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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이름 짓기
  • 환경과조경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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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11월호의 특집은 프랑스의 아장스 테르(Agence Ter). 매년 한두 호는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국내외 조경설계사무소의 근작만으로 지면을 구성한다는 편집 구상. 작년에는 마르틴 라인-카노(Martin Rein-Cano)가 이끄는 독일의 토포텍 1(TOPOTEK 1)을 실었고(20152월호), 올해는 이 달에 아장스 테르를 다룬다.

 

온천수의 생태적 프로세스를 시각적으로 강하게 전달해 큰 화제를 모았던 아크바 마기카이후, 아장스 테르는 유럽을 넘어 남미와 중국에 이르는 여러 문화권에서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을 펼쳐 왔다.

 

특히 도시 스케일의 조경 계획과 물을 기반으로 한 대형 프로젝트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어 왔다. 만일 찰스 왈드하임의 신간 제목처럼 어바니즘으로서의 조경(landscape as urbanism)’이 우리 시대 조경의 과제라면, 아장스 테르는 아마도 그것에 가장 근접한 실천을 전개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취재를 하며 모든 에디터들은 아장스 테르라는 이름의 뜻에 대해 똑같은 짐작을 했다. 아장스는 영어 에이전시(agency)와 마찬가지이니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었고, 테르는 흙이나 땅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따왔을 것이라고 믿었다. 수년 전에 출판된 그들의 작품집 제목도 ‘Territories’이고 이 중에 앞의 Ter만 다른 색으로 인쇄한 걸 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뭔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확신에 찬 진지한 목소리로 에디터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아장스 테르나 김아연 교수의 스튜디오 테라(Terra)나 결국 같은 뜻이지.” 그런데 본지 파리 리포터 박연미 선생이 공들여 진행한 인터뷰 원고를 보니 그게 아니었다. 첫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급하게 사무실 이름을 짓다가 대표가 세 명이라서 숫자 3에 해당하는 라틴어 ter를 썼다고 한다. 당황스러웠지만 재미있게 느껴졌다.

 

이름을 짓는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우리는 깊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논문을 다 써놓고도 제목을 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다못해 이 에디토리얼처럼 짧은 글쓰기에서도 가장 어려운 게 제목 달기다. 회사 이름 짓기, 사정은 더 하다. 이름이란 자고로 크고 좋은 의미를 담아야 한다. 이름이 운명을 좌우한다는 설도 무시할 수 없다. 어감도 중요하다. 겉멋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망설이지만 그래도 뭔가 있어 보이는멋은 있어야 한다. 유행도 의식할 필요가 있다.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거나 금년 환경과조경지면에 등장했던 조경설계사무소 몇 곳의 이름에는 어떤 의미나 사연이 있을까. 거칠게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을 것 같다(물론 정확하게 조사를 하거나 직접 문의를 한 건 아니다. 대부분은 짐작이고 떠도는 말을 주워 담은 이야기다). 첫 번째 유형은 작심하고 작명을 한 것처럼 느껴지는 전통적인(?) 2음절의 한자어 이름이다. 가원, 서안, 서인, 신화, 유림, 한림처럼 설립된 지 비교적 오래된 한국 조경의 대표적인 사무실들에 이런 이름이 많다. 이런 유형의 이름에서는 의미가 중요하다. 계림원, 동심원, 이화원처럼 3음절인 경우도 있는데, 이때의 은 아마 정원이라는 조경의 대상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다음의 두 번째 유형으로 볼 수도 있겠다.

 

설계의 대상 자체를 이름의 중심에 놓는 경우가 두 번째 유형이다. 아장스 테르의 테르가 3이 아니라 땅이었다면 바로 이 경우다. 테라, 로사이(loci), 사이트, 플레이스랩 등이 여기에 속한다. 신생 사무실인 경우가 많다. 이 유형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이 아닐까. 스튜디오 엘도 있고 디자인 엘도 있다. , 팩토리 엘도 있다. 소장의 성인 이(Lee)에서 따온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L은 동시에 랜드스케이프의 L이다. 땅이든 장소든 경관이든, 영어심지어 라틴어표현이나 그 약자를 쓰는 게 대세다.

 

세 번째 그룹은 대표 조경가의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다. 전통적으로 변호사, 의사, 건축가와 같은 전문가들은 사무실 이름에 자신의 이름을 내거는 경우가 많았다. 해외의 여러 조경설계사무소 역시 마찬가지다. 특이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사례를 많이 볼 수 없었다. 오래 전의 환경과조경광고란에서 매달 볼 수 있었던 김종해조경설계사무소가 내 기억으로는 이 유형의 대표 사례다. 이원은 이교원에서 교를 뺀 이름 아닐까. 흥미롭게도 지난 십여 년간 새로 문을 연 사무실인 경우, , 오피스박김, D스퀘어, JWL, KnL처럼 소장()의 이름을 쓰거나 조합하거나 응용하는 추세가 급증하고 있다. 로직은 논리가 아니라 초기 창립자들의 영문 성 첫 글자의 조합인 LOSYK이다. HLD의 뜻이 무엇일지 무척 궁금해 문의했더니 호영리디자인이라는 답이 돌아오기도 했다. 물론 신생 사무실만의 경향은 아니다. CA과 어소시에이츠이니 이 유형에 속할 테고, C’Topos의 땅이니 이름과 대상이 결합된 예다.

 

네 번째 그룹은 사무실 이름에 설계의 지향점이나 설계 태도를 담는 경우다. 마당, 라이브스케이프, 비욘드, 빅바이스몰, 사이, 어리연, 우리엔, 채움, D+H(디자인 플러스 호프(Hope)), salmworkshop 등을 떠올릴 수 있다. 다섯 번째 유형에는 기타 또는 우연 정도의 카테고리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살펴보면 재미있는 사연이 많다. 이작은 이번 작품의 줄임말이라는데, 확인한 팩트는 아니다. 스튜디오 101은 수년 전의 환경과조경연재물 제목을 그대로 썼다고 한다. 이수는 소장의 딸 이름 이수에서 앞의 두 글자를 가져온 경우. 많은 사람들은 사무실이 이수역 근처에 있냐고 묻는다고 한다. 그룹한의 작명 사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조경에 맺힌 사람들이 모여 한을 풀어보자는 뜻이라는 설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무실로 성장한 걸 보면 크다()라는 뜻의 우리말 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설이 더 유력한 것 같다.

 

아장스 테르 특집 덕분에 우리나라 조경설계사무소들의 이름과 그 사연을 새삼 즐겁게 생각해 보았다.

 

 

전진형 교수의 리질리언스 연재가 이번 호로 막을 내린다. 6개월간의 수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올해를 마감하는 다음 호에는 여러 연재물의 마지막 원고가 실릴 예정이다. 편집실의 가을 풍경은 또 다른 시작을 새롭게 준비하느라 몹시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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