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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서울, 경계 긋기와 경계 허물기
    강변도로를 달리면서 혹은 고층 건물에서 서울 시내를 바라보면 나 자신이 서울이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기계 속의 작은 부품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천만이라는 많은 인구가 먹고 자고 일하고 노는 데 큰 불편 없이 작동되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과 더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서울은 진정 아무 문제도 없는 도시인가 서울의 사대문 안은 600년의 역사를 지녔으며, 강남으로 확장된 현재의 서울시는 백제 시대부터 계산하면 2,000년의 역사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서울은 짧게는 600년 동안, 길게는 2,000년 동안 진화해온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진화의 과정 중에서도 한국 전쟁 후 부터 현재까지의 60년은 그 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급속한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태에서 세계 도시로 발돋움한 오늘의 서울로 성장하기까지 와우시민아파트 붕괴, 재개발로 인한 철거민 이주,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붕괴, 남산외인아파트 철거 등 많은 시행착오와 아픔이 있었으나, 이러한 성장통이 있었기에 오늘의 서울이 가능했다. 서울의 변화는 대략 2000년을 기점으로 그 전후의 성격이 달라진다. 즉 1990년대까지는 대규모개발 위주의 과격한 변화가 주를 이룬 ‘경계 긋기’ 작업이었다면, 21세기에 접어들면서는 시민의 눈높이에 맞춘 친환경적, 친문화적, 친보행적 개발이 대세를 이룬 ‘경계 허물기’ 작업이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개발 방향의 전환은 뉴 어바니즘으로 불리는 보행자 중심의 서구 도시 개발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지만,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행된 지방자치제와 지자체장 직선제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표를 의식한 시민 중심의도시 행정이 전국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시민의 피부에 와 닿고 가시적 효과가 큰환경, 교통, 경관, 문화, 복지 등이 도시 행정의 키워드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도시계획의 근간이 되는 토지이용계획은 대표적인 경계 긋기라 할 수 있다. 2000년 이전까지는 지구 생태계의 일부인 토지에 주로 경제적, 기능적 관점에서 상업지역, 공업지역, 주거지역, 녹지지역 등 평면적, 기하학적 경계를 만들고 분리시켜 생태계를 파괴하는 무리한 개발을 관행으로 일삼아왔다. 이러한 무모한 개발을 제어하는 수단으로 등장한 그린벨트 역시 또 하나의 경계 긋기에 지나지 않았다. 1971년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의 대규모 도시 외곽에 그린벨트(도시개발제한구역)가 지정되었는데, 경계선 안과 밖의 차별적 행위제한에 따른 그린벨트 내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그린벨트 해제를 선거 공약으로 내세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2001년 제주도 그린벨트의 전면적 해제를 시작으로 수도권에서도 부분적 해제가 이루어져 개발과 보존의 부자연스러운 구역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초의 한강 개발은 수로를 정비하고 둔치를 조성하여 일면 정돈된 강변 경관을 만들었으나, 이 역시 또 하나의 경계 긋기가 되고 말았다. 모든 제방이 직선형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자연 하천의 모습은 사라지고 물 흐르는 곳과 흐르지 않는 곳을 직선적으로 경계 짓고 말았다. 이러한 비생태적 경계 긋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는 2000년대에 들어 활발하게 진행되는데, 콘크리트의 경직된 경계를 허물고 유연한 자연형 하천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한강공원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1980, 90년대의 주택지 재개발과 재건축은 저층주거지 한가운데에 고층의 나 홀로 아파트를 만들어 기존 주거지와의 물리적·사회적 경계를 만들고 말았다. 기존 도시 조직의 붕괴와 원주민의 낮은 재입주율 등의 부작용이 초래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주민 주도의 ‘도시 재생’ 개념을 도입하여 대규모의 택지 개발보다는 중소규모의 현지 개량 혹은 정비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경계 긋기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서울은 2000년 넘는 역사의 층위가 공존하고 있는 박물관 같은 도시이기도 하다. 강동의 암사동에서는 원시 시대 주거지가 발굴되었으며, 한성백제 시대의 몽촌토성, 조선 시대의 왕궁, 도성, 정자 등 많은 역사적 유물을 볼 수 있다. 또한 서울은 전후 폐허에서 시작해 짧은 기간 동안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하여 한옥부터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거 양식이 부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는 도시다. 따라서 서울은 서로 다른 시기를 대표하는 지역 간의 시간적 경계를 유기적으로 연결함으로써 역사성과 조화성이 충만한 도시로 발전해야 한다. 최근 들어 도시 개발과 성장의 그늘에서 만들어진 사회 계층 간의 경계를 허물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면서 환경 복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많은 도시 가운데 특히 서울은 양극화가 두드러지고 계층 간의 경계가 매우 두껍다고 할 수 있는데, 소외 계층이 평등하게 도시 환경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시도되고 있다. 저소득층 주택과 골목의 개량, 보행 약자를 위한 시설 개선, 노인과 어린이를 위한 복지 시설의 건립 등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모두 계층 간의 경계를 허무는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서울은 개발과 성장 과정에서 수많은 공간적, 시간적, 사회적 경계를 만들어왔는데, 21세기 들어오면서 이들 경계를 해체하려는 작업이 여러 측면에서 시도되고 있음은 다행이다. 이러한 시도가 성공해야 서울은 진정한 세계 일등 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이 이러한 경계 허물기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는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아직도 만연해 있는 경제성 중심의 개발 행태, 전시성 생색내기 행정, 집단이기주의와 개인주의는 시민 모두가 함께 행복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다. 주민, 전문가, 행정가 등 사회 구성원 모두가 뜻을 모아 장기적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힘을 모아 흔들림 없이 실천할 수 있어야 비로소 경계 허물기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임승빈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를, 버지니아 공과대학교에서 환경설계계획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런던대학교에서 박사 후 연구를 하였고,하버드 대학교에서 객원 교수를 역임하였다. 저서로 『환경심리와인간행태』, 『경관분석론』, 『조경이 만드는 도시』, 『도시경관계획론』 등이 있으며, 한국조경학회, 한국농촌계획학회, 한국경관협의회, 한국인공지반녹화협회의 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며, 환경조경나눔연구원 원장을 맡아 조경을 통한녹색환경복지의 평등한 구현과 그린유토피아 건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 임승빈[email protected] / 환경조경나눔연구원 원장,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에디토리얼] 내 고향 서울
    “내 고향 서울은 만인의 타향이다. 그러므로 서울에 고향을 건설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뜨내기일 뿐이다.” 얼마 전 열린 한양 도성 학술회의, 작가 김훈의 음성이 가슴을 파고든다. 부산에서 났지만 백일을 갓 넘겨 서울로 이주했으니 내 고향도 서울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누가 고향을 물으면 “부산에서 태어났고 서울에서 자랐다”고 답한다. 서울과 고향 사이에 등호를 넣지 못하는 나는 서울의 구경꾼이나 이방인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하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하다. 서울로 올라온 부모님은 참 이사를 많이 다니셨다.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니 스물 세 개의 주소가 찍혀 있다. 2년에 한번 꼴로 이사를 다닌 셈이다. 덕분에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동네에서 거대 도시 서울의 변화와 발전을 역동적으로 경험하며 성장했다. 내가 서울을 고향이라 말하지 못하는 건 단지 유목민 같았던 이사의 역사 때문일까? 아마도 거주한 장소의 숫자보다는 그곳들에 대한 기억의 상실이 고향의 부재를 낳았을 것 같다. 어쩌면 고향은 공간이기보다는 시간일 것이다. 시간은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고 붙잡을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의 힘을 빌려 시간의 역류를 꿈꾼다. 기억은 시간의 방향을 거스를 수 있다는 기대감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고향, 그것은 곧 기억이다. 초록의 산야보다 콘크리트 주차장이 더 익숙한 원조 아파트 키드이지만, 나에게도 장소의 기억은 여러 개의 파편으로 조합되어 남아있다. 그러한 단편들의 콜라주가 그나마 나의 고향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서울은 고향의 매개체를 너무나 빠른 속도로 변화시켜 왔다. 연 날리던 들판이 롯데월드가 된 건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지금의 로데오거리에선 스릴 넘치는 화약 놀이 카니발이 열렸었고, 타워팰리스 자리에선 총천연색 만국기 아래를 달리며 스케이트를 탔다. 기억할 수 있는 고향이 물리적으로 사라졌다는 건 불행한 일이다. 이제 시간을 거스르기 위해, 고향의 파편을 경험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침대 맡에서 아이패드의 스크린을 두 손가락으로 벌리고 오므리기를 반복하며 옛 위성사진을 들여다보는 일뿐이다. 2012년에 서울시가 시행한 ‘서울시민의 고향 인식도’ 조사를 보면 매우 놀랍게도 시민의 81.1%가 서울이 고향이다, 또는 고향 같다고 응답하고 있다. 서울을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이들 중 반은 서울 태생이고, 나머지 반은 다른 지역 출신이다. 이들에게 서울은 고향‘이기’보다는 고향‘이어야’ 하는 도시인 셈이다. 그것은 패티김이 노래한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렵니다”(서울의 찬가, 1969년)라는 역설과 다르지 않다. “아, 우리의 서울, 거리마다 푸른 꿈이 넘쳐흐르는 아름다운 서울을 사랑하리라”(서울, 1982년)는 이용의 맹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 네버 포겟 오 마이 러버 서울”(서울 서울 서울, 1988년)이라는 조용필의 고백도 고향을 갖고자 하는 보편적 욕망의 표상일 것이다. 우리가 서울을 고향이라 여기고 싶은 건 서울이 육백 년의 역사 도시이기 때문이 아니다. 산 많고 강좋은 도시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전쟁의 상흔을 딛고 짧은 시간에 일구어낸 기적 같은 경제 발전때문도 아니다. 63빌딩이나 DDP 같은 화려한 랜드마크가 서울을 고향으로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서울을 고향으로 열망하는 건 서울이라는 도시의 시공간이 일상생활의 현실과, 또 그 기억과 뒤엉켜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은 그의 고향 풍경과 삶을 담은 자전 에세이 『이스탄불』에서 이렇게 말한다. “도시는 우리 자신의 삶과 정신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우리 자신 외에 도시의 중심부란 없다.” 도시의 핵심은 사람이며 삶임을 강조한 것이다. 도시 자체가 정치의 최전선이었던 지난 10여 년간 서울은 또 한 번의 큰 변화를 꿈꾸었다. 이명박, 오세훈, 박원순 시장은 도시의 구조와 형태를 재조직하고 삶과 문화를 재편성하는 그랜드 플래너를 자임했다. 계획가로서의 서울 시장들, 그들이 선언하고 추진해 온 서울의 비전과 대형 프로젝트는 서울이라는 도시를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희망과 어떻게 접속해 왔는가? 이번 호의 서울 특집은 이런 의문에서 기획되었다. 애초에 구상했던“그들의 서울, 우리의 서울”이라는 주제는 “서울의 오늘을 읽다”로 축소되었지만, 그들의 ‘세계 도시서울’, ‘걷고 싶은 서울’, ‘디자인 수도 서울’, ‘공유도시 서울’, ‘푸른 도시 서울’이 서울을 우리의 고향으로 만드는 일에 어떻게 기여했는가 하는 문제의식은 읽힐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나는 튀는 도시보다 참한 도시가 좋다』의 정석,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의 조한,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의 이경훈, 『랜드마크; 도시들 경쟁하다』의 송하엽, 『건축·도시·조경의 지식 지형』의 조경진 등 조경, 건축, 도시 분야의 베스트셀러 필자들이 이번 특집에 흔쾌히 참여해 주셨다. 이들은 시정市政, 기억, 거리, 랜드마크, 공원을 단면으로 잘라 건강하고 편리하고 아름다운 도시 살이를 디자인해야 할 우리 전문가들의 과제를 드러내 주고 있다. 김훈은 이렇게 글을 끝맺는다. “나는 내 고향 서울이 만인의 … 고향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한다. 타향사람들아, 서울이 당신들의 고향이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CODA] 부산시민공원이 남긴 것
    특집의 원고 청탁이 이렇게 수월했던 적이 없었다. 그들은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오랜 시간 붙잡고 있던 하야리아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려는 의지가 느껴졌다. 황금연휴의 다음날 부산으로 향했다. 하루 일찍 부산에 도착한 사진작가는 그 연휴에 엄청난 인파가 부산시민공원에 몰렸다고 전했다(그래서인지 이달의 사진에 사람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아무리 개장 직후라지만 우리나라 도시 공원의 인기가 이렇게 높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5월의 부산은 더웠다. 공원을 걷는 연인들이 그늘을 찾으며 불평하는 소리도 들렸고, 벤치마다 이미 주인이 있어 앉을 자리를 찾아헤매는 이들의 조급한 눈초리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 그늘이 좀 부족한 것 쯤이야 어떠랴 싶었다. 공원의 나무야 자랄 것이고, 그늘은 시간이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새 공원이라 그런지(?) 공간보다는 시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도시인의 로망인 저 푸른 잔디밭을 둘러싼 각종 놀이 시설에서, 바닥 분수에서, 미로 정원에서 수많은 아이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게다가 시민공원의 시설은 무료이니 웬만한 테마파크 못지않은 매력으로 다가서는 듯했다. 나중에 들은 설명이지만, 부산 사람들은 바람을 쐴 때 대개 바다를 찾는다. 그런데 내륙에 대규모 공원이 들어섰으니, 이 새로운 유형의 공간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것이다. 공원 문화도 학습하며 형성되기 마련이다. 지금 부산 시민들은 부산의 유일한 공간에서 공원 문화를 탐색하는 단계인 셈이다. 공원을 돌아본 후 공원의 북문으로 나서는데, 지금은 아주 일부만 남은 캠프 하야리아 시절의 담장에 시선이 가 닿았다. 그 너머로 집들이 보였다. 의외로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지난 100여 년간, 부산 시민의 지척에서, 이 큰 공간이 저 담장 아래 꽁꽁 숨겨져 있었겠구나 싶으니 새삼 기가 막혔다. 그리고 다음날, 이번 특집의 두 필자인 김승남 사장과 강동진 교수를 함께 만났다. 두 사람 모두 하야리아공원포럼을 통해 오랫동안 캠프 하야리아의 공원화에 노력해 온 만큼 현재 공원의 모습에 아쉬움도 컸다. 특히 캠프 하야리아의 역사적이고 문화적 가치가 있는 건물들이 토양 오염을 이유로 대부분 철거된 점을 안타까워했다. 환경 오염을 정화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독일 함부르크의 도시 재생 사업인 하펜시티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김승남 사장은 독일에서도 역시 기름이 유출되었으나 5년에 걸쳐 천천히 치유했다고 설명한다. 반면 부산시민공원의 경우는 ‘싸고 빨리’ 추진하기 위해 한꺼번에 밀어버리고 덮어버리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건물들도 새로 페인트를 칠하고 부재를 새것으로 바꾸어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이 안쓰럽다. 디자인의 완성은 디테일이 아니던가. 옛 건물을 무조건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상책은 아니겠지만, 차라리 그대로 두었다면 어땠을까. 마치 하야리아 담장의 파편처럼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장소의 기억을 호출하는 매개체가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대부분의 미군 기지의 토양이 오염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금, 반환되는 땅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는지, 환경이 오염되었다는 사실에 집중하는 것만큼 어떻게 치유와 보존을 병행 혹은 선택할 것인가 고민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한편 부산시민공원에는 기억의 숲이 조성되어 있다. 캠프 하야리아 곳곳에 심어져 있던 플라타너스를 한 곳에 모아 가식해 둔 것인데, 오히려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 그 모습 그대로 남게 된 공간이다. 개인적 선호의 차이가 있겠지만, 부산시민공원에서 지금 자연스러운 경관은 이렇게 과거의 것이 그대로 남은 곳들이다. 안타까운 것은 부대 내부의 철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캠프 하야리아의 부지와 부전역 사이에는 삼각형 모양의 주거 지역이 쐐기처럼 부대 쪽으로 밀고 들어온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효율적인 공원 토지 이용’과 뉴타운 계획을 이유로 이 주거지역을 철거하고 공원 부지로 편입시켜 부지를 정형화했다. 이를 두고도 두 필자는 입을 모아 안타까움을 표한다. 이 오밀조밀한 주거 지역이 남았다면, 독특한 상업 공간과 문화 공간으로 진화해 가며 공원의 경계에 활력을 불어넣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한번 없애버린 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지만, ‘하야리아공원포럼’의 노력으로 기존의 계획을 변경시켜 몇몇 건물을 남긴 것도 의미 있는 결과다. 무엇보다 부산시민공원의 성과는 사람들에게 남은 듯하다. 여하튼 부산의 시민들은 공원의 탄생에 크고 작게 기여했고, 이러한 경험에서 오는 자신감도 그 성과의 일부다. 이 경험은 부산에 남아있는 다른 많은 것, 폐선부지나 워터프런트(북항), 달동네 등에서 다시 진화하리라 믿는다. 부산시민공원을 담은 6월호 특집을 마무리하는 지금, 용산공원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때, 또 대한민국의 현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세월호 참사의 여진이 강하게 남은 지금, 예술평론가 수전 손택의 글을 공유하며 글을 닫고 싶다. “부디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사람과 식물
    #15 거트루드 지킬, 위대한 정원 예술가 영국 정원 역사상 가장 중요한 디자이너로 지금도 그 영향력이 시들지 않고 있는 거트루드 지킬Gertrude Jekyll(1843~1932)은 엄격한 쪽머리에 빅토리아풍의 검은 원피스를 입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정원을 돌아보는 노년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지킬이 디자인한 아름다운 색채 정원과 얼핏 매치시키기 어려운 모습이다. 어쩌면 검은 옷과 지팡이는 위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면 지킬 선녀로 변하여 마술봉을 휘둘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트루드 지킬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지루한 정원에 마술처럼 빛과 색을 가져다줌으로써 새로운 장르를 완성시킨 장본인이었다. 건축과 정원의 화합을 이루어낸 것 외에도 식물, 그중에서도 다루기 힘든 야생화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으며 그가 연출했던 장면들은 지금도 귀감이 되고 있다. 비록 야생화를 자유롭게 풀어놓기는 했지만 완강하고 경직된 사고방식으로 인해 작품으로 완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했던 윌리엄 로빈슨1과 비교해 볼 때, 첫 정원 작품으로 단번에 마에스트로의 평판을 얻은 지킬의 비결은 우선 자유로운 사고 체계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하게 한다. 물론 타고난 감각과 오랜 세월 화가로 활동하며 얻었던 체험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시력이 급속히 나빠져서 화가의 길을 접고 정원 예술가로 전향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다.2 그러나 그보다는 그의 삶의 여정이 자연스럽게 정원 예술가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정원공부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모든 영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정원 유전자’ 덕으로 지킬에게 정원은 어린 시절부터 일상에 속했었다. 유난히 색에 민감했으므로 꽃의 다양한 색조에 매료되었던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영국 남부의 서리 지방이 고향이었던 지킬은 만 열여덟 살이 되던 1861년에 런던의 사우스켄싱턴 예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하기 위해 집을 떠났다가 1876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홀로 남은 어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십여 년 만에 귀향했다. 딸이 돌아오자 어머니는 먼스테드히스Munstead Heath에 집을 새로 지었는데 이곳에 ‘실험적’으로 만들어 본 정원이 지킬의 공식적인 첫 작품이 된다. 그것이 불과 3~4년 만에 소문날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음으로써 정원 예술가로서의 운명이 결정되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영국인들은 소문난 정원을 방문하는 전통이 있었으므로 지킬 모녀의 먼스테드히스 정원에도 방문객이 찾아들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당시에 『정원The Garden』이란 제호의 잡지를 발행하던 윌리엄 로빈슨과 영국장미협회 회장의 방문을 받게 된다. 이렇게 얻은 성취감으로 인해 지킬은 정원이 대안이나 차선책이 아니라 그동안 쌓아왔던 예술적 체험을 집약시킬 수 있는 기회임을 이해했다. 이즈음 로빈슨의 권고로 『정원』 잡지에 기고를 시작했는데 1932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기까지 천여 편의 에세이를 쓰고 모두 열세 권의 책을 냈으며 크고 작은 정원 400여 개를 디자인했다. 이런 엄청난 작업량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지킬에게 정원이 전부였음을 시사한다. 지킬이 미술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미술공예운동Art & Craft Movement의 창시자 중 한 명이었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1834~1896)가 학교 인근에 디자인 회사를 설립했다. 본업이 화가였던 윌리엄 모리스는 공장에서 생산되는 생활용품들을 몹시 역겨워했다. 손으로 직접 만든 것만이 가치 있다는 철학 하에 벽지부터 가구까지 직접 만들어 저렴하게 판매하는 것을 목적으로 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손재주가 많았던 지킬이 “마음과 손과 눈”이 삼위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모리스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지킬은 회화 외에도 자수, 조각, 판화, 직조, 사진 등 다방면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분야를 넘나드는 포괄적인 작품 세계를 추구했다. 이런 성향은 후에 정원 예술가로 완전히 방향을 굳힌 후에도 양식에 구애받지 않은 ‘편견 없는 정원’을 만들게 했다. 그러나 정작 지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1775~1851)3의 그림 세계였다. 미술관에서 터너의 그림을 연구하며 보낸 수많은 시간은 터너의 화폭을 환하게 밝히는 지중해의 빛과 색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1874년 지킬은 터너의 빛을 찾아 여러 달에 걸쳐 북아프리카, 그리스, 이탈리아를 여행하게 되며 여기서 만난 파스텔 색조의 식물에 매료되어 돌아왔다. 이런 영향들이 축적되어 후에 지킬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경계 화단’4이 탄생했다. 경계 화단은 본래 프랑스 정형식 정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경계를 이루던 회양목 생단이 진화하여 꽃피는 식물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을 말한다. 지킬은 이 경계형 화단이 독립적 정원 요소로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것 같다. 화폭 속에서 더욱 빛나는 터너의 밝은 색조를 응시하던 수많은 나날 중 야생화들도 저렇게 ‘액자’에 담되 윤곽 없이 서로 스며드는 기법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것이다. 소로를 따라 화단을 길게 배치하는 것이 경계 화단의 기본 형태였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여러 방법으로 응용했다. 특히 옹벽, 계단, 테라스 등 시설물을 오히려 화단처럼 이용하여 식물과 어우러지게 함으로써 최대의 상승 효과를 내는 기법 역시 지킬의 아이디어였다. 경계 화단에서 보여준 지킬의 탁월한 감각은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원 전체의 구성에 여실히 반영되고 있다. 지킬의 정원들은 손수건 크기의 화단으로부터 몇 헥타르에 이르는 숲 정원까지 때로는 정형으로, 때로는 자연형으로 장르를 넘나들었으며, 전원의 정다움, 도시적인 세련됨, 이국적인 매력 등 상황에 따라 적절한 식물들로 ‘팀’을 짜서 배치함으로써 수많은 변주곡을 연주한다. 각 식물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무대를 만들어 줌으로써 최상의 효과를 얻어 낸 지킬의 방법론은 건축과 정원의 화합뿐 아니라 사람과 식물 사이에도 균형 잡힌 관계가 가능함을 말하고 있다. 20세기 초까지 일정한 패턴을 벗어나지 못하고 쳇바퀴를 돌고 있던 정원계에 지킬이 보여준 자유로움과 균형감은 확실한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 그림만 그리기 1
    설계의 정의 설계의 목적은 그림을 그리는 데 있지 않다. 설계design는 “특정한 대상의 형태와 기능을 결정하는 행위다.” 이때 특정한 대상은 반드시 건물이나 정원 같은 공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옷도, 가구도, 일상용품도 설계의 대상이며, 요즈음에는 심지어 감정이나 행위도 설계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설계를 할 때 우리는 대상의 형태와 기능을 결정하기 위해 다양한 요소들을 생각해야 한다. 크기, 색, 질감, 위치와 같은 물리적 성질들뿐만 아니라 대상의 목적, 의미, 만드는 과정, 심지어 변화까지도 디자이너가 고려해야 할 설계의 요소들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는 글이나 소리로 기술된 계획을 설계라고 하지 않는다. 설계 과정상의 모든 생각과 결정들은 그림을 통해서 구현된다. 설계의 매체는 결국 그림이다. 설계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설계 행위는 기능과 형태의 구체적인 그림을 만듦으로서 이루어진다는 전제가 붙어있다. 다시 온전한 정의를 내리자면 설계는 “특정한 대상을 만들기 전에 구체적인 그림을 통해 그 형태와 기능을 결정하는 행위다.”1 이렇게 본다면 설계의 목적은 특정한 대상의 형태와 기능을 구현하는 데 있지만, 모든 수식어와 관계사들을 제거하고 나면 설계는 본질적으로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된다. 두 가지 그림 그동안의 설계 경험을 떠올려보면 대부분의 시간을 그림만 그리는 데 쏟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실제의 공간을 직접 대면할 때라고는 고작 대상지 답사를 간다든가, 현장 실습 시간에 먼발치에서 콘크리트가 부어지는 모습을 바라본다든가, 모종삽으로 꽃포기들을 몇 번 심어본 기억밖에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졸업을 하고 회사에 취직하더라도 설계의 경험은 그림이라는 매체 바깥으로 나가기가 힘들다. 정원을 전문적으로 다루거나 시공을 겸하는 회사가 아니라면, 업무상으로도, 계약상으로도 설계의 모든 최종 결과물은 공간이 아닌 그림이 된다. 누군가는 공간을 만들면서 그림만 그려야 하는 설계의 현실에 괴리감을 느낄지 몰라도 이는 전혀 비정상적인 일이아니다. 근대적인 의미의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생기면서 공간을 창조하는 작업도 분업화된다.2 이제 설계가의 업무는 나무를 심고 석재 포장을 까는 일이 아니라, 어디에 나무를 심고 어떠한 모양으로 석재 포장을 깔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 되었다. 오늘날의 설계가는 구상에서부터 제작까지의 전 과정을 수행했던 중세의 대석공Master Mason이나 조선시대의 대목장과는 다르다. 설계가가 다루는 매체는 그림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림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려진다. 예술가도 설계가도 모두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이 중 설계가만이 전문적인 기술자로 인정받는 이유는 설계가의 그림이 작가의 개인적인 표현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전문적인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기술적 매체이기 때문이다(그림1, 2).3 우리는 이를 도면이라고 부른다. 도면은 정확하게 따라야 할 규칙이 있다. 전문적인 기술자로서 설계가는 이 규칙들을 숙지하고 지켜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건축학과와 조경학과 학생들은 저학년 때 도학과 제도라는 수업을 들어야 하고 평생 이때 배운 언어를 반복해서 구사한다. 그런데 공학도들 역시 제도 수업을 통해 동일한 도학의 원칙을 배우며 그들의 실습 과목 역시 설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는 설계가가 따라야 할 그림의 규칙이 예술가들이 익히는 표현기법보다는 공학자들이 요구하는 정보의 체계에 가깝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공학자의 도면과는 달리 디자이너는 기술적 정보의 전달을 넘어 대상의 미적인 아름다움과 작가가 부여하고자 하는 의미까지도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빠지는 함정이 있다. 바로 설계의 매체에 대한 잘못된 이해다. 설계의 그림은 기본적으로 정보로서의 가치를 지니면서 예술적인 표현을 반영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학생들의 그림은 이도 저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면의 형식을 취하지만 전달하는 정보는 오류 투성이고 그렇다고 대상의 아름다움도, 본인의 생각도 드러내지 못하는 그림. 다시 말하지만 설계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다. 때문에 설계의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잘못된 설계를 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앞으로 두 번에 걸쳐 할 이야기는 설계 매체에 대한 이야기다. 앞에서 나누었던, 그리고 이후 계속해서 하게 될 개념, 직관, 이론, 분석, 맥락, 의미와 같은 설계의 방법과 대상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잊어두자. 설계의 매체에 대한 이야기는 곧 설계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도면의 논리 가장 기본적인, 그러나 의외로 그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도면을 구성하는 그림들은 무엇인가? 조경학과 2학년 정도가 되면 누구나 이 질문에 쉽게 답을 한다.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 이 셋이 가장 기본적인 도면의 형식이다(그림3, 4, 5). 그런데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의문점이 하나 생긴다. 현실의 공간도, 설계가들이 구현하고자 하는 공간도 삼차원이다. 그런데 왜 도면의 기본은 삼차원적 형태를 보여주는 그림이 아니라 이차원적정보만을 보여주는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일까? 물론 이차원적인 그림들이 더 그리기 쉽겠지만, 고도로 복잡한 공학적 지식을 요구하는 교량도, 마천루도, 심지어 우주선의 설계 역시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로 그려진 이유가 단순히 설계가들이 그리기 쉬워서였다면 수긍하기가 힘들다. 고대 그리스어로 인위적인 것은 노모스Nomos라고 부른다. 노모스는 인간의 정신 문화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노모스의 반대말인 피지스Physis는 인간 문명과 대립되는 자연을 뜻한다. 문명이 발생한 이래로 인간은 자연 상태의 피지스를 노모스의 세계로 편입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설계는 단순한 자연의 변형을 넘어서 건축물과 같이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노모스의 공간을 창조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이를 위해 인간은 기하학이라는 사고 체계를 발명했다. 모든 문명을 막론하고 기하학은 건설, 치수, 천문, 경작 등 공간을 다루기 위한 모든 분야의 기반이 되는 지식이었다. 그래서 설계를 지배하는 사고의 체계, 그리고 설계 매체인 도면의 특수한 형식을 이해하려면 기하학의 사고를 이해해야 한다.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하였고 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하였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어바니즘』이 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있다.
  • [조경가의 서재] 책은 빨갛다 사랑도 빨갛다 아니 처연하다
    개양귀비 꽃잎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아 본 적이 있다. 한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붉은 빛은 그 강렬한 덧없음으로 인해 비현실로 각인된다. 그에 비해 동백꽃은 붉은 눈물방울처럼 툭 떨어져버리는 처연함에 속수무책이다. “빨간색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한계가 없고 특징적인 따뜻한 색이다. 그것은 생기에 차 있고 활동적이며 동요하는 색으로서 내적으로 작용하지만, 사방으로 자기 힘을 소모하는 노란색이 지닌 경솔한 성격은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빨강은 모든 에너지와 강렬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목적을 의식한 무한한 힘을 강력히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거의 외부로 향하지 않고 주로 자기 내부에서 분출하고 작열하는 빨강은 소위 남성적으로 성숙한 색이다.”1 칸딘스키가 ‘남성적’이라고 얘기했던 속성은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ovar의 영화 ‘하이힐’2을 보면 단순히 남성적인 것보다는 ‘여성 안에 갖고 있는 남성적인’ 빛깔로 욕망과 슬픔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색이 어느 정도 이면을 가지고 있지만,특히 빨강은 그 강렬함으로 인해 그 안에 숨겨진 슬픔과 부서지기 쉬운 감성을 간과하게 된다. 강렬함과 다치기 쉬운 감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빛깔. 그런 면에서 개양귀비 꽃잎은 빨강이 가지고 있는 빛깔의 본성을 가장 적절한 물성으로 보여준다. “나는 여기에서 당신들의 눈에 말을 걸고 있다. 이것이 나의 신중함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 동시에 나는 공중에서 당신의 시선을 통해 날아오른다. 이것이 나의 가벼움이다. 나는 빨강이어서 행복하다! 나는 뜨겁고 강하다. 나는 눈에 띈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를 거부하지못한다. 나는 숨기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섬세함은 나약함이나 무기력함이 아니라 단호함과 집념을 통해 실현된다. 나는 나 자신을 밖으로 드러낸다. 나는 다른 색깔이나 그림자, 붐빔 혹은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를 기다리는 여백을 나의 의기양양한 불꽃으로 채우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내가 칠해진 곳에서는 눈이 반짝이고, 열정이 타오르고, 새들이 날아오르고,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나를 보라,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를 보라, 본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다는 것은 곧 보는 것이다. 나는 사방에 있다. 삶은 내게서 시작되고 모든 것은 내게로 돌아온다. 나를 믿어라!”3 오만하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 나오는 ‘빨강’의 얘기다. 파묵의 빨강은 말 그대로 불꽃이다. 그래서 그것은 살아 있음 자체다. 그러고 보니 제목이 의미하는 것은 결국 불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지만 영원하고 싶은 그러나 영원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술탄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고,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바뀌고, 그들이 시대를 거슬러서도 지탱하고자 했던 양식이 바뀌는, 이전의 모든 것들이 소멸되어 가는 얘기. 그러니까 빨강은 소멸의 시간을 얘기하는 유일한 빛깔이다. 이수학은 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이원조경에서 4년 동안일했다. 프랑스 라빌레뜨 건축학교와 고등사회과학대학원이 공동 개설한 ‘정원·경관·지역’ 데으아(D.E.A.) 학위를 받았고, 현재 아뜰리에나무를 꾸리고 있다.
    • 이수학 / 아뜰리에나무 소장
  • [그들이 설계하는 법] 디자인 검산법, 경관 모형 실험
    1 조경은 글자 그대로 경관을 만드는 행위다. 실제의 경관이 장소를 구성하는 다양한 물리적구성 요소 간의 상호 작용에 의해 그 장소만의 공감각적 시스템을 형성하는 것처럼, 경관을 디자인하는 것 역시 대상지라는 물리적 바탕과 그 장소를 채우게 될 새로운 물리적 구성 요소의 조합을 통해 구현된다. 설계자만의 깊이 있는 개념과 태도도, 남다른 눈으로 해석한 대상지의 의미와 감흥도, 경관적 컬티바landscape cultivar로서 새로이 장소를 작동시키기 위한 창의적 전략도 물리적인 디자인 없이는 불가능하다.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모든 과정이 그 장소에 가장 적합하고 합리적이고 의미 있는 물리적 디자인을 위한 과정인 셈이다. 결과물로 디자인된 물리적 요소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경관적 감흥이 미학적 가치를 갖고 이용자들로부터 사랑받을 때, 그러한 과정도 의미를 얻게 된다. 혹자의 말처럼 우리가 디자인하는 물리적 경관은 일단 예쁘고 봐야 한다. 그래야 할 말이 있는 것이다. 2 무언가를 실제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과 검증이 필요하다. 경험 많은 작가일수록 보다 안정적인 결과물을 담보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고, 그것은 그만의 노하우가 된다. 하지만 흔히 말하듯 조경은 잡학이다. 가장 통합적이고 복합적인 디자인 단위라 할 수 있는 경관을 다루다 보니 비슷한 디자인 분야 중에서도 고려해야 할 것이 더욱 많고, 그러한 요소들 간의 모든 조합을 경험하는 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수많은 현장 경험을 수십 년 해온 대가가 아니라면 디자인과 실제의 간극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충실하게 디자인을 검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머리가 아니라 눈과 손을 통해 이루어질 때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이 때 모형model을 통한 스터디는 가장 손쉽지만 가장 효과적인 검증 도구가 된다. 3 나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디자인과 실제 사이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모형 스터디 작업을 시도하고자 노력한다. 단순히 최종 디자인을 재현하는 프레젠테이션 도구로서의 활용을 넘어, 대상지의 3차원적 현황을 보다 쉽게 이해하는 분석 도구로서, 개념적 전략이 대상지에 적용되었을 때 발생하는 현상을 관찰하여 그로부터 대상지만의 시스템을 도출하기 위한 전략적 도구로서, 계획안의 형태, 스케일, 공간감 등을 빠르게 검증하고 발전시키는 디자인 도구로서 모형의 다양한 활용 가능성을 실험해 본다. 뿐만아니라 디지털 모형의 활용은 복잡한 구조물의 기초에서부터 마감까지 실제 시공의 전 과정을 가상적으로선행해 봄으로써 시공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순서상의 오류를 파악하고 시공 방법을 개선하기 위한 효과적인 검증 도구가 되기도 한다. 4 모형을 통해 디자인 스터디를 하는 경우 나에게는 다섯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실제로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 직접 모형을 만들도록 한다. 물론 단순히 대상지 지형을 재현하는 모형이나 전체적인 베이스를 만들거나 하는 것은 누가 해도 상관이 없겠지만, 디자인 스터디 모형의 경우에는 제작 과정 자체가 디자인의 과정이 되므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디자이너가 직접 깨닫고 느끼고 수정하면서 디자인을 발전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모형 제작이 두세 시간을 넘기지 않도록 한다. 아주 디테일한 스터디를 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형 제작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 효율적인 스터디가 가능하다. 셋째, 디테일한 설계를 제외하고는 디지털 모형보다 물리적 모형physical model을 만들도록 한다. 화면의 한계 속에서 벗어나야 하며 손을 통해 디자인을 느끼는 것 역시 중요하기 때문이다. 넷째, 재료 선정 시 가급적이면 모형용 소재가 아니라 스케일과 재질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창의적 소재를 찾도록 한다. 다섯째, 쉽게 분해되거나 변경이 용이하도록 만들어야한다. 그래야 지속적인 스터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5 ‘Gubei Pedestrian Promenade Central Folly’(2009). 대부분의 프로젝트에서 디지털과 물리적 모형이 병행되는 경우가 많다. 센트럴 폴리는 상하이의 대규모 주거 단지 내 보행자 가로인 구베이 골드 스트리트Gubei Gold Street의 중앙 광장에 설치된 카페, 매점, 꽃집, 관리실 등으로 구성된 소규모 편의시설이다. 폴리 디자인의 거의 모든 과정은 디지털로이루어졌다. 기본구상 단계에서부터 디자인은 라이노 3D를 이용하여 완성되었고, 프로그램으로부터 추출된 평면, 단면, 입면을 베이스로 모든 캐드 도면이 작성되었다. 유일하게 디지털로 진행되지 않은 것은 바로 디자인의 검증 단계였다. 디지털 모형은 정교함에서는 뛰어나지만 유연하지 못하고, 모니터의 한계 또는 가상공간의 왜곡된 화각 탓에 대상을 통합적으로 관찰하고 인지하는 데 분명한 한계를 갖는다. 마우스의 반복된 클릭과 옵셋offset이나 카피copy 같은 명령어 없이 손끝으로 느끼면서 하나하나 완성되는 과정의 정교함은 디지털 세계의 오차를 검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일 것이다. 김현민은 1975년생으로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조경가협회(ASLA)에서 수여하는 우수졸업자상을 받았으며, 미국의 SWA Group에서 Shanghai Gubei Gold Street Plan, Symphony Park Competition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 기술사사무소 렛, 비오이엔씨에서 계획, 설계 및 정원 시공에 이르는 폭 넓은 실무를 경험하였고, 국내 여러 대학에서 조경 설계를 강의하였다.
  •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코랄리 윈 갭 필러 설립자
    갭 필러Gap Filler는 뉴질랜드 캔터베리 지방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파괴된 도시를 시민의 손으로 재건하기 위해 설립된 비영리 시민 단체다. 지진으로 생긴 수많은 공터들이 영구적으로 개발되기 전까지 무작정 비워두는 것이 아니라, 공터를 임시적으로 활성화하고 커뮤니티의 요구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 갭 필러의 목표다. 2010년 9월 4일에 전 도시를 뒤흔든 첫 번째 지진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인 이듬해 2월 22일에 또 한 번의 파괴가 이 지역을 충격에 빠뜨리면서 갭 필러의 역할과 임무는 빠르게 늘어났다. 설립자 코랄리 윈은 호주 애들레이드Adelaide 출신으로 원래 로스쿨을 다녔다. 그러나 연극과 영화, 미술사를 공부하고 싶어 법학을 그만두고 뉴질랜드 캔터베리 대학교의 문학부로 교환 프로그램을 갔다. 당초 반년을 염두에 둔 계획이었지만, 크라이스트처치의 매력에 빠진 그녀는 호주로 돌아가지 않고 이 도시에 자리를 잡았다. 지진 이전에는 미술관의 파트타임 매니저로, 그 후 아트센터에서 예술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거나 관람객 프로그램을 짜기도 하고, 웹사이트 관리, 마케팅 등 온갖 잡일을 도맡았다고 한다. 각종 페스티벌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기도 하고, 무료 연극단Free Theatre Company에서 실험적 연극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극단에서는 거의 보수를 받지 못했고, 가끔 급여가 지급되면 시간당 200원꼴이었다고 한다. 생활고와 타향 생활에 지쳐 방황하고 있던 코랄리 윈에게 지진은 하나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크라이스트처치 곳곳에서 수천 채의 건물이 붕괴되었는데, 그녀의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건물이 무너져 벽돌더미로 변하기 직전에 그녀는 가까스로 뒷문을 통해 빠져 나왔다고 한다. 집 뒷마당에 천막을 치고 바비큐 그릴로 음식을 만들며 생활해야 했고, 가졌던 모든 물건을 잃었다. 하지만 그녀는 당시를 회상하며 말한다. “왠지 모르게 자유스러워진 느낌이었어요. 떠난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많은 물건을 소유하지 않는 다는 사실이 말이에요. 때로는 우리의 물건들이 오히려 우리 삶을 지배하죠. 차 안에 있는 것이 내게 필요한 전부라는 현실을 맞닥뜨리고 나니, 사실 갑자기 신나는 기분이었죠.” 그녀는 목숨은 건졌지만, 첫 번째 지진 후 아트센터에서 해고되었다. 출장 가는 남자친구를 따라간 웰링턴의 거리에서 “I Love Christchurch” 포스터를 보고선참을 수 없어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갭 필러의 아이디어는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솟아났다. 실직 후 한 달 반 만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모든 것이 부정적이었던 상황에서 갭 필러는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단 하나의 기회였다. 함께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초기 멤버인 라이언 레이놀즈Ryan Reynolds나 앤드류 저스트Andrew Just와 달리 갭 필러에서 코랄리 윈이 항상 중심적인 역할을 맡은 이유는, 다른 정규직 일을 하고 있던 두 사람과 달리 오직 갭 필러에만 매진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갭 필러 설립 후 약 1년간 그녀는 무보수로 아침 7시부터 자정까지 거의 매일 일했다. 2011년 8월, 갭 필러는 드디어 크라이스트처치 시청으로부터5만 달러의 지원금을 받게 되었다. 현재 갭 필러는 6명의 유급 직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갭 필러의 중요한 역할은 버려진 도시 공간을 사용하는 데 갖가지 걸림돌을 제거하는 일이다. 법적인 난관과 책임 보험 등 시민들에게 생소한 어려운 절차들을 해결해 줌으로써 아이디어를 샘솟게 하고 현실화되게 돕는다. 갭 필러의 프로젝트가 주장하는 것은, 굳이 큰 예산의 공공 사업이 아니더라도 작은 시민 활동을 통해 실질적으로 사람들의 상처가 치유되고 동시에 도시의 성장 방향이 제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작은 프로젝트라고 모두 쉽게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실망스럽기도 하고 기대했던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코랄리 윈이 말하는 바는, 직접 해 보지 않으면 생각, 짐작, 대화만으로는 어떤 것이 성공하고 어떤 것이 관심을 끌지 알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다. 길을 아는 것과 실제로 걸어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기에 실패한 프로젝트 또한 나름대로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 갭 필러가 효과적인 것은, 이러한 실패가 비교적 적은 자본과 시간 투자로 진행되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시행되는 커다란 시행착오와 달리 재빨리 실패의 교훈을 흡수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진행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공공 정책적 측면에서 보면, 갭 필러는 일종의 길잡이 프로젝트로서의 성격도 가진다. 최근 조경 계획과 설계에서 대형 자연 재해와 각종 사회적 재난에 대비한 효과적인 대응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예방도 중요하지만, 많은 경우 재난은 제도적 준비를 무색하게 하는 압도적인 규모로 닥쳐온다. 그중 하나가 지진이다. 한반도는 그간 지진 안전지대로 인식되어 왔지만 상식을 뒤엎는 각종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크라이스트처치는 뉴질랜드 남섬의 중심 도시로서, 관광지일 뿐만 아니라 지역 산업과 문화의 구심점이 되어 왔다. 6개월 간격으로 일어난 두 차례의 지진은 도시 전체를 사실상 폐허로 만들었다. 살아남은 상당수 건물 또한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사용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일시에 발생한 대규모의 잔해, 공터, 그리고 충격적인 기억들은 대부분의 젊은이를 떠나게 했고, 일상적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제한된 인프라와 자본 탓에 복구와 재건은 수 년, 길게는 수십 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운 좋게 일자리를 유지하고, 삶터를 지키고자 도시에 남은 이들에게도 광대한 면적의 공터와 폐허 지역은 그날의 아픈 경험을 환기시키는 상처가 되고 있다. 갭 필러는 예술, 조경, 건축적 개입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 다시 웃음을 가져오고 새로운 모습의 도시에 대한 희망을 열고 있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 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 전시해 왔다.
    • 최이규 /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지소장
  • [공간 공감] 다섯 번째 공간 탐색, 서울시립대학교 캠퍼스
    이곳이 100년 가까이 된 캠퍼스라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1918년 경성공립농업학교로 시작하여 서울농업대학, 서울산업대학을 거쳐 약 30년 전 서울시립대학교(이하 시립대)로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시립대 캠퍼스를 처음 와본 건 아니었지만 여유를 가지고 찬찬히 둘러본 적이 없었던지라 이번 답사는 설계적 관점으로 이 공간을 살펴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캠퍼스 전반의 첫인상은 안정감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오래된 캠퍼스답게 차분하게 가라앉은 건축물과 아름드리나무들이 이러한 공간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건축물이 홀로 튀거나 윽박지르지 않고 대지에 안착되어 있다는 것은 구성원들이 편안한 공간감을 느끼는 데 도움을 준다. 100년 건축의 흔적을 기대할만 하지만 아쉽게도 서울학연구소나 박물관 등 몇몇 건축물에 국한되어 있고, 대부분의 건물은 보편적인 학교 건축의 모습이다. 최근 지은 것으로 보이는 건축물들에 주목할 만한데, 이들은 기존 캠퍼스와 스케일이나 재질면에서 어울리면서도 동시대적 감각을 드러내고 있다. 여러 부류의 건축이 공존하고 있지만 이질적이라고 보이지 않는 이유는 편안한 무게감이라는 공통분모가 캠퍼스 건축에 적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건축물과 그 배치가 주는 안정감과 더불어 원 수형을 지니면서 성목으로 자라난 아름드리나무들이 쾌적함을 더해준다. 캠퍼스 내의 나무는 과거 농업 학교의 유산으로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캠퍼스에 수목원을 결합해놓은 것처럼 다양한 수종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양호한 수형을 유지하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잘 관리된 녹음은 가치를 환산하기 힘든 혜택이 되어 구성원에게 되돌아가고 있다. 개별 건축이나 오래된 나무들 외에 시립대캠퍼스의 안정감에 기여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지형이다. 이 캠퍼스는 교문 부근의 지대가 높고 안쪽으로 완만하게 낮아지다가 끝부분에서 배봉산을 만나다시 오르막의 경계를 이룬다. 분지라고 볼 수는 없지만 완만한 그릇 같은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이 오목한 그릇에 담긴 건축과 나무는 상대적으로 낮아 보여 은연중에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은 또한 캠퍼스 외부로부터의 시각적 영향을 차단하고 위요감을 증가시키는 효과도 준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캠퍼스 전반을 아우르는 디자인의 원칙은 ‘언더 디자인’이다. 휴게 공간의 조성방향은 나무들이 완성한 공간을 잘 살피고 그 안에서 조심스럽게 구성원이 활용할 수 있는 최소의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상쾌한 그늘을 드리우는 큰 나무들 아래에는 데크와 벤치가 설치된 곳이 많다. 정욱주는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하였다. 글쓴이 외에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였고,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 빛과 색의 정원
    5월은 정원이 가장 풍요로운 계절이다. 새로운 잎이 돋는 신록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만한 정원이다. 어젯밤에 비도 오고 햇살도 밝으니 오늘 보게 되는 정원은 완벽한 차비를 갖추었을 터다. 숲 속에 위치한 주택 단지로 가는 길만으로도 마음이 정갈해진다. 도심 속에서 이런 숲길을 통해 주거지에 이르는 것도 새롭거니와 잘 정비된 도로가 흡사 어디 리조트에 가는 기분이 들게 한다. 작은 마을로 이루어진 주택 단지는 차분한 재료로 이루어진 비슷한 분위기의 저택들로 구성되어 주변 자연 및 정원과 잘 어울렸다. 맨 안쪽 산기슭에 위치한 주택은 힘 있고 정갈해 보였다. 린의 이재연 대표는 서안에서 10여 년 같이 근무했던 동료이고 설계와 현장경험을 한 이력도 비슷해서 나와는 태생적으로 비슷한 디자인 태도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장과 소재를 중시하고, 디자인·시공이 일체화된 작업을 위주로 하고 있는 점도 비슷하다. 아마도 디자인이 다른 부분은 나와 다른 성격적 특성 정도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보게 되는 정원은 내가 서안에서 독립한 후 처음 보는 서안 멤버의 정원이란 기대도 있다. 나와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작업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정원의 입구 여유 있는 주변 녹지와 도로변의 조경 공간은 안에 있는 정원에 대한 기대감을 높인다. 대문을 들어서면 단정한 계단과 그 옆 기단에서 흐르는 작은 벽천이 이국적이다. 코르텐스틸 기단은 식물 재료와 절묘하게 어울리고 베이지색 포장 재료와도 잘 어울려 명료한 입구 정원의 몫을 다하고 있다. 코르텐스틸기단 위에는 황금눈주목과 회양목, 일본조팝나무(홍조팝)를 심었는데, 금속의 재료와 잘 어울렸다. 특히 황금눈주목은 그 강렬한 색상이 더욱 이국적으로 보인다. 강렬하지만 잘 어울렸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금속과 대비되는 좀 더 차분한 색상의 식물을 선택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강한 이미지의재료에는 습관적으로 소프트한 재료를 놓는 버릇이 있다. 어쨌든 나와 다른 첫 번째 선택, 신선했다. 조팝나무와 황금눈주목 사이에 회양목으로 라인을 만든 것도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계단을 올라서면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이르는 디딤돌이 단정하게 놓여있다. 진입로가 마당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구조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으나 마당의 구조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 같다. 좌우로 긴 마당의 형태가 길의 레벨에 의해 변화가 생기고 포장 좌우로 살짝 마운딩 된 잔디 마당은 가볍게 느껴지기도 한다. 작은 지형의 흐름이 생겨 공간에 더욱 긴장감이 생기게 되는 효과도 있어 보인다. 또한 특별한 경계 없이 지형에 연속되는 포장과 잔디의 단정한 면이 시원한 공간감을 주고 있다. 빛의 마당 마당의 풍경은 눈부셨다. 날씨 탓도 있겠으나 풍부한 소재와 신선한 잎들, 꽃들이 빛나는 풍광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단정한 테라스와 한쪽의 코르텐스틸 기단, 그리고 여러 가지 변종 식물들의 풍부한 색상이 잘 어울렸고 마당에 심겨진 체리나무의 열매도 인상적이었다. 마당의 전면부에는 여러 가지 조팝나무가 심어지고 한쪽의 코르텐스틸 기단 위에는 무늬병꽃나무와 황금눈향나무가 심겨 있었다. 무늬병꽃나무의 흰색 잎과 연분홍 꽃이 황금눈향나무와 대비되어 이국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넓은 테라스에는 포니테일, 팜파스그라스, 모닝라이트억새 등 이국적인 그라스가 심겨 있었다. 나의 습관적 선택이라면 마당의 전면부에 그라스 종류를 배치했을 텐데 그는 테라스에 그라스를 배치하여 특별한 공간감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라스는 역광에 효과적인데, 테라스에 심겨진 그라스 종류들은 특히 섬세한 디테일을 가지고 있어 빛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주택 안의 풍경에 신선함을 더할 것이다. 이런 그라스가 은은하고 섬세한 빛을 표현한다면 순도가 높은 색상의 변종 식물과 꽃은 화려한 색상으로 빛을 표현한다. 황금눈향나무와 노란 대사초, 붉은 체리 열매, 대왕철쭉 등이 화려한 정원의 모습에 일조한다. 앞집 경계에 심겨진 에메랄드그린은 이런 화려한 색깔의 배경이 되는 맑은 녹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몇 개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건축의 형태가 강렬하기 때문에 다소 많아 보이는 정원의 색조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넓은 테라스와 같은 레벨의 잔디가 연속되면서 전체적으로 넓고 시원한 공간을 형성한다. 김용택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환경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부터 조경설계 서안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으며, 2001년부터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부암동 반계별서와 평창동 정원 등 정원 조성 작업을 주로 해 왔으며, 조경 작품이 주변 환경에 동화되도록 장소의 특성에서 얻은 모티프를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설계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