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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조경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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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이름 짓기
이번 11월호의 특집은 프랑스의 아장스 테르(Agence Ter)다. 매년 한두 호는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국내외 조경설계사무소의 근작만으로 지면을 구성한다는 편집 구상. 작년에는 마르틴 라인-카노(Martin Rein-Cano)가 이끄는 독일의 토포텍 1(TOPOTEK 1)을 실었고(2015년 2월호), 올해는 이 달에 아장스 테르를 다룬다. 온천수의 생태적 프로세스를 시각적으로 강하게 전달해 큰 화제를 모았던 ‘아크바 마기카’ 이후, 아장스 테르는 유럽을 넘어 남미와 중국에 이르는 여러 문화권에서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을 펼쳐 왔다. 특히 도시 스케일의 조경 계획과 물을 기반으로 한 대형 프로젝트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어 왔다. 만일 찰스 왈드하임의 신간 제목처럼 ‘어바니즘으로서의 조경(landscape as urbanism)’이 우리 시대 조경의 과제라면, 아장스 테르는 아마도 그것에 가장 근접한 실천을 전개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취재를 하며 모든 에디터들은 아장스 테르라는 이름의 뜻에 대해 똑같은 짐작을 했다. 아장스는 영어 에이전시(agency)와 마찬가지이니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었고, 테르는 흙이나 땅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따왔을 것이라고 믿었다. 수년 전에 출판된 그들의 작품집 제목도 ‘Territories’이고 이 중에 앞의 Ter만 다른 색으로 인쇄한 걸 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뭔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확신에 찬 진지한 목소리로 에디터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아장스 테르나 김아연 교수의 스튜디오 테라(Terra)나 결국 같은 뜻이지.” 그런데 본지 파리 리포터 박연미 선생이 공들여 진행한 인터뷰 원고를 보니 그게 아니었다. 첫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급하게 사무실 이름을 짓다가 대표가 세 명이라서 숫자 3에 해당하는 라틴어 ter를 썼다고 한다. 당황스러웠지만 재미있게 느껴졌다. 이름을 짓는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우리는 깊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논문을 다 써놓고도 제목을 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다못해 이 에디토리얼처럼 짧은 글쓰기에서도 가장 어려운 게 제목 달기다. 회사 이름 짓기, 사정은 더 하다. 이름이란 자고로 크고 좋은 의미를 담아야 한다. 이름이 운명을 좌우한다는 설도 무시할 수 없다. 어감도 중요하다. 겉멋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망설이지만 그래도 ‘뭔가 있어 보이는’ 멋은 있어야 한다. 유행도 의식할 필요가 있다.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거나 금년 『환경과조경』 지면에 등장했던 조경설계사무소 몇 곳의 이름에는 어떤 의미나 사연이 있을까. 거칠게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물론 정확하게 조사를 하거나 직접 문의를 한 건 아니다. 대부분은 짐작이고 떠도는 말을 주워 담은 이야기다). 첫 번째 유형은 작심하고 작명을 한 것처럼 느껴지는 전통적인(?) 2음절의 한자어 이름이다. 가원, 서안, 서인, 신화, 유림, 한림처럼 설립된 지 비교적 오래된 한국 조경의 대표적인 사무실들에 이런 이름이 많다. 이런 유형의 이름에서는 의미가 중요하다. 계림원, 동심원, 이화원처럼 3음절인 경우도 있는데, 이때의 ‘원’은 아마 정원이라는 조경의 대상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다음의 두 번째 유형으로 볼 수도 있겠다. 설계의 대상 자체를 이름의 중심에 놓는 경우가 두 번째 유형이다. 아장스 테르의 테르가 3이 아니라 땅이었다면 바로 이 경우다. 테라, 로사이(loci), 사이트, 플레이스랩 등이 여기에 속한다. 신생 사무실인 경우가 많다. 이 유형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엘’이 아닐까. 스튜디오 엘도 있고 디자인 엘도 있다. 참, 팩토리 엘도 있다. 소장의 성인 이(Lee)에서 따온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L은 동시에 랜드스케이프의 L이다. 땅이든 장소든 경관이든, 영어—심지어 라틴어— 표현이나 그 약자를 쓰는 게 대세다. 세 번째 그룹은 대표 조경가의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다. 전통적으로 변호사, 의사, 건축가와 같은 전문가들은 사무실 이름에 자신의 이름을 내거는 경우가 많았다. 해외의 여러 조경설계사무소 역시 마찬가지다. 특이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사례를 많이 볼 수 없었다. 오래 전의 『환경과조경』 광고란에서 매달 볼 수 있었던 ‘김종해조경설계사무소’가 내 기억으로는 이 유형의 대표 사례다. 이원은 이교원에서 교를 뺀 이름 아닐까. 흥미롭게도 지난 십여 년간 새로 문을 연 사무실인 경우, 린, 오피스박김, D스퀘어, JWL, KnL처럼 소장(들)의 이름을 쓰거나 조합하거나 응용하는 추세가 급증하고 있다. 로직은 논리가 아니라 초기 창립자들의 영문 성 첫 글자의 조합인 LOSYK이다. HLD의 뜻이 무엇일지 무척 궁금해 문의했더니 ‘호영리디자인’이라는 답이 돌아오기도 했다. 물론 신생 사무실만의 경향은 아니다. CA도 ‘진’과 어소시에이츠이니 이 유형에 속할 테고, C’Topos는 ‘최’의 땅이니 이름과 대상이 결합된 예다. 네 번째 그룹은 사무실 이름에 설계의 지향점이나 설계 태도를 담는 경우다. 마당, 라이브스케이프, 비욘드, 빅바이스몰, 사이, 어리연, 우리엔, 채움, D+H(디자인 플러스 호프(Hope)), salmworkshop 등을 떠올릴 수 있다. 다섯 번째 유형에는 기타 또는 우연 정도의 카테고리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연이 많다. 이작은 ‘이번 작품’의 줄임말이라는데, 확인한 팩트는 아니다. 스튜디오 101은 수년 전의 『환경과조경』 연재물 제목을 그대로 썼다고 한다. 이수는 소장의 딸 이름 ‘이수◯’에서 앞의 두 글자를 가져온 경우. 많은 사람들은 사무실이 이수역 근처에 있냐고 묻는다고 한다. 그룹한의 작명 사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조경에 ‘한’ 맺힌 사람들이 모여 한을 풀어보자는 뜻이라는 설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무실로 성장한 걸 보면 크다(大)라는 뜻의 우리말 ‘한’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설이 더 유력한 것 같다. 아장스 테르 특집 덕분에 우리나라 조경설계사무소들의 이름과 그 사연을 새삼 즐겁게 생각해 보았다. 전진형 교수의 리질리언스 연재가 이번 호로 막을 내린다. 6개월간의 수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올해를 마감하는 다음 호에는 여러 연재물의 마지막 원고가 실릴 예정이다. 편집실의 가을 풍경은 또 다른 시작을 새롭게 준비하느라 몹시 분주하다.
[칼럼] 꿈꾸는 자들을 위한 변명
이십대 학창 시절, 운동권 선배들의 주변부를 기웃거리며 도대체 왜 이 사람들은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꿈꾸고 싸우는가를 궁금해하던 시절이 있었다. 세상을 변혁하고자 했던 그들의 열정과 치열함을 존경했지만 나약한 나는 결국 그들의 무리에 끼지 못하고 패배자의 죄책감을 가지고 도망쳤다. 한참의 방황기를 끝내고 복학하면서, 그래, 조경이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실제로 만드는 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실천 학문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비로소 조경이라는 본연의 공부에 몰입할 수 있었다. 삼십대에 나는 대학에 자리를 잡았다. 주변에서 축하와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그 중에는 일종의 경고성 당부도 끼어 있었는데, 학생들의 눈높이가 너무 올라가지 않게 가르쳐 달라는 부탁이었다. 헛된 꿈이 커지면 겉멋이 들어 졸업 후 현실에 부딪치자마자 쉽게 포기하고 이직한다는 이유였다. 사십대인 나는 여전히 이십대와 삼십대의 에피소드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우리나라 조경의 최대 위기라는 지금, 이상향을 고민하며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현실을 망각한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발주처의 대책 없는 갑질, 터무니없는 설계비에 회사 운영을 위해서 짊어지는 박리다매형 운영 방식, 권위주의적 심의와 트집잡기 문화, 타 분야의 영역 침범, 사람을 뽑지 못해 안달하는 중소규모 회사들과 공무원 시험에 몰두하는 학생들, 주변적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징글징글한 조경의 현실은 매순간 모습을 바꿔가며 우리를 옥죈다. 교수라서 현실의 냉혹함을 모른 채 꿈 타령이나 하고 있다는 비판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꿈을 폄하하는 사람들은 지옥 같은 현실을 그들만의 전유물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조경의 본질이 새로운 세상, 변화된 세상을 꿈꾸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믿고 있다. 우리 일의 보람은 이러한 꿈과 이상을 현실로 바꾸는 힘과 과정에 있다. 이상향 혹은 유토피아. 이 가슴 설레는 단어를 조경의 본질과 연관 짓기에 부담을 느낀다면 조금 더 소박하게 표현해 보자. 좋은 공간, 아름다운 경관에 대한 상상은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조경 행위를 발생시키는 첫 단계다. 꿈은 비루한 현실을 변화시키는 첫 걸음이다. 유토피아는 땅 혹은 세계를 의미하는 ‘topos’에 ‘존재하지 않는’ 혹은 ‘좋은’ 이라는 이중적 의미의 접두사 ‘eu’를 붙인 합성어다. 16세기, 중세로부터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목격한 사회의 극단적인 탐욕과 부조리와 폭력성과 불평등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라는 대작을 탄생시켰다. 그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저마다의 유토피아를 정의하고 세부적인 작동 방식을 제시해 왔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유토피아를 실제로 구현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루이스 멈퍼드는 유토피아를 도피적 유토피아와 재건적 유토피아로 분류했는데, 두 유토피아의 차이는 지옥 같은 현실 세계를 그대로 두는 것과 그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와 실행력의 차이로 이해될 수 있다. 즉 현실에 대한 태도의 차이에서 그 방식이 달라질 뿐, 유토피아의 본질은 현실 그 자체에 대한 엄중한 성찰과 비판에 있다. 도시 공원의 양식적 진화에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픽처레스크 정원은 ‘이상향으로서의 자연’을 실제로 구현한 것이다. 근대의 도시 공원은 아르카디아Arcadia라는 도피적인 유토피아를 실제 도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재건적 유토피아로 변형시켰다는 데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최초의 시민 공원인 영국의 버컨헤드 공원, 여기에서 큰 영감을 받아 만든 미국의 센트럴 파크는 모두 열악한 도시 상황과 피폐한 현실을 벗어나 이상향으로서의 자연을 건설하고자 한 집단적 욕망이 실제 공간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바꿔 말하면 근대 조경의 시작은 유토피아를 시민의 일상 영역에 만들어 그들에게 현실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순기능의 도시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공원의 질적 변화를 유도했던 라빌레트 공원, 다운스뷰 공원, 하이라인 공원 등 우리가 부지런히 ‘벤치마킹’해 왔던 공원들은 모두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 인식과 더불어 그 공간에 펼쳐질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상을 통해 새로운 생명력을 갖게 된 사례들이다. 급하게 베껴 비슷한 모양새로 만들어 봐도 감동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원작 공원에 배어 있는 그들의 꿈과 비전까지는 벤치마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꿈과 비전을 실현하기까지의 구구절절한 과정을 벤치마킹하지 못한 탓이다. 우리가 그렇게 가벼이 여기는 꿈은 현실의 다른 모습이며 서로를 떼어놓을 수 없는 암수한몸이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에 나는 곧잘 학생들에게 자신이 꿈꾸는 이상향이나 유토피아를 그려보라고 한다. 어떠한 형태를 갖추든, 그들의 유토피아에서 현실은 악으로, 문제로, 고난으로, 디스토피아로 규정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날카롭게 해석하듯이, 근대의 유토피아가 앞으로의 세상에 대한 희망을 전제로 세계의 진보를 낙관적으로 표상하는 것이라면, 현대의 유토피아는 지금 세상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한다. 또한 현대의 유토피아적 상상은 집단적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이고 건설적이라기보다는 도피적이다. 무한 경쟁에 내몰리고 생존과 도태에 대한 두려움, 불확실성과 공포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대한 혐오, 나만이 누릴 수 있는 도피처,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는 무기력함, 이 모두가 학생들이 그린 유토피아 하나하나에 슬픈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최근 헤더윅 스튜디오의 전시와 이번 호의 특집인 아장스 테르의 작업을 보면서 나는 현대 유토피아에 대한 또 다른 버전을 발견한다. 다양한 프로젝트의 멋진 화보 이미지를 관통하는 강렬한 에너지는 더 나은 세계, 더 좋은 삶에 대한 집단적 상상과 실천 의지다. 아장스 테르의 작업을 들여다보면서, 치열한 현장에 대한 탐구, 더 좋은 삶에 대한 꿈과 비전, 전문가의 역할에 대한 확신, 세 명의 소장과 직원들의 집단 창작 과정에 대한 믿음이 이러한 작품들을 가능하게 만든 근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꿈과 가치를 공유하는 집단적 창작 방식은 우리에게 과연 사치일까? 해외의 멋진 작품을 접할 때마다 그들의 선진적인 발주 시스템, 전문가를 우대하는 사회적 풍토, 현실적인 설계비, 고용 안정성등을 부러워하며 한숨짓는 무기력 대신, 오늘은 당당하게 우리의 꿈을 이야기하자. 꿈과 현실의 변증법, 그것이 조경의 본질이므로. 김아연은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이자 느슨한 설계 집단 스튜디오 테라의 대표로서, 조경 설계 실무와 설계 교육 사이를 넘나드는 중간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자연과 문화의 접합 방식과 자연과 커뮤니티의 변화가 가지는 시학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작업을 하고 있다.
[아장스 테르] 디자인 철학
도시, 건축, 조경의 연계 일반적으로 도시계획가, 건축가, 조경가들이 각자의 영역을 고수하려고 하는 것과 달리 아장스 테르의 설립자이자 공동대표인 앙리 바바, 미셸 오슬레, 올리비에 필립은 도시·건축·조경을 가로지르는 접근을 통해 전문 영역의 한계를 실험한다. 아장스 테르는 전문 지식을 꾸준히 강화하고 넓혀 왔으며 조경의 관점에서 복잡한 도시계획 프로젝트에 해답을 제공한다. 아장스 테르는 조경이 거대한 도시적 변화를 이끄는 요인으로 기능한다고 믿는다. 세 공동대표와 아장스 테르의 디자이너들은 공간의 혁신을 촉발하면서도 기존의 구성 요소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개념적 접근 방안을 제시하기 위해 기존 환경과 맥락에 주의를 기울이고 특별한 경관 요소가 있는지 주목한다. 물리적·지리적·역사적인 요소를 기초로 삼고 프로젝트의 핵심을 개념화함으로써 프로젝트와 관련된 이해 당사자들과 지역 주민들이 공간의 변화를 쉽게 이해하고 함께 미래를 고민할 수 있게 돕는다. 맥락적 접근 방식과 개념적 접근 방식이 서로 대립하지 않고 균형을 이룰 때 지구 단위 계획에서부터 도시 간 계획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지혜롭게 수행할 수 있다. 테리토리territory에 대한 온전한 이해, 미래의 도시 경관을 그리기 위한 전제 조건 아장스 테르는 설립 초기부터 대규모의 프로젝트를 수행할 기회가 주어졌다. 다양한 경험을 추구했던 세 공동대표는 프랑스 오피스를 기반으로 기아나와 독일에 지사를 두고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다양한 문화적 맥락에서 테리토리와 관련한 여러 쟁점을 경험함으로써 광대한 규모의 프로젝트에도 적응할 수 있는 실무 능력과, 보편적인 주제를 유지하면서도 문화적 특수성을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었다. 현재 아장스 테르는 대상지의 지리적 특성과 경관을 도시 문제의 중심에 놓는 디자인 리서치를 통해 대도시 규모의 부지에 접근한다. 또한 그와 같은 접근 방식으로 프로젝트의 초기 단계에서 모든 이해 당사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변화의 도구를 제공한다. 지리학을 도입한 통합적 접근 방식 현대 도시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도시, 도시 근교, 도시 외곽의 변화는 때론 그보다 더 큰 차원의 계획에서 다뤄져야 한다. 아장스 테르의 목표는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도시의 변화와 양상을 조경의 관점에서 꿰뚫어 보는 것이다. 우리는 도시의 문제를 조경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새로운 도시 형태를 그려나갈 수 있다. 아장스 테르는 이러한 믿음과 희망 아래, 프로젝트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환경, 지표수 관리, 에너지 효율, 공공 공간 관리의 최적화, 새로운 재료와 기술의 적용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다양하게 실험하고 도전한다. 새로운 도시 구조의 탄생이 대상지의 생물 다양성을 강화하는 것처럼 테리토리를 둘러싼 맥락을 먼저 고려하고 이해해야 지속가능한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 아장스 테르는 기존에 존재하는 도시적 맥락을 활용해 삶의 새로운 방식을 창출해낸다. 우리의 열린 사고와 지적 호기심,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열망은 조경을 출발로 삼는 동시에 한계를 두지 않고 새로운 영역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 환경과조경 343호(2016년 11월호) 수록본 일부
[아장스 테르] 네 가지 디자인 전략
01. Recreate Landscape Park in Perpetual Motion Created by Management of Water 물 관리를 통해 끊임없이 유동하는 경관을 재창조하다 경관은 고정되고 안정된 불변의 주변 맥락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환경이다. 경관은 물처럼 흐름이 교차하는 것이다. 프로젝트의 단초로서 부유floating는 자연의 주기와 함께 아장스 테르의 작업에서 계속 다뤄지는 주제다. 시적이면서 창조적일 뿐만 아니라 파괴적인 힘을 지닌 물, 눈에 보이며 보이지 않고 잠재되어 있으면서도 도처에 있는 유동하는 물은 오랫동안 경관의 형상을 만들어 왔다. 물은 강이나 시냇가, 지하수처럼 대지와 상황에 따라 아주 상이한 형태를 띤다. 물은 테리토리territory의 속성을 드러내고 표현한다. 물은 프로젝트의 구성 요소이며, 공간의 형상을 만들어내며, 나타났다가 사라짐으로써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물은 공공 공간에서 부드러운 움직임을 유도하고 경계를 조정하며 놀라움을 연출한다. 물은 특별한 경관을 조성해주고, 여기에 적용된 추상적 제안들을 산출해내며, 이것은 공공장소에 그대로 반영되고 프로젝트를 ‘유일무이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유용한 공공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 우리는 기술적이자 질적이며 지속가능하면서도 편리한 새로운 해결안을 끊임없이 실험하고 있다. 물과 식물, 경관을 다루는 방식은 우리 프로젝트에 체계적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물이라는 주제와 그 관리는 프로젝트의 일차 도면에서부터 포함되는 항목이다. 불로뉴의 비양쿠르 공원처럼 전체 프로젝트를 ‘수압 장치hydraulic installation’로 변형시킨다거나, 푀플 드 레르브 공원처럼 습지 보존에 주력함으로써, 물이 주는 자원을 잘 관리하려는 지향점은 우리 작업의 핵심이다. 02. Water-Based Urbanism, the ‘Founding Element’ of a New Metropolitan Identity 물의 어바니즘, 메트로폴리스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위한 ‘기초 요소’가 되다 물과 어바니즘은 상당히 오래된 관계다. 역사적으로는 인류의 초기 문명이 출현했던 삼각주 지역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대규모의 하천 유역 또는 소규모 운하를 통한 전략적 도하 등에서도 이를 찾아볼 수 있다. 도시 중심에서는 (천연자원이자 운송 수단이었던) 물로의 접근이 중요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홍수 조절이나 비옥한 토지를 만들기 위한 관개 등의 이슈가 수 세기 동안 주요 인프라스트럭처 건설의 핵심으로 떠올랐으며 대규모 지역 개발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산업화와 집중화 시기를 지나며 중요한 자원을 잃어버렸던 여러 도시들은, 도시가 세워졌던 맨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이제 물은 다시 도시 생활 환경의 질적 요소로 인식되며 매력적인 도시 이미지와 새로운 도시 아이덴티티 확립을 가능하게 한다. 도시의 물과 주변 지역은 도시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으며, 자연 환경 개발을 가능하게 하고 레저 활동 구역을 제공해 준다. 아장스 테르의 설계 접근법은 물water, 지층strata, 수평선horizon을 프로젝트의 기초 원칙으로 삼는 것, 그리고 다음의 두 가지 목표를 표현하는 것이다. 첫 번째 목표는 현재 다양한 수변 공간―강, 바다, 운하 등―과 도시 사이의 분리를 없애는 것이다. 수리학적 논법은 아장스 테르의 전략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다. 물과 관련된 설계 전략은 워터프런트의 재활성화를 목표로 하며, 이는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강력한 아이덴티티와 새로운 활력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수변 지역의 투수성과 연결성을 재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이는 워터프런트에 인접한 지역에서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고, 주변 도시 조직과 개성적이고 매력적이며 독특한 관계를 창출하기 위함이다. 도시의 수자원을 이루는 구성 요소―강, 계곡과 유역, 지류, 집수 구역, 침식, 지형, 범람원 등―와 결합된 자연 경관 시스템은 거듭 변화하는 도시 환경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메타포이며, 결과적으로 이 시스템은 오늘날의 복잡한 도시 문제에 해답을 내는 기초가 된다. (가능한 범위 내의) 수위水位를 기준 높이로 잡을 때, 물리적·시각적 지속성이 확립된 새로운 수평선의 높이를 결정할 수 있다. 두 번째 목표는 물에 기반한 어바니즘water-based urbanism을 메트로폴리스의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내는 수단이자 방법론으로 보는 것이다. 물을 도시의 근본적 연결 고리로 이용할 때 상호 공동적인 아이덴티티를 창출할 수 있다. 특정 테리토리를 지향한다는 것은, 곧 마을과 도시 혹은 보다 더 거대한 규모의 지리학적 지역을 구성하는 기초가 되는 경관의 논리를 읽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아장스 테르의 목표는 다양한 스케일에서의 즉각적인 작업을 통해 해당 지역을 위한 비전을 실현하는 것과 동시에, 도시와 수자원 시스템 사이에 일상적 관계를 제안하는 것이다. 물은 우리 지역의 지맥veins이자 미래 도시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이상의 목표를 위해 개발된 전략은 도시 시스템과 자연 시스템 간의 시너지 관계를 주제로 다루며, 물의 위험 요소를 간과하지 않으면서 물을 활용할 때의 이점을 고려하고 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43호(2016년 11월호) 수록본 일부
[아장스 테르] 생 투앙 대공원
센 강변의 도크 지구 공동 개발Joint Development Zone of the Docks은 100헥타르 규모의 대규모 프로젝트로 파리 성문에 있는 생 투앙 역사 지구의 가장자리에 있다. 이 프로젝트는 거의 한 가지 기능만 하던 산업 지대를 기존 도시와 완전히 하나로 엮어 새로운 친환경 종합 개발 거점으로 변모시킨다.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되는 12헥타르의 강나루 공원은 센 강변에 넓은 오픈스페이스를 제공한다. 이 공원은 빈 공간과 매스가 교차하는 모습으로 구상되었으며 자연을 위한 공간과 공공을 위한 정원으로 구체화되었다. 생 투앙 대공원은 여유로운 공간과 다양한 분위기 덕분에 각기 다른 종류의 즐거움과 체험을 안겨준다. 빛과 그림자, 고요하고 내밀한 공간과 붐비고 역동적인 공간, 넓고 열린 조망과 틀에 맞춘 광경 등 상반된 풍경은 공원의 다양한 표정을 연출한다. * 환경과조경 343호(2016년 11월호) 수록본 일부 Landscape Architect Agence Ter Collaboration Agence Ter Architectures, BERIM, Coup d’Éclat,Biotope, ISL, Phytorestore, Skatepark Service Conseil, Razel Client Sequano Aménagement Location Saint Ouen, France Area 12ha Completion 2012 Photographs Agence Ter
[아장스 테르] 비양쿠르 공원
트라페즈Trapèze에 있는 비양쿠르 공원과 과거의 산업 지역을 재생시키는 이 프로젝트는 센 강과 도시가 갖고 있는 자연과 도시의 이중성에서 출발했다. 이제 공원과 연결되는 부두에서 범람하는 강물과 자갈밭, 작은 섬과 습지의 살아 있는 경관을 바라볼 수 있다. 새롭게 조성된 비양쿠르 공원은 이전 세기의 풍경화식 공원을 새롭게 재창조했다. 정적이었던 과거의 경관 연출은 자연의 체계가 지닌 변주와 변화, 불확실성으로 대체되었다. 기능에 맞게 공원 지형의 높이를 설정했다. 몇몇 구역은 변화하는 수면의 높이보다 항상 위나 아래에 있고, 그 외에 다른 곳은 정원의 배치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 모한다. 이러한 미묘한 자연의 변화는 센 강변의 풍경과 연속성을 갖는다. 대상지의 규모와 위치 때문에 비양쿠르 공원은 센 강변에 새롭게 조성된 리브 드 센Rives de Seine 지구의 핵심적 경관을 이루고 있다. 공원의 형상은 북쪽의 트라페즈 대도시 구역과 센 강변Banks of the Seine 사이에 새로운 지구를 조성하기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의 주요 지침에 따라 만들어졌다. 공원의 선적인 형상과 강둑으로 에워싸여 움푹 파인 지형 때문에 공원은 마치 식재된 부두처럼 보이며, 주택과 사무실 건물 사이에서 도시의 녹색 허파 역할을 한다. 지역 주민들은 공원에 직접 들어가지 않고도 경관을 즐길 수 있다. 난간 역할을 하는 콘크리트 계단에 앉아 계절마다 바뀌는 공원의 풍경과 센 강의 수위에 따라 변화무쌍한 수변의 모습을 만끽할 수 있다. 센 강을 향해 탁 트인 이 경관은 불로뉴-비양쿠르 시와 강을 다시 연결하는 계기를 열어준다. 아장스 테르는 전체적인 도시 프로젝트의 하나로서 ‘도시에 정박한 자연 섬’을 조성하는 안을 제시했다. 이안의 목표는 감상을 위한 경관을 조성했던 19세기의 풍경화식 공원을 재해석하고 자연 요소들의 불확실성과 변화하는 특성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어떤 구역은 원상태로 유지되고, 다른 어떤 구역은 자연에 의해 변화하며 수위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형의 과정을 겪게 된다. 따라서 정원의 전체적인 형상은 주기적으로 재구성된다. * 환경과조경 343호(2016년 11월호) 수록본 일부 Landscape ArchitectAgence Ter CollaborationSetec TPI, Biotope ClientSAEM Val de Seine Aménagement LocationBoulogne-Billancourt, France Area7ha Design Period2011~2017 PhotographsAgence Ter, Didier Raux, Yves Marchand & Romain Meffre
[아장스 테르] 푀플 드 레르브 공원
푀플 드 레르브 공원Parc du Peuple de l'Herbe은 센 강과 카리에르 수푸아시Carrieres-sous-Poissy 사이에 위치한 샹틀루Chanteloup의 사행천 인근에 있다. 약 100헥타르가 넘는 부지는 농업과 골재 채굴 등으로 이용되면서 한 세기가 되기도 전에 그 모습이 완전히 변해버렸고 현재는 실질적인 기능을 소화할 만한 어떠한 공간도 이곳에 남아 있지 않아 도시로부터 점차 단절되었다. 지금은 큰 호수 두 개와 오래된 도시 성벽이 드넓은 풀밭에 군데군데 드러나 있다. 센 강의 도도한 풍경을 향해 탁 트인 광활한 모습은 이 부지가 하천과 연계된 곳임을 상기시켜준다. 이블린 현 의회Conseil Général des Yvelines는 미개발되어 방치된 이곳을 많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 장기적으로 활용 가능한 청정 공간으로 유지하기 위해 대규모 공원으로 탈바꿈시키기로 결정하고, 다음의 세 가지 원칙을 공원 설계에 요구했다. 첫째, 대상지의 생태적인 특성을 강조할 것. 둘째, 공원 주변의 도시적 맥락을 센 강 쪽으로 끌어들여 강의 풍경을 재정의 할 것. 셋째, 곤충을 테마로 한 레크리에이션 시설물과 교육 시설을 제공하여 방문객을 유도할 것. * 환경과조경 343호(2016년 11월호) 수록본 일부 Landscape ArchitectAgence Ter CollaborationEcosphère, Infraservices, Nez Haut, Atelier d’Ecologie Urbaine, Hydratec ClientConseil Général des Yvelines LocationCarrieres-sous-Poissy, France Area113ha Design 2013~2016 PhotographsAgence Ter, Alexandre Petzold
[아장스 테르] 황푸 강 동안
상하이 시 당국은 황푸 강 동쪽 21km 유역의 대규모 재건 사업에 착수했다. 프로젝트 대상지는 메트로폴리스의 중심부로 현재 비어 있는 강 연안 지역에 새로운 생활 방식을 만들고, 강 전역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함으로써 메트로폴리스에 높은 가시성과 강한 아이덴티티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프로젝트는 인근 마을과 황푸 강, 그리고 새로운 폭의 강변 지역을 연결하는 유연한 교통, 생태, 공공 공간, 다양한 활동 및 경제 간 활성화된 인터페이스 창출을 위해 수변 공간을 새롭게 규정한다. 폭이 다른 세 개의 선형 공간―메인 패스(main path), 스포츠 패스(sports path), 디스커버리 패스(discovery path)―은 서로 다른 흐름과 이용 유형에 따라 구조화되며, 21km 길이의 강둑을 따라 계속 이어진다. 각각의 길에는 강둑을 활성화시키며 강변에서 할 수 있는 새로운 활동을 만들어내는 주제별 시설들이 들어선다. 강둑은 일상생활과 야간 활동을 위한 도시의 배경이자, 대규모의 지역 행사와 국가 행사를 개최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메인 패스는 프로젝트의 주된 중심축이다. 이 길은 쾌적하고 매력적인 보행자의 산책로로서, 길거리 음식 장터나 놀이터, 잔디밭에서의 야외 활동과 같은 일시적이거나 지속적인 범위의 활동을 제공한다. 스포츠 패스는 주로 자전거 타는 사람, 조깅하는 사람, 새로운 도시 스포츠의 팬 등을 위한 길이다. 다양한 활동(피트니스 시설, 탁구대, 스포츠 경기장 등)이 강변을 따라 길게 뻗어 있다. 디스커버리 패스에서는 강변 지역의 아름다움과 자연·문화·건축적 유산의 풍요로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주의를 기울여 이곳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면, 황푸 강과 메트로폴리스 경관의 특별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자연 공간은 지역 내 동식물 보호 및 종 다양성을 강조해 조성된다. * 환경과조경 343호(2016년 11월호) 수록본 일부 Landscape ArchitectAgence Ter CollaborationJacques Ferrier Architectures, Sensual City Studio, Concepto, AND ClientShanghai East Bund Investment Group LocationShanghai, China Area 350ha Competition2016 Completion2019
[아장스 테르] 스트라스부르 강변 개발
일Ill 강과 라인 강의 강둑 지역을 대상지로 하는 이 프로젝트는 과거의 항구 공간을 재개발하는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의 야심찬 정책 중 최종 단계에 해당한다.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 지역인 대상지는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와 독일의 켈Kehl을 잇는 다리를 통해 하루 3만6천 대의 차량이 통행하며, 이중 65%가 양 도시권 내를 이동하고 있다. 에이리츠Heyritz, 말로Malraux, 다뉴브Danube 시가지에서 시작하는 강의 다이내믹한 경관은 켈에 도달하는 트램 D 라인이 2017년 새롭게 연장됨에 따라 더욱 강화된다. 강을 따라 펼쳐지는 도시의 파사드와 라인 강 일대의 메트로폴리스로 통하는 새로운 입구를 갖게 된 스트라스부르는 이례적인 규모의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이 프로젝트는 다음의 세 가지 구조적 중심축에 따라 진행되었다. 먼저, 도시와 항구의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을 조성한다. 주거와 상업 활동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혼성적 도시 조직의 출현은 도시 인프라의 통합 및 인터페이스를 위한 경관적 처리, 지상의 활동 프로그램과 함께 시작된다. * 환경과조경 343호(2016년 11월호) 수록본 일부 Landscape ArchitectAgence Ter Collaboration51N4E, list, OTE, OTELIO ClientSPL 2 rives LocationStrasbourg, France Area72ha Competition2015 Completion2024
[아장스 테르] 가론 대공원
최근 조직된 툴루즈 도시 권역Greater Toulouse 도시 공동체CUGT는 대규모 도시 프로젝트를 주관하는 단체로, 2010년, 미래에 남북을 연결하게 될 동맥인 가론Garonne 강 및 운하 마스터플랜 개발을 위해 아장스 테르 팀을 선정했다. 아장스 테르는 툴루즈 시 밀집 지역 내에 도시 공원이나 자연 공원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가론 대공원Grand Parc Garonne의 조성을 제안했다. 가론 강의 자연적 동맥은 그 가능성이 거의 개발되지 않은 상태로, 전체 도시 권역 규모에서 거대한 연합을 이루고 통합적 공원을 조성할 수 있는 이상적인 환경이었다. 마스터플랜은 가론 강 및 주변 지역을 도시의 중심지로 부상시키고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초점을 두었다. 가론 대공원은 시민을 다시 강으로 불러들이고 그동안 잊혀 온 도시의 아이덴티티를 만나게 할 것이다. 가론 대공원의 마스터플랜에는 세 가지 조성 원칙이 있다. 첫 번째 원칙은 거의 개발되지 않았지만 개발 가치가 있는 부지를 자본화하기 위해 경관 및 환경적 맥락을 강화하는 것이다. 두 번째 원칙은 교통 네트워크의 불연속성을 안정화하는 것이다. 이는 공원으로의 접근을 용이하게 하고 공원 전체의 교통 네트워크에서 불연속적인 구간들을 제거하는 것을 뜻한다. 이 전략은 ‘비아 가로나Via Garona’라는 전체 길이 32km의 보행자 및 자전거 도로 중심축 조성을 통해 구현되며, 다양한 제2의 네트워크(보도, 스포츠 순환 도로, 항해 코스 등)와 연결된다. 아장스 테르는 특히 ‘가론 게이트Garonne Gates’를 통해 공원으로 들어가는 출입구 부분을 강조했는데, 이곳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복합 수송 플랫폼의 역할을 담당한다. 세 번째 원칙은 전체 강 유역을 따라 매력적인 관광 명소를 개발하여, 툴루즈 도시 권역의 문화 정책을 보완하는 문화·실천 지역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이상의 세 가지 조성 원칙은 가론 강 유역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단순한 선형의 녹색 지역이 아니라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3,000헥타르가 넘는 규모의 중요한 도시 공원이라는 생각을 구체화한다. 가론 대공원에서는 센트럴 파크나 뱅센 숲Bois de Vincennes처럼 단일한 미적 접근을 제공하는 여타 주요 공원과는 다르게 통합보다는 다양성이 강화될 것이다. 다양한 경관으로 이루어지는 이 공원은 미래를 위해 반드시 조성되어야 하는 국가적·대륙적 규모의 생태 이동 코리더를 구현한다. 몇 개의 연속적인 ‘공원’이 조성되면서 서로 다른 경관 시퀀스가 하나의 대규모 공원으로 이어질 것이다. * 환경과조경 343호(2016년 11월호) 수록본 일부 Landscape ArchitectAgence Ter CollaborationDe Hoym de Marien Architectes, BIC FL, Arcadis, ISL ClientCommunauté d’Agglomération du Grand Toulouse LocationToulouse, France Area3,000ha Design2011
[아장스 테르] 아크바 마기카
1997년 바트 외인하우젠Bad Oeynhausen과 뢰네Löhne의 온천 마을은 2000년에 개최될 정원 박람회 ‘란데스가르텐샤우Landesgartenschau’의 설계 및 전시 계획 국제 공모전을 개최했다. 우리는 정원 박람회가 6개월 동안만 진행된다는 점에 주목해 지속가능하며 공공 공간을 통합적으로 고려한 설계안 아크바 마기카Aqua Magica를 제출했고,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우리의 작품은 지하수를 겉으로 드러내 물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일시적인 정원이자 전시물이다. 대상지의 온천수에는 다양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성분이 함유되어 있어, 수 세기 동안 온천 마을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온천수는 지표면 밖으로 흘러나오자마자 치료소나 온천 시설로 옮겨지는데, 우리는 온천수가 스파나 치료소 같은 닫힌 공간에서 해방되어 열린 공간에서 그 우수성을 뽐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질학적 분석을 통해 공원 아래에 온천수가 흐르는 대규모 지하 단층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크바 마기카’는 이 지하 단층을 지칭하는 말이다. 우리는 지하 구역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조성해 보이지 않던 경관을 겉으로 드러내고 온천수를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지하 단층은 공원의 전체적인 형태를 결정짓는 윤곽선의 역할도 한다. * 환경과조경 343호(2016년 11월호) 수록본 일부 Landscape ArchitectAgence Ter ClientLGS 2000 Bad Oeynhausen-Löhne LocationBad Oeynhausen, Germany Area35ha Completion2000 PhotographsAgence Ter
[아장스 테르] 코르마이에스 공원
파리 외곽의 구 공업 지대에 위치한 코르마이에스 공원Parc des Cormailles은 철로를 따라 조성된 공원이다. 원경을 느낄 수 있는 공원, 도시적인 공원, 사적인 정원 등 다양한 스케일의 공간으로 구성된 공원은 기차역과 이브리 쉬르 센Ivry Sur Seine 중심부를 잇는 새로운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대상지의 서측에는 센Seine 강이 흐르는데, 강이 범람하면 강물로 인해 인간이 대지에 만들어놓은 구획이 일시적으로 사라지고 주변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바뀌게 된다. 우리는 이 같은 강의 특성과 맞물린 이른바 ‘수평 상태’의 공원을 조성하고자 했다. 수평적인 공원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커다란 잔디밭이며, 수평선을 뚫고 나타나는 요소로는 수로를 따라 들어선 건물과 돌무더기로 이루어진 둔덕 정도가 있다. 둔덕은 오래된 공장이 철거될 때 만들어진 일종의 전망대다. 도시의 스카이라인,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 철로 위를 다니는 기차 등을 바라볼 수 있어 포토존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또한 둔덕에 설치된 나선형 램프를 통해 둔덕의 경사지에 조성된 어린이 놀이 공간으로 진입할 수 있다. * 환경과조경 343호(2016년 11월호) 수록본 일부 Landscape ArchitectAgence Ter CollaborationEPDC, BERIM ClientSADEV 94-Val de Marne Department LocationIvry Sur Seine, France Area9ha Completion 2006 Photographs Agence Ter, Yves Marchand & Romain Meffre
[아장스 테르] 다르 에스살람
다르 에스살람Dar Essalam 공공 공간 정비의 핵심 아이디어는 ‘푸른 심장green heart’이다. 키가 큰 나무를 곳곳에 식재했고, 기존 과수원의 방풍림과 새로 식재되는 수목이 수직으로 만나도록 배치해 넓은 숲 속에 너른 녹지가 드러나도록 했다. 아장스 테르는 방풍림을 이루는 나무들을 보존해 장소의 기억과 과거 농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흔적으로 남기고자 했다. 방풍림과 직각으로 만나는 카수아리나casuarinas 나무와 사이프러스 울타리를 통해 도시의 구조를 엿볼 수 있으며, 이는 도로와 주거 공간을 형성하는 뼈대 역할을 한다. 또한 장소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작은 녹지들을 중앙의 공원과 연결해 도시 경관의 토대를 이루도록 했다. 경관 정비를 위해 다르 에스살람 중앙의 4헥타르에 이르는 개발 녹지를 보존해 농업 기술을 전승하자는 안이 세워졌다. 이 녹지는 중앙 공원의 일부로 활용되는데, 공공을 위한 부분과 녹지의 용도를 구분하기 위해 적절한 경계가 설정된다. 제방을 따라 식재된 키가 큰 수목들은 멀리서도 보여 경관의 높은 층위를 이루며, 이는 새로운 지평선과 깊이를 형성하고 독특한 분위기를 창출한다. * 환경과조경 343호(2016년 11월호) 수록본 일부 Landscape ArchitectAgence Ter CollaborationReichen et Robert & Associés, MB ClientIMMOPTIMA LocationRabat, Morocco Area20ha Completion2013 PhotographsAgence Ter, Alain Bujak
[아장스 테르] 라 바쉬 느와르 교차로
라 바쉬 느와르 교차로Carrefour de la Vache Noire 프로젝트의 목표는 구도심에 부족한 공공 공간을 제공하고, 도시 조직과 인프라로 포화 상태인 도시에 상징적인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2006년 SADEV 94Servir les Ambitions Économiques du Val-de-Marne 94(도시계획과)는 ‘바쉬 느와르 교차로 리노베이션 프로젝트’ 공모를 개최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많은 조경가가 독특한 구조물과 예상치 못한 장소에 공공 공간을 만드는 안을 제시했다. 우리는 공공을 위한 옥상 정원과 도시 광장으로 변형한 교차로를 조성하는 안을 제안했고, 프로젝트의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바쉬 느와르(검은 암소)’라는 독특한 명칭은 20세기 아르파조네Arpajonnais 철길 위에 소가 누워 기차 통행을 막은 뒤, 아르파조네의 철도 운행 자체가 중단된 일화에서 유래했다. 이후 철길은 없어졌으나 아르파조네는 주요 차도로 사용되었으며, 보행자의 통행이 어려운 교차로가 되었다. 프로젝트에서 해결해야 하는 사항은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도시에 제대로 된 진입 광장을 만드는 것이고, 두 번째는 교차로를 보행자가 쉽게 오갈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기 위해 교통을 통제하는 것이다. 마지막은 장소에 얽혀있는 검은 암소에 대한 이야기와 역사를 드러내는 것이다. * 환경과조경 343호(2016년 11월호) 수록본 일부 Landscape ArchitectAgence Ter CollaborationBERIM, Coteba ClientConseil Général du Val de Marne, SADEV 94 LocationArcueil, France Area3ha Completion2012 PhotographsAgence Ter, Camilla Pongiglione, Yves Marchand & Romain Meffre
[아장스 테르] 카노피아 우르바나
디아고날Diagonal에 위치한 토레 아그바르Torre Agbar는 건축가 장 누벨이 설계한 타워로 바르셀로나의 랜드마크다. 타워 인근에는 교차로 ‘플라카 데 레스 글로리에스 카탈라네스Plaça de les Glòries Catalanes’가 자리 잡고 있는데, 바르셀로나 시는 이 교차로를 지하화하고 상부를 공공 공간으로 재탄생시키고자 했다. 2013년 바르셀로나 시는 교차로를 도시의 새로운 구심점으로 만들기 위해 국제 지명 설계공모를 개최했다. 공모전에 초청받은 우리는 자연을 중심으로 새로운 경관을 형성하는 카노피아 우르바나Canòpia Urbana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2014년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카노피아 우르바나의 목표는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 목표는 도시와 자연을 결합하는 도시 생태 시스템의 개발이다. 두 번째는 지하와 지상을 비롯해 도시의 경관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는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며, 마지막 목표는 도시 광장과 공원의 기능을 모두 담을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는 것이다. 대상지는 세르다Cerdà시의 중요한 축에 위치하고 있으며 15헥타르에 달해 우리의 목표를 모두 달성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공간이라 여겨졌다. * 환경과조경 343호(2016년 11월호) 수록본 일부 Landscape ArchitectAgence Ter CollaborationAna Coello de Llobet, Factors de Paisatge / Manuel Colominas, Estudi Xavier Mayor, JG Ingenieros, Frances Xairo Associats SL ClientCity of Barcelona, Barcelona d’Infraestructures Municipals SA LocationBarcelona, Spain Area15ha Competition2014 Completion2020 GraphicsAgence Ter & Ana Coello
[아장스 테르] 조경이 만드는 도시
지난 7월 18일 아장스 테르의 파리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프랑스 니스에서 테러가 있은 직후였다. 사뭇 긴장감이 도는 파리의 분위기와는 달리,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사는 동네의 옛 건물을 개조한 그들의 사무실에서 끊임없는 농담과 진지한 대화가 세 시간 넘게 이어졌다. 그날의 흥미로운 인터뷰를 옮긴다. 박연미(이하 P):아장스(회사) 이름이 특이하다. ‘ter’의 의미가 무엇인가? 아장스 테르(이하 T):첫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서류에 써 넣을 이름을 급하게 만들었다. 복잡하고 대단한 이름이 아니라 우리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이름을 찾았다. 공동 대표가 세 명이라 라틴어에서 숫자 3을 의미하는 ‘ter’라는 말을 땄다. P.발음으로는 ‘테르terre’라고도 읽을 수 있다. T.만들고 나니 그렇더라. 프랑스어로 ‘테르’는 땅, 흙을 의미한다. 경관을 다루는 일은 내가 딛고 있는 땅에서부터 시작한다. 또한 지구를 뜻하는 이 말은 프랑스를 넘어서 전 세계로, 정원에서 도시까지 스케일과 장르를 넘나들며 경계 없이 일하겠다는 우리 의도와 잘 맞아 떨어졌다. 무엇보다 이 단어로 많은 말장난을 할 수 있어 사람들이 쉽게 기억한다. 그 후 30년 동안 바꾸지 않고 쓰고 있다(웃음). P.셋이 만나 창립하게 된 배경은 어떻게 되는가? T.1970~1980년대에는 유럽 조경 사회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파리 외곽 도심지 재정비 사업인 라빌레트 공원이 탄생하면서 오랫동안 도시계획에서 소외되었던 조경이 인프라 중심의 현대 도시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으로 제시되었다. 공원 이외에도 공공 영역에 대한 관심이 확장되면서 자크 시몽Jacques Simon(1929~2015)이나 미셸 코라주Michel Corajoud(1937~2014)와 같은 실험적이고 이론과 실천을 넘나드는 대가들이 기존의 베르사유 왕실원예학교를 현재의 베르사유 국립조경학교로 재탄생시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미셸과 앙리는 베르사유 국립조경학교 졸업 후 알렉상드르 셰메토프Alexandre Chemetoff 회사에서 팀장으로서 실무를 경험한 올리비에를 만났다. 1984년, 셋은 빠르게 합의를 보고 아장스를 차렸다. P. 셋은 프랑스인이고 프랑스 국가 공인 조경가 자격을 가지고 있다. 이력은 매우 닮아 있지만 그 전의 배경은 다양하다. T.우리 셋은 태생이 다양하다. 프랑코 이탈리아 튀니지 출신의 앙리, 독일계인 미셸, 인도에서 자란 올리비에. 조경가paysagiste 이전에 각자는 생물학, 미술, 세노그라피(무대장식), 여행 등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문화적으로 복합적인 아장스 DNA는 지금의 아장스 테르가 다양한 프로젝트를 할 수 있게 한 자산이다. * 환경과조경 343호(2016년 11월호) 수록본 일부
[공간 공감] 숲을 디자인하다
내가 좋아하는 조경가 한 명은 이렇게 얘기했다. 숲에서 놀아보지 않은 자는 설계하지 말라고. 그만큼 숲은 자연을 다루는 우리에게 창작의 영감을 주고, 사전 같은 참고 문헌이 되기도 하며, 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안식처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이 꿈꾸는 이상향이기도 하다. 숲에 대한 경험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느끼고 해석하는 근본적인 무기를 하나 더 구비한 셈인지도 모른다. 화담숲은 LG상록재단이 구본무 회장의 아호를 따 만든 비영리 수목원이다. 부담스러운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계절에 따라 바뀌는 숲의 또 다른 모습을 보기 위해 기꺼이 또 하루를 내어주고 싶은 매력이 있는 곳이다. 산자락의 남쪽 사면 760,330m2(약 23만 평)에 걸쳐 4,300여 종의 식물이 공존하는 화담숲은 여느 산림에 비해 종 다양성이 높다. 자연 상태로 두었다면 분명히 경쟁과 도태 때문에 유지하기 힘든 숫자일 테다. 그렇다면 이곳은 보전된 자연 산림이라기보다 정성스럽고 치밀하게 디자인되고 꾸준히 관리되는 정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정겹게 얘기하는 숲’이라는 의미의 화담숲. 그러나 화담숲에서는 ‘말하기’보다는 ‘걷기’에 몰입하게 된다. ‘걷다’라는 행위는 많은 철학자와 문학가가 찬양해왔듯, 생각과 감성을 단순하고 반복적인 신체 행위를 통해 깨워내고 세상과 나를 감각적으로 또 사유적으로 연결시키는 사람만의 고유한 특권이다. 두 발로 걷게 되면서 하늘을 보게 되고, 땅과 하늘을 잇는 존재로서의 독자성을 갖게 된 것은 인류사의 발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공원 설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픽처레스크 정원 양식을 떠올려본다. 다채로운 풍경이 펼쳐지는 하나의 이상적인 자연을 만들고자 했던 인류사적 욕구인 픽처레스크 정원은 ‘걷는다’는 행위를 통해서만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걷는다는 행위, 그로 인해 풍경 속의 내가 그림을 주체적으로 편집하여 연속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비로소 화폭에 담긴 풍경화를 우리를 둘러싼 공간으로, 현실로, 일상으로, 문화 영역으로 바꿔주었다. 화담숲은 참으로 걷기 좋은 곳이다. 편안한 경사를 유지하기 위해 지그재그로 계획된 일련의 산책로와 데크구조물은 움직임의 방향을 틀어 새로운 주제원으로 몰입시키거나, 근경과 원경을 교차로 바라보게 만들어 숲을 입체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구릉이 많은 한국적 픽처레스크라는 게 있다면, 아마 이와 비슷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이 많은 날에 가면 등 떠밀려 올라가야 하는 아쉬움이 크지만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풍경 속으로 점멸하고 나타나는 사람들의 무희적인 움직임은 역설적으로 사람이 많을 때에만 나타나는 순례의 경관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산 체험 방식인 등산은 일정한 경사를 앞으로, 직선적으로 걷는 것이다. 한편 화담숲에서 걷는 행위는 계속적인 시선의 굴절과 그에 따른 경관 체험의 반전을 동반한다. 숲을 디자인하는 것은 숲 자체의 디자인과 더불어 숲을 걷는 움직임을 디자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략)... * 환경과조경 343호(2016년 11월호) 수록본 일부 이 연재를 위해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대학교 정욱주 교수와 서울시립대학교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여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이들은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며, 2014년 1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유쾌한 답사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그들이 설계하는 법] 성장이야기
지난달에는 감히 우리에겐 정원이라는 문화가 없었으며 그래서 조경이 참 힘든 일이 되었음을, 그러나 이제 필요성이 절실하니 조경가가 이를 해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조경을 업으로 삼고 있는 동료 조경가 중 어느 누구도 이 일이 중요함을 인식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누구라도 이 일을 접하면 본능적으로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안다. 여기서 좋은 일이란 단순히 돈을많이 벌 수 있는 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결과로 보다 많은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제대로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른다. 사실 나도 잘 모른다. 큰 회사에 다니다가, 그리고 어느 설계사무소에 다니다 그만두고 스스로 사무실을 시작하면서 가졌던 생각은 설계란 그림만 그리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돌이켜 생각해봐도 ‘지어지지 않고 그림으로만 남는 설계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무실을 시작할 때도 돈이 되는 일 앞에 지어지는 일을 놓고자 했다. 이 같은 실천을 통해서 설계의 역할을 제대로 세워보리라는 작은 소망을 품었다. 그 후 10년이 지났지만 설계의 역할을 제대로 세웠는지는 모르겠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것 같아 힘들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스스로 설계가로서 단단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렇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이번 편에서는 그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으려한다. 보잘것없지만 오로지 순수하게 설계를 잘하고 싶은 조경가 박준서의 성장 이야기. 부디 이 글을 많은 사람이 읽지 않기를 바란다. 왜? 부끄러우니까. 습관에 대한 도전 건설사의 현장 사무소. 나는 현장의 공사 담당 소장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며칠 동안 우리가 설계한 플랜터의 상세도를 자꾸만 문제 삼기에 오늘은 기필코 결판을 보리라 다짐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니까 며칠 전 갑자기 전화가 왔다. 한참 시공 중인 현장에 느닷없이 시공사의 임원이 순시를 나왔는데 플랜터의 상세도를 두고 혹평을 하고 갔다는 것이다. 이런 디테일을 본 적이 없고, 자신의 시공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이건 안 된다는 거였다. ‘어쩌라고요?’ 나의 외침은 목구멍을 넘어오진 못했다. 대신,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죠. 네…. 하지만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설계한 만큼 이대로 시공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니 박 소장, 이거 이렇게 진행했다간 당장 내가 인사에서 불이익을 당할지도 몰라.” “예? 아니 왜요?” “그 임원이 자기 말대로 안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큰소리치고 갔다고.” “…….”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람. 하지만 이곳은 한국,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상황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왜 그런 디테일을 선택했는지, 그것이 생각처럼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 등을 구구절절 설명했다. 그리고 그 디테일을 꼭 지켰으면 좋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로부터 이삼일이 지나고 현장에서 미팅을 하자는 연락이 왔다. 만약 내가 디자인한 디테일로 시공하기로 결정되지 않으면 어떻게 할지, 왜 이따위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고민하고 있는지, 나 참 힘들어서 못 해먹겠네. 아무리 회의를 해도 내가 고집을 꺾지 않으니 하는 수 없다는 듯 마지막에 이렇게 물어왔다. “박 소장, 만일 현장에서 저 디테일을 바꾸면 어떻게 할 건가?” “글쎄요…” 순간 머릿속에 이걸 어떻게 하지,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수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그러나 이 땅에는 설계자의 손을 들어줄 수단도 시스템도 없었다. 건축에는 감리가 있으니 그를 통해서라도 설계에 힘을 실을 수 있겠지만, 조경은 그런 것도 없고 감독은 뭘 하든 문제만 만들지 말라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없었다. “뭐제가 어떻게 할 방법은 없겠네요. 그냥 집에 가서 이불 뒤집어쓰고 울겠죠?” 정말 내 심정은 그랬다. 다음날 다행히 시공사에서 본래 디테일대로 시공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10여 년이 지났지만 시공사에서 걱정한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디테일을 그 후로도 자주 써먹었고, 그럴 때마다 시공자는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나는 발주자나 의뢰인을 설득하는 일보다 현장의 작업반장을 설득하기가 더 힘든 상황을 수도 없이 겪어야 했다. 지어지는 설계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마주한 난감한 상황. 설계가 구현되는 과정에서 심심찮게 마주하는 상황이다. 상황의 경중을 떠나서 시공자가 설계자에게 설계의 의지를 꺾으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도 자기의 시공 경험에 반한다는 이유로. 설계의 권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설계의 역할이 이 땅에 존재하는가 의문이 들었다. 이 땅에서는 설계의 역할 따위는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니 서글퍼졌다. 내가 마주한 것은 거대한 습관의 벽이었다. 그런 습관을 시공자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클라이언트 그룹도, 설계가인 나 자신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수십 년간 버릇처럼 해왔기 때문에 이미 굳어진 믿음을 어디서 굴러먹다 온 새파란 설계가 놈 하나가 바꾸려 한다는 식의 태도를 본 것이다. 습관이 곧 고정관념이 되고, 그 고정관념을 너무 신봉하다 보니 신념이 되었고, 그것을 바꾸려는 노력은 도전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설계는 역설적으로 그런 습관을 깨는 작업이어야 한다. 힘들지만 습관을 이해하고 분명히 그 습관을 극복할 수 있는 이유와 당위성도 함께 제시하면서 말이다. 클라이언트를 설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장의 작업반장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설계. 그것이 하고 싶었다. 형태 말고 공간 설계공모를 진행하고 있다. 건축 설계공모. 나는 건축가와의 작업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가 만든 공간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이 생활하고 일하고 노는 곳이고, 그런 공간은 조경 작업이나 건축 작업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축가와 설계공모 작업을 많이 하는 편이다. 커다란 대상지의 도면을 앞에다 두고 건축가와 마스터플랜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 “박 소장님, 저희가 원하는 건 이런 그림이 아닌데요.” “네? 그럼 어떤 걸 원하시는데요?” “아니 그러니까 뭔가 좀 더 그로테스크하고 힘차면서도 기능적인 그런 그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건물과 잘 어울릴 거 같아요.” “아…네…. 그게 어떤 건데요?” “아니, 왜 그러세요. 그동안 잘 해주시더니. 왜 있잖아요. … 그래야 이 평면이 살죠. 건물도 살고. 밑바탕이 근사해야 건물이 더 도드라 지지요. 조경은 그런 거잖아요.” 이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금기어는 뱉지 말았어야지. 내가 삽화가인가? 이럴 거면 차라리 만화가를 섭외하지. 얼마 전 우리가 설계한 지방 모 기업의 사옥을 다녀왔다. 설계는 벌써 몇 년 전에 했고, 제법 많이 참견할 수 있어서 설계안에 꽤 근접하게 시공이 되었다. 의뢰인 측도 매우 만족했고,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좋은 공간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곳을 답사하면서 한 가지 느낀 것은 공간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설계는 평면 중심의 설계가 진행된 대표적인 예였다. 기업의 독보적인 상징성을 드러내기 위해 도드라진 형태와 디테일로 설계된 곳인데. 막상 가보니 편안하게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퍼걸러는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놓여있고 숲은 얕았으며 그늘 밑에는 앉을 곳이 없고 벤치가 놓인 곳엔 볼 게 없었다. 운동 삼아 산책로를 걸을 수는 있겠지만, 머물고 싶은 곳이 없어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는 그런 곳이 된 것이다. 내심 충격이었다. 입으로는 열심히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떠들고는 정작 기회가 왔을 때 그러지 못하다니. 보여주는 것에 너무 집착하고 있었나? 내가 그린 그림이 지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누구에게? 그게 누군지는 몰라도 분명히 사용자는 아닌 듯하다. 나는 내가 대단한 설계가라고 말하고 싶어 하고 있었다. 형태를 과하게 조작하고, 입체적 조형을 도입하고, 강렬한 대비 효과를 쓰고, 이를 사람들이 못 알아먹을 이상한 말로 포장하려 했다. 어쩌면 우리가 공모나 설계 설명서에 써넣던 강렬한 기능, 즉 축제니 문화 행사니 캠핑따위의 뭔가 있어 보이는 것을 먼저 생각하다 보니 그랬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만든 공간은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일상에서 이런저런 용도나 잠시 앉아 마음을 달래는 공간으로 더 많이 쓰일 텐데, 정작 그런 용도로는 만들지 못하고 있다니. 피터 워커의 테너 파운틴(Tanner Fountain)이라는 작품을 너무나 좋아했다. 그가 평소 이야기하듯이 테너 파운틴은 하나의 디자인적 제스처가 매우 다양한 역할을 일궈내는, 그리고 분명하게 보이는 설계의 표본이라 생각했다. 2000년에 그와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설계는 반드시 눈에 띄는 것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군중 속의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을 예로 들며 그처럼 눈을 사로잡는 대상을 설계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고, 관심을 갖고 접근해야 그 공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지당하며 공감 가는 이야기다. 단, 우리가 다루는 이 공간들이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을 만한 대상이 되도록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어려운 것이라 그게 문제지. 테너 파운틴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그의 설계 태도와 원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설계가로서 평범함을 지향하는 것은 무덤과도 같은 일이다. 독특하고 유일하며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설계를 하고 싶다. 하지만 그보다 사람들이 마음 편히 다가와 아무렇지 않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적 틀을 갖추는 노력이 더 우선 되어야 한다. 테너 파운틴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당시 그와의 인터뷰에서 요즘 조경 설계가 너무 튀려고만 하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공간적 세팅을 하는 데 게으르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잊고 있었다. 아니 이제야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듯싶다. 그 너머의 사람을 보다 몇 해 전, 어느 마을의 작은 공간을 조성하는 사업에 참여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설계와 시공을 하게 됐다. 몇 차례 대상지를 답사하면서 설계 아이디어는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시공도 그리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우린 그곳에 자그마한 쉼터를 만들어 가파른 길을 오르내리는 주민들이 쉬어갈 수 있는 곳을 만들어 주고자 했다. 내심 기뻤다. 이 공간을이용하며 즐거워할 주민의 웃음 띤 얼굴을 벌써 마주하는 것 같아 너무 기쁘고 기대됐다. 어느 날 답사를 간 우리는 한 가지 해프닝을 목격했다. 우리가 휴게 공간으로 조성하려 한 버려진 녹지를 둘러싸고 주민 사이에 다툼이 있었던 것이다. 녹지 바로 옆에 거주하는 할머니 한 분이 평소 이 녹지에 꽃을 심어 가꾸고 있었는데, 이웃 주민이 그걸 보고 야단을 친 것이었다. 왜 공공의 땅에 개인적으로 뭔가를 심고 가꾸는가가 논쟁의 핵심이었다. 우리는 의아했다. 왜 그게문제가 되지? 그 땅을 그 할머니가 소유하겠다고 나선 것도 아니고, 그 땅을 일궈 밭으로 쓰려 한 것도 아닌데. 그 할머니도 우리처럼 그냥 그곳에 꽃이 피고 낙엽이 지기를 바랄 뿐이었는데 말이다. 이 문제는 비단 한 사람이 공공의 땅에 꽃을 심을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라기보다 설계가가 너무 당연히 여기는 공공의 선을 위한다는 명분이 항상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이 마을은 그렇지 않아도 마을에 그려진 벽화 때문에 여러 문제가 발생해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예술가의 순수한 마음이 마을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다니.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고 예상한 것들이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소름 돋는 경험이었다. 이런 예뿐만 아니라, 우리가 설계하면서 만나는 공간들은 대상물로서의 물리적 구성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공간에는 어마어마하게 깊고 복잡한 인간관계가 투영되어 있고, 그 안에는 온갖 욕망과 사욕이 얽혀있다. 어쩌면 설계란 그런 욕망의 교통정리 행위거나 욕망의 분출구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몇 년 뒤 다시 찾은 작은 녹지엔 그때 만들어 놓은 벤치들이 있었다. 길을 오르내리던 주민들이 그곳에 잠시 앉아 가쁜 숨을 돌리고 있었지만, 주변에는 그 당시 심긴 초화들이 사라졌다. 꽃피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쉼터에서 그냥 평범한 쉼터로 변해 있었다. 아마 그 할머니는 더 이상 이곳의 꽃을 돌볼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그 작은 쉼터가 주민의 마음에 따듯한 마음을 깃들게 하는 자리이기를 바랐지만 상처만 남긴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애송이 설계가 어느덧 설계 경력이 20년을 훌쩍 넘어가고 있다. 매 순간 이제야 설계를 좀 알게 됐구나 하고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땐 뭘 몰랐지 싶다. 지금까지 참 많은 프로젝트를 다루며 늘 좋은 공간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믿어왔다. 당시에는 하나하나 최선을 다해 완성해 내려 했지만, 돌이켜 보니 허점들이 다시 보이기도 한다.그 프로젝트들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10년 전 이 사무실을 시작하며 수행한 프로젝트에는 결기 넘치는 젊은 열정이 보이지만, 또 다른 10년을 바라보는 지금은결기보다는 무난한 안정감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것 같다. 이제야 도면에 쓰여 있는 산책이, 휴식이, 삶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 건지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몇 해 전 나이 50을 바라보는 설계 선배가 자신은 아직도 애송이라고 하는 말에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다. 난 아직도 많은 성장을 해야 하는, 아직은 덜 익은 설계가일 수도 있겠다. 이제야 설계가 무엇을 하는 일인지 조금 깨달은, 이제야 설계 대상지에서 그곳에 묻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금 읽어 낼 수 있는, 그래서 이제야 그곳에 맞는 아이디어를 낼 수 있게 된, 더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설계가라고 말하고 싶다. 박준서는 ‘Link Landscape with Life’라는 모토로 디자인엘을 설립해운영하고 있는 조경 설계가다. 조경이란 근원적 삶의 터전으로서의 자연을 문화적으로 해석해 일상에 녹여 내는 행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에서 조경 설계의 사회적 역할을 바로 세우기를 바라고, 지어지는 설계를 실천하고자 한다.
[조경의 경제학] 경관의 수요: 자본에 의한 발생과 소멸의 메커니즘
경관 수요와 경관 효용 경관의 수요는 경관을 체험하고 싶어 하는 것 이상이다. 단순히 무언가를 원하는 욕망 또는 욕구의 차원을 넘어, 대가를 지급하고 그것을 충족하고자 하는 의사를 경제학에서는 ‘수요demand’라고 한다. 경관의 수요자는 대가를 지급하고 경관을 소비한다. 이때 그 대가가 조망점의 공급자에게만 귀속되고 조망 대상의 공급자에게는 이전되지 않기 때문에 경관의 적정한 공급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은 지난 호에서 말한 바 있다. 우리는 경관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우리가 경관을 체험할 때 무엇을 얻는가? 경제학자는 이러한 질문을 ‘경관이 우리에게 주는 효용은 무엇인가?’로 정리할 것이다. 경제학에서 효용은 ‘어떤 재화나 서비스가 우리의 욕망이나 욕구를 충족하는 능력’ 또는 ‘어떤 재화나 서비스를 소비함으로써 우리가 얻는 만족’을 말한다. 효용은 수요의 원천이다. 사람들은 효용을 얻기 위해 소비하고, 기업들은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골몰한다. 이 글에서 경관의 효용을 이야기할 때 생태적으로 건강한 경관이 대기를 정화하고 종 다양성을 높여주는 것과 같은 효과는 고려하지 않는다. 경관이라는 단어는 인지된 심상뿐만 아니라 (인식 밖에 존재하는) 인지의 대상을 칭하기도 하므로, 위와 같은 효과가 경관의 효용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역, 자연, 생태계 등의 단어와 차별화된 ‘경관’이 가지는 고유의 효용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시각을 중심으로 한 오관을 통해 인지되는 심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경관을 체험한다’고 할 때 무엇에 집중하는가를 생각하면 그 이유는 더욱 명확해진다. 위에서 언급한 효과는 생태적으로 건강한 경관이 발산하는 긍정적 외부효과 정도로 생각하자. 경관의 효용을 인식의 영역에서 찾는다면 경관 체험의 중심에는 미적 체험이 자리하게 된다. 우리가 경관의 체험을 통해 얻는 쾌pleasure에 미적인 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 미학에서 다루는 미적인 것the aesthetic의 범주가 매우 넓다는 것을 생각하면 미학적 방법으로 경관의 효용을 다루는 것이 그리 편협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 글에서는 경관을 체험하는 과정을 파헤치거나, 미적 체험을 유발하는 경관을 선별하거나, 보다 근본적으로 경관미가 무엇인지 밝히는 등의 미학적 설명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경제학적 관심으로 경관에 대한 수요의 발생과 소멸에 자본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 과정에서 미학자들이 이루어놓은 성과를 몇 가지 참고한다. 자본에 의한 경관 체험의 조작 자본은 능동적이고 지능적이다. 자본은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의 토대와 상부 구조를 능동적으로 바꾸어놓는다. 그 변화의 대상에 경관도 포함됨은 물론이다. 하지만 자본이 강압적이지는 않다. 자본은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선호를 조작함으로써 목적 달성의 효율성을 지능적으로 추구한다. 경관의 변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자본이 특정한 경관에 대한 우리의 미적 체험을 바꾸는 기제는 18세기 영국의 미학 이론인 취미론에서 단서를 찾을수 있다. 취미론은 독일의 바움가르텐Alexander Gottlieb Baumgarten(1714~1762)에 의해 자리 잡은 ‘미학’이라는 단어가 영국에서 널리 쓰이기 전에 벌어졌던 철학 논쟁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중세 기독교 사회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사상가들 사이에는 ‘미beauty’라는 것이 객관적인 대상에 내재한 성질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것이 비례와 같은 특징이건, 이데아와 같은 추상적 실재건, 신으로부터 기인한 무엇이건, 시대에 따라 설명은 달랐으나 미는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중세의 몰락과 함께 낭만주의가 등장했고 미적 체험에 대해서도 주관의 역할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취미론은 이러한 과정에서 미의 존재론에 대한 객관론과 주관론의 거리를 세련되게 탐구한 이론이다. 샤프츠베리Third Earl of Shaftesbury(1671~1713)는 무관심성disinterestedness에 대한 이론으로 취미론의 문을 열었다. 무관심성이란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진정한 미적 체험을 ‘무관심의 상태에서만 도달 가능한 어떤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미의 철학을 성립시켰다. 경험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은 허치슨Francis Hutcheson(1694~1746)은 내적 감관internal sense이라는 개념을 통해 취미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오관과 별도로 미를 감지하는 내적 감관으로서 미의 감관sense of beauty이 존재하며, 이 감관을 통해 느끼는 쾌가 바로 미의 관념idea of beauty이라고 보았다. 취미taste란 이러한 감관의 능력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에게 미적 감관은 오관과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이었다. 따라서 동일한 자극에 대해 미적 감관은 동일한 반응을 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동일하게 느끼지 않는다. 그는 그 이유가 미적 감관에 있지 않고, 관념 연합association of ideas에 있다고 보았다. 관념 연합은 우리의 인식 속에서 일어나는 연상과 같은 것이며, 그것이 형성되는 대표적인 이유는 반복된 경험을 통해 형성된 습관이다. 관념 연합이 미적 체험의 과정에 작용해서 동일한 대상을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도록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중략)... * 환경과조경 343호(2016년 11월호) 수록본 일부 민성훈은 1994년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조경설계 서안에서 2년간 일했다. 그 후 경영학(석사)과 부동산학(박사)을 공부하고 개발, 금융, 투자 등 부동산 분야에서 일했다. 2012년 수원대학교로 직장을 옮기기 전까지 가장 오래 가졌던 직업은 부동산 펀드매니저다.
[리질리언스 읽기]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한 도전, 해안 리질리언스
태풍 차바의 습격, 물에 잠긴 취약한 해안 도시 해안은 생물 자원이 풍부해 인간에게 다양한 생태계 서비스를 제공한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풍족한 식량과 아름다운 경관, 수질 정화와 해안 재해 저감과 같은 혜택을 인간에게 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혜택을 대가 없이 획득할 수 있는 재화, 즉 ‘자유재’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갯벌을 파괴하고 연안을 매립해 산업 단지나 농토, 초고층 빌딩을 건설했으며, 해안 사구를 개발해 해수욕장으로 탈바꿈시켜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 그리고 재산과 토지를 보호하기 위해 해안 생태계를 훼손해가며 인공 구조물까지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거침없는 해안 지역의 난개발로 인간 사회는 사회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장기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대규모 재해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해안 생태계를 파괴함으로써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취약한 해안 도시’를 자초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나라 해안 지역의 면적은 4,022km2으로 국토의 4%에 지나지 않지만, 인구의 27.1%에 해당하는 약 1,380만 명이 해안 지역에 삶의 터전을 두고 있다. 이러한 해안 지역의 인구 증가는 해안 도시 확장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대부분의 해안 도시는 해안 공간의 보전 계획보다는 개발 계획에 더 치중하여 성장했다. 다시 말하면 무분별한 해안 개발로 인해 태풍, 해일, 폭풍, 해안 저지대 침수, 해수면 상승과 같은 자연재해에 취약한 국토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나라 해안 도시의 취약성은 지난 10월 5일, 부산시와 울산시를 중심으로 상륙한 태풍 차바에 의해 여실 없이 드러났다. 과거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2만여 시민의 생명을 앗아간 태풍 카트리나를 연상시키듯, 거대한 파도는 보란 듯이 방파제를 넘었고 도심에는 물이 차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0명의 사상자와 257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1,500여 채의 건물이 수해를 입었다. 태풍 차바에 의한 피해 원인으로 많은 기사는 방파제의 높이를 언급했지만, 과연 해수면 상승과 이상 기후 그리고 지진 발생과 같은 대규모 자연 현상이 증가하고 있는 한반도에서 인간의 힘으로 완벽히 막을 수 있는 재해가 있는지 반문해보고 싶다. 또한 이미 폭염과 지진으로 사회 커뮤니티와 경제력이 훼손된 해안 도시들이 위기를 극복하고 미래의 재해를 대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재해를 완벽하게 막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며, 인간 사회가 얻은 사회 경제적 이득이 자연 생태계에서 비롯됐다는 진리를 아직 깨닫지 못한 무지에서 온 것이다. 그렇다면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지속가능한 해안 도시를 건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근 미국, 유럽 등 해안 방재 선진국들은 태풍 카트리나와 샌디 같은 재해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적응’하고 원상태로 ‘회복’할 수 있는 능력, 즉 ‘해안 리질리언스’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안 리질리언스란 지속가능한 해안 도시를 구축하기 위해 자연재해와 같은 교란을 흡수하고, 그 변화에 적응하며 새로운 해안 지역의 사회생태시스템을 구성함으로써 회복될 수 있는 해안 도시의 능력을 의미한다. 해안 리질리언스는 주로 자연적 혹은 자연 기반의 구조물을 통해 향상되며, 이는 해안 생태계 서비스와 해안 지역 주민의 삶의 질 향상에도 기여할 수 있다. 해안 리질리언스 등장과 발전 유엔재난경감국제전략기구UNISDR는 ‘2005-2015 효고행동계획Hyogo Framework for Action(HFA)’을 통해 재난에 대응할 수 있는 ‘커뮤니티 및 국가 리질리언스’를 구축하는 것을 첫 번째 계획으로 수립했다. 이후 효고행동계획은 재난 위험을 줄이려는 정부, 국제기구, 재난 전문가와 함께 발전했고, 관민의 강한 네트워크, 환경 리질리언스, 재해 대비를 위한 투자, 사회 커뮤니티의 리질리언스 강화, 사회 커뮤니티의 정보 교류 등의 다섯 가지 비전을 규정해 재난 리질리언스 향상을 위한 실전적인 방법과 원리를 제공했다. 효고행동계획의 목적은 재난에 대한 국가와 커뮤니티의 리질리언스를 구축해 2015년까지 점차 재해를 저감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급작스러운 재해로 인한 인명 피해, 사회 붕괴, 경제 침체, 그리고 생태계 훼손을 줄이고자 했다. 또한 유엔인간정주계획UN-HABITAT은 법과 제도, 교통, 거주 및 재생, 안전, 기후 변화, 성별, 계획 및 설계, 경제, 재건축, 리질리언스, 인권, 물과 위생 등 14가지의 테마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중 리질리언스 테마는 지진, 폭풍, 해일, 쓰나미와 같은 자연재해에 매우 취약한 도시의 거주민을 위해 리질리언스를 향상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 실제로 전 세계 대규모 도시의 80%는 지진에 매우 취약하고, 60%는 쓰나미와 태풍, 해일 등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새로운 기후 변화의 영향을 받고 있다. 도시 재난으로 발생한 피해액은 2011년에만 3,800백만 달러를 훌쩍 넘었다. 이에 도시를 보호할 수 있는 접근 방식과 새로운 도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그 수단으로 리질리언스가 활용됐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미국은 2005년 사상 최고의 사상자를 낸 태풍 카트리나를 맞는다. 이로 인해 미국은 재해 대응 정책을 대대적으로 수정하게 됐는데, 특히 UNISDR과 UN-HABITAT에서 정의한 리질리언스를 기반으로 프레임워크를 구축해 폭풍, 해일, 해수면 상승, 해안 침식 등의 해안 재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후 해안 지역의 재해 경감에 앞장선 록펠러재단이 오바마 정권과 손을 잡으면서 3대 목표 중 하나로 리질리언스를 선정했고, 이후 리질리언스의 핵심 키워드를 ‘해안’, ‘재해’, 그리고 ‘도시 혹은 커뮤니티’로 압축했다. 또한 그들은 리질리언스의 개념이 실천적인 조경 및 도시 계획안으로 도출되길 원했고, 지난 10년간 도시계획과 조경 설계 차원에서 리질리언스 개념을 도입한 사업과 프로젝트 등을 많이 실시했다. ‘100 리질리언트 시티100 Resilient Cities’, ‘리빌드 바이 디자인Rebuild By Design’, 그리고 ‘해안 리질리언스의 구조Structure of Coastal Resilience’ 등을 핵심 프로젝트로 들 수 있는데, 모든 프로젝트는 해안 리질리언스 평가를 기반으로 해안 에코 인프라스트럭처를 통해 수행됐다. 해안 리질리언스의 구조: 해안 리질리언스의 구조 프로젝트의 목적은 재해에 취약한 나라간세트 만Narragansett Bay, 로드아일랜드Rhode Island의 자메이카 만Jamaica Bay, 뉴욕의 애틀랜틱시티Atlantic City, 뉴저지의 노퍽 및 햄프턴 로드Norfolk and Hampton Roads와 버지니아 등 해안 지역 네 곳의 폭풍과 해일의 위험을 평가하고 과학적인 데이터를 도출해 생태 복원 설계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특히 기후 변화에 의한 폭풍과 해일의 위험 평가를 중심으로 시나리오를 구축해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조경가, 공학자, 과학자, 건축가 등 다양한 전문가가 팀을 이루어 최신 과학을 이용한 실험 설계를 통해 창의적인 결과물을 도출하도록 했다. 또한 회복력 있는 해안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예상 가능한 변화에 대한 깊은 이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적응을 통해 폭풍과 해일을 방어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43호(2016년 11월호) 수록본 일부 전진형은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대학 환경생태공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습지생태계 조성과 생태환경회복기술 개발, 시스템 다이내믹스를 활용한 도시 내 저탄소 경관 디자인 요소 개발 및 야생생물 군집 변화 모델링 등 생태계 복원 및 설계와 관련된 다양한 연구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생태학적 이론과 과학적 데이터를 근거로 한 다양한 디자인 시뮬레이션을 통해 설계 단계부터 시공 후까지 생태계 변화를 예측하여 대상지가 지속가능할 수 있는 생태적 조경 설계와 유지관리 방안을 연구하고 교육하고 있다. 최근에는 생태환경의 보존과 인간의 이용 및 개발의 조화라는 패러독스를 해결하기 위해 디자인을 통한 생태회복성(eco-resilience)에 관심을 갖고 이를 조경 분야에서 적용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모던 타임즈
#96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 아르누보 먼 길을 헤매다가 다시 20세기로 돌아왔다. 익숙한 세상에 오니 안도감이 든다. 하지만 비행기, 고층 건물, 기계와 자동차 등 온갖 기술 문명으로 복잡하기도 하다. 이 가운데 정원의 흔적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정원의 흔적을 찾기 위해선 우선 걷어내야 할 것들이 많다. 이를 위해서 앙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1863~1957)의 자취를 한번 따라가 보고자 한다. 벨기에 출신의 화가, 디자이너, 건축가였던 반 데 벨데는 혹시 에르퀼 푸아로의 오리지널이 아닐까 싶게 작은 체구에 에너지 넘치는 심미주의자였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아르누보’와 ‘바우하우스’의 중간 지점에서 맹활약하며 이 둘을 서로 연결한 인물이었다. 아르누보art nouveau란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으로 1880년경부터 25년 정도 유럽을 휩쓸었던 디자인 경향이다. 매우 심미적이고 우아했다. 직선을 배제하고 부드러운 곡선을 썼으며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꽃, 식물 줄기 등을 그래픽처럼 다룬 것이 특징이었다. 전반적으로 여성적인 디자인이어서 긴 머리의 키 크고 날씬한 여인이 물결 같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으로 상징되기도 한다. 새로운 예술이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인 혁신은 아니었다. 외모에만 손을 댔다. 산업화의 결과로 도시에 부와 제품이 넘쳐났으나 이들을 제대로 포장할 디자인이 없었다. 그래서 지나간 시절의 양식들을 두서없이 모방했던 데에 대한 저항으로 출발했다. 고딕 양식부터 루이 14세 스타일, 르네상스, 고전까지 난무하며 세상을 어지럽히던 시절이었다. 이를 역사주의historicism라고 하는데 이에 대응하여 새로운 것을 찾던 끝에 나타난 것이다. 가장 먼저 영국에서 반응하여 미술공예운동이 시작되었다. 존 러스킨과 윌리엄 모리스가 주동 세력이었다. 이들은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대량 상품이 문제라고 여겼다. 전통적인 수공업과 공예를 다시 불러들임으로써 해법을 찾고자 했다. 이로써 미술공예운동은 아르누보 스타일이 탄생하는 데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존 러스킨은 예술 평론가, 작가, 화가, 사회 개혁가로서 19세기 후반 영국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많은 글을 써서 산업 사회를 비판하고 수공업과 공예의 가치를 칭송했다. 윌리엄 모리스 역시 화가였으나 그림보다는 글을 잘 썼고 손재주가 좋았다. 그는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함께 수공예 회사를 차려 제품을 직접 디자인하고 수작업으로 제작했다. 바로 이런 움직임이 멀리 브뤼셀의 미술학도 앙리 반 데 벨데에게도 전해졌다. 1888년 모친상을 당한 앙리는 슬픔에 잠겨 칩거하며 철학 서적을 읽었다. 그러다가 러스킨의 글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는 미술공예운동에 주목했다. 그렇지 않아도 순수 미술이 자신의 세계를 충분히 표현해 주지 못한다는 불만을 품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결국 회화를 포기하고 응용 예술의 길을 걷기로 한다. 일단 런던으로 갔다. 미술공예 움직임에 동참하여 작업했다. 디자인 감각을 타고났으므로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했다. 그는 선線에 매혹된 사람이었다. 특히 식물 줄기의 자연적인 선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 푹 빠져있었다. 선에서 시작하여 디자인을 전개해 나갔다. 그는 선에 역동적 에너지가 내재해 있어 스스로 변화하며 새로운 형체를 만들어 내는 것 같다고 했다. 건축 설계에도 도전했다. 그리고 건축이 가진 무한대의 디자인 가능성을 발견했다. 건축의 외피며 실내 구조뿐만 아니라 인테리어, 가구, 촛대, 식기, 전등까지, 무엇을 보나 디자인할 대상이었다. 그는 건축이야말로 모든 디자인 분야를 흡수하는 종합예술로 보았다. 브뤼셀로 돌아가 결혼하고 신혼집을 지을 때 건축과 인테리어는 물론 가재도구에서 티스푼까지 백 퍼센트 직접 디자인했다. 의상도 디자인했다. 그가 디자인한 의상을 입겠다는 여성이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결국 그의 아내가 입어야 했다. 1900년, 반 데 벨데가 베를린에 나타났을 때 그는 이미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라는 명성을 얻고 있었다. 폴크방 박물관을 설계하고 베를린의 스타 헤어 디자이너 펠릭스 하비의 의뢰를 받아 미용실 인테리어를 해주었다. 건축부터 문고리까지 다 설계한다는 반 데 벨데에게 설계를 의뢰하려는 고객들이 줄을 섰다. 그러나 그는 좀 더 높이 도약하고 싶었다. 베를린 장안의 멋쟁이 케슬러 백작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그가 전환점을 제시해 주었다. 외교관, 미술 수집가, 작가였던 케슬러 백작은 예술가들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는 반 데 벨데의 내면에 훨씬 큰 것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보고 함께 바이마르에 가자고 제안했다. 바이마르를 제2의 피렌체로 만들자고 했다. 당시 바이마르와 작센을 통치하고 있던 빌헬름 대공에게 반 데 벨데를 추천하여 예술 자문으로 부름을 받게 했다. 반 데 벨데는 1902년, 만 32세의 나이로 아내와 자녀들을 동반하고 세계도시 베를린을 떠나 바이마르로 향했다. 여기서 1917년까지 지낸 십오 년이 그의 최전성기로 꼽힌다. 대공으로부터 공예 학교를 설립하여 제품 디자인에 힘쓰라는 명이 내려졌다. 그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공예 세미나를 통해 그는 예술, 산업과 수공업을 결합하고 실무와 이론을 일체화시켜나갔다. 완벽한 디자인은 용도에 정확하게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그리고 ‘제2의 피렌체’를 위해 부지런히 마스터플랜을 꾸렸다. ...(중략)... * 환경과조경 343호(2016년 11월호) 수록본 일부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시네마 스케이프] 최악의 하루
우디 앨런은 뉴욕을 대표하는 감독이다. 오랜 시간 동안 변함없이 뉴욕을 찬양하며 도시의 일상을 탁월하게 묘사해 왔다. 일찍이 1970년대부터 우디 앨런은 뉴욕이 서부의 도시들과 달리 어디나 걸어서 갈 수 있는 도시인 점을 매력으로 꼽았다. 걸어서 식당에 가고 걸어서 센트럴 파크를 지나면 박물관이 나오고 학교가 나온다. 그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거리와 공원을 걸으며 시시한 농담부터 진지한 철학까지 나눈다. 센트럴 파크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유에 대해 우디 앨런은 뉴욕의 상징일 뿐 아니라 시대극을 촬영할 때도 별다른 장치가 필요 없을 정도로 변함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울은 어떨까. 우선 서울은 걸어서 다니기에 물리적으로 너무 넓다. 사대문 안으로 좁혀보아도 아직은 보행자에게 친절한 도시는 아니다. 서울의 거리는 빠르게, 자주 변한다. 그래도 센트럴 파크 이상으로 긴 시간 동안 서울을 상징해온 남산이 있다. 1950~1960년대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는 남산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당시 영화 속 남산은 서울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전망대 역할을 한다. 영화 도입부는 남산에서 조망되는 서울의 변화를 스케치하거나, 등장인물들이 남산에 올라 서울 시내를 내려다본다. 남산은 산이자 공원이다. 한국인은 산을 신성시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남산에 올라 임금이 사는 궁궐을 내려다보거나 나무를 꺾어 땔감으로 사용하는 일은 금지되었다. 서울을 한눈에 조망하는 일은 근대적 체험인 셈이다. 사대산 중 하나였던 남산은 도시가 확장되면서 서울의 경계에서 중심이 되었다. 산이면서 공원이기 때문에 보존과 이용이라는 상반된 개념이 계속 충돌해 왔다. 넘쳐나는 관광객으로 곤돌라를 설치하는 것이 생태 보존에 도움이 될지 더 많은 이용으로 훼손이 가중될지 여전히 논쟁 중이다. 남산은 북한산처럼 본격적으로 등산복을 입고 오르는 산도 아니고 센트럴 파크처럼 다양한 행위가 일어나는 공원도 아니다. 한양도성까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둔 시점이어서 남산의 특성을 하나로 규정하기는 더 복잡해졌다. 몇 달 전 『씨네21』 김혜리 기자와의 대담에서 실제로는 체감하기 어려운 한강이 가진 깊이의 속성을 영화를 통해 발견한 적이 있다. 영화 ‘최악의 하루’는 우리가 생각하는 고정관념 속 남산에서 ‘길’의 가능성을 환기해 준다. 남산은 하이힐을 신고도 편하게 오를 수 있는 산이자, 도시를 내려다보며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공원이며, 조선 시대에 쌓은 도성을 체험할 수 있는 도시 유산이다. 번잡한 도심을 피해 ‘서울다움’을 체험할 수 있는 매력적인 길이다. ‘최악의 하루’는 서촌과 남산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하루 동안 펼쳐지는 가벼운 소동극이다. 제한된 시공간은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느낌을 준다. 주인공 은희(한예리 분)는 서촌에서 배우 수업을 마치고 걷던 중에 길을 찾는 일본 작가에게 도움을 주고 함께 차를 마시고 헤어진다. 오늘 처음 본 일본 남자 A와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 B와 잠시 사귀다 헤어진 남자 C를 남산의 길에서 만나는 이야기다. 은희는 드라마 촬영 중인 B를 만나기 위해 서촌에서 남산까지 택시를 타고 간다. 한참 기다리다 만나지만 말다툼을 벌이다 헤어진다. 은희가 전망 데크에서 찍은 사진을 SNS를 통해서 보고 C가 갑자기 찾아온다. 그와는 B의 눈을 피해 잠시 사귀다 한 달 전에 헤어졌다. 유부남인 C는 은희에게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며 매달린다. 은희는 B와 C에게 거짓말을 하며(말하는 순간은 진실로 보이지만) 각각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한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며 B와 C가 동시에 무대에서 사라지고 모든 것이 엉켜버린 최악의 하루가 지날 때쯤, 서촌에서 헤어졌던 A가 거짓말처럼 등장한다. 김종관 감독은 걸을 때 생기는 건강한 에너지를 담고 싶었다고 한다. B에게 남산은 삶의 현장이자 아줌마들로 붐비는 곳이고, C에게는 은희와 사랑을 속삭이던 추억의 장소다. A는 관광객 모드로 서울의 상징인 남산에 올랐다. 우연과 의도, 진실과 거짓, 설렘과 권태, 추억과 현실, 이 복잡한 감정들이 남산의 길에서 서로 얽히고설키다 마법같은 해피엔딩을 맞는다. ...(중략)... * 환경과조경 343호(2016년 11월호) 수록본 일부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한겨레 영화 평론 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제목으로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를 삶의 또 다른 챕터로 여긴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텍스트라 믿고 있다.
[떠도는 시선들, 큐레이터 뷰] 마이크로시티랩
‘마이크로시티랩Micro City Lab’은 거대 도시화 된 서울의 장소성을 ‘마이크로한 개입micro intervention’으로 탐색하는 도시 개입 프로젝트다. 전시에 참여하는 11개국 출신 17팀의 참여 작가는 미술, 건축, 디자인, 퍼포먼스, 제작 기술, 액티비즘이 매개된 장소로의 개입을 시도한다. 전시 기간 중 서울의 여러 외부 공간에서 직접 진행된 작가들의 개입 프로젝트를 통해, 도시 공간의 형식과 규정, 권력으로부터 어떻게 예술이 주체적으로 장소를 발언할 수 있을지 살펴보고자 한다. '마이크로시티랩'의 작가별 개입 프로젝트와 진행 사항은 전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microcitylab.com). 메가 시티, 서울 이 지면에서 타이페이, 선전(심천), 홍콩의 도시 공간과 예술을 소개한 적이 있다. ‘동북아시아 메가 시티’라는 연구 주제로 위 도시에 접근한 배경에는 우리의 도시 서울이 있다. 당시 리서치 내용을 검토하며 오늘날 도시와 장소성에 대한 전시 기획을 준비 중이었는데, 우선은 서울이라는 메가 시티, 그 규정된 형식이 마음에 걸렸다. 세계 5위의 메가 시티 서울. 도대체 우리는 어떠한 메가 시티에 살고 있는가? 지긋지긋할 정도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거대한 도시 볼륨을 생각하고 있자니 다소 추상적인 기분이 들었다. 이 도시를 좀 더 알기 위해 생활 습관을 조금 바꿔 보았다. 지하철 타는 시간을 줄이고, 작은 마을버스를 이용하거나 가까운 거리는 걸어 다니며 잘 알지 못하던 동네를 둘러보았다. 그렇게 도시를 경험할수록 골목마다 빼곡한 삶의 장소들이 뇌리에 쌓여 갔다.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어렵거나 사용이 차단된 영역, 관심 밖으로 방치된 도시의 공간들도 함께 쌓여 갔다. 도시로 파고들수록 메가 시티라는 거대한 볼륨은 잊혀 간다. 하나의 도시 안에는 규정할 수 없는 장소, 명명할 수 없는 장소가 수없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작은 장소들에는 수많은 개인과 커뮤니티의 다양한 삶의 활동이 벌어진다. 메가 시티의 형식이 흐릿해질 때쯤 오히려 선명해진 장면이 있다. “메가시티 안에는 수많은 ‘마이크로 시티’가 존재한다.” 우리 안의 수많은 ‘마이크로 시티’를 찾아서 오늘날의 도시에 다가가고자 한 여정은 10월 한 달간 선보인 도시 개입 프로젝트 ‘마이크로시티랩’을 기획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등포 양평동의 한 공장 건물에 위치한 인디아트홀 공에서 10월 7일부터 30일까지 열린 전시 ‘마이크로시티랩’은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를 ‘마이크로한 개입’을 통해 다양한 층위로 논의하고자 한 프로젝트다. 서울을 비롯한 거대 도시의 형태와 볼륨 너머에는 보이지 않는 마이크로한 장소와 삶의 이야기가 도시의 지층으로 쌓인다. 도시의 이면에는 소소한 시공간의 켜가 빼곡하지만, 이는 도시가 확장될수록 가장 쉽게 허물어지는 영역이기도 하다. 도시의 표면과 권력, 그리고 거대 메커니즘에 가려진 ‘마이크로 장소’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이야기는 도시를 살아가는 예술가의 시선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시선으로부터 한 발짝 거리로 나온 개입의 과정을 제안한다. 이때 장소로의 개입 방식은 예술에서 다소 과도하게 남용되는 개념, 형식, 미적 실천과 거리를 두고자 한다. 잘 드러나지 않는 장소에 대한 개입은 역시나 무용할 수 있는 예술의 최소한의 개입, 즉 ‘마이크로 개입’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전시에는 서울에서 살고 있는 한국 작가뿐만 아니라 멕시코시티, 베이징, 헬싱키, 런던, 베를린 등 대도시에 살고 있는 11개국 출신의 17팀의 작가들을 초대했다. 개중 14팀의 참여 작가는 전시 기간 중 서울의 여러 외부 공간(공공 공간, 거리, 공원, 유휴 공간, 재개발 지역, 문화 공간, 상업 공간 등)에서 각각 개입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미술, 건축, 디자인, 퍼포먼스, 제작 기술, 액티비즘이 매개된 장소로의 개입 방식은 서울에 쌓여 온 중층의 시간과 장소만큼이나 무수한 사건들과 관계가 된다. 참여 작가들의 ‘마이크로 개입’은 신체, 텍스트, 소리, 냄새 등 최소한의 물성으로 각 장소가 지닌 상황, 사물, 이면의 관계에 최대한 주목하고자 했다. ...(중략)... * 환경과조경 343호(2016년 11월호) 수록본 일부 심소미는 독립 큐레이터이며 미술과 도시 관련 비평을 쓰고 있다. ‘신지도제작자’(2015), ‘모바일홈 프로젝트’(2014) 등 현대 미술과 도시 연구를 매개한 전시 기획을 해왔으며, 도시 개입 프로젝트 ‘마이크로시티랩’(2016)을 선보였다. 2016년 난지창작스튜디오 연구자 레지던시에 입주해 활동 중이다.
베를린 시티 랩
베를린 서북부의 모아비트Moabit는 제조 산업을 담당한 공장과 발전소 등이 있던 외곽 도시로, 베를린 제조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모아비트의 서북 경계선에 위치한 ‘ZK/UZentrum für Kunst und Urbanistik, 보통 제트 코우라고 발음한다’는 기차역을 아트 스튜디오로 개조한 예술 공간이다. 디렉터 마티아스 아인호프Matthias Einhoff, 필리프 호르스트Philip Horst, 하리 작스Harry Sachs가 설립했으며 베를린 시에서 무려 40년 동안 공간을 장기 임대받아 활용하고 있다. “40년이라고요?”라고 경외심을 담아 묻자, “이웃 도시 암스테르담은 이런 경우 99년간 장기 임대를 해준다. 40년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지극히 유럽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비영리 단체인 ZK/U는 베를린의 수많은 예술 공간 중에서도 ‘도시’에 집중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아트 스튜디오다. 찬찬히 스튜디오를 살펴보니 과거 기차역이 지닌 공간의 특성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특별한 기운이 느껴진다. 게이트를 열고 들어서면 펼쳐지는 너른 마당은 역 앞 광장, 건물이 들어선 곳은 기차의 선로, 인터뷰를 진행한 테이블이 놓인 공간은 플랫폼이다. 플랫폼 안에는 주전부리를 팔던 매점도 천연덕스럽게 그대로 놓여 있다. 유휴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도시 베를린의 예술 공간답다. 베를린의 예술 유휴 공간 유휴 공간을 활용해 예술 공간을 탄생시키는 것은 이미 전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토리가 되어버렸지만, 베를린은 그중에서도 원조 격 도시라고 부를 만하다. “왜 건물을 신축하거나 리모델링하지 않나요?”라는 질문에 모두가 납득할 만한 대답이 돌아왔다. “돈이 없었으니까.” 서독과 동독의 통일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난 뒤, 독일은 거의 경제적 파산 상태가 되었다. 독일의 수도는 베를린이지만 GDP나 도시의 물가는 뮌헨이나 뒤셀도르프, 함부르크가 훨씬 높다. 오히려 베를린은 독일에서 가장 높은 실업률(11%)을 기록하고 있는 가난한 도시다. 하지만 예술가에게 우호적인 도시 환경을 지녔고, 저렴한 물가로 전 세계 젊은 예술가를 모이게 만드는 젊은 예술 도시이기도 하다.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poor but sexy라는 베를린의 닉네임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베를린의 특성은 무엇이든 그대로 남겨둔다는 것이다. 폭격을 맞은 상태 그대로 내버려 둔 성당, 기차역이나 우체국 등 공공건물을 그대로 사용하는 아트 스튜디오 등이 너무나 많다. 예술 공간뿐 아니라 카페, 바, 클럽 등 일상에서 쉽게 만나는 건물도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과거에 어떤 공간으로 사용되었는지 유추할 수 있을 정도다. 이런 독특한 건물 재사용 문화가베를린의 정경—어딘가 모르게 음습하지만 섹시하고 흥미로운—을 형성하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 * 환경과조경 343호(2016년 11월호) 수록본 일부 조숙현은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영상 커뮤니케이션 석사 학위를 받았다. 영화 전문지 『Film 2.0』과 미술 전문지 『퍼블릭아트』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저서로는 『내 인생에 한 번, 예술가로 살아보기』(스타일북스, 2015)와 『서울 인디 예술 공간』(스타일북스, 2016)이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으며, 서울이 예술가와 생활인이 공존할 수 있는 도시가 되기를 꿈꾼다. 현재 베를린에서 표류 중이며, 미래 도시의 희망을 베를린에서 찾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
[편집자의 서재] 검색, 사전을 삼키다
이전 직장에서 ‘검색’은 공적인 하루 업무 중 하나였다. 언론인의 꿈을 안고 들어간 모 통신사의 이슈팀에서 인턴 기자로 일을 시작한 첫 날, 각 부서의 부장이 차례로 회의실에 들어와 부서를 소개하고 앞으로 신입 인턴들의 활약을 기대한다는 덕담 한 마디씩 남기며 퇴장할 때만 해도 나는 펜을 무기 삼아 현장을 누비는 미래를 상상하고 있었다. 부장들의 장황한 소개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팀장이 들어와 회사의 띄어쓰기, 표기법, 맞춤법 규칙 등을 정리한 스타일 북한 부와 기사 작성 매뉴얼 한 부를 나눠줬다. 서너 쪽으로 정리된 얄팍한 기사 작성 매뉴얼을 손에 들고 나서야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알게 됐다. 우리의 취재처는 정부 기관이나 대기업의 기자실이 아니라 네이버, 다음, 디시인사이드, 네이트판과 같은 포털 사이트 메인 페이지나 오유(오늘의 유머), 인스티즈, 엽혹진(엽기 혹은 진실), 디젤매니아, 파우더룸, 아이러브싸커 등의 커뮤니티 게시판이었다. 말하자면, 회사가 우리에게 기대한 것은 현장 취재가 아니라 ‘검색어 대응’과 ‘어뷰징’이었다.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를 1위부터 10위까지 팀원끼리 분배해 “누리꾼들은 이에 대해 ~라는 반응을 보였다”와 같은 문장으로 끝나는 스트레이트 기사를 붕어빵 틀로 찍어내듯 생산하는 일이었다. 한동안 이슈팀 인턴 기자라는 이력은 그다지 밝히고 싶지 않은, 자랑스럽지 않은 경력이었다. 다행히 영상 취재 팀에 소속되어 하루 종일 검색어 기사에 매달리는 다른 팀원보다는 나았지만 주말 당직을 서야 하는 날이면 하루 종일 검색어 대응과 어뷰징에 시달려야 했다. 인턴 마지막 날, 모 부장이 격려하며 한 마디 했다. “때로는 회의가 들 때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어떤 기사를 클릭하고, 어떤 이슈에 반응하는지 감이 생기지 않았어?” 그 해 하반기, 그 매체에서 가장 많은 조회수를 기록한 기사는 일명 ‘거제 마티즈 사건’ 기사였다. 불륜 커플이 도심 한복판 차 안에서 성행위를 벌이다 블랙박스에 찍혀 SNS를 통해 신상이 일파만파로 퍼지고 있다는 선정적인 내용이었다. 압도적인 조회수를 기록한 기사였지만 기사를 쓴 인턴 동기는 누가 자신의 이름으로 인터넷에 검색했을 때 그 기사가 뜰까봐 부끄럽다고 했다. 검색 엔진은 단 몇 번의 클릭과 입력만으로도 넘쳐나는 정보를 제공하지만 정보의 질까지 알려주지는 않는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으려면 어떻게든 남들보다 더 선정적이고 선동적인 내용의 기사를 써야 했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언론 매체에 대한 실망과 회의를 잔뜩 품고 잡지의 세계로 도망치듯 뛰어들게 되었지만, 경쟁 상대는 바뀌지 않았다. 검색과의 싸움에서 늘 고전을 면치 못하는 잡지 편집자인 내게 지난 5월 출간된 『검색, 사전을 삼키다』는 벼락같은 일갈과 진정성 있는 격려를 동시에 안겨주었다. ‘출판의 꽃이자 자존심’인 사전이 검색에 삼켜져 버린 시대라니. 나처럼 종이 책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사형 선고나 지옥의 묵시록처럼 들릴 법한 책의 제목이다. 하지만 이 책의 진정한 메시지는 ‘검색이 좋아지기 위해서라도 좋은 사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후의 사전 편찬자’를 자처 하는 저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사전의 몰락 원인으로 꼽히는 검색 회사에서 웹 사전을 기획하고 있다. 저자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무료로 콘텐츠를 쉽게 찾아 볼 수 있게 되면서 사전이 위기를 맞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검색과 사전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검색 서비스는 대부분 첫 번째 검색 결과로 출판사로부터 저작권을 사들인 사전을 내놓는다. 사전은 ‘최소한의 검색’이자 ‘검색 결과의 뼈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검색이 좋아지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각과 관점을 가진 전문 사전이 많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딱지와 우표 수집에서 시작해 음반 수집을 거쳐 수집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어휘 수집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자신의 수집 역사와 정리벽을 이야기하며 사전에 대한 애정을 담백하고 유쾌하게 드러낸다. 사전이 얼마나 고상하고 우아한 물건인지를 예찬하는 그의 맛깔난 애정 고백을 읽다보면 이제는 한물 간 것으로 보였던, 지루하고 고루하게만 느껴지던 사전이 새롭게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실상 사전은 위기 수준을 넘어 멸종 위기에 놓인 상태다. 유명한 출판 브랜드의 백과사전 한 질이 중산층의 기준으로 여겨지던 과거의 전성기가 무색하게 올해 종이 사전은 45년 만에 소비생활 대표 종목에서 제외됐다. 지난해 사전의 월평균 소비지출액이 231원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사전의 몰락을 무조건 검색의 탓으로만 돌리지 않는다. 지난 6월, 그가 한 인터뷰에서 ‘종이 사전의 몰락과 원인은 인터넷 검색에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내놓은 대답은 나를 숙연하게 했다. 종이 사전의 쇠퇴에는 일본이나 영미권 사전을 생각 없이 번역하거나 콘텐츠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고 개성 없는 사전을 펴내던 종이 사전 편집자의 태만과 무능 탓도 있다는 것. 편집자로서의 근본적인 자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곱씹어볼 만한 대답이다. 잡지의 세계로 뛰어들었지만 어쩌면 지금의 작업도 인턴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해외 작품을 소개하는 경우, 인터넷 검색을 통해 회사와 작품에 대한 정보를 탐색하는 과정이 필수적으로 수반된다. 약 100쪽에 달하는 분량의 이번 아장스 테르 특집도 마찬가지로 구글 검색과 함께 했다. 검색과 종이 매체는 경쟁 관계가 아니라 떼려야 뗄 수 없는 공생 관계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분야를 가로지르는 접근을 통해 전문 영역의 한계와 가능성을 실험한다는 아장스 테르의 디자인 철학이 새삼 새롭게 읽힌다. * 환경과조경 343호(2016년 11월호) 수록본 일부
[CODA] 이폴리타를 추억하며
오랜만에 만난 H가 이젠 바쁜 일이 끝났냐고 물었다. 그녀의 동그란 눈을 보니 가벼운 질문의 대답도 어렵다. 거의 한 달 만에 찾은 필라테스 스튜디오. 몇 가지를 체크해본 H는 계속 그렇게 나쁜 자세로 앉아서 일을 하면 디스크에 걸려도 이상하지 않다고 경고했다. (에디슨이 발명한 것이 전기가 아니라 야근이라고 주장한 한 카툰이 떠오른다!) 이게 다 프랑스의 긴 휴가 때문이라고 툴툴거려 본다. 환경과조경의 평화로운 루틴을 뒤흔들었던 서울정원박람회가 끝나니 11월호 마감이 코앞이다. 이번 달 『환경과조경』은 무려 100여 페이지를 할애한 해외 작가 특집으로 꾸몄다. 그 주인공은 프랑스 조경설계사무소인 아장스 테르Agence Ter다. 우리 편집부는 바쁜 10월을 대비하여 지난 6월 말부터 아장스 테르에게 작가 특집을 제의하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다. 그러니까 아장스 테르가 L.A. 퍼싱 스퀘어 공모전의 우승팀으로 선정되고, 그 결과가 『환경과조경』 7월호에 수록된 직후였다. 섭외는 곧바로 성사되었고, 아장스 테르와의 인터뷰는 프랑스 리포터인 박연미 씨가 흔쾌히 맡아주었다. 박연미 씨는 졸업 설계 작품을 앙리 바바Henri Bava에게 크리틱 받았던 인연을 전하며 반가워했다. 프랑스의 많은 조경학도들이 가고 싶어 하는 설계사무소가 아장스 테르라는 말도 덧붙였다. 7월 중순, 박연미 씨는 아장스 테르의 파리 오피스에서 세 명의 공동대표와 인터뷰를 순조롭게 마쳤다는 소식을 전했다.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잡지에 수록할 작품 리스트를 협의하고 자료만 받으면 정원박람회 행사 준비와 무난하게 병행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인터뷰 직후부터 담당인 조한결 기자가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휴가를 갔는지 담당자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럽의 휴가는 길다던데…, 찜찜했지만 길어야 한 달 정도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기다림이 9월까지 이어지자 우리의 우려는 불안과 초조로 변해갔다. 그 긴긴 여름이 다 가도록 감감무소식인 아장스 테르 덕택에 조 기자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고, 기다림에 지친 편집부는 11월호의 대안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이 물러가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 새로운 담당자인 에밀리에게서 연락이 왔다. 길고 길었던 프랑스의 여름휴가가 끝이 난 모양이었다. 에밀리는 열정적인 직원이었다. 일단 연락이 재개되자 메일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간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신이 난 조 기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에밀리와 대화를 이어갔다. 아장스 테르는 네 가지의 아주 구체적인 디자인 전략에 따른 카테고리를 보내왔고, 이에 맞춰 11개의 작품을 수록할 수 있었다. 이 작품들은 3헥타르에서 3천 헥타르까지 그 규모도 다양했다. 수록 작품의 리스트를 만들면서 편집부는 한정된 지면 안에서 몇몇 작업을 자세하게 보여줄 것인지, 아니면 좀 더 많은 작품을 소개할 것인지 사이에서 갈등했다. 결론은 한 설계사무소의 작품 세계를 살펴보는 특집인 만큼 다양한 작품을 수록하는 쪽으로 났다. 사실 몇 백, 몇 천 헥타르에 달하는 도시적 스케일의 작업을 잡지 몇 페이지에서 속속들이 소개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조 기자는 3천 헥타르의 가론 대공원 프로젝트를 편집하면서 책 한 권도 모자라다며 아쉬워했다. 비록 한정된 지면 안에서 작품을 접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스케일과 문화권을 넘나드는 아장스 테르의 작업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물을 과감하게 이용하는 전략이나 도시권 규모의 계획 프로젝트는 유난히 리서치나 콘텍스트 분석을 강조하는 그들의 디자인 철학이 과장이나 수사가 아니라고 수긍하게 한다. 작품뿐만 아니라 설계사무소의 운영 방식도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세 공동대표가 나란히 앉아 있는 프로필 사진을 보면서 아마 이 가운데 누군가는 운영에 집중하고, 누군가는 설계에 주력하는 등의 역할 분담이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러나 인터뷰 원고를 받고 보니, 지난 30년간 여러 대륙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도 기본적인 콘셉트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언제나 그 셋이 함께 했단다. 처음에는 대외용 멘트가 아닌가도 싶었다. 그런데, 인터뷰는 세 명과 했는데 답변이 하나다. 이를 이상하게 여겨 박연미 씨에게 물으니 “셋이 서로의 이야기를 이어받아 덧붙이는 식으로 대화를 풀어내 답변을 분리할 필요를 못 느꼈어요. 마치 한 사람이 말하듯이 이야기를 해서 좀 놀라울 정도였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인터뷰 전 박연미 씨는 아장스 테르는 도제식 성향이 강한 프랑스 조경계에서도 시스템에 의한 설계를 지향하고 있는 독특한 아틀리에라고 귀띔해 그 운영 방식에 대한 궁금함이 컸다. 인터뷰 원고를 보니 앙리 바바를 비롯한 세 명의 공동대표는 프로젝트의 핵심 콘셉트를 함께 만들고, 그 구현은 팀원들에게 맡긴다. 이들이 공유하는 것은 대표 디자이너의 스타일이 아니라 프로젝트를 풀어가는 방법론이라는 것이다. 왕성하게 영역을 넓혀가는 아장스 테르의 저력이 바로 그 시스템을 유지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한 조경가 집단이 보여주는 작업의 진화와 그 다양한 스펙트럼을 살펴보고, 또 그 개념에 몰입하는 과정을 거치다보니, 바로 이 지점에 종이 매체의 역할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공고해졌다. … 정보의 홍수 시대에, 종이 매체는 그 존재의 이유를 고민하게 된다. … 이번 특집이, 그간 지면의 한계 때문에 부족함을 느꼈을 독자들에게 갈증을 해소해줄 수 있는 특별한 편집으로 다가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토포텍 1을 작가 특집으로 다뤘던 작년 2월호의 코다에 썼던 문장이다. 다시 보니 낯간지럽게 편집 의도가 거창했다. 당시 토포텍 1의 특집은 지금은 설계를 하겠다며 훌훌 떠나버린 양다빈 기자가 맡았었다. 그땐 토포텍 1의 담당자였던 이폴리타와 양 기자가 100여 통의 메일을 주고받으며 특집을 꾸렸다. 두 사람 모두 잘 있는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