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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유평공원 2단계 도시와 공원을 연결하는 녹지 보행 네트워크
    지난 5월 대유평공원 2단계 조성이 완료됐다. 대상지는 조선시대엔 정조가 설치한 국영농장 ‘대유둔전’으로 활용됐고, 1960년대에는 연초제조창이 들어서며 근대 산업화의 터전이 됐던 곳이다. 하지만 2003년 담배공장 폐쇄 후 20여 년간 도심을 단절시키는 장애물로 전락했다. 수원시는 이러한 대상지를 공원으로 만들어 시민들에게 돌려주고자 했다. 2017년 해당 부지에 대한 지구단위계획을 수립하면서 초기 단계부터 부지 중심에 공원을 두었다. 덕분에 대규모 공동주택단지와 대형 상업 시설이 자리 잡은 부지 가운데에 누구나 이용 가능한 대규모 공원을 조성할 수 있었다. 에이치이에이(HEA)가 설계한 대유평공원은 2021년 10월 말 1단계 준공(『환경과조경』 2022년 8월호)을 완료하고, 지난 5월 17일 2단계 조성을 마쳤다. 시대 변화에 따라 막히고 단절됐던 대유평이 시민을 위한 공원으로 새롭게 거듭나게 된 것이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 [기웃거리는 편집자] 영선 업고 튀어
    비가 많이 자주 오는 요즘이다. 비를 보면 생각나는 노래들이 있다. 비스트의 ‘비가 오는 날엔’, 헤이즈의 ‘비도 오고 그래서’, 아이유의 ‘레인 드롭(Rain drop)’, 태연의 ‘레인(Rain)’. 최근엔 이 노래들을 제치고 이클립스의 ‘소나기’가 비 오는 날 플레이리스트 꼭대기를 차지했다. 정작 노래 가사엔 ‘비’란 단어가 다섯 번밖에 등장하지 않지만, 나의 애착 곡들을 제칠 수 있던 이유는 이 노래의 배경 때문이다. 최근 선풍적 인기를 이끈 ‘선재 업고 튀어’의 ost다. 드라마 애청자로서 소나기를 듣고 있으면 비를 맞고 있는 류선재에게 노란 우산을 씌어주는 임솔이 생각나며, (나의 추억인 마냥) 그들의 이야기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류선재 역할을 맡은 변우석의 피지컬, 서로만 바라보는 두 주인공의 서사, 과거와 미래가 이어지는 섬세한 연출 등 다양하지만, 이 드라마에 몰입하게 한 가장 큰 이유는 타임 슬립이다. 유명 아티스트 류선재의 죽음으로 절망했던 열성 팬 임솔이 최애인 류선재를 살리기 위해 15년의 시간을 거슬러 2008년으로 돌아간다. 타임슬립 연도가 2008년인 점이 드라마를 보게 했다. 나에겐 2008년은 이마를 뒤덮은 풀뱅 앞머리와 머리카락 끝이 귀와 닿을 정도의 C컬로 말린 풍성한 버섯 머리가 유행하던 학창시절이다. 그네 의자에 앉아 무제한으로 제공되었던 생크림을 바른 식빵을 먹기 위해 갔던 캔모아 카페, 캠코더나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화려한 자막과 효과로 편집한 UCC 등. 그 당시 내가 직접 가던 장소와 했던 것들이 드라마에 나오니 반갑기 짝이 없었다. 시대 배경이 흥미를 불러 일으켰고 두 주인공의 반전 같은 사랑 이야기가 드라마에 과몰입하게 만들었다(더 많은 사람이 봤으면 하는 바람에 스포일러는 하지 않겠다. 이 이야기는 2회 엔딩부터가 진짜다). 선재 업고 튀어를 보면서 타임 슬립이란 장르를 언제 알게 된 건지 문득 궁금해졌다. 나의 처음은 2012년에 방영한 ‘옥탑방 왕세자’다. 이 드라마는 조선시대의 왕세자 이각과 신하 3인방이 세자빈 살인 사건을 수사하던 중 현대로 타임 슬립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조선시대 사람이 현대 신문물에 적응하는 과정이 재미있고, 과거의 관계가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드라마를 통해 타임 슬립이란 단어를 처음 접하고 어떤 의미인지도 알게 됐다. 그러면서 나 혼자만의 타임 슬립 붐이 일었고 타임 슬립 드라마와 영화는 다 챙겨 봤다. 타임 슬립 영화, 드라마를 보면 타임 슬립으로 과거와 미래 중 어디로 갈지 고민하곤 한다. 둘 다 가고 싶어 고르기 어렵지만 과거에 마음이 더 기운다.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개발되지 않은 땅을 사 한탕 크게 누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지 않을까. 최근 어느 할머니의 말로 인해 속물적 이유 말고 새로운 이유가 생겼다.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의 주인공인 조경가 정영선이다. 전시 연계 학술행사인 ‘정영선이 만든 땅을 읽다’에서 진행된 ‘정영선과의 대화’는 정영선이 날것의 대상지를 마주한 그때 그 당시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특히 포스터 한가운데를 차지한 바위가 상상력을 키웠다. 이 바위는 남해 사우스케이프의 암각 동산으로, 정영선은 암각 동산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이 바위를 없애보려고 했지만, 깨다 지쳤는지 그대로 방치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이 바위가 너무 좋더라고요. 보자마자 이 바위를 없애지 않고 다듬어, 주변을 두른 건축물의 다른 고유 기능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물과 꽃을 더”(44쪽)해 만들었다고 했다. 이를 들으면서 정영선이 마주했던 다듬지 않은 바위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이때로 타임 슬립해 정영선 옆에 서서 그와 똑같은 시선으로 바위를 보며 그의 고민의 소리를 듣고 싶어졌다.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졌는지 알고 싶을 뿐 아니라 정제되지 않은 대상지를 처음 마주했던 그때 그 순간의 감정을 느껴보고 싶다. 이런 마음이 생긴 게 정영선의 말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독 더 오락가락하는 비 때문에 기후가 정말 위기구나를 실감하는 요즘이라서 날것의 자연을 만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솔이가 선재를 살리기 위해 선재를 업고 튄 것처럼, 자연을 구하기 위해 (정)영선을 업고 튀어야 할 수도.
  •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낭만은 그런 것이다 이번 생은 내내 불편할 것
    기대만큼이나 걱정되는 마음도 컸다는 걸 고백한다. 어떤 변명을 해봐도 자격지심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지만 말이다. 조경이 나무 심는 일로 인식되지 않길, 당연히 예쁠 수밖에 없는 식물을 무기로 공간을 치장하는 일로 여겨지기를 않길, 누구나 할 수는 있지만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일로 보이길. 정영선이 식물을 손수 심고 작은 정원을 가꾸며 기뻐하는 소박한 할머니처럼 비춰지기보다 그의 작업 영역이 전 국토 곳곳에 퍼져 있는 모든 공공 공간이라는 점이 드러나기를 바랐다. 그래서 자꾸 표제를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땅에 쓰는 시’. 이 낭만적인 수사들을 대중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자꾸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너무 감성에 치우친 표현이 아닐까 하고 들여다봤더니 마냥 틀린 말은 아니었다. 조경학과에 입학한 뒤 들은 첫 수업에서 조경의 정의를 배웠었다. “자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아름답고 유용하며 지속가능한 환경을 형성하기 위한 종합 예술 과학.” 아름답고 유용하며 지속가능한 환경을 형성하는 일은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한 일일 것이다. 시는 운율, 울림 같은 음악적 요소와 언어의 특성을 이용해 문학 작품 중에서도 회화적 특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장르이니 종합 예술이라 말해도 어색하지 않다. 이제 해결되지 않은 건 ‘과학’이다. 깨닫고 나니 생명, 자연, 식물, 지구, 기후 위기 같이 사람들에게 더 닿기 쉬운 어휘에 밀려 설계, 계획, 마스터플랜, 도면 등 과정을 담은 단어들이 저 먼 곳으로 밀려나면 어떡하나 시키지 않은 우려가 시작됐다. 늘 그렇듯 사서하는 걱정을 떨치기가 더 어렵기 마련이다. 조경의 목표와 결과는 잘 설명된 셈이다. 결국 조경의 작업 과정을 이야기하는 게 어려운 게 아닐까 싶다. 배정한은 “많은 언론 기사와 인터뷰는 정영선의 조경을 ‘땅에 쓰는 시’로 비유하곤 한다. …… 그러나 ‘시’라는 어휘가 연상시키는 감상적인 의미가 그의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작업을 낭만적인 영역에 가둬버릴 위험도 있다”고 말한다. 이어 정영선의 여러 말을 인용하며 “그가 말하는 시는 지사, 즉 땅의 시공간적 맥락을 섬세하게 이해하는 태도의 다른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고 정리하며 “정영선의 작업을 정영선 고유의 경관으로 만드는 것은 부지의 조건과 맥락을 세심하게 독해하고 섬세하게 연결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땅에 쓰는 시’로 비유되기도 하는 그의 태도는 ‘관계’ 혹은 ‘관계 맺기’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난다”고 설명한다.(22쪽) 이를 통해, 시라는 단어가 조경의 결과물이 아닌 그 과정에 집중했기에 선택된 단어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우리는 정영선의 작업을 시라 일컫기보다 작업 태도와 그 과정을 더 많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김아연은 정영선 조경 속 “식물 하나하나가 시의 언어”이며, 그의 “손을 거친 장소는 특유의 미적 감성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25쪽) 정영선의 작품은 단순한 형식을 다루는 것을 넘어 서식처에 기반을 둔 생태계를 품은 생태 미학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그의 작품에서 본래 자연이었던 것과 설계한 것을 구분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김아연의 말처럼 “정영선의 작품은 예쁘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대경관이 주는 숭고미에 가깝기 때문이다.” 즉, 정영선 조경의 아름다움은 자연의 원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정영선은 “조경은 땅에 쓰는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고,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깊은 울림이 뜻하는 바는 김아연이 말한 대경관이 주는 숭고미와 결이 같을 것이다. 스스로자自, 그러할 연(然)이라는 한자에서 볼 수 있듯 자연스러움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물론 아모레퍼시픽사옥과 같이 ‘보이는 정원’(각주 1)도 있다. 하지만 대상지의 규모가 커질수록, 생태계의 원리를 더 깊이 따르고 그 흐름이 진짜 자연을 향해 흐를수록, 정영선의 작업처럼 자연과의 경계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면 조경은 더욱 보이지 않게 될 확률이 높다.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방법은 조경을 잘해서 사람들이 절로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 아무도 묻지 않아도 또 듣고 보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조경 작업 이야기를 하는 것. 피곤하고 고되지만 그 방법뿐이다. “낭만은 그런 것이다”. 조경을 떠나지 않는 이상 “이번 생은 내내 불편할 것”이다.(각주 2) **각주 정리 1. 이명준, “비평: 정원섬, 보이는 정원”, 『환경과조경』 2018년 8월호, p.30. “조경이 ‘보이지 않는다(invisible)’고 할 때,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담는다. 하나는 설계한 경관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하여 대중에게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간 예술로 인식되면서 동시에 생태적 성능을 지닌 경관을 만들기 위한 조경가들의 노력이 있었다. …… 랜드폼을 디자인하는 실험이 빈번하지 않은 국내에서 아직 조경은 시각적으로, 그리고 인식적으로 충분히 보이지 않았다. 조경은 좀 더 보일(visible)필요가 있다.” 2. 김경주의 시 ‘드라이아이스’의 한 구절. 문득 어머니의 필체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그리고 나는 고향과 나 사이의 시간이 위독함을 12월의 창문으로부터 느낀다/낭만은 그런 것이다/이번 생은 내내 불편할 것.
  • [PRODUCT] 삼원색처럼 다채로운 쉼터, 써클 트리오 퍼걸러 이용자의 다양한 행태를 수용하는 다목적 쉼터
    하나의 퍼걸러 안에서 다양한 공간적 경험을 체험할 수 있다면 어떨까. 예건의 휴게 시설 전문 브랜드 ‘푸르너스(Prunus)’는 다양한 이용자의 행태를 고려하며 자연을 비롯한 외부 공간과의 조화를 꾀하는 휴게 시설을 제작한다. 써클 트리오(Circle Trio) 퍼걸러(이하 써클 트리오)는 부산의 한국과학영재학교 단지 내 오작공원에 조성한 대형 조합 퍼걸러다. 학생 기숙사인 직녀관과 견우관 사이 오작공원 중심부에 위치한 써클 트리오는 학생과 교직원의 창의적 활동과 휴식, 친목 도모를 위한 다목적 공간으로 조성됐다. 써클 트리오는 주변을 감싸고 있는 박스 형태 건축물의 단조로운 경관을 상쇄할 수 있는 원형의 셸터로 디자인됐다. 크기가 다른 3개(대, 중, 소)의 원형 퍼걸러를 삼원색 다이어그램처럼 배치했다. 각 공간에는 학생과 교직원의 다양한 휴식과 학습 행태에 대응할 수 있도록 가든 테이블, 평상, 바 테이블 등 다양한 휴게 시설물을 설치했다. 또한 퍼걸러 지붕의 높낮이를 다르게 해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봤을 때 지붕 선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게 했다. TEL. 031-943-6114 E-MAIL. [email protected]
  • [에디토리얼] 그래서 노들섬은 어떻게 될까
    글로벌 예술섬. 화려하면서도 모호한 이름을 달고 진행된 노들섬 설계공모의 당선작이 지난 5월 29일 선정됐다. 서울시 보도자료 첫 줄은 당선작 ‘소리 풍경(Soundscape)’을 출품한 디자이너 토머스 헤더윅을 ‘영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묘사한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헤더윅의 당선작은 기존 건축물을 최대한 살려 주변부를 계획했으며 공중부에 다양한 곡선으로 한국의 산 이미지를 형상화한 특별하고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헤더윅(=다빈치), 곡선, 산, 환상. 이 네 가지 키워드만으로는 사업을 둘러싼 본질적인 의문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무엇을/누구를 위한 글로벌 예술섬인가. 누가 원하는/누구를 위한 랜드마크인가. 가장 안타까운 건 이번 당선작 발표에 사회적 반응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보도자료를 받아쓴 몇몇 짧은 기사 외에는 별다른 해설, 비평, 토론, 반론을 찾아보기 어렵다. 강 한가운데 유기된 섬에서 유원지와 관광지로, 오페라하우스로, 예술섬으로, 텃밭으로, 예술창작기지로, 다시 글로벌 예술섬으로. 지난 50년간 노들섬에서 주기적으로 들끓었던 도시의 욕망에 이제 모두가 지친 것일까. ‘한강르네상스’나 ‘그레이트 한강’ 같은 슬로건은 이제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기시감과 피로감 때문일까. 한강에 랜드마크‘들’을 만든다며 쏟아내고 있는 서울시의 화려한 구상‘들’에 눈길이 가지 않는다. 전문가 사회도 조용하다. 요악하자면 무관심이거나 냉소. 노들섬 공모와 당선작에 대한 건축, 조경, 도시계획 분야의 토론이나 비평을 거의 접할 수 없다. 그나마 소셜 미디어에 간혹 올라온 단편적인 반응을 간추려 보면 크게 세 가지 갈래다. 노들섬을 지금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게 최선이라는 주장, 헤더윅의 설계안이 뉴욕 리틀 아일랜드(본지 2022년 2월호)의 재탕 아니냐는 의구심, 서울시의 랜드마크병에 대한 피로감 호소. 이번 설계공모 출품작들의 게재 여부를 두고 본지 편집부의 의견은 다소 엇갈렸다. 다루지 않는 게 곧 비평이라는 의견과 설계안의 기본 정보라도 제공해야 그나마 추후의 토론을 낳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 후자로 결론 내고 촉박한 마감에 쫓기며 서둘러 지면을 꾸렸지만 그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특히 사회적 관심을 모으기 위해 공모전 성과를 적극 홍보해야 할 서울시가 의외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토론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비평 필자를 팔방으로 찾던 중 페이스북에 올라온 건축 전문 번역가 조순익의 글을 발견했다. 급박한 원고 청탁에도 조순익 선생이 흔쾌히 수락해준 덕분에 포스팅 글을 확장한 평문을 지면에 실을 수 있게 됐다. 그의 글은 피로감을 주는 서울시 랜드마크 사업의 의도 자체를 다시 따져 묻는 피로를 행간에 감추고, 오히려 출품작들의 형태에 내재된 의미를 질문하고 탐사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토론의 방향을 제시한다. “헤더윅의 당선작은 서울시의 아이콘주의에 동원된다는 의심을 피해갈 수 없지만, 작품 자체는 단순한 아이콘을 넘어 사회적 자연의 매력을 보여준다”(94쪽)는 그의 관점은, “ ……헤더윅의 안은 자연과의 유비 속에 비교적 자유로운 인공을 녹여낸다. …… 인공이 자연을 모방하는 충동으로 나타난다. …… 이번 공모의 결과는 인간-자연 이분법에 기초한 자연중심주의보다 자연 속에서 공생하려는 인간의 유토피아적 충동, 말하자면 인간의 자유와 자연의 적극적인 어울림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96쪽)라는 의견으로 이어진다. 독자 여러분의 다양한 피드백을 초대한다. 노들섬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영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이미지대로 한강대교 위에 한국의 산을 형상화한 환상적인 경관이 만들어질까. 우리는 그 위를 산책하며 한강의 매력적인 노을을 감상하게 될까. 서울시는 헤더윅 팀과 오는 7월 설계 계약을 체결하고 기본설계와 실시설계를 진행한 뒤, 내년 2월에 공사를 시작해 2025년까지 1차 조성(수변부 팝업 월, 수상 예술 무대, 생태 정원), 2027년까지 2차 조성(공중부=‘한국의 산’, 지상부 보행로와 라이프 가든) 완료를 목표로 사업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간의 반복 경험에 비춰 예상해본다면 수변부 일부를 고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예감. 예감이 아닌 소망인가? 너무나 당연한 주장이라 독자들에게 피로감을 주겠지만 그래도 한번 더 반복하지 않을 수 없다. 더 오래, 계속, 많이 토론해야 한다. 조경가는 자신의 작업을 어떻게 정리하고 보관할까. 7월호 특집 ‘조경가의 기록법’에 열 명의 조경가를 초대했다. 소중한 글과 그림으로 기억과 기록의 켤레를 선보여준 조경가 김기천, 김지환, 박승진, 신영재, 안동혁, 이수학, 이홍인, 조용준, 최재혁 그리고 비평가 정평진에게 감사드린다.
  • [풍경감각] 힘을 내요, 보험이
    지난 5월 말 나팔꽃을 심었다. 물에 적신 키친타월에 올려둔 씨앗 세 알은 이틀도 되지 않아 껍질을 채 벗지 못한 머리를 들어 올렸다. SNS 속 친구들의 정원에는 벌써 나팔꽃이 피었던데. 봄 한철인 프리지아와 수선화가 늦게까지 베란다 자리를 비워주지 않아서 여름 꽃 준비가 늦고 말았다. 벌써 반쯤 새싹이 된 씨앗을 보니 놓친 계절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한편으론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바로 플라스틱 포트로 옮겨주었다. 다시 이틀이 지나자 V자를 그리며(나팔꽃 떡잎은 V자 모양이다) 새싹 두 개가 불쑥 솟아올랐다. 역시 나팔꽃이라서, 그리고 더운 계절이 되어서 빠르구나. 그런데 돋아난 싹이 새잎을 펼치며 자라는 동안 나머지 하나가 감감무소식이었다. 기다리다가, 궁금해하다, 마침내 땅 속을 파헤쳐볼 결심이 섰을 때 막내가 돋아났다. 떡잎 대부분을 잃고 줄기만 남은 모습으로. 뿌리파리의 소행일까. 나팔꽃에는 수선화 화분의 흙을 재활용했는데, 지난 봄 수선화가 뿌리파리를 겪었다는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보드라운 떡잎과 연약한 새 뿌리를 갉으며 얼마나 신났을까. 어쨌든 불상사를 대비해 세 개나 심은 거니까 허름한 녀석은 솎아내고 튼튼한 녀석만 기르면 된다. 식물을 뽑아내는 일은 필요할 때마다 해왔고 어렵지도 않다. 식물에는 사람의 신경계나 뇌와 같은 부분이 없으며, 따라서 통증을 느끼거나 절망에 빠지지 않을 테니까.(각주 1) 그렇지만 올해는 막내를 끝까지 기르기로 했다. 나팔꽃은 잃어버린 떡잎에 아파하지 않는다. 작은 잎 조각으로도 다음을 준비하고 줄기를 뻗을 것이다. 다른 형제보다 느리고 작고 볼품없겠지만 그만두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뽑아버리거나 또다시 실수하지 않으면 된다. 나팔꽃 덩굴을 시들게 하는 찬바람은 11월에야 불어온다. 꽃과 열매를 경험할 수 있을 만큼 아직 많은 날들이 남아있다고, 막내에게 응원을 보내고 있다. 나팔꽃에게는 응원도 무의미하겠지만. 참, 막내에게 이름도 붙여주었다. 보험을 들듯 여분으로 심었던 것이니 보험이라 부르기로 했다. 짓궂은가 싶지만 보험이는 모르니까 괜찮다. **각주 정리 1. “식물은 접촉을 느끼지만 통증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리고 동물과 달리 식물의 반응은 주관적이지 않다 …… 식물은 뇌가 없기 때문에 주관적 제약에서 자유롭다.” 대니얼 샤모비츠, 『식물의 감각법』, 도서출판 다른, 2019, p.134
  • 조경가의 기록법 How Landscape Architec ts Record Their Works?
    기록하지 않은 것은 휘발되기 마련이다. 대상지 위에 처음 그렸던 선, 땅을 마주했을 때 떠올린 날 것의 첫인상을 온전히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마스터플랜이 완성되기까지 수십 번 고쳐 그린 수많은 선은 그저 최종안이 되지 못해 버려지는 부산물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기록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밑바탕이 된다. 어떤 프로젝트에서는 대안에 불과했던 아이디어가 다른 대상지에서 최적의 해결법으로 작동하고, 버려진 스케치와 도면에서 새로운 콘셉트를 건져 올리기도 한다. 모니터를 따라 붙인 포스트잇 메모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돕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조경가는 자신의 작업을 어떻게 아카이빙하고 있을까. 작업이 끝난 뒤 정리하는 걸 선호할까, 틈틈이 정리하는 걸 선호할까. 종이 문서, 도면, 영상, 사진, 낙서, 메모 등 그 종류와 방식은 어떠할까. 폴더와 파일을 어떤 방식으로 정리할까. 프로젝트별로 묶되 별도로 선별해 정리하는 자료는 없을까. 깨달은 점을 잊지 않기 위해 꾸준히 해오고 있는 기록법이 있다면 무엇일까. 홈페이지와 SNS는 기록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개개인의 아카이브 방식이 어쩌면 자질구레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작은 기록들은 조경가의 삶과 기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개인의 기록을 넘어 시대의 아카이브가 된다. 특집은 ‘기록 작업’과 ‘기록 생활’로 구성된다. 기록 작업에서는 작업 일지, 그 과정에서 떠오른 사유, 낙서, 도면, 전시, 아카이브 홈페이지 등 다양한 방식으로 꾸준하게 기록해온 조경가의 이야기를 듣는다. 기록 생활은 여섯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 보통의 조경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작업을 정리해 남기고 있는지 들여다본다. 진행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기록 작업 기록하다_이수학 그리기, 기록하기, 엮기_박승진 장면의 기록, 기록의 공유_안동혁 지어지지 않은 계획들, 설계공모 기록의 목적_정평진 기록 생활 중앙 집중 아카이빙_김기천 과정의 기록, 재가공의 기록_조용준 백업으로부터의 자 유_이홍인 생존 기록_김지환 조경가의 드로잉, 설계적 상상과 탐험의 기록_최재혁 숨 쉬듯 관찰하고, 꾸준히 기록하기_신영재 기록 생활 필자에게 던진 여섯 개의 질문 1 기록 루틴을 알려주세요. 2 아카이브하고 있는 기록물의 종류를 알려주세요. 3 폴더와 파일을 어떻게 정리하나요. 4 자 신만의 기록법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5 회사 공용 폴더와 개인 폴더가 따로 구분되어 있나요? 구분하 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6 SNS나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나요? 운영한다면 그 역할은 무엇인가요.
  • [조경가의 기록법] 기록하다 기록 작업
    시작하다 처음부터 그것이 그리 되리라 생각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1999년 ‘한국정원 톺아보기’와 2000년 ‘조경공방나무’ 두 개의 누리집을 꾸리면서 두 해 정도 지났을 때 이것을 묶어 책을 내면어떠한가 생각했다. 책 말미에 밝혔지만,(각주 1)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과 뜻을 굳게 가다듬어 정하는’ 다짐의 의미로 만든 것이었다. 세상에 내어놓는 작업이 쌓이고 무언가를 말할 수 있을 때 묶어 책을 내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헛것을 엮어 미래를 담보해 보자는 심산으로 만든 책이었다. 그러한 까닭에 허공을 향한 날 선 비판과 자의식만 가득한 책이 됐지만, 그때 책을 묶으면서 앞으로 오 년에 한 권씩, 조경, 그중에서도 설계에 관한 책을 만들어보자 했다. 지금 보면 가당찮은 얘기였지만 그 취한 말醉言(취언)이 개인적인 기록의 시작이었다. 기록이란 무엇인가 기록의 한자를 살펴보면 마음 다듬어 쓰다 혹은 마음에 새기다의 ‘기(記)’와 중요한 일을 퍼 올려금속에 적다의 ‘록(錄)’을 합친 낱말이다.(각주 2) 그래서 다시 풀어보면 ‘수만 가닥의 말 중에서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할 말을 지워지지 않는 금속에 새기듯 남겨 둔다’는 뜻이 된다. 뜻풀이를 들여다보면 기록을 위해 ‘내용’과 ‘방법’에 앞선 두 개의 전제 또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무엇을 담아 둘 것인가 하는 내용에 대한 ‘가치 판단’의 문제와 어딘가에 그것을 어떠한 방법으로든 새기는 ‘실천 행위’를 전제로 한다. 가치를 판단하기 위해서 무엇에 가치를 두고 있는가 하는 자신의 지향점과 판단을 위한 기준이 필요하고, ‘새기다’라는 실천 행위는 꾸준한 마음과 부지런한 몸을 바탕으로 한다. 헛것을 엮어 미래를 담보했던 그 책은 자신을 향해 하나의 기준을 설정하는 행위였다. 그 기준은 앞으로 던져질 수많은 질문의 첫 번째 질문이고, 질문과 질문 사이의 간극이 큰 성긴 그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근 질문은 촘촘해지고 또한 정치(精緻)해지리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미로 같은 누리집에 남겨진 기록 혹은 질문은 이십여 년 시간의 중첩이 만든 착시다. 모두 육백여든한 쪽의 기록을 환산해 보면 달에 두 쪽 정도 글이나 그림을 남긴 것이 꾸준함은 인정하겠지만 부지런하다 할 수 없다. 꾸준함도 2021년부터 두 해 넘게 온전히 작파(作破)했다가 작년에 조금 보수 공사를 했다. 왜 기록하는가 작년 『ULC D: 도시경관 출판하기』가 던진 네 개의 질문에 답하면서 ‘누리집의 시작은 조경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었다’고 얘기했다.(각주 3) 1999년, 척박한 조경 문화의 환경 속에서 누군가가 무언가를 해주리라 기다리지 말고 비판의 칼을 너 자신에게 돌려서 너부터 시작해라. 그 시작이 한국정원 톺아보기에 있는 ‘창덕궁 후원 산책하기’(각주 4)다. “창덕궁 후원의 경관에 관한 소고_정조의 상림십경(上林十景)을 중심으로”(각주 5)라는 짧은 글(小考)을 쓰고 이전에 답사하며 찍어둔 사진으로 산책하듯이 웹을 어슬렁거리자고 만들었다. 그때 후원은 부용지와 연경당이 있는 애련지 주변만 개방하고 나머지 구간은 허가받아야 들어 갈 수 있었다. 글을 쓰면서 기록의 대가들이 살던 조선시대와 만났다. ‘궁궐지宮闕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그리고 ‘홍재전서弘齋全書’를 만나고 ‘동궐도東闕圖’라 불리는 그림을 만났다. 당시와 달리 많이 변형되었지만, 땅에 각인된 후원의 흔적 사이를 걸으며 비로소 시간이 흐르고 그곳은 오백 년 동안 짓고 허물어지기를 반복하며 바뀌는 일상과 사건의 교직交織을 마주했다. 생각해 보면 그 모두가 그림과 글, 땅 위의 기록으로 인해 가능했다. 짧은 글에서 얘기했듯이 기록이 하나의 텍스트로 읽히고 각각의 텍스트는 상호 교차하면서 해석적 순환을 이룰 때 우리는 좀 더 풍부한 시선으로 사물을 인식할 수 있다. 이때 과거는 지나간 망각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의식의 형태로 현존하는 감각적 인식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무언가를 기록하는 하나의 이유다. *환경과조경435호(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하나의 시작에 불과하다. 태도는 설계설명서도 아니고 이론도 아니고 비평도 아니지만 조경에 대해 특히 그 중에서도 설계에 대한 최저생계비가 되었으면 한다.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이수학, 『태도_조경 | 행위 | 반성 | 시작』, 녹색나무, 2002, p.177. 2. “記(기)는 言(언)+己(기)가 합쳐진 형성 한자로 ‘己’는 실가닥을 가지런히 하는 실패의 형상으로 말을 다듬어 쓰다, 마음 새기다의 뜻을 나타나고, 錄(록)은 金(금)+록의 형성 한자로 ‘록’은 물을 퍼 올리다 그래서 중요한 일을 퍼 올려서 금속에 적다의 뜻을 나타낸다.” 민중서림 편집국 편, 『한한대자전』, 민중서림, 1998, pp.1900, 2134. 3. 이수학, “네 개의 질문에 답하다”, 『ULC D: 도시경관 출판하기』, 2024, pp.90~95. 4. www.ateliernamoo.xyz/jongwon_koreangarden/huwon/index.html 5. 이수학, “창덕궁 후원의 경관에 관한 소고_정조의 상림십경(上林十景)을 중심으로”, 『한국조경학회지』 28(1), 2000, pp.92~108. 이수학은 성균관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이원조경에서 4년동안 일했다. 프랑스 라빌레트 건축학교와 고등사회과학대학원이 공동 개설한 ‘정원·경관·지역’ 데으아(D.E.A.) 학위를 받았고, 2003년부터 아뜰리에나무를 꾸리고 있다. www.ateliernamoo.xyz
    • 이수학
  • [조경가의 기록법] 그리기, 기록하기, 엮기 기록 작업
    골든 레코드 “안녕하세요?” 한국인 신순희 씨의 목소리로 녹음된 이 짧은 인사말이 담긴 골든 레코드는 지금도 지구로부터 200억km 이상 떨어진 우주 공간을 비행하고 있다. 1977년 8월 발사된 보이저호는 예정된 임무인 태양계 탐사를 마치고도 47년째 현역으로 작동하고 있다. 여기에는 중요한 또 하나의 임무가 있었다. 비행 중 조우할지 모르는 외계 생명체에 지구의 문명을 알리는 것. 이 12인치 크기의 레코드판 이름은 지구의 소리(The Sound of Earth). 지구의 자연과 문명, 과학 기술, 문학 작품, 음악 등 여러 분야의 이미지와 소리 정보가 담겼고, 한국어를 포함한 55개국의 언어로 녹음된 인사말이 함께 실렸다. 알루미늄 보호 케이스에 재생기가 함께 보관되었는데 10억 년 이상의 견딜 수 있는 내구성을 지닌다고 한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실제로 이 레코드가 외계 생명체에 전달될 가능성보다는, 다가올 인류 멸망에 대비해서 지구의 마지막 기록을 영원히 남기는 것에 더 주목했다고 한다. 잊히는 것은 두려운 것이다. 책상 서랍 서랍은 늘 닫혀 있다. 무언가를 넣을 때 잠깐 열릴 뿐 대부분은 닫혀 있다. 서랍 속에 뭐가 있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2층 혹은 3층으로 된 서랍을 나름 용도를 구분해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쓰다 보면 잡동사니가 쌓이고 분류도 엉망이 된다. 그래서 서랍은 작은 창고가 되기 쉽다. 창고는 보관이라는 순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선별하고 버리는 작업을 동반하는데, 가끔 이 창고 정리가 위로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서랍 안쪽 깊숙한 곳에서 발견된 오래된 물건은 잊힌 기억들을 소환한다. 고장 나 멈춰진 손목시계, 닳아서 해진 지갑, 수십 년 전의 학생증, 쓰다만 메모장, 희미해진 영수증, 잘려진 비행기 탑승권, 정체불명의 USB. 그리고 지우기 설계 작업의 대부분은 생각을 확장하고 구체화하고 검증하는 것이다. 공간은 실존하고, 구현된 실체로 의미를 갖는다. 설계는 가상의 공간에서 진행된다. 빠르게 그리고 지울 수 있다. 지워지지 않는 펜과 잘 지워지는 연필의 궁합은 중요하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신속히 구분하는 행위는 설계 전략에 해당한다. 그리고 지우는 행위가 반복될수록 버려지는 종이의 무게도 증가한다. 살아남은 종이는 기록물의 지위를 획득한다. 책상 위에 놓이는 위치가 달라진다. 어제까지는 이면지였는데 오늘부터는 기록물이라니. 종이 드로잉의 힘은 강력하다. 생각이 실체적으로 구현된다. 대충, 빠르게, 정확히, 모호하게 그리는 것이 가능하다. 그려진 펜의 운행 궤적을 잘 보고 있으면 그린 사람의 마음이 읽히기도 한다. 종이 드로잉은 일종의 미니어처다. 높이 값을 생략한 모형이다. 고유의 스케일을 가지고 있으며 질감의 상상이 가능하다. 시선을 바꿈으로써 간단히 투시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고 줌인과 줌아웃도 손쉽다. 무엇보다 종이 드로잉은 대체할 수 없는 원본이다. 일 또는 일상 집안에서 이 방 저 방을 다니며 걷는다. 팔을 움직여 허공을 휘젓는다. 급기야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초기 설계안은 대부분 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결코, 책상머리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일과 일상은 태생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일은 일상의 일부분이다. 설계 작업자들한테는 더욱 그러하다. 일상을 기록하는 것은 일하는 것이다. 일의 순서를 정하고, 메모하고, 검색한다. 어떤 장소를 직접 찾아가 보고, 또 대상지를 답사한다.사람들을 만나 대화하고, 자료를 탐색한다. 밥을 먹다가, 잠을 자다가, 걷다가, 운전하다가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일상은 총체적인 설계 과정이다. 기록의 환경은 획기적으로 좋아졌다. 손안의 스마트 기기는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메모가 편리해졌고 검색도 빠르다. 손쉽게 이미지를 캡처하고, 저장하고, 불러올 수 있다. 위치와 시간 정보를 동시에 기록할 수 있다. 이미지의 변형과 편집, 공유가 자유롭다. 음성과 영상 같은 동적 정보를 실감 나게 저장할 수 있다. 스마트 기기는 우리 생활 대부분에 필수가 되었고, 설계 작업자들은 그것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늘 기록하고 있고 또 기록되고 있다. 도큐멘테이션 디지털 방식의 기록물은 관리하기가 쉽지 않다. 디지털적 사고가 필요하다. 체계적인 정리 방식을 요구한다. 창고에 쓸어 담기와 같은 아날로그적 행동은 훗날 기록물을 다시 불어올 때 험난한과정이 수반된다. 드로잉 원본은 보관 자체가 의미 있지만, 정리되지 않은 디지털 자료들은 나열된 숫자에 불과하다. 『도큐멘테이션Documentation』은 저장된 디지털 이미지를 책이라는 실체로 묶어내는 작업이었다.이제 기록물은 3가지 형태로 남게 되었다. 드로잉 원본과 디지털 이미지, 그리고 책. 책을 디자인하는 것은 공간을 설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건은 공간을 점유하는 실체다. 크기, 무게, 부피, 질감을 갖는다. 디자인은 각각의 디멘션을 정의하는 것이다. 유통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무언가를 정의하는 작업은 순전히 작업자의 의지에 달려 있다. 가로 120mm, 세로 170mm, 두께 45mm는 공간 설계의 성과물이다. 효율적인 출판 규격을 벗어날 것, 크기에 비해 두께감이 있을 것, 책등의 제본 형식은 기록물임을 암시할 것, 몇 가지 설계 원칙을 더해 표지는 모호할 것, 직관적이지 않을 것. 책을 위한 평면도와 입면도, 투시도와 스케치, 스터디 모형과 실물 목업 작업이 이어졌다. 이미지들은 일과 일상을 넘나든다. 일목요연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작업하면서 버려지지 않고 살아남은 이미지들이다. 해상도가 좋지 않아도, 일부가 잘려 나가도 괜찮다. 어떤 순간을 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모든 설계 작업을 마치고, 서문에 이렇게 썼다. “작업은 늘 조심스럽고 늘 흥미진진하다. 모든 작업은 땅 위에 구축되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좌뇌와 우뇌, 양팔과 양손 그리고 두 다리의 끊임없는 구동을 요구한다. 긴장과 이완의 지속적인 반복, 불안과 안도의 이상한 동거, 진척과 되새김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역행은 설계 작업자의 숙명이다. 여기에 더해 상습적 좌충우돌과 치명적 시행착오 또한 피해 갈 수 없다. 찢어진 메모지에, 혹은 값비싼 몰스킨에, 옐로 페이퍼의 구겨진 한 모서리에도 그 흔적은 남는다. 이제는 휴대 장치가 만들어내는 고해상도 이미지까지 가세하므로 기록들은 차고 넘친다.십 년의 작업 기록, 모든 순간을 기억할 수 있었으나, 모든 기록을 담을 수는 없었다. 500여장의 이미지를 따로 모아 묶는다. 작업과 일상은 뒤섞이기 마련이다. 구분하지 않았다. 친절하지 않다는 원망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정리라는 행위는 가끔 무의미한 과장과 무책임한 소거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대신 책의 말미에 기록된 이미지들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설계의 부산물 혹은 기록물 공간 설계의 종착지는 현장이다. 지구 위도와 경도, 고도의 교차점에 무언가를 만든다. 현장은 가시적이며 입체적이다. 모든 생각과 고민, 대화는 이 특정 지점을 향해 당당하게 출발하지만 모두 무사히 도달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기록은 남는다. 설계 작업은 많은 부산물을 남긴다. 부산물은 둘 중 하나의 운명을 맞는다. 버려지거나 남거나,정연한 형태로 제본된 결과물은 수많은 부산물의 결과다. 남겨진 기록물은 아카이브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설계의 결과물이 도착한 종착지가 전혀 다른 목적지였을 때, 보존된 아카이브는 작업의 원형이 된다. 현장의 변수는 무궁무진하다. 예측 불가의 좋음보다는 생각보다 더 나빠질 확률이 다소 높다. 결과에 승복했을 때, 살아남은 기록물은 위안이 된다. 가끔, 서랍을 열어보거나 모여진 디자인 노트, 쌓아 놓은 드로잉 더미를 들춰본다. 해지거나 변색된 물건들, 번진 잉크 자국, 쓰다가 멈춘 연필의 필적, 아직 끈기가 남아 있는 테이프 흔적.수많은 물음표와 느낌표 또는 별표. 누구에게는 의미 없는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설계 작업자에게는 생생한 삶의 증언이다. 박승진은 경관, 도시, 정원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loci 대표소장이다.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를 거쳐 한국 1세대 조경설계사무소인 서안에서 설계 실무를 했다. 워커힐호텔, 서울아산병원,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등의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2007년에 현재의 사무실을 열어 풀무원 물의 정원, 남해 사우스케이프 오너스클럽, 강릉 시마크호텔, 아모레퍼시픽의 기술연구원 및 오산 뷰티캠퍼스, 제주 오설록 티하우스, 아모레퍼시픽 본사 사옥, 통의동 브릭웰정원, 대구 미래농원(mrnw) 등을 설계했다. 2018년에 10년의 작업 기록집 『도큐멘테이션』, 2021년에 글 모음집 『텍스트_북』을 독립출판으로 펴냈다.
    • 박승진
  • [조경가의 기록법] 장면의 기록, 기록의 공유 기록 작업
    우리가 여행지 같은 특별한 장소에서, 또는 일상적이지 않은 특별한 순간에 사진을 찍는 이유는 그 특별함을 기록하기 위해서다. 사진으로 남은 기록은 해당 장소나 시점의 독특한 분위기나 경험의 내러티브를 기억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일종의 기억의 보조 장치로 이용되기도 한다. 이 매체의 독특한 측면은 그 기록이 찰나의 순간에 존재하는 장면(scene)에 대한 시각적 데이터들을 기록한다는 점이다. 혹자는 이 같은 기록 방식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대상의 일부만을 재현할 수 있고, 연속적인 시퀀스나 복잡한 서사를 담기에 제한적일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유튜브나 쇼츠 등 영상 미디어를 통한 정보의 공유가 대세인 현 시점에도, 순간의 장면에 대한 기록이 여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필름 카메라를 통한 (또는 필름 카메라 느낌의 사진 후보정을 통한) 아날로그 방식의 기록이 유행의 또 한 흐름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도 이러한 가치를 방증하는 현상이지 않을까. 필자가 조경가로서 만들어내는 작업물을 기록하는 방식 또한 앞에서 언급한 장면의 기록 방식을 따르고 있다. 설계 프로세스를 진행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대표적인 순간의 이미지나 중요한 장면 장면을 기록하는 것이다. 이 장면은 프로젝트 등의 진행 과정에서 거치는 주요한 지점을 의미하는 마일스톤(milestone)에 해당한다. 때로는 설계 최종안이 조경가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설계안이 아닌 경우도 있다. 부지의 여건, 제반 상황의 변화나 클라이언트의 요청 등에 따라 설계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조정되기도 하는데, 이때 초기의 아이디어나 이전 단계의 설계 진행 내용 등을 남기기 위해 해당 장면을 기록하는 것이다. 장면의 기록은 아이디어 스케치, 해당 시점의 평면도 또는 단면도, 스터디 모형, 작업 과정에 대한 사진 등 다양한 방법과 매체를 활용하는 편이다. 지난 2022년 여름, 설계 과정에서 만들어진 중간 과정의 작업물, 주요 장면의 기록들을 모아 삼청동 가모갤러리에서 전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 전시에서 공유했던 장면의 기록들을 통해 필자의 기록 작업을 조금 더 상술하고자 한다. *환경과조경435호(2024년 7월호)수록본 일부 안동혁은 HLD에서 조경가, 도시설계가, 디자인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뉴욕의 필드 오퍼레이션스(Field Operations)에서 9년간 근무하며 필라델피아 레이스 스트리트 피어, 부산시민공원,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 파크, 홍콩 침사추이 워터프런트 등의 조경 계획 및 설계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DL E&C 상품개발팀에서 2년간 아크로, e편한세상 브랜드의 조경 상품을 총괄하는 디자인 디렉터로 일했다. 현재 HLD에서 한화리조트, 다동공원 등의 조경설계와 낙동강 하구 국가도시공원 기본구상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