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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대화, 오늘의 재구성] 그 다음의 조경 김수린
처음 만난 때를 언제라 말해야 할지 어렵다. 조경가 김공일의 정체가 김수린인지 모른 채 오대오 가르마의 안경을 쓴 캐릭터와 먼저 인사했었다. 얼마 뒤에는 매끈하고 현대적인 광장에 동양화풍의 산과 수목을 조화시킨 광화문광장 조감도를 산업디자인과 조경을 전공한 김수린이 그렸다는 어느 인터뷰를 읽었다. 어떤 사람일까. 김수린은 궁금증이 사라질 즈음이면 공모전 당선이나 정원작가 선정 소식으로 다시 이름 세 글자를 내밀곤 했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는 여러 힌트를 조각조각 이어 붙여 만든 관념적 김수린이 생겨났다.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김수린을 만난 건, KT 디지코 가든(2022년 10월호) 인터뷰 자리에서였다. 오대오 가르마를 타지도 않고, 안경을 쓰지도 않은 모습을 확인하고는 괜히 자리에 기웃거렸던 기억이 난다. 벽에 수묵화가 걸려 있지는 않을까 그런 걸 궁금해 하면서 말이다.
인터뷰 날에는 비가 내렸다. 신발을 적시는 빗물은 성가셨지만, 인터뷰 장소인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자료실에서 듣는 빗소리는 제법 운치가 있었다. 환경과조경 편집위원으로 좀 더 가까이 지내게 되었지만, 늘 묻고 싶던 질문은 이번에야 할 수 있었다. “김공일 캐릭터는 일부러 본인과 다르게 디자인한 건가요?” 뜻밖의 답변이 돌아왔다. “종종 그런 질문을 듣는데, 김공일 캐릭터 사실 저랑 똑같아요. 평소에 후줄근하게 입고 안경 쓰고 다니거든요. 제 진짜 모습을 본 친구들은 저랑 김공일이랑 똑같다고 말해요.” 진짜 김수린이 더욱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어제는 뭐했나요?
최근 산림청 주최로 진행되는 ‘정원드림프로젝트’에서 정원작가로 활동하고 있어요. 나성진 소장님(서브디비전)의 추천으로 참여하게 됐는데, 계명대 학생과 매칭되어 즐겁게 멘토링을 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그려온 디자인을 어떻게 발전시키면 더 좋은 결과물을 낼 수 있는지, 정해진 예산 내에서 시공할 수 있는지 조언하고 있어요. 어젯밤까지만 해도 멘토 역할을 하느라 구미에 있었어요.
대학에서 산업디자인과 조경을 공부했죠. 두 전공이 설계하는 점 외에 접점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용을 염두에 둔 디자인을 한다는 점에서 닮아 보여요.
맞아요. 사실 산업디자인, 조경뿐 아니라 디자인 관련 학과는 다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프로세스는 다 똑같다고 생각해요. 단지 속한 분야에 따라 결과물이 다를 뿐이죠. 예술은 자기만족에서 그칠 수 있지만, 디자인은 예술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이 디자인을 도출했는지 상대를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 방법이 논리든, 스토리텔링이든 설득하는 법을 고민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닮았어요.
조경을 복수전공하게 된 이유는 뭔가요?
산업디자인학과 3학년 시절에 공공디자인이라는 수업을 듣게 되면서 조경을 접했어요. 당시 산업디자인의 뿌리가 산업혁명이고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돌아가는 기업 이윤을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좀 회의감을 느끼고 있던 차였죠. 디자인으로 더 좋은 일을 할 수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공공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조경이라는 학문을 만난 거죠. 조경을 공부하면 더 넓은 세계가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복수전공을 하게 됐어요.
두 전공이 서로 영향을 주기도 했나요? 산업디자인학과와 조경학과 모두 과제가 많은 전공인데 학창시절 이야기도 궁금해요.
두 전공 모두 스튜디오 수업을 진행하고, 과제와 팀 프로젝트가 많아 쉽지 않았어요. 대충 졸업 요건만 채울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어요. 그래서 휴학 없이 학교를 6년이나 다녔어요. 조교님이 한 학기만 더 다니면 제적이라고 경고했고, 친구들은 네가 무슨 초등학생이냐고 놀렸죠. 이래저래 고생은 많이 했지만 돌이켜보니 조경을 복수전공하길 꽤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산업디자인학과에서는 제품을 직접 만들어요. 1, 2학년 때는 수업 시간에 목재, 철재, 석고, 플라스틱 등 다양한 재료를 직접 가공하는 방법을 배워요. 목업실에 전기톱, 드릴, 샌딩기 같은 각종 목공 장비가 구비되어 있고, 용접실에 아르곤가스와 용접봉이 있어서 그 사용 방법을 배우고 과제에 활용할 수 있었죠. 3, 4학년 때는 종로, 을지로, 동대문을 돌아다니며 더 많은 재료를 탐구했어요. 절곡, 벤딩, 빠우(버핑), 샌딩, 레이저커팅, CNC, 분체도장 등 학교에서는 할 수 없는 가공을 숙련된 기술자에게 맡기고 직접 그 과정을 관찰했어요. 5, 6학년 때는 조경학과 커리큘럼에 집중했는데, 제품에 한정되어 있던 시야를 넓히고 도시적 차원으로 땅의 맥락을 읽고 조경학적으로 설계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제 강점이자 특징이 된 거 같아요.
대상지를 넓게 보고 설계하는 건 조경가가 가져야 할 기본 소양이지만, 실제 사용자가 공간을 거닐면서 받는 인상은 공간에 설치된 시설물, 포장 재료의 작은 디테일에서 비롯되잖아요. 이 모든 걸 섬세하게 챙겼을 때 공간에 완성도가 생기고 사용자에게 감동이 전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경험 덕분인지 광화문광장 실시설계 단계에서 시설물 도면을 맡게 되었는데, 기존에 잘 쓰이지 않은 디테일을 해외도서와 인터넷을 참고해 시설물에 풀어나갔어요. 광화문광장에 설치된 시설물들을 볼 때마다 뿌듯하고, 이런 기회를 준 CA조경에 늘 감사해요.
졸업 후, 조경 전공을 살리는 방향으로 진로를 정한 이유가 있다면요?
졸업할 당시에는 오직 취업만이 목표였어요. 그리고 조경설계사무소에는 가고 싶지 않았어요. 야근이 많고 박봉이라 너무 힘들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빤히 보이는 고생길을 걷고 싶지 않았어요. 실패한 인생처럼 보일 것 같다는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죠. 남들이 적당히 부러워할 만한 기업에 취직해 평범하고 안정적으로 사는 게 목표였습니다. 닥치는 대로 자기소개서를 썼죠.
첫 직장은 국민체육진흥공단에 속한 소마미술관이었는데, 3개월 동안 인턴 생활을 하면서 조각공원 관리를 했어요. 올림픽공원 내 있는 조각공원에서 어린 아이들에게 작품 소개를 하는 일종의 도슨트 역할을 했죠. 아이들이 공원에서 노는 것을 지켜보는데 너무 행복해 보이는 거예요. 순간 ‘아, 이런 행복한 공간을 만드는 직업이 조경가였지’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공원, 리조트, 한강변 모두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이 떠오르는 공간이잖아요. 예전에도 조경이라는 학문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지만, 직접 조경이 만든 공간 안에서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목격하니 벅찬 마음이 들었습니다.
CA조경에서 처음 맡았던 일이 기억나나요?
2017년 겨울에 CA조경 신입사원 공개채용 공고를 봤고, 다음 해에 입사했어요. 제 자랑이라 좀 쑥스럽지만, 회사 내 평가에서 포트폴리오 1등을 차지하기도 했고 면접도 잘 봐서 두 소장님이 서로 저를 데려가려고 골프 내기까지 했다고 들었어요. 처음 맡았던 프로젝트는 ‘고덕국제화지구 2단계 설계공모’였어요. 입사하자마자 현상 팀에 투입됐고 한 달 반 동안 평일과 주말을 포함해 집에 일찍 들어가 본 적이 없었어요.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제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힘들어서 ‘내가 설계에 이만큼의 열정은 없었나?’라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래도 결국 당선이 되었고 소식을 듣자마자 고생한 팀원들과 눈물 콧물 다 흘리며 기뻐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 이 맛에 설계하는구나’ 했어요.
김공일 시리즈를 통해 본 바로는, 연차에 비해 굉장히 다양한 프로젝트와 상황을 경험한 것 같아요.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그렇게 열심히 살 수 없을 것처럼 최선을 다해 일했고, 정말 일밖에 모르던 성실한 일꾼이었다고 생각해요. 5년 간 진행한 프로젝트를 나열하면 A4 용지 한 장을 꽉 채울 수 있을 거예요. 어느 일 년도 쉽게 흘러간 적이 없어요.2년 차에는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국제설계공모’를 진행했고, 3년차에는 ‘종로구청 통합청사 기본 및 실시설계’ PM을 맡게 됐어요. 아직 PM을 하기에는 경험이 부족하고 어리다는 의견이 있어, 보란 듯이 잘 해내고 싶어서 밤낮없이 일했던 것 같아요.
4년 차에 진행한 ‘판교 제2테크노밸리 도시첨단산업단지 1구역 내 E2-1블록 실시설계’도 기억에 남아요. 2018년 회사에 입사한 뒤 기본계획에서부터 참여한 프로젝트였고, 설계 아이디어를 내는 과정에서 조용준 소장님(CA조경)에게 처음으로 디자이너로서 가능성을 검증받았던 프로젝트였어요.5년 차에 PM을 맡아 진행한 ‘KT 디지코 가든’은 설계, 시공, 감리를 거쳐 완공까지 이르는 전 과정을 본 첫 프로젝트였어요. 여름 폭염과 장마에 대응하느라 야간에도 공사를 진행해 체력적 한계를 맛보기도 했는데, 고생 끝에 서울시 조경상 대상이라는 선물을 받아 뿌듯했습니다.
김수린 하면 새로운 광화문광장 설계공모에 제출한 조감도가 생각나요. 입체적 건물과 광장 뒤편으로 보이는 회화 느낌이 강한 남산이 인상 깊었어요. 설계 작업에서 실제와 다른 이미지를 만드는 걸 경계하기도 하잖아요. 이 조감도가 어떤 의미가 되길 바랐나요?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게 전에 김영민 교수님을 포함해 공모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모여 아이디어를 공유했어요. 그 회의에서 나온 키워드
가 ‘표면’이었습니다. 광화문광장은 고려와 조선을 거쳐 한국까지 이어
져온 천여 년의 기억이 새겨져 있는 땅이잖아요. 과거와 미래는 현재라
는 하나의 평면으로 압축되어 우리와 공존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깊은
표면(deep surface)’이라는 개념을 도출했어요. 그 개념이 마음에 깊이 와
닿았고 조감도에도 담기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
하면서도 평면적인 느낌이 나는 조감도를 만들고 싶었어요. 분위기를
잡아볼 겸 저해상도로 시험 삼아 작업을 했어요. 고풍스러운 산자락을
배경에 놓고 미래적인 느낌의 평면도를 바닥에 깔았는데 팀원들의 반응이 좋았어요. 그래서 고해상도로 다시 작업을 했는데 이전 작업만큼의
느낌이 나지 않았어요. 이유를 찾으려 출력도 해보고 조감도를 멀리에
서 봤다가 가까이에서 봤다가, 수정을 거듭하다 제출 전날이 됐습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마음에 들지 않아 고민하고 있는데, 진양교 대표님
(CA조경)이 지나가며 전 작업물의 산 느낌이 더 좋다고 코멘트를 해주었죠. 산이 문제였다는 걸 깨닫고, 점심시간 직전까지 완성한다면 조감도를 교체할 수 있다는 조용준 소장님의 허락을 받아 다시 작업하기 시작했어요. 점심을 삼각김밥으로 대충 때우며 작업해 겨우 마감 시간에 맞
출 수 있었어요. 빠르게 작업해서 아쉬운 점도 보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훨씬 좋아져서 여전히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D와 3D를 어우러지게 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3D 모델링 이미지를 바탕으로 시작한 작업이라, 입체적 느낌을 더 살릴
지 평면적 느낌을 더할지 고민했어요. 그림자를 넣은 버전, 그림자를 넣지 않은 버전을 모두 만들어 출력해 회의실에 붙여봤죠. 멀리서 보며 고
민하고 있는데 조용준 소장님이 그림자가 없는 버전이 더 좋다고 의견을 주었어요. 그래서 그림자 없는 버전을 선택해 발전시켰죠. 제가 참 귀가 얇은 편인 거 같아요. 이 팔랑귀 때문에 불필요한 고생을 한 적도 있
지만, 디자이너로서는 나쁘지 않은 거 같아요. 덕분에 많은 사람의 생각을 수용할 수 있고, 여러 작업물을 만들며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 회화적 작업을 ‘비포 선셋’에서 다시 만났어요. “바다와 갯
벌이 만나는 자연의 지형을 구현하기 위한 콜라주 기법”을 사용했다는 설명이 기억나요. 산업디자인이라는 전공이 영향을
미친 걸까요? 도면이 자칫 그림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해
쓰는 방법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콜라주는 제가 굉장히 자주 사용하는 기법이에요. 그런데 이게 산업디자인의 영향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저 이미지에서 많은 영향을 받는
편이고, 사고도 이미지적으로 하는 것 같아요. 그림이 평면도처럼 보이고 평면도가 그림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 둘을 꼭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조경 공간은 이용을 목적에 두기 때문에 인체 치수를 기준으로 동선 폭, 경사도, 계단 폭, 앉음벽 높이를 설정해 기본적으로 불편하지 않은 공간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비포 선셋’에서 재료를 다루는 방식도 눈길을 끌었어요. 화
강석 판석의 각도와 마감 방식을 바꾸어 색다른 효과를 냈죠. 재료에 대한 탐구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나온 작업이라
봐요.
재료의 물성은 제 디자인의 큰 원동력이에요. 새로운 재료를 발견하거나 흔하게 쓰는 재료를 다르게 가공해 색다른 느낌을 낼 때, 생각지도
못한 조합으로 재료를 이용할 때, 큰 재미를 느껴요. 산업디자인에서 영향을 받은 부분도 있을 겁니다. 학부 때 재료를 직접 가공하고 물성을
실험하며 자연스럽게 재료에 대한 관심과 이해력이 높아진 것 같아요.
재료 연구를 많이 하고 가장 트렌드가 빠른 분야가 인테리어라고 생각
하거든요. 그래서 평소에 홍대나 을지로에 있는 인테리어 재료 상점을
틈틈히 방문해 탐구하며 영감을 받고 있습니다.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에서 ‘비포 선셋’의 확장판, ‘LH 공공
정원’을 볼 수 있었어요. 비포 선셋과 같이 정원의 의미를 엿
볼 수 있는 이름이 아니라 아쉬웠는데, 따로 붙여둔 이름은
없나요?
개인적으로 ‘Sustainable Future: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LH 공공정
원‘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갯벌은 생명의 땅이지만 과거에는 개발의 땅으로 여겨졌죠. 순천만 갯벌 또한 한때 훼손될 뻔했지만 다행히 보존되어 수많은 생명체가 서식하는 자연의 보고가 됐고요. 대상지를 조사하면서 흥미로웠던 게 순천만국가정원이 갯벌과 도시 사이에 있어 개발과
보존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어요.
국가정원이 ‘개발’과
‘보존’ 사이 ‘공존’의 영역으로 의미가 있고, LH의 지향점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자연과 인간, 현재 세대와 미래 세대의 공존의 의
미를 담은 공원을 구상했습니다. 진입부는 개발로 인해 훼손된 자연으로, 뒷부분은 순천만 갯벌의 모습으로 표현했어요. 밀물과 썰물이 드나
드는 갯벌을 표현하기 위해 바닥 포장을 빗각을 치고 윤광 마감을 해 한
쪽에서 보면 물이 차 있는 듯한 모습을, 다른 쪽에서 보면 물이 빠져 있
는 듯한 모습을 연출했습니다. 미디어월은 순천만 갯벌이 위치한 남쪽을 향해 비스듬하게 배치했어요. 정원에서 미디어월을 바라보는 방향과
실제 순천만 갯벌을 바라보는 방향을 일치하게끔 해 행위의 중첩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다양한 정원 디자인을 선보이고 싶은 욕심이 날 법도 한데,
두 정원을 비슷한 방식으로 설계한 이유가 있나요? 닮은 것처
럼 보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요?
LH에서 ‘비포 선셋’을 보고 연락을 주었기에 기본적인 틀을 비슷하게
가져갔어요. 하지만 대상지 조건이 달라 새로운 콘셉트가 필요했죠. 이번 기회에 기술과 조경을 접목해 새로운 유형의 정원을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감사하게도 LH가 이 도전을 받아들여줬어요.
LH 공공정원에 사용한 기술은 크게 두 개예요. 첫 번째는 사물인터넷(IoT) 기술입니다. 미디어월을 보면 만조와 간조의 실시간 데이터가 반영
된 순천만 갯벌이 보여요. 갯벌이 만조일 땐 미디어월 속 바다의 물이 차
오르고 간조일 땐 물이 빠지죠. 파도 소리도 그에 따라 변합니다.
두 번째 기술은 AI를 활용한 모션 캡처 기술입니다. 미디어월 하단부에 카메
라가 있는데, 이 카메라가 프레임 안에 사람이 들어왔다고 인식하면 알고리즘에 따라 화면 속에 나무가 자라나요. 자신의 움직임에 따라 나무
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정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풍성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정원이 생소하고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어떤 시대건 새로운 도전이 있었고 그 시도가 모여 큰 변화를 만들어나갔죠. 그런 의미에서 LH 공공정원도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나가는 작은
시도라고 생각하며 보듬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대중이 모르는 김수린의 작업이 또 있을까요?
CA조경에 다닐 때, 조용준 소장님, 장서희 대리님과 함께 ‘서울형 저이
용 도시공간 혁신 아이디어 공모’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서울시 내 방치
된 도시기반시설 12곳을 새롭게 활용하는 방안을 찾기 위한 공모전이
었어요. 우리 팀은 ‘더스트 캡처dust capture’라는 아이디어로 미세먼지에
대한 도시적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하늘공원과 한강을 잇는
보행 공간을 만든 뒤, 보행로 주변 곳곳에 미세먼지 측정 상태, 공기 정화 상태, 오염 상태를 보여주는 타워를 설치하고 미세먼지를 포집하는
거미줄 형태의 시설물을 조성했습니다.
특히 저는 부품도를 만드는 작업에 집중했어요. 아이디어 공모전이라 상세 설계가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 더스트 캡처라는 아이디어가 독특한 만큼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구현 가능한 아이디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사랑니를 뺐던 터라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새 작업해서 결국 부품도를 완성했어요. 심사위원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아 1등을 차지해서 대상을 받았죠. 『LAM』에 이 결과물을 바탕으로 한 인터뷰가 실리기도 했고, 『환경과조경』 2019년 11월호에도 소개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김공일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조경 이야기를 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을 텐데, 만화라는 방식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많이 봤어요. 초등학생 때는 만화를 보느라 학
원도 안 가고, 중학생 때도 시험이 끝나면 만화방에서 살았죠. 수학 공식이 가득해야 할 고등학교 수학 노트의 반은 제가 그린 캐릭터가 차지
하고 있어요. 수학 과외 선생님이 제 노트를 보고 혼내지 않고 재미있어
하며 다음 편을 궁금해 하기도 했는데, 그 시절 받은 긍정적 피드백이
좋은 원동력이 됐어요. 그래서 네이버 디자인프레스에 기자로 지원할
때도 자연스럽게 조경이라는 콘텐츠를 만화로 설명하는 샘플 콘텐츠를
그려 제출했죠. 다행히 좋은 평가를 받아 네이버 메인에 연재할 수 있었습니다.
김공일 1화의 주제가 ‘조경’은 무엇인가였죠. 당시 “내가 설계
한 조경 공간에서 산책하고, 힐링하고, 행복해 할 그 누군가
를 위해 열심히 고민하는 작업”이라고 정의했어요. 그때로부터 벌써 5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는데, 조경에 대한 정의는 그대로인가요?
여전히 유효합니다. 사실 다른 사람이 제가 내린 조경의 정의를 읽는다고 생각하면 좀 부끄럽긴 해요. 새벽에 쓴 글이었거든요. 새벽에는 누구
나 감성에 쉽게 젖어들잖아요. 그날도 감성에 취해서 적었던 터라 좀 쑥
스럽습니다(웃음).
김공일 시리즈에서 세계 조경가 소개 코너를 재밌게 봤어요.
학창시절 조경사를 배웠지만, 현대 조경가를 많이 다루진 않죠. 동시대의 조경가를 찾아보는 건 학생 자신의 몫이기도 하고요. 김공일 시리즈에서 소개한 조경가가 마사 슈워츠, 피터
워커, 로리 올린, 제임스 코너였어요. 평소 좋아하는 조경가
인가요? 롤모델로 삼은 조경가가 있는지도 궁금해요.
저도 회사에서 실무를 접하면서 동시대 조경가의 설계가 궁금해져서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학창시절에는 잘 몰랐죠. 제가 현대조경사를 관심 있게 살펴보기 시작했을 때, 조용준 소장님이 더 많은 정보를 접하도록 도와주었어요. 인생을 살며 감사를 전하고 싶은 세 분이 있어요. 학부시절 제 가능성을 처음 발견해준 김영민 교수님, 그 가능성을 실무 역량으로 키워준 조용준 소장님, 마지막으로 설계를 포기하고 싶을 때 잡
아준 안기수 소장님에게 항상 감사합니다.
아직 어리고 아직도 한창 성장해야 하지만, 그래도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세 분 덕입니다.
마사 슈워츠, 피터 워커, 로리 올린, 제임스 코너를 선정한 이유는 이들의 작업이 사람들에게 흥미롭게 다가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롤모델로 삼은 조경가는 없지만, 로리 올린처럼 평범한 것 같지만 편안
하고 좋은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경의선숲길을 거닐 때면 그런 느낌을
받거든요. 그런데 사실 제가 잘하는 작업은 마사 슈워츠처럼 독특하고
회화적인 작업인 것 같긴 합니다.
유튜브 채널도 가지고 있던데, 원래 미디어 콘텐츠 제작에 관심이 많았나요?
평소에 생각이 많아서 그런지 어느 정도 사유가 쌓이면 명확히 정리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콘텐츠 만드는 일이 번거롭고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지만, 사람들이 잘 보고 있다는 피드백을 주면 너무 뿌듯해서 멈출 수가 없어요. 조경가로서 설계에서 성과를 낼 때도 보람을 느끼지만, 정보를 전달하며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
을 한다고 느낄 때 기뻐요
고백하자면, 저는 일하는 자아를 따로 두고 살아요. 그게 건강한 삶에 도움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김수린에게는 저보다
더 많은 자아가 있는 것 같아요. 조경가 김수린의 얼굴, 김공
일의 얼굴, 대학원생 김수린의 얼굴. 셋 중에 어떤 얼굴이 진짜 김수린에 가깝나요? 더불어 일과 일상의 균형을 유지하는
노하우가 있다면요?
제 MBTI가 INFJ에요. INFJ가 16가지 성격 유형 중에서도 수많은 자아
를 가지고 있기로 유명하더라고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는 것 같아요.
제 수많은 자아 중 어떤 모습이 저인지 모를 때가 많았어요. 예전에는
이 때문에 정체성 혼란을 겪었는데, 지금은 있는 그대로의 저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확실한 건 전 사람에게 영향을 많이 받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을 만나냐에 따라 제 모습이 달라져요. 다행인 건 인복
이 많아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다는 거예요. 조경가, 만화가, 대학원생
중 저다운 자아를 굳이 꼽으라면 조경가를 선택하고 싶어요. 만화가는
정말 조경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을 담은 자아라서 때묻지 않게 아껴주고 싶은 존재에요. 조경가의 자아는 제 마음의 심해를 유영하며 바닥까지 찍고 올라올 때도 있고, 조용한 공간에서 생각
을 정리할 시간을 많이 갖기 때문에 실제 제 모습을 가장 많이 담았다
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잠깐 조경설계를 멈추고 대학원에 다니고 있죠. 무엇을 연구
하고 있나요? 대학원에 다녀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나요?
설계사무소에서 실무를 만 5년을 경험했어요. 개인 일정보다 회사 일정이 우선이었고, 그렇게 일에만 푹 빠져 살다보니 시간이 어떻게 간 건지
모르겠어요. 어느 순간 주변을 돌아보니 대표님, 소장님을 제외하고 제
근속년수가 가장 길더라고요. 5년을 성취지향적으로 밤낮없이 살다보니 몸도 조금씩 안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잠깐 멈추기로 결정했어요. 지금은 대학원에서 ‘조경식재배치 자동화 알고리즘’에 관련한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실무를 하면서 ‘이런 도구가 개발되면 참 좋겠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이 어렴풋한 상상을 실현해보고 싶었어요.
김공일 마지막회 ‘잠시 쉬어가기로 했습니다’에서, 앞으로의
계획이 뭐냐고 묻는 동기에게 잘 모르겠다고 답하셨다고 했
죠. 지금도 같나요?커리어적 목표가 아닌 김수린이라는 인간의 목표를 들려주셔도 좋아요.
전에는 헷갈렸는데 지금은 제 장점이 뭔지 알겠어요. 인터뷰를 하면서
제 생각을 많이 정리할 수 있었어요. 이런 기회를 갖게 되어 감사합니다.
저는 조경과 기술을 접목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전통적인 조경도 좋지만,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면서 재료에 대한 경험도 쌓았고 새로운 기술에도 관심이 많아 이를 조경에 어떻게 접목시킬 수 있는지 계속 고민해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예전에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제 제가 가진 가능성을 발전시키면서 살기에도 인생은 짧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겠다고 다짐했죠. 10년
뒤의 조경, 20년 뒤의 조경은 어떻게 변할까요? 앞으로 조경의 경계에서
‘넥스트next 조경’, 즉 다음의 조경을 이끌어나가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김수린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과 조경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식재설계를 자동화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CA조경기술사사무소에서 ‘새로운 광화문광장 기본 및 실시설계’, ‘종로구 통합청사 기본 및 실시설계’ ‘판교 창조경제밸리 도시첨단산업단지 기본 및 실시설계’, '디지코 KT 기본 및 실시설계'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실무을 익혔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2016년 참가한 GIF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2022년 ‘LH 작가정원’으로 정원설계 활동을 시작했으며, 2023년 LH의 초청을 받아 순천만국가정원에 ‘LH 공공정원’을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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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스케이프] 해변의 풍경
드뷔시(Claude Debussy)(1862~1918)가 관현악곡 ‘바다(La Mer)’에서 묘사한 바다는 직관적이어서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게 어렵지 않다. 음악은 수면 위로 떠오르는 태양에 바다가 서서히 깨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정오의 빛으로 반짝이며 바람을 만나 춤추는 듯 물결을 일으키다가 다시 거센 폭풍과 함께 파도가 휘몰아치듯 요란하다. 그리고 이내 파도는 어둠과 함께 고요히 잦아든다.
드뷔시는 음악을 통해 바다 이미지의 총체를 거대한 서사로 사실감 있게 풀어냈지만, 정작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은 실제의 바다가 아니라 일본 에도시대의 우키요에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추정 1760~1849)가 그린 ‘가나가와의 파도’였다. 그럼에도, 드뷔시를 낭만주의를 극복한 인상파 음악가로 분류하는 것은 사물의 인상을 주관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는 ‘바다’라는 작품에 관해 “바다의 일렁이는 물결과 하얗게 흩날리는 물보라는 물론, 빛과 구름, 바람, 냄새와 같은 움직이는 대상의 순간적 인상을 음악에 담으려 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본래 서구 사회에서 바다는 산과 마찬가지로 혐오의 대상이었다. 바다의 끝 모르는 예측 불가능함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증폭시켰고, 비이성적 광기로 날뛰는 듯한 파도와 폭풍은 악마와 저주받은 영혼의 소행이라는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유럽의 오랜 골칫거리였던 해적의 노략질이나 시시때때로 영토를 침략했던 이민족의 공격도 모두 바다와 무관하지 않아서, 바다는 여러 면에서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바다와 육지 사이에 놓인 해변 또한 불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래 가득한 해변은 단조로운 데다 경계도 정확하지 않으며 바다도 육지도 아닌 모호함도 있었다. 해변은 분명함과 명료함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대상이었다.
바다와 해변의 이미지가 전환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부터다. 사람들은 점차 바다를 심미의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바다와 해안가에서 포착되는 숭고미는 예술가들의 창작에 좋은 주제가 되었고, 해변은 도시의 팍팍한 삶에 지친 이들에게 새로운 도피처를 선사했다. 또 바닷가 사람들이 건강하게 오래 사는 이유가 바닷물, 바다 공기, 갓 잡아 올린 신선한 해산물 섭취 등에 기인한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심신 건강에 관심 있는 이들을 바다로 이끌었다. 최초의 해변 휴양지로 알려진 잉글랜드 남부 해안 브라이튼(Brighton)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1812~1870)가 정기적으로 방문해 소설을 집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1841년 철도가 브라이튼까지 부설되고 방문객이 급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이곳은 유명 해변 리조트로 거듭나게 된다.
*환경과조경424호(2023년 8월호)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김윤정, “일제강점기 해수욕장 문화의 시작과 새변 풍경의 변천”, 『역사연구』 29, 2015, pp.7~34.
배정희, “바다–치유와 향랑과 재난의 이미지”, 『유럽사회문화』 13, 2014, pp.31~53.
이한석 외 1인, “영국 해변리조트 발달에 관한 연구”, 『한국생태환경건축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 7, 2004, pp.45~51.
姜宇源庸, 『치인의 사랑(痴人の愛)』에 그려진 ‘여가’와 ‘근대일본’, 『比較日本學』 26, 2012, pp.81~98.
그림 출처
그림 1. Michaelasbest / Shutterstock.com
박희성은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중 문인정원과 자연미의 관계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역사 연구자들과학제간 연구를 수행하면서 근현대 조경으로 연구의 범위를 확장했다. 대표 저서로 『원림, 경계없는 자연』이 있으며, 최근에는 도시 공원과 근대 정원 아카이빙, 유네스코 세계유산 제도와 운영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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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작은 자연과의 연결
블루메미술관, ‘자연애호가들’ 전
자연을 자연으로만 이야기하고, 자연과 자연이 아닌 것의 경계를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블루메미술관은 아마 이 질문에 불가능하다고 답할 것이다. 2013년 개관 이래 블루메미술관은 줄곧 자연과 연결되는 미술관을 지향해왔기 때문이다. 지난해 개관 10주년을 맞아 1년간의 연구 기간을 보내며 블루메미술관은 “지평을 넓혀 동시대 사람과 자연의 모습을 살피며 읽어”냈고, “여전히, 그리고 전에 없던 방식으로 자연과 연결되고자” 한다는 새로운 미션을 세웠다. 지난 5월 13일 시작된 ‘자연애호가들(Calling Nature Lovers)’ 전은 그 미션이 무엇인지 알리는 첫 발걸음이다. 영상설치, 회화, 조각, 사진, 사운드, 북큐레이션 작품 9점과 전시장과 자연 공간을 오가는 동선 안에서 자연을 만나는 다양한 방식을 경험해볼 수 있다.
미술관 안팎
자연의 경계가 불명확하듯 전시 역시 건물 입구를 경계로 나뉘지 않는다. ‘자연애호가들’ 전시는 미술관 앞마당의 잘 가꾸어진 정원을 마주하는 데서 시작된다. 블루메미술관 관장과 학예사는 정원이 자연을 향한 하나의 창이 될 수 있다고 믿으며 손수 정원을 가꾸고 있다. 색채와 높낮이가 다양한 식물을 스쳐 계단을 오르고, 주홍빛 능소화가 늘어진 콘크리트 담을 지나면 전시장의 입구가 나타난다. 뜨거운 여름의 햇빛을 막 피해 들어선 방문객을 향해 큐레이터가 묻는다. “전시 보러 오셨나요? 들어오는 길에 만난 정원에서 무엇을 보셨나요?” 큐레이터의 물음은 방문객의 긴장을 누그러뜨리는 동시에 전시에 몰입하게 만드는 실마리가 된다. 정원에서 본 것이 무엇이든 혹은 정원을 전혀 인식하지 않고 들어왔든,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는 방문객 스스로 자연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를 어렴풋하게 깨닫게 한다.
아늑한 밤으로의 초대
뙤약볕 아래 생동하는 자연과 활기찬 사람들로 가득한 바깥과 달리 전시장은 어둑하고 차분하다. 전시에서 처음 맞닥뜨리게 되는 작품이 분위기를 더욱 배가한다. 베리띵즈는 푹신한 매트리스 위에 현미경을 통해 본 미생물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형물과 전시 포스터 뭉치를 올려놓았다. 별도 설명 없이 놓인 작품을 보며 관람객은 자신만의 해석을 펼치는 데 집중하게 되고, 밤과 잠을 연상하게 하는 매트리스는 좀 더 편안해진 몸과 정신으로 전시에 몰입하도록 돕는다. 이 매트리스는 베리띵즈의 영상설치 작업 ‘세상에 없던 식물원’에서도 발견되는데, 매트리스와 함께 설치된 화분들이 침실에 들어온 듯한 아늑함을 자아낸다.
*환경과조경424호(2023년 8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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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약초: 백만 년 전 온 편지
황지해, 2023 첼시플라워쇼 금메달
영국왕립원예협회(RHS)가 주관하는 첼시플라워쇼에서 황지해의 ‘지리산 산약초: 백만 년 전 온 편지’(이하 지리산 산약초)가 금메달을 받았다. ‘지리산 산약초’는 동남쪽 약초 군락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아침 햇살 속 약초들이 자라고 있는 산자락의 모습을 구현해 우리가 지켜야 할 고유한 가치와 종의 보존을 이야기한다. 지리산에만 있는 지리바꽃, 멸종위기종인 나도승마, 산삼, 더덕 등 한국의 식물 300여 종과 총 무게가 200톤에 달하는 바위로 가로 10m, 세로 20m 크기의 땅에 지리산의 야성적 경관을 재현했다. 바위 사이에는 지리산의 젖줄을 표현한 작은 개울이 흐르고, 중심에는 지리산 약초 건조장을 참고해 만든 탑을 세웠다.
황지해는 2011년 첼시플라워쇼에 ‘해우소: 근심을 털어버리는 곳’을 출품해 한국인 최초로 금메달을 받았으며, 2012년에는 ‘고요한 시간: DMZ 금지된 화원’으로 쇼가든부문 금메달을 받은 바 있다.
*환경과조경424호(2023년 8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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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LH 가든_정원과 땅
김단비, 햄프턴코트 팰리스 가든 페스티벌 은메달
김단비의 ‘코리아 LH 가든_정원과 땅(Korea LH Garden_Garden with Land)’(이하 코리아 LH 가든)이 2023년 햄프턴코트 팰리스 가든 페스티벌 쇼가든부문 은메달을 수상했다. 김단비는 2022년 6월 인천검단지구에서 열린 제3회 LH가든쇼 작가정원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해, 영국 왕립원예협회RHS가 주최하는 가든쇼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바 있다.
‘코리아 LH 가든’은 LH가든쇼에 출품한 ‘그럼에도 대지에는’의 콘셉트와 디자인을 햄프턴코트 팰리스 가든 페스티벌의 대상지에 알맞게 풀어낸 작품이다. 인천 검단이 품은 대지와 생명을 모티프로 ‘대지의 주인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산딸나무, 진달래, 쉬땅나무 등 한국의 고유 식물로 특색을 살렸으며, 자연과 사람의 공생 관계를 정원 속으로 끌어들였다.
*환경과조경424호(2023년 8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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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웃거리는 편집자] 조화, 서로 잘 어울림
잡지를 만드는 과정 중 가장 중요한 건 교정이다. 오타는 없는지, 글과 어울리는 사진이 배치됐는지 확인하며, 똑같은 내용을 너덧 번 정도 반복해 읽는다. 읽다보면 꽤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조화’다. 이번 호에도 조화가 등장한다. “건물과 조경 공간이 하나의 공간으로 읽힐 수 있게 건물 색감과 조 화로운 조경설계를 했다. …… 지금 돌이켜보면 기존 녹지의 녹색과 건물의 붉은색 그리고 회색 포장이 건물과 외부 공간의 조화를 이뤄낸 것 같다.”(27쪽) 전자는 공간에 통일감을 부여하기 위한 조화이고, 후자는 보색으로 서로 융화해 다채로운 풍경을 연출한 조화라고 해석할 수 있다. 최근 후자의 조화를 느낀 영화 한 편을 봤다.
영화 엘리멘탈(2023)은 불, 물, 공기, 흙 4개의 원소들이 살고 있는 엘리멘트 시티를 배경으로, 불처럼 열정 넘치는 앰버(불 원소)가 어느 날 우연히 유쾌하고 감성적이며 물 흐르듯 사는 웨이드(물 원소)를 만나 우정을 쌓으며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영화는 피터 손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피터 손은 뉴욕에서 나고 자란 뉴욕 토박이지만 한국계 미국인 감독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출발점은 자신의 부모님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민 1세대인 부모님이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문화도 다른 미국에 정착하는 이야기와 다인종 사회인 뉴욕의 모습을 영화로 표현하고 싶었다며 기획 의도를 밝혔다.1 영화 곳곳에는 다인종 사회 모습이 담겨있다. 엘리멘트 시티로 가는 지하철 안에는 네 원소가 있는데, 식물을 품은 흙 원소에 물 원소의 물이 닿으면 나뭇잎이 풍성하게 자라고, 구름으로 표현된 공기 원소는 천장에 붙어 쾌적한 공간을 만들어준다. 지하철뿐 아니라 불에서 나는 연기를 내보내기 위해 환풍기를 설치한 앰버 집, 폭포수로 만든 웨이드가 사는 아파트 등 건물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서로 어우러진 하나의 도시 풍경을 나타내고 있다. 원소의 특징을 살린 장면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조화의 사전적 정의는 ‘서로 잘 어울림’이다. 잘 어울리기 위해선 서로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해야 한다. 요즘 자주 묻는 질문이 있다. “MBTI가 어떻게 되세요?” MBTI는 성격 유형 검사 도구로, 네 가지의 상대적인 선호 지표를 조합해 성격 유형을 16가지로 분류한다. 따로 검사를 하지 않아도 몇 가지 질문으로 MBTI를 유추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자주 가는 단골 카페에서 사장님이 갑자기 귤을 준다면, 귤을 보고 드는 생각은?’이란 질문에 대한 답변이 대부분 두 분류로 나뉘는데, “맛있겠다” 혹은 “저 귤은 어디서 가지고 온 거지”다. 전자는 실제 경험을 중시하며 지금에 초점을 두는S(Sensing, 감각형)형에 속하고, 후자는 영감에 의존하며 상상과 혁신을 중시하는 N(iNtuition, 직관형)형인 사람이다.
나는 ESFJ로, 네 가지 유형에서 S와 F(Feeling, 감정형)에 해당하는 비율이 높다. N형 사람은 꼬리를 무는 상상력이 풍부한데, 나는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 대해 생각하지 그 이상의 상상은 하지 않는다(상상을 안 할 때가 더 많다). 갑자기 카페에서 귤을 주면, ‘맛있겠다. 그것도 공짜로 주다니 좋은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슬프거나 힘들 때 닥친 상황에 대해 공감해주는 말에서 위로를 많이 받는다.
같은 MBTI를 가진 작가가 그린 웹툰2을 보고 MBTI에 과몰입하게 됐다. 아직도 잘 모르는 나를 더 이해했기 때문이다. 특히 대화를 이끌어가고 잘 들어주는 성격이지만 힘든 일이 있으면 그럴 에너지가 없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거나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가까운 사람을 만나 힘듦을 극복한다는 내용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MBTI가 사람의 모든 면을 설명한다고 하긴 어렵지만, 조금이나마 나와 상대를 이해하는 데 꽤 많은 도움을 받았다.
서로에 대한 이해는 사람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공간도 똑같다. 대상지, 수목, 포장, 재료 등 조경설계에 들어가는 요소들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조화로운 공간을 만들 수 있다. 128쪽에 달하는 잡지 지면 중 한 페이지인 이 지면도 마찬가지다. 유일하게 에디터의 글맛을 볼 수 있어 한 자 한 자 신중히 적어 내려간다. 문단이 잘 배치됐는지, 글 속에 주제가 담겨 있는지, 마지막 문장이 다음 문단을 잘 연결하고 있는지 등을 파악하며 적는다. 이번 글도 잘 어우러진 맛집이길 바라며 마침표를 찍는다.
**각주 정리
1.조진혁, “디즈니·픽사 최초의 한국계 감독 피터 손, ‘엘리멘탈’의 개봉을 앞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더 네이버(the NEIGHBOR)』 2023년 7월호
2.엣프제 메리(@esfj_merry)은 ESFJ인 사람들이 특정 상황에 보이는 행동을 웹툰으로 만들어 업로드하고 있는 인스타그램 계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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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당신의 우주는 그런 식으로 비좁아져간다
누구라도 만날 수 있는 모호한 제목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경을 중심에 두되 그 경계에서 활동하는 사람도 끌어안을 수 있는 인터뷰가 되기를 바랐으니까. 그래서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고유의 색을 보여줄 수 있는 키워드가 무엇일지 고민했고, 그 끝에서 일상이라는 단어와 마주쳤다. 그냥 일상이라는 말은 너무 막연하니까 시간이라는 기준을 세워 쪼개고 나름의 이유를 붙여주었다.
격월 인터뷰 ‘오늘의 대화, 어제의 재구성’은 세상을 다르게 보고, 새롭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어제를 들여다본다. 조경의 한복판에서, 혹은 조경의 언저리에서 독특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들을 찾아간다.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는 물론, 관심사는 무엇이며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있는지 살피고, 인생에서 꼭 이루고 싶은 버킷리스트는 무엇인지 같은 내밀한 대화까지 나누는 것이 목표다. 첫 질문은 늘 “어제 뭐했어요?”다. 단순히 안부를 묻는 말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 어제는 일상의 축소판이니까. 어제를 재구성한 오늘의 대화가 조경의 매력을 발굴하고, 누군가에게 새로운 레퍼런스를 주기를 기대한다.
김혜리는 1995년부터 『씨네21』에서 영화와 관련한 에세이, 리뷰 등 여러 글을 써왔는데, 그중에서도 나는 인터뷰를 특히 좋아한다. 적확하고 아름다운 단어로 쓴 질문들은 팔레트 위에 풀어놓은 물감 같다. 김혜리는 나긋하면서도 부담을 느끼지않을 정도로만 거리를 좁혀 말을 건네며, 펼쳐놓은 물감 중 적당한 것을 붓에 묻혀 캔버스에 올린다. 김혜리의 인터뷰는 묻고 답하는 행위라기보다 그렇게 어떤 인물을 그려내는 작업처럼 보였다.
글 속에서 김혜리는 인터뷰이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친구가 되기도 하고, 오랜 팬이 되기도 하고, 취향이 비슷해 동네 카페에서 자주 마주치는 이웃이 되기도 한다. 나열된 문장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얼마나 공들여 오랜 시간 인터뷰 대상을 연구했는지 느껴졌다. 실제로 김혜리는 인터뷰이의 글과 작품, 다른 사람과의 인터뷰를 읽을 뿐 아니라 상대의 사진을 책상 한편에 붙여 자주 바라보고, 그 사람에게 중요한 게 무엇인지 생각한다고 한다. 인터뷰를 할 때 꼭 지키려 한다는 작은 원칙이 참 좋았다. “그에 관해 전혀 몰랐던 독자도 인물의 실루엣을 더듬을 수 있게 하고, 그의 가장 열렬한 팬도 미처 몰랐던 면모를 하나쯤 발견하는 인터뷰가 되는 것.”
그래서 첫 인터뷰이로 김수린이 탐이 났다. 인터뷰를 여는 글(108쪽)에 썼듯, 김수린이 어떤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는 여러 힌트를 가지고 있던 참이었다. 같은 학교를 졸업해 사석에서는 날 선배라고 친근하게 부르지만, 사실 학창시절에는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사이라 조금 서먹한 기운이 감도는 게 좋았다. 아는 것 같지만 사실 전혀 모르는 상대를 향한 조각난 추측들을 물음과 답으로 얼기설기 이으면 진짜 김수린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여줄 수 있는지 궁금했다. 김혜리 기자도 같은 생각을 했을까, 인터뷰 중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으로 “‘덕분에 나를 알게 됐다’는 말 들을 때”를 골랐다. 그래서 “김수린에게는 저보다 더 많은 자아가 있는 것 같아요”라는 말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는 것 같아요. 제 수많은 자아 중 어떤 모습이 저인지 모를 때가 많았어요”라는 답이 돌아온 게 기뻤다. “전에는 헷갈렸는데 지금은 제 장점이 뭔지 알겠어요. 인터뷰를 하면서 제 생각을 많이 정리할 수 있었어요”라는 말은 더욱.
인터뷰는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혼자 쓰는 글과 달리 대화 내내 긴장을 늦출 수 없고, 막힘없이 말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인터뷰이를 탐구해가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성격유형 검사를 하면 내향성 95%라는 결과를 받는 내게 도움이 된다. 인터뷰이를 파헤치며 낯섦을 줄이고 남몰래 친근감을 쌓아올린다. 인터뷰는 이미 알고 있는 영화나 책, 노래만 즐기려하는 내 우주를 넓히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을 만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려 한다. 어느 날 밤, 김혜리의 트윗을 읽고 스스로 날 외딴 섬에 밀어 넣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이후부터다. “아무도 읽지 않는다는 이유로 장문의 글을 쓰지 않다보면 어느 새벽, 당신은 읽는 이가 기다린대도 긴 글을 쓸 수 없게 됐음을 깨닫게 된다. 아무도 먹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요리하지 않다보면 혼자만의 식사도 거칠어진다. 당신의 우주는 그런 식으로 비좁아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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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T] 전망을 감상할 수 있는 쉼터, 스카이네스트
다양한 이동 동선과 공간의 효율성을 꾀한 퍼걸러
오늘날 퍼걸러는 단순한 쉼터에서 벗어나, 다양한 형태와 기능으로 입체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도시 환경과 어우러진 휴게 및 편의 시설 개발에 주력하고 있는 토인디자인의 스카이네스트(TIP-950)는 2층 구조의 전망대형 퍼걸러로 이용자들에게 새로운 방식의 휴식을 제공한다.
스카이네스트는 다양한 이동 동선과 효율적인 공간 배치에 중점을 두었다. 안정적인 스틸 구조물에 강화 유리와 하드우드 마감을 더했다. 1층에는 평상, 벤치 등을 배치해 시설물을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나선계단 또는 슬로프를 통해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
보통은 나선계단을 통해서 빠르게 2층 전망대로 이동할 수 있지만, 노약자와 휠체어 이용자는 계단으로 오르기 어렵다. 이처럼 거동이 불편한 이용자를 위해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슬로프를 마련했다. 슬로프의 경사나 난간 높이, 회전 구간 폭 등은 모두 BF인증 기준에 맞춰 디자인됐다.
야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충분한 밝기의 조명을 적용했다. 2층 전망 공간은 주변 경관을 360도 즐길 수 있도록 펜스를 전면 강화 유리로 처리했다. 펜스 및 유리 벽면 내측에 배치한 바 테이블에 앉아 주변 경관을 둘러볼 수 있다.
TEL. 02-533-3720E-MAIL. www.toinp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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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눕기의 기술
성큼, 여름의 중심이다. 이번 7월호에는 조경가들이 참여한 ‘스테이’ 외부 공간 작업 일곱 편을 모았다. 김모아 기자의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의 제목처럼 “비록 잘 세팅된 편안함을 빌리는 형식일지라도, 복잡한 도시 생활로부터 이격된 약간의 여유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할지 모른다”(77쪽).
올해 초부터 편집자들이 공들여 섭외해 함께 실을 수 있게 된 얼라이브어스의 ‘롯데호텔 부산 야외수영장’, 안마당더랩의 ‘호지’, 연수당의 ‘하도문 속초’, 듀송플레이스의 ‘와온’과 ‘월령지헌’,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퍼즈 글램핑장’, 펠릭스Felixx의 ‘언바운드’는 다양한 위치만큼이나 다채로운 성격을 지니지만, 경험에 방점을 둔 공간 설계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뚜렷한 공통점을 갖는다.
호텔, 모텔, 여관, 펜션, 게스트하우스 등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숙박 시설이 언젠가부터 ‘스테이’로 통칭되고 있다. 물론 이름만 바뀐 건 아니다. 스테이의 유행은 ‘머무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공간’의 부상을 의미한다. 스테이는 단순한 숙박을 넘어 머물며 공간을 소비하고 장소를 경험하는 일련의 활동 전체를 뜻한다. 스테이(머물다)와 베케이션(휴가)을 합성한 신조어 ‘스테이케이션(staycation)’도 요즘 휴가 트렌드를 대변하는 말로 널리 쓰인다. 스테이 문화의 확산은 공간 경험의 맥락과 계기를 짓고 엮는 조경가의 안목과 손길을 초대하고 있다.
스테이에 그대로 스테이하고 싶은 유혹 때문이었을까. 다른 경우와 달리 스테이 원고 교정지는 집중해서 살피기 어려웠다. 편집된 텍스트와 이미지의 디테일로 눈이 가지 않았다. 교정지 속 스테이 공간 한가운데 두 발 뻗고 누워 일상을 규정하는 수많은 관계와 의무를 다 내려놓고 잠에 빠져드는 장면을 계속 상상했다. 이번 여름엔 나도, 독자 여러분도 어느 안온한 곳에 한참 머물며 침대로부터 등을 결코 분리하지 않는 완벽한 스테이케이션을 누릴 수 있기를. 알람 소리 없이 눈을 뜨고, 침대에 누워 창으로 쏟아지는 햇볕을 쬐고, 다시 나른한 잠을 즐기다 후덥한 여름 정원을 산책하고, 책 몇 쪽을 읽다 다시 잠에 빠지기를 반복하는 온전한 시간.
홈캉스이건 호캉스이건 책 한 권은 동반해야 와식臥食 생활이 완성된다. 『환경과조경』 신간 말고 다른 책을 가져가야 한다면, 나는 독일 작가 베른트 브루너의 『눕기의 기술』(현암사, 2015)을 망설임 없이 꼽는다. “침대에서 할 수 없는 일은 가치 없는 일이다.” 희극 배우 그루초 막스의 말로 포문을 여는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쾌하고 통쾌하게 눕는 자세를 옹호한다. 누운 상태만큼 편안한 자세가 어디 있겠는가. 저자 브루너의 말처럼 “눕는 것은 신체에 가장 저항이 적게 주어지는 자세이며 가장 힘이 덜 드는 자세이다. 우리는 누운 자세로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잠을 자고, 꿈을 꾸고, 사랑을 하고, 생각을 하고, 슬픔이나 그리움에 잠기고, 백일몽을 꾸고 고민을 할 수도 있다.”
측정 가능한 성과를 중시하고 순발력과 결단력 있는 행동을 보여줘야 하며 성실과 근면을 입증해야 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누운 자세는 게으름의 표상이자 무능력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브루너의 생각은 다르다. “누워 있는 것은 짙은 안개 속에서 산책하는 것과 비슷한 작용을 할 수 있다. …… 누워 있는 행위는 목표 없이 걷는 수직적 산책의 수평적 짝꿍”이다. 눕기는 앉고 걷고 뛰는 무한 경쟁 사회에 브레이크를 거는 수평적 삶의 지표다. 비생산적이라 더욱 소중하다. “바닥에 등을 붙이고 누워 위쪽(실내에서는 천장, 야외에서는 하늘)을 바라볼 때면 움켜쥐었던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며, 우리의 생각 또한 부유하기 시작한다. 몸의 자세를 바꿈으로써 마음도 따라 변하는 것이다.”
“수평적 삶을 위한 가이드북”을 자임하는 『눕기의 기술』은 다양한 시각으로 눕기를 관찰한다. 7만 년 전의 침상, 수면에 혁명을 일으킨 코일스프링 매트리스의 발명과 전파,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누워서 음식을 먹기 위해 고안한 소파와 그 현대적 변용, 침실의 사회적 변천사 등 역사적 주제가 책의 뼈대를 이루는 씨실이라면, 과학과 문학, 철학은 책에 무늬를 입히는 날실이다. 누워서 눕기의 기술을 익히며 『눕기의 기술』을 읽다 보면 수평 자세와 와식 생활에 대한 묘한 자부심까지 생긴다. 눕는 행위 하나로 중력이라는 자연의 진리에 순응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폭력적 경쟁에 저항하고 있다는 자부심.
이번 여름 어딘가에 머물며 오래 누워 있는 시간을 실천할 계획이라면, 생활의 수직/수평 비율을바로 잡을 생각이라면, 그 깊은 심심함과 이완의 정점을 함께할 친구로 『눕기의 기술』을 권한다. 이 책은 누워서 읽어야 제맛이다. 읽다 보면 잠이 스르르 온다. 읽다가 얼굴에 떨어뜨려도 책이 워낙 가벼워 절대 코뼈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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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감각] 습관이란 게 무서운 거더군
길을 나선다. 삐리릭. 도어록 소리를 듣고 나서 열쇠를 꺼내 현관문을 잠근다. 철컥 철컥 철컥. 세 번 손잡이를 돌려 확실히 잠겼는지 살핀다. 열쇠 꾸러미를 끌러 왼쪽 앞주머니에 넣고 계단을 내려가다 멈춘다. 가스 밸브를 닫았는지, 창문 잠금 장치를 빼먹지 않았는지, 콘센트 전원 버튼을 껐는지 문득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나오기 전에 두어 번씩 확인했지만, 혹시나 싶어 다시 계단을 오른다.
작업실로 돌아와 잠금 장치와 버튼을 하나하나 손으로 만져 확인한다. 역시 다 괜찮구나. 다시 집을 나선다. 이 과정을 거치느라 3분 거리 버스 정류장 가는 데 늘 20분 정도 걸린다. 계단을 오르내리고, 괜찮을 걸 알면서도 자꾸만 한번 더 온갖 버튼을 확인하는 일을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다. 깜빡 잊고 열어 둔 창문으로 누군가 들어오거나, 가스레인지나 과열된 콘센트에서 불길이 치솟는 장면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 습관을 고칠 수 없을까 싶어서, 정말 도둑이 들거나 불이 나면 어떨지 생각해 본다. 아깝지만 그렇다고 정말 비싸거나 다시 구하기 어려운 물건은 거의 없다. 중요한 파일은 클라우드에, 그리고 돈은 통장에 넣어두었다. 그럼 괜찮지 않을까? 아니다. 컴퓨터와 태블릿 PC, 스캐너, 액정 태블릿이 없어지면 큰일이다. 당장 그림을 그릴 수 없고 다시 구하기엔 가격도 만만치 않다. 클라우드에 업로드하지 못한 옛 작업물 파일과 종이 원화는 잃어버리면 끝이다. 작업실은 여러 가구가 사는 빌라인데, 만약 내 방에서 시작한 불이 건물을 홀랑 태운다면, 그래서 누군가 큰 해를 당한다면…….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하다. 계단 몇 번 오르내리고, 버튼 여러 개를 다시 확인하고, 3분 거리에 20분을 쓰는 게 무슨 대수인가. 아무래도 이 습관을 고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