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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도시재생의 경험과 비전
도시재생의 새로운 국면
부산이라는 도시 - 01
모든 도시는 인간이 모여 머물며 어우러져 살기 위해 선택한 삶터다. 그중, 항구 도시는 해양과 육지의 자원을 기반으로 경제적 가치를 보다 많이 창출하기 위해 사람들 스스로 선택한 보금자리다. 또 해양과 관련한 각종 산업이 발달해 다양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부산의 항구는 이러한 경제적 목적 외에 또 다른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다. 1876년 개항, 1945년 광복, 1950년 한국전쟁 등 일련의 사건에서 부산이 담당했던 ‘국가 문제 해결지’로서의 기능이다. 부산은 개항 직후부터 전쟁 후인 1960년대까지 급속한 변화 속에 놓여 있었다.
개항 후 140여 년의 시간 속에서 부산은 대한민국의 근대사와 켜를 같이 했다. 일제강점기, 광복, 경제개발기의 인프라와 부산의 사회체제, 공간 조직, 건축물, 장소들은 맞닿거나 연이어 있다. 또 일제강점기의 암울했던 상황에서도 움직였던 민초들의 공동체적 활동과 한국전쟁 후유증의 극복 과정이 지난 60여 년 동안 부산에서 벌어졌던 갖가지 일상과 사건의 배경이 되었으며 근거를 제공했다.
이러한 시대 상황은 부산이 특별한 준비 기간을 거치지 못한 채 역사적 사건들의 과정과 결과를 일방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게 했다. 이로 인해 부산은 제대로된 도시계획과 중·장기 도시발전 전략을 수립할 여유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결국 이러한 시간은 부산을 근대기에 출발한 도시임에도 근대사를 느낄 수 없는, 근대기에 발전된 도시임에도 근대 문화를 인지할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했다. ‘토목의 도시’, ‘기억 상실의 도시’라는 혹평을 들을 정도로 부산은 그동안 ‘부산만의 도시상都市像’ 구축에 소홀했다.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진입 도로 확폭이라는 미명아래 부산대교를 건설하며 시행된 부산세관 철거(1979년)가 무분별한 개발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점이 아니었나 싶다. 88올림픽을 준비하며 서울과 유사하게 시작된 공동 주거 단지의 본격적인 건설과 연이은 재개발 붐은 부산 곳곳의 산록과 해안에 스며있던 자연과 역사의 기억을 급격하게 해체시켰다. 그즈음 1992년의 시청 이전(남포동에서 양정으로)과 직할시에서 광역시로의 개칭(1995년)은 원도심의 쇠퇴를 불러왔고 근대 부산의 위상 또한 격하시키는 원인을 제공했다.
부산이라는 도시 - 02
부산은 타 지역에 비해 해운대, 영가대, 태종대, 이기대, 신선대, 몰운대, 시랑대 등 ‘대臺’로 끝나는 장소들이 유난히 많다. 이유는 바다 쪽으로 향한 지형의 끝점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대와 대 사이는 완곡한 모래사장과 크고 작은 포구와 항구가 자리를 잡았고, 이를 중심으로 동네와 시가지가 형성됐다. 그래서 연안부에 자리 잡은 시가지들은 대부분 앞으로 바다가 펼쳐진 배산임해背山臨海 구조를 가지고 있다.
부산의 연안부는 본토부와 연결된 여러 지점에서 들락날락하는 목을 이루고 있어, 여러 개의 작은 만과 반도들이 선으로 연결된 지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해안가에서 짧게는 50m, 길게는 1,000m 정도 내륙으로 이격된 배면부에 산들이 꼬리를 물고 연결되어 있다.
연안을 배경으로 병풍처럼 서 있는 승학산, 엄광산, 봉래산, 보수산, 구봉산, 수정산, 황령산, 금련산, 장산 등의 산봉우리들과 그 사이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던 보수천, 영주천, 초량천, 부산천, 동천(호계천, 가야천, 부전천, 전포천), 남천, 수영강, 춘천 등이 부산 연안 경관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역사적으로 부산의 도심 연안은 부산진성과 자성대 근처를 중심으로 하는 ‘점點’ 형태에서 출발했다. 구한말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연안부는 군사·경제적목적에 의한 침탈의 대상으로 악용되면서 절토와 매축에 의해 기다랗게 연결된 ‘선線’의 형태로 돌변했다. 전쟁 후, 1960~70년대를 거치며 부산 연안은 지형지세에 따라 지구地區 별로 가지각색의 목적을 가진 ‘면面’형태로 확장되었다.
강동진은 성균관대학교에서 건축학을 공부했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와 역사 경관에 대한 꿈을 키웠다. 현재 경성대학교 도시공학과에서 자연, 문화, 역사, 경관 등을 키워드로 하는 ‘도시재생’ 작업을 통해, 학생들이 도시재창조에 대한 꿈을 키워갈 수 있도록 함께고민하고 지도하고 있다. 특히 버려지거나 황폐해 가는 도시 유산(산업유산, 근대화 유산, 역사 마을 등)을 지키고 힘을 싣기 위한 방안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더불어 캠프 하야리아 부지의 시민공원화를 위한 전문가 그룹인 ‘하야리아공원포럼’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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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이 주도한 전주의 노후 주거지 재생 경험
도시재생의 새로운 국면
2007년 국토해양부는 도시재생사업단을 출범해 노후 주거지에 대한 지역자력형 재생 방안을 연구했다. 그동안 연구한 성과의 실용성 검증을 위해 2011년에 전주와 창원을 대상으로 테스트베드TB를 운영했고, 전주의 주거지 재생 TB 대상으로는 노송마을이 선정되었다.
전주의 테스트베드, 노송마을
1970년대 전주역은 지금의 전주시청 자리에 입지하고 있었다. 열차의 완행과 야간통금 때문에 역 주변에서는 필수 시설이었던 저렴한 여인숙촌이 역사 건너편에 자리하여 홍등가 기능을 하고 있었다. 이 홍등가와 면한 주거지가 노송마을이다. 철도 뒤로 구릉지를 형성하고 있는 입지적 특성으로 이곳은 1950년대 피난민촌이 형성되었다. 때문에 구불구불한 골목길에 면한 불규칙하고 작은 필지 위에 다닥다닥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도시 성장을 억제하는 철도로 인해 전주의 동부가 개발되지 못하자 1980년대 초에 역을 동측으로 2~3km 이동시키면서 홍등가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기존 전주역사 자리에는 전주시청이 이전해 왔고, 철도 부지가 도시 간선 가로로 대체되면서 이 대로변에는 고층의 업무 시설이 집적되었다. 그러나 업무시설의 이면에 낡고 어두운 홍등가가 계속 운영되면서 노송마을은 전주시에서 거주환경이 가장 열악한 마을 중 하나가 되었다. 이에 전주시는 주거지 재생을 위한 TB로 노송마을을 가장 적합한 곳이라 판단한 듯했다. TB 운영을 위해 연구진이 노송마을에 들어갔을 때 마을의 현황은 매우 암담했다. 면적 약 14만5천m2에 950세대 1,9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 노송마을은 10여 년 전 주거환경 개선사업을 시행한 곳이다. 이때 개설된 격자형의 소방도로에 의해 불규칙한 필지들은 더욱 작아져 다수의 과소 필지가 형성되었으며, 격자형 가로망이 개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동차가 통행 가능한 도로에 면한 필지는 35% 미만이었다. 산재한 공·폐가와 재활용을 이유로 너부러진 폐기물, 자투리땅에 방치된 쓰레기 더미 등이 마을의 경관적·위생적·방범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었다. 도심 한가운데서 시청과 인접해 있으면서도 도시가스도 하수도도 미정비 상태였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저소득 고령자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었으며, 가구주의 소득 수준이 월85만원 미만인 세대가 47.5%에 달했다.
주민 설득에서 참여까지 도시재생 TB에 대한 이해가 없던 주민들은 사업비 하나 없이 주민 주도에 의한 선 계획 후 타당성 있는 사업의 실행을 약속하는 연구진에게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마을을 직접 돌아보고 문제를 진단하기 위한 최초의 주민 워크숍 ‘동네 한바퀴’에 100여 명이 참가하여 연구진도, 행정도, 주민들 스스로도 놀라워했다. 부녀회장, 방범대장, 통장, 청년회장 등 마을의 다양한 조직의 장을 중심으로 구성된 사전 주민 대표 그룹과 집집마다 방문해 사업의 의미를 설명한 도시재생센터 연구진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주민들은 10여 명이 한 조가 되어 마을을 돌아보고 일상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문제를 진단했으며 조별 발표를 통해 이를공유했다. MP팀은 도출된 문제의 범주를 주택 중심의 사유 공간, 주차장화 된 경사 가로와 소공원 중심의 공공 공간, 일자리 창출을 위한 경제 환경, 마을 쓰레기 및 방범 문제 중심의 마을 관리 및 복지로 구분했다.
이렇게 구분된 범주별 문제에 대해 워크숍에 참여한 주민들로 하여금 개인적 관심 분야를 선택하도록 했으며, 각 문제에 대해 주민 스스로 대안을 모색하도록 유도했다.각 범주별로 주민들이 파악한 대표적인 문제와 대안은 매우 현실적이었다. 먼저 사유 공간에 대해서는 방치된 폐가에 의한 위생적·방범적 문제, 과소 필지로 인한 주택 신축 및 확장의 어려움, 노후 주택 수리의 필요성 등이 파악되었다. 그리고 행정의 협조를 통한 폐가 철거 및 텃밭 활용, 자투리땅의 저렴한 매입 중계에 의한 재건축 촉진, 담장 정비 등을 제안했다.
공공 공간에 대해서는 가파른 경사지 및 불법 주차로 인한 통행의 어려움, 골목길의 노후화, 야간의 범죄 우려, 소공원 관리 문제 등을 파악하고 가로의 재구성 및 정비, 주차 단속, 방범 장치 강화 등을 제안했다. 일자리 부족 문제에 대해서는 남성을 중심으로 폐가 철거 및 집수리 사업이, 여성을 중심으로는 동네 식당 및 텃밭 가꾸기 등을 제안했다.
마을 관리와 복지 측면에서는 쓰레기 무단 배출, 도시가스 미공급, 어린이 및 노인들을 위한 시설 부족, 점집 및 정신장애인복지시설의 확장 등이 지적되었으며, 주민 주도의 청소 및 화단 가꾸기, 학생을 위한 공부방 및 노인을 위한 사랑방 조성 등의 방안이 제시되었다.
MP팀은 사유 공간과 공공 공간의 정비를 물리적 재생으로, 일자리 창출은 경제적 재생으로, 마을 관리와 복지는 사회적 재생으로 구분했다.
김현숙은 1983년 전북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후, 일본 와세다 대학교에서 도시설계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5년 도시계획기술사 자격을 취득하여 21C도시건축연구소장으로서 도시계획 및 설계실무에 종사했으며, 1998년부터 전북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로 도시설계 연구실을 관장하고 있다. 중앙건설기술심의위원, 국가건축정책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국토정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도시설계,도시 경관, 도시재생에 관한 연구와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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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재생특별법’ 제정과 정책 추진 방향
도시재생의 새로운 국면
2013년 6월, 다양한 도시 문제를 해결하고 도시의 종합적인 기능 회복을 도모하기 위해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하 ‘도시재생특별법’)이 제정되었다. ‘도시재생특별법’은 쇠퇴하는 도시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경제 기반을 확충하고 근린 생활권 단위의 공동체를 활성화하는 활동 등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이 법은 앞으로 도시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중요한 기반으로 작동할 것이다.
정책 기반으로서의 도시재생특별법
‘도시재생특별법’은 제1조에 “도시의 경제·사회·문화적 활력 회복을 위해 공공의 역할과 지원을 강화함으로써 도시의 자생적 성장 기반을 확충하고 도시의 경쟁력을 제고하며 지역 공동체를 회복하는 등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된 바와 같이, 지원법 성격이 강하다. 즉, 지자체가 직접 계획하고 실행하며 국가는 이를 지원하는 체계와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도시재생’이란 법 제2조에서 정의된 것처럼 “인구의 감소, 산업구조의 변화, 도시의 무분별한 확장, 주거환경의 노후화등으로 쇠퇴하는 도시를 지역역량의 강화, 새로운 기능의 도입·창출 및 지역자원의 활용을 통하여 경제적·사회적·물리적·환경적으로 활성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도시재생특별법’의 주요 내용은 크게 주민과 지자체중심의 계획 수립, 도시재생 추진을 위한 중앙과 지방의 조직 구성, 도시재생 사업 지원, ‘도시재생선도지역’지정 등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계획 체계
‘도시재생특별법’에서는 먼저 국가가 ‘국가도시재생기본방침’을 수립하여 도시재생 시책, ‘도시재생전략계획’ 및 ‘도시재생활성화계획’ 작성에 관한 원칙, 선도지역 지정 기준, 도시 쇠퇴 기준 및 진단 기준, 기초 생활 인프라 기준 등을 제시하도록 했다. 도시재생 추진을 위한 계획 체계는 ‘도시재생전략계획’과 ‘도시재생활성화계획’(실행 계획)의 2단계로 구분되었다. 먼저 ‘도시재생전략계획’은 ‘전략계획수립권자’1가 ‘국가도시재생기본방침’을 고려하여 도시 전체 또는 일부 지역, 필요한 경우 둘 이상의 도시에 대하여 도시재생과 관련한 각종 계획, 사업, 프로그램, 유·무형의 지역 자산 등을 조사·발굴하고, 도시재생 활성화 지역을 지정하는 등 도시재생을 위한 추진 전략을 수립할 수 있게 했다.
한편 ‘도시재생활성화계획’은 ‘도시재생전략계획’에 부합하도록 활성화 지역 내 도시재생 사업들을 연계하고 시행하기 위한 실행 계획으로, ‘도시경제기반형’과 ‘근린재생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도시경제기반형’ 활성화 계획이 산업 단지, 항만, 공항, 철도, 일반 국도, 하천 등 국가의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도시계획 시설을 정비하고 개발과 연계해 도시에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고 고용 기반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라면, ‘근린재생형’ 활성화 계획은 생활권 단위의 생활환경 개선, 기초 생활 인프라 확충, 공동체 활성화, 골목 경제 살리기 등을 위한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을 의미한다.
이상민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조경학 석사와 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7년부터 국토연구원 부설 건축도시공간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로는 「도시 공공공간개선방향 설정을 위한 개념 정립 및 현황 조사연구」, 「도시 공공공간의통합적 계획을 위한 제도 개선방안 연구」, 「도시 생활밀착형 공공공간조성 방안 및 매뉴얼 개발 연구」, 「도시 공공공간 확보 및 질적 향상을위한 공개공지 제도 개선방안 연구」, 「도시공원 정책 수립을 위한 공원평가 모델 개발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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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재생’에 대해 생각해 볼 몇 가지
도시재생의 새로운 국면
지난 달 서울에서 교수 생활을 한 지 (벌써) 10년이 된 것을 ‘기념’하여 학생들과 함께 연구실에 쌓아 놓은 자료들을 다시 살펴보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작게는 한 연구실의 10년 살림살이 기록이지만, 크게는 우리나라 도시ㆍ건축ㆍ조경 분야의 연구와 사업 생태계에 ‘적응’하며 쌓게 된 생존 노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도시ㆍ건축ㆍ조경 분야의 연구나 사업의 진행 방식을 접하면서 귀국 초기에 내가 가졌던 가장 강한 느낌은, 내용 그 자체에 대한 어려움보다 이것이 생성되고 실행되는 구조에 대한 어리둥절함이었다. 도시ㆍ건축ㆍ조경 분야에 관련된 집단이나 개인이 국가 R&D를 대하는 태도와 참여 방식에 대해 나는 솔직히 경이로움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꼈다.
연구와 사업의 생태계
초고층 건물 연구 사업, 경관법 관련 논의, U-city 연구개발, 그리고 오늘의 주제인 도시재생 사업 등 굵직굵직한 과제들이 끊이지 않고 있었는데, 주제가 그 무엇이든지 진행 구조와 프로세스는 유사했다. 해외의 트렌드를 빠르게 전도하는 것을 전문성으로 내세우는 교수나 연구원들이 뭔가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려는 담당 공무원이 원하는 과업 내용을 아주 빠르고 유용하게 가공·정리해 제공하면, 이를 바탕으로 정부 주도의 시범 사업을 속히 실행해보고, 새로이 지원법도 만들면서 지속적 추진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성과도 보인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공무원은 승진도 하고, 교수는 요약 보고서형 논문 편수도 늘린다. 그러면 이제 신속하게 새로운 과제로 넘어갈 차비를 하게 된다. 그 빠른 추진력과 속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시범 사업 이후 연구가 얼마나 지속·심화되고 있는지, 그래서 우리 도시ㆍ건축ㆍ조경 현실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더 나아졌는지 얕게라도 추적해 보며 나는 불안감을 반복적으로 쌓아 왔다.
나의 불안감, 더 나아가 절망감의 근저가 되는 요인 중하나로, 현재 우리나라 도시ㆍ건축ㆍ조경 현실에서 우리가 무엇을 왜 절실하게 문제로 삼고 있는지, 그 문제에 대한 냉정한 진단을 회피한 채 성급하게 답을 찾아 적용해보려는 우리 전문가들의 부실한 ‘생각의 구조’를 먼저 지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 스스로 우리 도시와 지역 현장의 본질적 특성이나 절박한 문제의 핵심을 시간과 노력을 들여 뽑아내지 않았는데(못했는데), 일본의 지구계획이나 경관법, 도시재생촉진특별법과 도시재생본부 구성 등 타지의 해법을 빠르게 수입해서, 공무원들이 진행하고자 하는 국가 사업의 구도에 맞게끔 우선 정리해주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불안하다.
도시재생은 뭐가 좀 다를까? 뭐라도 빠르게 가공해내는 분들보다, 이리 삐딱하게 초를 치는 내가 더 게으른 것은 아닐까 반성도 하게 된다.
도시재생 사업에서 보이는 희망
생성 구조가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도시재생에 대해서는 그래도 조금 다른 희망을 갖고 있다. 기존의 정부 주도 시범 사업처럼 일단 한번 해보는 정도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은 여전히 들지만, 도시재생 사업은 이전의 재개발·재건축 사업, 그리고 그 이후의 재정비촉진 사업과는 분명 차별되는 구체적인 목표와 방법을 기반으로 한다. 물리적 환경의 측면은 물론, 주민 생활공동체를 중시하는 사회적 측면, 그리고 지역 문화와 산업에 기반을 두는 경제적 측면을 모두 균형 있게 고려하려는 목표와 전략을 새롭게 마련했다. 도시재생의 대표적 지향 중 하나인 소위 ‘자력수복형’ 도시재생, 즉 ‘시민 참여를 통해 지역 사회의 문제를 부분적·점진적으로 해결 한다’는 점에 특히 주목한다.1 ‘자력’과 ‘수복’이 각기 표방하는 내용에 희망을 갖기 때문이다. 레토릭으로 끝날지라도, 참여자들 간의 자발적인 협치에의해 갈등을 조정하며 지역활성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모색한다는 점에 희망을 가져본다. 우리 사회 도처에서, 지역 주민은 전문가보다 훨씬 먼저, 이전 시대와는 사뭇 다른 도시 생활의 가치를 추구하며 현실적인 지역 공동체 운동을 전개해 왔다. 지역 주민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주민자치 공동체 운동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이미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도시재생에 대한 문화적 공감대가 비교적 넓게 형성되어 있다. 주민 공동체 운동이 참여형 도시재생 계획의 지속적 주체로 보편화되기까지는 많은 난관이 있겠으나, 우리 사회는 시기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주민 주도, 주민참여형 계획과 사업을 일상적으로 진행할 준비가 되어있다. 이 점이 희망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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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재생의 새로운 국면
NEW ASPECTS OF URBAN REGENERATION
‘도시재생’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다. 개발 시대를 거쳐 쇠퇴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 도시의 현실은 어느덧 ‘재생’을 초대하고 있다. 1990년대까지 신도시, 산업 단지, 뉴타운 개발 등 팽창 위주의 대규모 재개발 사업이 도시를 양적으로 정비했다면 오늘날에는 대규모 개발의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중소 규모의 ‘주민참여형 도시재생’위주로 도시를 질적으로 정비하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이제 ‘도시재생’은 그간 일부 전문가의 개별적 노력이나 시민운동의 차원을 넘어서 법과 제도의 지원을 받는 단계로 전환되고 있다. 특히 지난 2013년 6월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좀더 체계적인 지원과 경험의 공유를 기대하게 한다.
하지만 ‘도시재생’은 우리의 도시가 앓고 있는 여러 고질병을 치료하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지역성에 대한 고려, 지역 주민과의 소통, 지속적 관심과 투자를 통한 자립성 구축 등의 노력 없이 성공 사례 베끼기에 급급한 ‘도시재생’은 또 다른 도시 문제를 낳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도시재생’의 전략을 모색할 때다. ‘도시재생’의 개념과 그에 따른 실천이 또 하나의 유행이나 열병처럼 우리 도시를 휩쓸고 지나가지 않게 하려면, 보다 심층적인 이론적 연구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이번 기획이 보다 실천적이고 전략적인 접근과 그 성과를 공유하고 소통하는 노력의 하나가 되기를 기대한다.
1. ‘도시재생’에 대해 생각해 볼 몇 가지 _ 박소현
2. ‘도시재생특별법’ 제정과 정책 추진 방향 _ 이상민
3. 주민이 주도한 전주의 노후 주거지 재생 경험 _ 김현숙
4. 부산 도시재생의 경험과 비전 _ 강동진
5. 창조적 파괴와 전략적 버리기 _ 김세훈
6. 미래 도시 디트로이트 _ Sto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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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라인을 꿈꾸는 서울역 고가
“지상에서 가장 긴 공중가로정원을 생각했었다. 느릿느릿 흐르다보면 … 나지막한 건물과 산이 둘러싸고 그 길 아래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꿈을 꿨다. … 지구상에서 가장 활동적인 공간을 관조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다가 계단을 내려가면 나도 거기 한 사람임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1 하이라인 특집을 준비하다가, 불현듯 10년 전 청계천 특집에 실렸던 이 글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궁금해 졌다. 공중가로정원을 꿈꿨던 그는 서울역 고가 공원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가. 그래서 그와의 짧은 인터뷰로 글을 시작한다.
남기준 거의 10년 전 이야기다. 청계천 특집 때 청계 고가를 허물지 말고 ‘지상에서 가장 긴 공중가로정원’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다. 당시는 하이라인이 지금처럼 크게 부각되었던 때도 아니었다. 이수학(아뜰리에나무 소장) 운전대를 잡고 청계 고가를 통과한 적도 많지만, 고가를 따라 하릴 없이 거닐어본 적도 꽤 된다. 특히, 철거 직전 차량 통행이 ‘금지된 고가’ 위를 거닐 때 받은 느낌은 신선했다. 고가의 높이 때문에 주변 건물들이 모두 나지막해 보였다. 어렸을때의 서울 풍경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광경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고가와 주변 건물 사이는 허공인데, 그 틈이 마치 바람이 졸졸졸 흘러가는 개천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고가의 양 옆만 허물고 중앙 부분을 그대로 남겨서, 좁고 긴 공중가로정원을 만들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바로 그 고가 위에서 떠올랐다.
남 지금 생각해보니, 서울역 고가보다 청계 고가가 하이라인과 주변 조건이 더 유사해 보인다. 서울역 고가는 도로 사이에서 섬처럼 고립된 감이 강한데, 청계 고가는 주변 건물과의 관계가 더 밀접해 보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때로부터 꼭 10년이 흐른 지금, 철거가 예정되었던 서울역 고가의 공원화 논의가 활발하다.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이 서울 시내의 주요 고가가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아현 고가, 약수 고가 등 셀 수 없을 정도다. 도시 미관을 해치고, 교통 흐름에 큰 도움이 되지 않거나, 유지관리비가 크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고가 도로를 하나의 근대 문화 유산으로 바라보는 관점도 필요해 보인다. 고가 도로가 건설되던 당시에는 분명 우리 사회가 고가를 필요로 했었다. 서울 시내의 허공을 가로지르고 세로지르던 고가 도로가, 최소한 특정 시기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공간적 켜로서는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이야기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지금 당장 필요한 것들로만 이루어진 도시가 아니라, 도시의 변천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요소들이 물리적으로도 남아 있는 도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물론 고가 도로가 근대 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허물어버린다면 논의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없애는 것은 언제든 할 수 있다. 한번 만들어진 것을 없애는 결정을 내릴 때, 보다 신중했으면 한다. 그렇다고 꼭 공원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공원화 할 것이냐 말 것이냐 보다 고가를 철거해야 하느냐 마느냐의 논의가 먼저 진중하게 검토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서울시의 방향이 이미 고가 도로 철거에서 공원화로 확정된 것으로 보여, 철거냐 아니냐의 논의가 무의미해진 것일 수도 있지만, 고가 도로와 같은 구조물도 근대 문화 유산으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더 논의가 이어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하이라인과의 관련성도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지양되어야 하지않을까 싶다. 서울에 어울리는, 서울만의 고가 활용법이 충분히 모색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서울만의 활용법을 제대로 구상하기 위해서는 보다 긴 시간이 필요하다. 우선은 고가 도로를 철거하지 말고 그대로 둔 상태에서 안전과 관련된 문제만 꼼꼼히 해결한 후, 상당 시간을 보행자와 자전거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다가, 긴 안목에서 최선의 활용 방안을 모색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갑작스레 던진 질문에, 그는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그러나 명확히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어떤 대목에서는 약간의 떨림이 느껴지기도 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는 2002년 5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만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열린 프로젝트 02 - 청계천’2이란 타이틀 아래 청계 고가와 그 아래 잠들어 있던 청계천을 살피고 그 쓰임을 고민했다.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그가 청계 고가와 청계천 일대를 찬찬히 바라보고 살펴보고 상상했던 것처럼, 우리는 충분한 시간을 갖고 서울역 고가를 바라보고 고민하고, 그 미래를 상상하고 있는 것일까? 이 글에서는 이러한 과정상의 문제점을 비롯, 서울역 고가 공원화를 둘러싼 몇 가지논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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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공중 산책로, 프롬나드 플랑테
파리의 프롬나드 플랑테Promenade Plantée는 여타 조경 작품들과는 다른 계기로 우리에게 알려졌다. 프롬나드 플랑테의 조성 과정에는 프랑스 현대 조경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된 화려한 국제공모전도, 거대한 규모와 난해한 설계 언어로 무장한 설계안도 없었다. 조성당시에는 라빌레트 공원Parc de La Villette이나 앙드레시트로엥 공원Parc André Citroën, 베르시 공원Parc de Bercy 같은 미테랑 대통령의 그랑 프로제Grands Projets에 가려 큰 이목을 끌지도 못했다. 조성된 지 1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영화 ‘비포 선셋Before Sunset’(2004) 덕분이었다. 9년 만에 재회한 연인이 서로의 기억을 더듬으며 감정을 재확인하는 장면의 배경이 되면서, 프롬나드 플랑테는 주민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즐기는 파리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도시재생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뉴욕의 하이라인이 유명해지면서 고가 폐선부지를 활용한 공원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프롬나드 플랑테와 그 아래의 비아뒥 데자르Viaduc des Arts도 함께 다시 주목받고 있다. 산업혁명의 유물이지만, 처치 곤란한 골칫거리가 되어 버린 도심 내 고가 폐선부지를 철거하지 않고, 그 위에 공원을 조성한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참신하고 획기적인 방안이었다.
근대 대도시와 철도
19세기 서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난 산업혁명과 도시화의 증거 중, 여전히 그 자취를 깊게 남기고 있는 것으로는 철도를 들 수 있다. 전에 없던 규모와 속도로 물류와 사람이 이동할 수 있는 철도는 진보의 상징이었다. 오스만화로 더 잘 알려진 제2 제정기 프랑스에서도 철도는 국가의 자부심이었고, 철도역은 도시를 대표하는 근대의 대성당이었다. 효율성이 우선시 되었기에, 도심 한복판을 철로가 가로지르는 것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1845년 ‘작은 벨트’라는 뜻의 도시철도Petite Ceinture가 최초로 파리에 등장했고, 도심 내외를 연결했다. 1859년 운행을 시작한 바스티유 선은 바스티유와 뱅센느 숲Bois de Vincennes 사이를 왕복했고, 파리 동쪽의 12구를 직선으로 관통했다. 1969년 RERRéseau Express Régional(지역고속전철망)이 도입되면서, 도시철도는 운행을 중단했다. 이후 남겨진 고가 폐선부지는 도시의 진보와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시기를 뒤로 한 채, 철거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도심 내 흉물로 전락했다. 이는 근대 산업 유산의 공통적인 문제였고, 이 난제에 대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방안은 미테랑 대통령 시기의 프랑스에서 등장했다.
프롬나드 플랑테는 독자적인 공원 조성 프로젝트가 아니라, 그랑 프로제에 포함된 바스티유 국립 오페라 극장의 형성에 수반된 주변 환경 정비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다. 새로운 오페라 극장을 위한 국제공모전의 지침에서 파리 시 당국은 광장까지 이어지는 연속된 산책로가 철로의 플랫폼과 동일한 높이로 조성되어야 함을 명시했다.1 1979년에 APURAtelier parisien d’urbanisme(파리 도시설계연구원)이 연구에 착수했고, 파리의회의 프로그램 승인(1987), DUPDéclaration d’utilité publique(공익사업인정)를 통한 고가 철로 인근 사업 구역 조성(1990)이 진행되었다. 이어 공모전에서 당선된 건축가 필리프 마티유Philippe Mathieux와 조경가 자크베르즐리Jacques Vergely의 안을 토대로 단계별로 공원이 조성되어 1993년에 완공되었다. 이와 별도로 진행된 하단부 개조 공사에서는 건축가 파트릭 베르제Patrick Berger의 안이 당선되었다. ‘예술의 고가 다리Viaduc des Art’라는 이름이 붙은 길이 약 1.5km의 이 구역은 프롬나드 플랑테가 시작되는 아브뉘 도메닐Avenue Daumesnil의 1번지에서 129번지에 해당하고, 고가 하단부의 아케이드를 상점가로 개조했다. 기존 철로의 아치 구조를 최대한 유지했고, 일관된 유리 진열창의 배열을 통해 연속성을 강조했다. 총 64개의 볼트 중 56개가 수공예 장인들의 아틀리에와 매장, 갤러리,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조성되었고, 나머지 8개는 통로 기능을 하여 도시 조직의 지속성을 재창조한다.
설계적 특징
프롬나드 플랑테는 파리 12구에 위치한 공원으로서, 길이 약 4.5km, 총 면적 약 65헥타르이며, 세계 최초로 9m 높이의 폐선부지를 공원으로 조성한 사례다. 하지만 이런 물리적 요건의 기술로는 프롬나드 플랑테라는 장소의 특징을 온전히 전달할 수 없다. 대상지는 과거 철로였던 곳이고, 거대한 식재나 수경 시설을 도입하기 어렵다. 철로 구조를 유지했기에 상단 플랫폼은 폭 9m 정도로 협소했고, 설계자들은 단순함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를 둘러싼 도성 윗길에 조성된 17세기의 공공 산책로에서 영감을 받은 설계는 중앙의 폭 2.5m의 보행로를 따라 대칭을 이루는 정형식 양식을 기본으로 한다. 하단 볼트의 기둥에 해당하는 부분마다 보리수나무를 식재하여 리듬감을 주었는데, 이곳의 토심을 2m 정도로 유지하는 것이 기술적 난제였다. 작은 테마 정원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여, 선형의 공간을 걷는 동안의 단조로움을 피하게 했다. 식물로 만들어진 정형식 문으로 구분된 각 정원은 토피어리나 화이트 가든, 트렐리스, 퍼골라, 파빌리온, 장미나 대나무 정원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었다.2
황주영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불문학과 영문학을 공부하고, 미술사학과에서 풍경화와 정원에 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19세기 후반 도시 공원의 모더니티에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술과 조경의 경계 사이를 넘나들며문화사적 관점에서 정원과 공원을 보는 일에 관심이 많고, 관련된 책몇 권을 함께 쓰고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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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라인 효과
하이라인의 전 구간이 완성되었다. 9월 21일 3구역의 개장으로 10여 년에 걸친 설계와 공사 과정은 작은 부분1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마무리되었고, 이 세월 동안 하이라인은 도시의 ‘명물’에서 더 나아가 뉴욕 시민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자산’으로 그 위상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도시사학자들은 뉴욕을 시험장testing ground이라고 말한다. 산업화, 탈산업화, 세계화의 중심으로서, 그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도시 문제를 앞서 경험하였고, 문제 해결을 위한 수많은 정책들을 쏟아내며 성공과 실패의 선례를 만들어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이라인은 가장 뉴욕적인 공원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물론 버려진 산업 기반 시설을 재활용하거나, 시민의 힘으로 공원을 만드는 아이디어가 뉴욕에서 처음 시도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원의 관리와 조성에 시민 단체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틈이 마련되고, 또한 이를 위한 비영리 단체가 일자리를 창출하는 경제 개체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공원이라는 매체로써 낙후된 도시를 재생시키고, 그곳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내는 보기 드문 현상은 뉴욕이라는 특수한 배경 하에서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역적 배경
하이라인이 속해 있는 웨스트 첼시West Chelsea와 미트패킹 지구Meatpacking District는 산업 철로였던 하이라인,2 화물 수송을 담당했던 첼시 항구Chelsea Piers 등이 복합적으로 연결된 공업 단지였다. 또한 19세기 철근 가공업을 시작으로 건설, 의복, 인쇄 등 여러 공업들이 거쳐 간 역사를 지닌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급격히 성장한 자동차 산업과 미국의 고속도로 건설 붐에 철도 산업은 사양길을 걷기 시작하였으며, 하이라인을 운행하던 기차는 건설 50여 년이 지난 1980년 잠정 휴업에 들어가게 된다.
하이라인의 운행 중단 후에도 근근이 공업 단지의 명맥을 이어가던 업종은 정육업과 자동차 수리업이었고, 그 외의 빈자리는 다양한 종류의 비즈니스와 사람들로 메워지게 된다. 현재는 아트 갤러리 산업과 고가의 패션 부티크, 레스토랑 등이 이 지역을 대변하고 있지만, 1980~90년대의 이곳은 외설물이나 성인 용품을 취급하는 상점부터 동성애자의 아지트가 되던 술집과 식당, 사진작가, 화가, 건축가, 각종 식료품 도매 업체까지 다양한 업종이 혼재되어 있는 곳이었다.3 공업 지역으로 용도가 지정되어 있고, 그에 맞는 건물 구조가 다른 용도로 이용되기 부적합했던 탓에, 이 지역은 주거단지나 상업 단지로 탈바꿈하기 어려웠다. 이런 모호한 설정 속에서 살아남거나 혹은 이를 찾아오는 산업의 집합이란 하나의 특색으로 정의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심각한 주택 문제에 늘 허덕이는 뉴욕 시에서 이 지역 또한 개발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특히 많은 주거 인구를 수용하고 있던 이스트 첼시East Chelsea4의 주택 가격 상승과, 인기 있는 주거 단지인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 허드슨 리버Hudson River 워터프런트와의 인접 등 여러 가지 위치적 조건들로, 이 지역은 이미 고밀도 주거 단지로 개발될 막연한 기대를 받고 있었으며,5 부동산업자들에게도 주목받고 있었다.
정치적 배경
하이라인 철거를 위한 공청회에서 하이라인 친구들Friends of the High Line의 설립자인 로버트 해먼드Roberts Hammond와 조슈아 데이비드Joshua David가 만난 것은 1999년이었다. 둘 다 평소 지역 사회의 대소사에 관심을 가지는 성격은 아니었다고 하나6 하이라인의 철거를 막는 데는 의기투합했다. 시민운동의 경험이 전무했던 그들이었으나, 그들의 행동은 매우 전략적이고 효과적이었다.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주민의 뜻을 전달하고, 실현 가능성있는 대안과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정책적인 도구7를 찾아보고, 또한 자신들의 의지에 반하는 시 결정의 허점8을 찾아내 당시 뉴욕 시장이었던 루돌프 줄리아니Rudolph Giuliani를 고소하는 대담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윤희연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조경 및 지역 계획학 석사를 마치고, WRT(Wallace Roberts & Todd)와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에서 실무 경력을 쌓았으며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에 조경사로 등록되어 있다.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 근무 중 하이라인 2구역의 리드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개념설계부터 실시 설계까지를 담당했다. 이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도시계획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조경학 전공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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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hua David
“ 지역과 주민이 가진 에너지를 발견하라”
지금의 하이라인은 시민 단체인 ‘하이라인 친구들’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지난 10월 15일 최이규 뉴욕지소장이하이라인 친구들의 공동창립자인 조슈아 데이비드를 만났다. 9월 21일 하이라인 3구역 개장 이후, 특히 많은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그였기에 어렵게 성사된 인터뷰였다. 조슈아는 1999년부터 시작된 하이라인과의 인연부터 지금까지 15년여의 경험을 들려주었는데, 하이라인의 재원 마련 과정, 디자인과 관리의 관계, 시 정부와의 파트너십 등의 경험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_ 편집자 주
하이라인의 발견
Q. 당신이 ‘하이라인 친구들Friends of the High Line’을 처음 시작했을 때, 그 의도는 우선 구조물에 대한 보존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도시의 과거에 대한 보존 운동에서 첫걸음은 무엇보다, 그 가치와 아름다움을 느끼는 과정일 것이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하이라인이 단순한 흉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반면, 당신은 왜 하이라인을 옹호하고 지키려 했나?
A. 하이라인의 철거 논의가 불거져 나왔을 때, 나는 이미 15년 정도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매일 하이라인을 지나다녔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하이라인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마 하이라인의 대부분이 건물 뒤에 가려있어,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거리의 이곳저곳에서 파편적으로 흉한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당시, 나는 잡지사에 기고하는 저술가였다. 때마침 내가 살던 동네에 관한 기사를 청탁받고, 첼시 지역의 동향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다. 소호에 있던 갤러리들이 첼시로 몰려드는 시기였고, 그 파급 효과에 관심이 있었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거리의 구석구석을 다 뒤지고 나니, 비로소 하이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22개 블록에 걸친 하이라인의 진면목과 규모를 어슴푸레 알아채기 시작한 거다. 그리고 이미 그 일부분이 철거되어 주택이나 오피스 건물로 바뀌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공동창립자인 로버트 해먼드Robert Hammond와 마찬가지로, 하이라인 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당시 조슈아는 반지하방에 살고 있었다. - 역주). 그것이 나와 하이라인의 개인적인 첫 만남이라고 할 수 있겠다.
Q. 하이라인의 건축적 가치, 즉 아르데코Art Deco 디테일이나 반복적인 볼트의 패턴 등, 구조물 자체의 미적인 부분이 당신의 보존 운동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가?
A. 당시 사람들이 하이라인을 보면서, 못생기고 흉물스럽고 당장 철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여기저기 녹이 슬어 있었고, 비둘기가 둥지를 틀었다. 그때만 해도 비교적 최근의 산업 시대 유산에 대한 건축계나 일반인들의 인식이 미미할때였다. 상식적인 시각에서 하이라인은 아름다운 건축과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주거 건물 같이 의도적으로 아름답게 설계한 건축물과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새로운 아름다움에 눈을 뜨는 데 때로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하이라인의 아름다움은 강고함으로 요약된다.
그렇다. 나는 하이라인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특히 아르데코 난간의 모습이 그랬다. 한편으로는 하이라인하부 공간 자체가 뿜어내는 공간적 개성에 매료됐다. 어두운 곳이었지만, 때로 서너 개 블록 길이로 뻗어있는 연속적인 기둥과 높이 들려진 천장은 마치 중세 시대 성당에서 느낄 수 있는 장엄함을 담고 있었다.
Q. 하이라인 운동에 필요한 모든 문서를 직접 작성한 것으로 아는데, 글 쓰는 작가, 기자로서의 경력이 하이라인 운동에 도움을 많이 준 것 같다.
A. 글의 중요성은 지나칠 수 없다. 어떤 조직을 시작하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아이디어를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단지 비전을 늘어놓기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란, 글을 쓰는 것뿐만 아니라,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 능숙하게 말하는 것, 여러 사람 앞에서 연설하는 능력 등을 모두 포함하는데, 프로젝트를 현실화시키는 데 필수적이다. 글쓰기에 익숙했던 나의 경력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재정적 자립
Q. 하이라인 운동의 주머니 사정이 열악했던 초기에, 가장 큰 투자는 경제적 타당성 분석economic feasibility study 보고서였다. 경제성 분석은 왜 중요했으며, 꼭 이루어져야 했는가?
A. 1999년 하이라인에 뛰어들었을 때, 뉴욕 시는 호황이었다. 그러나 9·11 사태 이후로 뉴욕 시의 자금줄은 사실상 말라버렸다. 정책적 투자는 매우 신중해 졌으며, 꼭 필요한 지출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한, 예산 편성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모든 분위기가 뉴욕의 경제적 기반을 회복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마이클 블룸버그Michael Bloomberg 시장이 취임하고,우리가 하이라인의 보존 필요성을 설득하려 하자, 당연히 답해야 할 질문이 ‘하이라인이 경제적으로 뉴욕시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였다. 첫 번째 면담에서 우리는 그에 대한 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뉴욕 시 핵심 관료들과 회의를 진행하면서 우리가 절실하게 배운 것은, 하이라인 보존에 뉴욕 시가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이라인의 건축적, 문화적 가치보다는 경제적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우리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모금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공적 자금의 지원은 너무나 불가피했고, 절실했다. 시민의 세금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하이라인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충분한 정당성을 분석해 숫자로 제시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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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Corner
“ 하이라인은 친밀함과 광대함이 합류하는 장소”
지난 10월 7일 뉴욕에서, 하이라인 디자인팀을 이끌고 있는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의 수장 제임스 코너를 인터뷰했다.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그였지만, 하이라인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확인하고는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그에게서 하이라인 전반의 디자인 철학부터 3구역의 특징, 하이라인 친구들 및디자이너들과의 협업 과정,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 전임시장에 대한 생각 등 다양하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있었다. _ 편집자 주
하이라인의 디자인 철학
Q. 이번에 개장한 3구역은 지난 1, 2구역과 비교할 때, 어떤 디자인 목표를 가지고 있나?
A. 하이라인의 성공에 크게 기여한 요인을 꼽으라면, 무엇보다 하이라인 자체의 본래적 성질에 대한 사려 깊은 존중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동안 버려져 황폐화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은 하이라인을 흉측하고 어두운 곳이라 생각해, 어떻게든 철거하려 했다. 하지만 우리 생각엔, 구조물 자체를 깨끗이 단장하고 밝은 공간으로 바꾸어 새로운 식재와 보행로 등의 시설을 도입하기만 한다면, 하이라인의 특징이 정반대로 큰 매력이 될 것이라 여겼다. 그러므로 전체를 아우르는 디자인 철학이란, 상황을 매우 세심하게 관찰하고, 하이라인 본래의 장소적 진정성을 회복하는 것, 그리고 이두 가지를 더욱 증폭해 드러내는 것이었다. 포장 계획은 그러한 방향성을 나타내는 대표적 사례이고, 매우 복잡하고 정교하게 야생화와 다년생식물이 역동적인 퍼포먼스를 펼치는 식재 계획 또한 그의 일환이다.
1구역은 미트패킹 지구Meatpacking District를 구불구불하게 흘러간다. 낡은 창고와 투박한 공장 건물들이 지배적인 경관을 형성하고 있으며, 하이라인은 매우 거칠고 도시적이고 산업적인 특징을 보인다. 규모와 디테일, 그리고 하나의 공간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집중적인 관찰의 결과가 현재 보는 1구역이다. 남쪽 끝단인 갠스부르트 스트리트Gansevoort Street의 진입부에 큰 규모의 숲을 두고, 일련의 연속적인 수목터널형 보행로가 이어지며, 강을 향한 일광
욕 데크가 나타나고, 10번가10th Avenue와 만나는 곳에는 작은 광장을 배치했다. 이러한 공간은 걸으면서 느낄 수 있는 연속된 사건episode이며, 특정한 환경condition과, 특정한 블록block, 특정한 시점moment을 십분 활용한 결과물이다.
2구역은 1구역과 매우 다른 성격을 보이는데, 갑자기 폭이 좁아지면서 주택 위주의 건물들이 구조물에 가까이 접촉하며, 직선적인 형태를 보인다. 전형적인 첼시의 경관이라 할 수 있는데, 벽돌 벽과 로프트 건물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규모와 촉감은 1구역과는 판이하며, 각 공간은 좀 더 단순하며 부드럽다. 2구역은 잡목숲thicket으로부터 시작해서, 탁 트인 잔디밭으로 연결되는데, 여기는 높은 건물이 없어 언제나 햇빛이 밝게 비치는 곳이며, 곧 건물들이 높아지면서 숲 위를 지나는 공중 보행로catwalk가 나타난 후에는 초지로 이어진다. 비교적 단순한 공간이지만, 평화로움을 만끽할 수 있고, 주변 환경에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곳이다.
3구역에서도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다. 남북으로 달리던 하이라인은 90도로 꺾여 동서방향으로 놓여, 허드슨 리버를 향해 나아간다. 구조물은 30번가30th Street와 평행되어, 한쪽에는 거리가, 다른 한쪽에는 철도차량 부지Rail Yards 위에 미래 도시가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진행 방향의 변경, 거리와 인접한 환경, 새로운 개발이라는 세 가지 요인이 3구역을 다르게 만드는 요인이다. 포장과 휴게 시설, 식재는 동일하다. 그러나 이용자가 달라진 공간적 스케일을 느낄 수 있는 장치들이 마련되었다. 강에 근접할수록 광대하게 넓게 열린 공간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에, 디자인 또한 여기에 화답한다.
Q. 지금에 와서 돌아볼 때, 공모전에서 제안한 안과 달라진 점을 들자면?
A. 당선안에는 크게 두 가지 주제가 있었다. 첫째, 하이라인을 매우 통일되고unified 일관된consistent 설계 언어로 디자인 하는 것이다. 즉 포장, 야생식물 식재, 시설, 조명, 난간 등을 전 구간에서 동일하게 적용했다. 우리는 하이라인을 각 구역별로 나누어 각기 다른 모습을 가진 곳으로 만드는 데 반대했다. 그런 점에서 하이라인 디자인은 애초 철로를 설계했던 엔지니어의 방식과 동일하다. 널plank을 까는 시스템을 일관되게 적용한 것도 그렇다. 각 블록별로 디자인을 고민할 것이 아니라, 널빤지라는 언어를 전체에 일관되게 적용하는 것이 중요했다. 또 하나는, 하이라인을 따라 벌어지는 특별한 장소places와 특별한 상황incidents을고안한 것이다. 공모전에서는 공중 습지와 공중 무대등과 같은 드라마틱한 디자인 아이디어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아무 것도 실현되지 못했다. 짐작하겠지만, 예산 문제와 장기적인 관리 문제가 그 이유다. 실용성, 경제성 등의 기준에 의해 제외되었지만, 10번가 광장10th Avenue Square과 같이 구조물을 파고든 테라스와 거리를 내려다보는 큰 창이 있는 곳으로 변형되었으므로 나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중 습지는 일광욕 데크 주변으로 얕은 물이 흐르는 수 공간으로 수정되었다. 공모전에서 제시된 철학과 이상, 디자인의 언어는 대부분 큰 역할을 했다. 투시도vignette대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그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실용성을 가미해 조성했다.
공모전에서는 디자인 의도를 시각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후 이러한 의도를 실현하기 위한 기술적 방법을 개발하는 데 약 2년이라는 무척 긴 시간을 보냈다. 널 시스템을 개발하여 조립하고, 지하부 설계, 토양의 개발, 식재의 세부사항, 난간과 조명등을 기술적으로 고민하는 데 투자했다.
Q. 콘크리트 널planking 시스템의 디자인에 영향을 준 것들은?
A. 우리는 보행로path라는 개념을 재정의하고 싶었다. 철로와 보행로, 식재 구역과 보행로가 따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합된 표면 시스템single surface system을 만들고자 했다. 이 표면은 때에 따라식물이 자라는 곳이 되기도 하고, 좀 더 경화되면 걸을 수도 있는 점진적graded이고 경계가 불분명한 상태를 추구했다. 그리고 그것은 하이라인 자체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원래의 하이라인은 자갈 바닥ballast과 철로만으로 이루어졌지만, 점차 식물이 그곳에 자리를 틀기 시작했다. 자갈 위를 걸을 수도 있지만, 그 자체가 식물이 자라는 토대가 되는 하나의 표면이다. 때로는 좀 더 통행로에 가깝고, 때로는 좀 더 화단에 가까울 따름이다. 정원과 보행로가 나뉜 딱 부러진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이라인에서 식물이 콘크리트 구조물의 틈 사이를 비집고 자라는 모습에 경탄했다. 널 시스템은 그러한 관찰을 추상적으로 해석해낸 결과다. 셋째, 널 시스템은 엔지니어의 사고방식에서 영감을 받았다. 철도공학자는 널 방식을 개발함으로써, 철로라는 상당히 까다로운 문제를 매우 체계적으로 해결했다. 효율적으로 건설이 가능하고, 교체나 수정, 추가가 용이하다. 쉽게 경로를 바꿀 수도 있어, 어떤 공간을 에둘러 갈 수 있는 유연한 시스템이다. 마지막으로, 널 시스템은 시각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줄 수있다. 그 외관은 호기심을 자극하고 기억을 불러일으키며 공간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데 독자적인 역할을 한다.
도시와 하이라인
Q. 하이라인 주변의 건물들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개장 초기에 볼 수 있었던, 녹슨 건물의 입면이나, 낡은 벽돌 벽 등은 사라지고, 반짝이는 유리와 금속 소재의 고층 건물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본래 하이라인의 풍경과 분위기에 큰 영향을 미쳤던 주변 건축물 경관이 변하는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A. 하이라인의 원천적 강렬함은 그것이 주변 환경에 지극히 무심하다는 것이다. 철로라는 구조물은 주위의 어떠한 요소에도 존중을 표시하지 않고, 무시할 뿐이다. 이는 엔지니어의 논리이며, 순수하게 그 자체로 자족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하이라인을 따라 늘어선 건물들 또한 철저하게 하이라인을 외면했다. 철로 쪽으로는 그저 빈 벽을 내밀었을 뿐이다. 이것은 콜라주collage와 같다. 하나의 시스템이 또 하나의 시스템을 찢고 들어와 이질적인 성질을 그대로 보존한다. 하이라인을 디자인함에 있어서, 우리는 이러한 장소의 특질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었다. 각 블록의 환경에 일일이 대응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저 하이라인 자체가 햇빛과 그늘, 습도와 건조함, 전망과 비스타 등에 반응하는 변화에 따라 각 공간을 계획했다. 결코, 하이라인위에 주변 도시 환경을 반영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하이라인의 오래된 난간을 철저히 고수하려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다. 철로에 부속된 난간을 자르거나 변형해서 인접 건물로의 접근로를 구축하는 것을 반대했다. 한두 군데, 계단이나 엘리베이터, 화장실을 연결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난간을 철거한 곳이 있긴 하지만, 우리의 기본적인 방침은 하이라인과 주변의 거리를 유지하고 격리시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