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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조경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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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14년 6월
이매거진 가격 9,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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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부산시민공원이 남긴 것
특집의 원고 청탁이 이렇게 수월했던 적이 없었다. 그들은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오랜 시간 붙잡고 있던 하야리아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려는 의지가 느껴졌다. 황금연휴의 다음날 부산으로 향했다. 하루 일찍 부산에 도착한 사진작가는 그 연휴에 엄청난 인파가 부산시민공원에 몰렸다고 전했다(그래서인지 이달의 사진에 사람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아무리 개장 직후라지만 우리나라 도시 공원의 인기가 이렇게 높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5월의 부산은 더웠다. 공원을 걷는 연인들이 그늘을 찾으며 불평하는 소리도 들렸고, 벤치마다 이미 주인이 있어 앉을 자리를 찾아헤매는 이들의 조급한 눈초리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 그늘이 좀 부족한 것 쯤이야 어떠랴 싶었다. 공원의 나무야 자랄 것이고, 그늘은 시간이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새 공원이라 그런지(?) 공간보다는 시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도시인의 로망인 저 푸른 잔디밭을 둘러싼 각종 놀이 시설에서, 바닥 분수에서, 미로 정원에서 수많은 아이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게다가 시민공원의 시설은 무료이니 웬만한 테마파크 못지않은 매력으로 다가서는 듯했다. 나중에 들은 설명이지만, 부산 사람들은 바람을 쐴 때 대개 바다를 찾는다. 그런데 내륙에 대규모 공원이 들어섰으니, 이 새로운 유형의 공간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것이다. 공원 문화도 학습하며 형성되기 마련이다. 지금 부산 시민들은 부산의 유일한 공간에서 공원 문화를 탐색하는 단계인 셈이다. 공원을 돌아본 후 공원의 북문으로 나서는데, 지금은 아주 일부만 남은 캠프 하야리아 시절의 담장에 시선이 가 닿았다. 그 너머로 집들이 보였다. 의외로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지난 100여 년간, 부산 시민의 지척에서, 이 큰 공간이 저 담장 아래 꽁꽁 숨겨져 있었겠구나 싶으니 새삼 기가 막혔다. 그리고 다음날, 이번 특집의 두 필자인 김승남 사장과 강동진 교수를 함께 만났다. 두 사람 모두 하야리아공원포럼을 통해 오랫동안 캠프 하야리아의 공원화에 노력해 온 만큼 현재 공원의 모습에 아쉬움도 컸다. 특히 캠프 하야리아의 역사적이고 문화적 가치가 있는 건물들이 토양 오염을 이유로 대부분 철거된 점을 안타까워했다. 환경 오염을 정화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독일 함부르크의 도시 재생 사업인 하펜시티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김승남 사장은 독일에서도 역시 기름이 유출되었으나 5년에 걸쳐 천천히 치유했다고 설명한다. 반면 부산시민공원의 경우는 ‘싸고 빨리’ 추진하기 위해 한꺼번에 밀어버리고 덮어버리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건물들도 새로 페인트를 칠하고 부재를 새것으로 바꾸어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이 안쓰럽다. 디자인의 완성은 디테일이 아니던가. 옛 건물을 무조건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상책은 아니겠지만, 차라리 그대로 두었다면 어땠을까. 마치 하야리아 담장의 파편처럼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장소의 기억을 호출하는 매개체가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대부분의 미군 기지의 토양이 오염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금, 반환되는 땅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는지, 환경이 오염되었다는 사실에 집중하는 것만큼 어떻게 치유와 보존을 병행 혹은 선택할 것인가 고민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한편 부산시민공원에는 기억의 숲이 조성되어 있다. 캠프 하야리아 곳곳에 심어져 있던 플라타너스를 한 곳에 모아 가식해 둔 것인데, 오히려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 그 모습 그대로 남게 된 공간이다. 개인적 선호의 차이가 있겠지만, 부산시민공원에서 지금 자연스러운 경관은 이렇게 과거의 것이 그대로 남은 곳들이다. 안타까운 것은 부대 내부의 철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캠프 하야리아의 부지와 부전역 사이에는 삼각형 모양의 주거 지역이 쐐기처럼 부대 쪽으로 밀고 들어온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효율적인 공원 토지 이용’과 뉴타운 계획을 이유로 이 주거지역을 철거하고 공원 부지로 편입시켜 부지를 정형화했다. 이를 두고도 두 필자는 입을 모아 안타까움을 표한다. 이 오밀조밀한 주거 지역이 남았다면, 독특한 상업 공간과 문화 공간으로 진화해 가며 공원의 경계에 활력을 불어넣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한번 없애버린 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지만, ‘하야리아공원포럼’의 노력으로 기존의 계획을 변경시켜 몇몇 건물을 남긴 것도 의미 있는 결과다. 무엇보다 부산시민공원의 성과는 사람들에게 남은 듯하다. 여하튼 부산의 시민들은 공원의 탄생에 크고 작게 기여했고, 이러한 경험에서 오는 자신감도 그 성과의 일부다. 이 경험은 부산에 남아있는 다른 많은 것, 폐선부지나 워터프런트(북항), 달동네 등에서 다시 진화하리라 믿는다. 부산시민공원을 담은 6월호 특집을 마무리하는 지금, 용산공원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때, 또 대한민국의 현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세월호 참사의 여진이 강하게 남은 지금, 예술평론가 수전 손택의 글을 공유하며 글을 닫고 싶다. “부디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매혹의 공간, 정원을 이야기하다
정원 디자이너 9인이 한 자리에 모였다. 올해 설립된 한국조경학회(회장 김한배) 정원학연구센터(센터장 조경진)가 ‘정원문화 심포지엄’이란 타이틀을 내걸고 판을 깔았다. 부제는 좀 길다. ‘Garden Talk: 매혹의 공간, 정원을 디자인하다.’ 그 밑에 설명이 한 줄 더 달려있다. ‘아홉 명의 디자이너의 정원 이야기.’ 9인의 발표자는 30대 신진 디자이너부터 50대 중견 디자이너까지 연령대만 다양한 것이 아니었다. 서울숲 같은 대형 공원을 설계한 조경가부터 설계 교육과 실무를 병행하는 대학 교수, 여러 프로젝트에서 색다른 플랜팅 디자인을 선보인 정원 디자이너, 쇼 가든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정원 설계사의 대표, 정원은 물론 인테리어 성격의 공간까지 통합적으로 다루는 디자이너까지, 활동 무대도 경력도 다양했다. 그들이 풀어낸 정원 이야기도 개인 주택 정원부터 공공 정원, 전시회까지 그 폭과 결이 다채로웠다. 지난 5월 8일 고양국제꽃박람회와 코리아가든쇼가 펼쳐진 일산호수공원 내 플라워컨퍼런스룸에서 만난 정원 디자이너들의 9인 9색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9인 9색 정원 이야기 “우리의 도시는 가꿈과 돌봄이 필요하다”는 말로 발표를 마무리한 정욱주 교수(서울대학교)는 복지관 정원 두 곳과 보육원 정원 조성 사례를 소개했다. 본지 4월호 특집 “다시, 정원을 말하다”에 “어느 정원의 8경”이란 제목으로도 소개된 바 있는 ‘어울누리뜰’(지적장애인복지관)은 일반적인 개인 주택 정원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엄연한 정원이다. “가꾸는 도시”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그의 발표는 정원의 범주와 정의가 확장되고 있으며, 정원의 핵심 키워드인 가꿈이 왜 도시로 확산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했다. 박승진 소장(디자인 스튜디오 loci)은 아예 스몰 퍼블릭 가든이란 용어를 언급하며, 식물원이나 미술관처럼 공공이 만들었으나 법적으로 공원으로 분류되지 않는 곳, 개인이 만들었으나 공공에게 개방된 장소에 만들어지는 정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공공 정원을 조성하는 과정의 지난함에 대한 그의 위트 넘치는 발표도 흥미로웠지만, 공공 정원을 많이 만들어야 하는 이유로 그가 제시한 여러 근거(커뮤니티 활성화, 범죄율 저하 등)도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그의 발표 제목이기도 했던 “열린 정원, 공공 정원”이 도시를 풍요롭게 하리란 기대감도 싹텄다. 이어진 발표에서 이재연 소장(조경디자인 린)은 자신이 디자인한 세 곳의 정원을 소개했다. ‘삶 속의 정원, 일터의 정원, 장식적인 정원’으로 구분된 정원 사례는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한 볼거리를 전달했지만, 그 정원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소개된 에피소드는 이미지에서 얻을 수 없는 더 많은 생각거리를 전달했다. “오래된 정원은 가족사의 기록이다. … 때로 정원은 식물에대한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 정원은 시간이 완성한다.” 특히 1년 동안 경관이 변화하는 모습을 4계절 9절기로 나누어 디자인을 한다는 대목은 꽤 인상적이었다(그가 소개한 작품 중 한 곳은 이번호 48쪽에 수록되었다.) “때론 나뭇가지 하나가 정원의 분위기를 좌우하기도 한다”는 말로 발표를 시작한 김용택 소장(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은 “도시 정원의 유형과 디테일”이란 제목 하에 구체적인 사례를 바탕으로 어떤 방식으로 디자인을 풀어나가는지를 찬찬히 소개했다. 마치 원래 그러한 지형이었던 것처럼 보이는 사진 속 정원의 모습이 섬세한 지형 조작을 통해 완성되었다는 설명에서는 디테일의 중요성이 달리 보이기도 했다. 우현미 소장(디자인 알레)은 다채로운 오브제를 갖춘 쇼룸, 실내외 조경, 플라워 & 인테리어 데커레이션, 디스플레이 등 복합적인 디자인 솔루션을 제안하는 디자이너답게 현대백화점 옥상 정원을 비롯한 독특한 상업 공간 정원 사례를 소개했고, 김아연 교수(서울시립대학교)는 “네 개의 정원, 두 개의 질문”이란 타이틀로 개인 정원과 공공 정원(하나는 전시회)을 디자인하면서 각각 맞닥뜨렸던 근본적인 질문 두 가지를 던졌다. ‘당신이 꿈꾸는 자연은 무엇입니까’는 “통제 가능한 자연과 야생의 거친 자연”을 원했던 각기 다른 개인 정원 클라이언트를 상대하며 마주했던 물음이고, ‘당신에게 자연은 어떤 의미입니까’는 한 사람의 꿈보다 여러 사람에게 의미 있는 자연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디자인한 공공 정원 작업에서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안계동 대표(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는 한옥 정원 한 곳과 가든 카페 한 곳을 디자인했던 경험을 나누어주었다. 특히 제대로 된 한옥 정원 사례가 많지 않은 상황이기에, 그가 소개한 율수원 디자인 과정은 그 의미가 더 커보였다. 또 사옥 1층을 가든 카페로 디자인한 사례는, 자신이 디자이너이자 클라이언트였기에 가능했던 여러 가지 디테일 실험이 흥미로웠다. ‘화무십일홍’을 늘 마음에 새기며 작업을 한다는 조혜령 소장(정원사친구들)은 “식재 계획시 꽃의 화려함만을 고려하는 것은 어리석다”며 정원의 즐거움이 시각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 후 자신만의 ‘정원 문화 사용법’을 들려주었고, 최윤석 대표(그람디자인)는 이제 국내에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쇼가든에 얽힌 경험담을 전했다. 가장 대표적인 과일인 사과의 경우, 사람들이 사과 열매는 잘 알아도 정작사과나무를 직접 본 사람은 거의 없어서 쇼 가든에 일부러 포함시켜보았다는 이야기를 비롯해 색다른 아이디어와 접근방식에 시선이 쏠렸다. 그는 마지막으로 “가든과 힐링은 같지 않다. ‘가드닝’과 힐링이 같다”는대목을 힘주어 강조했다. 심포지엄이 끝난 후 코리아가든쇼를 둘러보는 내내최윤석 대표가 이야기한 “정원은 늘 우리 곁에 있던 것이다”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무는 삶의 무늬다
나무를 매우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비로 수목원을 세우고 증권사를 다니며 번 돈으로 나무를 세심하게 돌보고 관리했다. 수목원이 커지면서 관리에 많은 노력이 투입되었지만, 그럼에도 그가 고수한 세 가지 원칙이 있다. 가지치기를 하지 않는다(현재는 생육을 위한 최소한의 가지치기를 하고 있다).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다. 농약을 치지 않는다. 이는 모두 나무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유지하고 식물의 생육 환경을 좋게 해주기 위함이었고, 그만큼 나무를 사랑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 그가 특별히 아낀 나무가 있었다. 벌컨magnolia vulcan 이란 이름의 목련이다. 수목원의 모든 나무를 사랑했지만, 벌컨은 꼭 한 번 더 들여다보고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던 그가 2000년 암 선고를 받고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무슨 조화인지, 그 해 벌컨은 꽃을 피우지 않았다. 푸른 눈의 한국인 고 민병갈 원장과 벌컨의 이야기다. “나무는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생명체다. 내가 없으면 그가 없고, 그가 없으면 내가 없다.” 지난 4월 24일 삼성에버랜드 디자인 그룹의 렉처 시리즈 강연자로 나선 고규홍 교수는 민병갈 원장과 천리포수목원 내 수목의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고 민병갈 원장의 나무 사랑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벌컨이 꽃 피지 않았다는 일화는 아는 이가 드물다. 신비롭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때 고 교수는 “전설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고 못 박았다. “인문학이란 사람이 삶의 무늬를 찾아가는 것이다. 삶의 무늬를 가장 잘 간직한 것은 나무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사라지지만,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나무의 결에 그대로 살아있다.” 나무가 사람의 흔적을 일러주는 화자임을 강조한다. 마치 옛날이야기를 전해주는 할아버지를 대하는 듯하다. 고규홍 교수는 기자 생활을 그만둔 이후 16년 동안 사람의 이야기를 간직한 큰 나무를 찾아 다녔다. 나무와 살았던 사람살이의 무늬가 남아있는 나무를 찾았고, 그 이야기를 글로 쓰고 사진으로 남겼다. 자주 찾아와서 바라보던 사람이 오지 않아 꽃을 피우지 않았다는 나무 이야기는 그중 하나다. “사람 사는 곳 어디라도 나무가 없는 곳은 없다”면서 그가 전한 또 다른 이야기는 나무를 보는 관점을 달리하게 했다. 가족에게도 버려진 한센병 환자의 외로운 마음을 받아준 소록도 솔송나무(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와 사람의 손길이 닿자 꽃을 피웠다는 전곡리 물푸레나무(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이야기가 그랬다. 특히 전곡리 물푸레나무는 고규홍 교수가 천연기념물 지정에 기여한 나무로 손꼽히는데, 일화가 하나 있다. 이곳은 6·25 전까지 마을을 형성하고 물푸레나무를 당산나무로 모셔 당산제를 지냈다. 이후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면서 마을이 사라졌고, 물푸레나무에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고 교수가 이 나무를 찾았고, 2003년 문화재청에 보호를 신청해 2005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근처에 거주하던 할머니 증언에 따르면 수십 년 동안 이 나무는 2004년과 2006년 딱 두 번 꽃을 피웠다고 한다. 하나는 사람이 나무에게, 하나는 나무가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한 사례다. 서로 교감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관계를 통 한 상호작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상에서 나무를 교감의 존재로 대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마 대부분 배경으로 인식하고 지나칠 것이다. 한 나무를 지키려 전력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주변의 나무가 조금은 달리 보일지 모르겠다. 용포리느티나무(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이야기다. 이 마을에는 15가구의 노인들이 살고 있는데, 팔려갈 처지의 당산나무를 지키기 위해 몇 년에 걸쳐 투쟁하고 결국 나무를 사 공동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중 돈을 꾸어 나무 구입에 보탠 사람도 있는데, 고규홍 교수가 마을 사람들에게 그렇게까지 나무를 지키려 한 이유를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우리 삶의 기반을 지키기 위해 돈을 꾸러 다니는 건 자랑스러운 일이다. 당산나무를 지키는 건 우리 조상의 얼을 지키는 일이다.” 그 나무 아래에서 마을 사람들은 새로운 무늬를 그리며 살고 있다. 고 교수는 사람처럼 나무도 말을 한다고 강조한다. 다만 사람이 듣지 못할 뿐이다. 그는 나무가 전하는 말을 해석해 이야기로 풀어내고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 “나무는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그’ 안에 들어서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오던 이가 사라지자 꽃을 피우지 않은 목련, 누군가 찾아가니 꽃을 피웠던 물푸레나무, 그리고 나무에서 위안을 얻은 사람들과 모든 걸 바쳐서라도 나무를 지키려 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나무는, 그리고 이 나무들에게 사람은 교유交遊의 대상으로, 서로 다르지 않다. 어쩌면 누구나 나무와 교유의 순간이 있었는지 모른다. 가만히 돌이켜볼 일이다. 고규홍 교수의 ‘나무 이야기’는 나무주변에 그려지는 삶의 무늬를 담고 있다. 고규홍 교수는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출판사를 거쳐 10년간 중앙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이후 큰 나무를 찾아 전국을 돌며 사진과 글로 세상에 알려 왔으며, 솔숲닷컴(www.solsup.com)을 통해 ‘나무 편지’를 발행하고 있다. 다수의 방송으로 나무 이야기를 전해왔고, 저서로는 『이 땅의 큰 나무』를 시작으로 『나무가 말하였네』, 『한국의 나무 특강』 등이 있다. 그가 소개한 나무의 다수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도 했다. 천리포수목원 감사로도 활동 중이며, 현재 인하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참여의 마당 꿈꾸는 용산 국가공원
국토해양부(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는 지난 2012년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를 실시했다. ‘치유’라는 콘셉트로 공모에 당선된 West8과 이로재의 “Healing: The Future Park”를 바탕으로 후속 설계가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국회의 예산 전액 삭감으로 기본설계 진행에 차질을 빚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5월 21일 용산공원추진기획단과 한국조경학회가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국민이 만들어가는 용산 국가공원’이라는 주제로 ‘용산공원 전문가 세미나’를 개최했다.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를 통해 채택한 마스터플랜이 난항을 겪고 있는 시점에서 시민참여 방법과 전략, 현실적 대안 제시와 제도화 방안을 논의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집단 지성 발휘해 창의적인 공원으로 “대중의 지혜는 전문가의 지식보다 더 정확한 답을 이끌어낸다” 김영민 교수(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는 영국의 유전학자인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의 말을 인용하며 대중의 지혜를 강조했다. 그는 덴마크 코펜하겐에 위치한 수퍼킬렌Superkilen을 예로 들었다. 덴마크에서 이민자들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에 조성된 이 공원은 고향 국가에 대한 아이덴티티를 나타내고 싶어 하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아이디어 개진으로 이국적이면서도 창의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김영민 교수는 “수퍼킬렌 공원 조성 과정에서 적용된 시민들의 아이디어가 어떻게 보면 너무 직설적이고 유치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것들이 모여 있을 때 다양성을 드러내기도 한다”며 “단순한 상징적인 시설물만으로도 주민들은 이 공간이 자신의 공간이라고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 출품작들이 제시한 ‘마당’이라는 전통적인 개념에서 시민참여를 이야기했다. 용산공원 부대 시설을 모두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는 부분적으로만 해체해 시민들이 창의적이고 생산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마당’으로 조성하자는 아이디어다. 홍윤순 교수(한경대학교 조경학과)는 국제공모에서는 당선을 위해 도시 스케일을 넘는 힘이 들어간 계획안이 많았다고 평가했다. 그는 “거시적인 마스터플랜이 조금 와해되고 있는 처지에서 중간 단계의 임시 공원을 중심으로 어떻게 세부적으로 발전시킬까 하는 점이 세부적인 마당이나 주민참여와 연결되어 조금 더 정교하게 모색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마당’은 전기나 수도와 같은 초기 인프라를 갖춘 공간이기 때문에 이용자에 따라 창의적으로 응용되어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융통성 있고 창의적인 공간의 조성에 관해서 한창섭단장(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은 6개 단위 공원에서 생태 중심의 공원으로 용산공원 조성의 기본 방향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융통성을 주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설명했다. 6개 단위공원으로 조성하게 되면 각각의 단위공원 개념에 맞춰 공간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전체적으로 공모 당선작의 개념은 받아들이되 생태 중심 공원으로 단일화시켜서 거기에 필요한 스포츠 시설이나 생태 습지 등 여러 가지를 만들어서 조금 더 융통성 있게 바꾸는 것이지 구체화한 내용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대형 공원 조성 시 시민참여 사례와 교훈’에 대해 발표한 민병욱 교수(계명대학교 생태조경학과)는 밀레니엄파크, 다운스뷰 파크, 서울숲, 센트럴 파크를 예로 들며 시민참여의 다양한 형태를 소개했다. 그는 “용산공원의 규모와 성격, 한국의 실정을 고려할 때, 국가가 주도하되 민간 파트너십으로 민간의 영역을 키워서 대등하게 이끌어갈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민간 참여 전략으로는 세제 혜택과 제도적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을 제시했다. 참여란 소통이다 세미나에 참여한 발표자와 토론자들은 용산공원 조성과정에 시민참여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입을 모았지만, 구체적인 시민참여의 범위와 형태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하기도 했다. 안상욱 단장(LH공사)은 “미군 기지의 이전 시기와 범위가 유동적인 상태이다 보니 문체부, 국방부 등 다른 중앙부처와 의견 조율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라며 용산 전체의 재생이란 틀에서 기초를 다지려면 행정 실무 협의회가 우선으로 구조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영민 교수는 “시민단체들의 목소리는 과연 시민 전체를 대변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며 “어떻게 보면 시민단체들은 특정 목적을 가진 경우도 있어서 공원을 이용하는 불특정 다수의 의견은 어떻게 개진하나 이런 부분을 고민했다”고 현실적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에 대해 김연금 소장(조경작업소 울)은 “시민참여를 도구가 아닌 과정으로 봤으면 좋겠다”며 “전문가와 시민을 분리해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소통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둘은 구분되고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소통하는 대등한 관계”임을 강조했다. 전문가와 시민의 관계를 함께 공동선을 추구해야 하는 관계로 본 그의 의견은 현재 용산공원 조성계획이 난항을 겪는 상황에 비춰볼 때 시사점이 크다. 미군기지 이전 계획변경, 신분당선 조정 등 용산공원 조성에 있어서 가장 큰 장벽들은 사실 전문가와 시민이 함께 소통으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김한배 회장(한국조경학회)은 “설계자가 시민을 고려해서 하는 설계도 시민참여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참여의 개념을 넓게 확장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했다. 용산공원은 국제 설계공모를 통해 이미 큰 그림이 마련되었고 설계자도 정해져 있는 상황이지만, 여타의 공원과는 상황이 무척 다르다. 미군기지의 이전 시기와 범위, 신분당선의 조정에 따른 교통문제, 침수에 대비한 물관리체계 수립 등 여러 문제들이 쌓여있다. 또한 국민 참여는 완공 이후에도 어떤 식으로든 폭넓게 추진되어야 할 과제다. 서울의 심장부에 있으면서도 외국군 주둔의 역사로 인해 ‘미지의 땅’으로 인식돼오던 용산 미군 기지가 아픈 역사 위에서 새 시대를 여는 공원으로 탈바꿈하기위해서 공공기관과 민간의 지혜로운 소통이 필요한때다.
미디어로 말하는 도시
통섭의 시대다. 대화와 소통이 더욱 중요해졌다. 미디어는 사람과 사람, 영역 간 소통의 매개체로 역할을 해왔는데, 전통 미디어의 신뢰 하락과 기기의 발달로 뉴미디어가 확산되고 공동체 미디어가 다변화하면서 그 지형이 변하고 있다. 미디어 홍수 속에서 각각의 미디어들은 ‘소통’이라는 키워드를 어떻게 다룰지 고민하고 있다. ‘도시’의 문제도 공간을 넘어 다른 이슈들과 함께 부각되고 있다. 그런데 미디어를 통한 ‘소통’은 많이 이야기 되고 있지만, 정작 많은 문제를 양산하고 이야깃거리가 만들어지는 ‘도시의 소통’에 대한 고민은 얼마나 되고 있는가? 그리고 누가 여기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것인가? 지난 5월 9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열린 “도시를 살리는 ‘소통’ 세미나”에서 전상인 교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가 던진 물음이다. 도시와 소통, 두 키워드가 만났다.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와 서울연구원은 최근 발생하고 있는 사회적문제들을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닌, 도시 안에서 벌어지는 문제로서 총체적 관점에서 진단하는 세미나를 주최했다. 이창현 원장(서울연구원)은 최근 화두로 떠오른 ‘안전’을 상기시키며 포문을 열었다. “도시는 살아있는 유기체다. 현대 도시는 아주 복잡하고 기계적으로 보이지만, 인간의 몸과 같이 도시도 막힌 곳이 없이 잘 소통해야 건강하고 시민이 안전하게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소통’이라는 키워드를 살림으로써 도시가 살아난다는 것이다. 이에 세미나에서는 전통 미디어와 뉴미디어, 공동체 미디어, 공공 환경, 그리고 시각적 측면에서 미디어의 모습 등 ‘소통’의 수단을 다각적으로 진단했다.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5인의 주제 발표 이후 토론이 진행되었는데, 소통을 위한 자리인 만큼 토론에 보다 비중을 두고 플로어와 패널의 대화에 많은 시간이 할애되었다. 미디어 전문가 3인과 공간을 다루는 전문가 2인으로 발표자가 구성됐다. 실체가 없는 미디어와 공간이라는 주제를 함께 다루다 보니 하나의 맥락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문제 해결의 방안으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거론되었다는 점은 동일하다. 차재영 교수(충남대학교 언론정보학과)는 “미디어가 자본과 국가에 의해 독점되는 상황에서 공동체 미디어를 그 대안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전통 미디어가 특정 계층이 전담하는 일방향 체계였던 데 반해 공동체 미디어는 일반 시민의 참여를 원칙으로 하는 쌍방향 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차 교수는 공동체 미디어가 “주민들의 관심과 요구에 부응하여 지역 사회에 관한 질 높은 정보를 제공하고,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실질적인 공론장 역할”을 함으로써 지지를 얻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종혁 교수(광운대학교 미디어영상학부)는 도시 속 불통의 결과를 해소하는 데 디지털 사이니지digital signage가 역할을 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 교수는 “도시의 소통은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지나치던 잠재된 문제를 발굴하고 그것을 일깨워 줌으로써 자발적으로 문제의식을 고취시켜 주어야 한다”면서, “도시 인프라와 기술의 접점에 놓여있는 디지털 사이니지의 활용은 수용자의 능동적 참여를 도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경진 교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는 시각적 커뮤니케이션 관점으로 도시를 바라보고 도시의 시각 미디어 환경인 동영상 전광판을 사례로 이야기를 풀었다. 조교수는 “온갖 시각 정보로 채워진 도시 경관에서 사유와 소통을 위한 여백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면서, 시민들이 미디어 환경 속에 놓여 일방적으로 무의미한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시사했다. 반면 동영상 전광판이 공동체 커뮤니케이션 플랫폼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수용하려는 변화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원재 소장(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도 비슷한 시각에서 소통의 수단이 사유화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소장에 따르면 도시는 일방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고 그 대표적인 것이 광고인데, 이는 정보 전달의 사유화로 흐른다. 공간과 미디어의 역학 관계 전상인 교수는 한국의 플래카드 문화를 비판했다. 플래카드의 난립으로 도시 미관이 오염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플래카드 설치가 불법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시민들이 이를 당연시 여기고 지나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원재 소장은 이를 절박함의 표현으로 해석했다. 플래카드 문화가 개선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 하지만, 도시에 담긴 사회적 현상을 파악해 보면 시민들의 절박함이 드러나는 것이 플래카드이기에 이를 비판적으로만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라도삼 실장(서울연구원 미래사회연구실)도 이에 동의했다. “압축된 공간에서 한정적인 소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노력의 결과가 플래카드 문화”라면서,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도시의 소통 문제로 귀결되며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미디어의 문제로도 연결되는 현상이라고 풀이했다. 미디어와의 관계에서 도시의 물리적 측면을 살펴보면 또 하나의 쟁점이 발생한다. “도시를 아무리 멋있게 조성해도 시민들이 보지 않는다”(이재현,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점이다. 토론자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발언들을 접할 수 있다. 조경진 교수는 “지구 어디서나 정보 소통이 실시간으로 가능해졌고 시공간의 압축을 넘어 시공간의 소멸이 진행되고 있다”며, “디지털 미디어가 도시 생활의 중심을 차지하고, 디지털 미디어의 침투는 물리적 공공 공간에서도 가속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미디어와 공간 간의 역학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컴퓨터의 발달과 함께 외부 활동이 축소되었다는 건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에 스마트폰의 발달로 미디어가 외부 활동과 공간에 미치는 영향이 가속화되었다는 게 발표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라도삼 교수는 SNS를 통해 미학적 공간을 찾고, 장소 읽기의 수단으로 미디어가 활용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김찬호 교수는 사람들이 “꽃을 보고 감동하지 않고, SNS에 올리고 관계하면서 그때서야 감동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공간과 미디어 그리고 관계성에 대해 새롭게 짚어볼 것을 요구했다. 조경진 교수는 미디어를 통해 장소에 관심을 갖게 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는데,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는 “장소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원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이에 서울의 ‘동네 문화’가 활기를 띠도록 공간을 다루는 사람들이 역할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전상인 교수가 서두에 밝혔듯이 세미나의 배경에는 분야의 절박함도 있다. 참석자들이 도시와 미디어의 위기 의식을 가지고 공론화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도시를 살리는 ‘소통’, 그 후가 더 기대되는 이유다. 미디어 지형과 도시의 모습, 그 변화에 귀추가 주목된다.
노란 리본의 정원
서울시는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서울광장에 분향소를 설치했다. 이와 함께 한국조경사회(회장 정주현)는 노란 리본을 달 수 있는 정원을 조성했다. 황용득 부회장(한국조경사회)이 설계한 노란 리본의 정원은 200m2 규모로 스테인리스 기둥을 눈물(혹은 ‘쉼’을 상징하는 쉼표) 모양으로 두른 단정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기둥은 세월호 사망자와 실종자의 수를 합한 302개(조성 당시 발표에 따름)이고, 여기에 초를 밝힐 수 있는 실린더가 설치되었다. 외곽에는 40mm 두께의 기둥을 설치하고 내부에는 60mm 두께의 기둥을 설치해 염원이 내부로 응집되는 무게감을 주었는 데, 이는 리본이 많아질수록 더욱 선명해진다. 주조색에 맞춰 경계부에 황금조팝나무를 심고, 굵은 기둥 하부에 노란무늬비비추를 심었다. ‘노란 리본의 정원’에는 특별한 디자인적 의미가 담겨있지 않다. 설계자는 조경가로서 세월호 참사에 사회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일까 고민했고, 그 결과로 시민들의 마음을 모을 수 있는 추모 공간 조성에 초점을 맞췄다. 일시적 정원인 이곳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완성된다. 조성 초기 기둥만 세워져 앙상하던 정원에는 어느새 시민들이 하나둘 묶은 노란 리본이 빼곡하게 채워져 풍성해졌고, 해질 무렵 촛불을 밝히는 이들의 마음이 더해져 먹먹해진 우리의 마음을 밝힌다. 정원이 만들어진 4월 30일 이후, 한국조경사회 회원들과 서울시 푸른도시국 조경과 직원들이 매일 저녁 불을 밝히고 있고,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지키며 추모객을 맞이하고 있다. ‘노란 리본의 정원’은 합동분향소철거 전까지 유지·운영되며, 그동안 조경인들에 의해 가꾸어질 예정이다.
조경 법제화의 전략
정주현 한국조경사회 회장 인터뷰 지난 5월 19일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조경산업진흥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가 열렸다. 한국조경학회(회장 김한배) 주관으로 진행된 이 공청회는, 지난 2013년 4월 24일 이노근 의원이 대표 발의한 ‘조경산업진흥법’ 제정을 위해 여러 이해 관계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현재 한국조경학회, 한국조경사회를 비롯한 조경 단체들은 건설 분야의 반대로 제정이 지연되고 있는 이 법안을 6월 국회에서 처리하는 것을 목표로 조경계의 관심과 참여를 요청하고 있다. 이 밖에도 최근 조경 관련 단체들은 산림청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수목원 조성 및 진흥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등 제도 변화에 활발하게 대응하고 있다. 본지는 한국조경사회의 정주현 회장을 만나 조경산업진흥법을 비롯한 조경 관련 법 제도 정비의 배경과 그 추진 전략에 관해 의견을 들어보았다. 도시 공원에 대한 국고 지원의 의미와 영향: 생활권 공원과 국가 도시 공원 laK 현재 추진하고 있는 조경 관련 법 제·개정 배경에 관해 설명해 달라. CJH 2000년대 후반 조경 산업은 호황의 절정을 누렸으나, 그 이후 조경 분야의 성장 저하 속도는 너무나 빠르다. 경기가 침체되자 조경 관련 법과 제도가 없으니 일을 만들어내기 무척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동시에 조경이 미래 지향적인 분야라는 인식도 정책 결정자들 간에 형성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이 제도를 정비할 적기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생활권 공원과 국가 도시 공원이 그것이다. 우선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의 개정을 통해 생활권 공원과 지방의 대형 공원을 지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사실 국토교통부는 법만 담당하고 있지, 지난 20년 동안 한 번도 예산 지원을 하지 않았다.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1980.6.1. ‘도시공원법’ 제정)을 다루는 곳이 국토교통부의 녹색도시과인데 법의 사업 집행을 모두 지방자치단체 사업으로 위임해 놓았다. 반면 예산을 배분하는 기획재정부는 지방자치단체의 사업에 국고를 지원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때문이다. 대통령 공약 사항에 ‘도시공원 조성에 대한 국비 지원’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근거로 공원 사업에 중앙 정부의 지원을 받고자 한 것이 ‘생활(권) 공원’이다. 우리도 이 공약에 큰 기대를 걸었다(지난해 국토교통부는 국비 2,000억 원을 투입해 향후 5년간 총 1,000개의 ‘생활 공원’을 조성하려는 사업계획을 밝혔으나, 올해 예산을 확보하지 못했다). 대통령의 임기 5년 동안, 첫 해에는 계획을 세우고, 올해부터 향후 4년간 1,000개의 도시 공원을 만들자는 계획이었다. 도시 공원 한 개소당 대략 5억 원 정도의 조성비가 든다. 그러면 총5,000억 원에 달하는데, 이를 모두 국고로 감당하긴 힘들 테니 국비와 지방비를 50대 50으로 매칭하여 2,500억 원을 지원받는 것으로 로드맵을 짜고 예산안을 올렸다. 첫해에는 100개의 도시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었으니 이에 필요한 국비는 250억 원이었다. 그러나 기획재정부는 이미 복지에 많은 예산이 배정되었다는 이유로 공원에는 예산을 전혀 할애하지 않았다. 이에 국토교통부와 논의해서 예산을 예결위에 다시 올리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치는 등 애를 많이 썼으나 최종적으로 국비지원이 무산되었다. 사실 타 부처에 비해 많은 예산을 올리는 국토교통부의 사업 중 공원 관련 업무는 우선순위에서 쉽게 밀려나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국토교통부는 올해는 다른 항목의 예산을 일부활용해 도시 공원을 조성하고 다음 해에 기획재정부에 다시 신청하겠다는 복안을 내놓았다. 앞으로 도시 공원에 국비를 지원받으려면 선례를 만드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국가 도시 공원은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서 국가 도시 공원 시스템을 만들자는 이야기다. 각 광역자치단체마다 도시 공원 한 개씩을 국가 도시 공원으로 지정하여 국가가 지원하는 것이다. 대형 공원 하나당 조성 비용을 3,000억 원 가량이라고 생각하면 17개 광역자치단체를 합하면 4~5조 원이 된다. 전국에는 2만여 개의 도시 공원이 지정되어있지만, 그 가운데 약 60%는 조성되지 못한 실정이다. 2020년이 되면 장기미집행시설 일몰제 때문에 도시공원 지정이 해제되는 상황이지 않은가(10년 이상 된 미집행 공원이 그 대상인데, 이미 2015년 10월 1일부터 자동 실효되는 미집행 공원이 생기게 된다). 그때가 되면 공원 녹지 시스템에 심각한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그러니 큰 공원 하나라도 살리자는 이야기다.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이 열악하다보니 큰 공원에는 손도 못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국토교통부 입장에서는 일단 지방자치단체에 일임한 사업을 다시 국가 사업으로 가져오기 힘들다. 그러니 오히려 지방자치단체에서 다시 예산을 달라고 국가에 요청하는 편이 수월하다. 그래서 우리는 기초자치단체 시장·군수 협의회에 국고를 요청하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이렇게 생활권 공원과 국가 도시 공원 두 가지에 국고지원을 할 수 있도록 제도를 차츰 정비해 나가야 한다. 국토교통부는 그동안 4대강 건설 등 대형 토목·건축사업이 많았기 때문에 조경 분야에 큰 관심을 쏟기 힘들었다. 그런데 최근 회색 사회간접자본(SOC)보다 녹색 기반 시설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이 현실이니 이제 공원이나 녹지에 지원해야겠다는 마인드가 생기는 것 같다. 그래서 국토교통부도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 개정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문제는 기획재정부가 개정안 자체도 반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그간의 관행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획재정부의 인식도 변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하드웨어는 ‘도시공원법’ 개정, 소프트웨어는 ‘조경산업진흥법’ 제정으로, laK ‘조경산업진흥법’은 어떤 배경에서 준비되고 있는 것인가? CJH 법 제도 정비에 관해서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다. 하나는 기존법, 즉 ‘도시공원 및 녹지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서 실제 하드웨어인 공원·녹지 등을 국고로 지원하도록 하는 것이다. 반면 ‘조경산업진흥법’은 소프트웨어를 지원하는 법이다. 이 진흥법은 완전히 새로운 내용을 만드는 제정법이라 추진이 쉽지 않다. 지금까지는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이 조경과 관련된 유일한 법이다. 산림이나 건축 분야에는 ‘산림’ 혹은 ‘건축’이란 이름이 붙은 법이 10~20여 개가 된다. 반면 ‘조경’이란 이름이 붙은 법은 아직 하나도 없는 상황이다. ‘건축기본법’(2007.12.21. 제정)이 만들어지자, 조경계에서도 그 영향으로 처음에는 ‘조경기본법’을 만들고자 했다(2010년 1월 5일 ‘조경기본법안’이 의원 발의되었으나, 관련 부처가 반대하여 2012년 5월 29일 회기만료로 폐기되었다). 법이란 기본법, 일반법, 특별법으로 구분되는데, 당시 무리해서 기본법부터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건축기본법’은 국가건축정책위원회가 만들어지고 김진애 의원이 치밀한 로드맵을 준비해 시작한 반면, 조경계는 당시 주무부처인 국토해양부와 전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채 법안 제정을 밀어붙였다. ‘조경기본법’이 좌절되자 2012년에는 당시 한국조경학회 양홍모 회장이 ‘녹색기반법’을 추진하기도 했다. 당시 국토해양부는 다양한 공원, 녹지, 하천, 그린벨트 등을 연결하는 시스템은 환경부의 소관이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이후 조경계는 계속 법을 제정하고자 국토해양부와 협의를 해 나갔고 특별법인 ‘조경산업진흥법’을 만들어보자는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사례 조사를 해보니, 다양한 분야에 다양한 산업을 육성하는 진흥법이 있었다. 일례로 ‘소금산업진흥법’도 있고, 특히 IT산업 분야는 진흥법이 많다. 이렇게 다른 진흥법 내용들을 참고하여 국토교통부와 협의해가며 법안을 만들어갔고, 지난해 4월 24일 이노근 의원이 대표 발의하게 된 것이다. laK ‘조경산업진흥법’이 만들어진다면 실질적으로 어떻게 조경 산업을 육성할 수 있는가? CJH 담당 부서인 국토교통부 내부에 이 법을 다루는 담당 조직이 생기게 될 테고, 이는 조경계에 대한 예산 지원으로 이어질 것이다. 조경 산업의 진흥을 위해 국토교통부 장관이 기본계획을 세우게 되고, 조경산업진흥센터와 같은 법정 단체를 만들 수 있으며, 산업진흥단지를 조성해 입주 업체에 세제 지원 등을 할 수도있다.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고 ‘조경산업진흥법’을 제정하게 되면, 조경계에는 기본적으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지원하는 법이 하나씩 생기는 셈이다. 그 이후 계획은 ‘녹색기반법’을 다시 준비하는 것이다. 이제 국토교통부도 그린인프라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laK ‘조경산업진흥법’ 제정에 대해 대한건설협회가 공식적으로 반대 입장을 내고 있다. CJH 대한건설협회는 조경 관련법이 생기면 조경이 건설 분야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라 우려하고 있다. 현재 법안에는 그런 내용이 없지만, 차후에 법 개정을 통해 분리 발주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건설산업기본법’에 따르면 건설업은 일반건설업과 전문건설업으로 나뉘는데, 조경은 이 두 가지에 모두 해당되어 업종이 3개가 된다. 일반건설업이란 토목, 건축, 토목건축, 산업·환경설비, 조경 이렇게 5가지를 말하고, 전문건설업 안에는 조경식재와 조경시설공사업이 있다. 일반건설업으로 본다면 조경은 토목이나 건축과 대등한 건설업의 한 종류다. 그런데 대한건설협회는 조경을 토목·건축의 하위 시스템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의 명분이 부족하다. laK 최근 정원을 포함하는 내용을 담은 ‘수목원 조성 및 진흥에 관한 법률’ 개정안에 반대하고 있는데, 이 개정안이 통과되면 실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라 예상하는가? 지난 5월 14일 있었던 ‘산림청과 조경계와의 상생 발전을 위한 간담회’에서 이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갔는가? CJH 산림청과의 대화는, 작년 9월에 산림청장 면담을 하면서 산림청과 조경계 간 실무위원회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현안에 대해 논의하자고 제안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지난 연말에 첫 회의를 했는데, 그때 산림청이 ‘수목원 조성 및 진흥에 관한 법률’ 관련 내용을 가져왔다. 내용을 보니 우리가 해야 할 정원에 관한 내용들이 상당 부분 담겨 있었다. 산림 분야가 보기에는 정원에는 주인이 없다고 느꼈던 것 같다. 이러한 산림청의 행보에 위기감을 느껴 지난 해 한국정원문화협회를 발족하게 된 것이다. 이후 올 2월에 ‘수목원 조성 및 진흥에 관한 법률’에 정원 조성을 지원하고 인력을 육성하는 내용을 담은 개정안이 발의되었다. 현재 여·야 국회의원이 모두 비슷한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 (2014.2.14. 이낙연 의원 대표 발의; 2014.2.28. 경대수 의원 대표 발의)했으므로 합의해서 통과시킬 가능성이 크다. laK 조경계 일부에서는 건설 경기가 안 좋은 상황에서 산림청이 정부 예산으로 일을 만들어내면, 어차피 하도급을 받더라도 조경 인력이 참여할 수 있으니 조경계에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겠냐는 의견도 있다. CJH 그런 딜레마도 있다. 이번 산림청과의 간담회에서 이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산림청은 개정안이 통과되면 정원 관련 사업은 100% 조경공사업으로 발주하여 산림조합은 빠지고 조경업체만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문제는 상당수의 산림조합이 조경공사업 면허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들도 참여할 수 있다는 거다. 다른 산림 사업처럼 산림조합과 수의계약을 맺지는 안겠다고 하는데, 특히 지방에서는 조경공사업으로 발주한다고 해도 산림조합이 조경공사업 면허를 내면, 나중에는 관행대로 우리 식구 감싸기를 하지 않겠냐는 우려가 있는 것이다. 제도적 울타리, 정부와의 관계 정부에는 조경계와 관련지을 수 있는 여러 부처가 있다. 우리는 우리를 지원하고 예산을 만들어주는 조직이 필요한 상황이다. 국토교통부는 이제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예산과 조직을 만들어가기 시작한 셈이고, 산림청은 그간 조경에 관계되는 사업을 많이 추진해 왔으나 조경 쪽에 실질적으로 일을 많이 주지는 못했다. 문화적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문화체육관광부와도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일전에 문화체육관광부에 ‘정원문화육성법’과 같은 법안을 올리려고도 계획해 보았으나, 아직까지는 부처 내 조경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앞으로 세미나와 같은 활동을 통해 정원이 문화라는 점을 인식시키는 노력도 필요하다. laK 문화체육관광부는 ‘수목원 조성 및 진흥에 관한법률’의 주무부처인 산림청을 의식해서 정원에 관심을 가지기 힘들지 않겠는가? CJH 그래서 지금 교통정리를 잘해야 하는 상황이다. 지금은 산업적으로도, 법 제도적으로도 정부와의 관계가 굉장히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 실리적으로 보면 ‘조경’이란 단어에 너무 연연하지 않을 필요도 있다. 여러 부처와 대화를 해보니 ‘조경’이란 말은 결국 국토교통부의 소관이다. 환경부는 생태 복원, 산림청은 도시숲, 국토교통부는 공원 녹지, 문화체육관광부는 정원 문화, 이런 방식으로 유연하게 역할을 분담하면서 여러 부처와 관계를 맺고 시장을 키워야 한다. 도시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변곡점에 와 있다. 좋은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조금만 더 서로 도와주며 노력하면 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시민이 디자이너가 되다
디자인 구상 오션프런트 시민디자이너그룹+UDI도시디자인그룹+시흥시 설계 경호엔지니어링건축사사무소 시공 티엘건설+메탈아트 오이도 오션프런트 섬의 모양이 까마귀 귀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 ‘오이도’는 아주 먼 과거부터 근·현대 시기까지 오랫동안 사람들이 촌락을 이루며 거주하던 생활 터전이자, 역사·문화·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전형적인 어촌 마을의 원주민들은 대부분 어패류 채취와 염전일에 종사하였다. 이후 오이도 주민들의 생활은 1987년부터 진행된 시화호 방조제 사업을 전후로 크게 바뀌게 되었다. 국토 개발의 열풍이 오이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고 간척 사업을 통해 시화산업단지라는 도시적·공업적 산물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결과 군자염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시화호를 가로지르는 방조제의 출발점인 오이도는 소금 만들고 조개 캐던 섬이 었다는 추억만을 간직하게 되었다. 시화호 개발은 단순히 바다와 갯벌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산업화, 도시화, 이주민 단지화로 옛 바닷가 마을 주민들의 넉넉한 인심마저 도시민의 그것으로 변모시켜 버렸다. 작은 어촌 마을이 도시로 변모된 지 25여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우리는 오이도를 어떠한 모습으로 재탄생시켜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달라진 오이도의 환경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오이도의 미래와 지속가능한 발전의 뼈대를 구축해야 했다. 그 해답은 몇몇 전문가 혹은 행정의 일방적인 주도로는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역 커뮤니티와 전문가, 행정이 거버넌스를 구축하여 오이도가 잊고 살아왔던 것과 오늘의 오이도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연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해안 지역에 ‘스며드는 공간 환경’ 구현을 통해, 지역 자원이 갖고 있는 정체성과 해안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오이도를 찾는 이에게아름다운 서해안의 낙조와 쾌적한 해안 경관을 제공함으로써 오이도 지역을 재생하기 위한 ‘오이도 오션프런트’ 프로젝트가 2011년 첫발을 내딛었다. 시민이 디자이너가 되다 오이도 오션프런트의 핵심은 ‘시민 디자이너 그룹’의 운영이었다. 형식적이었던 시민참여의 관행을 과감히 깨보고자 시민이 곧 디자이너라는 선언적 의미를 담아, 지역 주민을 프로젝트 추진의 단순한 보조자에서 주체로 격상시킨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이후 활동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였다. 시민 디자이너 그룹은 주민 자치 활동의 리더 및 구성원들이 지역에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토의하고, 조경·디자인 전문가의 지속적인 멘토링과 현장 답사 등을 통해 디자인 구현의 실현 가능성과 적용방안을 직접 검토하고 결정하였다. 2014년 현재까지 시민 디자이너 그룹은 지속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총 25회에 걸친 회의 진행과 현장 토론을 벌였고, 해안에 설치된 ‘생명의 나무전망대’의 기본적인 유지관리까지 맡아 운영하고 있다. 디자인 과정에서 시민 디자이너 그룹은 제방에 그늘이 없으니 나무를 심자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인공적인 구조물인 제방 위에 수목의 생육 환경을 무시한 채 나무를 직접 심는 보다는 지역의 역사성을 간직한 마을 어귀의 당산목처럼 크고 당당한 수목 형태의 조형물을 도입하는 방안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지역 주민들의 참여로 도출된 초기 디자인은 현재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형태였다. 시민 디자이너 그룹에서 1차 확정된 디자인은 실시설계와 구조 검토 과정에서 부재의 규격과 두께 등이 계속 커져 원래 구상한 형태가 유지되기 힘든 상황에 처했다. 특히 태풍 또는 강풍이 상존하는 해안 지역의 특성상 안정적인 구조 내력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가 불가피했기 때문에 초기의 디자인 콘셉트를 유지하면서 안정성을 확보하는 디자인 수정 토의가 계속 이어졌다. 시공 과정에서도 시민 디자이너 그룹은 ‘주민참여감독관’이란 직책을 맡아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공공공간에서 시행되는 사업의 특성상 주변 상가에서 주차 및 영업 차질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졌는데, 같은 시민의 입장에서 이해, 설득, 조율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지역에 상시 상주하는 주민의 관점에서 안전 관리 문제 등 다양한 위해 요소를 즉시 저감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여, 피감독자인 시공자에게도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제작 과정에서는 3D로 도출한 형태를 설계도로 변환하고 스테인리스 관을 20~30cm 내외로 조각조각 재단하고 정확한 각도와 위치에 용접으로 꼼꼼히 이어붙이는 과정이 차분히 진행되었다. 조형물의 현장 반입, 현장 조립, 거치 등이 마무리되어, 시민과 함께 애쓰고고민한 결과물이 드디어 오이도 제방 위에 설치된 순간, 이 조형물은 더 이상 설계자, 시공자, 발주자가 만들어낸 성과물이 아니었다. ‘생명의 나무’는 지역을 되살리고자 같이 고민하고 토의하고 그려온 시민 디자이너 모두의 것이었다. ‘생명의 나무 전망대’는 어찌보면 일반적인 조경 사업의 결과물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시민과 함께 호흡하고 고민하여 이루어낸 결과물이기에, 그 의미는 여타의 사례와 비교할 수 없다. 오이도 시민 디자이너 그룹의 활동이 이상적이고 지속가능한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 기반만큼은 착실히 다져졌다고 자부할 수 있다. 살맛나고 즐거운 오이도, 정이 넘치고 활기가 충만한 오이도를 꿈꾸며 달려온 지난 시간 동안, 시민과 전문가, 공무원들이 쏟아부은 열정이,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한 생명의 나무 전망대 이외에 ‘제방 경관 디자인, 교통 소통 활성화 제안, 문화 시설 확충, 주민생활여건 개선분과 운영, 스쿨가든 시행, 오이도 사랑모임 결성, 생활 안전 여건 개선’등 다양한 유무형의 결과물을 오이도에 남겼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오이도에서는 시민과 함께하는 지속가능한 공간 환경 디자인, 경관 만들기, 지역의 스토리텔링 만들기 활동이 지속적으로 시도될 것이고, 해를 거듭할수록 진화할 것이다.
라장 브리지
프랑스 남부 툴롱Toulon 인근에 400에이커 넓이의 포도밭이 있다. 이 포도밭은 라장 강River L’rgens에 의해 둘로 나뉘어 있다. 농장에 속한 건물과 주택은 부지 관리인의 거처와 가까이 붙어있지만, 반대편으로 이동하려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강을 건너 이동한다고 해도 차로 약 20분의 시간이 소요된다. 이에 농장주는 보행자와 사륜 오토바이가 다닐 수 있는 저비용의 가벼운 다리 건설을 의뢰했다. 수작업으로 진행된 다리 설치 대상지는 대형 차량의 접근이 불가능해 다리를 만드는 데 크레인을 이용할 수 없다. 이에 수작업으로 부품을 하나씩 조립해 다리를 건설할 수 있는 케이블 현수교cable-suspension bridge가 도입되었다. 수작업으로 다리를 세워야 한다는 점이 설계 과정 내내 주된 고려 사항이었다. 15개의 부품 및 지지 케이블은 제작된 상태로 현장으로 운송되었으며, 강물 위에 설치된 오버헤드 짚 와이어overhead zip wire로 개별 부품들을 북쪽 둑으로 옮기고 남쪽 둑을 향해 이동하면서 설치가 이루어졌다. 이곳은 강둑 자체가 그리 단단하지 않은 충적토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행히 남쪽 둑은 석회암 노두로 이루어져 있어 이를 활용해 다리를 설치할 수 있었다. 단단하지 않은 충적토에 가해지는 압력을 견뎌낼 수 있도록 스쿠프scoop 토대가 활용되었으며, 상대적으로 단단한 남쪽 둑의 암석 노두 위에 마스트mast를 설치하고 케이블을 연결했다. 마스트는 텔레핸들러telehandler를 이용해 설치했으며, 케이블은 수작업을 통해 강 양편으로 당겼다. 케이블의 장력을 견뎌낼 수 있도록 콘크리트 토대는 둑보다 훨씬 아래쪽에 배치했다. 다리가 위치한 지점은 보의 하류에 해당하는 지역으로서 간헐적으로 많은 양의 물이 방류되어 흘러가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지점의 강물은 예측이 쉽지 않으며, 범람의 가능성이 상존한다. 그러므로 다리 가운데 부분을 위로 살짝 올라오게 함으로써 범람 시 물속의 파편으로 인한 교량의 훼손 가능성을 낮추고자 하였다. 다목적 구조 및 디자인 다리는 총 길이 28m로 무게나 느낌은 비교적 가벼운 편이다. 이용자 및 사륜 오토바이에 의해 발생하는 상당한 정도의 점하중 굴절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교량의 데크 및 수직 난간이 하중을 균일하게 분산시켜야 했다. 때문에 수직 난간 사이에 철근을 격자로 배치했고, 이를 통해 난간 손잡이를 하나로 연결해 보행로가 일종의 트러스가 될 수 있도록 했다. 다리에 활용된 대부분의 구성품들은 복수의 구조와 디자인적 목표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수직으로 배치한 난간의 경우 기둥의 역할을 맡고 있으며, 손잡이와 마룻장은 하중을 분산시키는 전체 구조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수직 난간들 사이의 빈 공간을 개방형그물 구조로 채움으로써 교량의 데크 및 손잡이를 트러스로 활용해 교량에 가해지는 하중이 분산되도록 했다. 2톤 이하의 강철이 사용되었고 마룻장에는 약 1톤의 목재가 사용되었다. 다리 설치의 전 과정은 1주일 안에 모두 끝났다. 프로젝트에는 아주 적은 비용이 소요되었으며, 총 비용은 약 7만 파운드로 추산된다. 의뢰인은 애초의 기대 수준을 뛰어넘는 다리 설계에 매우 기뻐했다.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사람과 식물
#15 거트루드 지킬, 위대한 정원 예술가 영국 정원 역사상 가장 중요한 디자이너로 지금도 그 영향력이 시들지 않고 있는 거트루드 지킬Gertrude Jekyll(1843~1932)은 엄격한 쪽머리에 빅토리아풍의 검은 원피스를 입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정원을 돌아보는 노년의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지킬이 디자인한 아름다운 색채 정원과 얼핏 매치시키기 어려운 모습이다. 어쩌면 검은 옷과 지팡이는 위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면 지킬 선녀로 변하여 마술봉을 휘둘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트루드 지킬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지루한 정원에 마술처럼 빛과 색을 가져다줌으로써 새로운 장르를 완성시킨 장본인이었다. 건축과 정원의 화합을 이루어낸 것 외에도 식물, 그중에서도 다루기 힘든 야생화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으며 그가 연출했던 장면들은 지금도 귀감이 되고 있다. 비록 야생화를 자유롭게 풀어놓기는 했지만 완강하고 경직된 사고방식으로 인해 작품으로 완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했던 윌리엄 로빈슨1과 비교해 볼 때, 첫 정원 작품으로 단번에 마에스트로의 평판을 얻은 지킬의 비결은 우선 자유로운 사고 체계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하게 한다. 물론 타고난 감각과 오랜 세월 화가로 활동하며 얻었던 체험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시력이 급속히 나빠져서 화가의 길을 접고 정원 예술가로 전향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다.2 그러나 그보다는 그의 삶의 여정이 자연스럽게 정원 예술가의 길로 접어들게 했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정원공부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모든 영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정원 유전자’ 덕으로 지킬에게 정원은 어린 시절부터 일상에 속했었다. 유난히 색에 민감했으므로 꽃의 다양한 색조에 매료되었던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영국 남부의 서리 지방이 고향이었던 지킬은 만 열여덟 살이 되던 1861년에 런던의 사우스켄싱턴 예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하기 위해 집을 떠났다가 1876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홀로 남은 어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 십여 년 만에 귀향했다. 딸이 돌아오자 어머니는 먼스테드히스Munstead Heath에 집을 새로 지었는데 이곳에 ‘실험적’으로 만들어 본 정원이 지킬의 공식적인 첫 작품이 된다. 그것이 불과 3~4년 만에 소문날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음으로써 정원 예술가로서의 운명이 결정되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영국인들은 소문난 정원을 방문하는 전통이 있었으므로 지킬 모녀의 먼스테드히스 정원에도 방문객이 찾아들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당시에 『정원The Garden』이란 제호의 잡지를 발행하던 윌리엄 로빈슨과 영국장미협회 회장의 방문을 받게 된다. 이렇게 얻은 성취감으로 인해 지킬은 정원이 대안이나 차선책이 아니라 그동안 쌓아왔던 예술적 체험을 집약시킬 수 있는 기회임을 이해했다. 이즈음 로빈슨의 권고로 『정원』 잡지에 기고를 시작했는데 1932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기까지 천여 편의 에세이를 쓰고 모두 열세 권의 책을 냈으며 크고 작은 정원 400여 개를 디자인했다. 이런 엄청난 작업량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지킬에게 정원이 전부였음을 시사한다. 지킬이 미술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미술공예운동Art & Craft Movement의 창시자 중 한 명이었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1834~1896)가 학교 인근에 디자인 회사를 설립했다. 본업이 화가였던 윌리엄 모리스는 공장에서 생산되는 생활용품들을 몹시 역겨워했다. 손으로 직접 만든 것만이 가치 있다는 철학 하에 벽지부터 가구까지 직접 만들어 저렴하게 판매하는 것을 목적으로 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손재주가 많았던 지킬이 “마음과 손과 눈”이 삼위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모리스의 철학에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지킬은 회화 외에도 자수, 조각, 판화, 직조, 사진 등 다방면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분야를 넘나드는 포괄적인 작품 세계를 추구했다. 이런 성향은 후에 정원 예술가로 완전히 방향을 굳힌 후에도 양식에 구애받지 않은 ‘편견 없는 정원’을 만들게 했다. 그러나 정작 지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1775~1851)3의 그림 세계였다. 미술관에서 터너의 그림을 연구하며 보낸 수많은 시간은 터너의 화폭을 환하게 밝히는 지중해의 빛과 색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1874년 지킬은 터너의 빛을 찾아 여러 달에 걸쳐 북아프리카, 그리스, 이탈리아를 여행하게 되며 여기서 만난 파스텔 색조의 식물에 매료되어 돌아왔다. 이런 영향들이 축적되어 후에 지킬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는 ‘경계 화단’4이 탄생했다. 경계 화단은 본래 프랑스 정형식 정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경계를 이루던 회양목 생단이 진화하여 꽃피는 식물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을 말한다. 지킬은 이 경계형 화단이 독립적 정원 요소로 성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것 같다. 화폭 속에서 더욱 빛나는 터너의 밝은 색조를 응시하던 수많은 나날 중 야생화들도 저렇게 ‘액자’에 담되 윤곽 없이 서로 스며드는 기법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것이다. 소로를 따라 화단을 길게 배치하는 것이 경계 화단의 기본 형태였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여러 방법으로 응용했다. 특히 옹벽, 계단, 테라스 등 시설물을 오히려 화단처럼 이용하여 식물과 어우러지게 함으로써 최대의 상승 효과를 내는 기법 역시 지킬의 아이디어였다. 경계 화단에서 보여준 지킬의 탁월한 감각은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원 전체의 구성에 여실히 반영되고 있다. 지킬의 정원들은 손수건 크기의 화단으로부터 몇 헥타르에 이르는 숲 정원까지 때로는 정형으로, 때로는 자연형으로 장르를 넘나들었으며, 전원의 정다움, 도시적인 세련됨, 이국적인 매력 등 상황에 따라 적절한 식물들로 ‘팀’을 짜서 배치함으로써 수많은 변주곡을 연주한다. 각 식물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무대를 만들어 줌으로써 최상의 효과를 얻어 낸 지킬의 방법론은 건축과 정원의 화합뿐 아니라 사람과 식물 사이에도 균형 잡힌 관계가 가능함을 말하고 있다. 20세기 초까지 일정한 패턴을 벗어나지 못하고 쳇바퀴를 돌고 있던 정원계에 지킬이 보여준 자유로움과 균형감은 확실한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 그림만 그리기 1
설계의 정의 설계의 목적은 그림을 그리는 데 있지 않다. 설계design는 “특정한 대상의 형태와 기능을 결정하는 행위다.” 이때 특정한 대상은 반드시 건물이나 정원 같은 공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옷도, 가구도, 일상용품도 설계의 대상이며, 요즈음에는 심지어 감정이나 행위도 설계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설계를 할 때 우리는 대상의 형태와 기능을 결정하기 위해 다양한 요소들을 생각해야 한다. 크기, 색, 질감, 위치와 같은 물리적 성질들뿐만 아니라 대상의 목적, 의미, 만드는 과정, 심지어 변화까지도 디자이너가 고려해야 할 설계의 요소들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는 글이나 소리로 기술된 계획을 설계라고 하지 않는다. 설계 과정상의 모든 생각과 결정들은 그림을 통해서 구현된다. 설계의 매체는 결국 그림이다. 설계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설계 행위는 기능과 형태의 구체적인 그림을 만듦으로서 이루어진다는 전제가 붙어있다. 다시 온전한 정의를 내리자면 설계는 “특정한 대상을 만들기 전에 구체적인 그림을 통해 그 형태와 기능을 결정하는 행위다.”1 이렇게 본다면 설계의 목적은 특정한 대상의 형태와 기능을 구현하는 데 있지만, 모든 수식어와 관계사들을 제거하고 나면 설계는 본질적으로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된다. 두 가지 그림 그동안의 설계 경험을 떠올려보면 대부분의 시간을 그림만 그리는 데 쏟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실제의 공간을 직접 대면할 때라고는 고작 대상지 답사를 간다든가, 현장 실습 시간에 먼발치에서 콘크리트가 부어지는 모습을 바라본다든가, 모종삽으로 꽃포기들을 몇 번 심어본 기억밖에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졸업을 하고 회사에 취직하더라도 설계의 경험은 그림이라는 매체 바깥으로 나가기가 힘들다. 정원을 전문적으로 다루거나 시공을 겸하는 회사가 아니라면, 업무상으로도, 계약상으로도 설계의 모든 최종 결과물은 공간이 아닌 그림이 된다. 누군가는 공간을 만들면서 그림만 그려야 하는 설계의 현실에 괴리감을 느낄지 몰라도 이는 전혀 비정상적인 일이아니다. 근대적인 의미의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생기면서 공간을 창조하는 작업도 분업화된다.2 이제 설계가의 업무는 나무를 심고 석재 포장을 까는 일이 아니라, 어디에 나무를 심고 어떠한 모양으로 석재 포장을 깔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 되었다. 오늘날의 설계가는 구상에서부터 제작까지의 전 과정을 수행했던 중세의 대석공Master Mason이나 조선시대의 대목장과는 다르다. 설계가가 다루는 매체는 그림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림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려진다. 예술가도 설계가도 모두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이 중 설계가만이 전문적인 기술자로 인정받는 이유는 설계가의 그림이 작가의 개인적인 표현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전문적인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기술적 매체이기 때문이다(그림1, 2).3 우리는 이를 도면이라고 부른다. 도면은 정확하게 따라야 할 규칙이 있다. 전문적인 기술자로서 설계가는 이 규칙들을 숙지하고 지켜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모든 건축학과와 조경학과 학생들은 저학년 때 도학과 제도라는 수업을 들어야 하고 평생 이때 배운 언어를 반복해서 구사한다. 그런데 공학도들 역시 제도 수업을 통해 동일한 도학의 원칙을 배우며 그들의 실습 과목 역시 설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는 설계가가 따라야 할 그림의 규칙이 예술가들이 익히는 표현기법보다는 공학자들이 요구하는 정보의 체계에 가깝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공학자의 도면과는 달리 디자이너는 기술적 정보의 전달을 넘어 대상의 미적인 아름다움과 작가가 부여하고자 하는 의미까지도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빠지는 함정이 있다. 바로 설계의 매체에 대한 잘못된 이해다. 설계의 그림은 기본적으로 정보로서의 가치를 지니면서 예술적인 표현을 반영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학생들의 그림은 이도 저도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면의 형식을 취하지만 전달하는 정보는 오류 투성이고 그렇다고 대상의 아름다움도, 본인의 생각도 드러내지 못하는 그림. 다시 말하지만 설계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다. 때문에 설계의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잘못된 설계를 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앞으로 두 번에 걸쳐 할 이야기는 설계 매체에 대한 이야기다. 앞에서 나누었던, 그리고 이후 계속해서 하게 될 개념, 직관, 이론, 분석, 맥락, 의미와 같은 설계의 방법과 대상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잊어두자. 설계의 매체에 대한 이야기는 곧 설계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도면의 논리 가장 기본적인, 그러나 의외로 그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도면을 구성하는 그림들은 무엇인가? 조경학과 2학년 정도가 되면 누구나 이 질문에 쉽게 답을 한다.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 이 셋이 가장 기본적인 도면의 형식이다(그림3, 4, 5). 그런데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의문점이 하나 생긴다. 현실의 공간도, 설계가들이 구현하고자 하는 공간도 삼차원이다. 그런데 왜 도면의 기본은 삼차원적 형태를 보여주는 그림이 아니라 이차원적정보만을 보여주는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일까? 물론 이차원적인 그림들이 더 그리기 쉽겠지만, 고도로 복잡한 공학적 지식을 요구하는 교량도, 마천루도, 심지어 우주선의 설계 역시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로 그려진 이유가 단순히 설계가들이 그리기 쉬워서였다면 수긍하기가 힘들다. 고대 그리스어로 인위적인 것은 노모스Nomos라고 부른다. 노모스는 인간의 정신 문화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노모스의 반대말인 피지스Physis는 인간 문명과 대립되는 자연을 뜻한다. 문명이 발생한 이래로 인간은 자연 상태의 피지스를 노모스의 세계로 편입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설계는 단순한 자연의 변형을 넘어서 건축물과 같이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노모스의 공간을 창조하게 되면서 시작된다. 이를 위해 인간은 기하학이라는 사고 체계를 발명했다. 모든 문명을 막론하고 기하학은 건설, 치수, 천문, 경작 등 공간을 다루기 위한 모든 분야의 기반이 되는 지식이었다. 그래서 설계를 지배하는 사고의 체계, 그리고 설계 매체인 도면의 특수한 형식을 이해하려면 기하학의 사고를 이해해야 한다.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하였고 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하였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어바니즘』이 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있다.
[조경가의 서재] 책은 빨갛다
개양귀비 꽃잎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아 본 적이 있다. 한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붉은 빛은 그 강렬한 덧없음으로 인해 비현실로 각인된다. 그에 비해 동백꽃은 붉은 눈물방울처럼 툭 떨어져버리는 처연함에 속수무책이다. “빨간색은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한계가 없고 특징적인 따뜻한 색이다. 그것은 생기에 차 있고 활동적이며 동요하는 색으로서 내적으로 작용하지만, 사방으로 자기 힘을 소모하는 노란색이 지닌 경솔한 성격은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빨강은 모든 에너지와 강렬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목적을 의식한 무한한 힘을 강력히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거의 외부로 향하지 않고 주로 자기 내부에서 분출하고 작열하는 빨강은 소위 남성적으로 성숙한 색이다.”1 칸딘스키가 ‘남성적’이라고 얘기했던 속성은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ovar의 영화 ‘하이힐’2을 보면 단순히 남성적인 것보다는 ‘여성 안에 갖고 있는 남성적인’ 빛깔로 욕망과 슬픔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색이 어느 정도 이면을 가지고 있지만,특히 빨강은 그 강렬함으로 인해 그 안에 숨겨진 슬픔과 부서지기 쉬운 감성을 간과하게 된다. 강렬함과 다치기 쉬운 감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빛깔. 그런 면에서 개양귀비 꽃잎은 빨강이 가지고 있는 빛깔의 본성을 가장 적절한 물성으로 보여준다. “나는 여기에서 당신들의 눈에 말을 걸고 있다. 이것이 나의 신중함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 동시에 나는 공중에서 당신의 시선을 통해 날아오른다. 이것이 나의 가벼움이다. 나는 빨강이어서 행복하다! 나는 뜨겁고 강하다. 나는 눈에 띈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를 거부하지못한다. 나는 숨기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섬세함은 나약함이나 무기력함이 아니라 단호함과 집념을 통해 실현된다. 나는 나 자신을 밖으로 드러낸다. 나는 다른 색깔이나 그림자, 붐빔 혹은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를 기다리는 여백을 나의 의기양양한 불꽃으로 채우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내가 칠해진 곳에서는 눈이 반짝이고, 열정이 타오르고, 새들이 날아오르고,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나를 보라,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를 보라, 본다는 것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다는 것은 곧 보는 것이다. 나는 사방에 있다. 삶은 내게서 시작되고 모든 것은 내게로 돌아온다. 나를 믿어라!”3 오만하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 나오는 ‘빨강’의 얘기다. 파묵의 빨강은 말 그대로 불꽃이다. 그래서 그것은 살아 있음 자체다. 그러고 보니 제목이 의미하는 것은 결국 불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지만 영원하고 싶은 그러나 영원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술탄이 바뀌고, 시대가 바뀌고,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바뀌고, 그들이 시대를 거슬러서도 지탱하고자 했던 양식이 바뀌는, 이전의 모든 것들이 소멸되어 가는 얘기. 그러니까 빨강은 소멸의 시간을 얘기하는 유일한 빛깔이다. 이수학은 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이원조경에서 4년 동안일했다. 프랑스 라빌레뜨 건축학교와 고등사회과학대학원이 공동 개설한 ‘정원·경관·지역’ 데으아(D.E.A.) 학위를 받았고, 현재 아뜰리에나무를 꾸리고 있다.
[그들이 설계하는 법] 디자인 검산법, 경관 모형 실험
1 조경은 글자 그대로 경관을 만드는 행위다. 실제의 경관이 장소를 구성하는 다양한 물리적구성 요소 간의 상호 작용에 의해 그 장소만의 공감각적 시스템을 형성하는 것처럼, 경관을 디자인하는 것 역시 대상지라는 물리적 바탕과 그 장소를 채우게 될 새로운 물리적 구성 요소의 조합을 통해 구현된다. 설계자만의 깊이 있는 개념과 태도도, 남다른 눈으로 해석한 대상지의 의미와 감흥도, 경관적 컬티바landscape cultivar로서 새로이 장소를 작동시키기 위한 창의적 전략도 물리적인 디자인 없이는 불가능하다.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모든 과정이 그 장소에 가장 적합하고 합리적이고 의미 있는 물리적 디자인을 위한 과정인 셈이다. 결과물로 디자인된 물리적 요소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경관적 감흥이 미학적 가치를 갖고 이용자들로부터 사랑받을 때, 그러한 과정도 의미를 얻게 된다. 혹자의 말처럼 우리가 디자인하는 물리적 경관은 일단 예쁘고 봐야 한다. 그래야 할 말이 있는 것이다. 2 무언가를 실제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정확한 예측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과 검증이 필요하다. 경험 많은 작가일수록 보다 안정적인 결과물을 담보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고, 그것은 그만의 노하우가 된다. 하지만 흔히 말하듯 조경은 잡학이다. 가장 통합적이고 복합적인 디자인 단위라 할 수 있는 경관을 다루다 보니 비슷한 디자인 분야 중에서도 고려해야 할 것이 더욱 많고, 그러한 요소들 간의 모든 조합을 경험하는 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수많은 현장 경험을 수십 년 해온 대가가 아니라면 디자인과 실제의 간극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충실하게 디자인을 검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머리가 아니라 눈과 손을 통해 이루어질 때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이 때 모형model을 통한 스터디는 가장 손쉽지만 가장 효과적인 검증 도구가 된다. 3 나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디자인과 실제 사이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모형 스터디 작업을 시도하고자 노력한다. 단순히 최종 디자인을 재현하는 프레젠테이션 도구로서의 활용을 넘어, 대상지의 3차원적 현황을 보다 쉽게 이해하는 분석 도구로서, 개념적 전략이 대상지에 적용되었을 때 발생하는 현상을 관찰하여 그로부터 대상지만의 시스템을 도출하기 위한 전략적 도구로서, 계획안의 형태, 스케일, 공간감 등을 빠르게 검증하고 발전시키는 디자인 도구로서 모형의 다양한 활용 가능성을 실험해 본다. 뿐만아니라 디지털 모형의 활용은 복잡한 구조물의 기초에서부터 마감까지 실제 시공의 전 과정을 가상적으로선행해 봄으로써 시공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순서상의 오류를 파악하고 시공 방법을 개선하기 위한 효과적인 검증 도구가 되기도 한다. 4 모형을 통해 디자인 스터디를 하는 경우 나에게는 다섯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실제로 디자인을 하는 사람이 직접 모형을 만들도록 한다. 물론 단순히 대상지 지형을 재현하는 모형이나 전체적인 베이스를 만들거나 하는 것은 누가 해도 상관이 없겠지만, 디자인 스터디 모형의 경우에는 제작 과정 자체가 디자인의 과정이 되므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디자이너가 직접 깨닫고 느끼고 수정하면서 디자인을 발전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모형 제작이 두세 시간을 넘기지 않도록 한다. 아주 디테일한 스터디를 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형 제작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 효율적인 스터디가 가능하다. 셋째, 디테일한 설계를 제외하고는 디지털 모형보다 물리적 모형physical model을 만들도록 한다. 화면의 한계 속에서 벗어나야 하며 손을 통해 디자인을 느끼는 것 역시 중요하기 때문이다. 넷째, 재료 선정 시 가급적이면 모형용 소재가 아니라 스케일과 재질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창의적 소재를 찾도록 한다. 다섯째, 쉽게 분해되거나 변경이 용이하도록 만들어야한다. 그래야 지속적인 스터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5 ‘Gubei Pedestrian Promenade Central Folly’(2009). 대부분의 프로젝트에서 디지털과 물리적 모형이 병행되는 경우가 많다. 센트럴 폴리는 상하이의 대규모 주거 단지 내 보행자 가로인 구베이 골드 스트리트Gubei Gold Street의 중앙 광장에 설치된 카페, 매점, 꽃집, 관리실 등으로 구성된 소규모 편의시설이다. 폴리 디자인의 거의 모든 과정은 디지털로이루어졌다. 기본구상 단계에서부터 디자인은 라이노 3D를 이용하여 완성되었고, 프로그램으로부터 추출된 평면, 단면, 입면을 베이스로 모든 캐드 도면이 작성되었다. 유일하게 디지털로 진행되지 않은 것은 바로 디자인의 검증 단계였다. 디지털 모형은 정교함에서는 뛰어나지만 유연하지 못하고, 모니터의 한계 또는 가상공간의 왜곡된 화각 탓에 대상을 통합적으로 관찰하고 인지하는 데 분명한 한계를 갖는다. 마우스의 반복된 클릭과 옵셋offset이나 카피copy 같은 명령어 없이 손끝으로 느끼면서 하나하나 완성되는 과정의 정교함은 디지털 세계의 오차를 검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일 것이다. 김현민은 1975년생으로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조경가협회(ASLA)에서 수여하는 우수졸업자상을 받았으며, 미국의 SWA Group에서 Shanghai Gubei Gold Street Plan, Symphony Park Competition 등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하였다. 기술사사무소 렛, 비오이엔씨에서 계획, 설계 및 정원 시공에 이르는 폭 넓은 실무를 경험하였고, 국내 여러 대학에서 조경 설계를 강의하였다.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코랄리 윈
갭 필러Gap Filler는 뉴질랜드 캔터베리 지방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파괴된 도시를 시민의 손으로 재건하기 위해 설립된 비영리 시민 단체다. 지진으로 생긴 수많은 공터들이 영구적으로 개발되기 전까지 무작정 비워두는 것이 아니라, 공터를 임시적으로 활성화하고 커뮤니티의 요구에 맞게 사용하는 것이 갭 필러의 목표다. 2010년 9월 4일에 전 도시를 뒤흔든 첫 번째 지진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인 이듬해 2월 22일에 또 한 번의 파괴가 이 지역을 충격에 빠뜨리면서 갭 필러의 역할과 임무는 빠르게 늘어났다. 설립자 코랄리 윈은 호주 애들레이드Adelaide 출신으로 원래 로스쿨을 다녔다. 그러나 연극과 영화, 미술사를 공부하고 싶어 법학을 그만두고 뉴질랜드 캔터베리 대학교의 문학부로 교환 프로그램을 갔다. 당초 반년을 염두에 둔 계획이었지만, 크라이스트처치의 매력에 빠진 그녀는 호주로 돌아가지 않고 이 도시에 자리를 잡았다. 지진 이전에는 미술관의 파트타임 매니저로, 그 후 아트센터에서 예술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거나 관람객 프로그램을 짜기도 하고, 웹사이트 관리, 마케팅 등 온갖 잡일을 도맡았다고 한다. 각종 페스티벌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기도 하고, 무료 연극단Free Theatre Company에서 실험적 연극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극단에서는 거의 보수를 받지 못했고, 가끔 급여가 지급되면 시간당 200원꼴이었다고 한다. 생활고와 타향 생활에 지쳐 방황하고 있던 코랄리 윈에게 지진은 하나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크라이스트처치 곳곳에서 수천 채의 건물이 붕괴되었는데, 그녀의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건물이 무너져 벽돌더미로 변하기 직전에 그녀는 가까스로 뒷문을 통해 빠져 나왔다고 한다. 집 뒷마당에 천막을 치고 바비큐 그릴로 음식을 만들며 생활해야 했고, 가졌던 모든 물건을 잃었다. 하지만 그녀는 당시를 회상하며 말한다. “왠지 모르게 자유스러워진 느낌이었어요. 떠난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많은 물건을 소유하지 않는 다는 사실이 말이에요. 때로는 우리의 물건들이 오히려 우리 삶을 지배하죠. 차 안에 있는 것이 내게 필요한 전부라는 현실을 맞닥뜨리고 나니, 사실 갑자기 신나는 기분이었죠.” 그녀는 목숨은 건졌지만, 첫 번째 지진 후 아트센터에서 해고되었다. 출장 가는 남자친구를 따라간 웰링턴의 거리에서 “I Love Christchurch” 포스터를 보고선참을 수 없어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갭 필러의 아이디어는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서 솟아났다. 실직 후 한 달 반 만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모든 것이 부정적이었던 상황에서 갭 필러는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단 하나의 기회였다. 함께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초기 멤버인 라이언 레이놀즈Ryan Reynolds나 앤드류 저스트Andrew Just와 달리 갭 필러에서 코랄리 윈이 항상 중심적인 역할을 맡은 이유는, 다른 정규직 일을 하고 있던 두 사람과 달리 오직 갭 필러에만 매진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갭 필러 설립 후 약 1년간 그녀는 무보수로 아침 7시부터 자정까지 거의 매일 일했다. 2011년 8월, 갭 필러는 드디어 크라이스트처치 시청으로부터5만 달러의 지원금을 받게 되었다. 현재 갭 필러는 6명의 유급 직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갭 필러의 중요한 역할은 버려진 도시 공간을 사용하는 데 갖가지 걸림돌을 제거하는 일이다. 법적인 난관과 책임 보험 등 시민들에게 생소한 어려운 절차들을 해결해 줌으로써 아이디어를 샘솟게 하고 현실화되게 돕는다. 갭 필러의 프로젝트가 주장하는 것은, 굳이 큰 예산의 공공 사업이 아니더라도 작은 시민 활동을 통해 실질적으로 사람들의 상처가 치유되고 동시에 도시의 성장 방향이 제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작은 프로젝트라고 모두 쉽게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실망스럽기도 하고 기대했던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코랄리 윈이 말하는 바는, 직접 해 보지 않으면 생각, 짐작, 대화만으로는 어떤 것이 성공하고 어떤 것이 관심을 끌지 알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다. 길을 아는 것과 실제로 걸어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기에 실패한 프로젝트 또한 나름대로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 갭 필러가 효과적인 것은, 이러한 실패가 비교적 적은 자본과 시간 투자로 진행되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시행되는 커다란 시행착오와 달리 재빨리 실패의 교훈을 흡수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진행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공공 정책적 측면에서 보면, 갭 필러는 일종의 길잡이 프로젝트로서의 성격도 가진다. 최근 조경 계획과 설계에서 대형 자연 재해와 각종 사회적 재난에 대비한 효과적인 대응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예방도 중요하지만, 많은 경우 재난은 제도적 준비를 무색하게 하는 압도적인 규모로 닥쳐온다. 그중 하나가 지진이다. 한반도는 그간 지진 안전지대로 인식되어 왔지만 상식을 뒤엎는 각종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크라이스트처치는 뉴질랜드 남섬의 중심 도시로서, 관광지일 뿐만 아니라 지역 산업과 문화의 구심점이 되어 왔다. 6개월 간격으로 일어난 두 차례의 지진은 도시 전체를 사실상 폐허로 만들었다. 살아남은 상당수 건물 또한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사용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일시에 발생한 대규모의 잔해, 공터, 그리고 충격적인 기억들은 대부분의 젊은이를 떠나게 했고, 일상적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제한된 인프라와 자본 탓에 복구와 재건은 수 년, 길게는 수십 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운 좋게 일자리를 유지하고, 삶터를 지키고자 도시에 남은 이들에게도 광대한 면적의 공터와 폐허 지역은 그날의 아픈 경험을 환기시키는 상처가 되고 있다. 갭 필러는 예술, 조경, 건축적 개입을 통해 사람들 사이에 다시 웃음을 가져오고 새로운 모습의 도시에 대한 희망을 열고 있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 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 전시해 왔다.
여성 친화적 공원
새로운 공원 문화 최근 새로운 공원 문화에 대한 논의들이 활발하다. 그런데 공원 문화가 무엇인지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 했다. 공원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인지, 공원이 갖춰야할 요소인지, 공원의 분위기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공원이 어떤 곳이면 좋겠다는 생각은 분명하다. 공원이라 하면 초록이 흐드러진 풀밭과 나무, 이름모를 꽃과 벌, 나비, 곤충이 나풀거리고, 그 사이로 따뜻한 햇살이 흐르고, 일상의 노곤함을 달래며 유유자적한 걸음을 옮길 수 있는 길들이 어우러진 싱그러운 자연의 공간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자연의 축복을 받은 공간, 자연을 폭탄 투하한 공간…. 그런데 그런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하게 하는 건 그곳을 즐기고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빠의 손을 부여잡고 깡충깡충 거리는 아이들, 유모차를 미는 부부, 휠체어에 의존한 장애인들, 삼삼오오 친구를 동반한 노인들, 데이트를 즐기는 청춘들, 조깅을 하는 나 홀로 운동인 등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공원을 찾는다. 공원엔 사람이 있다. 그래서 공원이다. 풀과 나무만 있다면 그곳은 그냥 숲이다. 자연이라는 환경에 사람의 숨결과 활동을 불어넣기에 공원은 더욱 가치 있는 공간이 되는 것 같다. 도시 공원은 더욱 그런 듯하다. 도시의 삭막함 속에서 사람들은 공원에 가면 뭔가 편안하고 싱그럽고 막힌 숨을 쉬게 해 줄 것 같은 그런 기대감이 있다. 갑갑한 숨을 토해내고 자연으로부터 위안을 얻고 삶을 치유하는 등 공원은 사람들의 욕구가 결집되고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 도시민이 공원에 열광하는 이유일 것이다. 공원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연구자로서의 숙명이었지만 그 가치를 빛나게 한 것은 공원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바람과 공원을 이용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욕구에 불을 지핀 것이 사람 중심의 공원을 이야기한 필자와 하야리아공원포럼의 역할이었던 것 같다.1 공원에서 사람을 찾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전의 공원이 공원을 만드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나무를 심고 숲을 만들어 사람들이 이용하도록 제공하는 수준이었다면, 지금의 공원은 단순한 자연 공간의 개념을 넘어 사람들이 모이고 즐기고 공유하고 교류하는 활동의 장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다. 공원은 있는데 이용하기 어렵고 즐길 수 없다면 그 공간은 공원이 아니라 수목과 조형물의 전시 공간에 불과하다. 이제 사람들은 그런 공원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스스로 참여하여 즐기고 싶어 하고, 함께 만들어 가고 싶어 한다. 결국 이러한 생각들이 새로운 공원 문화를 창출하는 힘이 될 것이다. 공원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과 공원에서 얻고 싶은 다양한 요구들, 공원을 통해 느끼고 싶은 크고 작은 만족감들로부터 또 다른 문화가 시작되지 싶다. 여성과 가족을 고려한 공원의 도시·사회적 역할 공원을 보는 또 다른 시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문은 공원의 여성 친화성과 가족 친화성이다. 『부산의 꿈』과 『부산시민공원조성사업 성별영향평가』를 통해 설명한 바 있지만 이 글의 독자를 위해 간단히 소개를 하겠다.2008년 당시 여성 친화적 공원 조성은 성 평등 정책분야에서는 상당한 이슈가 되었다. 2007년 서울의 ‘여성이 행복한 도시 프로젝트’, 일명 ‘여행프로젝트’에 자극을 받아 공원에서도 성별의 고려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개진되기 시작했다. 마침 부산은 2008년 ‘부산시민공원 조성사업’의 기본계획을 수립했고 그에 대한 성별 영향을 분석하여 고려할 사항을 점검하는 성별영향분석평가 연구가 진행되었다. 공원 조성에 ‘여성·가족 친화성’이라는 변수를 넣어 생각해 보면 공원은 아주 다른 모습으로 조성될 수 있다. 공원은 여성 혹은 남성 그리고 가족이 이용하는 공동의 공간이다. 그런데 여성의 요구와 남성의 요구를 얼마나 고려하고 있을까? 또 얼마나 가족 중심일까? 엄마만 공원에 아이를 데려 가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발생하고, 이혼 가족과 한 부모 가족이 증가하는 추세에 여자아이를 데리고 혼자 공원에 온 아빠는 유아 변기가 없고 기저귀 갈이대가 없는 남자화장실에서 상당한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 남자아이를 데리고 혼자 온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들에게 공원은 즐거움의 공간이 아니라 또 다른 소외감을 느껴야 하는 공간일 수도 있다. 홍미영은 부산대학교에서 행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부산여성가족개발원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여성가족부 성별영향분석평가센터장을 맡고 있다. 관심 분야는 정책의 성별영향분석평가, 지방재정 및 성 인지 예산 분석, 도시 정책의 여성 친화성 등이다.최근 논문으로는 “도시공원의 여성친화성 평가를 위한 탐색적 연구”,“지방정부 성 인지 예산의 도입과 발전방향에 관한 연구”가 있으며, 공저로 『부산의 꿈』이 있다.
진화하는 시민운동과 도시 공원
팽팽한 줄다리기였다. 미국 정부와 부산 지역 시민단체 사이에서였다. 100여 년 동안 일본과 미군이 점령했던 하야리아 미군 기지의 국내 반환을 두고서였다. 결국 한국과 미국 정부의 협상 결과 하야리아 미군 기지 철수와 이에 따른 반환이 결정됐다. 땅을 다시 빼앗아 올 때는 시민의 여론이 뜨거웠다. 공원으로 조성하자는 취지도 좋았다. 하지만 과연 되찾은 땅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후대에 어떤 역사적 의미로 남겨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못했다. 하야리아 미군 기지 반환과 공원 조성 결정, 공원 조성계획의 변화와 개장에 이르는 20년 역사는 시민사회단체의 변천사이기도 하다. 몇 단계로 나눌 수 있다. 미군 기지 반환 및 공원 조성 운동, 지원 특별법 제정 및 무상 반환, 공원 조성 및 운영에의 전문가 참여와거버넌스governance가 그것이다. 미군 기지 반환 운동: 1993~2004년 진보 진영을 중심으로 한 하야리아 땅 되찾기 운동이 시작이다. ‘부산 땅 하야리아 되찾기 시민 대책위’ 등이 그 주인공이다. 1993년 문민 정권 시대였지만, 여전히 미국과 주한 미군에 대한 반대라는 정치적 부담을 무릅쓴, 시대를 앞서간 판단이었다. 대책위는 하야리아 반환 원년 선포 대회, 주한 미군 항의 서한 전달 등 다양한 방식으로 반환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시민사회단체 운동의 핵심은 일본과 미국에 빼앗겼던 우리 땅을 되찾자는 맥락이었다. 1997년 당시 범시민추진위원회 김희로 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무상으로 사용 중인 우리 땅을 쉽사리 내놓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며 “한국 정부가 대등한 위상에서 반환 협상을 벌여나갈 수 있도록 압력을 행사하겠다”고 천명했다. 1990년대 초반에 씨를 뿌린 하야리아 미군 기지 철수운동은 1993년 이후 본격적인 반환 및 공원 조성 운동으로 전환된다. 시대적 흐름의 변화에 따라 진보적 사회단체 중심으로 제기된 ‘미군 철수’라는 정치적 구호가 ‘우리 땅을 되찾자’는 대중적 구호로 바뀌기 시작했다. 한 걸음 나아가 외국 군 기지에 ‘생명과 평화의 터전으로서 공원을 조성하자’는 시민사회운동으로 바뀌었다. 그 주인공 중 한 명이 ‘하야리아 부지 시민공원추진 범시민 운동본부’ 허운영 공동운영위원장이다. 그는 1993년 민주주의민족통일 부산 연합 시절부터 미군 기지 반환 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해 1999년 통합 ‘미국 점유 부산 땅 되찾기 시민 대책위’를 거쳤다. 허운영은 2005년 “시민사회단체가 반환 운동에 급급해 하야리아가 가지는 상징성, 즉 상像의 정립을 적극적으로 제안하지 못했는데, 어떤 내용성을 담보할 것인지, 공원의 실질적인 내용을 둘러싼 논쟁이 앞으로 치열하게 벌어질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이어서 “하야리아 부대를 정치적인 시각에서만 바라볼 게 아니라 역사·환경·문화·생활 교육적인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밝혔다. 공원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표면 위로 고개를 내미는 순간이다. 특별법 제정과 무상 반환 운동: 2004~2006년 하야리아 기지의 폐쇄 결정 이후 부산시와 시민단체는 중앙 정부에 기지의 무상 반환과 특별법 제정 촉구를 요청했다. 2004년 시민사회단체들은 ‘하야리아 부대부지를 시민 공원화하기 위한 범시민 운동본부’를 발족했다. 당시 공원추진본부에는 ‘미군 점유 부산 땅 되찾기 범시민 추진위원회’ 등 부산 지역 76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했다. 공원추진본부는 단기적으로는 국방부로부터 부지를 무상 양여받고 부지를 도시 환경과 녹지 등을 고려한 시민공원으로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후 오염 조사 및 복원을 촉구하는 지난한 싸움에 나섰다. 하야리아공원포럼과 공원 콘텐츠: 2009년 이후 문제는 기지의 반환 이후였다. 공원 조성이 결정되고 설계가 시작됐지만 관계자는 물론이고 시민과 부산시조차 미군 기지 안에 어떤 건물이 남겨져 있으며, 어떤 것을 보존해야 하는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부산시는 ‘세계적인 명품 공원을 만든다’는 구실 하나로 ‘국적 없는 공원 설계’, ‘토목 중심의 행정 편의주의’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부대 주변에는 ‘시민공원 주변 뉴타운’이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초고층 주거단지가 계획됐다. 이대로라면 하야리아 시민공원은 좁은 지역의 근린공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단절된 공원이 될 게 뻔했다. 부산시는 2010년 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착공을 서두르는 모습까지 보였다. 부산시는 공원 운용 방안과 프로그램은 공원을 조성한 뒤에 고민하겠다는 입장이었다. 누가, 왜, 어떻게 공원을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공원 설계와 조성 과정에 전혀 반영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이병철은 1967년생으로 부산 출신이다. 서강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공부하고 이후 미국 미주리 대학교 저널리즘스쿨과 미국탐사보도기자협회 연구원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부산 동의대학교에서 저널리즘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2년부터 부산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도시와 환경에 대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한국기자상과 봉생문화상, 일경언론상 등 다양한 언론상을 수상했고, 저서로는 『백산의 동지들』, 『황령산온천반대보도백서』, 『부산의 상권』, 『아빠는 생태박사』,『CAR 데이터베이스로 취재하기』, 『세상을 깊게 보는 눈』 등이 있다.
‘공원 도시 서면’을 꿈꾸며
2005년의 제안 10년 전 필자는 캠프 하야리아의 공원화 방안에 대한 발표 기회를 두 차례 가졌다. 당시 H공원(캠프 하야리아에 대한 가상의 공원) 조성은 부산의 새로운 도시 자본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규정하고, ‘서면에 있는 H공원’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H공원이 있는 서면’이라는 시각으로의 확대와 전환을 요청했다. ‘도시와 자연이 공생하는 도심urban core in harmony with nature’이라는 핵심 개념 속에서 H공원을 중심으로 주변의 자연자원, 단절된 동천 등과의 연계를 통해 백양산에서 북항까지 모두를 잇는 3가지 ‘파크웨이park way’ 개념을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그린 네트워크는 백양산에서 황령산으로 이어지는 생태적 도심 녹지 축선 상에서 끊긴 구간들을 연결하는 것으로, 백양산의 녹지를 H공원으로 끌어 오고 또 H공원의 녹지를 서면과 도심 너머의 황령산으로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블루 네트워크는 복개와 인공화를 통해 원 기능을 잃어버리고 단순한 하수 처리 공간으로 취급되고 있던 동천의 복원을 제안한 것이었다. 백양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들은 H공원을 거쳐 서면을 지나 북항에 이르게 하고, 사람들과 각종 생물들이 맘대로 다닐 수 있는 산에서 바다로의 물길을 열자는 생각이었다. 마지막 옐로우 네트워크는 H공원이 서면과 불과 700~800m 떨어져 있다는 입지 조건에 착안한 것으로, 서면로터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상업 지역의 활력을 H공원과 보행으로 다양하게 연결하여 단일 활동권으로 통합하자는 제안이었다. 이러한 개념의 전개를 위해서는 ‘공원’의 고유 영역에 대한 파괴가 전제되어야 하며, 특히 조경을 넘어 도시, 건축 등 관련 분야와의 친밀한 조우를 위한 공공 정책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H공원과 서면의 유기적인 관계 형성을 통해 지역 쇄신을 도모할 수 있는 여러 방안을 공원부, 경계부, 외연부로 구분하여 제안했다. 2014년의 상황 10년 전의 논제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당시의 제안 중 공원부의 설계와 시공과 관련된 것을 제외한 대부분의 것들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부산시민공원은 온통 회색빛으로 둘러싸여 있다. 부산시민공원이 도심 공원으로 제대로 작동하려면 공원이 주변의 회색빛 콘크리트를 뛰어넘거나 품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부산시민공원=고립된 녹색 섬’이 아니라, 주변 가로변과 블록 내 골목길들, 고가도로와 철도 시설들, 넓은 대로와 공공 시설들과 함께 공원이 호흡하며 역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방법 찾기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부산시민공원이 있는 서면 일대는 광복동과 함께 부산의 지역 경제와 문화를 이끌고 있는 부산의 대표적인 도심이다. 바다와 맞닿은 광복동의 역할과 달리, 서면은 ‘내륙 도심 활력의 확산점이자 결집점’으로 역할해 왔다. 하지만 서면의 환경은 온통 인공적이고, 고개만들면 보였던 산들도 건축물 틈새로 산정만 겨우 보일뿐이다. 서면을 맑게 흐르던 동천은 코를 잡고 걸어야 하는 도시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했고,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던 5개의 지류(호계천, 부전천, 전포천, 가야천, 당감천)는 모두 복개되어 현재 남은 동천은 단지 2.6킬로 미터에 불과하다. 이러한 서면의 환경 변화사는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시작되었다. 부전역을 지나 부산역으로 가는 철길과 연접했던 캠프 하야리아는 서면을 서면로터리를 중심으로 하는 남쪽과 캠프 하야리아 주변으로 하는 북쪽으로 양분시켰다. 철길과 군부대는 서면의 상업 활력을 차단했고 백양산에서 흘러내리던 녹지 흐름도 끊어버렸다. 이러한 막히고 단절된 상황 속에서 백 여 년의 세월이 지난 것이다. 결국 지역의 퇴락과 정체를 낳았고, 철도와 군부대로 단절된 서면의 북쪽은 불균형하게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서면과 같은 도심은 땅이 무척 귀하고 풍요로운 곳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크고 웅장해서 풍요한 것 같아 보이면서도 그 이면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경관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취약한 곳이 도심이다. 서면 일대는 우리나라 대도시의 도심 중 그 취약성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곳 중 하나다. 좋은 도심에서 느낄 수 있는 창의적 힘과 활력이 거의 없다. 부산 시민 스스로도 서면은 그저 그런 모습으로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해운대와 광안리에 매달리고, 낙동강에 허황된 에코델타시티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강동진은 성균관대학교에서 건축학을 공부하였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와 역사 경관에 대한 꿈을 키웠다. 현재 경성대학교도시공학과에서 자연, 문화, 역사, 경관 등을 키워드로 하는 ‘도시 재생작업’을 통해, 학생들이 도시재창조에 대한 꿈을 키워갈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하고 지도하고 있다. 특히 버려지거나 황폐해 가는 도시 유산들(산업유산, 근대화유산, 역사마을 등)을 지키고 힘을 싣기 위한 방안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더불어 캠프 하야리아 부지의 시민공원화를 위한전문가 그룹인 ‘하야리아공원포럼’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부산시민공원 설계 이슈의 변천
도심 공원을 비롯한 도시 공공 공간은 시민 가치의 표상이고, 그 설계안은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의 다양한 욕망과 가치의 역학이 작용한 결과이다. 따라서 공공공간의 설계 작업은 최종적인 계획안의 내용보다 그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의 가치가 소통되고 합의되는 과정을 어떻게 반영하였느냐에 의해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 과정을 통하여 시민들은 타자의 상이한 가치와 기준들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그에 대한 담론 참여와 다양성 공유를 통하여 공공 공간을 공동체 공간으로 수용하게 된다. 이 글의 목적은 부산시민공원 설계 이슈의 변천을 살펴봄으로써 공원 조성에 있어서 설계의 역할과 구현된 공공 공간으로서의 위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설계 이전 상황: 2005년 5월 이전 부산시민공원은 조성 그 자체가 커다란 정치적 과제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원만한 합의를 통하여 부지를 돌려받고, 마치 당연한 듯 이곳에 공원이 들어섰지만, 그 과정은 쉬운 여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부터 미군 부대로 이어진 약 100여 년 동안 시민들에게 금단의 땅이었던 이곳의 주권을 회복하는 일이었고, 도심의 요지에 남아있는 군부대 이전적지를 다른 용도가 아닌 공원으로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시민운동의 결과였다. 그 과정에서는 부지 반환과 환경 치유 협상과 같이 국내 최초의 선례를 남기는 국가적 과제를 해결해야 했고, 개발 비용 부담을 이유로 공원 외 다른 용도로 개발하려는 정부와 개발업자들과의 정치경제적 문제를 넘어서야 했다. 이러한 상황으로 시민들이 부지반환을 제기한 1980년대 후반부터 개장까지는 25년 이상의 긴 기간이 소요되었다. 기본 구상안 작성: 2005년 5월~2006년 12월 초기 부산시민공원 조성은 정치 경제적 이슈들이 장악하였다. 설계는 부지 반환과 무상 양여 주장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수단으로, 2005년 5월 ‘기본 및 실시설계용역’을 발주하며 시작되었다. 당시로서는 부지가 반환되기 전이라 대상지에 대한 조사가 불가했기에 백지에 개념을 구상하는 수준이었다. 공원 설계를 마치토목 공사 수준으로 성급하게 발주하여 선정된 설계사는 만족할만한 계획안을 작성하지 못했고, 몇 달 후 용역 안에서 ‘시민공원 국제공모전’이라는 또 다른 형식을 통하여 계획안을 공모하는 이상한 설계 과정이 시작되었다. 국내 6개 업체가 지원한 첫 공모전에서는 당선작을 선정하지 못하여 설계 용역이 중지되었고, 이듬해 다시 국제 제안공모전을 개최하여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를 선정하고, 소위 ‘세계적인 명품 공원’ 설계를 의뢰하게 되었다. 결국 100여년 외세가 점유했던 땅의 설계 역시 외국인에게 의존하는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문제는 누가 설계했느냐가 아니라 선정된 설계안의 내용이었다. 대지에 대한 아무런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시민과의 소통이 부재했던 2006년 11월, 설계자는 대상지에 대한 4개(구획(안), 주머니(안), 펼침/접힘(안), 물결(안))의 지극히 추상적인 개념을 제시하였고,위원회는 이 중 ‘물결(안)’이라고 불리는 구상안을 설계안으로 확정한다. 당시 회의록엔 결정 사유를 ‘한국적인 이미지가 부여된 물결(안)에 대다수가 동감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목할 만한 사항은 그 회의에서 기본구상안의 후속 조치로 공원 프로그램을 선정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즉 이곳에 무슨 공원을 어떻게 만들지 보다 세계적인 조경가가 그린 멋진 조감도가 먼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시는 그 기본구상안을 원래의 한국 용역사에게 그대로 실시설계로 옮길 것을 지시하여, 2008년 2월 기본 및 실시설계 용역을 완료한다.그때가 부지가 개방되기 2년 전이었다. 김승남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환경대학원을 졸업한 뒤, 독일 카이저스라우터른 대학에서 건축 및 도시설계, 조경을 전공했다. 영화 연출, 시나리오 작가, 프로젝트 매니저 등 영화, 건축, 도시 분야의 다양한 경력을 거쳐 현재 일신설계 종합건축사사무소 사장이자 동아대학교건축학과 겸임 교수이다. 이밖에도 광안리사람들(공동대표), 지역문화지 『안녕광안리』, 부산도시학교, 하야리아공원포럼, 부산공공건축포럼,도시건축포럼B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부산신항배후 국제산업물류도시 도시개념공모와 행정복합도시 중앙오픈스페이스 국제현상공모 등에서 당선된 바 있으며, 부산시 경제기반형 도시재생계획, 산복도로 르네상스 마스터플랜 등 다양한 조경 및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수행하고있다.
부산시민공원
다시 시민의 품으로 시민공원이 위치한 범전동 일대는 선사시대부터 주거가 이루어질 정도로 농경지가 발달하여 근대에 이르기까지 농토로 이용하던 지역민의 삶의 터전이었다. 그러나 1930년, 당시 부산의 외곽 지역이었던 이곳에 일제에 의해 들어선 경마장은 삶의 터전을 앗아 갔고,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병참기지화 되어 군사 시설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캠프 하야리아는 한국전쟁 종전후 설치되어 물자와 장병의 이동을 관리하는 대한민국 최대 군수 기지 역할을 하였으며, 2006년 폐쇄되기까지 50여 년간 인근 지역의 도시개발 및 생활권 기능형성에 있어서 저해 요소로 작용했다. 더욱이 도시가 확장되자 도시 외곽에 자리했던 부지가 도심에 놓이게 되면서 철거 논의를 비롯한 다각적인 검토가 이루어졌다. 특히 슬럼화된 군 기지 주변 지역의 생활권 기능 회복과 더불어 센트럴 파크와 하이드 파크 등과 같이 도심 오픈스페이스 확보를 통한 도시의 질적인 발전을 위해 공원화를 모색하게 되었다. 결국 2004년 근린공원으로 최초 결정되었고(300,000m2), 주변 낙후 지역의 재정비 촉진 계획과 맞물려 부지 정형화 및 조정을 거쳐 현재의 시민공원 부지로 결정(470,748m2),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기본 구상 시민공원에 대한 기본 및 실시설계는 유신으로 결정되었으나, 시민공원의 중요성과 상징성을 감안, 전문가 자문 및 공청회 등을 거쳐 인지도가 있는 해외사 중 참여 의사가 있는 설계사무소를 선정하여 지명 현상을 실시하였고, 그 결과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의 ‘얼루비움ALLUVIUM’ 안이 선정되었다. 해외사의 기본구상(안)과 더불어 민관협치기구인 라운드테이블round table이 구성되어 시의원, 언론인, 시민운동가, 조경 전문가, 장애인 등 30여 명의 전문위원을 통해 각계각층의 다양한 의견을 공원 조성에 반영하였다. 얼루비움은 부산의 지리적 위치에서 시작한다. 비옥한 낙동강 하구의 삼각주 충적지에 위치하여 번성한 땅의 역사를 되새겼으며, 얼루비움이 갖는 의미와 가능성을 통해 3개의 공간 주제와 5개의 활동 주제를 설정하여 새로운 의미의 공원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3개의 공간 주제: 흐름, 쌓임, 연결 충적지는 하천의 흐름flow과 토양의 퇴적accumulation으로 형성되며, 강과 바다가 연결connectivity된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하야리아 미군 부대가 주둔해온 지난 한 세기 동안의 대상지는 적체된 공간이었다. 얼루비움은 막혀있던 도시의 흐름을 뚫어주고 갇혀있던 하천의 흐름을 되살리며 단절된 녹지의 흐름을 회복할 것이다. 유기적이고 역동적인 동선 체계는 부지 주변에 위치한 공원, 문화 시설, 상업 시설, 도시 기반 시설 간의 원활한 흐름과 연결을 가능하게 한다. 부지 내에 복개되어 있던 부전천과 전포천은 생태적으로 복원되어맑은 물로 다시 흐르게 될 것이며 잘려나갔던 화지산과 황령산의 녹지축은 공원 내를 가로지르는 넓은 폭의 숲길들에 의해 다시 회복될 것이다. 대상지에는 부산 시민들이 잊지 말아야 할 아픔과 질곡의 역사가 쌓여 있다. 얼루비움은 이러한 과거의 역사 위에 새로운 미래의 기억을 쌓아갈 것이다. 시민 공원은 새로운 기운이 흘러들어와 기억과 문화, 즐거움과 자연, 그리고 시민의 참여가 쌓이는 모든 사람에게 열린 공간이 될 것이다. 이러한 쌓임의 의미는 지형의 쌓음이라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시작된다. 미세한 지형의 쌓음을 통한 조형적인 대지 조작은 거대한 공원 부지를섬세한 휴먼스케일의 복합 공간으로 변모시킬 것이다. 공원 안팎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위계와 규모의 동선체계는 공원 구석구석을 감아 돌며 모든 이에게 최적의 접근성을 제공한다. 공원 내부를 도는 순환 동선은 단차 없이 완경사로 조성되어 모든 이들이 불편 없이 공원 곳곳을 감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5개의 활동 주제: 기억, 문화, 즐거움, 자연, 참여부산시민공원은 기억, 문화, 즐거움, 자연, 참여 5개의 주제 숲길과 그 사이사이 공원 안팎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보조 동선으로 공간을 구획하고 또 유기적으로 연계하였다. 총괄 및 조경설계 유신(유만재 전무, 김석기 이사, 정규현 과장) 기본 구상 James Corner Field Operations(James Corner, 정재윤) 토목 설계 길평(박기만 사장, 윤회철 이사, 김세훈 부장) 시공 화성산업 감리 유신, 길평 발주 부산광역시 위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시민공원로 73 (범전동) 공원 면적 470,748m2 완공 2014. 유신은 1966년 1월 설립된 이후, 꾸준히 성장하여 대표적인 엔지니어링 컨설팅 회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유신 레저조경부는 1980년대 중반 88골프장 기본 및 실시설계와 감리를 시작으로, 보광 휘닉스파크 리조트, 강원랜드스키장 턴키, 서대전 대중골프장, 운북 복합레저단지, 하이원 스위치백 리조트, 평창동계올림픽 슬라이딩센터(봅슬레이, 스켈레톤, 루지경기) 턴키 등 다양한 레저 관련 계획, 설계 업무 및 월드컵공원, 송도 국제업무단지 중앙공원, 연인산 도립공원 턴키 등 조경 계획 및 설계 분야에서 많은 실적과 노하우를 축적해 왔다. James Corner Field Operations는 뉴욕에 기반을 둔 도시설계와 조경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디자인 오피스다. 대규모 도시설계 프로젝트나 포스트 인더스트리얼 사이트부터 작지만 섬세한 디테일을 요구하는 디자인까지 다양한 규모의 작업을 수행하고 있으며, 주요 작품으로 뉴욕시의 하이라인과 프레시 킬스, 라스베이거스의 시티 센터, 중국 칭하이 지역의 도시설계 마스터플랜, 시애틀 워터프론트의 마스터플랜, 필라델피아의 레이스 스트리트 피어, 산타모니카의 통바 파크, 런던의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 파크, 홍콩의 침사추이 워터프론트 등이 있다. 모든 설계 실천에 있어서 사람과 자연의 생태를 연구하고, 생기 넘치고 역동적인 공공 영역 디자인을 구현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부산시민공원의 조성 과정
일본군과 미군이 사용하다 100여 년 만에 시민 품으로 돌아온 부산시민공원의 개장식이 지난 5월 1일 열렸다. 473,000m2 부지는 일제강점기 때에는 일본인들이, 한국 전쟁 이후에는 미군이 사용하다 2010년 1월 13일 부산시에 반환됐다. 총사업비 6,679억 원의 예산으로 2011년 8월 공원 조성에 착공하여 이번에 준공한 것이다. 축구장 74개 규모의 공원에는 기억·문화·즐거움·자연·참여의 숲길 등 5개의 ‘테마 숲길’이 조성되고 2개의 하천이 복원되었다. 공원에는 150여 종 100만여 그루의 각종 나무가 식재됐다. 특히 참여의 숲 34,987m2에는 시민들이 헌수한 10억여 원상당의 나무와 초화류 등 6만여 그루가 심어졌다. 하야리아Hialeah는 미국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 북서쪽에 있는 도시 이름으로 인디언어로 ‘아름다운 초원’이라는 뜻이다. 하야리아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50년 9월 주한 미군 부산 기지 사령부가 주둔할 당시 초대 사령관의 고향인 베이스 하야리아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에는 주택 133동을 비롯하여 사무실, 창고, 다용도 건물 등 338동, 연면적 89,331m2의 건물이 있었으며, 향나무 1,096주 등 4,700종이 넘는 수목이 있었다. 부산시민공원의 조성은 2006년 2월 부산시가 공원 조성 설계추진계획, 주변 지역 정비개발계획, 반환공여지 인수절차 이행계획, 캠프 하야리아 부지 반환과 관련한 시 조례 제·개정 등에 관한 로드맵을 담은 ‘부산시민공원조성 종합추진계획’을 확정, 발표하면서부터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공원의 조성과 함께 주변 지역에 대해서도 종합계획을 수립하여 공원의 조성과 주변 지역의 연계 개발을 추진하였다. 이때부터 프로젝트 코디네이터의 역할로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의 대강을 정리해 보았다. 지난 8년 동안 공원 조성과 관련하여 일어났던 일들을 종합해 보면 부지 정비 및 기반 조성, 기본계획수립 및 설계 보완, 공원 조성 사업, 시민 참여 및 관련연구, 기타 관련 계획 및 사업으로 대별된다. 부지 정비 및 기반 조성 2010년 1월 13일 부산시는 부지의 관리를 인수하였다. 그리고 인수받은 부대의 관리를 전문 업체에 위탁하고 지장물 철거 공사와 환경 오염 정화 사업, 문화재시굴 조사, 전포천 공사, 공원 설계 용역 및 주변 지역재정비촉진지구 기본 및 실시설계 용역 등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2010년 4월 24일부터 10월 31일까지는 부지를 시민들에게 개방하였다. 6개월 동안의 개방 기간 중에 총 13만 8천여 명의 방문객들이 부지를 찾아 1일 평균 700여명이 방문하였다. 당초 9월 말까지만 개방하기로 하였지만 시민들의 반응이 좋아 1개월 연장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지장물 철거 작업, 전포천 복원 공사, 환경 오염 정화 사업 등 선행 공사의 본격 시행으로 안전사고 우려 등의 문제가 제기되어 부지 개방을 종료하였다. 2010년 12월부터 지장물 철거 사업이 이루어졌다. 이 사업을 통하여 건축물 315동, 석면 247동, 지중폐관 7,850m 등이 철거되거나 제거되었다. 그리고 건설폐기물 125,973톤, 폐아스콘 32,100톤, 소각폐기물 12,507톤, 지정폐기물 569톤도 함께 처리되었다. 2011년 4월에는 환경 오염 정화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보다 1년 전인 2010년 4월 부산시와 국방부는 환경 오염 정화 위ㆍ수탁 협약을 체결하였는데, 국방부는 환경 오염 정화 사업 설계용역을 진행해 왔기 때문이다. 조사를 통하여 유류와 중금속 등이 50,234m2 면적에 73,468m3(중복 고려 시)인 것으로 파악되었는 데, SK건설 등이 참여하고 한국환경공단이 감독하여 2012년 7월까지 진행되었다. 오염 정화 사업은 토양 경작법(유류 오염토)과 토양세척법(중금속 오염토) 등을 적용하여 시행하였다. 사업 도중 22,477m3의 추가물량이 발생하여 최종적으로 95,945m3의 오염토와 35,500m3의 지하수를 처리하였다. 한편 2011년 2월부터 11월까지는 문화재 발굴 조사가 총 119,989m2에 걸쳐 실시되었다. 이 조사를 통하여 청동기 시대 지석묘를 비롯하여 총 298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다수의 미분류 토도편이 나왔다. 조사 구역 내 확인된 주요 유구는 공원 내 역사관 및 숲길에 전시ㆍ홍보하기로 하였다. 기본계획 수립 및 설계 보완 2006년 5월 부산시민공원의 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제안서 공모를 실시하였다. 미국의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이하 JCFO)와 하그리브스 어소시에이츠Hargreaves Associates, 일본의 다카노 랜드스케이프 플래닝Takano Landscape Planning 등이 응모하였으며 심사 결과 JCFO의 안이 선정되었다. JCFO는부지 반환식에 참석하는 등 자료를 수집하고 실시설계사인 유신과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며 설계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부산시와 시민단체 등은 여러 차례 공청회, 토론회, 자문회의 등을 개최하여 의견을 수렴하였다. 2007년 3월 최종적으로 제출된 기본계획안의 제목은 얼루비움Alluvium으로서 비옥한 새 기운이 흐르고 쌓이는 21세기 부산의 새로운 도시 공원 조성을 목표로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세계 도시 부산을 향한 공원, 미래를 향한 공원, 모두를 향한 공원, 문화가 있는 공원, 도심 재생을 촉진하는 공원을 담고자 하였다. 디자인적으로는 흐름과 쌓임으로 형상화되는 얼루비움의 층위구조를 통해 대규모의 공원을 조직적으로 엮어 내고자하였다. 단편적인 지역적 연차 개발phasing이 아닌 지속적인 수평적 층위 개발을 지향함으로써 부산시민공원이 지닌 장소적 특수성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부지 내의 지하 공간 및 이와 연계된 도시 기반 시설의 개발, 공원 표면의 모든 공간 구성의 바탕이 되는 조형적 정지 작업, 이용자들의 접근성을 보장해 주는 동선 체계의 구축, 향후 프로그램의 설치 및 개발의 방향을 결정하는 공간 주제의 설정 등이 얼루비움의 층위 구조를 이루었다. 이유직은 부산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부산의 미군 기지인 하야리아의 부지를 공원화하는 작업의 프로젝트 코디네이터로, 거창군 창조 도시 총괄계획가로 활동하고 있다. 마을만들기와 농촌 조경에 관심을 두고 현장에서 지역 재생과 커뮤니티 활성화를 위한 조경학적 실천을 모색하고 있다.
캠프 하야리아의 새로운 이름, 부산시민공원
2014년 5월 1일 부산시민공원이 공식 개장했다. 첫날에만 10만 명의 시민들이 다녀갔다.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처음 생긴 대규모 평지 공원, 부산 시민들은 도시 공원이란 존재 자체만으로도 반기는 분위기다. 2004년 미군 기지인 캠프하야리아 부지의 용도가 ‘근린공원’으로 결정되고 2006년 기지가 폐쇄된 지 10년여 만에 탄생한 공원이다. 정치 경제적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주한 미군 기지 이전 부지를 공원화하는 과정은 지난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성급하게 진행되면서 해외 조경가의 설계안에 대한 논란, 역사 문화 유산 보존과 공원 프로그램 문제, 거버넌스 방식 등 여러 가지 차원의 이슈를 생산해 왔다. 그 과정에서 도출된 키워드들은 도시 공원의 역할에 대한 다양한 담론을 형성했으며, 공원을 둘러싼 여러 주체들의 변화를 끌어내기도 했다. 이번 기획은 그 모습을 드러낸 부산시민공원을 소개하는 동시에 그간 제기되어온 이슈도 함께 점검해 보고자 한다. 부산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용산공원과 같은 미군 기지의 공원화에 시사점을 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기회가 되리라 기대한다. 더불어 부산이라는 도시에서 새로운 공원 문화를 만들어갈 시민 공원으로서의 가능성을 다각도로 검토해 보고자 한다. 부산시민공원의 탄생에 힘써온 부산의 여러 전문가들은 공원의 개장을 맞아 비판과 지지를 동시에 요청했다. 공원에는 ‘완성’이 없고, 부산시민공원은 이제 그간의 교훈을 밑거름 삼아 ‘공원 문화’를 만들어갈 출발점에 섰기 때문이다. 1. 부산시민공원의 조성 과정 _ 이유직(부산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2. 부산시민공원 _ 유신+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 3. 부산시민공원 설계 이슈의 변천 _ 김승남(일신설계 종합건축사사무소 사장) 4. ‘공원 도시 서면’을 꿈꾸며 _ 강동진(경성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 5. 진화하는 시민운동과 도시 공원 _ 이병철(부산일보 기자) 6. 여성 친화적 공원 _ 홍미영(부산여성가족개발원 선임연구위원)
[공간 공감] 다섯 번째 공간 탐색, 서울시립대학교 캠퍼스
이곳이 100년 가까이 된 캠퍼스라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1918년 경성공립농업학교로 시작하여 서울농업대학, 서울산업대학을 거쳐 약 30년 전 서울시립대학교(이하 시립대)로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시립대 캠퍼스를 처음 와본 건 아니었지만 여유를 가지고 찬찬히 둘러본 적이 없었던지라 이번 답사는 설계적 관점으로 이 공간을 살펴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캠퍼스 전반의 첫인상은 안정감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오래된 캠퍼스답게 차분하게 가라앉은 건축물과 아름드리나무들이 이러한 공간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건축물이 홀로 튀거나 윽박지르지 않고 대지에 안착되어 있다는 것은 구성원들이 편안한 공간감을 느끼는 데 도움을 준다. 100년 건축의 흔적을 기대할만 하지만 아쉽게도 서울학연구소나 박물관 등 몇몇 건축물에 국한되어 있고, 대부분의 건물은 보편적인 학교 건축의 모습이다. 최근 지은 것으로 보이는 건축물들에 주목할 만한데, 이들은 기존 캠퍼스와 스케일이나 재질면에서 어울리면서도 동시대적 감각을 드러내고 있다. 여러 부류의 건축이 공존하고 있지만 이질적이라고 보이지 않는 이유는 편안한 무게감이라는 공통분모가 캠퍼스 건축에 적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건축물과 그 배치가 주는 안정감과 더불어 원 수형을 지니면서 성목으로 자라난 아름드리나무들이 쾌적함을 더해준다. 캠퍼스 내의 나무는 과거 농업 학교의 유산으로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캠퍼스에 수목원을 결합해놓은 것처럼 다양한 수종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양호한 수형을 유지하고 있다. 오랜 시간 동안 잘 관리된 녹음은 가치를 환산하기 힘든 혜택이 되어 구성원에게 되돌아가고 있다. 개별 건축이나 오래된 나무들 외에 시립대캠퍼스의 안정감에 기여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지형이다. 이 캠퍼스는 교문 부근의 지대가 높고 안쪽으로 완만하게 낮아지다가 끝부분에서 배봉산을 만나다시 오르막의 경계를 이룬다. 분지라고 볼 수는 없지만 완만한 그릇 같은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이 오목한 그릇에 담긴 건축과 나무는 상대적으로 낮아 보여 은연중에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은 또한 캠퍼스 외부로부터의 시각적 영향을 차단하고 위요감을 증가시키는 효과도 준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캠퍼스 전반을 아우르는 디자인의 원칙은 ‘언더 디자인’이다. 휴게 공간의 조성방향은 나무들이 완성한 공간을 잘 살피고 그 안에서 조심스럽게 구성원이 활용할 수 있는 최소의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상쾌한 그늘을 드리우는 큰 나무들 아래에는 데크와 벤치가 설치된 곳이 많다. 정욱주는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하였다. 글쓴이 외에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였고,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 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SK플래닛 브랜드 스페이스 ‘더 팜’
모바일 기술을 이용해 원격으로 식물을 키울 수 있을 까? 자신의 바로 앞 책상머리에 놓아 둔 조그만 식물도 잘 키우기가 쉽지 않은 바쁜 현대인들이 과연 관심을 가지고 식물을 키워내게 할 수 있을까? ‘더 팜the Farm’을 시작하기 위해 만난 질문이다. 사실 이런 질문은 이미 오래 전부터 기술과 예술을 결합하려고 했던 미디어 아트 작가들을 통해 제기되었다. 1995년에서 2004년까지 진행되었던 텔레가든TeleGarden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켄 골드버그Ken Goldburg와 조셉 산타로마나JosephSantarromana에 의해 진행된 이 미디어 아트 프로젝트는 얼마 안가서 식물을 다 죽이게 될 것이라는 일부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세계 각지의 10만여 인터넷 유저들이 등록하였고, 하루 평균 15,000회 이상 텔레가든 사이트에 방문하여 식물을 심고 가꾸면서 성공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하였다. 일 년 후 세계적인 미디어 아트 공간인 아르스 일렉트로닉Ars Electronic 센터로 옮겨졌으며 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이미 1994년 같은 대학에서 텔레로보틱을 실험한 머큐리Mercury 프로젝트의 후속 프로젝트였으며, 월드와이드웹을 통해 사용자들이 원격으로 로봇을 제어하고 작동하게 하는 가장 최초의 미디어 아트작업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더 깊은 질문이 남는다. 수많은 원격 제어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주제 가운데 왜 정원이었을 까 하는 것이다. 텔레가든의 디렉터였던 켄 골드버그는 “정원이 인간적이고 가깝고 촉각적이기 때문이며, 또한 무엇보다도 정원을 통해 기술로 인해 소외된 사람들이 쉽게 소통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어느덧 더 빠르고 더 대용량의 정보기술 시대를 맞아 분주함에 쫓기는 사용자들의 모습에서, 삶의 속도를 느끼고 정원에 눈을 돌려 주변의 생명들을 조금씩 변화시키고 돌보는 모바일 기술의 전유가 필요해 보인다. 그런 면에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을 바탕으로, 모바일 중심의 창의적 생각과 기술을 접목하여 세상과 따뜻한 포옹과 소통, 그리고 변화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HUG라는 브랜드 가치로 삼는 SK플래닛이 ‘더 플래닛’ 사옥 로비 공간에 새롭고 스마트한 브랜드 스페이스 ‘더 팜the Farm’을 조성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로그 정보들은 마치 씨앗이 심어지고 자라듯이 생성되어 모이고 성장한다. 이렇듯 ‘더 팜’은 로보틱 텔레가든과 소셜 미디어가 융합하여 데이터 정보가 순환되고 소비되는 과정속에서, 식물을 돌보는 사용자들의 유의미한 의미화를 통해 창발적인 생태계의 모습을 갖게 된다. ‘심고 가꾸고 거두고 나누는’ 현실 속의 자연 생태계를 만들어가려는 ‘더 팜’은 상생과 순환을 통한 IT 생태계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더 팜’은 크게 벤딩 머신Vending Machine, 로봇 가든Robot Garden, 크릭Creek과 팜 앱Farm App의 네 가지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자체로 ‘심고 가꾸고 거두고 나누는생태계의 구조를 자연스럽게 따르고 있다. 우선 사용자는 첫 단계로 벤딩 머신을 만나게 된다. 벤딩 머신은 사용자 자신이 가진 가상의 재화인 팜 포인트를 이용해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토대로 씨앗을 구매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이다. 벤딩 머신에서는 씨앗과 포트를 개인 정보와 연결시켜 주는 바코드 라벨과 함께 수령하게 되는데, 이때 입력 창을 통해 팜 메시지를 입력할 수 있다. 식물을 키우는 목적을 구체화하여 재배와 돌봄의 동기를 부여하고 목적의 대상인 또 다른 누군가에게 선물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써 가상의 정보가 물리적인 실재의 씨앗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경험하게 되고 사용자는 자신의 가치를 씨앗에 심어 넣게 된다. 씨앗은 청경채, 수레국화, 적상추, 곱슬겨자의 4종류로, 재배가 쉽고 까다로운 환경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종으로 우선 선택되어 구성되었다. 브랜드 스페이스 기획 SK플래닛 마케팅앤커뮤니케이션부문 공간마케팅팀 브랜드 스페이스 ‘더 팜’ 설계 및 시공 버드핸드 건축 설계 및 시공 SK건설 위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면적 344.72m2 완공 2014 버드핸드는 공간 미디어 디자인 전문 회사로 SK플래닛 ‘더 플래닛(the Planet)’ 사옥 미디어콘텐츠디자인, SK텔레콤홍보관 티움(T.um), SK차이나 Happiness 플랫폼, 한국고등교육재단(KFAS) 명예의 전당 등의 구축 사업을 수행했다. 공간을 바탕으로 한 미디어 콘텐츠와 하드웨어 시스템을 통합하는 디자인 기획과 설계·실행을 해오고 있으며, 디지털 아트와 키네틱 설치 등 폭넓은 분야의 다양한 미디어 작가 및 집단들과 전문화된 협업 시스템과 솔루션을 구축하고 있다.
빛과 색의 정원
5월은 정원이 가장 풍요로운 계절이다. 새로운 잎이 돋는 신록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만한 정원이다. 어젯밤에 비도 오고 햇살도 밝으니 오늘 보게 되는 정원은 완벽한 차비를 갖추었을 터다. 숲 속에 위치한 주택 단지로 가는 길만으로도 마음이 정갈해진다. 도심 속에서 이런 숲길을 통해 주거지에 이르는 것도 새롭거니와 잘 정비된 도로가 흡사 어디 리조트에 가는 기분이 들게 한다. 작은 마을로 이루어진 주택 단지는 차분한 재료로 이루어진 비슷한 분위기의 저택들로 구성되어 주변 자연 및 정원과 잘 어울렸다. 맨 안쪽 산기슭에 위치한 주택은 힘 있고 정갈해 보였다. 린의 이재연 대표는 서안에서 10여 년 같이 근무했던 동료이고 설계와 현장경험을 한 이력도 비슷해서 나와는 태생적으로 비슷한 디자인 태도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장과 소재를 중시하고, 디자인·시공이 일체화된 작업을 위주로 하고 있는 점도 비슷하다. 아마도 디자인이 다른 부분은 나와 다른 성격적 특성 정도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보게 되는 정원은 내가 서안에서 독립한 후 처음 보는 서안 멤버의 정원이란 기대도 있다. 나와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작업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정원의 입구 여유 있는 주변 녹지와 도로변의 조경 공간은 안에 있는 정원에 대한 기대감을 높인다. 대문을 들어서면 단정한 계단과 그 옆 기단에서 흐르는 작은 벽천이 이국적이다. 코르텐스틸 기단은 식물 재료와 절묘하게 어울리고 베이지색 포장 재료와도 잘 어울려 명료한 입구 정원의 몫을 다하고 있다. 코르텐스틸기단 위에는 황금눈주목과 회양목, 일본조팝나무(홍조팝)를 심었는데, 금속의 재료와 잘 어울렸다. 특히 황금눈주목은 그 강렬한 색상이 더욱 이국적으로 보인다. 강렬하지만 잘 어울렸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금속과 대비되는 좀 더 차분한 색상의 식물을 선택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강한 이미지의재료에는 습관적으로 소프트한 재료를 놓는 버릇이 있다. 어쨌든 나와 다른 첫 번째 선택, 신선했다. 조팝나무와 황금눈주목 사이에 회양목으로 라인을 만든 것도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계단을 올라서면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이르는 디딤돌이 단정하게 놓여있다. 진입로가 마당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구조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으나 마당의 구조상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 같다. 좌우로 긴 마당의 형태가 길의 레벨에 의해 변화가 생기고 포장 좌우로 살짝 마운딩 된 잔디 마당은 가볍게 느껴지기도 한다. 작은 지형의 흐름이 생겨 공간에 더욱 긴장감이 생기게 되는 효과도 있어 보인다. 또한 특별한 경계 없이 지형에 연속되는 포장과 잔디의 단정한 면이 시원한 공간감을 주고 있다. 빛의 마당 마당의 풍경은 눈부셨다. 날씨 탓도 있겠으나 풍부한 소재와 신선한 잎들, 꽃들이 빛나는 풍광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단정한 테라스와 한쪽의 코르텐스틸 기단, 그리고 여러 가지 변종 식물들의 풍부한 색상이 잘 어울렸고 마당에 심겨진 체리나무의 열매도 인상적이었다. 마당의 전면부에는 여러 가지 조팝나무가 심어지고 한쪽의 코르텐스틸 기단 위에는 무늬병꽃나무와 황금눈향나무가 심겨 있었다. 무늬병꽃나무의 흰색 잎과 연분홍 꽃이 황금눈향나무와 대비되어 이국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넓은 테라스에는 포니테일, 팜파스그라스, 모닝라이트억새 등 이국적인 그라스가 심겨 있었다. 나의 습관적 선택이라면 마당의 전면부에 그라스 종류를 배치했을 텐데 그는 테라스에 그라스를 배치하여 특별한 공간감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라스는 역광에 효과적인데, 테라스에 심겨진 그라스 종류들은 특히 섬세한 디테일을 가지고 있어 빛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주택 안의 풍경에 신선함을 더할 것이다. 이런 그라스가 은은하고 섬세한 빛을 표현한다면 순도가 높은 색상의 변종 식물과 꽃은 화려한 색상으로 빛을 표현한다. 황금눈향나무와 노란 대사초, 붉은 체리 열매, 대왕철쭉 등이 화려한 정원의 모습에 일조한다. 앞집 경계에 심겨진 에메랄드그린은 이런 화려한 색깔의 배경이 되는 맑은 녹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몇 개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건축의 형태가 강렬하기 때문에 다소 많아 보이는 정원의 색조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넓은 테라스와 같은 레벨의 잔디가 연속되면서 전체적으로 넓고 시원한 공간을 형성한다. 김용택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환경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90년부터 조경설계 서안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으며, 2001년부터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부암동 반계별서와 평창동 정원 등 정원 조성 작업을 주로 해 왔으며, 조경 작품이 주변 환경에 동화되도록 장소의 특성에서 얻은 모티프를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설계를 하고 있다.
분당 주택 정원
산그늘, 구름 아래 뜰 이 정원을 만들면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일까? 잎의 질감과 색감, 지나치게 원색적인 색을 지닌 식물과 흔히 쓰이는 수종을 최대한 배제하고 주요수종을 선택해나갔다. 그리고 시간時間과 시간示間의 조율에 나섰다. 식물들의 미묘한 변화는 늘 감동을 준다. 이른 봄, 새싹이 돌기처럼 돌돌 돋아 연초록으로 빛나는 조팝나무의 잎눈이며, 조롱조롱 열리는 히어리의 꽃이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다. 그 다음으로 줄줄이 이 나무 저 풀이 너도나도 흐드러지게 꽃을 피운다. 주체할 수 없는 계절의 힘은 온 정원 그득 이들의 기지개로 시끌벅적하다. 식물들의 소담스런 잡담이 늦가을까지 반복되도록 식물을 구성한다. 이렇게 식물을 키우는 시간時間이 주는 미묘한 변화와 이 친구들이 피고 지는 사이示間의 조율만 잘 한다면 하루가 다르고, 한 주가 다르게 계절마다 다른 표정을 짓는 이 친구들의 정겨운 잡담이 늘 풍성한 정원이 되어줄 것이다. 이 주택은 주변의 자연 경관이 매우 우수한 남서울 골프장 후면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는데, 대지 면적이 약 800여 평에 이르는 저택이다. 골프장 서측에 전원주택 단지로 조성되어 있는 이 마을은 흡사 강원도의 풍경을 닮았을 뿐 아니라, 겨울의 기온이 아랫동네 판교와 약 5도 이상 차이 나는 것 또한 강원도 산간 마을과 닮아있다. 짧은 기간에 많은 종의 봄꽃이 피고, 여름엔 녹음이 짙고, 가을엔 단풍이 맑다. 물론 겨울의 온도가 많이 낮아 시내의 정원보다 더욱 꼼꼼한 식물의 월동준비가 필요하다. 입구 정원 담장 밖은 겹벚꽃나무와 계수나무를 대표 수목으로 심어 봄과 가을의 정취를 살리도록 했다. 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면 오래뜰(대문이나 중문 안에 있는 뜰)이 손님을 반긴다. 작은 물소리가 들리고, 오죽이 심겨있어 좁은 공간이 풍성하게 느껴지는 입구 정원이다. 옆집의 정원이 그대로 노출이 되어 에메랄드그린으로 차폐 식재를 하여 보더 가든border garden으로 마감했다. 앞마당 건축주는 주변 자연이 좋고 넓은 이 땅을 마지막까지 살 곳으로 정했다. 최대한 넓은 잔디 마당을 원했다. 이에 주변의 시선을 가리면서 자연 경관을 조망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주변의 집 중 이 집만 정남향으로 앉아 있어 옆집 2층에서 이 집의 마스터 룸이 그대로 노출되고 있었는데, 시선을 막기 위해 수목을 구입하기 전 실제 크기의 작대기를 세워보고 나무 크기를 정했다. 입구 정원에 심긴 에메랄드그린을 앞마당의 낮은 부분까지 확장하는 형식으로 식재했고, 높은 곳은 초대형 백송과 소나무를 배식했다. 앞마루 식당과 바로 연결된 앞마루는 차를 마시거나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 분위기 좋은 곳이다. 깔끔하면서도 자연미를 느낄 수 있는 분위기 연출이 관건이었다. 자줏빛 코르텐스틸 화단 위로 빈카마이너를 늘어뜨리고, 황금눈주목과 무늬병꽃나무를 열식해 공간의 질서를찾으면서 자연스러움을 주었다. 물이 흐르는 작은 수로와 단조로운 화단의 직선을 자연석으로 살짝 비틀었더니 만족스러운 느낌이다. 조경 설계 조경디자인 린, 라이브스케이프 조경 시공 조경디자인 린 건축 설계 상지종합건축사사무소 건축 시공 위드건설 면적 2,644m2 완공 2013 조경디자인 린은 땅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긴다. 땅의 의미와 그 이면에 숨겨진 가치를 찾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그 땅에서의 행복한 쉼을 고민하며, 새로운 가치를 지닌 땅을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디자인 그룹이다. 이재연 소장은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조경설계 서안을 거쳐 조경디자인 린을 설립했다. 윤영조 소장은 강원대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강원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경설계 서안과 삼성에버랜드를 거쳐 이재연 소장과 함께 2006년 조경디자인 린을 설립했다.
암스테르담 대학교 루테르세일란드 캠퍼스
새로운 캠퍼스 암스테르담 대학교의 새로운 루테르세일란드 캠퍼스Roeterseiland Campus 조경 설계의 목표는 도시와 경관을 서로 연결시키면서 동시에 지형의 고유한 정체성을 새겨 넣는 것이다. 암스테르담 운하의 고전적인 윤곽선이 주는 단순하면서도 절제된 멋이 특색 있는 루테르세일란드 시그너처와 결합된다. 이에 덧붙여진 그래픽의 켜는 캠퍼스의 영역을 한정해 줄 뿐만 아니라 서로 연결하고 길을 안내해주고 시선을 끌며 발길을 유도해낸다. 가장 기본적인 켜는 암스테르담 운하의 공공 공간이 띠는 선명한 윤곽과 전형적인 재료들로 구성된다. 그것은 바로 곳곳에 산재해 있는 느릅나무와 벽돌 및 푸른색 석회석이다. 연속적인 패턴으로 깔린 돋보이는 벽돌들이 길을 이루고 있다. 일종의 시그니처인 백색벽돌로 된 리본 모양 길은 특색 있는 나무 주위를 휘감아 돌기도 하고, 식재된 섬들의 윤곽을 이루는 루프모양을 띠기도 한다. 또한 이 길은 학생들이 앉아서 쉬거나 서로 만나고 외부에서 조용히 작업을 할 수 있는 의자나 테이블을 형성해내며 솟아오르기도 한다. 이 리본 모양 길을 따라 수변 위의 독특한 장소들과 감추어진 중정들이 이어진다. 서로 다른 영역 캠퍼스 내에 서로 다른 특징과 용도를 갖는 영역들을 설정했다. ‘그린 노즈Green Nose’는 아름다운 운하 두 곳이 내려다보이는 경치 좋은 곳이다. 여기서 학생들은 언덕 위의 풀밭에 앉아 햇살을 받고, 친구들과 소풍을 즐길 수 있다. ‘어메이징 코트야드Amazing Courtyard’는 바삐 돌아가는 캠퍼스 내의 조용하고 멋진 공간이다. 기존의 뒤뜰은 ‘아름다운 뒷마당Beautiful Backyard’으로 탈바꿈했으며, 학생들은 밖에서 공부를 하고 토론을 할 수있는 은신처 같은 장소를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두 곳의 대규모 건물군으로 향한 주출입구인 ‘중앙 다리Central Bridge’는 캠퍼스의 새로운 중심 공간이다. 다리 위의 기다란 벤치에 앉아 학생들은 주변을 바라다보거나 역으로 ‘응시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크레아-센터 CREA-centre’는 이 대학교의 문화적 허브이다. 특히 저녁에 그룹 단위로 옥외에 모여 행사나 강좌를 준비하거나 평가할 수 있는 곳이며, 테라스에 앉아 한 잔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발코니Balcony’는 첫 번째 지점의 정 반대편에 있으며, 그 지점과 유사하지만 바닥 포장이 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난간 위에 함께 올라앉아 눈앞에 펼쳐진 멋진 경치를 만끽할 수 있다. 도시형 캠퍼스 루테르세일란드 캠퍼스는 암스테르담의 중심을 이루는 실질적인 장소가 될 것이다. 학생들은 도시 맥락과 독립되어 있는 익명의 캠퍼스보다는 도시의 한 가운데에서 공부하기를 더 선호한다. 암스테르담 운하의 멋진 풍광은 뫼더흐라흐트Muidergracht를 따라 더 멀리 이어질 것이다. 공공 공간은 유연하면서도 정연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재료는 고전적이며 내구성 높은 것들이다. 중심 가로는 자동차 대신 자전거 이용자들(그리고 빠르게 걷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 적벽돌과 푸른 석회석 디테일로 마감된 새로운 보도는 고전적인 암스테르담 운하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고 있다. Landscape Architect INSIDE OUTSIDE Location Amsterdam, NL Scope Public Space and Courtyard landscaping Client University of Amsterdam Date 2010~ (Ongoing) Photographs INSIDE OUTSIDE 1991년에 페트라 블라이세(Petra Blaisse)가 설립한INSIDE OUTSIDE는 예술가, 건축가, 조경가, 디자이너로이루어진 종합 디자인 회사다. 조경 설계, 전시, 커튼, 표지판, 내부 가설물을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다양한규모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천연 자재, 색감, 빛, 소리, 시간을 소재로 역동적인 환경을 창조해 내는 작업에몰두하고 있으며, 긴밀한 협력 체계를 구축해 콘셉트 디자인에서부터 최종 디자인에 이르는 모든 작업에 건축주와건축가의 의도를 녹여내고 있다.
IBM 호놀룰루
중정이 건축과 조화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하기 위해 우리는 지면의 포장과 수경 디자인에서 블라디미르 오시포프Vladimir Ossipoff의 건축 파사드 패턴을 오마주로 빌려왔다. 이번 재설계가 있기 전까지는 오시포프가 설계한 이 멋진 건물은 그저 아스팔트 주차장 안에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어서 원래 설계된 경관을 감상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하와이 고유의 경관 유형에서 유래한 독특한 베란다·파티오 형태인 라나이Lanai에서 바라보면, 세밀하게 표현된 중정이 다양한 행사와 일상적 용도에 두루 활용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유연성을 갖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도심에서 살짝 벗어나 한숨 돌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함을 알 수 있다. 전경을 가로지르는 직선형의 인공 수로는 바다에 펼쳐진 수평선과 연결되는 한편, 하루 동안 끊임없이 변화하는 햇빛의 발랄함과 덧없음을 반사되는 빛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포장 패턴은 동일한 화산석이 지닌 세 가지 역동적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데, 대상지가 하와이의 지질학적 특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다시금 상기시켜준다. 돌 표면 처리 중 연마는 포장면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을 제대로 붙잡아둘 수 있도록 해주고, 열처리는 광택을 띠지 않지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반짝이는 특성을 지니게 한다. 또 돌을 쪼개 표면이 꺼칠꺼칠하도록 가공한 경우에는 다부진 깊이감이 나타난다. 이러한 세 가지 특성 모두가 패턴화된 마당 전역에서 표출되는데, 덕분에 밤낮으로 변모하는 빛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게 된다. 대상지 전역의 패턴에서 나타나는 스칼라적 변화 덕분에 이용자들은 건축은 물론 외부 공간에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인공적 조경요소들은 투수성이 있는 토종 ‘잔디판’ 식재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해안가에 나란히 늘어선 서프보드들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한편, 대상지의 생태적 역사를 웅변하듯 보여주고 있다. 기존 건물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시각적 배경에 설계방향을 일치시키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경관을 통해 하와이의 창조 설화를 보여줌으로써 문화적 역사 또한 함께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려 했다. 조경가들은 하와이 원주민의 후손들을 만나 구전으로 내려오는 성스러운 이야기를 어떤 방법을 통해 물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하와이 전통 설화에 따르면, 인간은 ‘어머니 대지Earth Mother’와 ‘아버지 하늘Sky Father’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 첫 번째 자식이 타로Taro였으며 타로를 돌보기 위해 인간이 창조되었다고한다. 이러한 창조 설화가 물과 빛의 패턴을 통해 역동적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아버지 하늘은 인공 수로의 유리 바닥을 통해 그 아래쪽에 위치한 타로 식물과 (어머니) 대지 위로 투사된다. Landscape Architect Surfacedesign Lead Designer James A. Lord Landscape Architect of Record Helber Hastert& Fee Client Victoria Ward, Limited, Subsidiary ofHoward Hughes Corporation Location Honolulu, Hawaii, USA Completion 2013 Photographer Marion Brenner Surfacedesign은 조경, 도시설계, 마스터플랜 등 광범위한 영역을 디자인하는 회사다. 2001년 설립되어, 대규모 도시계획, 공원 설계, 단지 설계, 기업·캠퍼스 설계, 가로경관 디자인 등 다양한 규모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사람과 자연 환경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지속가능성에 대해 열정을 갖고 있다.
캘리포니아 디지털 풍경화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5년째 살고 있다. 생활인으로 지내다보니, 이곳 사람들의 공원에 대한 인식이 여타 미주 대도시권과 차이가 있음을 느낀다. 가까운 거리에 근린공원이 없어도,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해변이나 구릉이 대부분의 주거지에서 불과 한 시간 내의 거리에 있다. 자동차 중심의 거리 환경은 이러한 여가 활동을 더욱 뒷받침하며 휴일에 자동차 핸들을 공원이 아닌 바다나 산으로 돌리게 한다. 교외화로 일반화된 주거 양식은 뒷마당을 포함하는 유형이 보편적이기에 공공 공원의 수요나 사용 밀도가 상대적으로 낮다. 그리고 수평적 확산을 거듭해온 도시 위계는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처럼 심장부 역할을 하는 중앙 집중형의 오픈스페이스와 거리가 멀다. 그런데 근래에는 가장 급속도로 교외화가 진행되었던 남부 캘리포니아마저도 산업 구조의 중심이 도시 집중을 본질적으로 요구하는 금융-서비스-IT 등 지식 기반 산업으로 이행되면서 다시금 도심지로 인구가 유입되는 국면을 맞고 있다. 그에 따라 남가주의 주요 도시들은 기존 도심지의 활성화 계획을 구상하였고, 각 도시의 시청사 전면에 중앙 공원을 조성함으로써 도시 문화 재생의 중심지로 삼으려 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세 도시가 비슷한 시기에 시청사 앞에 공원을 마련했다. 로스앤젤레스의 그랜드 파크Grand Park를 시작으로 뉴포트비치의 시민공원Newport Beach Civic Park, 가장 최근인 지난해 가을 문을 연 산타모니카의 통바 파크Tongva Park가 그 마지막 순서였다.1 작년 송구영신 전야에 그랜드 파크로 예상보다 3배가 많은 인파가 몰렸던 사건2을 기점으로 남가주 대도시 지역에서 공원의 위상 변화가 점쳐지고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이 주택의 안뜰이 아닌 도심의 공원으로 초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산타모니카 해변으로 가다 로스앤젤레스를 출발하여 산타모니카 프리웨이인 10번 도로를 타고 태평양을 향해 서쪽으로 이동하면 바다를 향해 카운트다운이라도 하듯 거리명의 숫자가 26에서부터 1로 줄어든다. 대상지의 서쪽 경계이기도 한 오션 애비뉴Ocean Avenue가 해안에 가장 가까운 1가에 해당하는데, 거리명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 수록 하늘의 끝이 태평양의 수평선과 만나길 기대하게 되지만, 마지막 길인 오션 애비뉴에 가까워져도 백사장은커녕 하늘의 끝도 보이지 않는다. 산타모니카 해변이 블러프bluff라 불리는 절벽 형태의 해안 지형이기 때문이다. 일반 절벽보다 넓고 길게 해안이나 호안을 따라 형성된 절벽을 뜻하는 블러프는 정서향의 산타모니카 해안선과 평행하게 백사장의 뒤편으로 절벽의 병풍을 드리운다. 절벽의 상부는 바다 쪽으로 완전히 열린 수 킬로미터의 전망대를 마련해주어 해질녘의 산타모니카는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랑한다. 대상지의 위치는 절벽의 끝에서 불과 한 블록 떨어져 있어 건물 2~3층 높이만 확보되면 산타모니카 부두와 해변을 모두 내려다 볼 수 있는 강력한 조망의 가능성을 가진다. 대상지는 지형적 조건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방문객을 기대할 수 있는 명소들에 둘러싸여 있어 도시 문화적 조건 또한 탁월하다.3 오션 애비뉴 건너 바다 쪽으로는 관광객이라면 반드시 찾는 제1의 아이콘인 산타모니카 부두가, 한 블록 북쪽으로는 연간 천만 명이 방문하는 쇼핑의 1번지인 3가 보행자거리3rd street promenade가 시작된다. 그러나 대상지는 가능성만 큰 곳은 아니다. 우선 산타모니카 하이웨이가 공원의 북쪽 경계를 감싸며 현 도심지와 대상지를 갈라놓는다. 동쪽으로는 근대 건축 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존해야 할 시청사 건물이 공원의 경계를 규정한다. 남쪽으로는 새로운 주거단지의 개발이 예정되어 있어 공공의 영역 밖이다. 서쪽으로도 시야는 바다를 향해 열리지만 6차선의 오션 애비뉴가 블러프 하부의 1번 도로와 연결되는 진입 경사로가 위치하기에 늘 차량의 통행이 붐빈다. 보행가로와 자전거 도로 체계가 발달된 산타모니카이지만 대상지의 실제 연결성은 사방으로 열린 도심 공원의 전형이라 하기엔 폐쇄적이다. 설계자 선정 과정을 살펴보다 캘리포니아의 아이콘인 산타모니카의 시민 공원 설계자로 예상과 달리 서부에 둥지를 틀고 있는 팀4이 아닌, 영국 태생의 제임스 코너James Corner가 이끄는 대륙의 반대편에서 온 뉴욕 기반의 JCFO가 선정되었다. 의아한 점은 지정학적 거리만이 아니었다. 프레시 킬스로 대표되는 JCFO의 여러 대형 공원 작업은 논리적 사고로 도출되는 대상지의 조직site organization을 통한 경관적 기반landscape as infrastructure의 형성과 도시적 전략urban strategy의 제시로 대표되는 작업이었기에 통바 파크처럼 빈 주차장이었던 부지에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 내는 작업과는 거리가 느껴졌다. 다만, JCFO의 근작인 하이라인 파크HighlinePark의 성공을 계기로 상대적으로 작은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실현해 가는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던5 2010년, 하이라인 파크는 이곳의 설계자 선정 과정에 강력한 카드로 통했고,6 통바 파크는 JCFO에게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설계의 결과물에 더욱 귀추가 주목되었다. 최영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디자인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마쳤다. 미국의 SWA Group과 한국의 오피스박김에서 다양한 성격의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ArchiprixInternational 본상, 뉴욕 신진건축가 공모 대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는 로스앤젤레스를 기반으로 하는 설계사무소 Laboratory D+H를 설립하여 활동 중이다.
통바 파크
통바 파크 + 켄 겐서 광장Ken Genser Square은 새로운 유형의 도시 경관을 구현하고 있다. 이는 자원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한편, 자연 친화적 성격을 띠고 있다. 광범위한 대중의 참여를 바탕으로 한 디자인은 현대적이고 변화무쌍한 일련의 정원 및 활동 공간을 창조하였다. 이 공간들은 산타모니카Santa Monica 중심부를 상징적으로 새롭게 정의하는 한편 도시와 상호 연결된 공원을 만들어준다. 개요 통바 파크 + 켄 겐서 광장은 약 7.4에이커(약 30,000m2)부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시청사, I-10 고속도로, 그리고 산타모니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야자수가 늘어선 오션 애비뉴Ocean Avenue 사이에 위치한다. 이 공원은 버려진 채 무미건조한 모습만을 드러내던 주차장을 구불구불한 언덕, 풀이 무성한 습지, 지중해풍의 초지공원, 그리고 활발한 도심 속 활동 공간 등으로 이루어진 울창한 경관으로 변모시켰다. 한때 이 지역을 특징짓던 남부 캘리포니아 지방 특유의 구불구불한 소협곡 경관arroyo에서 영감을 받아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일련의 오솔길을 디자인했다. 이 오솔길은 시청사 정문으로부터 유기적인 모습으로 등장해 서쪽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공원이 자연스럽게 도시 전체 망에 엮여 들어가도록 한다. 극적인 변화가 있는 지형 덕분에 부드러운 오솔길 구조가 한층 강화될 뿐만 아니라 각기 다른 테마를 바탕으로 한 네 곳의 언덕 지역이 유기적으로 연계될 수 있다. 이들 지역은 서로 다른 용도 및 사용자 경험을 바탕으로 설계되었다. 정원의 언덕Garden Hill은 일련의 좌석을 배치한 알코브alcove와 친근한 성격의 감상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 계절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자생종 또는 토착화된 남부 캘리포니아의 식물들을 식재했다. 발견의 언덕Discovery Hill은 어린이를 위한 놀이 공간으로, 언덕 미끄럼틀, 음악의 벽, 물놀이 시설, 그리고 놀이 요새 등 울창하고 그늘진 경관 속에 배치된 다채로운 모험 시설물들을 제공한다. 관찰의 언덕Observation Hill은 높이가 18피트에 이르며, 바닷가 및 인근 지역을 최상의 조건에서 조망할 수 있다. 전망대, 다리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밝고 경쾌한 공중 화장실이 언덕 아래에 숨겨져 있다. 만남의 언덕Gathering Hill은 모임과 휴식을 위한 공공 공간을 제공하며, 대규모 다목적 잔디밭, 그늘진 좌석 테라스, 그리고 편안한 소풍 공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켄 겐서 광장Ken Genser Square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모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한편, 대칭적인 모습과 구불구불한 잔디 언덕 등을 통해 랜드마크인 시청사 건물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한다. 식재 대상지의 변화로 나타나는 가장 도드라진 특징은 생태적 복원이라 할 수 있다. 정성들여 선택한 300그루 이상의 나무와 수천 종의 식물, 그리고 수백 종의 각기다른 캘리포니아 토착종이 이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풍요롭고 야심찬 식재 전략을 뒷받침하고 있다. 통바 파크와 켄 겐서 광장은 캘리포니아의 토착 식물들을 주요한 원예적 요소로 부각시키고, 최대 규모의 지중해식 초지 공원을 공공 공간에 제공한 최초의 대규모 프로젝트다. Landscape Architect James Corner FieldOperations(James Corner, Lisa TzionaSwitkin, Sarah Weidner Astheimer, Matt Grunbaum,David Christensen, Tsutomu Bessho, Yitian Wang) Contractor W. E. O’Neil Architecture for Restroom Frederick Fisher &Partners Structural & MEP Engineering Buro Happold Civil Engineering Fuscoe Engineering Lighting Design HLB Water Feature Design Fluidity Design Consultants Horticulture Perry & Associates, Greenlee &Associates Irrigation d.d. Pagano, Inc. Urban Soils Wallace Labs Geotechnical Engineer Converse Consultants Artist Iñigo Manglano-Ovalle Client·Owner The City of Santa Monica Location Santa Monica, California, USA Area 7.2ac Completion 2013 Photographs James Corner Field Operations,Jonathan Alcorn, Tim Street-Porter, Joakim LloydRaboff, Angie Smith James Corner Field Operations는 뉴욕에 기반을 둔 도시설계와 조경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디자인 오피스다. 대규모 도시설계 프로젝트나 포스트 인더스트리얼 사이트부터 작지만 섬세한 디테일을 요구하는 디자인까지 다양한 규모의 작업을 수행하고 있으며, 주요 작품으로 뉴욕시의 하이라인과 프레시 킬스, 라스베이거스의 시티 센터, 중국 칭하이 지역의 도시설계 마스터플랜, 시애틀 워터프런트의 마스터플랜, 필라델피아의 레이스 스트리트 피어, 산타모니카의 통바 파크, 런던의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 파크, 홍콩의 침사추이 워터프런트 등이 있다. 모든 설계 실천에 있어서 사람과 자연의 생태를 연구하고, 생기 넘치고 역동적인 공공 영역 디자인을 구현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칼럼] 생태경관건축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Landscape architecture가 1970년대 한국에 소개되면서 환경, 생태, 경관, 조경 등의 다양한 의미로 이해되었고 아직도 일반인들에게는 국토나 도시 환경보다는 정원이나 토목과 건축의 미화 작업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서양에서도 소위 조경은 사유지의 설계와 조성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라 20세기 초에는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landscape architecture로 이해되고, 1960년대에는 생태 경관 계획ecologicallandscape planning으로, 1980년대 이후에는 도시와 산업지의 재생과 관련된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landscape urbanism과 인프라스트럭처 중심으로 변신해 왔다. 건강, 환경 개선 및 재생, 지속성에 선도적 역할을 하고, 건설 사업의 보조를 넘어 환경 보존과 재생의 선두 역할을 함으로써 조경은 건축보다 더 사회적 연관성을 가지게 되었다. 또 조경은 개발뿐 아니라 보존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시장 경제의 변화에 덜 민감한 점이 있다. 조경 및건설 경기가 침체 상황인 이즈음, 조경 또는 경관계획의 원래 이름 landscape architecture를 다시 돌아보고, 그것을 학문 영역보다는 환경 개발과 보존의 한 방법론으로 생각하면서 조경 분야의 장래를 모색해 볼 필요가 있다. 조경계는 건축계의 동질성과는 달리 이질성으로 특징지어지고 있다. 이것은 조경이 농과·환경대학에 속하기도 하지만 건축·디자인대학에 속한 경우도 많다는 점, 그리고 그 자체가 문화를 바탕으로 한 실행이라는 점을 반영한다. 또 조경에는 건축과 다른 세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 경관은 건물에 비해 다양한 스케일―정원, 도시, 지역―을 포괄하고 경계 없는 개방형 시스템이며 역동적이다. 둘째, 조경은 설계, 계획, 시공 그리고 관리라는 네 영역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셋째, 경관은, 네덜란드의 어원에 따르면, 형성과 보존의 개념 또는 그림의 개념일 뿐 아니라 공동체 및 관리의 개념이다. 따라서 큰 규모의 조경인 경우, 지역 사회를 강조하고 특출한 예술가적 개성이나 개인주의적 사고를 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필요성과 전통을 갖고 있다. 이러한 근본적 차이는 조경에 건축적 방법을 직설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큰 문제임을 말해 준다. 즉, 조경 고유의 계획과 설계 방법을 개발하고 구현해야 함을 뜻한다. 더욱이 오늘날 지속성의 문제―기후 변화, 자원과 에너지 안보, 문화 정체성과 실체성, 계층 간의 갈등―는 생태경관적 접근 방식이 건축적, 도시적, 산업적 접근 방식보다 더 중요함을 의미한다. 현재 한국의 조경계는 건축, 도시·지역계획, 토목, 임업 분야로부터 영역 침투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사실 한국의 조경은 원래 문화적·역사적 뿌리가 약하며 중국이나 일본과 같은 정원예술의 전통이 적다고 나는 보고 있다. 한국의 유수한 산수·자연 환경, 20세기 중반까지 지연된 도시화, 잔손이 많이 가는 것을 싫어하는 심성, 도시 중산층의 부재 등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국의 풍류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흐름을 즐기는 멋이고 맛이었다. 지난 40년간 한국 조경은 괄목할만한 발전을 했다. 조경계가 잘해서 발전한 면도 있겠지만 외재적 원인도 컸다. 박정희 정부의 정책적 지원, 건설투기 붐, 급속한 산업화·도시화를 통한 환경 파괴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조경은 정원에나 적합한 방법을 도시 경관에 적용하기도 했다. 도시계획이나 사회 기반시설 또는 국토관리에는 적극적이고 지도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 했다. 건설이 남긴 폐해를 감추거나 미화하는 작업을 하면서 양적으로 성장해 왔다. 파괴가 많을 수록 조경 일이 많았다. 이제는 한국이 선진화되며 복지·행복 국가를 향해 질적 성숙을 하고 있다. 동아시아적 정체성을 회복하면서, 또 역동적 참여 민주화를 실현하면서 지속가능한 문화에 기여하는 국가가 되기 위해 조경이 해야 할, 그리고 할 수 있는 일은 수없이 많다. 기후 변화에 대응한 도시 및 지역 구조의 조정, 핵 에너지 위험을 감소하기 위한 지속가능한 에너지 경관 전략, 건설이 아닌 파괴로 치닫는 공공 기반시설(새만금 간척 사업 등)의 생태적 인프라로의 전환, 다기능적 생산 녹지 및 습지의 복원확장, 닫힌 전시 광경보다 일상적 생활환경의 개선에 주목하는 실용적 조경, 낭비의 측면이 큰 단일 용도의 공공 공간(학교, 정부 시설) 개조를 통한 녹지 증대와 환경 개조, 세천의 복원, 고가도로의 제거, 비투수층 도로와 주차장 및 산업 구조물의 제거, 대규모 녹화(지붕, 벽, 거리) 등이 그것이다. 공원이 따로 필요 없는 ‘숨쉬는’ 도시 및 국토의 재편성이 조경가와 경관계획가가 참여해야 할 일들이다. 설계와 계획 능력이 있고 과학적 지식에 기반을 둔 조경가일수록 할 일은 더 많다. 건설 사업의 ‘환경미화원’으로서의 조경보다 국민의 행복, 복지, 건강을 위해 공공 환경을 작동시키는‘전동차’로서의 조경이 필요하며, 이를 위한 적응과 변모의 계기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조경학과 실무 조경계는 다음과 같은 변신의 자세를 구축해야 한다. 첫째, 도시와 지역 규모의 경관·생태 및 공공 기반시설을 설계, 계획, 관리할 수 있는 관심과 능력을 확장해야 한다. 둘째, 열악한 도시 내부에 게릴라처럼 침투하여 아스팔트 도시를 건강한 유기체로 전환시키는 전문성을 길러야 한다. 셋째, 계획 및 관리 분야는 물론 기술·과학자와 협업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도시·국토계획의 전반적인 관리에서 ‘생태경관적 접근 방식’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넷째, 설계를 미관이나 형태보다는 삶의 질, 체험의 질, 건강·복지에 연계시키는 접근, 즉 국토를 몸으로, 조경을 의학으로 생각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의미 있는 일을 하려면, 또 위기에 대응하려면, 쉬운 일만 찾아서는 안 된다. 건설과 보존을 보완하기 위해 개발을 위한 보존, 보존을 위한 개발을 실행해야 한다. 경관이 본질적으로 스케일이 다양하고 경계가 없듯이, 조경 분야도 관심과 능력의 스케일을 다양하게, 경계 없이 하여 지속가능성 확보의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재도약의 기회를 찾아야 할 것이다. 고주석은 건축가이자 조경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생태경관적 접근 방식에 기반을 둔 디자인을 추구한다. 1989년 설립한 오이코스 디자인(Oikosdesign)을 이끌며 독일, 미국, 네덜란드, 한국을무대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고, 세계 여러 나라의 디자인 어워드와 설계 공모전에서 수상한 바 있다. 2003년부터 2013년까지네덜란드 바허닝엔(Wageningen) 대학교 조경학과 학과장을지냈다.
[에디토리얼] 용산공원, 참여할 때다
미지의 땅이자 금단의 땅인 용산 미군 기지의 공원화 프로젝트는 기지 이전에 관한 한미 정상의 양해각서가 체결된 이후 25년이라는 긴 과정을 겪고 있다. 우리나라 특유의 ‘빨리빨리’ 정서로 보면 이례적으로 길고 느린 호흡으로 구체화되어 온 프로젝트다. 양국 정상이 기지 이전에 합의(2003)한 후 기지의 공원화 계획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용산기지 공원화 구상’(2005)을 통해 계획의 밑그림이 그려졌고, 이 구상은 노무현 대통령의 ‘용산기지 공원화 선포’(2006)로 이어졌다. 이후 ‘용산공원 조성특별법’(2007)이 제정되었고, ‘용산공원 아이디어 공모’(2009)가 개최되었다. ‘용산공원 정비구역 종합기본계획’(2011)은 그간의 논의와 계획을 종합한 그랜드 플랜으로, 국제공모와 기본설계의 토대로 작동한 법정 계획이다. 2012년 4월, 정부는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의 당선작으로 West8 팀의 ‘미래를 지향하는 치유의 공원’을 선정한 바 있다. 용산공원이 담론의 영역에서 디자인의 차원으로 진화할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계획대로라면 이 작품을 바탕으로 기본설계가 진행되고, 2017년에는 공원 조성의 첫 삽을 뜰 예정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기본설계비로 책정된 예산이 작년과 금년 모두 국회에서 전액 삭감된 것이다. 표면상의 이유는 공원의 성격과 조성 시기에 관한 것이라지만 그 이면에는 비합리적이고 사소한 ‘어떤’ 정치적 이유가 작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본설계가 초기 단계에서 중단되었음은 물론 적지 않은 수의 공무원으로 구성된 국토교통부산하의 용산공원추진단도 개점 휴업이나 마찬가지였다. 법에 의해 국가 공원을 만들기로 한 정부가설계안을 선정했지만 그 설계를 진행할 예산을 못 받아 모든 일정이 지체되고 프로젝트 자체가 중지된 것이다. 엉뚱하게도 용산공원추진단은 종합기본계획 변경이라는 카드를 빼들었다. 종합기본계획은 이미 법적 고시가 끝났고 그 계획을 준거로 기본설계가 진행되는 마당에 다시 과거의 계획을 고치겠다는 것이다. 추진단은 변경의 당위성을 종합기본계획의 주요 골격인 6개 단위공원에 대한 반대 여론이 있다는 점, 그리고 공원 조성 여건과 상황의 변화―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의 난항, 미대사관 시설의 이전 시기, 침수 대비 등―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기본계획의 단위공원 개념은 공원 전체를 여섯 개의 주제로 나누어 개발하는 방식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진화하는 크고 작은 공원들의 연합united parks”이라는 탄력적 전략이며, 설사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기본설계 과정에서 다시 검토하는 것이 순리다. 여건과 상황이 달라졌다 해도 기본계획을 변경하여 대응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시간을 되돌려 과거의 계획을 바꾸기보다는 다음 단계의 과정에서 고려하면 충분할 일이다. 명분도 없고 실리도 없다. 그렇다면 종합기본계획의 변경은 예산 전액 삭감의 ‘어떤’ 이유와 연관된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변경 프로젝트가 이미 시작된 이 시점에서 ‘어떤’ 이유의 정당성 여부를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용산공원과 같은 빅 프로젝트는 계획 외적 환경, 즉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기존 계획을 주도했지만 다시 변경 계획이라는 난처한 숙제를 떠맡은 한국조경학회는 6개 단위공원을 생태 중심의 단일공원으로 바꿀 것이라는 추진단의 어색한 논리와 방향을 따르기보다는, 기본설계는 물론 그 이후의 과정에 닥쳐올 다양한 난제들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시나리오 계획과 유연한 전략을 구축하는 쪽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2년 연속 예산을 배정하지 않은 건 국회지만 그러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은 건 정부다. 정부와 국회모두 용산공원에 대한 관심과 의지가 거의 없었기에 벌어진 일이다. 만일 미래에 용산공원의 주인이 될 국민들이 예산 미배정이나 기본설계 중단과 같은 문제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국회와 정부의 입장은 지금과는 아주 달랐을 것이다. 시민참여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05년의 ‘용산기지 공원화 구상’이 방점을 두었던 ‘과정 중심적 계획과 유연한 설계’, 그리고 ‘참여적·소통적 계획’이 다시 강조되어야 할 시점이다. 지난 5월 21일에 열린 ‘용산 국가공원 전문가 세미나’에서 ‘참여’가 키워드로 부각된 것은 그나마 긍정적인 일이다. 지난 5월 1일, 한 세기가 넘는 긴 세월 동안 일본군과 미군이 점유해 온 캠프 하야리아가 부산시민공원이라는 새 옷을 입고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번 호에서 특집으로 다룬 부산시민공원은 용산공원의 앞날에도 적지 않은 교훈을 던져준다.10년 이상의 지난했던 부산시민공원의 조성 과정, 그 중심을 지탱하며 방향을 이끈 중심에는 시민, 언론, 전문가가 연합한 새로운 형식의 시민사회단체 ‘하야리아공원포럼’의 참여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지난 4월호부터 연재되어 온 김현민 소장의 “그들이 설계하는 법”이 이번 호로 마무리된다. 이수학소장의 “조경가의 서재”도 막을 내린다. 풍성한 그림과 글로 독자들과 소통해준 두 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다음 7월호부터 3개월간의 “그들이 설계하는 법”은 서울시립대학교 김아연 교수가, “조경가의 서재”는 에코이드ecoid의 김용규 소장이 이어갈 예정이다. 제주도로, 부산으로 종횡무진하며 잡지의 시각적 질을 높여주고 있는 전속 포토그래퍼 유청오 작가(스튜디오 키노)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빼놓을 수 없다. 지난 5월 중순부터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조한결 기자가 『환경과조경』 편집부의 새 식구가 되었다. 한국 조경에 만연한 피로와 불안을 교정하고 혁신해나갈 조경 언론인으로, 한결같이, 성장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