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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스케이프] 종묘의 공원화
지난여름, 의미 있는 사업 하나가 오랜 시간 끝에 완공됐다. 식민지기에 분리된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작업으로, 90년간 두 장소를 갈라놓은 율곡로 일부에 지붕을 덮고 지형을 복원한 것이다.
사업은 2007년 녹지문화축 사업 계획의 일환에서 시작되었다. 북악산 자락의 응봉에서 창덕궁과 창경궁–종묘–세운상가(철거 계획)–남산을 잇는 사업의 첫 단계인 셈이었는데, 이 구간은 무엇보다 역사적으로 회복해야 마땅한 곳이기도 하다. 서울 종묘(宗廟)는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후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으로, 수도 한양을 건설할 당시 사직(社稷)과 함께 가장 먼저 조성되었다. 종묘 북측에 있는 창덕궁과 창경궁은 각각 1405년(태종 5년)과 1483년(성종 14년)에 건설되었으니, 창덕국·창경궁 일대인 동궐(東闕)과 종묘가 하나의 큰 권역을 이루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부터인 셈이다.
임진왜란 이후 오랜 시간 빈터로 있었던 경복궁과 달리, 조선왕조 대부분 기간에 동궐을 왕과 왕후의 주궁으로 이용했기에, 위치적으로도 종묘와의 긴밀성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이번 사업에서 복원된 북신문(北神門)은 왕이 궁궐과 종묘를 오갈 때 사용한 문이라고 하니, 두 장소의 연속성은 이용 측면에서도 드러나는 셈이다.
두 공간을 설명하는 또 다른 관점은 풍수지리다. 한북정맥인 북한산 기운이 백악을 타고 동굴 권역을 지나 종묘로 흐른다는 해석은 정서적 측면에서의 위상과 상징을 공고히 하였는데, 일제의 율곡로 건설로 이 논리는 극심한 타격을 입는다. 이른바 지맥을 끊어 민족혼을 말살하려 했다는 통설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학자 염복규는 율곡로 건설의 근거가 어디에도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음에 의구심을 갖고 도로 개설의 과정과 여론을 전방위적으로 살펴본 바 있다.
동궐 권역과 종묘 사이를 관통하는 율곡로의 처음 이름은 경성시구개수(京城市區改修) 제6호선이다. 조선의 길은 전통적으로 잎맥 형태를 하며 길 끝에 가옥이 있는 막다른 길이 많은데, 이는 도성 길도 마찬가지였다. 丁자 형태의 대로를 갖췄을 뿐 순환형 도로 체계는 아니었다.
헤이안 시대부터 격자형 도시계획을 체화한 일제는 병합 초기인 1910년부터 순환형 도로망 구축에 공을 들였는데, 그중에 제6호선, 즉 율곡로 계획은 처음부터 궁궐과 종묘를 관통해야 한다는 난제를 안고 있었다. 총독부 청사였던 경복궁 이전·신설 계획을 가지고 있던 일본은 제6호선 건설을 관철시켜야만 했기 때문에, 순종은 물론 이왕가(李王家), 전주 이씨 종중의 격렬한 반대 속에서도 이완용계와 내통하며 도로 부설 계획을 추진했다. 그 와중에 놀라운 점은 종묘의 공원화를 논의했다는 사실이다.
*환경과조경415호(2022년 11월호)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염복규,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이데아, 2016.
경성부, 『경성도시계획구역설정서』, 1926.
“犬牙錯雜한 今日의 京城이 卅年後에는 一大理想園 (14) : 公園遊步地增設과 火災豫防大計劃
火災를 防禦하기 爲하야 新築家屋은 全部 防火材 旣築家屋도 改造”, 「매일신보」 1926년 4월 29일.
“社說: 宗廟地帶를 開放함이 如何 – 安息處 없이 헤매는 北部民을 보고”, 「동아일보」 1929년 6월 28일.
박희성은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중 문인정원과 자연미의 관계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역사 연구자들과 학제간 연구를 수행하면서 근현대 조경으로 연구의 범위를 확장했다. 대표 저서로 『원림, 경계없는 자연』이 있으며, 최근에는 도시 공원과 근대 정원 아카이빙, 세계유산 제도와 운영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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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란 무엇인가, 기계생명체가 던지는 질문
MMCA 현대차 시리즈 2022: 최우람 – 작은 방주
영화와 애니메이션 속 거대한 기계는 투박하고 귀가 떨어져나갈 굉음을 내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금방이라도 나를 향해 위협을 가할 것 같은 면모는 기계를 자연과 대척점에 놓인 무서운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반면 1990년대 초부터 최우람이 만들어온 ‘기계생명체(anima-machine)’는 부드럽고 유연하며 조용하고 아름다운 느낌을 자아낸다.
지난 9월 9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최우람의 고유한 세계관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 ‘MMCA 현대차 시리즈1 2022: 최우람 – 작은 방주’가 열리고 있다. 최우람은 정교한 설계를 바탕으로 세밀한 움직임을 보이는 살아 숨 쉬는 듯한 기계를 만들고, 독특한 이야기를 더하는 작업을 해왔다. 자동차 엔지니어인 할아버지와 화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최우람의 어린 시절 꿈은 로봇을 만드는 과학자였다. 수학을 좋아하지 않아 공과대학에는 가지 못했지만, 전공으로 미술을 택한 그는 과제를 하다 우연히 접한 키네틱 아트에서 접어 두었던 꿈을 실현할 실마리를 발견했다. 최우람은 모든 생명체의 본질이 움직임에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가 구축한 치밀한 메커니즘은 기계 역시 생명체처럼 완결된 아름다움을 자아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관객들은 기계생명체들을 보며 생명의 의미와 살아 있음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전시 첫 공간인 서울박스에 발을 내딛으면 기괴한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소음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리면 18개의 지푸라기 인형이 기이한 움직임을 반복하고 있는 ‘원탁’을 볼 수 있다. 인형들이 무릎을 접었다 펴기를 반복할 때마다 등에 진 검은 원탁의 기울기가 변하고, 그 위를 지푸라기 공이 떨어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굴러다닌다. 저 공이 무엇이기에 저렇게 절실히 지키는 것일까. 호기심을 품고 다가가면 지푸라기 인형 모두 머리가 없는 상태이며, 공인 줄 알았던 구체가 사실 머리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머리가 없는 지푸라기 몸체가 등으로 원탁을 밀어 올리는 모습은 마치 원탁 위 머리를 차지하기 위한 행동 같아 보이지만, 그 결과는 머리를 더 멀리 밀어내 버리는 역설적인 상황을 가져올 뿐이다”라는 해설이 제공되고 있지만, 의미없는 노동을 반복하는 지푸라기 인형을 보고 있으면 과연 그들이 자의로 저 원탁 아래에 머물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이들의 모양을 천장 가까이에서 느릿하게 날며 내려다보는 ‘검은 새’를 발견하면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이 끓어오르고 인형들의 몸짓이 꼭 나의 발버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환경과조경415호(2022년 11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1. 2014년부터 시작된 MMCA 현대차 시리즈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하고 현대자동차가 후원하는 연례 프로젝트다. 매년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한국 중진작가 1인을 선정해 전시를 비롯한 다양한 프로모션을 통해 지원함으로써, 한국 현대미술의 현주소와 역동성을 관객들에게 선보이고자 기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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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서울정원박람회
꿈의 숲 그리고 예술의 정원, 북서울꿈의숲에서, 9월 30일부터 10월 6일까지
가을 정원과 예술적 정취를 함께 즐길 수 있는 2022 서울정원박람회(이하 정원박람회)가 9월 30일부터 7일간 북서울꿈의숲에서 개최됐다. 2015년부터 열린 서울정원박람회는 올해 7회를 맞았다. 이번 정원박람회는 특히 오랜 기간 지속된 팬데믹과 바쁜 일상 등으로 지쳐있던 시민들에게 정원 문화를 통해 건강한 위로와 휴식을 선사하고자 했다.
서울시와 2022 서울정원박람회 조직위원회가 주최하고, 환경과조경이 주관한 올해 정원박람회의 주제는 ‘꿈의 숲 그리고 예술의 정원’이다. 과거 드림랜드가 있던 곳에 만들어진 북서울꿈의숲은 강북 지역을 대표하는 공원이다. 칠폭지, 월영지, 청운답원(잔디광장), 창포원, 문화광장 등 풍부한 녹지 공간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 예술 공연과 전시를 즐길 수 있는 꿈의숲아트센터, 어린이 미술관인 상상톡톡미술관이 있어 다른 공원과 차별화된다. 대상지와 조화롭게 어우러진 공공 정원 조성을 위해 북서울꿈의숲의 이러한 특징을 주제에 반영했다.
북서울꿈의숲과 어우러진 각양각색의 정원
9월 30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북서울꿈의숲에서 다양한 정원 전시가 펼쳐졌다. 상상톡톡미술관 전면에 작가정원(4개소), 창포원 좌우에 학생정원(6개소)과 시민정원(8개소), 청운답원 주변에 팝업가든(9개소)이 조성됐다.
작가정원의 주제는 정원박람회 주제와 동일한 ‘꿈의 숲 그리고 예술의 정원’이었다. 작가정원 공모에 47팀이 참여했으며, 1차 심사를 통해 4개 작품이 최종 선정됐다. 정원 조성 후 현장 심사를 통해 구영미·박지연의 ‘내 마음의 산책길’이 금상작으로 선정됐다. 이 정원은 청운답원 한 곳에 모여 있는 다른 작가정원들과는 달리 홀로 방문객을 맞이하는데, 햇살, 바람, 나무와 풀이 어우러진 공간에 놓인 내 작은 방은 온전히 자신의 감정과 마음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은상에는 최윤정·김동민의 ‘꿈을 저울질하는 시소’, 동상에는 장찬희의 ‘직관적 발아’와 김지학·설윤환의 ‘하얀바람’이 선정됐다(88~105쪽 참고).
조경, 원예, 정원, 건축, 도시계획, 산업 디자인 등 조경 관련 학과 학생 누구나 참여 가능한 학생정원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선보였다. 올해 금상에는 할리갈리(상명대학교)의 ‘물감: 퍼지는 꿈의 조각’이 선정됐다. 순백의 도화지 위에 알록달록한 색으로 자신이 상상하는 꿈을 그리는 모습을 정원으로 형상화했다. 시련을 벽으로 나타내고, 붓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식물이 번지면서 벽(시련)이 무너지는 모습을 표현해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했다. 은상은 블루밍(서울시립대학교)의 ‘블루밍 드림(Blooming Dream)’과 드리머즈(강원대학교)의 ‘별담; 꿈을 담다’가, 동상은 5스틴5stin(가천대학교)의 ‘예지몽; 藝至夢’, 해님달님(가천대학교)의 ‘항해, 꿈을 향해’, SEO(건국대학교)의 ‘숨기다&찾다Hide&Seek: 정원에서 숨겨진 감각을 찾다’가 수상했다.
시민정원은 정원 조성에 관심이 있는 서울 시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정원 문화의 대중화와 정원을 통한 지역 커뮤니티 활성화를 도모하는 장으로 역할하고 있다. 금상은 에이블 가든(Able Garden)의 ‘정원, 잊어버린 꿈을 다시 채색하다’에게 돌아갔다. 이들은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무채색이 되어 버린 꿈의 본래 모습을 정원에 투영된 빛을 통해 마주하게 했다. 이를 위해 빛을 투영할 수 있는 아크릴판을 활용하고 다양한 색채를 정원에 더했다. 은상은 해방촌 마을정원사의 ‘정원 우체부; 꽃, 안부를 나누다’, 마미 가드너스의 ‘꿈에 그린(green) 정원’이, 동상은 꿈꾸는 무지개의 ‘땅위에 무지개’, 그린수프의 ‘팔레트; 꽃+팔레트(Falette;Flower+Palette)’, 오동근린공원봉사모임의 ‘벽오산(오패산)벌리사의 꿈’, 가든러버의 ‘내마음을 물들인 정원아 사랑해’가 수상했다.
팝업가든은 정원박람회 기간에만 선보이는 정원이다. 금상에는 릴리목공소의 ‘꿈꾸는 정원사의 작업실’이 선정됐다. 이들은 ‘릴리’란 이름을 가진 가상의 정원사라는 인물을 설정해, 릴리가 오랫동안 머무는 공간이자 꿈을 키워나가는 작업실의 흔적을 정원으로 조성했다. 반짝 정원하자의 ‘너도나도 정원하자’가 은상을, LA 걸스(서울시립대학교)의 ‘꿈빛잡화점’, ART2ST(건국대학교)의 ‘화원(畫園): 정원을 그리다’, 별빛(고려대학교)의 ‘별의 물감_에스터 페인트(ASTER paint)’가 동상을 수상했다.
*환경과조경415호(2022년 11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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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가든
에버랜드 포시즌스 가든 가을 정원, 서울시립대학교 팀 설계
크라운;어스와 걸어서 시대 속으로
2022년 봄 학기, 서울시립대학교 2학년 전공 수업으로 ‘정원 및 외부공간 설계 스튜디오’가 진행됐다. 두 명이 한 팀을 꾸려 캠퍼스 내부 또는 그 주변에서 대상지를 찾고 공간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설계안을 제출하는 것이 과제였다. 조금 독특한 점은 두 분반에서 각각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한 팀을 선발해, 총 두 팀에게 에버랜드 ‘포시즌스 가든’의 가을 정원을 설계할 기회를 준다는 점이었다. 16주에 걸친 스튜디오 결과, 1분반에서는 권솔지·박효빈의 ‘크라운;어스(Clown;Us)’가, 2분반에서는 김다민·지서연의 ‘걸어서 시대 속으로’가 우수작으로 선정됐다.
‘크라운;어스’는 가면을 쓴 어릿광대처럼 사회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정원이다. 점점 활용도가 떨어지고 있는 서울시립대 자작마루 주변에 펑키한 분위기의 다채로운 색상의 식물과 차분한 분위기의 색조가 단순한 식물을 심어 사람들의 다면성을 표현하고 온전히 휴식할 수 있는 정원을 만들고자 했다.
‘걸어서 시대 속으로’는 이정표 정원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회기역에서 서울시립대학교 후문까지 도보로 이동하려면 최소 12번의 갈림길을 만나게 되어 길을 잃기 십상이다. 길 찾는 사람을 돕기 위해 서울시립대로고와 방향을 지시하는 화살표를 담은 이미지를 만들고, 이를 21개의 기둥에 쪼개 담아 배치했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지만, 갈림길에 들어서면 쪼개진 이미지가 하나로 이어지며 길을 안내한다. 기둥 사이로 이미지를 가리지 않도록 동선과 식물, 휴식 공간을 배치했다.
함께가든, 왕관을 쓴 어릿광대
김다민·권솔지·박효빈·지서연 팀(이하 서울시립대 팀)은 6월 22일, 에버랜드 내 조경팀 사무실에서 첫 미팅을 진행했다. 에버랜드는 계절마다 달라지는 정원인 포시즌스 가든을 선보이는데, 이번 가을 정원의 콘셉트는 ‘해피 핼러윈’이었다. 정원은 네 개 구역으로 구분되며,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테마로 구성된다. A구역 ‘컬러풀 펌프킨 가든’은 다양한 색감의 호박 조형물이 주를 이루는 정원이고, B구역 ‘트릭 오어 트릿 가든’은 집 조형물과 키치한 패턴의 식재가 특징인 공간이다. C구역은 서울시립대 팀의 함께가든이 조성되는 곳으로, 정해진 콘셉트는 없었다. D구역 ‘핼러윈 인피니티 가든’에는 대형 스크린에서 이어지는 메리골드 길이 조성된다.
권소희 프로(에버랜드 조경팀)는 대상지 답사를 이끌며 식재되어 있는 식물, 정원에서 유지해야 할 것과 바꿔도 되는 것을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서울시립대 팀은 에버랜드가 시설물보다 식재를 중심으로 한 정원을 추구한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에버랜드는 “정원을 잘 조성하면 한 계절 내내 칭찬을 듣지만, 잘 조성하지 못하면 한 계절 내내 질타를 받는다. 사람들이 사진도 찍고 한껏 즐길 수 있는 정원이 조성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정원 콘셉트를 고민하던 서울시립대 팀은 작품에 대한 평가를 되짚어봤다. 좋은 평을 들었던 반전 효과를 지닌 광대라는 콘셉트, 기둥을 통해 방향을 유도하는 개념, 조형물이 드리우는 그림자를 고려해 ‘크라운;어스’와 ‘걸어서 시대 속으로’의 장점을 합친 새로운 정원을 만드는 데 돌입했다.
두 번째 미팅은 6월 29일, 설계 스튜디오를 지도한 이윤주 소장의 LP스케이프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정원의 콘셉트와 방향성, 레퍼런스 이미지를 발표하고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함께가든의 콘셉트는 ‘크라운 오어 크라운(crown or clown)’으로, 서울시립대 팀은 왕관을 쓴 어릿광대의 모습을 상상하며 정원을 설계했다. 대상지를 세로로 분할하고 각 구역에 전혀 다른 분위기의 식물을 심음으로써 광대의 양면성을 표현했다. 곳곳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에는 핼러윈 느낌을 내면서도 사람들의 걸음을 유도하는 젠탱글(zentangle) 이미지를 삽입했다. 그림자놀이를 할 수 있는 조형물을 배치해 재미를 더했다.
발표는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세부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부분과 에버랜드의 요구 조건에 맞춘 설계안으로 수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후 서울시립대 팀은 에버랜드 정원에 사각 기둥 모양의 거울 기둥이 있다는 정보를 접했고, 이를 활용하는 방향으로 기둥 디자인을 발전시키기로 결정했다. 수종은 에버랜드 식재 리스트를 고려해 선정했다.
*환경과조경415호(2022년 11월호)수록본 일부
지서연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하는 학부생이다. 기후변화청년단체(GEYK)의 일원으로 도시 농업, 산불과 같은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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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웃거리는 편집자] 이름을 부르는 지혜
삶에서 가장 소중한 장면을 영화로 만든다면 어떨까? 영화 ‘원더풀 라이프’(1998)의 주인공은 천국에 가는 사람들을 위해 영화를 만든다. 각자가 꼽은 삶에서 가장 소중했던 기억을 영화로 만들어 천국으로 가는 이들에게 선물로 준다. 말하자면 천국의 프로덕션 회사에서 진행하는 텀블벅 프로젝트라고 할까? 문득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가는 행운(?)이 주어진다면 어떤 기억을 선택할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여러 장면이 있겠지만, 클라이언트로서 한 가지 요청이 있다면 장면을 구성할 때 미장센으로 ‘비 온 다음 날 아침 집에서 본 안개 낀 앞산의 풍경’을 그린 그림을 써달라고 하고 싶다.
시골집 마당에 서면 산세가 훤히 보이는 맞은편 산에는 왜가리 군락지가 있었다. 그 자체로도 하나의 수묵화였지만 비 온 다음 날 젖은 아스팔트 도로가 채 마르지 않은 아침, 안개가 산을 자욱하게 두른 풍경은 특유의 운치를 자아냈다. 소설가 김승옥의 표현을 빌리자면, 밤사이 진주한 안개라는 적군이 가하는 기습에 무장해제가 될 수밖에 없는 진풍경이었다. 그러한 날에 맡을 수 있는 젖은 흙냄새와 깨끗해진 아침 공기의 맛은 날씨를 보관하는 서랍이 있다면 그 안에 넣고 싶을 만큼 좋았다. 만약 겸재 정선 선생님이 이곳의 경관을 그림으로 그렸다면 인왕제색도에 버금가는그림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그때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것이 후회로 남았다.
풍경의 순간을 담지 못했던 나와 달리 영국에서는 귀여운 조직적 움직임을 2005년부터 선보이고 있다. 레딩대학교 기상학과 방문연구원 출신 개빈 프레터피니(이하 개빈)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추종자에 맞서 구름을 감상하는 모임인 ‘구름감상협회’를 창립했다. 이른바 구름 추적자라 불리는 회원들이 120개국에 5만여 명이나 있다. 사이비 종교 혹은 모종의 음모를 꾸리는 이상한 단체는 아니고, 순수하게 구름이 좋아서 모인 이들이 각자가 발견한 구름 사진, 그림, 시 등을 홈페이지에 공유하는 일종의 구름 커뮤니티다.
최근 창립자 개빈은 회원들이 보내온 사진과 명화를 엮어 책 『날마다 구름 한 점』(2021)을 출간했다. 이 책은 구름의 생성 원리나 광학 현상, 이름의 유래, 구름과 어울리는 문학 작품의 문장 등을 소개한다. 책을 통해서 텔레토비 동산의 햇님 주위로 퍼지는 빛의 이름이 부챗살빛(Crepuscular Rays)이란 것과 비행운처럼 선박의 배기가스가 선박 자국(Ship Tracks)이라는 구름을 만든다는 걸 새로 알게 됐다. 또한 SF영화에서 재앙을 예고하는 장면에 등장할 것 같은 ‘거친물결 구름(Asperitas)’은 협회 회원이 발견한 구름인데, 세계기상기구가 발행하는 『국제구름도감(International Cloud Atlas)』에 정식으로 수록됐다. 구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학계에서 못한 일을 해낸 것이다.
인터뷰이로 만난 박승진 소장으로부터 구름감상협회와 결이 비슷한 프로젝트에 관한 얘기를 듣게 됐다. 개빈이 구름감상협회를 통해서 생소한 구름의 세계를 알려주고자 했던 것처럼, 박 소장은 일반인에게 다소 낯선 식물의 세계를 알려주고자 했다. 우연히 공사장 근처를 지나다가 가림막을 배경 삼아 아름답게 나 있는 잡초를 발견하고, 잡초마다 갤러리 작품명처럼 스티커로 이름표를 붙여 주었다고 한다. 잡초를 하나의 작품처럼 감상할 수있도록 일종의 오픈 갤러리를 만든 것이라고 할까. 일회성에 그친 프로젝트였지만, 이러한 취지에 동조하는 이들이 많이 모인다면 우리도 식물 사진을 찍고 서로의 감상을 공유하는 초록감상협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그런 협회가 만들어진다면 맨 먼저 가입서를 쓰고 싶다.
구름의 평균 수명은 10분밖에 되지 않고, 잡초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 배우처럼 주목받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구름, 잡초라는 단어로 그들의 존재를 뭉뚱그리는 대신 권운, 적운, 개망초 등 정확한 이름을 호명해보는 것은 어떨까. 생물학자 에드워드 오즈번 윌슨은 “지혜로 나아가는 첫걸음은 대상을 올바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름에 집착하느라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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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글씨는 사람의 마음인 것 같아
눈물 나게 하는 것보다는 웃게 만드는 게 더 힘들더라. 그래서 영화도 드라마도 좋지만 시트콤 작가가 신기하고 위대해보였다. 첫 문장만큼 중요하고 어려운 게 글의 마무리였다.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제일 쉬운 건 당연한 말로 끝맺는 것이었다. 교훈적이고 감동적인 내용들 말이다. 답을 내리기 어려울 때는 의문문으로 끝내는 방법도 유용했다. 그런데 수십 차례 같은 전략으로 지면을 채우다보니 지겨웠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한 게 아닌지, 친구가 “너 그만 반성해도 될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를 건네기도 했다. 그래서 늘 재치 있는 문장들이 탐났다. 쉽게 공감하고 피식피식 웃으며 볼 수 있지만, 이런 걸 왜 여기다 쓰지 일기장이 없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는 문장들. 하지만 글은 쓰는 이를 닮기 마련이다. 그다지 유쾌한 편은 아닌 내가 쓰는 글은 늘 고만고만한 결을 유지했고, 가끔 벗어나보려고 바둥대봤지만 늘 제자리로 돌아왔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해야 할 일들. 무엇이 적혀있을지 뻔히 알면서도 비슷한 제목을 발견하면 매번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우선 많이 읽기, 솔직하게 쓰기, 쓸데없는 수사를 빼기 등 익숙한 전략을 훑어보고 있으면 꼭 그 가운데에서 ‘필사하기’가 등장했다. 베껴 쓴다는 의미의 필사(筆寫)는 글쓰기 실력을 향상시키는 유명한 훈련 방법 중 하나다. 정호승 시인은 서정주와 김현승의 시를 필사했고, 신경숙은 “눈으로 읽을 때와 한 자 한 자 노트에 옮겨 적어볼 때와 그 소설들의 느낌은 달랐다. 소설 밑바닥으로 흐르고 있는 양감을 훨씬 세밀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부조리들, 그 절망감들, 그 미학들. 필사를 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1고 말했다. 난 오래전 이들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인생 첫 만년필을 마련하고 그에 어울리는 노트를 샀다.
필사는 책을 손으로 읽는 작업이다. 이 훈련법의 핵심은 글을 단어 단위가 아닌, 문장 단위로 옮기는 데 있다. 눈을 바삐 왼쪽 오른쪽으로 굴리며 글을 베끼는 것이 아니라 문장을 잠깐이라도 외워 머릿속에 박아 넣는 것이다. 글자들이 휘발되기 전에 종이에 적는 일은 문장의 구조와 말맛, 문체를 만드는 법, 더 풍부한 어휘를 자연스럽게 익히게 만든다. 쉼표의 적절한 위치를 고민하게 되고, 접속사의 의미를 더욱 크게 느끼고, 문장을 매듭짓는 수많은 방법을 깨닫는다. 잘못 쓴 글자는 화이트로 지우는 대신 가운데 줄을 긋고 고쳐 쓰면 안 좋은 습관도 발견할 수 있다.
문장을 배우는 데만 깊이 몰입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 깃털 같은 집중력은 그리 오랜 시간 발휘되지 못한다. 쓰다보면 삐죽빼죽 삐침이 못나게 빠져나오고 어딘가 못생긴 글자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한다. 글씨의 형태에 공을 들이다보면 문장은 휘발되고 손 마디마디에 아픔만 고인다. 어딘가 비효율적인 필사 작업이지만, 그래도 완성된 글씨체가 마음에 든다. 길쭉길쭉한 모음(성공한 사람의 필적을 분석한 결과 가로획이 길다는 말을 듣고 더욱 길게 쓰려 노력하고 있다)과 조금은 작은 ㅁ과 ㅇ, 세로로 가늘어 조금 해체된 듯 보이는 ㅅ과 ㅈ.
디지털 기기의 자판에 더 익숙한 시대에 펜으로 꾹꾹 눌러 적은 글씨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겠지만, 매년 이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여는 대회가 있다. 올해 8회를 맞은 ‘교보문고 손글씨대회’는 심사위원 평가와 대중 투표를 통해 매년 아름다운 필체를 선정한다. 겉옷의 두께를 고민하게 되는 계절이면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수상작들을 볼 수 있다. 개성이 묻어나는 글씨체는 아는 글을 새롭게 읽히게 만들기도 한다. 올해는 으뜸상 수상자의 글씨를 오래 들여다봤다. 역대 최고령 수상자 82세 김혜남은 필체와 잘 어울린다며 며느리가 추천해준 나카가와 히데코의 『음식과 문장』의 한 구절을 적었다. “곡선에 싱싱한 탄력이 있고, 간결하게 새침”(유지원 심사위원)한 글자 모양 덕분일까, 글에서 새콤한 복숭아와 달큰한 밤의 맛이 나는 것 같았다. “글씨는 사람의 마음인 것 같아. 사람의 마음이 거기 담기는 것 같아요.”2 김혜남의 소감을 읽으며, 묘한 떨림을 가진 그의 글씨에 어떤 마음이 담겨 있을까 가늠했다. 글도 사람을 닮고, 글씨체도 사람을 닮으니, 공간 역시 그 공간을 만든 사람을 닮을까. 역으로 좋은 글을 쓰려 노력하다 보면 사람이 글을 닮아가기도 할까. 오늘도 손쉬운 방법 중 하나인 의문문으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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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신경숙, 『아름다운 그늘』, 문학동네, 2004, pp.155~156.
각주 2. 윤상진, “‘손글씨엔 마음이 담겨 있어요’… 82세 할머니의 글씨, 폰트로 제작된다”, 조선일보 2022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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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T] 다양한 디자인을 구현하는 디딤판 ‘필’
직선과 곡선이 조화된 디자인 디딤판
디딤석이 기능성뿐만 아니라 감성적 디자인을 갖춘다면 어떨까. 스튜디오미콘의 ‘필(Pill)’은 초고성능 콘크리트(UHPC)로 제작한 알약 모양의 디딤판으로, 직선과 곡선이 부드럽게 조화된 디자인이 특징이다. 석재를 자연스러운 형태로 잘라서 제작하는 일반 디딤석과는 달리 조형성을 강조해 제작했다. 성형성이 좋은 콘크리트로 만들기 때문에 다양한 디자인을 구현할 수 있다. 세 가지 규격을 제공하며, 각기 다른 규격의 디딤판을 조합해 세련된 분위기의 공간을 연출할 수도 있다.
내구성도 튼튼하다. 디딤판은 밟았을 때 쉽게 미끄러지면 안 되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는 소재가 한정적이다. 특히 일반 콘크리트는 사람이 밟는 충격을 감당하기 힘들어 디딤판의 소재로 한계가 있다. 필의 소재인 초고성능 콘크리트는 일반 콘크리트보다 약 6배 이상 큰 압축강도를 가진다. 덕분에 쉽게 파손되지 않으며 자외선, 동해, 염해 등에도 강하다.
정동근 스튜디오미콘 대표는 “기존의 디딤석은 자연스러우며 안정적인 매력이 있었지만 디자이너의 영감을 드러내기에 충분한 제품은 아니었다. 성형성이 좋은 콘크리트는 디자이너의 생각과 현장의 콘셉트를 반영하여 디딤석을 제작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다”라고 말했다. 미콘은 직접 디자인한 디딤판뿐 아니라, 공간에 어울리는 디딤판 맞춤 제작 서비스도 제공한다. 또한 스퀘어, 써클, 페블 등 다양한 모양의 디자인 디딤판도 선보이고 있다.
TEL. 031-831-3620WEB.www.miic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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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 IFLA 2022가 남긴 것
이번 달 특집 지면에서는 지난 8월 31일부터 9월 2일까지 예술과 혁명의 도시 광주에서 열린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IFLA 2022)를 기록한다. 40개국 1,500여 명의 조경가가 참여한 IFLA 2022는 기후변화와 도시 위기에 대응하는 조경가의 비전과 전략을 깊이 있게 논의하고 지혜를 모으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번 대회는 2019년 9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6 개최에 발맞춰 세계조경가협회IFLA가 발표한 ‘기후행동공약’의 실천적 토론장이기도 했다. IFLA는 온실가스 감축 목표의 달성을 위해 전 세계 조경가의 전환적 협력과 행동을 촉구하며 “1. 유엔 지속가능발전목표UN SDGs의 실천, 2. 2040년까지 탄소중립 달성, 3. 살기 좋은 도시와 커뮤니티의 수용력과 회복력 강화, 4. 기후 정의와 사회 복지 지원, 5. 문화 지식 체계의 학습, 6. 기후 리더십 발휘” 등 여섯 가지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광주 세계조경가대회는 한국 조경계에도 변화와 혁신의 기회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조경학계와 업계가 협력해 성공적으로 치러낸 이번 대회는 한국 조경계의 난맥을 교정하고 조경 직능과 학제의 미래를 다시 설계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기조 강연, 논문 발표회, 라운드 테이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펼쳐진 여성 조경가와 미래 세대의 활약은 한국 조경의 다음 50년을 기대하게 했다.
이번 IFLA 2022의 무엇보다 큰 성과는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Re:public Landscape)’라는 현재와 미래의 좌표를 한국은 물론 세계 조경계에 제시했다는 점일 것이다. ‘리:퍼블릭’은 서로 연관된 세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리:퍼블릭의 ‘리’를 ‘어떤 것을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이라는 뜻의 접두사 리(re)로 생각한다면, 리:퍼블릭은 ‘공공(성)에 다시 주목하는’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는 ‘다시 공공성의 경관과 조경을 지향하는’ 의제라 볼 수 있다. 둘째, 리:퍼블릭의 ‘리’를 ‘~에 대한, ~를 주제로’라는 의미의 전치사 리(re)로 여긴다면,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는 ‘공공적 조경 행위라는 주제’로 해석될 수 있다. 셋째, 리퍼블릭(republic)은 군주제 반대편의 정치 체제인 공화제에 해당한다. 본래의 경관(landscape) 개념에 배태된 수평성을 떠올린다면, 군주제의 수직적 위계와 권위에 대항하는 공화제가 경관 개념과 조응하는 체제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리퍼블릭의 어원인 라틴어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는 ‘일, 사건, 상황, 문제’를 뜻하는 명사 ‘레스’에 ‘공적인’이라는 뜻을 지닌 여성형 형용사 ‘푸블리카’가 결합된 말로, 공적인 일(또는 문제)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는 곧 ‘공적인, 공공의 경관’ 그 자체이기도 하다.
대회의 주제문을 다시 옮긴다. “전 세계는 팬데믹 확산, 기술 혁명, 정치적 갈등과 같은 급격한 변화에 직면해 있다. 건강, 행복, 미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할 사명이 조경 전문가에게 주어졌다. 국지적 지역부터 전 지구적 스케일까지 포괄하는 조경의 다양한 이슈를 논의하기 위해 조경가들이 모인다.
조경의 공공 리더십을 강조하는 2022년 세계조경가대회의 주제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는 다음과 같은 세부 주제를 포괄한다. 조경의 전문적 성취와 학문적 성과를 되짚어보고(re:visit), 부상하고 있는 새로운 이론과 기술을 통해 지구 경관의 재구성을 실험하고(re:shape), 일상의 생활과 환경을 건강하고 활력 있게 되살리며(re:vive), 자연과의 연결을 추구한다(re:connect).”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는 봉건 시대의 장식적 조원 전통과 결별하고 근대 도시의 공공 환경을 구축하는 전문 직능으로 탄생했던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의 이념을 다시 소환하고 회복한다.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는 인류세의 지구가 마주한 기후위기, 도시의 파국, 도시 정의와 형평성, 라이프스타일과 미감의 변동 등 복합적 난제를 풀어갈 조경의 좌표다. IFLA 2022를 통해 제시된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 개념을 구체화하고 실천할 과제가 한국 조경에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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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감각] 작은 잎사귀는 너른 평원이 되고
그냥 풀을 그린 그림,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거죠? 북 페어에서 받은 질문이다. 식물 세밀화는 풀을 그린 그림이 맞고, 그림은 보이는 것이 전부이며, 각자의 감상법이 있기 마련이므로 “보이는 그대로니 천천히 감상해보시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듣자마자 그는 다른 부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풀, 그 잎사귀 한 장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작은 세계가 펼쳐진다. 작은 잎사귀는 너른 평원이 되고, 그 사이를 물길 같은 잎맥이 가로지른다. 울퉁불퉁한 산맥 사이로 하얀 협곡이 구불거리거나, 평행한 녹색 이랑이 끝없이 이어진다. 식물 세밀화는 이런 풍경을 보여주는 그림이라 생각한다. 식물을 매개체로 어떤 의미나 심상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그림을 그린다. 작은 식물의 세계가 작아만 보이지 않도록 캔버스의 크기를 키우고 확대 비율을 높인다. 털, 턱잎, 수술과 암술, 꽃받침, 줄기의 단면처럼 전체 모습에서 보여주기 어려운 작은 디테일도 따로 담는다. 이 작은 풍경들이 누군가의 발걸음을 붙잡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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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 디지코 가든
KT Digico Garden
신뢰의 바탕
모든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발주처와의 신뢰 관계다. 신뢰는 문서화된 화려한 이력에서 시작되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드러나는 깊이 있는 실무 능력과 진정성 있는 자세가 그 근간을 만든다. KT 디지코 가든(KT Digico Garden) 프로젝트에는 색다른 소통 체계가 있었다. 발주처는 KT 내 브랜드 마케팅 부서였고, KT 광고를 대행하는 대홍기획이 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관리했다. 시작은 KT 브랜드 강화를 위해 건축물 벽면을 이용하는 뮤럴(mural, 벽화)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콘셉트 디자인이 진행되면서 조경을 중심으로 한 외부 공간 리노베이션 프로젝트로 바뀌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KT 이스트East 빌딩 부지뿐만 아니라 건물 주변을 둘러싼 종로구청 소유의 가로와 남측 공공 보행 통로까지 대상지로 편입됐다. 그러다 보니 프로젝트가 꽤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히게 됐다. KT와 종로구청의 공통분모가 필요했다. 우리는 광화문광장 숲과 연계한 도시숲 개념을 제안했다. 커다란 공통분모가 생기자 프로젝트는 빠르게 진행됐다.
발주처가 이런 프로젝트에 생소했기 때문에 진행 과정에서 설계사의 역할이 중요했다. 공공 프로젝트 경험이 많고 당시 종로구청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앞으로 일어날 상황을 미리 예측하며 구청 담당자들과 소통해 중요한 이슈를 빠르게 해결해 나갔다. 문제는 디자인을 결정하는 데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대홍기획을 통해서만 계획안을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설계 의도를 명확하게 전달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따라서 전문적인 도면과 용어보다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공간 이미지 위주로 보고 자료를 준비했다. 담당자의 조경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사례를 바탕으로 한 설명회를 자주 가졌고, 농장 답사에 동행해 공간 콘셉트에 맞는 수목과 우리가 원하는 수형의 특징을 자세히 알려주기도 했다. 이 과정 속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더욱 견고해졌고, 결과적으로 설계 의도를 프로젝트에 명확히 반영할 수 있었다.
설계 바깥의 세 가지 조건
원하는 수준의 시공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조경가는 설계 이외의 다른 것들도 알아야 한다. 좋은 콘셉트와 디자인, 충실한 설계 도서만으로 완성도 높은 공간을 만들기 쉽지 않다. 2017년 한국으로 돌아와 진행한 첫 프로젝트의 실패가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당시 최저가 입찰로 선정된 시공사는 여러 이유를 들어 디테일들을 바꾸었고, 현장 감리는 설계자의 의도보다는 공기 단축과 익숙한 방식의 시공을 선호했다. 결국 껍데기만 남고 설계자의 의도가 사라진 조잡한 공간이 완성됐다. 이 실패를 경험으로 삼아, KT 디지코 가든 프로젝트에서 좋은 시공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세 가지 조건을 담당자에게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설득했다. 첫째, 설계자의 의도를 명확히 구현할 수 있도록 돕는 디자인 감리. 둘째, 저가 입찰 방식이 아닌 시공 능력 평가를 통한 시공사 선정. 셋째, 예비비를 포함한 충분한 예산 확보.
광화문광장 사례를 들어 디자인 의도 구현을 위한 비용을 산정하고 진행 방식을 적용했다. 시공사 선정은 객관적 평가를 할 수 있는 서울형 공공조경가와 KT 내부 전문가를 심사위원으로 선정했다. 기본설계 도서를 바탕으로 예산 책정을 위한 공사비를 산정했다. 이러한 전략을 설계와 함께 입체적으로 진행하고, 설계사가 주도적으로 이 방식을 제안하고 이끌었다.
건축가 렌조 피아노, 그리고 조경가
렌조 피아노(Renzo Piano)의 콘셉트 스케치를 보면 지상층과 옥상층이 매우 흥미롭다. 지상 레벨에는 필로티로 띄운 건물 사이에 작은 언덕과 수목이 채워져 있으며, 이동을 위한 최소한의 계단실, 엘리베이터 코어, 에스컬레이터만 배치됐다. 건축물의 방이 시작되는 로비는 필로티로 띄워져 3층 높이에 위치한다. 옥상에는 지상층의 언덕 형태가 180도로 뒤집혀져, 수목을 심기 위한 식재 토심을 확보하는 동시에 주변으로 열린 평탄한 경관을 제시하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점은 지상층을 오로지 공공을 위한 공간으로 쓰며 자연 요소로 채운 계획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로비는 지상층에 시공됐고, 포장으로 둘러싸여 분리된 두 개의 언덕은 법적 기준을 준수할 정도의 녹지로 구현됐다. 전정한 회양목, 현무암으로 포장한 산책로, 듬성듬성 놓은 경관석, 휑한 언덕 위에 설치한 등의자, 특색 없는 교목 등 전형적인 오피스 빌딩의 풍경이 연출됐다. 지나는 몇몇 사람이 간헐적으로 잠시 쉬어갈 뿐 이 장소를 즐기는 사람을 볼 수 없었다.
새로운 풍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렌조 피아노가 제시한 초기 아이디어를 현실 여건에 맞춰 새롭게 각색하고자 했다. 날아갈 듯 가벼운 느낌의 KT 이스트 빌딩이 숲 속 녹지 위에 떠 있는 풍경을 만들고 싶었다. 콘크리트 가장자리에 갇힌 지형을 흐르게 하고 화강석 포장면 대신 두꺼운 녹지를 덧대 너른 자연의 카펫을 만들었다. 자연으로 채워진 공공의 공간, 이것이 설계안의 기초가 됐다.
도심 속 등산 코스
인왕산과 삼각산이 도시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풍경에 감동받은 렌조 피아노는 서울은 ‘자연의 도시’라고 말했다. KT 디지코 가든은 10분 동안 등산을 즐길 수 있는 작은 산이다. 암석 사이로 축축한 이끼와 고사리가 자라고,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와 새소리를 듣고, 짙은 숲 사이로 산책하고, 언덕을 올라 전망 데크에서 도심 풍경을 즐길 수 있다.
KT 디지코 가든에는 두 개의 정원과 세 개의 숲길이 있다. 그늘이 많은 북측 언덕은 음지성 식물을 중심으로 깊은 숲 속 자연을 재현해 바람정원으로 명명했다. 지하주차장 출입구가 있는 남측 정원은 구조적 문제로 토심이 부족하고 일반인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다. 데크 산책로를 주차장 상부까지 연결해 전망대를 설치하고 초지 언덕을 만들어 하늘정원으로 명명했다. 건물 주변을 따라 남측 공공 보행 통로에는 배롱나무 숲길을, 서측 중학천변으로는 버드나무 숲길을 조성하고 길 끝에 정자목이 될 팽나무를 심었다. 동측과 북측에는 이팝나무 숲길을 만들고, 두 길이 만나는 지점에 소사나무를 식재했다. 건물 주변의 녹음이 부족한 가로에는 UHPC(Ultra High Performance Concrete)로 제작한 플랜터를 교호로 배치하고, 줄기가 많은 산딸나무를 식재해 보완했다.
숲을 조성하며 가장 많은 공을 들인 곳이 바람정원이다. KT는 가로에서 필로티 내부의 풍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와 식물을 빽빽이 심기를 원했다. 그런데 정원 산책로에서 가로변 소셜 에지(social edge)까지의 녹지 폭원이 6~7.5m 정도에 불과해 큰 수목만으로는 의도한 풍경을 연출하기 어려웠다.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서로 다른 높이의 꽃산딸나무, 팥배나무, 산딸나무, 산단풍을 3m 간격으로 식재했다. 교목 사이에는 생강나무, 함박꽃나무, 덜꿩나무, 좀작살나무, 낙상홍 등을 배치했다. 또한 가로변 소셜 에지를 따라 중간 키 정도의 귀룽나무, 마가목, 자작나무, 낙상홍 등을 바깥으로 기울여 심었다. 이처럼 지형에 맞춘 세 개의 층위로 나눠 식재해 깊이가 느껴지는 숲을 만들고자 했다.
또 하나의 식재 전략으로, 식물의 가지나 잎사귀가 신체에 최대한 접촉할 수 있게 수목을 산책로 가까이에 배치했다. 도심 속 휴게 공간에서 잎사귀에 뺨을 맞는 경험을 주고 싶었다. 어른 키 높이의 가지가 산책로를 덮을 수 있도록 배식했다. 예를 들어 정문 북측 언덕을 오르려면 신나무의 가지를 피하기 위해 허리를 숙여야 한다. 0.6m 폭원의 좁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산딸나무와 마가목 가지를 눈높이에서 만날 수 있다. 작은 관목과 지피초화류를 산책로 포장면을 덮도록 식재했다.
이런 의도들은 설계 도서만으로는 전달하기 어럽다. 그래서 방성식 시공 현장 소장과 원하는 수형의 수목을 찾으러 여러 농장을 다녔고, 그 과정에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듯 원하는 느낌의 수목을 농장의 나무들과 비교하며 반복적으로 방 소장에게 설명했다. 덕분에 원하는 수형의 나무를 가져올 수 있었다. 그리고 식재 공사 때마다 현장에 방문해 일일이 수목의 위치와 방향을 결정했다. 다른 프로젝트를 병행하는 상황에서 고된 일이었지만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숲 아래 풍경들
하부 식재 연출에 대한 고민이 깊었는데, 이 부분은 전적으로 김수린 팀장에게 맡겼다. 좁은 면적이지만 공간이 깊어 보일 수 있는 속임수가 필요했고, 회화 기법에서 해답을 찾았다. 사용한 식재 기법은 크게 두 가지다. 근경과 원경을 강하게 대비시키는 방법과 그 사이에 중경을 추가하는 방법이다. 근경에는 잎의 채도가 낮고 질감이 거친 식물 관중과 모로위사초 ‘아이스댄스’를 심어 상이 오래 맺히도록 만들었다. 원경에는 잎의 채도가 높고 질감이 부드러운 긴산꼬리풀과 감동사초를 심어 대비시켰다. 그 사이에 경계를 뿌옇게 만들어주는 솔정향풀로 중경을 만들어 공간감이 한층 더 깊어지도록 했다.
남쪽의 하늘정원에는 단조롭지만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는 경관을 연출했다. 필로티 하부 공간에는 내음성이 강하고 생육성이 강한 수국을 군식했다. 주차장 상부 전망데크 주변에는 브라키트리차 새풀을 대량으로 식재해 넓은 들판에 올라가는 듯한 경험을 하게 했다. 바람정원 숲 하부에는 암석원이 있는데, 시공 경험이 많은 안기수 소장(공간시공 에이원)에게 맡겼다. 돌을 놓고 그 사에 식물을 심는 일에는 도면보다 현장의 감각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도심 속 골바람으로 만든 풍경
바람정원 안에는 폭원 6m의 환기구 시설 2개소가 있다. 경관 가치가 높은 장소 앞뒤에 있어 해결책이 필요했다. 특히 최상단의 환기구는 휴게 공간과 인접하게 놓여 있어 수목으로 가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를 해결하고자 미디어 커튼을 제안했는데, 예산 문제로 수경 요소를 접목한 이슬 스크린으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이마저 유지·관리의 어려움 때문에 포기해야 했고, 최종적으로 윈드 웨이브를 계획하게 됐다. KT 이스트 빌딩 일대에는 고층 빌딩이 많아 골바람이 자주 부는데, 윈드 웨이브를 이룬 3,054개의 패널들이 이 바람에 따라 움직이며 아름다운 물결을 만든다. 가로 7cm, 세로 12cm 크기의 알루미늄 패널 표면은 아노다이징(anodizing) 기법으로 마감했는데, 작은 바람에도 움직일 정도로 충분히 가볍다. 바람에 움직이는 패널이 듣기 좋은 청량한 소리를 만들어 청각적 즐거움을 더한다. 일부 패널에는 정원에 심은 식물에 관한 정보를 레이저 가공으로 기록했다. 지금 KT 디지코 가든을 방문하면 개장 이벤트로 윈드 웨이브에 새긴 고래를 만날 수 있다. 최근 흥행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KT 스튜디오 지니가 지분을 투자해 만든 콘텐츠다. 이와 연계한 윈드 웨이브 활용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그 결과 숲 속에 사는 고래를 주제로 한 일시적 이벤트 경관을 연출할 수 있었다.
빛이 그린 수묵화
정원에 빛을 이용해 다양한 풍경을 만들었다. 공간마다 특징이 다른데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 남측 하늘정원이다. 전망데크 주변 초지에 40여 개의 갈대 조명을 균등하게 배치하고 프로그래밍을 통해 빛의 흐름을 연출했다. 북측의 소셜 에지와 팽나무 플랜터, 플랫폼에 놓인 돌벤치 하부에는 선형 조명을 설치해 바닥 공간을 밝혔다. 자연스럽게 어두운 숲과 대비되어 공간의 깊이감이 생겨난다. 가장 특별한 야경은 의외의 공간에서 볼 수 있다. KT 이스트 빌딩 필로티의 거대한 천장과 벽면은 숲의 배경이다. 옆면이 뚫린 직육면체 구조 때문에 낮 동안은 그늘이 져 어둡지만 밤에는 빛이 반사되어 도화지처럼 하얀 면이 된다. 이런 특징을 활용해 바람정원 벽면에 그림자 정원을 만들었다. 잎 모양이 다양한 음지형 지피초화류를 심고 조명을 배치했다. 조명의 각도로 인해 커진 잎 모양의 그림자들이 겹쳐져 일러스트 같은 그림자 숲을 만든다. 필로티 천장에는 수목 가지와 투사등의 거리에 따라 그림자의 농담이 달라져 수묵화 같은 풍경이 연출된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1차 시공을 마치고 조명 연출을 확인하다 발견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광화문광장 일대 변화의
프로토타입을 꿈꾸다
조용준 인터뷰
광화문광장의 숲과 KT 디지코 가든이 멀지 않은 곳에있다. 두 장소는 어떤 관계인가.
광화문광장에서 건널목 하나를 건너면 KT 웨스트 빌딩이 나타나고 이어 대상지인 이스트 빌딩이 나온다. 광화문광장의 의의는 광장 주변을 함께 바라볼 때 발견된다. 광장이 변하면 그 일대도 함께 변한다. 클라이언트인 KT도 이를 인지하고 있었고, 당시 개발 중이던 이스트 빌딩을 광화문광장 개장에 맞추어 함께 열고 싶어 했다. 마침 광화문광장을 만들며 주변 일대의 기본 구상도 진행한 상태라, KT 디지코 가든이 광장 일대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프로토타입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KT 디지코 가든은 본래 KT 브랜드 강화를 위한 프로젝트에서 출발했다. 발주처도 ‘공공의 숲’이라는 개념이 홍보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데 동의했나. 좀 더 많은 사람들을 KT 디지코 가든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어떤 전략을 사용했나.
시작은 잭과 콩나무를 콘셉트로 한 뮤럴(mural, 벽화) 프로젝트였는데, 벽화 주변의 조경에 대해 논의하며 점차 조경 중심의 프로젝트로 바뀌게 되었다고 들었다. 단순히 보게 하는 공간보다 체험하는 공간이 사람들에게 더 크게 다가갈 수 있다고 설득했다. 아모레퍼시픽 사옥을 비롯해 오픈스페이스를 통해 브랜드를 강화한 프로젝트 사례를 많이 보여주었다. 또 광화문광장을 방문한 사람이 결국 식당을 찾아 빌딩가를 찾을 것이고, 숲이 매력적인 빌딩에 더 오래 시선을 둘 것이고, 밥을 먹은 사람이 숲을 거닐며 자연스럽게 KT에 대해 알게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콘텐츠 요소도 넣었다. 대상지 모퉁이에 커다란 팽나무가 있는데, KT가 지분을 투자한 인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의 한 장면에서 따와 심은 것이다. 정자목을 넘어 팽나무가 KT의 콘텐츠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대상지 내 윈드 웨이브에도 우영우를 상징하는 또 다른 요소인 고래 이미지를 삽입해 홍보 효과를 꾀했다.
광화문광장을 비롯해 주변을 거닐던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새로운 매력적인 숲이 필요했다. 우선 나무를 밀식해 도심에서 만나기 어려운 빽빽한 숲의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다. 지나는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도록 주변을 걸을 때 어디에서나 녹지를 발견할 수 있게 했다. 대상지 북쪽에 지하철역 입구가 있는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역을 빠져나올 때부터 숲으로 들어선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양 옆에 넉넉한 녹지를 조성했다. KT 이스트 빌딩 입구의 양쪽이 유리로 되어 있어 이곳에 근무하는 이들은 숲으로 출근해 숲에서 퇴근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렌조 피아노가 그린 녹지의 선형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했는가. 기존 설계안에서 수용한 부분과 수용하지 않은 부분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과거 대상지는 언덕이 없는 평평한 관아 터였으므로, 과거의 지형에서 비롯된 선형은 아니다.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렌조 피아노의 인터뷰를 찾아봤는데, 내사산으로 둘러싸여 그 지형에 의해 만들어진 서울이라는 도시에 큰 감명을 받았다더라. 그 결과 KT 이스트 빌딩 하부의 거대한 언덕을 계획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언덕이라는 콘셉트가 굉장히 좋아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었으나 필로티 하부에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아마 계획 초기에 개입할 수 있었더라면 건물 바깥으로 언덕을 둘러 숲으로 만들고, 필로티 하부를 숲에 둘러싸인 오픈스페이스로 조성해 식물이 생육하기 좋은 환경을 마련했을 것이다. 우선 법적 기준에 맞춰 콘셉트 위주의 도면을 다듬었다. 렌조 피아노의 안에 따르면 지상층 전체가 숲과 같은 언덕으로 덮여 있고 가장자리가 자연스러운 녹지로 마무리되지만, 실제 부지는 콘크리트 포장 도로로 둘러싸여 있다. 최대한 원 계획과 가까운 공간을 만들기 위해 일부 가장자리를 허물어뜨리고 언덕이 이를 넘어오게 해 더 많은 자연을 만들고자 했다.
이미 완성된 외부 녹지 공간을 부수고 다시 대규모 언덕을 조성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정해진 공사비 안에서 공간을 바꿔야 하는 게 쉽지 않았다. 구조를 바꿀 경우, 언덕 조성과 수목에 예산을 사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전략적으로 구조는 최대한 그대로 유지했다. 또 다른 문제점은 이 언덕이 지하 공간 위에 만들어진다는 점이었다. 지하 공간 위의 녹지에 나무를 더 심을 경우 하중이 늘어나 구조적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토양을 적당히 걷어낸 뒤 식재를 진행했다.
정원 대신 숲, 산책 대신 등산이라는 단어와 콘셉트를 사용한 이유가 궁금하다.
렌조 피아노의 아이디어를 단순히 형태적으로 차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내사산에 둘러싸인 풍경에 감동받아 언덕을 계획했으니, 이곳에서 작은 산을 경험하게 하고 싶었다. 평지를 걷다가 오르막을 오르기도 하고 높은 곳에 다다르면 전망을 즐길 수도 있는 등산 코스를 떠올렸다. 대상지에 처음 방문했을 때, 점심을 먹고 난 직장인들이 담배를 피우거나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건너편 커피숍에 앉아 수다를 떠는 게 휴식 활동의 전부였다. 단순히 쉬어가는 정원보다는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자연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해 보였다.
공간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 언덕, 식물, 콘크리트 구조물을 사용해 높이를 만들었다. 어떤 원칙을 기준으로 삼았나.
대상지가 북측에 있는 데다 필로티 하부라 어두워 식물 생육이 어려운 조건이었다. 게다가 차량이 진입하는 곳의 경우 구조가 약해 상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과 같은 공간을 만들기 어려웠다. 이곳에 빽빽한 숲을 만드는 대신 올라서면 탁 트인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를 만들어 임팩트를 주고자 했다. 폭원이 7m밖에 되지 않는 녹지에는 나무가 최대한 길과 밀착되도록 심고, 사이사이에 관목을 배치했다. 더욱 두꺼운 숲을 만들기 위해 키 큰 수목과 작은 수목을 다채롭게 심고, 되도록 줄기가 많은 수목을 사용했다. 이곳을 거닐다보면 잎사귀나 나뭇가지에 뺨을 맞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만큼 길 가까이에 나무를 심었다. 도시민들은 의도적으로 나무에 몸을 부딪치지 않는 이상 잎사귀와 나무를 몸으로 느끼는 경험을 할 수 없다. 하지만 KT 디지코 가든에서는 길을 오르려면 나뭇가지를 피해 고개를 숙여야 하고 수시로 온몸에 잎사귀가 닿는다. 대상지 가까이에 흐르는 중학천은 큰 기회 요소가 되었다. 이 작은 천이 산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실개천의 역할을 해준다. 천변을 따라 버드나무를 심었는데, 상위 계획에 따라 중학천이 복원되면 이 녹지가 도시 차원으로 확장될 것으로 보인다.
주요 소재로 콘크리트와 돌을 사용한 이유는?
렌조 피아노는 가볍고 건물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투명성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난간 등 여러 시설물을 얇게 만들고 멀리서 보면 가는 선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콘크리트는 렌조 피아노가 선호하는 소재고, 건물과 잘 어울려 많이 사용했다. 콘크리트로 해결할 수 없을 때는 돌을 사용했다. 지면과 돌이 만나는 부분을 안쪽으로 들어가게 해 그늘에 숨긴 뒤 선형 조명을 설치했는데, 이렇게 하면 돌로 만든 시설물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여 돌의 무거운 느낌을 덜어낼 수 있다. 간혹 긴 선형의 홈이 파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더글라스 정원에도 사용했던 나만의 디자인 시그니처로 수평성과 깊이를 강조하는 디테일이다.
소셜 에지는 본래 콘크리트 앉음벽만 있던 공간인데, 바로 뒤에 경사가 진 화단이 있어 비가 내리면 흙과 자갈이 계속 흘러내리는 문제가 있었다. 이 불편을 덜어내기 위해 화강석을 둥근 형태로 덧대 화단과 앉는 공간 사이에 자연스러운 턱이 생기게 했다. 본래는 하나의 조각을 길게 만들어 최대한 이음매를 적게 만들 계획이었으나, 도면과 실제 현장의 여건이 달라 시공을 진행하며 미리 제작한 조각을 잘라가며 이어 붙여야 했던 점이 조금 아쉽다.
주변 길과의 관계를 고려해 설계한 부분이 있다면?
도면에서 붉은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실제 대상지인데, 선 안쪽만 설계할 경우 숲과 같은 공간을 만들기 어려웠다. KT와 종로구청의 협의를 통해 종로구 부지 일부도 함께 손을 볼 수 있었다. 일종의 기부채납을 한 셈이다. 부지를 두른 네 개의 길을 각기 다른 테마의 산책로로 만들었다. 전문가의 관점에서는 작은 부지에 너무 많은 요소가 있다고 느낄 수 있지만, 실제로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작은 공간에서 다채로운 경험을 하기를 원한다. 중학천변에는 천변 식물을 모티브로 삼아 숲을 만들고, 광화문광장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삼봉로 모퉁이에는 커다란 팽나무를 심었다. 북쪽 길에는 이팝나무 플랜터를 놓아 숲길을 만들었다. 남쪽의 경우, KT가 독특한 수목을 심기를 원했던 길이다. 본래 요구했던 수목은 동백나무였으나 서울에서 생육이 어렵기 때문에 동백 못지않게 화려한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를 심었다. 내년 여름이면 이 부근이 분홍빛으로 물들 것으로 기대된다.
보고 자료에서 ‘조경과 기술을 결합한 문화 공간’, ‘인식의 변화 X세대, 인식의 확산 MZ세대’ 등 고객 경험개선 전략을 설명하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현재 조경과 기술의 접목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나. MZ세대가 공간을 이용하는 방식이 조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의견이 궁금하다.1
조경과 기술의 결합은 아직 풀기 어려운 문제다. 디지코(Digico)는 디지털과 텔레콤의 합성어로 KT가 통신 회사를 넘어 디지털 플랫폼 기업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단어다. KT 디지코 가든에도 그 의미를 담고자 기술을 접목한 공간을 조성하려 노력했다. 천으로 된 미디어 스크린을 계획하기도 했다. 스크린이 자유롭게 여닫히고 안쪽에 가상현실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두어 가상과 진짜 자연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기술력의 문제로 실현할 수 없었다. 사물인터넷IoT을 이용한 식물 유지·관리 계획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KT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MZ세대는 핫플레이스를 많이 찾아다니는 세대다. SNS에 그들이 올리는 콘텐츠 자체가 홍보 효과를 내기 때문에 외부 공간이 어떤 색다른 경험을 주느냐가 중요해진 것이다. KT를 비롯해 많은 클라이언트도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다.
김수린 작업 초기 워크숍 회의 중, KT의 통신 기술을 조경 공간에 도입하면 어떨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외국 사례도 찾고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검토도 해봤지만 실현하지는 못했다. 개인적으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기술력이 부족하다. 둘째, 조경과 기술을 결합했을 때 효과가 부족하다. 결국 조경은 식물과 더불어 휴식하는 공간을 만드는 행위다. 휴식 공간에 어떤 기술이 필요할까? 필요하긴 한 걸까? 우리는 수많은 기술과 정보로 복잡한 시대에 살고 있다. 출근할 때도, 일할 때도, 쉴 때도, 잠들기 직전까지도 너무 많은 정보를 읽고 흡수한다. 우리 세대는 어쩌면 너무 많은 정보에 질려버린 세대가 될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조경 공간에도 기술이 도입된다면, ‘알아서 잘’ 해주는 기술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어떤 기술이 쓰였는지 알고 싶지 않다. 기술이 정보를 알아서 잘 해석하고 반영해 우리 세대를 편하게 해줬으면 좋겠다.
이지현 IoT를 공간 구성 요소로 더하면 사용자에게 감각적 경험을 선사할 수 있다. 이런 기술을 사용하려 한다면, 자신의 의도를 담은 공간이 시설물과 기술의 접목에 국한되어 보이지 않게 하는 세심한 계획이 필요하다. 더불어 적절한 기술을 제공할 수 있는 곳을 알아야 하고, 기술 제공자에게 기획 의도를 설명해 실현까지 이어갈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설계자는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현상과 이치를 끊임없이 배워가야 한다는 걸 다시 깨닫는다.
오혜지 어떤 부분에 집중을 하느냐의 차이라 생각한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에 대해 고민한 거라면 스마트 패널 정도에서 멈추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기후변화로 인한 불편함과 식물의 유지·관리 부분을 다루고 싶다면 기술력 향상이 필요할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로 넘어가며 활동의 제한이 풀린 최근, 시각적이고 동적인 콘텐츠에 대한 욕구가 강한 MZ세대의 경험과 관심을 끌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숲이 인공지반 위에 만들어진 데다 필로티 하부에 놓여 식물이 생육하기 좋은 환경이 아니다. 유지·관리 계획을 어떻게 세웠나.
결국 환경에 맞는 식생을 선택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식물이 죽는다. 최대한 식물 생육이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관수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구축했다. 유지·관리의 문제는 결국 돈의 문제이기도 하다. 식물을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인력과 시스템이 있다면 처음과 같은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 식물 유지·관리에 대한 KT의 의지가 강해서 다양한 수목을 밀식할 수 있었다. 디지코 가든뿐만 아니라 기부채납한 부지까지 지속적으로 관리할 예정이다.
각주 1.KT 디지코 가든 프로젝트를 함께한 김수린, 이지현, 오혜지에게공통 질문을 던져 이메일로 답을 받았다.
글 조용준 CA조경기술사사무소 소장
설계 총괄 및 감리 CA조경기술사사무소(조용준)
설계 CA조경기술사사무소(김수린, 이지현, 오혜지)
시공 조경디자인 이레, 공간시공 에이원
발주 KT, 대홍기획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3길 33
면적 5,620㎡
완공 2022. 8.
사진 안상순
2004년 설립된 CA조경기술사사무소는 작은 공간의 설계부터 도시 스케일의 계획에 이르는 국내외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해왔다. 창의적인 생각으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며, 공공을 위한 의미 있는 장소를 만들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 www.cadesign.co.kr
조용준은 작은 공간부터 도시 스케일의 계획에 이르는 국내외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해왔다. 창의적인 생각으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며, 공공을 위한 의미 있는 장소를 만들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 www.cadesign.co.kr
김수린, 이지현, 오혜지는 CA조경기술사사무소의 일원이다. 김수린 팀장을 주축으로 이지현 대리와 오혜지 사원은 KT 디지코 가든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