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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르케엔 공원
Storkeengen
덴마크에 위치한 스토르케엔(Storkeengen) 공원은 다양한 건축적 도구를 통해 도시계획, 기후 변화 적응, 자연 보존 전략을 결합한 프로젝트다. C.F. 몰러 아키텍츠(C.F. Møller Architects)가 고안한 덴마크 중부 지역의 혁신적인 홍수 대응 시스템은 도시계획, 기후 변화 적응, 자연 보호를 결합하며 라네르스(Randers)를 미래 도시의 모델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홍수에 대응하는 자연 공원
라네르스는 산책과 카누 타기 명소인 구덴강(Gudenåen)으로 잘 알려진 도시다. 하지만 저지대에 위치해 홍수에 취약하고, 예측이 불가능한 기후 변화로 인한 위험성이 더 커졌다. 라네르스 시, 지역 수도사업소와 함께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다. 라네르스의 자연환경을 개선하고, 홍수로부터 이 지역을 보호하는 것이 목표였다. 도심의 건물 지붕, 주차장, 도로를 타고 흐르는 우수는 빗물 배수로(cloudburst routes)로 유입되고, 강가 목초지를 지나며 정화 및 여과된 뒤 구덴강으로 다시 흘러 들어간다. 새로운 도로와 배수로는 불투과성 포장 지역에 물이 고이는 것을 방지한다. 위험에 처한 초원을 습지로 전환함으로써, 다양한 건축적 멀티툴을 통해 자연환경을 개선하고 지역의 홍수 위험을 줄이며 주민과 방문객이 자연을 감상하며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자연 공원을 만들고자 했다.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글 C.F. Møller Architects
Landscape Architect C.F. Møller Architects
Architect C.F. Møller Architects
Construction Jakobsen & Blindkilde
Engineer WSP Denmark
Collaborator Geo
Client Randers Municipality and Vandmiljø Randers
Location Randers, Denmark
Area 83㏊
Completion 2024
Photograph Peter Sikker Rasmussen, Silas Andersen
C.F. 몰러 아키텍츠(C.F. Møller Architects)는 스칸디나비아의 대표 건축사무소로 혁신과 노하우, 북유럽적 가치를 기반으로 완성도 있는 프로젝트를 선보이고 있다. 건축의 기능적, 예술적, 사회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며, 도시를 위한 지속가능하고 심미적인 디자인 해결책을 제공한다. 지역적 맥락에 대한 세심한 분석을 통해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해법을 도출하며, 도시계획, 조경과 건축 등 다양한 요소를 통합하는 접근법을 통해 새로운 국제적 표준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자원 절약과 환경 문제, 프로젝트 예산을 고려하며 장인 정신을 토대로 다양한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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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옥정 파티오포레
YangJu Okjeong Patioforet
힐스테이트 양주옥정 파티오포레(이하 파티오포레)는 양주 옥정 신도시에 위치한 블록형 단독주택 용지에 조성된 타운하우스로, 독립된 주거 공간과 공동 이용 시설을 결합한 새로운 주거 형태를 제시한다. 건물 대부분이 세 개 층과 다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세대에서 정원과 테라스를 즐길 수 있다.
파티오포레의 조경에 서울 외곽 저층 주거를 선호하는 수요층이 자연과 조화된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한다는 점을 반영하고자 했다. 따라서 고층 아파트에서 경험할 수 없는 자연과의 밀접한 연결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고, 이를 위해 SWA는 자연 속 예술로의 초대(Invitation to the Arts in Nature)라는 콘셉트를 설정했다.
외부 공간은 여섯 개 블록으로 구성되며, 각 블록의 경계는 근린공원이나 녹지와 연결되어 자연과 어우러진 단지를 만든다. 주변의 자연경관에서 돌, 숲, 산, 공원이라는 디자인 콘셉트를 도출해 차별화된 경관을 조성했다. 이러한 조경 요소를 통해 입주민들은 자연을 가까이 느끼고 정원의 예술적 가치를 경험할 수 있다.
마운틴 빌리지, 산의 조형이 정원이 되다
단지에서 길을 따라 걸으면 대상지를 두른 산의 능선이 보인다. 이 풍경을 재해석해 산의 능선이 중첩된 형상을 연상시키는 공간을 연출했다. 산이라는 규모가 큰 공간을 끌어옴으로써 정원의 깊이감과 신비로움을 더했다.
어린이 놀이터와 놀이 정원: 8블록의 어린이 정원에는 마운틴 빌리지의 이미지에서 모티브를 얻어 사선을 활용한 디자인을 시도했다. 공간을 사선으로 분리해 삼각형의 놀이 공간과 휴게 공간을 효율적으로 배치했으며, 고보 조명을 활용해 역동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데크 라운지: 주민 공동 시설 앞에 마련한 데크 라운지는 목재 데크를 활용한 자연 친화적 커뮤니티 쉼터다. 느티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수목을 식재해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풍부한 녹음을 제공한다. 녹음을 즐기며 주민들이 자유롭게 앉거나 누워 편안하게 휴식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글·사진 엘피스케이프
조경 계획 SWA(San Francisco)
조경 설계 엘피스케이프, 라모디자인그룹
건축 설계 디에이그룹 엔지니어링 종합건축사사무소
시공 현대건설
조경 식재 정한조경
조경 시설 동영조경
놀이 시설 플레이잼
시행 미래개발2, 무궁화신탁, 미래인
위치 경기도 양주시 월정로 57 일대
규모 809세대
대지 면적 165,117.60㎡
완공 2024. 6.
엘피스케이프(LPSCAPE)는 부지의 고유성을 맥락 분석과 깊이 있는 해석을 통해 발굴하고, 이를 재구성하여 그 장소만의 상징적 가치와 특별함을 창출한다. 독창성을 갖추되 주변 환경과의 균형을 고려하여 조화를 이루는 디자인을 지향한다. 다양한 국가에서 수행한 프로젝트 경험을 토대로 분야의 경계를 넘어서는 확장된 조경설계를 통해 변화하는 미래 사회에 대응하는 공간을 구현하고자 한다.
SWA 그룹은 조경, 기획, 도시설계 등 전문 분야에서 선도적 역할을 해왔다. 다양한 프로젝트에서 인간과 경관이 서로 교류하는 방식을 정의하는 디자인을 선보이고, 장소와 지역적 맥락의 힘을 믿으며 대상지의 본질과 문화를 디자인에 담는다. 인간과 자연, 예술과 생태 사이에서 교집합을 만들고,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건축과 자연이 결합해온 방식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
라모디자인그룹의 ‘라모’는 랜드스케이프와 모자이크의 합성어(landscape+mosaics)로 우리의 삶을 채우고 있는 많은 경관과 조각의 조합을 뜻한다. 2003년에 설립되어 마스터플랜부터 조경 및 도시계획, 주거 등 다양한 규모와 유형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대지가 들려주는 소소한 속삭임, 사회적 요구, 변화하는 삶을 담아낼 수 있는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설계를 하기 위해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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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스케이프] 카트린 드 메디치와 디안 드 푸아티에
슈농소 성의 두 여인
여인들의 성
프랑스 루아르 지방에 가면 동화에나 나올 법한 성이 줄지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눈에 띄게 아름다운 것이 슈농소 성(Château de Chenonceau)이다. 슈농소 성은 마치 셰르(Cher)강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축조된 우아하고 독특한 건축물이다. ‘여인들의 성’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여인들의 손으로 빚고 완성하고 다듬기도 했지만, 여러 미망인의 한과 넋이 서린 곳이기 때문이다. 이 성에서 살다 간 여인들 이야기가 모두 흥미롭지만,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1519~1589)와 디안 드 푸아티에(Diane de Poitiers)(1499~1566)의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두 여인 모두 매우 특별한 인물이었으며 이 둘이 만들어 남긴 테라스 정원이 지금도 나란히 존재하고 있다. 정원은 사이좋게 나란히 존재하지만, 사실 두 여인은 연적이었다.
카트린은 앙리 2세(Henri II)(1519~1559)의 사랑을 받지 못한 왕비였고, 디안은 그의 영원한 연인이었다. 정실부인을 두고 젊은 정부를 얻는 경우가 많은데, 이 세 사람의 경우는 그것이 뒤바뀐 관계였다. 정부 디안이 왕비 카트린보다 스무 살이나 많았다. 카트린이 열네 살에 동갑내기 앙리에게 시집갔을 때, 이미 마흔에 가까운 디안이 앙리의 연인으로 확고부동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디안은 왕에게도 20년 연상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왕이 40세로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는데 그때 디안은 60세였다. 어떻게 그 나이 되도록 사랑받을 수 있었는지 많은 이가 지금도 궁금해 한다. 글쎄, 앙리 2세와 디안은 그저 연인 관계였을까? 왕에게 디안은 보호자였다가 연인이 되었고, 정치적 조언자이자 생의 동반자였으며, 여신과 같은 숭배의 대상이기도 했다. 카트린과 디안의 경쟁 구도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슈농소 성을 둘 다 탐냈으나 여기서도 디안이 이겼다. 앙리 2세가 죽은 뒤 카트린은 형식상 왕실 재산이었던 슈농소 성을 반환받아 그곳의 여주인이 되었으며 그 대가로 디안에게 쇼몽 성을 주었다. 쇼몽은 해마다 가든쇼가 개최되는 곳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성이다. 슈농소 성을 먼저 소유했던 디안의 삶과 그녀가 만든 정원부터 잠시 살펴볼까 한다.
디안 드 푸아티에
루브르 박물관에 다이애나 여신을 그린 유화 한 점이 있다. 전신상 크기인데 사냥의 여신 다이애나가 나체로 활을 손에 들고 활통을 맨 채 사냥개 한 마리를 동반하고 숲속을 걷는 장면이다. 이 그림의 모델이 디안이었다고 한다. 디안은 다이애나의 프랑스식 이름이다. 1550년경에 그린 것이니 디안이 50세가 넘었을 때 모델을 선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플레이보이』 잡지 표지를 장식한 마돈나를 연상하면 될 것 같다.
평범한 외모의 카트린과는 달리, 디안은 빼어난 미모에 품위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냉수욕을 하고 건강한 식단과 운동은 기본이었으며, 허브 추출물로 만든 천연 크림을 직접 고안해 피부 관리를 철저하게 했다고 한다. 한편 냉철한 성격의 소유자며 사업 수완이 뛰어나 앙리를 설득해 슈농소 성을 선사 받았는데 성의 증축과 관리에도 철저했다.
당시 성이란 그저 화려한 거처에 그치지 않았다. 귀족들에겐 작물을 재배하는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디안은 주변의 땅을 사들여 영토를 넓히고 성 주변을 숲으로 둘렀으며 뽕나무를 잔뜩 심어 수입을 세 배로 늘렸다고 한다. 정원 만들기와 가꾸기에도 심취해서 당시 프랑스에선 아직 새로웠던 이탈리아 르네상스풍으로 12,000㎡ 규모의 테라스 정원을 조성했다. 이때 물속에 대를 쌓고 그 위에 정원을 만드는 대범함을 보였다. 중앙에 분수를 설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종횡의 축을 내고 다시 대각선의 축으로 나누었다. 이로써 모두 여덟 개의 구획이 탄생했는데 각 구획은 운동과 놀이 공간, 식재 공간으로 분류했다. 주변의 숲에 정원사들을 보내 9천 줄기의 야생 딸기와 제비 꽃 뿌리를 캐게 해 정원에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수월한 관리를 위해 잔디로 구획을 채우고 토피어리를 심어 간소화했다.
디안은 원래 궁중에서 왕자를 돌보는 임무를 맡았었다. 조선시대와 비교한다면 동궁전의 상궁이었던 셈이다. 앙리가 아홉 살 되던 해 스페인에 볼모로 가서 4년간 머물렀던 일이 있다. 그때 스페인으로 떠나는 어린 앙리를 디안이 따뜻하게 안아주었다는데, 앙리가 그 따뜻한 품을 평생 잊지 못했던 것 같다. 앙리의 젊은 아내 카트린에게 질투나 경쟁심을 느낄 필요가 없었거나 현명했거나 둘 중 하나였던 것 같다. 후사를 생각해 자신에게만 엉겨 붙는 앙리를 카트린의 침실에 들여보내 남편의 의무를 다하게 했다고 한다. 카트린은 앙리 2세와의 사이에서 열 명의 자녀를 낳았다. 디안은 재테크의 귀재여서 축적한 재산도 많았고 성도 여러 채 소유하고 있었기에 말년에는 자신의 성에서 조용히 살다가 1566년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카트린 드 메디치
그 똑똑했던 디안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점이 있었다. 겸손하고 명랑하기만 했던 카트린이 두뇌회전이 엄청난 능력자라는 사실이었다. 카트린 드 메디치는 1519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에서 태어났다. 출생 직후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는데 어머니로부터 엄청난 부를 상속받아 너도나도 탐내는 신붓감이었다. 증조부인 교황 레오 10세의 보호 아래 친척들의 집에서 자라다가 잠시 수도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레오 10세의 뒤를 이어 카트린의 후견인이 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둘째 아들에게 카트린을 시집보냈다. 프랑스에서의 삶은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카트린은 앙리를 보자마자 반했다고 하는데, 앙리는 카트린에게 별 관심이 없었고 그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막대한 지참금에 더해 밀라노를 넘겨받기로 했으나 후견인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다. 밀라노를 넘겨주기는커녕 지참금도 지급하지 않았다. 이로써 지참금 외에는 볼 게 없던 카트린은 낯선 프랑스 궁중에서 완전히 찬밥이 되고 말았다. 인물이 뛰어나지도 않고 프랑스어도 서툴고 남편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신분도 격에 맞지 않은 상인의 딸, 카트린을 피렌체로 돌려보내라는 소리가 높아졌다. 숙부의 배신으로 돌아가도 별 볼 일 없음을 알게 된 카트린은 홀딱 반한 앙리의 곁에 남기 위해 납작 엎드리는 전략을 취했다. 이를 본 프랑수아 1세가 카트린의 총명함을 간파해 총애했고 프랑스 궁중에 남게 했다. 왕위 계승자였던 태자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카트린의 남편인 둘째 왕자 앙리가 왕으로 등극하고 카트린은 왕비가 된다. 그렇다 해도 처음엔 크게 달라진 바 없다가 열명의 왕자와 공주를 차례로 낳으며 카트린은 서서히 입지를 굳혀가기 시작했다.
당시엔 이탈리아가 문화적으로 프랑스에 월등히 앞서 있었다. 카트린은 시집갈 때 피렌체의 의상 디자이너와 요리사를 데리고 갔는데, 이들을 통해 세련된 패션과 우아한 생활 방식이 프랑스 궁중에 전파됐다. 그뿐 아니라 이탈리아 요리가 주목받아 후일 유명해지는 프랑스 요리의 시작이 되었다는 사실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카트린은 남편이 사망한 뒤 권력을 손에 쥐며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드러내게 된다. 아들 셋이 차례로 왕위를 이었으나 일찍 죽거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까닭에 실제로는 카트린이 정치를 틀어쥐었다. 당시 프랑스는 아직 왕권이 확립되지 않았고, 특히 종교 분쟁으로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역이 매우 어지러운 격변의 시대였다. 게다가 왕실의 피를 이어받은 높은 귀족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아들의 왕위를 지키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메디치 가문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카트린의 ‘정치 본색’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카트린의 차남 샤를르 9세가 통치하던 1572년 여름, 그 유명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이 일어났다. 원래 구교와 신교의 화합을 위해 둘째 딸 마고를 신교의 지도자 앙리 드 나바르와 혼인시켰으나 그 혼인을 보러 온 신교도와 구교도 사이에 처참한 살상이 시작되어 화합은 물 건너갔다. 종교 분쟁은 이후 오랜 시간 유럽을 뒤흔들게 된다. 1993년에 ‘여왕 마고’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영화 속에서 카트린은 검은 옷을 입은 악녀로 묘사된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일은 물론 아니다.
카트린의 슈농소 성
카트린은 슈농소 성을 가장 사랑하는 거처로 삼고 상당한 재정을 투자해 성을 확장하고 아름답게 꾸몄다. 디안이 이미 건설을 시작한 셰르강 교량을 완성하고 그 위에 2층짜리 갤러리를 추가해성의 독특한 외관을 완성했다. 1557년에 완공된 이 갤러리는 무도회장이 되었다. 카트린은 슈농소 성을 거처가 아니라 정치적 무대로 활용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화려한 연회와 행사를 자주 열어 자신의 권력과 영향력을 과시했다. 1560년에는 아들 프랑수아 2세의 즉위를 기념하는 프랑스 최초의 불꽃놀이가 슈농소에서 펼쳐지기도 했다.
디안에 대한 감정이 어땠는지 알 수는 없다. 주변에서는 디안의 코를 잘라서 내치라고 했다는데카트린은 그 대신 슈농소 성을 반환하라고 했다. 이에 디안은 그 대신 쇼몽 성을 달라고 요구했고 카트린은 이에 응했다. 부동산 가치로만 본다면 쇼몽 성이 훨씬 낫다. 그 사실을 카트린이 모를리 없었지만 슈농소 성을 빼앗고 싶은 마음이 그만큼 간절했던 것 같다. 디안은 끝까지 유리한 거래를 한 것이다.
슈농소에 입성한 카트린은 바로 증축 작업에 들어간다. 우선 뽕나무 농장의 규모를 확장해 수익을 더 올리고 조류관을 지어 진기한 새들을 길렀다. 이탈리아에서 올리브 나무를 들여와 대량으로 심었는데 기후에 잘 적응했다고 한다. 디안의 정원은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둔 대신 한 귀퉁이에 도서관 겸 문서고를 지었다. 디안과 달리 카트린은 책을 좋아했고 지리학, 천문학, 물리학, 수학에 두루 지식이 풍부했다. 또한 건축적 재능도 뛰어나 파리의 튀일리 궁전과 정원 외에도 많은건축물 축조에 관여했다.
카트린은 5,500m²의 규모로 테라스 정원을 지었는데, 성 본채를 사이에 두고 디안의 정원과 마주 보는 형국이었다. 전체적으로 약간 사다리꼴이며 그 중앙에 커다란 원형 연못을 만들었다. 정원 가꾸기에는 디안만큼 관심이 크진 않았다. 테라스 정원에 어떤 식물을 심었는지에 관한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다만 당시의 풍습대로 약초와 향기나는 식물을 심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지금은 정원사들이 절기에 따라 경계 화단에 초화류를 심고 벽에 기대어 장미도 심어 두었다.
당시 유럽의 왕실이나 귀족들에게 백성이란 무지렁이에 지나지 않았다. 민생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은 사소한 죄를 지어도 무지막지한 벌을 받았는데, 그들이 무자비하게 형벌 받는 장면을 구경하며 연회의 안줏감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묘사된다. 동양의 민民이라는 개념은 아직 없었다. 그러므로 카트린이나 디안의 능력과 삶을 감탄의 눈으로 바라볼 일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특권을 오로지 그 자체를 지키는 데 썼을 뿐이다.
다음 이야기의 주인공은 프로이센의 공주로 태어나 바이로이트의 여주인으로 살았던 빌헬르 미네(Wilhelmine von Bayreuth, 1709~1758)다. 18세기 소위 계몽주의를 살았던 여인인데, 계몽이라는 관점에서 정말로 개선된 것이 있었을지 기대해 본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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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 밀레니얼도 이미 옛날 이야기
75%를 위한 공원
25%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21세기 말이다. 시간이 반드시 직렬로 흐르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근현대 교육의 수혜자에게 감지되는 시간이란 앞으로만 쏟아진다. 따라서 앞으로 21세기는 이제 75% 남아있을 뿐이다. 우리는 겨우 몇 년 만에 AI를 필두로 세상이 끝없이 변해 가는 것을 지켜 보고 있다.(각주 1) 누군가는 그 변화의 선두에 서 있고, 누군가는 뒷자락에서 페이스 맞추어 가며 달려가고, 또 어떤 사람은 옆에 서서 이 행렬을 지켜보거나 곁눈으로 흘기고 있다.
한 심야 토크쇼의 호스트 존 올리버(John Oliver)는 몇 년 전 로봇 시대에 앞으로 인류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 조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비판적 사고,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 사회적 지능을 요구하는 직업.” 다만 “우리가 아는 직업 중 이런 직업은 없고 이제부터 찾아봐야 한다”는 것이 해당 섹션의 안타까운(!) 결론이었다. 결국 자신의 머릿속을 까뒤집는 한이 있더라도 뿌리부터 다시 생각해야 된다는 이야기다.
여러 호에 걸쳐 조금씩 언급했지만,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격변하는 도시 사회를 위해 어떤 공원을 상상해야 하는가. 조경은 미래에 유의미한 업역으로 남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이용을 위한 공원은 어떤 모습을 갖추게 될까.
에피소드 1. 단계적 MZ 거부 운동(과 그 외 소식)
너도나도 MZ라는 단어를 남발한다. 1988년생 밀레니얼로서 당당히 이 구분을 거부하는 바다. 한때는 기계 속 펼쳐진 세계에 열광했지만, 이제는 자우림의 노래 “20세기 소년소녀”(각주 2)를 흥얼거리며 ‘어린 시절의 갬성이 그리운’ 걸 보면 밀레니얼 시대는 이제야 ‘돌이켜볼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한 듯하다.
기술이 빠르게 변하고 사회도 그에 맞춰 가속도가 붙는 만큼 이 두 세대를 한 덩이로 잡아서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일견 이해가 된다. 하지만 사회는 앞으로 전진하는 동시에 돌고 돈다. 나선형의 미래를 바라보며,(각주 3) 지금 조성되는 공원과 정원은 앞으로 얼마나 유의미할지, 또는 얼마나 ‘추후 재설계’의 여지를 두고 조성되어야 하는 것일지 궁금해진다. 단계별 조성으로 대표되는 조경의 리질리언스 실천이 그저 “기본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서 내외부의 혼란을 저항하는” “그저 버티는 것 뿐”인 설계 패러다임이라는 리차드 웰러(Richard Weller)의 비판은, 우리 시대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꼬집는다.(각주 4) 우리는 여전히 돌고만 있다.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무섭다.
2. “비틀즈의 무지개, 오즈의 마법사, 듀란듀란의 노래”로 시작하는 이 곡은 사실 X세대를 위한 이야기다. 하지만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20세기 소년』을 읽고 자란 이들에게도 넌지시 울림을 준다.
3. 일본 애니메이션 ‘천원돌파 그렌라간’(2007)의 테마. 필자는 몇 번이나 돌려보고 한참 울었다.
4. Richard Weller, “The Landscape Project”, in The Landscape Project, Richard Weller and Tatum Hands eds., AR&D, 2022, p.11.
신명진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 생태조경학과와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문어발 도시 연구자다. 현재 예술, 경험, 진정성 등 손에 잡히지 않는 도시의 차원에 관심을 두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도시경관 매거진 『ULC』의 편집진이기도 하며, 종종 갤러리와 미술관을 오가며 온갖 세상만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jin.every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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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퍼니처] 토인디자인
지속가능한 쉼과 삶을 위한 디자인
지속가능한 도시를 위한 쉼
흔히 현대 도시의 삶을 표현할 때 생존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단어지만 생존의 반의어를 생각하면 선뜻 사용하고 싶지는 않다. 뉴욕의 센트럴파크는 현대 도시에서 생겨나는 극도의 스트레스와 부정적인 에너지의 응축을 해소하려는 조치로서 생겨났으며, 치유의 개념을 가진 대표적 도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현대 도시엔 생존보다 치유가 필요하다. 도시는 특유의 기능과 화려한 겉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질주하고 있다. 브레이크 없이 질주만 한다면 존재가 지속될 수 없다는 걸 도시의 구성원은 이제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멈춰야 할지, 어떻게 쉬어야 할지 막막함을 느낄 때도 있다. 답답한 일상이나 생업에서 벗어나 잠시 멈추는 것만으로도 부정적인 감정을 많이 해소할 수 있다. 이러한 행위를 ‘쉼’이라 부르지만 쉼의 형태는 사람들의 개성만큼 다양하고 계속 변화하고 있다. 우리는 ‘쉼’의 형태와 랜드스케이프를 결합하는 퍼니처를 연구하며, 자연과 가까워지려는 인간의 행위가 불편하지 않게 현대인의 생활상을 적절히 반영하고자 노력한다. 이는 조경이란 분야가 지속가능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방향과 맞닿아 있다고 본다.
모두를 수용하는 유니버설
누구에게나 평등한 사회는 인류가 추구해야 할 사회의 최종적인 진화 형태이며 모두가 힘을 합쳐 마땅히 도착해야 할 종착지다. 하지만 현실은 추구하는 이상과는 거리가 멀고 21세기로 넘어온 지 20년이 지난 현재도 쉽지 않은 문제다. 예를 들어 조경 시설에 흔히 적용되는 계단은 휠체어로 진입할 수 없고, 테이블, 벤치 등 시설의 높이가 모든 사람이 사용하기에 적당한 높이인지 검증이 필요하다. 또한 일률적인 간격의 자전거 거치대는 다양한 크기의 자전거를 모두 수용하기 어렵다.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접근법이 중요하며, 이러한 것이 모든 종류의 의사 결정에 당연히 포함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양한 환경과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진 사용자들을 최대한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유니버설 디자인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반려동물과 동행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영혼의 개념이 있는 영적 동물이다. 무리를 이루거나 짝을 찾아 함께하기를 원하며 인간의 심연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고독의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다. 공동의 목표 또는 취향을 공유하기 위한 커뮤니티는 살아 있는 생물처럼 생겨나고 성장하고 쇠퇴하고 있다. 인간의 최소 구성단위인 가족의 개념도 시대가 변화하면서 과거와는 다른 다양한 형태로 적응하며 진화하고 있다. 개인의 일상을 공유하고 유대를 형성하고 안식처가 되어주는 동반자의 모습도 이제는 반드시 인간일 필요는 없다. 반려동물 양육 인구 천만 시대에 도달할 만큼 다양한 동반자가 출현하는 시대다. 이와 같은 현대의 동반자 형태는 공공 시설의 영역에서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요구에 발맞춰 반려동물이 인간과 조화롭게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진화하는 티하우스
조경 시설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단순히 휴식을 보조하는 옥외 시설, 산책로에 군데군데 놓인 벤치와 차양막이 있는 시설. 보통 떠올리는 과거의 시설들이다. 현재는 생활 방식의 변화와 기능의 세분화가 이루어지며 휴게 시설들이 변화무쌍하게 진화하고 있다. 특히 다수의 시민을 수용하는 공공 시설로 기능했던 퍼걸러는 이용 주체와 커뮤니티의 구성에 발맞춰 고유한 개성을 드러내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 가령 냉난방이 가능한 실내 공간, 각종 모임을 지원하는 내부 가구들, 주변의 정취를 즐기며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야외 테라스까지 건축과의 경계를 허무는 형태의 퍼걸러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복층형 티하우스는 신축 아파트 단지 내부 주요 공간의 랜드마크로 기능하는 공공 휴게 시설이다. 단순히 잠시 쉬어가는 시설로 활용됐던 과거의 퍼걸러들과 달리 주민들이 머물 수 있는 생활 공간의 개념을 담아냈다. 이용자의 편의성을 최대한 고려한 디자인을 통해 마치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편안한 환경을 제공하고자 했다.
누구나 이용하는 슬로프 전망대
공공의 편의성을 위해 만들어진 시설 중에는 사회적 약자를 고려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보통 전망 시설은 각종 공원이나 명소의 주변 경관을 편하게 즐기기 위한 목적의 시설이지만, 누구에게나 접근이 가능한 시설은 아니다. 가령 전망대 진입 시 계단밖에 없는 공간에서 신체가 불편한 이용자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상층부로 올라갈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점을 고려해 누구나 편하게 진입할 수 있는 배리어 프리 전망 공간을 만들고 있다. 2층 구조의 전망대형 퍼걸러인 스카이네스트는 기존 계단 진입부 외에 휠체어로도 올라갈 수 있는 경사의 슬로프를 만들고, 진입부 핸드레일에는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판을 설치해 다양한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누구나 차별 없이 시설에 접근할 수 있는 전망 공간을 만들고자했다.
진입 장벽을 낮춘 인피니트 트랙
올라타서 이용하거나 베어링으로 운동 범위가 제한적인 운동 시설은 획일적인 운동 형태를 제공해 이용자의 흥미를 감소시킨다. 이러한 운동 시설의 구동부 베어링은 소모품으로 지속적인 유지·관리가 필수적으로 동반된다. 발판이 있는 운동 시설은 물리적 제약이 있는 사용자에게는 높은 진입 장벽으로 작용한다. 트랙형 운동 시설인 인피니트 트랙은 이러한 점을 보완했다. 지정된 발판에 올라가서 사용해야 하는 제약을 줄이고 방위나 높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본인의 체중과 근력에 맞게 운동의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게 했다. 모듈의 형태를 자유롭게 제작할 수 있어 맞춤형 구성이 가능한 시설로 사용 공간의 성격이나 주요 이용 계층에 맞게 조합해 각 공간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신개념 운동 시설이다. 베어링의 사용을 최소화해 유지·관리가 기존 운동 시설보다 용이하다.
자원 순환의 세덤 퍼걸러
첨단 기술과 자연이란 상반된 요소가 시대적 요구로서 공존한다. 자연환경과의 조화를 꾀하는 시도로서 식재와 조합된 시설물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 일상에서 벗어난 휴식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시설들은 플라스틱, 스틸 등 인공 자재의 노출을 최소화하고, 목재, 석재 등 자연적 소재를 우선적으로 활용하고 자연의 느낌을 연출할 수 있는 식재 등을 시설에 접목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세덤 퍼걸러는 빗물을 활용해 지붕의 식재에 관수를 하고 물탱크에 저장 후 남는 물은 수도꼭지를 통해 재활용할 수 있는 휴게 시설이다. 자원의 재생산 개념을 바탕으로 버려지는 물까지 다시 사용하는 자원순환을 통해 비용 절감 등 경제적인 효과를 가질 수 있게 했다.
반려동물과 조화를 꾀하다
반려동물 양육 인구 천만 시대에 가족 같은 동물들과의 동행은 시대적 흐름이다. 인간들만 사용할 수 있는 공공 시설은 반려동물과 함께할 수 없기에 아쉬움이 생길 수 있다. 동행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시설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다양한 시설이 필요해지고 있다. 반려동물과 함께 놀 수 있는 놀이대와 반려동물의 생활 패턴을 고려한 제품 개발을 통해 인생의 동반자라고 할 수 있는 반려동물과 함께 조화롭게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토인디자인은 토털 스트리트 퍼니처 디자인 브랜드로 트렌드를 고려한 현대적 감성의 디자인을 추구하며,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도시 환경을 만들고자 노력한다. 자연을 보존하는 동시에 이용자에게 기능성과 편안함을 제공하며 빠르게 변해가는 삶의 방식에 유연하게 대응하고 다양한 커뮤니티를 수용할 수 있게 돕는 스트리트 퍼니처를 만든다. 궁극적으로 주변 환경과 사회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이용자들의 이용 패턴을 연구해 지속가능한 인간의 쉼과 삶을 위한 디자인을 구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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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다
자연의 속삭임 전, 2025년 2월 9일까지
“자연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 내게는 들려온다. 그런 감각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각주 1) 자연의 소리를 화폭에 어떻게 옮길지 고민한다는 구순의 노 작가의 말이다. 이는 작가의 예술 세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서울시립미술관은 2024년 12월 12일부터 2025년 2월 9일까지 한국 구상 회화사의 발전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한 박광진 개인전 ‘자연의 속삭임’을 개최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소장품과 작가의 대표작 중 117점을 선별해 네 개의 섹션으로 나눠 선보였다. 첫 번째 섹션 ‘탐색: 인물, 정물, 풍경’에서는 한국 구상 미술의 대표 화가 이봉상, 손응성, 박수근 등의 영향을 받으며 여러 소재를 대상으로 예술적 방향성을 모색하는 과정을 다룬다. 두 번째 섹션 ‘풍경의 발견’에서는 작가가 점차 풍경화에 관심을 기울이며 포착한 여러 경관을 살펴본다. 세 번째 섹션 ‘사계의 빛’에서는 작가가 196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까지 그린 한국의 순수 자연을 섬세한 빛의 묘사를 통해 사실적으로 담아낸 풍경화를 선보인다. 네 번째 섹션 ‘자연의 소리’에서는 1990년대 이후 작가가 제주에서 자생하는 억새와 유채를 대상으로 집약되고 응축된 화면을 보여주고자 새로운 구상 미술의 가능성을 여러 측면에서 모색했던 시기의 작품을 볼 수 있다.
탐색: 인물, 정물, 풍경
박광진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사이 한국 아카데미즘의 영향 아래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통해 예술적 방향성을 모색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수채화에 매료된 그는 서울 사범학교에서 이봉상에게 수업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미술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각주 2) 그의 첫 유화 작품인 ‘창경원 입구’(1952)는 이봉상이 사용한 캔버스에 덧그린 것으로, 스승의 색채가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1954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에 진학한 박광진은 비원파 창시자인 화가 손응성에게 사사하며 예술적 정체성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손응성의 영향을 받아 불상, 자기, 꽃 등과 고궁을 소재로 작품을 그렸다. 그는 손응성의 그림 보조로 박물관에서 사생하던 중 고미술품 전시실을 배경으로 반가사유상과 기마인물형 토기, 청동 정병 등을 묘사한 ‘국보(國寶)’(1952)를 완성했다. 이 작품으로 제6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하며 미술계에 등단했다.
박광진은 옛 문화와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장소로 궁궐을 택했고, 이곳에서 사생을 시작했다.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전당포, 담배 가게, 일제강점기부터 수제화 거리로 알려진 염천교 다리 등으로 영역을 넓히며 일상 속에서 자신만의 풍경을 찾았다. 특히 그는 이웃이었던 서양화가 박수근과 교류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 인터뷰(각주 3)에서 박수근이 초가집이나 농부를 많이 그릴 때, 자신은 홍익대학교 근방을 사생했다고 설명했다. 이때 그렸던 ‘담배가게’(1956)는 유화를 활용해 홍익대 학생들의 담배를 사기 위해 들렸던 초가집 노점을 담은 졸업 작품이다. 더불어 이 시기에 그는 보문동과 혜화동 등 여러 장소를 다니며 인물과 풍경을 화폭에 담아냈다. ‘보문동 전당포’(1956)는 당시 많은 작가가 물감을 살 돈을 구하기 위해 자주 찾았던 곳으로, 그들의 일상과 생활 감정을 반영했다.
작가의 시선과 재료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닭장, 토끼장 같은 향토적 소재를 활용하고, 자화상(1964),(각주 4) 여성 좌상 등을 그리며 고전주의, 인상주의, 사실주의 화풍을 시도했다. 고색(古色)을 사용하거나, 건필로 색을 덧바르거나, 붓질의 속도에 변화를 주는 등 여러 기법을 실험했다. 특히 그는 ‘파고다 탑’(1957), ‘해바라기’(1961) 등에서 주변을 생략하고 가까운 대상이나 그 일부에 집중했고, ‘토끼장’(1962)에서는 가축우리의 사각 격자무늬 구도를 사용해 전통적 원근법에서 벗어난 독특한 시선을 선보였다. 이는 이후 작품의 변화를 예고하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전시 제목 ‘자연의 속삭임’은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비롯됐다.
2. 박광진은 서울 사범학교 재학 당시 이봉상 외에도 서양화가 권옥연, 류경채 등의 미술 수업을 수학한 바 있다.
3. 서울시립미술관, 박광진 화백과의 인터뷰, 2024년 10월 31일.
4. 유일한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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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재현, 권력의 탐구
엘름그린 & 드라그셋의 스페이스 전,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전시장 하나를 상상해보자. 관객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눈길을 외면하는 작품들, 무심하게 툭 펼쳐져 있어 의도를 알 수 없는 공간들, 안내판 하나 없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놓여 발견조차 어려운 설치물들. 이런 전시장을 활보하다 보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그간 방문했던 전시장들이 어땠는지 회상하며, 관객과 작품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도 생각해보게 된다. 이어 깨닫는다. 관객이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달하려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듯, 작품 또한 관객에게 반드시 친절히 제 의도를 보여주어야 할 필요는 없다. 이처럼 늘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사실을 뒤집는, 체계와 조건의 전복은 엘름그린(Elmgreen)과 드라그셋(Dragset)이 자주 사용하는 기법이다. 이들은 전복을 통해 그 안에 내제된 권력의 구조를 탐구하는데, 그 매개로 ‘장소’를 애용한다. 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인지하는 공간과 구조물, 그리고 이에 주어진 기능이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다양한 의미와 위계질서가 파생되는 현장이라는 인식과 의심에서 비롯”(각주 1)된 것이다. 이러한 ‘공간’은 이번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열린 ‘스페이스(Spaces)’(2024. 9. 3. ~ 2025. 2. 23)의 전시명 그 자체이기도 하다.
올해는 1995년부터 아티스트 듀오로 작업해온 엘름그린과 드라그셋이 협업한 지 30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스페이스 전은 둘의 공간 작업을 한 곳에서 살펴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전시 제목에 어울리도록 실제 크기에 버금가는 대형 수영장, 집, 레스토랑 자체를 전시장에 들였다. 누군가는 실제와 같은 공간을 전시장에 옮기는 게 과연 예술이냐 물을 수도 있다. 이에 엘름그린과 드라그셋은 답한다. “우리는 균질화된 전시 공간을 완전히 다른 환경으로 전환하는 일에 흥미를 느꼈다. 이를 통해 관객은 본래 정체성을 위장시킨 새로운 조건과 상황에서 작품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각주 2)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엘름그린 & 드라그셋 개인전 ‘어댑테이션(Adaptation) 소개글 중
2. 탁영준, “엘름그린 & 드라그셋 작품 속 신체와 공간”, 『신세계 매거진』 44호,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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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조경
제7회 젊은 조경가 원종호’ 온라인 토크쇼
지난 2월 19일, 그룹한빌딩 2층 환경과조경 세미나실에서 제7회 젊은 조경가 원종호 소장(JWL)의 온라인 토크쇼 ‘보이지 않는 조경’이 개최됐다. 유튜브 생중계 형식으로 열린 토크쇼는 1부 강연, 2부 질의문답 순으로 진행됐다.
강연은 간단한 자기 소개로 시작됐다. 원종호는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조경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대학원 졸업 후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 현대건설에서 실무 경험을 쌓고 제이더블유랜드스케이프에 합류한 과정을 설명했다. 이어서 토크쇼 제목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특집 ‘조경가 원종호’(『환경과조경』 2025년 1월호)의 다섯 가지 키워드는 설계를 업으로 삼는 이들에게 당연한 이야기지만, 저와 제 동료들이 추구하는 비가시적인 작업을 가장 잘 드러내는 키워드”라며 직관적이고 단순한 개념과 배치, 사소한 생각과 조형의 가능성, 크래프트, 관성에의 저항, 팀워크, 협업의 힘에 대해 말했다.
원 소장은 상암동 JTBC 신사옥, 성수동 코너 50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소개하며 그가 추구하는 보이지 않는 조경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했다. “누군가 우리의 프로젝트를 보고 ‘설계한 게 뭐가 있어?’라고 묻기도 하지만, 많은 고민과 생각의 결과물이다. 개념과 배치를 풀어가는 다양한 방식이 있겠지만 주로 단순하고 직관적인 개념과 배치를 활용하며, 직선이나 돌과 수목 캐노피를 통해 공간의 구조미를 강조한다”고 말했다.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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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웃거리는 편집자] 빛나는 북극성을 향해
하마터면 금 기자가 아니라 금 주사나 금 선생이 될 뻔했다. 취업 준비 시절 지인은 섬마을 시골 분교 국어 선생님 관상이라며 내게 선생님을 권유했다. 고향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넘치는 아버지는 내게 백수의 삶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안정적인 삶이 보장되는 면사무소 주사가 되기를 원하셨다. 모두 훌륭한 직업들이지만, 이상하게도 끌리지 않았다. 시골의 감성을 너무나도 좋아하지만, 각종 놀거리와 볼거리가 넘쳐나는 서울의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말은 제주로 가고, 사람은 서울로 가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속담을 핑계 삼아 서울의 삶을 계속 영위하고 싶었다.
이러한 내가 기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인터뷰’ 때문이었다. 아는 선배의 권유로 웹진의 대학생 에디터로 잠깐 일하며 인터뷰 기사를 써볼 수 있었다. 당시 지금처럼 힙하지 않았던 한 동네의 카페들을 팝업 스토어로 활용한 전시에 참가한 예술가를 인터뷰하는 꼭지를 맡았다. 내밀 명함조차도 없는 초보였지만 열심히 그들을 인터뷰했다. 밥값이나 벌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참 즐거웠다. 버려진 철사로 만든 설치물로 환경 보호 메시지를 전달하는 설치미술가, 명상과 숨소리에서 영감을 얻는 화가, 문 닫은 동네 공장의 문을 추상화처럼 담아낸 사진가 등 다양한 예술가들의 철학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서사도 흥미로웠지만, 세상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와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한 노력과 열정이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그 울림이 기자란 일을 선택한 계기 중 하나가 됐다. 마치 숲에서 오랫동안 헤매다 마침내 길을 안내하는 북극성을 발견한 기분이라고 할까.
기자가 된 이후에도 그 시절을 떠올리며 새로운 북극성을 찾는 마음으로 인터뷰집을 꾸준히 모아왔다. 그중 좋아하는 책을 한 권 꼽자면 바로 『일하는 예술가들』(2018)이다. 소설가 강석경이 장욱진, 김중업 등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추구했던 근현대 예술가의 철학과 작업을 섬세한 언어로 풀어 낸 인터뷰집이다. 잠언집이라 해도 좋을 만큼 밑줄 치고 싶은 예술가들의 답변이 많지만, 그보다 인터뷰를 소설처럼 풀어낸 방식이 더 흥미로웠다.
정확히는 소설처럼 인물의 삶과 서사를 해체했다고 할까. 등장하는 예술가들의 삶에 대해서 말하지만, 오롯이 그 사람 자체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삶에 작든 크든 영향을 주었던 주변인들을 소설의 등장인물처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복선을 활용해 서사를 구성했다. 또한 인터뷰란 장르의 특성을 놓치지 않고 자기만의 해석을 더해 한층 더 입체적으로 인물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가령 단순한 도상에 오롯이 집중하며 그림을 그렸던 장욱진의 미학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생략의 예술가로 자주 얘기 된다. …… 춤은 언어의 생략이고, 시는 산문의 생략이며, 소설은 인생의 생략이다. 그림은 마음의 생략이라고나 할까.”
문득 세심한 언어로 탁월한 해석을 내놓았던 작가에게 열다섯 명의 예술가를 만난 후의 소회를 묻고 싶었다. 이제는 하나의 역사가 된 거장들의 작업과 철학을 육성으로 들으며 무엇을 느꼈는지 궁금했다고 할까. 그 답변을 서문에서 어렴풋하게 들을 수 있었다. “물은 깊은 밤에도 저 혼자, 혼자 흘러내리며 자신을 정화시킨다. 끊임없이 흐르면서 맑음, 자기본질을 지키는 물의 속성을 닮고 싶다. 예술가란 바로 세상의 가치에 안주하지 않고 물처럼 쉼 없이 자신을 씻으며 길을 찾아가는 사람이 아닐까.”
이번 호 특집(16쪽)은 이처럼 건축과 조경 분야에서 ‘일하는 예술가’들을 모아 공모의 문제점을 진단하며 공모의 본질에 대해서 살펴봤다. 이를 통해 잠시나마 공모의 본질과 공모의 미래 방향에 대해서 가늠해 볼 수 있었다. 탈도 많고, 문제도 많고,숙제도 많다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사실 이러한 상황을 야기하는 문제를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도외시하거나, 남들도 다 한다는 이유로 도의를 저버린 수단을 강구하고, 세상의 불의에 적당히 타협하면서 지낼 수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세상은 조금씩 더 어두워진다. 그래서 이번 특집이 어긋나버린 공모의 문제를 직시하고, 좋은 공모, 나아가 좋은 공간을 만들 수 있는 목적지로 가는 작은 길잡이가 되길 바라본다. 어두울 때 가장 빛나는 북극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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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대단찮은 기록이 만든 무수한 접점과 다양한 변경이 조경의 외연을 넓히고 사물과 인식 사이에서 끝없이 우리를 흔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편집위원 회의를 마친 뒤 뒤풀이로 곱창집에 간 적이 있다. 완벽한 내향인인 나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임무가 주어졌으면 해서, 곱창 굽기에 일가견이 있다는 남기준 편집장의 손에서 집게라도 뺏고 싶었다. 긴장한 날 가여워한 것인지 누군가 물었다. “김 기자는 왜 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숱하게 고쳐 쓴 자기소개서의 지원동기 항목을 읊으면 될 일었지만, 질문자가 내가 늘 ‘글은 이런 사람이 쓰는 거구나’ 생각했던 이수학 소장(아뜰리에나무)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는 관심사가 넓으며 박학다식하고 수많은 책과 영화를 볼 뿐 아니라 깊이 소화해 자신의 언어로 내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함부로 입을 뗐다간 속이 텅 빈 사람이라는 걸 들킬까봐 우물쭈물하는 사이 다 구워진 곱창을 입에 욱여넣는 걸로 상황을 무마했다.
그런 이수학 소장에게서 격주에 한 번씩 편지를 받는다. 아뜰리에나무(이하 나무)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 ‘나뭇잎’이다. 첫 뉴스레터는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는데, “여행지 한켠에서 급하게 휘갈겨 쓴 엽서처럼 또는 하고픈 말 다 묻어두고 주소만 덩그러니 있는 그림엽서처럼 난데없고 하릴없지만 이 작은 소식지로 조경이 맞닿은 일상과 일에 때로 가볍고 어쩌면 느리게 낙하해 볼까 합니다”라는 인사말을 마주하고서는 몽롱해졌다. 편지는 아날로그로 써야 낭만적이라는 생각은 다 편견이었다. 바람에 나뭇잎 부딪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뭇잎’은 조경과 경관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길을 걷다 만난 풍경은 물론 책과 영화 속 경관도 다룬다. 나무의 설계 프로젝트도 소개하는데 좀 독특하다. 설계 철학과 해법을 설명하기보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설계와 경관에 어떻게 투영했는지 이야기한다. 나무에게 설계는 “세상과 관계 맺고”, “세상과 얘기하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이따금 전하는 꽃나무 이야기는 내가 발신자와 같은 계절을 보내고 있다는 걸 실감케 한다. 다이어리의 아무 페이지에 그린 손그림에는 디지털 도면에서는 볼 수 없는 손을 떨며 그린 듯한 선이 있는데, 그 떨림에 고민이 묻어 있는 듯해서 들여다보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나뭇잎이 ‘뉴스’가 아닌 ‘레터(편지)’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가장 흥미롭게 읽은 편지는 ‘디자인 4제’ 시리즈의 데크 편. 데크라는 단어의 의미가 갑판(16세기)에서 부두나 승강장의 나무로 된 평평한 바닥(19세기)으로 확장되어 “집에 딸린 ‘목재 테라스’가 떨어져 나와 공원이나 정원의 시설물로서 지금과 같은 뜻을 갖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일 것”이라 추측하며 데크의 역사와 그 역할에 대해 설명한다. 어릴 적 툇마루에서 평상으로 이어지는 기억 덕분에 데크를 좋아하게 됐다고 고백하는데, 생생하게 묘사한 풍경이 참 인상 깊었다. “한옥의 구조를 흉내 낸 그 집에서 마루는 내부도 외부도 아닌 중간 영역으로 앞뒤가 늘 열려 있어 바람 불면 좋고 비 오면 더 좋았다. 툇마루는 햇빛의 자리다. 종일 내리쬐는 빛은 시간과 계절에 따라 농도를 달리하여 끝없이 하릴없게 만들었다.”
이수학은 데크를 바닥 데크와 뜬 데크로 분류한다. “바닥으로서 데크는 땅의 표면으로 재료의 물성을 통해 영역을 나눈다. …… 지면에서 최소한의 높이 이상으로 떠 있는 데크는 지면에 붙은 데크와 달리 시간과 공간의 차원을 전이한다. …… 눕고 뒹굴다 엎드리고 자다 깨는 데크는 풀밭의 연장이고 무심한 하늘 밑이다.” 이어지는 나무의 데크 목록. 바닥 데크: 평평한 데크(사각데크, 둥근데크), 기울어진 데크(긴데크), 뻗어나간 데크(먼데크, 얹혀펼친데크, 바람자리), 스탠드로 연장된 데크(접힌데크), 뜬 데크: 평평한 데크(둥근데크, 모꼴데크), 기울어진 데크(너른긴데크), 놀이를 위한 데크(놀이데크), 계단이 연장된 데크(물가데크). 하나의 주제를 다양하게 풀어내는 솜씨가 웬만한 무크지 편집자보다 낫다. 이걸 공짜로 봐도 되나 이상한 죄책감이 든다. 조경을 잘 모르는 사람이 관심을 갖게 하는 데는 이런 소식지가 제격이지 않을까 싶다.
이수학은 기록을 다루는 특집에서 말했다. “개개인이 엮어 묶은 작업의 기록이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겠는가. 그저 사적인 사건이고 시간일 뿐이지만, 그 대단찮은 기록이 만든 무수한 접점과 다양한 변경(邊境)이 조경의 외연을 넓히고 사물과 인식 사이에서 끝없이 우리를 흔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각주 1) 좀 더 많은 사람이 ‘나뭇잎’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각주 정리
1. 이수학, “기록하다”, 『환경과조경』 2024년 7월호, p.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