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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스델타 캠퍼스
Campus Eemsdelta
엠스델타 캠퍼스(Campus Eemsdelta)는 네덜란드 북부 흐로닝언(Groningen) 근방에 새로 만든 학교 캠퍼스다. 16,600m2의 부지에 중등 교육, 실습 훈련, 스포츠 클러스터 등 세 가지 층위의 교육 시설이 마련됐다. 4헥타르의 야외 공간과 캠퍼스의 모든 건물은 학교에 필요한 교육 기능을 충족시키고, 주변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통합 학습 환경을 형성한다. 새 캠퍼스는 1,700명의 학생을 수용하고, 100% 순환형 에너지를 생성할 뿐만 아니라, 내진성을 갖추고 있다.
통합 학습 환경
흐로닝언 경관 속 비르던(wierden)에서 영감을 얻어 캠퍼스 공간을 구성했다. 비르던은 과거 홍수가 발생하면 주거지를 보호하도록 만들었던 인공 언덕이다. 언덕 가장자리에 사람들이 거주하고, 주요 건물은 중앙의 높은 건조 지역을 중심으로 배치됐었다. 엠스델타 캠퍼스는 이러한 역사적인 마을의 방사형 배치를 따랐다.
각 학교에는 개별 조직의 정체성과 외관을 담은 고유의 하우스가 있다. 캠퍼스는 세 개의 중등학교뿐 아니라 지역을 위한 스포츠와 문화 공간을 제공하는데, 이 기능들을 서로 묶되 공간적으로는 개별 하우스에 배치함으로써 캠퍼스 이용자와 인근 주민이 서로를 방해하지 않도록 했다. 모든 건물은 허브, 주 출입구, 공동 활동이 일어나는 중앙 심장부 주변에 위치한다. 건물 사이로 흘러든 주변 경관은 엠스델타 캠퍼스를 투과성이 있는 매력적 복합 단지로 변모시킨다.
중앙 심장부
밀폐된 중정(patio)는 모든 학생을 위한 만남의 장소다. 이 중정은 캠퍼스의 심장부이자 높은 섬이며, 그 한가운데에서 지식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 중정은 1층에서 개별 학교의 입구와 공공 기능을 연결하는 역동적인 운동장 역할을 한다. 옥상에는 학습 공간이자 야외 교실로 활용할 수 있는 고요한 정원을 조성했다. 정원의 좌석 구조물은 다양한 유형의 사회적 상호 작용을 촉진하는데, 홀로 조용히 쉬거나, 여럿이 함께 대화를 나누거나 쉬는 등 다양한 활동을 수용한다. 중정의 두 층은 커다란 원형 계단으로 연결되어 중앙 연단을 향하는 거대한 원형 극장을 형성한다.
*환경과조경433호(2024년 5월호)수록본 일부
글 Felixx
Landscape Architect Felixx Landscape Architects and Planners
Team & Partners Michiel Van Driessche, Marnix Vink, Deborah Lambert, John de Groot, Ramona Stiehl
Architect & Technical Advisor De Unie Architecten, Technion Adviseurs, Alferink van Schieveen Ingenieursbureau, DG Groep
Client Stichting Voortgezet Onderwijs Eemsdelta, ROC Noorderpoort, Municipality Appingedam
Location Appingedam, Groningen, the Netherlands
Area 4ha
Completion 2023. 6.
Photograph Felixx Landscape Architects and Planners, Egbert de Boer, Reyer Boxem
펠릭스(Felixx Landscape Architects and Planners)는 2014년 로테르담에 설립된 사무소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더 나은 환경 조성법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조경, 건축, 도시 설계, 도시계획, 과학, 생물학 분야 전문가 35명이 공간 연구, 경관 변화 전략, 마스터플랜, 공공 공간, 제품 설계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작업을 하고 있다. 지역성을 고려한 설계를 통해 글로벌 문제를 해결하고, 자연 기반 해결책으로 기후 변화에 대응해 환경적, 사회적, 경제적 회복탄력성을 갖춘 공간을 만들고자 노력한다. 이를 통해 건강한 생태계를 구축하고 사람들에게 다양한 혜택을 주는 도시 경관을 설계하는 것이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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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스테이트 신용 더 리버
Hillstate Sinyong the River
천혜의 자연이 깃든 녹색 단지
광주는 다핵화된 도시를 교통망이 연결하는 공간 구조로 개발되어 왔다. 개발가용지가 시가지 전역에 산발적으로 분포되어 있어 집약적 토지 이용이 곤란했고,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계획이 없는 상태에서 대규모 단지 개발을 몇 차례 거치며 획일적이고 개성이 결여된 도시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도심 내 녹지나 환경적 요소의 특장점이 반영된 개발을 하기 쉽지 않다.
힐스테이트 신용 더 리버는 전설(동쪽 삼각산에 살고 있는 용이 영산강으로 내려와 물을 마시고 고개를 들어 경치를 둘러보니 아늑하고 뛰어난 풍경에 반해 눌러앉았다)이 내려오는 북룡마을을 재개발해 조성된 단지다. 영산강변에서 수려한 경관을 지닌 이곳은 최근 많이 만들어지는 35층 이상의 고층 아파트 단지 추세와는 다르게 지상주차장이 계획되어 있어 주동 간격이 넓었다. 이 지상주차장이 지하화되면서 넓은 녹지 공간과 다양한 조경 요소를 반영하게 됐다. 대규모 택지개발지구에서 볼 수 있는 획일화된 분위기가 아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흐르는 물소리, 진한 꽃향기를 전하는 식재, 부드러운 조형적 시설을 통해 도심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시티가든’으로 조성하는 것이 설계 목표였다. 단지 주변의 자연 요소를 만끽하고 단지 내 인공 요소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입주민이 새롭고 흥미로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했다.
16개의 테마 공간
단지는 도심 속 대규모 오픈스페이스로, 한 개의 메가 스케일 광장, 두 개의 그랜드 스케일 라운지, 두 개의 멀티 스케일 스퀘어, 열한 개의 포인트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대적인 공간 연출, 섬세한 식재, 오감을 자극하는 휴게 공간, 산책로 등을 활용한 세심한 연출을 통해 이곳만의 가치를 보여주고자 했다.
이야기가 가득한 신용숲
단지가 들어서기 전 마을을 감싸고 있던 숲은 역사적·기후적으로 의미가 깊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영산강 너머 북쪽에 자리한 화산인 불태산이 마을을 건너가지 못하게 ‘솔무데기’라는 울창한 소나무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이 숲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 광주 목사를 기리는 비석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걸 보면, 그 역할이 중요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단지의 계절별 바람을 분석해봤을 때, 겨울에는 주로 북동풍이, 봄·여름에는 남풍이 불어온다. 이를 통해 기존 숲은 바람을 부드럽게 하는 마을의 비보숲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분석 내용을 토대로 단지 북쪽과 남쪽에 소나무를 포함한 다수종, 고밀도 식재를 활용해 숲을 재현했다. 굴거리나무, 동백나무, 목서, 홍가시나무 등 다양한 난대상록활엽수종을 식재해 여름에는 내부의 열 환경을 개선하고, 상록수종 비율을 높여 겨울에도 푸른 경관을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시그니처 엔트런스
차량으로 진입할 수 있는 주출입구와 부출입구의 회전 교차로를 식재만으로 연출하지 않고 빛과 물을 활용한 출입구 광장으로 조성했다. 특히 주출입구에는 석가산으로 둘러싸인 광장에 넓은 원형 폰드를 만들었다. 폰드 중앙에 특장 소나무를 식재해 아파트로 들어오는 입주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환경과조경433호(2024년 5월호)수록본 일부
글 노동균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수석
현대건설 조경 팀
사진 유청오
기본설계 조경디자인 싸이트
실시·특화설계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조경 식재 남광건설, 다원
조경 시설물 그린에이드, 원앤티에스
놀이 시설물 플레이잼
시공 현대건설
위치 광주광역시 북구 신용동 82-1 일원
규모 1,647세대
대지 면적 92,253.1m2
조경 면적 37,999.47m2
준공 202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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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선, 땅에 귀 기울여온 그 작업의 궤적
한국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은 국토개발기술사(조경)를 취득한 최초의 여성 기술사다. 1970년대 대학원생시절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조경 활동을 펼쳐온 그는 대통령국민포장, 세계조경가협회상, 미국조경가협회상, 한국건축가협회상, 김수근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지난해에는 제59차 세계조경가대회에서 2023 제프리 젤리코 상(IFLA Sir Geoffrey Jellicoe Award 2023)을 수상하기도 했다. 심사위원단과 IFLA 의장은 “정영선은 조경 분야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탁월한 업적을 이룬 전문가이며 서양에서 유래된 낯선 개념의 조경을 한국적 상황에 맞게 번역해냈다. 또한 청계천 복원, 선유도공원 등의 프로젝트를 통해 자연과 도시의 조화를 추구하고, 건조 환경에 자연의 과정을 통합하며, 과거 산업 유산을 지우기보다 새로운 디자인의 일부로 만드는 세계적 트렌드를 예측해 한국 조경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러한 작업에서 오늘날 조경 분야의 주요 관심사인 회복탄력성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읽어낼 수 있다. 정영선의 작품은 세계적 영향을 끼쳤고 조경 직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평했다.
정영선은 땅과 자연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바탕으로 다채로운 작업을 해왔다. “‘어떤 시를 여기에다 놓으면 좋을까?’라는 정영선의 말처럼 그녀의 조경 작업은 그에 어울리는 이름과 운율과 이야기를 되찾아주는 일이기도 하다”(배주연 서울독립영화제 2023 예심위원, ‘땅에 쓰는 시’ 프로그램 노트 중). 정영선의 설계 능력과 시적 감성, 50여 년간 쌓아온 전문성을 엿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4월 5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가 개최됐다. 정영선의 반세기에 걸친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개인전으로, 대표작을 비롯해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은 다수의 아카이브를 포함하고 있다. 4월 17일에는 정영선 조경가를 다룬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영화사 진진, 정다운 감독, 김종신 프로듀서 제작)가 개봉했다. 제20회 EBS 국제다큐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고, 제49회 서울독립영화제 장편 쇼케이스 부문에 공식 초청되는 등 작품성을 이미 인정받은 영화다. 정영선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전시와 영화를 지면에 중계한다. 정리 김모아, 금민수 디자인 팽선민 자료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영화사 진진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주최 국립현대미술관
후원 까르띠에, 소전문화재단
작가 정영선
작품수 500여 점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7전시실, 전시마당, 종친부마당
기간 2024. 4. 5. ~ 9. 22.
땅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4월 5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조경가 정영선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정영선: 이 땅에 숨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이 개최됐다. 파스텔, 연필, 수채화 그림, 청사진, 설계 도면, 모형, 사진, 영상 등 정영선의 60여 개 프로젝트에 대한 500여 점의 각종 기록 자료가 한 자리에 모였다.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어 보기 힘들었던 자료를 한눈에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최초로 공개되는 아카이브가 다수 포함되어 있어 큰 관심을 모았다. 그 기대를 보여주듯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관람객이 개막식을 찾았다. 정영선은 많은 이의 축하에 감사를 표하며 “앞으로도 조경이 발전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더불어 땅을 돌보는 방법을 잊어버리는 것은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는 인사말을 전했다.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는 정영선이 좋아하는 신경림의 시에서 착안한 제목이다. “이 땅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위하여 / 더불어 숨 쉬고 사는 모든 것을 위하여 / 내 터를 아름답게 만들겠다 죽어간 것을 위하여 …… 산과 더불어 바다와 더불어 강과 더불어 / 나무와 풀과 꽃과 바위와 더불어 / 짐승과 새와 벌 나비와 더불어”와 같은 시 구절에서 땅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정영선의 태도를 느낄 수 있다. 그에게 조경은 미생물부터 우주까지 생동하는 모든 것을 재료로 삼는 종합 과학 예술이다.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정영선은 늘 우리 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고유 자생종의 생물 다양성을 보전하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지사적 맥락, 일곱 개 묶음
정영선이 폭넓은 작품 세계를 펼쳐온 만큼 분류와 정돈이 필요했다. 전시를 기획한 이지회 학예연구사(국립현대미술관)는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을 디자인해온 정영선이 반세기에 걸쳐 낳은 수많은 유형의 작업 중 자료가 충분하고 관객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60여 개의 프로젝트를 엄선했다. 조경설계 서안 사무실 지하에서 발굴한 자료부터 각종 협력사가 제공해준 자료, 또 새로 제작한 자료까지 총 517점의 전시품을 마련했다. 이지회는 “조경이라는 살아 있는 움직이는 대상을전시로 담는 과정은 대단히 도전적이었다. 하지만 정영선 작가의 ‘최선을 다하면 살 길이 있다’는 말에 용기를 내고 미술관 디자이너 등 전문가와 방대한 자료를 짜임새 있게 구성하는 방법을 정리했다”고 밝혔다.
이지회는 먼저 계절에 따라 매순간 변화하는 공원과 정원의 시간성을 담고자 했다. 이를 위해 전시장 상부에 정다운·김종신 감독(기린그림)의 파노라마 영상을 흘려 움직이는 시간을 보여주었다. 관객의 시선이 머무르는 벽에는 정지현, 양해남, 김용관, 김종오, 유청오 사진가의 앵글에 담긴 절경이 펼쳐진다. 한국 전통 정원의 방지에서 영감을 받은 바닥장과 테이블장에는 각 프로젝트의 설계 과정과 세부 내용을 엿볼 수 있는 기록 자료를 담았다. 바닥장은 땅을 읽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정영선의 작업처럼 관람객도 땅 가까이 몸을 낮추어 작품을 감상하도록 유도한다.
전시는 국가 주도의 공공 프로젝트, 민간 기업이 의뢰한 정원과 리조트, 역사 쓰기의 방법론으로써 기념비적 조경, 식물을 연구하고 보존하는 수목원과 식물원 등 주제와 성격에 따라 작업을 분류했다. 일반적인 연대기적 서술 방식을 택하지 않았는데, 이는 경제 부흥과 민주화 과정이 동시적으로 발현된 한국 현대사의 특징과 맥을 같이한다. 또 수많은 유형의 작업이 공통적으로 정영선이 강조하는 ‘지사地史적 맥락’, 즉 땅의 이야기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시는 크게 일곱 개 묶음으로 구성된다. 정영선의 조경처럼 경계가 느슨한 최소한의 구획만 두어 관람객이 스스로 프로젝트의 맥락을 읽어 내기를 유도했다.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 없는 주제들을 우연히 마주치고 그 주제들이 포개지는 순간을 목격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전시장을정원 산책하듯이 거닐며 정영선이 도시 속 자연적 환경을 설계한 맥락과 그 과정에서의 고민, 그의 예술적 노력을 발견할 수 있다. 더불어 이러한 사유와 철학을 조경 직능을 넘어 자연과 더불어사는 삶을 추구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환원하고자 했다. 일곱 개 묶음이 담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첫 번째 묶음
패러다임의 전환, 지속가능한 역사 쓰기
땅의 기억과 역사를 기념하는 장소 만들기의 현장이 된 작업을 소개한다. 건물과 주변 환경을 연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간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법론으로서 조경의 역할이 드러나는 프로젝트들이다. 수직에서 수평으로, 채움에서 비움으로 인식의 전환을 시도한 사례들을 만나볼 수 있다.
국가적 상징성을 강조한 작업에서는 기념비적 축을 활용해 공간 위계를 세운 사례가 돋보인다. 대부분 중심축이 강한 공간 구성을 짰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맥락에 따라 구체적 제안에 차이가 드러난다. 독립기념관 명소화(1994~1996) 계획안에서 기존 공간의 경직성을 완화하기 위해 경관적 볼거리를 여러 차원의 규모로 제시했다면, 탑골공원(2001) 재정비에서는 슬럼화되어가는 문화 유적지에 틀을 세우고 역사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광화문광장(2009)에서 역사의 켜가 쌓인 육조거리의 정신을 이어 사람 중심의 비움의 미를 선사했다면, 실현되지 않은 용산공원(2011) 공모안은 한 세기 동안 잃었던 땅을 회복하고 그간 쌓인 공간의 흔적을 자생적 방법으로 살리는 방식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유일하게 조선인의 자본으로 건설된 철길을 공원화한 경춘선숲길(2015~2017)은 역사를 기념하고 이웃 공동체와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관계 맺음으로써 조경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한 작업이다. 설계의 핵심은 철길을 대하는 태도였다. 지역 사회와 도시적 맥락에서 경춘선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풀어나갔다. 철길, 철교 등 남겨진 근대 산업 시설은 물론 주변 녹지까지 보존을 원칙으로 삼고, 공원은 지역 주민의 일상 공원으로 환원하고자 했다. 마을의 뜰을 주제로 한 정원, 산책로, 공동체 정원을 주제로 한 과실수와 텃밭, 화랑대 역사를 문화재로 보존한 철도역 공원 등이 조성됐다. 다양한 변화를 겪은 경춘선숲길은 지역 주민뿐 아니라 많은 방문자가 찾는 명소가 되었으며, 선유도공원(1999~2001)과 함께 산업 시설을 공원화해 조경설계가 도시재생과 지역 활성화를 촉진한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두 번째 묶음
세계화 시대, 한국의 도시 경관
서울아시안게임, 서울올림픽대회, 대전엑스포 1993 같은 메가 이벤트는 늘 우리의 도시 경관을 바꾸어 놓았다. 한국을 찾는 세계인에게 선진국의 인상을 주기 위해 도시 경관 재정비 프로젝트가 동원됐기 때문이다. 대형 국가 주도 프로젝트에서 조경가는 도시의 비전을 제시하고 인공적인 개발 사업에 땅의 논리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프로젝트를 계기로 교직에 있던 정영선이 본격적으로 조경설계 현장에 뛰어들었고 조경설계 서안(이하 서안)을 창설(1987)한다.
서울아시안게임은 2년 뒤 이어 열릴 서울올림픽대회의 개최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국가적 심혈을 기울였던 행사다. 정영선은 아시아선수촌 아파트·아시아공원(1986), 올림픽선수촌아파트(1988)의 조경을 맡아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주거 환경을 제시했다. 올림픽선수촌 아파트 5,540세대를 위한 주거 시설과 부대시설을 포함한 상가동으로 구성되며, 방사형 선수촌 건물이 계단식 스카이라인으로 연결돼 독특한 경관을 이룬다. 대회가 끝난 뒤 아파트를 대단위 주거 단지로 사용할 것을 염두에 두어, 기념성과 상징성을 갖춘 축제의 장으로 만들되 주거 단지로서 쾌적한생활 환경을 갖추는 데 집중했다. 특히 서안은 성내천과 탄천이 합류하는 곳을 복개, 재정비하고 교량을 설치해 수변 경관을 갖춘 중앙공원으로 조성했다.
한국종합무역센터(1987)와 대전엑스포 1993 박람회장(1993), 인천국제공항(2001) 같이 국가의경제 발전, 무역 진흥, 국제 교류, 기술 도약 등 과제를 위한 대규모 복합 시설의 옥외 공간에는한국적 색채가 드러나는 디자인을 선보였다. 대전엑스포 1993은 21세기 국가의 비전과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하는 박람회였다. 세계인이 함께 즐기는 축제 분위기를 만들면서도 한국의 전통적 요소와 과학 발전의 면모를 조화롭게 선보여야 했다. 서안은 첨단 시설과 인공물 위주의 엑스포 옥외 공간과 어울리는 숲과 꽃을 살려 휴식 장소를 조성하고 안압지 형태의 수공원, 무궁화 동산 등을 마련했다. 소나무, 느티나무를 비롯해 한국 향토 수종인 87종의 교목과 관목 28만 8천 주, 초화류 64만 본을 심고, 1만 8천 평의 잔디밭을 조성했다. 행사 이후 엑스포를 위해 건립한 한빛탑 전면부를 개선하는 사업을 맡아 탑을 도시의 상징적 보행축과 연결했는데, 기존 공간 구도를 최대한 유지하면서도 시설물에 꽃, 나무, 물, 조명, 음악을 채워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세 번째 묶음
자연과 예술, 그리고 여가 생활
1980년대, 경제 성장에 따른 생활 방식의 변화로 여가 장소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고, 자연환경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생기며 도시 외곽에 예술, 교육, 체육, 관광을 아우르는 문화 기관과 레저 시설이 계획됐다. 정영선은 이러한 공간의 조경을 맡아 기능과 목적에 충실하면서도 한국 고유의 지향과 땅의 맥락을 읽는 작업을 진행했다.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하는 것은 물론 자연의 자생적 힘을 북돋는 생태적 복원을 시도했다.
충청북도 자연학습원(1981)과 어린이대공원 환경공원(1998)이 미래 세대의 환경 교육을 위한 야외 학습 장소의 성격이라면, 예술의전당(1988)과 국립중앙박물관(2005)은 예술과 문화 증진을 위한 국가적 상징성을 가진 곳이다. 정영선과 서안은 건축과 대지의 관계를 면밀히 디자인해 옥외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설계했다. 예술의전당에서는 남쪽의 우면산으로부터 내려오는 경사진 땅의 높낮이를 활용해 기능적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전체 단지 계획은 공원 개념에서 출발한다. 외부 공간의 명확한 특성을 규정하고 보행 위주의 동선 체계가 적용됐다. 덕분에 내외부가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옥외 공간은 축제와 행사가 열리는 장이 되었다. 도투락월드(1990), 휘닉스파크(1995), 마우나오션리조트(1999)는 스포츠 시설과 접목된 산악형 리조트다. 한국 국토의 80%가 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지형적 특성을 고려한 설계를 선보였다.
네 번째 묶음
정원의 재발견
오랜 옛날부터 이어져온 한국 고유의 식재, 경관, 공간 구성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정원을 소개한다. 정영선의 정원은 땅의 생김새와 성격에 부합하는 바라봄의 경험, 경치를 조망해가는 수행적 요소에 가치를 둔다. 나무나 꽃을 식재할 때도 관상적 가치를 넘어 생태적 특성과 형태,식물이 내재한 의미를 고려한다. 더불어 한국의 들과 산에 자생하는 야생화와 수목을 주로 심어자연스럽게 자라난 정원을 추구해왔다.
전통 정원의 대표격인 호암미술관 희원(1997)은 정영선이 전통 정원의 요소를 본격적으로 구사한 작업이다. 조경가 개인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작업이었지만, 희원은 한국 정원에 담긴 전통의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고 조경의 담론으로 올려놓는 계기가 됐다. 넓은 대지 위에 조성된 희원은 자연에 순응하며 내재된 원리를 읽어낸 선조의 미의식을 담고 있다. 담 안의 풍광에 머물지 않는 아름다움, 담 안과 밖의 조망을 잇는 전통 정원 조형미의 근원인 차경의 원리를 바탕으로 옛 지형을 복원했다.
“전통 정원의 내적 원리를 재현”한 점진적 경관의 전개는 해동경기원(2006)과 로스앤젤레스 한국정원(2008)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해동경기원은 한국 별서 정원의 시적 운치가 살아 있는 정원으로 불리운다. 이 정원은 약간의 경사와 작은 계곡을 배경으로 두고 있는데, 서안은 이역동적 지형에 어울리는 한국 별서 정원 양식을 적용하며 집과 자연, 일상과 이상, 풍류와 철학 사이의 관계를 맺는 정원을 제안했다. 노후화된 시설을 걷어내고 왜곡된 지형을 본래의 자연 지형으로 회복했으며, 땅의 높이 차이와 전통 건축, 숲에 의해 정원이 감춰졌다 드러나도록 했다. 점진적으로 상승하는 연속되는 풍경은 공간의 깊이를 더하고 자연과 소통을 끌어내며 정점인 고지에서는 주변의 풍광을 끌어안는다. 또한 현대중공업 영빈관 정원(2010)과 포항 별서 정원(2008)은 바다를 면한 한국 고유의 지형과 해송 숲의 경관을 그대로 담으려 한 사례다.
다섯 번째 묶음
조경과 건축의 대화
조경가와 건축가의 유기적 협업을 통해 탄생한 작업을 다룬다. 한강 상류의 수려한 경관을 담은조안리 정원(2007)은 전통 건축과 한옥에서 영감을 받은 현대식 목조 건축을 품은 정원이다. 오설록 티뮤지엄·이니스프리 제주(2011, 2023)는 녹차밭을 배경으로 둔 공간이다. 네 개 건축물 사이 제주 특유의 오름 지형과 곶자왈 숲을 조성했다.
제주도 경관 및 관리계획(2009)에서는 제주 경관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도민의 삶의 질 향상과 존엄성을 고양하는 경관 관리 방안을 마련했다. 다수의 건축가, 조경가, 도시공학자가 참여했는데, 이들은 도시를 하나의 과정으로 인식하며 제주 특유의 해민정신을 바탕으로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공존과 평화의 윤리를 추구했다. 남해를 조망하는 언덕에 지어진 골프장 ‘남해 사우스케이프’는 큰 암반과 암석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건축가가 설계한 스파 & 스위트 사이의 암각 동산을 다듬어 바다를 향한 경관을 열고, 돌 틈 사이사이에 풀을 심어 마치 원래 그러했던 것 같은 자연을 연출했다. 도시부터 개인 주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모의 작업을 통해 대지와 사람의 관계를 치열하게 고민한 설계자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여섯 번째 묶음
하천 풍경과 생태의 회복
강이 흐르는 곳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습지를 보호하고 도심 속 물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작업을들여다본다. 정영선은 한강 상류의 두물머리부터 하류에서 바다와 만나는 곳까지 다수의 프로젝트를 통해 하천 환경 개선에 힘썼다.
빌딩 숲 사이 야생적인 숲과 습지를 경험할 수 있는 여의도샛강생태공원(1997, 2007)은 서안의손길이 두 차례 닿은 국내 최초의 생태공원이다. 비행장 건립과 한강 개발 계획에 의해 인공 하천으로 전락한 샛강의 생태 환경을 1997년 한강수와 지하철 용수를 활용해 복원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남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시는 여의도샛강생태공원 현상공모를 추진했고, 서안은 육상화가 진행 중인 샛강 습지부를 물을 머금을 수 있는 땅으로 전환하는 스펀지 효과를 제시했다. 이를 통해 샛강은 한강과 자연 유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여의도샛강생태공원은 도심 내 한강변 중 가장 자연성이 강한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선유도공원(2001)은 정수장을 자연 정화의 장소로 재탄생시킨 작업으로, 국내 최초의 재활용 생태공원이다. 서안은 정수장의 본래 시설이 만든 공간과 땅의 모양을 이해하고, 기존 구조의 틀을 활용해 환경과 교육의 공간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시간에 따라 변화할 공간의 경관을 예측하는 것이 설계의 핵심이었다. 철근 콘크리트의 잔재가 녹음으로 뒤덮일 미래를 상상하며 옹벽으로 둘러싸인 선유도의 하부 둔치를 한강 특유의 생태 환경으로 복원하고자 했다.
정수장은 현재 수생 생물을 활용해 한강물을 생태적이고 지속적인 방식으로 정화하고 있다. 이는 도시 산업화의 흔적을 자연의 힘으로 회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며 동시대 도시 환경 계획의 중요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이외에도 고속도로 건설로 폐천 부지가 됐던 습지를 활성화한 파주출판도시 경관 계획(2007, 2012, 2014) 등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 기반 시설에 수공간을 주입해 생기를 불어넣은 사례를 살펴볼 수 있다.
일곱 번째 묶음
식물, 삶의 토양
정영선은 평생에 걸친 작품 활동을 통해 식물을 가까이하고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삶을 강조해 왔다. 마지막 묶음에서는 다양한 식생을 수집하고 연구하며 교육하는 수목원과 식물원, 자연의치유적 속성이 드러나는 명상과 사색의 장소들을 소개한다.
광릉수목원으로 불리던 국립수목원(1987)은 한국 최초의 산림 생물종 연구 기관으로, 정영선이 설계한 광장은 지금까지도 수목원의 중심이 되는 관상수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남해의 독특한 기후대의 식생을 갖춘 완도식물원(1991)과 화장품의 원료가 되는 식물로 구성한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2019), 성서에 등장하는 식물로 꾸민 왕창교회 작은 정원(2023)은 명확한 주제를 통해 식물의 다양한 면면을 보여준다.
환자와 그의 가족을 위한 서울아산병원의 녹지 공간(2007)과 종교 시설인 원다르마센터(2011)는 마음을 위로하고 몸을 수양하게 만드는 자연의 힘을 보여준다. 명상과 수련이 이루어지는 원다르마센터에는 소박하면서도 영성을 북돋는 성스러운 공간, 위로와 안식을 구해 찾아오는 사람들을 보듬어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정영선은 방대한 땅의 흐름을 읽고 수련원의 자리와 자연에 최소한으로 개입하는 길의 형태를 구상했다. 지역에 자생하는 식생을 존중하는 정영선의 태도는 자연의 가치를 해치지 않으려는 한국 전통 정원의 태도와 맥을 같이한다.
전시마당과 종친부마당 정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야외 종친부마당과 전시마당에는 새로운 정원이 조성됐다. 전시마당의 정원은 멀리 보이는 인왕산의 아름다움을 끌어들인다. 돌로 이뤄진 인왕산의 거칠고 힘찬 생명력을 표현하기 위해 언덕과 자연석을 배치했다. 이로써 화이트큐브에 둘러싸인 추상적인 정원이 미술관 밖의 장소와 연결된다. 양치식물과 내음성이 강한 야생화 등 한국 고유의 자생식물을심었다.
미술관의 뒷마당인 종친부마당은 보물 제2151호인 종친부의 경근당과 옥첩당의 앞마당이자, 공중 보행로로 연결되어 여러 경계가 만나는 곳이다. 이러한 고유한 공간 특성을 드러내고 주변의 경관과 어울리는 정원을 만드는 데 초점을 두었다. 마당 전면부를 낮은 기단으로 정리해 인왕산을 향한 탁 트인 조망을 확보하고, 미술관의 마감과 유사한 석재를 사용하되 관목으로 전통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기존 보행로의 판석도 새로운 패턴으로 다시 배치해 정원을 쾌적하게 관람할 수 있게 했다. 정리 김모아
땅에 쓰는 시
기획 및 제작 기린그림
배급 및 투자 영화사 진진
감독 정다운
프로듀서 김종신
출연 정영선
장르 다큐멘터리
개봉일 2024. 4. 17.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오기 때문이다.”(각주 1)이처럼 한 사람의 삶을 읽는다는 건 하나의 일생, 즉 하나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과 같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세계가 하나의 역사가 된다면 어떨까. 반세기 한국 조경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인물 사전을 만든다고 했을 때 반드시 들어갈 이름을 하나 꼽자면 바로정영선일 것이다. 그의 삶의 궤적을 읽는다는 건 한국 조경의 태동과 도약, 질곡을 살피는 일이라 해도 무방하다. 조경계의 언니로 불리던 늦깎이 대학원생이 세계조경가협회 제프리 젤리코 상을 받기까지의 여정은 두툼한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4월 17일에 개봉한 정다운 감독의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는 그 두툼한 책의 초록抄錄이라고 볼 수 있다. ‘이타미 준의 바다’ 등 건축 다큐멘터리 장르를 개척해 온 정 감독은 여러 작업을 거치면서 건축과 도시 그리고 자연을 연결하는 ‘조경’의 중요성을 인지하게 됐고, 자연의 생명력을 지키는 일에 앞장섰던 정영선의 조경 철학과 작품에 감명을 받았다. 정 감독은 정영선의 삶과 작품을 조명하는 영화로 자연의 복원과 치유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영화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까지 이어지는 사계의 순간을 포착한다. 야생화가 만개한 정영선의 집 앞마당부터 남녀노소 모두가 즐기는 대규모 공원과 신비로움을 간직한 개인 정원 등 다양한 장소를 종횡무진 누비며 각 계절이 지닌 고유한 경치를 온전히 담아낸다. 정 감독은 “조경가는 삶 속에서 자연의 요소와 사람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에 자연의 계절적 변화라는 기본 특질을 담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부분이었다”라고 연출 의도를 설명했다.
한국적 경관과 관계의 미학
샘과 백합이 어우러진 할아버지의 과수원을 평생 그리워하며 한때는 시인을 꿈꾸던 순수한 문학소녀는 어쩌다 땅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 되었을까. 영화는 이에 대한 답으로 정영선의 손길이 닿은 공간과 인연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특히 공간이 간직한 특성과 이용자 그리고 그 주변의 환경까지 고려하는 그의 작품관은 공원의 개념을 확장시키며 더욱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생태학자를 초빙하고 김수영 시인의 ‘풀’을 낭독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여의도샛강생태공원(1997), 왕성한 생명력으로 환자와 마음이 힘든 가족들 그리고 의료진까지 품어주는 서울 아산병원(2007) 등 그간 조성한 다양한 공간을 들여다보면 단어 하나, 쉼표 하나 허투루 쓰지 않는 시인처럼 경관과 도시, 나아가 사람을 보살피고 매만진 흔적이 돋보인다.
그의 작품을 읽는 두 가지 키워드를 꼽자면 ‘한국적 경관’과 ‘관계의 미학’이 될 것이다. 스스로 ‘연결사’를 자처하며 땅이 가진 시공간적 맥락을 읽고 조경을 통해 전통과 현대, 자연과 도시, 인간과 자연 사이를 긴밀하게 직조했다. 영화는 미나리아재비, 개쑥부쟁이 등 한국 국토의 매력을 즐길 수 있는 각양각색의 야생화와 제주를 비롯한 전국의 금수강산을 포착하며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한국적 경관의 현대적 완성이 빚어내는 자연스럽고도 감각적인 풍경들을 담아낸다.
삼국유사 속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는 말처럼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미학에 뿌리를 둔 그만의 설계는 땅이 간직한 고유의 맥락을 읽어 시를 그리듯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박승진 소장(디자인 스튜디오 loci)은 정영선의 작품 특징에 대해 “대상지가 가진 고유한 맥락을 읽고 조경을 통해 복잡한 도시 공간 속 건축과 자연, 도시 간의 알맞은 관계를 설정하고 연결한다”라고 말했다.
미래 세대를 위하여
조경은 특정한 순간이 아닌 거시적 관점의 미래를 바라보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더욱 가치 있고 매력적이다. 정영선은 동시대 조경가의 역할에 대해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기존의 것을 더욱 아름답게 번영시켜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언제나 더 큰 맥락과 앞으로의 미래를 고려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영화는 우리 땅을 즐기고 가꾸는 아이들의 모습을 처음과 끝에 배치하는 연출을 통해 미래를 항상 생각하는 그의 가치관을 담아냈다. 그 땅이 겪은 모든 시간을 머금은 채로 건강하고 아름답게 미래 세대에게 물려주는 것. 영화는 사계의 여정을 통해 조경가이자 한 명의 어른으로서 ‘정영선’이 오랜 시간 소망해 온 이 마지막 과제를 향해 접근해 나간다.
그는 정원을 만드는 것이 단순히 꽃을 심고 나무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치유와 회복의 장이자 자연을 보살피고 서로 소통하는 장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양한 작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그는 터의 특성과 정신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공간, 사람, 자연의 관계를 잘 읽어내는 데 집중해왔다. 이를 바탕으로 자연과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는 한국적 경관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완성해왔다.
영화는 정영선의 삶과 철학을 조명하는 동시에 벌과 나비가 점차 사라져가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미래 세대를 위한 땅의 모습을 함께 고민하게 만든다. “바다는 바다대로, 산은 산대로, 숲은 숲대로, 도심은 도심대로”라는 그의 말처럼 자연의 순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할 줄 아는 태도에 대해 역설한다. 이러한 철학은 그를 존경하는 젊은 조경가들과 미래 세대에 의해 이어질 것이며, 결국 우리의 국토는 모두가 같이 가꾸고 매만져야 하는 하나의 거대한 정원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글 금민수
각주
1. 정호승, “방문객”, 『광휘의 속삭임』, 문학과지성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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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가 만든 도시] 도시의 자연
때마침 온갖 봄꽃이 해사하게 만발한 탓에 우리 도시의 자연에 대해 불만인 점이 뭔가 저절로 너그러워진다. 전봇대와 어지러이 이어진 전선 사이에서 볼품없이 몽둥가리 당한 가지일망정 하늘하늘한 분홍빛 꽃과 고슬고슬한 연한 초록의 새순이 달린 나무 한 그루에서도 도시를 찾아온 봄과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만큼 도시 안에서 녹색의 존재는 기본 가치가 높은 자원이다.
요즘은 공세권이니 숲세권이니 하는 말이 통용되고, 경의선숲길이 지나는 연남동처럼 새로 공원이 조성되면서 그 주변이 소위 ‘뜨는’ 동네가 되는 현상이 기사에서 빈번하게 다뤄지기도 한다. 도시 안에서 녹색 공간이 발휘하는 현실적인 힘을 더 많은 사람이 이해하게 됐다는 뜻이다. 덕분에 설계공모를 통해 계획된 훌륭한 대형 공원도 여럿 갖게 되었고, 도시 내 공원을 만들기 위한 땅을 확보하기 위해 도로와 철도를 지하화 하는 엄청난 토목 사업도 사회적 동의를 얻는다(그림 2). 또한, 조성 후에도 촘촘한 운영과 관리를 해야 공원의 가치가 더욱 높아진다는 정책적 인식도 커지고 있다.
그럼에도 정작 우리의 일상 공간 아주 가까이에 있는 도시의 자연,(각주 1) 건물 한편의 조경 공간, 도로변의 가로수와 녹지, 동네의 오래된 작은 공원은 존재만으로 ‘기본은 하는’ 녹색의 가치를 다 발휘하고 있을까? 도시의 자연이라는 표현이 모호하고 넓지만, 이번 글에서는 산이나 하천, 대규모 공원이 아닌 일상 도시 공간의 작은 자연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일녹다역, 도시의 자연
도시의 환경오염과 기후변화가 가져오는 위협이 점점 가시화되면서 도시 안 자연이 지닌 가치가 더 다양한 측면에서 증명되고 있다. 도시의 건조물과 대비해 ‘자연’이라 셈할 조건은 외기에 노출되어 날씨의 영향을 받는 식생과 토양일 것이다. 녹색의 식생은 벌레와 새의 서식처가 되어 도시 생태계를 구성하고, 그 시각적 가치가 심리적, 문화적 가치라는 2차 가치를 생산한다. 또한 대기와 땅속 물과 공기의 흐름에 닿아 있어 우수와 미세 먼지를 흡수해 홍수, 지하수 고갈, 공기 오염 문제를 완화한다. 광합성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직접 흡수할 뿐만 아니라 도시 열섬 현상 완화 등 미기후를 조절해 냉방 에너지 수요를 낮추는 간접적 작용도 기후변화 저감에 일조한다.
여러 자연의 가치는 사실 작동하는 방식이 각각 다르다. 도시 생태계를 위해서라면 식생의 양이 절대적으로 많고 서로 이어져 있으며 실질적 생육 환경이 갖춰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경관적 가치를 위해서는 도시 공공 공간에서의 인지와 접근성, 조화로움을 위해 위치와 형태, 식재와 시설의 설계가 중요할 테다. 물 순환의 매개와 조절을 위해서는 같은 면적이라도 균등한 분포가 효과적이며 식재보다는 투수 조건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도시 안에서 자연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들은 자연의 여러 가치를 효과적으로 달성되도록 유도하고 있을까? 생태적, 경관적, 환경적 기능이 모두 잘 작동하도록 정교하지도, 그중 어느 하나라도 확실하게 달성하도록 효과적이지도 않다. 그런 제도의 한계를 잘 보여주는 도시의 자연은 ‘대지의 조경’이다. 건축물을 지을 때 의무적으로 만드는 조경 공간의 목적이 무엇인지, 도시의 자연이 지닌 여러 차원의 가치 측면에서 매우 모호하다. 그러다 보니 개발 압력에 이런 저런 완화 조항이 쉽사리 허용되고, 결국은 그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환경과조경433호(2024년 5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1. 법적 용어로는 200m2 이상의 대지에 의무적으로 조성하는 ‘대지의 조경’, 소공원, 어린이공원, 근린공원 등 ‘생활권공원’, 완충 녹지, 경관 녹지, 연결 녹지 등 ‘시설녹지’에 해당한다.
유영수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로재와 기오헌에서 건축 실무를 경험했다.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서 도시디자인과 사회과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며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병행했다. 현재는 인천대학교 도시건축학부에서 법, 제도, 현대 도시설계 이론, 스튜디오를 가르치고 있다. 건축과 도시를 아우르는 스케일에서 개별적인 공간 현상과 법제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 계획과 디자인의 역할을 확장하기 위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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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디자인 오피스] 스튜디오일공일
101, 생각을 그리다
일공일의 생각
스튜디오일공일은 궁극적으로 소규모 스튜디오 방식을 추구한다. 외형적 규모에 욕심내지 않으며, 소수의 프로젝트를 깊이 있게 수행하며 모든 프로젝트에서 디자인의 집중력을 잃지 않는, 작지만 강한 조경 디자인을 지향한다. 프로젝트의 종류, 성격과 규모에 경계를 두지 않으며, 작은 정원에서부터 주거 단지, 오피스, 공원 및 오픈스페이스, 리조트 등 다양한 스케일을 넘나들며 단위 경관, 소재, 디테일 등 또 다른 차원의 경관적 융합을 이어가고자 한다. 마이크로micro 경관과 매크로macro 경관이 살아 숨 쉬는 공간,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는 풍성한 경관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101’의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실험성, 심미성, 실현성을 바탕에 두고 있다. 100 다음에 새롭게 시작하는 1이라는 숫자가 갖는 상징적 의미처럼, 기본에 충실한 디자인이 새로움을 이끈다고 생각한다. 디자인 중심적 사고는 단순히 결과물 디자인의 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수행하는 모든 프로젝트의 바탕이자 과정이며 결과다. 현장 조사와 리서치, 분석, 디자인, 디자인 검증 등 프로젝트 시작부터 끝나는 순간까지의 전 과정에서 일정한 호흡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생성적 다이어그램을 통한 대상지 읽기, 디지털 또는 피지컬 모형을 통한 디자인 발전 스터디와 디자인 검증, 라이노를 통한 도면화, 디자인 감리 현장에서의 디자인 보정과 검수 등을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가 제안하는 계획이 우리만의 태도를 담는 차별화된 경관 디자인 창작물로 안정적으로 구현될 수 있도록 책임과 노력을 다하고 있다.
여전히 설계 스튜디오
‘일공일’은 궁극적으로 구성원 모두가 직위 및 역할에 상관없이 개별적인 디자인 주체로서 존중받고, 동시에 책임감 있는 디자이너로 성장하는 올 라운더(all rounder) 조경설계사무소를 추구한다. 설립 초기부터 공공 영역의 기본계획이나 대형 공공 프로젝트보다는 주로 민간 영역에서 벌어지는 규모가 작고 디자인 밀도가 높게 요구되는, 실제 시공으로 바로 이어지는 민간 특화설계 프로젝트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디자인 팀을 운영할 때 계획실과 설계실의 구분 없이 한 팀에서 기본계획부터 실시설계까지 프로젝트의 전 과정을 수행하게 했다.
일종의 고급 조경이라고 불리는 높은 수준의 디자인이 요구되는 프로젝트는 골격 디자인을 시작할 때 부터 각 부분의 세부 디테일까지 함께 고려하는 경우가 많아서, 디자이너들이 디테일 디자인을 접어두고 계획안만 그리는 훈련만 하면 디자인 실력 향상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프로젝트를 통해 자연스럽게 다양한 스케일을 오가는 디자인 과정에 참여하고, 본인이 참여한 설계안을 3D 작업으로 실체화하는 데 문제가 없는지 검토하고, 어떻게 도면화되는지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과정이 직원들을 올 라운더 디자이너로 성장시킬 것이라 본다.
같은 맥락에서 직원들에게 정원 공모에 참여할 것을 적극 권장한다. 정원박람회는 설계뿐만 아니라 시공까지의 전 과정을 더 긴밀하게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자, 더 나아가 다양한 정원 디자이너, 시공 전문가와 지속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의무 사항은 아니지만, 공교롭게 지금까지의 모든 팀장급 직원은 개인 자격으로 공모전에 참가해 수상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2015 순천만 한평정원 디자인전 작가부 선정(김현민, 차용준, 서용현, 김광중, 이상수), 2017 순천만 한평정원 페스티벌 작가부문 최우수상(오태현), 2020 경기정원박람회 작가정원 선정(이슬기), 2023 서울정원박람회 작가정원 부문 우수상(이세희, 장지연), 2023 서울정원박람회 작가정원 부문 우수상(최담희, 김선우) 등 다양한 정원박람회에 참여하고 수상했다.
공모전 참가자는 다른 직원에게 수차례 출품작에 대한 브리핑을 하고, 크리틱을 거쳐 작품을 발전시킨다. 시공작으로 선정되면 준공 시까지 필요한 작업이나 미팅, 답사 등을 업무 시간에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부분적인 경비를 지원한다. 직원 역시 본인의 여름 연차를 사용하거나, 작품 및 이미지 저작권을 회사와 공유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장소의 이야기를 듣다
예전에 기고했던 ‘그들이 설계하는 법’(『환경과조경』2014년 4월호)에서 언급한 ‘인터페이스 랜드스케이프(접촉면 경관)’는 여전히 내가 조경을 하고 있는 이유이며, 스튜디오일공일 설계 철학의 바탕이다. 짧게 요약하면 우리가 디자인하는 조경 공간의 이용자는 ‘조경가가 설계한 공간(다른 의미로는 조경가에 의해서 해석된 공간, 또는 원래 대상지가 가지고 있었던 무수한 역사적, 환경적 정보와 의미가 조경가에 의해서 선별되고 해석되어 다른 공간으로 재탄생된 공간)’의 이용을 통해서만 그 공간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결국 조경이라는 작업은 대상지와 이용자 사이의 역사, 문화, 생태, 그리고 공감각적 감흥을 포괄하는 ‘접촉면 경관’을 형성하는 작업이며, 그것을 통해 이 땅의 가치를 이해하고, 경관과 소통하고, 장소를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의미 깊은 작업이 아닐까. 우리가 대상지 리서치와 분석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아가 우리가 이러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더 큰 이유는 이러한 땅과 자연, 그리고 시간의 의미를 경관과 함께 통합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전문가는 조경가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도시숲과 숲놀이터
생명의숲은 학교숲운동과 도시숲운동 등 날로 열악해지고 있는 도시 환경에 숲을 통해 다시 건강한 도시 생태계를 만들고자 노력하는 시민단체다. 우정숲 프로젝트는 당시 도시숲운동의 일환으로 이 사업을 후원하던 우정사업본부가 서울중앙우체국 공개 공지에 기존 시설 철거 후 도시숲을 조성하게 되면서 시작됐다. 명동의 입구인 대상지는 불과 60~70년 전까지 남산의 울창한 소나무 숲이 퍼져 있던 남산의 끝자락이었고, 민족의 상징적 의미인 남산의 생태계가 열악한 도시 환경에 의해서 생태적 천이의 방향이 건강한 숲의 방향이 아닌 오염에 강한 산업 단지의 도시림인 팥배나무림와 산딸나무림의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이러한 주제를 담아 도시의 포장 블록을 뚫고 올라오는 자연의 힘을 모티브로 한 ‘들썩플랜터’를 주요 시설로 하는 도시숲운동 기념정원을 조성했다. 이 프로젝트를 인연으로 2023 모두에게 평등한 숲 만들기 희망숲 2호: 틈새숲, 2024 희망숲 3호: 무궁화기념정원, 2024 청주가드닝페스티벌 입구정원: 씨앗숲 등을 통해 도시에서의 숲과 자연의 의미를 전달하는 프로젝트를 함께하고 있다.
김아연 교수(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와 협업 프로젝트로 함께하게 된 유니세프 아동권리공간 ‘맘껏숲’ 프로젝트 역시 버려진 도시 공간을 다양한 연령의 아동을 위한 자연 여가 공간으로 조성한 숲놀이터다. 김아연 교수와는 이전에 군산의 유니세프 아동권리광장 ‘맘껏광장’을 통해서 18세 이하 아동(청소년)을 위한 자립적 활동 공간을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선행한 적이 있다. 맘껏숲에서는 맘껏광장보다 심화된 콘셉트를 활용해 평일 낮과 주말에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뛰노는 숲 놀이터를 마련하고, 저녁 시간에는 청소년을 위한 공방 및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청소년 숲 여가 공간을 조성했다.
홍석환 교수(부산대학교 조경학과)와 함께 진행한 밀주초등학교 역시 이와 비슷하게 밀양의 구도심에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을 생태적 자연 놀이터로 전환한 프로젝트다. 자연 놀이터 완공 후 입소문을 타고 대도시에서 전학을 오는 등 2개 학급이 늘어나고, 많은 주변 학교와 지자체 교육 관계 부서의 견학이 이어지는 등 큰 이슈가 되었다.
사무실을 운영한 지 올해가 벌써 9년 차다. 돌이켜 보면 한 해, 한 해 매년 정신없이 지나가기만 한 것 같은데, 이런 저런 재미있는 프로젝트가 제법 많이 쌓였다. 그들 간에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통일된 방향성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아 이런 것들이 일공일의 이미지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자리를 빌려 일공일의 지난 9년을 함께 노력해 준 모든 직원들에게 감사했고, 앞으로도 여전히 감사한다는 말을 전한다.
스튜디오일공일(STUDIO101)의 ‘101’은 100 다음의 새롭게 시작하는 ‘1’을 의미한다. 기본에 충실한 것이 곧 새로움의 시작이라는 디자인 철학을 기반으로 실험성, 심미성, 실현성을 갖춘 작업을 지향하는 실천적 조경설계사무소다. 정원, 오피스, 공원, 주거 특화설계, 리조트 및 테마파크 등 실제 시공으로 이어지는 공공·민간 영역의 다양한 외부 공간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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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의 도시공원 이야기] 눈치 싸움 산책 vs 조깅 vs 자전거
에피소드 1. 타돌이의 반기
이 글을 작성하기 바로 며칠 전, 자유를 갈망한 타조의 성남 도심 탈출기가 기사를 탔다. 함께 지내던 친구가 먼저 세상을 뜨며 상실에 빠진 ‘타돌이’가 근처 생태 체험장에서 탈출한 것으로, 대로에서 버스와 나란히 달리는 위험천만한 풍경이 펼쳐졌다. 봄날의 한 일화로 넘어갈 수도 있지만 최근 연구실에서 토론하고 있는 ‘비인간 도시’의 조건이 생각나며 그 잔상이 가시질 않는다.
만약 이곳이 타조가 뛰어다니는 게 익숙한 또 다른 차원의 세상이라면 타조를 위한 별도의 도로가 있을 수 있을까. 물론 야생 동물이니깐 인간의 신호 체계에 무조건 맞출 수는 없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야생 동식물 서식처의 연결과 이동을 돕고자 만든 생태 통로가 일반화됐듯, 타조가 도시를 활보하는 어떤 차원에서는 공존을 위한 또 다른 규칙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사실 안전하고 편리한 도시를 꿈꾸며 만들어낸 도로 규칙들은 결코 고정적이지 않다. ‘우회전할 때 횡단보도가 빨간불이면 무조건 멈춤’이라는 규칙 역시 이제 갓 돌이 지난 신생 규칙 중 하나다. 보행자와 운전자의 안전을 위해 제정된 교통 규칙이다. 한 차원 깊이 들어가자면 도시 공간을 누가 점유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실려 있다.
이처럼 실제 공간 규칙은 필요에 따라 언젠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반대로 관습화된 규칙은 변화에도 쉽게 움직이지 않으며 아주 천천히 바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치렀던 운전면허시험의 기억도 이미 가물가물(참고로 필자는 운전면허 필기시험 73점을 받은 용사다). 실제 우리가 도시 공간을 향유할 때는 대부분 본능처럼 체화된 규칙을 따르기 마련이다. 이 도시 공간 활용의 변화는 반드시 갈등을 불러오고, 공원 역시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또스테드: 뉴욕의 산책과 드라이브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의 걸작 중 하나라고 평가받는 보스턴 에메랄드 네클러스 공원 시스템(Boston Emerald Necklace Park System)은 뉴욕 센트럴파크와 프로스펙스 공원에서 그가 꿈꿨던 ‘녹지이자 교통 인프라이자 여가 공간’으로서 공원이 실험된 곳이다. 특히 파크웨이와 함께 회자되는 옴스테드의 발상 중 하나는 도시의 분리 이용에 관한 것이다. 필자가 종종 참고하는 옴스테드의 1870년 보스턴 미국사회과학협회 발표문을 보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12년 전 뉴욕에서 드라이브(pleasure driving)를 하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었다. 오늘날에는 최소한 1만 마리의 말이 드라이브를 위해 대기하고 있다. 12년 전에는 경량 마차를 위한 길이 전무했다. 오늘날에는 준공된 공원 내 14마일에 달하는 드라이브 코스가 있고 사람이 바글거린다. (뉴욕과 브루클린) 두 도시를 합하면 50마일에 가까운 파크웨이가 조성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적어도 평균 150피트 넓이의 녹지 경계가 만들어질 예정이다.”(각주 1)
비단 옛날이야기로만 치부할 수도 없다. 공원 조성 관련 시민 참여 프로그램을 운영하면 흔히 목격하게 되는 것이 조용하게 자연 속에서 산책할 수 있는 공원에 대한 욕망과 다양한 운동과 활동이 가능한 공원에 대한 욕망의 부딪침이다. 공원 내 자전거 도로용 신호등 체계나 골프 카트와 전기 자동차가 일렬로 서 있는 관리자용 주차 구역이 즐비함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지 않게 단차를 조정하고 동선을 그려놓은 센트럴파크를 누가 그려냈는가 생각해보면, 이처럼 욕망의 부딪침으로 인한 갈등을 해결하는 건 결국 설계가의 몫이다.
*환경과조경433호(2024년 5월호)수록본 일부
신명진은 뉴욕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뒤 서울대학교 대학원 생태조경학과와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석사와 박사를 마친 문어발 도시 연구자다. 현재 예술, 경험, 진정성 등 손에 잡히지 않는 도시의 차원에 관심을 두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도시경관 매거진 『ULC』의 편집진이기도 하며, 종종 갤러리와 미술관을 오가며 온갖 세상만사에 관심을 두고 있다. @jin.every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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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주년 맞이한 조경 네트워크
학생통신원 교류의 장, 간담회와 커리어데이
4월 6일 그룹한빌딩 6층 그룹한 갤러리에서 제40기 환경과조경 통신원 간담회가 개최됐다. 간담회는 1부 공식 행사와 2부 선배와 함께하는 커리어데이로 진행됐다. 올해는 1985년부터 시작한 환경과조경 통신원이 40년을 맞이한 해라 더욱 뜻깊다. 환경과조경 통신원은 전국 최대 규모의 조경 관련 대학생 네트워크로, 각 대학 소식과 지역 정보를 전달함은 물론 박람회 등 조경 관련 행사에서 서포터즈 활동을 통해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해 왔다.
환경과조경은 매년 통신원 임기를 시작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독려하기 위해 통신원 간 만남을 주선하는 간담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번 40기는 28개 학교에서 총 42명을 선발했다. 행사 1부에서는 39기 우수통신원상 시상식과 40기 전국 및 지역 기장 선출이 이뤄졌다. 39기 우수통신원상은 서유석(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과 윤민영(서울여자대학교 원예생명조경학과)이 수상했다. 40기 전국 기장은 김경미(공주대학교 조경학과)와 장세희(순천대학교 조경학과)가 선출됐다. 지역 기장에는 서울·경기·강원 지역에 심규연(건국대학교 산림조경학과)과 김솔(서울여대 원예생명조경학과), 경기·충청에 조휘리(공주대학교 조경학과)와 양경미(단국대학교 녹지조경학과), 영남에 백진규(경북대학교 조경학과)와 임시은(경북대학교 조경학과), 호남에 박지혜(순천대학교 조경학과)와 이지현(전북대학교 조경학과)이 선출됐다.
2부에서는 이형주(23기 통신원, 조경하다 열음)가 사회를 맡아 학생통신원 모임 ‘아라리’ 소개 및 활동 내용을 공유했다. 이어서 이성민(21기 통신원, 텍사스 A&M 대학교)의 영상 축사, 30기 선배 통신원 경험 공유 및 멘토링 등 선배 통신원과 함께하는 커리어데이를 통해 학생들이 진로, 직업 고민을 나누었다. 멘토링 시간에는 서락원(30기 통신원, 어반플레이), 이향지(30기 통신원, 얼라이브어스), 한지연(30기 통신원, 서울시 푸른도시여가국)이 계획, 설계, 행정 등 다양한 분야의 진로 상담 멘토로 참여했다.
*환경과조경433호(2024년 5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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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름한울마을
LH 아이돌봄 시설 클러스터 설계공모 당선작 디자인랩스튜디오+조경설계 호원
3월 28일,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주관한 의정부 고산 ‘아이돌봄 시설 클러스터 설계공모’의 시상식이 개최됐다. 당선작은 디자인랩스튜디오(건축)+조경설계 호원(조경)의 ‘푸름한울마을’이 차지했다. LH는 저출생 문제를 극복하고자 의정부 고산 지구에 아이돌봄 시설, 어린이 전용 문화 시설, 의료 시설 등 부모와 아이가 필요로 하는 시설을 한 곳에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클러스터 시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번 공모는 창의적인 아이돌봄 시설 클러스터를 구축할 수 있는 도시·건축·조경 통합설계 모델 마련을 목표로 한다. 2023년 12월에 개최된 공모에 총 10개 작품이 제출됐고, 2024년 3월 23일에 건축, 조경, 도시, 아동 전문가 14인이 심사를 진행했다. 아이돌봄 시설 간 자연스러운 연계, 창의적이고 상징적인 랜드마크 등의 요소를 평가한 결과 당선작을 비롯해 우수상 1점, 장려상 3점이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환경과조경433호(2024년 5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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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웃거리는 편집자]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낭만
나의 고향은 은모래의 도시였다. 물론 일간지 자동차 지면 광고에 등장할 법한 사막 한가운데에 놓인 도시는 아니다. 다만 은은한 은빛이 감도는 모래사장과 저절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빛이 나는 윤슬이 매력적인 강변이 있던 곳이었다. 동네 친구들과 수풀이 우거진 계곡 바위에 올라 다이빙하고, 잡으면 놓기 싫은 아기의 손바닥과 같이 부드러운 감촉의 모래사장을 누볐다. 특히 젖은 몸을 말리기 위해서 푹신한 은모래사장에 앉아 비 온 후 맑아진 강물과 저물어 가는 해가 만들어 내는 윤슬을 오랫동안 바라본 기억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생생한 여름의 낭만으로 남아있다.
불야성의 도시 서울로 오며 그런 낭만을 잠시 잊고 살았다. 여유를 느낄 새도 없이 또 다른 도시의 삶에 적응하느라 하루가 바쁘게 흘러갔다. 다만 운이 좋게도 서울에서 자리 잡은 터전이 한강과 그리 멀지 않아 한강을 자주 지나다녔다. 한강을 자주 지나다니며 수묵화처럼 아무도 밟지 않은 채로 고스란히 쌓여 있는 눈, 산속 깊은 고요한 암자를 둘러싼 대나무 숲처럼 한적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안개 등 날씨가 만들어내는 한강의 다양한 표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낯선 도시의 새로운 낭만을 찾았다는 기쁨과 함께.
한강의 낭만적 풍경을 채집한 수집가로서 한강의 낭만을 조용히 느낄 수 있는 장소를 추천한다면 광진교 8번가를 말하고 싶다. 이곳은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의 사이에 놓인 광진교의 8번째 기둥에 위치해 8번가라 불리는 교각 하부 전망대다. 광진교 중앙쯤에 위치한 나선형 계단을 따라 다리 아래로 내려가면 호그와트로 이어주는 킹스크로스 역 9와 4분의 3 승강장처럼 한강의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전면이 유리 통창으로 된 둥근 형태의 전망대인데 빈백에 누워 전면의 통창을 통해 한강의 탁 트인 풍경을 감상할 수 있고, 발아래 유리창을 통해 한강의 일렁이는 물결을 보며 물멍을 즐길 수 있다. 특히 교각 하부라는 색다른 공간 안에서 조금 더 가까이 마주할 수 있는 윤슬은 유년 시절의 은모래가 생각날 만큼 곱고 아름다웠다.
만약 이러한 낭만적 풍경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영화 ‘수라’는 사라진풍경 앞에 놓인 사람들을 주목하며 삶의 터전이자, 비단에 놓인 수라는 뜻을 가진 아름다웠던 수라 갯벌을 새만금간척사업으로 잃어버린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는 갯벌의 조개를 캐던 손으로 매립지의 잡초를 뽑는 어민, 공사를 조금이라도 늦추거나 막기 위해서 밤낮 가리지 않고 여전히 서식하고 있는 멸종위기종을 찾아다니며 갯벌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하는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 등 사라진 갯벌이 새롭게 만들어 낸 풍경을 보여준다. 특히 20년 동안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던 오동필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장은 새만금에서 잊지 못할 풍경으로 수만 마리의 도요새 군무를 설명하며 “너무나도 아름다운 걸 봤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책임감이 생긴 것 같아요. 말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아름다운 걸 본죄”라고 말했다.
사실 그들이 수라 갯벌을 잃어버린 것처럼 나도 은모래를 잃어버렸다. 내 고향에서는 더 이상 은모래를 찾아볼 수 없다. 은모래는 이제 나의 기억에만 존재할 뿐. 사라진 은모래의 빈자리를 백년 주기로 찾아온다는 홍수를 막기 위해서 설치된 차가운 콘크리트 제방이 채웠다. 새로운 풍경은 상처의 현존을 가열시킨다고 했나.(각주 1) 삶이 탄생과 죽음 사이에 놓인 것처럼 풍경 역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호시절의 추억과 장면을 균열 내는 풍경은 아리기만 하다. 어느 노랫말처럼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옛사랑을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 만나는 것만큼 씁쓸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돌이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시 시작할 수도 없는 불가항력이 만드는 상처 앞에서 무력할 뿐이다.
그래서 내게 마지막으로 남은 낭만적 풍경인 한강만은 지금의 모습 그대로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름다움을 본 죄인보다는 한강의 낭만을 사수한 명예 보안관(?)으로 남고 싶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처럼,(각주 2) 저 한강의 낭만과 아름다움을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싶다. 상처를 가열시키는 풍경보다 아름다움을 가열시키는 풍경 속에서 낭만을 품고 싶다.
*각주 정리
1. 김훈, 『풍경과 상처』, 문학동네, 2009.
2. 황인찬, “무화과 숲”, 『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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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물성이라는 건 생각보다 쉽게 사람을 사로잡아요
나들이하기에 딱 적절한 온도인데 “날이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 미세 먼지 때문이다. 하늘이 묘하게 부옇다. 얄궂게도 날이 좋으면 미세 먼지 수치가 극에 달했다. 봄날 휴일에 할 수 있는 게 카페를 찾거나 실내 활동을 하는 것뿐이라니. 결국 책장을 뒤적거렸고, 기후위기니 하는 현실을 잊고 싶어서 골라든 게 SF 단편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김초엽, 허블, 2017)이었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에서 시작한 독서니 우주를 종횡무진하거나 상식 밖 디스토피아를 그린 이야기에 파고들 줄 알았는데, 오히려 현실성 높은 이야기에 마음을 뺐긴 건 참 이상한 일이었다. 소설 제목이기도 한 ‘감정의 물성’은 이모셔널 솔리드라는 회사가 내놓은 제품이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대상에 물성이라는 단어를 붙인 작명에서부터 잘 팔리겠다는 기운이 느껴졌다. 그 특성마저 힙하다. 감정 자체를 조형화한 제품.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공포체’, ‘우울체’ 하 는 식으로 이름이 붙고, 파생되는 제품으로 비누나 향초, 손목에 붙이는 패치도 있고요. 지금 유진 씨가 구해온 건 침착의 비누라는 건데, 진짜 비누처럼 써도 되지만 그냥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나 봐요. 10분 정도 사용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감정의물성 #우울체 해시태그와 감성 사진이 인스타그램 피드에 주르륵 뜨는 모습이 연상됐다. 하지만 주인공 정하는 감정의 물성을 플라시보 효과를 이용한 상술로 치부한다. 줄거리보다 사람들이 감성의 물성을 구매하는 이유를 추적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정하는 특히 우울함이나 증오 같은 감정을 사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소비가 항상 기쁨에 대한 가치를 지불하는 행위라는 생각은 이상합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감정을 향유하는 가치를 지불하기도 해요. 이를테면, 한 편의 영화가 당신에게 늘 즐거움만을 주던가요?”(이모셔널 솔리드 대표) “나는 내 우울을 쓰다듬고 손 위에 두기를 원해. 그게 찍어 맛볼 수 있고 단단히 만져지는 것이었으면 좋겠어.”(연인 보현)
김초엽이 (아마) 가장 방점을 둔 답은 보현의 것이었겠지만, 나는 다른 문장을 더 깊게 마음에 새겼다. “물성이라는 건 생각보다 쉽게 사람을 사로 잡아요. 왜, 보면 콘서트에 다녀온 티켓을 오랫동안 보관해두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 그냥 실재하는 물건 자체가 중요한 거죠. 시선을 돌려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있는 거잖아요. 물성을 감각할 수 있다는 게 의외로 매력적인 셀링 포인트거든요.”(동료 유진) 글을 읽는 내 앞에 뜬금없게도 국립현대미술관의 모습이 펼쳐졌다. 정영선의 전시(88쪽)를 보러 온 사람들이 개막 행사를 빼곡하게 채운 그 광경. 유명한 공원 개장식에서보다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 모습이 이런 이벤트가 열리기를 바랐던 긴 기다림으로 읽혀 씁쓸하기도 했다. 조경이라는 건 어떤 장소를 만들어내는 논리이자 시스템인데, 모든 공간을 증강 현실로 재현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된다 하더라도 지극히 평면적인 전시가 될 테다) 이를 도면이나 사진, 영상, 음악으로 전할 수 있나? 의구심이 녹아내렸다.
2021년 4월, 성수역과 뚝섬역 사이에 ‘숲, 가게’가 열렸었다. 그곳에서는 떨어진 신당풍나무잎 200그램에 3천 6백만 원이라는 값을 매겼다. 무슨 셈법인가 싶을 텐데, 숲을 이루는 부산물이 만들어지기까지 시간, 생태계에서의 역할, 사람에게 소소한 즐거움과 감성을 전달하는 점까지 부가 가치로 매겨 가격으로 산정한 것이다. 작은 잎에 담긴 가치가 ‘가격’이라는 숫자를 통해 좀 더 유쾌하면서도 명확하게 다가온다.
조경에 물성이 없다고 말하기는 애매하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갖고 있는 건 분명하다. 그 가치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물성이 필요하다. 항우울제만으로는 자신의 우울을 조절할 수 없어 우울체를 사 모으는 아이러니에 뛰어든 보현처럼 말이다. 가시화하기 모호한 조경의 쓸모와 무게를 뒤적이며 이를 드러내기 위한 학예연구사의 노력은 분명 조경의 또 다른 면모를 발굴해낼 것이다. 이 재미있는 시도의 결과물로 만들어진 물성이 사람들을 쉽게 사로잡았으면 좋겠다. 한 가지 더 바라는 건, 작은 굿즈가 만들어지길. 손에 쥐면 기대감에 찬 사람들이 저마다 모여 떠들며 웅성거리던 그 순간을 쉽게 기억해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