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가람 열린 정원
Sagaram Open Garden
사가람과
사천여자고등학교
‘사가람’은 사천시의 옛 이름으로, ‘물가에 가까운 마을’이라는 뜻이다. 남해안 가까이 위치한 사천시는 작지만 강한 소도시로, 아름다운 자연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항공 우주 산업 등 미래 비즈니스가 집중적으로 벌어질 곳이다. 사천여자고등학교(이하 사천여고)는 사천시 구도심 한가운데 있는 미래 여성 실무자를 위한 실업계 특성화 고등학교다. 1966년 설립되어 60년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경남 지역의 대표적 여성 교육 기관이다. 깊은 세월의 두께만큼 노후화된 운동장은 학생들의 꿈을 키우기엔 한계가 있는 공간이었다. 체육관과 급식소 건물을 증축하면서 버려지게 된 외부 공간도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에너지 넘치는 청소년기 학생들의 다양한 활동을 수용할 수 있는 흥미로운 공간이 절실했다. 이러한 열망을 담아 사천시의 옛 명칭을 딴 ‘사가람 열린 정원’으로 프로젝트 이름을 짓고 지역성을 지닌 새로운 공간의 재탄생을 목표로 추진했다.
첫 디자인 접근은 학생들이 마치 물줄기처럼 자유롭게 흐를 수 있는 열린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문정현 이사장(사천여고)은 “학교는 공장이나 감옥이 아니다. 모든 학생들의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자유로운 열린 공간이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그는 학생들이 꿈을 드높일 수 있도록 한계가 없는 공간과 여러 영감을 주는 열린 공간을 지원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육 철학을 드러낼 수 있도록 자유롭고 흥미로운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운동장 개선 공사(1단계), 정문 및 주차장 개선 공사(2단계), 운동장 생태정원 조성 공사(3단계)의 세 단계로 나뉘어 기획, 설계, 시공이 5년에 걸쳐 진행되어 2024년 봄에 완공됐다.
사업 전 대상지는 여고의 낭만을 충족시켜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건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외부 공간이 운동장과 맞닿은 흙바닥이었다. 진입부는 차량과 보행자가 뒤섞여 혼란했고, 녹지는 활용도가 거의 없을 뿐아니라 관리가 안 된 수목으로 인해 지저분한 인상을 주었다. 사천여고는 학교 철문을 항시 개방해 운동장을 지역 주민과 공유하며 사용하고 있었는데, 시설이 노후해 학생과 주민 모두 이곳을 사용하는 데 많은 불편을 겪고 있었다.
특성화 고등학교인 사천여고는 전문교과와 보통교과 융합 수업이 많다. 수업의 폭이 넓고 활동 중심의 수업이 많아 이러한 수업을 수용할 수 있는 다양한 외부 공간 조성이 시급했다. 특히 사천여고의 자랑인 사회적 협동조합, 영화 스쿨, 특색 있는 여러 동아리 활동과 연계하고 지역 주민과의 공유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을 장기 목표로 삼아 단계별로 외부 공간을 바꾸어 나가는 계획을 세웠다.
황량한 운동장에서
다양한 활동을 담는 광장으로
진입로, 불규칙과 규칙: 정문에서 본관 입구 사이에는 포장되지 않은 도로가 있을 뿐 제대로 된 보행로가 없어서 학생들이 택배 차량 등 차량과의 충돌 위험에 노출되었다. 학생들을 보호하고 쾌적하게 걸을 수 있는 포장도로를 마련하기로 했다. 도로는 4m마다 반복되는 줄무늬 구획을 기본으로 하며, 이 프레임 내에서 밝은 회색에서 검은색으로 연결되는 불규칙한 그라데이션 픽셀 패턴을 통해 보행자와 차량 통행로를 구분했다. 보행로와 차도 사이에 단차를 두지 않아 차량이 없을 때는 보행 공간으로 사용하게 하고, 반드시 보차분리가 필요한 부분에는 간격을 두고 볼라드를 설치했다. 포장 재료로는 일반적으로 쓰는 투수성 인조 화강석을선택했다.
이벤트 광장, 사각으로 만든 사각 광장: 신축된 체육관과 급식소의 전면 공간을 쓸모 있는 이벤트 광장으로 정의했다. 광장의 규모는 약 14.5m×62m로 다양한 활동을 수용하기에 충분하다. 영감을 주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사각형으로 구성된 다양한 정사각 패턴을 만들었다. 여러 가지 정사각 패턴이 다양한 차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으로 기대된다. 유연한 액체와 같은 공간에 사각형들이 재미있는 방식으로 무작위하게 떠있는 듯한 공간으로 디자인했다.
지역 사회와
소통하는 열린 학교
문이 아닌 길을 인도하는 친구, 철문 없는 학교: 기존의 정문은 무거운 철문이었다. 녹슨 철문은 사람이 직접 열고 닫는 수동식이라 항상 열린 채로 두었기에 주민들은 자유롭게 학교를 출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돈되지 않은 주변 환경 때문에 사람들을 환영하는 밝은 분위기를 내지 못했고, 불법 주차 차량을 막을 수도 없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거운 철문을 철거하고 자동 유압식 볼라드를 설치했다.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는 항상 열려 있고 차량은 선택적으로 출입을 허가할 수 있게 됐다.
학교의 역사를 간직한 모던한 입구: 주어진 조건을 백지화하지 않고 어떤 것을 남기고 어떤 것을 철거해야 할지 평가해 존치 여부를 정했다. 현대적인 분위기로 변신을 꾀했지만 내재된 역사를 지우지 않는 것이 기본 원칙이었다. 이에 따라 학교 정문을 완전히 철거하지 않고 기존 문주 하나와 간판을 남겨 재활용했다. 기존 경비실 역시 입면을 골강판으로 감싸 리모델링해 활용했다.
주차장, 보행에 친절한 진입부: 보행자와의 간섭이 심했던 차량 동선을 정비하고 주차장을 한쪽으로 조성했다. 비상시나 이벤트가 열려 주차 공간 확장이 필요한 경우에만 기존 주차장을 활용하도록 해, 포장 공간은 온전히 학생들의 안전한 등하교 공간이 되도록 했다.
생태 친화형 학교와
열린 공간을 위한 프로세스
빈 운동장에 생명을: 기존 흙바닥을 투수 기능이 있는 인조 화강석 포장도로로 바꾸어 보행의 편의를 꾀하면서도 친환경적 해법을 더하고자 했다. 이용이 적었던 운동장 모서리 공간에는 생태정원을 조성해 빗물을 흡수하도록 했다. 버려진 것과 다름없던 교정 남측 공간에는 교목인 월계수와 교화인 동백꽃 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수목 주변에 어울리는 식재를 하고 텃밭을 조성해 휴게 공간이자 야외 학습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열린 프로세스: 주입식 교육과 강박적 교육 공간에서 열린 학습의 터로 거듭나도록 다양한 행동 방식이 유발될 수 있는 열린 공간을 조성하는 데 있어 그 과정 또한 참여형이 될 필요가 있었다. 마지막 단계인 생태정원 조성 사업을 진행하며, 문정석 소장(로컬프로젝트)이 세 차례에 걸쳐 학생과 교직원 참여 워크숍을 진행했다. 이 과정을 통해 1, 2단계로 진행된 외부 공간 개선 사업에 대한 사용자의 의견을 청취하고, 이들의 제안을 반영해 풍부한 공간 조성의 밑바탕을 마련할 수 있었다.
모든 공간이 완성된 뒤, 입구에서 교실까지 이어지는 보행로에는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해 교화인 동백꽃을 새겼다. 이 도색과 강조 패턴 작업을 통해 사람들을 보행 동선으로 인도하고 보행로와 차량 동선을 좀 더 명확하게 분리할 수 있게 했다.
사천 시내에 위치한 사천여고는 오래전부터 방과 후 지역 주민에게 공원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잠시 쉬고자 이곳을 찾는 주민들을 위해 그늘과 휴게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사천여고의 교정이 지역의 공공성을 실현하는 중심지이자 열린 정원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했다. 앞으로도 이곳에 학생과 지역 주민 모두의 풍부한 추억과 이야기가 쌓이기를 바란다.
박혜리·문정석·연혜진 인터뷰
담의 경계를 허물고,
다양성을 담는 운동장
글 김모아 기자
개선 사업은 노후 시설 보수에 그치기 쉽다. 학교 외부 공간 전반을 새롭게 바꿀 수 있던 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박혜리(이하 리) 시작은 사천여자고등학교(이하 사천여고) 외부 공간 개선 사업이 아니었다. 어느 날, 평소 존경하던 어른인 문정현 대표(사천여고 이사장)에게 전화가 왔다. 문 이사장은 경남 지역에서 다양한 사회 공헌 및 문화예술 활동 지원 사업을 펼쳐 지역에서 존경받는 어른이었다. 교육 공간에 대한 남다른 비전이 있는 분이라, 사천여고의 외부 공간이 학생들의 꿈을 키워나가기엔 너무 열악해 체육관과 급식소 증축을 시작으로 점차 개선하기로 했다며 자문을 요청해왔다. 당시 여건상 멀리서 응원하는 마음으로 자문만 해드렸다.
이후 증축된 체육관 앞에 광장을 만들려고 하는데, 그냥 포장 시공 업체 시안으로 공사하는 것이 맞는지 고민이 된다며 다시 도움을 구해왔다. 도면을 보니 일반 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보도블록 패턴이었다. 순간 오지랖이 발동했다. 나름 학창 시절의 낭만과 추억을 쌓을 수 있는 학교 배경이 이래서는 안 되지 하는 마음에 제한된 공사 금액 안에서 시공할 수 있는 광장 패턴 디자인을 살짝 도와준 일이, 이후 연속된 외부 공간 개선 사업으로 이어져 사가람 열린 정원 프로젝트의 시발점이 됐다.
세 단계로 구분된 프로젝트가 꽤 복잡하게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리 운동장 개선 공사(1단계), 정문 및 주차장 개선 공사(2단계), 운동장 생태정원 조성 공사(3단계)는 사실 편의상 내가 구분한 체계다. 실제로는 연계성 없이 개별로 발주됐다. 만약 통합 프로젝트로 발주됐다면 전체적인 마스터플랜을 세워서 더 효율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1단계와 2단계 사업은 어댑티브스를 주축으로 진행할 수 있었지만, 3단계 사업의 경우 식물을 다룰 수 있는 전문가와 함께하면 더욱 질 좋은 공간을 만들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최근 ‘시흥시 오이도 어촌뉴딜사업’을 함께 진행한 연혜진 소장(민앤그린 조경설계사무소)에게 곧장 연락했다. 또 학교 공간을 재구조화할 경우, 사용자 참여 디자인이 필수이기 때문에 촉진자가 필요했는데, 이 분야에서는 빅바이스몰을 통해 연을 맺었던 문정석 소장(로컬프로젝트 건축사사무소)말고는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두 분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됐다. 사실 적절한 설계비를 받을 수 있는 프로젝트도 아니었고, 그 돈조차 서울과 사천을 오가는 교통비로 다 소요되는 상황이라 두 분이 참여를 수락해주어서 감사하면서도 미안했다.
문정석(이하 석) 덕분에 프로펠러 비행기를 처음 타봤다. 사천여고가 사천공항에서 가깝다보니 비행기를 주로 이용했는데, 김포와 사천을 오가는 새벽 비행기가 프로펠러 비행기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나 쓰인 줄 알았던 비행기를 코앞에서 보고 직접 타보니 신기했다.
리 처음엔 기체가 너무 작고 흔들림도 심해서 너무 무서웠다(웃음).
학교 공간 설계 시 참여 디자인이 필수 요소가 된 모양이다.
석 2022년 개정된 ‘교육시설법’에 의해 교육 시설의 설계 전에 지역 사회 연계 가능성, 교육 과정 운영 및 교수 학습 방법에 따른 공간 구성, 사용자 참여를 통한 디자인 계획 등에 관한 사전 전략 수립 등이 사전기획의 방식으로 의무화됐다. 사전기획의 주요 내용 중 하나가 사용자 참여를 통한 디자인 계획 및 안전에 관한 사항이다. 이제 전문가나 학교 운영자 몇몇의 의견만으로 학교 공간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게 된 것이다. 사용자가 누구인지 명확히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학교 재량에 따라 학생, 학부모, 교사, 지역 주민 등을 설계 워크숍에 참여시키는 게 일반적이다.
사가람 열린 정원 프로젝트를 통해 학생들에게 어떤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나.
석 담당한 업무가 참여 워크숍이다 보니, 디자인 결과물보다 함께 공간을 만드는 과정을 경험하게 해주는 데 의의를 뒀다. 보통의 학생은 학교를 다니며 자신이 사용하는 공간에 대해 요구하고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걸 모른 채 졸업한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의 부재는 성인이 되어서까지 영향을 미쳐서, 훗날 자신이 거주 영역에서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게 만든다. 자신이 낸 목소리를 전문가들이 실제 공간으로 구현해 주는 과정을 통해, 권리를 행사하는 법을 깨닫게 하고 일종의 민주주의를 체험하게 해주고자 했다.
교감과 교장을 비롯해 부장급 교사와 실무 차원에서 도움을 주고받아야 하는 행정실장이 교직원으로 참여했다. 학생의 경우, 다양한 학년에서 희망하는 학생을 모집하는 게 이상적이겠지만 학업으로 바쁜 이들을 참여시키는 게 쉽지 않다. 임원 학생과 희망하는 학생들이 참여했다. 학교에서 독려를 많이 해서 참여율이 높았고 지역 주민과 졸업생까지 30명 정도가 함께 했다.
함께 학교 지도를 그리고 모형도 만들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연혜진(이하 진) 학생과 교직원은 물론 주민과 졸업생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한 워크숍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워크숍 과정을 보며 이 현장은 설계가 주도하기보다 참여자들이 의견을 마음껏 낼 수 있도록 독려하는 가이드의 역할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그들의 의견이 꼭 공간으로 나타나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프로젝트였다. 학교라는 공간은 학생을 보호할 수 있도록 안전에도 귀 기울여야 하는 곳이다. 사가람 열린 정원은 그 이름처럼 ‘열린’ 공간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리 학교를 두르는 담이 있고 출입은 정문으로만 이루어지기에 완전히 열린 공간은 아니다. 사방에 꽤 넓은 차도가 있기에 안전 측면에서도 담장은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사천여고가 열어둔 건 정문이다. 특성화고인 사천여고는 오후 네 시경이면 학생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 빈 공간이 된다. 그럼 이 운동장을 지역 주민들이 공원처럼 사용한다. 주변에 공원은 물론 쉴 만한 공간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가 일종의 공공 공간 역할을 하는 셈이다. 기존의 정문도 늘 열려 있었지만 불법 주차를 막을 수 없었기에, 자동 볼라드를 설치해 사람은 통과시키고 차량은 통제하는 형태로 바꿨다.
예산의 여유가 있었다면 담장도 손대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특히 대로변 버스정류장을 담장과 연계해 하이브리드한 스트리트 퍼니처로 만들면, 주민과 좀 더 적극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다기능적 담장이 되지 않을까 했다.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해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오히려 많은 주민을 이곳에 오게 해 서로를 감시하게 하는 효과를 내야 한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었다.
석 사천여고가 특성화 학교라 운영 방식이 특이하다. 인문계 고교에서 대학에 진학할 의사가 없는 학생들이 이 학교에서 나흘 정도 수업을 받기도 한다. 개방적인 교육 시스템이다. 그런 점에서 사천여고의 열린 운동장은 학교의 운영 방식과 퍽 잘 어울리는 공간이다.
운동장을 파고드는 형태의 녹지 공간이 독특하다. 흔히 비정형은 정형보다 비효율적인 도형으로 여겨지는 데 어떤 의도로 설계한 공간인가.
리 연역적인 결과로 완성된 공간이다. 워크숍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의견이 안전한 지름길의 필요성이었다. 체육관과 본관 사이를 오가는 학생들은 본능적으로 가장 짧은 경로를 찾고 반드시 운동장을 밟게 된다. 이때 신발에 묻은 모래 때문에 건물 진입부에서 넘어지는 사고가 종종 발생했다고 한다. 운동장을 밟지 않고도 건물 사이를 오갈 수 있는 지름길이 필요했고, 이 지름길을 감싸는 모퉁이 공간을 작은 정원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또 다른 운동장 모퉁이에는 벤치가 하나 있는데, 하교를 함께할 친구를 기다리는 장소로 주로 쓰인다. 많은 학생이 이용하기엔 너무 좁기에 공간을 확장할 필요가 있었다. 기능을 생각하며 그리다보니 운동장을 땅따먹기 하듯 정원이 파고들어가는 모양 자체가 디자인 언어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을 빠져나와 바로 쉴 수 있는 공간, 운동장을 하나의 풍경처럼 바라보며 쉴 수 있는 공간 등을 설정했고 원과 삼각형을 활용해 디자인했다. 대부분의 체육 활동은 체육관에서 이루어지기에 운동장을 크게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운동장은 원할 때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공간으로 쓰게 하고, 각 모서리는 면하고 있는 건물의 성격 혹은 그 장소에 필요한 기능을 첨가한 정원으로 만들었다. 디자인을 실현했다기보다 필요가 디자인을 완성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다. 할 수 있다면 밀양의 밀주초등학교처럼 운동장의 더 많은 부분을 정원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벤트 광장 패턴의 완성도가 인상적이다.
리 나 또한 놀랐다. 광장 패턴을 그렸을 당시 네덜란드에 있었기에 시공 현장을 한참 뒤에나 보게 되었는데, 비교적 완성도 높게 시공되어 있었다. 광장 도면을 그릴 때 패턴을 드러내기 위해 모든 블록을 한 땀 한 땀 실사이즈로 그렸는데, 그리면서도 시공하면 당연히 오차가 생길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도 도면과 거의 똑같은 광장이 완성된 건 담당 주무관과 시공자의 노력 덕분이라 생각한다. 전달한 디자인을 소중히 실현시켜 준 그 노력과 마음에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이때의 감동이 사가람 열린 정원 프로젝트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게 한 계기이기도 하다.
현장의 흔적을 남기고 기존 시설을 재활용하는 일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더 많은 노고가 드는 일이다. 때로는 더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리 대상지가 황폐했지만 재활용할 수 있는 것이 없을 지 계속해서 살폈다. 그러다 마주한 게 경비실과 문주, 간판이었다. 경비실은 나라장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형태였고 상태가 좋았다. 학생들의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고 기능성을 높일 수 있는 곳으로 위치를 바꾸고 골강판을 둘러 외부 마감만 새로 했다. 문주와 간판도 재활용해 학교에 내재된 역사를 느낄 수 있게 했다.
‘어댑티브스(Adaptives)’는 내가 추구하는 ‘적응적 재사용(adaptive reuse)’이라는 가치를 담은 사명이다. 우리는 부수고 새로 짓는 게 당연한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걸 백지화해 새로 만드는 게 효율적이고 비용이 적게 든다는 건 지극히 행정적 편의의 관점에 치우쳐 상황을 오독한 것이다. 대상지 분석 과정에서 무엇을 재활용할 수 있는지 꼼꼼히 살피고 알아보면 실제로 과다한 폐기물을 줄일 수 있고, 비용 절감에도 도움이 된다. 적응적 재사용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더 실용적이고 훌륭한 설계법이고, 지속가능한 환경을 실현할 수 있는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기본적 가치라 믿는다.
기존 대상지에 꽤 넉넉한 규모의 녹지가 있었다. 그곳에서 어떤 가능성을 읽었는지 궁금하다.
진 일반적인 학교와 달리 스탠드 대신 넓은 녹지가 있어서 놀랐다. 녹지 안에 있는 수목도 독특했다. 보통은 관리가 편한 눈주목, 향나무를 심기 마련인데 이곳의 녹지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배롱나무, 이팝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녹지로 들어갈 수 있는 길만 열어주어도 활용도와 그 가치가 높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가장 반가운 요소는 녹지 뒤 등나무 쉼터였다. 한때는 등나무 쉼터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지만, 구조물이 낡고 지저분해져서 사라지는 추세다. 사천여고의 등나무 쉼터는 최근에 리모델링을 했는지 조적 기둥도 튼튼했고 등나무의 생육 상태도 좋았다. 다만 관리되지 않은 녹지에서 마구잡이로 자란 가이즈카 향나무와 은행나무, 실화백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에서 등나무 쉼터로 이어지는 보행로의 폭이 너무 좁아 활용도도 낮았다. 녹지에 빽빽하게 심긴 나무를 걷어내서 등 나무 쉼터의 존재를 되살렸다. 정돈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까지 더해 경관적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실용적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운동장 남측에 조성된 소공원의 경우, 수목들이 조각처럼 서 있는 공간으로 보인다.
진 본래 목서와 가이즈카 향나무, 교화인 동백나무, 교목인 월계수가 있던 공간이다. 식재 설계를 하기보다는 기존의 나무들이 돋보일 수 있는 공간으로 연출하고자 했다. 크게 자라난 목서가 강조되도록 근처에 있던 동백나무를 옮겨 심어주고, 등나무 쉼터를 가리는 몇몇 수목은 제거했다.
학생과 교직원이 느끼는 학교 외부 공간에 대한 인식이 다를 것 같다.
석 학교는 ‘시간’이라는 개념에 지배받는 독특한 사회다. 50분 수업, 10분 쉬는 시간, 1시간 점심시간 등 시간에 맞추어 모든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학생들은 이곳에서 시간관념을 배운다. 이러한 특수성 때문인지 교사는 시간 운용에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를 불편사항으로 여기게 된다. 사천여고 운동장의 지름길 역시, 제시간에 가야 하는 공간에 도달하기 위해 생긴 것이다. 어떤 공간이 생긴다고 하면 교사는 정해진 시간 내에 학생들이 이동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지 생각하게 된다. 학생은 무의식중 내가 저 공간에 쉬는 시간 내에 다녀올 수 있는지,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게 된다. 지름길이 정형보다는 비정형적 형태를 띠게 된 이유도 다듬어진 모양보다 비정형이 이동 효율이 좋기 때문이다. 교사들은 생각보다 외부 공간에 대한 요구가 크진 않다. 업무 강도가 높다 보니 외부 공간을 즐기기보단 그 시간에 업무를 하려는 의지가 더 커보였다. 관심이 있는 부분은 주차장의 주차 대수와 주차장에서 본관 건물로 이어지는 동선 정도였다.
리 녹지 내 산책로도 일종의 지름길이다. 처음에 녹지를 보존하려고 했었는데 학생들의 의견을 듣고 안에 길을 내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덕분에 이 산책로가 전체 공간을 엮어주는 동선이 되었고 등나무 쉼터의 활용도까지 높아졌다. 외부 공간에 대한 학생들의 요구사항이 꽤 구체적이었던 모양이다.
진 외부 공간에 대한 이해도와 원하는 바가 명확했다. 꽃 터널이 있었으면 좋겠다, 흔들의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친구랑 단둘이 조용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등 구체적인 의견이 제시됐다. 이 내용을 잘 반영하기만 해도 성공이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운동장을 운동하는 학생만 쓸 게 아니라 내향적이고 조용히 즐기고 싶은 학생도 사용할 권리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등나무 쉼터가 있지만 단둘이 소곤소곤 대화 나눌 수 있는 퍼걸러를 놓고, 운동장을 바라보며 조용히 휴식할 수 있는 흔들그네도 놨다. 작지만 아기자기한 요소를 많이 넣어주려고 했다. 학생들이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는 점도 고려했다.
리 재학생 중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학생도 있고,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만 있지 않기에 토론을 하거나 영상을 찍고 영화 상영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무대가 필요한 활동이 많아서 동백꽃 모양의 무대와 잔디 무대를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실현하지 못한 게 아쉽다.
석 요즘 세대의 학생은 외부에서 창작 활동을 펼치는 경우가 많다. 그런 활동을 지지해 줄 수 있는 환경이 학교에 마련되어야 한다. 공부라는 게 책상에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학교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학생들이 진로를 찾는 데 도움을 줄 필요가 있다.
교육 방식이 변화하고 학생 수는 감소하고 있는데, 교육 공간은 그에 발맞춰 달라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석 우선 소프트웨어가 바뀌는 속도를 하드웨어가 따라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공공 공간의 질이 민간이 만드는 공간의 질을 따라잡기 힘들다는 점도 엄밀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학교 담장 허물기, 학교 숲, 그린스마트 미래학교 등 학교 공간에 대한 다양한 실험이 이어져 왔다. 그 흐름 속에서 어떤 공간이 살아남았는지 살펴보니 결국 가변성이 가장 중요한 키워드 같다. 아지트 같은 포켓 공간, 생태 정원 등 다양한 공간이 교내에 만들어졌지만 학교 사회의 특수성 때문에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유연하게 쓸 수 있는 여지를 공간에 남겨두는 게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기존 학교 공간 대부분이 하나의 기능에 주목해 만들어졌는데 이제 그 기조가 변화하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더불어 이러한 실험이 가능한 이유는 학생 수 감소로 인해 공간적 잉여가 생겼기 때문이라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리 학교 운동장이 꼭 군대 연병장을 연상시킨다는 이야기가 기억난다.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 보면, 여고를 다닌 나는 운동장은 거의 쓰지 않았고 대신 학교 옥상에 있던 정원에 자주 갔다. 그래서 사천여고에도 되도록 작더라도 감수성을 기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려고 했던 것 같다. 워크숍을 통해 학생 대부분 산책이나 쉼에 집중된 활동을 선호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방과 후 이곳을 찾는 주민 역시 간단한 기구를 이용해 운동을 하거나 정적인 휴식을 즐겼다. 그래서 사유할 수 있고 아기자기한 활동을 담는 공간을 만드는 데 집중한 것 같다. 현재는 교육 시설 대부분이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이 사천여고처럼 점차 지역 사회에 열리는 형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진 열린 학교운동장 사업을 진행했을 때 발생했던 문제들이 생각난다. 쓰레기, 소음, 치안 등 여러 문제가 발생했지만, 그 문제점을 해결해나갈 방법을 모색해 학교 운동장을 열린 공간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2018년 ‘디자인프레스’가 진행한 건축 시리즈에서 유현준 건축가 편(각주 1)을 굉장히 공감하면서 읽었다. 학교라는 공간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저층 형태의 건물을 분산해 배치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건물과 건물을 오가며 잠깐이라도 자연스럽게 외부 공간을 이용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나무가 많기로 유명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특히 건물 앞에 있던 커다란 감나무의 그늘을 자주 이용했다. 그곳에서 고무줄 놀이를 하고 친구와 담소를 나눴다. 학교의 외부 공간이 이처럼 운동을 잘하는 학생뿐 아니라 다양한 성향의 학생을 포용하는 다양성 높은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석 장기적인 관점에서 학교 운동장을 지금보다 더 열린 형태로 쓸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학생이 아닌 일반 사람들이 학교 공간에 관심을 갖게 되면, 학교 공간의 사회적 담론화로 이어진다. 관여된 사람이 늘어날수록 자연히 정치인들도 지금보다 학교 공간 환경에 대해 주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학교가 더욱 공공 공간화되어야 학교 공간을 바꿀 수 있는 예산을 끌어올 수도 있지 않을까? 무엇이 답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교실이 밀집되어 있는 학교 건물이 한쪽에 몰려 있고 남은 땅은 운동장으로만 쓰는 현재의 학교 공간 구성은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리 한 대학에 출강했을 때, 한강변 아파트 단지를 대상지로 삼아 마스터플랜을 그리는 도시설계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다. 그중 한 팀이 학교 시설을 한강 쪽으로 옮겨 한강을 향해 열린 문화 시설로 만들고 휴일에 학교 공간을 시민과 공유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현실적으로는 학교는 교육청 관할이기에 그 위치를 바꾸기 쉽지 않겠지만, 일종의 열린 공공시설로서 학교 외부 공간의 가치를 최대화할 수 있도록, 도시계획과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석 교육 기관의 설계 인허가 권한을 교육청이 갖고 있어서 생기는 문제일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행정과 교육 행정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더 좋은 학교 공간을 만드는 사례가 생기고 있다. 소수의 성공 사례를 일반화해 모든 공간에 적용하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앞으로 한국의 학교 공간이 점점 더 발전해 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각주 정리
1. 유제이, “유현준 건축가가 생각하는 ‘좋은 학교, 나쁜 학교’”, 디자인프레스 2018년 7월 4일.
글 박혜리 어댑티브스 소장
디자인 책임 어댑티브스(Adaptives Design & Research)
건축 및 도시설계 박혜리
조경 설계 민앤그린(3단계), 우진엘에스디(1단계)
참여 디자인 로컬프로젝트(3단계)
토목 설계 동영이앤지(2단계)
발주 사천여자고등학교
위치 경상남도 사천시 정동면 옥산로 47
면적 2,876㎡
준공 2024년(3단계), 2023년(2단계), 2022년(1단계)
사진 노경, 어댑티브스
어댑티브스(Adaptives Design & Research)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공간과 환경에 대한 이슈를 디자인과 리서치로 풀어내는 회사다. 도시 공간이 지나온 시간을 담으면서도 어떻게 현재와 미래에 쓸 만한 적응적 (재)사용이 가능할지 고민하고 있다.
박혜리는 네덜란드 로테르담 소재 KCAP의 어소시에이트 파트너로서 2021년부터 서울에 상주하며 한국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다. 최근 어댑티브스를 설립해 색다른 설계 방식과 디자인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네덜란드 공인 건축사이자 도시계획가이며 대한민국 건축사다.
문정석은 건축설계사무소에서 다수의 도심 복합 상업 시설을, 시민단체에서 작은 도시 공간 만들기를 통한 지역 변화를 주민과 기획하고 실천하는 상반된 일을 진행했다. 디자인을 통한 사회 참여, 참여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하고 있다. 현재 로컬프로젝트 건축사사무소의 소장이다.
연혜진은 가천대학교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종합건축사사무소 건원에서 실무를 경험했다. 현재 민앤그린 조경설계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건축 및 주택 외부 공간, 도시공원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목재친화형 목재도시 조성사업, 선로변 지장수목 관리 가이드라인 수립, 대전 도심구간 경부, 호남선 지하화 개발 방안 연구 용역, 기상관측 환경 개선 사업, 양동구역 제11, 12지구 개방형 녹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업하고 있다.
-
그림자 아카이브
Shadow Archive
기록물을 만들기 위한 여정의 기록
계속 걷기: 단서가 생각이 될 때까지
1. 선유도는 한강이라는 물이 만든 섬이며, 물을 정화하던 정수장이었고, 물이 풍부한 공원이 되었습니다. 선유도는 ‘물의 기록’입니다.
2. 물을 정수하기 위해서는 화학 약품이 필요합니다. 미세 입자들을 응집시키거나 소독하는 과정에 몸에 해롭지 않은 여러 화학 약품을 씁니다.
3. 섬은 햇빛이 풍부합니다. 고층빌딩의 간섭 없이 햇빛을 온몸으로 받을 수 있으니까요.
4. 햇빛은 세상의 무언가를 만나 그림자를 만듭니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생각납니다. 그림자는 누군가의 분신이자 정체성이기도 하지요. 햇빛과 그림자는 한 쌍일 텐데, 우리는 만져지지 않는 그림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공모전을 시작할 무렵, 몇 개의 단상이 머릿속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디자인 초반은 추리소설 같습니다. 몇 개의 단서를 발견하지만 아직 그 조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런 파편들이 몇 개의 생각 덩어리로 응집되어 침전될 때까지 선유도를 꽤 자주 오래 걸었습니다. 지난 20여 년간 선유도에서 목격한 풍경들과 개인적인 기억들이 떠올라 몽글몽글해졌습니다. 수생식물원의 남측 산책로를 멀리서 영화 장면처럼 지켜본 적이 많다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습니다. 많은 연인이 자작나무 사이를 오가며 꽃을 건네고 웃었습니다. 아이들은 줄을 지어 소풍을 나왔습니다. 노년의 부부가 손을 잡고 천천히 산책을 했습니다. 강아지들은 먼저 다녀간 친구를 찾아 나무 밑동을 킁킁거립니다. 자작나무 사이로 매일, 매 순간 단편 영화의 푸티지(footage)가 펼쳐집니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 필름처럼 이어지는 이 40m의 산책로를 제일 좋아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곳에 가면, 원래 설계도에 없던 못생긴 안전 난간과 아무도 앉지 않는 조악한 벤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물을 등지고 앉지 않습니다. 난간을 없애면 몸을 돌려 근사한 수생식물원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네 벤치에서 흔들거리는 한가로운 풍경도 선유도의 일부가 되어 있습니다. 오랫 동안의 관찰과 발견과 느낌과 상상은 이런 무위(無爲)의 풍경을, 콘크리트 구조물에서 자라는 생명을, 오늘의 잠깐을, 물과 햇빛과 약품이 만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기록하고 싶다는 바람이 되어갑니다. 선유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의 경관을 바라보는 아주 긴 정자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공부하기: 생각이 개념이 될 때까지
사람들이 가끔 물어봅니다. 어떻게 개념을 만드냐고요. 대단한 방법은 없습니다. 두뇌에 땀이 나도록 생각할 수밖에요. 햇빛, 물, 기록, 그림자, 화학 약품 이런 키워드를 가지고 열심히 검색을 해봅니다. 그 과정에서 제 눈에 들어온 하나의 이미지가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애나 앳킨스(Anna Atkins)가 해조류와 수생 식물을 기록하기 위해 사용한 시아노타입(cyanotype) 기법입니다. 앳킨스는 세계 최초의 사진집을 만든 여성입니다. 그녀의 시아노타입 기록 작업은 사진사, 식물학자, 예술가의 교차점에 위치한 선구적인 시도입니다. 대학 시절, 학과사무실의 꾸릿꾸릿한 냄새의 원흉이던 청사진 기법이 같은 원리입니다. 너무나 익숙했던 청사진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추억 여행은 잠깐, 이제 시아노타입에 대해 공부합니다. 구연산 제2철암모늄과 페리시안화칼륨을 적정 비율로 물과 섞어 숙성시킵니다. 액체를 종이나 천에 바른 뒤 잘 말려 감광지 혹은 감광천을 만듭니다. 물론 햇빛을 완전 차단해야 하니 암실에서 작업해야 합니다. 이미지를 얻고 싶은 물체나 OHP 필름 뒤에 이 감광지를 대고 햇빛에 20~30분 정도 노출시켰다 물로 세척하면 이미지가 나옵니다. 햇빛을 받은 부분은 파랗게, 빛을 받지 못한 부분, 즉 그림자에 해당하는 부분은 흰색이 됩니다. 태양광에 감광되는 화학 처리된 천에 실재하는 사물의 외곽선과 그림자를 깊은 푸른색으로 인화하는 햇빛 프린팅(sun printing), 즉 시아노타입으로 선유도의 풍경을 기록하고, 그 위에 매일의 그림자가 중첩되며 선유도의 시간을 쌓아간다는 그림자 아카이브의 개념이 드디어 명료해지기 시작합니다.
실험하기: 개념이 실체가 될 때까지
공공미술 심사와 심의 때 몇몇 위원이 묻습니다. 시아 노타입을 다른 작품에서 해봤냐고요.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이번이 처음입니다. 의심의 눈초리 가 쏟아집니다. 오랜만에 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제 작업이 잘 안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과 의심이 제기됩니다. 아마 제가 ‘미술’이라는 말에 너무 심 취해 있었나 봅니다. 새로운 시도에 너그러울 거라 생각했습니다. 1/3의 책임감, 1/3의 오기, 1/3의 호기심 으로 수많은 테스트의 시행착오를 거칩니다. 직사광선 에 파란 빛이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 약품과 물의 비율 을 어떻게 해야 할지, 흐린 날과 맑은 날은 노출을 얼마나 해야 되는지, 얼마나 밀착해야 이미지가 선명해지 는지, 어떤 천이 적절할지. 여러 번 실패하고 다시 해봅 니다. 납작한 식물 표본이 아니라 현장에서 입체를 다루니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3차원의 공간감이 그라데이션으로 나타납니다. 광량, 햇빛의 각도와 강도, 화학약품의 배합과 숙성 시간, 세척에 걸리는 시간 등 여러 변수로 인해 하나도 같지 않은 푸른색의 스펙트럼으로 펼쳐집니다. 버리는 시간만큼 자신이 생깁니다. 이러한 수고로운 경험지(經驗知)를 소중히 여깁니다. 보통의 조경 일에서는 실패나 실수를 거듭할 사치를 부리기 어렵습 니다. 그래서 ‘미술’이라는 말이 감사했습니다.
제작하기: 실체가 작품이 될 때까지
생각이 정리되고 테스트를 열심히 한다고 작품이 저절 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작업의 취지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솜씨 좋은 파트너들이 필요합니다. 수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림자 아카이브에는 그들의 노력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4월에 개장을 해야 하니 모든 테스트 작업을 겨울에 해야 합니다. 지난겨울 흐린 날이 정말 많았습니다. 이 작업을 하지 않았다면 매일 매일 햇빛의 강도에 그토록 예민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나의 젊은 팀원들과 해가 나오면 뛰어나갔습니다. 햇빛이 참 귀하다는 생각을 자주, 어쩌면 처음 한 것 같습니다. 2월의 맑은 며칠 동안 선유도의 곳곳을 누비며 햇빛 프린팅을 진행합니다. 빛에 취약한 감광천 은 첩보원처럼 검은 천으로 휘감아 조심스럽고 민첩하 게 다뤄집니다. 가장 조바심 나는 시간은, 낮에 햇볕을 쪼인 천들이 세탁기 안에서 돌고 있는 그 한 시간입니 다. 가장 경이로운 순간은, 좁은 세탁실에 쪼그리고 앉 아 푸른색으로 인화된 이미지를 비로소 처음 마주하 는 시간입니다. 정수장에서 정수된 물을 통과해야 비 로소 정수장의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니. 말장난을 하 면서 혼자 재미있어 합니다. 물을 경관적, 놀이적, 관리 적 요소로만 생각하던 오랜 습관에 균열이 가는 느낌 이 듭니다. 그렇게 세탁한 천은 매끈하게 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천을 발수 가공하기로 합니다. 공장으로부터 기계 작업하기 위해 천들을 1.5m×25m 롤로 만들어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프린트 이미지 하나는 여 백을 포함하여 고작해야 60~70㎝ 에 250㎝ 정도이니, 발수 가공 기계에 들어가려면 20개를 재봉질로 이어 하나로 만들어야 합니다. 퇴근 후 밤마다 제 아이와 번갈아 미싱을 돌립니다. 발수 가공이 끝난 천은 다시 낱 개로 분리하여 다림질을 또 해야 됩니다. 다림질이 끝난 천은 폴리카보네이트 투명 패널에 부착되고 철재 프레임에 조립됩니다. 자외선 차단 스프레이도 골고루 뿌려줍니다. 빨래, 바느질, 다림질. 우리 어머니들이 지 루하게 했던 가사 노동을 집약적으로 반복합니다. 천이 라는 재료를 선택한 순간에 내정된 일이었을 텐데, 당 시에는 이 고단함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구조체는 어떤가요. 자작나무들이 자리를 잡고 있던 터라 모든 작업은 장비 없이 나무를 피해 한 땀 한 땀 진행됩니다. 경사진 땅을 사람들이 편하게 앉을 수 있 게 평평하게 만들고 선유도공원 원 식재 도면의 붉은 인동과 홍자단을 섞어 식물을 심어봅니다. 패널 조립 과정도 놀랍습니다. 그들의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창의 성과 숙련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참 많 은 사람의 정성과 노력이 들어갔습니다.
협업하기: 작품이 생태계가 될 때까지
그림자 아카이브의 또 다른 주인공은 그림자 캐릭터입니다. 물과 식물이 있는 곳에는 늘 곤충이 찾아오지요. 곤충은 꽃가루받이, 유기물 분해, 먹이망 유지 등 생 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해충을 조절하고 토양 을 건강하게 만들며, 다양한 생물의 먹이로서 생물 다 양성을 지탱합니다. 또한 환경 변화에 민감해 생태계 건강을 알리는 지표종이기도 합니다. 곤충이 사라지면 생태계 전체가 위협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벌레 포비아가 만연해 있죠. 잘 알지 못하면 싫어하거나 무서워하기 십상입니다. 우리 생태계에 중요 한 곤충 친구들을 친근하게 표현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작가들에게 도움을 요청 합니다. 우선 곤충 전문가와 추운 겨울날 흔적을 찾아 선유도에 사는 50여 종의 곤충을 발견합니다. 따듯한 날이었다면 훨씬 더 많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선유도에 사는 곤충 탐사 결과를 캐릭터로 개발하고 3D 프린 팅해 패널 안팎에 숨깁니다. 낮의 햇빛, 밤의 조명을 받아 벌레들은 그림자로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밤의 불빛이 살아있는 곤충들을 더 불러 모으겠죠. 사람들이 민원을 넣을까봐 걱정이 앞섭니다. 터파기를 하는 어느날 잠자던 두꺼비 커플을 깨웠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물가로 조심스럽게 옮겨주었습니다. 그림자 아카이브를 찾는 사람들에게 좋은 기운을 불어줄 거라 현장의 여 러분이 즐거워합니다. 그렇게 두꺼비가 또 다른 그림자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선유도의 친구들입니다.
검증하기: 작품이 시설이 될 때까지
공사가 끝나고 드디어 개장을 합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건 오산이었습니다. 선유도의 풍경과 생태계의 기록이라는 작품의 의도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되 었습니다. 사람들이 떨어질 위험이 있다고 난간을 더 조밀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햇빛에 파란색의 천이 바래가는 햇빛 탈색(sun bleaching) 역시 작품의 일부라고 항변해 보지만, 얼마나 바래면 교체할 거냐는 끊임없는 질문에 아직 명확한 대답을 가지고 있지 못 합니다. 처음이니까요. 작품은 개장과 동시에 하자 교체 대상의 시설물이 됩니다. 사람들은 사진을 잘 찍기 위해 식물을 밟습니다. 힘 좋은 청소년들이 패널과 그 네 벤치를 미친 듯이 흔들어댑니다. 그네의 기초 공사를 더 깊고 더 강하게 해야 합니다. 목재에 얼룩이 생긴대서 색이 있는 오일 스테인을 덧대야 했습니다. 모든 것이 공원 시설로 존재하기 위해 부족해 보였습니 다. ‘공공’의 무게감이 타협을 요구합니다. 공사가 끝나면 즐거울 거라 생각했지만, 작품의 개장은 걱정과 우 려와 보수 공사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을 빠르게 인정합니다. ‘안전’이라는 단어는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압도합니다. 여담입니다만, 수년 전 해외 놀이터 답사에서 매우 가파른 언덕 위 야외 데크에 안전 난간이 없는 게 너무 놀라워 담당자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애들 떨어지면 어떡하냐고요. 담당자가 얘기합니다. 난간이 없어야 엄마들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지 않고 아이들을 계속 지켜본다고요. 참 다른 문화입니다. 공급 자가 어떻게 해도 떨어지지 않는 장치를 만드는 사회와, 떨어지지 않기 위해 이용자가 스스로 조심해야 하는 사회의 차이는 오랫동안 축적된 어떤 태도의 차이 일까요. 보수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잊었던 그 난간 없는 놀이터가 불쑥 생각났습니다.
기다리기: 작품이 사라지기까지
사라지지 않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라지지 않음을 욕망하는 것은 인간뿐입니다. 지구상에 태어난 누구나 태어나서 언젠가 사라져야 하는데, 왜 그렇게 악착같이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할까요. 얼마 못 버티는 것에 공공의 예산을 쓰는 것은 낭비라고 볼 수 있죠. 그러나 모든 것은 언젠가 정해진 생애를 마치면 겸허히 퇴장해 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기록 이 의미가 있겠죠.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영속된다면 기록할 필요가 없겠죠. 그냥 가서 보면 되니까요. 아카 이브는 사라지기 싫어하는, 혹은 사라질 수밖에 없는 세상의 많은 것들을 기꺼이 보낼 수 있는 가볍고 아름다운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순간은 돌이킬 수 없고 찰나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습니다. 그림자 아카이브는 선유도 풍경의 순간적 단면 위에 하루의 낮과 밤의 빛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들의 기록입니다. 그림자 아카이브는 선유도의 과거와 현재, 자연과 인간, 기록과 소멸 사이의 관계를 시각화한 풍경적 필름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어느 시점의 인상을 펼쳐놓은 병풍입니다. 선유도에서만 볼 수 있는 물의 경관을 바라보는 긴 정자입니다. 여기서 시민들의 일상과 계절의 변화가 겹치면서 새로운 그림자가 계속 수집 되겠지요. 이 작품이 완결된 오브제로서의 공공미술이 아니라 진행형 아카이브, 혹은 공동의 아카이빙 실천이길 바랍니다. 그림자 아카이브는 선유도공원에 대한 오랜 학습과 흠모의 결과이자 선유도를 찾는 사람들과 함께 만드는 소소한 연대의 기록물입니다. 선유도의 기억을 조금 더 푸르고 충만하게 축적할 수 있도록, 그림자 아카이브는 그 기록 장치로 행복한 삶을 살다 서서히 사라지기를 희망합니다.
글 김아연
사진 유청오
작가 김아연
그림자 캐릭터 디자인 김소연, 토드헴커
디자인팀 스튜디오테라(안형주, 김선주, 박근우, 박인경, 이한슬, 유다연)
디자인 지원 서울시립대학교 조경설계연구실(김소영, 김진현, 박형근, 신나경, 장계용, 적우예)
제작 및 설치 총괄 초록선(배용은, 이환명)
디자인 감리 안형주, 박근우
금속 각재 기원(이원길)
패널 금속 및 스윙 벤치 제작 선철제작소(김선철)
목재 가공, 패널 조립 및 설치 김승봉, 김명수
목재 천일우드(조상현)
도장 미도페인트(이명례)
전기 및 조명 다온태화이앤씨(주은성)
패브릭 발수 가공 비트패브릭
폴리카보네이트 패널 제작 흥왕(김경희, 이승우)
구조 설계 케이엔지니어링(권우현)
구조 자문 황경주
곤충 탐사 손윤한
영상 제작 이동웅
전시기획 및 시행 시월이앤씨
주최·주관 서울특별시 디자인정책관
재료 아연도각관에 도장, 옥스퍼드천, 목재, LED조명, 식물 등
위치 서울시 영등포구 선유로 343
규모 W364×H307.5×L4,475㎝
완공 2025. 4. 23.
김아연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와 동대학원, 미국 버지니아대학교 건축대학원 조경학과를 졸업했다. 조경설계 실무와 설계 교육을 넘나드는 중간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도시 속 다양한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담당해 왔으며 동시에 자연과 문화의 접합 방식과 자연의 변화가 드러내는 시학을 표현하는 설치 작품을 만들고 있다. 자연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아름다운 꿈과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일이 조경 설계라고 믿고, 이를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일을 중요시한다.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이자 스튜디오 테라 대표다. 서울시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번 그림자 아카이브를 기획, 제작했다.
-
포스코 스퀘어 가든
POSCO Square Garden
현재 조경가들은 절호의 시기를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 지구적 기후 변화 위기 속 만년 유망주 조경은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주역이 될 것 같기도 하다. 19세기 후반 극심한 도시 문제에 대처하며 일어났던 도시미화운동(City Beautiful Movement)은 현대 조경의 양상과 닮았다. 200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논의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을 현장에서 실천적으로 활용할 기회가 많아졌다. 조경이 개입하는 모든 유형의 공간에서 이러한 기류가 체감된다. 조경의 가장 큰 무기인 녹색의 자연은 어느 때보다 중요한 가치이자 기능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회 전체의 방향성을 지시해야 하는 공공 프로젝트는 물론이고 민간의 영역에서도 조경의 중요도는 나날이 더해지고 있다. ESG를 필두로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은 자연을 향하고 있고, 조경가들은 이를 가장 잘 다루는 전문가다.
포스코는 일을 맡게 된 설계사무소로서도,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도 여러모로 감사한 기업이다. 그들은 본인들이 소유한 공간을 개방해 가능한 많은 이들이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사회적, 환경적 기여를 기업의 의무로 요구하지 않았던 시대 때부터 그랬다. 그들은 공공을 위한 다수의 공간을 만들었지만,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프로젝트를 통해 기업이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기업이 공공을 위한 기회를 마련한다면 어떠한 가치로든 기업에게도 환원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기업 공간을 계획할 때 공공과 기업 모두에게 이로운 순환 고리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포스코라는 브랜드
우리는 포스코와 함께 일을 종종 해왔다. 포스코 스퀘어 가든(이하 스퀘어 가든)은 설계 시점 기준으로는 네 번째, 준공 기준으로는 두 번째 맡는 작업이다. 같은 대상을 두고 매번 차별화된 콘셉트와 전략을 계획해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야 할 때 고민이 깊어진다. 포스코와 함께 한 첫 프로젝트인 파크1538 포항(『환경과조경』 2022년 9월호)은 코르텐이라는 철강 소재를 사용해 기업 이미지를 직관적으로 구현했다. 포스코 인재창조원 역시 철이라는 기업의 대표 소재를 앞세워 표현했고, 파크1538 광양은 건축과 함께 굽이치는 땅의 움직임을 통해 그들의 역동성을 전달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지주사 분리 등 기업의 내부 구조가 바뀌었고, 포스코는 더 이상 철강만이 아닌 AI, 이차전지, 수소 등 한층 더 미래를 꿈꾸는 산업으로 변모를 시작했다. 그들에게 여전히 철은 중요했지만, 꼭 철이란 재료를 부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못 상충되는 의견을 전달받았다.
철의 유연함과 안온한 산책로
그래서 시선의 초점을 달리하며 철의 강함보다 유연함 에 초점을 맞췄다. 철은 그 무엇보다 단단한 강성의 소재이지만, 무엇으로도 주조될 수 있는 유연한 재료이기도 하다. 테헤란로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곳에 미려한 굴곡을 가진 선형의 덩어리를 흘려보내 용융된 상태를 은유하고 그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담아냈다. 최대한 순백에 가깝게 조색해 청정함을 표방하며 친환경적 신사업들을 추구하는 그들의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했다. 토심을 확보하는 플랜터인 동시에 걷다가 잠시 앉을 수 있는 벤치이지만 구체성과 지시성 을 덜어냈다. 가능한 추상적인 볼륨으로 이색적인 심상 만을 전달하고자 했고, 독특한 조형물 하나가 도심 사이를 꿰뚫고 나아가길 바랐다. 한국의 상징적 가로 중 하나인 테헤란로에 인상적인 장면을 남기고자 했다. 전체적으로 이용자들이 산책을 즐기며 거니는 공간으로 계획했다. 프로젝트에서 주어진 과제이기도 했지만, 사실 번잡한 도심 한복판에서 분명히 필요한 경험 이기도 하다. 온종일 앉아서 일하는 수많은 직장인, 실제 이용할 수 있는 공원이 빈약한 인근 지역 주민을 고려한다면 답은 꽤 쉬웠다. 산책은 걷는 행위 자체가 목적인 발걸음이기에 공간에서 그 걸음과 심상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했다. 길의 선형을 아주 선명하고 명료하게 구성하고, 산책로 주변에 두터운 식재를 더해 서정적이고 안온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건물의 세 면을 감싸고 도는 산책로는 각 면마다 서로 다르게 연출된 식재 구간을 통과하며 서울 한가운데에서 잠시나마의 여유로운 일상을 선사한다.
스퀘어 가든은 크게 네 개 공간으로 이루어지며 문화 예술 산책로, 버스킹 가든, 갤러리 가든, 선큰 가든이 있다. 선큰 가든은 조경의 작업이 거의 더해지지 않았 다. 서로 동시에 바라보이지 않는 공간들이기에 각 면 마다 다르게 기획하더라도 이질적 산만함보다는 차별적 매력으로 다가갈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그래서 특 정한 공간에 힘을 주는 대신 공간 사이사이를 연결하는 산책로를 통해 여러 공간을 엮어 완성도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문화예술 산책로
테헤란로에 인접한 전면부의 문화예술 산책로는 모든 공간과 기업의 인상을 보여주는 정면이기에 단단하고 정연한 모습으로 연출했다. 일부 관목과 초화류를 제외하면 소나무와 줄사철이라는 상록의 교목과 지피류, 단 두 켜의 식재로만 구성해 단정하면서도 기품 있는 분위기를 표현했다. 기존에 조성된 공간의 무게감이 인상적이었기에 본래의 식재 구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되 계절감만 조금 더하는 약간의 변주만 시도했다. 시간과 계절의 변화는 자연의 본질이지만, 전면부 공간만은 겨울 동안에도 스러짐 없이 오롯할 수 있도록 상록 수종 중심으로 계획했다. 특히 오랜 시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소나무 위치를 옮기지 않고 그 사이 사이를 돌아나가는 산책로를 새로 구성해 대상지가 품 고 있었던 땅의 시간이 계속 유지되게 했다. 백색의 비정형 구조물은 새로운 미래에 대한 지향점을, 소나무와 짙은 녹색의 식재는 지금까지 쌓여온 역사적 과정을 보여줄 수 있게 함께 배치했다.
버스킹 가든
건물 서측 버스킹 가든은 이름의 의미처럼 연중 야외 공연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 객석이 필요했다. 카페와 인접해 산책로 모든 구간에 앉아 쉬며 식음료를 즐기 기에 좋은 외부 공간이 되도록 조성했다. 전면부 문화 예술 산책로 구조물이 상징적인 조형에 가깝다면 버스킹 가든 구조물은 매우 기능적인 앉음벽이다. 산책로 양측의 식재 설계를 달리해 이용자들의 흥미를 유도하고자 했다. 건물에 인접한 부분의 식재 설계는 천리포 수목원과 협업해 드라이 가든으로 조성했다.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관목 및 초화류에 조형석을 같이 배치 해 이색적인 정원의 장면들이 이어지게 했다. 다른 한 측면은 길을 따라 배롱나무를 열식해 건물 정면의 흐름이 따라 들어오게 했다. 전면부의 소나무를 유지한 것과 같이 그 소나무 뒤에 있던 배롱나무도 그대로 존치했다. 이 배롱나무를 따라 이용자의 시선과 발걸음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며 버스킹 가든으로 자연스럽게 진입하게 했다. 공연 시 관람 시야를 방해하지 않게 하부 식재는 최소화했다.
갤러리 가든
동측부 갤러리 가든은 곳곳에 산개됐던 조형물을 재배 치한 조각정원으로 계획했다. 개별적으로는 주목할 만 한 조형물들이었지만 체계 없이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어 빛을 발하지 못했다. 한 장소에 모아서 각 조형물뿐 아니라 그것을 담아낸 공간도 함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했다. 산책로와 식재, 조형물이 조화를 이루며 연계될 수 있게 고민했고, 한번에 모든 작품이 보이지 않게 했다. 한 가지 요소를 감상한 뒤 언뜻 보이는 다음의 요소가 호기심을 자극하되, 전체가 한꺼번에 노출되 어 걸음의 흥미가 떨어지지는 않도록 시퀀스를 조율했다. 조형물 배면에는 벽을 두어 다른 요소들로 흩어질 수 있는 시선을 붙잡아 작품 자체에 대한 집중도를 높였다. 분비나무, 귀룽나무, 노각나무 등 한국 자생종 중 심으로 식재를 구성해 또 다른 매력의 장면을 선사하면서 우리 본연의 숲 경관을 보여주는 정원으로 표현 했다. 다간형 교목과 대관목을 활용해 조형물로 시선을 조정하는 동시에 주어진 규모보다 더 깊은 공간감을 부여하고자 했다. 수수하고 청초하다는 누군가의 묘사가 마음에 들었다.
리듬감을 만드는 콘크리트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소재의 선정이 중요했다. 현재까지 이어온 가장 굳건한 정체성이 더 소중한가. 새로운 출발을 알리며 생신한 야심이 더 앞서야 하는가. 양단의 가치에 대해 기업 내부의 의견이 분분했고 그 어느 하나 틀린 것은 없었기 때문에 결국 두 가지 모두를 담아야 했다. 틀에 담아 형태를 만드는 제작 방식은 철의 주조와 유사하지만, 질감과 색 상은 전혀 다르기에 철을 연상시키지 않는 콘크리트를 활용했다. 이 재료와 맞붙을 상록수 식재 구간의 짙은 초록색을 고려해 색채적인 대비도 의도했다. 앉음벽 역 할을 해야 했기에 앉는 구간과 기대어 설 수 있는 구간의 단면을 작성한 뒤 평면의 선형과 연동시켜 3차원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단면과 평면, 구간의 관계를 조작해 조형의 움직임과 형상을 조정했다. 시공사와 협의 후 현장에서 타설하며 디자인적 의도뿐 아니라 현장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변수에 대응하며 기다란 리듬감을 다듬어 나갔다.
브랜딩 스케이프
각 기업은 고유한 유무형의 가치와 자산들을 지니고 있다. 이미 겉으로 드러난 것들도 있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듣는 이야기에서 채집하는 것도 있다. 이는 머리와 마음에 담겨있는 추상적 개념일 수도 있고, 시간이 쌓여 축적된 철학적 태도일 수도 있으며, 우리가 다 루는 공간과 무관한 산업적 생산물일 수도 있다. 이를 잘 듣고 읽어내며 해석하여 실재하는 땅에 공간으로 내려놓는 게 조경가의 역할이다. 누군가가 마음에 품고 있는 비전과 내러티브를 공간으로 구현해 인상을 만들 어내고 이용자들이 다가올 수 있게 계획한다. 새로운 장소의 경험은 방문자에게 다시금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직간접적으로 그 너머에 있는 브랜드의 존재를 인식하게 한다. 이처럼 우리는 디자인을 통해 브랜드와의 관계를 형성하는 ‘브랜딩 랜드스케이프’를 추구하며, 지금도 현재 진행형에 있다.
글 얼라이브어스
조경 설계 얼라이브어스
건축 설계 포스코A&C
시공 포스코E&C
발주 포스코
위치 서울시 강남구 테헤란로 440
면적 17,454.80㎡
완공 2023. 8.
사진 김종오
얼라이브어스(ALIVEUS)는 현대 도시를 형성하는 데 필수적인 건축, 조경, 도시재생 및 문화 계획을 기반으로 하는 디자이너 그룹이다. 단단한 기준, 관철하는 감각을 중심으로 프로젝트를 풀어나간다. 우리는 서로의 특성을 인식하고 평등한 소통과 유연한 관계를 바탕으로 한 창의적인 융합을 통해 지속적인 시너지를 만들어 가며 균형점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통해 학제간 디자인을 기반으로 한 하이엔드 디자인을 구현한다.
-
퍼블릭 가산
Publik Gasan
대상지는 가산동의 산업 단지로 서울에서 손꼽히게 북적이는 지역 중 하나다. 가산동과 G밸리 사이에 위치한 복잡한 대상지에 자연을 통해 사람들의 숨통을 틔어줄 공간을 제공해주고자 했다. 삶의 터전이자 문화, 예술, 자연이 공존하는 모두의 공원과 나만의 정원을 함께 계획함으로써 퍼블릭 가산이 도심 속 모두를 위한 숲의 섬이 되기를 기대했다.
도심에서 찾기 어려운 대규모 녹지, 높고 자연스러운 수형의 나무들이 형성하는 깊은 숲을 먼저 떠올렸다. 숲은 도심에서도 여유롭고 편안한 휴식을 가능하게 한다. 좁은 숲길을 걸으며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하며 안락함을 느끼는 시간, 사색과 치유의 시간 등 다양한 경험이 가능한 조경 공간을 구성했다.
두 개의 공개공지
퍼블릭 가산의 남쪽과 북쪽에 위치한 공개공지는 방문객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공간이다. 일종의 진입 광장의 역할을 하는 두 공개공지를 세 가지 기능에 주목해 설계했다. 첫 번째 기능은 오픈스페이스다. 가로변과 접한 전면 공간을 활용해 도심 내 열린 공간을 마련하고자 했다. 두 번째는 활기 넘치는 공간이다. 각진 건물 사이를 관통하는 곡선형 산책로를 통해 공간에 활기를 부여하고, 주변으로 계절마다 변화하는 다양한 식생을 배치해 생동감 넘치는 경관을 연출하고자 했다. 세 번째는 숲과 그늘이다. 휴식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울창한 숲이 드리우는 넉넉한 그늘을 제공하고자 했다.
*환경과조경445호(2025년 5월호)수록본 일부
글 이승주 팩토리 엘 실장
크리에이티브 디렉팅/브랜딩 제이어드바이저리(JAD)
조경 설계 팩토리 엘(factory L)
건축 설계 제이어드바이저리, 희림종합건축사사무소
조명 설계 이온SLD
위탁 가산웰스홀딩스
시공 현대건설
위치 서울시 금천구 가산동 60-26
면적
연면적: 258,868.69㎡
대지 면적: 30,180㎡
사진 최용준, JAD, 팩토리 엘
팩토리 엘(factory L)은 2006년 이홍선이 창립한 설계사무소다.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건축과 조경이 결합된 공간 창출을 시도하고, 디자인과 시공을 연계한 조경을 실현해왔다. 대표작으로는 시몬스 팩토리움, 시몬스 테라스, 현대지식산업센터 퍼블릭 가산, 씨엔씨티에너지, 플레이스 캠프 제주, 산운 SK아펠바움, 논현 아펠바움, 유엔빌리지 루시드하우스, 유엔빌리지 빌라드그리움, 루시드에비뉴, 경희대학교 걷고 싶은 거리가 있다.
-
유원재
Youonejae
유원재는 잊힌 한국식 온천 문화 부활의 마중물 역할을 하겠다는 사명을 안고 태어났다. 유원재 조경은 전통과 지역에 기반을 둔 경관이 어떻게 21세기 한국식 온천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은유적 대답이다. 유원재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의 핵심은 온천에서 어떻게 전통과 지역 감각을 녹여내고 우리 삶의 일부가 될 수 있게 하는지다. 의미를 넓히면, 근대가 순수를 찾기 위해 삭제한 시공간을 되찾는 방법에 대한 실체적 연구이기도 하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접근이 좋겠다. 그런데 왜 은유인가.
인간은 전체 감각 세포의 60%가 시각에 할애된 시각화에 특유된 포유류다. 이미지를 기반으로 사고한다고 해도 큰 무리는 아니다. 눈으로 들어오는 시각 정보들은 뇌에 이미지로 저장되는데, 인간의 사고력은 유사성을 가진 몇 이미지들을 중첩시켜 떠올릴 수 있다. 덕분에 우리는 “그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행을 동물에서 식물로의 변신이 아니라 상상력을 자극하는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인간만이 가진 특별한 이 능력을 은유라 부른다. 은유는 문자를 만나면 시가 되고, 선율이 더해지면 노래가 된다. 그리고 땅을 만나면 조경가 정영선이 말하는 땅에 쓰는 시, 조경이 될 것이다.
온천이라는 무대 위에 은유라는 장르로 전통과 현대, 자연과 사람을 주제로 한 음악을 합주할 기회를 얻었다. 공연의 악기는 변치 않았고 변치 않을 것들인 이 땅의 물, 돌, 풀이다. 고리타분한가. 음악은 피타고라스 음률 12개로 무한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지 않나. 물, 돌, 풀이 만들어낼 은유의 경관은 끝이 없다.
*환경과조경445호(2025년 5월호)수록본 일부
글 장혁준 비오이엔씨 실장
조경 설계·시공 비오이엔씨(BEOH)
건축 설계 와이그룹(Y GROUP)
인테리어 C.C.P, 와이그룹
조명 설계 비츠로앤파트너스(Bitzro&Partners)
위치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주정산로 6
면적 12,000㎡
완공 2023. 9.
사진 장혁준, 박영채
비오이엔씨(BEOH)는 감각의 명료한 구축을 추구하는 조경설계사무소다. 작은 정원에서부터 도시 규모에 이르는 다양한 공간을 다루고 있다. 설계는 물론이고 그것의 구현을 가치 있게 생각해 시공, 감리, 관리까지 공간 만들기의 모든 업역을 가로지르며 이상을 실천하고 있다.
-
롯데 프리미엄 아울렛 동부산점
LOTTE Premium Outlets Dongbusan Store
흥미로운 대화
“쇼핑몰은 공원의 새로운 경쟁자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두 공간의 성격은 분명 다르지만, 현대 도시민의 다양한 욕망을 충족시키려 한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으니까요.”
부산역으로 향하는 택시 안, 롯데 프리미엄 아울렛 동부산점 외부 공간 리노베이션을 위한 현장 점검을 마친 뒤 프로젝트 담당자인 권정삼 책임과 나눈 대화다. 우리는 설계부터 현장 감리까지 10개월이란 긴 시간을 함께했다. 공식적인 회의를 넘어 때로는 현장에서, 때로는 이동 중에 자연스럽게 의견을 나누었다. 프로젝트와 관련된 논의가 끝나도 대화는 멈추지 않았다. 조경을 둘러싼 고민과 아이디어는 끝없이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생각이 조금씩 확장되기도 했다.
쇼핑몰과 공공 조경이라는 상반된 개념을 두고 각기 다른 시각을 공유하며 그 차이를 음미했다. 쇼핑몰은 소비와 유희를 중심으로 형성된 공간이고 공원과 광장은 휴식과 공존을 위한 장소지만, 두 공간 모두 현대인의 욕구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프로젝트 방향성에 대해서는 의견을 맞춰가며 조율했지만 이외 논의에서는 차이 속에서 새로운 시각을 발견하는 과정이 더욱 흥미로웠다.
몰링(mailling)의 흐름이 만드는 동선
북측 광장은 중앙의 비상 차로로 인해 녹지대가 네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이로 인해 방문객들은 매장 앞길 대신 중앙 길을 따라 이동하게 됐고 매장 입구와의 연결성이 약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중앙에 녹지대를 만들어 동선을 조정했다. 방문객들을 자연스럽게 매장 입구 방향으로 유도했고, 시선 역시 자연스럽게 매장을 향하도록 했다.
아울렛 내 모든 동선은 쇼핑 경험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됐다. 특히 550m 길이의 타원형 입체 동선은 두 개 층의 상업 공간을 순환하며 주요 광장과 내부 공간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구조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진입 동선과 만나는 지점에는 세 개의 라운지형 휴식 공간과 엘리베이터 중심을 둘러싼 여섯 개의 플랜터형 정원을 배치해 쇼핑 동선 속에서도 휴식을 고려한 공간을 조성했다.
아홉 개 주요 공간의 전체적 톤은 일관성을 유지했다. 화강석 플랜터, 목재 벤치, 다층 구조 식재를 기본 요소로 삼아 쇼핑 공간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구성만으로 정제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 공간은 단순한 휴식처를 넘어 쇼핑객들이 둘러본 제품 중 어떤 걸 선택할지 고민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는 장소로 기능한다.
VMD을 위한 적절한 비움
아울렛은 1년 내내 계절과 이벤트에 맞춘 테마형 공간을 제공한다. 비주얼 머천다이징VMD은 단순히 매장 내 전시에 국한되지 않고, 공간을 활용한 이벤트를 통해 고객 경험을 풍부하게 하고 브랜드와 매장의 매력을 극대화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남측 광장, 북측 광장, 이를 잇는 중앙 보행몰은 아울렛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세련된 분위기와 함께 이벤트, 전시, 마켓 등을 수용할 수 있도록 계획됐다. 양측 광장은 중앙 보행몰에서 초점 경관을 연출하는데, 북측에는 명품 매장이, 남측에는 실내형 쇼핑몰 입구가 자리하고 있다. 이를 고려해 축선상에 빈 포장 공간과 눈높이보다 낮은 녹지와 시설물을 배치해 개방감을 확보했다.
남측 광장 중앙에 휴식과 팝업, 전시와 공연이 가능한 복합 활용 공간을 마련했다. 공간 중심에는 450㎜ 높이의 팔각형 플랫폼(스테이지)을 조성했다. 이는 에비뉴엘 잠실점의 팝업 공간 ‘더크라운The Crown’을 변용한 디자인이다. 특히 해안가에 입지한 대상지의 특수성을 고려해 스테이지 둘레에 3cm 높이의 미러폰드를 적용했고, 공간을 활용할 때 전기선이 노출되지 않도록 페데스탈 포장 하부에 전기 인입을 가능하게 했다. 중앙 보행몰에 다섯 개의 녹지대를 설치했는데, 사이 공간에 시즌형 마켓 가판대와 키오스크, 전시물을 설치할수 있도록 녹지대를 적절한 간격으로 배치했다.
북측 광장은 두 개의 2단 플랜터가 중앙의 빈 공간을 감싸는 형태로 구성했다. 이 세 공간은 고흥석 잔다듬 마감의 포장재로 연결되어 단일 톤의 정제된 분위기를 띤다. 특별한 VMD 시설이 없을 때는 매장의 정체성이 강조되며 이벤트와 전시가 들어서면 풍성하고 활기찬 쇼핑몰 풍경이 완성된다.
특별함을 위한 도어매트 포장
도어매트 포장은 쇼핑몰의 매장 입구를 따라 배치되는 특별한 포장 방식으로, 공간의 전이를 자연스럽게 유도하며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마치 문 앞에 놓는 러그처럼 실내와 실외를 부드럽게 연결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폭 1.6m, 길이 0.8m인 쇼핑몰 내부 보행 공간보다 더 넓은 영역에는 포천석 계열의 밝은 화강석을 사용해 입구 주변을 시각적으로 강조했다. 쇼핑몰이 두 개 층이라 자연광이 충분히 들어오지 못하고, 중앙 명품 스트리트가 상대적으로 어두운 점을 고려한 디자인적 접근이다. 밝은 석재가 매장 내부 조명을 반사하면서 공간 전체를 더 환하고 개방적인 분위기로 조성한다.
보행로에는 회색 계열의 고흥석을 사용해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매장 입구를 따라 이어지는 두꺼우면서 밝은 회색 선과 보행 공간을 구성하는 넓고 좀 더 어두운 회색 면이 대비를 이루며 쇼핑몰의 공간 구조를 정돈한다. 이런 디자인 요소들은 단순한 포장 디테일을 넘어 쇼핑몰 내부의 빛과 동선, 분위기를 조화롭게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행운의 가시나무
식재 설계 과정에서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었다. 몰링하는 방문객들에게 풍부한 녹음을 제공하기 위해 서로 다른 높이의 지엽이 풍성한 수목들을 다층 구조로 식재하고, 하부에는 1~3㎡ 규모의 패턴 식재를 적용했다. 최근 트렌드인 자연형 식재 방식이다. 하지만 이런 식재가 브랜드 간판을 가리고 유지·관리가 어렵다는 의견이 많았다.
설계사에게 유지·관리가 당연히 필요하고 쇼핑객이 이동하면서 시점이 바뀌면 간판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고 설득했지만, 돌이켜보면 이는 설계자의 논리일 뿐이었다. 클라이언트 요구를 다시금 고려해 식재 설계를 보완했다. 적절한 밀도의 잎을 가진 수목을 선정하고 중층의 아교목과 대관목을 최소화했다. 하부 식재는 플랜터 크기에 맞춰 매스 식재와 패턴 식재를 혼용했다.
가장 고민스러웠던 부분은 상록활엽수의 비율과 수종 선택이었다. 당시 남부 지역에서 활용할 수 있는 상록 활엽수는 녹나무, 후박나무, 감탕나무, 참식나무, 동백나무 정도였다. 대부분 잎이 두껍고 짙은 녹색이며 지엽이 촘촘했다. 보다 밝고 가벼운 느낌의 공간을 연출하기 위해 옅은 녹색의 하늘하늘한 수목이 필요했지만, 겨울철을 고려해 70% 이상을 상록교목으로 구성해야 했다. 이에 녹나무와 후박나무를 전정해 유사한 분위기를 내기로 하고 적합한 수목을 찾아 나섰다. 운 좋게도 후박나무를 보러 간 현장에서 가시나무를 발견했다. 농장에서 발주처를 설득한 끝에 마음에 드는 나무들을 붉은 노끈으로 표시했고, 끈을 묶는 순간 마치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다시 조정해야 했던 식재 설계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끝나지 않은 대화
대형 쇼핑몰은 공간 구조와 동선이 도시공원과 유사하며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공공 성격을 지닌다. 다양한 활동과 공동의 감각을 형성하는 공간으로 기능하면서 최근 어느 비평문(『환경과조경』 2025년 2월호)의 주장처럼 ‘유사공원(類似共園)’, 즉 공공성과 사적 소유 경계를 넘어선 공동 경험의 공간으로 해석될 수 있다. 렘 콜하스Rem Koolhaas가 말해 온 “쇼핑은 인류 공공 활동의 마지막 남은 형식일 것”이라는 주장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오늘날 도시 환경에서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프로젝트가 마무리되고 몇 개월 후, 사무실 근처 중국집에서 고량주 한 잔을 기울이며 우리는 다시금 쇼핑공간과 공공 공간의 경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치 쇼핑몰을 거닐 듯, 대화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며 또 다른 주제로 이어졌다.
글 CA조경기술사사무소
조경설계 총괄 CA조경기술사사무소(조용준)
조경설계 CA조경기술사사무소(조용준, 서유진, 신원재, 허지선)
조경 디자인 감리 CA조경기술사사무소(조용준, 서유진, 신원재, 허지선)
조경 시공 공간시공 에이원
발주 롯데백화점
위치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 기장해안로 147
면적 4,600㎡
완공 2024. 8.
사진 안상순
2004년 설립된 CA조경기술사사무소는 작은 공간의 설계부터 도시 스케일의 계획에 이르는 국내외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해왔다. 창의적인 생각으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며, 공공을 위한 의미 있는 장소를 만들고자 한다. www.cadesign.co.kr
-
양주옥정 파티오포레
YangJu Okjeong Patioforet
힐스테이트 양주옥정 파티오포레(이하 파티오포레)는 양주 옥정 신도시에 위치한 블록형 단독주택 용지에 조성된 타운하우스로, 독립된 주거 공간과 공동 이용 시설을 결합한 새로운 주거 형태를 제시한다. 건물 대부분이 세 개 층과 다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세대에서 정원과 테라스를 즐길 수 있다.
파티오포레의 조경에 서울 외곽 저층 주거를 선호하는 수요층이 자연과 조화된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한다는 점을 반영하고자 했다. 따라서 고층 아파트에서 경험할 수 없는 자연과의 밀접한 연결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고, 이를 위해 SWA는 자연 속 예술로의 초대(Invitation to the Arts in Nature)라는 콘셉트를 설정했다.
외부 공간은 여섯 개 블록으로 구성되며, 각 블록의 경계는 근린공원이나 녹지와 연결되어 자연과 어우러진 단지를 만든다. 주변의 자연경관에서 돌, 숲, 산, 공원이라는 디자인 콘셉트를 도출해 차별화된 경관을 조성했다. 이러한 조경 요소를 통해 입주민들은 자연을 가까이 느끼고 정원의 예술적 가치를 경험할 수 있다.
마운틴 빌리지, 산의 조형이 정원이 되다
단지에서 길을 따라 걸으면 대상지를 두른 산의 능선이 보인다. 이 풍경을 재해석해 산의 능선이 중첩된 형상을 연상시키는 공간을 연출했다. 산이라는 규모가 큰 공간을 끌어옴으로써 정원의 깊이감과 신비로움을 더했다.
어린이 놀이터와 놀이 정원: 8블록의 어린이 정원에는 마운틴 빌리지의 이미지에서 모티브를 얻어 사선을 활용한 디자인을 시도했다. 공간을 사선으로 분리해 삼각형의 놀이 공간과 휴게 공간을 효율적으로 배치했으며, 고보 조명을 활용해 역동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데크 라운지: 주민 공동 시설 앞에 마련한 데크 라운지는 목재 데크를 활용한 자연 친화적 커뮤니티 쉼터다. 느티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수목을 식재해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풍부한 녹음을 제공한다. 녹음을 즐기며 주민들이 자유롭게 앉거나 누워 편안하게 휴식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환경과조경443호(2025년 3월호)수록본 일부
글·사진 엘피스케이프
조경 계획 SWA(San Francisco)
조경 설계 엘피스케이프, 라모디자인그룹
건축 설계 디에이그룹 엔지니어링 종합건축사사무소
시공 현대건설
조경 식재 정한조경
조경 시설 동영조경
놀이 시설 플레이잼
시행 미래개발2, 무궁화신탁, 미래인
위치 경기도 양주시 월정로 57 일대
규모 809세대
대지 면적 165,117.60㎡
완공 2024. 6.
엘피스케이프(LPSCAPE)는 부지의 고유성을 맥락 분석과 깊이 있는 해석을 통해 발굴하고, 이를 재구성하여 그 장소만의 상징적 가치와 특별함을 창출한다. 독창성을 갖추되 주변 환경과의 균형을 고려하여 조화를 이루는 디자인을 지향한다. 다양한 국가에서 수행한 프로젝트 경험을 토대로 분야의 경계를 넘어서는 확장된 조경설계를 통해 변화하는 미래 사회에 대응하는 공간을 구현하고자 한다.
SWA 그룹은 조경, 기획, 도시설계 등 전문 분야에서 선도적 역할을 해왔다. 다양한 프로젝트에서 인간과 경관이 서로 교류하는 방식을 정의하는 디자인을 선보이고, 장소와 지역적 맥락의 힘을 믿으며 대상지의 본질과 문화를 디자인에 담는다. 인간과 자연, 예술과 생태 사이에서 교집합을 만들고,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건축과 자연이 결합해온 방식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
라모디자인그룹의 ‘라모’는 랜드스케이프와 모자이크의 합성어(landscape+mosaics)로 우리의 삶을 채우고 있는 많은 경관과 조각의 조합을 뜻한다. 2003년에 설립되어 마스터플랜부터 조경 및 도시계획, 주거 등 다양한 규모와 유형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대지가 들려주는 소소한 속삭임, 사회적 요구, 변화하는 삶을 담아낼 수 있는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설계를 하기 위해 노력한다.
-
올림픽파크 포레온
Olympic Park Foreon
최대 규모 재건축 단지
재개발 추진부터 준공까지, 부동산 뉴스에 등장하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이슈가 가득하고 관심을 많이 받은 올림픽파크 포레온은 둔촌주공아파트 143개동 5,930세대를 85개동 12,032세대로 재건축한 단지다. 약 17만㎡녹지에 교목 1만 6천 주, 관목 15만 5천 주, 초화 100만 본이 식재됐다. 티하우스와 퍼걸러 60여 개, 수경 시설 16개, 어린이 놀이터 18개(물놀이터 6개), 주민 운동 시설 12개소, 휴게 정원 30여 개소가 설치됐고, 옥상 녹화 면적은약 2만2천5백㎡에 달한다. 4개 시공사와 4개 설계 본부가 1년에 걸쳐 조경 특화설계를 진행하고, 시공을 하면서 현장 상황과 요청에 맞추어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의 결과를 위해 함께 설계를 조율했다. 올림픽파크 포레온은 단일 공동 주택 단지로는 가장 크고, 가장 많은 조경 공사비는 물론 역대 최대의 설계·시공 전문가를 투입해 완성한 단지다.
올림픽파크 포레온
올림픽공원은 서울에서 손꼽히는 대형 공원이며 강동구 주민의 생활권 공원이다. 단지명인 올림픽파크 포레온은 “올림픽공원과 푸른 자연 위에 자리한 따뜻하고 평온한 곳”이라는 의미로, 올림픽공원을 향한 둔촌주공아파트 주민의 각별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지점이다. 이에 주목해 올림픽공원의 랜드마크를 단지의 조경 공간에 옮겨 담아 단지와 공원의 관계성을 높이고 고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을 설계 목표로 삼았다. 넓은 단지의 장점을 활용해 다양한 자연의 경관을 담는 ‘메가 네이처 파크(Mega Nature Park)’라는 콘셉트로 조경 계획을 진행했다.
단지를 일곱 개 선형 공간으로 나눈 뒤 세부 공간을 계획했다. 단지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중심 클러스터는 메가 포레스트와 메가 그린필드로 구성된다. 단지를 동서 방향으로 관통하는 축인 포레스트웨이와 스트림웨이는 자연 그대로의 녹음을 단지 내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레벨 차가 있는 곳에는 선형 마당인 스케이프라인과 비스타라인을, 올림픽공원과 단지를 연결하는 대형 보행로에는 아티스틱 애비뉴를 조성했다.
메가 포레스트
둔촌동 습지를 포함해 생태경관 보전지역과 경계가 맞닿아 있는 단지 동측은 주동의 층수가 낮고 인동간격이 충분하다. 이를 활용해 녹음이 단지로 흘러들어와 자연 그대로의 숲과 정원이 된 듯한 공간을 계획했다.
에버그린가든: 메가 포레스트의 핵심 공간인 에버그린가든은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숲을 콘셉트로 한 공간으로 대형 팽나무 숲, 넓은 잔디밭 등으로 구성된다. 배롱나무 대형목과 아름다운 조형미를 보여주는 소나무는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한다.
포시즌가든: 팽나무 대형목을 중심으로 넓은 잔디밭과 티하우스, 데크가 조화를 이루는 안락한 커뮤니티 공간을 마련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함께 바뀌는 자연의 색채를 담아내 그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고요하고 평온한 휴식처로 조성했다.
메가 그린필드
단지를 가로지르는 녹지를 수목으로만 가득 채우는 것을 경계했다. 비움과 채움 공간을 구분해 리드미컬한 오픈스페이스 공간을 만듦으로써 주동과 주동 사이의 조경 공간이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했다.
거석원(巨石園): 돌 사이에서 자란 소나무가 있는 바위산을 등산하다 보면 험한 환경을 이겨내는 식물의 생명력, 소나무가 바위산을 짊어진 듯한 강인함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돌과 소나무의 아름다움을 단지 내에 표현하고자 했다. 울주, 횡성 일대에서 모양이 자연스럽고 야생 들풀이 피어난 거석을 수집해 레벨차가 생기는 단지 외곽 경사면에 배치하고 조형 소나무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했다.
메가 그린필드: 단지 중앙의 메인 외부 공간인 메가 그린필드는 넓게 펼쳐진 잔디광장이다. 독특한 형태의 수경 시설인 아이파크 워터 오브제, 조형적 티하우스, 특색 있는 형태로 시선을 끄는 대형목이 너른 잔디밭과 어우러져 있다.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조명을 통해 야간에도 이용할 수 있는 매력적인 공간으로 계획했다.
예원(藝園, Artistic Bosque): 공간 강조와 배경의 구분을 위해 주동 사이에 위치한 사각형의 공간을 몬드리안 방식으로 분할했다. 레이아웃의 특징이 두드러지도록 조형 퍼걸러, 잔디마당, 산책로, 수목 식재 패턴을 평면 속 직선과 맞추어 배치했다. 이로써 평면을 구성하는도시적 선형이 3차원 공간을 경험하는 이용자에게도 전달된다. 정형적으로 식재된 수목 사이의 좁은 산책로를 따라 진입하면 넓게 열린 잔디광장을 만나게 된다. 공교롭게도 이 오픈스페이스 사방을 야생적인 분위기의 신단풍 숲이 감싸고 있어 이용자는 열려 있지만 동시에 위요감을 느끼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신단풍 숲 하부에는 골재 크기가 작은 쇄석을 포설하고 작은 초화류를 심었다. 더불어 정원형 의자를 배치해 이용자가 자유롭게 접근해 원하는 방식으로 휴식하도록 유도했다. 총림을 배경으로 놓인 비정형의 3D 프린팅 벤치, 이끼를 품은 자연의 돌, 저녁을 밝히는 갈대등, 공간 확장 효과를 내는 스테인리스 미러월이 감각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일상 속 예술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 아름다움을 인정받아 다양한 상(2024 K-디자인 어워드 위너 및 2024 우수디자인상품 선정 및 동상 수상)을 수상했다.
둔촌진경원(遁村眞景園): 9호선 둔촌오륜역에서 단지로 들어서 제주 팽나무길을 지나면 둔촌진경원이 펼쳐진다. 산을 표현한 가벽을 배경으로 식재된 왕벚나무 대형목과 주변을 둘러싼 석가산이 어느 깊은 계곡 주변을 거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한국영상대학교 교수진과 협업을 통해 계획한 프로젝션 맵핑 미디어 아트를 석가산에 맵핑해 야간에는 색다른 경관이 연출된다.
비스타라인
비스타라인은 강동대로에서 단지 출입구를 지나 풍성로에 이르는 남북 통경축이다. 이 통경축의 시작점인 북쪽과 남쪽에 장방형의 오픈스페이스를 조성했다.
송류원(松流園): 비스타라인 북측에 위치한 송류원은 약 200m 길이의 잔디마당이다. 잔디마당의 녹지와 포장의 경계를 허물고 아름드리 소나무를 심었다. 소나무라는 수종의 조형미와 한국의 미가 공간에 잘 드러나도록 식재 위치를 선정하고 사계절 푸르른 경관을 느끼게 했다.
북측 진입부에는 1.5m 단차를 활용한 캐스케이드를 조성했다. 단지로 들어설 때 들리는 청량한 물소리는 앞으로 펼쳐질 공간에 대한 기대감을 한층 더 높이는 효과를 낸다. 캐스케이드와 소나무에 둘러싸인 2층 티하우스에서는 다채로운 경관을 다양한 방향에서 관망하고 휴식할 수 있다.
남측 입구에는 둔촌주공아파트의 흔적인 ‘둔촌축제 기념비’를 설치했다. 기념비 주변에 대형 배롱나무를 식재하고 바 테이블, 통석 벤치 등 휴게 시설을 배치했다. 이곳에서 주민들은 백일 동안 화려하게 피어 있는 배롱나무 꽃을 감상하며 서로 소통하고 추억을 나누게 될 것이다.
라이브러리 앤드 가든(Library & Garden): 비스타라인 남측 잔디마당에는 성균관대학교 최혜영 교수가 디자인한 정원을 조성했다. 주민 편의 시설 인근이라는 점을 고려해 정원으로 이루어진 도서관이라는 콘셉트로 설계됐다. 이 커뮤니티 정원에서 주민들은 사색하며 일상의 지친 심신을 달래고 서로 교류하며 생각과 지혜를 나누게 된다. 정원 맞은편에는 연못에 담긴 듯한 2층의 티하우스를 설치했다. 이곳에 올라 넓은 잔디마당을 배경 삼아 정원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포레스트웨이
포레스트웨이는 강동구 생태 자연의 중요 요소인 일자산의 숲 경관을 단지 내로 잇는 녹지축이다. 일자산~올림픽파크 포레온~올림픽공원~성내천~한강으로 연결되는 녹지 흐름에서 한 축을 담당하는 공공보행통로가 될 것이다.
녹음이 흘러들어오는 단지 동측에서 연결된 소나무 숲길에 한 폭의 진경산수화 같은 자연을 생생하게 구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석가산과 세 개의 폭포가 흐르는 연못, 그 규모에 어울리는 2층의 티하우스를 조성해 웅장한 분위기의 쾌적한 공간을 만들었다.
지형으로 인해 공공보행통로 내 데크 층에 단차가 발생하는데, 이를 자연스럽게 극복할 수 있도록 곡선형 보행로 주변으로 자연을 닮은 휴게 정원인 슬로프 가든을 조성했다. 물, 돌, 곡선 등 자연의 요소를 단순화해 다양하게 조합한 미술품 ‘바람의 탑’을 중심으로 바람에 흩날리는 초화류를 심고 화산석을 배치해 거친 야생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공공보행통로를 따라 단지 서측으로 이동할수록 짙은 소나무 향을 느낄 수 있다. 소나무로 가득 찬 숲 사이를 굽이굽이 흐르는 유려한 곡선의 산책로를 조성했다. 산책로를 느리게 걸으며 오감으로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산책로 곳곳에 목재 데크와 곡선형 앉음벽 등을 설치했다.
스트림웨이
스트림웨이는 단지 외곽의 둔촌동 습지를 포함한 생태 경관 보전지역의 우수한 자연 요소를 테마로 한 공공보행통로다. 공공보행통로를 따라 다양한 수공간을 배치해 단지의 동서를 자연스럽게 연결했다.
습지를 마주하고 있는 단지 경계에서 시작된 정형적 형태의 폰드 세 곳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폰드와 다양한 수목들 사이에서 풍부한 삶의 감성을 느끼기를 바랐다. 폰드 중심에 위치한 티하우스에서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즐길 수 있다.
공공보행통로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면 풍성한 단풍나무 숲길을 만날 수 있다. 이 숲길을 따라 배치한 자연형 계류 종점에 2층의 티하우스를 배치했다. 티하우스 지붕에서 떨어지는 물의 모습이 이곳을 단지 내 핫스폿으로 만들 것으로 기대된다.
스트림웨이의 서쪽 끝에는 유려한 곡선의 중첩이 돋보이는 조형 폰드와 공중에 떠 있는 돌(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워터 라운지인 투영의 정원을 조성했다. 해가 뜰 무렵에는 떠오르는 햇살이 돌 뒤에서 흩뿌려지는 풍경이 만들어지고, 저녁에는 몽환적인 분위기의 조명이 독특한 경관을 연출해 물의 정원이자 빛의 정원으로 기능하게 된다.
아티스틱 애비뉴
아티스틱 애비뉴는 강동대로와 양재대로가 만나는 사거리에서 단지로 진입하는 입구에서 출발하는 보행로다. 롯데월드타워와 올림픽공원을 잇는 경관축을 단지로 끌어들이는 중심보행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두 그루의 큰 나무를 형상화한 높이 12m의 미술 작품을 설치해 단지의 시작을 알리는 랜드마크로 삼았다.
송경원(松徑園): 아티스틱 애비뉴가 단지에서 레벨이 가장 낮은 공간이라는 점을 활용해 중후한 무게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설계했다. 이를 위해 채도가 낮은 마감재를 사용하고, 웅장한 분위기의 소나무를 심고 하부에 야성적이고 거칠게 다듬은 바위를 배치했다. 탁 트인 잔디마당에는 폭포형 수경 시설과 오픈형 티하우스를 설치하고, 고풍스러운 소나무가 식재된 길을 조성했다. 티하우스에는 공동 주택 최초로 AI 기술을 활용한 공간별 실시간 음악 큐레이션 서비스 기술을 적용했다.
보타닉 가든-30여 개의 휴게 정원
레스팅가든: 칠엽수를 단일 수종으로 군식해 집중력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반면 하부에는 다양한 초화류를 식재해 다채로운 경관의 변화를 느끼게 했다.
미스틱가든: 과거 둔촌주공아파트 4단지에 있던 메타세쿼이아 숲길을 재현했다. 더불어 아름다운 암석을 배치하고 미스트 분수를 곳곳에 설치해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휴게 정원을 조성했다.
힐링웨이가든: 외곽 산책로의 시작점에 있는 힐링웨이가든을 둔촌습지와 연계해 약 100m 길이의 자연형 생태연못으로 조성했다. 단풍나무 가로수길, 야생 초화가 거칠게 자란 암석원을 따라 산책과 휴식을 즐길 수 있다. 외곽 경계의 단차를 활용해 단지 외부의 자연을 시각적으로 끌어들여 숲속을 산책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성읍원(城邑園): 팽나무 숲 사이로 데크 길을 의도적으로 구불구불하게 놓아 바쁜 일상 속 느림의 미학을 즐기는 공간을 조성했다. 무심히 놓은 이끼석과 현무암 괴석이 곳곳에 핀 야생화, 팽나무와 어우러져 제주의 작은 마을에서 느낄 수 있는 여유로움을 자아낸다. 돌 틈 사이에 설치한 미스트는 숲속의 신비로운 경관을 연출하는데, 동틀 녘 나지막한 현무암 돌담에 앉아 있으면 안개 낀 제주의 고즈넉한 아침 분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휴휴원(休休園): 휴휴원에는 색조Hue(휴)와 쉼休(쉴휴)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이곳에서 청량한 물소리,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채로운 색감을 보여주는 식재, 그 중심을 지키는 바위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물위에 떠 있는 바위산을 뜻하는 부소담악(浮沼潭岳)에서 착안해 70m의 계류와 연못, 그 위에 네 개의 석가산이 떠있는 듯한 모습을 연출했다. 1m 정도의 레벨차를 활용해 계류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었다. 계류의 시작, 중간, 끝부분에 연못과 함께 조성한 휴게 공간에서 한국의 돌과 물이 만든 풍경 속에서 쉬고 또 쉬어갈 수 있다.
아뜰리에 가든: 몬드리안의 격자 추상 작품을 모티브로 설계했다. 산책길에 높낮이를 만들어 공간에 깊이감을 더하고 고풍스러운 고벽돌 플랜터로 분위기를 고취시켰다. 키 큰 소나무 숲을 조성해 숲속에 조성된 정원 같은 풍경을 연출했다. 정원을 방문할 때뿐 아니라 주동에서 내려다볼 때도 격자 추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정원을 완성했다.
사유원: 차분한 색상과 통일된 설계 언어를 통해 충분한 사유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을 설계하고, 마운딩과 수목을 더해 경관의 입체적 변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진회색 길 주변으로 짙은 녹색의 초화류와 관목을 밀식해 자연스러운 시선의 이동을 유도하고, 다간형의 배롱나무를 흩뿌리는 방식으로 식재해 자연스럽게 입체감을 형성했다. 이용자의 시선은 중첩되는 마운드의 선형을 따라가게 되는데, 특히 높은 마운드
로 둘러싸인 공간에 테이블 의자를 배치해 온전히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했다. 밝은 색의 휴게 시설과 갈대 조명, 가을이면 붉게 물드는 초화류의 모습은 조화로우면서도 아름다운 색채의 대비를 만들어낼 것이다. 예원과 더불어 2024 K-디자인 어워드에서 위너로 선정됐다.
안녕? 올림픽파크 포레온!
사라진 둔촌주공아파트를 기억하고 기록하고자 시작된 ‘안녕, 둔촌주공아파트’(2013~) 프로젝트를 이끈 주역은 이곳을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주민들이었다. 도시에서 ‘고향’이라는 단어가 아파트를 지칭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이곳에서 평생을 보낸 원주민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단지 내 기록관을 세워 40여 년간 쌓은 기억을 전시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에서 장소에 대한 주민들의 애착을 읽을 수 있다. 조경설계도 이에 발맞춰 기존 단지 외부 공간에 있던 의미 있는 시설을 보존해 다시 설치하거나 재해석해 새로 조성하는 노력을 더했다. 새롭게 변신한 공동주택 단지에서 살아가며 장소 애착을 갖게 될 또 다른 아파트 키드가 이 지면에 소개하지 못한 다른 조경 공간에서도 추억을 만들어가기를 바란다.
글 그룹한어소시에이트, 시공사 컨소시엄
사진 유청오
기본설계 서인조경
조경 특화설계 그룹한어소시에이트
시공 현대건설, 대우건설, HDC현대산업개발, 롯데건설
조경 시공 유일종합조경, 다원, 미담, HDC랩스, 동영조경, 아세아종합건설
휴게 시설 아르디온, 원앤티에스, 드림월드, 플레이잼
놀이 시설 스페이스톡, 아르디온, 플레이잼, 원앤티에스, 드림월드
석가산 미담, 수림원, 아세아종합건설
위치 서울시 강동구 둔촌1동 170-1 일대
규모 12,032세대
대지 면적 462,793.3m2
조경 면적 170,691.72m2
준공 2024. 11.
-
LH 파주가든
지난 9월 26일, 파주 운정중앙공원에서 LH 파주가든(이하 파주가든)이 공개됐다. 파주가든은 세종과 평택, 인천에서 열렸던 기존 LH가든쇼의 명맥을 잇는 공공 정원 프로젝트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올해부터 일상과 정원이 함께하는 공원 조성을 위해 추진 중인 ‘LH 도시정원프로젝트’의 첫 번째 프로젝트다. 이번 파주가든에서는 초청정원, 작가정원, 학생 및 주민참여정원 등 총 21개 정원이 조성됐다.
초청작가로는 김단비(숲을위한주식회사), 박종완(플레이스랩기술사사무소), 유충헌(스케이프360), 이상수(스튜디오이공일 조경기술사사무소)가 초대됐다. 작가정원에는 김초롱(세종정원연구소), 박성준(엠엠엠 디자인 스튜디오), 윤채영(숲을위한주식회사), 이정연(서브디비전), 이현승(사이트닷), 이호우(담), 박희수(디엘피 조경기술사사무소)의 작품이 선정됐다. 작가정원 공모는 올해 1월 23일부터 2월 23일까지 진행됐으며, 주제는 ‘도시의 색, 숨, 삶’이었다. 공공 정원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정원을 통해 도시에 ‘색’을 입히고, ‘숨’을 불어넣어, 주민들의 ‘삶’의 일부로 지속가능한 공공 정원 디자인을 제출했다. 아울러 인접한 정원을 고려한 내부 동선 계획, 구조적 안정성, 유지·관리를 위한 작업로와 관람객 동선 디자인 등이 요구됐다. 현장 심사와 품질 유지·관리 심사를 통해 추후 수상자를 선정할 예정이다.
박동선 LH 국토도시본부장은 “파주가든의 대상지가 교하지구와 운정지구 시민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입지인 만큼 심혈을 기울여 조성했다”라며 “앞으로도 도시가 곧 정원이 되고 정원을 통해 도시의 브랜드가 구현되는 다채로운 도시 정원 마련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진행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
주 최 LH
위 치 경기도 파주시 파주운정3지구 수변공원1호(운정중앙공원)
주 제 도시의 색, 숨, 삶
규 모 초청작가정원 4개소(200m2/개소당)
작가정원 7개소(150m2/개소당)
주민참여정원 5개소(10m2/개소당)
학생참여정원 5개소(10m2/개소당)
------------
초청정원
부서진 시간, 피어난 용치_김단비
운중산책@운정_박종완
어반 네이처(urba_N_ature)_유충헌
망중유한(忙中有閑), 삶의 여백 그리고 한가로움_이상수
------------
작가정원
푸른 빛으로 함께 흘러가는 것_김초롱
네이처 시네마(Nature Cinema)_이현승
도간루: 닿은 순간_윤채영
일월운정(⽇⽉雲庭), 해와 달, 구름이 쉬어가는 정원_박성준
클라우드_이정연
끌림: 더 컬러 오브 파주(The Color of Paju)_박희수
빅(Big) 282_이호우
-
[LH 파주가든] 부서진 시간, 피어난 용치
초청정원
파주는 세계 유일 분단국의 접경 도시다. 이곳에 들어서는 공공 정원은 파주의 역동성과 평화로움을 상징하는 실증이다. 파주 곳곳에 남은 분단국의 잔해를 재해석해 보여줌으로써 불안정속의 안정, 아픔과 애환 속 희망을 전달하고 기억하고자 한다.
파주의 유일함에 대한 소회, 개활지에 촘촘히 설치된 전쟁의 상흔을 정원에 담았다. 파주시의 도시 화석으로 자리 잡은 ‘용치’는 땅을 뚫고 자라난 생명력을 느끼게 하며, 부서진 시간을 보상하듯 새살을 피어 댄다.
*환경과조경439호(2024년 11월호)수록본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