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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영화 같은 장면을 기록하다
이경준 사진전: 원 스텝 어웨이
“도시 모습과 사람들이 어우러져서 만들어내는 그런 모습들을 프레임 안에 담는 작업을 해오고 있고요. 제가 경험하면서 느낀 것이나, 제 마음을 움직이는 순간들을 사진에 담아내고 있습니다.”(각주 1) 도시 관찰자이자 일상을 하나의 패턴으로 포착하는 창작자 이경준의 시선으로 살펴본 뉴욕과 서울의 일상 속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그라운드시소 센트럴의 개관작인 ‘이경준 사진전: 원 스텝 어웨이(One Step Away)’에서 그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전시는 익숙한 도시 풍경을 멀찍이 포착해 낯설고도 아름다운 장면들로 담아내는 이경준의 작품 세계를 소개한다.
전시는 작가가 주로 생활해 온 서울과 뉴욕을 배경으로 곳곳의 일상을 담은 250여 점으로 구성된다. 회색 도시가 황금빛으로 물드는 순간부터 사람들이 점, 선, 면으로 연결되는 순간, 싱그러운 녹음과 함께 휴식하는 순간까지. 네 개 챕터를 통해 누구에게나 익숙한 도시의 공간들이 이어진다. 바쁘게 혹은 단조롭게 반복되는 도시 풍경이지만, 한 걸음 멀리서 바라본 불완전하지만 아름다운 우리의 삶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시를 하나의 유기체이자 패턴으로 포착하다
물리치료사이자 프리랜서 포토그래퍼인 이경준은 2018년부터 뉴욕에서 살아왔다. 그가 처음 사진기를 든 건 고등학생 때다.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가족, 친구, 일상을 담기 시작하다가 대학생이되면서 본격적으로 사진을 공부했다. 새로운 환경과 학업에 지쳐 힘든 시기를 보내던 그는 우연한 기회로 사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높은 곳에서 바라본 도심 속 풍경에 위로를 받았다. 위에서 바라본 도시 모습에서 새로움을 느끼면서 작업의 영감을 얻기 시작했다. 건물의 기하학적 구도와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빛의 색감, 사람들의 섬세한 움직임. 한 걸음 멀리서 바라본 세상은 거대한 유기체 같았다. 이러한 시선의 전환은 청년 이경준의 단조롭던 삶에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경준은 높은 곳에서 그리고 멀리서 바라본 도시 속 풍경을 담아내는 자신만의 시그니처를 만들었다. 도로 위 차선, 건널목, 표지판, 신호등 그리고 그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패턴을 포착하는 이경준의 스타일은 세계적 기업과 브랜드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뮤지션 구원찬, 죠지와의 앨범 표지 작업, 패션 디자이너 브랜드 헬무트 랭(Helmut Lang)과의 컬래버레이션 등 국내외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게 활동하고 있다.
*환경과조경437호(2024년 9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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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 미디어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환경과조경, 한국조경신문과 인수 합병
환경과조경은 ‘주간 한국조경신문’과 함께 조경 미디어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지난 8월 1일부터 환경과조경은 주간 한국조경신문을 인수 합병해 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한국조경신문은 2008년 창간된 주간 조경 전문 매체다. 그간 조경인의 권익과 조경 분야의 소통 및 정보 공유를 위해 노력해 왔다. 하지만 국내 언론 지형의 빠른 변화 속에서, 16년간 두 차례의 휴간과 복간을 거듭하며 경영상 어려움을 겪어 왔다.
그동안 한국조경신문을 이끌었던 김부식 회장(한국조경신문)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힘을 잃지 않은 건 많은 조경인의 지지와 격려 덕분이었다고 말하며 그간의 소회를 밝혔다. 아울러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된 것에 대해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혁신하지 않으면 소멸되는 오늘의 현실에서, 40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지닌 환경과조경과의 합병을 통해 다양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고 조경의 가치와 품격을 한층 더 높여가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환경과조경437호(2024년 9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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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웃거리는 편집자] 미스터 코모레비
미스터 토일렛(toilet). 짐작컨대 이름만 들으면 중세 프랑스 왕실 소속 관리로서 아프리카 대륙 여행 중 지역 원주민의 생활 습관에서 영감을 얻어 현대 화장실의 시초가 되는 건물을 만들어 화장실을 뜻하는 영어 토일렛(toilet)의 유래가 된 사람처럼 보이지만, 전혀 아니다. 물론 화장실과 연관이 없는 건 아니다. 대체 그는 누구이며, 어쩌다 저런 별명을 얻게 된 것일까.
그는 고故 심재덕 수원시장으로 화장실 문화 운동에 평생 헌신하며 한국 공중화장실의 수준을 높인 인물이다. 평소 더러운 화장실에 대한 관광객들의 불만에 마음이 쓰였던 심 시장은 2002 한‧일 월드컵 개최를 준비하며 공중화장실 환경 개선을 도모하는 캠페인을 적극 추진했다. 당시 이 캠페인은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한국 공중화장실 역사의 큰 전환점이 됐다. 2007년 그는 암 투병 와중에도 세계화장실협회(World Toilet Association)(WTA)를 발족시켜 화장실 문화 개선 운동에 앞장설 정도로 진심을 다했다. 음악이 들리거나, 향기가 나고, 작은 그림과 좋은 문구가 걸려 있는 공중화장실을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건 깨끗하고 아름다운 화장실 만들기에 진심이었던 그의 노력이 빚어낸 결과물이다.(각주 1)
시간이 흘러 미스터 토일렛만큼 화장실에 진심인 프로젝트가 탄생했다. 2020 도쿄올림픽‧패럴림픽을 배경으로 추진된 더 도쿄 토일렛(The Tokyo Toilet)(이하 도쿄 토일렛) 프 로젝트는 어둡고, 더럽고, 냄새나고, 무섭다는 인식이 지배적인 공중화장실 공간을 개선하기 위해 추진됐다.(각주 2) 안도 다다오 등 유명 건축가와 디자이너가 모여 17개의 화장실 리노베이션을 진행했다. 들어가서 문을 잠그면 불투명해지는 특수 제작 유리로 만든 화장실, 수도꼭지를 다양한 높이에 배치해 남녀노소, 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손을 씻을 수 있게 만든 화장실 등 저마다 개성을 드러낸다. 공식 홈페이지도 독특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3D 뷰를 통해 화장실 외부부터 내부까지 구석구석 둘러볼 수 있게 했다. 화장실 변기를 구경하는 게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지만, 궁금하다면 둘러봐도 좋을 것 같다.
이 흥미로운 프로젝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시도를 선보였다. 도쿄 토일렛을 소개하기 위한 영화를 제작했는데, 그 영화가 바로 최근 개봉한 ‘퍼펙트 데이즈(Perfect Days)’다. 영화는 도쿄의 화장실을 묵묵히 쓸고 닦는 중년 청소부의 평범한 일상을 담아낸다. 주인공 히라야마는 자판기 캔커피로 하루를 시작하며, 그날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팝송을 들으며 출근하고, 때때로 필름카메라로 코모레비(木漏れ日)(각주 3)를 담아내고, 저녁엔 단골 가게에 들러 식사를 하고,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다 까무룩 잠든다. 소소한 일상의 편린을 통해 반복된 일상에서 발견하는 작은 기쁨을 차곡차곡 쌓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사실 메시지보다 영화를 담아낸 형식이 좋았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극영화를 선택한 점이 새롭게 다가왔다. 보통 이런 공간 프로젝트는 다큐로 만들어 설계를 맡은 스타 건축가의 서사를 쫓아가거나, 비슷한 사례를 모아 하나의 메시지를 던지는 형태로 빠지기 쉬운데 이 프로젝트는 이러한 전형적인 방식에서 벗어났다. 대신 상상력 한 스푼을 더해 어쩌면 어딘가 존재할지도 모르는 누군가의 삶 속에서 중요한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는 도쿄 토일렛을 은근하게 보여준다.
미스터 토일렛과 도쿄 토일렛 이야기의 공통점은 바로 태도다. 외면 받는 것을 외면하지 않고, 함부로 대하는 것을 함부로 대하지 않은 것. 박보나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의 태도가 도시의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만들어 냈다고 할까. 이번 호에 소개한 프로젝트에서도 그런 태도가 읽힌다. 탄소 저감을 위해서 목재 트러스를 활용한 하이라인-모이니한 커넥터(30쪽), 민관 협력을 토대로 저비용과 친환경이란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브지리풋 스트리트 공원(58쪽)을 설계한 조경가들은 기후 위기 시대의 과제를 외면하지 않고 도시의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만들어 냈다. 그래서 이들에게 미스터 코모레비란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코모레비처럼 반짝이는 태도를 가진 이에게 주는 나만의 작은 헌사이자 훈장이라고 할까.
**각주 정리
1. 최혜경, “심재덕 씨의 뒷간 라이프”, 『행복이 가득한 집』 2008년 3월호.
2. 최은화, “모두를 위한 공중화장실: 더 도쿄 토일릿”, 『공간』 2020년 11월호.
3.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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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응원한다, 내를 그리고 느그를
여름밤을 참 좋아했다. 해가 지면 천천히 식는 공기, 서서히 어두워지는 하늘은 여름 저녁에만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요즘 같아선 그 풍경이 다 미화로 만든 거짓 기억인가 싶다. 더운 데다 습도까지 높아 새벽녘이 되어도 온몸이 축축하다. 그래도 또 여름을 그리워할 게 분명하다. 내게 여름은 무언가 낭만적이고 아득한 존재다. 여름 같은 대상이 또 있는데, 바로 학생들이 주인공인 영화다. 언제까지 남의 삶을 나의 청춘인양 여기며 먹먹해 할지 모르겠지만, 교복을 입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여학생들의 이야기를 보면 가슴이 둥둥 울린다. ‘스윙걸즈’와 ‘훌라 걸스’가 그랬고, ‘땐뽀걸즈’(각주 1)와 닮은 ‘빅토리’가 그랬다.
배경은 1999년, 경상남도 거제. 나의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리면 생활 반경과 생각의 너비가 딱 발 닿는 곳까지밖에 이르지 못했는데, 필선은 거기서부터 나와 참 다른 사람이었다. 힙합을 너무 사랑해서 발 디딘 곳 모두를 무대로 삼는 필선은 단짝 미나에게 말한다. “거제가 좁다”고. 가뜩이나 좁은데 춤을 출 곳마저 없다. 일 년 전 사고를 일으켜 정학을 당하고 댄스 동아리 해체를 당했기 때문이다. 그런 둘 앞에 세현이 나타난다. 그가 전학 오기 전 서울에서 치어리딩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자 묘책이 떠오른다. 만년 꼴찌 축구부를 응원한다는 명목으로 치어리딩 팀을 꾸려 연습실을 확보하자!
꽤 많이 본 익숙한 문법이었기에 자연스레 다음 장면이 상상됐다. 힙합을 추고 싶은 필선과 세현의 갈등과 화해, 처음에는 응원부를 무시하지만 점점 그 효과를 보는 축구부, 축구부의 승리에 기뻐하는 치어리딩 팀, 그런 내용 아니겠나. 그런데 어라? 필선이 벌써 치어 댄스를 춰야 한다는 걸 납득하고 세현과 화해한다. 응원부 ‘밀레니얼 걸즈’가 벌써 그럴듯한 치어리딩을 해낸다. 축구부의 모습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다.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깨달았다. 어떤 춤이냐가 문제가 아니다. 이들에게 춤은 투쟁이다. 자신이 오롯이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자리를 얻어내는 싸움.
치어리딩할 때 밀레니얼 걸즈는 가정 속에서의 역할에서 벗어나 춤에만 집중한다. 어떻게 하면 더 정확한 동작을 하고 동선에 맞춰 움직일 수 있는지 연습하고 다투고 소리 지르고 뛰고 웃는다. 그 순간만큼은 어떤 외부 요소도 끼어들 수 없다. 여동생들을 돌보며 짜장면 집 장사를 돕던 장녀도, 틈틈이 다림질을 해야 하는 세탁소의 딸도, 태권도장 일은 돕지만 여자라서 태권도는 배울 수 없는 딸도 사라진다. 그 한가운데 선, 축구부 에이스의 동생이 아닌 세현이 제 이름으로 반짝반짝 빛난다. 거제 조선소에서 벌어지는 시위를 응원하는 장면이 낯설어서 좋았다. ‘땐뽀걸즈’와 ‘빌리 엘리어트’를 떠올리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거제에서 자랐다면 누구든 한번쯤 일자리로 생각해보는 이곳에서 밀레니얼 걸즈는 하늘을 향해 쭉쭉 뻗는 팔과 바닥을 세게 구르는 발동작으로 시위대를 응원한다.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안쓰럽지만 애써 웃어 보이는 표정을 짓는 대신, 다른 곳에서 했던 그대로의 치어리딩을 펼친다. 그렇게 밀레니얼 걸즈는 응원을 전하는 사람을 넘어, 조선소의 투쟁자와 같은 위치에서 연대를 펼치는 완전한 투쟁자가 된다.
이 과정을 지켜보면 밀레니얼 걸즈가 치어리딩 내내 지어보이는 미소에서 무해한 상냥함 대신 앞으로 강하게 치고 나아가려는 결연함을 읽게 된다. 그들이 춤을 추며 응원하는 행위를 좋아하는 이유도 알게 된다. 혹 깨닫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봐 필선이 말한다. “응원한다, 내를 그리고 느그를.” 현실이 영화 같을 순 없다는 걸 충분히 안다. 게다가 빅토리는 축구부의 경기 결과 외에는 영화 속 투쟁자들이 승리를 쟁취해냈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웃으며 엔딩 크레디트를 볼 수 있는 이유는 승리의 형태가 다양하다는 사실도 알기 때문이다. 박범수 감독이 승리의 정의가 꼭 고루할 필요가 있냐며 빅토리는 “그 개개의 의미 있는 승리가 모여 전보다 조금 더 나아지는 이야기”(각주 2)라고 말했듯이. 처서가 지나니 이른 아침이면 열기가 덜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사계절 중 두 번째 계절이 저문다. 온 계절이 다 흐르기 전에 남들은 이해하지 못해도 나만의 “까리한” 승리가 모여 전보다 나은 일 년이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중얼거려본다.
**각주 정리
1. 땐뽀걸즈의 내용이 궁금하다면 다음을 참고. 김정은, “땐뽀걸즈, 버티는 청춘에 관하여”, 『환경과조경』, 2017년 11월호, p.143.
2. 김영재, “제목이 ‘빅토리’인 이유 “승리의 정의 꼭 고루할 필요 있나요?”, 파이낸셜투데이 2024년 8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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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T] 모두를 위한 무장애 퍼걸러와 야외 테이블
차별의 문턱을 낮추는 열린 휴게 공간
우리 사회는 장애와 비장애인이 서로의 다름을 의식하고 배려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공존을 꾀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공간에서 장애 유무가 차별의 요소로 작용할 때가 있다.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으며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생활 공간을 만드는 조경 시설물 브랜드 ‘미담’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허물고, 다양한 사용자가 무장애 환경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쉼터를 만들고 있다.
이러한 쉼터를 통해 장애인뿐만 아니라 보호자도 편리하고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는 활동 공간을 마련했다. BF 퍼걸러와 BF 야외 테이블은 휠체어의 크기에 맞춘 곡선형 디자인을 통해 휠체어 이용자의 활동 반경을 확보한다. 스툴이나 일반 벤치를 배치해 보호자, 또는 이웃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이러한 무장애 휴식 공간은 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쉴 권리를 보장한다.
기능성뿐 아니라 시각적 요소를 고려한 디자인을 시도했다. 돋보일 수 있는 강한 색상으로 주변 공간과 차별화를 꾀하기보다는 모두가 평등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란 의미를 담아 주변과 어우러지는 색을 활용했다. 이를 통해 모두는 같은 존재라는 걸 인식시키고, 차별 없이 어울리며 쉴 수 있는 공간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차갑게 느껴질 수 있는 철재 프레임에 목재를 더해 따뜻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실용적인 수납을 위해 테이블 옆에는 가방 걸이를 설치했다.
TEL. 02-6951-1041 WEB. www.mi-d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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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친환경 파리 올림픽
이번 8월호 배송이 끝날 때쯤 적지 않은 독자들은 밤낮을 바꿔가며 올림픽 경기 중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것 같다. 2024년 파리 올림픽(7월 26일~8월 11일)과 패럴림픽(8월 28일~9월 8일)의 가장 중요한 슬로건은 ‘친환경 올림픽’이다. 2012년 런던 올림픽의 절반 수준으로 탄소 배출량을 감축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건축, 도시, 조경계가 가장 눈여겨볼 점은 100년 만에 파리에서 다시 열리는 올림픽이지만 신축 경기장이 거의 없다는 것. 경기장의 95%가 기존 시설 재활용이거나 임시 건물이다. 신축 건물은 선수촌과 수영 센터 정도다. 아프리카계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파리 북부 생드니 지역에 저탄소 기술로 새로 지은 이 건물들은 올림픽이 끝나면 청년층과 스타트업이 입주하는 주상복합 건물로 쓰이면서 도시 재생에 활용될 예정이다.
파리 시내와 인근 지역의 랜드마크와 명소 10여 곳이 임시 경기장으로 탈바꿈했다.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 상드마르스 광장이 비치발리볼과 장애인 축구 경기장으로 변신했다. 도시의 척추인 샹젤리제 거리에서는 사이클 경기가, 도시의 혈관인 센 강에서는 남녀 철인3종 수영 경기가 펼쳐진다. 1900년 만국박람회의 전시장이었던 그랑팔레는 태권도와 펜싱 경기장으로 쓴다. 서양 조경사의 정점인 베르사유 궁원에서는 근대5종과 승마 경기가 열린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잠들어 있는 앵발리드 광장은 양궁과 육상 종목에 쓰인다. 프랑스 대혁명의 역사가 깊게 쌓인 도심 한복판 콩코르드 광장에서는 이번에 정식 종목으로 처음 채택된 브레이크댄스를 비롯해 스케이트보드, 3대3 농구 등 역동적인 경기가 펼쳐진다. 소장 욕구를 샘솟게 하는 파리 올림픽 공식 포스터(일러스트레이터 위고 가토니 작)는 도시의 광장과 공원을 올림픽 경기장으로 재활용한 파리발 도시 혁신을 생생히 보여준다.
파리 올림픽의 에어컨 퇴출은 개막 몇 달 전부터 핵심 이슈로 떠올랐다.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선수촌에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았다. 대신 건물을 효율적으로 배치해 공기 순환을 촉진하고 차가운 지하수를 이용해 냉각 시스템을 가동하는 방식을 택했다. 폭염에 따른 경기력 저하를 우려한 일부 국가의 반발로, 결국 파리올림픽조직위원회는 각국이 필요한 경우 자체 비용으로 휴대용 에어컨을 주문할 수 있다고 한발 물러섰다.하지만 건설, 교통과 운송, 식음, 운영 등 여러 방면에서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친환경 올림픽이라는 목표가 구체적으로 실천되었다.
새로 지은 건물 옥상에는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고, 대회 운영에 필요한 전력은 풍력과 태양광으로 만든 재생 에너지로만 충당한다. 플라스틱 사용을 철저히 제한한다. 경기장에 페트병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고, 선수와 관중 모두 재사용 가능한 병과 컵을 써야 한다. 탄소 발자국을 줄이기 위해 프랑스산 식재료를 80% 이상 사용하며, 반경 250㎞ 안에서 기른 제철 식재료의 비율을 25% 이상으로 유지한다. 대부분의 경기장이 반경 10㎞ 이내에 있고 선수촌에서 30분이 걸리지 않기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충분히 접근할 수 있다. 참가 선수와 입장권을 소지한 관중은 지하철을 비롯한 모든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친환경 올림픽’의 기치를 내건 파리 올림픽은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혁신적 도시 실험의 현장인 셈이다.
이번 호 특집 “정영선을 읽는 시선들”은 지난 7월 3일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국립현대미술관 서울, 4월 5일~9월 22일) 연계 학술행사로 열린 ‘정영선이 만든 땅을 읽다’의 발제와 대담 내용을 다시 엮은 것이다. 많은 독자의 시선을 오래 붙잡는 지면이 되기를, 그리고 ‘2024년 정영선 현상’에 대한 토론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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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감각] 아침에는 파스타를 생각한다
모닝콜이 울리고 있다. 눈을 감고 돌아눕는다. 해야 할 일 목록이 머릿속에서 차락 펼쳐지지만 일어나고 싶지 않다. 써야 하는 글과 그려야 하는 그림. 잘하고 싶은데 쉽게 풀리지 않아 걱정이네. 이제 수영장에 갈 시간인데, 그냥 오늘만 쉴까. 화분에 물을 줄 때가 되었던가. 조금만 이따가 확인해 봐도 별일 없겠지. 그러고 보니 베란다에서 꽃구경한 지도 꽤 되었네. 즐거운 일 뭐 없나?
파스타를 떠올린다. 오늘은 어떤 파스타를 만들까. 꼬불꼬불 뭉쳐 있는 페투치네나 소면처럼 가느다란 엔젤헤어를 쓰는 레시피를 찾아볼까. 레몬과 생크림이 떨어졌으니 마트에 다녀와야겠구나. 선드라이 토마토랑 안초비를 넣으면 요리가 근사해진다고 하던데. 마트 간 김에 구경하자. 오늘은 어제보다 맛있으면 좋겠다. 가장 맛있는 레시피는 기억해 뒀다가 친구들이 작업실에 놀러 오면 만들어 줘야지. 아니다. 좋아하는 파스타가 뭐냐고 메시지를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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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선을 읽는 시선들
Reading Jung Young Sun and Her Landscape Works
지난 7월 3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다원공간에서 ‘정영선이 만든 땅을 읽다’가 개최됐다.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 연계 학술행사로 마련된 이 심포지엄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하고 한국조경가협회와 본지가 협력해 진행했다. 행사는 ‘조경가 정영선을 읽다’, ‘정영선의 작업을 읽다’, ‘정영선과의 대화’의 세 개 세션으로 구성됐다. 첫 번째 세션 ‘조경가 정영선을 읽다’에서는 배정한 교수(서울대학교)와 김아연 교수(서울시립대학교)가 정영선에 대한 학술적 비평의 텍스트 두 편을 발제했다. 두 번째 세션 ‘정영선의 작업을 읽다’에는 협업 파트너, 사제지간 등 정영선과 다양하게 관계 맺은 6인의 발제자를 초대했다. 이들은 정영선이 설계한 장소를 조명하며 그의 설계 태도, 철학, 작업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지막 세션 ‘정영선과의 대화’에서는 정영선이 조경진 교수(서울대학교), 배형민 교수(서울시립대학교)와 함께 대담을 나누고, 관객의 질문에 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의 발제와 대담을 지면에 글의 형태로 기록한다. 교차하고 비껴가는 여러 시선이 오늘날 조경설계에서 정영선이 갖는 가치를 새롭게 그려주기를 기대하며, 지면에 옮기는 과정에서 세션의 구분을 없앴다. 이번 학술행사를 촉발한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오는 9월 22일까지 진행된다.
진행 김모아, 금민수, 이수민 디자인 팽선민
태도가 경관이 될 때: 정영선의 조경_배정한
유산의 창조, 정영선이 만든 한국 조경설계의 변곡점_김아연
맥시멈과 미니멈_박승진
협업의 유산을 읽다_전은정
땅을 읽는 법을 배우다_이호영
선유도공원이 건네는 위로_조용준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과 디올 성수, 미래 세대의 수용_김선미
한국 조경 가치의 시각화, 아모레퍼시픽 본사_백규리
정영선과의 대화: 식물과 땅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_정영선, 조경진, 배형민
정영선을 읽는 시간_글 최영준
2024년 여름, 우리는 정영선의 조경이 일반인에게 하나의 문화적 코드가 된 계절을 통과하고 있다. 일 평균 1,300명의 관람자가 조경이 무엇인지를 알아가고 있고, 공중파 미디어 콘텐츠는 물론 아이들의 채널에서도 땅에 시를 쓰는 할머니가 인기다. 그 인기와 인지의 바탕이 1세대 여성 조경가 정영선이라는 커리어의 특수성과 소탈한 성품에서 기인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대중이 가장 크게 놀란 순간은 아마 그가 설계하거나 기획을 이끈 일의 목록을 마주쳤을 때일 것이다. 많은 이가 일상적으로 방문하던 장소들이 그녀가 살아 숨 쉬는 많은 것을 담아낸 땅들이란 걸 알았을 때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그 장소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궁금해할 것이라는 생각이 학술행사 ‘정영선이 만든 땅을 읽다’ 기획의 시작점이었다.
그가 만든 여러 땅들의 작업은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있다. 전통과 동시대성을 모두 품는 광폭의 시대정신, 국토를 다루는 공공과 기업 및 개인을 포괄하는 클라이언트의 다채로움, 작은 뜰에서 초대형 공원까지 다채로운 규모. 다양한 관련 분야와 협업해 온 두꺼운 포트폴리오는 다채로운 독자의 목소리로 들어볼 가치가 있는 현대 조경의 역사이자 흥미로운 독해의 대상이다.
정영선이 만든 땅을 읽는 첫 순서인 ‘조경가 정영선을 읽다’는 지난 50년 동안 조경가의 길을 걸어오며 땅과 관계 맺어 온 그녀의 인생과 지사地史를 관통해 줄 이야기로 시작되는 것이 마땅했다. 전시 도록에도 수록된 배정한 교수(서울대학교)의 글은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이야기와 변곡점이 된 주요 작업 세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정영선을 조망한다. 경관을 대하는 태도가 그의 손으로 만들어 낸 경관이 되었다는 해석은 정영선을 아는 데서 이해하는 단계로 이끌어 준다. 김아연 교수(서울시립대학교)는 직접 조경 작업을 하는 현역 동료로서의 시선과 정영선이 한국 조경 분야에 드리우는 명과 암을 동시에 들려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한국 조경의 여러 변곡점을 짚으며 이어간 그의 발제는 정영선의 조경이 왜 가장 평범한 혁명일 수 있는지 피부에 와 닿도록 설명해준다.
두 번째 세션 ‘정영선의 작업을 읽다’에는 정영선이 만든 땅의 너른 스펙트럼을 담아줄 다채로운 성격의 발제자를 초대하고, 각자 한 장소에 대한 감상과 비평을 담아줄 것을 부탁했다. 다각도의 시선으로 작업을 읽기 위해, 정영선의 작업과 서로 다른 관계성을 갖는 세 그룹을 설정했다. 첫 그룹으로 조경설계 서안(이하 서안)이란 조경 작업의 울타리에서 정영선과 함께 협업하고 사제 및 조력 관계를 맺었던 박승진 소장(디자인 스튜디오 loci), 전은정 소장(조경포레)을 초청했다. 서안의 굵직한 프로젝트를 함께 수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와 근거리에서 정영선과 직접 상호 작용하며 배우고 호흡했던 조경 유산에 대해 들려준다.
다음으론 1세대 조경가인 정영선의 작업을 관찰하고 경험하며 성장했고 현재 자신의 작업을 가장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는 동시대 조경가 이호영 소장(HLD)과 조용준 소장(CA조경기술사사무소)을 섭외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정영선의 조경이 그들에게 끼친 영향력과 자극,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시도한 경험을 듣고 싶었다. 이호영 소장은 서안에서 실무를 시작했으나, 정영선과 직접적인 협업의 기회가 적었기에 ‘어깨너머 스스로 배운’ 정영선 조경에 대한 연구 기록과 그것이 본인의 작업에 어떻게 투영되었는지를 들려준다. 직접적 접점이 없었던 조용준 소장은 ‘원거리에서 관찰한’ 정영선의 조경을 선유도공원 평면의 모사를 통해 탐독한다.
세 번째 그룹에는 다음 세대라 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최근에 조경에 입문한 이들이자 조경계에서 각자의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김선미 부장(동아일보 콘텐츠기획본부)과 백규리 매니저(현대엔지니어링 건축조경팀)를 초대했다. ‘다음 세대의 해석과 수용’이라 이름 붙인 이 그룹이 정영선이 만든 땅의 공동 생산자나 후속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로서 어떻게 정영선의 조경을 받아들이고, 어떠한 태도와 호흡으로 청자에게 전달하는지를 담는 것도 의미있다고 보았다. 정영선이 작업을 통해 제시한 지속가능성과 한국성에 대한 정신과 그 해석을두 사람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다.
마지막 순서는 이번 전시의 작가인 정영선과의 직접 대화를 나누는 ‘정영선과의 대화’로 구성했다. 대화의 시작을 열고, 작가에게 주요한 질문을 던질 대담자로서 정영선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조경진 교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와 대학원에서 사제관계이기도 했던 배형민 교수(서울시립대학교)를 섭외했다. 최종 순서로 객석에서 질문을 받고 대답을 듣는 시간은 필자가 진행하며 마무리했다.
정영선의 작업과 다양한 접점을 갖는 여러 세대의 후배 조경가와 이론가의 생각을 하나로 엮는 이 기획은 정영선의 조경이 텍스트로서 얼마나 다양한 독해가 가능한지에 대한 기획이었다. 모두가 그의 작업과 삶으로부터 선한 영향력을 받았고, 그에 대한 유의미한 반추와 정리, 해석과 기록을 들려주었다. 학술행사가 끝나고 며칠 뒤,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많은 조경인에게 텍스트가 된 정영선의 조경이 있었는데, 과연 조경가 정영선에게 텍스트는 무엇이었을까. 교과 과정도 미완이었을 1세대에게는 무엇이 기초가 되는 텍스트이자 레퍼런스였을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 산천의 자연, (그녀가 정원이라 칭하는) 국토 경관’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할아버지의 과수원이 펼쳐져 있던 들판과 뒷산, 국토의 원형이 남아있던 개발 시대 이전 한국 땅의 본 모양새는 그가 땅에 작업을 하는 영감의 원천이자 근간이 되는 텍스트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참고할 정보와 이미지가 홍수인 시대, 원 경관의 흔적이 자본의 지우개로 소실되는 시대를 사는 우리 세대에게 조경가 정영선이 만든 땅의 고유성은 우리의 시각과 태도를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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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선을 읽는 시선들] 태도가 경관이 될 때: 정영선의 조경
조경가 정영선과 한국 조경 50년
1941년생 정영선은 1973년 신설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조경학과에 1기로 입학하면서 조경과 연을 맺는다. 1인당 국민소득 320불에 불과하던 시절, 근대화와 국토 개발의 급류 속에서 한국가 통치자의 강력한 주도로 서구의 전문 직능이자 학문 분과인 조경(landscape architecture)이 전격 수입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경제비서실 내에 조경비서관까지 임명했고(1972년), 제도권 조경은 불과 3년 만에 학제(1973년 학과 신설), 공공기관(1974년 한국조경공사 설립), 자격제도(1975년 조경기술사 시행)를 갖추게 된다.(각주 1) 이 이례적인 상황 속에서 시작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정영선의 조경 인생은 한국 조경 50년사의 궤적과 그대로 일치한다. 그 자신의 회고처럼, 그의 조경은 “오늘 우리 조경계가 안고 있는 고뇌”였고 “현실과 이상 사이의 끝없는 갈등을 헤쳐 나온 우리 조경인들의 삶 그 자체”(각주 2)였다. 조경가 정영선을 통해 우리는 한국 조경의 50년 성장사와 그 명암을 다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영선의 조경은 곧 한국 현대 조경이라는 등식이 반드시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러 지점에서 구별된다. 그는 주로 공공 발주 물량과 건설 시장 여건에 의존해 온 한국 조경계 전반의 불안정한 조건을 독자적 조경론과 경관 미학, 창의적 조경 실천을 통해 돌파하며 새로운 길을 개척해 왔다. 2023년 세계조경가협회(IFLA)는 정영선에게 제15대 제프리 젤리코상(Sir Geoffrey Jellicoe Award)을 수여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정영선은 한국에서 조경설계를 개척하고 선도했을 뿐 아니라 서양에서 유래한 조경 개념을 한국의 대지와 경관에 맞게 ‘번역’해냈다. 그는 청계천 복원, 선유도공원 등 다수의 독보적 프로젝트를 통해 자연과 도시를 화해시키고 자연의 과정과 건조 환경을 통합하며 과거의 산업 흔적을 존중해 설계의 한 부분으로 포섭하는 최근의 세계적 경향을 예견하고 실천했다.
동시대 조경의 핵심인 회복탄력성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사명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작업에 내재해 있었다.”(각주 3) 이처럼 여러 걸음 앞서가며 새 지평을 연 정영선의 이론과 실천은 그 개인의 작품과 문화적 역량에 대한 조명과 인정으로 이어졌을 뿐 아니라 전문 직능으로서 조경의 사회적 역할과 위상을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영선의 조경은 한국 조경 50년사에 대한 예리한 비평이기도 하다.
진화와 세 개의 변곡점
정영선의 손을 거친 조경 작품은 정확한 목록을 작성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개인과 기업의 정원, 도시 가로와 광장, 근린공원, 기념공원, 생태공원, 산업시설 재활용 공원, 선형 공원, 묘역, 병원, 오피스, 상업시설, 복합문화공간, 공동주택 단지, 공장, 캠퍼스, 종교 시설과 단지, 테마파크, 리조트 등 그가 다룬 프로젝트의 유형은 조경 업역의 다양성과 복합성 그 자체를 예시한다. 작업의 양과 유형 못지않게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조경 이론과 실천이 계속 진화해 왔다는 점이다. 그 진화의 함수에서 변곡점이 된 세 가지 작업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환경과조경436호(2024년 8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1970년대의 정치 지형과 사회 상황과 결부된 한국 조경 태동기의 사정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할 것. 배정한, “근대의 굴레, 녹색의 이면: 한국 조경의 근대성과 박정희의 조경관”, 『건축·도시·조경의 지식 지형』, 나무도시, 2011, pp.152~181.
2. 정영선, “조경과의 조우, 그리고 나를 있게 한 소중한 것들”, 『환경과조경』 1998년 6월호, p.30.
3. International Federation of Landscape Architects, “Landscape Architect Youngsun Jung from South Korea is the 2023 Recipient of the Sir Geoffrey Jellocoe Award”, www.iflaworld.com/sgja-2023-winner, 2023.
배정한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 교수이며, 본지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조경 이론과 설계, 조경 미학과 비평의 접면을 확장해왔다. 대표 저서로 『공원의 위로』, 『조경의 시대, 조경을 넘어』, 『현대 조경설계의 이론과 쟁점』이 있으며, 『경관이 만드는 도시』와 『라지 파크』를 번역했다. 『한국 조경 50년을 읽는 열다섯 가지 시선』, 『용산공원』, 『건축·도시·조경의 지식 지형』, 『공원을 읽다』, 『서울도시계획사』 등 이십여 권의 책을 기획하고 동학들과 함께 썼으며, ‘용산공원’ 종합기본계획 등 다수의 대형 공원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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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선을 읽는 시선들] 유산의 창조, 정영선이 만든 한국 조경설계의 변곡점
유산은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혹은 현 세대가 앞 세대로부터 물려받는 물적·문화적 자산이다. 자산(asset)이 유산(heritage)이 되기 위해서는 세대를 초월하는 전승(pass on)이 필요하다. 조경가 정영선의 작업이 국토 근대화를 보정해 온 푸른 유산으로 남을 것인가 혹은 대한민국 조경 1세대의 예외적 사례로 기억될 것인가는 다음 세대의 실천에 달려 있다. 그의 작업이 현재를 성찰하는 준거가 될 때, 그리고 내일을 상상하는 영감의 샘으로 작동할 때, 세대와 세대 사이에서 유산은 창조된다. 이 전승의 과정에서 우리의 설계 현실을 반성하며 질적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여덟 가지 쟁점을 제시한다.
조경 디자인의 특수성
“샛강에서 디자인한 곳이 어디예요?”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보고 나오면서 어느 도시 전문가가 전화를 걸어왔다. 여의도샛강생태공원(이하 샛강)에 가본 적이 있는데 너무 자연스럽다며 디자인한 곳이 어디인지 궁금해했다. 인간적 쓸모를 만드는 근대적 의미의 디자인 관점에서 보면 샛강은 잘 보존된 하천 풍경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주차장과 관리사무소를 만들려는 서울시의 계획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정영선의 회고가 떠오른다. 그는 개발이라는 도시적 욕망과 인간적 질서의 외삽을 거부하고 하천에 내재된 자연 형성 과정의 조건을 만드는 일을 디자인의 이름으로 관철했다. 새로운 것, 인공적인 것, 수직적인 것, 눈에 띄는 것을 만드는 개발 시대의 디자인 관행 속에서, 원래의 것을 지키고 폭력적 개입에 저항하는 일 자체가 디자인의 과업이 될 수 있음을 샛강은 증명하고 있다. 자기완결성을 포기하고 ‘연결’과 ‘관계’를 통해 총체성을 만들고 자신을 낮춰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역설을 통해 디자인으로서 조경설계의 고유성과 특수성을 보여주었다.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자. 폭력적인 개발 드라이브와 발주처의 명령에 디자이너 개인이 맞서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용역자이기에 앞서 전문가라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디자인적 완성도는 어디에서 올까. 자신만의 매니페스토와 화려한 컴퓨터 조형에 취한 설계에 몰입하고 있진 않은지. 디자이너들의 자아도취적 발언과 시각적 포장의 재생산 관행, 인스타그래머블 풍경 만들기와 포토 스폿의 난무 역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샛강은 우리에게 조경 디자인의 고유한, 그래서 동시대에 더더욱 생경한 역할과 방향을 제시한다.
조경이라는 이름
“나는 조경이라는 말이 싫다.” “조경은 땅에 쓰는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고,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습니다.” 모두 정영선의 말이다. 사석에서 그는 경치를 ‘만든다’라는 조경造景이라는 이름을 애초에 잘못 붙였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공적으로 그는 조경의 가치와 역할을 ‘한편의 시’에 비유하며 울림을 준다. 그에게 조경은 애증이 서려 있는 단어다. TV 속 유재석의 입에서 ‘조경가’라는 단어가 발음될 때 조경은 새로운 뉘앙스를 갖는다. 정영선의 업적은 모두 조경가라는 직능명을 붙이고 이뤄낸 성과다. 그는 “후배 세대가 조경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활동하고 있다며 늘 우리 분야의 가치와 조경설계의 역할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격려한다. 그는 조경가의 사회적 위상을 새로운 레벨로 올려놓았고 우리가 하는 일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게 만들어준, 조경의 살아 있는 정의가 되었다.
그렇다면 조경가는 누구인가. 누가 조경가의 자격을 정하는가. 건축사와 같은 전문 설계 자격 제도를 법적으로 가지지 못한 우리 분야에서 조경가는 오랫동안 자격 여부에 상관없이 스스로 자부심을 부여할 수 있는 열린 단어였다. 단 한번의 공모전 당선으로 작가의 호칭을 획득하는 시대에 20~30년 넘게 설계 일을 해도 여전히 업자인 수많은 전문가에게는 어떤 새로운 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까.
한국 조경 50년에도 조경이라는 이름에 대한 부끄러움과 불편함이 스며 있다. 대학 학과 명칭에서 조경이 사라지기도 하고, 대학마다 경쟁력 강화와 입시 경쟁률 제고를 이유로 조경학과의 명칭을 없애거나 변경하기도 한다. 일련의 논의 과정을 통해 우리 사이에도 찬반의 입장이 선명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각주 1)이름에 앞서 우리는 조경의 이름으로 행한 일들에 대한 성찰에 게을렀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한국성과 지역성
“나 옛날 살던 동네 같아요.” 학생들과의 토론 과정에서 영화 ‘땅에 쓰는 시’에 나오는 정영선의 양평 정원을 두고 나온 얘기다. 부모님이 살던 시골집도 양평 정원처럼 집으로 들어가는 어귀에개집과 심드렁한 흙 마당이 있었다. 그 주변으로 어린 눈에는 대단할 것 하나 없는 들풀이 나부꼈
다. 왜 많은 사람이 영화 속 풍경을 보고 자신만의 고향과 어린 시절을 떠올릴까. 정영선 작품의한국성을 희원과 같은 전통 정원에만 한정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영선은 원 경관을번역하고 재창조한다. 그의 창조 안에는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기억으로서 자연이 내재되어 있다. 늘 보던 아름다움을 재발견해 재구성하는 정영선의 설계 방법은 그렇기 때문에 지역적이며, 많은 사람이 공감하기 때문에 한국적이다. 그의 작품은 기억과 장소 애착 환기 장치trigger로서 풍경의 힘을 보여준다. 그가 구현하는 한국성은 조형 요소가 아닌 경험과 기억의 원형이며, 그가 다루는 과거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모두 내포하는, 옛것의 창의성과 창발성을 실현하는 시제다.
우리가 전통을 다루는 관행을 돌아보자. 전통은 형식적으로 재생산되고 많은 경우 공간 작명에 그치는 예스러운 것 그 이상이 아니다. 레트로 감성이라는 표제어로 과거는 상품 가치를 갖게 되고, 아이러니하게도 옛것은 새롭지 않으면 가차 없이 폐기된다. 새롭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무한 브랜드 경쟁 시대에 느린 시간성으로 채울 수밖에 없는 조경이, 지속적으로 폐기되고 갱신되는 패스트 디자인의 하나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새삼 물어본다.
시그니처 식재
“어? 여기 정 선생님이 하셨나?” 십수 년 전, 김해 클레이아크미술관으로 가는 길에 잠시 봉하마을을 거닐다가 나의 동료가 무심코 뱉은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 생가가 있는 마을 길가에 병아리꽃나무가 있는 걸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지금이야 정원 열풍으로 이름 외우기도 벅찬 식물이 각종 매체를 통해 쏟아져 나오니 병아리꽃나무가 무슨 대수냐 싶지만, 그때만 해도 흔히 쓰는 조경수의 종류는 손에 꼽을 만큼 빈약했다. 정영선의 손이 닿은 곳에는 일반적으로 쓰지 않은 한국 자생종이 어김없이 심겼다. 이름도 아름다운 것이 많았다. 이스라지, 미나리아재비, 노루오줌, 노루귀, 팥꽃나무, 꼬리풀 등. 식물 하나하나가 시의 언어다.
그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자생 식물을 조경설계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는 측면과 더불어 비싼 소나무와 몇몇 수종에 의지하던 관행적 식재 설계를 거부해 몸값에 따른 식물의 위계를 당당하게 해체했다는 점이다.(각주 2)그의 식재 디자인 어휘는 자연을 공부해서 얻은 그만의 사전에서 비롯된다. 어느 시인은 사전을 통틀어 여기에 쓸 수 있는 단어는 꼭 하나라고 얘기했다. 정영선의 사전에는 바로 그 장소에 필요한 우리 식물이라는 단어들이 채곡채곡 쟁여져 있다.
아름다움의 근원
“눈물겹게 아름다워요.” 정영선의 손을 거친 장소는 특유의 미적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서식처에 기반을 둔 건강한 생태계의 내재적 아름다움은 시각적 즐거움을 넘어서는 또 다른 미적 경험을 선사한다. 정영선의 작업은 대상의 물리적 속성을 다루는 형식 미학에서 생태 미학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의 작품은 기후 위기 시대 우리 주변에 창궐하는 예쁘기만 한 자연의 모사품들 이면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에 질문을 던진다. 과연 이들은 지속가능한가. 정영선의 작품은 예쁘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대경관이 주는 숭고미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적 체험은 경관에 몰입하는 주관적 체험을 전제로 한다. 그는 풍경을 중첩시켜 단위 공간의 제한된 경계를 확장하고 깊이감을 형성한다. 경계의 디자인으로 철저하게 주변을 차단하거나 열고 중첩시켜 경관의 깊이와 몰입감을 준다. 그 아름다움은 시각적·표면적 아름다움을 넘어선 경험적·윤리적인 미적 태도를 형성한다. 윤리와 미학이 결합하고 의미와 아름다움이 합쳐진다.
최근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국가정원과 정원박람회 현상에서 대경관은 실종됐다. 국가정원과 정원박람회 후보지는 대체로 하천 부지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남은 큰 빈 땅이 그곳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각종 정원 행정이 하천의 하천다움, 강의 원 풍경을 얼마나 숙고해 추진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예쁜 것만 살아남는 시대, 소비재로서 자연은 찰나적 풍경 이미지로 끊임없이(재)생산된다. 기후 위기 시대, 자연에 대한 위기의식이 결여된 자연의 상품화가 엄청난 예산으로 행해지고 있는 이 현실 앞에 우리는 침묵할 수 있는가.
공공 프로젝트의 도전
“공공이 해도 이럴 수 있다니.” 선유도공원은 대한민국 공원 디자인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서울시 행정가의 전폭적 지지와 현장 설계와 감리가 가능했던 예외적 상황이 크게 기여한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선유도공원을 공공 발주 프로젝트의 대표 사례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대표성은 동일한 범주의 다른 사례와의 유사성을 가져야 하는데 선유도공원은 일반적인 공원 만들기 관행에서 이질성이 훨씬 크다. 오히려 발주부터 시공까지의 공공 프로젝트 전 과정에 있어 프로세스의 변칙에 가까운 예외적 사례다.
우리는 왜 좋은 작품을 탄생시키는 절차를 만드는 일에 인색하고, 예외적인 스타의 도래만 기다리는가. 한국 조경은 국가 주도의 공공 프로젝트를 통해 성장하고 정착해왔다. 그 가운데 정영선은조경을 통한 사회적·지구적 책무를 자임해왔으며, 제도의 공백을 메운 설계가의 헌신과 재능기부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이는 전문적 설계자 자격, 공정한 발주 방식, 현장 감리 제도가 없는 현실에서 여전히 진행형이다. 국가 주도의 사업이 넘쳐나던 풍요의 시대는 품질에 대한 치열함과내부 성찰 능력을 빈곤하게 만들었다. 설계의 기획-발주-심의-시공-감리 전반의 제도적 기반의 취약성은 또 다른 정영선의 탄생으로 메꿀 수 없는 근본적 한계다. 또한 개인의 능력에만 의존하는 작품 만들기에 대한 비판적·비평적 담론과 실천이 희박한 현실 역시 우리가 서있는 취약한지반이다.
작가로서 조경가
“조경가가 꼭 호미를 들어야 되나요?” 학생들과 토론하다 보면 꼭 등장하는 질문이다. 호미는 정원 가꾸기 전통이 훨씬 오래된 서구권에 역수출될 정도로 가드닝의 핵심 도구다. 이 시대 호미는 무엇을의미하는가. 누구나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호미라는 도구의 보편성은 조경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인식을 강화한다. 아이러니하게 정영선의 호미는 현장 감독 권력을 가진 자의 도구이며, 완성도에 대한 전문가적 집착을 보여주는 징표다. 그에게 호미가 상징하는 것은 땅과의 교감, 관찰의 방식, 직업 윤리와 책임감이다. 박승진은 이를 “작가적 태도로서 직접하기”라고 불렀다..(각주 3)직접하기는 경험적 지식을 축적한다. 실천적 학문으로서 조경은 이론과 개념을 구현하면서 겪는 시행착오를 통해 진화한다. 데이터에 기반을 둔 의사결정과 연구 성과는 합리성과 첨단성을 보장하지만, 직접하기를 통한 검증은 나 몰라라 한다. 대중에게 호미는 조경의 강력한 아이콘이자 상징으로 작동한다. 많은 후배 디자이너 역시 호미를 들지 않으면 작가 반열에 오르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을 가지고 산다.
반면 강력한 호미의 대중적 상징성은 조경의 정의와 조경가의 역할에 대한 인식을 꽃 심는 상징적 행위에 제한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치열한 첨단 경쟁 사회에서 조경의 지향성이 아날로그 감성에 고착되는 것을 경계한다면, 우리의 직접하기와 현장성은 어떻게 진화해야 할 것인가. 이 또한 중요한 개인적, 나아가 시대적 고민거리다.
국토의 총체성과 정원
“국토는 하나의 정원입니다.” 정영선이 즐겨 하는 이야기다. 나는 이 아름다운 문장이 수많은 행정가들에게 왜곡된 영감을 줄 수 있음을 걱정한다. 정영선의 개별 프로젝트에는 국토 경관의 아름다움과 총체성이 관통하고 있다. 그는 성종상과의 대화.(각주 4)에서 “정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쓰레기를 치우고 땅을 다듬어야” 함을 강조하며, 꽃을 심기 전 땅에 대한 밑 작업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그에게 정원은 “잠시 빌려 쓰는 땅에 대한 헌사”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정원 사업에는 정원의 본질, 지구적 위기 의식, 국토 가꾸기의 철학이 상실되어 있다. 정원도시는 장식과 행사 중심으로 추진되는 지자체장의 정치 매니페스토가 되어가고 있고, 행정으으로서가드닝은 어마어마한 예산을 투자하며 초기 효과에 골몰하고 있다. 흙이 보이지 않도록 빡빡하게 심으라는 어느 지자체의 지침은, 식물이 성장하며 고유의 형상과 건강한 생육을 위해 밀도를 낮춰 심는 자연주의 정원과는 정면으로 대치된다. “국토는 하나의 정원”이라는 말이 국토의 정원 테마파크화로 변질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할 때다.
자산에서 유산으로
영화 ‘땅에 쓰는 시’에서 정영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번 경관을 잘못 건드려놓으면 되돌리는 데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요. 국토의 바다는 바다대로, 숲은 숲대로, 도심은 도심대로, 마을은 마을대로 어느 나라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 …… 샛강은 샛강답고, 한강은 한강답고, 큰 강은 큰 강답고, 동네 산은 동네 산답고, 시골은 시골답고, 아파트는 아파트답게…….”
정영선의 작업은 대한민국 조경 50년의 중요한 질적 전환을 가져오는 변곡점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지점 이후의 경로는 그의 몫이 아니다. 변곡점 그 자체는 상승도 하강도 아니다. 그가 만든 풍부한 자산과 변화를 우리 시대의 살아 있는 유산으로 만드는 일은 우리 세대의 실천에 달려 있다. 조경가 정영선의 작업이 현재를 성찰하는 준거가 될 때, 그리고 내일을 상상하는 영감의 샘으로 작동할 때, 세대와 세대 사이에서, 우리 안에서 유산은 창조된다.
**각주 정리
1. 2022년 한국조경학회가 주최한 월간 웨비나 ‘조경, 왓츠 유어 네임?’의 논의와 이를 발전시켜 게재한 『환경과조경』 2022년 7월호 특집 ‘조경, 그 이름을 묻다’를 참고.
2. 박승진은 정원학 심포지엄 기고문 “열 개의 시선으로 바라본 정영선의 정원미학”(2014)에서 정영선은 “정원 식물의 서열화”를 깨고 그의 작업 속 모든 정원 식물은 “동등한 지위를 획득”한다고 해석했다.
3. 박승진, “열 개의 시선으로 바라본 정영선의 정원미학”, 제2회 정원학 심포지엄 기고문, 2014.
4. 정영선, 성종상, “정원 대담: 우리 시대 한국인의 삶과 정원”, 『한국 조경의 새로운 지평』, 도서출판 한숲, 2021.
김아연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와 동대학원, 미국 버지니아대학교 건축대학원 조경학과를 졸업했다. 조경설계 실무와 설계 교육을 넘나드는 중간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제주 중문대포해안 주상절리대 경관 개선사업 설계팀의 디자인 감독을 맡았다. 자연과 문화의 접합 방식과 자연의 변화가 드러내는 시학을 표현하고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일을 중요시 한다.