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 삭막한 겨울 풍경에 색을 입힌 과일나무 서울문화재단, 도시게릴라 프로젝트로 최정화 작품 선보여
    매서운 영하의 날씨에도 과일을 주렁주렁 매단 나무를 볼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우중충한 회색 건물 사이에 화려한 과일나무가 등장했다. 서울 동대문구 청계9가를 따라 걷다보면 서울문화재단 2층 데크 위에 설치한 높이 7m, 지름 5m의 거대한 과일나무를 만날 수 있다. 형형색색의 탐스러운 열매를 매달고 있는 과일나무는 서울문화재단이 청사 이주 10주년을 맞아 도시게릴라 프로젝트 ‘거리의 재발견: 청계9가’를 주제로 선보인 설치미술가 최정화의 작품 ‘과일나무’다. 어깨를 움츠리고 걸음을 재촉하게 되는 삭막한 계절, 서울 도심에 철모르고 자라난 과일나무는 얼어붙은 마음을 한결 푸근하게 만든다. 도시게릴라 프로젝트 도시게릴라 프로젝트는 삭막한 도시 생활에 지친 시민들에게 예상치 못한 일상 공간에서 예술과 만나는 즐거움을 주는 서울문화재단의 공공 문화 예술 프로젝트다. 지난 2013년 가을 밤, 5개의 작가 그룹(길종상가, 무늬만커뮤니티, 프로젝트대배살, 소심한 상상, 엠조형)이 북촌, 서울시청, 한강공원, 용산역 일대, 보광동 우사단로 등 5개 장소에 그래피티, 드로잉, 설치 등 각기 다른 콘셉트의 작품을 남긴 ‘서울-밤길에 드로잉 조심’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특히, 철공소가 밀집되어 있는 용두동 일대 골목에 철제 조형물, 폐자재 등을 활용한 설치 미술로 ‘철등 거리’를 조성한 ‘용두동 철등거리’(2014),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산업 단지로 산업의 변천에 따라 지나온 세월의 흔적이 골목 곳곳 에 남아 있는 구로디지털단지의 노점과 지하철 역사에서 공공 미술과 퍼포먼스를 선보인 ‘도시게릴라 프로젝트 in 구로’(2015) 등 지역 커뮤니티와 밀착해 장소의 특성을 반영한 도시 문화·공공 예술 캠페인으로 시민들과 소통하며 공감대를 형성했다. 대중과 소통하는 최정화의 공공 미술 서울문화재단과 최 작가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06년 서울문화재단이 성북수도사업소의 이전으로 생긴 유휴 공간에 청사를 이전하면서 최 작가는 건축가 오우근(지음아키씬)과 함께 청사의 리모델링 디렉터로 참여했다. ‘C-9 생생生生 프로젝트’로 명명된 리노베이션 작업은 청계9가(C-9)를 청사 리노베이션을 통해 새로운 문화 지역으로 재생시키고 향후 청계8가 (C-8), 청계7가(C-7), 청계6가(C-6)에 이르는 청계천 전역을 문화 지대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담았다. “작품을 소유하는 1%의 관객보다 나머지 99%의 관객이 더 중요하다”1는 신념을 밝혀 온 최정화는 ‘C-99 생생 프로젝트’에 공공 미술의 개념을 더했다. 청사 건물은 ‘열린 공간’을 지향하여 층과 벽을 허물었고 상하좌우를 터놓아 시민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이번에 ‘과일나무’ 작품이 설치된 서울문화재단 2층 데크는 기존 업무 공간에서 시민을 위해 개방한 공공 공간으로 전환되었다. 철공소와 소화기 판매점이 밀집된 낙후된 청계9가 일대를 지나는 시민들에게 시각적 자극과 소통의 기회를 제공한다. 리노베이션 작업 당시 나뭇잎으로 건물 전체를 감싸는 작업을 계획했지만 구현되지 못해 아쉬웠다는 최 작가는 서울문화재단과의 인터뷰에서 청사 이전 10주년을 맞아 설치한 이번 작품이 당시의 아쉬움을 달래는 위로가 될 것 같다고 밝혔다.2 최정화 특유의 촌스러운 듯 화려한 색감 속에 유쾌하고 따뜻한 감성이 묻어있는 ‘과일나무’ 시리즈는 지난 2015년 9월 프랑스 북부 도시 릴에서 개최된 도시 문화·예술 축제 ‘릴 3000’에 초대돼 호평을 받았다. ‘과일나무’는 가벼운 패브릭 소재를 이용해 이동이 가능한 크기로 제작되었다. ‘거리의 재발견: 청계9가’ 프로젝트가 종료된 이후에도 서울의 다양한 도심 공간에 순환설치될 예정이다. 청사 이전 10주년, 서울문화재단은 과일나무의 탐스러운 열매처럼 문화와 예술을 매개로 지역을 변화시키는 열매를 맺고 있을까? 서울문화재단 조선희 대표는 “다양한 예술적 시도와 실험을 통해 서울문화재단을 예술, 그 자체로 상징이 되는 공간으로 조성해 나갈 것”이라며 “변화를 거듭하는 이 공간은 여전히 미완未完이며, 앞으로 더 채워지거나 사라짐을 반복해 거듭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 남서울생활미술관, 백 년의 베일을 벗다 ‘미술관이 된 구벨기에 영사관’ 전, 2월 21일까지
    사람이 머물렀던 공간에는 이야기가 남는다. 공포 영화 ‘장화·홍련’을 본 뒤 적었던 감상이다. 이 영화는 탄탄한 이야기를 받쳐주는 아름다운 영상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고, 그 영상미는 영화의 배경인 건물에서 비롯됐다. 일본식 목재 가옥은 영화 전반의 어두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보색으로 구성된 벽지는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고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에 어깨가 움츠러든다. 한동안 나무로 된 건물을 보면 ‘장화·홍련’이 떠올랐다. 이처럼 공간은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많은 사람이 영화나 드라마를 추억하기 위해촬영지를 찾고, 과거의 건물이 보존된 거리에서 역사탐방을 한다. 건물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되고, 그 이야기가 한 시대를 대표하는 경우 역사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미술관이 된 구벨기에 영사관’ 전은 복잡한 사당 한구석에 자리한 붉은 벽돌 건물의 역사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2015년 12월 15일부터 올해 2월 21일까지 남서울생활 미술관에서 ‘미술관이 된 구벨기에 영사관’ 전이 열린다. 이 전시는 대한제국기에 벨기에 영사관으로 세워져 현재 남서울생활미술관으로 활용 중인 건물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 준다. 올해 건물이 세워진 지 110년을 맞이해 그 의미가 깊다. 전시는 건축과 미술 두 부문으로 구성된다. 건축 부문에는 초청 큐레이터로 한국 근대 건축사학자 안창모(경기대학교 교수), 문화재 복원 모형에 고주환(티엠새한 문화재 대표이사), 전시 공간 디자인에 건축가 최욱(원오원팩토리)이 참여해 건물의 역사와 특징을 해석했다. 미술 부문에는 김상돈, 노상호, 임흥순, 장화진, 허산 작가와 남서울예술인마을 그룹이 참여했다. 미술관 뜰에 들어서면 좌우 대칭의 붉은 벽돌 건물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이런 붉은 벽돌집은 20세기 초, 서구 문화가 도입되면서 주로 서울의 사대문 안에 지어지기 시작했다. 벨기에 영사관도 본래 회현동에 당시 유행하던 열주―하층은 도리아식, 상층은 이오니아식 석주―가 아름다운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도심 개발 사업에 밀려나 1982년 관악구 남현동에 이축됐다. 계속 방치됐던 건물은 2004년이 되어서야 소유주인 우리은 행이 서울시에 무상으로 임대하면서 서울시립미술관의 분관인 남서울미술관으로 문을 열게 됐다. 1층은 건축 부문 전시장으로 건물의 역사와 이축 과정을 보여준다. 전시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설치했던 가벽이 제거됐고 그 뒤에 숨겨졌던 기둥, 벽난로, 창문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가벽을 들어내면 창틈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와 추울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1층의 벽면을 채운 창은 햇빛을 통과시켜 전시장을 따뜻하게 달군다. 흰색 대리석 벽난로는 이축 과정에서 굴뚝과 연결되지 못해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외에도 건물 목재 골조모형, 석주 거푸집, 이축 시 샘플로 만들어졌던 석주, 전시 기획 중 발견된 타일―건물의 발코니에 사용된 타일이 본 건물의 다락방에서 발견됐고, 지금은 1층 우측 전시실의 바닥에 설치되었다― 등을 통해 건물을 이해할 수 있다. 목재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예술 부문의 전시가 이어진다. 1층의 전시가 과거에 대한 궁금증에 답하고 있다면 2층은 그 전시를 통해 관람객이 느낀 감성을 확장한다. 회화, 설치, 사진, 영상, 조각 등의 예술 작품은 미술관을 비롯해 미술관이 있는 남현동과 사당 지역까지 화두를 확장하여 건물을 재해석 했다. 장희진 작가의 ‘모던 테이스트(정관헌)’는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바라보게 하고, 노상훈 작가의 ‘소년시少年市’와 허산작가의 ‘벽에 난 균열 #03’은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해 건물의 숨겨진 이야기를 상상하도록 만든다. 해가 잘드는 방에 설치된 ‘노스텔지아’를 통해 건물의 애환을 위로하고 싶었던 임흥순 작가의 마음도 느낄 수 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작품은 건물이 지닌 역사와 문화, 사회에 걸친 다층적인 의미를 곱씹어보게 한다.
  • [시네마 스케이프] 어린 왕자 인용의 기술
    영화 ‘어린 왕자’는 새로운 이야기 구조 속에 어린 왕자의 원작이 소개되는 형식의 애니메이션이다. 모두가 다 아는 뛰어난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는 그 자체를 충실히 재현하느냐 새로운 시선으로 재해석하느냐로 나뉜다. 전직 비행사였던 괴짜 할아버지는 옆집으로 이사 온 소녀에게 어린 왕자가 등장하는 자신의 모험담을 들려준다. 할아버지와 소녀가 등장하는 현실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표현하고, 어린 왕자가 등장하는 소설은 종이로 만든 인형을 스톱 모션 기법으로 촬영해 만들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표현된 공간과 종이로 만든 어린 왕자의 공간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현실의 도시는 획일적이고 건조한 분위기이며 감정 없는 인간들로 채워져 있다. 좀비 같은 표정의 인간들은 똑같이 걷고 똑같은 자세로 일하며 목표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린다. 반듯한 도로, 사각의 주택, 네모난 가로수 모두 질서 정연하다. 자세히 보면 문손잡이도 네모다. 효율을 상징하는 직선의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회로란 없다. 소녀의 엄마는 치밀하게 인생 계획표를 짜서 하루하루 실천하도록 강요한다. 회색의 도시와 대조적으로 종이로 만든 캐릭터와 풍경은 따뜻하기 그지없다. 풍부한 색감의 동화 그 자체다. 색종이나 상자를 찢어서 무언가 만들어 본 사람은 기억하고 있을 종이의 질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두꺼운 종이를 투박하게 찢거나 겹쳐서 만든 구름과 연기에서 종이가 가진 특성이 잘 드러난다. 얇은 종이를 돌돌 말아서 만든 어린왕자의 황금빛 머리칼과 여우와 만나는 밀밭은 생동감이 넘친다. 어린 왕자가 입고 다니는 연두색 항아리 바지는 걸을 때마다 사랑스럽게 펄럭거리고 긴 머플러와 여우 꼬리가 햇빛에 투명하게 빛나며 바람에 날리는 장면은 눈부시다. 사막과 오아시스의 물,밤하늘에 뜨는 별, 어린 왕자가 좋아하는 해지는 풍경까지 세심하게 표현하고 있다. 아, 종이가 이토록 풍부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소재구나. 책 속 캐릭터들이 종이로 생명을 얻다니, 마법이 따로 없다. 어린 왕자와 여우가 서로를 길들였듯이 소녀는 할아버지에게 좋은 영향을 받으며 변한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이집트 정원 History of Landscape Architecture with 100 Scenes: The Egypt Gardens
    #72 인류 최초의 정원사들 마리 루이제 고트하인Marie Luise Gothein(1863~1931)이라는 여성이 있었다. 약 백 년 전, 1914년에 『정원예술사Gartenkunst』라는 책을 내놓은 독일 여성이다. 2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책으로서 고대 이집트부터 책이 출판된 1910년경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아직도 이 책을 능가하는 정원 역사서는 없는 것으로 안다. 일찌감치 영어로도 번역되었다. 고트하인 여사는 교양 시민층에서 태어나 탄탄한 기초 교육을 받고 학문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나 여성은 대학 입학이 불가한 시대였으므로 독학으로 석학의 경지에 올랐다. 그녀는 런던의 대영도서관을 자신의 대학으로 여겼다고 한다. 『정원예술사』 책을 내놓기 전에 영국 시인들에 대한 평서를 여럿 발표하고 번역서도 냈다. 그러다가 정원 열병에 걸렸던 것 같다. 처음에는 풍경화식 정원을 연구하기 위해 영국 전체를 여행했다가 차츰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지중해 일대를 돌아다녔고 결국 이집트 정원사까지 탐구했다. 그리고 10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위의 책을 완성했다.1 위키피디아는 물론 참고 서적도 변변치 않았던 시대였다. 아마도 영국과 독일의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정원 서적과 도판을 모조리 읽고 분석하지 않았나 싶다. 말년에는 중국, 일본, 인도 등을 여행하다가 인도 문화에 심취하여 『인도 정원』이라는 책도 냈다. 1931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100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원고를 쓰는 내게 고트하인 여사의 『정원예술사』는 매우 소중한 참고서다. 물론 백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으므로 미진한 부분이 없진 않지만, 그런데도 읽을 때마다 그녀의 맑은 지성과 뛰어난 통찰력에 새삼스럽게 놀라곤 한다. 다른 서적을 읽다가 고트하인 여사의 책에서 그대로 베낀 내용을 발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는 사이 고트하인 여사는 내게 몹시 존경스러운 인물이 되었다. 이번 달, 이집트 정원에 대한 원고를 쓸 요량으로 그녀의 『정원예술사』 이집트 편을 다시 들춰보았다. 읽던 중 문득 솔깃한 대목을 만났다. 이집트 중부의 베니 하산Beni Hasan이라는 동네에서 발견된 벽화에 대한 설명이었다. “정사각형의 화단들이 나란히 배치된 곳이 바로 채소밭이다. 채소밭 옆에 원형의 연못이 있는데 그 주변에 식물 덩굴을 그려 넣어 연못이 정원에 속함을 알렸다. 남자 둘이 부지런히 물을 길어다가 채소밭에 붓고 있다. 이들은 정원사로서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그들의 이름이 떡하니 쓰여 있을 뿐 아니라 무덤 주인에게 제물을 바치는 장면에서 또 한 번 등장하기 때문이다. 어깨에 장대를 메고 자기들이 기른 채소를 바구니가 미어지게 담아서 나르는 장면이다. 이 정원사들의 이름은 ‘네테르네히트Neternecht’와 네페르호텝‘Neferhotep’이었다.” 연재하는 동안 왕, 귀족, 영웅이나 유명 인사의 정원 이야기를 전하는 데 다소 지쳐있었던 것 같다. 이때 나타난 두명의 정원사는 마치 첫눈처럼 신선했다. 이들이 과연 누구였을까. 어느 시대에 살았을까. 어떻게 살다 갔을까. 고트하인 여사는 더 이상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으나 나는 이들의 삶에 대해 좀 더 자세한 것을 알고 싶었다. 각주를 찾아보니 퍼시 뉴베리Percy Newberry라는 이집트 학자가 1893년에 베니 하산에서 발굴된 석묘에 대해 쓴 책들이 있는 데 그중 1권의 삽도 27번부터 참고했다고 적혀 있었다. 검색해 본 결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도서관에서 그의 책을 2012년에 스캔하여 디지털 아카이브에서 제공하고 있었다. 퍼시 뉴베리는 베니 하산 지방의 발굴 책임을 맡았던 자였다. 여기서 중왕국 시대의 석묘 39점이 발굴되었는데 그 결과에 대해 집필한 것이 위의 책이다. 39개의 무덤 중에서 3호 무덤 벽화에 우리의 두 정원사가 등장한다. 3호 무덤은 아메넴헤트 1세(기원전 1991~1962)의 시대를 살았던 어느 왕족의 무덤이었다.2 그러니 우리의 두 정원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4천 년 전에 활약했다는 결론이 얻어진다. 그들의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무덤주가 가족 구성원뿐만 아니라 모든 식솔을 벽화에 등장시키고 각각 머리 위에 직분과 이름을 써넣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정원사’라는 뜻의 상형문자는 라고 쓴다. 오른쪽의 문자는 갈대 두 개인데 음성 부호로서 알파벳 y를 대신한다. 왼쪽의 것은 장대에 매단 채소 바구니나 물동이인 듯하다. 아니면 트렐리스에 주렁주렁 열린 포도송이를 뜻하는 것일까. 우리의 두 정원사에 대한 흔적은 여기서 더 이상 추적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발굴된 무덤 중에서 정원사의 것은 없다. 물론 앞으로 발굴될 수도 있다. 당시 정원사들이 노예였는지 자유인이었는지 역시 알 수 없다. 자유인이었다고 해도 높은 석묘 건축비를 감당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에 묻혔을까. 해결되지 않은 질문을 그대로 두고 일단은 단락을 넘기는 수밖에 없다. 정원에 대한 문헌 기록은 모형이나 그림보다 적어도 천 년 정도 앞선다. 고왕국 제4왕조 첫째 왕인 스네페루 Sneferu(기원전 2600~2576년경)대에 이집트 북쪽을 통치했던 총독은 ―이름이 확실치 않다― 비록 정원 모형이나 그림은 남기지 않았지만 기록을 통해 “1헥타르가 넘는 정원과 450헥타르의 포도밭”의 소유자였음을 자랑했다.3 고대 이집트에서 포도는 생활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식물이었다. 열매를 먹고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며 신전에 바치고 제사에 올리는 중요한 열매였다. 늦어도 고왕국 초기부터 이미 포도밭을 만들어 가꾼 것으로 알려져 있다.4 본래 레반트 지역에서 건너왔을 터이나 곧 이집트 전역에서 재배되었다. 포도밭을 가꾸는 장면을 가장 먼저 묘사한 것도 이집트였다. 고왕국의 4~5대 왕조 사이(기원전 2600~2500년경)에 이미 ‘포도의 일대기’를 그려 포도가 무르익어 와인이 되는 과정을 묘사했다.5 이렇게 포도를 가꾸고 익혀서 열매를 수확하거나 포도주를 만드는 것 역시 정원사의 일이었다. 덩굴 식물이므로 트렐리스를 만들어주면 줄기들이 서로 얽혀 녹색 지붕을 이루는 포도나무는 정원의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가족들이 포도 덩굴 아래 앉아 연못을 바라보는 여유로운 풍경도 볼 수 있으며 정원사들이 짬짬이 포도 덩굴 아래서 땀을 식히는 모습도 그려졌다. 포도주는 고급 품목으로서 왕실, 신전과 고관의 전용물이었다. 궁전이나 신전에 대규모의 포도밭을 조성하여 전문적으로 생산했다. 당시 궁전이나 신전 정원의 반은 포도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6 물론 최대 효과를 노려 관수하고 관리했다. 이를 위해 사방으로 물길을 내고 약 2.5m 간격의 격자로 점토 벽돌 기둥을 세웠으며 이 기둥에 대고 포도나무를 심었다. 기둥의 크기는 가로·세로 약 1.3m, 높이는 2~2.2m 정도로 수확하기에 적절한 높이였다. 기둥을 이렇게 넓게 만든 것은 포도나무 주변의 온도를 최대한 일정하게 유지하여 한 해에 여러 번 수확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사시사철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이집트의 포도밭은 알키노오스의 정원을 연상시킨다. 그리스에서는 꿈에 그리는 이상향으로 묘사되지만 이집트에서는 현실이었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떠도는 시선들, 큐레이터 뷰] 아시아 메가 시티 선전과 도시/건축 비엔날레 Wandering Eyes, Curator's View: 2015 Bi-City Biennale of Urbanism/ Architecture
    과거 한적한 어촌 마을이었던 선전Shenzhen(深圳)이 중국의 대표적인 도시로 성장하는 데는 불과 35년여 밖에 걸리지 않았다. 1985년 건축된 160m의 무역센터는 당시 중국 최고의 마천루로 선전의 급속한 경제 발전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3일 만에 1층을 지어 올렸다’는 기록은 중국식 초고속 도시 성장을 신화적으로 증명하는 대목이다. 이미 빼곡해진 빌딩숲 선전에는 계속된 도시의 욕망을 좇아, 현재 118층, 600m에 달하는 국제금융센터가 건설 중이다. 여전히 도시 곳곳이 ‘공사 중’인 선전, 고속으로 ‘돌진중’인 미래형 메가 시티를 도시 문화적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도시성에 대한 비전, 전망, 문화적 가치에 대한 탐구는 2005년부터 선전-홍콩 도시/건축 비엔날레Shenzhen-Hong Kong Bi-City Biennale of Urbanism/Architecture를 통해 제안되고 있다. 올해로 10년째, 6회를 맞이하는 선전-홍콩 도시/건축 비엔날레는 ‘어바니즘’ 모토의 세계 유일한 도시ㆍ건축 비엔날레다. 건축 비엔날레와는 차별화된 전략으로, 도시성과 사회와의 관계를 질문하고 그 사이에서 어떠한 소통이 가능한지를 탐색한다. 더군다나 올해 선전 비엔날레의 주제는 ‘도시 살리기Re-living the City’로, 도시재생에 대한 의지를 함축적으로 전달한다. 필자가 12월에 다녀온 도시/건축 비엔날레를 통해, 경제 도시선전이 탐구하는 아시아 메가 시티의 도시 문화적 이슈와 논의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도시 경제 지정학에 주목한 선전의 어바니즘 비엔날레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선전의 독특한 지정학적 맥락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다. 중국 광둥성 남부, 홍콩과의 접경지에 위치한 선전은 1979년 중국 최초의 경제특구로 지정된 후,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뤄내 세계 경제사에서도 손꼽히는 도시다. 그 배경에는 홍콩과 인접한 경제자유지역이라는 지정학적 위치가 있다. 홍콩과 접경 지점에 위치한 기차역 뤄후Louhu에서는 엄청난 인파의 중국인이 홍콩에서 선전으로 다시 들어가고 있어 급증된 두 도시 사이의 상호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선전은 그간 홍콩의 위성 도시 역할을 하며 중국의 대외 개방 창구로 성장해 왔는데, 최근 통신, IT, 벤처 산업, 금융업, 서비스업까지 급속도로 경제권이 확대되며 광둥성 3대 자유무역구 중 최고의 GDP를 기록했다. 조만간 홍콩을 앞지를 것이라는 전망까지 제시되고 있으니, 선전의 고도성장은 도시에 가득한 마천루마냥 멈출 줄 모른다. 그러나 선전에 도착해 받은 첫인상은 고층 아파트가 끝없이 펼쳐진 황막한 유령 도시, 삭막한 뉴타운과 흡사해 보였다. 선전, 이 도시의 문화에 관한 정보가 많지 않은 이유는 그간 가파른 경제 성장을 이뤄내느라 문화적인 면에 있어서는 폐허, 일종의 불모지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일 년에 수백여 개의 박람회가 열리는 중국 최고의 박람회 도시라지만 이것 또한 산업의 한 일종이라 문화적 성과로 볼 수는 없을 듯하다. 폐쇄된 밀가루 공장에서의 비엔날레 도시/건축 비엔날레는 문화적 불모지라는 선전의 오명을 마치 대도시 어바니즘을 통해 탈바꿈시키려는 듯 2년마다 국제적인 건축가들을 초청해 대규모 스케일로 진행한다. 이번 선전 비엔날레에서는 전 세계 80개 이상의 건축ㆍ도시 프로젝트가 2015년 12월 4일부터 2016년 2월 28일까지 세 달 여간 선보인다. 심소미는 독립 큐레이터이며 미술과 건축 관련 글을 쓰고 있다. ‘신지도제작자’(송원아트센터, 2015), ‘모바일홈 프로젝트’(송원아트센터, 2014), ‘Hidden Dimension’(갤러리 스케이프, 2013) 등 다수의 전시를 기획했다. 갤러리 스케이프 책임큐레이터, 갤러리킹 공동디렉터,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2015년 동북아시아 도시 리서치(예술경영지원센터 후원)를 진행했으며, 2016년 난지창작스튜디오 연구자 레지던시에 입주해 활동 중이다.
  • [조경의 경제학] 정원을 만들까, 주차장을 만들까? Economics of Landscape Architecture: Should We Make Gardens or Parking Lots?
    작은 마당에서 시작된 고민 당신에게 자그마한 마당이 하나 있다. 바쁜 일상에 쫓겨 아침저녁으로 허둥지둥 지나치기만 하는 빈 자투리땅이다. 하지만 꽃 피고 단풍 드는 계절이 되면 당신은 항상 이 마당을 정원으로 꾸며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지금, 올봄에는 그 계획을 반드시 실천하리라 결심하는 참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얼마 전 큰 맘 먹고 새 차를 한 대 뽑은 것이다. 아직 시트의 비닐도 벗기지 않은 그 차를 당신은 집 앞 골목길에 세워놓고 있다. 혹여 누가 지나가다 차를 상하게 하지는 않을까,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다. 아내는 담장을 헐고 마당에 주차를 하자고 성화다. 마음이 흔들린다. 이 작은 마당에 정원을 만들까, 주차장을 만들까? 누구에게는 쉬운 선택이지만, 다른 누구에게는 매우 어려운 선택일 수 있다. 결정을 내린 후에는 만족할 수도 있지만 크게 후회할 수도 있다. 이렇게 성가신 선택을 우리는 매 순간 하고 산다. 당신이 지금 할 수 있는 다른 모든 일을 포기하고 이 글을 읽고 있는 것처럼. 선택을 더욱 어렵게 하는 것은 정원이나 주차장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자원이 마당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정원을 만드는 데는 흙, 돌, 식물이 필요하고, 주차장을 만드는 데는 시멘트, 페인트, 자동문이 필요하다. 이런 재료들을 다루는 기술자마저 다르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들이 어디에 있는지, 이것들을 사용하기 위해 얼마를 지불해야 하는지, 정원과 주차장 중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변수가 너무나 많다. 그래도 우리는 결국 선택을 하면서 산다. 한편 시야를 개인이 아닌 사회로 넓히면 선택의 차원이 달라진다. 당신이 사는 동네에 있는 여러 개의 마당 중에 몇 개를 정원으로 만들고 몇 개를 주차장으로 만들어야 하나? 당신이 사는 나라에 있는 수많은 마당 중에 몇 개를 정원으로 만들고 몇 개를 주차장으로 만들어야 하나? 그리고 당신이 사는 이 지구에서는? 마당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정원과 주차장만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문제가 한층 더 복잡해진다. 무언가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것들의 근원을 되짚어보면 우리가 가진 자원은 토지, 노동, 자본, 이렇게 세 가지로 환원된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 이것을 ‘생산의 3요소’라고 배웠다. 경제학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러한 자원의 양이 한정적이라는 데 있다. 도대체 우리는 한정된 자원 중 얼마만큼을 정원 또는 주차장을 생산하는 데 사용해야 하나? 당신이 당신의 마당을 원하는 대로 사용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자원을 그 소유자가 원하는 대로 사용하면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들이 꼭 필요한 만큼 생산될 수 있을까? (비록 지금은 당신의 마당에 무엇을 만들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지만, 그래도 가끔은)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소비자 잉여와 생산자 잉여 경제학은 시장기구에 의해 최적의 자원 배분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모든 재화와 서비스가 아무런 방해 없이 자유롭게 시장에서 거래되면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메커니즘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경제학이 이를 증명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수요공급곡선을 활용하는 모형을 살펴보자. 느긋한 토요일 아침, 당신은 아까 그 마당을 생각하며 커피를 마시고 있다. 잠이 덜 깬 상태로 즐기는 그날의 첫 커피 한 잔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다. 이 첫 잔을 위해서라면 당신은 상당한 대가를 치를 의사가 있다. 첫잔을 비우고 두 번째 잔을 주문한다. 역시 그윽한 내음이 코를 즐겁게 하지만 아까만은 못하다. 그래도 커피는 참 대단한 음료라고 생각하며 잔을 비운다. 이 잔을 위해서도 당신은 상당한 대가를 치를 의사가 있지만 첫 잔만큼은 아니다. 세 번째 잔은 어떠한가? 그리고 그 다음 잔은? 커피를 마시면 마실수록 마지막 잔이 주는 기쁨은 바로 전 잔에 비해 작아진다. 그리고 마침내 돈을 주고는 커피를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은 상태에 이르게 된다. 경제학자는 이 당연한 이치를 ‘소비량이 증가할수록 한계효용이 체감한다’고 표현한다.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 때문에 수요곡선은 <그림 1>과 같이 우하향하는 모양을 띠게 된다.1 공급곡선의 모양은 생산에 소요되는 비용에 의해 도출된다. 커피 가게 주인의 입장에서는 커피의 생산량이 늘어날수록 마지막 잔에 들어가는 비용이 바로 전 잔에 비해 커진다. 이를 경제학자는 ‘생산량이 증가할수록 한계비용이 체증 한다’고 표현한다. 한계비용 체증의 법칙 때문에 공급곡선은 <그림 2>와 같이 우상향하는 모양을 띠게 된다.2모두가 알다시피 시장균형은 수요곡선과 공급곡선이 만나는 점에서 이루어진다. 이 균형점에서 소비자와 생산자가 얻는 이득을 따져보면 왜 경제학자가 이 균형점을 ‘매우 가치 있는 상태’로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그림 3>은 수요곡선과 공급곡선이 만나는 균형점(E)을 보여준다. 많은 소비자와 생산자가 경쟁적으로 거래를 한 결과 당신의 동네에서는 커피가 총 세 잔 소비(생산)되며 그 가격은 3천원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동네는 한정된 자원을 커피에 대해 딱 세 잔 소비(생산)할 수 있는 만큼 배분한 것이다. 이제 첫 잔의 효용과 비용을 생각해 보자. <그림 3>의 수m요곡선에 따르면 소비자는 첫 잔에 대해 5천원까지 지불할 의사가 있다. 첫 잔의 한계효용이 무척 크기 때문이다. 반면 공급곡선에 따르면 생산자는 첫 잔을 천원에 판매할 의사가 있다. 첫 잔의 한계비용이 아주 작기 때문이다. 민성훈은 1994년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조경설계 서안에서2년간 일했다. 그 후 경영학(석사)과 부동산학(박사)을 공부하고 개발, 금융, 투자 등 부동산 분야에서 일했다. 2012년 수원대학교로 직장을 옮기기 전까지 가장 오래 가졌던 직업은 부동산 펀드매니저다.
  • [그들이 설계하는 법] 과정 The Way They Design: Process
    이미 지난 호에 언급했지만 나의 특별한 ‘설계하는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설계할 때 유용했던, 그리고 여전히 도움이 되는 다양한 단상을 공유하고자 한다. 지난 달에는 설계에 있어 ‘문제 제기’와 관련된 단상을 열거했다. 이번 달에는 ‘과정’이라는 넓은 범주에 해당하는 테제를 나열해본다. 각 테제의 개별적 유효성과 적합성은 전적으로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책상다리의 순서 1934년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는 『독서의 ABC』에서 “완성된 후 네 개의 다리를 가지고 똑바로 설 수만 있다면 책상의 네 개 다리 중 어느 다리를 먼저 만들었는 지는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1 완성된 결과물이 무엇이든 간에 설계, 제작, 시공 작업이 끝난 후에는 사용자의 영역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결과물 사용에 있어 설계 과정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설계 과정, 의도, 순서에 상관없이 완성품은 나름대로의 세계를 구축하고 사용자의 경험은 전혀 다른 의미 체계를 생성하기 때문이다. 사이즈의 문제 언젠가 홀데인J. B. S. Haldane의 “적합한 사이즈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읽은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에 관한 이야기를 기억한다.2 홀데인은 “동물 유형에 따라 적합한 사이즈가 있고 사이즈의 변화는 형태의 변화를 동반한다”라고 말하며 다음 이야기를 한다. 『천로역정』에 등장하는 키가 60피트인 거인은 그리스도인보다 10배나 더 크고 넓고 두꺼워서 그리스도인 무게의 100배, 80~90톤가량이라고 한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거인의 뼈는 그리스도인의 100배 정도밖에 안되기 때문에 각 제곱인치당 인간의 뼈가 감당해야 하는 무게의 10배를 감당해야 한다. 인간이 자신의 10배의 무게에 의해 허벅지 뼈가 부러진다는 사실로 유추해 보았을 때 『천로역정』에 표현된 거인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허벅지가 무너지는 고통을 경험했을 것이라고 홀데인은 이야기한다. 사이즈는 물리와 중력의 문제다. 작은 생쥐가 코끼리와 맞먹는 크기가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구조·시스템적 변화가 있어야 하며,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는 표면 장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파리가 물에 빠졌을 때는 표면 장력에 의해 파리의 온 몸이 무력화되지만, 인간의 몸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물속을 빠져나올 수 있다. 모든 물질에는 적합한 스케일이 있으며, 공간도 마찬가지다. 최근 건축, 조경, 도시 분야에서는 생태모방biomimicry 혹은 파라메트리시즘parametricism이라는 개념 아래 유기체적 형태의 모방과 적용에 대한 작업이 많이 진행되고 있다.3 혈구 세포의 구조적 형태를 몇 백만 배 확대한 구조·설치물에서부터 물고기의 비늘에서 착안한 건물 표피 시스템까지, 스케일의 증폭과 적용은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창의적 작업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홀데인이 말한 스케일의 문제는 직설적인 해석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자하 하디드Zaha Hadid 제국의 전도사인 패트릭 슈마허Patrick Schumacher가 전파하는 파라메트리시즘은 파라메트릭 디자인과 디지털 디자인의 직설적·형태중심주의적 해석만을 주창한다. 파라메트리시즘을 의미하는 ‘변수주의’와는 정반대 지역적 특수성과 사이트 변수의 영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독단적인 유기 곡선 형태의 상품을 신자유주의 글로벌 자본 시장의 스타키텍트starchitect 시스템 속에서 세계 전역에 수출하고 있는 것이다. 슈마허는프라이 오토Frei Otto를 파라메트리시즘의 유일한 선도자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프라이 오토의 업적은 자연의 형태와 시스템에서 영감을 받아 새로운 구조 시스템을 해석, 제안, 개발한 데 있다. 그의 건축 구조에 관한 작업보다는 덜 알려진 도시 시스템에 관한 연구를 보면, 나뭇잎의 잎맥 무늬, 거품 패턴의 분석 등 최소거리에 기반을 둔 도시 시스템의 가능성이 실험되었음을 알 수 있다.4 오토에게 형태는 시스템을 담아내는 메커니즘의 발현이었고 목적 대상이 아닌 매체일 뿐이었다. 홀데인의 사이즈에 대한 일화를 통해 우리는 자연의 순수성에 매혹된 형태에 대한 강박 관념을 경계해야 한다. 서예례는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의 도시설계와 조경 담당 교수이며, 어반 터레인즈 랩(Urban Terrains Lab)의 디렉터다. 코넬대학교, 바나드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뉴욕 시립대학교,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도시설계와 건축을 가르쳤다. 미국 공인 건축사이자 친환경건축 인증제 공인 전문가로 2001년부터 2009년까지 와이즈/만프레디(Weiss/ Manfredi: Architecture/Landscape/Urbanism)에서 프로젝트 건축가로 일하며 시애틀 올림픽 조각공원, 뉴욕 바나드 디에나 센터 등의 프로젝트를 담당했다. 2009년부터는 오피스 오브 어반 터레인즈(Office of Urban Terrains)의 디렉터로 다양한 건축, 조경, 도시설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서울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 전공으로 학사와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에서 건축학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 서예례[email protected]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교수, 오피스 오브 어반 터레인즈 디렉터
  • 장항 선셋 워터프런트 랜드마크 다리, 연결 그 이상
    장항의 산업 유산과 재생 충남 서천군 장항읍은 일제강점기에는 쌀 수탈의 전초기지였으나 1960~1970년대에는 장항 철 제련소와 장항항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산업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던 곳이다. 이후 공장 산업의 쇠퇴와 항구의 이동으로 인해 인구 감소와 노령화 등 전형적인 도시 쇠퇴의 징후를 겪었으나, 최근 장항의 산업 문화유산과 해변 생태 경관이 이 지역의 고유한 자원으로 주목받으면서국립생태원, 국립해양생물자원관, 장항미디어센터, 문화예술창작공간, 장항스카이워크 등의 새로운 시설이 유치되어 생태·문화·관광 도시로 거듭나고 있는 중이다. 2015년 1월 완공된 장항 선셋 워터프런트 랜드마크(이하 선셋 랜드마크)는 과거의 산업 유산, 새롭게 조성된 각종 시설, 그리고 수변 경관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도시의 명소를 확립하고 장항 지역 경제의 활성화를 도모하고자 계획되었다. ‘장항 선셋 수변 명소화 프로젝트’로 시작된 이 계획의 장소는 구 장항 도선장과 그 주변이다. 이곳은 1930년대부터 군산을 왕복했던 유일한 연락선인 장항선船이 정박했던 곳으로서, 2009년 운행을 종료하면서 과거의 추억을 간직한 채 남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 지역은 장항에 새로운 변화를 도모할 수 있는 장소로 다시금 주목받았다. 금강 하구의 풍부한 생태 자원 덕분에그 주변이 현재 각종 어항과 부두로 활발하고, 근거리에 근·현대의 산업 유산이 고루 분포해 있으며, 낙조로 대표되는 경관 자원이 있어 워터프런트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잠재력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또한 화물철로를 따라 조성된 문화관광공원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하므로, 공원 위쪽에 자리한 국립생태원과 장항미디어센터, 그리고 서측의 구 장항 제련소, 국립생태해양자원관, 송림산림욕장 등이 도보와 자전거 도로로 이어지는 중추가 되어 장항의 새로운 명소로 부각될 가능성이 높았다. 기본설계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성종상 교수 조경 디자인 연구실 실시설계(주)오우재건축사무소(건축), (주)서안알앤디조경디자인(조경), (주)ULP(조명), (주)세일종합기술공사, (주)영진엔지니어링(교량·토목) 설계팀성종상, 김준현, 신하영, 박준성(서울대학교), 김주경, 전엄지(오우재건축), 신현돈, 이장우(서안알앤디), 이연소(ULP), 김상석(영진엔지니어링) 시공(주)에스엔티건설 발주서천군 공공시설사업소(구 미래전략사업단) 위치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장산로 301 일대 면적10,000m2 완공2015. 1. 27.
    • 김준현[email protected] / 서울대 GSES 성종상 교수 연구실 + 오우재건축 + 서안알앤디 + 세일종합기술공사 + 영진엔지니어링 + ULP
  • 도원지 수상보행교 다리, 연결 그 이상
    이 프로젝트는 영남대학교 조경학과에 교수로 재직할때 진행한 대구 달서구 로하스벨트 조성 연구 프로젝트를 뿌리로 삼아 시작되었다. 로하스벨트란 달서구의 산이나 강, 저수지를 따라 다양한 도시 경관을 감상하며 쾌적한 보행로를 걷게 하는, 사람을 위한 힐링 프로젝트다. 도원지는 계절마다 다른 빛깔의 경관을 보여주는 산들이 저수지를 감싸고 있어 녹색길을 걷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곳이다. 특히 도원지 서편의 기암절벽과 오래된 숲의 모습이 짙푸른 물에 담겨 동편 길에서 바라보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수상보행로는 대구 남쪽의 대표산인 앞산을 따라 걸어오던 사람들과 도원지 및 월광수변공원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수 경관을감상하며 다음 녹지 길로 갈 수 있도록 연결하고 있다. 기암절벽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동편의 밭과 물의 경계를 따라 조성하여 기존 수변 경관의 피해를 최소화 하도록 구상했다. 디자인이 아닌 기능과 단순한 경관을 꿈꾸며 이 아름다운 경관에 새로운 무엇을 더한다는 것이 참힘들었다. 그러나 수변을 따라 걸어가는 길이 필요하다는 전제 아래 새로우면서 낯설지 않은, 그러나 사람들이 계속해서 찾고 싶은 독창적인 디자인이라는 모순된 목표를 위해 기나긴 여정을 걸었다. 가장 큰 관심과 사랑을 기울였던 곳은 동편 밭두렁을 따라 수변에 오랫동안 살아온 풀과 나무들이었다. 수경관과 기암절벽의 숲 경관도 뛰어나지만 소외되고 관심 없는 길을 따라 오랫동안 그곳을 지키며 수변의 아름다움을 더했던 그 식물들이 나를 설레게 했다. “그래, 이 소외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기특한 식물들을 사람들이 가깝게 감상할 수 있도록 하자.” 마음이 결정되자 보행교의 선은 금방 디자인되었다. 기존 식물이 자라던 수변 경계를 따라 미려한 곡선의 수중교 선이나타났다. 주동선인 수중보행교는 저수지의 보 근처에서 시작해 월광수변공원이 있는 제방까지 약 270m 길이의 곡선 길(탐방로 A)로 만들었다.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 다양한 수변의 식물을 감상하고 한 번씩 서편의 기암절벽 숲 경관을 보며 기쁨을 누리는 공간이 되리라생각했다. 그리고 단순히 그 길을 건너기 위해 걷는 사람 외에 좀 더 도원지를 감상하길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수생 식물과 부유 식물이 자라는 곳에 더 여유로운 곡선의 보행교(탐방로 B)를 붙였다. 앉아서 쉬어갈 수 있는 의자도 마련했다. 난간에 기대어 다양한 식물을 바라보며 관계 맺도록 공간의 스케일을 고려했다. 그리고 일정 구간을 지나면 원형의 수중 쉼터를 만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모여 모든 경관을 감상하고 다양한 행태를 담도록 지름 13m의 원형 광장을 디자인했다. 걸터앉을 수 있는 원형 의자가 오랫동안 사람이 물 위에서 머물도록 유도한다. 보행교는 선이 아니라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디자인 방향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프로젝트명대구 도원지 수변경관개선사업(탐방로) 실시설계 기본구상영남대학교 조경학과 + 최신현(2007) 실시설계씨토포스 설계팀최신현, 김수현, 김은지, 조은옥 시공(주)아트포커스 + (주)보선건설 발주달서구청 공원녹지과 위치대구시 달서구 도원동 840번지 일원(도원지 일대) 면적 탐방로 A: 목재포장 마감+단파론 난간(수상교 L=274m x B2.2m, A=603m2) 탐방로 B: 목재포장 마감+디자인 난간(수상교 L=141m x B2.2~3.5m, A=350m2) 원형광장: 목재포장 마감+단파론 난간(R 6.5m, A=130m2) 완공2015. 10. 최신현은 영남대학교에서 조경학을 전공했고 홍익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설계학과를 졸업하였다. 영남대학교에서 조교수로재직하였다. 현재 (주)씨토포스 대표이사로 다수의 대규모 도시공원과 건축물, 환경조형물 등을 디자인하는 조경건축가로 활동중이며 서울시 건축심의위원, 공공조경가로 활동하고 있다.
  • 팔로 알토 어도비 크리크 보행·자전거 다리 다리, 연결 그 이상
    101번 고속도로 보행교 프로젝트 실리콘 밸리의 심장부에 위치한 팔로 알토Palo Alto에는 101번 고속도로와 베이 트레일 주변에 자리한 기술 및 연구 회사―구글, 인튜이트(Intuit), 스페이스 시스템즈 로랄(Space Systems Loral) 등―에 다니는 수백 명의 회사원이 거주한다. 이 직장인들이 출퇴근 시 이용할 수 있는 지하도―101번 고속도로 아래를 통과한다―가 마련되어 있지만 인근의 연못이 자주 범람하기 때문에 일 년 중 절반 정도만 이용이 가능하다. 이에 팔로 알토 시는 101번 고속도로 위를 지나는 보행교 프로젝트The Highway 101 Pedestrian Overpass Project를 계획했다. 이 공모 프로젝트를 통해 조성되는 다리는 기존의 지하도를 대체할 뿐만 아니라 팔로 알토 지역과 산타 클라라 밸리 정비 지구Santa Clara Valley Water District를 연결하게 된다. 따라서 팔로 알토에 거주하는 직장인은 전보다 쉽게 회사로 이동할 수 있으며 산책로와 자전거의 이용이 활발해져 베이랜드의 아름다운 경관을 많은 이가 즐길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2015년 1월 최종 후보에오른 세 팀 중 64노스64North의 작품이 당선되었다. 당선작은 2016년 의회의 승인을 받은 후, 2018년 건설을 시작해 2019년 완공될 예정이다. 수년 동안 이 지역의 인프라스트럭처는 자동차를 중심으로 조직되고 설계되었다. 덕분에 지역 간 이동과 연결은 쉬워졌지만 상당한 비용 지출, 탄소 배출, 소음,분진 등의 문제도 발생했다. 이에 팔로 알토의 지역 사회는 보행로와 자전거 도로, 레일, 무인 자동차 등을 활용하여 보다 다각적인 미래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인프라스트럭처는 하나의 기능만을 염두에 두고 단기간에 설계된다. 64노스는 인프라스트럭처가 오히려 다양한 기능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프라스트럭처 중 하나인 다리는 연결이라는 기능뿐만 아니라 좀 더 유연하게 미래 계획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다리는 아름다운 경관과 경험을 선사하며, 더 나아가 주변의 자연 세계를 다채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수년 동안 이 지역의 인프라스트럭처는 자동차를 중심으로 조직되고 설계되었다. 덕분에 지역 간 이동과 연결은 쉬워졌지만 상당한 비용 지출, 탄소 배출, 소음, 분진 등의 문제도 발생했다. 이에 팔로 알토의 지역 사회는 보행로와 자전거 도로, 레일, 무인 자동차 등을활용하여 보다 다각적인 미래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인프라스트럭처는 하나의 기능만을 염두에 두고 단기간에 설계된다. 64노스는 인프라스트럭처가 오히려 다양한 기능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프라스트럭처 중 하나인 다리는 연결이라는 기능뿐만 아니라 좀 더 유연하게 미래 계획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다리는 아름다운 경관과 경험을 선사하며, 더 나아가 주변의 자연 세계를 다채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Architect64North Landscape ArchitectBionic EngineeringHNTB ArtNed Kahn Environmental ConsultingWRA LightingSean O’Connor Lighting CyclingAdvisor Jeff Selzer LocationPalo Alto, California, USA Design2015 로스앤젤레스에 기반을 둔64노스(64North)는 종합 설계사무소로서 혁신적인 공간과 경험을 만들기 위해 전통적인 경계를뛰어넘어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와의 협업에 주력하고 있다. 디자인 소장인 윌 카슨(Wil Carson)이 이끌고 있으며 엔지니어링 뉴스-레코드(Engineering News-Record)가 선정한 40세이하의 상위 20위 설계 전문가(Top 20 Design ProfessionalsUnder 40)에 이름을 올렸다. 미국건축가협회(The AmericanInstitute of Architects), 헤이즈 브랜다이스 펠로우십(TheHays Brandeis Fellowship)의 예술 부문, 대통령 우수 환경 메달(Presidential Medal for Environmental Excellence)에서여러 상을 수상하고 각종 국제 디자인 공모전에서 우승하면서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 64North / 64Nor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