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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삶의 무늬다
고규홍의 ‘우리나라의 특별한 나무 이야기’
  • 환경과조경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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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포리 느티나무

 

나무를 매우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비로 수목원을 세우고 증권사를 다니며 번 돈으로 나무를 세심하게 돌보고 관리했다. 수목원이 커지면서 관리에 많은 노력이 투입되었지만, 그럼에도 그가 고수한 세 가지 원칙이 있다. 가지치기를 하지 않는다(현재는 생육을 위한 최소한의 가지치기를 하고 있다).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다. 농약을 치지 않는다. 이는 모두 나무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유지하고 식물의 생육 환경을 좋게 해주기 위함이었고, 그만큼 나무를 사랑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 그가 특별히 아낀 나무가 있었다. 벌컨magnolia vulcan 이란 이름의 목련이다. 수목원의 모든 나무를 사랑했지만, 벌컨은 꼭 한 번 더 들여다보고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던 그가 2000년 암 선고를 받고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무슨 조화인지, 그 해 벌컨은 꽃을 피우지 않았다.

푸른 눈의 한국인 고 민병갈 원장과 벌컨의 이야기다. “나무는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생명체다. 내가 없으면 그가 없고, 그가 없으면 내가 없다.” 지난 4월 24일 삼성에버랜드 디자인 그룹의 렉처 시리즈 강연자로 나선 고규홍 교수는 민병갈 원장과 천리포수목원 내 수목의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고 민병갈 원장의 나무 사랑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벌컨이 꽃 피지 않았다는 일화는 아는 이가 드물다. 신비롭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때 고 교수는 “전설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고 못 박았다. “인문학이란 사람이 삶의 무늬를 찾아가는 것이다. 삶의 무늬를 가장 잘 간직한 것은 나무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사라지지만,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나무의 결에 그대로 살아있다.” 나무가 사람의 흔적을 일러주는 화자임을 강조한다. 마치 옛날이야기를 전해주는 할아버지를 대하는 듯하다.

고규홍 교수는 기자 생활을 그만둔 이후 16년 동안 사람의 이야기를 간직한 큰 나무를 찾아 다녔다. 나무와 살았던 사람살이의 무늬가 남아있는 나무를 찾았고, 그 이야기를 글로 쓰고 사진으로 남겼다. 자주 찾아와서 바라보던 사람이 오지 않아 꽃을 피우지 않았다는 나무 이야기는 그중 하나다. “사람 사는 곳 어디라도 나무가 없는 곳은 없다”면서 그가 전한 또 다른 이야기는 나무를 보는 관점을 달리하게 했다. 가족에게도 버려진 한센병 환자의 외로운 마음을 받아준 소록도 솔송나무(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와 사람의 손길이 닿자 꽃을 피웠다는 전곡리 물푸레나무(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이야기가 그랬다.

특히 전곡리 물푸레나무는 고규홍 교수가 천연기념물 지정에 기여한 나무로 손꼽히는데, 일화가 하나 있다. 이곳은 6·25 전까지 마을을 형성하고 물푸레나무를 당산나무로 모셔 당산제를 지냈다. 이후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면서 마을이 사라졌고, 물푸레나무에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고 교수가 이 나무를 찾았고, 2003년 문화재청에 보호를 신청해 2005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근처에 거주하던 할머니 증언에 따르면 수십 년 동안 이 나무는 2004년과 2006년 딱 두 번 꽃을 피웠다고 한다. 하나는 사람이 나무에게, 하나는 나무가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한 사례다. 서로 교감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관계를 통

한 상호작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상에서 나무를 교감의 존재로 대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마 대부분 배경으로 인식하고 지나칠 것이다. 한 나무를 지키려 전력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주변의 나무가 조금은 달리 보일지 모르겠다. 용포리느티나무(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이야기다. 이 마을에는 15가구의 노인들이 살고 있는데, 팔려갈 처지의 당산나무를 지키기 위해 몇 년에 걸쳐 투쟁하고 결국 나무를 사 공동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중 돈을 꾸어 나무 구입에 보탠 사람도 있는데, 고규홍 교수가 마을 사람들에게 그렇게까지 나무를 지키려 한 이유를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우리 삶의 기반을 지키기 위해 돈을 꾸러 다니는 건 자랑스러운 일이다. 당산나무를 지키는 건 우리 조상의 얼을 지키는 일이다.”

그 나무 아래에서 마을 사람들은 새로운 무늬를 그리며 살고 있다.

고 교수는 사람처럼 나무도 말을 한다고 강조한다. 다만 사람이 듣지 못할 뿐이다. 그는 나무가 전하는 말을 해석해 이야기로 풀어내고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 “나무는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그’ 안에 들어서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오던 이가 사라지자 꽃을 피우지 않은 목련, 누군가 찾아가니 꽃을 피웠던 물푸레나무, 그리고 나무에서 위안을 얻은 사람들과 모든 걸 바쳐서라도 나무를 지키려 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나무는, 그리고 이 나무들에게 사람은 교유交遊의 대상으로, 서로 다르지 않다. 어쩌면 누구나 나무와 교유의 순간이 있었는지 모른다. 가만히 돌이켜볼 일이다. 고규홍 교수의 ‘나무 이야기’는 나무주변에 그려지는 삶의 무늬를 담고 있다.

고규홍 교수는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출판사를 거쳐 10년간 중앙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이후 큰 나무를 찾아 전국을 돌며 사진과 글로 세상에 알려 왔으며, 솔숲닷컴(www.solsup.com)을 통해 ‘나무 편지’를 발행하고 있다. 다수의 방송으로 나무 이야기를 전해왔고, 저서로는 『이 땅의 큰 나무』를 시작으로 『나무가 말하였네』, 『한국의 나무 특강』 등이 있다. 그가 소개한 나무의 다수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도 했다. 천리포수목원 감사로도 활동 중이며, 현재 인하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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