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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LH가든쇼] 그럼에도 대지에는
“사람이 새와 함께 사는 법은 새를 새장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당에 풀과 나무를 가꾸는 것이다.”(박준, ‘광장’) 하지만 인간은 자연을 가꾸는 대신 울타리에 가둘 생각에 빠져있다. 대지는 생명의 기원이자 수많은 생명체가 어울려 사는 곳이지만, 인간은 홀로 대지의 주인인 ㅡ것처럼 행세한다. 이러한 착각에서 벗어나 모든 생명체가 땅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식물 한 포기, 풀벌레 한 마리에게 양보할 수 있는 정원을 조성했다. 대지의 주름은 ‘연결’로, 자연의 물결은 ‘원’으로 해석했다. 펼침과 접힘의 반복된 형태를 가진 주름은 구역을 구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수많은 관계를 연결시키는 하나의 길과 같다. 접힙과 펼침으로 생긴 물결은 반복된 시간을 선형 공간에서 원으로 그려낸다. 각 원은 분리된 영역을 가졌지만, 모여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다. 이를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이 서로 어울려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원형 구멍이 뚫린 디딤판으로 동선을 만들고, 유럽 미장 특유의 색감이 돋보이는 벽으로 공간을 둘러쌌다. 좌우 대칭을 이룬 동선은 출입구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벤치와 그늘막을 설치해, 구멍 안에서 자라는 식물을 여유롭게 구경할 수 있도록 했다. 독립수의 단단한 나무줄기를 통해 내면의 단단함을 표현하고, 풀줄기로 불안정하지만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했다. 또한 이벤트성에 그치는 단일 수종의 식재 패턴에서 벗어나 봄부터 겨울에도 감상할 수 있는 지피·초본류를 식재해 계절감을 더했다. 설계 김단비 시공 수풀리안, 숲을위한주식회사 김단비는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조경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수풀리안에서 숲에 대해 배우고 있다. 정원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각기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하나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한다.- 김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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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LH가든쇼] 심연풍경
다양한 생명이 모여 사는 갯벌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정화 작용이 숱하게 일어난다. 흔히 깊고 어두운 이미지가 강한 심연을 정화 능력을 갖춘 갯벌처럼 치유의 공간으로 해석했다. 숲, 갯벌, 고인돌 등 검단의 대표적 풍경 위에서 생명력 넘치는 식물과 빛, 바람 등 자연 요소에 의해 생동하는 정원을 조성함으로써 내면을 위로하는 심연의 풍경을 선사하고자 했다. 조형 가벽으로 공간을 분리하고, 가벽의 중첩을 통해 위요감과 더불어 깊이감을 불어넣었다. 메탈 체인으로 만든 투과성 높은 가벽은 공간을 분리하는 역할과 동시에 시시각각 변화하는 역동적인 경관을 보여준다. 바다의 윤슬처럼 반짝이는 메탈 체인 사이로 스며드는 빛과 일렁이는 바람의 소리는 공감각적 체험을 선사한다. *환경과조경411호(2022년 7월호)수록본 일부 설계 오태현 시공 오스케이프 스튜디오, 마이조경, 쌔즈믄 오태현은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비오이엔씨와 스튜디오일공일에서 경험을 쌓았으며, 현재 오스케이프 스튜디오를 설립해 활동 중이다. 2017년 72시간 도시생생 프로젝트, (구)진주역 복합문화공원 설계공모에 참여했으며, 2017 대한민국 한평정원 페스티벌 작가정원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오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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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LH가든쇼] 비포 선셋
서울 광화문을 기준으로 정동 방향에는 강릉이, 정서 방향에는 인천이 있다. 인천은 매년 해넘이 축제가 열릴 만큼 석양이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갯벌의 주름 사이사이를 흐르는 바닷물이 붉은 노을빛을 반사시키며 낭만적인 경관을 만든다. 1861년에 제작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면 과거 검단은 바다와 맞닿아 있었다. 대대적 간척 사업으로 인해 과거의 지형을 찾아보기 어려워졌지만, 잠시 1860년대로 돌아가 저녁 노을에 붉게 물들었던 갯벌과 검단의 풍경을 정원을 통해 떠올려 보고자 했다. 바다와 갯벌이 만나는 자연의 지형을 구현하기 위해 콜라주 기법으로 평면을 구상했다. 갯벌은 녹지로, 바닷물은 포장으로 표현했다. 바닥은 선형의 화강석 판석으로 구성되는데, 각 판석의 한쪽 면은 비스듬히 깎여 있는 형태다. 이로써 정원에서 서쪽 방향을 바라볼 때만 경사면에 닿는 햇빛이 반사되어 석양빛이 바다와 만났을 때의 풍경을 만들게 된다. 경사면은 윤광마감으로, 다른 면은 버너마감으로 처리해 반사되는 부분과 그렇지 않는 부분을 구분했다. 윤광마감으로 된 바닥을 밟으면 기러기가 우는 듯한 소리가 나 잠시 바다에 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정원 끝에 설치된 기울어진 벽은 검단의 하늘을 담은 장치다. 벽의 바닥을 따라 조명을 설치하고, 스폿 조명이 벽 가운데를 비추도록 두어 밤이면 해질녘 석양의 모습을 연출하게 했다. *환경과조경411호(2022년 7월호)수록본 일부 설계 김수린 시공 공간시공 에이원, 와이엠 일렉트로닉스, 채움 김수린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과 조경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을 정량화시키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CA조경기술사사무소에서 ‘새로운 광화문광장 기본 및 실시설계’, ‘종로구 통합청사 기본 및 실시설계’, ‘판교 창조경제밸리 도시첨단산업단지 기본 및 실시설계’, ‘DIGICO KT 기본 및 실시설계’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실험적 조경 프로젝트를 즐기며, ‘GIF 드론해커톤’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상, ‘서울형 저이용 도시공간 혁신 아이디어 공모’ 대상을 수상했다.- 김수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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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LH가든쇼] 자연으로 돌아오는 시간, 회원
개발로 인해 사라진 검단의 흔적을 되살렸다. 사라진 검단의 옛 흔적을 되새기며, 갯골과 구릉에서 찾은 해안선과 대지의 주름을 정원으로 담아냈다. 굴곡진 지형은 작은 구릉과 물길, 웅덩이가 되고 다양한 미기후와 생명을 불러온다. 돌릴 때 ‘딸깍’ 하는 소리가 나는 회전문을 통해 진입 시 극적 전환을 연출했다.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골과 구릉 사이에 놓인 외나무다리를 조심스레 건너며 풀과 나뭇잎의 바스락거림, 빗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고, 소생물의 삶을 마주할 수 있다. 목재 루버로 만든 퍼걸러 안쪽에는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를 배치하고, 밖에서도 정원 내부의 자연을 감상할 수 있도록 퍼걸러 상단에 창을 냈다. 목재 특유의 색은 정원에 따뜻한 느낌을 불어넣는다 *환경과조경411호(2022년 7월호)수록본 일부 설계 최지은 시공 초신성, 탐라는 정원, 디자인공감대 최지은은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라이브스케이프에서 일하고 있다. 2021년 제2회 서울식물원 식재설계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안성민, 신영재와 함께 디자인 그룹 ‘초신성’을 만들어 활동 중이다.- 최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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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LH가든쇼] 뫼비우스, 순환의 땅
갯벌은 해와 달의 인력, 지구의 자전과 같이 자연의 순환 에너지로 발생하는 대지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것들은 우주적 생태계 안에서 끊임없이 순환하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순환의 의미를 잊곤 한다. 검붉은 갯벌의 기억을 순환의 고리를 의미하는 뫼비우스 띠와 생생한 자연의 모습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했다. 세 개 레이어를 통해 자연에 감싸져 있는 인간을 표현했다. 맨 아래층 자연에 해당하는 지면에는 이끼, 고사리 등의 음지 식물과 숙근초를 식재해 야생의 자연이 가진 생동감을 표현했다. 지하고가 높은 자작나무는 맨 위층의 자연을 의미한다. 시야 확장을 위해 관목 식재를 지양하고, 자작나무의 흰색 수피를 통해 내후성 강판과의 색감 대비를 연출했다. *환경과조경411호(2022년 7월호)수록본 일부 설계 류광하 시공 기로디자인, 공간시공 에이원, 성산기업, 더그린 류광하는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석사과정을 마치고, 현재 기로디자인을 설립해 활동 중이다. 2012년 72시간 도시생생 프로젝트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제9회 경기정원문화박람회에서 작가정원을 조성했다.- 류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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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LH가든쇼] 지렁이의 대지 바느질
자연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알지 못한 채 지나친 향과 색은 얼마나 짙고 푸를까? 밤낮으로 변화하는 풍광을 사람이 아닌 지렁이의 눈높이에서 보고자 했다. 지렁이가 흙과 돌, 풀 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만든 길, 대지의 숨구멍을 정원으로 만들었다. 이를 통해 공간을 공유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들과 자연의 짙은 향, 생명의 에너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지렁이는 매일 시시각각 달라지는 자연의 모습을 나타내는 콘셉트다. 지렁이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연의 미세한 변화를 정원으로 표현했다. 자연의 변화를 보다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보행로 높이를 지면보다 낮게 조성하고, 가장자리를 따라 서서히 높아지는 플랜터 벽을 만들어 깊이감을 더했다. *환경과조경411호(2022년 7월호)수록본 일부 설계 박성준 시공 그린부라더 박성준은 MMM 디자인 스튜디오 소장으로,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와 조경기술사사무소 바이런을 거치며 실무 경험을 쌓았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공간을 잇는 디자인을 추구하며, 생각하고 구현하는 일련의 과정을 탐닉하길 좋아한다. 2018 태화강 정원박람회 쇼가든 부분 공동참여작가로 금상을 수상했다.- 박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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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LH가든쇼] 기화요초, 신성한 숲의 물결
조선시대 검단을 처음 밟은 외국인이 보았을 갯벌의 너그러움과 신성한 숲 자락에 자생하는 초목의 풍경을 구현했다. 굴곡진 갯벌을 형상화한 지형 위에 한반도 자생종 식물군의 조합으로 이뤄진 기화(구슬같이 아름다운 꽃)와 요초(옥같이 고운 풀)가 서식하는 신성한 두 개의 숲을 조성했다. 갯벌과 숲을 은유하는 공간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새로운 도시적 풍경이 된다. 전체적인 지형은 약 0.75m부터 약 1.1m까지 높이가 다양하다. 완만한 경사를 통해서 빗물이 밖으로 빠져 나가게 했으며, 마치 갯벌을 걷듯이 익숙지 않은 보행 경험을 느낄 수 있도록 언덕 주변을 청고벽돌로 포장했다. *환경과조경411호(2022년 7월호)수록본 일부 설계 이양희 시공 공간시공 에이원, 채움, 와이엠 일렉트로닉스, 카미가든웍스 이양희는 가천대학교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을 공부했다. 조경그룹 이작과 CA조경기술사사무소에서 다양한 공공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2021년 스튜디오 천변만화를 설립했고, 다양한 분야 간의 협업을 통한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다. 도시 공간 내 지속가능한 여러해살이풀 식재에 대한 관심을 두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설계에 적용하는 이론의 실무화를 추구한다.- 이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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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량 금호어울림 센트로 Yullyang Kumho Oullim Centro
율량 금호어울림 센트로는 청주시 율량동 신라타운을 6개동, 748세대 규모로 재건축한 단지다. 인근에 초, 중, 고등학교와 학생들을 위한 다양한 시설이 있고, 단지 앞으로는 청주시 청원구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널찍한 율량천이 흐른다. 봄이면 벚꽃이 피어나는 무심천과 수변공원, 내덕생활체육공원, 운천공원을 비롯해 청주 백제유물전시관 등 역사·문화 시설도 가까이 있다. 이러한 지역 고유의 풍경과 자연을 매개체로 삼아 율량의 도시와 역사의 조화를 보여줄 수 있는 단지를 조성하고자 했다. 시간유적 최근 곳곳에 들어서는 아파트와 빠르게 진행되는 도시 개발로 인해 지역 특성과 그 땅이 가진 기억과 역사가 흐릿해지고 있다. 이에 주목해 율량의 풍부한 역사를 보여줄 수 있는 시간유적(time henge)을 콘셉트로 설정했다. 시간유적은 영속적인 시간 속의 경관을 뜻한다. 단지를 거닐며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질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고, 이를 통해 율량이라는 지역과 땅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자극하고자 했다. 각기 다른 테마의 공간을 분산 배치하기보다, 시간유적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담은 공간들이 일련의 거대한 녹지로 인지되게 만드는 전략을 세웠다. 타임리스 그린 율량의 과거와 현재를 담은 중앙광장 ‘타임리스 그린’에는 녹음이 가득하다. 생태계류, 생태연못, 미러폰드를 조성해 인접한 율량천이 단지 안으로 흘러든 것 같은 풍경을 연출했다. 크고 작은 수목과 어우러진 다양한 수경 시설은 더운 여름에도 청량감을 느끼게 하고 탁 트인 열린 자연 경관을 선사한다. 수경 시설과 함께 놓인 커다란 돌은 율량의 유적과 선돌을 상징한다. 주변으로 누운 형태의 소나무와 수형이 독특한 소나무를 심어 자연의 풍경을 담은 독특한 수 경관을 완성했다. 예술이 펼쳐지는 갤러리 단지 중앙광장을 감싼 기다란 생태계류를 이용해 과거 율량에 있었던 역참(말을 바꾸어 타던 곳)의 풍경을 담았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정원과 다양한 예술 작품을 담은 갤러리 정원을 단지 곳곳에 배치했다. 티하우스와 부대시설, 중앙광장을 오가며 자연스럽게 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정원은 실외 미술관을 연상시킨다. *환경과조경411호(2022년 7월호)수록본 일부 글 박윤경 사람과나무 사진 유청오 조경 기본설계 선엔지니어링 조경 특화설계 사람과나무 시공 금호건설 조경 시공 영림산업 놀이, 휴게, 운동 시설 스페이스톡, 그린프리즘, 청우펀스테이션 위치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율봉로 94번길 61 대지 면적 29,640m2 조경 면적 11,098m2 완공 2022. 3. 조경사무소 사람과나무는 1999년 설립된 조경설계사무소다. 자연의 가치를 높이는 디자인을 모토로, 20년간의 노하우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자연과 사람이 조화로운 풍경을 빚어내며 조경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끌고 있다.- 사람과나무, 금호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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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디자인 오피스] 조경설계 디원 시간의 감각으로 빚는 감동의 디자인
설계 철학 그리고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꽃 사이를 벌이 드나들고. 아기들 공원에서 뛰놀 때. 가슴 두근거린다. 모든 것 공경스러워 눈 가늘어진다”. 얼마 전 작고한 김지하 시인의 연작시 중 ‘새봄’의 여섯 번째 시다. ‘꽃’과 ‘벌’ 그리고 ‘아기들’을 시적 언어로 삼아 자연과 함께 공존하는 세상을 꿈꾸는 시인의 소망을 엿볼 수 있는데, 우리의 궁극적인 설계 지향점과 많이 닮았다. 자연의 생태계가 작동되게 하고 그곳에서 사람이 어우러지고 또 그저 바라보며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울림이 생기는 장소를 만들 수만 있다면, 우리가 가치를 두고 소임을 다하고 있는 것에 안도해도 될 것 같다. 우리 설계의 이상향은 마지막 시구처럼 공경스러워 눈이 가늘어질 정도의 감동이 장소에 대한 기억으로 남아 그 추억을 만날 기대 또는 경험하고 싶은 분위기, 아니면 알 수 없는 이유로 나도 모르게 다시 발걸음하고 싶은 곳을 남기는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욕심이 큰 것 같지만 진심 어린 소박한 꿈이다. 그렇다면 그런 장소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첫째, 땅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 눈에 보이는 부분뿐만 아니라 잠재된 물리적 특징과 무형의 흔적들까지도 허투루 다루지 않는다. 세심하게 설계로 풀어가는 단초로써 그 땅의 기억과 에너지의 흐름으로 이어지게 한다. 둘째,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한다. 프로젝트에 따라 대상지를 이용할 다수의 객관성 확보가 전제되어야 하며, 소수 또는 개인의 니즈와 취향, 기존의 라이프스타일을 세심하게 고려해야 할 수도 있다. 어떤 공간이든 사람에 근거한 프로그램, 기능, 심미적인 부분을 세심하게 고려해야 한다. 셋째, 시간의 감각을 읽어야 한다. 이 감각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시점으로서의 시간이다. 시류에 맞는 삶의 패턴과 사람들의 욕구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다른 하나는 시간의 양, 기간이 만드는 변화다. 시간에 따른 변화를 예측해 설계하고, 시간의 변화에도 설계의 본질이 유지되도록 고민해야 한다. 물론 다년간의 설계 경험으로 예측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시간의 예술로 의외의 효과를 얻거나 반대의 경우를 맞닥뜨리기도 한다. 특히 살아있는 식물을 비중 있게 다루는 분야이기에 항상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항상 부족하단 생각에 늘 진지하게 인식하고 담아내려 하고 있다. 흥미롭게 진행한 프로젝트, 공동 주택과 수목원 최근 가장 흥미롭게 진행한 프로젝트를 생각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우리가 잘 해오고 보람 있게 느끼는 점,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에 생각이 미쳤다. 우리 작업의 대부분은 주거 프로젝트다. 도시의 일상에서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 바로 집이다. 특별한 이벤트가 아닌 매일의 일상을 마주하는 곳이기에 그 가치와 무게를 더욱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 특히 도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이용자의 욕구 충족을 위한 프로그램, 삶의 질을 높이고 커뮤니티 활성화를 유도하는 환경을 심도 있게 고민해야 한다. 빠른 발전으로 생활 환경이 첨단화됐더라도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갈망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모두 도심 외곽의 정원 있는 집에서 살 수는 없기 때문에 공동 주택의 조경은 필수 불가결한 존재로 좀 더 비중 있고 규모 있게 다뤄져야 한다. 서초그랑자이: 강남의 하이엔드 단지지만 이웃에게 열려 있는 따뜻한 단지를 추구했다. 서초그랑자이는 서초 무지개 아파트를 재건축한 현장으로 2015년 건설사의 수주 경쟁을 위한 프로젝트였다. 우리는 조경 디자인을 맡았고, 수주 성공 후 특화설계까지 진행하면서 완공까지 6년여 동안 함께했다. 수주를 위해 공격적인 전략이 필요했고, 건설사가 과감하게 동 1개를 비우는 결정을 한 덕분에 도심에서 보기 힘든 넓은 오픈스페이스를 확보할 수 있었다. 조경, 건축, 외관, 인테리어 모든 공종이 함께 새로운 아이디어를 과감하게 시도하고 다수의 공간을 모델링으로 완성해가며 짧은 시간 내에 프로그램뿐 아니라 시각적인 디자인을 밀도 높게 스터디해서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만들어야 했다. 프로젝트 성격상 시간적 압박감은 있었지만 공종 간 경계를 넘나들며 유연하게 함께 고민했다. 덕분에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었고 심미적인 디자인 능력을 키우는 기회가 됐다. 실시설계를 진행하면서 오픈스페이스의 기능을 극대화하기 위해 커뮤니티 반대편에 외곽을 둘러싸는 구조의 스카이 워크를 계획했다. 이로써 단조로울 수 있는 평지의 대상지를 입체적으로 만들고 이용자에게 보다 풍부한 경험을 선사했다. 비 오는 날은 회랑을 거닐고, 맑고 쾌적한 날에는 자연스럽게 지상 3m 높이의 스카이 워크에 걸어 올라가 푸른 오픈스페이스를 산책하며 여유를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으로 2021 서울 유니버설디자인 대상에서 광장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는데, 사적 공간의 공적 사용을 위한 디자인 해결 노력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외부인 누구나 공공 보행 통로를 통해 중앙 오픈스페이스를 즐길 수 있도록 했고, 또 다른 곳에서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시선의 산책과 전망을 유모차를 탄 아이와 보호자, 휠체어를 탄 장애인, 노인들도 부담 없이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했다. 다 함께 누릴 수 있는 결과물이라서 만족감이 컸던 프로젝트였다. 안산그랑시티자이: 안산그랑시티자이는 1, 2단지를 이어서 현상설계를 통해 특화설계로 진행한 프로젝트다. 6,600세대의 대규모 단지이기 때문에 커뮤니티의 활성화와 산업 중심의 구도심에서 벗어나 보다 쾌적한 생활을 위해 이주할 주민들의 욕구를 단지 자체에서 충족시키는 것이 중요한 설계 방향이었다. 마침 사회 이슈였던 소확행과 삶의 질에 대한 욕구를 북유럽의 휘게(hygge)라이프의 지향점으로 녹여내 여유로운 삶이 일상이 되는 리조트 같은 단지를 조성하고자 했다. 거점 커뮤니티 개별 동들과 정원들이 하나의 단위를 이루어 소단위 커뮤니티를 만들고, 단위 공간을 확장해 단지 전체에 소속감과 연대감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도록 했다. 이웃과 함께하는 여유로운 삶을 녹여내기 위해 조성한 생활 가로, 캠핑장, 텃밭 등이 형식적 구색 맞춤이 아니라 입주민이 실질적으로 이용하고 활발히 즐기는 프로그램이 될 수 있도록 고민했다. 입주 몇 개월 뒤 현장을 답사했는데, 숲 속 휴게 공간에서 차를 나눠 마시던 몇몇의 주민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는지 물으며 차를 나눠줄 테니 마치고 들르라며 말을 건넸다. 잠깐 스치는 여유로움이 우리에게도 전이됐다. 낯선 이에게 말을 건네는 여유와 담소가 있는 숲 속 작은 공간들이 참 아늑해 보였다. 청계 센트럴포레: 현장 일정과 발맞춰 완성도를 높인 단지다. 청계 센트럴포레는 DL이앤씨의 특화설계로 진행했으며, 프로젝트 시작 5개월 만에 조경 공사를 시작해야 하는 프로젝트라 첫 미팅을 현장에서 하며 숨 가쁘게 진행했다. 대규모 단지는 아니었지만, 단지 순환 동선을 따라 만나는 각각의 정원을 다양한 시설물과 식재 패턴으로 디자인해 매번 새로운 정원을 만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촉박한 일정 중 현장 상황의 이해, 미술 장식품을 공간 디자인으로 연계시키기 위한 협의 및 위치 조정, 입주 예정자 및 현장 의견을 조율하며 작업해 나갔다. 공간을 모델링하며 눈높이에서 보이는 공간감과 조형감을 고려해 수경 시설의 높이와 단의 조형, 티하우스의 방향과 위치, 가벽의 높이 등을 결정했다. 현장에 방문해서 문제의 소지는 없는지 확인하고 결정해 바로 도면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거의 공사 시점과 맞물려 설계를 진행하다 보니 시설 및 구조물 등 하드웨어 부분을 현장에 적용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 그렇듯이 식재는 수급 상황과 현장 여건의 영향을 받는 부분이라 지속적으로 의견을 교환했고, 대목들만 어느 정도 위치 시킨 상태에서 현장 검수 요청을 받아 현장에서 협의하며 대체와 보완 수종을 검토했다. 필요에 따라서는 좀 더 자세한 식재 보완 자료를 작성하기도 했다. 가능한 여건 내에서 설계 의도를 최대한 완성도 있게 구현한다는 시공사와의 공감대가 형성되었기에 촉박한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디테일까지 완성도 있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국립세종수목원 수목원은 유전 자원 보존과 자원화를 촉진하며 학술적 가치가 있는 곳이다. 관람하고 휴식하는 위락지의 기능도 큰데, 국립세종수목원은 도심의 공원형 수목원을 지향할뿐 아니라 도시의 그린 인프라 역할도 수행해야 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기본설계까지 진행된 상태에서 각 테마에 맞는 정원별 특화설계를 중점적으로 진행했다. 각 테마 정원에 대한 주제, 이용성 및 도입할 전시 수종의 분류 의도 등을 고려해 공간 디자인뿐 아니라 시설, 구조물 디자인까지 발주처와 매주 협의해 상세 도면을 작성해 나갔다. 특히 어린이 정원은 일반 공원이나 놀이터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차별화된 체험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다. 지형을 이용한 모험 공간을 만들고, 아이들 키 높이에 맞춰 하천의 흐름을 모사하여 물의 변화를 놀이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하고, 수목 울타리로 만든 미로 놀이 등 다양한 놀이 요소를 접목한 정원을 조성하고자 했다. 웰컴 공간인 방문자 센터는 수목원 얼굴에 해당하는 공간인 만큼 경관뿐 아니라 가치 있는 수목 선정이 중요했다. 적절한 수량 확보가 가능한 이색 수종 선정을 위해 식물 재배원에서 직접 수목을 조사하며 고민한 과정은 값진 경험이 되었다. 프로젝트가 마무리될 무렵 입구 상징 조형물 작업이 완료됐는데, 금속 선재의 작품이다 보니 존재감을 부각할 보완 작업이 필요했다. 조형 마운딩을 제안하여 작품의 콘셉트와 규모가 더 잘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거의 2년 동안 많은 피드백과 촉박한 일정에 지치고 힘들기도 했지만, 노력한 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 설계사무소를 운영하며 중요시 여기는 것 설계사무소의 실체가 무엇일까? 디원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공간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고 디자인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물, 그 결과물이 하나씩 쌓여가면서 디원이라는 설계사무소의 실체가 만들어지고 있다. 설계사무소 운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디원이라는 실체를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다. 하나의 생물과 같이 시간과 함께 진화하며 만들어온 우리만의 개체 특성으로 설계의 대상지와 시류에 유연하게 반응하며, 구성원들도 개인적 성장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설계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구성원들이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는 가치를 지속적으로 찾는 것이 중요한 숙제일 것이다. 디원의 설계사무소로서의 본질과 정체성은 현장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때로는 페이퍼 워크에서 멈추기도 하고, 다양한 이유로 다른 분야를 넘나들면서 다른 색이 가미되고 명도와 채도가 조절되기도 하지만, 설계 의도가 반영된 색상의 본질을 유지하기 위해 열정을 낼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설계 과정에서 의견을 나누고 다시 객관화하는 과정을 통해 최선의 디자인을 구현하고 적극적으로 다양한 상황을 조율하며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까지도 설계이기에, 그 과정을 가치 있게 생각하고 즐기는 문화가 존재하는 설계사무소가 되고자 한다. 앞으로 한번은 꼭 해보고 싶은 일 IT, 예술, 공연 등 다양한 전문 분야와 협업하여 새로운 조경 트렌드를 제시하고 싶다. 예를 들어 요즘 이슈인 메타버스 개념을 공간에 접목하는 것이다. 현실 세계의 확장 및 가상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공간 창출 및 기능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다수의 특화 프로젝트를 하면서 시설물의 조형적 효과와 공간 분위기를 극대화하는 식재의 역할에 관심이 많았는데. 국립세종수목원 프로젝트에서 생소하고 다양한 식재 수종을 접하면서 어렴풋이 식물, 그 자체를 주 프로그램으로 한 다양한 정원 디자인을 해보고 싶어졌다. 다년간 디자인 경험이 농축된 감각적인 공공 치유 정원도 만들고 싶다. 도시의 건조한 일상 중 마치 카페에 들러 차 한잔하듯이 자연의 생명력을 밀도 높게 음미하며 일상의 치유를 감당하는 미니 정원을 거리의 중간에 배치하는 시리즈물로 생각해봤다. 확장되는 도시가 자연의 생명력으로 채워지고 사람에게 그 에너지가 전이되는 선순환을 희망해본다. [email protected] 조경설계 디원(D.ONE)은 일상을 즐기는 사람들의 삶을 디자인한다. 단순한 설계를 뛰어넘어 재미있는 상상과 독창성이 있는 공간을 디자인하며, 보기에 아름다울 뿐 아니라 이용하기에 편리한 실용적인 외부 공간을 설계한다. 화려함이나 세련된 기교, 상징적 가치만으로 치장하지 않고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구현하며, 일상의 모든 환경을 이루는 요소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도록 한다.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생명력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5년 1월 17일에 시작하여 17년이 지난 현재 17명이 함께 하고 있다.- 최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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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스케이프] 혼다 세이로쿠의 도시공원 계획
일찍이 근대화를 받아들인 일본은 서구 사회에 대한 흠모와 동경이 유별났다. 많은 지식인이 유럽으로 건너가 선진 서구 사회를 경험하고 운영 노하우를 습득했으며 귀국해서는 각자의 분야와 위치에서 근대화를 견인했다. 메이지 시대 일본 도시는 ‘진보한’ 근대 도시로의 도약을 목표로 하는 도시부흥계획을 구상했다. 간토 대지진 이후 도쿄의 재건 사업을 이끈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오사카 시장을 역임하며 오사카를 오늘날의 상업 도시로 키운 세키 하지메(關一), 유럽 각지를 돌며 근대 도시계획의 법제와 정책을 공부해 자국의 도시계획 제도를 수립한 이케다 히로시(池田宏) 등은 근대 도시를 실천한 대표적인 테크노크라트 1세대 주역이다. 도쿄 역사 설계로 잘 알려진 건축가 다쓰노 긴고(辰野金吾)와 오사카에서 주로 활동한 가타오카 야스시片岡安 등은 붉은 벽돌과 흰 화강암을 결합한 영국풍 건축물을 일본에 소개했다. 조경 분야의 주역으로는 혼다 세이로쿠本多靜六(1866~1952)를 꼽을 수 있는데, 그는 경제학과 임학을 기반으로 국토 전반의 녹지 경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대표적 공원 전문가다. 혼다 세이로쿠(이하 혼다 박사)는 일본 최초의 근대 도시공원인 도쿄 히비야 공원(日比谷公園, 1903년 개장)을 설계하고 국립공원을 지정하는 등 조경학과 임학에 큰 기틀을 마련했다. 도쿄제국대학 교수 시절, 일본 전역에 수많은 도시공원을 조성해 ‘공원의 아버지’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꾸준한 연구와 글쓰기를 통한 자기 계발, 안정된 자산 관리와 퇴직 후 사회 환원 등 인생을 성실하고 계획적으로 운영해서, 일반인에게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실천한 자산가이자 처세에 모범이 되는 인물로 더 유명하다.1 혼다 박사를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그의 이력에 한반도에서 활동한 사실이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서울 남산의 ‘경성부 남산공원 설계안’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경성부가 서울 남산을 대공원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고, 혼다 박사에게 구체적인 안을 요청했다. 그는 191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제자 다무라 쓰요시(田村剛)와 함께 남산을 현장 조사하고 1917년 3월 ‘경성부 남산공원 설계안’2을 발표했다. 혼다 박사의 남산공원 설계안에는 남산이 공원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몇 가지 주요 방향이 제시되어 있다. 첫째, 산림 황폐로 훼손된 남산을 사방공사 등으로 안정화한 후 식재 등의 조경 설비를 적절히 진행할 것, 둘째, 공원 도로와 시설을 남산의 환경 조건에 맞게 배치해 고유한 남산의 풍경을 십분 이용할 수 있어야 할 것, 셋째, 남산공원에 도입할 시설에 맞는 운영 방법을 취해 공원 관리에 힘쓸 것 등이다. *환경과조경411호(2022년 7월호)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京城府, 『京城府南山公園設計案』, 1917. 서울역사편찬원, 『국역 경성부사 제3권』, 2014. 渋谷克美, “国ソウル「南山公園」と本多静六-公園設計にみる本多静六の国際感覚”, 『本多静六 通信』 17, 2008, pp.5~9. 손용훈·서영애, “1917년 경성부 남산공원설계안의 삼림공원 개념에 관한 연구”, 『한국전통조경학회지』 30(4), 2012, pp.23~31. 그림 출처 그림 1. newscast.jp/ 그림 2~3. 京城府, 1917, 京城府南山公園設計案. 박희성은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중 문인정원과 자연미의 관계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역사 연구자들과 학제간 연구를 수행하면서 근현대 조경으로 연구의 범위를 확장했다. 대표 저서로 『원림, 경계없는 자연』이 있으며, 최근에는 도시 공원과 근대 정원 아카이빙, 세계유산 제도와 운영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