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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경제국주의 사보타주 Environmental Imperialism Sabotage
    지난 수십 년간 종말론에서나 있을 법한 인구 이동 및 공동체 소속을 둘러싸고 반복되어 온 전 세계적 갈등은, 환경제국주의(environmental imperialism)의 한 학파에서 나온 19세기 확장주의에서 비롯된 지역 구조의 부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인도 출신 연구자 라마찬드라 구하(Ramachandra Guha)는 환경제국주의라는 용어를 설명한 바 있다.1 그의 해석은 공간 혹은 영역에 대한 인간의 영향력이 특정 모형으로만 이해하기에 너무 복잡한 나머지 20세기 말과 21세기의 지역 계획가가 무시하기 일쑤였던 문화적·심리학적 영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환경제국주의는 한 커뮤니티가 이국의 땅에 미치는 영향력 중 많은 부분은, 해당 지역에 이미 존재했으나 존중받지 못한 맥락과 다르거나 심지어 완전히 반대선상에 놓인 문화적 관례 및 자연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임을 상기시킨다. 따라서 자연과 분리불가결한 관계를 지닌 혼성 커뮤니티와 화해를 시도해온 수십 년(어떤 제국의 경우에는 수백 년)의 노력은 헛된 것이다. 생물권 다양성을 존중하는 조경 계획가가 신자유주의 악으로부터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받는 시대에, 우리가 지닌 제국주의적 본성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설계가의 행동은 프로젝트에 문화보다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이는 곧 자연과의 매우 특별한 존재론적 관계를 반영하는 특정한 삶의 방식 ̄즉, 교육받고 특권을 지닌 결정권자의 생정치(biopolitics)2 ̄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공학적 프로토콜의 옹호를 받고 있는 국제적 환경주의 흐름은 새로운 접근 방식이 떨쳐내야 하는 골칫거리다. 인식론적 무정부주의3를 통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섬세하지만 존중할 만한 다른 지역적인 가치로 글로벌 문화를 논의할 수 있다. 이탈리아 미래파Futurist의 파시즘적 논리를 펼치게 했던 기념비주의와 포괄주의가 백여 년에 걸쳐 생물권의 풍부함을 비약적이고 무식하게 손본 결과, 지구Gaia의 일상과 상상을 초월하는 다양성이 결국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고국에 흩어져 위험천만한 거주지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 현실을 환경적으로 구축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자연적·사회적 환경을 길들이는 대신 동행하기를 지향하는 전문가들이 실험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대 환경 관리에서 쉽게 발견되는 환경 미학을 바탕으로,4 동시대의 예술 작업을 구성하는 연구와 실천적 프로젝트의 중심에서 생태철학적 현상을 잡아내는 것은 이미 보편화되었다. 풍부하고 혼합적인 접근 방법으로서 삶 공간의 무형성을 이해하는 능력은, 뒤에서 보게 될 감각민족지학연구소(Sensory Ethnography Lab)의 사진가 필립 우다드(Philippe Oudard)와 건축가 조민석의 다양한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중략)... *환경과조경375호(2019년7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Ramachandra Guha and David Amold, eds., Nature, Culture, Imperialism: Essays on the Environmental History of South Asia , New Delhi: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2. Michel Foucault, The Birth of Biopolitics: Lectures at the College de France, 1978-1979, London: Palgrave Macmillan, 2008. 3. Paul Feyerabend, Against Method: Outline of an Anarchistic Theory of Knowledge, London: Verso, 1975. 4. Alban Mannisi, “Environmental Observatory: Sensory Landscape Permaculture”, Kansai Engineering Symposium Proceeding , Nagoya, 2018. 알반 마니시(Alban Mannisi)는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스트다. 그는 건조 환경을 구축하고 연구하는 플랫폼 SCAPETHICAL(www.scapethical.org)의 설립자이자 이사이며, 호주 멜버른 공과대학(RMIT)의 건축·도시설계학부 부교수다. 역사와 하이브리드 컬처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관심을 두고 프랑스, 한국, 싱가포르, 영국, 태국, 일본, 호주에서 탐구해 왔다.
    • 알반 마니시(Alban Mannisi)
  • [도면으로 말하기, 디테일로 짓기] 생태 계류
    단지 계획과 관련된 도면을 제외하고 재료와 형태, 디테일에 공들여 디자인하는 시설 중 하나는 수경 시설이 아닐까 싶다. 공간의 배경이 되든 중심이 되든, 수경 시설은 대상지의 조건 혹은 설계 콘셉트에 따라 비교적 구체적으로 형태와 구상을 표현할 수 있고 존재 자체로도 이목을 강하게 끄는 특징을 갖기 때문이다. ‘한남 더 힐’은 그룹한과 오오토리 컨설턴트(OHTORI Consultants)의 요지 사사키(Yoji Sasaki)가 협업한 고급 주거 단지 프로젝트다. 오오토리가 기본설계를, 그룹한이 실시설계를 진행했다. 공사용 도면을 작성하면서 세부 공간의 생소한 디테일이나 잘못 표현된 부분에 대한 샵드로잉을 그려 협의했고, 이를 통해 설계안을 정확하게 구현하고자 했다. 제시한 도면은 단지 중심에 위치한 생태 계류 상세도로, 평지와 경사지에서 생태 계류와 산책로를 자연스럽게 통합하는 여러 디테일 전략을 담고 있다. 계류와 산책로의 결합, 녹지와의 경계 처리, 물의 흐름에 따른 세굴 방지, 계류 시작점 처리 등을 중점적으로 고려해 작성했다. ...(중략)... *환경과조경375호(2019년7월호)수록본 일부 김기천은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후 그룹한에 입사하여 현재 전략디자인본부를 이끌고 있다. 조경 이론과 담론이 왕성하던 2000년대 초부터 여러 설계 이슈에 그룹한의 고민들을 담아내며 다양한 유형의 공공 오픈스페이스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최근에는 프로젝트의 스케일을 다양화하며 설계가의 고민을 공간에 구현하는 접근 방식에 관심이 많다. 주요 작업으로는 서울대공원 재조성 국제 설계공모, 시흥 배곧생명공원, 영천 렛츠런파크, 양평 현대 연수원 블룸비스타 등이 있다.
  • [그리는, 조경] 손과 컴퓨터
    아날로그의 손맛과 디지털의 마우스 터치 중 어느 것이 우월한가에 대한 질문은 컴퓨터 드로잉이 시작되던 무렵부터 조경가, 연구자, 교육자의 토론에 자주 등장했다. 이제 손과 컴퓨터가 다투면서 공존하던 시기를 훌쩍 넘겨 컴퓨터 드로잉의 시대가 되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접어들어 컴퓨터 모니터를 벗어나 VR가상 현실과 AR증강 현실을 이용해 새로운 형식의 경관을 디자인하는 지금, ‘손 vs 컴퓨터’ 구도는 ‘디지털 vs 또 다른 디지털’ 구도로 대체되었다. 근래에 초기 아이디어 구상 단계 이후에도 손으로 공들여 드로잉하는 디자이너를 본 적이 없다. 이제 손 드로잉 사례를 논문에 인용하려면 애써 찾아내야 한다. 게다가 아날로그의 손맛을 흉내 내는 새로운 디지털 테크놀로지, 일명 디지로그(digilog)제품이 쏟아지는 현재의 디지털 생태계에서 손과 컴퓨터의 대결 구도는 해묵은 이분법적 프레임으로 여겨질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손과 컴퓨터를 드로잉 도구로 다시 생각해보는 것은 중요하다. 조경가가 그간 손과 컴퓨터의 기능과 역할을 어떻게 생각했고, 이를 조경 설계에 어떻게 활용해왔는지 되짚어 볼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손 vs 컴퓨터? 컴퓨터 드로잉은 20세기 중반 이후, 비교적 근래에 나타났기 때문에 조경 드로잉의 긴 역사에서 컴퓨터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다. 컴퓨터가 조경 드로잉 도구로 부상하자마자 조경가들은 전통적인 드로잉 도구였던 손과 새로운 기계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손과 컴퓨터를 대결 구도로 놓고 둘 중 어떤 것이 조경 설계에서 우월한지를 다퉜다. 손이 컴퓨터보다 뛰어나다는 주장은 사람의 뇌와 손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컴퓨터 마우스를 거치지 않고 바로 종이 위에 옮길 수 있기 때문에 설계가의 머릿속에 있는 디자인 아이디어가 손실되지 않는다는 논리다. 이러한 점에서 손이 컴퓨터보다 경관의 형태, 재료, 구조에 대한 감수성을 시각화하는 데 뛰어나다고 주장한다(그림 1).1 손 드로잉을 경관에 대한 설계가의 감수성이 집적된 산물로 보는 견해는 컴퓨터가 조경 설계에 본격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하던 1980년대 중반에도 제기되었다.2 그 저변에는 손은 설계가의 창의성을 펼쳐내는 상상성의 도구이며 컴퓨터는 창의성을 저해하는 도구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손 우월론에 맞서 컴퓨터 드로잉이 조경 설계에서 더 뛰어나다는 목소리도 꾸준히 있어 왔다. 컴퓨터는 손보다 빠르고 정확하며 수정과 복제가 쉽기에, 이러한 기계적 효율성은 컴퓨터 우월론의 주요 논거로 활용됐다. 1980년대부터 컴퓨터 드로잉의 절차가 손 드로잉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조경가도 있었다. 연필과 마우스라는 다른 도구를 쓰지만, 식재를 반복해 그리거나 지우고 스케일을 조정하는 과정은 손과 컴퓨터 드로잉 모두에 해당한다.3 이러한 점에서 컴퓨터 드로잉은 빠르고 효율적이며 많은 선택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덕분에 오히려 창조적 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4 컴퓨터 드로잉이 손을 거의 대체하는 요즘, 컴퓨터가 창조적 도구라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제공하는 다양한 필터와 효과를 이용하면 경관의 분위기, 미묘함, 모호함, 역동적 프로세스 등을 자유롭게 시각화할 수 있다(그림 2).5 컴퓨터 소프트웨어가 제공하는 기능이 많아져 손 드로잉으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표현이 가능하고 연필에 필적하는 사용감을 주는 전자 기기가 출시되는 지금, 손이 컴퓨터보다 경관에 대한 설계가의 감수성을 시각화하는 데 우월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중략)... *환경과조경375호(2019년7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손을 옹호하는 대표적 조경 이론가인 마크 트라이브는 컴퓨터 드로잉에서는 “설계 아이디어, 특질, 예상되는 경험, 수용자의 능력이 손실”될 우려가 있고, “기계 매체(컴퓨터)가 인간을 장소와 거리 두게 하는 반면, (손) 드로잉은 특정 장소에 시간, 집중력, 이목을 집중하게” 돕는다고 주장했다. Marc Treib, “Introduction”, inDrawing/Thinking: Confronting an Electronic Age, Marc Treib, ed., London: Routledge, 2008, p.10; Marc Treib, “Introduction”, in Representing Landscape Architecture , Marc Treib, ed., London: Taylor & Francis, 2008, p.19. 뛰어난 손 드로잉을 남긴 조경가 로리 올린은 “뇌는 손에 곧바로 반응하여 (공간의) 구성, 균형감, 움직임, 예기치 않은 감정이 생성되므로 다음 선을 어디에 그려야 할지 떠오르지만, … 키보드나 마우스로는 공간의 감수성, 즉 공간의 형태, 재료, 구조, 중량감을 발전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Laurie Olin, “More than Wriggling Your Wrist (or Your Mouse): Thinking, Seeing, and Drawing”, in Drawing/Thinking: Confronting an Electronic Age, pp.85, 97. 2. 조경가 워렌 버드와 수잔 넬슨은 “카메라나 컴퓨터는 우리의 인식과 이해를 무한하게 확장하지만 대상에 가까이 갈 필요가 없어져 감각을 통한 앎의 즐거움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손) 드로잉이 개인의 표현을 드러내고 지속하는 언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Warren T. Byrd, Jr. and Susan S. Nelson, “On Drawing”, Landscape Architecture 75(4), 1985, p.54. 3. 아서 컬락은 “모든 캐드 드로잉은 근본적으로 손으로 그려지며, 복잡한 심벌을 그리고, 복사, 편집, 스케일, 비율을 변경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손 드로잉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Arthur J. Kulak, “Prospect: The Case for CADD”, Landscape Architecture 75(4), 1985, p.144. 4. Bruce G. Sarky, “Confessions of a Computer Convert”, Landscape Architecture 78(5), 1988, p.74. 5. Roberto Rovira, “The Site Plan is Dead: Long Live the Site Plan”, in Representing Landscape: Digital , Nadia Amoroso, ed., London: Routledge, 2015, p.99. 이명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경 설계와 계획, 역사와 이론, 비평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있다. 박사 학위 논문에서는 조경 드로잉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현대 조경 설계 실무와 교육에서 디지털 드로잉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했고, 현재는 조경 설계에서 산업 폐허의 활용 양상, 조경 아카이브 구축, 20세기 전후의 한국 조경사를 깊숙이 들여다보고 있다. 가천대학교와 원광대학교,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조경비평 봄’과 ‘조경연구회 보라(BoLA)’의 회원으로도 활동한다.
  • [공간의 탄생, 1968~2018] 1980~1990년대 공간의 탄생, 근교의 도시화
    주택난을 해소하라 지난 연재에서 한국 도시화 50년의 첫 번째 공간적 사례로 1970년대 농촌의 도시화에 대해 새마을운동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번 연재에서는 두 번째 사례로 1980~1990년대 근교의 도시화에 대해 살펴본다. 이를 위해 근교와 근교의 도시화에 대한 개념적 이해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근교(近郊, suburb)라는 말은 ‘도시의 가까운 변두리에 있는 마을이나 들’을 말한다.1 다시 말해, 근교는 아직 도시화가 일어나지 않은 도시 인근의 지역 또는 농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근교의 도시화는 기존 또는 인근 도시의 성장, 확장, 팽창 등에 따라 일어나는 근교 지역의 도시화 현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근교의 도시화에는 중심 도시(기존 또는 인근 도시)와 주변 도시(근교 지역)의 관계가 이미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1980~1990년대 근교의 도시화는 기존의 도시에서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할 수 없는 도시 문제, 특히 과도한 인구 집중으로 인한 주택 문제로부터 촉발되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중앙 정부는 ‘1기 신도시’와 ‘200만 호 건설 계획’을 통한 대규모 주택 공급을 추진했으며, 이에 따라 서울 주변의 수도권뿐만 아니라 전 국토에 대규모 주택 건설이 삽시간에 일어났다. 사실 주택 문제는 1950년대의 한국전쟁과 전후 복구, 1960년대 이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흐름 속에서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었으며, 주택 문제의 해결은 전 국민과 중앙 정부의 숙원이었다. 실제로 1972년 박정희 정부의 ‘250만 호 건설 계획’, 1980년 전두환 정부의 ‘500만 호 건설 계획’ 등 대규모 주택 건설 계획이 지속적으로 추진됐지만, 막대한 재정적 부담과 다른 정책의 우선순위에 밀려 온전히 실천되지 못했다. 하지만 1987년 민주화 이후 대통령 직선제에 따라 선출된 노태우 정부는 정치적 안정과 사회적 요구 등으로 인해 주택 문제를 더이상 도외시할 수 없었다. 마침내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 1년이 되어가는 1989년 2월 24일, ‘보통사람들의 밤’에서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만 존재했던 200만 호 건설의 의지를 다음과 같이 본격적으로 천명했다. “그동안 우리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고 땀 흘려 엄청난 노력을 했습니다. 그 결과 의식주 중 이제 먹고 입는 문제, 큰 걱정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내 집을 가지겠다는 모든 보통사람들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이 사람 획기적인 정책을 추진해 나가려 합니다. … 중산층 이상의 주택 택지 공급을 원활히 하여 시장 기능에 의해 건설이 활성화되도록 할 것입니다. 특히 국민 주택 규모의 주택은 주택 은행 등을 통한 금융 지원을 늘려 건설을 촉진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임기 중 200만 호의 주택을 짓겠다는 공약을 실천하여 약 1,000만 명의 우리 국민이 새집에 입주하게 할 것입니다.”2 1기 신도시와 200만 호 건설의 시작 및 경과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도시의 주택 문제는 비단 1980~1990년대만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1980년대 말에 주택 문제가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에서까지 중요하게 다루어진 당시의 주거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87년 12월 말 주택 보급률은 전국적으로 69.2%인데 비해, 서울은 50.6%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특히 서울을 중심으로 한 높은 잠재적 주택 수요에 비해, 가용 택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주택 공급이 지지부진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이후 주택 가격이 폭등하고, 고급 아파트를 중심으로 아파트 투기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일례로 1975년에서 1988년까지 국민 소득, 즉 실질 GNP의 증가는 세 배에 지나지 않았지만 주택 가격은 무려열 배 이상 상승했다.3 이로 인해 1980년대 말 주택 문제는 정권 안정과 체제 유지를 위한 급선무의 과제로 부상했다. ...(중략)... *환경과조경375호(2019년7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근교”, 표준국어대사전, 2019년 6월 10일 접속(https://ko.dict.naver.com/#/entry/koko/ec9e80ed1fd7488794a60bb7fa066a8c). 2. 노태우, “국민이 강해야”, ‘보통사람들의 밤’에서의 총재 연설, 1989년 2월 24일, 2019년 6월 10일 접속(http://pa.go.kr/research/contents/speech/index04_result.jsp). 3. 김관영, “주택200만호 건설계획의 평가”, 『국토정보』 1992년 5월호, 국토연구원, pp.14~22. 김충호는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공학과 도시설계 전공 교수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미국 워싱턴 대학교 도시설계·계획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삼우설계와 해안건축에서 실무 건축가로 일했으며,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와 워싱턴 대학교, 중국의 쓰촨 대학교, 한국의 건축도시공간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분야의 교육과 연구를 했다.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한 건축, 도시, 디자인의 새로운 해석과 현실적 대안을 꿈꾸고 있다.
  • [이미지 스케이프]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찰리 채플린의 말입니다. 채플린이 감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삶은 클로즈업할 때는 비극이지만 멀리서 찍으면 희극이다”라고 번역하는 게 더 정확하다는 얘기도 있더군요. 하여간 보통은 가까운 비극과 먼 희극이라는 간단한 대비가 더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가까이 느끼는 내 인생은 항상 힘든 것 같고, 멀리 보이는 다른 사람의 인생은 늘 부럽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경관 관련 일을 하다 보니 주변에서 늘 이것 좀 어떻게 개선할 수 없냐는 얘기를 자주 듣습니다. 어지러운 간판, 정돈되지 않은 국도변 상가와 창고, 농촌 마을의 현란한 지붕 색. 그중 지붕 색 이야기는 아주 단골 메뉴입니다. 유럽에 가 보니까 주황색 지붕이 참 아름답던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하기 어렵냐는 거지요. 지붕 재료 만드는 회사에 몇 가지 색을 지정해 주면 되지 않느냐, 전체적으로 하기 어려우면 우선 고속 도로나 국도에서 보이는 곳만이라도 지붕을 개량하면 가능하지 않겠냐는 현실적인 처방까지 해 줍니다. 예전에 올림픽할 때 고속 도로 주변에 녹색 페인트를 칠했다는 얘기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처방이야 어찌 되었건 진단은 정확한 것 같습니다. 제가 봐도 알록달록한 우리나라 농촌 마을의 지붕은 참 요란스럽습니다. 채도를 조금만 더 낮추고 톤을 정돈하면 훨씬 좋은 모습이 되지 않을까요? ...(중략)... *환경과조경375호(2019년7월호)수록본 일부 주신하는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거쳐 같은 학과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토문엔지니어링, 가원조경, 도시건축 소도에서 조경과 도시계획 실무를 담당했고,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원예생명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경 계획과 경관 계획에 학문적 관심을 두고 있다.
  • [에디토리얼] 연재의 굴레, 그럼에도
    감사하게도, 15년이나 묵은『현대 조경설계의 이론과 쟁점』의 개정판을 내보라는 권유를 받곤 한다. 대폭 뜯어고칠 궁리를 하며 개정판이 나온 책들을 골라 읽는 취미 비슷한 게 생긴 적이 있는데, 진중권의『앙겔루스 노부스』 개정판(아트북스, 2013)서문 한 구절에 그만 나의 심정이 포개지고 말았다. “…13년 전에 쓴 자기 글을 다시 읽는 것은, 마치 밤에 쓴 글을 낮에 읽는 것만큼이나 민망한 일이다. 감상적 어조로 쓴 부분은 특히 그러하다. 그 글을 쓰던 청년의 몸속에 지금은 중년의 사내가 들어앉아 있다. 옛글을 다시 읽는 민망함보다 강렬한 것은 그리움이다.” 진중권은 그 그리움을 양분 삼아 헌 집 위에 새집을 덧대어냈지만, 나는 그 민망함을 받아들이고 주저앉았다. 개정판 포기의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건 아니다. 정작 하려던 이야기는 책의 초고가 된 연재 글쓰기의 추억과 고통이다. 『현대 조경설계의 이론과 쟁점』의 내용 대부분은 2001년 3월부터 2002년 8월까지 『환경과조경』에 연재한 ‘동시대 조경 이론과 설계의 지형’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남기준 편집장의 권유로 시작한 연재. 반은 필라델피아에서, 나머지 반은 천안에서 썼다. 동시대 조경의 지형도를 그려보겠다는 기획 초기의 열정만으로 매달 다가오는 마감의 중압감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았다. 마감 전쟁을 치르고 탈진하면 순식간에 닥쳐오는 다음 마감. 좁은 방안을 계속 걸어 다니며 한 문장씩 중얼거린 후 키보드를 두드리고 다시 일어나 걷기를 반복하는 나의 글쓰기 습관은, 벗어나기 힘든 굴레와도 같았던 그 연재 과정에서 생겼다. 지은 지 반세기가 넘은 필라델피아 외곽의 허름한 목조 아파트 아래층에는 조경가 J가 살고 있었다. J 부부와 그들의 갓난아기는 나의 고질적 글쓰기 습관이 발생시키는 극심한 층간 소음을 묵묵히 견뎌주었다. J는 쿵쾅거리는 내 발 소리의 양과 강도만으로도 원고 마감이 며칠 남았는지 정확히 맞출 수 있었다고 한다. 2014년의 잡지 리뉴얼 이후, 많은 필자에게 여러 연재 꼭지를 부탁했다. 편집자의 꾐에 넘어가 덜컥 연재를 수락한 그들은 텅 빈 순백의 모니터 앞에서 속이 타고 피가 마르는 밤을 보냈을 테다. 연재, 그것은 일상을 스스로 감옥에 가두는 일이고 불안과 초조의 늪으로 자신을 내모는 일이다. 과월호들을 다시 펼쳐보니 연재 필자들의 분투가 새삼 피부에 와닿는다.『환경과조경』의 지면을 풍성하게 해 준 그들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린다. 지난한 과정을 감내하며 집필한 연재물 중 몇 가지가 단행본으로 새롭게 편집되어 독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는 점은 필자에게도, 편집자에게도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김영민의 ‘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2014년 연재)는『스튜디오 201, 다르게 디자인하기』(한숲, 2016)로, 김세훈의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2015년 연재)는『도시에서 도시를 찾다』(한숲, 2017)로 출간되어 한국 조경과 도시설계 이론의 지층을 두텁게 하는 데 기여했다. 장장 3년간 연재된 고정희의 ‘100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2014~2016년 연재)는『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한숲, 2018)로 묶여 조경 문화와 역사의 교점을 읽는 새로운 틀을 제시했다. 자생적 도시재생의 현장을 탐사한 최이규의 인터뷰 ‘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2017~2018년 연재)도 곧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서영애의 장기 연재 ‘시네마 스케이프’가 이번 달로 막을 내린다는 아쉬운 소식을 전한다. 315호부터 이번 374호까지 60회를 이어온 ‘시네마 스케이프’는 그 어느 지면보다 높은 열독률을 가진 인기 꼭지였고, 연재 3년째를 넘어서던 여름에『시네마 스케이프』(한숲, 2017)로 출간되어 영화와 경관론의 접면을 넓히기도 했다. 이 책의 서문에서 필자는 “영화를 보고 나서 한 호흡으로 써내려 간 적도 있지만, 한 달의 절반을 원고와 보낸 적이 더 많았다”고 술회한다. 2014년 여름은 어느새 2019년 여름이 되었다. 5년간의 수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이번 호 특집으로는 한국, 중국, 미국을 가로지르며 조경의 사회적 책무를 실천하고 문화적 영향력을 전파하고 있는 랩디에이치Lab D+H의 근작들을 싣는다. 서울의 최영준, 선전의 중후이청, 상하이의 리중웨이, 세 파트너가 함께 이끄는 랩디에이치는 정원과 주거 단지부터 도시 공원과 복합 상업 공간, 신도시 마스터플랜과 도시재생 프로젝트에 이르는 다양한 스케일을 넘나들며 동아시아 조경의 혁신을 실험하고 있다. 아키데일리, 디자인붐, 아키텍트매거진, 도무스웹 등 다수의 저널이 이미 주목한 바 있는 랩디에이치의 작업들은 도전과 가능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책장을 뒤져 최영준 소장의 ‘그들이 설계하는 법’(2018년 1월호~3월호)도 재독해보시길.
  • [바우하우스와 모더니즘 조경] 도시 녹지, 조경의 플레이그라운드
    바우하우스의 격한 움직임에 자극받아 표현주의와 입체파 미술의 방법론까지 차용해가며 ‘우리도 바우하우스’처럼 새로운 정원 예술을 창조하려던 몸부림은 브라질의 부를레 막스나 멕시코의 루이스 바라간 등 발군의 예술가들이 나타나 일단락 지었다. 그러나 진정한 정원 혁명은 이런 화려한 무대 뒤편, 도시 전체에서 따로 진행되고 있었다. 건축과 거의 시기를 같이해 변화하기 시작했으나 매우 서서히 진행됐기에 아무도 인식하지 못했다. 백 년이 지난 1980년대에 비로소 지난 세기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음을 인식하게 되었고, 최근 들어 바우하우스 10 0 주년 기념행사들을 준비하며 조경계를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재삼 확인되었다. 심지어는 19세기 중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서서히 일어났던 변화를 제2의 정원 혁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제1의 혁명은 영국 풍경화식 정원을 말한다. 신세계의 지옥, 산업 도시가 도시계획을 부르고 제2의 정원 혁명을 초래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20세기 정원의 가장 큰 변화는 정원 예술의 영역이 아니라 사회정치적 영역에서 일어났다. 이는 산업혁명 이후 일어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변화와 큰 관계가 있다. 특히 도시의 팽창이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불과 수십 년 사이에 도시 인구의 비율이 몇 곱으로 증가하고 도시가 걷잡을 수 없이 비대해짐으로써 도시 재정비, 즉 도시계획이 불가피해졌다. 도시계획은 건축가뿐 아니라 정원사의 일에도 큰 변화를 초래했다. 주 활동 무대가 개인의 영지에서 도시로 이전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배층을 위해 일하던 종속적 관계에서 벗어나 시민 사회 전체의 용역을 받는다는 새로운 신분과 사명을 얻게 되었다. 이는 ‘사회적 책임’을 동반하는 위치였으며 이에 따라 직업관도 달라졌다. 변화는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거의 반세기에 걸쳐 서서히 진행됐다. 하루아침에 전통과의 단절을 선언한 건축가들과는 달리 평생 자연의 원리를 익히며 살아온 정원사들은 겸허했고, 하루아침에 정원을 갈아엎고 새것을 만들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감히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겠다고 기염을 토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당면한 사회적 문제를 풀어내는 데 골몰했으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변화와 혁신이 이루어졌다. 지배층을 ‘모시는’ 위치에서 도시 녹지를 조성하는 전문가로, 건축가와 나란히 도시설계를 책임지는 위치로 신분 상승하고 보니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전통적인 정원사 교육만으로는 충족이 어려운 과제였고 특히 아카데미 교육을 받은 건축가들을 만나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대학 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나라마다 차이가 있었겠지만, 독일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기존의 2년제 고등정원학교가 있었으나 1929년 베를린 농과대학에 조원 석사 과정이 설치되면서 드디어 대학 교육의 막이 열렸다. 긴 개혁의 과정에 화룡점정을 찍은 것이다. 이는 대단히 근본적인 변화였다. 이로써 정원의 사회화 과정, 민주화 과정이 시작된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시작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20세기 말에 들어서야 비로소 사회화, 민주화 과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도면으로 말하기, 디테일로 짓기] 디자인과 방정식
    일관성 있는 디자인은 하나의 방정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디자인 과정에서 사유와 개념은 구체적 형태로 발전하면서 수치화 또는 도면화 단계를 거치고, 이를 통해 기호와 숫자로 된 도면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방법으로 형태를 만드는 작도 과정에서는 일종의 규칙성이 나타나는데, 마치 방정식을 세우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x2+y2=0, 사인(sine), 코사인(cosine), 탄젠트(tangent)등은 다양한 모양의 곡선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그래프를 그려본 적이 있을 것이다. 최근 코딩으로 구현하는 디자인도 이러한 수학적 방정식을 근간으로 한다. 단위(unit)또는 단위에 기반한 시스템이 만든 경관에 대한 생각은 제임스 코너의 저서1에 잘 나타난다. 일정한 수식에 근거한 디자인은 어떻게 실제 공간과 경관으로 구현될까? 이때의 작도 방식은 어떻게 방정식으로 변환될까? 나아가 새로운 디자인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CFO에 근무할 당시, ‘두바이 크리크 하버(Dubai Creek Harbour)’ 프로젝트를 맡아 약 4km의 해안선을 디자인했다. 물결 모양의 반복적 형태를 구현한 이 작도 과정은 일종의 방정식으로 변환될 수 있다. 우선 두 개의 물결 모양 곡선으로 외부 해안 산책 동선(방파제 에지)과 내부 순환 동선을 만들었다. 두 곡선이 만나는 지점(동선의 접합 지점)은 인공섬 내부로 연결되는 주요 결절점이 되고, 해안으로 뻗은 곡선의 끝점은 바다를 향한 조망점이 된다....(중략)... *환경과조경374호(2019년 6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1.James Corner, Taking Measures Across the AmericanLandscape, Yale University Press, 1996. 조용준은 서울시립대학교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했다. 진양교 교수의 ‘채우기와 비우기’ 설계 이론과 제임스 코너의 실천적 어바니즘을 기반으로 한 간단명료한 디자인에 영감을 받았다. 15년여의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실질적 설계와 페이퍼 아키텍처를 추구하며, 독자적인 설계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 깊이(invisible depth), 생성적 경계(generative boundary), 언플래트닝 랜드스케이프(unflattening land-scape)를 탐구하고 있다. 최근 CA조경기술사사무소 소장으로서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설계공모 팀의 당선을 이끌었으며, 개인 자격으로 서울형 저이용 도시공간 혁신 아이디어 공모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그리는, 조경] 설계 전략 그리기
    설계할 때 가장 먼저 그리게 되는 드로잉 유형은 아마도 다이어그램일 것이다. 설계가는 대상지의 여러 정보를 고려하며 설계 아이디어를 간단히 그려본다. 대상지의 자연, 문화, 역사, 경제, 사회를 포함하는 다양한 현황을 지도 위에 표시해보며 대상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부지의 바람직한 이용 방법을 합리적이면서도 창의적으로 상상하고 표현한다. 이러한 상상은 점차 진화하고 구체화되어 (이전 연재에서 살펴본)평면도나 입단면도, 투시도 형식으로 그려진다. 다이어그램은 사전적으로 “어떤 것의 겉모습, 구조 혹은 작동 방식을 보여주는 단순화된 드로잉, 즉 도식(schematic representation)” 또는 “그래픽 형식으로 무언가를 그리는 행위”를 뜻한다.1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간단한 평면도나 입단면도, 투시도도 다이어그램에 포함된다. 하지만 조경 설계에서 다이어그램은 경직된 하나의 유형이라기보다 평면도, 입단면도, 투시도로 표현하기 힘든 요소를 도식화한 것을 광범위하게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보이지 않는 경관 요소, 움직임, 생태와 문화 프로그램, 그러한 요소 간의 관계, 시간에 따른 변화 등의 설계 전략을 시각화한 것을 다이어그램이라고 부른다(그림 1). 그러므로 다른 드로잉 유형과 달리 다이어그램은 경관의 겉모습과 반드시 닮아야 함을 전제하지 않는다. 설계안의 논리를 그림으로 스토리텔링하는 것이 다이어그램의 주된 임무다. 다이어그램과 유사해 종종 혼용되는 드로잉 유형으로는 맵핑(mapping)이 있다. 맵핑은 말 그대로 지도를 만드는 것 혹은 설계를 위해 새로 만든 지도를 의미한다.2맵핑은 여러 경관 정보를 지도 형식으로 단순하게 나타낸 도식이라는 점에서 다이어그램에 포함된다(그림 2). 조경 설계에서 맵핑이라는 용어를 다이어그램만큼이나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조경에 땅을 다루는 작업이 많이 포함되기 때문일 것이다. 조경적인 다이어그램은 곧 맵핑인 셈이다. 어쩌면 조경 설계는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내는 작업일지도 모르겠다. 미국 모더니스트의 다이어그램 조경 다이어그램과 맵핑을 광범위하게 생각한다면, 그 시작은 드로잉의 역사와 함께한다고 할 수 있다. 지난 연재(『환경과조경』 2019년 3~5월호)에서 다룬 켄트의 드로잉, 즉 투시도 형식에 마운드 조성을 위한 지형 변경 사항을 점선으로 그려 넣은 드로잉이나 렙턴이 그린 입단면도는 오늘날의 다이어그램과 닮은 구석이 있다. 옴스테드도 조경 설계를 위해 다이어그램을 남겼다(그림 3과 4). 하지만 본격적으로 다이어그램이 등장한 때는 20세기 초반 미국의 모더니스트, 즉 개릿 엑보(Garrett Eckbo)(1910~2000), 제임스 로즈(James C. Rose)(1913~1991), 댄 카일리(Dan Kiley)(1912~2004)의 드로잉에서였다. 이들은 클라이언트를 비롯한 다른 누군가에게 설계 전략을 보여주기 위해 다이어그램을 공들여 그리기 시작했다. 설계 과정에서 다른 드로잉 유형과 함께 다이어그램을 중요한 시각화 방식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엑보는 식재 계획을 다이어그램으로 표현했다(그림 5). 평면도 형식의 이 드로잉을 다이어그램이라 부르는 이유는 식재 정보를 간단한 기호로 시각화했기 때문이다. 이전의 조경 평면도에서 식재의 겉모습이 사실처럼 보이도록 그려졌다면, 엑보는 식재 유형별 형태와 질감 등의 특성을 간단한 기호로 환원해 표기했다. 물론 이제 평면도에서 나무는 정면을 그리는 플라노메트릭이 아닌 완벽한 탑뷰로 시각화되고 있다. 수종의 복잡한 정보를 간단한 규칙으로 나타내 어떻게 공간에 배치할 것인지 간결하면서도 잘 읽히게 하는 것이다.3...(중략)... *환경과조경374호(2019년 6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https://en.oxforddictionaries.com/definition/diagram 2.나디아 아모로소는 드로잉 유형을 분류할 때 다이어그램과 맵핑을 한 범주로 본다. Nadia Amoroso, “Representations of the Landscapes via the Digital: Drawing Types”, in Representing Landscapes: Digital , Nadia Amoroso, ed., London: Routledge, 2015, pp.4~5. 또한 안드레아 한센은 “지도는 광범위한 의미에서 다이어그램의 유의어”이며 두 유형이 “복잡한 것을 명확히 하려는 의도로 추상화하거나 단순화하여 시각화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지닌다”고 말하면서, 두 범주를 분리하기보다 혼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Andrea Hansen, “Datascapes: Maps and Diagrams as Landscape Agents,” in Representing Landscapes: Digital , p.29. 배정한은 다이어그램의 형식적 유형의 하나로 맵핑을 포함시키며, 조경진은 다이어그램이 대체로 장소와 관련이 있거나 없을 수도 있지만 맵핑은 구체적 장소와 반드시 관련된다고 본다. 배정한, “현대 조경설계의 전략적 매체로서 다이어그램에 관한 연구”, 『한국조경학회지』 34(2), 2006, p.102; 조경진, “환경설계방법으로서의 맵핑에 관한 연구”, 『공공디자인학연구』 1(2), 2006, pp.77~78. 장용순은 건축 다이어그램을 보이지 않는 것과 복잡한 관계를 사고하는 도구라고 보며, 현대적 다이어그램 유형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첫째는 네트워크, 동선, 인프라를 보여주는 연결적 다이어그램, 둘째는 조닝과 프로그램 배치를 보여주는 집합론적 다이어그램, 셋째는 공간 데이터를 시각화한 데이터스케이프 혹은 시간에 따른 변화와 잠재성을 보여주는 변이적 다이어그램이다. 또한 이러한 현대적 다이어그램 이전에는 구상적 다이어그램이 있었다고 하면서, 여기에 평면도, 단면도, 입면도, 투시도를 포함시키고 있다. 장용순, 『현대 건축의 철학적 모험: 01 위상학』, 미메시스, 2010, pp.117~145. 3.Dorothée Imbert, “The Art of Social Landscape Design”, in Garrett Eckbo: Modern Landscapes for Living , Marc Treib and Dorothée Imbert ed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7, pp.152~154. 이명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경 설계와 계획, 역사와 이론, 비평에 두루 관심을 가지고 있다. 박사 학위 논문에서는 조경 드로잉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현대 조경 설계 실무와 교육에서 디지털 드로잉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했고, 현재는 조경 설계에서 산업 폐허의 활용 양상, 조경 아카이브 구축, 20세기 전후의 한국 조경사를 깊숙이 들여다보고 있다. 가천대학교와 원광대학교,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조경비평 봄’과 ‘조경연구회 보라(BoLA)’의 회원으로도 활동한다.
  • [공간의 탄생, 1968~2018] 1970년대 공간의 탄생, 농촌의 도시화
    농촌을 도시화하라 지난 5개월간의 연재에서 한국 도시화 50년의 문제의식과 현황, 메커니즘을 살펴보았다. 이제 한국 도시화 50년의 구체적 공간 사례를 시대별로 탐구한다. 첫 번째 사례로 1970년대 공간의 탄생에 대해 농촌의 도시화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이를 위해 농촌과 농촌의 도시화에 대한 기본적 질문에서 시작하고자 한다. “농촌은 과연 무엇이며, 농촌의 도시화는 어떠한 변화와 관련되어 있을까?” 농촌은 도시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삶터, 일터, 쉼터 등이 융합되어 있는 마을, 즉 물리적 정주 환경을 기본 단위로 구성된다. 따라서 농촌의 도시화는 단순히 마을의 물리적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농민의 생활 변화, 농업의 경제적 의존 변화, 자연자원 관리의 변화 등 여러 사회생태적 변화와 긴밀하게 연관된다. 1970년대 농촌의 도시화를 한반도의 역사적 맥락에서 바라보면, 전통적인 농촌·농경 사회가 도시·산업 사회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농촌 지역의 문명사적 전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문명사적 전환은 한반도 최초의 농경 시점까지 소급해 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6,000년 이전부터 유지, 진화, 발전되어 온 정주 환경의 물리적·사회생태적 변화라고 규정할 수 있다.1 다시 말해 1970년대 농촌의 도시화는 풍수 사상, 배산임수, 씨족 마을 등 전통 마을의 구성 원리에 따라 형성된 농촌 마을의 근대화 과정이다. 이 중심에는 ‘새마을운동’이 있었으며,2 ‘새로운 도시만들기’를 향한 정부 주도의 도시화에 따라 전국의 모든 농촌 마을에서 대규모의 물리적 변화가 일시에 일어났다. 한국의 정부 주도 도시화와 대규모 물리적 개발은 1960년대 계획 국가의 형성과 함께 시작됐으며, 1960년대에는 특정 지역 개발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이, 1970년대에는 국토종합개발계획의 토대 하에 본격적인 국토 개발이 추진됐다. 이와 같은 도시화 맥락에서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정부 주도로 추진됐다. 1972년 내무부의 새마을농촌건설계획 보고서의 첫 페이지는 당시의 도시화를 향한 열망적 선언을 강렬하게 드러낸다.3 이에 따르면 기존의 전통적인 농촌의 취락과 기반은 개조와 개벽의 대상이며, 1980년대의 선진화된 농촌을 목표로 농촌 정주 환경의 도시 형태 형성 및 도시 성격화를 추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새마을운동에서 보이는 농촌의 도시화는 한국만의 일은 아니며, 근대 산업 국가로 진입하며 직면하게 되는 도시화 과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새마을운동의 시작과 경과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정부 주도의 농촌 개발 또는 농촌 근대화 운동으로 알려졌지만,사실 새마을운동이 처음부터 중앙 정부 주도로 체계적으로 추진된 것은 아니다. 새마을운동은 1970년에 새마을가꾸기사업으로 실험적으로 시행됐으며, 197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새마을운동이라는 현재의 명칭을 사용하게 됐다. 새마을운동은 농촌 개발이라는 표면적 이유뿐만 아니라 쌍용양회의 시멘트 과잉 생산, 박정희 정부의 정치적 기반 유지 등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원인이 되어 시작됐다. 특히 박정희 정부는 1969년 삼선개헌 이후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신에게 큰 지지를 보이는 농촌을 안정적인 정치적 기반으로 삼아야 했다. 이에 따라 중앙 정부는 1970년 전국 33,267개의 마을 각각에 시멘트 335포대와 철근을 무상으로 제공해 시멘트와 철근의 자유롭고 효율적인 활용을 유도했다.그 결과는 중앙 정부의 기대를 훨씬 넘어선 것이었으며, 중앙 정부는 이같은 성공에 고무되어 향후 새마을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됐다. 1971년에 이르러 마을 조림,진입로 확장, 소하천 정비, 퇴비장 만들기, 소류지 준설, 관정 보수, 하수구 정비, 공동 우물, 빨래터 만들기, 쥐 잡기의 10대 새마을가꾸기사업을 지정해 추진했다. 새마을운동은 초기 실험의 성공에 따라 기반 조성(1971~1973), 사업 확산(1974~1976), 사업 심화(1977~1981)의 단계를 거쳐 급속도로 확대되어 추진됐다.4 결과적으로 새마을운동은 기초 환경 개선 위주에서 점차 농가 소득 증대의 방향으로 전환됐으며, 농촌을 벗어나 도시, 공장, 직장, 학교 등으로 점차 확대됐다....(중략)... *환경과조경374호(2019년 6월호)수록본 일부 김충호는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공학과 도시설계 전공 교수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미국 워싱턴 대학교 도시설계·계획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삼우설계와 해안건축에서 실무 건축가로 일했으며,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와 워싱턴 대학교, 중국의 쓰촨 대학교, 한국의 건축도시공간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분야의 교육과 연구를 했다.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한 건축, 도시, 디자인의 새로운 해석과 현실적 대안을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