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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텍스트로 만나는 조경 활자산책
    1999년부터니까, 15년째 종이책을 만들고 있다. 9년은 잡지와 단행본을 함께 만들었고, 6년은 단행본에만 집중했다. 그 기간 동안 만든 단행본이 대략 80권 남짓이니, 한 해에 5권쯤 편집한 셈이다. 단행본 에디터로서는 적은 양이지만, 절반 이상의 시간을 잡지에 투자했으니 게으름을 피운 수준은 아니다. 에디터로 참여한 첫 번째 단행본은 1999년 8월에 출간된 『현대 한국 조경 우수 작품집』이다. 선배들이 주로 편집했고, 나는 거드는 수준이었다. 양장 제본된 406쪽 분량의 제법 두꺼운 작품집이었는데, 『환경과조경』에 1985년 9월부터 1999년 6월까지 실린 근작, 수상작 중에서 대표작을 골라 내용을 꾸렸다. 특이했던 점은 책에 실린 주요 이미지와 『환경과조경』 총 목차, 조경 관련 분야 명부, 조경 제품 사양 등이 실려 있는 CD를 부록으로 제작한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환경과조경』에 15년동안 실렸던 주요 작품들을, 이 책을 편집하면서 압축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었기 때문에 큰 공부가 되었다. 아, 그리고 잊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원래 이 책은 양장(하드커버)이 아니라 무선 제본(소프트커버)을 하려고 했었는데, 인쇄소의 실수로 표지에 문제가 생겨, 인쇄 및 제본이 모두 끝난 후 원래 책 크기에서 1cm 정도를 잘라내고 양장으로 다시 제작했다. 추가 비용을 인쇄소에서 부담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손해가 없었지만, 당시의 아찔했던 기억은 지금도 후반 작업에 신중을 기하게 하는 좋은 약이 되었다. 그 책을 기점으로 어쩌다가 단행본 담당자가 되어 적지 않은 조경 책을 편집했다. 출판 의뢰가 들어온 경우가 대다수였지만, 연차가 쌓인 후에는 자체 기획도 조금씩 시도했다. 그러면서 자연히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조경 관련 도서를 뒤적이게 되는 경우도 늘어났다. 이 글은 그렇게 만들고 접한 몇 권의 책 이야기다. 초기에는 『한국 조경 설계경기 작품집』(한국조경사회 편), 『골프코스 설계 및 시공』(마이클 허잔 저, 황원 역) 등 주로 출판 의뢰가 들어온 책들을 편집했다. 차례부터 제목까지 전적으로 필자의 의견에 의지했다. 출판기획서도, 에디터의 역할도 머릿속에 없을 때였다. 출력소에서 필름 교정을 볼 때마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제발 큰 잘못은 없기를’ 따위의 주문을 몇 번이나 되뇌고, 불안한 마음에 교정 오케이를 쉽게 내지 못했다. 이때 펴낸 책 중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신 실내조경학』(이종석·방광자·김순자 저)이다. 올해 초에 여섯 번째 인쇄를 할 정도로, 꾸준히 팔리고 있는 책 중의 하나다. ‘전문 서적은 역시 교재가 갑이다’라는 깨달음(?)을 준 책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기억에 남는 또 다른 책은 『건강을 부르는 웰빙 가든』이다. 다른 기자가 기획하고 필자도 섭외했는데, 당시 막 뜨기 시작한 ‘웰빙’을 ‘정원’과 접목시켜 개정판까지 펴냈다. 『주택 정원』을 제외하고 처음 펴낸 정원 책으로, 정원 책의 가능성을 어렴풋이나마 맛보게 해주었다. 필자인 이성현 대표는 이후 『정원사용설명서』를 함께 펴냈고, 지금도 올 하반기 출간을 목표로 『건축가의 정원, 정원사의 건축』이란 타이틀의 책을 함께 작업 중이다. 또 한 권을 꼽자면, 『재료의 미학』이 떠오른다. 필자인 황용득 대표가 소장하고 있던 어마어마한 슬라이드 필름도 인상적이었지만, 편집 과정에서 들었던 재료의 물성, 단행본을 통한 자료공유의 필요성, 답사 뒷이야기에 대한 잔상이 꽤 오래남았다(이 책은 후에 『돌, 철 그리고 나무』란 타이틀로 개정증보판이 출간되었다). 에디터로서 각성을 하게 된 책 중의 하나는 『현대 조경 설계의 이론과 쟁점』(배정한 저)이다. 입사 이후 맡았던 연재 원고 중에서 피드백이 가장 많았던 ‘동시대 조경 이론과 설계의 지형’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낸 것이어서 밖에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작업이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우선 담당자였던 내가 단행본을 출간하자는 필자의 제의에 난색을 표했다. 연재가 종료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단행본으로 묶어내면 아무래도 판매가 저조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의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올해로 출간 10주년을 맞이한 이 책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호응을 얻고 있다(현재는 절판 상태인데, 개정판을 낼 계획이다). 대학 시절 읽었던 수 많은 소설집이 문학 계간지에 수록되었던 작품을 묶어서 펴낸 것이었음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당시에 『현대 조경 설계의 이론과 쟁점』에는 왜 그리 박한 평가를 했는지, 지금도 물음표로 남아 있다. 이 책을 기점으로, 잡지 연재 후에 단행본을 묶어내는 방식의 기획이 조금씩 늘어났다. 그리고 이 책을 편집하면서 본문 표기 원칙, 주석 표기 원칙 등 몇 가지 기준을 뚜렷하게 세울 수 있었고, 디자인과 판형에 대한 감도 조금씩 잡을 수 있었다(그렇다고 크게 나아지진 않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활자산책
    디자이너, 저자가 되다 편집부 앞으로 온 이메일 한 통. 조경가 L이 평소에 써두었던 원고를 보내며 출판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조경 답사를 다니며 기록해둔 메모 성격의 원고로, 조경설계에 관한 전문가적 의견이 담겨 있었다. 메일을 읽고 있자니, 불황의 한복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출판 시장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졌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아니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에, 독자층이 옅은 전문 도서는 더더욱 출간에 이르기 어렵다. L에게 바로 답장을 하지 못하고 고민이 이어졌다. 학자나 작가, 혹은 기자가 아니라면 대개 글쓰기는 일상적인 일이 아니다. 조경 동네를 둘러보아도 책을 쓰는 디자이너를 찾기 어렵다. 디자이너가 작품집이 아닌 책을 쓰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과연 디자이너에게 책을 쓰는 일이 필요하긴 한 걸까. 디자이너는 누구를 향해, 무엇을 위해 글을 쓰려고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디자이너의 책을 읽어줄 독자는 어떤 사람들 일까. 예비 저자들은 대개 그들의 첫 책의 독자로 실무자, 인접 분야 전문가, 학생 그리고 관심 있는 일반인들까지를 막연하게 함께 꼽곤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누구를 향해 글을 쓰느냐에 따라 문체나 내용이 달라져야 할 것이다. 건축 관련 글과 땅콩집으로 유명한 구본준 기자(한겨레)는 그의 저서 『한국의 글쟁이들』(2008)에서 1990년대 후반부터 부상한, 글쓰기가 삶의 중심인 ‘글쟁이’의 특징에 대해 언급한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 글쟁이들이 “전문성과 대중성의 중간, 지식을 생산하는 학문의 최전선과 독서 대중 사이에 존재하며 양쪽을 이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학자가 아니더라도 준전문가로서 해당 분야의 최신 지식을 쉽게 설명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 이런 글쟁이들은 분야의 대중화를 선도한다. 극도로 전문적인 내용을 소수의 전문가들과만 공유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귀 기울여볼 만한 대목이다. 이러한 글쟁이들은 “‘전달력’을 중시하며 독자지향적인 기획 마인드를 추구한다.” 도시나 건축 동네로 고개를 돌려보면 책을 펴내는 디자이너들이 좀 더 많다. 지난 10~20년간 전문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난 책들 그리고 전문가의 울타리를 넘어 대중의 관심을 받은 책들이 있다. 그들은 왜, 누구를 향해 책을 쓰고, 그 전략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도시·건축 분야의 책들을 되짚어 보면서 김진애를 빼놓을 수 없다. 건축과 도시계획을 전공한 그녀는 서울포럼을 운영하면서 스스로 꾸준히 글을 쓰기도 하고, 동료 건축가들의 책을 기획하면서 책 쓰기를 독려하기도 했다. 그런 김진애가 1999~2001년 ‘자라기 시리즈’(『매일매일 자라기』, 『프로로 자라기』, 『사람으로 자라기』)를 냈다. 그녀가 서문에서 소상히 밝히고 있듯이 이 시리즈는 건축 입문을 고민하는 사람, 관련 대학생, 젊은 실무자들, 건축팬을 대상으로 한 책으로 “학교에서 잘 다루지 않는, 실무세계에서도 서로 알겠거니 하고 말하지 않는 내용”을 담은 것이다. 일종의 도시건축 분야의 자기계발서 같은 책이다. (『환경과조경』 315호 특집의 제목인 ‘조경가로 자라기’는 이 시리즈에서 빌려온 것이다.) ‘탐험하기’, ‘만들기’, ‘커뮤니케이션 기’, ‘쌓아가기’, ‘감지하기’ 등과 같이프로가 되기 위한 구체적 안내가 담겨있다. 김진애 특유의 시원시원하고 거침없는 문체와 그 시시콜콜함이 매력이다. 이 시리즈가 출간된 지 이미 15년이 지나 사회적 상황과 전문 분야의 지형도 여러모로 변했고 책의 편집도 요즘 취향과는 다르지만, “배우는 재주도 배워야 한다”는 그녀의 말처럼 직능에 대한 이해를 돕는 책의 존재가 부럽게 느껴진다. 대중을 위한 건축 입문서로는 단연 서현의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1998)를 꼽을 수 있다. 서현은 “건축가가 건물을 만드는 과정을 짚어”보며 건축가들은 어떤 관점에서 건물을 바라보는지, 여기에는 어떤고려 요소가 있는지 등을 대중의 눈높이에서 설명하고있다. 이 책의 후기에서 서현은 “대상의 감상과 판단은 스스로 하여야 한다. 그 판단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받침이 지루하게 이 책에서 서술된 것이다”라고 썼다. 이러한 생각은 전문가를 위해 쓴 책에서도 이어진다. 『건축을 묻다』(2009)에서 그는 ‘건축은 무엇인가’ 그리고 ‘건축은 예술인가’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찾기 위해 예술, 기술, 기능, 공간, 사회, 역사, 도시와 같은 연관 개념과의 관계성을 파악한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직접 확인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건축은 직접 찾아가서 보고 책은 원본을 찾아보고자 노력했다고 밝혀두고 있다. 책을 쓰는 과정이 나만의 답을 찾기 위한 치열한 여정이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건축가에게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필요한, 그리하여 흔들리지 않는 가치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거의 모든 것의 역사 활자산책
    “독서도 다른 취미와 마찬가지여서, 우리가 애정을 기울여 몰두할수록 점점 더 깊어지고 오래간다.”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의 말이다. 깊이 공감한다. 독서가 종종 고리타분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경우가 있지만 나는 이만큼 흥미로운 행위가 또 있을까 싶다. 문자가 발명된 이후로 글은 계속해서 쓰여졌고, 책 또한 만들어졌다. 현재 전 세계에 출판된 책의 수는 헤아릴 수 없으며, 그 한 권 한 권의 가치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 역시 무궁무진하다. 심지어 하드커버를 두른 네모난 모양의 종이뭉치는 아름답기까지 하다. 다시 생각해보자. 독서보다 건전하고 유익하며 안전한(?) 행위가 또 있을까? 물론 찾아보면 몇 개의 리스트를 만들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우리는 누구나 독서의 장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책 읽기는 점점 변방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의 감각을 새로운 방식으로 만족시키는 뉴 미디어가 속속 등장하면서 어느새 책은 프랜차이즈 카페의 장식품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어야 하는가’ 나의 대답은 ‘예스’다. 사실 이러한 질문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니, 참 억지스럽지 않은가. 이 짤막한 글은 앞의 질문을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가’로 바꿔 읽으려는 나의 노력이다. 우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이상한 것이 아니라, 정말 아주 이상하다 - 빌 브라이슨,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어릴 적 나의 꿈은 화가였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찾아간, 동네의 작은 미술학원 선생님이 예뻐서는 아니었다(절대 아니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하얀 종이 위에 점을 찍고, 선을 그려나가는 과정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이유로 나의 꿈은 교사에서 과학자로, 다시 산업디자이너로 의사로 작가로 교수로 기자로 수십 번도 더 바뀌었다. 하지만 이렇게 장래 희망이 바뀌는 동안에도 늘 함께한 것은 책이었다. 하지만 위인전과 같은 책에는 쉽게 정을 붙이지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 책장에 꽂혀있던 위인전 전집은 그 위에 덕지덕지 쌓인 먼지만큼이나 싫었다. 미래에 대한 나의 꿈이 많이 바뀐 이유는 이것저것 관심이 많았을 뿐더러 궁금증이 많았기 때문인데, 그 나이에 본받을 위인들에 대한 딱딱한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은 고문이었다. 나의 지식에 대한 갈증에 ‘현존하는 가장 유머러스한작가’라는 평을 받는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는 단비와 같은 책이었다. 많은 것을 알고는 싶어했지만, 그 수고를 생각하고 포기하곤 했던 내게 재미있는 과학 교양서라니, 거기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라는 강렬한 제목에서 나를 끌어당기는 무엇인가를 느꼈다. 기자 출신의 여행 작가인 빌브라이슨은 스스로 궁금하게 생각했던 과학에 관한 여러 가지 궁금증을 3년에 걸쳐 파헤쳤다. 우주, 지구, 입자, 생물과 미생물, 인류, 생명, 화학, 기후 등등 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가 망라되어 있으며 태초부터 지금까지 만물의 역사를 쉬운 말로 써놓았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저자가 깔끔한 문장으로 풀어쓴 자연과학의 원리와 비밀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를 덮게 된다. 중학교 시절에 이 책을 접하고, 책이라는 매체가 가진 매력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후 나의 독서는 작가의 필력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많이 바뀌었지만, 당시의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 에드워드 윌슨, 『통섭』 여기저기서 ‘통섭’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공모전에서도 이 단어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통섭은 과연 무슨 뜻일까. 미국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사용한 ‘컨실리어스Consilience’의 번역어로, ‘서로 다른 것을 한데 묶어 새로운 것을 잡는다’는 의미를 품고 있으며, 통상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통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범학문적 연구를 말한다. 융합, 퓨전과 같은 개념이 유행하고 있는 요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용어다. 지금까지 인간은 세상을 인식함에 있어서 거대한 세상을 여러 분과로 나누는 환원주의還元主義 방식을 채택했다. 환원주의 방식의 폐단은 각 분과 간의 우열이 생기는 것이다. 이때 효과적인 방법이 환원주의로 쪼개진 세상을 다시 하나로 모으는 것, 즉 통섭이다. 통섭은 지식의 경계를 무조건적으로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들이 서로의 이해를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데에 통섭의 매력이 있다. 저자는 서구 학문의 큰 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다양한 분야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간과했던 지식통합의 가능성을 찾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정보의 바다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통합된 지혜라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
  • 한국의 나무 특강 활자산책
    식물을 공부하려고 책을 찾는 사람은 대개 도감을 먼저 고른다. 그리고는 각기 다른 특징으로 무장한 색다른 형식의 도감을 추가로 구매한다. 조경학과에 입학한 순간부터 식물 공부에는 정도가 없고, 직접 보는 것이 최선이며, 도감은 필수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한국 조경 수목 핸드북』(김용식 저) 같은 책을 들고 수목원과 식물원, 대학 교정을 거닐었지만 암만 봐도 그놈이 그놈 같았다. 도감과 관찰은 기본이고, 식물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식물과 먼저 친해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은 건 불과 얼마 전이다. 간단하게 유래만 살펴보는 것보다 관련된 이야기 속에서 식물을 이해하는 것이 도감을 몇 번 들여다보는 것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일까? 식물에 해박한 전문가 중에는 이야기꾼이 많다. 수목원에서 일하는 가드너, 임학과나 원예학과 교수, 나무병원장, 나무 칼럼니스트 등을 만나보았는데, 하나 같이 글을 잘 쓰고 맛깔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물론 내가 만났던 이들이 예외적인 경우일 수도 있지만, 그들은 대개 신화나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다. 심지어 “이야기 속에서 식물의 흔적을 찾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고 약속한 듯 입을 모으기도 했다. 『고규홍의 한국의 나무 특강』(고규홍 저)은 바로 그런 식물 이야기가 빼곡히 담겨 있는 책이다. 먼저 이 책에 소개된 안동 용계리 은행나무 이야기를 좀 들여다보자. 안동 용계리에는 약 700살쯤 먹은 은행나무가 있다. 한국에 살아있는 은행나무 가운데 가슴높이 둘레가 가장 큰 나무로 알려져 있다. 많은 전설이 얽혀 있는 이 나무는 마을의 당산나무로 모셔지며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천연기념물 175호로 지정되어 국가로부터 보호받고 있었다. 그런데 1987년 댐 건설로 마을이 물속에 잠길 처지에 처하면서 위기를 겪게 되었다. 당시 공사를 주관한 한국수자원공사의 이상희 사장이 현장을 방문했는데, 이 나무를 보고는 공사 이후에도 나무가 살 수 있는 방도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여러 전문가를 통해 예산만 충분하다면 이식을 통해 나무를 살릴 수 있다는 결론을 얻은 그는 청와대에 협조를 요청했다. 그해 8월 은행나무 보존을 위한 조례가 제정 공포되었고 보존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때, 나무 이식 공사에서 최고 전문가로 인정받는 고 이철호 회장(대지개발)이 나섰다. 이 회장은 나무를 들어올리기 위해 H빔 공법을 이용했다. 나무가 워낙 크고 무게가 680톤이나 돼 나무를 조금씩 들어 올리면서 빈틈에 흙을 메우는 방식으로 천천히 공사를 진행했다. 원래 있던 자리보다 15m 높이 올라가게 되었는데, 임하댐이 완공된 뒤의 만수위보다 높아졌다. 공사는 총 4년이 걸렸다. 다시 1년을 관찰하며 점검한 결과 제대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공사에는 23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었는데, 나무 하나를 살리기 위해 시행된 공사로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대형 공사였다. 책에는 나무에 얽힌 전설과 이후 이야기가 더 담겨있지만, 여기서는 일부만 요약했다. 이처럼 『고규홍의 한국의 나무 특강』은 나무에 얽힌 우리 삶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나무의 생리와 이용, 재배 및 관리법에 대한 팁도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다. 또 하나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한 페이지에 걸쳐 은행나무가 침엽수인 이유를설명하는 대목이다. 침엽수와 활엽수를 구분하는 방법은 잎이 가늘고 뾰족한지, 잎이 넓고 둥근 면이 있는지를 보면 된다. 은행나무는 후자에 해당하는데 침엽수로 구분된다. 구분법을 배운 직후에는 도감이 잘못되었는지 의심하는 일도 있다. 하지만 이론상 침엽수가 맞다. 이 책은 그 이유를 알기 쉽게 묘사해 놓았다. 저자가 주목하는 건 나무를 둘러싼 이야기지만 나무 자체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점도 큰 매력이다.
  • 생각의 탄생 활자산책
    괜히 찔린다. 나는 이런 글을 쓸 만큼의 독서량을 갖고 있지 않다. 대학교 2~3학년 때였나, 한창 ‘인문학 읽기’가 유행한 적이 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디자인, 상상력, 기능과 형태, 예쁘거나 좋아 보이는 것에 대한 탐구욕이 강했기에 시류를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상당히 편식된 독서 리스트를 갖고 있다. 이번 특집을 준비하면서도 ‘책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과연 재미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태국에서 조경학과를 다닌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우린 1학년 때는 조경에 대해 배우지 않고 디자인 원론을 공부했어.” 거기에 착안해서 나의 책 읽기 경험의 공유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해보려고 한다. 이 글은 나만의 ‘디자인 상상 수업’을 짧은 픽션fiction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시나리오는 이렇다. 2014년 9월 서울 어느 대학교 조경학과에 디자인 일반론 수업이 새로 개설되었는데, 여기서 행정상 오류가 발생한다. 교수가 잘못 배정된 것이다. 디자인과 전혀 관련 없는 철학과 교수다. 하지만 공립학교다 보니 그대로 한 학기 지낼 수밖에 없는 상황. 수강 취소를 고려하던 중 흥미로운 소식이 들려온다. 수업 교재로 쓸 만한 좋은 책을 추천하면 추가점수를 준단다. 과목의 제목은 ’상상력과 디자인’이다. 수업 형태는 이론과 실습으로 3학점이다. 물론 책으로 하는 상상 속의 수업이다. 1. 생각의 탄생 개강 2주차. 교수님도 아직까지 적잖이 당황하신 듯하다. 하지만, 첫 수업의 책은 직접 정해오셨다. 제목은 『생각의 탄생』.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지인이 추천해준 책이라는데. 막상 처음 책을 펼쳤을 때는 그저 일반적인 자기계발서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제시한 수많은 천재들의 창의적으로 사고하는 13가지의 방법론적 접근들은 ‘그들이 실제로 했던 방법을 따라하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식이 아니라 ‘창의적 사고를 하기 위해 생각의 구조를 재편하는 방법’을 얘기하고 있다고 한다. 그때 누군가 왜 그 책을 들고 오셨냐는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 대부분이, 10여 년간 받아먹기만 하는 주입식 교육의 산물이니까 그렇지, 너희가 생각하는 법을 안다고 보니”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창조적인 활동과는 지극히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아온 신입생들에게 하는 말이려니 싶었지만, 나 역시 뜨끔하긴 하다. 어쨌거나 책을 훑어본다. 생각 도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관찰’, ‘형상화’, ‘추상화’, ‘차원적 사고’, ‘모형 만들기’ 등의 딸림 제목들을 보니 ‘상상력’과 ‘디자인’ 두 단어 모두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렇게 이번 가을은 다르게 사고하는 방법, 생각하는 방법을 익힌다. 2.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이젠 긴 바지가 덥지 않다. 과목명에 상상력이 들어가서 일까? 아니면, 그래도 들어본 ‘진중권’의 책이라서 일까? 어쨌거나, 누군가가 진중권의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을 추천한 듯하다. 다행히 읽어본 책이다. 수업의 일반적인 개요를 논하기에는 충분한 책이라는생각이 든다. 내가 적은 추천 리스트에도 들어있었는데, 미리 말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 나는 이 책을 왜 기억하고 있는 걸까? 우선 상상력이란 단어를 쓰지 않는다는 점이 맘에 들었다. 제목과 서론에서는 언급했지만, 이 말랑말랑 한 책은 우리에게 상상력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 점이 좋았다. 한때 유행했던, ‘~미쳐라’ 시리즈를 보면, 자꾸 미치라는 소리 때문에 미칠 뻔했다. 다시 책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보면, 주로 미학에 관련된 내용만으로 끌고 가며 나도 모르게 상상하게 만들었다. 가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하지만, 패션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저자의 취향도 묻어나는 책이다. 이 책은 보기에 따라서는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보통의 책과는 다르게 돌려보고 눕혀보고 숨어있는 그림을 찾아내야 하는 등, 은근 노동 아닌 노동을 시킨다. 고정되어 있는 출판물을 가지고 새로운 시각을 요구한다. 어쩌면 그 자체가 상상력인 것 같다. ‘새로운 시각의 경험’, 그것만으로 본전은 뽑은 책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도중, 이번 수업의 끝을 알리는 듯한 단어가 교수님 입에서 나온다. ‘디자인.’ 내가 이걸 알아챈 이유는,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에서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마지막 두 페이지에서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권의 책으로, 사고하는 방법과 미학·예술 분야에서 상상력 넘치는 예시들을 통해, 과목에 대한 간은 보았다.
    • 양다빈
  • 조화로운 삶 활자산책
    몇 년 전 아버지께서 시골에 집을 짓고 전원생활을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을 때 엄청난 불안감이 엄습했다. 멀쩡히 다니시던 직장을 뒤로 하고 전원생활이라니! 이전부터 나무나 꽃을 키우시는 일을 좋아하셨고 생태나 환경 문제에도 관심이 많으셨던 아버지께서는 시골에 내려가신 뒤로 아예 ‘생태주의자’를 자처하셨다. 적당히 제초제를 치라고 어머니와 내가 그렇게 말씀을드려도, 아버지는 허리가 꼬부라지실 때까지 손으로 잡초를 뽑으셨다. 아버지가 손수 가꾼 정원을 내게 처음으로 보여주셨을 때, (아버지께 미안하지만) 나는 그것이 정원이 아니라 정글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더할 나위없이 친환경적이었지만 말이다. 어머니는 이 환경적으로는 완벽한 정글 같은 정원을 어떻게 하면 번듯하게 바꿀 수 있을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신다.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저녁 밥상에 내놓은 채소도 사실은 실망스러웠다. 아버지의 정원에 사는 온갖 풀벌레들이 선심쓰듯 남겨놓은 채소에 감지덕지하며 부족한 듯 배를 채워야 했다. 우리 가족이 전원으로 이사한 소식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드디어 ‘웰빙’을 실천하게 되었냐며 부러워했다. 하지만 말이 좋아 ‘웰빙Well-being’이지 사실은 온갖 불편함과 고된 노동을 감수해야 하는 삶이다. 최근 ‘에코라이프스타일’로 유명한 모 연예인이 블로그에 ‘모순덩어리 삶’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관심을 받았다. 그는 ‘개는 사랑하지만 가죽 구두를 신’으며 ‘숲을 사랑 하지만 집을 짓는다’고 했다. ‘웰빙’, ‘에코 라이프스타일’ 등 최근 유행하고 있는 생활양식은 사실 그리 낭만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짚신과 가죽 구두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는 삶이다. 그런데 여기 이 모순덩어리 삶에 대해 ‘조화로운 삶’ 이라 부르는 작가들이 있다. 그들에게 ‘조화로운 삶’에 대한 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또 반쯤은 ‘조화로운 삶이라니, 어디 들어나 보자’ 하는 불손한 마음으로 책을 집었다. 그들이 말하는 ‘조화로운 삶’에 비추어 내 모순덩어리 삶을 반추해본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 헬렌 니어링·스코트 니어링, 『조화로운 삶』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의 저자, 스코트 니어링이 남긴 말이다. 그의 말에는 ‘삶의 방식’ 그 자체보다는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이 중요하다는 의미가 담겼다.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삶과 불편하지만 소박한 삶 사이에서 고민하는 과정 그 자체가 삶을 풍요롭게 하고 성숙하게 만들 것이라는 작가의 신념에 용기를 얻는다. 책 제목에서 느껴지는 평화로움과는 반대로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편리함, 이기주의, 물욕 등의 유혹에 맞선 투쟁의 기록이다. 니어링 부부는 도시를 떠나 버몬트 숲 속으로 들어가며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독립된 경제를 꾸리는 것,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것, 사회를 생각하며 바르게 사는 것이 그 목표였다. 이 목표를 위해 그들은 채식주의를 지킬 것, 자급자족할 것, 노동은 시간을 나눠서 할 것, 기계에 의존하지 말 것, 남는 음식은 필요한 사람에게 줄 것 등의 세부 원칙을 만들고 철저하게 지켰다. 그들은 이 과정에서 때로는 쓰라린 실패를 경험하기도 했다. 유기물로 된 퇴비를 만드는 과정에서 여러차례 시행착오를 겪었으며,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기위해 노력했지만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버몬트 주민들은 쉽사리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의 과정을 고백하는 그들의 문체는 투쟁적이기보다는 담담하고 진솔하다. 목표의 성공 여부보다는 ‘희망과 인내, 그 일에 쏟아 붓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1 담담하고 서정적이기까지 한 니어링 부부의 글에 이끌려 낭만적인 환상을 품지 말기를 당부한다. 니어링 부부는 속편, 『조화로운 삶의 지속』에서 이렇게 주의사항을 전했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일은 어느 순간 가벼운 마음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거듭되는 고민 속에서 내린 결정이고, 그 결정은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앞날을 내다보고 만족스러운 결과에 이르는 결정이어야 한다. 처음 3년을 보내기가 가장 힘들고 어렵다. 적어도 그만큼은 시행착오를 거듭해야 한다.” 나는 내 본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즐겁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앞서 소개한 『조화로운 삶』은 『월든』이 출간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에 출간된 책이다. 니어링 부부보다 100년을 앞서 소로는 문명으로부터 벗어난 월든 호숫가에서 손과 발의 노동만으로 생활을 꾸려 나갔다. 두 책이 비슷한 점도 많지만, 수기적 성격이 강한 『조화로운 삶』에 비해 『월든』은 실험적, 연구적 성격이 강하다. 그는 책의 ‘경제’ 챕터에서 당시의 식량 가격을 종류별로 정확하게 기록했으며 자신의 수입과 지출을 세세하게 정리해 놓았다. 또한 계절 별로 변하는 호수의 풍경과 자신이 보고 관찰한 동·식물의 행동과 특징을 아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한 예로 그는 호수에서 낚시한 경험을 이야기할 때 호숫가로부터 낚시를 한 지점까지의 거리, 닻을 내린 지점의 수심, 낚싯줄을 드리운 길이까지 기록했다. 그의 자질구레하고 세밀한 기록은 19세기 중반 미국의 풍속사에 마니아적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모르겠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음을 미리 알려둔다.
  • 1969년 이후의 조경 이론 활자산책
    “형, 읽을 만한 전공 책 좀 추천해 주세요.” “내일 한 십만 원 준비해서 나올 수 있니” 대학 1학년 때의 일이다. 똑똑해 보이는 한 선배의 손에 이끌려 조경 관련 원서를 불법 복제해 파는 작은 출판사에 갔다. 충무로의 한 허름한 건물 2층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스무 권 남짓한 책을 집으로 가져와 아주 자랑스럽게 책꽂이에 꽂았다. 존 옴스비 사이몬즈John Omsbee Simonds의 『조경학Landscape Architecture』과 마이클 로리Michael Laurie의 『조 경 학 개론Introduction to Landscape Architecture』이 끼어있던 걸로 기억된다. 나머지는 투시도나 수목 심벌 그리기 연습용 책이거나 (엄밀히 말하자면) 조경의 범위를 벗어나는 도시계획, 토지이용계획, 환경 정책 관련 책들이었던 것 같다. 하늘같은 선배의 권장 도서이므로 나는 그 책들 속에 조경의 모든 게 있는 줄 알았고 그게 조경의 전부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런 조경(학)이 만족감을 주지 못함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소위 ‘사회과학’서적을 열심히 기웃거렸다. 하지만 딜레탕트 고유의 열등감을 키우는 촉매로 작용할 뿐이었다. 책과 담을 쌓았다. “넌 ‘비평’을 해라, 조경 비평.” 3학년 때의 일이다. 지금은 환경 관련 시민운동에 열정을 쏟아 붓고 있는 선배, K교수가 던진 말이다. 전후 맥락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갑자기 비평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그 두 글자에 이유 없이 가슴이 뛰었다. 허전함과 공허함을 동반한 조경 공부의 갈증, 어쩌면 비평을 통해 그 목마름을 해소할 수도 있으리라는 막연한 믿음이 생겨났다. 갈증의 원인은 계획이나 설계, 즉 노하우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이론과 비평, 즉 노와이know-why의 공백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던 것 같다. 미술이나 문학 비평의 참고서들은 많았지만 조경을 중심에 두고 읽을 비평 개론서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건축 비평으로 눈을 돌리자 책 한 권을 건질 수 있었다. 웨인 애토우Wayne Attoe의 『건축과 비평적 상상력Architecture and Critical Imagination』(1978). 그냥, 무조건 번역하기로 했다. 고백하건데 내 석사 논문의 절반 이상을 애토우의 책에서 거의 그대로 가져와 채웠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플러스 펜 두세 다스를 소진시키며 쓴 이 책의 번역 노트 세 권을 최근에 발견했다. 누렇게 변한 종이와 시퍼렇게 번진 잉크로 남은 옛 시간의 그림자를 보고 있자니 그 시간 속의 사건들이 하나 둘 고개를 들고 나오는 것 같아 얼른 공책을 덮었다. 이후 몇 년간, 이 책 저 책, 정말 많은 양의 목적 없는 ‘나홀로’ 번역을 했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나는 번역이라는 종교의 충실한 신도였다. 그건 공부를 위한 행위가 아니었다. 번역은 한없이 외로운 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허기, 끊임없이 침범하는 학문적 열등감에 맞서기 위한 심리적 방어기제 였다. 로스메리 월드롭의 말이 떠오른다. “번역은 몸에서 혼을 짜내서 다른 몸으로 꼬여내는 것과 같다.” 힘든 노동이었다. 그러나 번역을 통해 나는 책과 화해했고 비로소 조경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럼, 이 책을 보게.” 환경, 그리고 미학. 매력적인 이 두 단어를 동시에 품은 박사 과정 과목 ‘환경미학’, 수강생은 나 혼자였다. 막막하던 학기 초의 탐색기가 끝나갈 무렵 C교수님은 아놀드 벌리언트Arnold Berlenat의 『환경미학The Aesthetics of Envi ronment』(1992)을 잠시 보여주셨다. 유학 중 잠시 귀국했던 Z선배로부터 구한 복사본을 다시 복사한,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따끈따끈한 책이었다. “이번 학기엔 그냥 이거 번역해 보겠습니다.” 과목명과 책 제목이 일치한다는 단순한 이유로 시작된 독서였지만, 이 책은 이른바 ‘독서를 통한 개안’의 차원을 처음 경험하게 해주었다. 벌리언트의 『환경미학』과 그의 전작 『예술과 참여Art and Engagement』(1991)를 통해 산만하던 나의 미학적 지식을 체계화할 수 있었고, 이원론에 입각한 서구 근대 미학의 한계를 파악하고 그것에 대한 대안적 논의로서 환경미학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마음껏 기댈 수 있는 벽을, 새로운 시각을 허락하는 창을 책에서 만났던 당시의 흥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활자산책
    활자 산책을 떠나며 책 권하지 않는 사회 책을 읽지 않는 시대다. 스마트폰이 점령한 우리의 일상에서 ‘책’은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출간 종수도 눈에 띄게 줄었고, 주요 독서층은 고령화되었다. 20대가 독서 시장을 견인하던 호시절은 풍문으로만 남았다. 텍스트는 SNS의 위력 앞에서 파편화되었고, 140자 단위의 짧은 호흡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좀처럼 책을 펼쳐들지 않는다. ‘그래도 종이책은 살아남는다’던 희망 섞인 전망이 ‘그래도 종이책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간절한 바람으로 바뀌고 있는 이즈음, 책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조경 동네로 범위를 축소해도 마찬가지다. 한국 조경을 한 단계 성숙시킬 수 있는 조경 담론과 조경 문화의 근간? 공허하다. 화려한 이미지로 중무장한 화보집도 전과 비교할 수 없이 소비되지 않는 시대가 아닌가. 풍성한 담론은커녕, 조명해볼만한 책이 몇 종이나 있을까? 상황이 이러함에도 우리는 책장을 넘겼다. 도서관을 뒤지고, 필자를 만나고, 서점을 순례하고,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하고, 독서 경험을 떠올리고, 몇 권의 책을 추렸다. 이번 호 특집은 그 책 읽기 경험의 공유다. 그래도 책을 권하다 활자 산책을 준비한 까닭은 소박하다. 몇 권의 책이 조경의 허약한 문화적 기반을 살찌울 수 있으리란 거창한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추천 도서’ 목록이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란 생각을 했다. 지극히 주관적이더라도 말이다. 흔히들 조경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젊은 시절의 폭넓은 경험과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답사와 독서를 포함한) 문화 체험을 강조하곤 하지만, 막상 뚜렷한 안내판이 없다는 점도 떠올렸다. 많이 경험하고, 많이 보고, 많이 읽는 것을 강조하지만, 너무 막연하지 않은가. 읽을 만한 책을 찾아 다른 이들의 블로그를 기웃거리던 경험, 누구나 한번쯤은 있지 않을까. 그래서, 너무 딱딱하지 않게 두런두런 책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했다. 올해 진행했던 특집을 되돌아보는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도 자극이 되었다. 2월호 특집 ‘우리시대 아파트 담론의 지형도’와 5월호 특집 ‘서울의 오늘을 읽다’에 필진으로 참여한 전문가들은 『아파트와 바꾼 집』, 『아파트 한국사회』, 『콘크리트 유토피아』, 『아파트 게임』, 『나는 튀는 도시보다 참한 도시가 좋다』,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 『랜드마크, 도시들 경쟁하다』,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 『못된 건축』 등의 책을 펴낸 필자였다. 그것도 굉장히 알찬 내용의 책을. 그뿐이 아니다. 6월호 특집 ‘부산시민공원’의 필자는 모두 『부산의 꿈 - 캠프 하야리아의 시민공원 만들기』의 저자였다. 몇 권의 책이 특집의 토대가 되어준 것이다. 당시 ‘아파트’를 주제로, 또 ‘서울’을 주제로 쓰인 여러 권의 책을 쌓아놓고 나누던 이야기는 꽤 흥미로웠다. “아예 한 호쯤은 책을 특집으로 해보면 어떨까”라는 의견이 나온 것도 아마 그때의 기억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주관적인 너무나 주관적인 과문한 탓이겠지만, 국내에서 조경 관련 추천 도서 목록을 찾는 일에는 실패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조경학과 홈페이지 (www.design.upenn.edu / landscape-architecture / recommended-reading)에서 찾은 63권의 권장 도서recommended reading와 올해 7월에 출간된 『Landscape Architecture: A Very Short Introduction』의 뒷부분에 실린 몇 권의 추천 도서 목록만을 얻을 수 있었다. 세분화된 추천 도서가 필요하다면, 관련 박사 논문의 참고문헌을 뒤적이면 되겠지만 우리의 의도는 그와는 좀 달랐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우선, 조경 동네에서 독서량이 많은 이들이 누구일까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글을 쓰는 이들이 아닐까 싶었다. 잡지 연재필자와 단행본을 펴냈던 필자, 그리고 편집위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어떤 이에게는 ‘내 인생의 책’ 5권을, 또 다른 이에게는 ‘조경학과 학생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책’ 5권을 부탁했다. 편집부 기자들도 각자 10권부터 20권 가까이를 추천했다. 그렇게 한 권 한 권 모으다보니, 순식간에 200여 권의 목록이 쌓였다. 10권 이상을 보내온 고마운 이들도 적지 않았다. 장르도 다양했다. 누구는 『오만과 편견』에서 영국인들의 정원 문화를 끄집어냈고, 왠지 추천 도서 목록에서 빠질 것 같지 않은 『월든』이나 『조화로운 삶』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Design with Nature』 같은 전공 서적은 중복되어 거론되었고, 『동아학생대백과사전』 같은 다소 엉뚱한 책도 호명되었다. 어느 정도 리스트가 쌓여가자, 처음 생각했던 추천 도서 목록을 제시하는 방안이 최선일까 하는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솔직히 부담도 컸다. 결국, 지금까지 거론되었던 책을 중심으로 하되 몇 개의 가지를 나누어서 ‘주관적인’ 독서 경험을 공유하는 쪽으로 큰 방향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특집의 제목에 ‘권장 도서’ 혹은 ‘추천 도서’라는 수식이 포함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일곱 가지 갈래의 독서 경험 다섯 명의 편집부 기자와 편집주간, 마침 여름방학을 이용해 실습을 나온 우성백 학생까지, 총 일곱 명이 각기 한 편씩 총 일곱 편의 원고를 완성했다. 그렇다고 일곱 가지 갈래를 조경, 건축, 예술, 문학처럼 도식적으로 나누지는 않았다. 그래도 조경 전문 잡지이니까 조경 도서에는 두 꼭지를 할애했다. 한 명은 그동안 조경 책을 편집하고 만든 경험을 되돌아보았고, 또 다른 한 명은 조경 책을 중심으로 한 독서 경험을 반추했다. 나머지 다섯 명은 조금씩 결이 다른 분야의 책을 펼쳤다. 이렇게 해서 정리된 일곱 편의 원고 제목은 모두 실제 책 제목이다. 해당 부류의 책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책이라서 제목으로 뽑은 것은 아니다. 각 원고의 내용을 단적으로 함축하는 책 제목을 원고 제목으로 빌어 왔을 뿐이다. 한때, 그러니까 책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던 시절, 김현의 『행복한 책 읽기』나 『장정일의 독서 일기』 같은 책이 꽤 인기 있었던 적이 있다. 물론 최근에도 이현우의 『그래도 책 읽기는 계속 된다』처럼 ‘책을 읽는 책’은 꾸준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 자체로 흥미로운 텍스트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읽어본 책에 대해서는 색다른 시선을, 읽어보지 못한 책에 대해서는 흥미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또 누군가의 내밀한 지식 창고를 엿볼 수있는 기회가 흔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번 특집이 그와 같은 역할을 충실히 해낼 수는 없겠지만, 타인의 책꽂이를 엿보는 소소한 즐거움은 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가을, 종이책을 펼쳐드는 당신에게! 덧붙이는 글 특집의 구체적인 짜임새를 잡아나가는 과정에서 ‘내 인생의 책’과 ‘조경학과 학생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 리스트를 전해주어, 이번 특집에 풍성함을 더해준 편집위원과 잡지 연재 필자, 단행본 필자에게 특별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1. 1969년 이후의 조경 이론 _ 배정한 2. 조화로운 삶 _ 조한결 3. 생각의 탄생 _ 양다빈 4. 한국의 나무 특강 _ 이형주 5. 거의 모든 것의 역사 _ 우성백 6.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_ 김정은 7. 텍스트로 만나는 조경 _ 남기준
    • 남기준
  • 미래 도시 디트로이트 도시재생의 새로운 국면
    미래 도시 디트로이트Detroit Future City 스토스Stoss는 일련의 도시계획 전문가들과 함께 디트로이트 시 전역에 걸친 도시설계 작업인 디트로이트웍스 프로젝트Detroit Works Project에 참여했다. 본 프로젝트가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사회적·경제적·생태적 시스템 사이의 긴밀한 연계성을 확립함으로써 생산적 효율성을 발견해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통합된 해결책을 바탕으로 도시 전반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도시 생활, 도시에서의 새로운 생산 방식, 그리고 생산적인 그린인프라를 제안하고자 한다. 스토스는 경관landscape을 단지 여가 공간으로만 간주했던 전통적 인식을 재정의하는 동시에 이를 다변화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경관이 도시의 건전성 및 거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한다. 단일한 기능만을 지닌 수동적 경관은 자원만 소비할 뿐이다. 반면 현대의 생산적 경관은 자원 자체를 만들어낼 수 있으며 도시 거주민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환경 문제를 줄여줄 수 있다. 생산적인 경관을 만들어내는 것이 스토스의 작업의 기준이 되는 원칙이다. 생산적 경관과 그린인프라는 공기, 물, 그리고 토양을 정화시키며 보다 건강한 도심 생태계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혁신적 경관은 다양한 유형의 블루·그린인프라 조성에 초점을 맞춰 물과 공기의 정화를 추구하며, 식량 및 에너지 등의 생산 기반 시설, 지역 사회의 참여, 그리고 연구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이 계획은 새로운 도시 구조를 만들기 위한 사회적 촉매제로서 종합적 경관 기반 시설의 확립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스토스(Stoss)는 도시 및 사회적 공간 조성 과정에서 조경의 생산적인역할을 추구하는 설계사무소다. 스토스는 기본적으로 공공의 영역과 관련된 일을 한다. 공원이나 캠퍼스 및 오픈스페이스, 지역 및 도시 조성전략, 다양한 스케일의 경관 기반 시설, 개발 및 재개발 등의 공간 조성프로젝트에 관여하고 있다. 스토스는 창의적이면서 실용적인, 동시에아름다우면서 기능적인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간단하지만 효율적인 기술적 접근과하이브리드적인 해결책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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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조적 파괴와 전략적 버리기 도시재생의 새로운 국면
    창조와 파괴만큼 도시·조경설계 분야에서 흥미로운 논란을 일으키는 행위도 드물다. 도시 자체가 크고 작은 창조와 발명의 결과다. 19세기 중반 바르셀로나에 도시 격자를 카펫처럼 덮은 일데폰스 세르다Ildefons Cerdà, 그리고 비슷한 시기 보스턴 커먼Boston Common에서 프랭클린 파크Franklin Park에 이르기까지 7마일에 달하는 에메랄드 네클리스Emerald Necklace를 도시에 선사한 프레데릭 로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 이들은 아름다운 흔적을 도시에 남긴 창조자들이다. 이들은 종종 전대미문의 독창적인 계획가이자 용감한 개척자로 대접받는다. 그에 비해 파괴는 도시의 일부를 없애거나 중요성을 격하시키는 작업이다. 도시를 파괴한 사람은 때로는 도시 문명의 적 혹은 몰지각한 불도저라는 불명예를 얻게 된다. 이렇게 전혀 반대되는 의미의 두 단어를 결합한 개념인 ‘창조적 파괴creativedestruction’가 최근 도시계획 분야에서 자주 논의되고 있다. 1940년대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에 의해 널리 쓰이게 된 이 말은 최근 뉴욕타임즈 지에 따르면 시애틀, LA, 디트로이트 등의 도시를 쇠퇴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으로 주목받고 있다.1 창조적 파괴는 흔히 기존 환경을 의도적으로 파괴함으로써 바람직한 결과를 얻게 된다는 식의 지나친 단순화를 통해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개념이 자주 인용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도시 쇠퇴 과정이 성장과 발전의 정반대가 아니며 가능하면 피해야 할 절대악도 아니라고 보는 신선함 때문일 것이다. 이는 한 시기에만들어진 도시의 부분이 가까운 미래에 필요한 기능이나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점차 교체되어야 하며, 현재 세계 도시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쇠퇴decline가 바로 그 파괴와 교체 과정의 생산적 준비단계라는 관점이다. 이러한 생각은 특히 최근의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잘 나타난다. 다음은 디트로이트의 다소 불명예스러운 통계 중 일부이다. •미국 역사상 파산한 도시 중 가장 큰 도시(2013년 7월 파산 신청) •도시 총 부채 약 18조5천억 원(인구 1인당 약 3천만 원의 부채) •1950년대 180만 인구에서 2014년 70만 인구로 감소•남은 인구의 약 82%가 고등학교 졸업 이하 학력 •최소 약 4만 채의 집이 즉시 철거 대상으로 지정됨: 총 건축물의 30%가 극도로 열악함 혹은 빈집 •시 전체 가로등 약 8만8천 개 중 3만5천 개만 작동 •단위 인구 당 살인 사건 발생률 뉴욕 시의 11배 1900년대 초 미국의 실리콘밸리, 디트로이트 디트로이트는 미국 자동차 산업의 빅3, 즉 포드Ford, GMGeneral Motors, 크라이슬러Chrysler가 가져온 자동차 상업화 및 대중화의 진원지로 잘 알려졌다. 하지만 디트로이트는 자동차 생산이 이루어지기 전 이미 운하와 철도가 지나가는 물류 거점이자 내륙 워터프런트를 활용한 선박 제조 기지로 자리매김하며 1890년 약 21만 명 규모의 도시로 성장했다.3 당시의 디트로이트는 모험가 정신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기술 혁신을 이끌고 있는 1900년대 판 실리콘밸리였다. 흔히 ‘포디즘Fordism 자본주의’나 영국 헉슬리Aldous Leonard Huxley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혹은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의 ‘모던 타임즈Modern Times’에서 직간접적으로 묘사된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Henry Ford가 이 시기 디트로이트에 등장한다. 1903년 포드사를 설립한 그는 1906년 ‘Model N’의 상업적 성공을 토대로 대량 생산 시스템을 적용해 가격을 획기적으로 낮춘 ‘Model T’로 자동차 대중화의 꿈을 이룬다. 하지만이 도시는 몇몇 성공한 기업가들의 독무대는 아니었다. 세계 최고의 두뇌들, 열정적인 소자본 창업가, 그리고 이들의 혁신을 지원하는 수많은 창업 인큐베이터와 경쟁력 있는 컨설턴트들이 당시의 디트로이트를 담금질했다. 1901년 자체적으로 자동차 부품 워크숍을 설립하고 포드사에 자금을 조달한 닷지 브라더스Dodge Brothers를 포함해 1908년 GM, 1925년 크라이슬러 등이 혁신의 도시 디트로이트에 둥지를 틀었다. 지난 1850~1890년 10배 가까이 증가한 도시 인구는 다시 1890~1950년 8배 이상 늘어났다. 1950~2013년: 산업 쇠퇴, 악마의 밤, 그리고 파산 선고 그러나 1950년대 전후를 기점으로 이 혁신 도시는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수렁에 빠지기 시작했다. 미국내외 자동차 산업 간의 과도한 경쟁, 1950년대 본격화된 백인 중산층의 대규모 교외 이주, 1960년대 불거진 사회 불안과 폭동, 1973~1974년 석유 파동 등의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비슷한 시기 디트로이트 빅3는 시설 투자의 방향을 급선회한다. 1947~1958년 신규 자동차 공장 25개를 전통적으로 혁신의 중심지였던 디트로이트 도심부가 아닌 교외 지역의 저렴하고 넓은 토지에 설립한다.4 게다가 자동차 산업이 쇠퇴하기 시작할 무렵 새로운 산업이나 서비스를 도입해 변신에 성공한 뉴욕이나 보스턴과는 달리 디트로이트의 도심부는 제2, 제3의 신산업 유치에 실패하고 만다. 이곳은 더 가난하고, 더 분노에 찬, 그리고 혁신의 감각을 망각한 흑인 커뮤니티로 가득 차게 된다.5 1980년대를 기점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집단적 의식처럼 번진 ‘악마의 밤Devil’ Night’은 매년 수백 가구의 방화 피해와 살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디트로이트는 계속된 산업 쇠퇴와 사회 불안, 정부 부채 누적으로 결국 2013년 7월 공식적으로 파산 선고를 하게 된다.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 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 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환경대학원과 협동과정 도시설계학전공에서 도시설계 이론과 스튜디오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 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중국·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