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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구 환경오염에 따른 생태계 변화와 전망 ; 지구의 몸살, 그 위험수위는?
    오늘날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환경문제는 과거 특성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에는 문제가 발생한 지역에 국부적인 것으로 그 지역을 벗어나면 피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오늘날은 지구전역에서 오염이 진행되는 까닭에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 과거의 환경오염이 주로 일찍이 산업화를 달성한 선진국들에 의해 이루어진 반면 오늘날은 개발도상국들도 뒤늦게 공업화와 경제개발을 서두르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막대한 오염물질을 배출하고 있다. 지구환경문제의 광역성에 비추어 오늘날 논의되고 있는 주요 테마로는 오존층의 파괴, 지구의 온난화, 산성비, 산림의 감소, 야생생물종의 감소, 사막화의 진행, 해양오염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문제를 가속화시키는 요인인 유해폐기물의 국가간 이동, 개발도상국의 공해문제 등도 역시 지구환경문제의 범위로 볼 수 있다. ※ 키워드 : 정종관, 특별기획, 환경오염, 지구, 위험수위, 사막화, 오존층, 지구온난화, 유해폐기물 ※ 페이지 : 58-63
  • 지구 환경오염에 따른 생태계 변화와 전망 ; “차세대도 공유할 생물자원의 지속적 이용방안 강구할터”-환경처, 박종건 자연보전국장
    자연환경보전기본계획과 시·도의 지역자연환경환경보전계획을 근간으로 앞으로 10년간 펼쳐갈 자연보전 업무의 방향을 이미 설정했습니다. 이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부처간 유기적인 협조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연환경보전업무 추진협의체’를 구성·운영하여 국가 전체적인 환경보전 업무를 종합 조정해나갈 계획입니다. 또 자연생태계에 대한 조사와 아울러 조사된 자료를 데이터베이스 화하여 필요한 모든 사람들이 이를 손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자연생태계보전을 위한 국가 전략을 수립하여 국제적인 흐름에 대처할 것입니다. 특히 생물자원을 보호하고 현세대와 다가올 세대가 다같이 이용할 수 있도록 생물자원의 지속적인 이용방안을 강구하는 한편, 생물공학기술의 개발 등에도 관심을 기울여 국내 생물종 뿐만 아니라 외국의 생물 자원의 이용에도 적극 나설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 키워드 : 특별기획, 환경오염, 생태계, 환경처, 박종건, 생물자원, 이용 ※ 페이지 : 52-53
  • 6백년 수도서울, 도시환경의 맥을 짚어본다 ; 6백년 수도 서울의 시설물
    1394년 태조 이성계가 서울을 도읍으로 정한 이래 6백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분야에서 많은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다. 변화와 발전이란 항상 전통이라는 개념과 대치되면서 서로 상충되기도 하고 때로는 융합되기도 하면서 끊임없는 변신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러한 변신의 과정속에서도 가급적 원형그대로 보존해야 할 많은 요소들이 있다. 조상들의 지혜와 얼이 담겨있는 문화 유적들이 그 중 하나인데 본고에서는 특히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조경분야와 관련된 여러 문화유적 및 시설물들을 되새겨 보고 현재 조경에 응용, 접목시켜야 하는 당위성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단유(壇遺)단(壇)은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평지보다 높게 흙이나 돌로 쌓은 재단으로 서울에는 사직단, 원구단, 선농단, 장충단, 한강 저자도의 기우단 등 여러 제단이 있었다.-성곽, 성문서울성곽은 이태조가 1394년 천도한 후 축성한 성곽으로 북한산, 인왕산, 남산, 낙산의 내사산을 연결하여 총연장 17km에 달하는 성벽을 쌓았다. 성곽에는 4대문(동-흥인지문, 서-돈의문, 남-숭례문, 북-숙청문)과 4소문(동북-홍화문, 동남-광화문, 서북-창의문, 서남-소덕문)을 두었다.-조경유적지서울의 조경유적은 궁원과 별장원, 민간정원으로 대별되는데 별장원과 민강정원은 거의 다 사라져 버렸고 궁원의 일부만이 남아있다. 남아있는 주요 궁원으로는 경복궁의 경회루 지역과 아미산 지역, 향원정 지역이 있으며 창덕궁 후원에는 부용정 지역, 반원지 지역, 옥류천 지역이 있으며 창덕궁 동남쪽에 낙선제 후원이 있다. 별서정원으로 대원군이 별장으로쓰던 자하문 밖에 석파정이 일부 남아있고 종로구 삼청동에 있던 옥호정(玉壺亭)정원이 이 그림으로만 전해 내려오고있다.-조경 시설물조경에는 주위의 산새나 나무, 꽃, 풀 등 식물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시설물들이 이용된다. 우리나라에는 후원양식의 화계정원이 특히 발달하였는데 여기에는 화계, 연가, 화문담, 석지, 석분 등 시설물이 배치되기도 한다.-정자(亭子)우리나라의 정자는 보통 벽이 없이 기둥만 세우는 것을 정(亭)이라하고 하고, 벽을 세우면 당(當)이라고 불렀으며 이 외에도 사(謝), 헌(軒), 대(臺), 루(樓), 제등 유사한 여러 종류의 건물이 있는데, 평면형태도 원형, 정방형, 장방형, 육각형, 팔각형, 십자형 부채꼴 모양 등의 여러 형태가 있다.-다리고지도와 문헌에 의하면 서울에는 주로 청계천과 그 지류하천을 중심으로 80여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조선조 초기에는 나무다리로 만들었었으나 우기에 떠내려가는등 피해가 커짐에 따라 후기에 와서는 대부분 돌다리로 바꾸었다. 궁궐내에 설치된 다리는 기능보다는 상징성과 조형미에 치중하며 아름답게 장식된 것이 특징이다.-능, 묘, 고분시설서울은 왕릉의 도시라고 할 만큼 많은 왕릉과 고분등 무덤문화재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한강 이남에는 송파구에 방이동 고분, 석촌동 고분군이 남아있고 조선시대 묘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왕릉의 대부분이 서울에 남아 있다. 보통 일반 서민들의 묘지는 봉분앞에 비석만 세우는 등 소박하게 처리하지만 신분과 계급이 높을수록 상서, 망주석, 장명등 동자석 등 시설물이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망각되었던 과학기술 문화재우리의 무관심속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었던 우리 조상들의 과학기술 시설물들인 일성정시의,측우기, 앙부일구, 자격루, 수표, 혼천시계, 관상감 관천대 등이 최근 각계의 관심속에 문화재 지정 및 복원작업이 이루어 지는 등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불교시설물불교 사찰에는 가람배치에 따라 대웅전, 극락전 등 주요 건축물 외에도 탑파, 석등, 범종, 당간지주, 일주문 등이 있는데 서울에는 곳곳에 이런 시설물들이 남아 있다.-기타시설물광화문 앞의 해태상은 화재를 예방하고자 풍수도참설에 의거하여 물짐승을 세웠다는 풍설이 있으나 그것은 풍문에 불과한 것이다. 해태는 깊은 산 속에 사는 성스러운 짐승으로 성질이 곧고, 옳고 그름을 판단한 짐승으로 구덕(九德)까지 갖추고 있다고 해서 고대 초(楚)나라에서는 해태를 사법(司法)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 키워드 : 단유, 성곽, 성문, 조경유적지, 조경 시설물, 정자, 다리, 능, 묘, 고분시설, 과학기술 문화재, 불교시설물, 기타 시설물※ 페이지 : p61~p68
  • 6백년 수도서울, 도시환경의 맥을 짚어본다 ; 풍수로 본 서울 도시공간의 합리성
    -풍수의 보편성 문제 서울이란 땅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다. 하지만 서울이 거쳐온 역사는 단순하지 않다. 전근대적인 왕조시대의 중심지에서 자본주의의 중심지로 탈바꿈했다. 도시의 역할과 구조가 혁명적으로 변해왔다. 봉건시대에 있어서 서울을 만든 풍수의 놀 리가 이미 질적 변화를 경험한 거대도시 서울에 대하여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가 불분명한 것이다. -음양론과 역의 사상 음양론과 역이라는 풍수사상의 기반을 살펴볼 때 생명가치의 존중과 인간과 자연의 조화와 화해를 통한 삶의 지속성 추구가 중시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풍수의 정신이며 서울은 이러한 정신이 투영되어 비로소 원형을 갖게 된 것이다. -서울의 풍수 서울의 땅은 삼각산과 한강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이들이 음양의 두 중심축인 셈이다. 삼각산은 서울 강북지역의 전역에 산맥을 뻗어 지기를 흘려보낸다. 한강은 서울 전역에서 흘러나온 물을 모아 흘러간다. 삼각산에서 뻗은 주맥이 만든 서울의 중심이 북악산이다. 삼각산이 서울전체를 주관한다면 북악산은 사대문(四大門) 즉 이 내명당(內明堂)이다. 내명당의 물은 청계천으로 모여들어 한강과는 역방향으로 흐른다. 내명당은 인왕산과 낙산 그리고 남산으로 보호된다. 좌우용호(左右龍護)와 주산(主山)인 북안, 안산(案山)인 남산은 각각 짜여진 도시이다. 전후좌우, 안과 밖 그리고 위 아래의 균형이 잘 잡혀있다. 이중환(李重煥)이 택리지(擇里志)에서 ‘온 나라 산수의 정교함과 신령함이 모인 곳’으로 서울을 묘사한 이유도 음양의 조화가 치밀했던데 있었다고 보여진다. -서울 풍수의 의의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 서울의 공간은 음양의 조화가 파기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음을 상징하는 ‘자연’ ‘보전’ ‘비움’ ‘소박’ ‘전통’ 등과 같은 가치들은 쇠퇴하고 ‘성장’ ‘인공’ ‘채움’ ‘화려함’ ‘현대’ 등의 양(陽)의 가치만 강조되어졌다. 도시화에 따른 여러 가지 부작용들은 풍수적 입장에서 음양의 조화를 무시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이해된다. 현재 서울의 공간은 풍수로는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상황이 이와같음에도 풍수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과거의 맥을 되짚어 봄으로써 당면한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다. -건강한 서울을 위한 풍수의 제언 서울의 도심에서 쇠락하는 기능들이 발생하고 이들이 공간이동 혹은 소멸하는 경우에 그들이 점유했던 공간을 새로운 기능으로 채울 것이 아니라 그냥 비워 두어야 한다. 예를 들어 학교, 군부대, 공장, 등이 이전하고 난 뒤 생기는 공간은 자연생태로 복원하기 위해 비워두는 것이다. 이것이 어려우면 최소한 구릉지대나 산줄기에 위치한 기능들이라도 소멸하면 이곳만이라도 비어워야 한다. 비움은 잠재력을 재충전하는 것이며 변화속에서 살아남은 융통성을 남겨두는 것이다. 비워진 공간은 서울에 고갈된 음(陰)의 성격을 살려주고 나아가 사람들의 가치관에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 키워드 : 풍수, 음양론 ※ 페이지 : p74~p79
  • 6백년 수도서울, 도시환경의 맥을 짚어본다 ; 민가정원
    민가란 우리 조상들이 살아왔던 주거공간이요, 민가정원이란 주거공간 속에서 자연을 노래하고,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겼던 대상이었으므로 대단히 중요한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도시화와 개발이라는 명분하에 대개의 주거문화유산들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으며 도시내에 기록과 유적마저도 찾아볼 길이 없다. 본고에서는 이런 측면에서 뿌리찾기작업의 일환으로 조선시대 서울의 민가와 민가정원에 대해 기록에 의해 더듬어보고 그나마 남아서 유형문화재 및 민속자료로 지정된 유산들에 대해 정리 언급하면서 향후 이들 민가정원의 발굴 및 복원 계승의 필요성과 과제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조선시대 서울의 사회적 배경신분계층에 따른 주거의 위치와 주택규모는 적어도 기록상에 나타나는 사대부 또는 서민주택의 원형과 정원의 규모를 짐작하는데 도움이 되며, 이중에서 문화가치가 높은 민가와 정원을 발굴하고 복원하는데, 또 그 유적을 보전하는데 참고가 되리라고 생각된다.-민가주택 및 정원의 기록과 원형--개괄적인 서울의 주거문화 형태19세기 이후의 서울의 주거형태를 보면 고래등같은 큰 기와집과 게딱지같은 작은 초가들이 한데 모여있고 관청이나 왕실, 사당과 같은 관 건물과 일반사가집들이 역시 한데 어울려서 크고 작은 건물, 관과 민의 건물들이 뒤섞인 모습을 보였다. 1896년 이후 10년간의 호적대장에 의하면 당시 성안의 서린방이나 장통방같은 곳에는 1백칸을 넘는 가옥들이 여럿 있었고 50칸을 넘는 집들은 전체 성안에 2백체를 웃돌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동시에 10칸 이하의 집들도 성안 전체의 절반 이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같은 다양한 규모의 집들이 서로 혼재되어 한쪽 1백여칸 집이 있는 바로 곁에 10칸에 20, 30칸짜리 집들이 뒤섞여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중에는 기와집이 있는가 하면 초가집들도 서로 섞여 있게 마련이었다.-기록에 나타난 민가와 민가정원여기에 소개하는 민가와 민가정원들은 소유자가 조선 6백년을 통털어 대표성이 있는 인물이고, 정원에 관한 기록이 반드시 있고, 문헌적・고증적 자료의 수집이 가능한 것으로서 향후에도 서울의 민가정원을 이해하고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서울 600년사와 기타 기록에 의한 사례들을 모아 정리하고 도신화해 본 것이다.-현존하는 고주택・민가정원서울시내에 남아 있는 주택과 정원중에서 가치가 있는 것들은 대개 사적, 지방 유형 문화재나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므로 이들을 중심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대표적인 민가와 민가정원은 사적1점 지방 유형문화재3점과 민속자료 22점뿐으로 이중 대표적인 민가정원은 성락원(城樂苑), 석파정(石波亭), 부암정(付岩亭)이다. -서울의 지형경관적 조건과 민가정원의 위상청계천을 따라 1910년 고종 당시 도성내에 있던 다리의 숫자만도 76개 도성외 10개가 있었다고 하니 개천이 얼마나 컸고 깨끗하였으며 주변경관이 좋았는가를 짐작 할 수 있다. 다라서 사대부집 민가의 배치는 주로 산세와 수경관이 겸비된 곳에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민가는 건축적으로 조정(朝庭)에서 정해준 규모를 초과해서 짓지는 않았지만 대지의 규모와 주변 풍광은 크게 재재를 받지 않았으므로 자연을 벗하고 노래할 수 있는 곳에 택지를 택하여 가치있는 것들이 많았다.민가는 사람이 살았던 생활공간이요. 그 정원은 생활의 장으로써 외부공간이다. 세계 어디를 가 보아도 선진국일수록 옛 선조들의 정신을 기리고 관광자원화 하기 위해 역사유적을 중요시하고 있다. 파리가 그렇고 프랑크푸르트, 런던, 로마, 보스톤이 그렇다. 남들은 비록 짧은 역사와 넓지 않은 문화속에서 과거를 들추어내고 보존 전시하여 그 나라를 빛내는데 우리 서울은 있는 것 마저 파괴하고 유념해 두지 않으니 도대체 어불성설인 것이다. ※ 키워드 : 민가, 민가정원, 민가정원의 유적 ※ 페이지 : p52~60
  • 6백년 수도서울, 도시환경의 맥을 짚어본다 ; 수도 서울, 숲의 생태계
    생태계는 사람, 동물, 미생물 등의 생물과 물, 기후, 토양 등 생물을 둘러싼 주변의 무기환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서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어 영향을 주고 받으며 균형을 유지하여 나간다. 생태계는 또한 물질이나 에너지를 통하여 끊임없이 순환한다. 가량 식물들은 태양에너지를 받아들여 물질을 생산하는 생산자이며, 이것에 의존하는 동물들은 소비자이다. 식물과 동물은 분해자(分解者) 또한 환원자를 통하여 자연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불교의 윤회사상은 생태계의 원리와 일맥 상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인구의 증가와 산림수도 서울의 인구는 현제 1천1백만명을 넘고 있는데 조선 초기 수도를 정할 당시에는 약 10만을 조금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후에는 서서히 증가하였으나 해방과 6・25동란 이후 급격히 증가하였다. 현재 서울시의 자연공원과 근린공원의면적은 1989년말 현재 약 16,800ha로 서울시민 1인당 녹지면적은 약 15㎡이다. 이 면적은 일본 동경의.1.15㎡,요꼬하마 1.32㎡,오오사까 1.42㎡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편이며 미국의 뉴욕, 로스엔젤레스, 영국의 런던과 비슷한 수준이다.-서울시민의 산림에 대한 의식표본적으로 조사한 바로는 서울 시민의 약 55%가 일상적으로 집에서 산이 보이는 곳에 거주하고 있으며, 66%가 1년에 최소 한번 이상 근교의 산을 찾는 것으로 나타났다. 산림의 중요성에 대하여 묻는 질문에 대하여는「목재 생산기능」, 「수원(水原)의 함양(涵養)」,「풍치경관(風致景觀)의 보전」「동식물의 보호」중에서 조사에 답한 사람의 74%가 「수원(水原)의 함양(涵養)」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 다음으로 20%가 동식물의 보호, 4%가 풍치경관의 보전, 나머지 2%가 목재생산이 중요하다고 응답하였다.-서울시 도시 숲의 실태현재 서울에서는 원시적인 숲은 거의 없어져 버리고 정도의 차는 있어도 사람의 영향하에 있는 자연 즉, “사회화된 자연”으로 변해 버렸다. 도시내에 있는 숲은 바로 이 “사회화된 자연”의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로수 현황서울시의 가로수는 전국의 26%로 27만여 그루가 생립하여 있다. 구성비율을 보면 양버즘나무가 49.4%, 은행나무가 36.8%, 은단풍이 3.6%, 수양버들이 2.4%, 그 외 벚나무와 느티나무 등 모드 25종으로 구성되어있다.-숲의 관리 방향우리 시민들은 환경적, 인위적으로 자칫 쇠퇴할 우려가 있는 이 “사회화된 도시숲”을 되살릴 의무를 가지고 보호해야 한다. 나아가 가능한 자연에 가깝게 도시 숲은 조성, 유지 관리하는 생태적 관리를 해야하며, 그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도시 숲을 인간과 같은 하나의 살아있는 자연생태계의 일원으로 인식함과 아울러 공존공생하고 하는 인식이 필요하다. ※ 키워드 : 생태계, 산림, 도시 숲, 가로수 현황, 숲의 관리※ 페이지 : p69~p73
  • 6백년 수도서울, 도시환경의 맥을 짚어본다 ; 도시공원 체계 변천
    한성의 도읍풍수도참설이 풍미했던 14세기말 선조들은 지맥의 좋은 지기가 감응하여, 그것이 왕성을 기할 수 있는 즉 장풍득수할 수 있는 장소를 나라의 수도 입지로 마련하였다. 즉 북악산, 인왕산, 타락산, 남산을 내사산으로 북한산, 덕양산, 아차산 관악산을 외사산으로 하며, 동에서 서로 흐르는 한강의 물은 성밖의 동남일대를 에워싸는 형태인 산하금대형의 형승지를 길지로 택하였다, 백두대간에 의해 백두산을 부모로 출발하여 목간의 땅인 북안산 밑에 정궁인 경복궁을 배치하고, 중국의 고대로 부터 전해오는 이론서인 「주례고공기」에 의한 「좌묘우사전 조후시」의 기본적인 도시계획에 의해 성곽내의 도시계획을 마련 하였다.공원개념의 변화조선시대 공원에는 왕이나 사대부를 위한 시설이 있었으며, 강무나 습사하는 곳으로 잡목을 식재했다는 기록을 통해 서양과 같은 넓은 지역을 공공의 이용보다는 국익을 위해 녹지를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경국대전」에 “경복궁과 창덕궁의 주산과 내맥에는 산배 산록에 경작을 금한다, 외산인 경우에는 산배에서의 경작만을 금한다,”라고 쓰여있다. 이것은 풍수지리사상에서 나온 고려 신종때의 산천비보문제와 같이 산천의 길흉 순도를 따지게 하여, 즉 주산 내맥의 산에는 산배, 산록 일체의 경작을 금하고 외부에는 산배만 경작을 금한다는 것이다, 또 군사적인 목적이나 연료의 공급을 위해 송목금벌정책을 세우고 입표금표를 세워 녹지를 보호한 기록을 볼 수 있다,그러나 이러한 개념이 20세기초부터 변화하기 시작하여, 1934년에 조선시가지 계획에 경성부 공원계획에 의한 공원의 정의를 보면 “시민의휴양 · 오락 · 아동의 교육또는 도시의 미관에 공하는 외에 화재등에 대해서 방화선이 되어 연소를 방지하고 또 피난처로서 필요 불가결의 시설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특히 전쟁시에 있어서 도시의 공습은 물가피함에 다라 도시공원을 방공의 목적으로 구성함이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개항기~일제말의 근대공원1930년 성안한 경성부 최초의 도시계획에 의해 계획된 도시계획공원은 경복궁, 창경국, 덕수궁을 포함한 모두 38개의 공원과 자연공원을 포함하여 총 20.28k㎡로서 전시가지 면적의 18.6%로 q인당 28.3㎡에 해당하는 공원계획이었다, 1934년 조건시가지계획령의 제정을 계기로 경성부내에 대공원 11개소, 근린공원 42개소, 소년공원 168개소, 아동공원 672개소, 도합 903개소의 공원이 계획되었으나 이것은 수치상의 계획일 뿐 실제로는 토지취득의 난점 또는 지형 등의 문제로 단지 140개소의 계획에 머물렀다. 이로서 계획구역 134k㎡에 대한 공원면적비는 10.3%이었고, 1,100,000인을 계획인구로 한 도시계획으로 1인당 공원면적은 12.6㎡에 달하였다.이와같이 도시계획에 의한 최초의 공원은 1934년 조선총독부의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거한 1940년 3월 총독부 고시 제 208호로 결정 고시된 약 1,380ha에 달한 서울의 공원들이 장기적인 계획공원이었다.그 후 현재까지의 공원해방 후 전쟁과 정치 등의 혼란기동안 공원계획은 임기응변적으로 국부적인 변경을 해왔으나 도시계획의 편입 및 급진적인 인구증가로 공원용지의 잠식에 대비하여 변경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공원에 대한 인식부족과 관리 미숙의 문제점은 있었지만 1962년 도시계획법이 제정되어 도시계획법이 제정되어 도시계획시설로서 입법된 이후 특기할 만한 사항은 경복궁·창덕궁·덕수궁·종묘의 5개 문화재 유적지를 근린공원으로 바꾸고 새로이 묘지공원이 신설되어 동작동 국립묘지를 현충묘지공원으로 변경 고시하였다. 1968년 도시공원기본계획에서 서울의 공원녹지의 기본계통은 환상방사형을 기본형태로 하여 산포식으로 근린 및 아동공원을 배치하도록 계획하고 있다. 1970년대에는 그 동안 시대적인 혼란으로 공원용지의 침식, 도시의 팽창과 신시가지조성등으로 계획된 도시공원은 자연공원으로 북한산공원외8개소, 보통공원은 28개소, 근린공원은 47개소, 도로공원은 봉천공원, 묘지공원3개소 그 외 유원지 3개소가 되었다. 초기에 조성된 낙성대공원은 정책입안자의 의지로 강감찬 장군의 유적지를 다듬은 사적공원이었을 뿐이며, 본격적인 근린공원은 서소문공원, 도산공원과 자매도시공원이었다.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울 컨트리클럽의 골프장부지를 기증받아서 종합대공원인 어린이 대공원(1973년)이 조성되었다. 1977년부터는 문화재 유적지의 복원을 이루면서 동적위락시설의 제공의 일환으로 서울대공원(1984년)이 경기도 과천시 청계산 기슭에 동·식묵원과 운동시설, 현대미술관(1986년), 서울랜드(1988년)가 연합해서 기본계획이 이루어져 도시민의 문화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흡족한 시설이 제공되었다.서울의 도시계획의 변경과 확충 그에 따른 인구 이동의 결과로 강북의 학교가 강남으로 이전됨에 따라 그 이전지를 공원으로 조성한 예로 신문로 서울고등학교 자리에 경희궁공원(1986년), 양정고등학교 자리에 손기정공원(1990년)이, 또 공군사관학고 이전지에는 보라매공원(1986년)이 조성되었다. 서대문 구치소 이전지에 서대문 독립공원(1992)과 생태적인 환경조성을 위한 용산가족공원(1993년)은 도시민의 새로운 여가행태를 야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 키워드 : 도시공원, 도시변화, 역사, 도시역사, 도시변화역사, 공원 ※ 페이지 : 67 ~
  • 조경공간 이용후평가 ; 파리공원 이용후평가
    파리공원의 이용자들은 10~20대 연령층의 학생 및 주부가 많았으며 전체 이용객의 81.3%가 도보 미 자전거를 이용하여 접근한 것으로 나타나 근린주구민의 이용률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었다. 시설물의 경우 원로, 광장체계에 있어 매우 높은 이용평가를 받았으나 하계 이용시 그늘이 없어 녹읍제공에 투자가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며 휴식공간 증설 및 옥외화징실 설치도 요망된다. 경관평가에 있어서는 시설물을 구성곤간의 위치 및 상호관련성에 대한 만족도가 비교적 높았으나 아늑함과 계절감을 제고하기 위한 경재식재 및 차폐식재의 보완의 절실한 것으로 생각되며 이는 회귀분석 결과와도 일치한다. 이용행태면에서는 물리적 변수인 햇빛바람의 접근 용이성, 만남의 편이성 등의 행태만족도에 긍정적 열할을 하고 있으나 녹음에 대한 행태만족이 낮은 값을 보이고 있는 바역시 이용행태에도 푸르름이 문제가 대두되었다. 또한 다양한 행태의 유발을 의한 이용지도 차원에서의 프로그램 개발이 이루여져야 할 것이며 상주 관리인의 증원 문제도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본 공원에 있어서는 교육의 성별, 소득, 접근시간의 네가지 변인에 의하여 앞으로 공원이용에 대한 만족 불만족을 판별할 수 있게 되었다. 인지 분석에 따라 6개 인자에 의한 가설력변인이 추출되어 선정된 시설물 문항 분류의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었으며 시설물 이용만족도를 높이기 위하여는 관리시설 측면의 요인들과 조경시설의 기능적 측면 인자들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것으로 판단된다. ※ 키워드 : 파리공원, 공원, 평가 ※ 페이지 : 124 ~ 127
  • 6백년 수도서울, 도시환경의 맥을 짚어본다 ; 근대이후 한국건축의 변천사
    - 한국 근대건축사의 흐름 한국 근대건축사에 대한 기존연구에서 나타난 시대구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⑴ 초기 서양식건축 (개항 ~ 1990년 이전) ⑵ 구한국말기 건축 (1901 ~ 1910년) ⑶ 일제강점 전반기 구축 (1911 ~ 1925년) ⑷ 광복이후 건축 (1945년 ~ ) 여기에서 초기의 서양식건축과 구한말의 건축에 큰 차이는 없지만, 구한말 건축은 서양식 건축이 어느정도 시민들에게 계몽되어 있는 상태라는 점, 그리고 식민지 전기의 건축은 양식주의 건축이 주류를 이루고, 식민지 후기 건축은 근대주의 건축의 시작이라고 구분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동안에도 전통 한옥을 모티브로한 건물이 세워지기는 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인들이 식민지에서 이국정취를 느껴보기 위해 만든 철도역, 호텔이나 아니면 태평양전쟁때 대동아공영권을 부르 짖으며 그들의 정렴지 곳곳에 세웠던 내쇼널리즘에 입각한 재관양식(건물 본체는 현대식 건물인데 지붕에는 기와를 얹은 것)의 박물관, 관공서 따위였다. 광복 후 우리 건축계에서 전통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것은, 김수근, 김중업이 갖가지 실험을 해보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김중업의 ‘프랑스 대사관’ (1962)은 전통의 형태와 기능적인 대사관 건축의 세련미를 잘 조화 시켰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았다. 1967년, 김수근의 ‘부여박물관’은 그 디자인이 일본의 신사건축의 모방이라고 전통시비를 일으켰다, 이는 1966년 ‘국립종합박물관현상설계 지침서’ 및 그 건설과정과 함께 한국의 건축가드레게 건축적전통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는 일제강점기동안 우리의 건축관을 가지지 못하고 지내오다가 광복 후 20년동안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가던 한국 건축계에서는 당연한 현상이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직설법적인 전통표현은 1980년대까지 관공서건축을 중심으로 꾸준히 이어졌다. 1970년대의 고도성장기,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올림픽을 통해서 건축계도 국제적인 안목을 가지게 되었고, 이땅에 서양식 거눅이 들어온지 100년, 특히 1945년 이후, 근대건축을 내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노력을 시작한지 50년이 되었다. 한국에서 근대건축은 이식기, 탐색기를 거쳐 이제는 자리자신의 건축적 어휘력을 풍부하게 늘려나가는 연마기에 들어서 있다고 할 것이다. ※ 키워드 : 한국건축, 근대, 건축의 변천사, 한국건축변천사 ※ 페이지 : 52 ~ 57
  • 조경공간 이용 후 평가 ; 자연공원의 이용 후 평가
    환경계획상의 오류를 줄이고,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주민 또는 이용자를 계획과정에 참여시키기도 하지만 또 다른 수단은 이용 후 평가로서 계획 및 설계가 완공된 후 이용자들의 선호 · 만족도와 이용패턴, 유지관리등 제반사항의 평가자료를 토대로 계획상의 미비점을 보완하여 개선하거나 유사한 계획의 의사결정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도 있다. 자연공원의 경우, 이용 후 평가란 제목이 연구결과는 아직 수행된 바가 없는 것 같다. 다만, 자연공원법 제 13조 2항에 의한 재 계획과정에서 단편적인 이용 후 평가를 시행하고 있고, 학술적으로는 자원보전관리 및 이용자 선호도, 편익개선축면에서의 접근이 있어왔다. 기존 자원가치가 우수한 자연훙경지를 대상으로 개발하는 자연공원은 계획 및 관리목표가 우수한 자원의 보존과 이용 편익도모에 있다. 따라서 자연공원의 이용 후 평가는 자원의 보전성과 이용자의 편익성이라는 2개의 핵심사항에 대한 평가를 선적으로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연공원에서의 이용후 평가는 이용자행태 및 만족도, 자원의 보존성의 평가 뿐만 아니라 자원이 보존과 이용자의 편익을 위한 공원계획과 유지관리계획의 합리성 등을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본다, 왜냐하면 고려할 수 있는 사항을 충분히 조사, 검토하고 최선의 예측을 토대로 한 계획 및 설계를 전제로 이용 후 평가의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키워드 : 자연공원. 평가, 공원 ※ 페이지 : 119 ~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