고 블록을 스스로 해체하는 일, 즉 창조를 위한 파괴 작업이 설계적 반성 혹은 설계가의 성찰의 목표이자 방법일지 모르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계기가 필요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당연하게 여기던 질서를 새삼스럽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아연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와 동 대학원 및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건축대학원 조경학과를 졸업했다. 미국Stephen Stimson Landscape Architects와 가원조경기술사사무소,디자인 로직에서 실장으로 일했으며, 국내외 다양한 스케일의 조경 설계를 진행해왔다. 자연과 문화의 접합 방식과 자연과 커뮤니티의 변화가 가지는 시학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느슨한 설계 집단 스튜디오 테라의 대표로서 조경 설계 실무와 설계 교육 사이를 넘나드는 중간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 김아연[email protected] /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스튜디오 테라 대표
  •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귄터 보크트 보크트 조경설계사무소 설립자 겸 소장, 스위스취리히연방공과대학 석좌교수
    지금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에서는 아티스트 댄 그레이엄Dan Graham과 조경가 귄터 보크트의 협력 프로젝트인 옥상 정원, ‘생울타리와 반사 유리 체험Hedge Two-Way Mirror Walkabout’을 선보이고 있다. 그레이엄은 반사 유리를 이용한 파빌리온pavilion으로 유명한 작가다. 그는 현대 도시의 대표적 소재인 철과 유리를 사용한 미니멀리스트minimalist 스타일의 추상적인 구성을 통해 서구 정원의 통인 파빌리온을 재해석한다. 그의 작품은 건축과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며 현대 미술과 건축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전통적인 파빌리온이 정원의 초점focal point으로 작동하는 반면, 그레이엄의 작품은 주변의 환경을 반사하며, 공간을 나누고, 틀을 짓는 역할을 한다. 귄터 보크트는 스위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경가로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디자이너 중 한 사람이다. 알리안츠 아레나Allianz Arena, 노바티스 캠퍼스Novartis Campus Park, 국제축구연맹 본부Home of FIFA, 런던 이스트빌리지East Village와 테이트모던 미술관TateModern Collection 등의 프로젝트는 조경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디자인 프로세스나 기저에 깔린 생각에 대해서는 이해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지난 5월 16일, 뉴욕건축센터Center for Architecture에서 열린 ‘도시의 자연Urban Nature: Between Human and Non-Human’ 콘퍼런스에 참여하기 위해 뉴욕을 방문한 귄터 보크트를 만났다. 그에게서 이론이 단단하게 뭉쳐진 실무 조경가라는 느낌을 받았다. 귄터 보크트는 최근 여러 강연을 통해 프로젝트 자체에 대한 소개보다는 주로 현재 조경이 처한 역사적 맥락과 조경 설계의 환경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2005년부터 스위스 취리히연방공과대학Eidgenössische Technische Hochschule Zürich(ETH Zürich)건축학과 교수직을 맡은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힘든 이유로 이미지에 기반을 둔 사고방식을 꼽았다. 즉 공공 공간이나 도시를 설계하기 위해서는 경관의 각 요소에 대한 역사나, 그 요소들이 존재하는 이유, 각 요소의 구체적 작동 방법 등 전반적인 도시화의 과정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 건축이란 기본적으로 매우 제어된 상황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그러한 맥락을 무시하고도 작품이 성립할 수 있는 경우가 많지만, 조경의 경우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 보크트의 논지다. 보크트는이미지 이전에 그 아래에 숨겨진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취리히와 스위스의 물리적·문화적 환경을 예로 들면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현재 스위스 디자인의 힘을 뒷받침하는 토대를 세가지 요인으로 정리했다. 첫째, 스위스의 자연 환경이다. 알다시피 스위스는 항상 알프스를 무대로 살아왔다. 영국이나 프랑스 등 유럽 주요국들의 조경은 낭만적인 이미지의 구축을 통해 발전해 왔다. 이에 반해 스위스는 혹독하고 위험한 자연 환경을 다루기 위해 언제나 실질적 가치와 효율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디자인역사가 전개됐고, 이 때문에 비교적 일찍 모더니스트 디자인의 원리를 받아들여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했다. 둘째, 스위스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한 정치 사회적 역사 과정이다. 스위스는 유럽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유럽연합EU에 속하지 않고 중립국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한 번도 왕정이나 귀족 정치를 거친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스위스의 각 마을에는 직접민주주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다. 전통의 무게와 굴레가 제거된 상황에서 스위스는 독자적이고 실리적인 건설과 설계 문화를 개척해 왔다. 셋째, 스위스의 독특한 장인 문화와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교육 과정이다. 학생들은 16세가 되면, 고등학교와 대학 교육을 받을지 아니면 도제apprenticeship 수업을 받기 위해 마스터의 견습생으로 들어갈지 결정해야한다. 대부분의 국가와는 달리 스위스는 각 전문 분야를 자격증 제도를 통해 보호하지 않는 반면, 도제 교육을 통해 이른 나이에 직업적으로 성숙한 프로페셔널을 길러냄으로써 높은 설계·시공 품질을 유지하고 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 지형으로 구성된 환경과 큰 나라들 사이에 끼어 시달려온 역사적 상황, 식민 지배와 전쟁으로 인해 말소된 전통 등 한국의 사정은 귄터 보크트가 묘사하는 스위스와 상당 부분 유사하다. 그는 종종 ‘랜드스케이프landscape’와 ‘랜드스케이프 파크landscape park’를 구분해 말하는데, 스위스는 ‘디자인되지 않은 랜드스케이프un-designed landscape’라고 한다. 구체적인 맥락은 다르지만 빠른 산업화를 거치며 대부분의 도시 환경을 실용성 위주로 건설해 온 한국의 경관적 여건도 이와 유사하다. 미국이나 서구 선진국처럼 우리와 국토와 문화적 여건이 다르고, 서서히 성장하고 성숙해온 나라들에 비해 스위스는 직접 참고 할만한 사실이 많다는 뜻이다. 인터뷰를 통해 귄터 보크트의 작품과 스위스 디자인은 어느 순간 이루어진 신화가 아니라 주목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전시해 왔다.
  • [공간 공감] 메리츠 타워
    이번 호의 대상은 ‘걱정 인형’으로 잘 알려져 있는 메리츠화재 사옥의 외부 공간이다. 강남역 사거리의 남동쪽에 위치한 메리츠 타워는 내년이면 준공 10년차가 되는 꽤 오래된 건축물이지만, 의외의 외부 공간이 있다는 점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 독자들도 사진만 보고서는 외국 프로젝트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곳을 잘 모르는 일차적인 이유는 눈에 잘 띄지 않아서다. 강남대로와 면한 건물 전면에도 약간의 공공 공간이 조성되어 있지만 그곳이 건물 후면 공간의 존재를 암시하지는 않는다. 건물의 측면에서도 접근할 수 있기는 하지만 멀리서 보기에는 막다른 골목처럼 보여서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메리츠 타워의 로비에 들어서면 거대한 창의 액자 효과를 통해 비로소 후면 공간을 감상할 수 있다. 다소 까다롭게 그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은 건물의 후면 진입부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강남역 상업 지역의 이면도로에서 이 공간으로 진입할 수 있지만 두 팔을 벌려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육중한 담의 크지 않은 문을 통과해야 후면의 외부 공간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기업에 따라 사옥의 외부 공간을 감상하거나 사진을 찍는 도중 경비원의 압박 수비를 받는 경우도 있지만, 이곳은 비교적 견제 없이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다. 안내판에 흡연이나 요란한 이용에 대한 자제가 당부되어 있는 정도다. 이것이 정교한 의도인지는 설계자의 설명을 듣지 않았으니 정확히 알길은 없다. 하지만 민간이 공공에 제공한 공간이되, 아는 사람들만 조용히 사용하는 정도로 설정된 소극적 분위기를 풍긴다. 열려있으나 비밀스러운 정원이 라고 부를 만하다. 공간 자체의 완성도는 만족스럽다. 공사 비용을 걱정하지 않고 쓴 듯한 고가의 재료가 말끔한 디테일로 시공되어 있고, 메인 뷰는 다소 복잡해 보이지만 잡다하지는 않다. 나무가 땅을 만나는 상식적 방식에서 벗어나 있어서 (대왕참나무 입장에서) 다소 걱정이 되긴 하지만, 공간을 지배하는 스테인리스 스틸과 유리는 세련되어 보이고 건축물과 담에 의한 후면 공간의 위요감도 만족스럽다. 특히 주 재료인 스테인리스 스틸은 외부 공간을 밝고 생기 있게 만들고 있지만,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게 하는 적절한 선택이다. 캐스케이드cascade 방식의 물 활용은 강남역 이면 도로와의 단차를 극복하고 공간을 생동감 있게 연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흘러내리는 물의 양이 적으면 차분하게 보일 텐데 많은 양의 물을 꽤 급한 경사로 쏟아붓다보니 물의 패턴도 역동적으로 보인다. 물의 질감은 건물 내에서도 흥미로운데, 소리가 소거된 상태로 물의 부서짐을 감상할 수 있다. 물에 관한 재미있는 관찰은 외부 공간에서도 이어진다. 캐스케이드 방식의 수경 시설은 후면 공간 전체를 대상으로 큰 물소리를 생산하고 있다. 캐스케이드와 외부 공간을 구획하는 옹벽 사이에 생긴 선큰 공간에는 벤치와 함께 휴게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정욱주는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하였다. 글쓴이 외에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였고,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 [칼럼] 재해로부터 공동체를 지키는 방법
    저녁이 되면서 내리던 비는 더욱 거세졌다. 폭우 속에서 처량하게 순서를 기다리던 비행기들은 모두 결항됐다. 우리는 곧 허물어질 듯 한 여관에 도착했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어섰고, 날씨는 더거칠어져 있었다.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덜컹거리는 창문, 펄럭이는 맥주 회사 달력, 무엇보다 지린내가 절어 있었다. 여기에 묵었던 사람들의 오줌은 훨씬 더 독한 모양이었다. 머리만 대면 바로 잠을 자는 내 동행은 아마 태어나서 처음으로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창문 밖 어둠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온 몸이 긴장되어 자리를 펴고 눕는 것조차 생각할 수 없었다. 그와 나는 갑자기 어느 깊은 외딴 구석에 격리되고 절연되고 갇힌 것이다. 풍요롭고 안락하게만 느끼던 휴가지의 공간이 갑자기 사라지고, 잠들면 어두운 수렁에 빠질 것 같은 두려운 휴전 상태로 던져졌다. 장엄한 아포칼립스apocalypse의 스펙터클에 갇혀 날이 밝기를, 비바람이 잦아지기를 조용히 기다릴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 태풍으로 수천억 원의 재산 피해와 수백 명의 인명 피해, 그리고 수천 명의 이재민이 생겼다. 우리 사회는 매년 이와 비슷한 재해를 겪었고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다보니 매년 겪는 일쯤으로 생각하기도 했고, 어떻게 매번 똑같은 일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지 의아해하기도 했다. 건축 저널리스트로 일을 막 시작할 때 이 일을 겪다보니 건축가들이 제안한 재해에 대응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작업을 찾아보기도 했다. 기후 변화와 환경 오염 등 자원의 과소비로 인한 자연의 위협이 커지고 있지만, 국내 건축계는 이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했다는 점을 확인했을 뿐이다. 2011년 3월 11일,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대재앙의 실체에 직면했다. 일본 도호쿠東北 지방에서 일어난 대지진과 쓰나미는 후쿠시마 원전의 붕괴로 이어졌고, 아직도 진행 중인 이 재난은 가장 선진적인 자본주의 국가의 내적 문제와 한계를 가장 묵시록적으로 드러냈다. 이 재앙은 일본 사회는 물론 국제 사회에 원자력에 대한 반성을 일으켰다. 일례로, 이와사부로 코소는 “지금껏 ‘인류의 진보’로 여겨지던 ‘장치’의 한 가지 도달점–에너지 공급의 효율화와 생산의 고도화, 정보·과학기술, 그것들과 복합적으로 얽힌 관료 기구와 시민사회–이 재해를 계기로 자기 붕괴”한 표시라고 이 재난을 진단했다. 건축가인 토요 이토도 “쓰나미 피해와 원전 사고라는 두가지 재해 모두가 인재라는 결론에 이르렀다”며 “사람과 공동체가 건축의 존재 이유”라고 말했다. 그리고 집을 잃은 센다이 시 미야기노로 가서 참사를 함께 이겨낼 공동체를 위한 건축 ‘모두의 집Home for All’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게루 반은 이재민을 위한 임시 거주 공간 프로그램을 꽤 오랫동안 지속하고 있기도 하다. 일본 정부는 아직도 정확한 상황을 공개하고 대처하기보다는 은폐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만, 일본 건축계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새롭게 변화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환경과조경』 이번 호에 소개되는 ‘리빌드 바이 디자인Rebuild by Design’도 매우 흥미로운 설계공모다. 주 정부에 의해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2012년 10월 허리케인 샌디가 강타한 뉴욕의 해변 지역을 미래의 재해에서 보호하고 거주민들에게 안전하고 매력적인 곳으로 만들기위해 시작되었다. 이를 구현하는 제안들을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지역민이 참여해 만들어가고 있는데, 현재 OMA와 BIG 팀 등 건축가, 조경가, 엔지니어, 도시학자, 사회학자, 정치가 등이 한 팀으로 구성된 여섯 개의 협력적 팀을 최종 선정해 그들이 함께 이 지역의 새로운 청사진을 그려가고 있다. 장기적 안목에서 재해를 예방하는 것이 더 나은 해결책이라는 공감대가 정부와 시민사회에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재해 대처 능력이다. 참으로 답답하게 이번 세월호 참사로 우리는, 우리 사회의 법과 질서의 붕괴, 민주주의의 타락, 그리고 사회적 재앙을 처절하게 목도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망가뜨린 생태계를 복원하는데도 우리 건축, 도시, 조경 전문가들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있다. 4대강의 환경 문제가 연일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그 심각성이 우리 삶을 위협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뒷짐을 지고 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이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재난을 불러올 수 있으므로 그 환경 속에서 우리의 건축을 고민해야 하지만, ‘안일한 유토피아’ 담론의 종결자인 4대강 사업이나 원자력발전에 대해 새롭게 검토하자는 건축계의 적극적인 목소리와 구체적인 제안은 아직 요원하다. 뉴욕 주지사 앤드루 쿠오모Andrew Cuomo의 말로 마무리를 대신한다. “지구상의 많은 지역은 분명 대자연의 소유다. 어느 순간, 대자연으로부터, 당신이 이곳에 살기를 원치 않는다고 느낄 때가 올 것이다.” 박성태는 중앙일보 출판국에서 잡지 에디터로 일했다. 그 후 『인서울매거진』과 『공간』의 편집장을 지냈다. 현재 정림건축문화재단에서 『건축신문』, ‘건축학교’, ‘프로젝트 1’, ‘통의동집’ 등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 [에디토리얼] 회복탄력성
    우리는 누구나 온갖 역경과 시련을 겪으며 살아간다. 자잘한 일상사에서도 수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다. 인간관계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갈등이다. 예기치 않은 사고로 신체의 기능에 큰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거나 가족을 떠나보내는 아픔을 맞이하기도 한다. 갑작스런 지진이나 태풍이 한 개인의 일생과 사회의 역사 전체를 앗아가기도 한다. 그 극심한 고통과 좌절을 어떻게 견디고 살아갈 수 있을까 싶은 순간들.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삶의 역경과 시련을 이겨낼 잠재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최근의 심리학은 그러한 힘을 ‘리질리언스resilience’라 부른다. ‘회복탄력성’으로 번역되고 있는 리질리언스는 “원래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힘”을 뜻한다. 밑바닥까지 떨어져도 꿋꿋하게 다시 튀어 오르는 능력, 불행과 역경을 이기고 다시 일어서서 더 성장하게 하는 인간 내면의 신비한 힘을 설명하는 개념이 회복탄력성이다. 그런데 회복탄력성을 누구나 똑같이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무공처럼 강하게 되튀어 오르는 사람도 있지만 유리공처럼 바닥에 떨어지는 즉시 산산조각나는 사람도 있다. 『회복탄력성』(위즈덤하우스, 2011)의 저자인 연세대학교 김주환 교수는 회복탄력성을 “마음의 근력”에 비유한다. “몸이 힘을 발휘하려면 강한 근육이 필요한 것처럼, 마음이 강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마음의 근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마음의 근육이 견뎌낼 수 있는 무게를 훈련을 통해 키우는 일이 중요하다. 구부러질지언정 결코 부러지지 않는 회복탄력성을 길러나가는 사람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가능성이 높다. 회복탄력성은 심리학과 교육학을 넘어 최근에는 경제학이나 안보 분야에서도 주목받을 만큼 널리 유행하고 있지만, 실은 생태학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전통적인 생태학은 생태계를 안정적이고 결정적이며 위계가 분명한 닫힌 시스템이라고 인식했지만, 현대 생태학은 생태계의 복잡성, 동적 변화, 지속적인 교란disturbance에 초점을 둔다. 즉 생태계는 평화롭고 안정적인 낭만의 세계가 아니라 끊임없는 교란에 의해 계속 망가지고 회복되며 적응해가는 열린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잠시의 집중 호우에 맥없이 초토화되곤 하는 우리 도시의 산과 강, 순간의 강풍에 형체도 없이 해체되는 우리의 자연 환경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태학자 홀링Crawford Stanley Holling은 회복탄력성을 “시스템의 지속성을 유지하고 변화와 교란을 흡수하고 상태 변수 사이에 동일한 관계를 유지하는 능력의 정도”라고 정의한 바있다. 바꿔 말하자면, 회복탄력성이 높은 자연이나 환경의 시스템은 지진, 가뭄, 홍수, 태풍, 화재 등과 같은 예상치 못한 교란을 겪더라도 지속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심리학적 회복탄력성이 마음의 근력이라면, 생태학적 회복탄력성은 자연과 도시 환경의 근육인 셈이다. 이번 호에 싣는 ‘리빌드 바이 디자인Rebuild by Design’은 계획과 설계를 통해 재난 지역의 회복탄력성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목표를 지향한, 큰 의미를 지닌 프로젝트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2012년의 허리케인 샌디는 현대 도시 경제와 문화의 심장부인 뉴욕 메트로폴리탄을 강타함으로써 현대 문명이 자연의 재해에 얼마나 취약한지 적나라하게 알려주었다. 본문에서 유영수 소장이 예리하게 진단하고 있듯이, “‘리빌드 바이 디자인’이 재건 프로젝트를 통해 기상 재해와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수해 위협을 완벽하게 차단하겠다고 공언했다면, 그것은 오만한 착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빌드 바이 디자인’은 현실적이고도 겸손한 지혜를 보여주었다. 앞으로의 기상 이변이 현대 도시 문명의 통강한 근육이 필요한 것처럼, 마음이 강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마음의 근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마음의 근육이 견뎌낼 수 있는 무게를 훈련을 통해 키우는 일이 중요하다. 구부러질지언정 결코 부러지지 않는 회복탄력성을 길러나가는 사람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가능성이 높다. 회복탄력성은 심리학과 교육학을 넘어 최근에는 경제학이나 안보 분야에서도 주목받을 만큼 널리 유행하고 있지만, 실은 생태학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전통적인 생태학은 생태계를 안정적이고 결정적이며 위계가 분명한 닫힌 시스템이라고 인식했지만, 현대 생태학은 생태계의 복잡성, 동적 변화, 지속적인 교란disturbance에 초점을 둔다. 즉 생태계는 평화롭고 안정적인 낭만의 세계가 아니라 끊임없는 교란에 의해 계속 망가지고 회복되며 적응해가는 열린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잠시의 집중 호우에 맥없이 초토화되곤 하는 우리 도시의 산과 강, 순간의 강풍에 형체도 없이 해체되는 우리의 자연 환경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생태학자 홀링Crawford Stanley Holling은 회복탄력성을 “시스템의 지속성을 유지하고 변화와 교란을 흡수하고 상태 변수 사이에 동일한 관계를 유지하는 능력의 정도”라고 정의한 바있다. 바꿔 말하자면, 회복탄력성이 높은 자연이나환경의 시스템은 지진, 가뭄, 홍수, 태풍, 화재 등과 같은 예상치 못한 교란을 겪더라도 지속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심리학적 회복탄력성이 마음의 근력이라면, 생태학적 회복탄력성은 자연과 도시 환경의 근육인 셈이다. 이번 호에 싣는 ‘리빌드 바이 디자인Rebuild by Design’은 계획과 설계를 통해 재난 지역의 회복탄력성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목표를 지향한, 큰 의미를 지닌 프로젝트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2012년의 허리케인 샌디는 현대 도시 경제와 문화의 심장부인 뉴욕 메트로폴리탄을 강타함으로써 현대 문명이 자연의 재해에 얼마나 취약한지 적나라하게 알려주었다. 본문에서 유영수 소장이 예리하게 진단하고 있듯이, “‘리빌드 바이 디자인’이 재건 프로젝트를 통해 기상 재해와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수해 위협을 완벽하게 차단하겠다고 공언했다면, 그것은 오만한 착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빌드 바이 디자인’은 현실적이고도 겸손한 지혜를 보여주었다. 앞으로의 기상 이변이 현대 도시 문명의 통제를 벗어날 가능성을 전제하고, 그로 인한 재난상황으로부터 도시의 회복 능력, 즉 ‘회복탄력성’을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 점은 이 프로젝트가 동시대 조경, 도시설계, 도시계획 분야에 던지는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보다 회복탄력적인 지역을 만들기 위해 함께 작업하자Working together to build a more resilient region”라는 모토를 공유하며 설계적 지혜를 모은 여섯 팀의 당선작을 꼼꼼히 살펴보는 일도 흥미롭지만, ‘리빌드 바이 디자인’ 설계공모의 프로세스 자체가 회복탄력적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4단계에 걸친 다단계 공모 과정, 학제간 전문가 집단의 협력, 공공 기관의 리서치 지원, 지역 사회의 참여, 기업 재단의 후원 등이 정교하게 결합된 공모 프로세스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욕망에 따라 계속 변화하고 교란되기 마련인 대형 프로젝트의 운명을 회복탄력적으로 지탱시켜 준다. 비평가 줄리아 처니악Julia Czerniak은 『라지 파크』(도서출판 조경, 2010)에서 성공적인 대형 공원의 조건으로 ‘가독성’과 ‘회복탄력성’을 꼽은 바 있다. 다운스뷰 파크나 프레시 킬스와 같은 2000년대 초반의 프로젝트를 통해 현대 조경의 쟁점 중 하나로 부각되기 시작한 회복탄력성은 이제 ‘리빌드 바이 디자인’을 통해 본격적인 설계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압축적인 근대화와 경제 성장이 낳은 일상적위험이 상존하는 우리 사회―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대표적인 ‘위험사회’―의 현실은, 조경가의 전문성이 존중되지 않고 비정상적일 만큼 많은 정치적·사회적 간섭과 교란을 겪는 우리의 설계 환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하고 진화할 수 있는 회복탄력적 설계를 요청한다. 자연과 도시 환경의 회복탄력성을 기를 수 있는 설계적 지식을, 회복탄력적 설계를 가능하게 하는 실천적 지혜를 탐구할 시점이다. 방대한 양의 자료를 헤치며 ‘리빌드 바이 디자인’을 리뷰해주신 유영수 소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빼놓을 수 없다. 봄날이 갈 무렵 합류한 조한결 기자에 이어, 조경학을 전공한 양다빈 기자가 한여름을 열며 편집부의 새 식구가 되었다. 젊은 그들의 열정과 능력이 차곡차곡 쌓여갈 때 『환경과조경』은 물론 한국 조경의 근력 또한 튼튼해지리라 믿는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CODA] 내 인생의 책
    이번 호 특집 ‘활자 산책’을 준비하며, 주변 지인들에게 ‘내 인생의 책’ 다섯 권씩을 꼽아달라고 부탁했다. 10분 만에 답변을 준 이도 있었고, 시간을 좀 달라며 마감 시한을 확인한 이도 있었다. 몇몇은 실명이 밝혀지는 걸 꺼려했다. 은근히 부담스럽다는 말도 덧붙였다. 어떤 이는 ‘내 인생의 책’의 기준을 되묻기도 했다. 인생의 어떤 선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책일 수도 있고,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일 수도 있지 않겠냐는 뻔한 답변을 주기도 했고, 질문을 듣자마자 곧바로 떠오른 책이 바로 ‘내 인생의 책’이 아니겠냐는 답을 하기도 했다. 그들이 보내온 도서 목록을 들여다보는 일은 흥미로웠다. 짧은 선정(?) 이유를 보내온 이들도 있었는데, 그 몇 줄에 인생의 굵직한 순간이 담겨 있기도 했고, 책 한 권으로 비롯된 독특한 경험을 엿볼 수도 있었다. 같은 책을 비슷한 이유로 좋아한다는 대목을 읽고 나서는 한 뼘쯤 그 사람과 가까워진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내가 시큰둥했던 책을 색다른 이유로 좋아한다는 이도 있었다. 연배가 비슷한 경우는 교점이 상당했다. 잡지와 단행본 필자로 인연을 맺은 이들에게 부탁했던 탓인지, 글쓰기와 관련된 코멘트도 꽤 있었다. 다른 이에게 ‘내 인생의 책’을 부탁하며, 나만의 리스트도 한번 추려봤다. 스스로에게 약간의 시간을 주고, 생각나는 책 제목과 이유를 한 줄씩 적어내려 갔다. 어렵지 않게 읽은 책 3권과 만든 책 2권을 꼽았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만든 책 2권이 영 찜찜했다. 곧바로 이 책도, 그 책도, 저 책도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책 50권이라면 몰라도 5권은 도저히 못 고르겠다. 성서 이외에 4권은 도저히 선정할 수 없어서 고심끝에 포기했다”는 어느 연재 필자의 답변이 십분 이해되었다. 직접 편집한 책을 제외하고, 다시 후보를 추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좀 더 여유를 갖고 독서의 추억을 되짚어 나갔다. 책장을 들여다보며, 제법 꼼꼼히. “초등학교 5학년 때 밤새 읽은 최초의 어른 소설책”이라는 이유와 함께 『수호지』를 꼽은 이도 있고, “고교 시절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에 실려 있는 ‘들소’를 읽고 세상에 이렇게 글 잘 쓰는 사람이 있는지 처음 알았고, 고3 때에는 이 소설의 모티브를 베껴서 습작이랍시고 써본 기억이 난다”는 답변도 있었건만, 나는 아무리 기억을 짜내도 대학 시절 이전에 읽은 책 가운데에는 영 떠오르는 책이 없었다. 심지어 “초등학교 고학년 때 집에 있던 『동아학생대백과사전』을 1권부터 12권까지 그냥 쭉 읽었더니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이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러다가 책장에 집중했다. ‘언제부터 나만의 책장이 있었더라’ 그러고 보니 대학입학과 함께 부모님의 집을 떠나 살기 시작한 스무 살 이전에는 나만의 책장이래야, 참고서 따위만 빽빽이 꽂혀 있던 아주 빈약한 것밖에 없었다. 거실에는 아버지의 책과 전집류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번듯한 책장이 있었지만, 나의 것은 아니었다. 군대 시절을 제외하고, 결혼 전의 6년 동안 내 자취방 한 구석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던 책꽂이는, 값싼 칼라박스(?)였지만 그 속을 채우고 있던 내용물만은 온전히 나의 것이었다. 마치 보물창고를 알려주듯, 자신의 단골 헌책방을 소개해준 선배를 따라나서 수집한 책은 물론이고, 창간호부터 폐간 때까지 정기구독했던 영화 잡지 『키노』를 비롯해서, 한 권 한 권에 사연이 깃들어 있던 책들이었다. 결혼 후에도 한동안 그 책들은 책장을 옮겨가며 살아남았다. 점점 책이 늘어나면서, 책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붉은색 포장 끈으로 묶인 상태 그대로 집안 한 구석에 처박혀 있었을지언정. 상황이 갑자기 달라진 시점은 아이가 태어난 후였다. 집안에 있던 책장의 풍경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나와 아내의 책은 붉은색 포장 끈의 포박을 피하지 못했고, 상당수의 책은 아예 퇴출의 아픔을 맛봐야 했다. 게다가 아이가 커갈수록 구조조정의 횟 수도 늘어났다. 꺼내기 쉽고 눈에 잘 띄는 곳에 자리한 책장은 모두 아이의 책이 차지했고, 어렵게 목숨을 부지한 나와 아내의 책은 구석진 자리에 만족해야 했다. 물론 자주 보는 책(다시 말하면 인용을 많이 하는 책)은 사무실의 내 자리와 가까운 곳에서 볕을 잘 쬐고 있지만 말이다. 때문에 지금 나의 책장에서 살아남은 책은 나의 독서 경험을 시대순으로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내 인생의 책’ 후보로는 충분한 자격이 있는녀석들이다. 그래서 책장을 몇 번이나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사실 굉장히 낯선 책도 있었다. ‘어떻게 이런 녀석이 아직까지 살아남았지’ 반면 몇 번이고 곱씹어 읽던 아련한 추억이 떠오른 책도 있었다. 맨 처음 고른 3권은, 문학의 존재 이유에 대해 알려준 김현의 『한국 현대 문학의 위상』, 가장 사랑하는 소설집인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 공간에 대한 관심에 불을 지핀 조병준의 『나눔 나눔 나눔』이었다. 책장을 찬찬히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여기에다가 고종석의 『코드 훔치기』와 김규항의 『B급 좌파』를 추가해서 5권의 리스트를 완성하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다. 생뚱맞지만, 역삼동 『환경과조경』 사무실의 책장 귀퉁이에서 발견한 인연으로 지금까지 내 책장에서 장수하고 있는 『로커스1: 조경과 문화』와, 그 잔잔한 울림이 지금도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는 조은의 『벼랑에서 살다』, 독특한 스타일과 글의 호흡이 아름다운 이수학의 『태도: 조경·행위·반성·시작』을 비롯해서 갑자기 툭툭 튀어나온 책들이 너무 많은 까닭이다. 역시 질문을 받자마자 떠올린 책들이 ‘내 인생의 책’이었던 것일까? 하지만, 책장의 변천사를 돌아본 것부터 독서 경험을 되돌아본 것까지 모두 나쁘지 않았다. 심지어 ‘내 인생의 영화’, ‘내 인생의 여행’, ‘내 인생의 공원’ 따위를 꼽아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혹 이 글을 읽는 자리의 가까이에 자신만의 책장이 있다면, 한번쯤 찬찬이 들여다보시길 권한다! 분명 시간 낭비는 아닐 것이다.
  • [시네마 스케이프] 프란시스 하 거주의 지리학
    다음은 한 가상 인물에 대한 정보다. ‘대전에서 출생 후 18세까지 거주 - 25세까지 서울 거주 - 약 3년간 강원도 거주 - 32세까지 미국 거주 - 37세까지 서울거주 - 45세까지 분당 거주 - 최근 세종시로 이주.’ 이 가상 인물에 대해 ‘강원도에서 군 생활을 한 남자로 유학을 다녀온 후 서울에서 취직했고 결혼 후 분당에서 살다가 최근 근무지가 세종시로 이전하게 된 공무원이나 연구원’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한 사람의 지리적 이동 경로는 단순한 발자취를 넘어 개인의 많은 것을 내포한다. 일터와 거주지가 조금 멀더라도 자녀 교육을 위해 특정 동네를 고집하는 사람도 있고, 반려견을 위해 쾌적한 교외 생활을 계획하는 사람도 있다. 나이들면 전원에서 살고 싶은 사람도 있고, 한 번도 전원에서 살아보지 않아서 나이 들수록 도시 한가운데서 살아야 마음이 더 놓이는 사람도 있다. 어디에서 살고 왜 거기에 사는지는 그 사람의 현재를 말해주므로 살아온 거주지를 맵핑해 보면 저마다의 독특한 요인과 변화를짐작해볼 수 있다. ‘프란시스 하’는 무용수가 되고 싶어 하는 27세 프란시스가 꿈을 좇는 여정의 영화로, 주로 그녀가 집을 찾아다니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책의 챕터를 나누듯 그녀의 거주지가 영화의 장을 나눈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일곱 곳을 옮겨 다니는데 ‘브루클린 - 차이나타운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 동료의 아파트 - 파리 - 뉴욕 포킵시 - 워싱턴 하이츠’ 순이다. 브루클린에서 절친한 룸메이트와 지내는 일상으로 영화가 시작되고, 돌고 돌아 결국 맨해튼의 북쪽 지역인 워싱턴 하이츠에 본인만의 거주지를 장만하면서 끝난다. 룸메이트가 프란시스를 떠나 이사하는 이유는 평소에 살고 싶어 하던 트라이베카TriBeCa로 가게 될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트라이베카는 로어맨해튼Lower Manhattan에 위치한 비교적 고급 주거지다. 그 친구는 이후 전근 가는 약혼자를 따라 기대에 부푼 채 일본으로 떠나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다.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거주지를 옮겨야 하는 프란시스에 비해, 그녀의 친구는 거주지에 대한 욕망이 우정이나 꿈보다 우선순위에 있다. 거주지는 취향의 선택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욕망과 사회적 신분상승을 드러내기도 한다. 프란시스는 그녀가 집착하는 집, 꿈, 친구 관계, 이 세 가지가 모두 불안정한 상태다. 크리스마스를 지내기 위해 방문한 새크라멘토는 가족의 따듯함이 있는 ‘집’이지만 꿈과 관계의 결핍을 채울 수 없기에 거주할 ‘집’은 못 된다. 우연한 기회에 공짜로 이용할 수 있게 된 파리의 ‘집’은 휴대전화 요금까지 걱정해야 하는 타국일 뿐, 꿈이나 관계와는 동떨어진 곳이다. 근사한 펜트하우스조차 그녀에게는 머물 수 없는 ‘집’에 불과하다. 내내 울리지 않는 휴대전화만 들여다보는 프란시스 뒤로 파리의 에펠탑 조명이 이토록 괄시받는 영화라니. 그녀에게 정착하지 못하는 ‘집’이란 이루고 싶은 꿈과 관계 맺기에 실패한 결핍의 상징이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고, 한겨레 영화평론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전공으로 삼아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지만, 극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그것이 주는 감동과 함께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텍스트라 믿고 있다.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풍경의 발견
    #24 아르카디아는 어디에? - 베르길리우스의 목가 북미 중서부의 프레리가 최초로 ‘발견된 경관 혹은 풍경’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풍경은 물론 늘 거기 있었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사람들이 풍경이 거기 있음을 새삼 알아차렸다는 뜻이다. 이 사실은 인간이 그만큼 자연 경관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몇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림이 클수록 더 멀리 떨어져서 봐야 한다. 인간은 ‘풍경’이라는 큰 그림을 알아보기 위해 우선 풍경에 등을 지고 그 많은 세월을 걸어와야 했다. 물론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야 풍경이 발견되었다니 무슨 소리? 영국의 풍경화식 정원이 시기적으로 더 먼저가 아닐까? 그렇지 않다. 풍경화식 정원의 경우 ‘발견’된 풍경이라고 볼 수 없고 오히려 ‘발명’된 풍경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 너무 자연스러워 보이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경관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풍경화식 정원은 마치 무대 장치를 만들 듯, 혹은 영화의 세트장을 세우듯 한 장면 한 장면 계산하여 조심스럽게 ‘설정’한 풍경들로 이루어진다. 풍경화식 정원의 시조로 알려진 영국의 알렉산더 포프의 정원은 연극 무대 장치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실제로 초기의 풍경화식 정원을 조성할 때 건축가 혹은 화가가 디자인한 연극 무대장치를 참고로 하여 장면을 연출했다.1 비록 모두 설정된 장면이라고 할지라도 어딘가 모델은 있지 않았을까? 물론 그랬다. 풍경화식 정원의 모델이 되었던 것은 상상 속의 이상향이었으며 아르카디아Arcadia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아르카디아라는 단어에는 여러 가지의미가 있어서 지금은 쇼핑몰이나 농원 등의 이름으로도 쓰이지만, 까마득한 고대로부터 인류가 그려왔던 이상향의 여러 이름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실제로는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존재하는 지명이며 고대 로마의 시성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B.C. 70~19)의 노래를 통해 목가적 이상향으로 승화된 곳이다. 도연명이 노래한 ‘도화원’이라는 선경仙境이 동양 문화에서 가지는 의미와 흡사하다. 다른 점이 두 가지 있다면, 동양에선 아무도 도화원을 현실화하려고 애쓰지 않으며 상상 속에 그대로 두고 있지만, 서양에서는 아르카디아를 재현하려는 노력이 사뭇 진지하고 절실하게 이어져 왔다는 점이다. 또 다른 점은, 선경은 죽음을 극복한 세상이지만 아르카디아엔 죽음이 있고 이것이 커다란 테마가 되어 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고대의 철학자들이 이상향을 이야기하고 시인들이 노래를 지어 부르던 것을 17세기 후반부터 화가들이 화폭에 담았으며, 18세기 중엽 영국의 예술가들이 풍경화식 정원을 만들어내면서 마침내 이상향이 구현된 듯 보였다. 처음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이후 이천 년 넘은 시간이 지난 후였다. 이상향의 주인공이 된 아르카디아인은 예로부터 목축업에 종사했다. 사방이 험한 산과 암벽으로 둘러싸인 지리적 특성 덕에 외부의 영향을 적게 받아 고유의 문화를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었다. 양을 치는 것이 유일한 경제적 수단이었던 척박한 땅이었으나 아르카디아인은 바로 여기서 그리스의 역사가 태동했노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아르카디아 출신으로서 로마에서 출세한 폴리비오스란 역사가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 아르카디아에 대해 이렇게 자랑한 바 있다. “산수가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목동들은 노래 솜씨가 빼어나 늘 경연이 벌어지고 노랫소리가 그치지 않는다.”2 베르길리우스는 폴리비오스의 이 짧은 서술에 착안하여 향후 서양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될 열 편의 서사시를 지었다.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상향을 아르카디아라고 설정한 것이 바로 베르길리우스다. 그는 아르카디아야말로 목자들의 수호신, 판Pan의 고향이라고 했으며 목동들의 노랫소리가 그치지 않는 풍요로운 축복의 땅이라 했다. 물론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에서 많은 모티브를 땄지만 아르카디아를 배경으로 하여 새로운 이야기로 엮어냈다. 인류의 황금기에 성스러운 땅 아르카디아가 탄생하는 장면으로부터 주민들의 평화로운 삶과 사랑, 죽음을 묘사했고, 여러 신과 님프를 등장시켜 단순한 노래의 범주를 넘어 아르카디아의 신화를 창조했다. 그러나 아르카디아 신화는 베르길리우스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세에는 기독교의 ‘천국’이 있었으므로 아르카디아에 대한 수요가 없었지만 르네상스에 다른 고대 문화와 함께 다시 발굴되었다. 그 후 아르카디아는 수많은 시인과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무수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특히 바로크의 구속적인 절대왕정 시대를 거치면서 아르카디아의 목자들처럼 속박 없이 자유롭게 한가로이 노래하며 사는 삶에 대한 동경이 점점 커졌다. 그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내로라하는 작가나 예술가라면 한 번쯤은 아르카디아를 재해석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강박관념이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르길리우스의 목가 열 편 중 사람들의 심금을 가장 울린 노래는 아마도 5편, 다프니스 이야기일 것이다. 시 열 편이 각각 주제를 달리하는데 다프니스의 주제는 ‘죽음’이다. 반신반인이었던 다프니스는 아르카디아 주민이었으니 당연히 목동이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천상의 목소리로 노래하던 그가 사랑의 슬픔을 못 이겨 그만 죽어버린다. 그러자 님프와 동물을 포함한 모든 자연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슬픔의 기운이 세상을 덮었고 식물이 자라기를 멈추어 가시덤불만 남았다. 베르길리우스는 죽은 다프니스가 별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설명하며 그의 묘비명에 이런 글 귀를 써넣어 다프니스를 기렸다. “나는 다프니스, 세상에서 이름을 얻었고 하늘의 별들에게까지 명성을 떨쳤노라. 아름다운 동물들을 돌보는 목동이었으나 나는 그들보다 더 아름다웠다.” 다프니스 이야기가 후세 사람들을 그토록 매혹한 이유는 주제가 죽음이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고 그보다는 사후에 벌어질 일에 대한 궁금증이 다프니스 이야기에 심취하게 한다는 설명도 있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 꿈꾸기
    현실과 이상의 경계 지나가는 애들마다 어깨를 쳐주며 힘내라는 말을 건네는 것을 보면 이번 발표는 어지간히도 망친 듯하다. 선생님들로부터 내 설계는 개념에서 작은 디테일까지 철저하게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들었다. 기능적인 문제를 간과한 과오는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계단 칸수나 난간 높이가 법적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꼼꼼한 지적을 하는 것은 너무하다 싶다. 아무리 설계의 궁극적인 목표가 공간을 실제로 구현하는 데 있다 해도 현실의 모든 제약을 고려한 설계가좋은 설계라는 견해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현실에 맞추어 설계안을 좋게 만들어 나가기보다 오히려 좋은 설계안이 실현될 수 있도록 법규를 바꾸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 않을까? 어릴 적에 나는 화성에 숲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고 하늘을 나는 성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는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설계를 시작했다. 예전에 했던 상상은 꼬맹이의 스케치북에 남겨둔 채 디자이너를 꿈꾸는 내가 해야 할 일은 정말 기사 시험을 위한 도면을 그리고 지식을 외우는 것일까? 신들의 풍경 넓은 잔디밭과 그 주변으로 흩어져있는 큰 나무들, 호숫가를 따라 부드럽게 이어지는 산책로. 공원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다. 미국의 센트럴파크도, 한국의 올림픽공원도, 심지어 이름도 생소한 낯선 나라의 공원에서도 똑같은 장면이 연출된다. 그런데 공원은 이래야 한다는 고정 관념을 잠시 잊을 수 있다면, 식상할 정도로 익숙해진 이 풍경이 여느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경관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공원은 영국의 풍경화식 정원 양식picturesque garden을 원형으로 삼는다. 물론 지난 두 세기 동안공원의 모습도 많이 바뀌어 왔지만 중요한 골격은 여전히 풍경화식 정원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서구의 대표적인 공원이 조성된 19세기는 풍경화식 정원이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거의 모든 나라의 조경 양식을 지배하던 시대였다. 근대적인 도시 공원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한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도 당시 저명한 영국의 정원과 공원의 양식을 센트럴파크에 적용했을 정도였으니,1 영국 귀족의 영지를 꾸미기 위해 만들어진 풍경화식 정원이 훗날 시민 사회를 대표하는 공원의 양식이 된 사실이 이상하지만도 않다. 그런데 자연스러운 풍경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풍경화식 정원의 모습이 원래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풍경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8세기 영국의 귀족 사이에서는 인문학적 소양을 높이기 위해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는 ‘그랜드투어Grand Tour’가 유행했다. 이 때 영국인들은 단순히 유럽의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을 감상하고 이국적인 문화를 즐기고자 관광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탈리아의 풍경 속에서 르네상스 시기의 고전 문학, 고대의 신화, 로마의 역사적 자취를 읽어내고자 했다.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과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과 같은 풍경화가는 이러한 문화 경관을 회화로 표현하고자 했다(그림1, 2). 푸생과 클로드의 작품을 언뜻 보면 이탈리아 전원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한 그림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푸생의 풍경화에서는 자연 그 자체가 그림의 목적이 아니다. 서사적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한 알레고리적 매체일 뿐이다. 클로드의 경우, 로마 근교의 실경을 직접 야외에서 스케치하곤 했는데 이 스케치가 그대로 작품이 되는 일은 없었다. 더 나아가 클로드는 이런 스케치를 스튜디오에서 재구성하여 로마의 역사적 사건이나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를 재현하는 풍경을 그렸다. 그의 화법은 후대의 풍경화가처럼 사실적인 묘사를 중시하기보다는 오히려 무대 연출의 방식을 응용하고 있는 것이다.2 이렇게 푸생과 클로드의 풍경화에 등장하는 목가적 전원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철저하게 문학적 내용에 맞추어 재구성되고 연출된 풍경이었다. 푸생과 클로드의 풍경화는 영국인의 자연관에 큰 영향을 미쳤고, 영국에서는 이상주의 풍경화에서나 찾아볼 수 있던 아르카디아Arcadia(목가적 이상향)의 모습을 현실 속에서 구현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3 영국의 풍경화식 정원은 이렇게 탄생하게 된다. 풍경화식 정원이 고전적 문화를 경관에 담기 위한 상상속의 공간이었다는 증거는 곳곳에서 나타난다. 당시 풍경화식 정원 양식을 정립한 주요한 인물들은 정원을 풍경화나 문학의 자매 예술로 높이 평가했고, 실제 새로운 정원 이론의 많은 부분은 당대의 미술과 문학에 관련된 논의에서 건너왔다.4 예를 들어 스토Stowe와 라우샴Rousham, 에셔Esher와 같은 저명한 풍경화식 정원에서는 그리스나 로마의 유적을 연상시키는 사원과 첨탑이 곳곳에 배치되는데, 이는 푸생과 클로드의 풍경화에 나타나는 연출 방식과 거의 동일하다. 또 당대 최고의 조경가였던윌리엄 켄트William Kent가 설계한 정원의 경험은 정해진 동선을 따라 건축물이나 시설물에서 고전 문학의 에피소드를 읽어내는 방식으로 구성된다.5 스타우어헤드Stourhead 정원의 경우, 주요 공간은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인 아이네이스의 이야기에 따라 연출된다. 이처럼 영국의 풍경화식 정원은 ‘그림화된 자연nature pictorialized’이었고,6 이 때 정원을 통해 표현하고자 한 풍경은 전원의 사실적 묘사가 아니라 신들의 전원, 즉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의 재현이었다. 실현되지 않은 도시 18세기 영국의 조경가만이 상상 속의 경관을 현실로 구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20세기 최고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는 당시에는 존재한 적 없는 새로운 형태의 이상 도시를 꿈꾸었고 평생 이를 실현시키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1922년 코르뷔지에는 ‘현대 도시Ville Contemporaine’라는 계획안을 통해 그의 도시적 이상향을 처음 제시한다. 이 가상의 도시는 건축사가 에벤슨Norma Evenson의 말처럼 지금까지의 도시 구조와는 전혀 다른 “대담하고 설득력 있는 멋진 신세계의 비전”을 보여주고자 했다.7 그의 도시는 지난 세대의 혁명가가 꿈꾸었던 그 어느 도시보다도 과격했다. 183m에 달하는 스물 네 개의 유리 마천루가 도시 중앙에 세워진다. 그리고 일반 시민은 각기 다른 공원을 중정으로 갖는 거대한 아파트에서 살아간다.8 이 도시의 모든 건물과 도로는 필로티로 떠있어 도시의 지상부 전체가 보행자를 위한 거대한 공원이 된다. 그리드로 이루어진 이 도시는 기술과 자연이 하나의 질서 안에서 움직이는 기계화된 근대 문명의 표상이자 결과물이었다(그림3). 1925년 코르뷔지에는 한 자동차 회사의 지원을 받아 이 계획안을 실제로 파리에 실현시키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브와쟁 계획Plan Voisin’이다(그림4). 센 강 북쪽의 파리 중심부를 완전히 철거하고 마천루로 이루어진 새로운 도시를 만들려던 이 제안은 수많은 논쟁거리를 남긴 채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 이후 1935년 코르뷔지에는 과거의 안을 보완하여 발전시킨 새로운 계획안을 선보인다. ‘빛나는 도시La Ville Radieuse’라는 이름의 이 도시는 과거 그가 꿈꿔오던 이상적인 도시의 청사진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경제적, 사회적 지위에 따라 도시의 구역이 분리되었던 과거 계획안과는 달리 공간상의 차별은 사라지고 평등한 공동체만이 존재한다. 새로운 이상 도시는 사람의 모양을 닮았다. 그리고 사람을 닮은 도시에서는 모든 시민들이 차별 없이 녹음 안에서 맑은 공기와 햇빛을 마음껏 누리며 건강하게 살아간다(그림5). 코르뷔지에가 빛나는 도시를 발표했을 무렵 대서양 건너편의 미국에서는 또 다른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가 새로운 도시의 모델을 제시한다. 라이트의 ‘브로드에이커 시티Broadacre City’는 우리가 알고 있는 도시의 상식에서 상당히 벗어나있다. 도시라고 부르기에 어색할 정도로 모든 공간이 저밀도로 흩어져 있는 이 도시는 오히려 전원에 더 가까워 보인다. 가장 보수적이면서도 급진적인 미국적 이상 도시는 건축적으로 혁명적인 형태를 제시했을 뿐 아니라 강력한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코르뷔지에와 마찬가지로 라이트는 과학에 기반을 둔 새로운 기계 문명의 가능성을 의심치 않았다. 라이트에게 전통적인 고밀도 도시는 차별이 만연한 사회 구조를 반영하는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그는 통신과 교통, 기술의 발전에 따라 결국 이 과거의 고밀도 도시 구조는 폐기되고 자유로운 개인이 가장 민주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도시가 미국에서 건설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미국의 모든 가정에 1에이커, 약 1,200평의 부지를 나누어줌으로써 탄생한 브로드에이커 시티는 미국적 이상에 가장 가까운 도시다(그림6, 7).9 빛나는 도시와 브로드에이커 시티를 발표했을 당시, 이 두 거장은 건축가로서 전성기에 있었다. 그들이 설계한 건물들이 새로 지어질 때마다 모더니즘 건축의 새로운 이정표가 제시되었고, 모든 건축주는 그들과 함께 일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왜 그들의 이상을 반영한 수많은 건물을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 다시 실현을 보장할 수 없는 이상 도시 설계에 매달렸던 것일까? 두 건축가 모두 설계의 궁극적 목적은 아름다운 건축물을 디자인하는 데 있다고 보지 않았다. 그들은 건축은 단위 건물을 넘어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건축이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설령 이루어질 수 없는 몽상에서 끝날지라도 그들의 건축 끝에는 보편적인 이상이 있었고 그들은 설계를 통해서 그 이상을 끊임없이 실현시키고자 노력했다. 1956년 코르뷔지에는 인도 펀잡Punjab에 그의 첫 도시 찬디가르Chandigarh를 짓는다. 그리고 그의 이상 도시 모델을 수용한 다음 세대의 건축가들에 의해 ‘빛나는 도시’와 닮은 도시들이 전 세계에 만들어진다.10 라이트의 브로드에 이커 시티는 결국 실현되지 못하고 계획안으로 남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동차가 보급되고 미국의 경제가 유래 없는 호황을 누리게 되면서 미국의 도시는 급속하게 교외로 확산된다. 1990년대에 이르게 되면 라이트의 예언처럼 미국 대부분의 도시에서 고밀도의 고전적 중심가는 붕괴된다. 항공기에서 바라본 오늘날 미국의 도시는 80년 전 라이트가 상상한 저밀도의 전원도시와 너무나도 닮아있다.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하였고 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하였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어바니즘』이 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