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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화하는 시민운동과 도시 공원 캠프 하야리아의 새로운 이름, 부산시민공원
    팽팽한 줄다리기였다. 미국 정부와 부산 지역 시민단체 사이에서였다. 100여 년 동안 일본과 미군이 점령했던 하야리아 미군 기지의 국내 반환을 두고서였다. 결국 한국과 미국 정부의 협상 결과 하야리아 미군 기지 철수와 이에 따른 반환이 결정됐다. 땅을 다시 빼앗아 올 때는 시민의 여론이 뜨거웠다. 공원으로 조성하자는 취지도 좋았다. 하지만 과연 되찾은 땅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후대에 어떤 역사적 의미로 남겨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못했다. 하야리아 미군 기지 반환과 공원 조성 결정, 공원 조성계획의 변화와 개장에 이르는 20년 역사는 시민사회단체의 변천사이기도 하다. 몇 단계로 나눌 수 있다. 미군 기지 반환 및 공원 조성 운동, 지원 특별법 제정 및 무상 반환, 공원 조성 및 운영에의 전문가 참여와거버넌스governance가 그것이다. 미군 기지 반환 운동: 1993~2004년 진보 진영을 중심으로 한 하야리아 땅 되찾기 운동이 시작이다. ‘부산 땅 하야리아 되찾기 시민 대책위’ 등이 그 주인공이다. 1993년 문민 정권 시대였지만, 여전히 미국과 주한 미군에 대한 반대라는 정치적 부담을 무릅쓴, 시대를 앞서간 판단이었다. 대책위는 하야리아 반환 원년 선포 대회, 주한 미군 항의 서한 전달 등 다양한 방식으로 반환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시민사회단체 운동의 핵심은 일본과 미국에 빼앗겼던 우리 땅을 되찾자는 맥락이었다. 1997년 당시 범시민추진위원회 김희로 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무상으로 사용 중인 우리 땅을 쉽사리 내놓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며 “한국 정부가 대등한 위상에서 반환 협상을 벌여나갈 수 있도록 압력을 행사하겠다”고 천명했다. 1990년대 초반에 씨를 뿌린 하야리아 미군 기지 철수운동은 1993년 이후 본격적인 반환 및 공원 조성 운동으로 전환된다. 시대적 흐름의 변화에 따라 진보적 사회단체 중심으로 제기된 ‘미군 철수’라는 정치적 구호가 ‘우리 땅을 되찾자’는 대중적 구호로 바뀌기 시작했다. 한 걸음 나아가 외국 군 기지에 ‘생명과 평화의 터전으로서 공원을 조성하자’는 시민사회운동으로 바뀌었다. 그 주인공 중 한 명이 ‘하야리아 부지 시민공원추진 범시민 운동본부’ 허운영 공동운영위원장이다. 그는 1993년 민주주의민족통일 부산 연합 시절부터 미군 기지 반환 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해 1999년 통합 ‘미국 점유 부산 땅 되찾기 시민 대책위’를 거쳤다. 허운영은 2005년 “시민사회단체가 반환 운동에 급급해 하야리아가 가지는 상징성, 즉 상像의 정립을 적극적으로 제안하지 못했는데, 어떤 내용성을 담보할 것인지, 공원의 실질적인 내용을 둘러싼 논쟁이 앞으로 치열하게 벌어질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이어서 “하야리아 부대를 정치적인 시각에서만 바라볼 게 아니라 역사·환경·문화·생활 교육적인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밝혔다. 공원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표면 위로 고개를 내미는 순간이다. 특별법 제정과 무상 반환 운동: 2004~2006년 하야리아 기지의 폐쇄 결정 이후 부산시와 시민단체는 중앙 정부에 기지의 무상 반환과 특별법 제정 촉구를 요청했다. 2004년 시민사회단체들은 ‘하야리아 부대부지를 시민 공원화하기 위한 범시민 운동본부’를 발족했다. 당시 공원추진본부에는 ‘미군 점유 부산 땅 되찾기 범시민 추진위원회’ 등 부산 지역 76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했다. 공원추진본부는 단기적으로는 국방부로부터 부지를 무상 양여받고 부지를 도시 환경과 녹지 등을 고려한 시민공원으로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후 오염 조사 및 복원을 촉구하는 지난한 싸움에 나섰다. 하야리아공원포럼과 공원 콘텐츠: 2009년 이후 문제는 기지의 반환 이후였다. 공원 조성이 결정되고 설계가 시작됐지만 관계자는 물론이고 시민과 부산시조차 미군 기지 안에 어떤 건물이 남겨져 있으며, 어떤 것을 보존해야 하는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부산시는 ‘세계적인 명품 공원을 만든다’는 구실 하나로 ‘국적 없는 공원 설계’, ‘토목 중심의 행정 편의주의’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부대 주변에는 ‘시민공원 주변 뉴타운’이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초고층 주거단지가 계획됐다. 이대로라면 하야리아 시민공원은 좁은 지역의 근린공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단절된 공원이 될 게 뻔했다. 부산시는 2010년 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착공을 서두르는 모습까지 보였다. 부산시는 공원 운용 방안과 프로그램은 공원을 조성한 뒤에 고민하겠다는 입장이었다. 누가, 왜, 어떻게 공원을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공원 설계와 조성 과정에 전혀 반영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이병철은 1967년생으로 부산 출신이다. 서강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공부하고 이후 미국 미주리 대학교 저널리즘스쿨과 미국탐사보도기자협회 연구원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부산 동의대학교에서 저널리즘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2년부터 부산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도시와 환경에 대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한국기자상과 봉생문화상, 일경언론상 등 다양한 언론상을 수상했고, 저서로는 『백산의 동지들』, 『황령산온천반대보도백서』, 『부산의 상권』, 『아빠는 생태박사』,『CAR 데이터베이스로 취재하기』, 『세상을 깊게 보는 눈』 등이 있다.
  • ‘공원 도시 서면’을 꿈꾸며 캠프 하야리아의 새로운 이름, 부산시민공원
    2005년의 제안 10년 전 필자는 캠프 하야리아의 공원화 방안에 대한 발표 기회를 두 차례 가졌다. 당시 H공원(캠프 하야리아에 대한 가상의 공원) 조성은 부산의 새로운 도시 자본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규정하고, ‘서면에 있는 H공원’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H공원이 있는 서면’이라는 시각으로의 확대와 전환을 요청했다. ‘도시와 자연이 공생하는 도심urban core in harmony with nature’이라는 핵심 개념 속에서 H공원을 중심으로 주변의 자연자원, 단절된 동천 등과의 연계를 통해 백양산에서 북항까지 모두를 잇는 3가지 ‘파크웨이park way’ 개념을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그린 네트워크는 백양산에서 황령산으로 이어지는 생태적 도심 녹지 축선 상에서 끊긴 구간들을 연결하는 것으로, 백양산의 녹지를 H공원으로 끌어 오고 또 H공원의 녹지를 서면과 도심 너머의 황령산으로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블루 네트워크는 복개와 인공화를 통해 원 기능을 잃어버리고 단순한 하수 처리 공간으로 취급되고 있던 동천의 복원을 제안한 것이었다. 백양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들은 H공원을 거쳐 서면을 지나 북항에 이르게 하고, 사람들과 각종 생물들이 맘대로 다닐 수 있는 산에서 바다로의 물길을 열자는 생각이었다. 마지막 옐로우 네트워크는 H공원이 서면과 불과 700~800m 떨어져 있다는 입지 조건에 착안한 것으로, 서면로터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상업 지역의 활력을 H공원과 보행으로 다양하게 연결하여 단일 활동권으로 통합하자는 제안이었다. 이러한 개념의 전개를 위해서는 ‘공원’의 고유 영역에 대한 파괴가 전제되어야 하며, 특히 조경을 넘어 도시, 건축 등 관련 분야와의 친밀한 조우를 위한 공공 정책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H공원과 서면의 유기적인 관계 형성을 통해 지역 쇄신을 도모할 수 있는 여러 방안을 공원부, 경계부, 외연부로 구분하여 제안했다. 2014년의 상황 10년 전의 논제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당시의 제안 중 공원부의 설계와 시공과 관련된 것을 제외한 대부분의 것들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부산시민공원은 온통 회색빛으로 둘러싸여 있다. 부산시민공원이 도심 공원으로 제대로 작동하려면 공원이 주변의 회색빛 콘크리트를 뛰어넘거나 품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부산시민공원=고립된 녹색 섬’이 아니라, 주변 가로변과 블록 내 골목길들, 고가도로와 철도 시설들, 넓은 대로와 공공 시설들과 함께 공원이 호흡하며 역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방법 찾기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부산시민공원이 있는 서면 일대는 광복동과 함께 부산의 지역 경제와 문화를 이끌고 있는 부산의 대표적인 도심이다. 바다와 맞닿은 광복동의 역할과 달리, 서면은 ‘내륙 도심 활력의 확산점이자 결집점’으로 역할해 왔다. 하지만 서면의 환경은 온통 인공적이고, 고개만들면 보였던 산들도 건축물 틈새로 산정만 겨우 보일뿐이다. 서면을 맑게 흐르던 동천은 코를 잡고 걸어야 하는 도시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했고,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던 5개의 지류(호계천, 부전천, 전포천, 가야천, 당감천)는 모두 복개되어 현재 남은 동천은 단지 2.6킬로 미터에 불과하다. 이러한 서면의 환경 변화사는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시작되었다. 부전역을 지나 부산역으로 가는 철길과 연접했던 캠프 하야리아는 서면을 서면로터리를 중심으로 하는 남쪽과 캠프 하야리아 주변으로 하는 북쪽으로 양분시켰다. 철길과 군부대는 서면의 상업 활력을 차단했고 백양산에서 흘러내리던 녹지 흐름도 끊어버렸다. 이러한 막히고 단절된 상황 속에서 백 여 년의 세월이 지난 것이다. 결국 지역의 퇴락과 정체를 낳았고, 철도와 군부대로 단절된 서면의 북쪽은 불균형하게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서면과 같은 도심은 땅이 무척 귀하고 풍요로운 곳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크고 웅장해서 풍요한 것 같아 보이면서도 그 이면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경관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취약한 곳이 도심이다. 서면 일대는 우리나라 대도시의 도심 중 그 취약성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곳 중 하나다. 좋은 도심에서 느낄 수 있는 창의적 힘과 활력이 거의 없다. 부산 시민 스스로도 서면은 그저 그런 모습으로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해운대와 광안리에 매달리고, 낙동강에 허황된 에코델타시티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강동진은 성균관대학교에서 건축학을 공부하였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와 역사 경관에 대한 꿈을 키웠다. 현재 경성대학교도시공학과에서 자연, 문화, 역사, 경관 등을 키워드로 하는 ‘도시 재생작업’을 통해, 학생들이 도시재창조에 대한 꿈을 키워갈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하고 지도하고 있다. 특히 버려지거나 황폐해 가는 도시 유산들(산업유산, 근대화유산, 역사마을 등)을 지키고 힘을 싣기 위한 방안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더불어 캠프 하야리아 부지의 시민공원화를 위한전문가 그룹인 ‘하야리아공원포럼’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부산시민공원 설계 이슈의 변천 캠프 하야리아의 새로운 이름, 부산시민공원
    도심 공원을 비롯한 도시 공공 공간은 시민 가치의 표상이고, 그 설계안은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의 다양한 욕망과 가치의 역학이 작용한 결과이다. 따라서 공공공간의 설계 작업은 최종적인 계획안의 내용보다 그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의 가치가 소통되고 합의되는 과정을 어떻게 반영하였느냐에 의해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 과정을 통하여 시민들은 타자의 상이한 가치와 기준들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그에 대한 담론 참여와 다양성 공유를 통하여 공공 공간을 공동체 공간으로 수용하게 된다. 이 글의 목적은 부산시민공원 설계 이슈의 변천을 살펴봄으로써 공원 조성에 있어서 설계의 역할과 구현된 공공 공간으로서의 위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설계 이전 상황: 2005년 5월 이전 부산시민공원은 조성 그 자체가 커다란 정치적 과제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원만한 합의를 통하여 부지를 돌려받고, 마치 당연한 듯 이곳에 공원이 들어섰지만, 그 과정은 쉬운 여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부터 미군 부대로 이어진 약 100여 년 동안 시민들에게 금단의 땅이었던 이곳의 주권을 회복하는 일이었고, 도심의 요지에 남아있는 군부대 이전적지를 다른 용도가 아닌 공원으로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시민운동의 결과였다. 그 과정에서는 부지 반환과 환경 치유 협상과 같이 국내 최초의 선례를 남기는 국가적 과제를 해결해야 했고, 개발 비용 부담을 이유로 공원 외 다른 용도로 개발하려는 정부와 개발업자들과의 정치경제적 문제를 넘어서야 했다. 이러한 상황으로 시민들이 부지반환을 제기한 1980년대 후반부터 개장까지는 25년 이상의 긴 기간이 소요되었다. 기본 구상안 작성: 2005년 5월~2006년 12월 초기 부산시민공원 조성은 정치 경제적 이슈들이 장악하였다. 설계는 부지 반환과 무상 양여 주장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수단으로, 2005년 5월 ‘기본 및 실시설계용역’을 발주하며 시작되었다. 당시로서는 부지가 반환되기 전이라 대상지에 대한 조사가 불가했기에 백지에 개념을 구상하는 수준이었다. 공원 설계를 마치토목 공사 수준으로 성급하게 발주하여 선정된 설계사는 만족할만한 계획안을 작성하지 못했고, 몇 달 후 용역 안에서 ‘시민공원 국제공모전’이라는 또 다른 형식을 통하여 계획안을 공모하는 이상한 설계 과정이 시작되었다. 국내 6개 업체가 지원한 첫 공모전에서는 당선작을 선정하지 못하여 설계 용역이 중지되었고, 이듬해 다시 국제 제안공모전을 개최하여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를 선정하고, 소위 ‘세계적인 명품 공원’ 설계를 의뢰하게 되었다. 결국 100여년 외세가 점유했던 땅의 설계 역시 외국인에게 의존하는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문제는 누가 설계했느냐가 아니라 선정된 설계안의 내용이었다. 대지에 대한 아무런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시민과의 소통이 부재했던 2006년 11월, 설계자는 대상지에 대한 4개(구획(안), 주머니(안), 펼침/접힘(안), 물결(안))의 지극히 추상적인 개념을 제시하였고,위원회는 이 중 ‘물결(안)’이라고 불리는 구상안을 설계안으로 확정한다. 당시 회의록엔 결정 사유를 ‘한국적인 이미지가 부여된 물결(안)에 대다수가 동감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목할 만한 사항은 그 회의에서 기본구상안의 후속 조치로 공원 프로그램을 선정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즉 이곳에 무슨 공원을 어떻게 만들지 보다 세계적인 조경가가 그린 멋진 조감도가 먼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시는 그 기본구상안을 원래의 한국 용역사에게 그대로 실시설계로 옮길 것을 지시하여, 2008년 2월 기본 및 실시설계 용역을 완료한다.그때가 부지가 개방되기 2년 전이었다. 김승남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환경대학원을 졸업한 뒤, 독일 카이저스라우터른 대학에서 건축 및 도시설계, 조경을 전공했다. 영화 연출, 시나리오 작가, 프로젝트 매니저 등 영화, 건축, 도시 분야의 다양한 경력을 거쳐 현재 일신설계 종합건축사사무소 사장이자 동아대학교건축학과 겸임 교수이다. 이밖에도 광안리사람들(공동대표), 지역문화지 『안녕광안리』, 부산도시학교, 하야리아공원포럼, 부산공공건축포럼,도시건축포럼B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부산신항배후 국제산업물류도시 도시개념공모와 행정복합도시 중앙오픈스페이스 국제현상공모 등에서 당선된 바 있으며, 부산시 경제기반형 도시재생계획, 산복도로 르네상스 마스터플랜 등 다양한 조경 및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수행하고있다.
  • 부산시민공원 캠프 하야리아의 새로운 이름, 부산시민공원
    다시 시민의 품으로 시민공원이 위치한 범전동 일대는 선사시대부터 주거가 이루어질 정도로 농경지가 발달하여 근대에 이르기까지 농토로 이용하던 지역민의 삶의 터전이었다. 그러나 1930년, 당시 부산의 외곽 지역이었던 이곳에 일제에 의해 들어선 경마장은 삶의 터전을 앗아 갔고,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병참기지화 되어 군사 시설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캠프 하야리아는 한국전쟁 종전후 설치되어 물자와 장병의 이동을 관리하는 대한민국 최대 군수 기지 역할을 하였으며, 2006년 폐쇄되기까지 50여 년간 인근 지역의 도시개발 및 생활권 기능형성에 있어서 저해 요소로 작용했다. 더욱이 도시가 확장되자 도시 외곽에 자리했던 부지가 도심에 놓이게 되면서 철거 논의를 비롯한 다각적인 검토가 이루어졌다. 특히 슬럼화된 군 기지 주변 지역의 생활권 기능 회복과 더불어 센트럴 파크와 하이드 파크 등과 같이 도심 오픈스페이스 확보를 통한 도시의 질적인 발전을 위해 공원화를 모색하게 되었다. 결국 2004년 근린공원으로 최초 결정되었고(300,000m2), 주변 낙후 지역의 재정비 촉진 계획과 맞물려 부지 정형화 및 조정을 거쳐 현재의 시민공원 부지로 결정(470,748m2),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기본 구상 시민공원에 대한 기본 및 실시설계는 유신으로 결정되었으나, 시민공원의 중요성과 상징성을 감안, 전문가 자문 및 공청회 등을 거쳐 인지도가 있는 해외사 중 참여 의사가 있는 설계사무소를 선정하여 지명 현상을 실시하였고, 그 결과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의 ‘얼루비움ALLUVIUM’ 안이 선정되었다. 해외사의 기본구상(안)과 더불어 민관협치기구인 라운드테이블round table이 구성되어 시의원, 언론인, 시민운동가, 조경 전문가, 장애인 등 30여 명의 전문위원을 통해 각계각층의 다양한 의견을 공원 조성에 반영하였다. 얼루비움은 부산의 지리적 위치에서 시작한다. 비옥한 낙동강 하구의 삼각주 충적지에 위치하여 번성한 땅의 역사를 되새겼으며, 얼루비움이 갖는 의미와 가능성을 통해 3개의 공간 주제와 5개의 활동 주제를 설정하여 새로운 의미의 공원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3개의 공간 주제: 흐름, 쌓임, 연결 충적지는 하천의 흐름flow과 토양의 퇴적accumulation으로 형성되며, 강과 바다가 연결connectivity된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하야리아 미군 부대가 주둔해온 지난 한 세기 동안의 대상지는 적체된 공간이었다. 얼루비움은 막혀있던 도시의 흐름을 뚫어주고 갇혀있던 하천의 흐름을 되살리며 단절된 녹지의 흐름을 회복할 것이다.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동선 체계는 부지 주변에 위치한 공원, 문화 시설, 상업 시설, 도시 기반 시설 간의 원활한 흐름과 연결을 가능하게 한다. 부지 내에 복개되어 있던 부전천과 전포천은 생태적으로 복원되어맑은 물로 다시 흐르게 될 것이며 잘려나갔던 화지산과 황령산의 녹지축은 공원 내를 가로지르는 넓은 폭의 숲길들에 의해 다시 회복될 것이다. 대상지에는 부산 시민들이 잊지 말아야 할 아픔과 질곡의 역사가 쌓여 있다. 얼루비움은 이러한 과거의 역사 위에 새로운 미래의 기억을 쌓아갈 것이다. 시민 공원은 새로운 기운이 흘러들어와 기억과 문화, 즐거움과 자연, 그리고 시민의 참여가 쌓이는 모든 사람에게 열린 공간이 될 것이다. 이러한 쌓임의 의미는 지형의 쌓음이라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시작된다. 미세한 지형의 쌓음을 통한 조형적인 대지 조작은 거대한 공원 부지를섬세한 휴먼스케일의 복합 공간으로 변모시킬 것이다. 공원 안팎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위계와 규모의 동선체계는 공원 구석구석을 감아 돌며 모든 이에게 최적의 접근성을 제공한다. 공원 내부를 도는 순환 동선은 단차 없이 완경사로 조성되어 모든 이들이 불편 없이 공원 곳곳을 감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5개의 활동 주제: 기억, 문화, 즐거움, 자연, 참여부산시민공원은 기억, 문화, 즐거움, 자연, 참여 5개의 주제 숲길과 그 사이사이 공원 안팎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보조 동선으로 공간을 구획하고 또 유기적으로 연계하였다. 총괄 및 조경설계 유신(유만재 전무, 김석기 이사, 정규현 과장) 기본 구상 James Corner Field Operations(James Corner, 정재윤) 토목 설계 길평(박기만 사장, 윤회철 이사, 김세훈 부장) 시공 화성산업 감리 유신, 길평 발주 부산광역시 위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시민공원로 73 (범전동) 공원 면적 470,748m2 완공 2014. 유신은 1966년 1월 설립된 이후, 꾸준히 성장하여 대표적인 엔지니어링 컨설팅 회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유신 레저조경부는 1980년대 중반 88골프장 기본 및 실시설계와 감리를 시작으로, 보광 휘닉스파크 리조트, 강원랜드스키장 턴키, 서대전 대중골프장, 운북 복합레저단지, 하이원 스위치백 리조트, 평창동계올림픽 슬라이딩센터(봅슬레이, 스켈레톤, 루지경기) 턴키 등 다양한 레저 관련 계획, 설계 업무 및 월드컵공원, 송도 국제업무단지 중앙공원, 연인산 도립공원 턴키 등 조경 계획 및 설계 분야에서 많은 실적과 노하우를 축적해 왔다. James Corner Field Operations는 뉴욕에 기반을 둔 도시설계와 조경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디자인 오피스다. 대규모 도시설계 프로젝트나 포스트 인더스트리얼 사이트부터 작지만 섬세한 디테일을 요구하는 디자인까지 다양한 규모의 작업을 수행하고 있으며, 주요 작품으로 뉴욕시의 하이라인과 프레시 킬스, 라스베이거스의 시티 센터, 중국 칭하이 지역의 도시설계 마스터플랜, 시애틀 워터프론트의 마스터플랜, 필라델피아의 레이스 스트리트 피어, 산타모니카의 통바 파크, 런던의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 파크, 홍콩의 침사추이 워터프론트 등이 있다. 모든 설계 실천에 있어서 사람과 자연의 생태를 연구하고, 생기 넘치고 역동적인 공공 영역 디자인을 구현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 유신 / 유신 +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
  • 부산시민공원의 조성 과정 캠프 하야리아의 새로운 이름, 부산시민공원
    일본군과 미군이 사용하다 100여 년 만에 시민 품으로 돌아온 부산시민공원의 개장식이 지난 5월 1일 열렸다. 473,000m2 부지는 일제강점기 때에는 일본인들이, 한국 전쟁 이후에는 미군이 사용하다 2010년 1월 13일 부산시에 반환됐다. 총사업비 6,679억 원의 예산으로 2011년 8월 공원 조성에 착공하여 이번에 준공한 것이다. 축구장 74개 규모의 공원에는 기억·문화·즐거움·자연·참여의 숲길 등 5개의 ‘테마 숲길’이 조성되고 2개의 하천이 복원되었다. 공원에는 150여 종 100만여 그루의 각종 나무가 식재됐다. 특히 참여의 숲 34,987m2에는 시민들이 헌수한 10억여 원상당의 나무와 초화류 등 6만여 그루가 심어졌다. 하야리아Hialeah는 미국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 북서쪽에 있는 도시 이름으로 인디언어로 ‘아름다운 초원’이라는 뜻이다. 하야리아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50년 9월 주한 미군 부산 기지 사령부가 주둔할 당시 초대 사령관의 고향인 베이스 하야리아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에는 주택 133동을 비롯하여 사무실, 창고, 다용도 건물 등 338동, 연면적 89,331m2의 건물이 있었으며, 향나무 1,096주 등 4,700종이 넘는 수목이 있었다. 부산시민공원의 조성은 2006년 2월 부산시가 공원 조성 설계추진계획, 주변 지역 정비개발계획, 반환공여지 인수절차 이행계획, 캠프 하야리아 부지 반환과 관련한 시 조례 제·개정 등에 관한 로드맵을 담은 ‘부산시민공원조성 종합추진계획’을 확정, 발표하면서부터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공원의 조성과 함께 주변 지역에 대해서도 종합계획을 수립하여 공원의 조성과 주변 지역의 연계 개발을 추진하였다. 이때부터 프로젝트 코디네이터의 역할로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의 대강을 정리해 보았다. 지난 8년 동안 공원 조성과 관련하여 일어났던 일들을 종합해 보면 부지 정비 및 기반 조성, 기본계획수립 및 설계 보완, 공원 조성 사업, 시민 참여 및 관련연구, 기타 관련 계획 및 사업으로 대별된다. 부지 정비 및 기반 조성 2010년 1월 13일 부산시는 부지의 관리를 인수하였다. 그리고 인수받은 부대의 관리를 전문 업체에 위탁하고 지장물 철거 공사와 환경 오염 정화 사업, 문화재시굴 조사, 전포천 공사, 공원 설계 용역 및 주변 지역재정비촉진지구 기본 및 실시설계 용역 등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2010년 4월 24일부터 10월 31일까지는 부지를 시민들에게 개방하였다. 6개월 동안의 개방 기간 중에 총 13만 8천여 명의 방문객들이 부지를 찾아 1일 평균 700여명이 방문하였다. 당초 9월 말까지만 개방하기로 하였지만 시민들의 반응이 좋아 1개월 연장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지장물 철거 작업, 전포천 복원 공사, 환경 오염 정화 사업 등 선행 공사의 본격 시행으로 안전사고 우려 등의 문제가 제기되어 부지 개방을 종료하였다. 2010년 12월부터 지장물 철거 사업이 이루어졌다. 이 사업을 통하여 건축물 315동, 석면 247동, 지중폐관 7,850m 등이 철거되거나 제거되었다. 그리고 건설폐기물 125,973톤, 폐아스콘 32,100톤, 소각폐기물 12,507톤, 지정폐기물 569톤도 함께 처리되었다. 2011년 4월에는 환경 오염 정화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보다 1년 전인 2010년 4월 부산시와 국방부는 환경 오염 정화 위ㆍ수탁 협약을 체결하였는데, 국방부는 환경 오염 정화 사업 설계용역을 진행해 왔기 때문이다. 조사를 통하여 유류와 중금속 등이 50,234m2 면적에 73,468m3(중복 고려 시)인 것으로 파악되었는 데, SK건설 등이 참여하고 한국환경공단이 감독하여 2012년 7월까지 진행되었다. 오염 정화 사업은 토양 경작법(유류 오염토)과 토양세척법(중금속 오염토) 등을 적용하여 시행하였다. 사업 도중 22,477m3의 추가물량이 발생하여 최종적으로 95,945m3의 오염토와 35,500m3의 지하수를 처리하였다. 한편 2011년 2월부터 11월까지는 문화재 발굴 조사가 총 119,989m2에 걸쳐 실시되었다. 이 조사를 통하여 청동기 시대 지석묘를 비롯하여 총 298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다수의 미분류 토도편이 나왔다. 조사 구역 내 확인된 주요 유구는 공원 내 역사관 및 숲길에 전시ㆍ홍보하기로 하였다. 기본계획 수립 및 설계 보완 2006년 5월 부산시민공원의 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제안서 공모를 실시하였다. 미국의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이하 JCFO)와 하그리브스 어소시에이츠Hargreaves Associates, 일본의 다카노 랜드스케이프 플래닝Takano Landscape Planning 등이 응모하였으며 심사 결과 JCFO의 안이 선정되었다. JCFO는부지 반환식에 참석하는 등 자료를 수집하고 실시설계사인 유신과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며 설계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부산시와 시민단체 등은 여러 차례 공청회, 토론회, 자문회의 등을 개최하여 의견을 수렴하였다. 2007년 3월 최종적으로 제출된 기본계획안의 제목은 얼루비움Alluvium으로서 비옥한 새 기운이 흐르고 쌓이는 21세기 부산의 새로운 도시 공원 조성을 목표로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세계 도시 부산을 향한 공원, 미래를 향한 공원, 모두를 향한 공원, 문화가 있는 공원, 도심 재생을 촉진하는 공원을 담고자 하였다. 디자인적으로는 흐름과 쌓임으로 형상화되는 얼루비움의 층위구조를 통해 대규모의 공원을 조직적으로 엮어 내고자하였다. 단편적인 지역적 연차 개발phasing이 아닌 지속적인 수평적 층위 개발을 지향함으로써 부산시민공원이 지닌 장소적 특수성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부지 내의 지하 공간 및 이와 연계된 도시 기반 시설의 개발, 공원 표면의 모든 공간 구성의 바탕이 되는 조형적 정지 작업, 이용자들의 접근성을 보장해 주는 동선 체계의 구축, 향후 프로그램의 설치 및 개발의 방향을 결정하는 공간 주제의 설정 등이 얼루비움의 층위 구조를 이루었다. 이유직은 부산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부산의 미군 기지인 하야리아의 부지를 공원화하는 작업의 프로젝트 코디네이터로, 거창군 창조 도시 총괄계획가로 활동하고 있다. 마을만들기와 농촌 조경에 관심을 두고 현장에서 지역 재생과 커뮤니티 활성화를 위한 조경학적 실천을 모색하고 있다.
  • 캠프 하야리아의 새로운 이름, 부산시민공원
    2014년 5월 1일 부산시민공원이 공식 개장했다. 첫날에만 10만 명의 시민들이 다녀갔다.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처음 생긴 대규모 평지 공원, 부산 시민들은 도시 공원이란 존재 자체만으로도 반기는 분위기다. 2004년 미군 기지인 캠프하야리아 부지의 용도가 ‘근린공원’으로 결정되고 2006년 기지가 폐쇄된 지 10년여 만에 탄생한 공원이다. 정치 경제적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주한 미군 기지 이전 부지를 공원화하는 과정은 지난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성급하게 진행되면서 해외 조경가의 설계안에 대한 논란, 역사 문화 유산 보존과 공원 프로그램 문제, 거버넌스 방식 등 여러 가지 차원의 이슈를 생산해 왔다. 그 과정에서 도출된 키워드들은 도시 공원의 역할에 대한 다양한 담론을 형성했으며, 공원을 둘러싼 여러 주체들의 변화를 끌어내기도 했다. 이번 기획은 그 모습을 드러낸 부산시민공원을 소개하는 동시에 그간 제기되어온 이슈도 함께 점검해 보고자 한다. 부산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용산공원과 같은 미군 기지의 공원화에 시사점을 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기회가 되리라 기대한다. 더불어 부산이라는 도시에서 새로운 공원 문화를 만들어갈 시민 공원으로서의 가능성을 다각도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부산시민공원의 탄생에 힘써온 부산의 여러 전문가들은 공원의 개장을 맞아 비판과 지지를 동시에 요청했다. 공원에는 ‘완성’이 없고, 부산시민공원은 이제 그간의 교훈을 밑거름 삼아 ‘공원 문화’를 만들어갈 출발점에 섰기 때문이다. 1. 부산시민공원의 조성 과정 _ 이유직(부산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2. 부산시민공원 _ 유신+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 3. 부산시민공원 설계 이슈의 변천 _ 김승남(일신설계 종합건축사사무소 사장) 4. ‘공원 도시 서면’을 꿈꾸며 _ 강동진(경성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 5. 진화하는 시민운동과 도시 공원 _ 이병철(부산일보 기자) 6. 여성 친화적 공원 _ 홍미영(부산여성가족개발원 선임연구위원)
    • 김정은, 이형주
  • 조경가로 자라기 30대 조경가 30인에게 던진 다섯 가지 질문
    한국 제도권 조경이 서른 살을 향해 달려가던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의 경제적 환경은 본격적인 조경설계사무소에 대한 수요를 낳았고, 정상적인 설계 교육이나 시스템이 뒷받침되지 못한 상황에서 ‘스스로’ 성장한 한국 조경 1세대와 2세대는 불안하지만 동시에 화려한 그들의 시대를 맞았다. 반면 최근의 문화친화적 사회 환경은 문화적 역량과 전문성을 갖춘 조경가를 요청하고 있지만, 이른바 건설 경기의 침체가 이 세대에게 위기를 맞게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세대가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조경을 배우고 조경가를 꿈꾸기 시작한 이들이다. 한국 조경의 3세대라 부를 수 있을 이들은 전 세대와는 다른 토양에서 시작했다. 조경의 정체성에 대한 막연한 책임감이나 부채 의식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자신의 선택을 통해 조경가의 길을 걸었다. 그들에게는 개인의 전문성이 더 중요했다. 척박한 외적 설계 환경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로서의 조경가, 디자이너로서의 조경가로 내실을 다지며 성장하고 있다. 그들의 성장 과정은 다양한 스펙트럼에 걸쳐 있다. 유수의 해외 디자인 스쿨에서 유학하고 세계적 오피스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아온 이들이 있는 반면, 국내에서 교육받고 제도권 설계사무소에서 경력을 쌓으며 자신의 전문성과 역량을 깊고 넓게 가꾸어 온 이들도 적지 않다. 국내의 교육과 다양한 작업 경험을 바탕으로 해외 설계사무소에서 활동하는 이들도 있고, ‘강소’ 오피스를 꿈꾸며 일찍이 독립한 이들도 있다. 이번 호 『환경과조경』은 이들이 조경가로 자라온 다양한 과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불안하고 피로한 한국 조경의 이면에서 묵묵하지만 깊이 있는 호흡으로 성장하고 있는 30대 조경가 30인의 성장사와 비전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이들 30인의 조경가의 이야기는 조경가를 꿈꾸면서도 늘 갈증과 허기를 느끼는 미래 세대에게 조경가로서의 성취에 대한 비전과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또 스타 조경가가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의 평범한 한 구성원으로서 또 직업인으로서 조경가로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1. 조경가로 성장하게 한 가장 큰 동력과 계기는? 또는 당신을 사로잡은 조경의 매력은? 2. 조경가의 길을 걷는 과정에서 또는 자신의 작업에, 영향을 준 사람이나 작품 혹은 책이 있다면? 3. 주도하거나 참여했던 작업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또는 중요하게 여기는 프로젝트와 그 이유는? 4. 성장 과정에서 직면했던 어려움이나 현재의 가장 큰 고민은? 5. 조경가로서 자신만의 접근 방식이나 설계 철학은? 조경가로서의 미래에 대한 꿈과 구상은?
    • 김정은, 이형주, 조한결
  • 텍스트로 만나는 조경 활자산책
    1999년부터니까, 15년째 종이책을 만들고 있다. 9년은 잡지와 단행본을 함께 만들었고, 6년은 단행본에만 집중했다. 그 기간 동안 만든 단행본이 대략 80권 남짓이니, 한 해에 5권쯤 편집한 셈이다. 단행본 에디터로서는 적은 양이지만, 절반 이상의 시간을 잡지에 투자했으니 게으름을 피운 수준은 아니다. 에디터로 참여한 첫 번째 단행본은 1999년 8월에 출간된 『현대 한국 조경 우수 작품집』이다. 선배들이 주로 편집했고, 나는 거드는 수준이었다. 양장 제본된 406쪽 분량의 제법 두꺼운 작품집이었는데, 『환경과조경』에 1985년 9월부터 1999년 6월까지 실린 근작, 수상작 중에서 대표작을 골라 내용을 꾸렸다. 특이했던 점은 책에 실린 주요 이미지와 『환경과조경』 총 목차, 조경 관련 분야 명부, 조경 제품 사양 등이 실려 있는 CD를 부록으로 제작한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환경과조경』에 15년동안 실렸던 주요 작품들을, 이 책을 편집하면서 압축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었기 때문에 큰 공부가 되었다. 아, 그리고 잊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원래 이 책은 양장(하드커버)이 아니라 무선 제본(소프트커버)을 하려고 했었는데, 인쇄소의 실수로 표지에 문제가 생겨, 인쇄 및 제본이 모두 끝난 후 원래 책 크기에서 1cm 정도를 잘라내고 양장으로 다시 제작했다. 추가 비용을 인쇄소에서 부담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손해가 없었지만, 당시의 아찔했던 기억은 지금도 후반 작업에 신중을 기하게 하는 좋은 약이 되었다. 그 책을 기점으로 어쩌다가 단행본 담당자가 되어 적지 않은 조경 책을 편집했다. 출판 의뢰가 들어온 경우가 대다수였지만, 연차가 쌓인 후에는 자체 기획도 조금씩 시도했다. 그러면서 자연히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조경 관련 도서를 뒤적이게 되는 경우도 늘어났다. 이 글은 그렇게 만들고 접한 몇 권의 책 이야기다. 초기에는 『한국 조경 설계경기 작품집』(한국조경사회 편), 『골프코스 설계 및 시공』(마이클 허잔 저, 황원 역) 등 주로 출판 의뢰가 들어온 책들을 편집했다. 차례부터 제목까지 전적으로 필자의 의견에 의지했다. 출판기획서도, 에디터의 역할도 머릿속에 없을 때였다. 출력소에서 필름 교정을 볼 때마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제발 큰 잘못은 없기를’ 따위의 주문을 몇 번이나 되뇌고, 불안한 마음에 교정 오케이를 쉽게 내지 못했다. 이때 펴낸 책 중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신 실내조경학』(이종석·방광자·김순자 저)이다. 올해 초에 여섯 번째 인쇄를 할 정도로, 꾸준히 팔리고 있는 책 중의 하나다. ‘전문 서적은 역시 교재가 갑이다’라는 깨달음(?)을 준 책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기억에 남는 또 다른 책은 『건강을 부르는 웰빙 가든』이다. 다른 기자가 기획하고 필자도 섭외했는데, 당시 막 뜨기 시작한 ‘웰빙’을 ‘정원’과 접목시켜 개정판까지 펴냈다. 『주택 정원』을 제외하고 처음 펴낸 정원 책으로, 정원 책의 가능성을 어렴풋이나마 맛보게 해주었다. 필자인 이성현 대표는 이후 『정원사용설명서』를 함께 펴냈고, 지금도 올 하반기 출간을 목표로 『건축가의 정원, 정원사의 건축』이란 타이틀의 책을 함께 작업 중이다. 또 한 권을 꼽자면, 『재료의 미학』이 떠오른다. 필자인 황용득 대표가 소장하고 있던 어마어마한 슬라이드 필름도 인상적이었지만, 편집 과정에서 들었던 재료의 물성, 단행본을 통한 자료공유의 필요성, 답사 뒷이야기에 대한 잔상이 꽤 오래남았다(이 책은 후에 『돌, 철 그리고 나무』란 타이틀로 개정증보판이 출간되었다). 에디터로서 각성을 하게 된 책 중의 하나는 『현대 조경 설계의 이론과 쟁점』(배정한 저)이다. 입사 이후 맡았던 연재 원고 중에서 피드백이 가장 많았던 ‘동시대 조경 이론과 설계의 지형’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낸 것이어서 밖에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작업이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우선 담당자였던 내가 단행본을 출간하자는 필자의 제의에 난색을 표했다. 연재가 종료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단행본으로 묶어내면 아무래도 판매가 저조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의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올해로 출간 10주년을 맞이한 이 책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호응을 얻고 있다(현재는 절판 상태인데, 개정판을 낼 계획이다). 대학 시절 읽었던 수 많은 소설집이 문학 계간지에 수록되었던 작품을 묶어서 펴낸 것이었음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당시에 『현대 조경 설계의 이론과 쟁점』에는 왜 그리 박한 평가를 했는지, 지금도 물음표로 남아 있다. 이 책을 기점으로, 잡지 연재 후에 단행본을 묶어내는 방식의 기획이 조금씩 늘어났다. 그리고 이 책을 편집하면서 본문 표기 원칙, 주석 표기 원칙 등 몇 가지 기준을 뚜렷하게 세울 수 있었고, 디자인과 판형에 대한 감도 조금씩 잡을 수 있었다(그렇다고 크게 나아지진 않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활자산책
    디자이너, 저자가 되다 편집부 앞으로 온 이메일 한 통. 조경가 L이 평소에 써두었던 원고를 보내며 출판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조경 답사를 다니며 기록해둔 메모 성격의 원고로, 조경설계에 관한 전문가적 의견이 담겨 있었다. 메일을 읽고 있자니, 불황의 한복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출판 시장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아니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독자층이 옅은 전문 도서는 더더욱 출간에 이르기 어렵다. L에게 바로 답장을 하지 못하고 고민이 이어졌다. 학자나 작가, 혹은 기자가 아니라면 대개 글쓰기는 일상적인 일이 아니다. 조경 동네를 둘러보아도 책을 쓰는 디자이너를 찾기 어렵다. 디자이너가 작품집이 아닌 책을 쓰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과연 디자이너에게 책을 쓰는 일이 필요하긴 한 걸까. 디자이너는 누구를 향해, 무엇을 위해 글을 쓰려고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디자이너의 책을 읽어줄 독자는 어떤 사람들 일까. 예비 저자들은 대개 그들의 첫 책의 독자로 실무자, 인접 분야 전문가, 학생 그리고 관심 있는 일반인들까지를 막연하게 함께 꼽곤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누구를 향해 글을 쓰느냐에 따라 문체나 내용이 달라져야 할 것이다. 건축 관련 글과 땅콩집으로 유명한 구본준 기자(한겨레)는 그의 저서 『한국의 글쟁이들』(2008)에서 1990년대 후반부터 부상한, 글쓰기가 삶의 중심인 ‘글쟁이’의 특징에 대해 언급한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 글쟁이들이 “전문성과 대중성의 중간, 지식을 생산하는 학문의 최전선과 독서 대중 사이에 존재하며 양쪽을 이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학자가 아니더라도 준전문가로서 해당 분야의 최신 지식을 쉽게 설명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 이런 글쟁이들은 분야의 대중화를 선도한다. 극도로 전문적인 내용을 소수의 전문가들과만 공유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귀 기울여볼 만한 대목이다. 이러한 글쟁이들은 “‘전달력’을 중시하며 독자지향적인 기획 마인드를 추구한다.” 도시나 건축 동네로 고개를 돌려보면 책을 펴내는 디자이너들이 좀 더 많다. 지난 10~20년간 전문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난 책들 그리고 전문가의 울타리를 넘어 대중의 관심을 받은 책들이 있다. 그들은 왜, 누구를 향해 책을 쓰고, 그 전략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도시·건축 분야의 책들을 되짚어 보면서 김진애를 빼놓을 수 없다. 건축과 도시계획을 전공한 그녀는 서울포럼을 운영하면서 스스로 꾸준히 글을 쓰기도 하고, 동료 건축가들의 책을 기획하면서 책 쓰기를 독려하기도 했다. 그런 김진애가 1999~2001년 ‘자라기 시리즈’(『매일매일 자라기』, 『프로로 자라기』, 『사람으로 자라기』)를 냈다. 그녀가 서문에서 소상히 밝히고 있듯이 이 시리즈는 건축 입문을 고민하는 사람, 관련 대학생, 젊은 실무자들, 건축팬을 대상으로 한 책으로 “학교에서 잘 다루지 않는, 실무세계에서도 서로 알겠거니 하고 말하지 않는 내용”을 담은 것이다. 일종의 도시건축 분야의 자기계발서 같은 책이다. (『환경과조경』 315호 특집의 제목인 ‘조경가로 자라기’는 이 시리즈에서 빌려온 것이다.) ‘탐험하기’, ‘만들기’, ‘커뮤니케이션 기’, ‘쌓아가기’, ‘감지하기’ 등과 같이프로가 되기 위한 구체적 안내가 담겨있다. 김진애 특유의 시원시원하고 거침없는 문체와 그 시시콜콜함이 매력이다. 이 시리즈가 출간된 지 이미 15년이 지나 사회적 상황과 전문 분야의 지형도 여러모로 변했고 책의 편집도 요즘 취향과는 다르지만, “배우는 재주도 배워야 한다”는 그녀의 말처럼 직능에 대한 이해를 돕는 책의 존재가 부럽게 느껴진다. 대중을 위한 건축 입문서로는 단연 서현의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1998)를 꼽을 수 있다. 서현은 “건축가가 건물을 만드는 과정을 짚어”보며 건축가들은 어떤 관점에서 건물을 바라보는지, 여기에는 어떤고려 요소가 있는지 등을 대중의 눈높이에서 설명하고있다. 이 책의 후기에서 서현은 “대상의 감상과 판단은 스스로 하여야 한다. 그 판단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받침이 지루하게 이 책에서 서술된 것이다”라고 썼다. 이러한 생각은 전문가를 위해 쓴 책에서도 이어진다. 『건축을 묻다』(2009)에서 그는 ‘건축은 무엇인가’ 그리고 ‘건축은 예술인가’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찾기 위해 예술, 기술, 기능, 공간, 사회, 역사, 도시와 같은 연관 개념과의 관계성을 파악한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직접 확인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건축은 직접 찾아가서 보고 책은 원본을 찾아보고자 노력했다고 밝혀두고 있다. 책을 쓰는 과정이 나만의 답을 찾기 위한 치열한 여정이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건축가에게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필요한, 그리하여 흔들리지 않는 가치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거의 모든 것의 역사 활자산책
    “독서도 다른 취미와 마찬가지여서, 우리가 애정을 기울여 몰두할수록 점점 더 깊어지고 오래간다.”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의 말이다. 깊이 공감한다. 독서가 종종 고리타분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경우가 있지만 나는 이만큼 흥미로운 행위가 또 있을까 싶다. 문자가 발명된 이후로 글은 계속해서 쓰여졌고, 책 또한 만들어졌다. 현재 전 세계에 출판된 책의 수는 헤아릴 수 없으며, 그 한 권 한 권의 가치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 역시 무궁무진하다. 심지어 하드커버를 두른 네모난 모양의 종이뭉치는 아름답기까지 하다. 다시 생각해보자. 독서보다 건전하고 유익하며 안전한(?) 행위가 또 있을까? 물론 찾아보면 몇 개의 리스트를 만들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우리는 누구나 독서의 장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책 읽기는 점점 변방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의 감각을 새로운 방식으로 만족시키는 뉴 미디어가 속속 등장하면서 어느새 책은 프랜차이즈 카페의 장식품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어야 하는가’ 나의 대답은 ‘예스’다. 사실 이러한 질문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니, 참 억지스럽지 않은가. 이 짤막한 글은 앞의 질문을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가’로 바꿔 읽으려는 나의 노력이다. 우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이상한 것이 아니라, 정말 아주 이상하다 - 빌 브라이슨,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어릴 적 나의 꿈은 화가였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찾아간, 동네의 작은 미술학원 선생님이 예뻐서는 아니었다(절대 아니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하얀 종이 위에 점을 찍고, 선을 그려나가는 과정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이유로 나의 꿈은 교사에서 과학자로, 다시 산업디자이너로 의사로 작가로 교수로 기자로 수십 번도 더 바뀌었다. 하지만 이렇게 장래 희망이 바뀌는 동안에도 늘 함께한 것은 책이었다. 하지만 위인전과 같은 책에는 쉽게 정을 붙이지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 책장에 꽂혀있던 위인전 전집은 그 위에 덕지덕지 쌓인 먼지만큼이나 싫었다. 미래에 대한 나의 꿈이 많이 바뀐 이유는 이것저것 관심이 많았을 뿐더러 궁금증이 많았기 때문인데, 그 나이에 본받을 위인들에 대한 딱딱한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은 고문이었다. 나의 지식에 대한 갈증에 ‘현존하는 가장 유머러스한작가’라는 평을 받는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단비와 같은 책이었다. 많은 것을 알고는 싶어했지만, 그 수고를 생각하고 포기하곤 했던 내게 재미있는 과학 교양서라니, 거기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라는 강렬한 제목에서 나를 끌어당기는 무엇인가를 느꼈다. 기자 출신의 여행 작가인 빌브라이슨은 스스로 궁금하게 생각했던 과학에 관한 여러 가지 궁금증을 3년에 걸쳐 파헤쳤다. 우주, 지구, 입자, 생물과 미생물, 인류, 생명, 화학, 기후 등등 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가 망라되어 있으며 태초부터 지금까지 만물의 역사를 쉬운 말로 써놓았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저자가 깔끔한 문장으로 풀어쓴 자연과학의 원리와 비밀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를 덮게 된다. 중학교 시절에 이 책을 접하고, 책이라는 매체가 가진 매력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후 나의 독서는 작가의 필력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많이 바뀌었지만, 당시의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 에드워드 윌슨, 『통섭』 여기저기서 ‘통섭’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공모전에서도 이 단어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통섭은 과연 무슨 뜻일까. 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사용한 ‘컨실리어스Consilience’의 번역어로, ‘서로 다른 것을 한데 묶어 새로운 것을 잡는다’는 의미를 품고 있으며, 통상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통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범학문적 연구를 말한다. 융합, 퓨전과 같은 개념이 유행하고 있는 요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용어다. 지금까지 인간은 세상을 인식함에 있어서 거대한 세상을 여러 분과로 나누는 환원주의還元主義 방식을 채택했다. 환원주의 방식의 폐단은 각 분과 간의 우열이 생기는 것이다. 이때 효과적인 방법이 환원주의로 쪼개진 세상을 다시 하나로 모으는 것, 즉 통섭이다. 통섭은 지식의 경계를 무조건적으로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들이 서로의 이해를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데에 통섭의 매력이 있다. 저자는 서구 학문의 큰 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다양한 분야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간과했던 지식통합의 가능성을 찾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정보의 바다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통합된 지혜라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