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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간 공감] 정독도서관의 여름 뜰
    ‘정독’이라는 어감은 어쩐지 좀 무겁다. 강한 받침이 연속될 뿐 아니라 혀뿌리가 목구멍을 탁 막으면서 나오는 소리로 끝나는지라, 여운도 없이 냉정하기만 하다. 더욱이 ‘도서관’이라는 좀 지루한 느낌의 단어가 이어지다보니, 이 공간에는 참 무거운 공기가 흐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앞선다. 답사를 위해 찾은 일행의 발걸음도, 잡지에 실을 만한 장면을 찾아 부지런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소리도 좀 크게 느껴져 고요히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살며시 미안함이 느껴졌다. 그러니 이름이 가지는 무게감이 공간에 그대로 스며 있다는 생각도 틀리지는 않아 보인다. 스스로를 수형자로 여기고 마치 감옥에 갇힌 듯 공부에 열중하는 이들에게 바깥의 뜰은 어떤 의미일까? 삼십 년도 더 지난 고교 시절, 새벽잠을 설치고 도달한 도서관 앞 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되돌아가던 열여섯 소년은 그 뜰을 기억하지 못한다. 바르게 읽는다는 뜻의 정독正讀도서관에서 중첩된 시간을 읽어내는 일은 즐겁다. 1976년에 경기고등학교가 지금의 강남 삼성동으로 이전하면서 그 터에 지어진 것이 오늘의 정독도서관이다. 벌써 40년이나 되었다. 당시 교사校舍로 쓰이던 건물들이 보수되어 도서관이 되었고, 학교 운동장으로 사용되던 곳을 정원으로 만든것이 이 뜰의 역사다. 도서관으로 1977년 1월에 개관했으니, 1년 미만의 공사를 마치고 만들어진 뜰이다. 자료를 검색해보니 개관 당시 도서관보의 표지에 건물과 뜰의 조감도가 그려져 있는데,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위성 사진에서 보면 마치 한자 ‘서울 경景’을 본뜬 것 같은 정형적인 평면 구조가 선명히 드러난다. 대부분의 녹지는 잔디밭으로 조성되어 비워져 있고, 그 둘레를 따라 향나무며 몇몇의 낙엽수들이 나이 든 모습으로 서 있어 공간에 위엄을 드러낸다. 나무 기둥의둘레가 오십 센티미터쯤 되는 벚나무에서 그간 뜰을 스치고 간 시간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오로지 걷는 것과 앉아서 머무는 것만 허용되는 이 뜰은 어쩌면 북촌에 남겨진 고성과 같은 곳이다. 이 연재를 위해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대학교정욱주 교수와 서울시립대학교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여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이들은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며, 2014년1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유쾌한 답사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 노들섬, 공모 과정을 실험하다 노들꿈섬 공간·시설조성 3차 설계공모
    최근 유럽에서 파격적인 방식으로 도시 개발 사업을 진행 중인 사례가 있다. 바로 2014년 11월에 시작된 ‘파리 재창조Réinventer Paris’다. 파리 최초의 여성 시장인 안 이달고Anne Hidalgo와 장루이미시카Jean-Louis Missika 부시장의 주도 하에 파리 시는 시 소유의 크고 작은 유휴 부지에 대한 프로젝트 안을 공개 모집했다. 언뜻 보면 여느 공공 개발 사업과 비슷해 보이지만 여기에는 독특한 게임의 법칙이 있다. 시 소유 토지를 민간에 매각하거나 공공이 직접 사업 주체가 되지 않을 것. 파리 시에 가장 필요한 용도, 혁신적인 건축, 효과적인 운영 방식, 실현 가능한 파이낸싱 전략을 제안하는 팀을 선정할 것. 단, 시의 재원에 의존하지 않을 것. 시는 민간의 주도로 개발 수행이 가능하게끔 여건을 조성하고 커뮤니티를 동참시킬 것. 이러한 룰에 따라 23개의 대상지를 선정했고, 2015년 말까지 개발 안을 접수했다.1 가장 높은 공공 용지 입찰가를 제시한 디벨로퍼에게 땅을 매각하고 개발을 규제하는 소극적인 도시 관리 기법이 아니라, 가장 혁신적인 설계·운영·파이낸싱·커뮤니티 참여 패키지를 고안한 팀에게 개발권을 주고 파리 시는 이 팀을 위한 러닝메이트가 되는 방식이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공모 방식의 연장선에 ‘노들꿈섬 공모’(이하 노들섬 공모)가 있다. 참으로 긴 여정이었다. 2005년 서울시가 노들섬을 매입한 후, ‘노들섬 예술센터 국제 아이디어공모’(2005)부터 ‘노들섬 예술센터 1차 지명초청 설계공모’(2006), 이후 ‘노들섬 공연예술센터 2차 지명초청 설계공모’(2008), ‘한강예술섬 조성공사 설계용역’(2009), 또 ‘한강예술섬 설립·운영에 관한 조례 제정 및 폐지’(2010), 그리고 조성 사업 보류 결정(2012)에 이르기까지 10여 년에 걸쳐 릴레이식 논의가 진행되었다. 노들섬 총괄계획가 서현 교수에 따르면 3차에 걸친 노들섬 공모는 시의 일방적인 사업 추진관행에 대한 반성과 공모 과정 자체를 혁신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엘리트가 나서서 어떤 종류의 건축물을 집어넣고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자고 주장한 후, 이를 통해 결과물을 결정하는 것은 구시대적 방식”이다. 그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노들섬을 위한 새로운 공모 방식을 고안하는 데 1년 정도의 시간을 투자했다. 그 신호탄으로 2015년 8월에 마무리된 ‘1차 운영구상 공모’에서 “합리적인 상상력을 통해 노들섬에서 미래 사회의 모습”을 그려보았고, 같은 해 11월 ‘2차 운영계획ㆍ시설구상 공모’에서는 이런 상상력을 어떻게 노들섬 프로그램의 기획과 운영에 적용하느냐는 고민 끝에 어반트랜스포머(대표 김정빈 교수) 팀의 ‘밴드 오브 노들’이 선정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2016년 6월, ‘3차 공간ㆍ시설조성 공모’결과가 발표되었다. 이를 통해 선정된 공간 조성 팀은 2차 공모 당선 팀과의 협의를 통해 “어떻게 바둑의 룰을 바둑판 위에 올려놓을까”를 결정하게 된다.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 대학교 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 이론을 가르치고 스튜디오 수업을 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 [칼럼] 비장소, 헤테로토피아, 파빌리온 - 중中의 공간
    산업이 발전하고, 물류와 사람의 이동이 활발해지고, 도시가 성장하고 사람들의 생활이 복잡해지면서 우리 주변에는 이상한 공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상한 공간들이 생겨났다는 것은 전에 없는 공간이라는 말이고, 당연히 그것은 변화하는 생활환경을 뒷받침하거나 이끌기 위해 우리가 만든 공간이다. 우리는 그것을 비장소non-place라고 부른다. 비장소는 장소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장소가 근대 이전의 삶을 공간적으로 정의한다면, 비장소는 근대 이후의 삶을 공간적으로 규정한다. 물리학적으로 우리는 4차원 시공간에 살고 있다. 가로, 세로, 높이의 세 축을 가진 3차원 공간과 시간이라는 차원이 섞이면서 4차원 시공간이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공간과 시간을 따로 떨어뜨릴 수 없다. 우리의 기억이나 추억, 생각, 앞으로의 예측, 과거에 대한 설명 등은 모두 시간과 공간이 결합된 상태의 이야기다. 더군다나 공간과 달리 장소는 공간에 섞이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근대 이전의 공간은 이러한 장소와 거주의 문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장소는 곧 거주로 인식되었다는 말이다. 그것은 정착민이든 유목민이든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집, 마당, 골목, 도시, 뒷산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나그네들이 쉬어 가는 주막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생겨났다. ‘이야기가 생겨났다’는 것은 그것이 거주의 문제였다는 걸 증명한다. 그것이 이야기를 낳은 거주의 문제라는 것은 거기에 분명한 장소성이 있다는 말이다. 인류의 언어, 전설, 신화는 그들이 살았던 언덕, 고개, 초원 등과 무관하지 않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허생원과 성 서방네 처녀와의 하룻밤은 물레방앗간이라는 장소와 메밀꽃밭으로 연상되는 계절의 시간이 이어지면서 우연히 만난 동이와 허생원이 부자간일지도 모른다는 강한 암시를 준다. 이 소설은 장돌뱅이들을 등장시킨 만큼 집이라는 거주의 장소보다는 계속 임시적인 공간, 즉 그 공간은 지속적으로 존재하지만 이용자들은 그저거쳐 가는 공간들이 나온다. 주막, 물레방앗간, 그리고 계절을 알려주는 메밀꽃밭 등이 그런 공간이다. 그러나 허생원은 물레방앗간에서의 하룻밤 정분을 잊지 못해 그 처녀를 만날까 하는 마음에 계속 봉평장을 찾는다. 물레방앗간이라는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공간에서 생긴 이야기로부터 이 소설의 이야기는 만들어진다. 이와 같이 근대 이전의 공간은 거기서 생긴 이야기를 공동체 모두가 공유하며 장소로 인식된다. 그러나 근대 이후 기계론적 합리주의와 시스템 속에 갇히면서 자아 상실과 의미 상실을 경험하며 우리는 장소를 상실한다. 우리는 거대한 쇼핑몰에서 우리가 뭘 사야 할지를 잊어버리고 자본의 스펙터클에 압도되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산다. 이미 밖에서는 자동차에게 길의 풍경을 내주었지만 쇼핑몰에서는 카트에게, 상품에게 우리의 길을 줘버린다. 그리고 계산대에 섰을 때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내 뒤로 줄 서 있는 사람들을 헤치며 다시 물건을 취소할 엄두가 나지 않는 다. 거기서 부딪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허생원이나 동이와 같이 서로를 간섭하면서 친해지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심지어 계산대 직원은 물건값도 모른다. 바코드 인식기가 모든 걸 해주고 거기에 맞춰 카드를 내면 된다. 공항 역시 마찬가지다. 검색대를 몇 차례 통과하면서 우리는 계속 신분증을 직원에게 건네지만 나는 계속 익명으로 존재한다. 그 익명 속에서 우리는 편안함을 느낀다. 그 익명성 덕택에 그곳은 늘 새롭다. 우리가 도시를 즐기는 이유는 거기에서는 우리가 어딜 가든, 영화관을 가든, 마트에 가든, 식당에 가든,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비장소라고 부른다. 집이라고 비장소의 예외일 수는 없다. 거기서는 모두 잠만 잔다. 집에서 익명성을 거두어주는 사람은 주부지만 그렇게 모두들 집을 나가고 나면 그 공간에 의해서 주부마저 소외된다. 푸코는 이러한 현대 도시의 특징에 주목해서 개인적으로 한시적인 유토피아를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라고 부른다. 그러나 한시적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비장소에 해당한다. 파빌리온pavilion 역시 이러한 비장소다. 파빌리온은 특별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구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건축이지만 건축의 역할이 없는 건축이다. 연극에서 역할이 없는 배우를 상상해 보라. 그러나 파빌리온은 건축에서, 혹은 조경에서 역할이 없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 역할은 연극이 이루어지기 전의 무대와 같다. 무대에서 어떤 연극이 공연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무대는 늘 어떤 연극을 기다린다. 파빌리온도 그렇다. 파빌리온은 어떤 성격도 가지지 않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공간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는 헤테로토피아일 수도 있고, 비장소일 수도 있다. 또한 그 무엇도 아닐 수 있다. 이런 모호한 개념을 서양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그래서 차라리 동아시아 철학의 ‘중中’이라는 개념이 훨씬 유용하다. ‘중’은 유학에서는 ‘정확하다’는 의미다. 또한 불가에서는 ‘공空’의 의미를 ‘무자성無自性(non self-identity)’으로 해석한다. ‘무자성’이란 스스로 그렇다라고 생각하는 바가 없다는 말이다. 즉, 아무 성격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의미다. 그래서 공은 단순히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비어 있기 때문에 가능성으로 꽉 찬 상태고, 가능성을 향해 무한히 열려 있는 상태다. 유가와 불가는 각각 다른 철학이지만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같이 ‘중’으로 표현하는데, 파빌리온 같은 모호한 공간을 규정하기에는 더 없이 정확하다. 파빌리온은 아무런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무자성의 공간’이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역할도 정확하게 수용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중의 공간’이기도 하다. 연금술에는 “모호는 모호한 것을 통해서, 미지는 미지의 것을 통해서”라는 격언이 있다. 모호한 것을 정확하게 규정하기 보다는 그 모호함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말로 모호를 설명하는 것이 때로는 가장 정확하다. 함성호는 1990년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91년 『공간』에서 건축평론신인상을 받으며 건축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시집으로 『56억 7천만년의 고독』, 『성타즈마할』, 『너무 아름다운 병』, 『키르티무카』가 있으며, 티베트 기행산문집 『허무의 기록』, 만화비평집 『만화당 인생』, 건축평론집 『건축의 스트레스』, 『당신을 위해 지은 집』, 『철학으로 읽는 옛집』, 『텃밭정원 도시미학』(공저), 『반하는 건축』, 『아무것도 하지 않는 즐거움』, 『파빌리온, 도시에 감정을 채우다』(공저)를 썼다.
  • [에디토리얼] 마감에디토리얼을 쓰다가
    “비행기 의자 하나 사드릴게요!” 얼마 전 남기준 편집장이 던진 진심어린 농담이다. 사연은 이렇다. 봄과 여름이 때 이른 줄다리기를 하던 어느 날, 마감전쟁을 치르는 동료들을 나 몰라라 뒤로 한 채 학회 참석을 구실로 이탈리아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안한 마음에 에디토리얼이라도 빨리 넘겨야겠다고 작심했다. 굳은 결심의 효과였을까. 어깨를 펼틈도 없이 좁은 이코노미 좌석은 집중을 넘어 몰입의 경지를 경험하게 해 주었다. 구상, 검색, 커피, 흡연, 산책 등 글쓰기의 필수 과정이라고 여겼던 일련의 습관을 강제로 생략당하니 글이 단숨에 풀렸다. 육필로 휘갈겨 쓴 원고를 옆 자리 승객에게 빌린 노트북으로 타이핑한 후 모니터를 휴대폰으로 찍었다. 착륙 후 와이파이 터지는 곳에서 ‘원고 사진’을 카톡으로 보냈다. 원시와 첨단이 뒤섞인 이 이상한 프로세스에 아마 독자들은 물음표를 던지실 것 같다. 몸은 바다 건너 멀리 있었지만 그 어느 달보다 빨리 끝낸 원고를 칭찬하며 편집장은 한 달에 한번 마감 때마다 국내선이라도 꼭 탈 것을 권했고, 마침내 비행기 의자 선물이라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까지 떠올린 것이다. 이제 2년 반이 넘었으니 익숙해질 만도 한데 아직도 매달 잡지의 첫 지면에 무언가를 쓴다는 게 영 어색하다. 한두 시간이면 충분한 A4 두 장의 짧은 글, 하지만 한 달 내내 어깨를 내리누른다. 사례는 나의 힘! 서점과 온라인을 두루 헤매며 국내외 저명 전문지는 물론 잘 나간다는 상업 잡지의 에디토리얼을 사례 연구하기도 수차례. 그러나 답은 없다. 근사한 스타일로 간명하게 독자들을 사로잡는 멋진 글들을 흉내 내보지만 결국 아류의 티를 보정할 수 없다. 그달에 실리는 내용을 두루 안내하면 모범생이 쓴 교과서 서문처럼 재미가 없어진다. 공들여 기획한 특집에 한 명의 독자라도 더 끌어들일 요량으로 특집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면 중언부언이 되기 십상이다. 약간의 메시지를 담거나 주장을 넣으면 진부한 계몽이나 어설픈 설교의 곁길로 샌다. 최근에 마음 꽂힌 책이나 작품에 초점을 두면 먹물 버릇이 발동해 당장 고루한 논문이라도 쓸 태세다. 이른바 조경계의 현안(?)이란 걸 다루자니 수영복 입고 지하철 타는 기분이고, 그 현안을 다른 프레임으로 진단하자니 매국노 취급당할 게 뻔하다. 재치를 발휘한답시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프로 편집장과 편집팀장, 그리고 아마추어 편집주간이 수시로 의견을 주고받거나 아이디어를 메모하거나 수다를 떠는 용도로 쓰는 ‘단톡방’의 대화내용을 버무려 집단 창작이라는 미명 하에 이 지면에 적은 적도 있다. 잡지 리뉴얼 때부터 지금까지 어려울 때마다 고견을 들려주고 있는 몇몇 선배들로부터 얻어내는 아이디어나 정보를 가공해 싣기도 한다. 연구실 대학원생들과 함께 한 세미나의 줄거리를 옮긴 적도 몇 차례. 심지어 어느 제자와 나눈 대화를 조금 살을 붙이고 가다듬어 기록하기도. 고백하자면 어느 학기의 종강 때 수강생들에게 나눠주었던 편지를 에디토리얼에 재탕으로 우려 싣기도 했다. 참으로 놀랍고 곤혹스러운 사실은 의외로 이 지면을 읽는 독자가 많다는 점이다. 정확한 통계가 있는 건 아니지만 편집부에 들려오는 여러 소문을 종합해 보면, 비교적 열독률이 높은 지면은 에디토리얼과 잡지 제일 뒤쪽의 코다CODA, 본문 중간중간의 텍스트 양이 많지 않은 짧은 연재 글들이라고 한다. 특히 잡지의 첫 쪽이다 보니 이 지면을 펼치고 잠시 시간을 투자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지만, 에디토리얼보다는 열심히 만든 특집, 그달에 힘준 작품, 필자의 많은 공이 들어가는 연재 글들에 시선을 던져 주십사 이 자리를 빌려 독자들께 부탁드린다. 앞에서 구구절절 징징거리며 늘어놓은 이런저런 이유로 이 에디토리얼 지면은 매달 잡지의 마감일을 지연시키는 주범이 된다. 디지털 출력본의 교정까지 끝내고 인쇄소로 넘어갈 준비가 완료된 상황, 모두가 목을 빼고 내 원고를 기다리고 있는 풍경, 대략 난감이다. 또 한 달이 흐르고 어김없이 만난 막다른 길, 머릿속을 산만하게 떠다닌 글감 세 조각을 소개한다. 원래는 다음의 세 가지 주제가 강력한 후보로 경쟁했는데 마감에 몰려 쓰다 보니 어디론가 휘발된 모양이다. 첫 번째 후보는 조경에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는 문제 제기. 최정민 교수(순천대학교 조경학과)가 “조경, 다른 이름을 가지는 것은 어떤가”(라펜트, 2016년 7월 10일)라는 칼럼을 통해 6월호 에디토리얼 “조경이라는 이름”의 문제의식을 확장해 주었다. 공이 다시 나에게 돌아왔는데, 이 지면보다는 조금 더 넓은 공간에서 깊이 있게 다루는 게 나을 것 같다. 그가 명쾌하게 진단하고 있듯이 “조경이라는 이름이 조경이 하는 일이나 결과물을 대변하지 못하고 … 조경이 하는(할 수 있는) 일을 제한하고 있다”면, 40년 넘게 정든 이름이라 아쉬움 가득하지만 개명을 심각하게 고려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조경은 조경에 갇혀 있다. 경합을 벌인 두 번째 후보는 용산공원. 수면 아래에서 잠잠하던 용산공원이 지난 4월 이후 심심찮게 언론을 타고 있다. 공원에 들어갈 ‘콘텐츠’를 선정하는 공청회 이후의 일이다. 2012년의 국제 설계공모 이후 당선작을 바탕으로 기본설계가 진행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실종되었던 용산공원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나고 있는 것은 환영할 만하지만, 쟁점의생산 과정이 지나치게 정치적이고 그 핵심 이슈가 시간을 역행하는 양상이라 우려된다. 특히 일부 정치인들의 비논리적인 주장에 대응할 수 있는 전문가의 책임이 필요한 시점이다. 긴 호흡으로 천천히 추진하는 것과 예산의 전액 삭감에 따른 계획 중단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슈다. 심도 있게 기획해 본문에서 다시 다룰 것을 약속드린다. 마지막 후보는 이번 특집인 파빌리온이었다. 짐작하시겠지만 8월의 특집 ‘파빌리온’은 무더위에 지친독자들을 의식한 계절형 기획이다. 폭염으로 가득한 한여름의 도시, 어딘가에 숨겨진 나만의 자유의파빌리온을 찾아보시길. 참고로, 비행기 의자 프로젝트는 수포로 돌아갔다. 중고로 나온 물건도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CODA] 취향의 탄생과 유행
    요즘 홍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지난 겨울 혹독한 감기에 시달린 후 나는 자극적인 커피 대신 평소 밍밍하게 느끼던 차에서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당시 누군가 건넨 홍차 한 잔에는 은은한 달콤함이 있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둔했던 나의 혀끝과 코는 차의 맛과 향을 분간하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최근 다양해진 커피의 세계만큼, 홍차 역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니 그 종류가 다양해서 무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처음에는 조금 막막하게도 느껴졌다. 그러나 이내 인터넷에서 최근 홍차의 유행 바람을 타고 각종 티살롱이나 브런치 카페를 섭렵한 파워 블로거들이 펼쳐내는 수많은 정보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차를 마시는 지인들과의 정보 교류가 활발해졌다. 모여 앉으면 각 차 맛에 대한 품평(까지는 아니고 추천)이 이어졌고, 블랜딩 방법, 차 도구, 티푸드, 패키지 디자인 등등 이야깃거리는 무궁무진했다.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때 각자의 성향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차를 만드는 시간에 가벼운 차 이야기를 통해 어색한 분위기를 털어버리며 본격적인 대화를 이끄는 사람도 있고, 차를 우리는 시간을 조급하게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차를 마시기 좋은 소위 ‘핫’한 카페를 소개하는 사람도 있고, 찻잎의 색깔을 논하는 사람도 있다. 차에 관한 해외의 최신 정보를 알려주는 사람도 있고, 차라면 모르는 일이라고 마뜩찮은 시선을 보내는 이도 있다. 아무튼 차를 마시는 시간은 바쁜 일과 중 모두들 짬을 내어 여유를 부리는 시간이다. 또 차를 둘러싼 다양한 화제를 보면 차는 맛뿐만 아니라 멋이 중요한 문화인 듯하다. 이런 차 문화는 비단 지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홍차를 마시는 문화가 처음 시작된 18세기 영국에서도 비슷했다. 최근 한국18세기학회의 회원들이 엮어낸 『18세기의 맛: 취향의 탄생과 혀끝의 인문학』은 ‘미각’이란 키워드를 통해 18세기의 여러 문화적 현상을 살펴본 책이다. 18세기는 동서양 모두 고급스런 음식이 대중화되고, 이국적 음식이 세계화되는 변화가 크게 일어난 시대이다. 또한 18세기는 저급한 감각으로 치부되어온 맛에 관한 담론이 본격적으로 문화의 전면에 등장한 시대이기도 하다. 민은경 교수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는 영국에 상륙한 홍차에 담긴 문화적 의미와 정치경제학적 배경을 설명한다. 영국의 국민 음료라고 할 수 있는 홍차가 영국에 보급된 시기 역시 18세기이다. 당시 중국에서 수입했던 차나 자기는 고가의 사치품이었는데, 귀족들은 차를 마시기 위해 찻상과 장식장을 별도로 제작하고 화가를 고용해 찻상을 둘러싼 가족의 화목한 모습을 담은 풍속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 풍속화에는 ‘담화도Conversation Piece’라는 이름이 붙었다. 여기서 ’컨버세이션conversation’은 대화를 나눈다는 좁은 의미보다, 여러 사람과 관계하며 더불어 살아간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이렇듯 가정에서 차를 마시는 공간은 손님을 접대하고 만나는 사교의 공간이었고, 차는 새로운 사교 문화를 형성했다. 그리고 영국인들은 집에서 마시던 차를 점점 정원과 공원과 같은 야외에서 즐겨 마시게 되었고, 귀족들에 한정되었던 차 문화는 누구나 향유하는 보편적 문화가 되었다. 즉 ‘그들만의 호사’가 ‘모두의 취향’이 된 것이다. 19세기 중국과 영국의 아편전쟁이 사실 차 전쟁이었고, 미국 독립전쟁 역시 식민지 미국에서의 차 수입과 유통을 통제하려 했던 영국의 정책에 반발했던 사건인 보스턴차사건이 도화선이 되었음을 떠올린다면, 미각과 음식은 결코 가벼운 주제가 아니다. 주경철 교수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는 유럽에서 버터가 어떻게 확산되었는지 밝히며, “사람이 향유하는 맛이라는 것이 전적으로 생물학적인 게 아니라 사회적인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즉 “특정 음식을 맛있다고 느끼기까지는 분명 사회적으로 배워서 습득하는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현재 서양 요리는 대부분 베이스로 버터를 사용해 부드럽고 섬세한(느끼한) 맛을 내는데 반해 중세의 음식은 고급 요리일수록 후추를 많이 첨가해 매웠다. 중세 유럽에서 매운맛이 고귀한 지위를 누린 것은 아시아에서 수입해야 했던 후추가 워낙 고가의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맛을 평가하고 새로운 요리법을 퍼뜨리는 주역은 대개 상층사회 인사들이다. 귀족이나 부르주아가 어떤 음식을 즐기는 것은 그들만이 그 음식을 독점한다는 점과 무관치 않다. 그런 면에서 보면 맛의 유행에서 희소성은 지극히 중요한 요소다.” 17세기에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직항로가 개척되면서 후추가 대량으로 수입되어 모든 사람이 후추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상류층은 후추 대신 다른 향료를 찾았고, 최대한 섬세한 맛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러한 맛의 이행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18세기 프랑스 요리였고, 그 결과 오늘날까지 프랑스 요리는 지배적인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그러니까 맛의 역사라는 것이 쉽게 말해 ‘허세’가 좀 섞인 ‘멋’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생각해보면 내가 커피 대신 홍차에 관심을 돌리게 된 계기가 지인이 건넨 차 한 잔에서 비롯된 것이니, 차를 마시겠다는 선택은 내가 한 것이지만 지인들의 차 문화 혹은 지금의 홍차 유행에 자연스럽게 동화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현대 사회에서 기호품의 선택은 개인의 취향이라고 하지만, 그 역시 사회·경제적 흐름 속에 놓여 있다. 기호 음료를 둘러싼 산업 구조의 변화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한 때 ‘세련된 취향’으로 자리매김했던 커피가 대중적으로 확산되고, 웰빙과 힐링 바람을 타고 온 녹차 문화가 시들해지면서 그 대체품으로 홍차가 떠올랐을 수도 있다. 바우만 Zygmunt Bauman은 그의 저서 『유행의 시대Culture in a Liquid Modern World』에서 오늘날 “문화의 역할은 기존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욕구를 창조하는 동시에, 이미 확립되었거나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욕구들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유행이 ‘되어감’이란 서로 모순되는 욕망과 갈망, 즉 “어떤 집단이나 집합체에 속하고자 하는 열망과, 군중과 구별되어 개성과 독창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 충돌하며 멈추지 않는 진자운동을 한다. 그렇다면 내가 편승한 곳은 취향의 공동체이리라. 그리고 나의 홍차 사랑은 언제 또 다른 기호의 소비로 옮겨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조경의 상대성 이론
    #9 에리히 멘델존, 내 건축에 녹색 레이스를 입혀다오 미국 유타에 가면 로버트 스미스슨이 만든 달팽이 방파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막 한복판에 소위 저먼 빌리지German Village라고 하는 것이 있다. 독일인들이 사는 마을이 아니라 독일식 다세대주택을 재현해 놓은 일종의 세트장이다. 세트장이지만 영화를 찍으려고 만든 것도 아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베를린 폭격을 연습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다. 1943년부터 연합군들이 전면전에 돌입하며 카셀, 함부르크와 드레스덴 등의 다른 도시들은 불바다를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베를린의 집들은 어찌 된 일인지 소이탄 공격이 별 효과가 없었다. 특히 19세기 후반부에 노동자들을 위해 튼튼하게 지은 다세대주택들이 폭격에 강했다. 그 시대에 이미 화재 예방을 위해 다양한 건축 기법을 모색해서 지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사실을 연합군들이 미처 모르고 있었다. 집과 집 사이의 벽에는 창문 없는 맨 벽에 돌, 벽돌, 콘크리트 등 비연소성 소재만을 사용했고 최소한 24cm 두께로 지었으며 건축 소재뿐 아니라 건물 배치에서도 불이 서로 옮겨붙지 않도록 적정 거리를 유지하는 등 세심한 화재 예방을 위한 조례가 시행되고 있었다. 궁리 끝에 미국 국방성의 화학전戰 담당자가 당시 미국에 망명 와 있던 독일 출신의 유대인 건축가 에리히 멘델존Eric Mendelsohn(1887~1953)에게 비밀리에 자문을 요청했다. 멘델존은 이에 응했고 거의 원본과 똑같이 건물을 만들어 주었다. 독일식의 튼튼한 가구도 만들어 넣고 침대 시트, 커튼까지 그대로 재현했다고 한다. 유타는 공기가 건조하여 발화 양상이 베를린과 달랐으므로 오일의 성질을 조정한 후, 비 내리는 베를린마냥 물을 뿌려가며 폭격 연습을 했다고 한다. 결국 폭격에 성공했고 모두 세 번을 재건하여 연습을 반복한 후 마지막에 남은 건물 두 채를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어쩌면 다가올 3차 세계대전을 대비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차 세계대전 때 많이 파괴되긴 했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건물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저먼 빌리지가 한때 널리 명성을 떨쳤던 스타 건축가 멘델존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당시 그는 56세였으니 원숙한 경지에 들어 왕성히 활동할 나이였지만 베를린을 떠난 뒤 운도 그를 떠났는지 별로 이렇다 할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한때 뜻을 같이 했던 미스 반 데어 로에나 발터 그로피우스와는 달리 망명 후에 일이 썩 잘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한창 시절은 1920년대였다. 독일 뿐 아니라 유럽에서 가장 잘 나가는 건축가 중 하나였으며 소위 말하는 ‘유선형 건축Streamline Architecture’의 대표자였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포츠담에 있는 태양관측소 ‘아인슈타인 타워’다. 1919년부터 1922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아인슈타인은 여러 번 활동 무대를 옮겼지만 일반 상대성 이론을 개발할 당시에는 베를린 대학교에서 연구하고 있었으며 베를린의 천문학자들에게 자신의 상대성 이론을 한번 검증해 달라고 요청했었다. 그때 천문학과 학과장을 맡고 있던 프로인틀리히 교수는 첼로를 연주하는 천문학자로서 멘델존과 친한 사이였다. 멘델존의 아내도 첼리스트였으므로 서로 잘 알고 지냈다. 프로인틀리히 교수가 어느 날 멘델존에게 상대성 이론을 검증하기에 적합한 태양관측소를 한 번 지어볼 수 있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아인슈타인 타워였다. 완성된 관측소를 보고 아인슈타인은 “건물이 상당히 유기적이네”라고 평했다고 한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뿐 아니라 ‘유기적인 건축’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 낸 셈이다. 이렇게 상대성 이론이 유기적인 건축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자 베를린과 포츠담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천문대가 준공되었던 1922년에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탔고 그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아인슈타인에게 별장을 하나 선사했는데 그 별장이 바로 포츠담근처에 있었다. 그러니 베를린과 포츠담의 시민들이 마치 자신들이 노벨상을 탄 것처럼 흥분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 타워는 구경거리가 되었고 상대성 이론은 화젯거리가 되었다. 후에 포츠담의 칼 푀르스터 설계실에서 근무하던 헤르타 함머바허1는 상대성 이론을 정원의 형태로 한번 풀어보겠다고 기염을 토했으며 그 결과물을 1936년 드레스덴의 정원 박람회에 출품했다. 물론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아인슈타인 타워로 일약 유명해진 멘델존은 곧 스타 건축가가 되었고 한창 때에는 직원 40명을 둔 큰 사무실을 운영했다. 일이 너무 많아 비명을 질렀으며 리하르트 노이트라Richard Neutra, 율리우스 포제너Julius Posener 등의 쟁쟁한 인물들이 그의 사무실에서 견습생으로 일했다. 건축학 외에 경영학도 전공한 덕분인지 멘델존은 경제적으로도 승승가 도를 달려 동료들의 시기와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물론 그의 집과 재산은 나중에 나치에게 남김없이 몰수당하고 만다. 그러나 지금 에리히 멘델존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까닭은 단지 그가 모더니즘의 대표 건축가 중 하나로서 고찰의 대상이 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반복해서 표현했던 그의 정원관 때문이다. 그는 자연과 정원을 사랑한 건축가로 잘 알려져 있다. 건축의 단단함과 뾰족함, 직선과 모남을 식물이 부드럽게 감싸주어야 한다고 거듭 말하기도 했다. 그는 개인 주택도 다수 설계했는데 대부분 정원을 직접 만들었다. 짐작컨대 그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미국의 프랭크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유선형이라고는 하나 그의 건축은 다른 모더니즘 건축들과 마찬가지로 기능적이고 합리적인 입면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단 하나의 유연한 곡선으로 마무리 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것이 입면 전체일 수도 있고 담장의 둥근 모서리 일수도 있으며 발코니의 외곽 라인일 수도 있다. 때로는 원형 혹은 반원형의 탑을 부착하기도 했다. 건물 전체가 유기적으로 설계된 아인슈타인 타워는 오히려 예외적이다. 그는 “건물이란 아직 벌거벗은 신생아와 다름없다. 녹색의 레이스를 달아 예쁜 옷을 입혀야 비로소 완성이 된다”2라며 식물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러나 얼핏 정원을 옹호하는 것 같은 이 말을 곰곰이 뜯어보면 조경가로서 그리 좋아할 일도 아니다. 그는 ‘정원’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녹색 레이스로서의 식물’을 말하고 있다. 사실 이런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건축가가 멘델존 하나만은 아니다. 거의 모든 건축가들이 갖고 있는 생각일 것이다. 다만 멘델존의 운이 좋지 않아서 제인 브라운의 『The Modern Garden』이란 책에 여러 번 인용된 덕에 지금 혼자 화살받이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어떻게 말했든 사실 그의 건축은, 특히 그의 완벽하고 매끄러운 곡선의 표면은 정원이 다가갈 틈을 내주지 않는 아성과 같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 고정희 / 서드스페이스 베를린 대표
  • [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 맥락 무시하기
    맥락의 이름으로 선유도공원, 청계천, 감천문화마을, 한양도성 길, 하늘공원, 서서울호수공원, 북한산 둘레길, 광화문광장, 북서울꿈의 숲, 이화동 벽화마을. 요 근래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며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아온 다양한 조경 공간들이다. 프로젝트의 성격도 다르고 규모도 다르고 디자인 방식도 전혀 다른 이 공간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얼핏 보면 서로 닮은 구석을 찾기 힘든 이들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하나 있다. 바로 맥락context이다. 요즈음 좋은 디자인이란 곧 맥락을 잘 고려하고 반영한 디자인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듯하다. 화제가 되는 새로운 조경 작품이나 공모전 당선안의 설명을 보면 대상지에 남아있는 지형이 되었든, 인근 마을의 설화가 되었든, 그곳에 찾아오는 철새들이 되었든, 항상 맥락에서부터 그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영화를 중간부터 보면 전후 맥락을 모르기 때문에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다. 마찬가지로 주변의 맥락과 소통할 수 없는 설계는 삐걱거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좋은 설계는 맥락을 존중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명제가 사실은 전혀 당연하지가 않다. 오랫동안 맥락을 무시하는 태도가 좋은 설계의 당연한 전제였다면 믿겠는가? 그리고 이는 여전히 지금도 유효한 설계의 가치이기도 하다. 맥락이라는 새로운 바람 잠시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 판단은 유보하고 언제부터 맥락을 중심으로 설계의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지를 살펴보자. 맥락이 설계의 중요한 가치로 대두하게 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야만 우리는 설계에서 맥락이 지니는 의미를 편견 없는 시선으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날 조짐은 이미 1960년대부터 건축계를 중심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20세기 초 몇몇 선구적인 건축가들의 개별적인 실험에서 시작된 모더니즘은 곧 유럽 전역으로 확장되어 서구의 근대 문명을 대표하는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 모더니즘은 국제주의의 이름으로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로 전파되어 건축과 도시는 물론, 인간의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편한다. 1960년대는 성기 모더니즘이 건축의 헤게모니를 완전히 장악한 시기였다.1 국제주의, 더 넓게는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적인 건축 운동인 모더니즘이 내세운 가치는 새로움과 보편성이었다. 새로움과 보편성이라는 기치 아래에서 거의 모든 과거의 가치가 부정되고 지역의 특수성은 배격당했다. 이렇게 모더니즘은 거의 반세기 동안 인간의 정주 구조에서 맥락을 철저히 지워왔다. 모더니즘 거장들의 시대가 저물어가던 1960년대 들어서 새로운 세대의 건축가들은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왔던 모더니즘의 가치관이 만들어낸 결과는 거장들이 꿈꾸어오던 이상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전의 마을과 도시를 구성하던 골목들은 그리드 형태의 차도로 정리되었고 자연스럽게 거리에서 사람들의 소리는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지붕의 모양을 보면 어느 동네인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특색 있던 건물 대신 지루하게 반복되는 콘크리트 박스형 건축물들이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공간이 되었다. 모더니즘이 유일한 건축적 양식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이를 어쩔 수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비서구권 건축가들의 괴리감은 더욱 컸다. 유럽과 미국의 젊은 건축가들 역시 모더니즘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지만 모더니즘은 최소한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양식이었다. 그러나 제3세계의 건축가들에게 모더니즘은 서구에서 수입된, 어쩌면 강요되었을 지도 모르는 이질적인 양식이었다. 1960년대 정치적으로 과거의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하고 있을 무렵 오히려 그들의 도시와 삶은 다시 근대화와 국제화라는 명분으로 종속되기 시작했다. 모더니즘은 그들의 맥락을 파괴하는 데 가장 선두에 서있었다.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겨울의 왕국인 스칸디나비아 지방에서 왜 지중해의 이상을 담은 수평창과 평지붕을 사용해야 하는가? 누구보다 강렬한 태양과 색채를 가진 멕시코에서 왜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회색과 백색의 도시를 만들어야 하는가? 그동안 목조로 건물을 지어오던 일본에서 콘크리트와 철골의 건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새로운 그들의 건축을 시도한다.2 맥락이 다시 중요해진다. 그리고 완전한 제국을 완성했다고 자부했던 성기 모더니즘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새로움과 보편성보다 정체성의 기반이 되는 맥락을 중요시한 젊은 건축가들의 작업들은 이후 이론가들에 의해 맥락주의contextualism, 혹은 지역주의regionalism라는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된다.3 그리고 이 새로운 흐름은 모더니즘에 대한 전면적인 전쟁이 선포되었을 때 선봉에 서게 된다. 1970년대에 들어서게 되면 모더니즘이 끝났다는 선언은 더 이상 특별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이 공공연하게 받아들여졌다. 이제 거장들이 떠난 모더니즘의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연합 전선을 구성했던 후계자들은 모더니즘의 가치를 대체할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해야했다. 이때 역사, 의미, 상황, 장소성, 지역성, 정체성 같이 모더니즘이 부정했던 가치들을 포괄하는 맥락의 개념이 전면에 등장한다. 맥락의 대두와 함께 조경의 가치가 새삼스럽게 주목받기 시작한다.4 솔직히 말하자면 20세기 전반부에서 조경의 위상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근대 도시와 함께 나타난 새로운 공원이 근대적 의미의 조경이 형성되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는 했지만, 인간의 정주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급진적인 변화의 과정에서 조경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조경은 도시와 괴리된 낙원의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그 모든 형태의 변화에 대한 변명거리를 제공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뿐이었다. 공원은 극도로 열악해져만 가는 산업도시에 대한 구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면죄부를 주기도 했으며, 모더니즘이 과거의 맥락을 모조리 파괴해가는 과정에서도 이를 정당화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다가 맥락의 의미를 다시 찾아내는 과정에서 경관은 모더니즘이 장악했던 반세기 동안 잃어버린 가치를 복원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가 된다. 왜냐하면 맥락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은 경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관을 만드는 조경의 역할 역시 재조명받게 된다.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하였고 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 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하였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 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어바니즘』이 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있다.
  • [조경가의 서재] 기억 속 서가의 풍경 ‘정조의 상림십경’에 대한 글을 쓰게 된
    이즘은 책은 읽지 않고 음악이나 듣고, 드라마만 보며 산다. 그래서 ‘네 놈이 읽은 책을 뱉어내라’는 죽비를 맞았을 때 궁한 마음에 이십여 년 전에 읽었던, 기억에도 가물거리는 그들을 소환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 먼저 이해를 구한다. 내 낡은 기억의 통로를 따라가다 혹여 길을 잃더라도 당신은 명주실 되잡고 무사히 빠져나가시길 바란다. 세상에는 무수한 길이 있듯이 책 속에도 수많은 길이 있다. 그리고 어느 길로 접어드는가는 우연과 인연이 만들어낸 운명 같은 일이다. 스치고 지나갔던 옷자락이 나중에 다시 만나 환하게 밝아지는 일은, 책의 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십여 년 전쯤, 짧은 글을 하나 쓴 적이 있다. 사실 그 글은 연속으로 쓸 계획이었는데 한 편만 쓰고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지금 와서 그 글을 어떻게 쓰게 되었을까 되짚어보니 꽤나 오랜시간 적잖은 만남이 거기에 얽혀 있었다. 1984년과 1985년 사이의 어느 날이었을 게다. 자주 가던 다방에서 사람들 틈에 있던 그녀는 ‘그’의 시를 내게 알려주었다. “갈 봄 여름 없이, 처형 받은 세월이었지 / 축제도 화환도 없는 세월이었지…”1로 시작되는 시,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2는 이 숨 막히는 시까지. 폭력과 저항이, 절망만큼이나 희망을 길어 올리던 그 시절을 실험적 언어와 도저한 슬픔으로 그려내던 황지우의 시집을 읽으며 나는 조금씩 성장했고, 그의 네 번째 시집 『게눈 속의 연꽃』에서 ‘산경山經’을 노래했을 때 기꺼이 그를 따라 『산해경山海經』3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와는 그즘에서 헤어지게 됐지만 말이다. 기원전 3~4세기에 쓰여졌다고 추정되는 『산해경』은 크게 ‘산경’과 ‘해경’으로 나뉘는 중국과 그 주변에 대한 상상의 지리서다. 여기에는 상대적으로만 측정 가능한 위치와 상상의 동물, 불가해한 일이 끝없이 펼쳐진다. 지은이도 없이, 오랜 세월 주석만 첨삭되면서 오늘에 이르렀지만 동아시아 정신 세계의 한 부분을 그려 낸 책, 그저 이야기로만 듣던 해태며 봉황, 주작이 전부였던 내게 오백 리씩 가면 나타나는 그 많은 동물들이 멸종된 고대 생물로 느껴지는 떨림이었다. 글을 옮긴 정재서는 역자 서문과 그의 책 『동양적인 것의 슬픔』에서 고전이 담고 있는 다의적 함의와 여러 층위의 중첩을 풀어헤치며 “구조의 금간 틈, 차이에 대한 눈뜸은 항상 모든 지배적 언술 체계 내에 존재하는 이항 대립을 의식하는 시각으로부터 발생된다”4고 일깨웠다. 그리고 서구에 의해 타자화 되고, 다시 중국에 의해 타자화 되었던 중국 중심의 세계주의에 대한 독해를 위해 서쪽으로 2,765리 가면 만날 수 있는 사이드Edward W. Said를 불러들였을 때 ‘고조선에서 중화문화권에 속했다고 하는 조선까지의 상황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하는 질문을 품으며, 예전에 스치며 지나듯 읽었던 먼지 덮인 문학잡지5를 다셔 펼쳐보게 되었다. 이수학은 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이원조경에서 4년 동안 일했다. 프랑스 라빌레뜨 건축학교와 고등사회과학대학원이 공동 개설한 ‘정원·경관·지역’ 데으아(D.E.A.) 학위를 했고, 현재 아뜰리에나무를 꾸리고 있다.
  • [그들이 설계하는 법] 태도, 접촉면 경관
    1 사실 기고를 마음먹기까지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조경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다양한 설계 이야기를 담고 싶다는 기획 의도와 조금 더 먼저 이 길을 가고 있는 선배로서 조경을 시작하는 학생들이나 후배들에게 들려 줄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는 편집진의 말을 수차례 들었음에도 맘이 내키지 않는 다. 학교를 벗어나 업으로서 조경을 시작한 지 이제 고작 10년 남짓이다. 내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여전히 헤매고 있는 풋내기 조경가가 지면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부끄럽고 무모하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2 “왜 요새 블로그1에 글 안 올리세요? 예전엔 종종 들어갔었는데.” 오랜만에 방치해 두었던 블로그에 들어가 보았다. 한동안 꽤나 정성들여 글이며 자료를 올렸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뜸해졌다. “요샌 바빠서. 정신이 없네.” 사실 바쁜 일상에 쫓겨서가 아니다. 조심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아직 여물지 않은 생각들을, 여전히 진행 중인 실험들을 글로 적는다는 것이 무책임한 일이 아닌가 싶어진 것이다. 나는 신입사원 면접을 할 때마다 좋아하는 조경가가 누구냐는 질문을 한다. 지원자의 설계적 성향을 파악해 보기 위함인데, 언젠가 한 친구가 “OOO이라는 우리 학교 선배요. 그 선배만큼 열정적인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라고 답했다. 그때는 ‘이 친구는 아는 조경가도 한 사람 없나’ 그렇게 생각했다. 한참을 지나 생각해보니 그 친구는 ‘태도’를 이야기 한 것이었다. 유명 작가의 작품집을 통해 접할 수 있는 멋진 디자인이나 철학보다도, 가까이서 직접 보고 느낀 친한 선배의 ‘열정’이 더 큰 힘이 되었으리라. 그리고 그것이 지금 조경을 시작하는 그들에게,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는 우리들 자신에게도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열정’은 언제나 과정을 의미하며, 태도를 지배한다. 무엇을 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했는지, 그리고 여전히 그렇게 애쓰고 있는지가 오히려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조금 용기를 내본다. 지금부터 시작할 이야기들은 나의 조경에 대한 태도, 아직은 어설픈 과정의 이야기들이다. 3 “형, 형이 하는 설계는 잘 모르겠어요. 다이어그램도 이해가 잘 안 되고요. 꼭 그렇게 어렵게 조경해야 되나요” 몇 해 전이다. 한 후배 녀석이 우리 회사에서 제출한 설계공모 도판을 보았는지 술자리에서 묻는다.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설계공모 작업들은 잘된 설계안이 아닐뿐더러, 그다지 친절하지도 않다. 다이어그램은 복잡하고, 디자인은 매우 거칠고 개념적이며, 공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충분치 않으니 이해가 쉽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운 좋게 여러 작업들이 당선은 되었지만, 대상지에 대한 합리적인 해법과 완성도 높은 디자인을 명쾌하게 제시해야 하는 설계공모의 결과물로서는 사실 낙제다. 4 기술사사무소 렛의 장종수 소장님과의 개인적인연으로 시작하게 된 설계공모 작업들2은 나로서는 참 행운이었다. “우린 목표가 2등이야. 그냥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것을 하자고.” 진심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당선이 목표가 아니라고 하시니 맘은 편하다. 사실 당시 진행된 국내 설계공모 작품들을 보면서 항상 아쉽다고 느끼는 점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동안 내가 배우고 공부해 온 해외의 많은 설계공모가 그러했듯, 설계공모는 작품을 통해 설계자만의 디자인 사고와 새로운 설계 기법, 여러 가지 도시적·사회적·철학적 때론 정치적 담론까지도 공론화할 수 있는 ‘설계안 이상의 가치’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 시절 지겹게 보아왔던 라빌레뜨 공원이나 다운스뷰파크, 프레시킬스 뿐만 아니라 근대적 공원의 시작이자 최초의 공원 설계공모격인 센트럴파크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소위 잘 뽑아진 결과물로서의 공간적·경관적 형태와 프로그램을 생산하는 것은 좋은 설계일 수 있지만, 그것이 곧 좋은 설계공모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5 또 다른 한 가지는 대상지(site)를 대하는 설계자의 태도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대지와 설계안의 괴리감이다. 흔히들 우리가 설계해야 할 대상지는 백지가 아니라고 쉽게 말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설계는 직접적인 설계 대상인 대지, 그 장소에 담긴 경관(landscape)이라는 실체(substance)를 ‘탐구’하고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대지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외부와의 물리적·비물리적 관계성 및 맥락성(context)을 통해 그 땅의 개념적 의미를 ‘해석’하고 ‘부여’하려는 경향이 지나치게 강하다. 게다가 하이브리드라는 시대적 흐름은 개념이나 이론, 디자인 철학이나 방법론까지도 조경이 아닌 외부로부터 차용되어야 더 ‘쿨‘한 것으로 몰아간다. 경관이라는 실체에 대한 탐구와 내부로부터의 고민 없이 밖으로의 팽창만을 꿈꾸는 조경은 걱정스럽다. 우리가 의무감처럼 행해왔던 많은 분석 리스트 중에 순수하게 조경만의 언어로 대상지를 들여다보는 분석 방법은 몇 가지나 있는가? 그것만으로 우리만의 디자인을 이끌어 내기에 여전히 충분한가? 그리고 그것들은 디자인으로 잘 발전되어 왔나? 6매번 설계공모 작업 때마다 고민하고 전달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우리가 항상 다루어야 하는 땅에 관한 이야기,‘그 장소만의 경관 체계(landscape system)를 어떻게 읽고 해석해 나갈 것인가’와 해석된 경관 정체성을 바탕으로 새롭게 들어오는 이종(異種)의 조직 속에서 작동 가능한 새로운 경관,즉 변이적 경관(landscape cultivar)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파주운정지구 도시기반시설 조경설계공모(2007)에서는 대상지의 경관을 형성해 온 기작과 새롭게 형성되는 도시의 기작을 중첩하는 과정을 통해 기존 대지에 순응하며 도시 조직의 일부로서 작동하는 경관을 제안하고자 하였고,강북생태문화공원 설계공모(2008)에서는 대상지 내부의 자연 조직과 도시 조직이 만나는 추이대 형성 과정을 통해 대상지의 경관을 조직화하는 가장 기본적인 체계인 메타스케이프(metascape)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충북혁신도시 설계공모(2008)에서는 대상지에 존재하는 일상적 경관 중 가장 마이크로한 경관 요소들을 찾아 이들의 재조합을 통해 경관 중합체(landscape polymer)라는 대상지만의 경관이 내재된 변이적 경관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고자 하였고,하남미사지구 설계공모(2009)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대상지의 경관을 지배해 온 농지의 미세 지형과 시스템,조각 숲의 구조와 기능을 새로운 공원의 기반적 시스템(infrastructural system)으로 적용해 보고자 하였다. 내곡 보금자리지구 조경설계공모(2010)에서는 지형 구조가 도시의 공간감과 스케일,생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서울의 팽창 과정을 되짚어 봄으로써 알아보고자 하였고,송산그린시티 철새서식지 설계공모(2011)에서는 대상지를 여러 유형의 비오톱 조합체로 인식하고,대체 서식처로서의 작동을 위한 필수적인 비오톱을 선정하고 이들의 이식(grafting)과 복제(cloning),재조합(re-organization)을 통한 단계적 서식처의 복원을 제안하였다. 7물론 지금까지 해온 나의 작업들이 깊이 있는 논쟁을 끌어낼 만한 것들이 못 된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인 ‘경관을 바라보는 일관된 가치관’을 가지고 설계에 접근하려고 애써 왔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비록 불완전한 모습일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각자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내어 놓는 사람들이,설계자의 가치관들을 각자의 설계 언어로 꾸준히 발전시키려는 노력들이 더욱 많아지길 바란다. 또 그러한 노력들이 현장에서 설계 작업을 실제로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더욱 가치 있을 것이다. 우리 설계가들은 매일 생각하고,시도하고,시행착오를 거친다. 조경이라는 실용적 학문에 있어서 이러한 피드백의 과정은 더 할 수 없이 중요한 가치이며,설계자 개개인이 자기만의 경관을 더 많이 이야기할수록 우리나라 조경의 스펙트럼이 더 다양해지리라 믿기 때문이다. 8경관은 하나의 장소가 작동하기 위한 공감각적 시스템이다. 사실 경관은 마치 수백만 개의 다양한 구성 요소들이 작은 톱니바퀴들처럼 그곳만의 조직으로 오랫동안 서로 맞물려 작동하며 만들어진 커다란 아날로그시계와도 같다. 경관은 시간을 거슬러 하나의 장소가 작동되어 오던 그 장소만의 역사적·사회적·생태적 시스템을 통합적으로 담아낸다. 씨앗이 토양과 소통하며 뿌리를 내리고 환경―비,바람,기온,습도 등에 반응하며 그 장소만의 식생을 이루는 것처럼, 인간이 대지와 소통하며 경작을 하고 길을 내고 공간을 만들었던 것처럼, 경관은 그 속에 담겨있는 요소들 모두가 서로 반응하며 지금껏 만들어온 ‘장소와 요소, 요소와 요소들 간의 소통’에 의한 결과물인 것이다. 또한 경관은 이러한 장소의 시스템으로부터 파생된 2차적 무형의 산물, 즉 공간에 대한 감흥을담는다.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보며 그때의 분위기나 느낌이 전해지지 않아 아쉬워했던 경험처럼,경관은 한 장소의 소리,향기,촉감,공간감,문화,역사 그리고 이들의 상호작용에 의한 장소만의 고유의 공기를 담는 공감각의 매체(synaesthetic media)다. 9변이적 경관(landscape cultivar). 우리가 설계를 해야 하는 대상지는 오랜 시간 땅과 소통하며 그 장소만의 공감각적 경관을 담고 있는 물리적 바탕이기도 하지만,동시에 앞으로 이 땅을 이용하게 될 새로운 이용자들과도 지속적으로 소통하여야 할 시간적 매체(temporal media)이기도 하다. 이때 대상지의 표면(surface)은 단순히 경관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실재하는 지형적 베이스(topographic base)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대상지의 역사,문화,생태계를 포함하는 이 땅의 ‘과거의 기억’을 유일하게 담아내며 현재와 관계를 맺어주는 오래된 사진 앨범과 같다. 우리들 스스로 항상 되뇌는 말처럼,‘조경’이라는 작업이 단순히 대지를 ‘화장’하는 일이 아니기 위해서는 우리의 설계가 단순히 미학적 가치를 넘어 이 땅의 경관이 가지고 있는 내재된 경관,그 기억을 드러내고,그것이 이 땅에 들어올 새로운 조직과 유연히 작동할 수 있도록,두 조직 간의 상충(contradiction)을 경관적으로 중재(arbitration)하는 작업이 되어야함을 이야기한다. 변이적 경관이란 ‘변이’라는 말 자체가 담고 있는 것처럼 ‘본질’,이 땅의 ‘경관적 정체성’을 벗어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대지의 기억이 말끔히 지워진 새로운 ‘B’라는 제3의 경관이 아니라 ‘조건과 입장이 다른 여러 켜들이 얽혀서 생성적 배역을 해나가는 조경의 역할3’,즉 ‘A-1’의 경관인 것이다. 10접촉면 경관(interface landscape). 벌써 10년 전이다. 나의 블로그 타이틀이기도 한 이 용어는 대학원에서 MVRDV의 책을 읽다가 우연히 내 가슴에 박혀 버렸다.“세계는 세계와 우리의 접촉면의 관계 안에서 변화한다. 세계의 한계는 우리 접촉면의 한계다. 우리는 세계의 실체와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계의 접촉면 과 상호작용한다.”4 그들이 꺼내 놓은 이 단어는 내가 그동안 고민하고 있었던 여러 가지 의문들에 대한 해법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왜 대상지의 경관에 더욱 관심을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을 갖게해 주었다. 사실 ‘접촉면’이라는 우리말보다 ‘인터페이스’라는 외래어가 더 익숙하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부터 핸드폰,인터넷,각종 프로그램,게임 등 우리는 하루에 수십 가지의 인터페이스를 만난다. 우리가 매일 쓰는 포토샵의 바탕화면은 버전 업이 될 때마다,새롭게 바뀐 디자인에 놀라워하기도 하지만,바뀐 아이콘 위치에 곧 당황스러워 하기도 한다. 인터넷의 포털사이트 역시 어떤 사이트의 홈 화면은 잘 정리되어 쉽고 정확하게 그날의 정보를 전달하는 반면,어떤 곳은 쓸데없거나 잘못된 기사들을 제공해 오히려 시간만 허비시키거나 사건에 대한 오해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우리가 하고 있는 조경 설계라는 작업은 인터페이스를 디자인하는 작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컴퓨터 프로그램 또는 웹을 하나의 공간으로 인식할 때,사용자는 ‘인터페이스 화면’이라는 유일한 매개면 만을 통해서 그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기능과 정보와 소통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대상지’ 역시 이용자가 한 장소에 담긴 다양한 경관적 정보들과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환경적 매개면(environmental agency)이며,설계자가 어떠한 경관적 잠재력을 읽어내고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땅에 대한 의미와 이용자들의 이해는 달라질 수 있다. 결국 우리가 하고 있는 ‘조경’이라는 작업은 대상지와 이용자 사이의 역사, 문화, 생태 그리고 공감각적 감흥을 포괄하는 접촉면 경관을 형성하는 작업이며, 그것을 통해 이 땅의 가치를 이해하고, 경관과 소통하고, 장소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의미 깊은 작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11‘또 대상지?’ 사실 진부한 것은 대상지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였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만의 눈으로, 보다 창의적으로 대상지를 깊게 들여다보고, 각자가 읽은 것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끊임없이 이야기하면 좋겠다.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갈 때, 밖으로부터의 언어들과는 차별되는 우리만의 디자인 이야기가 더욱 흥미롭고 의미 있어지지 않을까. 각주 1 “인터페이스 랜드스케이프(www.cyworld.com/interface_landscape)”란 이름의 개인 블로그를 2004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조경 설계에 관심 있는 동료나 후배들과 나의 고민과 자료를 공유하고 싶단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사실은 늘 나의 조경 사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수학 소장(아뜰리에나무)의 열정을 좇아보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다 각주 2 이번호에 소개하는 설계공모 작업들은 SWA Los Angeles재직 당시 기술사사무소 렛과 개인 자격으로 협업하였거나, 이후 기술사사무소 렛의 실장으로 재직하면서 작업한 것들이다. 그중 파주운정지구 도시기반시설 조경설계공모(나군, 2007), 강북생태문화공원 설계공모(2008), 충북진천·음성 혁신도시 조경설계공모(A구역, 2008)는 당시 SWA 동료였던 서울시립대학교 김영민 교수와 함께 작업하였다. 각주3 정욱주,“상충의 도시, 생성의 층위”,『LAnD: 조경·미학·디자인』,도서출판 조경, 2006. 각주 4 Peter Weibel, “Architecture as Interface”, MVRDV, MVRDV at VPRO, Actar, 1998. 재인용 김현민은 1975년생으로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조경가협회(ASLA)에서 수여하는 우수졸업자상을 받았으며, 미국의 SWA Group에서 Shanghai Gubei Gold Street Plan, Symphony Park Competition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 기술사사무소 렛, 비오이엔씨에서 계획, 설계 및 정원 시공에 이르는 폭 넓은 실무를 경험하였고, 국내 여러 대학에서 조경 설계를 강의하였다.
  •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래리 기키 & 채드 기키 올드 컨트리 마켓
    연중 온화한 기후와 아름다운 원시 자연으로 널리 알려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의 대표적 관광지, 밴쿠버아일랜드Vancouver Island에는 쿰스Coombs라는 조그만 마을이 있다. 인구 천여 명에 불과한 소읍이지만, 평범한 시골 마을은 아닌 것이, 연간 1백만 명이 넘는 방문객을 끌어들이는 올드 컨트리 마켓Old Country Market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겐 비단 물건을 사거나 간식을 먹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이 있다. 지난 40여 년간 수많은 관광객들의 감탄을 자아낸, ‘풀이 무성한 지붕sod roof과 그곳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염소들을 구경하는 일’이다. 처음엔 그저 대책 없이 자라는 풀을 일일이 자르기가 귀찮아 올려놓은 염소들은 어느덧 “Goats on the Roof지붕 위의 염소”라는 브랜드로 정착될 만큼 유명해졌고, 지역 경제를 살리고, 고용을 창출하며, 변방의 작은 마을 쿰스를 세계에 알리는 아일랜드 스타일의 대표 이미지가 되었다. 별 생각 없이 운전을 하던 사람들도, 지붕 위에서 어슬렁거리는 염소들을 보면 일단 차를 세우고 잠시 쉬어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어린이들에겐 너무나 신기하고 즐거운 광경일 것이다. 현재 활동 중인 네 마리의 염소들은, 피치스Peaches, 포피Poppy, 캐러멜Caramel, 엉클 베니Uncle Benny 등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이미 은퇴(?)한 놀Knoll과 토트Tott가 있다. 염소가 보이지 않으면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못할 만큼, 아이들에게 네 마리의 염소는 꼭 만나봐야 할 슈퍼스타에 가깝다. 1950년대에 노르웨이에서 캐나다로 이민 간 크리스티안 그라틴Kristian Graaten과 그의 아내 솔베이그Solveig는 1973년, 과수원에서 직접 수확한 과일들을 한적한 도로변에 놓고 팔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나, 허기진 관광객들을 위해 햄버거를 메뉴에 추가하면서, 그들은 작은 마켓 건물을 지으면 어떨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크리스티안은 자신의 고향 릴레함메르Lillehammer에서 일상 풍경이었던 녹색 지붕을 떠올렸다. 노르웨이의 시골에서는 경사진 언덕에 기대 헛간을 짓고, 지붕이 대지와 연결되도록 하는 일이 흔하기 때문이다. 흙과 풀로 덮인 지붕은 겨울이면 단열재가 되고, 여름엔 증산 작용으로 인해 냉각 효과를 볼 수 있다. 연로한 부부는 아들인 스베인Svein과 앤디Andy 그리고 사위인 래리 기키Larry Geekie의 도움을 받아 소박한 건물을 지었다. 당시에는 이곳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염소지붕이 되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작은 가판대에서 시작한 올드 컨트리 마켓은, 이제 슈퍼마켓뿐만 아니라 아이스크림 가게, 125석 규모의 카페테리아, 지역 농산물을 판매하는 채소 가게, 서핑보드숍, 훈제연어 델리, 베이커리, 수입 식품점, 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 기프트 숍, 모종과 원예 식물을 판매하는 화원, 중국 골동품 가게, 패션 부티크 등 다양한 업종들이 성업 중이다. 여름 휴가철이면,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도로변 갓길 수백 미터 뒤까지 차를 대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사람들의 유일한 불만은 이곳이 언제나 지나치게 붐빈다는 것이다. 올드컨트리 마켓 덕분에 주변의 소매점들 또한 덩달아 혜택을 보고 있다. 비즈니스의 성공을 짐작할 수 있는 일면으로, 사장 래리 기키의 가족들은 동절기 동안 가게 문을 닫고 세계 곳곳으로 긴 휴가를 떠난다. 그리고 그 여행에서 얻은 새로운 정보와 좋은 제품들을 다시 올드 컨트리 마켓으로 들여와 판매하고 있다. 종종 많은 사람들이 염소를 보지 못한 채 돌아가야 한다. 날씨가 춥거나 혹은 염소가 집에 들어가 버리거나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염소는 조각품이나 벽화가 아닌 살아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지붕 위의 염소들은 사람들의 바람이 무엇이든 간에 하고 싶은 대로만 행동한다. 물론 염소를 볼 수 없는 건 아쉬운 일이지만, 사실 마켓 운영의 입장에서는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다. 염소를 보겠다며 다시 찾는 손님들도 많고, 얼굴만 빼꼼히 내밀던 염소가 풀을 뜯으러 등장이라도 하면 그 자체가 이벤트가 되기 때문이다. 염소를 여러 번 보았다 해도 무생명의 물체와 달리 하나의 작은 생명의 면모는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다시 보아도 여전히 지루하지 않다. 사실 ‘지붕 위의 염소’에서 실제 염소의 출현은 핵심적인 요소가 아니다. 그 콘셉트 자체가 귀엽고, 그들이 지붕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 직접 눈으로 염소를 확인하는 과정은 그 중 지극히 일부일 뿐이다. 이 사소하고 일상적인 광경으로부터 우리는 잊고 있던 시골에 대한 향수와 지역성 그리고 편안하고 환영받는다는 느낌을 동시에 받는다. 지붕 위에서 염소들이 자유롭게 노닐고 있는 슈퍼마켓이라면, 그 내부 또한 한 번쯤 들여다봐야 할 만큼 재밌는 곳이 아니겠는가. 이건 어떨까하는 작은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지붕 위 염소의 성공은, 창의성이란 지역과 자본에 관계없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음을 선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래리 기키의 아들이자 삼대 째 가업을 잇고 있는 채드기키와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생으로, 그룹한 뉴욕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 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 전시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