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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광주디자인비엔날레, 숲을 디자인하는 방법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를 도라하면 도가 아니다. 노자의 도덕경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로“도道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노자老子가 한 줄로 집약해 놓은 답변과도 같다. 내용이 추상적이어서 정확히 뜻을 짚어내기가 어려우며 실제 학자들 사이에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도가 항상 불변의 도는 아닐 수 있다”,“ 생각될 수 있는 진리는 절대적 진리라고 할 수 없고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진리는 영원한 진리라고 할 수 없다”혹은“도(진리)는 말로써 한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등등. 지난 9월 2일부터 10월 23일까지 광주 시내 일대에서 펼쳐진 2011 광주디자인비엔날레(총감독 승효상, 아이웨이웨이)는“디자인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며“도가도비상도(圖可圖非常圖디자인이 디자인이면 디자인이 아니다)”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다. 道를 圖로 바꿔 도덕경의 첫 구절을 패러디한 주제로서 그 해석과 의미는 매우 다양할 것이다.이번 행사는“도가도비상도”의 개념을 작품으로 풀어내는 ‘주제전’, 지난 백년간 건축, 패션 등 기존의 영역에서 디자인을 이끌었던 100개의 이름을 선정하여 작품을 전시하는 ‘유명’과, 이와는 대조적으로 의료와 환경 등 우리의 주변 일상에서 기존의 유명 디자인 작품의 오브제(브랜드 등)를 넘어선 새로운 디자인의 영역을 탐색 확장하는‘무명’, 그리고‘커뮤니티’,‘ 광주폴리’,‘ 비엔날레시티’등 모두 여섯 개의 대주제로 구성되었으며, 44개국에서 133명 작가, 73개 기업이 참가하였다.
  • 올조회, 경인아라뱃길 가다
    본지가 매년 조경 분야의 발전에 공로한 조경인들에게 수여하고 있는 ‘올해의 조경인’상의 수상자 모임인 ‘올조회’에서는 지난 9월 26일(월) 경인아라뱃길 현장을 방문했다. 한국수자원공사는 지난 2009년 경인아라뱃길 사업의 친수경관 조성과 관련해 인천광역시와 경기도 김포시에 속하는 사업 지역 내 인천터미널, 김포터미널, 두물머리생태공원, 주운수로, 파크웨이를 대상으로 설계 공모전을 개최하였다. 그 결과 조경설계 서안㈜ R&D의 ‘청옥빛 소풍 Azure Journey’이라는 작품이 최종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경인아라뱃길은 현재 서해갑문이 있는 인천터미널과 한강갑문이 있는 김포터미널, 주운수로를 포함해 수향 8경, 파크웨이, 자전거도로, 포켓 공간, 선착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공정률이 90%로 오는 11월에 준공될 예정이다. 사진_최자호 부장
  • 조경의 길을 묻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지난 10월 4일 화요일, 조경전문포털사이트 라펜트(www.Lafent.com)에는 ‘2011년 제1회 조경의 길을 묻다 간담회(이하 조경의 길)’가 동영상으로 공개되었다. 라펜트는 사이트 동시 접속자가 늘어날 것을 대비하여 사전에 서버 교체와 점검을 완료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4일 하루 동안 사이트의 로딩 속도가 평소보다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되었다. 예상을 상회하는 사람들이 라펜트 ‘조경의 길’에 접속을 했던 것이다. ‘취업’과 ‘진로’ 문제가 조경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얼마나 절실한 당면 관심사인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최근 조경 분야가 주목하고 있는 키워드 중 하나가 ‘소통’이다. 특히 외부 공간 전반을 조성하는 분야의 특성상 분야 간 소통에 근거한 융합과 통섭이 많은 이들로부터 회자되면서 중심 이슈가 되었다. 이는 분야와 업역을 넘어선 외부 공간 전반을 조성하는 코디네이터로서의 역할이 조경가에게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분야와 업역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세대 간 소통은 과연 어떠한가? 특히 대학 고학년에서 조경 실무를 준비하는 예비 조경인과 조경 전문가와의 핫라인을 만드는 시도는 필요하고 또한 가치 있는 과제가 아닌가? 이러한 문제 의식이 이번 간담회의 시작이었다.
  • ASLA Awards 수상, 최신현 (주)씨토포스 대표
    지난 9월 28일 미국조경가협회(ASLA)는 2011년 ASLA Professional Awards 수상작을 발표했다. 해마다 약 1천여 개의 조경 작품 및 연구 프로젝트가 출품되지만 단지 10여 개의 작품만이 수상의 영예를 얻을 만큼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이 상에 올해는 (주)씨토포스가 설계한 서서울호수공원이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바로 General Design 부문 Honor A ward를 수상한 것. 우리나라로서는 조경설계 서안(주)이 설계한 선유도공원(2004년)과 청계천 (2009년)에 이은 세 번째 수상이다. 앞선 두 작품이 몇 차례의 실패와 도전 끝에 이룬 수상인데 반해 서서울호수공원은 단 한 차례의 도전으로 수상을 이뤘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에 대표 설계자(Lead Designer)인 (주)씨토포스 최신현 대표를 만나 수상 소감 및 설계 과정, 디자인 철학 등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먼저 결코 쉽지 않은 상을 단 한 번에 수상했다. 소감은?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상을 받게 된 것은 매우 기쁜 일이지만(거듭되는 인터뷰를 하다 보니) 약간의 부담이 된다. 다른 분들도 다만 출품하지 않았을 뿐이지 좋은 작품도 많은데…….그래서인지 인터뷰 하는 것도 사실 조심스럽다.개인적으로는 고등학교 때부터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다. 그것이 대학에서 조경학과를 선택하게 된 한 계기가 되었고 그 후로 작품 활동을 하면서 언제쯤 그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 수상이 그 첫 시작의 단추를 꾀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디자인 능력과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린다. 서서울호수공원을 설계하면서부터 ASLA 출품을 염두에 둔 것인가? 특별히 도전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처음부터 ASLA 출품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다만 디자인 할 때 처음부터 도면에서 보이는 것보다는 실제 공간이 만들어졌을 때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디자인을 했고, 시공까지 책임감을 가지고 공간을 만들다보니 좋은 작품이 나온 것 같다. 사실 보수도 받지 않고 감리를 하게 된 것도 설계를 아무리 열심히 했다 하더라도 시공과 연결되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공간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내 설계에 대해선 시간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공사까지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보통 설계가들은 시공을 잘 하지 않는데 나의 경우 설계와 시공을 직접 많이 해봤기 때문에 시공에 대한 경험과 현장에서의 디테일에 대한 고민들이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원천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그런 과정에서 ASLA 어워드에 대한 공지가 나왔고 나의 여러 작품 중에서 디테일적으로 비교적 완성도가 높은 서서울호수공원을 출품하게 된 것이다.
  • 북미한인조경가회 AKLA
    ‘북미한인조경가회’의 시작북미한인조경가회의 시작은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북미의 각 지역에서 활동/공부하고 있던 선배들의 의지로 ‘북미한인조경가회’의 연락망이 조직됩니다. 캐나다에 계신 전재현 선배를 포함해서 14명가량이 뉴저지의 모히간 산장에서 모인 자리가 지금의 ‘북미한인조경가회’의 시작이 되었으며, 2001년 2월 9일 김준연, 차태욱, 박윤진, 김정윤, 성정환 선배들이 함께한 자리에서 지금은 전설과도 같은 ‘뉴잉글랜드 선언’이라 일컬어지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같은 날 필라델피아에서는 조윤철, 정욱주, 김아연, 이재영, 손방, 송준재 선배들이 ‘뉴잉글랜드 선언’과 함께 역시 전설로 남아 있는 ‘필라선언’을 작성하게 됩니다. 이때에‘북미한인조경가회’의 기본적인 목적으로 북미주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조경가들간의 긴밀한 연결, 진보적인 사고의 교환과 공유, 그리고 이를 통한 한국 및 세계 조경계에 대한 기여라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2011년 현재, 10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그 때의 선배들은 세계 곳곳에 계시지만 그 당시의 선배들의 마음과 열정이 ‘북미한인조경가회’를 지탱하고 있는 뿌리임은 분명합니다. ‘북미한인조경가회’에서 벌어지는 일, 벌어질 일‘북미한인조경가회’는 워낙 땅이 넓은 북미 지역의 특성상 온라인에서 많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프라인에서도 비공식적인 지역 모임, 그리고 공식적인 MT를 통해 모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조경이라는 공통점을 매개로 다양한 관심과 다양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모여 교류하는 공간이지요. 때문에 온라인상에서는 도시·조경·디자인에 대한 광범위한 토론과 의사소통이 종종 이루어집니다. 또한 비공식/비정기적으로 각 지역의 모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많은 회원들이 함께 하는 MT와 같은 공식 모임에서는 회원들이 자신이 참여한 프로젝트를 자유롭게 발표하고 서로 비평하는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합니다. 물론 맛있는 음식과 술이 늘 곁들여진답니다. 쉽게 듣기 힘든 조경과 관련 분야에 대한 정보와 뒷이야기들이 오고가며, 타지에서의 학업, 졸업과 취업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또한 해외에서 활동하는 조경인들의 생활의 단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현재에 충실하며 희망을 품고 미래를 준비하는 곳이 또한 ‘북미한인조경가회’입니다. 10주년을 맞이하여 ‘북미한인조경가회’는 차태욱 선배가 말씀하신 것처럼 앞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한인 조경가들의 뛰어난 능력과 자질을 인지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몸담고 있던 북미조경계를, 그리고 나아가서 세계 조경계를 변화시킬 수 있도록 기여하고자 합니다.앞으로 ‘북미한인조경가회’의 멋진 활약,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부속 모리스 수목원Morris Arboretum
    세계적인 수목 컬렉션과 역사적인 정원의 만남식물원을 찾아가는 길은 마치 새로운 영화를 보거나 책을 펼쳐 드는 일처럼 색다른 설레임을 준다. 같은 나무와 꽃을 가지고도 그것을 어떤 공간에 어떻게 보여주는가에 따라 정원은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는 오브제가 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가장 역사적인 도시 중 하나인 필라델피아의 북쪽 체스트넛 힐(Chestnut Hill)에 위치한 모리스 수목원은 120년이 넘는 역사가 살아 숨쉬는 장편 드라마와도 같은 공간이다. 마치 드넓은 초원에 한 편 한 편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듯 각각의 독특한 주제와 디자인으로 짜여진 정원을 감상하는 일은, 사실 단순한 꽃놀이나 마음의 휴식을 주는 시간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후세대를 위한 모리스 남매의 선물모리스 수목원은 처음 콤프턴(Compton)이라는 이름으로, 1887년 존 모리스(John Morris, 1847 ~ 1915)와 리디아 모리스(Lydia Morris, 1849 ~ 1932) 두 남매의 여름 휴양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모리스 남매의 부친 아이작 모리스(Isaac Pascall Morris)는 철강 제조 회사 아이피 모리스(I.P. Morris) 사의 설립자로, 이 회사는 남북전쟁 후 전기 보급과 자동차 발명 등 급부상하기 시작한 산업화에 힘입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존 모리스는 하버드대학교 엔지니어링학과를 졸업한 후 부친과 함께 회사를 경영해 나갔고, 은퇴 후에는 여동생인 리디아와 함께 수목원 조성에 전념했다. 모리스 남매는 1881년부터 1906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아시아, 유럽 등 전 세계를 함께 여행하며 정원 조성에 대한 아이디어, 예술 작품, 조각품, 식물들을 수집하여 하나하나 수목원을 일궈 나갔다. 특히 1889년에 시작한 세계 여행은 11개월에 이르는 대장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존 모리스는 하버드대학교 부속 아놀드 수목원의 첫 디렉터였던 찰스 사전트(Charles S. Sargent)와, 식물학자이자 식물 탐험가였던 데이비드 페어차일드(David Fairchild), 명망 높은 식물 수집가 E.H. 윌슨(Ernest. Henry Wilson) 등 당대 내로라하는 식물 전문가들과 교류를 통해 전 세계로부터 갖가지 진기한 식물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많은 정원사와 원예가를 고용하여 체계적이면서도 독특한 스타일의 정원을 조성하고 관리해 나갔다. 모리스 남매는 또한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장되는 도시화에 따른 난개발을 우려하여 자연환경과 토지의 보전 관리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는 후에 콤프턴이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부속 모리스 수목원으로 변모하는 데 중요한 주춧돌이 되었다. 남매는 또한 교육의 힘을 믿었고, 언젠가 그들이 일군 땅이 대중을 위한 정원이 되어 원예와 식물학을 위한 교육 기관의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결국 1932년 리디아 모리스의 죽음 이후 콤프턴은 정식으로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부속 모리스 수목원이 되었다.
  • 창덕궁
    Changdeok Palace 造營_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로 하고 경복궁을 창건하였으나, 정종 때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였고 태종 때에야 수도를 옮길 준비를 하면서 경복궁 동쪽 향교동 일대에 궁궐을 조성하게 된다. 태종 5년(1405) 2월 한양에 한 달 간 머물면서 친히 공사의 진행을 둘러보고, 1년에 걸친 공사 끝에 창덕궁昌德宮이라 명명하였다. 이어 1411년 진선문進善門과 석교石橋를 건립하고, 다음해 돈화문敦化門을 준공하는 등 왕궁의 보완 공사를 진행하고, 1418년 7월 박자청朴子靑에게 명하여 인정전仁政殿을 개축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인정전의 개축 공사가 끝나기 직전 승하하고, 뒤를 이은 세종이 즉위한 1419년 9월 준공하게 되었다. 그 후 인정전은 1453년 단종의 즉위와 동시에 두 번째 개축을 하게 되고, 모든 공사는 세조 6년(1460년)에 이르러 마무리되었다.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이 불타버리게 되어, 광해군 원년(1609) 재건 공사가 시작되어, 1614년 원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1623년 광해군에 반대한 세력에 의해 창덕궁의 많은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1636년 인조는 후원1인 옥류천 주위에 소요정, 청의정, 태극정을 지었으며, 1644년에는 존덕정을, 1645년에는 취향정을 건립하였다. 또한 1692년에는 애련지와 애련정이 조성되고, 인조 25년(1647) 창덕궁의 전반적인 복구가 다시 이루어지게 된다. 이후 1704년 대보단이 조성되었으며, 1776년 영조는 규장각을 짓고, 정조는 부용정을 개축하였다. 1828년 순조는 사대부의 생활을 즐기기 위해 민가 양식의 연경당을 건립하였다. 이후 1908년 일본에 의해 궁궐 일부에 개축이 행해지고, 인정전에는 서양풍 가구와 실내 장식이 도입되게 되었다. 1917년 대조전을 비롯한 내전 일곽이 소실되었는데이때 정궁인 경복궁의 침전 공간에 있던 교태전·강녕전, 동서행각, 연길당·함원전 등의 건물을 헐어 사용하였다. 그 후 1990년대에 들어와 3단계에 걸친복원 공사가 이루어져 1995년 인정전 주변의 내행각 11동이 복원되었고, 1999년 외행각 주변 15동이 복원되었으며, 2002년 규장각 권역에 대한 복원공사가 이루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고정희의 식물이야기(16)
    1셰익스피어(1564~1616) 원작 논란머지않아, 정확히 말하자면 11월 3일 인디펜던스데이로 유명해진 롤란드 엠머리히 감독의 최신 영화 한 편이개봉될 예정이다. 제목은‘익명anonymous’이다. 한국에서도 개봉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 영화는 세상을 좀 시끄럽게 할 것 같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그의 작품을 정말로 직접 썼는가?”에 대한 논란을 소재로 하기 때문이다.누가 셰익스피어를 모르겠는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작가 중 하나로 꼽히는 셰익스피어. 그의 작품을 직접 읽거나 연극으로 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햄릿이며 로미오와 줄리엣, 맥베스와 오셀로 등의 내용 정도는 누구나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희곡 서른일곱 편 중에서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은 작품은 단 하나밖에 없다.2 햄릿은 무려 일흔다섯 번, 로미오와 줄리엣은 총 쉰 번이나 영화로만들어졌다. 16세기 중·후반에서 17세기 초에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희곡은 지금도 연극무대에 꾸준히 오르고 있으며 그의 명성은 조금도 시들지 않고 있다. 이 사실은 다른 어느 작가도 이루지 못한, 수백 년의 시대를 초월한 셰익스피어의 천재성과 그의 작품의 보편성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오셀로, 맥베스, 그리고 팔스타프 등의 작품은 베르디가 오페라로 작곡하여 더욱 널리 알려지는데 일조하기도 했다.이런 전무후무한 희대의 작가가‘본인의 작품을 직접 쓰지 않았을 수 있다’는 논란이 18세기에 시작되었고 이 논란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원작 여부에 대한 의문이 더욱 짙어져가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 근거가 되는 몇 가지 핵심적인 논지를 들자면, 첫째로 보통 작가들은 평생 서너 편의 희곡도 쓰기 어려운데 서른일곱 편의 희곡을, 그것도 두고두고 명작으로 남을 그 많은 희곡들을 과연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단순한 인간이 쓸 수 있었는가라는 점이다. 평균 일 년에 한 편 이상을 쓴 셈이다. 특히 작품 속에서 보이는 엄청난 철학적 깊이와 고대 문학과 예술에 대한 방대한 지식, 그리고 법률이며 정치 상황에 대한 전문적 지식, 궁중 생활과 테니스며 매사냥 등 귀족들의 생활에 대한 상세한 묘사들로 미루어 볼 때 셰익스피어의 출신 성분과 교육 수준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주장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의 언어인데, 그는 역대 작가 중 가장 많은 단어를 구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총 17,750개의 단어를 썼으며 가장 서민적인 표현으로부터 최고급 수준의 언어까지 다양하게 구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필요하면 새로운 단어도 만들어 냈다. 영어 사전에 가장 많이 인용된 것도 그의 언어이다. 물론 교육 수준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독학으로 지식과 언어 구사력을 넓히고 명작을 쓰는 것이 가능한 일이니 이 논란은 크게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둘째는 외국어 실력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쓴 사람은 그리스어와 라틴어 외에도 상당한 수준의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구사했음에 틀림이 없는데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어느 사이에 외국어까지 배웠겠는가라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장갑을 만드는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나 기본 교육만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스물한 살 정도 되었을 때 런던으로 가서 배우가 되었다. 그리고 희곡을 써서 바로 무대에 올렸는데 쓰는 족족 엄청난 반향을 얻었고 유명해졌다. 그런데 어디에서고 그가 고등 교육을 받았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국어 습득 역시 천재라면 가능한 일에 속한다. 세 번째는 그의 외국 지리와 문물에 대한 지식이다. 셰익스피어 작품의 상당 부분이 영국 이외의 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탈리아의 베로나를 무대로 하고 있다. 오셀로와 베니스의 상인은 물론 베니스가 무대이고, 햄릿은 덴마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그 외에 보헤미아, 시칠리아, 프랑스, 그리스, 이집트 등 거의 온 세상을 무대로 하고 있으며 실제로 그 나라에 가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장면 묘사들이 작품에 실려 있다. 그런데 셰익스피어 자신은 영국을 떠나 본 적이 없다. 물론 이 역시 여행 서적들을 읽어 습득할 수 있는 지식이지만 보통 여행 서적에서 다루지 않는 세세한 문물들까지 알고 있다는 것은 천재성으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다. 네 번째로 의심이 가는 점은 인쇄된 판본 외에 셰익스피어가 직접 쓴 편지, 일기, 메모 등이 한 줄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유품 중에 책이 단 한 권도 없었다는 점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보았을 거라는 해석도 있는데, 아무리 도서관에서 빌려보았다 하더라도 작가의 서재에서 책이 한 권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한 줄의 메모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다. 인쇄로 넘기기 전에 손으로 쓴 원고가 한 편이라도 혹은 부분적으로라도 어딘가는 남아 있는 것이 정상이다. 글 쓰는 사람들이 대개 작품 외에도 편지나 메모, 일기 등을 남기기 마련이다. 특히 그가 남긴 유언장을 보면 누가 어떤 가재 도구를 물려받는가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정하고 있음에도 그의 작품의 판권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이 없다는 대목에 도달하면 누구나 마음속으로 물음표를 찍게 된다. 이미 1780년 경 셰익스피어 고향 출신의 전기작가 제임스 윌멋이 스트팻퍼드 일대의 반경 오십 마일의 범위에 있는 모든 도서관과 사택들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단 한 줄의 편지도 나타나지 않았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본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이메일처럼 당시의 일상적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편지였음을 감안할 때 특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셰익스피어가 사업에 능란했다는 점이다. 그는 런던의 글로브 극장의 주주였고 재산을 많이 모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자녀들 교육을 등한시해서 그의 딸들이 문맹이었다는 점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 딸이 둘이었는데 한명은 아예 문맹이었고 다른 한 명은 자기 서명이나 겨우 그리는 정도였다고 한다.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보이는 엄청난 교육적, 문화적 수준에 비추어 볼 때 정말 상상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 소통+장소,..조경(9)
    소통의 참여자: 주인 노릇을 하는 이가 주인“간혹 ‘주민 참여 프로그램 운영’을 주민 참여로 오해하는 경우들이 많다. 그래서 어떤 프로젝트의 경우 발주처는 ‘주민 20명 이상이 모이는 참여 프로그램 2회, 주민 설명회 2회’ 같이 사람 수와 횟수를 제시하는 경우가 있다. ‘이해관계자들 간의 공동의 이해 도달’은 너무 추상적이고 설계자들의 성실성을 확신할 수 없어서 그렇겠지만, 이런 경우 자칫 프로그램을 위한 프로그램을 할 수 있다. 대상지와 프로젝트의 성격에 따라서, 주민들을 고려해서 그리고 무엇에 대한 상호 이해가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 속에서 참여 프로그램을 검토하고 이용해야 한다.” 저번 호에서는 소통의 기법으로서 ‘주민 참여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번 호에서는 ‘소통의 과정’에 누가 참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내용은 좀 늦은 감이 있다. 소통의 전략과 기법 이전에 논했어야 했다. 글 쓰는 이의 불찰이다.
  • 연재를 마무리를 하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나는 건축이나 조경의 이론은 실천을 통해서 작가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며, 이론가의 역할은 그들의 작업을 관통하는 심층적 의미를 발견하고 이를 이론으로 정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현실을 끊임없이 반영해야 하는 디자인의 이론은 이즘, 혹은 고정된 담론으로 고착되는 순간 무의미해진다고 믿고 있었다. 실천이 보편적 이론이 되는 순간, 그는 다른 실천에 의해 파괴되어야 할 구습이 된다. 이러한 믿음 뒤에는 까다로운 모순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론적 담론이 부재한 디자인의 실천은 그 순간, 순간의 감각에 의존하는 문제 해결 과정인가? 반대로 실천을 생산하지 못하는 이론은 단순히 역사적 검토 자료나 결과물을 설명할 미사여구에 불과한가? 어떻게 보면 연재를 통해 쓴 열 개의 텍스트들은 내가 스스로 제기한 모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공모전은 이론과 실천의 연결 고리를 찾아내기 위한 최고의 소재였다. 공간을 디자이너가 기획하고 만들어낸다고 생각하지만, 실무를 하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된다. 재정적인 제약, 클라이언트의 다양한 가치, 법적인 장치들, 주민들의 이해관계, 이러한 현실적 조건들이 디자이너의 원안을 깎아내고 마름질하여 실제의 공간을 생성한다. 공모전에서 역시 이 같은 제약 조건들이 존재하지만, 그 힘은 현실의 프로젝트에 비해 상당히 미약하다. 공모전은 디자이너에게 한계를 벗어나 자신의 생각과 감각을 극대로 발현시킬 것을 요구한다. 때문에 여기에서는 실제 프로젝트에서는 불가능한 일탈이 허용되며 가장 원석에 가까운 디자이너의 생각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