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화문광장] 비평: 설계가의 역사학
지난 『환경과조경』 지면(2019년 3월호)에서 광장의 정치성에 관해서는 충분히 논의했다. 여러 논객이 말했듯이 광화문광장 디자인을 정치라는 프레임으로 논의하는 것은 우리 조경가에게는 소모적이다. 광장의 탄생이, 그리고 그간 광화문광장의 쓰임새와 그에 따라 만들어진 상징이 결코 무정치적이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광장의 정치성에 관한 논조가 민주주의의 본질과 광장의 기능의 관계와 같은 생산적인 내용이 아니라 특정 정파의 상대편을 공격하기 위한 정치 논리에 봉헌하는 메타포로 사용되는 현실이 아쉽다. 프랑스 정치철학자 자크 랑시에르가 진단하듯, 현재 민주주의의 위기는 우리의 목소리를 대표한다고 여겨진 대의제 시스템의 위기다. 그러므로 광장은 그러한 특정 정치 집단이나 권력의 소유물로서가 아니라 그간 소외되어온 수많은 주체의 목소리가 울릴 수 있는 무대로 기능하면 된다.
설계가의 역사학
새로운 광화문광장은 막 50년을 지나고 있는 한국 조경의 궤적에서 한국의 역사와 정체성의 공간화 방식으로 중요하게 논의할 만한 작품이다. 역사가가 유물, 유적, 문화재를 사료로 간주하고 원형의 보존에 관심을 가진다면, 설계가는 그 사료의 가치를 고려하고 창의적으로 활용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가는 방안을 탐구한다. 설계가는 제도의 한계에 봉착하더라도 잔존하는 유적, 이제 사라졌지만 분명 존재했던 장소에 대한 대중의 기억을 다양한 방식으로 공간에 불러들인다. 어느 부지에나 역사는 누적되어 있기 마련이지만, 역사가 중심 문제로 제기되는 공모전의 출품작을 들여다보는 것은 무척 흥미롭다. 설계가가 역사를 공간화하는 여러 방식 중에는 현실 제도 아래에서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경우도 있지만, 창의적 아이디어는 우리가 역사를 새롭게 경험하고 대면하는 대안적 방법을 제공한다. 경직된 현실 제도에 균열을 일으켜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오히려 설계가의 상상적 역사학에 있다고 믿으며, 그런 미래를 상상하면 즐겁다.
설계가가 역사학을 풀어내는 방법은 다양하다. 누군가는 부지에 잔존하는 구조물이나 지층을 비롯해 역사를 간직한 물질을 이용해 방문객이 과거를 체험하게 한다. 잔존하는 물질이 역사적 가치가 높으면 원상태로 남기고, 상대적으로 가치가 덜하면 창의적으로 변형한다. 적당한 물질이 없을 경우 새로운 구조물과 시설을 만들어 장소가 지닌 상징성이나 대중이 지닌 집합 기억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역사를 공간에 물질화할 때 과거의 형상을 그대로 빌려오기도 하며, 단순한 형태로 추상화하거나 재해석하기도 한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역사적 상징, 옛 조경과 건축 설계의 원리나 구조를 빌려 부지의 얼개를 짜고 생태 시스템을 구축하기도 한다.
한국의 정체성 공간화하기
조경가는 오래 전부터 한국의 정체성을 공간에 구현하는 방식을 탐구했다. 한국성을 늘 과거형으로만 다뤘던 건 아니지만 대체로 조경가는 그것을 역사에서 끄집어내고자 했다. 정체성은 고정된 실체라기보다 어떤 본질을 간직한 채 끊임없이 변화한다.1 어느덧 반세기를 넘어선 한국 조경에서 한국성의 내용과 이를 공간에 구축하는 방법도 부단히 달라졌다.
파리공원(1987)은 예술 작품으로 평가되는 한국 조경의 초기 작품 중 하나로, 한국성을 공간에 투영한 대표적인 작업이다. 대부분의 조경가는 태극무늬를 변형해 얻는 조형적 공간 구성과 패턴이 인상적이라고 상찬했지만, 전통 문양과 전통 정원 요소의 직설적 모방에 대해서는 못마땅하다는 시선이 제기되기도 했다.2
여의도공원(1999)은 조경 설계에서 전통을 이용하는 방식에 대해 회의론을 불러일으켰다. ‘여의도광장 공원화 설계현상공모’(1996) 출품작들은 대체로 전통 사상을 구조와 기능으로 변역하지 않고 그 어휘를 공간을 단순히 분할하는 도구로 차용했다. 장소의 성격을 고려한 재해석 없이 전통 조경 시설을 늘어놓기에 급급했다.3 이후 전통에 대한 현대적 해석의 실험은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다(물론 희원(1997)처럼 전통의 정수를 현대적으로 재현하는 좋은 작품은 만들어졌다). 전통 시설물의 외피를 두른 시설이 양산되어 전국 곳곳에 심겨졌지만 정작 우리의 옛 역사를 현대적 어휘로 번역하는 실험은 부족했다. 도리어 전통 요소를 뒤처진 것으로 치부하고터부시한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조경가는 전통에 대해 우상파괴자(iconoclast)가 되는 대신 반-전통주의(anti-traditionalism)를 자처한 것 같다.
밀레니엄을 전후로 조경가들은 부지의 먼 역사가 아닌 근대 이후의 역사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학계는 지역성과 장소성,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을 탐구했고, 실무에서는 가동을 멈춘 산업 경관을 오픈스페이스로 전환하는 설계가 많아졌다. 폐허의 거친 물성은 조경가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이러한 근현대 산업 역사의 영웅화에 눌려 부지의 오랜 역사는 묻혔다. 현대 조경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선유도공원(2002)에서 조선시대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선유정이 공원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고전통을 직설적으로 흉내 낸 전통 시설물이라는 이유로 비평 대상이 되기도 했다.4
시간은 흘러 전통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진화했다. 대중의 취향이 변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스스럼없이 한복을 입고 활보하는 젊은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경 설계에서 전통을 다루는 새로운 감수성이 출현했다. 역설적이게도 외부인의 시선을 경유하여 전통의 디자인 요소로서의 가능성이 실험됐다. 외국인의 관점을 오리엔탈리스트의 약탈적 시선으로 낙인찍는 대신 그들에게 없는 한국만의 특성을 보는 하나의 시선으로 받아들일 자신감이 우리에게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2012) 당선작 ‘치유의 공원(Healing: The Future Park)’은 한국의 전통 사상을 관념적으로 다루지 않고 자유로운 형태 생성의 디자인 모티브로 이용했다. 일견 클리셰처럼 다룰 가능성이 농후한 오작교를 새 모양의 장식이 달린 아름다운 교각 구조물로 디자인했고, 다목적 오픈스페이스 역할을 했던 전통 요소인 마당을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적재적소에 배치했다.5 삼천리금수강산 모티브는 지형을 만드는 틀이자, 도시 주변에 산재한 계곡을 비롯해 수려한 경승지를 즐겼던 옛 산수 문화의 현대적 복원에 효과적으로 활용된다. 그간의 문제는 전통이라는 소재가 뒤쳐진 데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를 디자인하는 감각이 새롭지 못했던 것에 있었다.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설계공모’(2019) 당선작 ‘깊은 표면(Deep Surface)’은 조경가의 역사학이라는 타임라인에서 이 다음에 위치하는 중요한 작품이다.
깊은 표면의 분위기
깊은 표면은 형용 모순적 어휘로 이루어진 이름이다. 지하 도시와 지상을 연결하는 실체적 행위를 연상시키면서도 다소 형이상학적으로도 들리는 오묘한 언어였다. 깊은 표면이 제안한 광장의 분위기는 ‘역사’와 ‘일상’으로 대표된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을 슬며시 밀어내 친근한 조각품처럼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동상이 지배하던 광장의 위엄을 누그러뜨리고, 대신 그곳에 조선시대의 상징적 경관을 복원했다. 깊은 표면의 조감도는 북악산-광화문-광화문광장으로 이어지는 축을 강조해 조선시대의 역사성을 강화했다. 북악산을 살짝 비켜 앉힌 광화문의 아름다운 경관, 산세와 추녀선이 그려내는 유려한 하늘선이 막힘없이 드러났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광장 양측에 도열한 재질과 형태가 불균질한 거대한 건물군의 파사드를 캔버스 삼아 한양의 내사산을 투영해 한국적 경관을 재구성했다. 동궐도와 경기감영도를 비롯한 옛 산수화와 현재 서울의 색감을 제대로 파악해 묘사한 한 폭의 그림이었다.이 조감도는 West 8이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 당선 이후 선보인 산수화풍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했다. 치유의 공원의 이미지는 공모전 이후 그린 관념적 그림이다. 깊은 표면의 이미지는 더 나아가 도면으로 구현됐다. 북악산과 광화문이라는 실재하는 경관, 내사산이 투영된 미디어 파사드라는 경관에 둘러싸인 나를 상상했다. 근래 유행하는 몰입형 미디어 아트를 경관 디자인에 활용한 흥미로운 시도로 보였다.6
*환경과조경415호(2022년 11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1. 최정민, “현대 조경에서의 한국성에 관한 연구”,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각주 2. 박준서, “기념성과 실용성의 조화”, 『환경과조경』 2005년 1월호, pp.124~125; 배정한, “한국 조경의 변화와 주요 작품”, 『한국조경의 도입과 발전 그리고 비전: 한국조경백서 1972-2008』, 환경조경발전재단, 2008, pp.246~247.
각주 3. 조경진, “패러노이아: 의미과잉 속의 한국현대조경”, 『Locus 2: 조경과 비평』, 조경문화, 2000, pp.131~147.
각주 4. 배정한, “시간의 정원, 발견의 디자인”, 『조경의 시대, 조경을 넘어: 배정한 조경비평집 1』, 도서출판 조경, 2007, p.62
각주 5. Myeong-Jun Lee, “Transforming Post-industrial Landscapes into Urban Parks: Design Strategies and Theory in Seoul, 1998–present”, Habitat International 91. 2019, pp.1~13.
각주 6. Myeong-Jun Lee, “Ecological Design
이명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에서 오랫동안 공부하다가 2020년, 안성으로 이사와 한경대학교 친구들과 즐거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최근에 코로나에 확진되었다. 이때다 싶어 원고를 썼다. 지루하고 권태로운 격리 생활에서 벗어나 저 문만 박차고 나가면 바로 광장이겠지 상상하면서 원고를 마무리했다.
-
[광화문광장] 비평: 교차하는 표면들의 좌표
광장에 온 사람들은 모두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도 영원히 만나지 않을 평행한 선들로 구획된 도로였던 곳에 주어진 선택지는 앞으로 나아가거나 반대로 돌아서 가는 것, 오직 두 가지뿐이었다. 역사적인 변화에 대한 평가는 대개 진보나 퇴행으로 수렴되나, 그것은 상대적인 판단이다. 변화의 방향이 아닌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이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는 흔한 정치적 수사도 누군가에게는 그와 반대로 여겨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광화문광장은 그 이전에 비해 어떤 종류의 진전 혹은 퇴행을 보여주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자신이 어느 방향을 보고 서 있는지를 묻는 것일 수 있으나, 그에 답하는 것이 쉽지 않은 까닭은 광장의 바라보는 시선이 앞과 뒤, 둘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는다는 데 있다. 킴벌리 크렌쇼(Kimberlé Crenshaw)가 제시한 교차성 이론은 이 같은 다면적 대상을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눈으로 분석할 수 있는 하나의 틀을 제공한다. 앞서 그는 한 사람에 대한 차별 혹은 우위를 야기하는 사회적 위치가 단일한 범주로 구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낸 바 있다. 크렌쇼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인종과 젠더, 계급, 종교, 지역 등 다양한 차원에서 발생하는 소수성과 다수성의 상호 교차 및 중첩의 결과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장소에 대해서도 그것을 긍정 또는 부정할 수 있는 유일한 잣대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광화문광장 위에는 진보 또는 퇴행을 가름하는 복수의 표면들이 서로 맞물리며 교차하고 있기 때문이다.
축: 회복과 파괴
월대 복원은 새로운 광화문광장을 이루는 하나의 축을 암시한다. 그것은 경복궁 남측과 접한 역사광장의 조성, 그리고 궁궐의 축에 따라 편측으로 만들어진 시민광장의 배경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1990년대 시작되어 총독부 철거와 광화문 복원을 거쳐 앞으로도 20년 이상 이어질 문화재청의 경복궁 2차 복원 정비 사업의 한 단계이자 반세기에 걸친 거대한 흐름의 일환이다. 새로운 광화문광장은 적어도 당선안을 기준으로 볼 때 그러한 흐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심사평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당선안의 가장 큰 강점은 ‘역사적 축을 강렬히 형성’한 것이었다. 또한 당선안은 북악산으로부터 경복궁으로 이어지는 자연의 흐름을 광장과 주변 건물 옥상으로 연장했으며, 미디어파사드라는 현대 기술을 통해 주변의 도시 경관들을 대신하여 내사산이라는 과거의 풍경을 불러들였다. 여러 계획적 요소를 종합적으로 나타낸 투시도는 설계안이 이 장소에 과거의 어떤 시점을 투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공모 전반을 기획한 것으로 알려진 심사위원장 승효상은 지속적으로 서울이 가진 역사적, 자연적 축의 회복을 강조해왔다. 최근의 사례는 West 8의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 당선안일 것이다. 승효상은 여기에서 ‘남산과 세운상가, 종묘와 북악산을 거쳐 백두산으로 흐르는 축의 연결’을 강조했다. 용산공원 당선안의 조감도와 새로운 광화문광장의 투시도는 주변의 현대적 경관을 의도적으로 희석한 반면 저 멀리 뒤편에 그려진 산수화와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로 연결되는 그림처럼 보인다.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 국제설계경기’에 승효상이 민현식과 공동 응모한 작품은 그러한 관점이 드러난 가장 앞선 시기의 프로젝트 중 하나로, 건축가 정기용은 해당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남산과 관악산을 선으로 이음으로써 상승하는 삼각형 마당을 보여주었다. …… 결과가 발표됐을 때 그래도 조그만 기쁨이 있었는데, 그건 이들의 안이 유일하게 ‘서울’이라는 땅을 커다랗게 가늠한 것이었기 때문이다.”1
정기용의 말처럼 기울어진 계획안의 삼각형 마당에서 바라본 남측과 북측 투시도는 주변의 풍광을 가리는 양 옆의 건물군 사이로 각각 관악산과 남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로운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 뒤편 광화문역 연결 통로에서 세종문화회관 방향으로 진입하는 경사면, 해치마당에서 바라본 풍경은 승효상과 민현식의 국립중앙박물관 설계안의 ‘상승하는 삼각형 마당’과 일정 부분 닮아있다. 좌우의 광화문 계단과 미디어월은 광장에 진입하기 전, 주변의 건물군을 시야로부터 은폐하고 오직 광장의 수평면 위로 북악산의 모습만을 남겨둠으로써 잠시나마 과거의 경관을 체험케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특정 시점을 도시에 투사하는 경향은 비단 서울뿐 아니라 여러 장소에서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통일 뒤 15년간 통독 베를린의 총괄계획가였던 한스 슈팀만(Hans Stimmann)은 장벽이 가르고 있던 포츠담 광장(Potsdamer Platz)을 나치 이전의 도시 구조로 되살리는 ‘비판적 재건’ 기조 아래 만들고자 했다. 당시 ‘포츠담 광장 국제설계경기 심사’에 참여했던 렘 콜하스(Rem Koolhaas)는 사퇴 후 일간지에 다음 내용을 담은 공개서한을 발송했다. “(포츠담 광장) 공모 심사는 나의 건축 활동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이 같은 자멸적 행위가 국제 설계공모라는 구실을 필요로 함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파렴치함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광장이 현대 건축의 경연장이 되는 것을 막아낸 한스 슈팀만은 퇴임 후 베를린을 최악과 최고, 모두로부터 구해냈다는 평가를 얻었다. “복원이라 부르는 것은 파괴의 가장 나쁜 수단”이라고 했던 존 러스킨(John Ruski)n의 말이 건물뿐 아니라 도시와 경관에도 해당될 수 있다면, 용산공원과 광화문광장처럼 역사적 아픔을 가진 ‘한 많은 땅’을 치유하는 방법들 가운데 ‘그 사건들 이전과 가장 가까운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은 현재로서 가장 파괴적인 선택 중 하나일 수 있다.
동상: 탈식민과 근대화
해치마당을 등지고 선 이순신 장군 동상의 존재는 새로운 광화문광장이 바라보고 있는 축의 방향과는 전혀 달랐던 동상 건립 당시의 지향점을 증언하고 있다. 당선안은 광장의 한가운데 서 있던 동상을 그와 조금 더 잘 어울리는 것으로 보이는 역사마당으로 이전하고 광장 전체를 비워둘 것을 제안했으나, 여론의 반대가 기존의 자리를 고수하길 원했다.
그 동상이 언제부터, 왜 거기에 있어야 했는가를 묻는 것은 과거의 광장, 즉 세종로가 무엇을 표상하는 장소였는가를 밝히는 일이기도 하다. 세종로에 이순신 장군 동상을 제작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한 것은 반일 정서가 가장 격화됐던 한일협정 이듬해 1966년 광복절이었다. 같은 해 4월과 12월에는 각각 아산 이순신 사당의 성역화 사업과 광화문 복원이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추진되었다. 협정 체결 후 격화됐던 한일협정반대운동은 종료되었으나, 해방 이후 20여 년간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었던 반일 감정의 분출은 일본의 문화와 일상생활에서의 잔재를 청산하고자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3공화국의 연속된 행적들은 일제로부터 독립한 탈식민국가의 민족 정체성 확립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동상의 건립은 근대화를 표상하는 상징거리 경관을 만든 하나의 요소이기도 했다. 당시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앞에 콘크리트로 복원된 광화문의 변경된 건립 위치와 공법, 전면의 현대적인 마천루 양식으로 계획된 두 개의 정부종합청사, 세종로의 차도 확폭은 이순신 장군 동상과 기단 규모의 확대로 이어졌다. 동상 제막식 연설에서 박정희는 위대한 조상 충무공의 정신을 본받는 것은 곧 “조국 근대화의 과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앞선 ‘한일회담 타결에 즈음한 특별담화문’에서 일본에 대한 패배주의와 열등의식은 “근대화 작업을 좀먹는 가장 암적인 요소”라며 이를 넘어서야 한다는 극일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반동적인 성격의 정치 주체에 의해 만들어진 이때의 이순신장군 동상과 콘크리트 광화문은 민족 정체성과 더불어 극일과 근대화를 표상하는 모뉴먼트로서 과거로 회귀하려는 현재의 광장과 달리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당시 시인 서정주는 “콘크리트라면 굳이 광화문을 복원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건 웃음거리 아닌가?”라며 조롱했던 반면, 중건추진위원 중 한 사람인 건축가 정인국은 이를 복원이 아닌 산업화와 경제 발전을 표상하는 최신의 재료와 기술력을 발휘한 하나의 모뉴먼트로 볼 것을 주문했다.
말하자면 오늘날 광장과 동상은 서로 뒤집힌 채 등을 맞대고 있는 상태로, 그 간극은 목조로 복원된 현재의 광화문과 철거된 콘크리트 광화문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깊다. 때문에 동상이 공공 미술로서 지니는 의미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을 수 없다. 발전주의 국가의 경제 성장 모델은 시효를 다해 저성장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도시를 부강하게 만들어줄 혈관이라 믿었던 도로들은 이제 공원과 보행로에 자리를 내주어 도시의 숨길이 되었다. 중앙청과 그 정문 역할을 했던 콘크리트 광화문은 철거되어 서로 다른 박물관의 전시품이 되었고, 정부종합청사는 과천, 대전, 세종 등 지방으로 그 부처와 기능들이 분산되었으며, 맞은편 제2정부종합청사가 계획됐던 의정부지는 복원을 앞두고 있다. 민족이라는 정체성 역시 저출생과 인구 절벽이 추동하는 다문화 공동체에서 점차 구심으로서의 힘을 잃어 갈 것이다. GDP와 임금, 구매력에서 한일의 역전 현상이 나타나는 지금 동상이 그렸던 극일과 근대화라는 미래상은 점차 과거의 것이 되어가고 있으나, 그럼에도 오늘날 탈식민의 과제는 경복궁 복원이라는 회귀적인 방식으로 지속되고 있다. 동대문과 남대문이 일제의 도시 건설 과정에서 파괴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가 임진왜란 당시의 왜군 장수의 입성을 기념하려는 목적 때문임을 생각하면, 궁궐의 복원이 곧바로 과거의 극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극일의 표상으로서의 동상과 더불어 탈식민에 대한 강한 콤플렉스를 드러내는 것에 가깝다.
중세 도시의 모뉴먼트와 광장, 건축물의 유기적 관계를 예찬한 카밀로 지테(Camillo Sitte)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이전을 비판적 사례로 언급한 바 있다. 동상의 크기와 색채에 적합한 스케일과 배경, 그리고 주변의 다른 모뉴먼트와의 관계에 따라 조각가가 선택했던 기존 위치에서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옮겨진 동상은 환경과 고립된 요소로서 동떨어져 총체적 의미를 발현하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 동상은 다비드 상과 반대로 자신을 제외한 주변의 모든 환경이 달라져 오직 홀로 과거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어서 그는 광장 중앙에 모뉴먼트를 세우지 않고 비워야 하는 몇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먼저 통행에 장애를 초래할 뿐 아니라 같은 축선 상의 건물 혹은 그 입구를 시야에서 감추게 되고, 다양한 방면에서의 접근이 가능해짐에 따라 복수의 배경을 갖게 되는 것 또한 모뉴먼트의 의미를 드러내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 동상뿐 아니라 전면에서 광화문을 가로막고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배경을 달리하는 세종대왕 동상의 위치는 지테가 지적한 것과 동일한 문제를 지닌다. 이는 공공 미술로서 두 동상의 성패를 결정짓는 지점이자 당선안의 제안대로 동상을 이전해야 했던 이유다.
*환경과조경415호(2022년 11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1. 정기용, “‘비움’에 대한 근원적 성찰”, 『월간미술』 1999년 9월호.
참고자료
강난형, 송인호, “1960년대 광화문 중건과 광화문 앞길의 변화”, 『건축역사연구』 101, 2015.
염운옥, “‘제국의 심장’에서 ‘시민의 광장’으로: 런던 트래펄가 광장”, 『영미연구』 39, 2017.
염복규, “1960-2000년대 광화문 공간의 재구축에서 ‘전통과 현대’”, 『문화와융합』 44, 2022.
카밀로 지테, 손세욱, 구시온 역, 『도시·건축·미학』, 태림문화사, 2000.
오장근, “광장의 언어 지테(Sitte)의 시선에서 바라본 광장의 구조와 의미 이해하기”, 『기호학 연구』 40, 2014.
서울 의정부지 유구보호시설 조성 설계공모 2단계, 서울시, 2022.
정기용, “‘비움’에 대한 근원적 성찰”, 『월간미술』 1999년 9월호.
이은영, 『우리 시대 엘리트의 몫』, 미술문화, 2001.
존 러스킨, 현미정 역, 『건축의 일곱 등불』, 마로니에북스, 2012.
제공건축, ‘우리의 사적인 광장’, 2019. www.jegong.com/blank-2
안진희, 배정한, “광장에 대한 공론의 생성과 공간적 반영”, 『도시설계』 78, 2016.
정평진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고, 건축전문 잡지에서 기자로 일했다. 여러 매체에 도시와 건축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2020 ‘사회적 건축: 포스트코로나 젊은건축가 공모’에서 대상을, 2022년 『환경과조경』 ‘조경비평상’에서 가작을 수상했다. “도시는 공통재(commons)”라는 믿음으로, 공공 공간의 좀 더 사적인 점유 형식과 공개공지 및 공공 미술 등 사적 영역의 좀 더 공적인 활용 방식을 상상하고 있다.
-
캇하레이너 운하
Catharijne Singel
반세기만에 위트레흐트(Utrecht)의 역사적 중심지는 다시 한번 물과 초목으로 완전히 둘러싸이게 됐다. 위트레흐트 구시가지 주변의 운하 복원은 기차역 지역 마스터플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50년 전 10차선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메웠던 운하를 다시 파내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수변을 복원하였다. 대상지는 생태, (수상)레크리에이션, 교통이 정교하게 통합된 녹지와 경사면이다. 자연 친화적인 수변 공간 덕분에 동식물을 위한 더 넓은 장소가 마련되었고, 도시의 녹지가 되살아났다.
역사적 배경
위트레흐트는 로마시대에 세워진 도시다. 수세기 동안 도시는 방어용 성벽과 캇하레이너 운하(Catharijne Singel)로 둘러싸여 있었다. 방어벽은 점차 허물어졌고, 황폐한 상태가 됐다. 조허르J. D. Zocher(1791~1870)가 설계한 공원은 과거의 방어 시설 지역에 대부분 자리를 잡았다.
1958년 캇하레이너 운하는 새로운 순환 도로의 건설로 인해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봉착했다. 수년 간의 논의 끝에 1969년 주요 간선 교통망을 만들기 위해 운하의 물을 빼내는 작업을 진행했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결정이었지만, 현대적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1970년대의 다른 도시 개발과 마찬가지로 이 결정은 위트레흐트 도심의 공공 공간에 재앙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자동차 교통이 활발해지면서 차량을 통한 접근성이 우선적으로 고려됐다. 지역 주민들은 방문객과 자동차 교통에만 일방적으로 초점이 맞춰지는 것을 보며 소외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운하 복원을 위한 많은 캠페인이 생겨나는 등 친수 공간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이 계속됐다.
1980년대 후반 위트레흐트의 기차역 인근 지역 개선을 위한 첫 번째 계획이 수립되었다. 2002년 실시된 국민 투표에서 위트레흐트 주민들은 캇하레이너 운하 복원에 대한 찬성의 목소리를 드러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시정부, 주민과 함께 운하 복원을 위한 새로운 디자인을 만드는 공동 프로세스를 시작했다.
개입의 목표
위트레흐트 중앙역(Utrecht Central Station) 지역 재개발은 네덜란드에서 크고 복잡한 프로젝트 중 하나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역사적인 도시와 기차역을 더 강력하게 연결하여 도심의 차량 통행을 현저히 감소시키고, 자전거 이용자와 보행자를 위한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해 공공 공간의 거주성과 보행성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캇하레이너 운하의 마지막 구역 복원이 이뤄졌는데, 이 프로젝트 대상지의 1,100m 정도가 포함됐다. 전체적으로 약 40,000m3의 물이 운하로 되돌아왔고, 그 전체 길이는 약 6km에 이른다.
디자인 원칙
캇하레이너 운하의 위치와 인근 조허르(Zocher) 공원의 확장을 고려해 교통의 흐름과 관련된 선택지들을 신중하게 마련했다. 몇몇 상황을 제외하고 보행자 동선을 최우선순위에 두었다. 운하를 따라 펼쳐진 광범위한 산책로는 여가와 스포츠 활동에 적합하다. 이용자들은 산책로를 거닐며 장소의 역사, 예술 작품 등에 대한 다양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수많은 좌석 공간에 앉아서 쉴 수 있고, 각기 다른 종류의 초목으로 이루어진 녹지, 그리고 주위를 둘러 싸고 있는 도시의 다양한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기존 조허르 공원의 평면도와 조망을 기반으로 조허르의 디자인 요소 중 새롭게 재해석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조사했다. 그 결과 핵심 요소인 수경 시설이 공간에 개방감을 더하고 수면에 비친 경관을 제공한다는 점, 높낮이를 달리하는 여러 식물 군락이 존재한다는 점, 공원에 대칭적 형태의 보행 경로가 없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상록수부터 연중 개화가 풍성하게 이뤄지는 수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종을 식재에 활용했다. 탁 트인 수공간과 거친 초원, 그리고 식물 군락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다. 조허르의 스타일에서 수변의 선은 공원의 형체가 의도적으로 반사되어 드러나는 세련된 선이다. 기존에 있던 키 큰 식물과 나무가 물에 반사된 모습은 운하와 공원 사이의 시각적 통일성을 만들어 낸다.
포플러, 플라타너스, 자두나무, 느릅나무 등 다양한 수목은 새로운 공원과 기존의 조허르 공원을 연결한다. 나무를 선택할 때 생물학적 다양성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예를 들어 꿀벌과 땅벌을 유인할 수 있도록 단일 수종의 꽃나무를 선정했다.
구운 클링커(옛 라인강 벽돌)와 자갈 같은 재료를 사용해 위트레흐트의 역사적인 도심 내부와의 시각적 연결을 도모했다. 둑 주변에 목재 데크를 설치해 좌석, 무대 등으로 활용하게 했다. 기존의 목재 데크에 하부 구조를 추가하여 레저용 보트뿐 아니라 카누와 노 젓는 배 이용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환경과조경415호(2022년 11월호)수록본 일부
글 OKRA
Landscape Architect OKRA
Engineering Witteveen+Bos
Contractor D. Van Der Steen BV
Client City of Utrecht
Location Catharijne Singel, Utrecht, The Netherlands
Area 4.2ha
Design 2017
Completion 2021
Photograph OKRA, Stijn Poelstra
OKRA는 네덜란드에 기반을 둔 설계사무소로 조경과 도시, 지역 계획을 주로 하고 있다. 긴장감 있는 디테일과 예술적 감흥이 짙은 콘셉트를 통해, 역사와 문화의 결이 두텁고 인구 밀도가 높은 유럽 도시에서 강렬한 어바니즘을 제시해왔다. 도시에 현존하는 맥락과 미학을 존중하며, 다양한 시간적 리듬에 유연하게 적응하는 도시의 장소를 디자인한다.
-
반포르엘
Banpo LE|EL
대상지는 서울에서도 번잡하기로 유명한 센트럴시티(서울고속버스터미널)와 신반포로를 경계로 두고 있다. 주변은 신축 아파트 단지와 재건축 예정인 낡은 아파트 단지가 모여 있는 주거 지역으로,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반포 한강공원으로 접근이 용이한 북측은 중심 상업지면서 한강이라는 극적인 자연 녹지와 인접한 아이러니한 경관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반포르엘은 모든 주거동이 필로티로 되어 있어 건물로 인해 외부 공간이 단절되지 않고, 야외 공간과 반 실내가 반복해서 이어지는 구조다. 비가 오는 날에도 실내에서 바깥의 공기를 느끼고 바라볼 수 있어 단지 전체가 테라스 카페 같은 낭만적인 분위기를 띤다. 이러한 구조적 측면으로 작은 단지의 단점을 극복하고, 평지의 이점을 십분 활용해 공간과 공간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했다. 각 콘셉트가 있는 공간들이 필로티를 통해 연결되니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동하며 다양한 경험을 누릴 수 있다. 갤러리, 활동(액티브), 감성(센서리)이라는 세 가지 콘셉트로 길을 나누어 공간을 배치했다.
갤러리 웨이
남측 주출입구에서부터 북측 단지 보행 출입구까지 이어지는 갤러리 웨이는 다채로운 수 경관을 보여준다. 물과 조경이 만들어내는 경관을 갤러리에서 천천히 소유(溯游)하듯 즐길 수 있다.
주출입구에 설치한 라이트닝폰드는 지하주차장 진출입램프 지붕을 활용한 공간으로, 역보(reversed beam) 끝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정원에 청량감을 더해준다. 지붕면에 적용한 물줄기를 형상화한 디자인 패턴은 커다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이 풍경의 진가는 밤에 더욱 드러나는데, 낮 동안 빛을 받아 밤에 은은한 빛을 뿜는 축광석으로 마감되어 진짜 물결이 흐르는 듯한 빛나는 풍경을 선사한다.
단지 중앙의 아쿠아가든은 원형 패턴의 반복과 물줄기는 내뿜는 연못, 분수를 이용해 경쾌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곡선형의 녹지와 잘 어우러지는 원형의 티하우스는 휴게 공간뿐 아니라 연못 위 폭포의 역할까지 하는 하나의 조형물과 같다. 연못 중앙에는 미술 작품이 있는데, 이는 붓놀림을 형상화한 것으로 시원하게 물이 떨어지는 티하우스의 폭포와 같이 경쾌한 움직임을 나타낸다. 작품과 어우러진 휴게 시설물과 녹지를 보면 야외 갤러리에 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웅장하고 푸른 소나무로 외곽을 둘러싸고 내부 연못 주변으로 붉은색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를 심어 선명하고 밝은 단지 중심 공간의 역할을 하게 했다.
커뮤니티 시설과 연결되는 선큰갤러리는 갤러리의 휴게 공간을 연상하게 한다. 옹벽을 자연스럽게 감싸는 미러폰드의 잔잔한 수면은 선큰 공간의 고요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더욱 드러낸다. 폰드 한쪽엔 미술 작품을 두고, 반대편은 키 작은 수목으로 장식해 편안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공간을 만들었다.
단지 북측의 생태연못에는 자연미와 조형미가 어우러지는 루미에가든을 조성했다. 자연의 풍광을 따온 석가산은 다양한 식재와 다층의 수경 시설로 자연 속에 그대로 들어온 느낌을 준다. 곁에 설치한 티하우스에 앉아 작은 계곡의 풍경과 물소리를 감상하면 생생한 작품을 보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환경과조경415호(2022년 11월호)수록본 일부
글 곽가나 윤디자인스케이프 부장,
이한결 롯데건설 조경담당 사원
사진 유청오
조경설계 윤디자인스케이프
시공 롯데건설
조경 시공 정한조경
놀이 시설 원앤티에스
휴게 시설 스페이스톡
위치 서울시 서초구 잠원동 74-1
규모 596세대
대지 면적 23,726.56m2
조경 면적 10,404.25m2
완공 2022. 8.
-
2022 서울정원박람회
지난 9월 30일부터 7일간 북서울꿈의숲에서 2022 서울정원박람회(이하 서울정원박람회)가 개최됐다. 2015년부터 개최된 서울정원박람회는 올해 7회를 맞았다. 과거 드림랜드가 자리했던 곳에 만들어진 북서울꿈의숲은 강북 지역을 대표하는 공원이다. 칠폭지, 월영지, 청운답원(잔디광장) 등을 갖추고 있으며, 다양한 문화 예술 공연과 전시를 즐길 수 있는 꿈의숲아트센터와 상상톡톡미술관이 공원 내에 자리하고 있다.
‘꿈의 숲 그리고 예술의 정원’을 주제로 작가정원, 학생정원, 시민정원, 팝업가든, 시민정원사 원형화단, 푸른수목원 참여정원을 선보였다. 6월 10일부터 7월 7일까지 진행된 작가정원 공모에는 총 47팀이 참가했으며, 1차 심사를 통해 4개 작품이 선정됐다. 작가정원은 상상톡톡미술관 전면에 조성됐다. 9월 26일 현장에서 최종 심사가 이루어졌으며 9월 30일에 열린 개막식에서 순위가 발표됐다. 구영미·박지연의 ‘내 마음의 산책길’이 금상작으로 선정됐다. 내 마음의 산책길은 햇살과 바람, 식물이 만든 고유한 장면에 몰두해 자연과 밀도 있게 만나는 경험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마음에 온전히 집중하게 하는 정원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2009년 애정을 갖고 만든 북서울꿈의숲 곳곳에 조성된 정원을 보니 처음 공원이 생겼을 때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도심 속 녹지 공간을 늘리기 위해 도시계획 차원의 아이디어를 내도록 유도하고 있다. 도심 속 녹색 공간을 즐길 수 있는 서울로 바뀌어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서울정원박람회를 통해 조성된 작가정원, 학생정원, 시민정원은 행사 종료 후에도 존치된다. 진행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사진 유청오 디자인 팽선민
-
[2022 서울정원박람회] 내 마음의 산책길
Curing Trail
바쁜 현대 사회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내면의 나와 마주하는 시간이 적다. ‘내 마음의 산책길’은 박노해의 시 ‘내 마음의 방’의 정서를 녹인 정원에서 자연의 특성을 활용해 다양한 식물 경험을 제공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자신의 감정에 집중하며 저마다의 마음속을 산책하기를 바랐다.
내 작은 방
머리 위로 빼곡히 나뭇가지가 드리운 숲길을 지나면 나뭇잎 사이로 하늘이 보이고,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뜻하지 않게 꽃의 무리를 마주하게 된다. 살결에 부딪치는 부드러운 그라스 사이를 지나 내 작은 방에 들어서면 컴컴하고 고요한 나만의 작은 세계를 마주할 수 있다. 식물의 향기와 소리만이 있는 작은 방은 새로운 감각을 자극하며 내 안의 순수함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방 안을 비추는 한줄기 햇살은 방문자가 빛을 따라 방 밖으로 나오게 유도한다. 바깥으로 한 걸음 내딛으면 풀과 꽃이 섞인 초지가 펼쳐지고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내 마음의 산책길에서 벗어나게 된다.
방 밖 공간
내 작은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중간목과 관목을 주로 식재해 정원 내부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벽을 연출했다. 교목, 소교목, 관목, 초본을 활용해 층위를 만들고 캐노피로 인해 그늘이 드리우는 아늑하면서도 밝은 숲길을 조성했다. 이 숲길을 거닐며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숲길은 숲 속의 빈터로 이어진다. 그라스와 숙근초화류를 섞어 심어 자연스러운 연결을 꾀했다.
웅덩이(빗물 정원)는 비가 내리면 물이 고이면서 경관이 바뀌는 공간이다. 가장 낮은 부분에는 습지 식물을 식재하고, 사면에는 건조에 잘 견디면서도 습한 환경에 적응 가능한 식물을 심었다. 식물이 지닌 색으로 계절마다 다른 색채의 물결이 일렁이도록 했다.
설계 구영미, 박지연
시공 탐라는 정원, 목공(김진홍 팀), 철공(박상문, 임구현)
구영미는 조경학을 전공하고 12년 정도 조경설계사무실에서 근무했다. 현재는 바우어(bower)라는 이름으로 작업하고, 서울숲 오소정원에서 도시정원사로 활동한다. 매일 아침 반려견 삼순이와 함께하는 산책길과 숲에서 영감을 얻는 정원 디자이너다.
박지연은 숙명여자대학교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하고, 한샘 디자인실에서 십 년간 주거 공간 기획과 디자인을 했다. 이후 식물에 매료되어 조경과 정원을 공부하고 경기정원문화박람회, 서울식물원 식재설계 공모전에 참여했다. 서울숲공원 녹지관리팀에서 3년간 근무하며 느린 산책의 정원, 튤립정원 등을 설계하고 조성했다.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
[2022 서울정원박람회] 꿈을 저울질하는 시소
Juggling Dreams on a Seesaw
사람들이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을 정원에 담아보고자 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꿈을 보았을 땐 아득히 높게만 보이고,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미끄러질 듯한 두려움을 느끼는 모순된 감정을 기울어진 땅으로 비유했다.
사람은 꿈을 이루기 위해 기울어진 땅 위에서 흔들리는 길을 따라 걸어가는 존재다. 꿈과 나 자신의 무게에 균형을 맞추며 나아가다 보면 그 끝에서 찬란한 과정들을 고스란히 담은, 빛나는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시소
꿈하면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밤의 달을 정원에 담았다. 정원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대형 시소를 주요 동선으로 설정해 꿈을 향해 흔들리며 걸어가는 길을 형상화했다. 베어링을 중심으로 양쪽에 압축 스프링을 설치한 대형 시소에서 잔잔한 흔들림을 느낄 수 있다. 방문객들은 시소를 타듯 흔들거리는 길을 걸으며 역동과 균형의 이중적인 감정 속에서 정원을 감상하게 된다.
*환경과조경415호(2022년 11월호)수록본 일부
설계 최윤정, 김동민
시공 드오르, 이안종합조경, 파파스랜드스켚, 아름다운길
최윤정은 2013년 안스디자인 조경기술사사무소를 시작으로 엔지니어링, 정원 설계 등을 하며 8년의 경력을 쌓았다. 2020 코리아가든쇼에서 ‘리틀포레스트’라는 작품을 통해 정원 디자이너로 데뷔했다. 현재 드오르에서 감성적인 색을 가진 정원을 보여주고자 힘쓰고 있다.
김동민은 2013년 조경설계 비욘드에서 근무를 시작해 경호엔지니어링에서 조경 계획 및 설계 경력을 쌓았다. 현재는 희림종합건축사사무소 조경부에서 건축·조경 관련 업무를 하고 있다.
-
[2022 서울정원박람회] 직관적 발아
Intuitive Scenery
정원을 설계·시공·관리하면서 마주했던 가장 경이로운 순간은 바로 추운 겨울을 지나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식물들이 발아하는 순간이었다. 그 약동하는 생명력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동을 선사한다. 정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 자체로 완연한 예술이다. 정원에서 느낀 이 감정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최근 정원과 조경은 아파트의 품격을 높이는 공간의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정원의 본질은 생애 주기를 반복하는 생명에 있고, 자그마한 풀에도 생명이 약동한다. 사그라들고 다시 발아하는 식물의 생애를 직관적으로 접하고 정원과 사람이 교감하는 모습을 그려보고자 했다.
정원
계절마다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요소는 풀이다. 풀은 황량한 땅에서 고개를 들고 굉장한 속도로 자라나며 다시 황량한 땅으로 돌아간다. 이런 특징을 활용해 발아하는 모습이 매력적인 고사리 밭이 펼쳐지게 했다.
수평적으로 펼쳐지는 정원은 다방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한눈에 들어오는 정원은 다각도에서 보는 맛이 덜하지만, 어느 방향에서든 길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정원의 생명력을 보여준다.
*환경과조경415호(2022년 11월호)수록본 일부
설계 장찬희
시공 가드너씨, 조경시공서화, 아름다운길, 와이엠일렉트로닉스
장찬희는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졸업 후 오픈니스 스튜디오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설계와 현장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현재는 회사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다양한 도전을 해보고 있다. 2021 매향리 평화생태공원 작가정원과 2022 서울정원박람회 작가정원에 참여했다.
-
[2022 서울정원박람회] 하얀바람
White Breeze
북서울꿈의숲에는 과거 ‘드림랜드’가 있었다. 드림랜드는 너른 평지에 조성된 다른 놀이공원과 달리 벽오산에 둘러싸여 있으며 계곡에 내려앉은 자연 속 놀이동산이었다. 하얀 빛의 궁전과 높은 하늘 위에 자유로운 곡선을 그린 롤러코스터의 풍경은 지금도 주민들에게 추억으로 남아있다.
밝고 따듯하지만 옅어져 가는 드림랜드의 향수를 공원 위에 다시 불러와 과거를 회상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연결하는 정원을 조성하고자 했다. ‘하얀바람’은 공원의 장소적 의미를 고찰하고 순기능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하나의 공간이자 예술 조각으로, 공원의 다양한 예술 문화와 조화를 이루고 향유하는 정취의 장을 만든다.
하얀바람의 안팎
벽오산에 둘러싸인 놀이공원의 형태적 특징에서 착안해 정원의 프레임을 세우고, 상상톡톡미술관의 건축적 언어, 인접한 시설의 형태와 연계했다. 청운답원(인근 잔디광장)의 지형과 유기적으로 호응하는 조형 마운드는 공원으로부터 정원의 영역성을 형성하는 동시에 다채로운 색감을 지닌 식물의 배경이 된다. 밝고 거친 질감의 벽과 길은 자연과 대비를 이루어 다양한 풍경과 이색적인 경험을 제공하고, 밝고 가벼운 느낌의 조형 루버는 경계가 되어 공원과 정원을 연결한다.
*환경과조경415호(2022년 11월호)수록본 일부
설계 김지학, 설윤환
시공 JK+, 다인조경스케치, 쌔즈믄, 전국자연석, 와이엠일렉트로닉스
후원 조경설계 서안, 오픈니스 스튜디오, HEA, 자연감각
김지학은 2017년 자연감각에 입사해 실무를 익혔고, 중국 베이징의 리드스케이프(Leedscape)에서 다수의 설계공모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현재는 오픈니스 스튜디오에서 정원 디자인 실무 경험을 쌓고 있다. 2019 경기정원문화박람회 작가정원, 2021 매향리 평화생태공원 작가정원에 참여했다.
설윤환은 단국대학교 녹지조경학과를 졸업했다. 조경설계 서안에서 정영선 대표에게 자연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이진형 소장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의미 있고 소중한 공간을 만들어가는 훈련을 하고 있다.
-
[어떤 디자인 오피스] 씨에이티 조경설계사무소
대지의 기억을 읽고 장소의 서사를 담는 디자인
조경이 하는 일은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일이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먼저 찾게 되는 것은 그 지역만이 가진 이야기들이다. 문학적 이야기가 아니라 그 땅이 생겨남으로써 발생한 자연과 사람의 현상적 이야기들. 그것은 역사, 지리, 기후, 생태, 인문 등 대지의 시간과 공간에 관한 기록일 것이다. 우리는 공간 디자인에 앞서 그 장소가 지닌 이야기를 탐색하고, 그 공간이 요구하는 적합한(올바른) 이용을 탐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지역의 이야기를 담아서 풀기
프로젝트가 주어지면 가장 먼저 그곳의 내력을 살핀다. 오랫동안 배어 있던 본 모습, 원래의 쓰임, 여기에 왜 이렇게 큰 나무가 남아있는지 등의 이야기에 궁금증을 품는다. 사실 가장 기초적이고 당연한 설계 수순이다. 그런데 의외로 프로젝트를 의뢰한 사람도 그런 내력을 모르고 오히려 놀라는 경우가 많다. 설계안에 지역의 이야기를 담겠다고 하자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지역의 이야기를 제공해주어, 그 속에서 중요한 키워드를 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장소성 찾기와 공간 디자인
공간을 다룰 때 시각적 디자인의 완결성은 공감각적 측면에서 신선함, 안정감, 흥미를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시각적 디자인보다 먼저 하는 일은 장소성 찾기다. 장소의 가치와 쓰임을 정립하고 그것을 가장 적합한 형태로 공간에 녹여내는 것이 좋은 공간 디자인이다. 최근 진행한 부산 사상구 감전당산공원이 그랬다. 구청장 보고회 때 발표의 절반 이상을 장소의 가치에 대해 설명하는 데 썼다. 오래된 나무가 있고 주택가가 밀집한 지리적 연유를 고지도와 함께 설명하고, 오래전부터 살기 좋은 마을이었음을 알리는 내용으로 구성했다. 담당 국장은 이런 방식의 설계 보고회는 처음 본다고 놀라며 사업에 대한 기대를 표했다. 이러한 긍정적인 반응은 이후에 선보인 계획안의 디자인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감전당산공원
오래된 나무가 있는 곳에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당시의 풍경을 추측할 수 있는 옛 지도는 오래된 이야기를 더욱 생생하게 만들어준다. 특정 장소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알리고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일은 공간 디자인의 중요한 요소다. 장소의 이야기를 찾아내고 알리는 일련의 과정이 공간을 시각적으로 화려하게 디자인하는 것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다.
디테일
설계를 하면 할수록 디테일의 중요성을 느낀다. 디테일은 직접 시공에 참여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다루기 까다로운 영역이다. 감리나 시공을 병행하지 않는 설계자가 가까이하기 어려운 영역이기도 하다. 작은 요소에 공간의 정체성과 이미지가 드러나도록 설계하고 싶어도 현장의 성격과 여건에 따라 공식적이고 효율적인 설계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시공에 필요한 것을 빠짐없이 작성하는 디테일과는 다른) 디테일한 설계를 하고 싶어도 기회가 잘 생기지 않았다. 김해시의 작은 프로젝트에서 복잡하고 민감한 설계안을 내자, 담당 부서가 비공식 감리를 요청하는 상황이 생겼다. 우리가 원하던 바였다. 공사의 외주 업체인 시설물 팀은 대충 빨리 마무리하고 현장을 떠나고 싶어 했고, 우리는 현장에서 꼼꼼하게 위치, 각도, 높이 등 하나하나를 조정하고 싶었다. 시청 담당자는 우리에게 감독의 권한을 넘겨주며 원하는 품질이 나오도록 시공사와 협의하도록 했고, 우리는 도면과 다르게 만들어온 시설물을 설계 의도대로 조정하여 완성할 수 있었다.
작지만 완성도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 것을 본 다른 발주처도 비공식 감리를 자연스럽게 요청했다. 중요한 공정의 경우 자재의 종류, 색상, 시설물의 위치 등을 시공자가 설계자에게 허락을 받고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비공식 감리를 진행했던 부산 금정구의 어느 쌈지공원 공사. 약 300평 공간에 경사지를 활용해 모던한 계단 공간과 상징 공간, 휴게 공간을 계획했다. 우리는 시공사와의 첫 미팅에서 도면과 공사에 문제가 있으면 우리에게 먼저 연락 달라, 공사의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고 이야기하며 서로 신뢰와 유대를 형성했다. 경사지에 계획한 UHPC 계단은 겉으로 보는 것과 달리 복잡한 하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복잡한 구조 도면을 본 철골 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레벨을 못 맞춘다고 현장을 포기해 버렸다. 사실 복잡하긴 했다. 너무 복잡해서 레벨을 이해하고 철골 도면을 작성해 줄 수 있는 구조 팀을 구하지 못해 직접 작업했던 도면이다. 다행히 빠른 시간에 다른 철골 시공팀을 찾았고, 시공 팀은 복잡한 도면을 잘 소화해 상판만 얹으면 되는 깔끔한 계단 구조를 만들어냈다.
공간 계획의 실마리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며 풀어나간다. 오래된 지도 한 장에서 시작하기도 하고, 설화의 짧은 문구에서 시작하기도 하며, 그 장소에서 필요한 이미지를 찾거나 그곳에 있었을 법한 이미지를 상상하기도 한다.
김해 경전철 하부의 작은 공간 시설물은 김수로왕의 탄생 장면을 묘사하며 가야 왕도 김해의 오랜 역사를 한번에 보여주었다. 해운대수목원의 생명의 숲은 수목원에 결여된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시작했다. 종류별로 모아놓은 묘목장 같은 수목 전시장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한 장소에서 다양한 식물과 자연 소재, 공간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계획했다.
김성완(씨에이티 조경설계사무소 대표)의 논문에서 시작된 영도 근대 역사 흔적 지도는 조경설계사무소에서 흔치 않은 종류의 일이다. 강영조 교수(동아대학교)가 100년 전 영도 지도를 입수하면서 시작된 일이다. 김성완 대표는 오래된 길에서 보아온 풍경을 ‘경관 유산’이라는 새로운 유산의 개념으로 제시하며 강영조 교수와 함께 2018년 한국조경학회 우수논문상을 받았다. 100년 묵은 영도의 도시 풍경 연구를 계기로 근대 영도의 흔적을 따라 걷는 탐방 지도와 안내 책자를 제작하고 전시 공간까지 조성했다. 100년된 지도 한 장에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2020 대한민국 공공디자인 대상에서 우수상을 받았고, 2022 아시아 도시경관상 본상에도 올라 현재 심사 중이다. 오래된 도시를 걷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벽면 녹화 프로젝트인 율리 강변 풍경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보았을 풍경을 상상하며 시작했다. 대상지 인근에는 선사시대 유적이 있는데,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서 볼 수 없지만 삼십여 년 전만 해도 서쪽의 낙동강 변이 보이는 지역이었다. 우리는 선사시대부터 보았을 강변의 풍경을 상상하며 대상지 벽면에 잔물결의 이미지를 담았다.
작은 공간의 설계
건축가와 함께하는 개인 주택, 카페 등의 조경 설계는 작은 공간이지만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개인 공간의 설계는 감리를 병행하고 시공사 선정에도 깊게 관여하며 진행한다. 작은 공간일수록 도면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작은 바위, 야생화, 소관목, 이끼류 등을 배치할 때는 직접 시공하기도 한다. 중요한 위치의 수목 한 그루, 바위 하나를 찾기 위해 공사 기간의 대부분을 보내기도 한다. 개인 공간 설계의 경우 거의 모든 공정을 다루다 보니 별도의 시공사가 있는 공공 공간 설계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가 들어간다. 하지만 그만큼 공간에 대한 애착이 더 가게 된다. 양산의 개인 주택 정원의 경우 더 좋은 공간으로 쓰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계약에도 없는 작은 정원 수첩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땅의 기억
아직 많은 수의 프로젝트를 수행하지 않았지만 프로젝트마다 깊은 이야기를 담고자 노력하고 있다. 다양한 이야기를 담으려는 시도는 발주부서의 의욕적인 업무 수행과 관심이 아니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아직은 여러 가지 이유로 현실과 타협하고 의도와 다르게 진행되는 상황을 경험하며 배워나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한 뼘이라도 더 좋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 동료들과 함께 고민하고 있다. 함께하고 있는 동료들의 생각을 옮긴다.
조경이 디자인할 수 있는 영역이나 범위가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하지만 여러 분야와 협업하는 일들, 특히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제한된 공간 안에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한정된 공간이지만 많은 고민을 통해 공간이 가진 문제를 해결하고 좋은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큰 변화가 아니더라도 가용 범위 내에서 분위기를 바꿀 방법과 재료를 찾아보며 작업에 임하고 있다. 누군가의 일상 속 기억에 자리 잡을 수 있는 담백한 공간을 만들어 보고 싶다. 언제든 편하게 다시 찾아오고 싶은 그런 공간(모현호).
입사 초기에는 땅의 형태에 집중하며 디자인했다. 그 결과 기능적이고 효율적인 설계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은 땅의 기억에 집중하고자 한다. 장소가 가진 이야기, 장소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기억과 같은 것들.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내가 만든 공간을 다수의 사람과 공유하는 즐거움 때문이다. 앞으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해 만들어질 공간들을 기대한다(김경언).
[email protected]
씨에이티 조경설계사무소(CAT Landscape Design Group)는 지속가능한 환경을 생각하는 젊은 조경설계인들과 함께 21세기를 이끌어갈 창의적인 지도를 만들어가고 있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고 쾌적한 삶과 사람의 가치가 보장되는 맑고 밝은 세계를 꿈꾸는 우리는 다양한 영역의 공간과 시간을 우리만의 신선하고 새로운 역량으로 디자인해나간다. 고양이를 좋아해서 CAT를 회사명으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