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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합 곡예를 하는 예술가, 그리고 젠트리피케이션 젠트리피케이션, 몇 가지 시선
    소위 ‘작가’ 또는 ‘예술가’로 불리거나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는 이들을 한두 가지 유형으로 묶어둘 수는 없겠지만, 그 내용과 형식이 무형의 것이든 유형의 것이든, 정치적 함의를 가지든 그렇지 않든, 감각에 따른 것이든 이성이나 감성에 따른 것이든, 내 한몸 고사하면서 창작 욕구를 풀어내고자 하는 것만은 아마도 그들 공통의 원동력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여기에 더해 예술을 통해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고, 훌륭한 작가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도 있을 수도 있고, 명성을 쫓는 일을 떠나 예술, 철학, 사회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반응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자가 천민자본주의라고 부르기도 하는 그런일들에 맞서겠다는 투쟁 정신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도 있을 것이고, 한편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잘 팔리는 ‘비싼’ 작가가 되어 럭셔리한 생활을 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원동력이 무엇이든 대체로 애초부터 확실한 경제적 성공이나 안정을 담보로 하지는 않는 예술가의 노력은, 바로 그런 이유로 ‘굶어 죽을지언정 빵보다는 장미를 택한다’거나 ‘그림 때문에 귀를 자른다’는 둥 딱히 반드시 예술성과 결부되지 않았어도 되었을 사례를 통해 보편화의 오류를 거쳐 신화화되거나, 반대로(그러나 같은 이유로) 부르조아나 한량들의 시간 때우기, 또는 엘리티시즘, 더 나아가서는 한낱 어린아이의 미성숙함 쯤으로 치부되고는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회의 일원으로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사각지대에서 ‘기타 등등’으로 존재하며 쓸모없는 잉여인간으로 부유하던 예술가들이 돌연어떤 부분에서 필요한 사람들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 같다. (물론 그에 상응하는 값을 받지는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우리가 사실은 버티기 위해 종합곡예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여기가 맹지인데, 자네 친구들 좀 불러서 건축 실험하고 그럴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하나 지어서 레지던시같은 것도 좀 하고. (밤이면 늑대들이 울부짖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섬이라 조용히 작업 구상하기에도 좋을 거야.”또는, “미술 해요? 어머 잘 됐다, 그림 그리고 싶으면우리 동네 와요. 벽화 좀 그려 줘. 사람들한테 그림 알려지고 그러면 좋잖아? 나는 지금 빚까지 내어가면서(물론 그가 소유한 집이 있는 동네에) 마을 만들기 하고 있는거야.” 진나래는 미술과 사회학의 겉을 핥으며 문화 예술계 언저리에서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게으르게 활동하고 있다. 진실과 허구, 기억과 상상,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흐리고 편집과 쓰기를 통해 실재와 허상 사이‘이야기-네트워크-존재’를 형성하는 일을 하고자 하며, 사회와 예술, 도시와 판타지 등에 관심을 가지고 최근에는 메이커스 문화나 신연금술, 인공지능 등 기술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지점들에 매료되어 엿보기를하고 있다. 2012년 ‘일시 합의 기업ETC(Enterprise of Temporary Consensus)’를 공동 설립하여 활동하였으며, 2015년 ‘잠복자들’로 인천 동구 지역의 공폐가 밀집 지역을 조사한 바 있다. www.jinnarae.com
    • 진나래[email protected] / 일시 합의 기업 ETC’, ‘잠복자들’ 공동대표
  • 젠트리피케이션, 쫓겨나는 사람들을 위한 블루스 젠트리피케이션, 몇 가지 시선
    지난 1월 28일 용산구의 지역 부동산 공인중개사들이 나서 젠트리피케이션 방지를 위한 자정 결의 대회를 열었다. ‘한국 공인중개사 용산구 지회장’과 ‘용산구청장’의 명의로 6개 항목의 ‘자정 결의문’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임대료 및 권리금 상승 담합’, ‘건물주에게 과다한 임대료 상승을 부추기는 행위’, ‘과다한 중개수수료의 요구’ 등을 금지하고, ‘건물주와 임차인 모두 안정적인 지역경제 상생발전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행정구에서 지난 몇 달 사이에 발생한 이 사건은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어려운 단어가 이제 학계를 넘어 업계를 거쳐 관계에까지 도달한현상으로 보인다. 방금 어렵다는 말을 쓴 이유는 아직도 이 단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판단에 기인한 것인데, 어쩌면 이런 판단도 그릇된 것인지 모르겠다. 젠트리gentry라는 계급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나 역시도 대학교 시절 ‘경제사’ 수업에서 몇 줄 읽은 게 전부다. 사실, 이제 그런 역사적 맥락을 뒤져보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뜨는 동네에서 쫓겨나는 사람들 현재 한국의 도시에서 발생하는 젠트리피케이션은 대략 ‘동네가 뜬다 → 임대료가 상승한다 → 임차인들이 쫓겨난다’로 요약된다. 임차인들이 쫓겨나는 자리에는 본격적으로 투자 혹은 투기를 수행하는 임차인이 들어오는 과정이 뒤따른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났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영세한 구멍가게 자리에 대기업 편의점 체인이 들어서고, 아담한 동네 카페가 화려한 프랜차이즈 카페로 바뀌는 것이다. 한 주간지 기사가 “뜨는 동네의 역설”1이라고 표현한 것이 이런 과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해 준다. 추상적으로 들릴까봐 몇 가지 예만 언급하겠다. 앞에서 언급했던 용산구와 성동구 이전에 종로구의 인사동과 삼청동, 마포구의 홍대앞과 상수동, 강남구의 가로수길과 세로수길 등이 2000년대까지 뜨는 동네, 혹은 ‘핫 플레이스’의 대표적 장소였다. 세 곳의 성격은 각각 다르지만 2010년대 중반인 현재 이곳을 찾으면 여가와 소비를 위한 대규모 상권으로 변모되어 십 수 년 전만해도 이곳에 예술가를 비롯하여 이른바 창의적 유형의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은 마치 거짓말처럼 들린다. 즉, 현재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이란 ‘뜨는 동네’가 다른 무언가로 변환되는 순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용산구의 자정 결의안이 ‘자백’한 대로, 동네가 어느 정도 ‘뜬다’고 판단되면, 부동산업체가 건물주를 ‘들쑤시고’ 건물주는 이때다 하고 ‘갑질’에 나서면서 새로운 업체가 하나둘씩 투자를 하면 동네 전체의 성격이 본격적 상권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 때깔이 바뀌는 과정에서 이전의 세입자가 쫓겨나는 현실이 존재한다. 그 세입자들은 대체로 원주민(소상인)이거나 예술가다. 그 현실은 이렇게 건조한 문체의 글로 적는 것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힘겹고 눈물 나는 과정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의 본토에서는 이렇게 ‘쫓겨나는’ 현상을 ‘displacement’라고 부른다. 전치나 축출 등의 번역어가 신통치 않다면, 사전을 뒤져서 ‘제자리에서 쫓겨난 이동’이라는 뜻을 확인해 두자. 즉, 전치는 젠트리피케이션 동전의 이면이다. 따라서 ‘전치 없는 젠트리피케이션도 있는가’ 등의 질문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는 곳에서 전치 당하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도 있을 수는 있지만, 전치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길고도 난해한 말을 굳이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정리한다면, ‘뜨는 동네에서 쫓겨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젠트리피케이션의 핵심이다. 그러니 아직도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그럴싸한 어감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없애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그럴싸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는 게 사실이라면 그건 왜 그럴까? 이런 질문은 ‘뜨는 동네’에서 ‘뜬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것을 요구한다. 뜨는 동네는 왜 그리고 어떻게 생성된 것일까? 신현준은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및 국제문화연구학과 HK교수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서 문화 산업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은후 정치경제학과 문화 연구를 접속하는 연구를 지속적으로 수행해 왔다. 대중문화, 국제 이주, 도시 공간이 주요 관심 분야다. 2006~2007년에는 싱가포르 대학교 아시아연구소의 방문연구원, 2008~2009년에는 네덜란드 레이든 대학교 방문교수, 2015년에는 듀크 대학교의 방문연구원으로 각각 재직한 바 있고, 국제 저널인 『Inter-Asia CulturalStudies』의 편집위원, 『Popular Music』의 국제고문위원을 역임해 왔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 팝의 고고학 1960/1970』(2005, 공저), 『귀환혹은 순환: 아주 특별하고 불평등한 동포들』(2013, 공저), 『가요, 케이팝 그리고 그 너머』(2013) 등이 있다.
    • 신현준[email protected] /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및 국제문화연구학과 HK교수
  • 젠트리피케이션, 그리고 디즈니랜드 젠트리피케이션, 몇 가지 시선
    나는 현재 서촌 통의동에 거주하고 있다. 집과 사무실이 한 건물 안에 있는 직주근접의 삶이다. 이러한 삶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나의 졸저인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와 『무지개떡 건축』에 자세히 설명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건물은 개인 소유다. 주거용으로 사용하지 않는 부분은 내가 운영하는 건축설계사무실을 비롯한 몇 개의 작은 회사에게 임대하고 있다. 즉, 나는 지주이며, 건물주이며, 임대인이다. 나에게 원고 청탁을 한 배경에 이런 이유가 있을 것이므로 미리 밝혀 둔다. 소유 지분의 상당 부분은 당연히 대출로 해결했으며 그 원리금의 상환을 위해 노력 중이다. 서촌으로 이사 온 지 햇수로 14년째가 되었다. 따라서 완전히 ‘굴러온 돌’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박힌 돌’도 아니다. ‘이웃사촌’이라는 표현은 낯간지러워서 못쓰겠다. 필요할 때 만나서 서로 상의하거나 힘을 합치는 정도다. 이사 온 직후 도시가스 간선 설치 문제를 두고 이웃적선동과 해묵은 갈등이 불거졌을 때 그랬고, 눈을 치우거나 골목길 주차 문제가 심각해졌을 때 그리 한다. (주차와 관련해서 대놓고 싸운 경험 또한 물론 있다.) 몇 년 전 인근의 작은 공원이 사라지게 될 상황이 되었을 때는 사회적 명분이 뚜렷했기 때문인지 이웃들 못지않게 다른 지역 사람들도 많이 모였고 결국 없던 일로 만들었다. 긴밀하게 참여해 온 지역 단위의 움직임은 ‘오픈하우스 서촌’이나 보안여관이 주최하는 벼룩시장 정도다. 자율 방범대에 속해 있기 때문에 다소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이웃 및 경찰들과 순찰을 돈다. 결론적으로 이웃과의 관계는 이전에 아파트 단지에 살았을 때와 그리 다르지 않다. 어차피 도시에서의 삶은 여러 변수들로 구성되는 인간관계의 맵핑mapping에 의해 결정된다. 공간적 인접성, 오래된 역사, 골목길과 같은 물리적 요소 등은 그 변수의 일부일 뿐이다. 직업적으로는 스스로를 ‘동네 건축가’라고 불러왔다. 동네에 대해서 주민으로서의 입장을 넘어서는 건축적, 역사적 차원의 관심이 있다. 그리고 서촌 및 북촌, 광화문 일대를 대상으로 다수의 작업을 수행해 왔다. 지금은 작업 범위가 넓어졌지만 건축가로서의 나의 경력이나 건축적 사고의 많은 부분은 이 지역에서의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동네의 여러 문제에 매우 깊숙하게 개입하고 있노라고 할 정도는 아니기에 그런 점에서 ‘동네 건축가 1.0’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개념도 앞으로 좀 더 진화하기를 바란다.여기까지가 주로 사실의 기술이라면, 이제부터는 의견을 제시한다. 오늘날 서촌의 화두는 단연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그리고 디즈니랜드화disneyfication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맞물려 있는 현상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동일시할 성격은 아니다. 디즈니랜드화하지않고서도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고 또 그 반대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젠트리피케이션의 경우, 이것은 시장 경제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다. 일종의 부작용이므로 사회적인 해결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서로 다른 차원의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시장 경제 자체를 부정하며 완전히 새로운 대안을 찾는 것인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하며, 이 글의 주제나 사회적 통념과 거리가 있으므로 더 이상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제도적 개입이다. 시장 경제 자체는 인정하되, 법과 제도 및 행정력을 통해 그 부작용의 해소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고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아무리 민주적인 사회라도 각종 권리를 제한하는 제도적 개입은 존재하며, 그것은 종종 놀랄 정도로 강력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프랑스의 파리 시가 얼마 전에 발표한 구도심 내 주거용 건물의 매매에 대한 제한 규정도 그렇고, 우리나라의 각종 건축 심의에서 제시되는 내용들도 그러하다. 2016년 현재 서촌 일대에 적용되고 있는 건축 행위에 대한 강제적 제약은 법리적으로는 심지어 위헌 가능성도 제기될 정도다. 하지만 사유 재산권에 대한 이러한 공공적 개입 자체를 원론적으로 부정하는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임대차와 관련된 합리적인 법률시스템을 만들어내야 할 의무가 있는 국회보다 일선 행정 기관이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적극적인 것은 역설적으로 흥미롭다. 마침 몇몇 지자체가 앞장서서 젠트리피케이션 문제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선언하고 나선 것이 그 좋은 예다. 건축가황두진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2년 서촌으로 이주한 이후 구도심에서의 경험을 배경으로 자신의 건축적 생각을 키워 왔다. 이 과정에서 현대 건축가지만 한옥 작업을 병행하게 되었다. 대표작으로는‘가회헌’, ‘춘원당 한방병원 및 박물관’, ‘캐슬 오브 스카이워커스’, ‘원앤원 빌딩’ 등이 있다. 활발한 저술 활동을 통해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2005, 해냄), 『한옥이 돌아왔다』(2006, 공간사), 『무지개떡 건축』(2015, 메디치미디어) 등을 펴냈다. 서울시 건축상, 대한민국 한옥 대상, 대한민국 공공 디자인 대상, 유네스코 아시아 태평양 문화 유산상등을 수상했다.
  • 젠트리피케이션의 유행을 다시 생각하다 젠트리피케이션, 몇 가지 시선
    최근 1년 사이 한국에서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학술적·대중적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주제로 한 각종 정책적·학술적 논의(도시정책 포럼 ‘젠트리피케이션 없는 도시재생 가능한가’ 등)에서부터 소위 젠트리피케이션 현장이라 불리는 지역의 자생적 젠트리피케이션 포럼(테이크아웃드로잉 ‘한남포럼’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젠트리피케이션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2016년 1월 한 달 사이에만 약 300여 건의 신문 보도가 이뤄질 정도로 대중 매체의 관심이 이러한 논의의 확산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서구에서 1960년대 초 루스 글라스Ruth Glass에 의해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란 용어가 만들어진 이후 지난 50년 동안 다양한 경험 연구와 이론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 다뤄질 정도로 용어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1 이와 달리 한국에서는 현재 젠트리피케이션이라 불리는 도시 상황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학술적 논의가 부족함에도 거의 매일 언론 보도로 일반인들에게 젠트리피케이션이 ‘소개’되고 ‘주입’되다시피 하고 있다. 글라스가 정의한 젠트리피케이션의 개념은 “중간 계급이 도심과 도심 주변 지역의 저소득층 주거지에 있는 오래된 주택을 수리하여 이주해옴으로써 기존의 저소득층을 대체하는 과정”으로, 50년간 서구에서 진행된 젠트리피케이션 논의는 주거 젠트리피케이션이 주를 이뤘다.2 그러나 현재 한국 언론에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명명되는 도시 현상은 상권이 활성화됨에 따라 상승하는 임대료로 인해 소상공인(세입자를 중심으로)이 떠나는 사회 변화를 일컫는다. 즉, 한국 미디어 속 젠트리피케이션은 주거 젠트리피케이션residential gentrification이 아니라 서구의 상업 젠트리피케이션commercial gentrification, 또는 관광 젠트리피케이션tourism genrification과 유사하다. 서구에서 오랜 기간 동안 주거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뤄져 온 것과 비교하면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해 관심을 갖고 논의한 역사는 상대적으로 짧다. 그러나 주거 젠트리피케이션과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에 이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3 상업 젠트리피케이션은 상업 지역 또는 상업 건물의 젠트리피케이션을 의미하는 단어로, 부티크피케이션boutiqueification이나 소매 젠트리피케이션retail gentrification으로 불리기도 한다.4 주거 젠트리피케이션이 이뤄짐에 따라 새로 유입된 중간 계급의 기호에 맞는 새로운 상업 시설들이 생겨나면서 기존 소비공간에 큰 변화를 야기했다. 이선영은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 지리학과에서 ‘뉴빌드 젠트리피케이션과 젠트리피케이션 반대 운동(New-Build Gentrification and AntigentrificationMovements in Seoul, South Korea)’ 이란 주제로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아시아 지역의 도시 개발과 주민 운동에 관해싱가포르 국립대학교에서 비교 연구를 수행했다.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가 맺어지는 공간이자 사회적 관계 그 자체로서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도시의 다양한 모습을 연구하고 있다.
  • Diverse Perspectives on Gentrification 젠트리피케이션, 몇 가지 시선
    최근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 cation’이란 단어가 유행처럼 쓰이고 있다. 언론 매체는 연일 관련 기사를 쏟아내고, 지자체도 이를 심각한 사회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일례로 서울시는 지난 2015년 12월 젠트리피케이션을 ‘구도심이 번성해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몰리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으로 정의하고 원주민을 지키기 위한 종합대책을 마련했다. 상황이 심각한 6개 지역(대학로, 인사동, 신촌ㆍ홍대ㆍ합정, 북촌, 서촌, 성미산마을, 해방촌, 세운상가, 성수동)을선도적으로 지원해 시 전역으로 확산될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 젠트리피케이션의 유행을 다시 생각하다 _ 이선영 • 젠트리피케이션, 그리고 디즈니랜드 _ 황두진 • 젠트리피케이션, 쫓겨나는 사람들을 위한 블루스 _ 신현준 • 종합 곡예를 하는 예술가, 그리고 젠트리피케이션 _ 진나래 • 성수동의 젠트리피케이션 시나리오 _ 김경민·이한아
    • 김정은, 조한결, 김모아
  • 창업 설계를 위한 매뉴얼 NEW START, MY DESIGN OFFICE
    바야흐로 청년 창업가들의 시대다. 한때 새 시대의 개척자로 여겨지던 빌 게이츠, 래리 앨리슨 등의 기업가들은 어느덧 구세대의 인물이 되었다. 마크 주커버그, 에반 스피겔, 네이선 블레차르지크 등 새로운 아이콘으로 떠오른 청년 창업가들의 성공 신화가 전 세계의 젊은이에게 ‘스타트업 정신’을 불어넣고 있다. 한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중소기업청 자료에 따르면 청년이 창업한 기업의 수는 해마다 늘고 있다. 30세 미만 대표자의 신설 법인 수는 2008년 2,027개에서 2015년 4,986개로 2배 이상 늘어났으며, 30대 대표자의 신설 법인 수 또한 2008년 13,751개에서 2015년 20,418개로 크게 늘어났다. 하지만 청년들 사이에 번지고 있는 ‘창업’, ‘스타트업’ 열풍만큼 젊은 기업들의 미래가 늘 밝은 것만은 아니다. 2013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30세 미만 대표자 기업의 1년 생존율은 49.6%로 절반이 채 안 되는 기업만 살아남았고, 5년 생존율은 16.6%로 80% 이상의 기업이 문을 닫았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준비 없이 젊음과 패기만믿고 창업에 뛰어들었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설계사무소 창업을 꿈꾸는 젊은 조경가들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정부와 지자체에서 실시하고 있는 청년 창업가를 위한 지원 제도와 프로그램 중에 실질적으로 설계사무소 창업자에게 도움이 되는 지원 제도와 프로그램은 무엇일까? 자신의 설계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젊은 창업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 조한결
  • 설계사무소 소장으로 산다는 것, 그 냉정과 열정 사이 강연주 우리엔디자인펌 대표 인터뷰
    “그래서 창업을 권하려는 것이냐, 아니면 말리려는 것이냐” 설계사무소 소장들에게 이번 특집 이야기를 꺼냈더니 한결같이 이런 질문이 되돌아왔다. 건축설계사무소 소장들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디자인 전문지에서 설계사무소를 열지 말라는 특집을 준비할리 만무한데도 말이다. 그 냉소적인 되물음은, 그만큼 지금이 어려운 시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설계사무소를 여는 일이 마냥 쉬웠던 시절이 있었을까. 시베리아 같은 바깥 세상에 뛰어드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결심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내 설계’를 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창업은 그 모든 갈등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도전해보고 싶은 길이다. 이번 특집에 참여한 어느 소장이 말했듯 “설계를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설계사무소를 여는 것은 (그 자체가) 큰 꿈”이다. 자신의 사무소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무엇일까? 아마 같은 길을 먼저 걸어간 선배를 찾아 조언을 구하는 일일 것이다. 앞서 ‘좌충우돌 창업기’를 들려준 창업자들은 모두 30대에 자신의 사무소를 열었다. 공부를 마치고 각자 필요한 만큼의 실무와준비 과정을 거치면 30대 초반에서 후반의 나이가 되기 마련이다. 혹시라도 20대에 독립한 용기 있는 (혹은 무모한?) 소장이 있는지 궁금했지만 찾지 못했다. 그래서 이 젊은 창업자들의 선배 가운데 20대에 독립한 우리엔디자인펌의 강연주 대표를 찾았다. “멋모르던 시절이라 준비랄 것 없이 시작했다”며 사양의 뜻을 전하려는 그녀에게 사무소 운영 경험을 담담하게 이야기해 달라 거듭 청했다. 정답보다는 늘 차분하고 냉철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 뒤에 숨겨진, 지난 20년을 버티며 회사를 성장시킨 뜨거운 열정과 과정이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이들에게 용기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강연주 대표의 창업 스토리는 『환경과조경』 2009년 7월호 조경가 인터뷰 꼭지에서 짧게 소개된 바 있다. 이번 인터뷰는 7년 전 이야기에서 출발해 좀 더 자세한 속내를 들어 보기로 했다. 1997년 7월에 조경설계연구소 우리환경을 설립했다. 28살이란 이른 나이에 독립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강연주 대학 때 학교를 열심히 다니진 않았지만, 설계가 내 일이란 생각을 늘 했었다. 근사한 말로 포장을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확고한 신념 같은 게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설계가 좋았고, 무엇보다 매력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도 그게 가장 중요하지 않나 싶다. 어떤 일에 대한 매력 말이다. 졸업 즈음에 선배의 권유로 청산조경 설계실에 입사했는데, 이후 박명권 대표와 함께 조경기술사사무소 효신으로 옮겼다가 그룹한을 설립할 때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직장 생활 체질이 아닌지 그룹한에서 1년 정도 일하다가 조경설계 서안으로 옮겨서 다시 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었는데, 다시 다른 회사로 옮겨가고 싶지가 않았다. 어떻게 할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남편이 사업자를 내고 독립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했다. 그래서 아는 분 사무실에 책상 하나 놓고 그렇게 혼자 시작한 게 첫 출발이었다. 1997년, 28살에 사무실을 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실무 경험이 필요한 설계 분야에서 창업하기에 20대는 이른 나이가 아닌가 싶다. 처음부터 창업을 하겠다는 뚜렷한 의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그런 일이 많겠지만, 당시는 건설사나 설계사무소에서 그때그때 일을 받아서 도면을 그려주는 경우가 꽤 있었다. 처음에는 그런 프리랜서를 생각했다. 그러다 회사를 여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원대한 꿈을 가지고 시작했다기보다는 설계는 하고 싶었고, 일은 스스로 선택해 하고 싶다는 의지가 복합되어 있었던 것 같다. 아마 내가 독립적인 성향의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설계가 무엇인지 막 배운때였기 때문에 나만의 설계 스타일을 추구하기 위해 사무소를 연 것은 아니다. 요즘엔 경력을 쌓고 자격증을 따거나 유학을 다녀오는 등 차근차근 준비해서 독립한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나는 그렇게 계획적으로 준비한 경우는 아니다. 직원도 뽑고 이제 정식으로 ‘회사’라고 생각한 것은 언제쯤인가? 처음부터 ‘회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힘들었다. 사실 번듯한 사무실 공간을 마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직원을 뽑은 것은 회사를 만들고 1년쯤 지났을 때다. 당시 자리를 빌려 쓰던 사무실에서 나오게 되면서 신혼집 거실에 책상을 놓고 직원들 한두 명을 불렀다. 창업할 때 어떤 종류의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가? 또 경력이 많지 않았는데 어떻게 수주를 했는지도 궁금하다.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고 비교적 설계비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분야가 아파트 조경이었다. 항상 집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아파트 조경이란 기초부터 하는 일이기 때문에 여기서 경험을 쌓으면 다른 일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창업 당시 IMF의 여파로 경기가 좋지 않았다. 그나마 아파트 조경 설계에 대한 요구가 막 생겨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룹한에서 설계 하도급을 받기도 하고 짧지만 3~4년의 실무 경험 가운데 알게 된 건설사에서 일을 받아 아르바이트하듯 일했다. 그렇게 기반을 쌓았다.
    • 김정은 / 우리엔디자인펌 대표
  • 최윤석 그람디자인, 정원사친구들 NEW START, MY DESIGN OFFICE
    01 창업을 결심하게 된 시점은 경력은 오래 되지 않았지만 회사 생활에서 어색함보다 익숙함(혹은 능숙함)이 몸에 배기 시작한 때인 것 같다. 어이없게도 창업 동지들과 술자리에서 나누던 이야기들―직장 상사 뒷담화부터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바람―이 1, 2년 사이에 창업 이야기로 구체화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오고간 것 같은데, 조경 설계 분야에만 한정되지 않는 디자인에 대한 열정이 주로 기억에 남는다. 한 프로젝트의 A부터 Z까지 전 과정을 직접 체득하고 싶은 욕구도 있었고 무엇보다 디자인 빌드design build 방식의 사업을 꿈꿨다. 근무와 작업 환경도 다른 방식을 추구하고 싶었고,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보다 더 좋은 수입을 기대한 측면도 있었다. 근데 이건 아직까지는 실패 상태다. ‘사업 준비는 치밀하게’라는 말을 어디서 주워들어서 책을 찾아 읽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많은 선배들을 만나서 묻고 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런데 사실 설계사무소 개업 자체는 사업자등록증 하나면 되더라(고향 친구가 보습학원 하나 차리는데 옆에서 보니 그게 더 복잡했다). 그래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마음에 수주될 프로젝트는 제로 상태인데도 법인설립, 사무실 위치, 기자재, 세무사 계약, 협회 등록, 조달청 입찰 참가 등록 등 이것저것 알아보며 일반적인 회사의 모습을 먼저 갖추고자 했다. 창업에 필요한 것들을 알아보고 조금씩 준비하고 있을 때에도 사실 속으로는 주저하고 있었다. 일거리 수주에 대한 걱정, 어쩌면 현 직장에서 더 나은 커리어를 쌓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는 갈등, 불안정한 수입에 대한 두려움 역시 존재했다. 전반적인 준비 여건이 마련되었을 때, ‘조경 바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시던 아버지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 당신은 이십대 때 장사를 시작했다며 “시작하려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빨리 시작하고망할 사업이라면 빨리 망해서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다시 시작해라(취업이든 뭐든). 갑을관계로 보자면 원래 또래의 갑들은 은퇴하고 지금 내 나이에 젊은 갑들 맞춰주려니 정말 힘들다”고 조언해주셨다. 생각해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했다. 당시 막 결혼했을 때여서 ‘망할 거면 애가 태어나기 전에 빨리 망해야지’ 하는 생각도 있었고 비슷한 연령대의 갑과 을실무자들끼리 세대 공감할 수 있는 교류도 경쟁력이 있겠다 싶었다(근데 이 부분은 착각이었다. 당시엔 우리가 너무 어렸다). 회사 규모가 작으니 당연히 동업을 시작한 창업주들이 실무자이자 사장이자 경리이자 청소부인 1인 다역을 맡아 출발했다. 최윤석은 1977년생으로 경희대학교에서 환경조경디자인을 전공했고 선진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 조경레저부에서 근무하다 2008년 경정환 대표와 그람디자인을 설립했다. 2012년부터 ‘정원사친구들(gardening friends)’을 결성하여 다양한 정원 문화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2009년 대구 신천 공룡문화놀마당 디자인 공모 1등, 2011년 한글 글자마당 아이디어 현상공모 당선, 2012년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 실내정원 설계공모 대상,2012년 한강 여주저류지 및 강천섬 활용 아이디어 공모 대상,2013년 시흥시 100년 타임캡슐 설치 공간 디자인 아이디어 현상 공모 대상,2013년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참여정원 대상, 2014년 코리아가든쇼 우수상,2014년 노들섬 활용 아이디어 공모 대상을 수상했다.
  • 최영준 Laboratory D+H NEW START, MY DESIGN OFFICE
    01 10년 전, 학부 3학년 때 진로의 방향을 설정하는 수업에서 정했던 30대 중반의 목표는 좋은 동료와 함께 작은 설계 스튜디오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정말 감사하고 운 좋게도 첫 직장에서 3년차가 되었을 즈음, 친구이자 동료였던 현재의 파트너 후 이챙 종钟惠城에게 좋은 창업의 기회가 왔고, 그 친구는 나에게 함께 하기를 제안했다. 함께 운동한 후나 퇴근길에서 “언젠가 함께 해보자”고 희망사항처럼 얘기만 나누던 우리에게 찾아온 진짜 기회였다. 설립 당시인 몇 년 전 만해도 중국의 건설 경기가 매우 호황이었다. 파트너십을 제안한 중국 현지의 사무실과 연계된 미국 회사라는 회사 모델을 설정하고 주로 중국 대륙의 프로젝트를 목표로 삼았다. 창업을 결심한 후에도 거의 2년 가까이 창업 준비와 신분 변경 등에 시간이 소요되었고 2014년에 이르러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회사 이름이 다소 길고 거창한 느낌이 있는데, 회사의 지향점을 잘설명하는 키워드를 담고 있다. 파트너십을 제안한 회사의 이름이 DH라는 이니셜로 요약되는데, 우리 사무실은 그보다 실험적이고 혁신을 추구하는 작업을 하자는 취지로 ‘Laboratory’를 앞에 붙였다. 그리고 우리는 LAB의 지향점을 순수 ‘디자인design’ 실무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이슈나 환경 문제를 다루는 ‘희망hope’을 담은 작업도 추구하자는 의미로 ‘Design+Hope’라고 재정의했다. 아직 회사의 기반을 잡아가는 중이라 본래의 지향점에 온전히 부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는 못하지만, 설계비와 상관없이 학교와 같이 지역 사회에 기여하는 프로젝트나 저영향 개발 방법을 적용한 프로젝트에는 최대한 참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02 창업을 결심한 시기가 결혼을 서너 달쯤 앞둔 시점이었는데, 안정적인 미래를 꿈꾸고 보여줘야 할 시기에 기존 회사의 아늑한 울타리에서 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또한미국에 있다 보니 신분 문제를 해결하기가 복잡하고 까다로웠고 오랜 기다림을 필요로 했다. 주된 시장이 중국이라는 사실 또한 나에게는 불안 요소였다. 언어의 장벽이나 먼 거리에서 올 수 있는 물리적 한계와 더불어 중국인만의 문화적인 고유성, 중국의 사회적인 특성 또한 언제, 어느 때에 변수로 작용할지 모르는 불확실한 영역이 었다. 다행히 아내가 같은 분야의 일을 하기에 이해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비자 문제가 해결되기까지는 거의 2년이 걸렸지만, 그 사이에 여러 경험을 쌓으며 회사의 창업을 준비할 수 있었다. 또한 중국과의 문화적 차이는 동료들의 도움과 신뢰를 바탕으로 극복할 수 있었고 최근에는 전 직장 동료였던 친구도 합류하여 큰 힘이 되고 있다. 최영준은 1982년생으로,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설계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 Group과 한국의 오피스박김에서다양한 성격의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Archiprix International 본상, 뉴욕 신진건축가 공모 대상,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 대상 등을 수상했다. 『공원을 읽다』, 『용산공원』 등의 공저가 있으며, 현재는 후이챙 종과 함께 로스앤젤레스 기반의 설계사무소 Laboratory D+H를 설립해 활동 중이다.
  • 정성빈 Miners+100. Inc. NEW START, MY DESIGN OFFICE
    01 ‘서울100’ 프로젝트1를 기점으로 모든 것이 시작됐다. 2014년 봄, 책 한 권을 같이 만들어 보자고 꾸렸던 모임이 회사가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서울100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기회와 마주했다. 누군가는 자신의 사무실 한켠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이 들어왔다. 2014년 9월, 서울연구원과 용역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법인사업자가 필요했고 이 일을 계기로 모임이 회사(법인)가 됐다. 2014년에 우연히 생겼던 모임이 회사가 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지면에 매끄럽게 적어내는 게 쉽지는 않다. 그럴듯한 창업의 계기를 기대했던 독자를 위해 그럴듯한 이야기를 적고 싶지만, 서울100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중 계획에 없던 일과 기회를 만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회사가 된 것이 전부다. 명함 속 회사 로고 아래에 ‘Landscape 3.0’을 큼지막하게 넣었다. 모임이 시작되던 무렵 라펜트에 ‘한국 조경 3.0 시대’라는 제목의 칼럼이 올라왔다. 변화하는 시대에 새로운 조경을 당부하는 오휘영 명예교수(한양대학교)의 선언적인 글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막연하게 우리 세대(3.0)의 조경은 무엇일까 함께 고민하고 있었다. 그 고민은 우리가 배운 조경으로 어떻게 먹고 살 것인지와 맞닿아 있다. 이는 여전히 유효한 고민이며 나 또한 표류하며 답을 찾고 있다. 02 공동 창업자 3인은 한국전통문화학교 전통조경학과 선후배 사이로, 스무 살 무렵부터 10여 년간 가까이 지내왔다. 한 명은 네덜란드 유학길에 오르기 전 룸메이트이자 가장 좋아하는 형이고 또 다른 한 명은 현재의 룸메이트로 가장 좋아하는 동생이다. 이따금씩 만나 맥주 한 잔과 함께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가 매일 만나 함께 일을 하는 묘한 관계가 되면서 시너지와 한계점이 공존하게 됐다. 준비 없이 시작한 창업이기에 체계적이고 전략적으로 회사를 운영하는 데 많은 부족함과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좋은 상황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최근에는 법인세를 납부하는 과정에서 따끔한 수업료(세금)를 내면서 사무실 살림을 야무지게 꾸려가는 방법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회사를 다닐 때에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4대 보험을 올해가 되어서야 시작했다. 서울시 창업 지원 프로그램2으로 지원 받은 6평 남짓한 공간에 집기들이 하나둘씩 채워지며 사무실의 모습이 갖춰지고 있다. 정성빈은 1981년생으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조경학과를 졸업한 후네덜란드 베를라헤 인스티튜트(Berlage Institute)에서 도시 건축 석사 학위를 받았다.이후 2014년 9월, 대학 동문인 이재원, 원광연과 함께마이너스플러스백(Miners+100)을 설립했다. 이들은 조경 설계, 지역 계획,도시 기획 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으며 2015년 5월, 리서치 결과물인『서울100 Vol.1 이태원』을 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