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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계 교육의 단면들
    설계 교육은 단순히 설계 지식과 기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 이상이다. 스튜디오 중심의 설계 교육은 조경 교육의 핵심적 과정이자 통합적 방법이다. IFLA-UNESCO의 조경교육헌장(2005)과 ECLASEuropean Council of Landscape Architecture Schools의 조경교육지침(2010)은 설계 스튜디오에 조경 교과의 절반 이상을 편재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설계도 어렵고 교육도 어려우니 ‘설계 교육’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언제나 뜨거운 감자다. 우리나라 조경 교육에서도 설계 교육은 다양한 차원의 현재진행형 과제를 안고 있다. 현재의 교육 구조와 설계 환경에서 설계 교육의 의미와 역할은 무엇인가? 설계 교육의 구성과 과정 그리고 교수법은 적절한가? 교육 수요자인 학생은 설계 스튜디오 교육에서 무엇을 원하는가? 학교의 설계 교육과 실무 설계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조경·건축·도시설계를 가로지르는 협력적·통합적 설계 교육은 가능한가? 설계 교육은 도시와 환경의 미래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 • 나의 설계 스튜디오 교육 _ 권진욱, 김영민, 민병욱, 서예례, 안세헌,  양건석, 윤영조, 이애란, 정욱주, 정태열, 조동범, 최정민, 홍윤순 • 설계 교육의 내일을 고민하다 _ 김소라, 김아연, 유석연 • 우리가 바라는 스튜디오 수업 _ 31기 학생통신원 • 하버드 GSD의 설계 교육을 묻다 _ 니얼 커크우드 인터뷰 • 볼 스테이트 대학교의 스튜디오 수업 _ 크리스틴 존슨 인터뷰
    • 김정은, 이형주, 조한결, 양다빈
  • 경의선숲길을 거닐다 폐선부지의 변신, 경의선숲길
    20대 초중반을 대흥동에서, 후반을 동교동에서 보내고 있다. 동아리 선후배 및 동기들과 어울려 이 주변 술집과 골목을 누비며 밤을 새고 무수한 레포트와 이력서를 동네 카페에서 죽치고 앉아 쓰곤 했던 내게 (현재의)경의선숲길과 그 일대는, 말하자면 나의 ‘주 무대’ 같은곳이다. 지금이야 이곳에 공원이 들어서고 주변에 번듯한 상가도 세워져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철길 일대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곳이 었다. 철길로 인해 오랫동안 단절되어온 탓에 철길을 사이에 두고 도시의 풍경은 낯선 느낌이 들만큼 확연히 달라졌다. 특히 서강대 학생들에게 철길 너머의 인근 하숙촌은 옆 건물 하숙생 알람 소리에 맞춰 기상한다는 농담―실제로 경험해 본 바, 단순한 우스개만은 아니다―이 있을 만큼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열악한 주거 환경과 소금 단지만큼 짠내 나는 하숙집 아주머니의 바가지로 악명 높은 동네였다. 철길 일대는 가로등이 별로 없고 으슥해 늦은 밤이면 근처를 지나가기가 망설여지는 위험 지역이기도 했다. 철길을 따라서 억센 잡초가 뒤덮고 온갖 쓰레기가 널려 있었지만 아무도 이곳을 치우거나 가꾸지 않았다. 한때 중요한 물자와 많은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는 경의선 철길은 도시 조직에 파묻히고 결국 지중화되어 폐쇄되면서 지역의 슬럼으로 변해갔다. ‘별 것 없는’ 공간이 사랑받는 법 5~6년 전 기억을 다시 끄집어낸 것은 이 으슥한 ‘뒷골목’이 공원으로 바뀐 것을 처음 보고 느꼈던 놀라움을 말하기 위해서다. 2012년, 개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찾아가 봤던 경의선숲길 1단계 구간(대흥동 구간)은 규모도 크지 않고(17,450m2) 디자인이 특별히 세련된 것도 아니지만 다양한 연령과 계층의 주민들이 활발히 이용하는 ‘생기 있는 공원’이었다. 올해 개장한 경의선숲길 2단계 구간(연남동, 염리동, 새창고개 구간), 특히 연남동 구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가히 뜨거울 정도다. SNS나 블로그 등에 공원을 배경으로 한 사진이 심심치 않게 올라오고 있고 공원을 중심으로 한 상권도 점점 확대되고 있다. 인근 스트리트 문화를 즐기는 젊은이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에서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주민들이 찾는 생활형 공원이 되고 있다는 점은 이 공원이 유행처럼 인기를 끌다 금방 시들해질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느 공원처럼 탁 트인 광장이나 테마 놀이터도 없고 다양한 스포츠를 즐기기도 힘든 좁고 긴 선형 공원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경의선숲길권역의 문화 재생과 늘장 폐선부지의 변신, 경의선숲길
    누구를 위한 숲길 공원인가 지난 6월 말 메르스 여파 속에서 서울시의 경의선숲길 2단계 공사(연남동, 염리동, 새창고개 구간)가 완료되었다. 6.3km에 걸친 선형 공원의 상당 부분이 개통되어 앞으로 경의선숲길은 주변 지역에 여러 가지 효과를 낳을 것으로 기대된다.경의선숲길은 그 규모와 특성과 함께 의미 또한 중요하다. 우선 폐선부지 전 구간에 걸쳐 유휴 공간을 체계적으로 활용해 공원 녹지가 추가적으로 확보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서울의 서북 생활권을 관통하는 녹지축은 주민들의 삶의 질을 크게 향상시킬 것이다. 이미 공원 조성과 운영 관리 과정에서도 지역 여건을 반영한 ‘문화 공원’으로서의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자연적이기보다는 지나치게 장식적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이 공원의 조경 요소는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일상적 삶의 문화를 생태적 요소와 함께 어우러지게 하는 바탕이 될 것이다. 특히 서교동, 연남동, 신촌등 홍대 문화권과 크게 맞물려 있는 문화 지형적 특성을 감안하면 경의선숲길은 서북권뿐만 아니라 서울 전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시는 주민 협의와 참여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등 시민 참여에 바탕을 두고 공원을 조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공원이 도시 차원에 미칠 영향을 고려 하면서 향후 운영과 관리를 위한 거버넌스를 준비했는 가’라는 측면에서는 많은 한계가 나타나고 있다. 주변의 도시적 맥락보다는 경의선숲길 자체에만 의미를 국한시킨 점, 그리고 제한적인 주민 참여라는 한계는 이미 서울시와 한국철도시설공단의 상호 협약에서부터 예견되었다. 협약의 내용은 공단이 서울시에 공원 조성을 위한 부지 사용권을 제공하는 대신 서울시는 역세권 개발과 관련한 인·허가에 협조한다는 것이다. 이 협약은 서울시가 지역 생활에 기반한 장소성과 도시적 전략의 차원에서 경의선 권역을 다루기 어렵게 하는 한계선을 이미 설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점이 대두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역세권 개발 방식을 짚지 않을 수 없다. 거의 2km에 이르는 구간에서 실행될 대기업의 대형 역세권 개발이 주변 지역에 야기할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최정한은 1996년 ‘걷고싶은도시만들기시민연대’(도시연대)를 설립하여 7년간 사무총장으로 일했다. 1990년대 후반 인사동에서 ‘마을만들기’라는 개념을 이론화하고 인사동 유지 보전을 위한 작은 가게 살리기 활동을 펼쳐 인사동 지구단위계획과 문화지구 지정을 이끌어냈다. 이후 인사동과 북촌한옥마을을 기반으로 마을만들기 전국네트워크를 운영한 바 있다. 2001년 이후 홍대 앞 클럽데이를 10년간 주관했고, 2003년 지역 재생과 공간 재활용을 아젠다로 내걸고 문화·예술, 도시, 건축, 조경 등 관련 분야의 전문가, 지역 활동가 100여 명이 참여하는 사단법인 공간문화센터를 설립한 후 현재까지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경의선 폐선부지의 개발 유보지에 세워진 사회적 경제 장터 ‘늘장’의 대표로도 활동하고 있다.
  • 되살아난 옛 골목길의 정취 폐선부지의 변신, 경의선숲길
    거실 같은 골목길 예전에 필자가 살던 동네의 골목은 자동차 한 대는 쉽게 지나가도 동시에 두 대가 지나가기에는 어려운 좁은 폭의 길이었다. 그 골목길 어귀의 전봇대 불빛 아래에는 작은 구멍가게가 있었다. ‘도매 식품’이라는 간판을 단 그 가게에서 가장 비싼 과자는 200원짜리 ‘가나초콜렛’이었다. 포장은 밤색과 빨간색의 두 가지였는데 왜 다른 포장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학생들이 학교에 가고 없는 낮 시간에는 할머니와 ‘일하는 언니’들이 골목길에 나와 수다를 떨곤 했고, 그 옆에서는 유치원을 다니기엔 아직도 많이 어린 아이들이 세발자전거를 타고 놀았다. 그런 골목길이 하교 시간부터 저녁 식사 시간 전까지는 축구나 야구를 하는 동네 운동장이 된다. 주말 낮이나 평일 저녁에는 어른들이 배드민턴을 치러나오기도 했다. 배드민턴공은 대문 위에 떨어지기 일쑤여서 몸집이 작은 아이들이 가끔씩 벽을 타고 올라가서 몇 개씩 주워오곤 했다. 장황하게 골목길의 풍경을 묘사한 이유는 우리의 골목길을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하게 사용해왔는가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1970년대까지 골목길은 우리의 거실이었고 운동장이었다. 그러다가 현대자동차가 포니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삶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골목길=주차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집집마다 자동차가 있어 멀리 있는 시골도 편히 갈 수 있게 되었지만, 대문 앞의 공원 같고 마당 같고 운동장 같던 골목길은 없어졌다. 운동장 같던 골목이 없어졌지만 그때는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반짝거리는 자동차를 얻었으니까.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놀이터가 필요 없다. 방과 후에 학원에 가야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도 가끔씩 서는 장터를 위해 수십 년간 사용되어 오던 놀이터의 놀이기구와 모래를 모두 없애고 그 자리를 공터로 만들었다. 이제 우리가 집을 나서 갈 수 있는 곳은 돈을 내야 들어 갈 수 있는 카페와 정신없는 길밖에 없다. 새로 짓는 계획 도시의 중앙에는 좋은 공원이 자리 잡고 있지만, 왠지 그 공원은 우리의 삶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 같다. 작정하고 차려입고 가기 전에는 좀처럼 발걸음이 향하질 않는다. 서울숲이 그렇고, 분당중앙공원이나 광교호수공원도 그렇다. 참 좋은데 자주 가기는 힘들다. 공원과 접근성 얼마 전 경의선숲길을 다녀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이 공원은 다르다. 근처 홍익대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처음 개장한 다음에는 가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잡지사에서 건축가의 시선으로 경의선숲길을 평해달라는 원고 청탁을 받게 되었고 어느 더운 여름날 오후 마음을 잡고 가보았다. 처음에는 들어가는 곳을 찾지 못해 헤매었다. 경의선 홍대입구역 7번 출구로 들어가서 3번 출구로 나온 다음에야 겨우 경의선숲길을 볼 수 있었다. 시원하게 뚫린 선형 공원의 개방적인 모습이 첫인상으로 다가왔다. 공원 주변으로 있는 각양각색의 맛집과 소위 ‘힙’해 보이도록 리모델링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우선 시장기를 해결하기 위해 ‘○○블루스’라는 가게에 들어갔다. ‘항정살 철판구이’를 맛있게 먹고 본격적으로 산책을 시작했다. 이 공원의 특징은 주변의 도심 조직과 밀접하게 붙어있다는 점이다. 서울숲이 뉴욕의 센트럴 파크처럼 대규모로 조성되었음에도 공원을 찾는 사람들이 센트럴파크에 비해 현격히 적은 이유는 서울숲의 주변부 대부분을 단절하는 강변북로와 순환도로에서 찾을 수 있다. 겨우 도시와 접한 성수동쪽 면이 부분적으로 공원과 연결되어 있지만 사실 사람들이 그쪽으로 갈 일 자체가 많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반면에 센트럴 파크는 직사각형의 공원 부지 사방으로 수많은 거리가 접하고있어서 다양한 도심 속 프로그램과 유기적인 연계가 가능하다. 한 예로 센트럴 파크 중심에서 5번가로 나오면 바로 앞에 구겐하임 미술관Solomon R. Guggenheim Museum이 보이고, 심지어 5번가와 접한 공원 내에는 록펠러가 기증한 엄청난 예술품이 소장되어 있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도 있다. 미술관 하나는 공원 바깥쪽에 다른 하나는 공원 안에 위치해 있는 모습이 마치 공원과 도시가 ‘장군 멍군’하는 형세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센트럴 파크는 도시와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공원이 된 것이다. 반면에 서울숲은 도로로 막혀 있다. 분당중앙공원 주변으로는 아파트 숲밖에 찾아 볼 수 없으며, 누군가 공원에 가려 해도 구름다리를 타고 7차선의 도로를 건너야 한다. 유현준은 홍익대학교 건축대학 부교수이자 유현준건축사사무소 대표다. 하버드 대학교,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연세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리처드 마이어 뉴욕 사무소와 MIT건축연구소에서 실무를 익혔다. 2013년 김수근건축상 프리뷰상, 2010년 공간문화대상 대통령상, 2009년 젊은 건축가상등을 수상한 바 있다. 주요 저서로는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Modernism : A Hybrid between Eastern and Western Culture』, 『52 9 12』, 『현대건축의 흐름, 모더니즘 동서양 문화의 하이브리드』가 있다.
  • 사람들 순하게 말 붙여 올 때까지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고 서로 손 잡는 숲이 될 때까지 폐선부지의 변신, 경의선숲길
    한 번이라도 해보면 “그 기쁨을 아는 몸”이 되어 멈추기 어렵다는2 설계 공모전과는 달리, 무엇인가를 만들거나 짓는 사람에게는 다시 반복되는 일이라도 그 때마다 기쁨을 기대하는 ‘완성’이라는 순간이 있다. 흥분감이나 초조함이라는 자극적인 상태는 이미 잉태의 시간을 거치는 동안 차분해졌고, 희열이라는 자극적인 표현보다 그 때만큼은 ‘엄숙함’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 까? 자신이 설계에 참여한 공간을 (바쁘다보니?) 완성된 이후에도 가보지 못했다는 설계자도 있지만, 시공 현장까지 면밀하게 체크해가면서 설계를 피드백하고 해결해가는 책임 있고 부지런한 설계자에게도 그 완성의 순간 이전과 이후에 느끼는 감정은 다를 것이다. 그저단 하루의 차이라 하더라도…. 공원이라면 그 순간은 언제일까? 사사키 요우지는 이 순간을 “준공식이 있던 날 초대된 어린이들이 느티나무 숲 속을 환성을 지르며 달려가고 아이들의 신선한 옷 색깔이 모노톤으로 통일된 바닥과 대비되어 약동하였다. 그 풍경이야말로, 우리들이 목표로 한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도시 광장’ 탄생의 순간이었다”3라고 간접적으로나마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기대했던 모습을 확인하는 희열과 함께 그 순간부터 공간이 어떻게 작동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두려움도 뒤섞여 있다. ‘설계 의도를 잘못 이해하지는 않을까? 불편해하거나 생각하지 못한 더 좋은 안을 떠올리지 않을까’ 등등의 복잡한 감정일 것이다. 비유한다면 집이 완성되어가면서 전기와 상하수도, 가스, 인터넷 등 설비 장치들이 외부와 연결되어 마치 생명체와도 같이 박동하기 시작하는 부팅 모멘트에서 초조해하는 감정의 교차와도 같다. 출산의 순간, 무엇보다 아이의 손발가락부터 세어볼 때의 설렘…. 자기 새끼 아니면 누가 알까? 경사진 산책로를 내려가며, 저 아래에서 다소 불편한 관절을 내색 않으려는 걸음걸이로 올라오고 있는 주민에게 말을 붙인 것도 혹시라도 그런 어색함이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이 동네에 사세요? 철길이 공원으로 바뀌니까 좋으신가요” 옷차림이 정갈해서 왠지 말붙여도 긴 답을 기대 못할 것 같은 어르신. 정답과도 같은 간단한 답만 되돌아오고, 다시 제 갈길 걸으며 사진 찍느라 아무래도 지체하고 있던 사이 마지막 지점을 되돌아와 반갑게도 다시 말을 붙여 오신다. 그래서 시작된 동행은 느릿느릿 연남동 구간의 끝인 홍대입구역까지 이어졌다. 이 부근에서 1960년대 후반부터 거주했다고 하시니 누구보다 지역의 변화에 대해 훤하시다. 당시 집에 유선 전화를 신청하고 설치하기까지 몇 년을 기다려야하는 힘든 시대였지만 특별히 신촌로터리에서부터 전봇대 5개 설치할 비용을 들여 쉽게 했다는, 그래도 동네 사람들에게 공용으로 쓰게 했다는 신화 같은 이야기까지. 그 정도로 힘쓸 만한(?)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이주’가 미덕인 서울에서 50년 가까이 한 동네에 정주하신다는 것이 반가운 일이다. 실은 필자도 1970년대 중반(엊그제 같은데 딱 40년 전이다!)이 지금 같았더라면 이 공원 길을 따라 서강대가 있는 노고산 아래의 고등학교를 통학했을 것이다. 이미 은퇴하고 공원 산책을 유일한 운동으로 하시는 어르신은 필자에게는 아버지 정도의 나이셨지만 적어도 이 부근의 경관 변화를 공유한다는 접점이 있었던 탓인지 말씀도 즐겁게 하시고 듣는 사람도 흥미 있는 동행이 되었다. “주민들 의견을 듣는다고 해서 나가보기도 했고 오래된 나무를 훼손하지는 않을까 걱정도 했는데 어떤 것은 잘 보전하고 옮겨 심은 것도 잘 되었어. 지하에서 나오는 물을 활용한 연못도 마음에 들어. 저절로 물고기가 살기 시작했다니까.”, “에엣, 정말이요?” 조동범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과정을, 원예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학했다. 전남대학교 조경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로컬에서공원 녹지 거버넌스 활동과 마을 만들기, 시민 가드너 양성의 현장 활동도 하고 있다. 2000년경부터 광주 도심 철도 폐선 부지 공원화 운동과 그 이후15여 년에 걸쳐 공원 조성, 주변 지역의 마을 만들기, 주민 참여 운영 관리 방안 마련에 참여하고 있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한국조경학회 기획·설계분과 부회장을 맡아 환경조경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 경의선숲길을 그리다 폐선부지의 변신, 경의선숲길
    경의선숲길은 총연장 6.3km의 경의선 철길 폐선 부지에 조성된 선형 공원으로, 경의선(용산선)과 공항철도가 기존 철길의 지하에 건설되면서 공원화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현재 경의선숲길의 지하 약 10~20m 아래에는 경의선 철로(복선)가, 그보다 더 아래인 지하 약 30~40m에는 공항철도가 지나간다. 서울시가 철도 부지의 소유권자인 한국철도공사와 앞으로 30년간 무상으로 공원 부지를 사용할 수 있는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그동안 지역 간 단절 요소로 남아 있던 철길이 새로운 소통과 교류의 장으로 기능하는 계기가 되었다. 홍제천부터 용산문화체육센터까지 이어지는 6.3km의 길 중 약 4.3km는 공원 조성 구간이고 2km는 복합 역사 구간이다. 공원 구간의 면적은 약 101,700m2, 폭원은 10~60m이며, 총 3단계에 걸쳐 조성되고 있다. 2012년 2월에 1단계 구간(대흥동 구간, 길이 760m, 설계 선진엔지니어링)이 준공되어 활발하게 이용되고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연남동·염리동·새창고개 구간은 2단계 구간으로 올해 6월에 준공되었다. 3단계 구간은 와우교·신수동·원효로 구간으로 2016년 5월을 목표로 한창 공사 중이다. 경의선의 어제와 오늘 마포와 용산 일대를 횡단하는 이 길은 열차가 다니기 훨씬 이전부터 많은 사람과 물자가 왕래하던 활발한 교통로였다. 조선 시대에는 한양을 오가는 경강 상인들이 넘어 다니던 고갯길이었고, 길 주변으로 창고와 마을이 번성하기도 했다. 새창고개, 염리동, 광흥창, 신수철리(신수동) 등 경의선숲길이 통과하는 곳의 지명을 살펴보면 이 지역의 옛 모습을 가늠할 수 있다. 1906년 군사적 목적으로 철길이 놓인 이후에도 물류 수송의 중심 지역으로 기능하면서 점차 도시가 확장하는 양상을 보였으나, 1970년대 이후 운송 수단의 발달로 인해 점차 그 중요성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이 도심 속 철길은 생활 환경을 저해하는 주범으로 낙인 찍혔고 주변 지역은 자연스럽게 슬럼화되었다. 안계동은 서울시립대학교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을 전공하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서인환경, 두산개발을 거쳐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를 설립했다. 평화의공원, 서울숲, 난지한강공원처럼 굵직한 작품부터 사도감어린이공원, 율수원처럼 소규모 작품까지 다양한 층위의 프로젝트를맡아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이남진은 서울대학교 산림과학부에서 임학을 전공하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9년부터 동심원조경에서 일하고 있다. 2012년 여름부터 경의선숲길 프로젝트를 담당하여 지금까지도 현장과 사무실을 오가는 중이다. 경의선숲길지기의 창립 멤버이기도 하다.
  • 폐선부지의 변신, 경의선숲길 Gyeongui Line Forest Park
    1906년 군사적 목적으로 처음 개통된 경의선은 이후 산업철도로 한동안 사용되었고, 1951년부터 2009년까지는 통근열차가 운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도심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철길로 인해 지역 단절과 생활 환경 낙후 등의 문제점이대두되어 2005년부터 철길의 지중화 사업이 추진되었고, 이로 인해 발생한 폐선부지를 공원으로 조성하는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난 6월 27일, 연남동·염리동·새창고개 2단계 구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 경의선숲길을 그리다 _ 안계동·이남진 • 사람들 순하게 말 붙여 올 때까지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고서로 손잡는 숲이 될 때까지 _ 조동범 • 되살아난 옛 골목길의 정취 _ 유현준 • 경의선숲길권역의 문화 재생과 늘장 _ 최정한 • 경의선숲길을 거닐다 _ 조한
    • 조한결, 양다빈
  • 공원 탐닉 당신의 공원은 어디입니까?
    언젠가 혼자서 책을 한 권 쓴다면 ‘공원 탐닉’이란 제목으로 쓰리라 마음먹었다. 나름 구성도 짜보았고, 챕터 제목도 끼적여 놓았다. 오래된 폴더를 열어 작성한 날짜를 확인하니 2006년 7월 18일이다. 파일명은 ‘개인 단행본 집필 아이템’. 요즘은 잘 쓰지 않는 신명조 서체만큼이나 생소한 차례 구성안이 모니터에 펼쳐진다. ‘①물: 흐르고 비추는, ②빛: 낯보다 찬란한, ③풀: 흔들리며 유혹하는, ④돌: 단단하거나 무르거나, ⑤흙: 그 자체로 아름다운, ⑥점: 작지만 소중한, ⑦선: 나누고 연결하는, ⑧면: 여백을 넘어, ⑨생: 성장하며 진화하는’ 등 총 9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네이버 아이디로 ‘녹색 여백’을 쓰던 때인데, 그 아이디만큼이나 상당히 작위적이다. 아마 9장으로 구성한 건, 물, 빛, 풀, 돌처럼 한 글자로 된 근사한 단어를 더는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일 게다. 12장으로 구성된 256쪽 안팎의 책이 가장 부담 없고 읽기 편하다는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으니까(이런 구성이면 한 챕터가 20쪽 내외여서 적절히 사진이 가미되면 한 호흡으로 읽기 좋다). 실제로 책을 펴낼 때까지 3개를 더 찾아내야 할 텐데…. ‘물’은 일산호수공원을, ‘빛’은 노래하는 분수대를, ‘풀’은 하늘공원을, ‘돌’은 선유도공원을, ‘흙’은 올림픽공원을, ‘점’은 옥상공원을, ‘선’은 양재천을, ‘면’은 공원 전반을, ‘생’은 조경의 이모저모를 소재로 쓰려고 했다. 아마, 지금 쓴다면 경의선숲길과 광교호수공원, 양화한강공원, 서울숲, 서서울호수공원, 여의도한강공원을 어딘가에 포함시킬 테고, ‘흙’은 지형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나무와 풀을 품어내는 기반으로서의 소중함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까 싶다. 키워드 하나당 공원 하나씩을 매치시켰지만, 특정 공원을 중심으로 쓸 생각은 없었다. 몇 곳이 되었든 구체적인 사례를 바탕으로 내가 지극히 주관적으로 느낀 공원의 매력에 집중할 요량이 었다. 그러니까 ‘물’은 우리가 공원에서 만나는 흐르고, 떨어지고, 솟구치고, 반사하는 각양한 물을 주인공으로 쓰고, ‘돌’은 석재를 비롯해서 다양한 재료의 물성과 맛을 탐닉하는 방식이다. ‘풀’은 나무와 꽃도 포함한 공원의 식물을 이야기하는 챕터로 할애할 생각이었다. 잎 넓은 나무 다음으로 풀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라스 류에 대해선 딱히 할 말이 많지 않으니까. 부제는 ‘도시의 녹색 여백, 공원을 만나다’ 정도가 무난해 보였다. 이 ‘공원 탐닉’ 집필 프로젝트는 에피소드 몇 가지만 스케치 해놓고는 더 이상 진전시키지 않았다. 충분히 뜸을 들이면서 진행하려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더 좋은 (?) 사례를 기다리자는, 좀 대책 없는 설계를 처음부터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마감 독촉하는 에디터도 없는 책이 아닌가. 이번호 특집 ‘당신의 공원은 어디입니까’란 질문에 충실한 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의 구상을 얼기설기 풀어 놓는다. ‘나의 공원’ 이야기는 지난 달 코다에서 충분히 했으니까(궁금하신 분은 『환경과조경』 2015년 9월호, p.143 참조). 미리 쓴 ‘책을 펴내며’ 중에서 여백餘白의 여는 남을 ‘여餘’다. 그러니까 쓰고 남은 흰부분이 여백인 셈이다. 뭐, 빈자리라고 할 수도 있다. 상황에 따라 잉여의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핵심은 ‘쓰고 남은’ 면이란 점이다. 그런데, 쓰다가 우연히 남은 것과 쓰면서 일부러 남긴 것과의 차이는 크다. 남은 여백에는 의도 따위가 담겨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여백은 더 채우지 못해 아쉬운 빈 곳이거나, 더 이상 쓸 필요가 없어 방기된 공간이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남겨진 여백은 이야기가 다르다. ‘여백의 미를 잘 살린 작품…’ 운운할 때 등장하는 여백은 보는 이에게 진한 여운을 남겨주기도 하고, 그곳이 여백이 아닌 다른 것들로 채워졌을 때보다 더 큰 완성도를 갖게 해준다. 이우환은 『여백의 예술』(이우환 저, 김춘미 역, 현대문학, 2002)에서 “예술 작품에 있어서의 여백이란, 자기와 타자와의 만남에 의해 열리는 앙양된 공간”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 기억이 머무는 공간, 나의 공원 당신의 공원은 어디입니까?
    기억을 찾아서 어렸을 적부터 이십대 후반이 된 지금까지 한 동네에 살고 있는 탓에 동네 공원은 내게 무척 익숙한 공간이다. 이름도 ‘고척근린공원’, 지명이 그대로 이름이 된 참 평범한 공원이다. 익숙하다는 말과 평범하다는 말은 의미도 쓰임도 제법 다르지만 두 단어가 주는 인상만큼은 비슷하다. 평범하니 익숙하고, 익숙한 것이기 때문에 평범하다고 느낀다. 고척근린공원은 그렇게 내게 무척 평범하고도 익숙한 공간이다. 이리 익숙한 공간이라도 막상 공원에서 보냈던 추억들을 하나하나 반추하고 정리해 보려니 꽤나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추억이 너무 많아서인가보다.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만큼이라면 도리어 쉬울 텐데. 그래서 이 산발적인 기억을 정리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고안해 보았다. 공원 내의 다섯 개의 장소를 뽑아 순간적으로 튀어 오르는 기억들을 적어나가는 거다. 물론 이 방법이 산란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공간을 통해 추억을 더듬는 것이 시간을 되짚는 것보다 기억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을까 싶다. 참, 이제부터 이야기하려는 다섯 개의 장소가 고척근린공원에 있는 공간의 전부가 아니란 점은 밝혀두어야겠다. 이 장소들을 선정한 기준은 ‘나의 기억이 많이 깃든 곳’이기 때문에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하나, 만남이 꽃피는 정문 공원 진입부인 정문은 초중고생 때 친구들을 만나던 약속의 장소였다. 크고 기다란 모양의 탑이 기준처럼 서있고 그 옆으로 의자 대용으로 쓸 만한 조형물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데, 친구들을 기다릴 때면 그 조형물 위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처음 이 조형물이 생겼을 때, ‘이건 뭔가 이상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공원의 도입부를 알리기 위한 기념물로 세워 놓았나 보다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실 정문의 명물은 이기이한 조형물보다 조그만 트럭에서 늘 뻥튀기를 튀기고 있는 아저씨다. 매번 보는 광경이어서 그런지 뻥튀기 아저씨가 없으면 공원에 온 거 같지가 않을 정도다. 공원 가까이에 다가갈수록 탁탁 거리는 기계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내게 고척근린공원의 최고 이정표는 동떨어진 섬처럼 자리한 조형물이 아니라 그 앞을 지키고 선 뻥튀기 아저씨다. 둘, 두 얼굴의 놀이터 놀이터에는 꽤 재밌는 추억이 남아 있다. 네 살 즈음이었나. 미끄럼틀을 무서워해서 매번 동네 친구들이 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던 나는 친언니의 엄청난 놀림을 받고나서야 미끄럼틀을 타보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미끄럼틀이 왜 그렇게 무서웠던 건지는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단순히 겁이 많아서였던 건지, 어린 아이의 눈에 미끄럼틀이 너무 높고 커 보였기 때문인 건지. 무튼 나는 아주 큰맘을 먹고서야 미끄럼틀을 타는 데 성공했고, 그 모습은 사진으로 남아 아직도 내 앨범에 꽂혀 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놀던 기억도 빼놓을 수 없다. 밤 9시 즈음부터 11시 정도까지, 학원을 땡땡이치고 놀이터에 가면 반 친구들을 참 많이도 만날 수 있었다. 낮 동안 땀이 나게 뛰노는 아이들의 주무대였던 놀이터는 저녁이 되면 일탈을 꿈꾸는 청소년들의 비행장소가 되었다. 친한 친구들이 아니라도 곧잘 어울려 놀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보면 종종 눈이 맞아 연애를 하는 애들이 생기기도 했다. 물론 나에게는 해당사항 없음이지만 말이다. 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놀이터에 마지막으로 가 본 게 언제였더라.
  • 사랑의 떨림이 시작된 공원 당신의 공원은 어디입니까?
    동아리를 만든 게 불순한 의도는 아니었으나 대학교에 입학해서 이런저런 활동을 많이 했다. 과대표부터 시작해서 학생회 활동도 일부 돕고, 사진 동아리, 무술 동아리 그리고 지금 다니고 있는 잡지사의 학생통신원까지 하면서 여러 모임을 두루 경험했다. 다 배워보려 시작한 활동들이지만 대학 생활이란 것이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기승전‘술’로 연결되다보니 참으로 쓸데없이 허송세월 한 것 같은 느낌도 가끔 든다. 그래도 잘한 일 중 한 가지는 군 입대 전 학과 동아리를 만든 것이다. 우리 과에는 과거 학술 동아리가 있었는데 체제가 학부에서 학과로 개편되면서 명맥이 끊긴 상태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교수님들께서 동아리를 만들면 지원을 많이 해주신다 약속하셨고, 어찌어찌 내가 총대를 메고 동아리원을 모집해 조직 구성, 운영, 행사 진행 등을 도맡았다. 그렇게 몇 개월을 유지하다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어릴 때 학과 동아리를 만들어 운영하다보니 나름 선배들에게 예쁨 받는 후배가 돼 있었다. 한참 윗 기수학번의 선배들도 알게 되고 교수님들께도 신임을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얻은 듯싶었다. 하지만 학과동아리를 만든 게 내 대학 생활에 있어 가장 의미 있는 일이 된 이유는 이게 아니다. 복학과 동시에 재학생들과 자연스레 융화되는 장치가 됐고, 그럼으로써 연애를 하는 발판도 만들어 주었다. 그러니 어찌 잘 만들었다 안 할 수 있을까. 동방탈출: 애정의 시작 시작은 언제나 어렵다. 연애도 마찬가지다. 나는 연애를 늦게 시작한 편이다. 동갑내기 친구들보다 군대를 조금 늦게 간 편이라 전역했을 때 나이가 스물넷이었는데, 그해 처음 연애를 했다. 복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과 동아리에 가입한 같은 과 후배를 꼬셨다. 그녀는 지금의 내 여자 친구다. 사실 처음엔 연인 사이로 발전할 줄 꿈에도 몰랐다. 내가 그녀를 갈구는 못된 선배였기 때문이다. 복학하기 전에 학과 동아리 방에 잠깐 들른 적이 있는 데 그때 여자애 둘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나보다 학번이 3년 아래인 꼬맹이들이었다. 한 명은 회장, 한명은 부회장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군대에 가 있는 사이 동아리 회원 수가 절반 이하로 줄어 있었는데, 동아리를 만든 입장에서 애정이 있던 터라 그 후배들을 도와 신입생들을 뽑고 가르쳐 다시 활성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에 회장과 부회장을 정말 많이 괴롭혔다. 그러다 심하게 감정적으로 서로 격해진 일이 있었는데 이후 화해를 하고 다시 친목을 다지기 위해 공원으로 스터디를 위한 답사 겸 출사를 나가게 됐다. 사랑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내 대학 시절 생활권이었던 전주의 중심부에는 덕진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덕진공원의 면적은 약 15만m2로 전주에서 가장 큰 도시 공원이다. 공원 면적의 3분의 2를 연못이 차지하고 있는데, 초여름 연꽃이 만발하면 절경을 이뤄 출사지로 각광을 받는다. 또한 이곳은 후백제 때 견훤이 도성 방위를 목적으로 만들었다는 설과 고려 때 건지산과 가련산을 잇는 비보풍수를 목적으로 만들었다는 설이 함께 전해져 오고 있다. 조선왕조의 발원지로서의 전주와도 깊은 관련성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단오제면 물맞이를 하기도 하고, 축제의 장소로, 그리고 평상시 소풍과 나들이 장소로 시민들이 즐겨 찾는 전주의 명소 중 하나다. 도시 마케팅의 수단으로 하고많은 관광지 중 구색맞추기식으로 공원을 넣는 경우를 심심찮게 보게 된다. 하지만 전주에서 덕진공원은 지역민들이 타지 사람들에게 꼭 소개하는 핫플레이스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전주내에서 놀러 갈 외부 공간이 마땅치 않다는 데 있다. 전주에서 주거지와 멀지 않은 근교의 손꼽히는 나들이 장소는 크게 전주동물원, 한옥마을, 덕진공원 정도다. 물론 지금은 패턴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겠으나 불과 4~5년 전쯤에는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러한 이유로 덕진공원은 그 주변에 위치한 대학교들의 조경학과 졸업 작품에 단골로 등장하는 대상지였다. 그래서 우리는 조경학과 동아리이니 답사를 목적으로 가닥을 잡고 토요일 낮 점심 때 쯤 덕진공원에 모였다. 지금은 조경시공 회사에 다니고 있는 친구 같은 1년 후배와 나보다 키가 작아 신뢰하는 ‘평생 막내’, 회장과 부회장 그리고 신입부원들을 데리고 답사를 빙자한 나들이에 나섰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도 있어 조촐한 인원이었는데 이날 부회장이 조카를 데리고 와서 더 나들이 분위기로 기울었다.어쨌든 격식을 갖춰보고자 각자 카메라로 세 가지 주제를 찍어보라고 후배들에게 미션을 줬다. 이 공원에서 안 좋은 요소, 좋은 요소, 그리고 풍경 사진을 포함해 각자만의 ‘주제 사진’을 하나씩 찍도록 했다. 첫 두가지는 수업 때 들었던 “문제를 해결하는” 설계의 재료를 찾아나서는 과정의 일환이었고 세 번째는 후배들에게 사진 찍는 데 재미를 붙이게 하려는 목적 혹은 그냥 공원을 즐기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